I am your bunny2023-01-27 12:51:58
당신의 긴 춤을, 그리고 뒷모습을 기억합니다
<애프터썬> 리뷰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애프터썬>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나는 캠코더로 우리 가족의 영상을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순간인 것을 알기에 일상 속 가족의 모습을 자주 기록하곤 한다.
처음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영상을 다시 찾아보는 매 순간은 아마 행복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캠코더 속 영상을 찾아볼 때 드는 생각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막 지난 추억을 되짚어보며 행복하다기 보다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 씁쓸함이 가득했고,
그 순간에는 몰랐었던 영상 속 인물의 세세한 표정, 감정들이 더 눈에 띄었고,
왠지 모르게 굳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다시 꺼내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애프터썬>은 이렇게 성인이 된 '소피(프랭키 코리오)'가 어린 시절 아빠와의 튀르키예 여행이 담긴 캠코더를 다시 꺼내보며 지난 추억을 회상해보는 영화다.
당시 어린 소피는 마냥 행복한 감정이 앞섰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소피는 그 캠코더를 보며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 아빠랑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좋아.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은 태양 아래 있으니까 같이 있는 거나 다름 없잖아?
20여 년 전, 소피는 어느 여름날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빠는 소피를 찍고, 또 소피는 아빠를 찍고, 그렇게 서로를 캠코더 속에 남기곤 한다.
소피는 아빠에게 서로 다른 장소에 있어도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다는 말을 건넨다.
이 말을 들은 그 순간 아빠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미묘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상대방(가족이든, 친구이든, 그 누구든)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말을 들었을 때의 멍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많이 유약하고 서툰 인물이었던 캘럼은 이 순간 소피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여러 시점의 장면들이 번갈아가면서 나온다.
20여 년 전의 튀르키예 여행 모습, 여행 당시 남겼던 캠코더 속 영상, 어른이 된 소피의 모습, 그리고 아빠가 클럽에서 춤을 추는 모습.
아빠는 긴 춤을 춘다.
추고, 추고, 또 춘다.
숨이 벅찰 것 같이 오랜 시간 동안 긴 춤을 춘다.
소피의 아빠 캘럼은 간단히 말해 성장통을 겪고 있는 사람 같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빠'가 되었고, 딸 소피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한편으론 유약한 생각이 자꾸 들곤 한다.
캘럼이란 사람은 서툴고 불안한 감정이 자꾸 앞서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피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소피의 앞에서는 티내지 않으며 그녀를 보듬어주고 보호해준다.
그래서 캘럼은 소피를 재운 뒤 홀로 밤바다에 잠시 뛰어들기도 하고, 소피 몰래 온몸이 떨릴 정도로 매우 서럽게 울기도 한다.
이런 슬프고 복잡한 감정을 해소하듯이 아빠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긴 춤을 춘다.
이 장면은 최근 내가 본 영화 중에서 최고로 꼽는 장면이다.
깜빡거리면서 나오는 캘럼의 춤 장면은 내가 상영관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내 눈앞에 잔상같이 아른거렸고,
집에 가는 내내 생각났으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누군가 영사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 반복재생된다.
- 아빠한텐 뭐든지 다 말해도 되는 거 알지?
나도 다 해 본 거니까 뭐든 얘기해도 괜찮아.
-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아빠는 자신의 고민을 뒤로 한 뒤 소피에게 계속해서 딸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상기시켜준다.
이런 사랑은 20여 년이 지난 현재, 캠코더 너머에 있는 어른이 된 소피에게도 전해진다.
소피 역시 자신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다.
어린 나이에서 비롯되는 고민인데, 소피 역시 이 고민을 잠시 뒤로 한 뒤 아빠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곤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생일날 생일축하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적이 있다며 덤덤하게 말하는 아빠를 기억한 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아빠에게 매우 크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내 딸.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완전히 덮을만큼 환하게 웃어주는 내 딸.
이 순간 캘럼은 얼마나 행복했으며, 또 동시에 얼마나 슬펐을까.
-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건 사랑이니까.
캘럼의 클럽씬에서 Blur의 Tender라는 노래가 길게 나온다.
사랑으로부터 구원받는 순간을 기다리는 아빠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며, 이 사랑이 밀려올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노래가사가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긴 춤을 추는 아빠를 구원하듯이 어른이 된 소피가 나타나 아빠를 안아준다.
캠코더를 통해 지난 시절의 사랑을, 그리고 숨겨져 있던 불안과 우울을 발견한 소피가 어린 시절의 아빠를 이해한다는듯이 꼭 안아준다.
- 소피 정말 사랑해.
그건 절대 잊지 마.
아빠가.
우리 부모님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무한한 사랑을 주면서도 유약한 생각이 자꾸 들곤 했을까.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자식에게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꾸 서툴고 불안한 생각이 들곤 했을까.
자식은 어렵다.
부모의 사랑은 어렵다.
소피와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소피가 잠이 들면 몰래 펑펑 우는 아빠처럼,
긴 여행을 끝내고 딸을 먼저 보낸 뒤 캠코더를 끄고 다시 긴 춤을 추러 가는 아빠처럼,
삶과 가족은 이렇게 복잡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런 얘기를 해 준다.
사랑은 우리 모두의 몫이며,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에 대한 위안이 생긴다는 것.
긴 여운과 울림을 주는 영화 <애프터썬>은 2월 1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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