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3-03-31 21:20:45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이란?
<장기자랑> 영화 시사회 후기
시놉시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원고 250명의 학생들을 포함해서 305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로 기적적으로 구조된 단원고 학생들과 희생자 부모들은 큰 트라우마를 겪는다. 김태현 무대 감독은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을 창설하고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세월호 침몰 사건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중에 자체 지원한 희생자 부모들인 수인 엄마,애진 엄마,예진 엄마,영만 엄마,동수 엄마,순범 엄마,윤민 엄마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장기자랑이라는 연극을 통해 승화시키는데...
자식들을 사고로 잃은 슬픔을 유가족들은 차마 말하지 못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간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이 유쾌한 연극을 통해 트라우마를 이겨내보려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준다. 자식을 잃고도 자신의 일에 전진하며 살아가는 부모도 있고 잊지 못해 유품을 정리하지 못한 가족도 나온다.
장기자랑이라는 연극은 단원고 학생들이 세월호를 타기 전에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신 그 역할을 유가족 부모들이 하고 있는데 그중에 중도 포기하는 유가족 부모들도 있었다. 사실은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그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기 싫어할 테고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원하지 않는 엄마들도 있었기에 그 빈자리를 전문 배우들을 섭외시켜 메꾸었다고 한다.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은 각 지방으로 돌아가면서 연극을 시작했으며 자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 도착하지 못한 제주도까지 가서 간담회도 했다. 또한 후반부에서는 울컥한 마음으로 2021년 단원고에서 연극을 한다. 그전에 단원고에서 추모 팀으로 연극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교장과 교감 선생님의 반대로 무산됐다. 마지막으로 유가족 엄마들이 연극을 끝내면서 우는 모습을 보니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 사고 앞에서 인명 피해가 났을 때 희생자들의 가족이 안게 되는 고통과 상실감은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장기자랑을 통해 알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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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히림의 전쟁 | '반지의 제왕'이라서 눈감는 안일함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주로서의 삶을 답답해하며 전사가 되고 싶어 하는 로한의 공주 '헤라'(가이아 와이즈). 어느 날, 그녀는 소꿈친구이자 웨스트마크 영주 '프레카'(숀 둘리)의 아들 '울프'(루크 파스콸리노)의 구혼을 받는다. 그러나 곤도르와 혼약을 맺은 로한의 왕 '헬름'(브라이언 콕스)도, 연심이 없었던 헤라도 구혼을 일언지하로 거절한다. 헬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낀 프레카는 결투를 청하고, 헬름은 결투 중 예기치 못하게 프레카를 죽이고 만다.
이에 격분하며 복수를 다짐하며 자취를 감췄던 울프. 그는 수년 뒤 로한의 적인 던랜드인을 이끌고 나타나 로한의 수도 에도라스를 습격한다. 헬름과 두 아들 ‘할레스’(벤자민 웨인라이트)와 ‘하마’(야즈단 카푸리)는 기마대 로히림과 함께 전투에 나서지만, 내부의 배신이 겹치면서 대패한다. 두 왕자를 모두 잃은 헬름과 헤라는 울프의 군세에 밀려 나팔 산성에 그대로 고립되고,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방도를 찾기 시작한다.
높고도 험한 <반지의 제왕>이라는 벽
영화팬들 사이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도는 말이 있다. 20년 전 <반지의 제왕> 포스터가 과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팩트였더라. 아직까지도 '21세기 최고의 판타지 영화'라는 마케팅 문구는 <반지의 제왕> 몫이기 때문. 피터 잭슨 본인이 만든 <호빗> 삼부작도, 아마존 프라임이 심혈을 기울인 <힘의 반지> 드라마도 10억 달러 흥행과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동시에 달성한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는 비견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판타지 영화 팬들은 <반지의 제왕>을 늘 그리워한다. 이 시리즈를 처음 본 전율을 언제 다시 느껴볼까 궁금해하면서. 이는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이하 <로히림의 전쟁>)이 낯선 외양에도 불구하고 특히 궁금한 이유였다. '반지 전쟁' 250여 년 전 로한의 왕 헬름과 그의 딸 헤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피터 잭슨과 앤디 서키스가 제작할 영화 <반지의 제왕: 골룸 사냥>에 앞서서 팬들을 가운데땅으로 초청했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약 한 달 늦게 공개된 결과물은 다소 실망스럽다. 원작에서는 이름조차 없었던 주인공 '헤라'의 서사는 평범하고, 그녀의 활약상을 보각한 각색은 부자연스럽다. 카미야마 켄지가 맡은 애니메이션 작화도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판타지와 <반지의 제왕>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로히림의 전쟁>을 싫어할 수 없다. 곳곳에 삽입된 <반지의 제왕>과의 연결고리를 찾다 보면 아쉬움이 절로 잊히기 때문이다.
에오윈을 넘지 못한 헤라
<로히림의 전쟁>의 성패는 헤라에게 달려 있었다. 애초에 원작에 없는 인물의 재조명이 기획 의도니까. 그런데 정작 헤라는 새로울 게 없다. 그녀는 공주로서의 삶을 답답해하며 전사가 되길 꿈꾼다. 공주로 태어났기에 다른 왕족과의 혼인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헤라는 모든 구혼을 거절한다. 대신 그저 말을 달리며 모험을 떠나는 삶을 꿈꾼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주 접한 말괄량이 공주가 바로 헤라다.
문제는 헤라와 똑같은 캐릭터가 이미 20년 전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등장했다는 것. 로한 제2왕조의 마지막 왕인 세오덴의 조카딸이자, 제3왕조의 첫 번째 왕 에오메르의 동생인 '에오윈'(미란다 오토)이 주인공이다. <로히림의 전쟁>에서 내레이션도 맡은 그녀는 전투에 나선 남자들을 기다리기만 하는 처지를 답답해하며 남몰래 무술을 연마했다. 심지어 왕명을 어긴 채 '펠레노르 평원의 전투'에 나서서 마술사왕까지 죽였다.
그런데 두 캐릭터가 겹쳐 보일수록 헤라는 에오윈에 비해 매력이 부족하다. 에오윈과 달리 헤라는 완성형 캐릭터이기 때문. 에오윈은 공주에서 전사로 변모해 가는 인물이었고, 관객도 그녀의 좌절과 성장을 함께 겪으면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헤라는 이미 완성된 전사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그녀의 감정선에 이입하기 어렵고, 그저 활약상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 헤라에게서 에오윈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는 이유다.
<반지의 제왕 2> 다시 보기
그 결과 <로히림의 전쟁>에서는 프리퀄 겸 스핀오프만의 매력이 돋보이지 않는다. 사실 영화가 다루는 사건 자체의 한계가 명확하다. 사건의 전개나 세부적인 전투 양상이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이하 <반지의 제왕 2>을 반복하기 때문. 아이센가드의 적, 수적 열세 상황에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는 주인공, 그 순간 헬름 협곡 위에서 등장하는 로히림 등.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적군이 오크가 아닌 인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헤라는 이처럼 <반지의 제왕 2>의 반복에 불과한 이야기에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원작 소설은 그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으니까. 그저 헬름에게 딸이 있었고, 그녀를 향한 울프의 구혼을 거절했다는 내용만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라를 어떤 캐릭터로 묘사하고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붙여주느냐에 따라 <로히림의 전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극 중 헤라는 기존 캐릭터들의 조각모음에 불과하다. 그녀는 그저 세오덴처럼 농성하고, 아라고른처럼 최후의 돌격을 결심하고, 레골라스처럼 숱한 적군을 무찌르고, 간달프처럼 지원군을 끌고 온다. 기존에 못 본 역할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여러 캐릭터가 맡았던 역할을 혼자 해낼 뿐이다. 결국 <로히림의 전쟁>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반지의 제왕 2>를 일본풍 애니메이션으로 그린 것에 불과해 보인다.
실수는 반복된다
오히려 헤라의 존재가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는 구간도 적지 않다. 기존 서사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헤라의 활약상을 부각하려다가 전개가 꼬이기 시작한다.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헤라의 활약상을 덧댄 흔적이 가려지지 않은 셈이다. 이는 <호빗> 3부작에서 소설에 없던 오리지널 캐릭터, '타우리엘'이 중심이 된 로맨스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의 흐름이 끊겼던 문제점과도 유사하다.
특히 헤라가 등장할 때마다 전투 시퀀스의 흐름이 꼬이는 경우가 잦다. 아이센 여울목에서 펼쳐진 전투와 수도 에도라스의 함락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시퀀스에서는 크게 세 주체가 등장한다. 헬름과 군대는 전투를 펼치고, 울프와 그의 본대는 헬름의 군을 우회해 수도 에도라스로 진격하고, 헤라는 울프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대피시키며 수도를 방어한다.
그런데 전투가 진행될수록, 특히 헤라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시점부터 세 주체의 행적은 꼬이기 시작한다. 분명 여울목에서 부왕 옆에서 전투 중이었던 헬라스가 에도라스로 먼저 진군한 울프를 갑자기 앞지르는 식이다. 본편에서 엘프인 레골라스가 간신히 대적한 무마킬을 헤라가 혼자 죽이는 과장된 묘사도 시리즈의 일관성을 저해한다. 헬름 협곡에서 헤라와 그녀의 시녀 올윈이 숱한 적군을 대적하는 전개도 같은 맥락에서 의아하다.
프리퀄을 지탱하는 각색과 작화
안일하게 전편의 영광에 기댄 것 같은 헤라 캐릭터의 만듦새는 군데군데 몰입도를 높인 장점과 대조되기에 더욱 아쉽다. 각색한 울프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원작에서 그는 아버지를 죽인 헬름을 향한 복수심 때문에 로한을 침략한다. 반면에 영화는 울프의 동기를 더 구체화한다. 그가 헤라에게 품은 연심이 집착으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덕분에 승전하기 직전 그가 헤라를 놓지 못해서 패배하는 전개도 그저 허망하지는 않다.
헬름의 아들 하마의 최후를 변경한 각색도 인상적이다. 원작에 그는 나팔 산성 앞에 주둔한 울프의 군대를 기습하다가 사망한 반면, 영화에서는 울프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헬름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한다. 이는 헬름의 좌절감, 광증, 복수심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 헬름 협곡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이유를 알려주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처럼 <로히림의 전쟁>은 원작이 간략히 다룬 감성적인 측면을 깊이 파고든다.
각색 외에는 작화가 놀랍다. 카미야마 켄지가 본래 배경을 그리는 미술 스태프 출신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경에서 보여주는 가운데땅 풍경은 그림인지 실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밀하다. 일례로 오프닝의 경우 평원에서 말을 타는 헤라와 그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순간적으로 실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시를 유발한다. 나팔 산성의 전경을 비추는 순간도 실사 영화 부럽지 않은 장엄함이 느껴진다.
다만 전투 시퀀스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로히림의 전쟁'이라는 부제만 보면 실사영화 속 로한의 기병대의 웅장한 돌격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림만으로 실사영화 수준의 장대한 전투 시퀀스를 보여주기에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나마 보름달을 배경으로 프레알라프가 이끌고 온 지원군이 울프의 군대를 공격하는 장면만큼은 명장면으로 뽑기에 손색없다.
가운데땅은 여전히 반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히림의 전쟁>에는 <반지의 제왕> 팬이라면 아쉬운 대목이 눈에 밟혀도 모른 척 넘어가 줄 수밖에 없는 포인트가 적지 않다. 사루만의 재등장 때는 작고한 크리스토퍼 리가 <호빗> 촬영 당시 더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헤라가 반지만 찾는 모르도르의 오크들을 만나고, 그 순간을 궁금해하는 간달프와 헤라가 연락을 취하는 대목 또한 '반지 전쟁'과의 연결고리를 암시하기에 흥미롭다.
전반적으로는 <호빗: 다섯 군대 전투>와 유사하다. <반지의 제왕>에 못 미치는 완성도가 아쉽지만, 아라고른과 레골라스의 우정을 암시하는 대목이나 노년의 빌보 배긴스를 연기한 이안 홈이 출연한 순간에 결국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사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뉴라인 시네마 로고가 등장하고 로한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올 때부터 예견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Acceptable 무난함
'반지의 제왕' 향이 소량 첨가된 판타지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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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KY 데일리] 초능력, 그 알록달록한 비밀 공간
제20회 BIKY 기획기사 [초능력이 생겼어요!]
<초능력이 생겼어요!>
감독/ 안드라 도르스, 마르타 셀레츠카
국가/ Latvia
제작년도/ 2024
시놉시스/
스케이트보드 사고로 초능력을 얻은 13살 휴고는 학교 최고 인기인이 됩니다. 갑작스러운 인기에 들뜬 휴고는 단짝 친구 톰과의 우정이 소원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인기를 유지할 것인지, 오랜 우정을 지킬 것인지 고민에 빠진 휴고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놓입니다. 초능력으로 얻은 인기와 진정한 우정 사이에서 소년 휴고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초능력! 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어떤 능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의 세상에서 나타난 ‘초능력’이 극을 어떻게 끌어갈지 매우 기대되었다. 무릇 틀에 박힌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훨씬 자유롭고 다이나믹하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초능력이 생겼어요!>는 주인공 ‘휴고‘를 둘러싼 학교 안과 밖의 사건들을 해결하는 중심에 초능력을 등장시켜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키는 듯 보이다가 말끔히 해결하는 작품이다. 어릴적 자주 읽던 청소년 소설이나 동화 같은 느낌도 물씬 난다.
어른의 시선에서는 이렇다 할 스토리나 관통하는 핵심 사건은 없다. 어린 시절의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 장기자랑에 누가 누구와 나갈 것인가, 전학생과 친해지느냐 마느냐, 보드를 누가 더 잘 타냐 하는 시시콜콜한 경쟁들 뿐이다. 어린 주인공들 사이에서는 긴장이 감돌지만, 평화롭고 장난기 넘치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효과음과 노래 또한 상당히 과장되고 장난스럽다. 군중이 나오는 학교 씬들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여 키치한 분위기를 만든다. 라트비아의 한 학교와 마을을 직접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초능력을 표현한다는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이미지 또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cg로 나의 눈을 이끌었다. 휴고의 초능력은 부상 당한 코 부분의 엑스레이를 찍으려다가 게임기에 전기가 통해서 생겼기 때문에, 능력을 쓰려고 집중하는 순간 코 부근에 전기 잔상처럼 푸른빛이 일렁이는 표현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동심을 간질였던 장면은 ‘블랙홀’이라 칭하던 학교 내 공간에 변기가 생겼고, 그 구멍이 정말 또 다른 세계인 것처럼 만화적으로 표현되는 씬이었다. 누군가 떨어트린 물건들이 형형색색 모여 있고, 미니어쳐의 세상 같기도 한, 알록달록한 비밀 공간만의 세계가 귀엽고도 나 또한 환상 속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듯한 감각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할로윈 코스튬에서나 쓸 법한 마법사 모자를 쓰고 있던 정체불명의 아이가 실제 마법사로 카메오처럼 나오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다. 휴고의 능력이 유명해지면서 교내 장기자랑 수상이 유력해지자, 다급하게 ‘초능력자 금지’ 조항이 생긴 걸 보고 마법사가 좌절하며 와르르 쌓인 이모티콘으로 변하는 컨셉추얼한 장면이 굉장히 깜찍했다.
단체 관객들과 함께 보았기 때문에 더 의미 있었다. 모두 어린 학생들이었는데, 극적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솔직하게 반응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주인공이 아끼던 게임기가 변기에 빠질 때, ‘어, 어! 게임기!’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들. 그리고 엔딩에서 다시금 전봇대에 부딪치는 주인공을 보며 ‘또?!’라며 놀라고 답답해 하는 목소리들. 꾸며진 스토리보다 그 속의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에 즉각적으로 공감해줄 줄 아는 이들을 위한 영화 같았다. 여러 방면으로, <초능력이 생겼어요!>는 더더욱 BIKY스러운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상영 일정
2025.07.12(토) 13:00 하늘연극장
2025.07.17(목) 10:00 사하구청 대강당
BIKY 2025. 07. 08. (화) ~ 2025. 07. 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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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우주 신파극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9년, 대한민국의 달 탐사선 '우리호'가 달로 향한다. 5년 전 발사 직후 폭발한 '나래호'와 달리 무사히 달 궤도로 향하는 듯 보였던 우리호. 그러나 이내 태양 흑점 폭발로 인한 태양풍이 우리호를 덮치고, 이 사고로 인해 3명의 우주비행사 중 ‘황선우’(도경수) 대원 혼자 생존한다.
달 착륙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대신 유일한 생존자를 귀환시키로 결정한 정부는 5년 전 나래호 사고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전임 센터장 ‘김재국’(설경구)을 프로젝트에 재합류시킨다. 하지만 태양풍에 이어 유성우가 달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재국은 혼자 귀환 작전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이에 그는 NASA 유인 달 궤도선 메인 디렉터이자 전 아내인 ‘윤문영’(김희애)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며 모든 것을 건 작전에 나선다.
한국의 마이클 베이?
김용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다 보면 떠오르는 감독이 있다. 마이클 베이다. 두 감독은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 상업적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용화 감독은 5명밖에 없는 쌍 천만 한국 감독이다. 마이클 베이도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비롯해 <아마겟돈>과 <진주만> 등으로 세계적인 흥행을 일궈냈다.
작품 내적인 특징도 비슷하다. 시각적으로 화려하다. 김용화 감독의 기술적 성취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설립한 텍스터 스튜디오는 <신과 함께> 시리즈를 비롯해 <백두산> 등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선보였다. 마이클 베이도 사실적인 촬영과 CG를 결합해 2시간 넘도록 스크린에 집중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든다.
단점도 같다. 내실이 부족하다. 김용화 감독의 작품은 늘 한국 특유의 신파극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마이블 베이 역시 각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액션과 스펙터클을 막무가내로 보여준다. 난장판을 뜻하는 단어 'Mayhem'과 그의 이름 'Bay'를 합친 'Bayhem'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다.
투입된 제작비만 280억 원에 달하는 김용화 감독의 신작 <더 문>은 그가 왜 '한국의 마이클 베이'인지를 증명한다. 한국 영화 최초로 달 탐사를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제작비 대비 놀라운 시각 효과를 보여주면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신파로 점철된 이야기는 이내 관객의 시선을 놓치고 만다.
눈을 사로잡는 한국 최초 달 탐사
촬영 전 프리 프로덕션 기간만 7개월가량 걸렸다는 말대로 <더 문>의 볼거리는 분명히 인상적이다. 김용화 감독의 장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누리호가 폭발하는 첫 장면을 제외하면 어색한 장면이 거의 없다. 칼날 같은 선이 느껴질 정도로 정교한 질감도 눈에 띈다. 생존이 최우선인 절박한 분위기, 아무도 없는 우주 속 공포와 두려움을 강조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사실 위기감을 고조하는 과정은 매끄럽지 않다. 편의적인 전개가 이어진다. 하필이면 유성우가 쏟아질 타이밍에 탐사선을 띄우고, 굳이 주인공을 우주선 가운데에 결박시켜서 상황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식이다. 하지만 일단 위기가 생기면, 기술력을 앞세워 그 상황에 몰입하게 하는 힘은 좋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스토리는 어색해도 변신 로봇의 액션을 보며 눈이 즐거워하듯이. 유성우를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영화가 떠오르기는 해도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시퀀스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기시감이 느껴진다. 재난의 시작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를, 유성우를 피하는 장면은 브래드 피트 주연의 <애드 아스트라>를 닮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도 마지막 탈출 시퀀스에서 스쳐 지나간다. 다만 '첫 시도'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레퍼런스처럼 보이기는 한다. 각 시퀀스의 구성은 좋기 때문이다. 상황 자체에 빠져들면 이 영화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신파가 아니라 방법이 문제다
하지만 <더 문>은 김용화 감독의 예상가능한 단점도 고스란히 지녔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탈출극이 아니라 SF 탈출극을 배경 삼아 신파극을 찍은 듯한 인상이다. 물론 약간의 변주는 있다. 익숙한 방식과 새로운 방식을 섞었다. 문제는 둘 다 부자연스럽다는 것. 신파를 활용하는 맥락은 여전히 억지스럽다. 즉, 신파를 넣은 게 문제가 아니라, 신파를 제대로 못 써서 문제다.
우선 <더 문>은 또 한 번 '가족애'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황선우의 아버지, '황규태'(이성민)를 중심으로 두 주인공을 엮는다. 5년 전 나로호 폭발 사고 이후 자살한 황규태. 죽음의 이유를 두고 황선우와 김재국은 서로 다른 진실을 숨기고 있다. 영화는 이처럼 애절한 부자 관계와 죄책감 가득한 우정을 충돌시키며 관객을 울리려 한다. 실제로 5년 간 감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눈물을 안 흘리기도 쉽지 않다.
문제는 감동을 주기 위해 굳이 이해할 수 없는 전개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작중 진상은 이렇다. 나래호 프로젝트에는 결함이 있었다. 이에 황규태는 재국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재국은 나래호 발사를 강행했다. 달 착륙 프로젝트가 연기될까 봐 두렵다는 이유로. 그 결과 로켓은 폭발했고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책임을 졌다. 한 명은 죽음으로. 다른 한 명은 잠적으로.
이러한 전개는 지나치게 편의적이다. 챌린저호 폭발 사고처럼 작은 결함 하나가 로켓 발사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장 5월에는 누리호 3차 발사도 연기된 바 있다. 발사 예정일 당일에 발견된 소프트웨어 결함 때문에. 즉, 눈물이라는 목표 때문에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현실적인 맥락을 일부러 외면한 셈이다. 그 결과 가슴 절절해야 할 가족애와 우정은 억지로 돌변하고 만다.
인류애라는 무리수
<더 문>의 또 다른 카드는 가족애와 우정을 넘어서는 '인류애'다. 황선우가 조난당했을 때, 미국 정부는 쉽사리 도움 요청에 응답하지 않는다. 우주 개발을 둘러싼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NASA 내부의 알력 싸움 때문에. 이에 영화는 황선우를 구해 달라고 인류애의 가치에 호소한다. 의도는 좋다. 발상과 아이디어도 그럴싸하다. 우주 개발 역사를 보면 경쟁 관계였던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협력한 사례도 여럿 찾을 수 있다.
이 또한 풀어내는 방식이 문제다. 인류애라는 감정에 호소하려면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근거를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더 문>은 지나치게 특수한 근거만 내세운다. NASA에서 유인 달 궤도선 '루나 게이트웨이'를 책임지는 메인 디렉터, 윤문영이 대표적이다. 그녀는 루나 게이트웨이에서 임무 수행 중인 우주 비행사에게 황선우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 모두 지구인이 아니라 우주인이라면서.
하지만 그녀의 말은 캐릭터의 배경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녀는 한국계 혹은 한국 국적이고, 김재국과 이혼한 전력이 있다. 그런 그녀가 NASA와 미국 정부의 지시를 무시한 채 한국인 우주 비행사를 구해달라고 호소한다. 말과 달리 혈연과 정에 기댄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스토리텔링에서 정작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빼지 않은 셈이다.
설득을 하는 대상도 인류애라는 키워드에 적합한지 의문이 남는다. 윤문영도, 한국 정부도 한국의 우방국이자 철저히 제1세계에 속한 국가에게만 도움을 요청한다. 루나 게이트웨이에 있는 우주 비행사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출신이다.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우주 개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인류애를 강조하려는 시도라기에는 다소 얄팍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첫 술에 배부르겠냐만은...
부적절한 신파 활용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신파의 비중이 크다 보니 달에서 고생하는 황선우보다 김재국과 윤문영의 이야기의 비중과 분량이 더 크다. 영화의 초점이 달이 아닌 지구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정작 신파는 공감대가 약하다. 설득력도 없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초점은 불명확해진다. 달에서의 위기가 지구의 상황과 겹쳐질 때 오히려 영화적 긴장감은 사라진다. 결국 <더 문>이라는 제목 자체가 어색해진다.
신파 때문에 희생당한 지점도 있다. 더 파고들 여지가 있는 대목을 전형적인 한국 영화답게 단순한 유머로 짚고 넘어가는 식이다. 비전문가 장관과 전문가 차관 및 센터장의 대립, 그로 인한 혼란과 오류 등은 충분히 드라마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갈등이다. 하지만 <더 문>은 조한철 배우의 이미지에 기대 손쉽게 해당 문제를 다루고 넘어간다.
이러한 완성도는 <더 문>의 흥행이 물음표인 이유이기도 하다. 팬데믹 이전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사실 <더 문>은 무조건 흥행해야 하는 영화다. 제작비, 개봉 규모, 감독과 배우의 이름값, 배급사(CJ) 파워를 고려했을 때 실패할 수 없는 작품에 가깝다. 한국 최초의 달 착륙이라는 소재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근래 한국 관객은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하면, 영화값에 상응하는 재미를 보장하지 못하면 과감하게 영화를 포기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산: 용의 출현>과 <헌트>만 생존한 작년 여름 시장이 이를 방증한다. 안타깝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1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첫날 관객 수를 보면 <더 문>이 2023년 여름 시장의 첫 희생자가 되어도 이상하지는 않아 보인다.
Poor 형편없음
언제까지 첫 발자국이라고 박수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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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름한 펍에서 피어난 연대의 용기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의 특효약은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집, 카페, 도서관, 기차 안, 공원 벤치, 친구 집...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들과 머무르느냐에 따라 감각과 생각은 각기 다르게 작동합니다. 그렇게 모든 공간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는 자연스러운 믿음이 생겼죠.
'이 영화'의 중심에도 특별한 힘이 있는 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다투고, 분개하고, 배척하다가 결국에는 합일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연대의 물꼬가 열리는 이곳의 이름은 바로 '올드 오크(The Old Oak)'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나의 올드 오크>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나의 올드 오크>는 2024년 1월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나의 올드 오크
The Old Oak
어느 날, 시리아 난민들이 영국 북부의 작은 마을로 이송되면서 동네의 분위기가 수선스러워집니다. 마을 어귀의 허름한 펍 ‘올드 오크'에 모인 주민들은 이방인에 대한 반발심을 쏟아내고, 주인장 'TJ'는 따뜻한 맘씨에도 손님을 놓칠세라 한 발짝 떨어져서 관망하기를 택합니다. 그러던 중 한 마을 주민에 의해 아끼던 카메라가 망가진 시리아 소녀 '야라'를 만나고, ‘TJ’는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가게 뒷방의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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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일부 마을 주민들은 동네에 정착한 시리아 난민들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합니다. "망할 외국인", "난민수용소", "거지꼴" 등의 님비(Not In My BackYard) 발언도 서슴지 않습니다. 심지어 '야라'의 가족과 우정을 쌓아가는 'TJ'를 향해 위선적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죠. 그들의 이러한 적개심은 '올드 오크'에서 마구 터져 나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을 전체에 남은 공적 공간이라고는 허름한 펍인 '올드 오크'가 유일하거든요.
그들이 내세우는 난민 혐오의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일 공간마저 모조리 없앨 만큼 마을의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방인들로 인해 동네의 집값과 가치가 더 떨어진다는 겁니다. 내 가족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고, 사는 게 퍽퍽한 와중에 누가 누굴 챙기냐는 논리였죠. 실은 그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마저도 무너져가는 가게를 수리할 돈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주장대로 이곳은 이방인을 받아줄 마땅한 곳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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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배타적으로 굴 수밖에 없다는 마을 주민들의 아우성이 무색하게도, 원주민과 이방인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마을은 오래전 광부들이 모여 살던 탄광촌이었습니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활기를 잃어버린 마을은 서서히 메말라갔고, 사람들이 떠나자 마을의 집값과 가치는 떨어졌습니다. 즉, 원주민(탄광 노동자)과 이방인(전쟁 피해자)은 모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지 오래인 동네에 등장한 난민들은 그저 문제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더 손쉬운 약자였던 셈입니다.
광부 노조가 겪은 이전 세대의 아픔에 공감한 '야라'는 원주민과 이방인을 가르지 않고, 마을에 힘을 불어넣을 방법을 제안합니다. 바로 광부 노조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올드 오크'의 닫힌 방을 열고, 시대를 뛰어넘어 약자를 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힘들 때일수록 돕고 살자던 그 시절의 캐치프레이즈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When you eat together, we stick together)"를 내걸고 말이죠. 함께함으로써 할 수 있게 된다는 희망으로 가득한 '올드 오크'에서 원주민과 이방인은 조금씩 섞여 들어갑니다. 이렇게 이 영화는 편가름보다 중요한 연대와 포용의 힘을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이방인을 헐뜯고 배척하던 장소에서 약자들이 함께하는 커뮤니티가 된 '올드 오크'. 영화는 식사 준비를 위해 아무렇지 않게 '올드 오크'를 드나드는 시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왠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끼며 눈치를 보는 마을 주민들을 비춥니다. 포용을 위선으로, 배척을 당위로 여기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유토피아의 이방인이라는 메시지가 느껴졌던 장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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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약한 사람에게 화살을 겨누는 것을 알량한 위안으로 삼는 사회, 약자가 약자를 더 혐오하는 사회, 서로 돕고 사는 것을 위선으로 치부하는 사회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러한 모습이 이토록 당연해진 건지, 영화를 보면서 자꾸만 한국 사회의 모습이 겹쳐 보여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올드 오크'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원주민과 이방인의 대립을 그려내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용기, 연대, 저항의 가치를 조명하는 작품, <나의 올드 오크>. 갈림길 하나 없이 오로지 디스토피아로 향하는 길만이 쭉 뻗어 있는 듯한 오늘날, ‘우리’가 될 용기, ‘우리’를 위한 연대,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저항의 중요성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노동자 계급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전하는 켄 로치 감독의 지난 영화들을 감상하며 연말을 보내고, <나의 올드 오크>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용기내고, 연대하며, 저항하는 한 해를 다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Summary
영국 북동부의 폐광촌에서 오래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는 어느 날 마을로 들어선 낯선 버스에서 사진작가가 꿈인 소녀 ‘야라’를 만난다. 마을 주민들은 불쑥 찾아온 ‘야라’네 가족과 다른 사람들을 반기지 않지만 ‘TJ’와 ‘야라’는 ‘올드 오크’에서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 켄 로치
출연 : 데이브 터너, 에블라 마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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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 폰 트리에, 어둠 속의 댄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들어가기에 앞서 1973년 발매된 Paul Simon의 싱글 <American Tune>이라는 노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가사를 읽어보면, 이 노래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뼛속까지 지쳐버린 이민자들이 부르는 '미국식 한의 정서'를 담은 노래이다. 잉글랜드인들을 태운 메이플라워 호가 막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꿈과 이상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 되었지만, 70년대에도 여전히 미국이라는 신화는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60년대 말에 소련보다 먼저 달에 도착하였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다. 노래의 화자는, 모든 것은 진보하고 변화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민자인 내 삶만은 나아지지 않는 것인지, 이 노동은 죽을 때까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메이플라워 이래 아메리칸 드림을 위한 여행은 계속된다. 이제는 오직 일신의 안식을 바라며 노래는 끝이 난다. 이 곡이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안 사실이다. 예수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그 수난을 감당해야 했던가?
Many's the time I've been mistaken
And many times confused
Yes, and I've often felt forsaken
And certainly misused
Oh, but I'm alright, I'm alright
I'm just weary to my bones
Still, you don't expect to be bright and bon vivant
So far away from home, so far away from home
And I don't know a soul who's not been battered
I don't have a friend who feels at ease
I don't know a dream that's not been shattered
Or driven to its knees
But it's alright, it's alright
For we lived so well so long
Still, when I think of the
Road we're traveling on
I wonder what's gone wrong
I can't help it, I wonder what has gone wrong
And I dreamed I was dying
I dreamed that my soul rose unexpectedly
And looking back down at me
Smiled reassuringly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
We come on the ship they call The Mayflower
We come on the ship that sailed the moon
We come in the age's most uncertain hours
And sing an American tune
Oh, and it's alright, it's alright, it's alright
You can't be forever blessed
Still, tomorrow's going to be another working day
And I'm trying to get some rest
That's all I'm trying to get some rest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American Tune>을 부르는 Slmon & Garfunkel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지난 2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랩 대령 역을 맡았던 故 크리스토퍼 플러머 배우의 부음 소식을 듣고서, 부모님의 추억팔이용으로 내가 어릴 적에도 같이 DVD로 돌려 보았던 영화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위 영화에 대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추억이자 향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를 보았다. 12세 관람가,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의 주연, 칸느 2관왕의 업적, 개봉 당시 평단의 극찬, 포스터에서 비요크의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때문에 라스 폰 트리에 판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안이하게 관람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악랄한 -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 의도를 가진 감독이 만든 2시간 20분짜리 악몽이었다. <American Tune>을 들었을 때, 희망도 절망도 아닌 <수난>의 정서를, 영화를 보면서 똑같이 느꼈다. 과거와 미래의 희망은 이 뮤지컬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 아주 지난하고 힘든 과정만이 영화 속에 담길 뿐이다.
소음은 리듬이 되고 음악이 된다
1964년 미국 워싱턴 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들과 함께 이민을 떠나온 셀마(비요크)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같은 유전병을 가진 아들의 눈을 고치기 위한 수술비를 벌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녀가 일과 후에 뮤지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직장 동료 캐시(카트린느 드뇌브)도 참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60년대를 풍미했던 <쉘부르의 우산>의 그 카트린느 드뇌브가 변변치 않은 무대에 억지로 올라가 있는 듯한 기묘한 모습, 일사불란한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고 홀로 겉도는 셀마의 모습을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의심쩍다. 그녀의 뮤지컬 실력은 무대가 아니라 공장 소음 안에서 꾸는 몽상에서만 제대로 발휘된다. <라라랜드>에서 전주만 들어도 신이 나는 뮤지컬 ost에 맞추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이들이 LA 고속도로를 점거한 군무에 익숙했던 우리의 눈은, 미국 동부 공장 노동자들이 위험하고 비좁은 공장 안에서 추는 춤이 어색하기만 하다.
6mm 핸드헬드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셀마의 일상은 그녀가 보는 세상에 대한 어지럽고 둔탁한 인상을 담고자 노력하며, 마치 한 체코계 이민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사실성도 부여한다. 시력이 감퇴하는 대신에 예민해진 셀마의 청각은, 그녀의 삶이 매번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주변의 작은 소음을 감지한다. 그 작은 소음, 규칙적인 리듬으로부터 그녀의 노래는 다시 시작되고, 셀마는 혼자서 미치기 직전의 순간에 그 박자에서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뮤지컬 영화와 달리 관객은 뮤지컬 장면에 매번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는데, 위험한 공장 프레스 앞에서 몽상을 하고 있는 셀마의 현실 모습이 점차 뮤지컬 장면 안으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같은 위태로운 현실의 침투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일부러 훼방 놓으면서, 극이 후반부로 치달아 갈수록 뮤지컬이 나오는 몇 분을 시간이 멈춰버린 지옥처럼 길게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다.
후반부로 치달을 수록 이 소음은 하나 둘 제거되면서 성스러운 종교 음악만이 남는다. 교도소 안에서 셀마는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라고 물으면서 절망한다. 이 때 비요크의 95년도 앨범 'It's so quiet'라는 노래와 뮤비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는데, 설마 이것까지도 감독의 시니컬한 농담인 지를 의심했다. 이 곡의 뮤비안에서 비요크는 엠마 스톤 못지않게 화려한 원색 드레스를 입고서 뮤지컬의 여주인공처럼 '여긴 너무 조용해!'라고 주변을 조용히 시킨 다음, 가장 경쾌하고 자신 있게 꽥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셀마로 분한 그녀는 자신을 미치게 하는 고요를 쫓아내지 못한다. 겨우 통풍구로 들려오는 막연한 채플 소리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My favorite things>를 부를 뿐이다.
비요크의 <It's so quite> 뮤직 비디오
유럽 감독이 만든 악몽 'American bad dream'
감독의 비행 공포증 때문에 이 영화가 유럽 여러 지역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배우 또한 데이비드 모스(빌 휴스턴 역)를 제외한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유럽 출신의 배우들이다. 우리는 미국 땅을 제대로 밟아본 적도 없는 덴마크 감독이 가상으로 구현해 낸 미국의 허상을 보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적 패권은 모두 이 신대륙으로 넘어갔고, 유럽에는 오직 과거에의 향수와 문화예술적 자부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착란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지 못하며 무용한 지 영화는 낱낱이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셀마는 동료들과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뮤지컬을 연습하고 있다. 마리아와 본 트랩가 아이들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의 계곡과 산,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미라벨 궁전을 배경으로 이제 누구에게나 친숙한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손을 거쳤으므로 티 없이 밝고, 아름답게 묘사된 장면들은 이제 관객을 골리는 악취미를 가진 유럽 감독에 의하여 생활에 찌든 유럽계 이민자들의 소일거리 취미로 축소, 재현된다.
셀마의 예술적 기질과 취미는 생산 활동에 저해되는 결격 사유가 되고, 아들의 병원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는 변명은 '공산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는군요'라는 조롱으로 돌아온다. 체코에서의 좋았던 시절을 발설하면 '그러면 체코로 돌아가지 왜 여기 있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이웃의 얼굴을 한 미국 사회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은 놀랍지도 않지만, 그는 2차 대전 후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맹목적으로 미국 땅을 밟은 유럽계 이민자들의 무력함,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백치미, 현실과 이상의 혼돈, 후세대를 위한 자발적이고 맹목적인 희생까지도 비틀어 보여준다.
빌과 제프, 체격이나 인상이 비슷한 마을의 두 남자가 셀마의 주위를 맴돈다. 빌은 그녀에게 트레일러를 내주고, 아들 진을 낮동안 돌봐 주는 친절하고 선한 이웃이고, 제프는 셀마에게 호감을 보이는 낯선 이다. 눈이 멀어가는 셀마에게는 이 둘의 의도와 진심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결국 셀마는 태워주겠다는 제프의 호의를 거절하고 그녀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운 빌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녀의 선택, 빌을 의지하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것을 계기로 그녀의 운명은 추락의 길을 걷는다.
영화가 빌을 묘사하는 방식은 흔한 미국 영화에서 악당을 그리는 방식과는 다르다. 그는 사악하기보다는 저열한 인물이다. 치밀하다기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거짓말로 둘러대고, 부인이 그의 거짓말을 믿도록 신파 장면을 연출하며, 경제적 정신적 파산으로 인해 죽음을 생각해왔으나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어서 셀마에게 그 역할을 위임한다. 부인과 셀마뿐 아니라, 정의를 지키다 순국한 희생양으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스스로 믿을 만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비열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셀마의 범죄 장면은, 살면서 웬만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지리멸렬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장면을 끔찍하도록 길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뮤지컬 대사와 음악이다. 이제 그녀의 환상 속에서 강은 핏빛으로 흐르며, '날 용서할 수 있나요'라는 그녀의 노래는 부조리의 끝을 달린다.
수녀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수녀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는 수녀에서 선생님으로, 다시 트랩 가 아이들의 어머니로 신분이 바뀐다. 마리아의 재기 발랄함과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녀원, 트랩 대령과의 초반 대립을 거쳐, 그녀는 오직 자신의 노래로써 한 가족을 변화시킨다. 후에 그녀의 부재를 앓는 아이들을 위해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 돌아와 한 가족을 이루게 된다. 반면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숙제하는데 이상한 질문만 하는 어머니, 아들의 생일에 자전거도 못 사주는 어머니, 범죄자 어머니, 아이가 찾아도 답이 없는 어머니이다. 셀마는 그녀의 유전병 때문에 서서히 시력이 감퇴하자 주인공 마리아 역에서 수녀 역의 조연으로 밀려난다. 이것은 어머니(Mother)에서 살인자(Murderer)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아이와 어떤 연결고리도 갖지 못하는 희생당하는 성 처녀와 같은 수녀(Nun, 아이에게는 무의미함 None)로 전락하는 것을 상징한다. 마리아의 선택은 수녀원의 자비로운 허락과 자유 의지에 따랐던 반면, 셀마에게는 점점 극단적이고 좁은 A/B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그녀를 진심을 다해 돕고자 하는 캐시마저 이 시스템에 동조하게 되는 것은 슬픈 역설이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셀마를 잔다르크에 자주 비견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진(Jean)'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녀는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에서 누구도 굽힐 수 없는 신념을 가졌던 잔(Jeanne)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녀가 원하여 자유 의지로 신념의 전쟁을 했는지, 하늘에 있는 누군가 계시를 내렸는지를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잔 다르크처럼 의연한지를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전화기에 대고 화내며 울부짖고,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몸부림친다. 사실 그녀는 평범한 어머니, 선생님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되고 싶어 했던 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던 대로 운명의 되물림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결국 그녀는 자신이 치른 희생에 합당한 구원을 받았다는 듯 수그러든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관객 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절규 혹은 노래가 울려 퍼지고, 한 번의 추락, 그리고 뮤지컬의 막이 드디어 닫힌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폴 사이먼의 <American Tune>에서 후렴구 가사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I dreamed I was dying"에서 "And I dreamed I was flying"으로 변주, 높이 승화되는 구절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된 육신을 말한다. 그리고 해방된 자는 이제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로 항해하는 저 이상향의 풍경을 또렷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강탈당한 것을 지켜내고 본인 스스로까지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셀마는 시력을 되찾아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또렷하게 직시할 수 있다. 그렇게 더딘,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흘러가는 이 항해는 후대에게 전승된다.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마치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전쟁이 모든 것을 휩쓸기 직전에 사람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 가족의 결합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난민이 된 트랩 가 가족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알프스를 희망차게 넘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항상 이상했던 것은 알프스는 춥고 험할 텐데 이 사람들은 동네 뒷동산을 산보하듯 노래를 부르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즉 영화는 불행했던 과거(트랩가 7남매 어머니의 죽음)와 다가올 불안한 미래(난민의 삶)는 잘라버린 채 온전하고 행복한 모습들만 보여준다. 마치 이에 대한 블랙 패러디처럼, <어둠 속의 댄서>는 셀마가 이민 전 행복했었던 체코에서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도 생략하고 , 그리고 그녀의 희생을 통해 아들 진에게 주어진 좀 더 밝은 미래를 보여주지 않은 채 무대의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면서 한부모, 장애인, 이민자, 블루칼라 노동자 등 모든 측면에서 의지할 곳 없는 사회 소수자인 한 여성을 여러 장치들을 가지고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가학성이 과연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영화는 많은 논란거리를 낳았고,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단과 관객의 평가 또한 극명히 갈리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뮤지컬 장르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관객을 심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인위적인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었나? 감독은 실제로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던 비요크를 비슷한 상황에 몰아넣어 과하게 몰입시킴으로써 훌륭한 연기가 아닌 그녀의 진실된 고통을 착취한 것이 아닌가?
사디스트적인 악취미를 가진 감독이 단지 본인의 유희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는 가정 하에, 이 씁쓸하고 어두운 뮤지컬 영화는 종교적인 희생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20세기판 <마태 수난곡>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감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보다는 차라리 <셀마 수난곡>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나무판자 위에 몸을 결박당하는 셀마의 모습을 보며 성경에 나오는 '그 존재'가 아닌 다른 누구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20세기의 아메리칸 드림을 믿고 현실에서 구원받기 위한 모든 이민 세대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당한 대속죄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것들은 자식 세대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시련이기에, 그녀는 친구의 얼굴을 한 어떤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도 이겨낸다. 이로써 그녀의 아들과 후손들은 광명의 한 자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또 다른 결의 결핍과 상처를 떠안은 채 아메리칸 드림의 항해를 이어간다.
[Eurofilm 11. 덴마크, 독일,스웨덴, 네덜란드, 미국,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2021년 3월 6일 감상 / 2021년 3월 7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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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부하더라도 말해져야 할 희망의 가치
사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인류의 삶에 끼친 영향이 막대했기 때문이겠다. 같은 소재를 사용한 작품이 많아질수록, 작품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는 중요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작품들을 바라볼 때 소재를 얼마나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지, 어떤 추가적인 소재를 활용하는지를 통해 본다.
사실 이제는 소재의 싸움이 어느 정도 그 한계를 맞고 마무리되어 가는 시기다. 다양한 소재를 통한 예술 작품들이 출품되고 상영된 지는 이미 꽤 지났다. 이런 상황일수록 같은 소재라 하더라도 독특한 연출법과 패러다임들이 작품을 빛내게 된다. 이를테면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인터미션까지 있어 화제가 된 <브루탈리스트>가 있다. 이 작품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주인공이 가지는 성격인 이민자, 건축가라는 요소를 중점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하고, 주제 의식을 풀어간다. 앞서 말한 ‘많이 사용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요소를 첨가한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작품에 대한 관점 또한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평단의 호평을 받아 올해 개최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는 성과를 쥐었다.
<화이트 버드>는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배경의 이야기, 홀로코스트라는 일종의 “흔한 소재”를 차용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과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관객에 주입하는 데에 사용됐던 ‘영화’라는 매체를 돋보이게 한 점이 눈에 띈다. 핵심적인 시퀀스는 사라(아리엘라 글레이저)가 줄리안(올랜도 슈워드) 가족의 헛간에서 숨어 지내며 희망을 잃어갈 때,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영사기를 활용해 실제 영상을 봄으로써 희망을 찾는 과정에 있다. 당시에는 나치의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선전하는 데 사용됐던 영화가 사라와 줄리안에게 만큼은 희망과 미래의 상징으로써 사용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이트 버드>가 희망을 말하는 방법
희망을 말하는 여러 상징물이 등장한다. 앞서 말했던 영화에서부터 시작해, 영화의 제목이며 가장 중요한 심볼로 등장하는 ‘화이트 버드’, 하얀 새가 있다. 영화에서는 하얀 새를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등장시키고 강조한다. 주로 사라가 헛간에 숨어 지내는 과정에서 등장하는데, 희망을 잃을 위험에 처하는 상황들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장치로서 등장한다. 하얀 새가 ‘평화, 자유’라는 의미를 뜻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88 올림픽’ 당시 날렸던 수많은 비둘기가 흰색을 띠기도 했다. 이는 자유와 희망, 평화 등의 상징적 의미를 올림픽을 관람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퍼포먼스였다.
이 ‘화이트 버드’는 사실상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상징물로서 작용한다. 사라의 희망을 위한 것에서부터,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희망을 위해. 그리고 줄리안이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두 다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영화 종반부에서의 장면인데, 꽤 슬픈 상황이지만 작 중 사라가 “어쩌면 줄리안이 자유로워진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라는 대사를 남긴다.) 순간에서 등장한다. 사라가 줄리안으로부터 선물 받은 목각 새 인형 또한 그런 상징성을 가진다.
단순 새라는 상징물뿐 아니라 사라와 줄리안, 그리고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라를 둘러싼 그 주변 사람들 모두. 그들은 모두 서로를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치당원들의 감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그 사이에서 서로를 돕고 좌절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정함은 다른 이를 끌어내리고 무너뜨리려 하는 악의보다 강하고, 끈질기며 가치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도 그렇다. 타인에게서 미움받은 경험보다, 타인에게서 받은 호의와 사랑의 힘은 양에 비해 강력하고 지속적이다. 다만 영화에서 일종의 “감동 유발 장치”로 사용되는 ‘노래’는 다소 작위적이고, 전개 과정에서 등장의 수미상관을 이룸으로써 “플래그” 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쉽다. 의도 자체에 아쉬움을 표하고 싶진 않다고 하더라도, 그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음에 매우 아쉬움을 느낀다.
원작이 있는 영화의 딜레마
원작이 있는 영화는 항상 딜레마에 휩싸인다. 어떤 장면과 연출을 살려둬야 할지, 아니면 각색해야 할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장면과 요소들이 다르기 때문에, 특히 원작이 있는 작품은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비판과 아쉬움을 낳게 된다. <화이트 버드> 또한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 ‘무엇을 각색할 것인가,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나는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면 원작을 관람 전후로 무조건 확인해보는 편인데,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참고했는지와 원작을 잘 각색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원작과는 다르게 각색된 부분들이 몇 있었는데, 특히 노인이 된 사라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의 방식이 영상통화를 통하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는 사라가 직접 손자의 집에 방문해서 전하는 것으로 택한다. 과연 의문이다. 원작을 보존했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흐름이었음에도 불구, 오히려 보존했다면 더욱 과거와 현재에 대한 구분이 지어지면서 스토리텔링과 현재의 시공간이 자연스럽게 왕복하는 듯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게 됨으로써 현재와 과거의 비슷한 컬러 톤이나 미장센 등의 유사성으로 인해 자칫 두 시공간이 같은, 어쩌면 크게 시간적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여지가 남겨지게 됐다. 이는 원작 고증과 각색의 딜레마에서 오히려 패착이 될 가능성에 대한 결정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화이트 버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어났던 인종 말살 행위에 대한 무도함에 대한 매체적 비판을 행함으로써 그 가치를 보여주기를 택한다. 그것을 얼마나 정교하게 보여주는가에 대한 물음에 날카로운 대답을 던지지는 못했으나 작품이 가진 소재의 가치와 메시지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자부심을 드러냈다.
세계가 급변하고 어떤 가치가 이 세상을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되는 요즘일 것이다. 기존에 믿고 있던 가치가 흔들리게 될 수도 있고 종잡을 수 없던 마음이 오히려 단단히 굳어지는 과정에 놓여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이 영화가 주목하는 ‘자애와 박애, 그리고 선의’라는 가치를 넘겨짚어서는 안 된다. 전쟁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21세기, 특히 생명이라는 가치의 소중함이 점점 희박해지는 이 현실에서 그 가치를 지켜야만 인류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명과 존엄함의 가치 아래서, 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기를. 그리고 관람 후에도 그 가치에 대한 평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나의 간청을 모든 관객에게 바친다.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한 뒤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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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1차 예고편
최악의 열차 사고, 아내의 죽음 뒤 숨겨진 진실
한 남자의 거침없고 잔혹한 복수가 마침내 폭발한다!가족과 떨어진 채 지내던 현직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는 열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중, 아내의 죽음에 얽힌 사고가 계획된 범죄였음을 알게 된다.
분노가 폭발한 마르쿠스는 범인들을 뒤쫓아 목숨을 건 추격전을 시작하고 자신만의 잔혹한 정의로 그들을 심판하기로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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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블러드 레드 스카이> 공식 예고편
[2021년 7월 23일, 넷플릭스 공개]
의문의 병을 앓는 여자.
치료를 위해 어린 아들가 밤 비행기에 오른다.
이륙 후, 비행기가 테러리스트들에게 점령당하자 여인은 생존 싸움을 시작한다.
그간 힘겹게 숨겨온 어둠의 힘을 뿜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