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04-29 18:00:36
[JIFF 데일리]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막달라> 리뷰
막달라|Magdala
다미앙 매니블|Damien MANIVEL
France | 2022|78 min|DCP|Color|Fiction|15|Asian Premiere
시놉시스
예수의 죽음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마리아는 머리가 허옇게 센다. 열매를 따 먹고, 빗물을 마시고, 나무 사이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서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린다. 마리아는 그를 찾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의 죽음 후 동굴과 숲 속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은둔한 막달라의 마지막 순간을 감독의 상상력으로 재연했다. 연기자의 움직임을 담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다미앙 매니블 감독은 전작에서도 협업했던 배우이자 댄서인 엘사(Elsa Wolliaston)에게 인간 사회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홀로 된 막달라의 마음을 따라가게 했다. 영화는 어떤 극적인 이야기나 절망을 나타내기보다 매우 단순하게 막달라의 걸음을 함께하며 연기자가 진실되게 느끼는 공간의 에너지와 자연의 반응을 충실히 묘사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빚는 젊은 작가 감독 다미앙 매니블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문성경)
성녀(聖女) 막달라 이야기
마리아 막달라(막달레나). 그녀는 호칭이 많다. 예수의 제자. 기독교의 성인(聖人). 예수가 부활했을 때 빈 무덤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다른 제자에게 알린 인물. 오해도 많다.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 회개한 창녀. 47년 간 광야에서 지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와 혼동되기도 했다. 필립보, 토마스, 마리아 복음서 등 몇몇 위경 내용에 근거해 그녀가 예수의 연인이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널리 퍼졌다.
다미앙 매니블 감독의 <막달라>도 비슷하다. 위의 이미지가 전부 혼재한다. 막달라는 숲에서 고행 생활을 이어간다. 직접 만든 십자가를 놓지 않는 그녀는 환상 속에서 예수를 만난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발밑에서 우는 막달라. 예수와 몸을 섞는 막달라. 비가 오는 날 예수의 얼굴을 그리며 그리워하는 막달라. 스크린에 비친 그녀는 예수의 제자이자 연인이고 성녀(聖女)다.
인간 막달라의 죽음을 체험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막달라의 외관이다. 일반적으로 막달라는 어리고, 환희에 찬 백인 여성이다. 교회가 만든 그림이나 조각 속 그녀는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다. 영화 속 막달라는 다르다. 그녀는 노년의 흑인 여성이다. 죽음이 임박한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통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든 막달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달한다.
물론 <막달라>는 자기 의도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느리다. 그녀가 이슬 한 방울을 마시는 순간을 10초가 넘도록 보여준다. 클로즈업도 극단적이다. 러닝타임 절반은 그녀 얼굴로 가득하다. 움직임도 거의 없다. 막달라가 한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막달라>는 전통적인 성녀 막달라의 이미지를 깰 수 있다. 답답할 정도로 정적인 영화는 관음적이다. 주인공 삶의 단편을 훔쳐본다는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실제로 관객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막달라의 삶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얼마나 예수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막달라는 성녀가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막달라는 동굴에 누워 죽음을 기다린다. 천사는 촛불을 든 채 그녀가 죽기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막달라, 천사, 촛불을 천천히 오간다. 초가 녹을수록 막달라의 숨은 약해진다. 긴 시간 동안 연인을 그리워하며 고행을 이어간 한 여성의 삶을 요약하듯이. 마지막 숨을 뱉은 그녀의 손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다. 막달라는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 인간일 뿐이다.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그래서 <막달라>는 이율배반적이다. 몇몇 요소는 '이 영화에 새로운 게 있나?' 싶은 의문을 자아낸다. 환상 속에 나타난 예수는 익숙하다. 다른 영화, 드라마, 그림 등에서 재현한 유대인 남성 그대로다. 임종을 지켜보는 천사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전통에 충실하다. 순진한 얼굴을 가진 백인 소년. 성경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모습대로다.
하지만 종교적인 인물을 묘사하되 결코 종교적이지 않다. 가톨릭 교회가 숨기려 하는 대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비주의적 묘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젊은 막달라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녀 얼굴은 희열로 가득하다. 그런데 신실한 성녀보다는 성적으로 흥분한 여성에 가깝다.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esa)"처럼. 성적 오르가슴을 통해 종교적 신비경을 표현한다. 우연이 아니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따르면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은 성적인 황홀경을 맛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선 막달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자기 심장을 도려내 하늘에 바치는 막달라. 예수가 죽은 뒤 한때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한 채 숲 속을 헤매던 여성은 심장을 도려내는 고행 끝에 옛 연인을 만난다. 실제로 막달라는 죽은 뒤에야 예수를 만나러 승천할 수 있다. 즉, 영화는 한 번의 황홀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신과 하나 되는 '합일' 경험을 다시 경험하려면 고통으로 가득한 수행을 견뎌야 하니까. 틀에서 벗어난 막달라의 죽음이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이유다.
영화 <막달라> 상영시간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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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억은 그 자체로 기록이 된다
당신은 매일 40개의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마치 모국어인 것처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한다. 그러니 우선 외워야겠지. 시험공부하듯 어디에 적을 순 없고, 머리에 담아 조그맣게 읊조리는 정도만 가능하다. 종일 외우는 데에 집중할 환경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설거지나 재료 준비 등 주방 일을 하며, 당신을 감시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잠들기 전 시간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기도문을 외듯 나지막이 웅얼거리는 당신을 핀잔할, 당신과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수백 명의 질타를 견디면서.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제2차 세계대전, 나치 수용소, 그리고 페르시안으로 위장한 유대인. 세 가지 키워드로 단박에 이해할 것이다. 영화 초반부의 방점은 '페르시안'에 찍혔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상황은 나치 수용소로 잡혀간 한 유대인이 페르시아인인 척하며 독일군 장교에게 알려줄 페르시아어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정확히는 '만드는' 과정. 그는 페르시아어를 할 줄 모르지만, 순간적인 기지는 뛰어났다. 거대한 거짓에 그럴싸한 작은 사실 몇 개를 섞으면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보인다던가. 앞으로 그가 겪을 일과 딱 맞는 말이다.
자, 어떻게 매일 40개의 단어를 만들며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도망가는 건 방법이 아니다. 지뢰밭에 발을 디디거나 독일군의 총을 맞거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살고자 하는 당신이 택할 게 못된다.
다행히 영화의 주인공, 그리고 실화를 기반에 둔 소설의 주인공은 다른 방법을 찾는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갈 때다.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 불길에 그을리는 종이. 종이 위 까만 글자들이 사그라진다. 그 위로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이름과 역할이 생겼다 사라지고 다시 생기길 반복한다. 암전. 이윽고 숲처럼 보이는 탁 트인 공간. 꼭 맞는 나무의 대칭 가운데,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절뚝이는 것도 같고, 무언가 위태로운 느낌이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커다란 코트를 짊어지고서. 걸음은 투박할지언정 무너지지 않고 계속 앞을 향한다. 영화가 끝나고, 본 것을 되새기면서 깨닫겠지. 복선 그득한 장면들이었단 걸.
'페르시아어 수업' 타이틀이 뜨고,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맺힌다. 덜컹대는 트럭 안,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다만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눈빛들. 키 큰 남자가 옆 사람과 작게 조잘거린다. 남자의 무미건조한 눈빛은 옆 사람이 샌드위치가 있다는 말에 마구 반짝인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아주 유서 깊은 책을 줄 테니, 이거랑 교환하자고. 엄청난 값어치의 물건을 얻는 거라며. 눈망울이 큰 남자가 샌드위치를 내밀자 키 큰 남자는 제 몫을 제외한 남은 샌드위치를 책과 함께 넘긴다.
페르시아어로 된 책. 키 큰 남자가 샌드위치를 욱여넣으며 말한다. 훔친 거라고. 그건 유대교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
지적하자, 대수가 아니라는 듯이 남자는 마저 씹어댄다. 눈망울이 큰 남자,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질'은 뒤이어 딴지를 걸지 않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 수 없다고 받아들였을까. 훗날 자신도 율법을 무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도적질 하지 말라의 다음 37, 거짓증거 하지 말라.
트럭이 멈추고 독일군의 명령으로 안에 있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우르르 내린다. 소지품을 한 곳에 내려놔. 가방이 툭툭 바닥에 떨어지고 총살이 시작된다. 이때 우리가 아는 액션 영화 같은 드라마틱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 즉 우리 관객들이 보는 화면은 고정되었다. 정적인 프레임. 비명이나 절규가 나올 새도 없이 모든 일은 끝난다. 단 한 사람, 질을 제외하고.
그는 품에 있던 페르시아어로 된 책을 내밀며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군인들이 믿을 리 없는 소리다. 그러나 많고 많은 언어 중 페르시아어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로 그들은 혹한다. 페르시안이라니. 장교 '코흐'에게 데려가면 포상으로 통조림 열 개를 받을 것이다. 아니면, 죽이면 되고.
불신, 권위에 대한 자존심과 자긍심, 똑똑하다는 자만심. 이 모든 성질을 뭉쳐 사람으로 빚으면 코흐가 만들어지려나. 아니다. 이건 독일군 사령관도, 다른 장교들도, 다른 군인들도 충분히 될 수 있다. 다만 코흐만 가진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간절함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동생이 있는 이란으로 넘어가 식당을 열 생각으로 그득하다. 독일을 벗어날 생각을 한다는 건 그가 당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독일의 패배를 예상하는 것이다.
질이 자신을 책의 주인인 '레자'라고 거짓말했듯 코흐 또한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당에 충성하는 척 해왔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큰 틀에선 그들은 차이점이 없는 듯했다. 코흐도 결국 전쟁 통에서 살고자 했을 뿐 아닌가? 각자의 배경과 상황은 제각각이므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무언가를 어기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매일 이어지는 교습. 하루에 4개로 시작했던 수업은 갑자기 하루 40개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질은 패닉 한다. 끝이라는 생각에 도망치려 든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기에 제 발로 돌아온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며, 최선을 다한 거짓말로.
여기, 또 변수가 생긴다. 코흐가 명부 작성을 담당했던 '엘사'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질을 앉힌 것. 엘사와 달리 질의 글씨체는 명필이기도 하다. 그의 일터는 이제 주방이 아니라 명부가 펼쳐진 책상 앞이다. 질에게 주어진 건 45분의 시간, 명부, 만년필과 잉크, 그리고 독일어 40개가 적힌 종이 한 장. 질의 머릿속은 온통 단어 만들 생각뿐이긴 하나, 코흐가 시킨 일부터 하는 게 순서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며 꾹꾹 종이에 눌러 적다가 문득, 기시감을 느낀다. 눈앞에 보이는 건 글자들. 독일군의 철저한 관리 하에 수감번호로 불리는 이름들. 이름은 곧 단어다. 그 이름들을 조금만 변형하면 금세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다. 이거면 살 수 있다. 질은 들뜬 마음으로 '페르시아어'를 조합해간다.
시간이 쌓일수록 몇몇 군인들은 질이 불만스럽다. 특히 주방을 감독하는 일로 쫓겨난 엘사와 그리고 처음부터 질이 유대인이라고 확신한 '맥스'가 보기에. 위계가 엄격하기에 그들의 농간에도 질은 레자로서 목숨을 이어나간다. 교묘한 줄타기가 잘해가던 레자. 실수로 페르시아어 수업 첫날에 말했던 '빵'을 '나무'와 똑같은 단어로 발음한다. 그리고 끝난 줄만 알았던 레자는 사경을 헤매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건 코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그러니까 레자가 만들어 낸 페르시아어였다. 거짓에 거짓을 더하자 더할 나위 없는 견고한 진실로 변모한다.
코흐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레자를 변호하며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라고 명한다. 내키지 않아도 그를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던 질, 아니 이제 레자라는 명명이 우리의 눈과 귀엔 더 익숙하다. 모든 것이 엇비슷하게 뒤섞이던 순간, 전환점을 맞이한다.
독일군은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을 단체로 이송하고, 그럴 때마다 레자는 코흐의 보살핌으로 농장에 피신한다. 그는 마치 독일군의 아군 같다. 텅 빈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코흐의 맞은편 침대는 이탈리아 형제가 차지했고, 저도 모르게 레자는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형제 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레자를 지켜낸다. 그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어쨌든, 레자는 목숨 하나를 직접적으로 빚진 느낌이다.
레자는 그 죽음들을 지켜보며 가라앉는다. 진짜 페르시안이라서 죽임을 당한 사람과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죽은 남자.
이 대목이 코흐와 그의 차이를 보여준다. 레자는 자신의 생존으로 직간접적으로 죽은 이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 또한 죽음으로써 모든 잘못을 짊어지려 한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애석하게도, 코흐는 제 부하들을 총으로 위협하면서까지 죽음을 목전에 둔 그를 끄집어내어 곁에 둔다. 그에겐 아직 레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드디어,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다. 코흐가 그토록 바라던 독일에서의 탈출 시기다. 처음 수용소에 왔을 무렵 질이 꿈꿨던 일이기도 하다. 아마 잡혀온 초반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그는 홀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도망갈 기회가 생기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듯이.
수용소 내 모든 문서들은 활활 타오른다. 레자의 손으로 적힌 무수한 이름들도. 이름의 주인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글자가 사라지면 모든 증거가 사라지는 셈이다. 피해가 없어지면 가해 또한 잿더미가 된다.
코흐는 혼란스러운 수용소에서 레자를 빼낸다. 자신은 공항에 가서 테헤란으로 넘어갈 거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레자를 등진다. 레자는 뒤돌아 자신 앞에 놓인 광경을 본다. 눈으로 뒤덮인 곳. 길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만들 모든 발걸음이 곧 길이 될 테다.
당연히 코흐는 국경을 넘지 못한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벨기에인 행세를 하려 들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그의 눈동자는 마구 흔들린다. 하지만 꿋꿋하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모국어처럼 익숙하게 말한다. 그는 알 수 없었을 테지. 단순히 속은 게 아니라, 그가 말한 것들은 모조리 사람의 이름이었다고.
마지막.
질은 영국군에게서 질문을 받는다. 수용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느냐고. 수천 명이라는 답. 살아남은 다른 생존자들 또한 쉬이 답할 질문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그중에서 기억 남는 이름이 있냐고. 기대가 담기지 않은 물음이다. 살아있는 게 기적인 그들에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있다. 2,840개의 가짜 페르시아어. 2,840개의 이름들. 2,840명의 사람들이. 그는 머릿속에 빼곡한 명부를 읊는다. 천막 안이 점점 고요해지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린다. 공간은 그의 목소리와 빠르게 놀리는 펜촉 소리만 들린다.
죄책감, 고통, 미안함, 고마움, 공포, 안도. 뒤섞인 감정은 눈물이 되어 뚝 뚝 떨어진다. 그래도 그의 입은 계속 단어들을 뱉는다. 살기 위해 빌렸던 단어들에게 진실을, 원래의 이름을 돌려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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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질> 장점이 곧 한계가 되는 94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언론 시사회를 끝낸 '황정민(황정민)'은 귀가하던 중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최기완(김재범), '염동훈(류경수)', '고영록(이규원)'을 마주한다. 모욕적인 질문과 요구를 일삼는 그들에게 따끔한 조언을 남기고 갈 길을 가던 정민. 그러나 집에 들어서려는 순간 습격을 받은 그는 정신을 잃었다가 포박된 채로 간신히 깨어난다. 전날 밤에 마주쳤던 청년들과 재회하고, 그들과 동료인 '샛별(이호정)'과 '용태(정재원)'가 가하는 협박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자신과 또 다른 인질 '소연(이유미)'의 몸값으로 현금 5억 원을 주기로 약속한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정민은 배우로서의 역량을 총동원해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필감성 감독의 장편 영화 연출 데뷔작인 <인질>은 유덕화 주연의 중국 영화 <세이빙 미스터 우>의 리메이크작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모큐멘터리라는 점으로, <여배우들>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차인표>처럼 스타들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 의도적으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 상황 자체를 즐기도록 유도한다. 한국영화에서 모큐멘터리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질>은 존재 자체로 신선한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대담한 시도는 흥행 보증수표이자 원톱 주연으로서 영화를 지탱할 연기력도 일찌감치 검증된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갖는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는 대체 불가능한 황정민의 존재가 <인질>의 근본적 한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황정민의 존재감에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과연 허구와 현실 사이를 오가는 모호함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물론 <인질>의 황정민 활용법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특히 정민이라는 캐릭터는 그가 배우다운 존재감을 발휘하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순간마다 빛난다. 본래 지병인 심장병을 활용해 인질범들과 수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정민이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만 넌지시 일러준다. 그러고는 의자에 묶인 채 심장병이 도졌다며 고통스러워하는 정민을 제시한다.
이 순간 그가 실제로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객과 달리 인질범들은 그가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가 그 확신과 의심의 정황을 짧은 순간 수 차례 비틀기 때문에 관객과 인질범이 혼란 속이 느끼는 서스펜스는 자연히 고조된다.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곧 캐릭터인 점을 이용해 현실과 허구 사이의 모호함을 영화 내외적으로, 양쪽 모두에서 극대화하는 것이다. <베테랑>과 <부당거래> 속 캐릭터 이름을 이용해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 <신세계>에서의 명대사를 활용한 유머가 등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 외에도 <인질>은 작중 사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연출이나 인질범들이 유튜브를 통해 폭탄 및 총기 제조법을 배우는 설정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허구의 영화를 현실로 끌어들인다. 신인배우들을 대거 등장시키는 것은 그중 가장 영리한 선택이다. jtbc 드라마인 <이태원 클라쓰>나 <알고 있지만,> 등에서 눈도장을 받은 염동훈 역의 류경수나 샛별 역의 이호정이 출연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낯선 마스크를 지닌 배우들 덕분에 황정민이 경험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를 순간 혼란스러울 정도로 섬뜩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메인 빌런 최기완의 첫 등장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인질>의 줄타기는 이내 점점 위험해진다. 영화가 황정민이라는 배우에게 집중하기보다는 판을 키워 나가면서 점차 균형점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인질범들은 황정민의 집에 침입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돈을 갈취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고,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도 적지 않은 비중과 분량을 할당받는다. 이때 카메라가 황정민이 갇혀 있는 아지트 밖으로 나가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그의 존재감은 줄어들고, 아지트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문제점들은 햇빛 아래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림자 밖으로 나온 <인질>의 단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황정민의 빈자리를 채워야 할 다른 캐릭터들이 충분히 구체적이고 입체적이지 않다. 말투와 걸음걸이, 표정과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실제 인물을 그대로 옮긴 듯 생동감 넘치는 작중 황정민 캐릭터에 비하면 나머지 인물들은 일반화되어 있고, 도구적이고 작위적으로 소비된다. 압도적인 악역처럼 보이던 기완만 하더라도 익히 접해왔던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전형을 답습하는 데 그친다. 첫 등장과 달리 그는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인 인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쉽게 끓어 올라서 위기를 자초한다. 그가 경찰들을 놀려먹는 것도 치밀함보다는 절박함의 발로에 불과해 보인다. 다른 범인들이 욕과 고함을 반복할 뿐, 기존의 악역들과 특별한 차이점을 보여주지 못하는 데서도 이미 존재하는 캐릭터의 얼굴만 달라진 깊이의 부족이 드러난다.
이렇게 평면적인 캐릭터의 근원에는 짜임새가 부족한 서사가 있다. 각각의 인물들이 뛰어놀 수 있는 판이 제대로 깔리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황정민이 인질범들의 아지트에 갇힌 직후 영화는 다섯 범죄자들의 관계를 훑어준다. 이때 그 안에서의 위계나 애정관계, 이해타산이 꽤 명확하게 드러나다 보니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행동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나마 기완이 선사하는 반전이라고 할만한 대목도 예상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경위의 세밀함보다 사건의 진행과 임팩트를 보여주기에 급급한 것도 문제다. 마치 <더 테러 라이브>가 각 사건들의 연결성보다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분위기와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선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당장 국민배우가 갑작스레 납치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기에, 막상 범죄자들의 동기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충동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그들의 관계에는 그 외에 아무런 접점이 없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굳이 온 세상에 자신들의 범죄 행각을 들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잘 알려진 연예인을 납치하는 이유는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모든 문제는 한정된 예산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야 하기에 캐릭터들의 사연을 가능한 한 압축시켜야 했던 선택과 집중이 낳은 불상사로, 결국 영화의 장점이 돌연 한계로 전환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인질>은 상업적으로 유효하고 재밌는 영화다. 원 테이크로 찍은 카 체이싱 장면이나 산에서의 추격전은 박진감이 넘친다.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뚝심도 인상적이다. <부당거래>, <신세계>, <베테랑>과 같은 황정민의 필모그래피를 훑는 장면과 더불어 여러 영화들을 오마주한 장면들은 마치 한국의 범죄 액션 영화를 총망라하는 듯 보이며 색다른 재미를 준다. 빗속에서 정민과 기완이 펼치는 격투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을 연상시키며, 경찰이 취조실에서 범죄자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여러 범죄 영화의 잔상이 느껴진다.
단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결정적인 장점인 '현실과 픽션의 모호한 경계를 즐기는 재미'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순간, <인질>의 한계가 도저히 숨겨지지 않는다는 유일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을 뿐이다.
A(Acceptable, 그럭저럭 괜찮음)
황정민의, 황정민에 의한, 황정민을 위한 9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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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으로 빚어진 비극과 희극 그리고 단절감에 대한 무력함
시놉시스
피에트로는 12살 무렵 브루노를 처음 만났다. 둘은 금세 친해졌지만 피에트로가 토리노로 가게 되면서 사이는 멀어진다. 10년의 시간이 흐르고 브루노는 벽돌공이 되어있었고 대학생이 된 피에트로와 만나지만 인사는 하지 않는다.
한편 피에트로의 아버지와 피에트로의 사이가 멀어진다. 진정한 친구인 브루노와 함께 있었던 시절이 좋았던 걸까? 피에트로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음을 굳게 닫힌 채 살아간다. 하지만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고 31살이 된 피에트로는 브루노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과연 어떤 모습이 변해있을까?
브루노는 삼촌과 낙농업을 하며 살고 있었다. 왜냐하면 브루노의 아버지는 벽돌공이었고 술주정뱅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고 했지만 브루노는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가게 된다.
반면에 피에트로는 자신의 아버지가 공장의 엔지니어이면서 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고 대들며 자신이 택했던 전공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12살에 아버지와 함께 친구인 브루노를 데리고 빙하와 산을 올라갔다.
고산병이 있었던 피에트로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자신을 산에 데리고 갔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난 후 자신이 이룬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브루노를 다시 만나면서 집을 같이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부탁을 받은 후에 피에트로는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 집을 만드는 걸 배우게 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작가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만약 피에트로에게 브루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친구의 우정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친구가 있으면 서로 조언도 해주고 덕담도 오갈 수 있다.
그렇지만 친구 사이에도 희극과 비극이 존재한다. 피에트로는 먼저 직장을 가지고 비전이 있는 브루노를 동경했지만 브루노도 실패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장기적으로 더 성공한 피에트로를 동경하게 된다..
브루노는 우연히 피에트로의 친구들 중에 라라와 인연을 맺지만 낙농업을 준비하다가 빚만 늘어나서 허덕이게 된다. 결국 가정도 파멸하게 되어 산에서 홀로 살아간다. 그러고는 처참한 비극의 주인공이 돼버린다.
피에트로도 친구를 잃은 아픔을 꽤 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영화는 말해준다. 사실은 피에트로가 네팔 여행을 하면서 히말라야 산도 가보고 네팔에서 거주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여덟 개의 산이라는 네팔인들의 세계관을 보고 어이가 없어하지만
진정 자신이 깨닫게 된 건
브루노와의 단절이 자신에게 큰 단절로 되돌아온 것이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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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셜록과 왓슨을 뒤이을 추리 듀오 드라마 6
우리 때는 다 셜록이랑 왓슨 좋아했다 •••
셜록과 왓슨 듀오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씨네픽이 준비했습니다!
댓글로 여러분만의 듀오도 추천해 주시면, 씨네픽지기가 놓치지 않고 챙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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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많은 소녀
죄 많은 소녀
충격적인 영화다. 주제, 배우의 연기, 감독의 연출 모두 예사롭지 않을 뿐 아니라 탁월하다. 저예산 독립영화의 작품 수준이 이 정도라면, 한국영화는 가능성과 희망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다.
여자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한 여학생의 자살 사건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어떻게 살해하는가'에 관한 핍진한 관찰 기록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관객의 심리를 건드린다. 그것은 배우들의 연기 뿐 아니라 음악, 음향, 인물들이 놓여 있는 극단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도록 한다.
경민이 실종되고, 담임 선생과 형사들은 전날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를 불러 경민의 실종에 관해 묻는다. 학교에 오지 않은 경민의 부재를 보면서, 영희도 마음 속에 한가닥 불안함이 꿈틀거리는데, 담임과 형사는 경민의 실종에 영희가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질문한다.
영희는 억울하다. 형사는 영희와 친하게 지내는 한솔을 불러 영희와 대질 심문을 한다. 한솔은 영희가 경민에게 '죽을 용기도 없는 게...'라는 말을 했다고 말하면서 영희의 말이 경민의 실종 또는 자살을 부추기는 말을 했을 거라는 의미로 말한다.
영희는 사실을 말하지만, 이때까지 관객은 영희와 한솔의 진술 가운데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영희의 태도는 자칫 도도하고 건방져 보이기도 하고, 담임을 비롯한 학교의 선생과 경민의 부모는 경민이 아무 이유없이 실종되거나 자살할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가장 만만한 아이가 영희였다. 실종 전날 밤 늦게까지 함께 있었고, 경민의 가방과 신발이 발견된 장소 부근에 있는 CCTV를 모두 조사한 결과, 경민이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밝혀졌다. 그렇다면 경민과 마지막까지 있었던 영희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경민이 실종 또는 자살한 것일까를 선생들과 형사들은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했다.
영화에서 경민은 자살한 것이 확실하다. 다만, 경민이 왜 자살했는가에 관한 이유나 암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중에 경민의 시신이 발견되고, 모든 사람들 - 선생들, 형사들, 심지어 같은 반의 친구들도 - 이 영희를 의심과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면서, 영희도 억울함을 벗어나려고 자살을 기도한다.
영희가 병실에서 겨우 회복하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찾아와 경민의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다고 알려준다. 즉, 경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유서를 쓰고 자살한 것이며, 영희가 함께 있었던 날은 우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선생들과 같은 반 친구들은 - 그들 가운데는 영희의 집으로 쳐들어가 영희를 린치한 몇 명의 같은 반 친구들도 있었다 - 경민이 영희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상황이 분명해지는 순간 모두 태도를 바꾼다. 영희를 의심하고 비난하던 친구들이 다정한 태도로 영희의 건강을 걱정하고, 병문안을 오며, 기꺼이 어려운 일을 돕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같은 세대의 갈등은 봉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경민의 자살에 영희보다 더 책임이 있는 사람은 '한솔'이었다. 영희와 가까운 친구였지만, 영희가 경민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질투를 느끼고, 영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다. 한솔은 영희가 병원에 있을 때 찾아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한다. 영희도 한솔을 안아주고 입맞춤을 하는데, 이 영화에서 동성애 코드를 넣은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희와 한솔은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영희를 괴롭히는 또 한 사람은 경민의 엄마다. 경민이 자살한 직접적 원인은 알고 보면 그의 부모에게 있다. 경민의 부모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원인과 책임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그래서 경민의 유서가 발견되었음에도 영희의 병실을 찾아와 영희를 괴롭힌다.
처음부터 영희의 말을 믿지 않았던 선생들과 형사들, 경민의 엄마는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경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물으려 하고, 없는 죄를 덮어 씌우려 했던 기성세대에게 영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는 '자신의 죽음'이다. 그래서 영희는 표백제를 먹고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실패한 죽음 이후에도 영희는 끝없이 자살을 궁리한다. 이때 두번째 자살은 명백한 의도와 목적을 갖는다.
영희가 경민에게도 말했듯, 지금과 같은 의미 없는 삶이라면 사는 것과 죽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고등학생은 가장 고통스러운 세대다. 이미 유치원,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는 암기식 수업을 해야 하고, 여러 개의 학원을 다니며 밤낮 없이 공부, 공부, 공부만 하는 지겹고 역겨운 나날이 무려 12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여기에 부모의 무관심(경민), 가난(영희)과 같은 외부적 환경까지 겹치면서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은 우울하고 괴로운 심리상태가 된다. 청소년들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질식시킨 건 기성세대인데, 정작 그 기성세대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한다.
영희는 그런 기성세대를 보면서 환멸과 증오의 감정이 차갑고도 날카롭게 솟아나는 걸 느낀다. 영희는 한솔과 함께 경민의 엄마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한다. 자기(영희)는 경민이 왜 죽었는지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경민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이면 내(영희)가 왜 죽었는지 사람들이 당신(경민 엄마)에게 물어볼 거다. 그때 내 죽음에 대한 이유나 잘 대답하길 바란다.
즉, 영희는 경민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추악한 책임전가를 그대로 경민 엄마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앞부분에서 경민의 죽음을 두고 선생들, 형사들, 경민 엄마는 영희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한솔은 그 장면을 보면서 침묵한다.
이제, 영희가 죽게 되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경민 엄마가 되고, 그 옆에 한솔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형사와 사람들은 영희의 죽음에 대해 경민 엄마에게 물을 것이고, 한솔은 역시 침묵할 것이다. 경민 엄마는 당연히 영희의 죽음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을 것이며, 한솔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도 사과할 대상이 사라지고, 죄책감은 무겁게 그의 삶을 짓누를 것이다.
처음부터 경민의 죽음은 기성세대가 만든 원죄의 결과이며, 기성세대가 저지른 타살이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세대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전가한다.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억울함이 기성세대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게 되고, 기성세대에 대한 복수는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완성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김의석 감독은 이 작품이 장편 데뷔작인데,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 연출부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대부분이 여성이어서 여성의 심리, 세부적인 생활 모습을 보면서 여성 감독인 줄 알았는데, 남성 감독이어서 놀라웠다.
영희가 형사에게 추궁당하고, 마치 범인인양 낙인 찍히고 나와서 화장실에 앉아 생리대를 보는 장면은 영희의 심리와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영희는 죽을 만큼 억울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하혈인 것처럼 보이는 다량의 생리혈을 보여줌으로써, 영희가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는 걸 관객이 느끼게 한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다리를 향해 걸어가는 영희는 중간에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볼 듯 하다 다시 걷는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다리 안쪽을 향해. 영희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을까. 성대를 다쳐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뱉어내지 못한다. 그의 침묵은 죽음보다 무겁다.
배우 전여빈의 연기는 마치 '곡성'에서 어린이 배우 '김환희'의 연기와 비교할 수 있다. 그만큼 처절하고 극적이다. '영희'는 자존감도 있고, 자기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청소년이지만, 그 모습이 기성세대에게는 건방지고 불편하게 보인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신세대를 길들이려는 기성세대의 어리석은 모습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억울한 심정을 꾹꾹 눌러 참으며, 자신을 죽임으로써 기성세대에 복수하겠다는 영희의 태도는, 죽을지언정 기성세대에 굴복하거나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기성세대가 저지른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고발하겠다는 자기파괴적 행동이 극단적으로 보여도 그같은 방법 밖에는 가지지 못한 약자의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영희'는 기성세대가 키운 훌륭한 신세대지만, 결국 기성세대가 죽인 신세대이기도 하다. 아니, '영희'는 기성세대가 키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잘 큰 신세대였고, 그를 죽인 기성세대는 오만하고 건방지며, 비겁하고, 야비한 존재였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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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생각하는 아이들, 생각하는 학교
감독: 네사 니 시아냔, 데클란 맥그래스
출연진: 맥커리비 교장 선생님과 아이들
시놉시스: 벨파스트 지역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는 특별한 철학 수업이 있다. 이 수업을 주재하는 맥커리비 교장 선생님은 엘비스를 추앙하고 고대 철학을 사랑하는 유쾌한 사람이다. 빈곤과 마약, 종교 분쟁으로 얼룩진 벨파스트 지역은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담보하기 어려운 동네. 맥커리비 선생님은 만연한 폭력과 빈곤의 그늘에서 아이들, 나아가 그들이 사는 바로 이곳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수업 방식에 그리스 철학자들의 지혜를 동원한다.(하략) (최은영)
아일랜드, 벨파스트 지역에는 특별한 초등학교가 있다. 벽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세네카 등 저명한 철학자들의 명언이 장식되어 있고,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우며 자유로이 토론한다. 교장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는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교장 선생님과의 토론을 통해 스스로의 잘못과 그것의 인과 관계, 그리고 그러한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아 나가게 된다. 학부모는 학교를 신뢰하고, 선생님의 말을 존중한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 학교란 말인가? 요즘 한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초등학교 이슈들(주로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에 얽힌 불합리한 사건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이지 영화 같은 일이어서, 필자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는 이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닌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학교는 절로 생기지 않는다. 마치 헤엄치는 백조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 학교를 있게 했다. 교장은 권위를 내려놓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동료 교사들을 교사로서 존중한다. 아이들이 방황의 기로에 놓였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는 이 역시 그이다. 마약과 종교 분쟁, 총기 사고 따위로 삭막하고 황량하던 벨파스트 지역에서 아이들이 어두운 길로 빠져들지 않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맥커러비 교장이 목표한 바이다. 그러나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비단 아이 그 자체만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벨파스트 지역이 가지는 특수성은 때로는 그들의 노력을 무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와 교직원들은 노력한다.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아이의 삶과 생각을 바꾸는 일이고, 그것은 나아가 벨파스트와 아일랜드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장은 말한다. 단 하나의 학생이라도 그들로 하여금 좋은 변화를 맞이한다면 그것으로도 좋을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투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다.
완전히 같은 직종은 아니지만 나도 비슷하게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으로서 이 학교의 이야기는 여러 부분에서 좋은 영감을 주었다. 열정적인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껏 열정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을 신뢰하고, 그만큼 지원하며 바라는 대로 따르는 환경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교사는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들이 받는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언젠가 한국도 이런 학교가 생길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09-16(토)15:00 - 16:42 롯데시네마 은평 7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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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앰뷸런스, 정신차린 마이클 베이 감독의 긴장감 넘치는 액션 영화
?Rabbitgumi입니다!!
파괴지왕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앰뷸런스가 개봉했습니다.
사실 아주 크게 기대받던 영화는 아니었죠.
예고편을 봤을 때, 은행을 털고 추격전을 벌이는 이야기여서 뻔하게 느껴지기도 했구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꽤 재미있는 액션 영화였습니다.
마이클 베이 감독 특유의 액션 연출 스타일이 그대로 들어가있는데 조금은 질질 끈다거나 오버하는 장면이 줄었어요.
이야기 구성에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액션과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긴장감 만은 확실히 잡습니다.
영상과 음향이 멋집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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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넷]리뷰:내가 이해하려고 만들어본 테넷 시간순서도/테넷 라이브 리뷰/분석/해석
#테넷#테넷리뷰#테넷분석
영화 리뷰어 인생 최대 위기다. 저도 이해 못하겠으니 같이 이야기해요!00:00 (잡담)
05:05 (스포없는 리뷰)
28:45(영화 내용 설명)
1:44:34(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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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랙폰> 메인 예고편
2022년 호러 영화 중 가장 높은 팝콘 지수! 숨막히는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할 #블랙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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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듄: 드리프터> 메인 예고편
최강의 질주 액션!
생존을 위한 사투가 시작된다!우주를 수호하는 제미니 부대는 그레이 리더의 지휘 아래 에레보스 우주 전투에 뛰어든다.
간단한 보호 작전인 줄로만 알았던 미션은 어마어마한 대전투로 드러나고 설상가상,
제미니 부대는 모두 전멸하고 '아들러' 와 '헤이즐'의 함선은 어느 행성에 불시착하게 된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함선과 희박한 산소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어둠의 그림자가 숨통을 조여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