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롬2023-03-13 18:54:03
아픔의 단절을 딛고 인연을 만들어가다
<스즈메의 문단속>(2023)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을 보는 이유는 ‘빛의 마술사’라는 그의 별명답게 신카이풍 작화를 보기 위해서다. 필자는 그렇다. 그가 항상 만든 애니메이션 작화는 왠지 모를 감동이 있다면, 스토리 면에서 그 감동을 저하시킨다. 영화는 분명 재밌었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나 목적을 이해하기에는 힘든 면이 있었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여타 필모그래피와 다르게 신카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하다. 이제부터 그 의도를 파악할 예정이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단속이라는 정의를 국어사전에 검색하면 ’ 사고가 없도록 문을 잘 닫아 잠그는 일‘이라고 나온다. <스즈메의 문단속> 스토리는 ‘소타’와 ‘스즈메’가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를 막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여기서 문단속은 가시적인 면과 비가시적인 면으로 나뉜다. 스즈메가 가시적으로 보이는 문은 재해를 막고, 사람을 구하는 작용을 한다.
하지만, 스즈메 내면의 문은 대화의 단절과 인연을 만들어가는 작용을 한다. 스즈메는 어렸을 적 사고로 돌아간 엄마를 대신에 4살 때부터 자신을 돌봐준 이모 ‘타마키’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둘 사이에 엄마와 언니라는 존재를 애써 잊어가며 살아가지만, 그 눈덩이는 커져가며 점차 둘의 대화는 붕 뜨게 된다. 하지만, 스즈메가 미미즈를 막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통해 둘은 과거를 인정하고, 관계가 회복 및 개선된다. 이뿐만 아니다. 스즈메는 어렸을 적 엄마를 찾겠다고 길을 헤매다 우연히 저승으로 향하는 문을 넘는다. 그리고 후반부 스즈메는 과거의 자신을 만나며 어릴 적 느꼈던 엄마를 잃었던 슬픔을 공감하고, 위로한다. 단순히 표면적인 스토리의 ‘문단속’이 아닌 스즈메라는 캐릭터가 갖는 외내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한층 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든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인연의 연속성을 지닌다. 비록 단절된 인연이라도 그 인연이라도 말이다. ‘인연’이라는 명사는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몇 개를 꼽으며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다. 스즈메가 요석이었던 다이진을 쫓고, 미미즈를 막기 위해 일본 동부지역을 도는 여정을 시작하는데, 여정 중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각자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는 장면들은 인간 내면의 따뜻함과 함께 일상의 순간을 느낄 수 있다.
두 번째는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이다. 영화는 인적이 드문 공간에 있는 문이 열리며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가 등장한다. 이를 막기 위해 스즈메와 소타는 문을 닫기 위해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데 과거에 있었던 장소의 분위기와 모습을 떠올리며 신의 가호를 외치며 문을 닫는다. 이때, 과거를 떠오르는 모습들은 단절되었던 인연을 잇게 만들어준다. 애초에 <스즈메의 문단속>이 12년 전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을 스토리라인에 직접적으로 대입한다. 스즈메가 문을 닫는 지역들은 실제 당시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던 곳들이었고, 미미즈의 형태도 잘 보면 지구 과학 시간에 봤던 지각판 선을 연상케 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렇다면 신카이 감독은 이런 아픈 사건을 스토리라인에 왜 직접적으로 대입하여 만들었을까. 어쩌면 두 번째 인연은 ‘어떤 사물’을 넘어 과거와 관계되는 연줄을 극복해 나가는 인연일 수 있다. 스즈메가 과거의 사건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영화를 본 이들도 각자가 가졌던 과거의 아픔을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길 바라는 게 아닐까.
<스즈메의 문단속>은 평범한 일상과 인연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동일본 지진과 같이 가슴 아픈 사건으로 없어질 뻔한 일상의 행복을 상기해 주고, 개인주의로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 보여주는 인연의 감사를 보여주며,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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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스러운 이미지만 나열되는 공포영화
과연 신이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그 신이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초월된 어떤 존재를 믿는다. 하느님, 부처, 알라 등 다양한 종교 집단의 믿음을 받는 존재들은 이미 인류의 마음속에 선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런 비 과학적인 존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각 종교에 헌신하고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매주 기도를 하고 자신과 가족의 평안을 위해 종교시설에서 시간을 보낸다.
큰 종교들에서 조금 시선을 돌리면 더 다양한 종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 작은 분파들을 비롯해 특정 지역에서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는 토속 신앙들도 있다. 모두 사람들의 신뢰를 받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다양한 신은 그 믿음이 대를 이어 계속 전해 내려오고 해당 신의 믿음을 일반 대중에게 연결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스님, 목사, 신부 등이 대표적이며 지방 신들과 이어주는 무당도 그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 모두 공통적으로 종교의 가르침이나 선한 존재에 대한 것들을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일련의 종교들을 현재까지 존재하게 하는 건 바로 믿음이다.
지방 신을 믿는 무당과 그 가족의 이야기
영화 <랑종>은 무당인 님(싸와니 우톰마)과 그의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의 이야기를 다루는 페이크 다큐영화다. 태국어로 랑종은 무당이라는 의미로 이 영화가 주인공인 님과 그가 모시는 반야 신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 속 님은 젊은 시절 반야 신에게 신내림을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과거 신내림을 받기 전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몸이 아팠다. 얼마 정도 저항을 했지만 결국 반야 신을 받아들인 그는 대를 이어 반야 신을 섬기는 무당이 되었다.
님은 반야 신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영화 내내 그는 반야 신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행동한다. 신내림 직전 님과 그의 언니가 경험했던 신체의 이상한 아픔이 조카 밍에게도 벌어지자 님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것이 진짜 신내림인지를 판단하려 한다. 영화는 전형적인 다큐의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님이 가진 시각이나 생각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는다. 그의 인터뷰에는 반야 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깔려있는데 그것은 결국 반야 신이 선한 신이라는 판단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 속 마을의 사람들은 동물, 집, 산, 나무 등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애니미즘(animism)의 시각이 영화에 담겨있는 것인데, 이 애니미즘은 살아있는 생물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물에 정령이나 혼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주로 원시 문화에서 많이 믿었던 이 개념은 현대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문화의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그런 다양한 혼령이 주변에 있다고 믿는데 특히나 반야 신은 그 모든 것의 균형을 맞추는 존재로 특별히 그를 받아들인 무당 님 또한 특별한 존재로 묘사한다.
사실 영화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특별하지 않다. 님의 인터뷰와 생활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님이 형부의 장례식장에서 밍을 만나 관찰하는 시선으로 전환된다. 밍이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 신체의 아픔 등은 그것이 일종의 신내림이라는 것을 모두가 부인하지 않는다. 밍의 엄마가 자신의 딸이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만 영화 내의 다른 등장인물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입장에서 결국 밍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반야 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 흔들릴 때 찾아오는 공포
모든 등장인물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반야 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불신하지 않는다. 그 믿음과 신뢰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안정감을 주는데 밍의 이상한 행동들에 불안감이 있지만 무당인 님의 말을 따르면 그런 것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믿음이 곧 사람들을 안심하게 해주는 것인데 그 믿음이 흔들리는 시점부터 영화는 공포의 강도를 높이게 되고 후반부에는 거의 직접적인 이미지로 그 공포를 보여주게 된다.
사실 제작자로 참여하고 있는 나홍진 감독의 영향이 많이 들어갔다고 보여진다.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그 점에서 나홍진 감독의 전작인 <곡성>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두 영화 모두 무당이나 퇴마 의식이 진행되기도 하고, 지역의 신인 바얀 신을 향한 믿음이 어느 정도 있는지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홍진 감독의 색깔이 겹쳐 보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나홍진의 색이 입혀진 것까지는 괜찮지만 영화가 나홍진 영화가 가지고 있는 깊이 까지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랑종> 이 <곡성>처럼 보다 근원적인 공포를 효과적으로 보여줬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중반까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무당인 님의 시각과 설명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하여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예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 후반부의 전개와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의 중반이 넘어가면 영화는 밍에게 나타나는 이상한 증상들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공포의 수위를 높인다. 그런데 한 번에 수위를 높인 영화는 그 이후 아주 원초적이고 혐오스러운 공포 이미지를 계속 반복해서 보여준다.
일종의 푸티지 영화인 이 영화는 캠코더로 귀신이나 초자연 현상을 찍은 여러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한국영화인 <곤지암>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처음 몇 장면들은 꽤나 공포스럽지만 영화의 공포스러운 존재의 모습이 계속 반복해서 보여지게 되면서 오히려 무서움이 줄어든다. 아주 직접적으로 공포스러운 장면을 드러내는 후반부는 주인공들의 처절함과 공포심이 화면으로 전달되지만 혐오스럽고 역겨운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가 만들고자 하는 공포심이 극대화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가 여러 번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미지에 완전히 파묻혔기 때문이다. 영화가 던진 주제의 힘은 약하지만 그를 뒷받침해주는 이미지들은 너무 강렬해서 주제가 가져오는 공포는 휘발되버리고 만다.
혐오스러운 이미지만 나열되어 아쉬운 영화
영화가 포함하고 있는 특정한 종교나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핵심적인 질문은 후반부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후반부 하이라이트 장면인 퇴마 의식 장면은 바얀 신에 대한 믿음이나 무당에 대한 믿음 같은, 영화의 초반부터 던지고 있는 질문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저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혐오스러운 공포의 장면들이고 그 이면에 있는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나 주제는 완전히 가려져 버린다. 그래서 영화의 맨 마지막 보여주는 메시지도 큰 울림을 가지기 어렵게 된다.
그만큼 영화는 자신이 가진 메시지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참혹한 영상만을 반복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자신이 파놓은 깊은 우물 밑만 보여줄 뿐 그것을 밖으로 내뿜지 못하고 있다. 나홍진이 제작한 영화이지만 그가 연출한 영화들의 깊이보다는 그가 가진 테크닉과 분위기만 가지고 온 영화라는 한계를 보여준다. 영화는 대부분 신인이나 무명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는데 특히 님의 조카 밍 역을 연기한 나릴야 군몽콘켓의 연기가 훌륭하다. 그는 아주 발랄한 젊은 여성의 연기로 시작해 여러 령에 의해 빙의된 괴이한 존재를 그의 얼굴과 몸짓으로 표현해내 영화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든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연기는 <부산행>, <곡성>에 참여한 박재인 안무가에게 연기지도를 받아 훌륭하게 표현되었다.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가 가진 분위기 자체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주제와 공포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많이 아쉬운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랑종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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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적인 스타일리쉬, 보는 이도 극단적으로 미쳐버려
왕가위 감독은 독창적인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이다. 그의 영화의 매력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분위기가 좋다", "느낌있다" 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연출과 영상미가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실이다. 흔히 왕가위 감독의 리즈시절이라 불리던 80~90년대에는 그의 스타일을 모방한 광고나 영화가 한국에서 여럿 나왔을 정도니. 다만 그의 단점으로 뽑히는 것은 이러한 연출과 영상미를 따라오지 못하는 각본이다. 실제로 촬영감독이 바뀐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때 부터는 각본의 단점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번에 이야기 할 영화 "2046"은 그런 왕가위의 장점인 연출과 영상미, 단점인 각본이 극단적으로 나온 영화라고 생각한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독창적인 카메라 무빙은 이 영화에서 더 강렬해졌으며, 난해한 스토리 라인은 작중 현실과 소설의 이야기와 상상이 교차되면서 혼란이 더욱 커졌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 영화에 극단적으로 반감을 표할 것이고, 동시에 누군가는 극단적으로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매료시키는 그 영상미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우면 어때. 너무 황홀하잖아.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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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주말은 건강히 잘 보내셨나요?
오늘은 1월 2주차의 주말 박스오피스를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씨네픽과 함께 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
'박스오피스 예측(결과) 콘텐츠'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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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5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말동안 (1월 14일~16일) 관객 수 17만 1927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현재 689만 7608명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무색하게도 연일 흥행 독주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하우스 오브 구찌> 등 할리우드 거장 감독들의 대작들이 개봉하고,
그리고 한국영화 기대작인 <특송>의 개봉에도 불구하고 꿋꿋히 관객 수를 동원하고 있는데요.
이 기세로 누적 관객 수 700만명을 이번 주 안에 돌파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2위. <특송>(▲5)
▶이번 주 주말 박스오피스 2위는 지난 1월 12일 개봉한 <특송>입니다.
주말동안 (14일~16일) 주말 관객 수 16만 0147명을 동원했고, 총 누적 관객 수는 23만 3432명입니다.
개봉 후 5일간 <특송>은 쟁쟁한 경쟁작들 속에서 순조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으며,
실관람객들의 평점은 CGV골든에그 지수 93%를 기록하며 흥행열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특송>은 박소담 배우의 원톱 주연작으로 성공률 100%의 특송 전문 드라이버 ‘은하’가 예기치 못한 배송사고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추격전을 그린 범죄 오락 액션 영화입니다.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짜릿한 카체이싱 액션과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으로
극장에서 꼭 봐야할 극장 필람 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위. <씽2게더>(-)
▶주말 박스오피스 3위는 유니버설 픽쳐스의 <씽2게더>입니다.
같은 기간(14~16일)동안 주말 관객 수 13만 4346명을 동원했으며, 충 누적 관객 수는 49만 9047명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인 <씽2게더>의 흥행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관객들의 뜨거운 입소문에 힘입어 개봉 3주 차에도 굳건히 CGV 골든에그지수 98%를 기록하며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작품 및 신작들 대비
압도적인 수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오히려 박스오피스 1위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나 2위인 <특송>보다도
좌석 판매율은 16.4%로 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무난히 이번 주 누적 관객 수 5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83회 예측 이벤트는 1월 2주 차 주말 박스오피스 예측 이벤트입니다.
먼저 1월 둘째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제공하는
실제 관람객의 성별/나이별 관람추이를 보겠습니다. 남성 64%, 여성 36%로 남성 관객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령대 별로는 20대 비율이 45%, 다음으로는 30대가 3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제83회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에 한 주동안 참여한 씨네픽 유저들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위의 표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씨네픽 제 83회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이벤트의 참가자 중의 대부분은
박스오피스 1위 -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예측하셨고, 박스오피스 2위 -<특송>, 3위 - <씽2게더>를 예측해주셨습니다.
이 순위는 실제 박스오피스 순위와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83회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이벤트의 참가자 중 35%의 참가자분들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박스오피스 1위,
27%가 <특송>의 박스오피스 2위를 예측, 3위도 마찬가지로 32%의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씽2게더>의 박스오피스 3위를 예측했습니다.
또한 제 83회 박스오피스 순위예측에 참여하여 1위, 2위, 3위를 모두 맞혀 상금을 받아가실 분들은 모두 36명 입니다.
상금을 받아가신 정답자는 전체 참가자 중 10%가 넘는 수치입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많이 참여해주시어, 상금을 많이 받아가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제 83회 예측 이벤트에 참여해주신 모든 참가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정답자분들 36분에게는 진심으로 축하인사 드립니다!
다음 주에는 더 재밌고 유익한 제 84회 씨네픽 이벤트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4위. <경관의 피>(▼2)
▶주말 박스오피스 4위는 지난 주 순위에 비해 2계단 하락한 <경관의 피>입니다.
<경관의 피>는 주말 관객 수 9만 0725명을 기록, 총 누적 관객 수는 55만 7141명을 기록했습니다.
조진웅, 최우식, 권율등 주요 출연진들이 예능이나 라디오에 출연하여 연일 홍보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운 흥행실적입니다.
물론 극장가는 계속해서 할리우드의 대작 신작들이 줄줄이 개봉하고 있고 무엇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행에 제동이 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5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
▶주말 박스오피스 5위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차지했습니다.
주말동안 4만 2074여명의 관객 수, 총 누적 관객 수는 7만 8483명을 기록했습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생애 최초 뮤지컬 영화로 많은 화제를 받았습니다. 또한 최고의 안무가,
최고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 최고의 제작진들이 영화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게다가 30,000 : 1의 경쟁률을 뚫고 배우로 참여한 '레이첼 지글러'의 환상적인 연기와 가창력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입니다.
다소 흥행 성적은 아쉬운 결과를 보이고 있는데요. 제79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3관왕을 석권한 작품이고, 아직 개봉 1주도 안됐기 때문에 앞으로의 박스오피스 순위가 상승할 수 있을지 기대해보겠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 북미 박스오피스 1위는 11년만에 다시 돌아온 <스크림>시리즈의 새 영화 <스크림>이 차지했습니다.
주말동안(14~16일) 북미기준 $30,600,000 (한화 약 394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습니다.
이 기록은 역대 프랜차이즈 <스크림> 시리즈 중에서 최고 스코어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평단에서는 故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유산을 훌륭하게 계승함과 동시에 신선한 재미와 반전까지 두루 갖춘
양질의 오락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영화로 평가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국내에도 1월 개봉을 확정지은만큼 곧 만나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크림>은 "우즈보로의 첫 번째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25년이 지난 뒤, 새로운 살인마가 나타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TOP 7> (2022년 1월 14일 ~ 2022년 1월 16일)
1. <스크림> 3060만 달러
2.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2080만 달러 (누적 6억 9872만 달러)
3. <씽2게더> 827만 달러 (누적 1억 1935만 달러)
4. <355> 234만 달러 (누적 841만 달러)
5.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231만 달러 (누적 2868만 달러)
6. <벨> 164만 달러
7. <아메리칸 언더독> 160만 달러 (누적 2106만 달러)
이번 주 박스오피스 분석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다음주에도 더욱 더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안녕~~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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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왕비의 삶, 보통 여성의 삶 <코르사주>
영화의 제목과 같이 주인공인 엘리자베트는 국가를 대표하는 ‘얼굴’이 역할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지성과 신체력은 ‘여성'이라는 미명하에 국가라는 옷에 달린 왕비라는 코르사주가 되어버린다. 왕비라는 신분은 구속이나 억압 없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엘리자베트는 영화 초반부터 흉부를 꽉 조이는 코르셋 때문에 호흡곤란으로 귀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기절한다. 지난 역사 속 여왕의 이야기를 보고 있지만 보통 여성의 삶과는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여왕이 자신의 코르셋을 조이는 하녀에게 ‘더 조여'라며 엘리자베트가 겪었을 숨 막히는 삶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비극적인 삶에도 희로애락은 있다. 작고 소소한 일상이 공유될 때 그 사람의 미소와 눈물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솔직한 욕망이 드러날 때 우리는 주인공에게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덕분에 한 여왕의 일대기가 아닌 한 여성의 삶을 공유하는 영화로 다가온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화의 결말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현실성 있는 삶이기에, 죽음만큼은 자유로웠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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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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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권태 속에서 만난 그들만의 이끌림, "스프링 블라썸"
10대와 30대의 만남,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이 차는 꽤 나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서로 간의 공통점이 많은 둘.
이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인 건가?
10대인 '수잔'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그 끝에는 항상 수잔 혼자만이 홀로 남아있다.
수잔이 원해서 일부러 또래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장담할 순 없겠지만
수잔은 자신이 또래 친구들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하루, 수잔은 또래 친구들처럼 파티에도 참석하여 그들만의 어울림에 끼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잘 맞지 않은지 어영부영 끝나고
집 가는 길에도 친구들과 같이 가기는 커녕 혼자 따로 떨어져 간다.
그렇게 수잔은 또래 친구들과 조금씩 멀어져 간다.
일상생활, 학교생활 모두에 지친 수잔은 매일 이 거리를 드나드는데,
그곳에서 한 남자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수잔은 한 순간 그에게 빠져 그의 주위를 맴도는데..
'라파엘'은 수잔이 매일같이 드나드는 거리에 있는 한 극장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배우로,
몇 년째 똑같은 대사, 똑같은 연기만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는 자신에게 매우 지쳐있는 인물이다.
이 둘 사이를 자세히 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서로 같은 점이 있어서인지 둘은 서로를 알아보고 눈이 맞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수잔'과 '라파엘'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우선 수잔은 항상 똑같은 일상에 지쳐있는 인물이다.
여자 친구들, 남자 친구들, 선생님, 저 자신까지도.
그 모두에게 다 지쳐있어 지루하기만 한 하루를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학교 생활, 일상 생활이 모두 즐겁지 않을 수밖에.
라파엘 역시 매번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에 심히 지쳐있는 상태인데,
연극이 행복하냐, 연극을 즐기고 있냐는 수잔의 물음에 무섭다고 답할 정도로 라파엘은 연기하는 법을 잊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이 점에서 봤을 때, 수잔과 라파엘은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일상에 지쳐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을 가진다.
즉, 이 둘 모두 삶의 권태기를 맞이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수잔과 라파엘 모두 자신이 속해있는 곳에서 소속감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잔을 보면 친구들이 말을 걸거나 학교생활 관련하여 물어볼 때 일부러 회피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도 수잔이 먼저 거절하기 일쑤이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역시 처음엔 다가오다가도 나중에는 수잔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듯 수잔은 자신이 속해있는 곳에 자신이 원해서 소속감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라파엘도 마찬가지이다. 연극이 끝난 후 회식 자리를 가지려고 하면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한다.
회식할 거냐는 물음에 '아니'라는 대답만 내놓기 일쑤였다.
수잔과 함께 있을 때도 동료들이 회식할 거냐는 물음에 예의상 간다고만 하지, 실제로는 가지 않는다.
이렇듯 라파엘 역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즉, 소속감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수잔과 라파엘은 각자 자신의 나이대에 맞는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않고
자신과는 다른 나이대에 더욱더 관심을 가지는 듯 싶기도 하다.
그렇게 10대인 수잔과 30대인 라파엘이 만나는 횟수가 잦아들면서 가까워지게 되고,
아침 일찍 만나 밥까지 같이 먹게 되는 등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데..
아침 일찍 만나 같이 밥을 먹게 된 그날, 라파엘은 수잔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연극의 서곡에 흘러나오는 오페라 곡을 들려준다.
이 오페라 곡을 들으면서 둘은 서로 짜지 않았는데도 음악에 몸을 맡긴 채 같은 동작을 취하며 춤을 추게 되는데,
이 곡이 어쩌면 두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라파엘이 좋아하는 오페라 곡은 영화에서 총 두 번 나오는데,
그 중 첫 번째로 들었을 때는 서로의 호감 정도를 표시하며 확인하는 의미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뒤이어 또 한 번의 오페라 곡이 나오는데, 두 번째로 나왔을 때는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졌다는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오페라 곡을 통해 처음에 표현했던 동작이나 움직임들이 두 번째로 표현했을 때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움직임이 느껴졌으니까.
처음에는 두 사람의 호감을 표시했다면, 두 번째에는 두 사람의 깊어진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달까.
영화를 보다 보면 아무래도 10대와 30대와의 사랑이다보니 그 차이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사탕'과 '담배'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수잔과 라파엘은 한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게 되는데
라파엘은 담배를, 수잔은 라파엘의 첫 선물로 사탕을 사게 된다.
담배는 10대인 수잔이 살 수 없는 영역이자 10대와는 좀 거리가 있어보이는 소재이고,
사탕도 취향이다보니 확답을 지을 순 없지만 30대보다는 10대를 나타내는 데에 더 가까워보이는 소재라고 느껴진다.
두 사람이 상점에서 산 물건을 봤을 때 10대와 30대의 간극과 사랑이 동시에 확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탕과 담배외에도 또 다른 소재로도 10대와 30대간의 간극이 느껴지는 소재가 있는데,
그건 바로 '석류 레몬에이드'와 '맥주'이다.
라파엘은 맥주를, 수잔은 석류 레몬에이드를 시키는 장면에서 그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맥주는 아직 수잔이 먹기에는 어린 나이에 해당되고 보통 어른들이 주로 마시므로 성인에 해당되고,
석류 레몬에이드는 그에 반대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아 10대와 30대 간의 간극이 잘 보여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10대와 30대와의 만남..?
솔직히 약간 꺼려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당혹스러운 면도 있었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만남을 보면 처음부터 색안경 끼듯이 편견을 안고 바라봤던 것 같다.
하지만, '스프링 블라썸'을 보면서는 나이차가 무색하게도 서로간의 어떠한 공통점이 있어 마음이 잘 맞는다면 이것 또한 사랑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는 나이가 없구나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서로를 향한 이끌림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을.
그 순간 과거, 편견을 안고 봤던 나 자신이 좀 부끄러워졌다.
나이대가 비슷해야 그래도 좀 더 잘 맞을 거라는 나의 편견..
또한 영화 안에서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등과 같은 장치가 없는데, 이렇듯 오리지널 감성으로 사랑에 대한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해 주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깊은 듯 싶다.
덕분에 옛날 감성의 느낌으로 사랑에 대해 집중해서 본 느낌이랄까. 오히려 그 둘만의 관계에 더 집중해서 보게 된 가장 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프링 블라썸'에 대한 나의 평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둘을 보고 있으면 괜히 나의 봄날도 기다려지고, 사랑에 나이차는 무색하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가장 눈여겨 봤던 점! 1. 오페라 곡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2. 10대와 30대의 만남을 나타내주는 소재가 있을까.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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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을 열어보니 너무나 평범하고 예측가능한 액션 영화였습니다.
특히나 세 캐릭터 모두 그걸 맡은 배우들의 다른 캐릭터들을 떠올리게 하는 캐스팅이어서,
영화를 보다 보면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영화 레드 노티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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