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2023-02-02 13:05:12
선과 악이라는 종이 한 장에 불어오는 바람
[영화] 사바하 스포일러 리뷰
반야심경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사바하'는 불교에서 '원만하게 이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주문의 마지막에 붙인다는 특징으로 보자면 기독교의 아멘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이 제작한 영화로,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최근 한국 오컬트 영화 중 하나이다.
(이후 스포일러)
이 영화는 이전에 두 번 본 적이 있는 영화인데, 최근 다른 오컬트 영화를 보고 감상을 쓰던 차에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왜 개봉 당시에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고, 그럼에도 혼자서 멈추고 생각해가며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보통 종교 영화라고 하면 특정 종교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영화들만을 알고 있었는데,
사바하 속에는 불교와 기독교적 세계관이 공존한다는 점에서(거의 불교가 주된 세계관이긴 하지만) 더욱 흥미로웠다.
오컬트 영화는 시청 시 상징과 해석의 재미가 크다고들 말하곤 하는데, 이 영화 속에도 정말 상징이 많았다.
하지만 상징을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의 대사로 해설해주거나 촬영으로 보여주는 등 상대적으로 관객에게 친절한 영화라 머리 싸매지 않고 보기가 편했다.
이 영화에서도 다루는 '진짜 신이 존재할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무신론자였던 학창 시절의 내가 항상 부정해 왔지만,
성인이 된 이후를 생각해보면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꼭 보고 싶다는 궁금증만이 남아있는 것 같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이 영화는 '어디에 계시나이까'라는 대사를 통해 땅에 발을 딛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 인간들을 굽어살피지 않는 것만 같은 신에게 원망의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깊게 묘사되고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주인공 박 목사의 가족을 죽인 13살 무슬림 소년병의 '신의 뜻이다'라는 말은,
또 다른 주인공 나한의 맹목적 믿음과 악행에 대치되고 있으며 기독교인인 감독이 관객에게 가장 전하고 싶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또 주인공 나한이 악행을 저지르고 가위에 눌리며 잠에 들 때 그를 위로해주는 것은 풍사 김제석도, 벽에 그려진 사천왕도 아닌 어머니의 자장가라는 점 역시 인상 깊다.
이런 주제의식만 있었다면 영화가 너무 진지하거나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 불교적 세계관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는 영화가 된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명확한 선악은 없다'이다. 영화 속의 표현'만'빌리자면 기독교적 세계관은 선악이 뚜렷한 이분법적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불교적 세계관 속에서는 집착과 욕망이라는 개념만이 악한 것으로 표현될 뿐 행위자의 선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서있는 위치와 행동에 따라 계속 변하는 것이다.
악한 행동을 하나 했다고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선한 행동을 100년 가까이 한 생불도 짐승으로 전락할 수 있다. 작중 살아있는 미륵불, 육체와 시간을 극복한 영생의 존재로 묘사되는 김제석은 성불의 직전에 삶에 대한 집착이 생겨 용에서 뱀이 되었다. 반면 태어나면서부터 악성을 타고났다고 여겨진 '그것'은 뱀이 된 김제석을 죽이기 위한 무언가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맹목적인 믿음의 허망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 속에서 관객이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또 영화에서 유독 강조되는 것은 '연기(緣起)'이다. 생활과 윤리 과목에서 얼핏 배웠던 것 같은 이 개념은 작중에서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태어나기에 저것이 태어나며,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이 멸한다'라는 대사로 표현된다. 풍사 김제석은 티베트 고승의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삶에 대한 집착이 생겼고, 삶에 대한 집착이 생겼기 때문에 뱀이 되었다. 악이 된 김제석을 멸하기 위해 '그것'이 태어났고, 김제석이 번뇌를 끝내고 집착을 버렸다면 끝까지 악성을 유지했을 '그것'은 김제석이 끝내 뱀으로 전락함으로써 오히려 부처(혹은 무언가)가 된다. 김제석이 멸하니 '그것'도 멸하며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하늘이 된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과관계는 결국 우리가 영화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설명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진짜 신적인 존재를 목도하더라도 그것이 선을 향해 있는지 악을 향해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주어진 위치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중심에 세우고 나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해보며 사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