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까2022-08-12 22:27:24
[JIMFF 데일리] 달지만은 않은 시나몬 사탕 같은 멜로 영화, 그리고 음악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영화와음악 섹션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Cast
감독: 박찬욱
출연: 박해일, 탕웨이
Synopsis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을 맡게 된 형사 ‘해준’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와 마주하게 된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서래’. 경찰은 보통의 유가족과는 다른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리고 탐문하기 시작하는데, ‘해준’은 ‘서래’를 알아가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 (출처: 제천국제음악영화제)
Review
<헤어질 결심> N차 관람 열풍을 일으킨 ‘헤결사’를 아시나요? 이 자리에서 당당히 고백하겠습니다. 제가 바로 그 ‘헤결사' 중 한 명이랍니다. <헤어질 결심>은 아름다운 각본으로 잊을 수 없는 명대사를 한 움큼 만들어내고, 섬세한 연출로 2022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의 영예를 얻은 멜로 영화입니다. 마침내 미결로 남은 ‘해준'과 ‘서래'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많은 ‘헤결사'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죠.
하지만 <헤어질 결심>에 음악이 없었더라면, 마냥 달지만은 않은 시나몬 사탕 같은 박찬욱 표 멜로 영화는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작품의 음악은 국내 영화 음악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조영욱 음악 감독이 맡았는데요.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올해의 큐레이터'로 선정된 조영욱 음악 감독을 기념하며, 그가 “내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독특한 작품”이라고 밝힌 <헤어질 결심>의 영화 음악을 파고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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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의 영화 음악에는 OOO가 없다
때때로 배우의 연기와 현장 소리만으로 채워진 영화를 보다 보면, 내심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쯤 ‘쿠구궁…’ 할 때가 됐는데…” 이처럼 음악은 영상 중심의 시각 매체인 영화에 깊이를 더하는 요소입니다. 영화와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 사이와도 같죠. 서로의 옆집에 산다는 박찬욱 감독과 조영욱 음악 감독처럼 말입니다. 조영욱 음악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의 작품을 박찬욱 감독과 함께 완성했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한 번쯤 본 듯한 소재들로 만들어졌으나, 이상하게도 한없이 낯설고 새로운 영화입니다. 그리고 음악은 이 영화를 낯설게 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죠. 조영욱 음악 감독은 멜로 영화가 음악을 사용하는 전형적인 패턴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일반적으로 멜로나 로맨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감정이 피어오를 때, 설레는 느낌을 자아내는 감미로운 음악을 사용합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그릴 때는 밝고 경쾌한 음악을, 두 사람의 갈등이 심화할 때는 축 가라앉은 음악을 쓰고요. 멜로 영화답게 <헤어질 결심>에도 감정이 피어오르고, 사랑에 빠지고, 갈등이 심화하는 장면이 모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음악들’은 찾아볼 수 없죠.
“멜로드라마지만 감정을 배제한 음악이 이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공들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스토리 강화에 역점을 두기보다는 두 인물 간에 오가는 분위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조영욱 음악 감독, <헤어질 결심> 프로그램 노트
그의 말처럼 <헤어질 결심>의 음악에는 감정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멜로디 라인이 거의 없죠. 대신 같은 음을 반복해 내는 타악기의 소리가 인상적입니다. 영화에서 긴장감을 조성할 때 주로 쓰는 반복적인 사운드가 ‘해준'과 ‘서래'의 사랑 주변을 맴돕니다. 둘의 사랑이 커지는 와중에도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온갖 요소들을 절로 떠올리게 하죠. “<헤어질 결심>의 영화 음악에는 OOO가 없다”, 정답은 ‘멜로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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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교향곡 ‘아다지에토’와 정훈희의 ‘안개’
멜로디가 거의 없는 음악들로 채워진 작품이기에 오히려 몇 없는 멜로디가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아마도 관객의 뇌리에는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와 가수 정훈희의 ‘안개'가 깊이 박혀있을 겁니다. ‘아다지에토'는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추천한 음악이자, ‘해준'이 이윽고 붕괴하는 순간에 흘러나온 음악입니다. ‘안개'는 수사를 핑계로 ‘서래'의 집 안을 들여다보는 ‘해준'의 사랑이 저도 모르게 커지는 순간과 ‘서래'의 죽음으로 영원히 종결되지 못할 사랑이 되어버린 순간에 흐르던 음악이죠.
‘기도수'는 집에 청음실을 마련해두고 음악을 즐기는 인물입니다. 영화에서 구태여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박찬욱 사단은 관객들이 이 사실을 놓치지 않도록 장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구성했죠. ‘서래'는 ‘기도수'가 말러의 음악을 추천하며 산을 타는 방법을 소개하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산을 올라 ‘기도수'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기도수'가 청음실에서 음악에 빠져있을 때 유서를 위조합니다. 이러한 디테일로 영화는 더욱더 단단한 서사와 만듦새를 갖춥니다. 조영욱 음악 감독은 여기에 말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친 곡이라는 ‘아다지에토'의 음악적 디테일까지 더했죠. 음악에 비유하자면,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가 한 번에 소리를 낼 때 귀를 즐겁게 하는 풍부한 청음이 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박찬욱 사단의 영화는 작은 디테일도 그냥 만들지 않습니다. 완벽한 음악을 선사하려는 오케스트라의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만드는 박찬욱 사단의 작품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헤결사'는 오늘도 영화속 숨은 디테일을 찾으며, <헤어질 결심>에 반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를 찾아냅니다.
‘안개'는 <헤어질 결심>의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고려한 음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수 송창식에게 듀엣곡으로 녹음해주기를 간청했다는 일화도 유명하죠. ‘안개'는 이별 후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이 그리운 마음을 애써 억누른다는 내용의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언제나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뿌연 안개가 낀 이포에서 안개처럼 존재했다가 그렇게 사라져버린 ‘서래'를 그리며 살아갈 ‘해준’의 심정을 반영한 노래 ‘안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엔딩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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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사단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진 않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를 만듭니다. 아주 사소한 의문도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설계하고 다듬어 영화를 세상에 선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를 ‘변태 같다'는 말로 가볍게 표현하곤 하지만요. 제겐 박찬욱 사단의 영화가 나만 알고 싶은 맛집과도 같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원히 나만 알고 싶을 만큼 소중한 그런 영화 말이죠.
조영욱 음악 감독은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위해 선정한 영화 중 한 편인 <겟 카터 1971>의 상영이 끝나면,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관객과의 만남을 가질 예정입니다. <헤어질 결심>의 영화 음악이 인상적이었다면, 제천에서 조영욱 음악 감독을 직접 만나보세요.
Schedule in JIMFF
<헤어질 결심> 2022.08.14(일) 메가박스 제천 1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