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1-21 16:46:31
만찬 없는 최후의 만찬
영화 <클럽 제로> 리뷰
SYNOPSIS.
STEP 1. 깊게 심호흡하고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해 보세요
STEP 2. 한 번에 한 가지 종류의 음식만 먹어보세요
STEP 3.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세요
모든 단계를 통과한 여러분을 이제 ‘클럽 제로’의 회원으로 임명합니다!
최고급 기숙사 시설에서 학생들에게 일대일 특별 교육을 제공하는 엘리트 학교의 새로운 영양교사로 임명된 ‘미스 노백’. (미아 와시코브시카) 건강을 유지하면서 학습 능력을 키우는 ‘의식적 식사법’을 가르치는 ‘미스 노백’의 다정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수업에 아이들은 점차 빠져들게 되고 더 극단적이고 위험한 식사를 이어가는데…
POINT.
✔️ "유럽의 웨스 앤더슨"이라는 평을 받는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이 선보이는 감각
✔️ 다양한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한 만큼, 음악이 영화 주제를 돋보이게 해요
✔️ 음악과 함께 어우러지는 원색의 미술도 아주 매력적
✔️ 앨리스, 제인 에어, 스토커... 다양한 얼굴을 보여온 배우 미아 바시코프스카의 단단한 연기
✔️ 독특한 소재를 독특하게 풀어가는 전개

스무 살 언저리쯤, 사이비를 만난 적이 있다. 사이비. 작년에 <나는 신이다>로, 그 전에는 코로나19 당시 신천지로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그 이름. 내가 만난 이는 대학 선배의 얼굴을 하고 나에게 밥을 몇 번씩 사주며, 서로가 기독교인임을 확인하고, 별도의 성경 공부 모임을 만들어 나를 데려갔다. “이상한데?” 싶은 말을 들어도 내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런 걸까 의구심만 품던 어느 날, 진짜 이건 너무 아니다 싶은 문장을 듣고 나는 그와의 인연을 단숨에 끊었다. 결국 그가 어떤 종류의 사이비였는지도 모르는 채로, 폐해 하나 남기지 않고 무사히 벗어났지만, 그 사건을 통해 분명히 한 가지를 배웠다.
조종은 언제나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 원하는 문장을 조금씩 섞으면서 급진적인 곳까지 나아간다는 것. 개구리를 삶아 죽이듯이. 아주 조금씩. 그래서 나는 이후로 <나는 신이다>를 보거나 그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아니 저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다들 믿었단 말이야?”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상한 문장을 하루아침에 듣는 사람과, 차곡차곡 거기까지 이끌려 간 사람의 지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이비만 그럴까? 우리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아는 현실은, 이성과 지성으로 견고히 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는 어쩌면 매우 취약한지도 모른다. 그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 <클럽 제로>가 있다.

#삐딱한 세계에 어서 오세요
영화는 원탁을 치워내고 의자만 움직여 둘러앉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은 ‘노박’이라는 교사의 영양학 수업을 듣게 된 이유를 제각각 밝힌다. 듣다 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음식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그 음식이 연장하는 삶을 대하는 자세와도 닮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열망을 아는 것. 그래서 파고들 부분을 찾아내는 것. 그 자리가 조종의 시작점이 된다.
이 영화에서 기묘하게 삐딱한 느낌으로 고정된 샷을 많이 사용하는 카메라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때만큼은 적극적으로 패닝(pan)해 움직인다. 가구의 직선이 강조된, 움직이지 않는 배경을 뒤로 하고, 학교 풍경은 기이하게 삭막하다. 노란색과 파란색 교복을 비롯한 원색들이 기묘하게 튀어 오르고, 강박적으로 울리는 음악이 끈덕지게 우리를 스크린으로 끌어 당긴다.

여기서, 한때 앨리스였고 또 제인 에어였던 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영양학에 대해 남다른 기준을 가진 독특한 교사 미스 노박으로 분해 낯선 얼굴을 보여준다. 미스 노박은 더없이 맞는 말들을 조합해서, 음식에 대해 기존에 갖고 있는 우리의 통념을 벗겨낸다. 무의식적으로 해온 “먹기”라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하도록 유도하고, 학생들을 차곡차곡 남다른 세상으로 데려간다.
시놉시스만 들으면 <클럽 제로>는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미스 노박, 그의 손에 의해 괴이한 ‘클럽 제로’의 세계로 넘어간 아이들의 영화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를 보고 그 메시지 하나만을 읽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클럽 제로>에 등장하는 학교는 그 자체로 매우 기이하다. 다만 우리에게 그 기이함이 익숙할 뿐이다.

학교 표어는 “There’s more in you”와 “We reach up to the stars”다. 학교 이름은 대놓고 talent school, 재능학교다. 너는 더 잘할 수 있고, 네 안에 더 큰 것들이 있고, 그래서 너는 저 별처럼 높은 데까지 자라갈 거라는 말. 이렇게 써놓으면 다소 컬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익숙한 문장들이 아닌가? 자존심을 너무 중시하느라 지쳐버린 어른들이 강박적으로 쏟아낸 자존감 열풍으로, 작은 거절도 흠집도 감당하지 못할 아이들을 길러낸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사실과 믿음, 어디까지일까
이 영화는 두말할 나위 없이 믿음에 대한 영화이다. 우리는 사실 관계는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앎’의 영역이라고 굳게 “믿는”다. 믿음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 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같은 영역에만 속하는 단어라고 “믿는” 단어지만, 사실 우리는 많은 사실들을 믿고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지도에서 보고 찾아갈 때, 우리는 이 지도를 따라가면 그곳이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다. 아직 내 눈으로 확인해서 앎으로 넘어오지 않은 영역이지만, 이 지도가 맞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믿음 또한 앎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도, 믿음은 그렇게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종교인들만의 단어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앎과 믿음은 자주 비틀린다. 소비주의를 막고 음식이 낭비되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던 아이도 미스 노박의 수업을 들으며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아이가 된다. 이미 믿음이 가지를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이전의 앎과 믿음을 폐기한 것이다. 우리의 문장들은 그렇게 쉽게 비틀리고, 우리는 그렇게 쉽게 변한다.

이 영화는 미아 바시코프시카의 '확신으로 단단한' 표정을 전면에 내세워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믿는 것이 정말, 맞는지? 우리가 이룩한 현실이 정말로 견고하고 탄탄하게 세워진 세계가 맞는지? 어쩌면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조차, 근본적으로 뒤집어질 가능성은 없는지?
물론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딸기와 크림이 가득 얹힌 초콜릿 라테 한 잔을 가득 마신 내가 갑자기 ‘클럽 제로’에 들어갈 일은 없겠고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도 그렇겠지만, 꼭 그런 극단적 사례까지 가지 않을 뿐 이러한 믿음의 전복은 우리에게 꽤나 흔한 일이다. 오래 전에는 다이어트의 적이 지방이라고 말하던 세상이 요즘은 탄수화물을 주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사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은 3대 영양소일 뿐인데.

#만찬 없는 최후의 만찬
미스 노박만을 탓하기엔 이미 이리저리 부조리하게 삐딱한 세계였다. 애초에 섭식에 ‘유행’이 있다는 것도 우습지만, 유행을 따라 미스 노박을 데려온 학부모 회의는 미스 노박과 학생들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면서 본질을 전혀 잡지 못한다. “오페라인지 극장인지”를 집요하게 챙기는 그 시선은 아이들에게 닿지 못한다.
어떤 부모도 아이들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잘 교육하고 싶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어떤 부모도 완벽할 수 없으므로. 사태가 흐를 만큼 흐른 후에도 “오페라인지 극장인지”나 운운하고 있는 다른 부모들뿐 아니라, “조종당했다manipulated”는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단 한 사람의 부모 또한 다른 부모들과 같은 엔딩을 맞이했다.

“최후의 만찬” 같은 장면을 한참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삶에서 만찬을 제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최후의 만찬에서 만찬을 제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후 뿐이 아닌가?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나.
생각해 보면 영화의 모두가, 그리고 현실의 우리 모두가, 다 미련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모두 미련하고, 휩쓸리고, 답답하고, 슬퍼진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울려 퍼진다. 이 영화 속 “믿음”에 대한 인식은 낯설지 않다. 기후위기를 진심으로 우려하는 사람들과 지구온난화가 거대한 음모라고 믿는 사람들이 같은 지구 상에 살아가고 있는걸. 우리는 결국 각자의 믿음을 얼기설기 엮어 올리며, 구멍 숭숭 난 현실을 살고 있다.
무엇이 만찬을 만찬으로 만드는가? 훌륭한 요리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 시간이 아름답게 기억되려면 애정 어린 눈빛과 따뜻한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구멍 난 현실 속, 각자의 믿음 아래, 음식이 아닌 삶으로 주어졌어야 했던 해답들은 무엇이었을까?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하여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1월 24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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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종된 순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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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9명의 번역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남겨주세요.
코로나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던 불과 1년 전 그때.
많은 국민들은 코로나로 인해 불철주야 일하던 의료진들을 향한 <덕분에 챌린지>를 펼쳤었다.
터진 댐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물을 맨몸으로 막는 듯한 불가항력을 느꼈던 의료진들에게, 이 수줍지만 진심을 담은 챌린지는 아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 챌린지의 뒤에는 간접적으로 코로나의 종식에 힘쓰고 있지만 그 어떤 혜택이나 칭찬에서도 한 발짝씩 멀어져 있었던 연구원들도 있었다.
냉정한 잣대를 들이밀자면 의료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의 기세를 꺾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늘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보다는 그림자 안이 더 편하다며 씁쓸하게 웃어야만 하는 연구진들의 알 수 없는 섭섭함은 지금도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속에 쌓여있을 것이다.
영화 [9명의 번역가]들은 출판업계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원색적인 모욕을 많이 들으면서도 늘 영광의 중심에서는 슬그머니 멀어진. 마치 영화처럼 벙커 속에 있는 듯한 번역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지어 그런 푸대접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신간의 원고를 누출시켰다는 누명까지 쓴 채로.
해커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은 고전적인 밀실 추리 방식을 지니고 있고. 9명의 용의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다.
2인자의 삶;숨어 있는 것들을 향해.
사진출처:다음 영화
번역가들은 신간 <더덜리스>의 번역을 완성할 때까지 계약서의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벙커 밖으로 나올 수 없다.이 갑갑한 벙커 안에서 번역가들이 받아야 하는 대우는 사실 사는 데는 아무 지장 없지만, 한편으로는 참 서운하고 비참하다 불러도 할 말은 없어 보인다.
절대 빛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벙커(지하)에서 영원히 2인자의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은 번역가들의 처지는 그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숨겨놓은 욕망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 욕망이 헬렌의 경우는 작가가 되는 것이고. 카테리나(올가 쿠릴렌코)는 작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로즈메리에게는 아름다운 문학의 정점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알렉스(알렉스 로더)에게는 에릭의 멸망.
이들 마음속에는 자신 안의 욕망이 벙커에서 빠져나와 빛을 보기를 바라면서도. 자격 미달이라거나. 혹은 아직 때가 아니었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최소한의 선은 지키려 하지만. 에릭(램버트 윌슨) 만은 다르다.
에릭은 이 영화를 통틀어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속과 겉이 같고. 스스로의 모습을 숨기는데 가장 적은 힘을 들이는 사람이므로. 번역가들이 안전하게 숨겨 놓은 마음속의 비밀스러운 욕망을 맘껏 비웃는다.
자신의 위치가 물리적인 장소인 벙커 안의 번역가들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과 동일하게. 그들의 꿈마저도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해 무차별적 폭언을 일삼는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곰곰이 들여다볼 장소가 없었던 에릭의 행동은 그 누구보다도 성급하고 깊이가 없었으며 예측 가능했기에. 악인에게 허락된 예정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꿈은 실패할 가능성도 많지만.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도 많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자신이 그렇게 무시해 마지않던 알렉스의 꿈은 보기 좋게 에릭을 추락시켰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순수한 것들은 모두 죽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에는 크게 두 부류의 집단이 등장한다.
한 집단은 문학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에릭의 비서이자 책임감 외에는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볼 수 없는 로즈메리와,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책 속 인물인 레베카처럼 꾸미고 다니는 카테리나. 번역가로서의 삶 이외에도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며 몰래 소설을 쓰던 헬렌이 이 집단에 속한다.
악, 혹은 속세로 대변되는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에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존재하는 순수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거나 해를 가한다.
충실한 로즈메리는 에릭을 결국 가장 필요한 순간에 떠났고. 헬렌은 에릭의 차가운 말에 스스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벙커 안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카테리나의 생사는 에릭의 총알에 의해 알 수조차 없게 된다.
거침없는 에릭만큼이나 참을성이 없는 총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더덜러스> 원작자의 가슴팍에도 한 발의 총알을 명중시킨다.
카테리나보다도 먼저 사경을 헤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위치였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가슴팍에 품었던 책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알렉스의 목숨을 구해준 책은. 알렉스에게도. 또한 <더덜러스>의 창조주에게도 마지막 순수를 상징하는 책(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었다.
결국 에릭은 자신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있는 순수의 존재를 모조리 말살시켜 버렸다.
결말에 대하여;처벌은 합당한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표면적으로 봤을 때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쪽은 에릭이다. 첫 장면에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서점의 살인마저도 에릭의 짓인 것이 자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벌이라는 면에서 보면 알렉스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단지 두 사람의 처벌이 그들의 처지와 살아온 모습에 맞게 변형된 것일 뿐이다.
에릭에게 내려진 처벌의 형태는 그 어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세속적이며. 벗어날 수 없고. 또한 적절하다. 에릭은 감옥에서 소위 하는 말처럼 썩게 될 것이고. 자신이 한없이 견고하다 생각하며 쌓아올린 명성은 녹슬다 못해 삭아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스에게 내려진 처벌은 이에 비하면 형태가 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더 가혹해 보인다.
작가로서의 삶으로 본다면, 이 가명을 쓰는 작가는 두 번 다시는 <더덜러스>같은 책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 말해도 좋다. 이 베일 속의 작가는 늘 숨어 있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자신에 대한 용기가 없었다. 그는 스승의 뒤에 숨어있을 때야 자신의 모습을 겨우 드러낼 수 있었고. 그 뒤에서의 삶에도 겨우 만족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위한 방파제가 사라진 지금. 글을 쓸 베짱이 있었다면.이라는 말이 평생 그의 벙커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것은 명약관화하듯 뻔하다.
또한 알렉스로서의 삶도 비참하다.
알렉스의 가장 큰 자부심이자 스스로를 감추는데 적합했던 투명 망토인 <더덜러스>의 원작자라는 사실은. 에릭의 총알 한 발에 의해 숨통이 끊어져 버렸다. 그는 이제 맨 얼굴인 채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만. 이미 불법 번역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경찰서에 출입한 경력이 있고. 이번 사태로 인해 경찰의 의심을 일정 기간 동안은 받으며 살아야만 한다.
멀고 먼 인생의 종점을 바라보며 현재의 알렉스 상태를 진단해 본다면. 에릭의 미래보다도 암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면서
많은 반전을 두고 있는 영화는 좋다. 관객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좋다.
에릭에게서 원고를 뺏기 위해 벙커에 갇히기 전부터 계획을 세워왔다는 설정이 기발하긴 하지만. 그 후반부는 전반부의 정통 추리와는 결이 달라 많은 감정을 깨뜨린다.
또한 해커의 이메일에 대한 설정 추리도 조금 아쉽다. 물론 에릭의 바보 같음, 혹은 후반부의 결이 달라지는 장면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상황에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외부밖에 없으므로 가장 먼저 의심했어야 한다.
또한 에릭의 경우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있어서는 모조리 처벌을 받았지만(혹은 이제 받겠지만) 알렉스의 경우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진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다른 번역가들을 모두 이용했다는 점에서 보면. 주인공도 결국은 번역가들을 가장 앞장서서 도구로 사용했음에는 틀림이 없고. 이것이 과연 에릭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알렉스가 울컥이며 외롭게 길을 걷는 모습을 비춘다.
그 복잡한 표정에 담긴 감정은 다행이라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에릭의 여생을 성공적으로 감옥에 저당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뉘우침과 참회의 감정이 지배적이다. 알렉스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에릭의 총알이 책에 박혀 목숨을 구했을 때. 분명 자신은 살았다고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자신의 비극이 시작될 것이란 걸 알았을까.
에릭의 형벌과 함께 스스로의 형벌도 그의 생을 관통하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렉스는 그 길을 걸으며 어렴풋이 느꼈으리라.
[이 글의 TMI]
1. 보는 내내 속도감이 꽤 빨라서 긴장이 많이 되었음.
2. 두 시간짜리 영화가 귀해지는 마법이라니.
3. 이제 추워져서 슬슬 가을 옷 정리도 해야 할 듯.
4. 친구랑 보러 가기로 했는데 얘 늦잠 자서 인생 하직할 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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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트 나잇 인 소호>낭만과 비극을 품은 런던의 거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런던 소호로 온 ‘엘리(토마신 맥켄지)’. 기대와 달리 런던과 기숙사에서의 삶은 피곤하기만 하고, 이에 그녀는 새 자취방을 마련해 삶에 변화를 주려한다. 그리고 마치 엘리의 심경을 읽기라도 한 듯이 색색의 네온사인이 깃든 새 자취방은 꿈에서 1960년대 소호의 매혹적인 가수 ‘샌디(안야 테일러 조이)’를 만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샌디의 화려한 모습에 매료된 엘리는 매일 밤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삶을 함께 누리려고 하지만, 꿈이 점점 악몽으로 변해갈수록 현실에서 그녀의 삶도 점차 기괴해진다. 끝내 샌디에게 닥친 비극의 목격자까지 되어버린 엘리는 현재까지도 살아있을 범인을 쫓는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신작인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놓인 작품이다. 비교적 유쾌한 코미디에 기반해 잔혹한 액션, 과장된 연출이 빚어내는 쾌감과 미학이라는 감독 본연의 스타일로부터 적지 않은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웃음기를 내려놓은 호러 영화로 돌아왔다는 점, 그리고 비중에 관계없이 등장했던 액션이 사라진 것이 대표적이다.
그 빈자리는 진중한 스토리가 대신한다. 영화는 1960년대와 현재 런던을 오가며 누구보다도 성공을 바라왔지만 사회의 벽과 폭력에 가로막혀야 하는 청년들의 두려움을 강렬한 색감과 화려한 렌즈 플레어와 조명이 만든 초현실적인 이미지 안에 녹여낸다. 이때 눈길을 끄는 것은 낭만과 비극으로 가득한 두 주인공의 사연을 전달하고 대담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기 위해 라이트 감독이 선택한 메신저, 거울이다. 덴마크의 설치 예술가인 올라퍼 엘리아슨의 말대로 거울은 서로 다른 기능을 한다. "역사적으로, 거울은 잠재의식에 대한 생각을 가진 매우 흥미로운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거울은 평행 세계에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바로 이러한 거울의 이중적 기능을 스토리 전개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실제로 영화는 엘리를 끊임없이 거울 앞에 위치시킨다. 당장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엘리는 거울을 본다. 그 안에서 그녀는 어릴 적 죽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다. 런던 패션 학교에 진학한 후 룸메이트와의 갈등으로 인해 기숙사를 나와 이사한 방에서도 엘리는 거울을 본다. 그 거울 안에서는 자신과 닮은 모습의 샌디를 발견한다.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 런던으로 온 자신처럼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샌디를 본다. 이때 거울의 독특한 특성은 엘리가 거울에서 보는 두 대상으로부터 서로 다른 이야기를 꺼내오며 엘리를 주체이자 대상이라는 이중적 관계 안에 놓고, 막 대학생이 된 청춘의 성장 스토리를 비춘다.
우선 엘리는 거울 안에서 자신의 옆에 있는 엄마를 볼 때 단순히 거울에 비친 이미지만 보지 않는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꿨던 엄마의 꿈을 자신이 이루겠다는 각오, 런던에서 지낼 미래에 대한 기대와 동경, 동시에 런던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조현병을 앓다가 자살한 엄마의 전철을 불안증을 앓고 있는 자신이 따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함까지 같이 본다. 이렇게 엄마와 함께 서 있다가도, 다시 혼자 서 있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엘리는 현재 자기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이는 엘리아슨이 잠재의식을 만나다고 표현한 대목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거울의 매끄러운 표면에 반사된 나를 닮은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거울이 우리가 볼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이미지를 제공하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던 자기 자신의 외관이나 정체성에 대해 재고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백설공주> 속 새 왕비가 마법 거울로부터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매일 재확인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면서 엘리는 삶의 확고한 중심을 잡는 주체이자 성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겪는다.
그에 반해 꿈 혹은 환각 속의 거울에서 만난 자신과 똑 닮은 샌디는 엘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의 심정을 재확인하는 것과 달리 전혀 다른 이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경험을 한다.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엘리 본인이 샌디가 있던 거울로 들어가고, 샌디가 엘리의 삶으로 넘어오면서 둘의 세계는 경계가 사라지고, 엘리는 샌디의 삶을 자신의 것처럼 경험한다. 자신이 염원하던 60년대 런던의 낭만과 화려함, 그리고 런던에서 성공한 이의 기쁨을 온몸으로 즐길 기회가 오자 고민 없이 기꺼이 샌디의 삶 안으로 뛰어든다.
이러한 엘리의 경험은 거울이 우리와 닮은 이미지를 보여주기는 하나, 결코 똑같은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기에 가능하다. 거울에 비치는 상은 좌우가 바뀌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과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은 또 다른 주체를 거울 안에서 만나고, 그 주체가 '나'를 볼 때 '나'는 그 주체에게 하나의 대상이 된다. 즉, 거울 속 나 자신을 통해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화의 주인공이었던 왕비가 거울 속에서 백설공주라는 또 다른 주인공을 발견한 순간, 둘 사이에 갈등이 본격화되는 이유다. 이처럼 거울은 단순히 대상을 비출 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의 세계를 마주 보게 하고 교차시키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도구이며, 이는 런던에서 새로운 커리어와 삶을 시작한 엘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성인으로서 중심을 잡고, 더 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아가는 과정은 항상 설렘과 안으로 가득할 수 없다. 거울에서 자신과 함께 타인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곧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호러 영화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거울 속에서 만난 샌디와 그녀의 화려한 삶은 한 명의 청년이자 여성이 겪어야 했던 쇼비즈니스계의 추악한 악습으로 인해 거울 부서지듯 산산조각 난다. 이때 샌디가 겪어야 했던 공포와 무력함은 유령과 망자의 모습으로 엘리 앞에 나타나며 런던 골목골목마다 그녀를 에워싸고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누르는 악습이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스타일리시하고 화려한 런던 소호의 밤길에 내려앉은 어둠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엘리는 그 두려움과 공포에 그저 굴복하거나 미쳐버리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일을 하며 샌디의 신원을 밝히고 그녀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한다. 이에 더해 자신만의 힘으로 주위를 배회하는 유령들을 떨쳐낼 수 없을 때는 친구인 존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구해낼 수 있음도 보여준다. 과거의 낭만과 비극이 한 데 얽힌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는 사실과 다른 이의 비극이 언제든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것, 곧 거울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엘리는 한 명의 성인이자 패션 디자이너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엘리의 성장담은 거울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에드가 라이트 감독이 현란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건네는 격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성장과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엘리가 거울을 보듯이 스크린을 보면서 그녀의 다양한 감정과 사연 속에 빠져들고, 그들의 사연이 완결되는 지점에 우리의 삶도 닿기를 바라면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의 거울, 런던과 소호의 거울에 담긴 이야기가 선사하는 즐거움과 별개로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분명한 단점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샌디가 중심이 된 과건의 사건이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현재 엘리의 경험과 오버랩되면서 공포감을 증폭시키는 것에 비해 엘리의 현재 이야기는 그 자체로 관객을 흡입시킬만한 매력이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개별 인물과 패션이라는 소재를 사실상 거의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과의 로맨스나 룸메이트인 조캐스타와 같은 캐릭터들은 단지 샌디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첫 시작이자 단추로써의 역할 외에 별다른 의의가 없는 도구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또한 패션이라는 소재를 사실상 거의 다루지 못하다 보니 굳이 엘리를 왜 패션 디자이너로 설정했는지도 와닿지 않는다. 이는 비슷한 시대상과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졌던 <크루엘라>와 가장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패션 학교에서 겪는 엘리의 에피소드는 새로운 삶과 커리어에 도전한다는 엘리와 샌디의 공통점을 보여주면서 두 주인공 간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기능적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신 맥켄지와 안야 테일러 조이의 환상적인 호흡과 강렬한 이미지가 시선을 끌어당기는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분명 뇌리에 각인될 작품일 듯싶다. 호러 영화로 돌아온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변화가 성공적으로 귀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엘리와 샌디의 이야기를 열고 닫는 거울을 다방면으로 이용한 스토리텔링과 몽환적인 스타일이 최소한 러닝타임 동안은 몇몇 흠결까지 가릴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뽐내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런던의 현재와 과거, 낭만과 비극이 만나는 성장담을 과시적인 스타일로 빚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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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날 기념! 극장가를 찾은 "아이들을 위한" 영화들
봄바람이 살랑이는 가정의 달 5월,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찾아온 어린이날을 맞아 극장가를 찾아온 "아이들을 위한"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1. 엄마를 만나기 위해 어른들 몰래 떠나는 여행! <아이들은 즐겁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5월 5일 어린이 날에 개봉하는 <아이들은 즐겁다>는 동명의 인기 웹툰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9살 '다이'가 엄마와의 이별이 가까워졌음을 알고 어른들 몰래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과 마지막 인사를 담았다. 영화는 예고없이 찾아온 엄마와의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다이'가 친구들과 가족, 이웃의 보살핌 속에서 나아가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며 관객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선사한다.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팝재즈 싱어송라이터 이진아가 음악 감독으로 참여했으며, 네이버 평점 9.55점을 기록한 허5파6 작가의 인기 웹툰을 소재로 한 작품인만큼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어른들의 입장이 아닌 아이들의 순수한 시선에서 바라보는 만남과 이별, 여행의 즐거움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따뜻한 동심의 세계로 우리들을 이끌 예정이다.
▶ Synopsis
신나는 만남, 함께 한 여행, 그리고 마지막 인사 "고마워"
어딘가 아파서 병원에 있는 엄마와 항상 바쁜 아빠,
조금은 외롭지만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덕분에 9살 다이는 즐겁다.
어느 날, 엄마와의 이별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다이,
친구들과 함께 엄마를 만나기 위해 어른들 몰래 여행을 떠난다.
9세 인생 최초! 전재산을 탈탈 털어 떠난 여행.
그리고 엄마와의 만남 끝에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인사.
2. 손끝으로 세상을 느끼는 아이와의 특별한 만남! <내겐 너무 소중한 너>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5월 12일 개봉 예정인 <내겐 너무 소중한 너>는 국내 유일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단독법 '헬렌켈러 법' 제정을 응원하는 작품으로 눈길을 끈다. <내겐 너무 소중한 너>는 돈만 좇아서 살아가던 '재식'이 손끝으로 세상을 느끼는 아이 '은혜'의 가짜 아빠를 자처하면서 시작된 특별한 만남을 담은 작품이다. 오직 돈만 생각하며 막무가내로 살아온 재식이 시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은혜와 특별한 유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깊은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또한 은혜를 통해 여지껏 사회에서 소외되어 온 시청각장애인들에 대한 현실을 담담한 시선으로 이야기하며 장애인의 복지 현실에 대한 메시지도 함께 전한다. <내겐 너무 소중한 너>는 극 영화로는 국내 최초로 '시청각장애'에 대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진정성있는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와 함께 귀여우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가득 채워져 과연 어떤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갈지 기대를 모은다.
▶ Synopsis
가짜라도! 아빠가 되어야 한다!
돈만 빼고 세상 무서울 게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재식'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지영'의 전재산을 먹튀하기 위해
'지영'의 딸 '은혜'의 가짜 아빠를 자처하게 된다.
앍 보니 '은혜'는 시각과 청각 장애를 모두 가진 아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은혜'를 귀찮아 하던 '재식'은 손끝으로 세상을 느끼는 '은혜'만의 특별한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하는데...
3. 아이들의 행복한 등교를 위해 나선 용감한 엄마들! <학교 가는 길>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아이들은 즐겁다>와 함께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봉하는 <학교 가는 길>은 장애 학생 아이들이 행복하게 학교 다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선 용감한 어머니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강서 특수학교인 '서진학교'의 개교를 위해 무릎까지 꿇는 강단과 용기로 17년째 멈춰 있던 서울 시내 신규 특수학교 설립을 이끌어 낸 용감한 어머니들의 사연을 통해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딸을 키우고 있는 같은 학부모로서 엄마들의 마음에 공감한 김정인 감독이 학교를 짓기까지의 여정을 밀도 있게 담으며 깊은 감동을 자아낼 예정이다. 특히 영화 속에서 어머니들이 아이의 장애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 자녀로 인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매일을 기쁘게 보내는 모습, 장애 자녀를 묵묵히 기다려주고 아이들이 각자의 속도에 맞춰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모습 등은 자녀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애틋한 모성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 Synopsis
전국 특수학교 재학생의 절반은 매일 왕복 1~4시간 거리를 통학하며 전쟁같은 아침을 맞이한다.
장애 학생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특수학교 아이를 위해
거리로 나선 엄마들은 무릎까지 꿇는 강단으로 맞서는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활력으로 주위가 가득 채워져야 할 지금,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사뭇 조용하게 지나가는 듯 해 아쉽고 또 쓸쓸한 마음이 드는 5월이다.
봄을 채 느낄 새도 없이 찾아온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어린시절 품었던 따뜻하고 순수했던 마음으로 오늘 소개한 세 작품을 통해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바라보는 시선을 함께 느껴보는 건 어떨까?
씨네랩 에디터 J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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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3년만에 세상 밖으로
3년만에 세상 밖으로, 이은정 감독의 '오랜만이다'
개막식부터 이어진 비소식과 더운 날씨에도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찾아주는 관객들이 많다. 이은정 감독은 첫 장편영화이자 음악영화를 선보이며 기쁜 마음을 전했다. 2020년 팬데믹과 맞물려 오랜 기다림 끝에 세상에 나온 영화 '오랜만이다'의 이은정 감독과 ‘연경, 음악, 그리고 이은정 감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소개와 함께 간단한 영화 소개 부탁드립니다.
영화 '오랜만이다'를 연출한 이은정입니다. 영화 '오랜만이다'는 오랫동안 가수의 꿈을 꾼 연경이 서른 초반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꿈을 포기할지 고민하는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시절에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기타 하나가 첫사랑 현수로부터 배달되며 다시금 떠오른 첫사랑, 꿈과 현실 사이 청춘들의 고민을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를 구상하는 과정에 생긴 에피소드가 있다고 들었어요.
영화 제작사 대표님이 ‘지하철에서 첫사랑을 만나 보내는 하루’를 음악 영화로 오랫동안 기획하셨는데요. 제가 연출을 맡았을 때 코로나19로 인해 촬영을 1년 정도 멈추었어요. 그때 절반가량의 시나리오도 다시 썼거든요. 처음에 작성한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촬영을 중단한 1년의 기간이 감독님께는 더욱 깊이 있어진 시간이 되었을까요?
영화 속 연경이도 꿈을 향해 도전하지만, 자꾸만 벽에 가로막히고 좌절하고 어쩌면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닌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사실 촬영이 중단되니 연경과 감정이 동일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바뀐 시나리오를 감독님과 배우님들께서 좋아하셔서 나머지 절반을 새로운 시나리오와 합쳐 완성했어요. 기존의 시나리오는 로맨틱 코미디 성향이 강했다면 완성작은 훨씬 차분하고 음악인으로서 연경의 성장담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저에게는 이 영화 자체가 연경이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로 작업하는 가운데 촬영이 계속 중단되다 보니 “아냐 넌 할 수 있어, 될 수 있어”라고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거든요. 연경이가 마지막에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데 울컥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감독님께서 좋아하는 곡 추천 부탁드립니다.
여고생 연경과 잘 어울리는 곡인 '천문학은 모르지만', 현대에서 부르는 '무지개'라는 곡을 추천드립니다. '무지개'를 들을 때 각자의 느낌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제가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감성인 것 같아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감독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처음입니다.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어요. 저 혼자 3년 가까이 영화 '오랜만이다'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언제 세상에 나와 관객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러다 영원히 안 되면 어쩌지 불안감도 생겼어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저의 불안을 해소해 준 느낌이에요.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한 것을 보게 되어 의미가 있고 세상에 나왔다는 것에 감동이었습니다.
8월 12일, 이은정 감독은 배우들과 함께 영화 상영 후 곧바로 음악 공연을 하는 ‘히든트랙’에 참석했다. 당시 관객과 가까이에서 만나 영화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이게 진짜 음악영화제’라 마음에 와닿았다고 전했다. 이은정 감독은 연경과 음악의 연장선에 서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은정 감독은 영화 '오랜만이다' 음악들이 워낙 좋기 때문에 음원도 나오고 나중에 노래방에서 나오면 따라 부르고 싶다는 즐거운 꿈을 밝혔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김미정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시은
에디터 : 김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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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서구 - 551분 이라는 시간, 그 안에 담긴 2년의 세월
영화중에서도 보기 힘든 영화가 있다. 여기에서 보기 힘들다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영화가 어렵거나, 수위가 높거나, 말 그대로 접하는 것 자체가 힘들거나. 왕빙 감독의 영화 철서구는 마지막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먼저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놀란 점은 이 영화에게 바치는 수많은 평론가들의 찬사와 호평도 있었지만, 특히 '러닝타임'이 놀라웠다. 필자가 과거에 러닝타임이 길었다고 평한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3시간 58분), '아라비아의 로렌스(3시간 48분)', '유레카 (3시간 38분)', '아이리시맨 (3시간 30분)'의 러닝타임 따위는 우습게 뛰어넘는 9시간 11분이라는 러닝타임은 필자에게 안 당황스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기가 들어서 더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필자말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건지, 2020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관객들의 선택 2위를 차지했다) 대체 감독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서 551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쓴 걸까. 보고 나서 느꼈다. 아, 551분을 날린게 아니구나. 그 시간을 써서 담고 싶은 게 있었구나. 이걸 읽어보고 괜히 러닝타임 기니 있어보이는 척 하고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하지 마시길. 단순히 러닝타임이 길다고 호평받는 거라면 '모던 타임즈 포에버 (2011, 10일)'는 시민 케인, 게임의 규칙을 뛰어넘는 걸작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철서구는 왕빙 감독이 2년 동안 철서구의 주민들과 직접 생활하며 공업지구의 쇠퇴와 그 주민들의 삶을 그대로 담은 영화이다. 왕빙 감독이 단순히 영화를 찍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진심으로 다가갔다는 것을 느낀 것은, 주민들이 카메라 앞에서도 꺼리낌없이 삶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1부에서는 카메라가 있어도 서로 싸우고, 씻고 나온 공장 직원의 성기가 그대로 보이기도 하니) 러닝타임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관객들에게도 감독 처럼 그들의 삶을 최대한, 가능한 직접 느껴보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시간 11분은 하루에서는 학교에 있는 시간, 근무 시간보다 조금 더 되는 시간이지만 2년이라는 세월에 비할바는 못된다. 다만 영화관에서의 9시간 11분은 긴 시간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어느새 그들의 삶을 직접보고, 직접 느끼게 되며 그들의 삶에 공감하게 된다.
필자가 본 영화들 중에 정말 잊지 못한 경험이 될 정도로 좋은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정말 보기 힘들다. 러닝타임이 긴 것도 그렇고, 애초에 정식 수입이 된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보기 힘들 수 밖에 없다. 영상도서관이나 필자처럼 영화제 상영으로 봐야하는 수 밖에. 현재 유튜브에 업로드도 되어있지만 집에서 보면 이 영화의 의미는 희석된다고 생각하기에 추천 하지 않는다. 어떠한 외부 요인의 개입 없이, 영화 스크린과 나만의 커뮤니케이션, 교감만이 있는 씨네마에서 봐야 감독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번 보기는 정말 힘들지만, 한번 꼭 본다면 분명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두 번 보기도 힘든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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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비우스> 피로 쓴 안티 히어로의 조악한 탄생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희귀 혈액병을 앓고 있는 생화학자 ‘마이클 모비우스(자레드 레토)'.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인공 혈액을 포함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 끝에 그는 흡혈 박쥐의 DNA에 치료제 개발의 힌트가 숨어 있음을 발견한다. 모비우스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친구이자 후원자인 ‘마일로(맷 스미스)'가 준비해준 배에서 동료 ‘마르틴(아드리아 아르호나)'과 함께 불법적인 실험을 진행하고, 마침내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임상 실험을 진행한 후 그는 새 치료제가 강력한 힘과 능력을 줌과 동시에 인간의 피를 마셔야만 해소되는 갈증도 선사함을 깨닫는다. 이에 모비우스는 FBI 요원 '사이먼(타이리스 깁슨)'으로부터 치료제 개발 사실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치료제를 맞은 마일로는 모비우스와 같은 힘을 갖게 되고, 모비우스는 새로운 힘에 도취된 친구 앞을 가로막는다.
SSU의 딜레마
자레드 레토, 맷 스미스, 타이리스 깁슨 등이 출연한 <모비우스>는 소니의 슈퍼 빌런 세계관인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Sony's Spider-Man Universe, SSU)'의 세 번째 작품으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폭발적인 흥행 이후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베놈>으로 포문을 연 SSU는 현재 스파이더맨의 빌런들이 모인 팀인 '시니스터 식스(Sinister Six)'를 선보이기 위한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으며, <모비우스> 역시 그 준비 작업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이때 SSU는 흥미롭게도, 또 필연적으로 한 가지 딜레마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스파이더맨의 빌런들이 모인 세계관이기에 SSU는 관객들을 주인공들에게 공감시킴과 동시에 그들이 명백한 악인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놈>에서 실패자와 패배자로 낙인찍힌 베놈과 에디 브룩이 의기투합하여 자신들의 존재감과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이야기는 감정적으로 어필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그들은 살인과 식인처럼 위법적인 수단을 거침없이 활용하면서 안티 히어로 혹은 빌런으로서의 정체성도 버리지 않는다.
<모비우스>도 예외는 아니다. 시니스터 식스의 멤버가 될 것을 암시한 만큼, 모비우스 역시 자신이 단순한 슈퍼히어로가 아닌 빌런의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때 <모비우스>는 '피'와 '아버지'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수단을 통해 새로운 주인공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선과 악의 경계선, 피
애초에 캐릭터의 모티브가 흡혈귀인 만큼, <모비우스>에서는 피라는 소재가 거듭 등장한다. 당장 흡혈 박쥐를 잡으러 간 영화의 첫 장면에서 모비우스는 스스로의 손에 상처를 내 그 피로 박쥐들을 유인한다. 어린 모비우스와 마일로도 그들이 매일같이 하루 세 번 혈액 투석을 해야 하는 병을 앓는다는 공통점 덕분에 친구가 된다. 그래서 모비우스는 그 치료 과정을 단축시키기 위한 인공 혈액을 발명하고, 아예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외부의 피를 먹어도 문제가 없는 흡혈 박쥐를 연구한다.
특히 모비우스의 실험이 부작용을 낳은 후에 피는 더욱 중요한 소재가 된다. 박쥐로부터 얻어낸 혈청 덕분에 폭발적인 힘과 새로운 몸을 얻게 된 그는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는 한 능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에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인공혈액으로 갈증을 달래려 한다. 이미 변신 직후 실험을 진행하던 배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피를 마신 것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 혈액이 갈증을 늦출 뿐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는 관계로, 모비우스에게 사람의 피는 최후의 기준점이 되어버린다. 본능에 굴복해서 세상을 파괴할 힘을 갖거나, 욕구를 따르지 않고 세상을 구원할 존재가 되는 기로에 선 것이다. 따라서 모비우스에게 피는 선과 악, 히어로와 빌런을 가르는 일종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비우스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마일로를 대조시킬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친구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비우스가 개발한 혈청을 주사한 마일로. 그는 혈청을 맞은 후 자행한 살인에 괴로워하고 이를 억제하려고 하는 친구와 대비되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거리낌 없이 활용해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 또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범죄를 회상하며 즐거워하고 춤을 추기까지 한다. 이때 두 친구 사이에 차이점은 오직 하나다. 본능을 따라 사람의 피를 마시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피와 아버지로 확립하는 안티 히어로/빌런의 정체성
이에 더해 영화는 모비우스와 마일로, 그리고 에밀이라는 유사 부자 관계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끌어들여 감정적 요소를 더하고, 선과 악의 차이를 더욱 구체화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무의식에는 파괴적 욕동(타나토스)과 사랑의 욕동(에로스)이 존재한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다가도 그 증오를 선망으로 바꾸어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양가적 감정에 휩싸인다. 이때 양가적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지만, 그로 인해 죄책감에 휩싸이며, 죄책감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로 상징되는 규율과 규칙을 내재화하게 만든다. 그 규칙에는 기독교와 같이 강력한 규율을 지닌 종교를 포함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인 윤리, 도덕, 법 등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나 다름없는 에밀의 밑에서 함께 자란 두 박쥐 인간의 차이점은 흥미롭다. 실제로 마일로는 에밀이 언제나 모비우스를 우선시했고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면서 에밀에게 증오를 표하지만, 모비우스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에밀을 선망하며 그를 롤모델로 여긴다. 따라서 마일로가 아버지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은 그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빌런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마일로를 막고자 하는 모비우스의 모습은 그가 히어로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는 앞서 본 선과 악의 기준인 피와도 연관된다. 두 친구에게 피를 마시는 것은 본능적인 욕구에 굴복하는 일이다. 따라서 마일로가 피를 마시는 행위는 욕동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를 죽이고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악행이다. 그가 괜히 경찰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모비우스가 인공 혈액을 마시는 것은 욕동을 억누르며 선의 길을 걸으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피와 아버지라는 소재는 역설적으로 모비우스가 결코 히어로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수감되었을 때나, 또 클라이맥스에서 펼쳐지는 대결을 앞두고 모비우스 역시 끝내 사람의 피를 마셔서 힘을 얻기 때문이다. 폭주하는 마일로를 막은 결과는 좋았을지 모르나, 그 역시 본능과 욕구를 이겨내지 못했다. 또 그 과정에서 사적 제재를 가함으로써 작중 FBI 요원 사이먼으로 대변되며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낳은 사회적 질서에 심대한 피해를 끼치고 만다. 그렇게 베놈의 뒤를 이어 피로 쓴 안티 히어로이자 빌런인 모비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의 매력을 가리는 설득력 없는 화법
문제는 엉성한 각본과 조악한 편집으로 인해 모비우스의 탄생기가 지닌 차별성과 매력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모비우스>의 시나리오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모비우스와 마일로 간의 관계를 명확히 묘사하는 데 실패한다. 철저히 두 친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정작 친구 관계의 시작점인 유년 시절을 보여주는 분량이 상당히 적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들의 공통분모인 에밀과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대목이 부족하다 보니 둘의 갈등과 대립이 선명히 그려지지 않기도 한다.
또한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러닝 타임에 무리하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낸 결과, 급 전개되는 로맨스처럼 여러 사건들은 설명되지 않은 채 그저 발생하는 데 그친다. 덩달아 모비우스의 조력자인 마르틴, 모비우스와 마일로를 쫓는 FBI 요원 사이먼 같은 캐릭터들도 무의미하게 소비된다. 자레드 레토와 맷 스미스의 연기가 눈을 사로잡는 데는 두 주인공 외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가 없는 것도 큰 몫을 맡는 것이다.
히어로 영화, 액션 영화에 기대할 만한 볼거리의 질이 낮은 것도 치명적인 단점이다. 사실 <모비우스> 속 액션의 콘셉트는 분명 나쁘지 않다. 박쥐의 상징성에 주목한 <더 배트맨>과 달리, 박쥐의 원초적 습성에 주목해 박쥐의 능력을 직관적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인상적이다. 또 배나 병원처럼 한정된 장소에서 고전적인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초반부 액션은 그 자체로도 눈길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하지만 액션의 규모가 커지려는 중후반부에서 단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밤거리와 지하 동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피아식별을 어렵게 하며, 알아보기 힘든 액션은 클라이맥스에서 긴장감을 최대치로 고조시키는 데도 무용하다.
여기에 새로 만든 연구실을 놔두고 굳이 기존 연구실을 찾아가서 무기를 만드는 장면처럼 바로 앞뒤 장면의 연결조차 매끄럽지 못한 편집이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 그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부터 <베놈>, <베놈 2>에 이르는 소니의 히어로 영화들은 어수선한 편집으로 인해 필요한 분량이 대거 생략되고 완성도가 하락한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비우스>도 고질병을 피하지 못한 셈이다.
과거 마블의 수장인 케빈 파이기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 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이 말은 2개의 쿠키 영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SSU의 거대하고 야심한 미래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하다. 스스로의 매력과 잠재력조차 온전히 살려내지 못한 <모비우스>는 케빈 파이기의 조언과 정확히 반대에 위치한 작품으로, 현재 SSU의 다음 타자로 예정된 <크레이븐 더 헌터>를 향한 기대감을 전혀 키우지 못한 채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D(Dreadful, 끔찍한)
시작은 그럴싸하나 끝은 미약한 흡혈귀 빌런의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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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에 담긴 이순신과 거북선이 왜군을 통쾌하게 물리치다
?Rabbitgumi 입니다!
한국의 국민영웅 이순신 장군이 돌아왔습니다.
명량의 후속편인 한산인데요.
명량의 시점보다 앞의 이야기를 다루는 프리퀼이죠.
영화에는 학익진을 비롯해 거북선이 등장해 유명한 한산대첩을 영상으로 담습니다.
무척 박진감 넘치는 영화가 나왔는데요.
이순신과 거북선의 활약이 무척 멋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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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커밍 아스트리드> 메인 예고편
‘아스트리드’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10대 소녀다.
1920년대 스웨덴의 시골에서 10대 소녀에게 허락된 일이란
집안일을 돕거나, 동생들을 돌보거나 하는 그저 허드렛일뿐.
게다가 기독교 집안인 까닭에 이성교제는 물론
머리모양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하다.
하지만 딸의 글 솜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아끼는 아버지는
‘아스트리드’를 지역 신문사의 인턴으로 일할 수 있게 힘쓴다.
그곳에서 그녀는 삶의 전환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말괄량이 소녀 ‘아스트리드’가 전설의 작가 ‘린드그렌’이 되기까지
그녀의 가장 결정적인 삶의 모먼트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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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퇴마록> 공식 예고편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항할 퇴마사들의 탄생⚡ 하늘이 불타던 날🔥 새로운 전설이 시작된다! 1000만부 베스트셀러 원작 오컬트 블록버스터 [퇴마록] 예언의 시작 예고편 공개! 2025년 2월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