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1-21 16:46:31
만찬 없는 최후의 만찬
영화 <클럽 제로> 리뷰
SYNOPSIS.
STEP 1. 깊게 심호흡하고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해 보세요
STEP 2. 한 번에 한 가지 종류의 음식만 먹어보세요
STEP 3.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세요
모든 단계를 통과한 여러분을 이제 ‘클럽 제로’의 회원으로 임명합니다!
최고급 기숙사 시설에서 학생들에게 일대일 특별 교육을 제공하는 엘리트 학교의 새로운 영양교사로 임명된 ‘미스 노백’. (미아 와시코브시카) 건강을 유지하면서 학습 능력을 키우는 ‘의식적 식사법’을 가르치는 ‘미스 노백’의 다정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수업에 아이들은 점차 빠져들게 되고 더 극단적이고 위험한 식사를 이어가는데…
POINT.
✔️ "유럽의 웨스 앤더슨"이라는 평을 받는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이 선보이는 감각
✔️ 다양한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한 만큼, 음악이 영화 주제를 돋보이게 해요
✔️ 음악과 함께 어우러지는 원색의 미술도 아주 매력적
✔️ 앨리스, 제인 에어, 스토커... 다양한 얼굴을 보여온 배우 미아 바시코프스카의 단단한 연기
✔️ 독특한 소재를 독특하게 풀어가는 전개

스무 살 언저리쯤, 사이비를 만난 적이 있다. 사이비. 작년에 <나는 신이다>로, 그 전에는 코로나19 당시 신천지로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그 이름. 내가 만난 이는 대학 선배의 얼굴을 하고 나에게 밥을 몇 번씩 사주며, 서로가 기독교인임을 확인하고, 별도의 성경 공부 모임을 만들어 나를 데려갔다. “이상한데?” 싶은 말을 들어도 내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런 걸까 의구심만 품던 어느 날, 진짜 이건 너무 아니다 싶은 문장을 듣고 나는 그와의 인연을 단숨에 끊었다. 결국 그가 어떤 종류의 사이비였는지도 모르는 채로, 폐해 하나 남기지 않고 무사히 벗어났지만, 그 사건을 통해 분명히 한 가지를 배웠다.
조종은 언제나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 원하는 문장을 조금씩 섞으면서 급진적인 곳까지 나아간다는 것. 개구리를 삶아 죽이듯이. 아주 조금씩. 그래서 나는 이후로 <나는 신이다>를 보거나 그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아니 저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다들 믿었단 말이야?”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상한 문장을 하루아침에 듣는 사람과, 차곡차곡 거기까지 이끌려 간 사람의 지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이비만 그럴까? 우리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아는 현실은, 이성과 지성으로 견고히 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는 어쩌면 매우 취약한지도 모른다. 그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 <클럽 제로>가 있다.

#삐딱한 세계에 어서 오세요
영화는 원탁을 치워내고 의자만 움직여 둘러앉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은 ‘노박’이라는 교사의 영양학 수업을 듣게 된 이유를 제각각 밝힌다. 듣다 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음식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그 음식이 연장하는 삶을 대하는 자세와도 닮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열망을 아는 것. 그래서 파고들 부분을 찾아내는 것. 그 자리가 조종의 시작점이 된다.
이 영화에서 기묘하게 삐딱한 느낌으로 고정된 샷을 많이 사용하는 카메라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때만큼은 적극적으로 패닝(pan)해 움직인다. 가구의 직선이 강조된, 움직이지 않는 배경을 뒤로 하고, 학교 풍경은 기이하게 삭막하다. 노란색과 파란색 교복을 비롯한 원색들이 기묘하게 튀어 오르고, 강박적으로 울리는 음악이 끈덕지게 우리를 스크린으로 끌어 당긴다.

여기서, 한때 앨리스였고 또 제인 에어였던 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영양학에 대해 남다른 기준을 가진 독특한 교사 미스 노박으로 분해 낯선 얼굴을 보여준다. 미스 노박은 더없이 맞는 말들을 조합해서, 음식에 대해 기존에 갖고 있는 우리의 통념을 벗겨낸다. 무의식적으로 해온 “먹기”라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하도록 유도하고, 학생들을 차곡차곡 남다른 세상으로 데려간다.
시놉시스만 들으면 <클럽 제로>는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미스 노박, 그의 손에 의해 괴이한 ‘클럽 제로’의 세계로 넘어간 아이들의 영화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를 보고 그 메시지 하나만을 읽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클럽 제로>에 등장하는 학교는 그 자체로 매우 기이하다. 다만 우리에게 그 기이함이 익숙할 뿐이다.

학교 표어는 “There’s more in you”와 “We reach up to the stars”다. 학교 이름은 대놓고 talent school, 재능학교다. 너는 더 잘할 수 있고, 네 안에 더 큰 것들이 있고, 그래서 너는 저 별처럼 높은 데까지 자라갈 거라는 말. 이렇게 써놓으면 다소 컬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익숙한 문장들이 아닌가? 자존심을 너무 중시하느라 지쳐버린 어른들이 강박적으로 쏟아낸 자존감 열풍으로, 작은 거절도 흠집도 감당하지 못할 아이들을 길러낸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사실과 믿음, 어디까지일까
이 영화는 두말할 나위 없이 믿음에 대한 영화이다. 우리는 사실 관계는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앎’의 영역이라고 굳게 “믿는”다. 믿음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 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같은 영역에만 속하는 단어라고 “믿는” 단어지만, 사실 우리는 많은 사실들을 믿고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지도에서 보고 찾아갈 때, 우리는 이 지도를 따라가면 그곳이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다. 아직 내 눈으로 확인해서 앎으로 넘어오지 않은 영역이지만, 이 지도가 맞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믿음 또한 앎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도, 믿음은 그렇게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종교인들만의 단어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앎과 믿음은 자주 비틀린다. 소비주의를 막고 음식이 낭비되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던 아이도 미스 노박의 수업을 들으며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아이가 된다. 이미 믿음이 가지를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이전의 앎과 믿음을 폐기한 것이다. 우리의 문장들은 그렇게 쉽게 비틀리고, 우리는 그렇게 쉽게 변한다.

이 영화는 미아 바시코프시카의 '확신으로 단단한' 표정을 전면에 내세워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믿는 것이 정말, 맞는지? 우리가 이룩한 현실이 정말로 견고하고 탄탄하게 세워진 세계가 맞는지? 어쩌면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조차, 근본적으로 뒤집어질 가능성은 없는지?
물론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딸기와 크림이 가득 얹힌 초콜릿 라테 한 잔을 가득 마신 내가 갑자기 ‘클럽 제로’에 들어갈 일은 없겠고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도 그렇겠지만, 꼭 그런 극단적 사례까지 가지 않을 뿐 이러한 믿음의 전복은 우리에게 꽤나 흔한 일이다. 오래 전에는 다이어트의 적이 지방이라고 말하던 세상이 요즘은 탄수화물을 주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사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은 3대 영양소일 뿐인데.

#만찬 없는 최후의 만찬
미스 노박만을 탓하기엔 이미 이리저리 부조리하게 삐딱한 세계였다. 애초에 섭식에 ‘유행’이 있다는 것도 우습지만, 유행을 따라 미스 노박을 데려온 학부모 회의는 미스 노박과 학생들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면서 본질을 전혀 잡지 못한다. “오페라인지 극장인지”를 집요하게 챙기는 그 시선은 아이들에게 닿지 못한다.
어떤 부모도 아이들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잘 교육하고 싶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어떤 부모도 완벽할 수 없으므로. 사태가 흐를 만큼 흐른 후에도 “오페라인지 극장인지”나 운운하고 있는 다른 부모들뿐 아니라, “조종당했다manipulated”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단 한 사람의 부모 또한 다른 부모들과 같은 엔딩을 맞이했다.

“최후의 만찬” 같은 장면을 한참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삶에서 만찬을 제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최후의 만찬에서 만찬을 제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후 뿐이 아닌가?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나.
생각해 보면 영화의 모두가, 그리고 현실의 우리 모두가, 다 미련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모두 미련하고, 휩쓸리고, 답답하고, 슬퍼진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울려 퍼진다. 이 영화 속 “믿음”에 대한 인식은 낯설지 않다. 기후위기를 진심으로 우려하는 사람들과 지구온난화가 거대한 음모라고 믿는 사람들이 같은 지구 상에 살아가고 있는걸. 우리는 결국 각자의 믿음을 얼기설기 엮어 올리며, 구멍 숭숭 난 현실을 살고 있다.
무엇이 만찬을 만찬으로 만드는가? 훌륭한 요리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 시간이 아름답게 기억되려면 애정 어린 눈빛과 따뜻한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구멍 난 현실 속, 각자의 믿음 아래, 음식이 아닌 삶으로 주어졌어야 했던 해답들은 무엇이었을까?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하여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1월 24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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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어딘가 있을, 아무도 모를 너에게
그런 영화가 있다. 평가도 좋고 관심도 있지만, 도저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경우도 그렇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대개 그렇듯 <아무도 모른다> 역시 먼저 접한 사연만큼 슬픔과 좌절의 감정으로 이끌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감상했다. 역시 훌륭했다. 꺼려진 시간만큼 혹은 그 이상의 값어치를 느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도 모른다>의 대단함은 실화에 기대지 않음과 악인이 없다는 점에서 나온다. 어머니가 버린 자식들이 자기들끼리 살아간다. 라는 간단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의 모티브만 가지고 세계를 구축했으며, 훌륭한 연출과 연기력으로 설득력과 감성을 갖추어 관객들에게 제공했다. 이 때문에 실화 미화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는 첫째가 집안을 방치한 건 물론 막내 동생을 학대했으며, 막내 동생이 죽은 이유도 첫째의 친구들이 구타를 했기 때문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라면 불가피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를 악인이 없다는 본인 고유의 세계관으로 승화시켰다.
이 영화를 보며 강력하게 작동한 감각은 특정 인물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이 아니었다. 사회적 제도나 시선에 대한 비판은 찰나도 스치지 않았다. 그 감정은, 마치 공항에서 같이 흙을 파는 것, 폐기 식품을 얻으러 편의점에 가는 것, 컵라면 용기에 피어난 새싹에 물을 주는 것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그들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건 역시나 연출과 연기력이고, 영화가 마술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에 힘을 보태준다. 실제로 몸통이 분리되거나, 모자에서 토끼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런 기분을 만드는 힘. 속임수라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 역시 행위에 숭고함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주변에 사실 악인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악인이라고 칭할 만한 사람은 뉴스나 기사로 접할 뿐이다. 그럼에도 왜 비극은 자주 일어나고 우리는 삶이 힘들까? 사회적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려 해도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에 큰 재약이 있는 시대도 아니다. 물론 개선해야 할 점은 차고 넘치지만. 다만 이러한 소수의 요소 때문으로만 삶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훨씬 다양한 환경과 그보다 복잡한 내면이 얽히고 섥혀 이내 과부하가 일어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작동 중지 말고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데, 이것이야말로, ‘아무도 모른다’이지 않을까.
사람이나 사물 따위를 알거나 이해하지 못하다. 사실을 알지 못하다. 어떤 지식이나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모르다의 사전적 정의이다. 이렇게 빈틈 없는 기준 속에서 과연 우리가 아는 건 얼마 정도이고 한줌의 모래처럼 귀한 앎을 감사해하는지. 또한 무수한 모름을 애써 외면해오지는 않았을까. 실제 그들이 흙투성이로 지하철을 탔는지, 세뱃돈 봉투의 다른 글씨체를 보고 생각에 잠겼는지, 바닥에는 여전히 매니큐어 자국이 남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의 삶이 왜 고통스러운지, 보는 우리가 어째서 공감을 하는 건지. 여전히 모른다. 다만 아는 건 우주는 무한하고 우리가 아는 사실은 극히 일부분, 즉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경찰에서 보호 중인 동생들이 첫째를 변호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됐는데 오빠가 친절했다는 증언이 담겼음을 확인하고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일화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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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의 전복, 통쾌한 복수
평소에 가까웠다고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도 때론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친분을 쌓으면서 같이 일도 하고 개인적인 여가를 같이 보내다 보면 상대방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을 거라 생각하고 내가 하는 생각과 판단에 많은 부분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과는 더 끈끈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어떤 일이든 같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계기는 상대방과 같이 할 수 없게 만든다. 마치 그 일이 경계선이 되는 것처럼 얼마 전까지 완전히 믿을 수 있고 함께 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과 멀어지게 된다. 그것이 실제로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거나 잘못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 각각의 실제 생각과 감정을 알기 전까지는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그래서 직접 대면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멀어진다.
두 해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영화 <밀수>는 무척이나 가까웠던 해녀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멀어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바닷속에서 일하는 해녀들이 중심에 있다. 특히나 춘자와 진숙은 영화 초반부터 떨어질 수 없는 친구 사이로 보인다. 두 사람을 비롯한 다른 해녀들은 그들이 사는 군천 주변에 생긴 공장들로 인해 바닷속에서 건질 수 있는 생물들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바닷물이 오염된 해녀로서 일할 수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궁여지책으로 바닷속에 던진 밀수품을 건지는 일을 하게 된다.
그 일은 실제로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배를 운영하고 있는 진숙의 아버지와 일꾼 장도리(박정민)가 일을 도우면서 춘자와 진숙을 비롯해 다른 해녀들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밀수품을 건지는 일이 불법이라는데 있었다. 해양경찰인 장춘(김종수)의 수사망에 걸려들게 된 그들은 결국 출동한 경찰에 덜미를 잡힌다. 그 과정에서 당황한 진숙의 아버지와 진숙의 남동생은 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만다. 그리고 진숙은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가고, 춘자는 배에 올라온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친다.
영화는 이 초반 이야기를 보여주고 몇 년후로 시점을 돌려 그 사건 이후 각 인물들의 모습을 하나씩 보여준다. 경찰에 잡히지 않았던 춘자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 이후 그가 다시 군천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주던 영화는 춘자와 진숙이 다시 대면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이야기를 전환하여 극적 흥미를 높인다. 진숙은 춘자를 믿지 않는다. 아마도 계속 군천에 있었던 인물들 대부분은 춘자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과거 최악의 순간에 혼자 도망간 춘자가 진숙과 다른 사람들을 배신했다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 그런 소문은 무척 빠르게 주변으로 펴져 진숙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영화 <밀수>의 주요 등장인물인 춘자와 진숙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가 무척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 외에도 장도리와 해양경찰 장춘도 꽤 흥미로운 인물이다. 장도리는 진숙이 감옥에 가있는 동안 진숙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와 배의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 초반에는 별 볼 일 없는 일꾼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인물이다. 해양경찰 장춘은 굉장히 윤리적이고 올바른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그 역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전복과 긴장
여기에 더해 한 명의 외지인이 더 등장한다. 바로 권상사(조인성)이다. 춘자를 협박하던 그는 춘자가 제안한 군천에서의 밀수 건을 진행시키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굉장히 악독한 조직의 보스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어서 그가 등장할 때마다 그를 상대하는 인물들은 무척 공포스러워한다.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권상사 역시 처음엔 완전히 악독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 <밀수>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을 초중반에 소개한다. 하지만 주요 인물들이 처음에 보여줬던 모습과 후반부에 보여주는 모습은 차이가 있다. 그 변화를 드러내는 방식은 진숙처럼 평범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장도리처럼 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춘자나 권상사 그리고 경찰 장춘은 실제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편에 설지 자꾸 의심하게 되는 캐릭터다. 그들의 실체가 드러날 때 영화 속에서는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긴장감이 높아진다.
관객들은 대체적으로 진숙의 생각과 감정에 좀 더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진숙과 가장 가까웠던 춘자가 등장할 때 관객도 동요하게 된다. 진숙과 춘자를 중심에 두고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이 가진 특성이 계속 전복되고 또 다른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각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중반까지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이 엄청나게 큰 에너지를 가진 액션이나 스릴러의 느낌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조금은 전개가 느슨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포인트가 된다.
이 영화는 춘자의 진짜 속마음이 드러났을 때, 다른 인물의 진짜 속마음이 드러나면서 이야기의 방향이 바뀐다. 그러니까 춘자의 속마음을 알게 된 순간에 다른 인물의 속마음을 공개하면서 중반과는 다른 전개를 보인다. 이렇게 모든 캐릭터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 이후, 영화는 범죄 영화로서의 모습으로 전환되며 속도를 올린다. 춘자와 진숙 그리고 다방의 마담인 옥분(고민시)은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해 주변 인물들이 가진 진짜 생각과 음모를 알게 되고 그것을 활용해 그들만의 작전을 시도하는 모습이 무척 긴장감 넘치게 보여진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마지막 바다에서 벌어지는 추격과 소동을 보여주면서 통쾌하게 전개된다.
재미있는 2023년 첫 텐트폴 영화
영화 <밀수>는 각 인물들의 진짜 속마음이 드러날 때 진짜 재미가 시작된다. 특히나 김혜수가 연기한 춘자는 엄청나게 밝고 활발한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그의 진짜 속내는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진숙과 재회하고 나누는 모습은 흥미롭다. 무엇보다 진숙이 춘자에게 실망한 상태지만 여전히 자신의 편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영화는 무척 재미있는 오락영화다. 여름에 시원한 극장에서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앞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중반부까지 영화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큰 이벤트나 사건이 없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소지가 있다. 또한 영화 속 배우들이 70년대 복장으로 70년대 풍의 연기를 하는데 특히나 김혜수가 연기한 춘자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좀 더 과장되 보인다. 감독과 배우의 선택이겠지만 조금은 과장되고 이상해 보이는 연기는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또한 진행되는 전복과 반전도 한편으론 그렇게 어렵지 않게 예측이 가능하다. 상황에 대한 설명을 쉽게 하면서 또 반복적으로 해주기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에 따라가기 쉽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범죄 영화로서 조금 밋밋하고 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군함도>와 <모가디슈> 같은 힘 있게 전개되는 영화에 재능이 있었던 류승완 감독은 액션에 힘을 조금 빼고 다양한 캐릭터의 전복을 통해 과거 그가 연출했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영화 중반에 호텔에서 벌어지는 근접액션과 후반부 근접액션에서 그의 액션 장기가 살짝 드러나지만, 무엇보다 후반부 수중에서 벌어지는 추격 액션은 박진감 넘치게 구성되어 있다.
영화 <밀수>는 진숙과 춘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들의 주변에는 여성 해녀들이 몇 명 더 있고, 다방 마담인 옥분도 힘을 거든다. 특히나 진숙과 춘자 그리고 옥분은 서로의 진짜 속마음을 완전히 알게 되면서 끈끈해진다. 그렇게 여성들이 연대하는 과정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들었다. 이 영화 속 마지막에 나란히 선 진숙과 춘자, 옥분이 나중에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은 가까운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런 점이 이 영화를 더욱 통쾌하고 깔끔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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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원 배우의 얼굴만 믿고 설계한 것 같은 '설계자'
모델 겸 저승사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검은색 옷 입고 다니는 남자 영일(강동원)이다. 키 크고 얼굴 조막만 하고 잘생겼다. 누가 보면 모델 지망생정도 되는 사람일 것 같지만 아니다. 영일의 직업은 설계자다. 살인처럼 보일 수 있는 사건을 사고로 위장시키는 게 영일의 일이다. 혼자서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팀원이 있다. 중년의 여성 재키(이미숙), 월천(이현욱), 점만(탕준상)이다. 매번 찾아오는 의뢰에 거부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영일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의뢰를 해결하는 영일의 팀. 모든 사건을 설계자로서 좌지우지한다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어느 날 영일의 팀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함과 동시에 우연한 사고로 꾸며달라는 요청이었다. 사건을 의뢰한 사람은 주영선(정은채)이다. 이 주영선이 누구인가?라는 점이 영일이 받았던 사건들과 의 특이점이다. 바로 주영선은 검찰총장 후보자의 딸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고위공직자가 되기 직전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려운 사건인 걸 직감하는 영일. 하지만 시선이 많다는 걸 오히려 역이용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런 영일의 바람과는 다르게 일은 점점 꼬여간다. 설계자의 존재를 설계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드러나는 영일의 정체. 이 모든 악행을 기획한 사람은 누구일까?
<설계자>를 설계하다
이 영화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쓰고 싶은 것은 아이디어다. 이 아이디어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잘 구현됐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핵심을 보여주는 방식 자체는 신선했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사건을 조작하는 주인공(영일)에 관한 영화다. 그럼 1차적으로 사건을 조작할 수 있을까/그렇지 않을까에 대해 서로 대립하면서 서스펜스를 만들지 않을까? 영화는 이 1차적인 목적을 충분히 수행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영화에서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많다. 이 선택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이 마무리되지 못할까 봐 초조해하는 인물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또 영화가 인물의 욕망을 단순하게 짠 편이라 영일의 시점만 쫓아가도 이야기의 표면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영화의 리듬이라는 측면에서 쓸데없이 늘어지는 장면이 많음에도 대략적으로라도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까이 있고 그만큼 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재키(이미숙)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사실상 재키가 이 영화에 작동하는 모든 모티브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모티브? 바로 정서다. 이 영화에서 누가 설계자고 설계자 머리 위에 누가 있고 주인공 영일과 대결하는 흑막이 누구고 이런 거 별로 안 중요하다. 물론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본질이 아니다. 다시 돌아와서. 재키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 재키의 동선이 영일에게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중심으로 본다면 사실상 영화의 플롯이 이것과 동일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월천의 동선도 이해가 된다. 월천만? 점막과 이치현의 행보까지 영화가 같은 모티브를 인물에게 반복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거 놓치고 영화 보시면 솔직히 이게 뭔가 싶으실 것이다(사실 안 놓치고 봐도 이게 뭔가 싶으실 것이다). 그냥 단지 이 캐릭터들이 이 결론에 도달하는 걸 보기 위해 이 영화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 다른 관점에서 관람하시는 걸 제안하는 바다.
설계자 맞아?
이 영화의 두 번째로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 구성 방식이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 치고 굉장히 불친절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보여준다. 어떻게? 어떤 관객들의 입장에선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이게 뭐야?”라고 느낄 만큼 맥이 빠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일반적인 플롯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교훈극이 아니다. 여러 사건을 연이어 배치시켜서 이 일들이 만든 정서를 영화의 핵심으로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말이 좋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거지 이 단점은 이 영화의 기획의도에 근원적으로 결함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첫 번째 이유. 이 영화는 상업영화로서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전적으로 다른 길만 골랐다. 상업영화의 큰 덕목이 뭘까? 기-승-전-결의 쉬운 플롯과 이에 따른 간단한 결과물이다. <범죄도시 4>나 <파묘> 같은 영화들이 작가로서의 개성을 포기하고 상업성을 택했다는 걸 많은 팬들이 기억할 것이다(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기획하고 연출하고 각본을 쓰는 입장에서 이 부분을 염두하고 싶었다면 그대로 가면 된다. 하지만 이 <설계자>는 반대다. 사건들만 연이어 보여줄 뿐 결론을 애매하게 지어 영화의 혼선을 스스로 만든다. 대표적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방식을 보면 후반부 전개와 아예 통으로 어긋난 것 같다. 한국사회의 수많은 단면을 보여준 다음 그 인물이 그렇게 말하면 신빙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에필로그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 앞에서 한 인물이 했던 말이 의미가 없어진다. 사실 그 캐릭터도 똑같은 비판을 듣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 안에 관객들을 속이는 속임수도 너무 많다. 하우저 TV(이동휘) 같은 캐릭터가 들어간 이유를 관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왜? 이 인물이 그렇게까지 필요한 인물이 아니니까. 이 인물을 대표하는 집단은 앞에 이미 나왔다. 그리고 이야기 상에서 어떤 유효타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이 캐릭터의 악행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리액션이 없는 수준이다. 이 인물이 보여주는 병폐를 보여주기엔 연출이 생동감 넘치지 못했다. 물론 어떤 영화가 이런 할리우드식 전개를 쫓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상업영화라면 흔히 하는 말처럼 ‘중학교 2학년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두 번째 이유. 설계자의 설계 치고 허점이 너무 많다. 이 허점을 하나하나 다 손꼽기엔 너무 많아 적기도 힘들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하나만 써보자면, 영일이 기획하는 모든 설계에는 3자가 개입해선 안 된다. 어떤 버스정류장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 버스정류장에 사람이 있는 시기도 새벽녘이 아니다(새벽녘이어도 그 근처에 사람이 있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전부 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냥 단지 거기에 그 사람이 단 한 명만 있단 이유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선 설계자라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이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일이 설계자라는 것 치고 인간관계성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부실하다. 그나마 재키와의 관계가 특별한 것 말고는 이 사람의 용인술은 극을 이끌기엔 터무니없다. 설정을 뒷받침할 만 당위성을 영화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유. 이 영화에서 현실을 다루는 방식은 굉장히 낡았다. 예를 들어보자면,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와 관련된 내용은 이 고위직의 후보로 임명되는 과정을 다 담았다고 보기엔 어렵다. 대통령은 뭐 하고 여, 야 정치인들은 무얼 하는 걸까? 법무부장관은? 이 인물은 본인의 직업인 검사를 잘 활용하고 볼 수 있는 걸까? 그냥 단지 영화가 1차원적으로 줄거리를 전개하기 위해 해당 직업만 가져오니 인물의 개성도 납작해지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재키도 마찬가지고 월천도 마찬가지고 이치현도 마찬가지다. 이 인물들을 둘러싼 가장 핵심 설정이 이 영화의 사건들과 계속 대치되는 감이 있다. 그래서 영화가 약간 갈길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을 담고 싶은 건지. 장르적으로 재미있고 싶은 건지. 아니면 둘 다인건지 명확하게 정하지 못한 채로 기능적인 전개만 돋보인다. 각본 상에 있는 설정들이 상호 간에 충돌하며 '서로 틀렸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뭐라는지 모르겠어요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 음향 믹싱이다. 플롯이 친절한 것도 아니고. 어떤 캐릭터는 불필요하게 느껴지고. 이렇게 이물감이 심한 영화에 음향까지 안 들리는 건 영화를 더 조악하게 만드는 요소다. 대표적으로 글쓴이는 탕준상 배우가 말하는 거 못 알아들었다. 이 인물 입에서 중요한 대사가 몇 있는데도, 그걸 강조하는데도 못 알아들었다. 탕준상 배우가 비교적 신인이라? 글쓴이는 강동원, 이미숙, 이종석 배우 같은 베테랑의 입에 나오는 대사도 못 알아들었다. 특히 강동원 배우가 맡은 영일 캐릭터는 감정선이 납작한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저음으로 대사를 전달한다. 믹싱 상태가 좋았어도 안 들린다는 사람 많을 텐데 그마저도 안 좋으니 잘 안 들린다. 그래서 글쓴이가 세 사람을 돌이킬 때 후반부 이미숙 배우의 개인기를 보여주는 장면 말고는 “두두두두”만 생각난다. 이야기의 밀도가 높아지고 싶고 장력이 팽팽하려고 해도 영화가 그럴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 구조가 불친절하고 사건마다 개연성이 얼마나 헐렁한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설계자>의 가장 큰 단점은 영화의 기본적인 틀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헐렁한 이야기 틀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배우가 있다. 바로 김신록 배우다. 이 영화의 조악한 믹싱에도 이 인물이 어떤 캐릭터인지 스스로 보여준다. 가령 이치현(이무생)과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이 인물은 별다른 연출이 필요 없다. 그냥 말투와 눈빛처리만으로도 이 영화가 기획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대 역인 이무생 배우가 광기를 숨기는 캐릭터라면 이 인물은 광기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런데 사회화된 광기여야 적합하다. 그럼 목소리 톤을 높이는 대신 눈을 이용해서 몰아붙이는듯한 연기가 좋겠지? 이 배우는 그걸 그대로 구현한다. 우리가 알던 김신록 배우의 퍼포먼스와 그렇게 멀리 떨어진 모습은 또 아니지만 영화에서 유일하게 빛난다는 점에선 기록할 만하다.
여전히 4번 타자
이 <설계자>가 개봉하는 현재까지 강동원 배우는 계속해서 패전 투수를 자처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한국영화의 팬인 글쓴이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비슷한 정도의 잘생김을 가지고 있는 누구는 광고모델로 전직했는데, 이 분은 아직도 영화배우잖아? 그래서 글쓴이는 현재 강동원이라는 배우가 처한 입장이 궁금하다. 과연 좋은 시나리오가 오는데도 이런 선택만 하는 걸까 싶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대참패를 기록한다 하더라도 강동원 배우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강동원 배우의 퍼포먼스가 아쉽지도 않았다. 강동원 배우는 자기의 색을 깔끔하게 소화한다. 영화가 괴작이더라도 강동원 배우는 제 몫을 다 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편으로는 강동원 배우가 흐름을 바꾸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를 표하고 싶다. 강동원이라는 이름 하에 <천박사 퇴마 연구소>나 <인랑>, <골든 슬럼버> 같은 영화들은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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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향성 없이 시대상을 잘 드러낸 영화 《에놀라 홈즈》
넷플릭스에서 셜록 홈즈 전편을 보고 나서 그 이후 셜록 홈즈는 실존 인물처럼 다가와버렸다. 나의 머릿 속에는 셜록-베네딕트 컴버비치가 각인되어 있었던 터라 다른 셜록 시리즈들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에놀라 홈즈는 셜록 드라마 시리즈에서 마지막에 조금 등장을 했던 터라 그래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보기 시작했다. 물론 캐릭터 설정은 많이 다르긴 했다. 드라마 셜록에서는 여동생이 감옥에 수감될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지만 영화 에놀라 홈즈는 철부지 같으면서도 소녀미 가득한 진취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드라마의 세계관과는 이어지지 않아서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에놀라 홈즈》 시놉시스영화 《에놀라 홈즈》는 에놀라가 사라진 엄마를 찾으러 나서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식 끊긴 두 오빠들에게 에놀라는 맡겨지고, 보수적인 마이크로프트는 에놀라를 현모양처로 키우려 한다. 하지만 홈즈 가문 답게 에놀라는 두 오빠를 따돌리며 런던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시작부터 도망자 신세인 귀족 청년과 엮이고 만다. 그 와중에 오빠 셜록까지 따돌려야 하는 에놀라. 미스터리가 가득한 이 모험. 과연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큰 줄기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영화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을 때 정면을 보면서 에놀라가 말을 거는 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아주 격하게 놀랐다. 영화의 형식의 중간중간 에놀라가 관객에게 현재 상황을 리포팅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연극에서 대표적인 방법으로 활용되던 서사극 형식을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주인공이 연극 속에 있다가 갑자기 관객에게 이야기를 설명해주면서 관객들이 몰입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효과를 주는 방법이다. 영화 《에놀라 홈즈》에서는 이 효과가 제대로 먹혔다. 갑자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여러분~?하고 에놀라가 관객을 불러댄다. 에놀라의 감정선에 몰입하기 보다는 그 상황과 흐름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였다.
그리고 내용이 여성 참정권에 관련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여성 화자인 에놀라의 감정선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영화 자체가 억압의 구조로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서사극 형식이 여성 화자가 여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관객들이 자신의 입장에 맞춰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끔 만든 장치이지 않았나 싶다.
본격 자아 찾기 프로젝트
에놀라는 사라진 엄마를 찾기 위해 런던으로 향한다.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자란 에놀라지만 엄마는 에놀라에게 친구이자 선생님이었기에 엄마에 대한 의존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사라진 엄마에 대한 좌절감에 허우적 거리기보다 에놀라는 스스로 엄마를 찾아나선다. 그런 에놀라에게 런던에서 조우한 엄마의 친구는 충고의 말을 건넨다. “다른 사람 찾는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네 자아를 찾아.”
이 이후 에놀라는 엄마를 찾는 것에도 몰두하지만 점차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가를 깨닫는다. 도망자 신세의 귀족 청년을 다시 찾아내고 그를 도와 여성 참정권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에놀라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찾으면서 “내 인생의 나의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여성 탐정의 길을 떠난다.
후속작이 나올까?
그래서 든 의문은 후속작이 나올 것인가?였다. 에놀라 홈즈는 원작 소설이 6권이라고 한다. 에놀라 홈즈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셜록처럼 그 추리의 세계를 깊게 담아낸 것도 그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여성들의 삶을 면밀하게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즉, 이미 그 시대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맞제. 그 땐 그랬었지.’하는 감상을 할 수 있는 영화였다. 그 소재를 되게 러프하게 다루면서도 재밌게 풀어냈고, 여성의 입장에서만 편향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작품이었다.에피타이저 같은 작품이랄까?
그래서 과연 에놀라 홈즈가 이제 에놀라의 인생과 그 시대상을 면밀하게 보여주는 후속작으로 찾아올 수 있을지에 대해 기대감과 함께 궁금증이 들었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속작이 나왔으면 좋겠다.
어찌보면 무거운 소재를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영화 《에놀라 홈즈》. 후속작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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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변화, 일본스러움, 혹시... 나도?
* 이 리뷰는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 지금은 기후위기라고 쓰지만 그 당시에는 기후변화가 더 익숙했기에 기후변화라고 씁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지칭했다. 나의 영감 노트는 'Inspiration of Alien(외계인의 영감)'였고,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출석을 부를 때 공식적으로 외계인이라고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재밌게도 나의 장래 직업에 꽤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천문학자였다.
사실 이 영화는 알고 본 영화가 아니었다. 원래는 영화를 보기 전에 그래도 사전 탐색을 좀 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책(영화의 원작을 쓴 작가의 다른 책)을 구매하면서 쓴 기대평이 당첨되면서 보게 되었다. 그래도 조금 찾아보긴 했다.
감독이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것, 원작에 핵에 관련된 것을 기후변화로 변경했다는 것 정도, 작가의 다른 책인 '목숨을 팝니다'를 읽어본 바로는 이 영화도 좀 난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 정도였다.
시사회였지만 시사회 같지 않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아무런 광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그런 시작은 처음이었다. 왜 청소년 관람불가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소년 관람불가라고 할 만한 장면은 한 장면뿐이었데 잘라내도 무관한 장면이어서 오히려 잘라내고 등급을 낮추는 게 흥행에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잘라내고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 싶었다.
일본식 유머 코드가 잔뜩 배어 있으면서 끝으로 가면서 그 웃음기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영화다.
아빠는 화성인, 엄마는 지구인, 아들은 수성인, 딸은 금성인.
진짜인지 아닌지 끝까지 애매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책을 읽어보고 싶은 느낌이었다. 근데 아마 책을 읽어도 비슷했을 거다. 목숨을 팝니다의 결말도 비슷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하는 생각은 다른 곳에서 왔다.
지난 환경의날에 환경영화를 본다고 <킹 오브 썸머>라는 영화랑 <판도라>를 봤다. 그런데 환경영화제에서 상영을 했다던 <킹 오브 썸머>보다 이 영화가 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해 더 잘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인은 지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한 고민, 그 다양한 고민들을 영화 속에 모두 담고 있었다. 사실 그게 재미있다.
기후변화는 인간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래 지구가 가지는 속성(간빙기)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주장(나는 사실 이것도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을 수성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외운 것이 아니니까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지구인은 오만하다. 지구를 자기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한다.
자신들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화성인인 아빠는 모든 것(직장, 가족)을 포기하면서 지구인들이 변해야만 지구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주 연합이었던가!?
위에서도 언급했듯 원작은 기후변화 대신 원자력발전소와 핵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책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가까운 시일에 누군가 나에게 환경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아름다운 별'을 추천해 줄 것 같다.덧 1. 하지만 일본식 개그가 재미없다면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덧 2. 은근 유명한 배우들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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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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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엄마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날까. 울 때는 엄마, 하고 울게 될까. 어쩌다 엄마라는 단어에 온갖가지의 감정이 붙어버렸을까.
우리 엄마는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었다. 초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부모님이 편지를 써 오라는 이상한 숙제를 내주곤 했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엄마가 작가이시냐, 시인이시냐 하고 물었다. 정작 나는 "녹음이 짙은 계절이구나."로 시작하는 그 편지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초딩이었다.
엄마의 엄마는 일본에서 유치원을 다녔던 있는 집 귀한 딸이었다. 자수를 끝내주게 놓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엄마의 엄마에게 옷을 지어달라고 했다. 노래를 잘하고 춤도 잘추는, 요즘 말로 예체능으로는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가 글재주를 타고났나 보다.
나는 엄마의 비밀상자에서 엄마의 자매들과 나눈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자녀가 있다면 비밀상자를 꼭꼭 숨겨두길 바란다). 한 이모가 엄마에게 "언니.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야."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다. 엄마는 뭐라고 답장을 썼을까. 또 다른 누군가는 "바보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엄마한테 보냈다. 연애편지인 듯했다. 엄마는 뭐라고 답장을 썼을까.
내가 초등학생일 때 엄마는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제는 열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겨 피아노는 물 건너갔다.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나와 동생이 중고등학생 때 보던 영단어장을 항상 거실에 두었는데, 몇 단어나 외웠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엄마는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나는 엄마가 엄마라는 것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를 생각하면 슬퍼진다. 한 인간의 삶에서 '엄마'라는 단어를 빼고 모든 것이 지워졌으므로, 나는 엄마에 대해 알지 못한다. 엄마가 아닌 그 사람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엄마한테 남은 것이 자식뿐이라 화가 난다. 일생동안 손가락이 다 휘어지도록 일했는데 엄마한테는 아무런 지위도, 성취도 없다. 그냥 엄마다.
엄마로서의 삶과 주체로서의 삶
엄마는 엄마라는 이유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 레다는 그러고 싶지 않다. 레다는 자식을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연구가 더 중요하고 자신의 욕망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여름 휴가 역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게 아니라 혼자서 떠난다. 휴가에서도 할일이 많다. 논문도 읽어야 하고 수영도 해야 하고 선탠도 해야 한다.
그런 레다의 고요는 한 대가족에 의해 박살이 난다. 이들은 이모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아이까지 섞인 대가족이다. 레다는 어린 여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 니나에게 자꾸만 시선이 간다. 대가족, 특히 여자 아이와 아이의 엄마를 바라보는 레다의 표정이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니나의 모습과 니나 또래쯤 되었을 레다의 과거 회상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레다는 엄마로서의 삶보다는 자기만의 삶을 살고 싶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에는 남편이 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두 딸이 있었다. 레다는 남편과 육아를 분담하면서, 자기의 몫이 아닐 때는 아이들이 울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그 사랑스러움만으로 자기 삶을 내팽겨칠 수가 없는 것이다.
비교문학 학자로서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겠나. 그걸 이제와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버릴 수 있을까. 지금도 수도 없는 여자들이 경력단절을 경험한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취업하여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노력했고, 또 열심히 살았나. 그런데 단지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 노력들이 물거품이 된다. 다시 돌아갈 자리는 없다.
대가족은 물놀이를 즐기느라 아이가 사라진 것도 모른다. 뒤늦게 아이를 잃어버린 걸 알아채고는 온 해변을 뒤지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레다는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숲속에서 혼자 놀고 있던 아이를 발견하고는 니나에게 데려다 준다. 니나는 레다에게 묻는다. 너무 힘들지만, 곧 지나가지 않겠냐고. 그러나 레다는 대답한다. 지나가지 않는다고.
결코 지나가지 않는 괴로움들
갈등은 아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이 사라지고부터 시작된다. 레다는 아이의 인형을 훔쳐가는데, 눈앞에서 아이가 울고불고, 어른들이 아무리 아이를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다. 레다는 별장으로 돌아가 훔친 인형을 꼭 안고 잔다. 인형 옷도 새로 사서 입힌다.
평화롭던 대가족은 사라진 인형 하나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정말 이 가족은 평화로웠을까? 삼대가 모여 즐겁게 휴가를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니나의 괴로움이 있다. 니나에게는 평화가 없다. 늘 자기를 따라다니는 어린 딸, 눈에 안 보이면 사라지고마는 딸,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남편, 그리고 내연남.
니나의 내연남은 해변에서 일을 하는 대학생 윌이다. 윌은 누구에게나 다정하다. 그게 윌의 일이기도 하다. 레다와도 한번 저녁을 같이 먹는데, 레다는 윌에게 쉽사리 마음을 터놓는다. 레다가 인형을 돌려주기로 결심하고 니나의 집을 찾아갔을 때, 니나와 윌이 내연관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레다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학회에서 교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몇 번의 그런 생활이 반복된 후,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는 집을 나가버린다. 여기서 혹자는 엄마의 책임감을 운운하겠고, 혹자는 바람난 유부녀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겠으나 분명한 건 레다가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두 딸이 너무 버거워서, 아이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다 뒤처질 것 같아서, 또는 그밖의 여러 이유로 레다는 우울해한다. 학회에 나가 혼자 있는 것(또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 레다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이다. 가만 보면 엄마들에게는 탈출구가 많지 않다. 나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문을 쾅 닫고 들어가 잠가버렸지만, 엄마는 쾅 닫고 들어가 잠글 방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방이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레다는 3년간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3년이 지나고, 아이들이 보고싶어져(영화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만 아마도 레다의 우울이 가시고 난 후가 아닐까) 집으로 돌아간다. 그때쯤은 아마 아이들이 커서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테고 엄마보다 친구를 찾았을 것이다.
레다는 인형을 돌려주지 않고, 마치 자식을 돌보듯이 인형을 돌본다. 아이는 어떤 인형을 사주어도 그 인형을 잊지 못한다. 니나 가정에는 작은 틈이 생겼고, 레다는 그 틈을 지켜본다. 니나는 괴로워한다. 인형을 잃어버린 아이는 엄마를 자꾸만 괴롭게 한다. 엄마가 괴롭지 않으려면 아이가 인형을 찾아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레다는 인형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저녁, 윌이 레다를 찾아와 방을 빌려달라고 한다. 무슨 그런 부탁이 다 있는지 모를 일이다. 윌은 예전의 저녁식사에서 레다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레다는 거절하지만 얼마 뒤 니나가 레다를 찾아온다. 레다는 기꺼이 방을 내어주겠다고 말하며, 인형을 돌려준다.
니나는 도대체 왜 그랬냐며 분노하지만, 레다는 그저 장난이었다고 말한다. 그저 장난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다. 레다가 인형을 훔친 건 행복해 보이는 니나에게 '너도 한번 괴로워봐라' 하는 마음이었을까, 딸들을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레다는 시장에서 니나를 마주친 적이 있다. 니나가 쓴 커다란 모자가 자꾸 바람에 날리자, 모자에 뾰족한 핀을 꽂아 고정시켜준다. 이렇게 하면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다고. 그 말은 팁 같으면서도 모종의 조언이나 충고 같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레다가 사는 집에 놀러가겠다고 했던 니나는 레다가 준 건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며 핀을 돌려준다. 핀은 마치 자식을 품을 자격도 없다는 듯이, 레다의 아랫배에 깊이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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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엄마의 사랑은 당연하다고 너무도 쉽게 오해하게 된다. 이 당연한 사랑을 받지 못해 병들고, 당연한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병든다.
엄마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거실이나 주방이 아닌, 엄마만의 방.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또는 엄마 역할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할 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엄마의 방이 없다는 것은 엄마의 사랑만큼이나 당연하게 여겨진다.
레다는 니나와 아이를 보면서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끝없이 반추한다. 자식을 등지기로 결심했던 레다에게 그 시절은 어떻게 기억되었을까. 니나는 그 여름을 어떻게 기억할까. 어느 쪽으로나 썩 편치만은 않다. 엄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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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 2021.
감독 : 메기 질렌할
주연 : 올리비아 콜맨, 다코타 존슨, 제시 버클리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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