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4-05 15:11:52
식목일 기념 식집사들을 위한 플랜트 힐링무비
<리틀 포레스트>부터 <타샤 튜더>까지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4월 5일 식목일인데요, 마침 그간의 건조함을 싹 달래주는 듯한 단비가 유난히 반가운 하루입니다.
한창 목말랐던 식물들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최근 연달아 일어났던 산불 피해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네요.
오늘은 씨네랩 역시 식목일을 맞아 다양한 식물을 소재로 한 힐링영화 모음을 준비해 봤어요.
아끼는 식물과의 동거를 즐기고 있는 식집사에게도,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예비 식집사에게도, 또 봄이니만큼 푸릇푸릇한 영상미를 즐기고 싶으신 분에게도 추천해 드리고 싶은 영화들입니다.
배고픈 마음과 속을 채워 나가는 농촌살이 이야기 <리틀 포레스트>부터
유명 동화작가의 삶과 아름다운 정원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타샤 튜더>까지!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8편의 플랜트 힐링무비를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리틀 포레스트(2018)
Little Forest

감독: 임순례
출연: 김태리, 류준열, 문소리, 진기주 등
장르: 드라마
등급: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103분
배고픈 마음과 속을 채워 나가는 농촌살이
시험, 연애, 취업… 뭐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은 오랜 친구인 재하와 은숙을 만난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재하’, 평범한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은숙’과 함께 직접 키운 농작물로 한끼 한끼를 만들어 먹으며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을 맞이하게 된 혜원. 그렇게 특별한 사계절을 보내며 고향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를 깨닫게 된 혜원은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데…고단한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내려온 혜원이 소꿉친구인 재하와 은숙을 만나고 사계절의 자연 속에서 직접 만든 음식을 통해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힐링 드라마.

온기가 있는 생명은 다 의지가 되는 법이야.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그 모든 건 타이밍이다.

친구들은 모른다.
나도 이곳의 토양과 공기를
먹고 자란 작물이라는 걸.
타샤 튜더(2018)
Tasha Tudor: A Still Water Story

감독: 마츠타니 미츠에
출연: 타샤 튜더 등
장르: 다큐멘터리
등급: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104분
천상의 정원을 일궈낸 동화작가
전 세계에서 사랑 받는 베스트셀러 동화 작가이자 「비밀의 화원」과 「소공녀」, 백악관의 크리스마스 카드 삽화를 그리고 30만 평 대지를 천상의 화원으로 일구며, 꿈꾸는 대로 살았던 자연주의자 '타샤 튜더' 라이프스타일의 아이콘, 타샤가 직접 들려주는 그녀만의 행복 스토리!

정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아요.
이 정원을 만드는 데 삼십년이 걸렸어요.

꽃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바라보면 알 수 있어요.
좋아하지 않는 곳에 살고 있다면 다른 곳을 떠나세요.
할 수 있을 때 행복을 찾으세요.
인생 후르츠(2018)
Life Is Fruity

감독: 후시하라 켄시
출연: 츠바타 슈이치, 츠바타 히데코, 키키 키린 등
장르: 다큐멘터리
등급: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91분
주렁주렁 인생미학
90세 건축가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87세 못 하는 게 없는 슈퍼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 둘이 합쳐 177살, 혼자 산 날보다 함께 산 날이 더 긴 부부는 50년 살아온 집에서 과일 50종과 채소 70종을 키우며 살아간다. 어느 날 슈이치는 설계 의뢰를 받고 늘 꿈꾸던 자연과 공존하는 이상적인 건축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는데…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인생은 살수록 아름다워진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바람 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자연의 소리는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다.
식물카페, 온정(2021)
Plant Cafe, Warmth

감독: 최창환
출연: 강길우, 김우겸, 박수연 등
장르: 드라마
등급: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75분
당신을 위한 식물 처방전
종군 사진기자로 일했던 주인공 ‘현재’는 파키스탄 전쟁 당시의 트라우마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다. 퇴사 후 다시 찾은 할아버지의 수목원에서 어린 시절 느꼈던 식물과의 특별한 교감을 떠올린다. 식물로부터 살아갈 용기를 얻은 ‘현재’는 도심 속 <식물카페, 온정>을 운영하게 된다. 본인의 반려식물과 함께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카페를 찾은 손님들에게 ‘현재’는 병든 식물은 물론 병든 마음에 필요한 그만의 식물 처방전을 건넨다.

사람도 때마다 분갈이가 필요하다.
뿌리가 자라다 못해 흙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마음이 제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자꾸 밖으로 삐져나올 때
마음이 가는 그곳으로
사람도 분갈이를 해야 한다.

자라는 게 티가 나지 않는 식물은
그 시간 동안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식물도감(2018)
Evergreen Love

감독: 미키 코이치로
출연: 이와타 타카노리, 타카하타 미츠키 등
장르: 멜로/로맨스
등급: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75분
제철 요리와 함께하는 무공해 힐링 로맨스
어제는 머위밥, 오늘은 달래 파스타… 이츠키는 자연에서 얻은 제철 식재료로 그녀를 위한 맛있는 요리를 하고, 사야카는 점점 그와의 시간을 통해 무의미한 일상에 활기를 찾고 작은 행복을 발견해나간다. 항상 ‘혼자’였던 삶이 ‘함께’가 되면서 둘은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데…

아가씨 괜찮다면 날 주워가지 않을래요?
물지 않아요.
예절교육 받은 착한 아이랍니다.

잡초라는 이름은 없어.
모든 풀에는 이름이 있어.
모리의 정원(2020)
Mori, The Artist's Habitat

감독: 오키타 슈이치
출연: 야마자키 츠토무, 키키 키린 등
장르: 드라마
등급: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99분
은둔화가 쿠마가이 모리카즈의 말년을 다룬 실화 바탕 영화
30년 동안 정원을 벗어난 적 없는, 작은 것들의 화가 모리카즈 아내 히데코와 조용하게 소소한 일상을 누리며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싶지만 그의 정원에 자꾸만 예기치 못한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는데.. 햇살, 바람, 새소리.. 자연의 아름다움이 담긴 모리의 정원으로 초대합니다. 일본의 원로배우 키키 키린의 유작이 된 작품.

못 그려서 좋아요.
잘 그린 그림은 끝이 뻔하거든요.
못 그린 그림도 작품입니다.

이 정원은 남편의 전부예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2014)
Attila Marcel

감독: 실뱅 쇼메
출연: 귀욤 고익스, 앤 르 니, 베르나데트 라퐁 등
장르: 코미디, 드라마
등급: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106분
삶을 되찾기 위한 기억여행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읜 폴은 말을 잃은 채 두 이모와 함께 산다. 이모들은 폴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했지만 33살의 폴은 댄스교습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웃 마담 프루스트의 집을 방문한 폴은 그녀가 준 차와 마들렌을 먹고 과거의 상처와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나쁜 기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네게 바라는 건 그게 다야.
수도꼭지를 트는 일은 네 몫이란다.

Vis ta vie.
네 인생을 살아.
낮과 달(2022)
The Cave

감독: 이영아
출연: 유다인, 조은지, 정영섭 등
장르: 드라마
등급: 15세 관람가
러닝타임: 111분
제주도에서 만난 남편의 첫사랑
남편과 사별 후 평소 남편이 살고 싶어 했던 제주도로 이사 온 민희는 성격 좋은 동네 이웃 목하와 그의 음악하는 아들 태경을 만나 친분을 다지게 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한 순간, 목하가 남편의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본의 아니게 상실의 아픔을 분노 게이지로 다스리게 되는 민희, 평온했던 일상 속 잊고 지냈던 오만년 전 ‘구 남친’의 기억을 강제 소환당한 목하. 두 여자의 예측 불가, 밀고 밀리는 관계가 시작된다!

낮에도 달이 뜨는 거 알아요?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거죠.

나는 과거나 미래 그런 거 그립지 않아요.
지금이 딱 좋아요.
오늘 추천드릴 영화는 여기까지 인데요, 어떠셨나요?
그럼 즐거운 식목일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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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복되는 생활 속, 미묘한 변주를 찾기를
<쉘 위 댄스>에서 매너리즘에 가득 찬 얼굴로 지하철 창문 밖으로 보이는 댄스 학원을 보았을 때 야쿠쇼 코지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필자는 이 장면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지하철에 몸을 맡겨 집으로 휩쓸려가는 와중에, 야쿠쇼 코지는 고개를 아주 조금.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그 이후로 그의 삶은 360도 바뀌게 된다.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순간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 살인>, <멋진 세계>, <큐어> 등 여러 작품에서 보여줬던 야쿠쇼 코지의 연기는 설명 없이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전율이 스크린을 타고 넘어와 나에게 전해진다. 올해 개봉한 <퍼펙트 데이즈>에서도 그러했다. 아니, 전보다 더한 것이 몰려왔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일상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강박적일지 모르는 그는 다음과 같은 행동을 매일 반복한다.
매일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어젯밤에 본 책 한 구석을 접어 표시해 두고 책장에 넣는다. 그러곤 일층으로 내려가서 주방 싱크대에서 양치를 하고, 수염을 정리하고, 물통을 들고 올라가서 방 한 구석 놓여 있는 식물에 물을 준다. 그러고 옷을 챙겨 입고, 내려와서 문 앞에 놓인 나무 선반 위에 필름 카메라, 지갑, 차키 그리고 동전 몇 개를 챙겨서 나간다. 현관문을 열고 하늘을 보며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다음 집 앞 자판기에서 보스 캔커피를 뽑아 차에 타고 출근을 한다.
관객은 반복되는 그의 행동, 그의 하루를 보며 지루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듯이 극이 진행될수록 약간의 변주가 주어진다. 왕래가 없던 조카가 찾아와 며칠을 같이 지내게 되거나, 젊은 직장 동료의 여자친구에게 혼자만 듣던 노래를 들려주거나, 단골 식당 여주인의 전남편과 강변 공원에서 그림자놀이를 하거나, 갑자기 차가 퍼져 본인이 아끼던 카세트를 팔거나. 그럼에도 히라야마의 삶은 다시 중심을 찾고 원래의 루틴을 찾아 다시 반복된다. 그러고 영화가 끝이 난다. 단조로워 보이지만, 그만큼 담은 것이 풍부한 영화이다.
영화를 보러 간 날,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영화관 로비에는 어린아이와 부모들이 가득했다. 동시기 개봉작 애니메이션 탓인 것 같다. 부산스럽고 활기 찬 그들 사이를 비집고, 조용한 상영관에 들어앉았다. 내 옆엔 30대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고, 내 앞으로 4줄은 단체 관람을 온 듯한 중년부터 노년까지의 관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위에서 보니, 그들의 뒷모습은 왜인지 모르게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와 닮아 있었다. 정적이면서도 어딘가 삶의 조그만 부분에서 희망을 바라는 듯한 그 모습. 그날따라,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지 않던 내가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도시의 마천루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햇빛을 보며 울고 있는 히라야마,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 이와 상반된 분위기의 당찬 배경 음악. <퍼펙트 데이즈>에서 가장 역동적인 장면이라 느껴졌다. 이 마지막 장면의 여운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그랬던 것 같다. 내 주변 젊은 관객들이 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에 극장을 떠났고, 앞서 언급했던 단체 관람 중년층 관객들만이 자리 잡고 크레딧을 지켜보았다.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쿠키 영상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였다.
코모레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뜻한다. 코모레비는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이 문장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 영화를 온전히 마음속에 담아 두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빠르게 박혔다. 히라야마는 반복되는 일상 속 코모레비를 놓지 않는, 누구보다 최선으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약간의 바람에도, 약간의 시간 경과에도, 약간의 고개 각도에도 사라지고 달리 보이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줄기 햇빛에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적인 일상이라도 미묘한 변주가 찾아올 수 있다고 희망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다.
영화관을 나오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당연히 집으로 가는 발길을 서둘렀겠지만 그날만큼은 지금 이 순간의 코모레비에 눈길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히라야마의 점심시간처럼,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과 다를 바 없는 하늘이었고, 평범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이 내 일상의 코모레비임을.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아직 이 영화를 아직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이 영화를 통해 그들의 코모레비를 찾았으면 한다. 그들의 코모레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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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두둥실 휘감은 무지개 너머, 영화 <오즈의 마법사>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유명한 작품일수록 잘 읽어보지 않게 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대충은 아니까? 다른 고전도 유명한 문구만 알면 '뭐.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니까'하면서 넘기듯이. 책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얕고 넓은 교양으로만 관심이 있어서 그럴 거다. 오즈의 마법사도 비슷하다. 아, 오즈의 마법사? 알지 알지. 도로시,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나오는 그 이야기. 아, 그리고 영화 OST에는 좋아하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도 나오고. 주디 갈랜드가 도로시로 나오잖아. 윈드오케스트라에서 벌써 두 번이나 OST를 연주하기도 했어. 하지만 내용을 더 깊이 물어본다면 하다못해 오즈가 어떤 인물인지조차 잘 모르는 게 들통날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읽어볼 마음이, 기회가 생겼다. 오랜만에 할 일 없는 일요일 저녁. 넷플릭스도 왓챠도 동하지 않는 저녁, 책장에 꽂힌 <오즈의 마법사> 책을 꺼내 들게 된 것이다.
네 다음 1939년생(!)
아차 싶었다. 선물 받아놓고 너무 고이 모셔놔 버렸네. 동화니까 술술 읽힐 테니 부담 없이 펼쳤다. 책 표지와 군데군데 들어가 있는 일러스트도 소담하니 반가웠다. 책이 좋아지는데 일러스트도 크게 한몫했다. 정말 동화 같았으니까. 얼마 되지 않아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만 읽으니 아쉬워 영화도 같이 보았다. 그래, '그' 주디 갈랜드가 도로시로 나오는 그 영화 <오즈의 마법사>. 1939년에 이만한 작품을 만들었으니 문화유산에 기재될 만하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일 때 어느 곳에선 이런 판타지 영화가 제작되었다니! 물론 지금 CG를 생각하면 이게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다시 눈을 비비고 제작연도를 생각해보자. 1939년. 지금 어떻게 영화가 제작되는지 보다 그때 어떻게 찍었을지가 더 궁금할 지경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그녀를 아프게 했는가
물론 문화유산이 된 것은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함께다. 도로시를 통해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지만 실제론 도로시에게 주어진 건 괴롭힘과 약물, 다이어트를 강요한 어두운 현실. 주디 갈랜드는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을 후회했을까? 성공은 역시 독이 묻은 행운이었을까? 그녀의 입장은 알 수 없지만 영화는 그녀가 출연하지 않았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하게 초반부터 나오는 그녀의 <Somewhere over the Rainbow>, 얌전한 버전의 스칼렛 오하라를 보는 듯한 당돌하면서 귀여운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모른다. 슬픈 얘기를 많이 듣고서 봐서 그런가 간혹 투덜거리면서 봤다. 아니, 얼굴이 어때서, 체구가 어때서! 왜 못생기고 살이 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는지! 좋기만 한데.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대체 불가능하게 좋은데! 카메라가 문제였을까, 사람들의 눈이 문제였을까? 심지어 그녀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데. 우리에게 수많은 웃음과 행복을 주고 본인은 불행했을 주디 갈랜드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면, 그 와중에 어딘가 찜찜했다면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와 책의 기본적인 구성은 거의 비슷하다. 도로시는 강아지 토토와 함께 토네이도로 집째(!) 날아와 버렸다. 도로시는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친구 3인방 허수아비는 뇌를, 양철 나무꾼은 심장을, 겁쟁이 사자는 용기를 갖고 싶어서 함께 오즈를 찾아가게 된다. 오즈는 소원을 들어줄 테니 서쪽의 마법사를 없애라는 조건을 달았고 약속을 지켰더니 알고 보니 위대한 마법사는커녕 도로시와 집이 멀지 않은 서커스 극단 마술사. 오즈의 실체는 실망스러웠으나 모두들 원하던 것을 가지고 도로시는 토토랑 같이 집에 돌아온다. 참으로 행복한 이야기.
그러나 차이점이 명백히 존재한다. 갈등구조.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 그리고 그들이 원하던 소원. 책에는 특별한 갈등구조가 있지는 않으며, 장애물이 있다 해도 함께 노력해서 고비를 넘긴다. 이미 3인방은 뇌와 심장과 용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왜 당신들만 몰라!) 뇌가 없는 허수아비가 고민의 순간 해결책을 찾아낸다거나,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이 발밑에 벌레를 다치게 할까 봐 안간힘을 쓰고, 용기가 없다는 사자가 깊은 물살을 점프해서 친구들을 데려다주고 위험할 땐 '크오와왕'하면서 위협도 할 줄 안다. 이쯤 되면 내 머리와 몸통과 내면에 있는 것은 뇌인가, 심장인가, 용기인가. 실제로 오즈가 서쪽 마녀를 없앤 대가로 준 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 밖에 서로에게 의지하며 위기를 헤쳐나갔다는 점, 그리고 각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 또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 약간 잔인하기는 하다. 양철 나무꾼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굳이 40번의 도끼질로 40마리의 늑대를 죽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반면 영화는 갈등구조를 뚜렷하게 표현하기 위해 서쪽 마녀를 지속적으로 악역으로 입력시킨다. 책에서 읽을 땐 그저 오즈가 서쪽 마녀를 없애야지만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일종의 '퀘스트'에 불과했는데 영화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종종 나와서 도로시와 3인방을 괴롭히고 염탐한다. 큰 위기는 외부의 도움을 받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게 에메랄드 시로 가기 전에 양귀비꽃 들판 장면이다. 책에서는 도로시, 토토와 겁쟁이 사자가 양귀비 냄새에 취한 걸 보고 양철 나무꾼과 허수아비가 바쁘게 열 일 하고, 어쩌다 친구가 된 쥐 친구들의 도움을 보태 빠져나왔다. 영화에선 나무꾼과 허수아비는 그저 '어쩌지'를 반복하다가 북쪽 마녀가 뾰로롱 분홍색 비눗방울을 타고 와서 눈을 내려주면서 해결된다. 거 참, 예쁜 장면이긴 했지만 김 빠졌다. 4인방의 활약이 궁금했지, 북쪽 마녀님이 눈을 내리는 걸 기대하진 않았으니까.
"그럼 저한테 뇌를 못 주시나요?"
허수아비가 물었습니다.
"너는 뇌가 필요 없어.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으니까. 아기들이 뇌가 있다고 많이 아는 건 아니잖아. 경험을 통해서만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단다. 세상을 오래 살수록 경험도 많이 쌓이는 법이야."
(중략)
"그러면 내 용기는요?"
사자가 걱정스레 물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넌 이미 용기 있는 사자야. 너에게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자신감이야. 생명이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위험에 처하면 두려워하기 마련이지. 그런 두려움을 이기고 위험에 맞서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란다. 그런데 넌 그런 용기를 이미 많이 가지고 있잖아."
(중략)
그러자 양철 나무꾼이 물었습니다.
"내 심장은요?"
"글쎄, 그건 말이지. 네가 심장을 갖고 싶어 하는 게 오히려 잘못인 것 같아. 심장은 사람들을 대부분 불행하게 만들거든. 그 사실을 알면 심장이 없는 걸 행운으로 여길 텐데. "
- p. 234-236
<오즈의 마법사>의 핵심. 즐거운 소원 성취 시간이다. 오즈는 허수아비, 사자, 양철 나무꾼에게 "네가 원하는 건 이미 너에게 있거나 딱히 받을 필요가 없는 거야"라는 식의 답변을 한다. 뇌가 없어도, 용기가 없어도, 심장이 없어 보여도 이미 다 제 기능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는 방식 역시 당사자에게 믿음을 더해주는 정도다. 허수아비에게는 왕겨와 핀, 바늘로 만들어진 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를 것)를 주고, 양철 나무꾼에게는 겉은 비단에 속은 톱밥인 심장을 넣어주고, 사자에겐 마치 초록색 병에 든 액체를 접시에 놓고 이걸 마시면 용기로 변한다고 하면서 만족스러운 선물을 준다. <어린 왕자> 뺨칠 설득력 아닌가. 자, 네가 원하는 뇌도, 심장도, 용기도 여기 있어.
어디 보자, 자네에게 필요한 건 말일세
"당신이 약속한 양철 나무꾼의 심장은 어떻게 되는 거지? 또 약속한 겁쟁이 사자의 용기는? 허수아비의 뇌는?"
"누구나 뇌를 가질 순 있어. 그건 열등하고 소모적이야. 땅이나 바다에서 사는 모든 겁쟁이 하등 생물이 뇌를 가지지. 내가 있던 곳의 대학에선 모두가 위대한 사상가로 태어난다네. 그들이 졸업을 하면 네 것보다 나을 바 없는 뇌로 깊은 생각을 해낸단다. 네가 갖기 못한 건 졸업장이야. 따라서 나에게 갖춰진 지적인 권위와 '대학위원회의 공식적인 인정'에 따라 여기 당신에게 영예로운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바이네."
"사자, 자네는 용기가 없어 도망간다는 망상에 빠져있지. 지혜와 용기를 착각하는 거야. 내가 있던 곳의 영웅을 얘기해주자면 해마다 그들은 도시 한복판에서 퍼레이드를 벌인다네. 그들은 자네와 다른 게 없어. 자네가 갖지 못한 것은 메달이야. 마녀에게 맞선 특출난 용맹과 뛰어난 공적으로 자네에게 훈장을 수여하네. 자넨 전설적인 용사임을 기억하게."
"양철 친구, 자넨 심장을 원하지. 심장이 없는 건 엄청난 행운이라네. 심장은 완벽히 만들어지지 않는 한 실용적일 수가 없다네 내가 있던 곳에 매일 선행만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네. 사람들은 그를 '선행자'라고 불렀지. 하지만 그가 큰 심장을 가진 건 아니었어. 자네가 갖지 못한 건 단지 표창장이야. 따라서 자네에게 친절에 대한 감사로 기꺼운 마음으로 존경과 애정의 선물을 주겠네. 그리고 기억하게, 감성적인 친구여. 심장은, 자네가 얼마나 사랑하느냐보단 얼마나 자네가 사랑받느냐가 중요하다네"
-영화 <오즈의 마법사> 中
영화에서는 당사자의 믿음과 안도를 위한 선물이라기보다 타인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증명용으로서 선물을 주었다. 허수아비에게 뇌라는 게 있는 건 쉽지만 '위대한 사상가의 똑똑한 뇌'를 주고자 박사학위를 주고, 사자에게도 보통 크고 작은 용기가 아닌 '영예로운 용기'를 뜻하는 메달을, 양철 나무꾼에게도 그냥 콩닥거리는 심장 말고 '착한 심장'을 가진 걸 보여주려고 심장 모양으로 똑딱거리는 시계를 표창장이라며 준다. 사실 저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실제 현실이라면 박사학위와 메달과 표창장에 껌뻑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여태까지 지켜오던 동화적인 이야기가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아 아쉬웠다. 박사학위와 메달, 표창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걸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럼 그들은 다시 뇌와 용기, 심장이 없는 존재란 말인가. 누구를 위해 증명해야 하는가. 게다가 저 박사학위는 잘못하면 학위 위조에 걸릴지도 모른다! 저 메달, 저 표창장 역시 공신력이 있는 것인가? 사기꾼 아니랄까 봐 선물도 사기로 준 건 좋은데 나중에 뒤탈이 있을 만한 선물이다. 오즈가 착한 사람이면서 나쁜 마술사라고 본인이 한 말이 맞는 말인가 보다. 마술사가 현실적이면 나쁜 마술사지, 안 그런가?
집이 천국입니다
우리의 도로시는? 도로시랑 토토는 정말 고생 많았다. 물론 우연찮게 못된 마녀를 제거해주는 대단한 일을 하고 왔지만 말이다. 다른 친구들이 선물을 받을 때 속으로 참 애간장을 많이도 태웠고. 애당초 책에선 은색 구두였고, 영화에서는 빨강 구두였던 마녀의 구두 사용법만 알았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아서 그녀는 구두를 구두의 용도로만 썼고 고생 끝에 집이 천국이라는 쉬운 결론을 얻었다. 영화가 더 김 빠지는 건 도로시가 짐작건대 아픈 와중에 꿈을 꾼 것처럼 표현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을 만났을 때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는 말을 하는데 그게 복선이었다니! 병문안 온 아저씨 삼인방이라나! 세상에, 이게 다 꿈이라니 너무 서운하지 않나. 진짜 갔다 왔는데! 하면서도 집이 천국이라는 도로시 얼굴은 보기 좋지만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면에서 책의 전개와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책으론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선사한다. 도로시의 집은 흑백이나 갈색이었던데 비해 오즈의 나라에서는 총천연색으로 비친다. 갑자기 모든 게 색깔이 생겼을 때의 그 아름다움이란! 또 도로시만큼이나 토토를 잘 부각해주었다. 강아지를 괴롭힐 때마다 도로시는 돌직구를 날리는 프로 강아지 사랑꾼이었고, 토토 역시 원작에는 없던 위기의 순간 도로시를 구하는데 크게 일조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저 작은 강아지 토토가 매우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떻게 영화를 찍었을까 싶을 정도. <Somewhere over the rainbow>라는 언제 들어도 좋은 주디 갈랜드의 노랫소리에 깨알같이 손을 주는 토토의 귀여움까지 확인할 수 있고, 오즈의 세계를 예쁜 원색으로 꾸며놓고 노래와 춤이 가득한 축제로 만들어주었으니까. 마지막으로 <Ding-Dong, The Witch Is Dead>, <Follow the Yellow Brick Road>, <If I Only Had A Brain> <We're Off to See the Wizard>처럼 아기자기한 수록곡이 중독적으로 귀를 맴돈다.
김동인의 <무지개>라는 소설에서는 무지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다. 조금만 더 가보자고 하다가 눈 깜짝할 새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소년들이 넘쳐난다. 그 이야기 속 무지개가 위험하고 절대 만날 수 없는 존재였다면 오즈의 마법사 속 무지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진짜 무지개였다. 위험하지도 않고 희망을 주는 좋은 무지개. 꿈이든, 꿈이 아니었든 어떤가. 영화 속 도로시에겐 자려고 하면 생각나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마음이 둥실 휘감겨서 무지개 너머 도로시와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 오즈와 함께 하는 기분인걸. 감사해야겠다. 무지개를 손에 움켜잡으려는 게 문제지, 무지개 너머를 꿈꾸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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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가위 한 스푼, 타란티노는 두 스푼 섞었는데 밋밋해
초대받으면 안 됐을 손님
급한 대로 싼 짐입니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지금 현재. 일제 경찰이 집에 무작정 찾아오는 것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짐 다 싸 놨습니다. 일본 경찰 졸개가 말했다. 어디론가 차경을 데려간다. 이동하는 차경. 도착한 곳은 어느 외진 호텔이다. 중앙 홀로 들어가니 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아는 얼굴이 몇몇 보인다. 조선 총독부에서 만난 사람들 같다. 무라야마 쥰지. 천 계장, 총독의 비서, 같은 부서 동료가 같은 이유로 영문도 모른 채 중앙에 앉아있다.
머리를 맞대는 사람들. 다섯 명 모두 나름의 이유를 대고 있다.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네가 출신 성분이 다르지 않냐’라는 말까지 나온다.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확실히 위기에 몰렸다. 이 사람들을 호텔에 초대한 사람은 총독의 경호대장 카이토다. 일행 앞에 등장하는 카이토. 카이토는 일본어로 자기의 목적을 말한다. “여러분은 항일단체 '유령'의 구성원이자 스파이로 유력한 용의자들입니다. 여기서 스파이 ‘유령’이 누구인지 고발하는 분들을 먼저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유령이 나오기 전 까지는 못 나갑니다.” 충격적인 말에 술렁이는 호텔. 과연 유령의 정체와 목적은 무엇일까?
'박쥐' 향 첨가
영화를 보면서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은 극의 때깔에 대한 부분이다. 영화 색감 잘 뽑았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소품들을 잘 살렸다. 이 소품들이 떼거지로 있는 세트장 ‘호텔’이 감독의 의도를 잘 살린 좋은 선택지였다. 일단 영화는 1,2부로 이어져 있다. 영화의 핵심사건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게 1부고, 이 이후에 공간을 옮겨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2부다. 이 1,2부 구성에는 이야기를 이끄는 두 핵심 인물이 차이점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구분할 수 있다. 이 <유령>에서 1부는 후반부 영화가 품고 있는 핵심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임무가 있다. ‘유령’이 누구인가?라는 심리/스릴러물이 영화의 흡인력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 형식이 바탕이 된 전개를 잘 소화한다. 이를 위해서는 색감으로 인물 간의 처지와 연대도 보여줘야 하며 극에서 개성까지 부여하는 영화 내적의 과제를 소화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비주얼적인 부분을 잘 뽑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장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은 무라야마/박차경, 두 인물의 비주얼이다. 설경구 배우는 연기를 그냥 잘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캐릭터를 코디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에 맞게 어울리게 잘 코디했다. 그 가죽으로 된 레더 코트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코디가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면 이 무라야마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캐릭터성을 좀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박차경의 인물 코디는 이하늬 배우가 비율 좋고 미녀라서 잘 살린 감이 있다. 이 인물 역시 무라야마와 유사하게 캐릭터성을 코디 안에서 품어야 한다. 극에서 주요한 사건이 있을 때 박차경의 시각적인 부분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고, 과하다 싶은 클로즈업을 배우의 카리스마와 비주얼로 넘어가는 장면도 몇 군데 보인다. 사실 좀 박차경의 서사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체감상 이 캐릭터가 매번 비슷한 얼굴연기만 짓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오케이’를 한 감독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를 아웃핏과 비주얼, 경험치로 그나마 끌고 간 이하늬 배우의 연륜이 돋보인다. 그리고 두 사람보다 더 빛난 연기가 있다 바로 박해수 배우다. 이 배우는 이번에도 목소리 톤만으로 다른 악역연기를 보여준다. 이 카이토는 극에서 서스펜스를 담당하며 호텔의 사람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이 사람은 <SNL>의 콩트 연기도 잘하고 이런 역할도 잘하는 게 대단하다. 아마 이 영화의 가치 중 많은 부분이 이 배우의 연기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1월 2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마 연말 시상식에 이름을 볼 수 있을 듯?
왕가위와 타란티노 향 첨가
영화를 보며 두 명의 아티스트가 생각났다. 바로 왕가위와 쿠엔틴 타란티노다. 왕가위는 핸드헬드를 활용하고, 조명과 색감을 적절하게 쓴 영화감독이다.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는 이 시각적인 스타일화를 잡은 덕택이 크다. 앞 문단에서도 썼듯 영화는 조명과 빛 활용을 잘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빛을 활용한 연출은 인물 간의 연대와 갈등을 나타내는 데에 있어 나름의 역할을 한다. 특히 이 빛에 관한 연출은 유리코 역을 맡은 박소담 배우 쪽에 집중되어 있다. 또 초반부에 유령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이 장면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의 행적에도 빛을 활용한 강약조절 연출이 돋보인다.
그러나 감독 자체가 이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을 좀 얕게 쓴 감이 있다. 너무 주제가 대놓고 다 드러난다/ 왕가위는 이 시각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의 기본이 되기 위해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해피 투게더>가 그렇다. 영화에서 아련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랑의 기억을 묘사하는 데 그의 연출방식은 최적화다. 반대로 이 영화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언어가 부분 부분 희생된 감이 있다. 일단 액션이 그렇다. 영화에서 액션은 굉장히 중요하다. 2부에 들어가면 인물의 액션을 바탕으로 서사를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도 썼던 인물 간의 연대와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 액션이기 때문이다. 또 영화에 나타나는 어떤 액션 신은 굉장히 처절해서 극의 다른 분위기를 묘사하기까지 한다. 이 액션 신을 보여주는 방식은 어쩐지 타란티노의 것이 생각난다. 우선 영화가 호텔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활용한 것이 <장고 : 분노의 추격자>와, 인물 간의 갈등을 <데쓰 프루프>나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로 표현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액션에서 피가 좀 많이 나오고, 칼이 찔리는 신체 훼손도 그냥 나오는 편이다. 그러나 이 액션이 생동감이 있었는지는 솔직히 의문점이 있다. 전체적으로 뚝뚝 끊기는 느낌은 영화의 콤플렉스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 든다. 또 적지 않은 분들이 액션의 핍진성에 대해 의문점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극에서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액션 신을 보여준다. 어떤 인물들은 액션에 굉장히 능하다. 어떤 분들은 ‘주인공 버프’ 아닌가 싶기도 할 것 같다. 글쓴이는 이에 대해 ‘이 두 인물이 공통점을 갖는 부분’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긴 하지만 좀 더 생동감을 더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외에도 타란티노와 왕가위가 좀 사족같이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영화에서 어떤 소재는 액션과 유사하게 인물의 연대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선택지가 과연 영화의 밀도를 높였는지는 의문점이 있다. 아니 포스터랑 예고랑 영화 본 편이랑 안 맞으면 어떡해? 또 2부에 <화양연화>의 빨간색 호텔 내부를 연상케 하는 지점이 있었다. 이 부분도 그냥 화려해서 쓴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솔직히 후반부에 이 장면이 굉장히 중요한데, 공간의 특성 때문에 좀 어지럽다고 생각했다.
그냥 휙 쓰고 말아
영화에서 전체적인 완성도를 해친다고 해친다고 느낀 부분은 인물이다. 극에서 주인공 롤이 있는 인물들 중에 정말 초반부만 역할을 하고 아예 불필요한 캐릭터가 있다. 이 캐릭터는 이야기 전개의 흐름을 깨며, 좀 위험하다고 생각이 든다. 코미디 하려고 넣었다기엔 안 웃기다. 아예 하드보일드하게 가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인물을 아예 돌아이로 만드는 것이 어땠을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함은 영화의 사실상 가장 큰 단점으로 생각이 든다. 또 영화에서 음악이 거의 쉴 틈 없이 계속 나온다. 여기서 설경구 배우가 맡은 무라야마는 대사를 속삭이며 치는 경우가 많다. 이거 설경구 배우 개인기로 넘어간 거지 다른 배우면 소리에 묻혔을 것 같다. 일본어 대사가 몇 개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런 걸까? 이 외에도 유리코 역을 맡은 박소담 배우의 역할은 뭔가 허술하다.
시각적인 부분에서도 아쉽다. 영화 후반부에 처형의 이미지가 두 번 쓰인다. 첫 번째 처형은 좀 많이 과하다. 이 인물이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시각적으로 끔찍한 걸 드러내기 위해 굉장히 잔혹한 방식을 택한 것이다. 다른 잔혹함이야 뭐 액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라 나름 괜찮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극의 개연성을 해치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두 번째 처형은 영화가 갑자기 급진적으로 변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연출은 너무 낡았다. 이 처형이 극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인데 이게 너무 멋이 없어서 카타르시스가 없다. 차라리 첫 번째 처형을 반복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영화에서 사용한 이해영 감독의 영상언어는 좀 난잡하다. 분석적으로 보는 시각이 아닌 ‘그냥 단지 영화에 집중해서’ 보면 편집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느낌이 있었다.
정말 유령이 될 듯
감독의 전작 <독전>을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떤 영화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이 분이 미장센, 스타일리스트의 관점에서는 나름 호평을 받았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솔직히 모르겠다. 상업적으로는 이 영화가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글쓴이의 관점이 세상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이 영화가 센 한 방이 없다는 것이다. 액션도 계속 있고 건물 불타고 와장창 깨지고 사람 죽고 이러는 와중에도 뭐랄까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이상한 액션 신뿐이다. 더 작가주의적인 이야기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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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트 레터
이와이 슌지 감독는 이 영화를 <러브 레터, 1995>의 정식 속편은 아니지만, <라스트 레터>을 집필할 당시에 러브레터를 어느 정도 의식했다고 한다. 다 보고 나면 <러브 레터>에 대한 답장처럼 도 느껴진다. 왜냐하면 <라스트 레터>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러브 레터>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초반부와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후반부의 격차에서 애절함을 발생시키는 구조부터가 그렇다. 손 편지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그렇다. 세상을 떠난 첫사랑, 차마 전할 수 없었던 진심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누구에게나 찬란했을 학창 시절의 추억을 꺼낸다. 순수한 청춘의 비밀이 밝혀지며 공감대를 넓혀간다. 피아노 건반에 발맞춰 아름다운 영상미로 감수성을 한껏 끌어올리는 연출도 동일하다. 이렇게 ‘남겨진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방식’으로 죽은 존재를 부활시키는 것도 <러브 레터>와 닮았다. 물론 세상을 떠난 사람과 닮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동일하다.
그밖에 대학시절 사귀는 과정은 생략한 채 그 직전까지의 고교 생활만 다룬 것은 <4월이야기>에서, 그리고 두 소녀가 여름방학을 함께 보내며, 불꽃놀이를 하는 장면은 <하나와 앨리스>에서 가져왔다. 이렇듯 자신의 전작들을 적절히 재활용하면서 이와이 슌지다운 카메라워킹과 기법들을 선보인다.
그러나 <러브 레터>의 극적인 형식을 활용했으나 <라스트 레터>는 동어반복을 하지 않는다. 전작처럼 죽은 이를 추억하며, 후반에 이르러 진실을 드러내는 구조를 취하지만, 계절을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꿔 <러브 레터>를 부정한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러브레터>의 두 주인공인 나카야마 미호와 도요카와 에츠시를 어떤 모습으로 등장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와이 슌지의 어두운 면을 끌어들인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와이 슌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첫사랑의 추억‘외에 다른 게 있다.
이 영화는 쿄시로(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유리(마츠 다카코), 두 사람을 내세워 번갈아가며 내면의 심리를 드러낸 방식이다. 중년의 남녀가 그들의 학창 시절을 추억하고 노인세대의 삶도 다루고 부부관계, 동창회, 폐교 직전의 학교건물까지 다루고 있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2세들에게 무언가를 전해주려는 다소 복합적인 구조를 취했다. 그럼에도 초반의 정신없던 이야기가 중반쯤부터 정리되면서 안정적으로 끝맺는다. 감독의 연출은 때로는 산문처럼 느린 호흡으로, 어떨 때는 운문처럼 최소한의 장면으로 천천히 관객을 설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쿄시로가 왜 죽은 미사키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가는지가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라스트 레터>의 구성이 느슨하며, 어느 부분에서 조금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아무래도 머리로는 ‘첫사랑 멜로’를 하고 싶었으나 가슴으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이 졸업식 축사를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를 본 순간 확신하게 됐다. 졸업 축사에서 ‘꿈을 이루거나 혹은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자신의 꿈과 가능성이 무한하게 여겨졌던 이 장소를 몇 번이고 떠올릴 것’이라며 감독은 '사랑'보다 '꿈'에 무게를 실는다.
가만보면 이 영화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다. 짝사랑하는 또래의 학생을 피해 전학을 갈까 고민하는 소요카, 20년 넘게 차기작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엄마를 잃은 슬픔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아유미, 유리 또한 덤덤해 보이지만, 첫사랑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런데 노인들은 앞날은 모른다면서 힘차게 전진한다. 바로 '고희(70세)가 넘어 영어를 공부하는 할머니'와 그녀의 영어선생님이다. 이 분들은 일본의 고령층 즉, 미국과 패권 경쟁을 했던 ‘단카이 세대(団塊の世代)’를 상징한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라스트 레터>는 초식화된 중년의 '빙하기 세대(마츠 다카코, 후쿠야마 마사하루)'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졸업 '축사'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일본의 10대들(히로세 스즈, 모리 나나)에게 품고 있다.
이 3세대 간의 애틋함은 단순한 첫사랑으로 해석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이와이 슌지는 <러브레터>의 첫사랑 멜로 형식을 빌려 일본의 현주소를 안타까워하며 과거의 일본을 추억하고 있는 것 같다. 고로 미사키의 정체는 '80년대 잘 나갔던 일본 고도성장'일지도 모르겠다는 합리적 추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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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제이슨 스타뎀의 <어 워킹 맨>이 디즈니의 <백설공주>를 밀어내고 박스오피 1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데이비드 에이어가 공동 집필한 이 작품은 은퇴 후 조용히 살아갔던 요원이
인신매매 조직이 상사의 딸을 납치하자 다시 싸움에 뛰어드는 이야기를 다루며, 척 딕슨의 소설 시리즈를 원작으로 했습니다.
그에 반해 <백설공주>는 지난주에 비해 약 66% 폭락하며 1,420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더구나, <마인크래프트: 더 무비>가 오는 4일 북미 개봉을 앞두고 있어,
가족 관객층을 흡수할 가능성이 높아 흥행 전망은 어두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수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더 초츤>의 5번째 시즌 일부를 극장에서 상영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인
<더 초즌: 라스트 서퍼 - 파트 1>이 주말 수익 1,129만 달러로 3위에 오르며 신앙 영화의 여전한 강세를 증명했습니다.
국내 박스오피스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입니다.
주연 배우의 이슈로 인해 흥행에 다소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승부>가 주말 관객 수 54만 명, 누적 관객 수 70만 명을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영화의 준수한 완성도로 인한 호평이 입소문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예상됩니다.
인기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극장판인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역시 지난주에 이어 2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누적 관객 수 53만 명을 돌파하며, 그 인기를 실감시키고 있습니다.
3위는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가 차지하였으나, 누적 관객 수 300만 명의 벽을 넘지 못하며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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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와 삶의 관계에 대한 스필버그의 회고록
운명처럼 다가온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은 무섭다. 어린 새미. 엄마, 아빠랑 손 잡고 극장에 가기로 했다. 극장이 무섭다는 아들의 말에 엄마 미치와 아빠 버트는 아들을 달랜다. "상영관에 가면 막상 사람들이 거인처럼 보일 거야. 근데 그건 다 연기하는 거라고." 귀엽게 설명한다. 용기를 내는 새미. 손 꼭 잡고 극장으로 들어간다. 새미와 부모님이 보기로 했던 영화는 <지상 최대의 쇼>다. 러닝타임이 재생된다. 영화에 정신이 팔려 미친 듯이 빨려가는 새미. 특히 그 영화의 한 장면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장면은 기차가 추돌사고를 일으키는 신이었다. 대박! 어떻게 저렇게 만들지? 설마 진짜 기차를 부술리는 없을 테고. 금세 집으로 돌아가서 이 장면을 구현하고 싶어졌다.
집에 도착했다. 직접 그 장면을 만들어보는 새미. 아버지에게 핀잔도 듣지만 새미를 멈출 수는 없다. 꿈이 생기기 시작한 새미. 꿈을 영화감독으로 정했다. 현재 2023년의 누군가가 말해도 '정말?' 할 말을 1950년대에 했으니 오죽할까. 아버지는 이런 새미의 목표를 취미쯤으로 생각한다. 반면 어머니 미치는 생각이 다르다. 춤추는 걸 좋아했던 미치. 아들 새미가 영화감독으로서 잠재력을 펼치길 바라고 있다. 아무튼 새미 가족은 사이가 좋다. 카메라를 새미에게 사준 아버지 버트. 취미든 아니든 알 바 아니다. 이제 새미의 세상을 만들 때가 왔다. 꿈 앞에 나아가는 새미. 그런 세미 앞에 거친 인생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신이 된 남자
한 분야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도 이 방대하게 넓은 영화 시장에서 게임 체인저가 됐다면 그 공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죠스>로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스필버그. 영화적 상상력은 공간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발현됐다. 외계인들과의 첫 만남을 묘사했던 <미지와의 조우>가 생각난다. 사실 이 영화를 지금 2023년 본다고 하면 살짝 루즈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봐도 신선하다고 느낄 부분이 몇 있다. 스필버그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 모두 다 <E.T>라는 영화를 알고 있다. 골판지 돌돌 말아 만든 것 같은 비주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외계인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어른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만들었던 스필버그. <미지와의 조우>가 스릴러/미스터리적인 특성을 띈 것과는 반대로 <E.T>는 동화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 분이 같은 장르 안에서 템포를 바꾸는 것에만 능한 게 아니다. 그냥 영화를 잘한다.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릴러 <마이너리티 리포트> 로맨스 <영혼은 그대 곁에> 등 장르와 시대를 가로질러 압도적인 능력치를 보여준 것이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나이가 들면 늘 하던 것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이 사람에게 그런 건 없다. 물론 전체적으로 스필버그가 갖고 있는 영화적인 톤은 그대로지만 크고 작은 변화들은 지속해 왔다. 최근 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까지 스필버그는 뭐에 홀린 듯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 <파벨만스>는 스필버그가 홀렸던 ‘어떤 것’에 대한 영화다. 왜 영화를 사랑하게 됐는지를 러닝타임동안 옴니버스 형식으로 설명한다. 또한 두 번째로 영화를 만들 때 어떤 가치관을 바탕으로 만들게 됐는지도 보여준다. 또 가장 결정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청년 스필버그의 영화관에 영향을 줬는지도 보여준다. 엥? 그냥 전기영화 아니야? 이 영화는 뻔한 전기영화와는 다른 감이 있다. 바로 러닝타임 내내 이런 가치들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피소드 하나당 하나가 아니라 사실상 이런 가치들이 하나로 묶여있는 듯한 연출법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져있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의 부모님은 입체적인 캐릭터다. 아버지 버트는 아들의 꿈이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카메라를 사 준다. 또 이 버트라는 캐릭터는 아버지로서 굉장히 훌륭한 사람인 것으로 보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어떤 문제가 있어서 영화의 핵심 사건에 원인을 제공한다. 또 어머니 미치는 아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다. 또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들의 꿈을 후원한다. 이 영화를 좋아하고 예술가적 특성이 마음 안에 있는 그녀가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도 영화에서 재미있게 묘사된다.
무관은 정말 서운해
사실 아카데미를 그렇게까지 신뢰하는 편은 아니다. 뭐 오스카에서 상 하나 못 받았다고 영화 가치가 떨어지나? 그런 건 없다. 글쓴이만 해도 작년 수상작인 <코다>보다 <드라이브 마이카>나 <파워 오브 도그>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건 좀 해도 너무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엄청난 작품이라는 것은 변함없지만 감독상 정도는 줄 만 했잖아?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감독의 역량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느낄 수 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새미는 영화 안에서 몇 작품을 찍는다. 이 작품은 새미의 삶과 별개처럼 보이지만 사실 거의 그대로 현실을 담고 있다. 극 중 극이 품고 있는 서사 중 몇몇 장면이 현실의 어떤 지점에서 영화화되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정밀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현실과 영화와의 사이라는 지점은 영화의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과도 이어져있다. 그러니까 그 부분은 이 ‘현실과 영화사이의 교집합’은 곧 ‘새미의 예술관’, 즉 ‘스티븐 스필버그의 예술관’과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렇게 토대가 단단해진 스필버그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아버지가 세계 2차 대전 참전 용사였다는 것(<라이언 일병 구하기>) 외로웠던 유년시절에 판타지적인 요소로 아로새긴 친구(<E.T>), 퇴색되어 버린 가족의 사랑(<A.I.>)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뮌헨>)까지 그의 실제 행보를 생각해 보면 이런 장면들이 작품을 보고 나서도 다른 감동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 이 영화는 인물에 대한 판단이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우리가 만약에 한 60여 년 동안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60년의 세월 동안 쌓은 입지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해 보자. 우리 지나가다가 만난 아무 나도 '어려운 시기 이겨내서 지금 행복하게 잘 산다'류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들곤 한다. 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이라면 이 드라마틱한 성장서사를 더 전하고 싶지 않을까? 영화는 냉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대한 이야기? 없다. 영화를 위한 거룩한 희생? 감정적으로 들끓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이 사건들을 어떻게 영화화할 것인가?'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정적인 반응에 강점이 찍힌 건 작품 상영 후를 묘사하는 지점 쪽에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가족들에 대해서 무작정 안 좋게 묘사한다던가, 영화에서 악역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을 무조건 감싸준다던가 하는 일은 없다.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영화의 핵심 중 한 부분('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영화화한다는 것')과도 닿아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도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영화 촬영은 엔딩과도 관련이 있다. 엔딩에서 그렇게 연출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영화에서 두 사람의 촬영방식을 구현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새미가 찍는 극 중 영화, 스필버그가 기획한 장면 연출이다. 또 어떤 장면에서 빛을 활용한 촬영이 돋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영화에서 품기는 분위기를 더 매력 있게 만든다.
이 둘이 부부
사실 이 <파벨만스>를 글쓴이가 전부터 기대했던 이유는 두 주인공 때문이다. 바로 폴 다노와 미셸 윌리엄스다. 폴 다노는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선 굵은 연기를 한 것으로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다. 또 <더 배트맨>에서는 적은 노출로 어떻게 하면 광기를 폭발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한 티가 났다. 이렇게 테크닉 화려하게 때려 박는 연기를 잘하는 것 같지만 이 사람은 따뜻한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연기력으로 두드러지는 부분은 다른 배우들 쪽에 좀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테크닉이 다른 영화들처럼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폴 다노는 대체불가한 장점을 과시하며 안정적으로 극을 이끈다. <밀양>의 송강호 배우가 생각나는 연기였다.
미셸 윌리엄스는 연기의 정석을 그대로 옮긴 것 같았다. 폴 다노처럼 개성 있는 해석능력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미셸은 반대로 그 세계와 인물을 오롯이 이해하고 순간마다 서려있는 감정연기를 풍부하게 보여줬다. 이 마치를 가로지르는 캐릭터 특성은 호기심과 신선함이다. 뭔가 새로운 걸 찾아 나서는 성격인 미치. 이 신선함에 대한 강박은 인물을 후반부까지 이끄는 좋은 동력이 된다. 걸핏하면 몰입이 깨질 수도 있는 인물을 영화의 엔딩까지 적절하게 끌고 갔던 것은 이 미셸 윌리엄스의 덕이 크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양자경과 케이트 블란쳇이 유력했던 탓에 이 분이 엄청 언급된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미셸 윌리엄스는 인물의 입체성을 이 세계가 품고 있는 질서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만한 가치가 충분했다고 느낀다.
모든 걸 포함하는 이야기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역시 엔딩이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에게도 가장 인상 깊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솔직히 처음 극장 문을 나올 때 '이걸?' 싶었다. 그런데 집에 가면서 다시 돌아보니 이 영화의 엔딩으로 이 장면만큼 깔끔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해가 어려운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첫 장면과 끝장면이 왜 그 부분으로 시작할까?를 생각해보신다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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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
*영상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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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 마블과 여성
02:19 흑인, 그리고 소수자
04:17 짤막한 마블쟁이 생각
2021. 01. 04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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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다> 티저 예고편
음악의 마법에 빠질 시간!
가장 조용한 세상에서 시작된 여름의 노래!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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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가 끝이야> 메인 예고편
전 세계가 주목한 용기 있는 선택 로튼토마토 팝콘지수 92%🍅 북미 박스오피스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