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04-29 18:00:36
[JIFF 데일리]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막달라> 리뷰
막달라|Magdala
다미앙 매니블|Damien MANIVEL
France | 2022|78 min|DCP|Color|Fiction|15|Asian Premiere
시놉시스
예수의 죽음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마리아는 머리가 허옇게 센다. 열매를 따 먹고, 빗물을 마시고, 나무 사이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서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린다. 마리아는 그를 찾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의 죽음 후 동굴과 숲 속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은둔한 막달라의 마지막 순간을 감독의 상상력으로 재연했다. 연기자의 움직임을 담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다미앙 매니블 감독은 전작에서도 협업했던 배우이자 댄서인 엘사(Elsa Wolliaston)에게 인간 사회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홀로 된 막달라의 마음을 따라가게 했다. 영화는 어떤 극적인 이야기나 절망을 나타내기보다 매우 단순하게 막달라의 걸음을 함께하며 연기자가 진실되게 느끼는 공간의 에너지와 자연의 반응을 충실히 묘사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빚는 젊은 작가 감독 다미앙 매니블은 이 영화로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문성경)
성녀(聖女) 막달라 이야기
마리아 막달라(막달레나). 그녀는 호칭이 많다. 예수의 제자. 기독교의 성인(聖人). 예수가 부활했을 때 빈 무덤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다른 제자에게 알린 인물. 오해도 많다.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인. 회개한 창녀. 47년 간 광야에서 지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와 혼동되기도 했다. 필립보, 토마스, 마리아 복음서 등 몇몇 위경 내용에 근거해 그녀가 예수의 연인이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널리 퍼졌다.
다미앙 매니블 감독의 <막달라>도 비슷하다. 위의 이미지가 전부 혼재한다. 막달라는 숲에서 고행 생활을 이어간다. 직접 만든 십자가를 놓지 않는 그녀는 환상 속에서 예수를 만난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발밑에서 우는 막달라. 예수와 몸을 섞는 막달라. 비가 오는 날 예수의 얼굴을 그리며 그리워하는 막달라. 스크린에 비친 그녀는 예수의 제자이자 연인이고 성녀(聖女)다.
인간 막달라의 죽음을 체험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막달라의 외관이다. 일반적으로 막달라는 어리고, 환희에 찬 백인 여성이다. 교회가 만든 그림이나 조각 속 그녀는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다. 영화 속 막달라는 다르다. 그녀는 노년의 흑인 여성이다. 죽음이 임박한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통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든 막달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달한다.
물론 <막달라>는 자기 의도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느리다. 그녀가 이슬 한 방울을 마시는 순간을 10초가 넘도록 보여준다. 클로즈업도 극단적이다. 러닝타임 절반은 그녀 얼굴로 가득하다. 움직임도 거의 없다. 막달라가 한 걸음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막달라>는 전통적인 성녀 막달라의 이미지를 깰 수 있다. 답답할 정도로 정적인 영화는 관음적이다. 주인공 삶의 단편을 훔쳐본다는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실제로 관객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막달라의 삶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얼마나 예수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막달라는 성녀가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막달라는 동굴에 누워 죽음을 기다린다. 천사는 촛불을 든 채 그녀가 죽기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막달라, 천사, 촛불을 천천히 오간다. 초가 녹을수록 막달라의 숨은 약해진다. 긴 시간 동안 연인을 그리워하며 고행을 이어간 한 여성의 삶을 요약하듯이. 마지막 숨을 뱉은 그녀의 손에는 작은 십자가가 있다. 막달라는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 인간일 뿐이다.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죽음
그래서 <막달라>는 이율배반적이다. 몇몇 요소는 '이 영화에 새로운 게 있나?' 싶은 의문을 자아낸다. 환상 속에 나타난 예수는 익숙하다. 다른 영화, 드라마, 그림 등에서 재현한 유대인 남성 그대로다. 임종을 지켜보는 천사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전통에 충실하다. 순진한 얼굴을 가진 백인 소년. 성경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모습대로다.
하지만 종교적인 인물을 묘사하되 결코 종교적이지 않다. 가톨릭 교회가 숨기려 하는 대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비주의적 묘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젊은 막달라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녀 얼굴은 희열로 가득하다. 그런데 신실한 성녀보다는 성적으로 흥분한 여성에 가깝다.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esa)"처럼. 성적 오르가슴을 통해 종교적 신비경을 표현한다. 우연이 아니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따르면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은 성적인 황홀경을 맛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선 막달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자기 심장을 도려내 하늘에 바치는 막달라. 예수가 죽은 뒤 한때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한 채 숲 속을 헤매던 여성은 심장을 도려내는 고행 끝에 옛 연인을 만난다. 실제로 막달라는 죽은 뒤에야 예수를 만나러 승천할 수 있다. 즉, 영화는 한 번의 황홀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신과 하나 되는 '합일' 경험을 다시 경험하려면 고통으로 가득한 수행을 견뎌야 하니까. 틀에서 벗어난 막달라의 죽음이 성스럽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이유다.
영화 <막달라> 상영시간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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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감의 무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단순히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가족, 직장, 사회에 대한 책임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 부모로서의 책임도 생기고, 직장에서는 팀을 이끌거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책임도 생긴다. 이런 책임감이 인생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책임감은 단순히 의무를 다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하고,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의사나 비행기 조종사 같은 직업은 단순히 일을 잘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그들의 결정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최고의 판단을 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다.
영화 <하이재킹>은 이러한 책임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부기장 태인(하정우)은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의식과 책임감을 끝까지 지키며, 희생자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동료인 기장 규식(성동일)과 승무원 옥순(채수빈) 역시 마찬가지로 높은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 역시 승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비행기를 납치하는 용대(여진구)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책임감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게 비록 잘못된 에너지가 되어 발산되지만 결국에 그의 행동도 책임감에서 비롯된 죄책감이 원인이었다.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의 책임감이 어떻게 충돌하고, 그것이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첫 번째 감정] 태인의 책임감
부기장 태인은 과거 공군에서 납치된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어긴 경험이 있다. 그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에 명령을 거부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비행기는 납북되었고 태인은 군에서 퇴출당했다. 이러한 과거가 그에게 큰 두려움을 안겼겠지만, 그에게 여객기 조종사라는 직업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그 일을 그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여객기 조종사가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승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영화에서 태인은 매우 조용하고 진지한 인물로 묘사된다. 특별히 실없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대처하는 그는 이 영화 안에서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다. 비행기가 납치당했을 때도 그는 감정적인 반응을 먼저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그 상황을 대처하며 승객들을 안전하게 내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납치범에게 위협을 당하고 총에 맞는 상황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태인의 책임감은 단순한 의무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일종의 사명감으로 보이기도 하고, 과거에 다른 여객기를 납북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도 그에게 더욱 책임감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강력한 힘이 된다. 그는 납북된 선배 조종사의 가족들까지 챙기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가는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영화 전반에 걸쳐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느 누구도 아닌 태인의 서사가 중심이 된다.
[두 번째 감정] 용대의 분노
납치범 용대는 사실 억울한 인물이다. 북으로 넘어간 형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고 어머니는 혼자 집을 지켰지만, 지병으로 홀로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 그는 가족을 살필 기회도 없었고, 그저 감옥에서 출소해서 돌아온 집에 숨져있는 그의 어머니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상황과 슬픔은 그대로 큰 분노를 만들어낸다. 물론 그의 납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용대의 분노는 그를 비행기 납치로 이끌었다. 그의 분노는 다른 무고한 승객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결국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거나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다. 그는 침착하게 대응하는 부기장 태인을 보며 자신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조금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용대가 가지고 있는 분노가 그의 판단력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그런 행동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용대는 극단적인 선택을 계속해나간다. 북으로 가자는 그의 외침은 후반부로 갈수록 공허하게 들린다. 단지 그의 분노만 화면 속에서 전달될 뿐이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점점 어두워지는 다른 승객들의 얼굴빛에 가려져간다. 그래서 그의 서사 안에서는 그의 행위에 정당성을 가지지만, 비행기 전체의 승무원과 승객들의 서사까지 확대하고 나면, 그 분노는 정당성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분노가 되어버린다.
[세 번째 감정] 규식의 믿음
기장 규식은 처음에는 태인을 믿지 않았다. 공군에서 쫓겨난 태인을 직접 평가하기 전까지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담배를 피우며 태인과 규식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규식은 태인에게 이번 비행에서 착륙을 해보라고 이야기하면서, 태인의 실력을 살펴보려 한다. 외부의 평가는 이미 끝난 태인에겐 그 기회가 그의 경력에 꽤 중요한 기회였다.
이후 비행기가 납치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인은 차분함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본 규식은 부기장으로서의 태도를 먼저 인정하게 된다. 폭탄이 터지고, 비행기에 구멍이 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그 상황을 대처하고 승객안심시키는 모습은 충분히 규식에게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규식은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점차 태인에게 의지하게 되고, 결국 그를 전적으로 믿게 된다.
중반부에 규식은 눈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면서 태인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결국 규식은 마지막 순간에 태인에게 착륙을 맡긴다. 규식의 믿음은 태인이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외부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믿은 규식의 태도는 매우 감동적이다. 이 영화에서 기장으로서의 역할은 무척 제한적이었지만, 리더로서 가질 수 있는 품격은 충분히 보여준 규식이다.
영화 <하이재킹>은 과도하게 감동코드를 밀어 넣지 않으면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 특히 부기장 태인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인데, 그의 우직한 모습이 끝까지 이 영화를 지탱한다. 그가 가진 책임감,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들의 믿음이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든다.
비록 분노에 가득 찬 납치범이 벌인 일이지만, 그를 달래고 설득하면서 좋은 상황을 만들려 애쓰는 모습이 긴장감 있게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실화의 힘이 장점이 되는 영화다. 비행기 불시착한 모습도 실제와 똑같고, 납치범의 사연도 거의 비슷하다. 살아남은 사람들과 희생된 사람들의 구성도 실제와 동일하다. 실화가 좋았기 때문에 담백하지만 긴장감 있는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에는 유머가 전혀 없다. 성동일과 하정우라는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특유의 개그 연기가 전혀 없다. 또한 외부 비상 센터 같은 정부의 대처를 보여주는 장면도 없이, 온전히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이 이 영화의 감정들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가 다루는 당시 시기에는 비행기 납치나 납북이 많았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도 누군가를 살리려는 책임감을 가졌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언제나 그런 사람은 사회에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단지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영화 <하이재킹>에는 그런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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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니퍼 로페즈, 연타석 안타는 무리였을까?
5★/10★
1999년 첫 국내 개봉해, 2019년에 재개봉까지 한 〈노팅 힐〉은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과도 같은 영화다. 할리우드 톱 배우인 여성이 런던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두 인물이 만났을 때 생기는 긴장에 멜로와 코미디를 버무려 지금 봐도 매력적인 연출로 담아냈다. 그리고 20여 년 후. 제니퍼 로페즈가 주연을 맡은 〈메리 미〉가 개봉했다. 〈메리 미〉는 〈노팅 힐〉과 닮은 구석이 많은 영화다. 이번에도 톱스타 여성과 평범한 남성이 있고, 시대적 감성에 맞춰 진보한 멜로·코미디 요소도 있다. 〈노팅 힐〉과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OST는 내내 귀를 즐겁게 한다. 특별히 새로운 요소가 있는 건 아니지만, 로코의 기존 공식을 탄탄히 채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음을 훌륭히 증명해낸 것이다.
〈메리 미〉에 쏟아진 호평 때문일까? 제니퍼 로페즈가 또 다른 로코 〈샷건 웨딩〉으로 돌아왔다. 제니퍼 로페즈는 결혼을 앞둔 신부 달시로 분했다. 완벽주의 성향인 예비 남편 톰의 계획에 따라 필리핀의 한 휴양지 섬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둘. 그러나 시끌벅적한 전야제를 거친 후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 달시와 톰은 사소한 문제로 언쟁을 벌이고, 끝내 둘이 이 결혼에 완벽한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적이 섬을 급습해 하객들을 인질로 삼고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혼식 직전 사실상의 파혼 상태에 다다른 예비 부부는 자신과 하객들을 구하기 위한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여기까지가 〈샷건 웨딩〉이 벌여놓은 판이다.
장르 특성상 달시와 톰이 온갖 역경 끝에 서로를 향한 진심을 확인하고 행복한 마무리를 맺을 거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영화의 완성도는 그 과정을 어떻게 펼쳐낼지에 달렸다. 결과는 다소 실망스럽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달시가 샷건과 수류탄을 들고 섬을 활보하는 장면은 (다소 노골적이긴 하지만) 적당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 과정에서 여성을 옥죄는 전통적인 혼례의 자잘한 규칙이 하나씩 깨지기 때문이다. 몸을 꽉 조이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어쩔 수 없이) 조신한 태도로 임할 수밖에 없는 의례들이 화끈한 전투(?) 과정으로 자연스레 대체되며(피비린내 나는 케이크 커팅 신을 보라!) 달시가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결혼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완벽함에 집착하던 남편 톰 역시 여기에 동참함으로써 평등한 결혼을 향한 여정에 함께한다. 액션과 메시지를 버무린 〈샷건 웨딩〉의 연출은 분명 칭찬 받을 만하다.
그러나 어딘가 헐거워 보이는 장면도 많다. 더 큰 문제는 영화의 몰입을 떨어뜨리는 몇몇 장면에 제니퍼 로페즈가 있다는 점이다. 다소 과한 연기로 영화 톤을 어그러뜨리는 이 장면들은 어쩌면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의욕을 담아내기에는 각본과 연출이 그다지 탄탄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영화의 장점과 단점이 한 배우에게 공존하는 상황이다.
〈샷건 웨딩〉이 〈메리 미〉로 안타를 친 제니퍼 로페즈의 차기작이라는 데서 아쉬움은 더 커진다. 로코가 ‘불가능해진’ 시대(혹은 로코의 유행이 지나간 시대)*에 홈런은 애초에 무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제니퍼 로페즈의 연타석 안타 정도는 기대한 사람들 중 실망감을 느낀 건 나뿐이 아닐 테다.
*https://brunch.co.kr/@cyomsc1/253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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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 목숨을 다 바친 해녀 그리고 바닷속에 감춰진 환경 오염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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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제주도 삼달리에서 현순직 해녀는 87년간 해녀 일을 해왔다. 현순직 해녀는 16살 때부터 아기 상군(상군은 해녀에서 제일 높은 계급)이라 불렀으며 우리나라 바다 어디 안 가본 곳 없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바다에 바친 현순직 해녀가 이제 물질을 마쳤다. 한편 채지애 해녀는 5년 차 경력을 쌓은 해녀이며 원래는 헤어 디자이너 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다로 돌아와 부모님이 하는 해녀 일을 돕는다고 하자 반대가 심했다. 지금은 나름 잠수도 잘하고 물속에서도 수영을 잘한다. 이 두 해녀가 전해주는 바다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해녀들은 잠수복을 입고 빗창을 들어 바다로 들어가 성게와 소라를 잡는다. 그런 고달픔을 풀기 위해서 해녀 노래를 부른다. 해녀 노래는 해녀들의 일의 고됨을 알려주는 제주도 민요이다. 또한 이어도 설화와 용왕할머니라는 민간 신앙을 믿음으로서 해녀들이 얼마나 바다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다가 오염되어 해녀들의 일자리도 잃고 있고 물꽃과 미역 줄기들이 가득하던 바다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현순직 해녀는 바다가 부모보다 더 많은 걸 준다고 말한다. 2016년의 바다부터 2021년의 바닷속을 비교한 영상을 보여주는데 풍성함이 가득했던 바다는 이제 남은 게 없고 성게들이나 소라들도 사라졌다. 바다에만 목숨을 바친 현순직 해녀의 큰 아쉬움과 더 이상은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한은 바다만 한없이 쳐다보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주도 해역의 바다가 예전처럼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환경 오염에 대한 심각성을 보는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물꽃은 이제 전설이 되어버렸다. 물꽃은 이제 볼 수 없으며 바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가 무심코 방치한 환경 파괴가 바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흔히 말하는 전설 속의 생명체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마도 우리가 환경 오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사라질 위기종들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는 일이다.
" 우리는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지구를 물려받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로부터 지구를
빌린다 "
<아메리카 원주민 속담>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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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음악의 힘
혼자 산 지 오래된 사람들은 혼잣말을 잘한다. 혼잣말은 대개 말로 끝나지 않고 리듬을 부여받는데, 나이듦의 증거라고도 한다. 난 주로 '안경이 어디 갔을까'를 노래한다. 안경잽이들에게 가장 난제는 안경찾기이다. 안경이 있어야 안경을 찾는데, 안경이 없어서 안경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책 싫어하고 운동 싫어하고, 미술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음악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동서고금 어디에도 그들만의 음악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슈퍼스타K, K팝스타, 위대한탄생,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국민가수, 싱어게인... 노래 경연 프로그램만 해도 벌써 몇 개인지. 거기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어쩜 그리 노래를 잘하는지.
그덕에 내한 온 해외가수들이 감격하고, 음악영화들이 대박을 터뜨린다. 나도 음악영화들을 참 좋아하는데, 3일차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두 개의 음악영화를 보고 왔다. <코다>와 <노래로 쏘아올린 기적>이다.
이 영화들을 음악영화라고 감히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노래가 주제이니 거칠게 음악영화로 분류해본다.
장애인 가족 속 비장애인 자녀, <코다>
<코다>는 농인가정의 청인 자녀를 뜻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아카데미에서 상 받았다 정도나 알았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터라 영화를 보는 내내 '이거 이래도 되나' 싶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찾아보니 프랑스 영화인 <미라클 벨리에>의 리메이크판이었다. <미라클 벨리에>의 주인공 폴라는 초등학생이고 <코다>의 루비는 고등학생이다. 폴라 엄마랑 루비 엄마가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폴라의 부모는 목축업에, 루비의 부모는 어업에 종사하고 폴라에게는 남동생이, 루비에게는 오빠가 있다, 정도가 바뀐 설정이다. 주인공이 청소년으로 설정되면서 남학생과의 풋풋한 하이틴 로맨스도 한 스푼 첨가되었다.
장애인을 부모로 둔 비장애인 아이는 한 번도 아이일 수 없다. 세상으로부터 부모를 지켜야 하고, 비장애인들의 세상에 부모의 언어를 통역해주어야 한다.
농인의 가정에 청인, 게다가 노래 잘하는 자식이라니. 이건 축복일까? 자식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아예 노래라는 게 어떤 것인지 들어본 적이 없어 그저 물고기를 잘 잡은 것과 비슷한 기분일까. 감히 추측할 수 없지만, 그냥 영화에서 보여주는 대로 느껴본다.
영화는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자식인 루비마저도 부모를 도와야 할 사람, 지켜야 할 사람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가족에게로 갈아넣고자 한다.
그러나 오빠의 말처럼, 루비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의 가족들은 잘 살았다. 비장애인들과 함께 그럭저럭 살아왔다. 장애인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비슷하지 않은가. 정상인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 사회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장애도 있으면서 왜 애를 낳아서는, 거기에 속된 말들까지 덧붙여.
노래가 뜻대로 되지 않자 루비는 말한다. 한 번도 부모님 없이 해본 적이 없다고. 루비의 부모는 좋은 부모였다. 장애인은 장애를 가졌다뿐이지 스스로의 역할들을 해내며 살아간다.
장애인을 재단하고, 범주화하고, 자신만의 개념 속으로 밀어넣는 것, 즉 대상화는 혐오이고 폭력이다. 그건 장애인이 아니야, 내가 아는 장애인의 모습으로 행동해야지, 바람직한 장애인의 모습이 아니니 도울 필요도 없지, 장애인이면 착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이런 문장들이 랜선을 타고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폭력을 자행했는지 반성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음악은 <미라클 벨리에>가 좋았고, 영상미는 <코다>가 좋았다. 두 영화를 함께 보는 것도 권하고 싶다. 영화 후반부에 가서, 오디션을 볼 때 수어를 함께 사용하는 장면은 <미라클 벨리에>에서도, <코다>에서도 눈물이 났다. 다 알면서도.
폐허 속에서도 음악이 흐르네, <노래로 쏘아 올린 기적>
영화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네 명의 아이들이 냄비 따위를 들고 노래를 해서 돈을 버는데, 벌이가 영 시원치 않다. 그중 노우르는 유일한 여자아이이자 모임의 리더이다. 어지간한 남자아이들보다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똑똑하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 났지만 꿈이 크지 않은 동생 무함마드에게, "유명해져서 세상을 바꿀 거야"라고 말하라며 협박하는 무서운 누나이기도 하다.
이들은 물고기를 잡아 번 돈을 밀수꾼자에게 날렸지만 사원에서 코란 성가를 불러 돈을 벌어 악기를 마련한다. 무함마드는 동네 음악선생에게 과외도 받는다. 이후 결혼식 축가 등 돈 되는 대로 일을 하다가(그 어린 아이들이) 갑자기 누나 노우르가 신부전으로 쓰러진다.
너무 비싼 수술비 때문에 신장이식을 받던 노우르는 투석 중 사망하는데, 그 이후 무함마드는 대학에 진학하여 노래가 아닌 택시기사로 학비를 번다.
그러나 우연히 음악경연대회에 원격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페이스북을 통해 옛날 누나와 함께 투석하던 아밀을 만나게 된다. 무함마드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르는 아밀을 보고 무함마드는 다시 한번 누나를 떠올리고, 노래를 부르겠다고 다짐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TV에서 '아랍 아이돌'이라는 경연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걸 알게 된다. 장소는 이집트. 가자지구에서 이집트까지는 사실상 갈 수가 없다. 그때, 무함마드는 예의 돈 떼먹은 밀수업자를 찾는다. 비자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밀수업자도 폭탄으로 인해 다리를 잃었다. 전쟁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파괴한다. 무함마드는 가까스로, 또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어 겨우 이집트에 도착하지만, 표를 구할 수가 없다. 절망한 무함마드는 화장실에서 노래를 부른다. 무함마드의 노래소리를 듣고 옆칸에 있던 사람이 표를 주고, 무함마드는 경연에 나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자면, 무함마드가 노래를 부를 때 가자지구의 사람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모습이다. 폐허가 된 마을에서도 음악은 축제가 되고, 한 명의 영웅을 응원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모은다.
음악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폐허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부르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소리.
<노래로 쏘아 올린 기적>은 사실 스토리라인이 허술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클리셰가 지나치고, 또 신파적이기도 하다. 부자연스러운 대사들과 연기들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영화에 주목해야 한다.
<코다>가 헐리우드식의 전형적인 영화라면, <노래로 쏘아 올린 기적>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선 문법이다. 배우, 이름, 음악, 배경, 모든 것이 낯설다. 두 영화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에는 상대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은 너무도 생경하였는데, 나는 외국의 음악이라면 팝이나 알지 그 외 문화권의 노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함마드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감동 포인트를 찾는다는 것도 사실 너무 어려운 일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고, 지금도 수많은 팔레스타인, 특히 가자지구의 사람들이 학살되고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신의 이름으로 백린탄 등의 미사일을 쏘며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죽인다. 한때 홀로코스트를 겪었으면서도 팔레스타인의 민간인들을 다 죽일 기세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정치적인 것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 상당히 꺼려지지만, 한 개인으로서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이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러시아의 편을 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관심을 가진다. 자원과 관련되기 때문이 아닐까? 러시아의 석유, 천연가스와 우크라이나의 밀 농사가 각국의 경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직까지도 내전이 그치지 않는 아프라카 대륙의 르완다, 최근에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내전, 그리고 수십 년째 지속되는 팔레스타인 전쟁, 미얀마의 민주항쟁에는 관심이 덜하다.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미미하기 때문이라고 예상해 본다. 가자지구에 미사일이 날아가도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목소리로 가자지구의 상황을 알렸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나라일지라도 한 가수가 유명해짐으로써 가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실화여서 슬프고, 실화여서 다행이지만 또 불행이기도 하다.
폐허에서도 예술은 살아있고, 당장 집이 날아가고 사람들이 죽어도 사람들은 음악을 사랑한다. 그것이 음악의 힘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 이래 음악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일 것이고,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영화를 어찌 기존의 문법으로 재단하고 비평하겠는가. 그건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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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형벌, 징벌(Posessions, 2020)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벌을 준다는 의미의 징벌은 드라마에서 인물들이 자주 언급하는 말이자, 극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유대교의 신앙에서 간통죄에 대한 처벌로 여겨지는 표식을 나타낸다. 갑작스레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랑이 목이 베인 채 사망하게 되고, 칼을 들고 있던 신부 나탈리는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다. 이 메인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갈등과 대립, 진실을 파헤치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징벌>은 이스라엘/프랑스 드라마인 만큼 그 정체성이 다면적이고 기존에 봐왔던 드라마들과는 다른 독특한 면모가 있다. 신랑은 이스라엘인 용의자 나탈리는 프랑스인이고, 모두가 유대교라는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배경은 이스라엘이고, 불어, 영어와 히브리어가 등장한다. 6부작이라는 다소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전개 대다수에는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빠르고 시원시원한 전개를 원하는 시청자들에겐 다소 불편할 수 있으니 미리 주의를 바란다. 극 전체적으로 짙게 깔린 모호한 분위기와 답답한 감정선들은 후반부로 가서야 어느 정도 해소되기 때문. 다소 여성의 인권이 낮은 이스라엘 사회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유대교의 종교 사상 등이 반영되어 형사인 에스티가 주위 남 형사들에게 듣는 차별적 말들, 나탈리의 엄마가 집착하는 종교사상들과 주위 여론에 의해 희생양이 돼버린 나탈리의 상황들은 이스라엘 여성들의 입장을 잘 대변해 주는 듯하다. 게다가 주인공 나탈리의 행동과 미묘한 표정들은 사건을 더욱 미궁으로 빠지게 하는 미스터리다. 어느 날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누가 봐도 무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또 한때는 큰 비밀을 숨기기라도 한 듯 수상쩍은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마지막 화의 반전은 가히 놀라울 것이다.
물론 인물 간의 관계는 매우 촘촘하고 흥미롭다. 나탈리를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카림이라는 인물이 그중 하나인데, 프랑스 영사관 직원이자 아랍계 프랑스인이다. 영사관 직원이라는 직위답지 않게 그는 어느샌가 형사의 영역으로 넘어와 나탈리와 함께 숨겨진 비밀들을 찾아가고, 이스라엘 형사인 에스티와 함께 범인이 누구인지 같이 추적하면서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기도 한다. 카림이 이렇게까지 깊숙한 영역으로 들어온 이유에는 나탈리에 대한 연민이 어느 정도 적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을 설명해줄 중요한 인물들이 하나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수사에 혼선이 생기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범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고 잡혔을 때에도, 그에게는 통쾌함보다 연민이 제일 강하게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도 다 타의에 의한 압박과 비정상적인 통제에 의해서라는 생각이 확연하게 들기 때문인 것 같다. 마지막에도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 모든 건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두가 떠안고 가야 할,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새겨진 징벌이 된 것이다.
원제인 소유물로 결말을 해석해 본다면 나탈리는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야만 하는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행한 불가피한 선택들이 더 큰 파멸을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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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닐라 스카이> - ‘쓴맛과 단맛이 뒤섞인 진짜 하늘로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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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Vanilla Sky)
개봉일 : 2001.12.21. (한국 기준)
감독 : 카메론 크로우
출연 : 톰 크루즈, 페넬로페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 커트 러셀
‘쓴맛과 단맛이 뒤섞인 진짜 하늘로 뛰어들다’
완벽한 현실과 완벽한 꿈, 순식간에 뭉개져버린 현실과 여전히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는 꿈. 현실과 꿈의 경계가 조금씩 모호해지고, 눈을 뜬 순간 머물고 있는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 순간. 내면 깊은 곳에 품어뒀던 그녀가 말을 건다. “눈을 떠!”
33살의 젊은 나이, 잘생긴 얼굴과 튼튼한 몸에 잘나가는 출판사 사장인 데이빗은 언제부턴가 자각몽을 꾸기 시작한다. 그는 사고로 부모님을 일찍 여윈것을 제외하면 남부러울 것 없는, 소위 말하는 달달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다. 데이빗도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유일한 단점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뿐인데, 그의 인생에 크게 문제가 될만한 것은 아니었다. 죽이 잘 맞는 친구 브라이언과 데이빗을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친구 토미 아저씨. 그리고 가끔씩 같이 밤을 보내는 파트너 줄리. 데이빗의 인생엔 절망과 실패는 티끌만큼도 없어 보인다.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데이빗의 삶이 망가지게 된 건 데이빗에게 상처를 입은 줄리가 그와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한 순간부터였다. 소피아와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아침, 날아갈 듯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된 하루는 종잇장이 바람에 날리듯 순식간에 뒤집어져버린다. 데이빗의 얼굴은 무너져내렸고, 사고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회사 위원회는 데이빗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이빗은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하고, 의사들이 내민 가면을 쓰며 자신의 얼굴을 외면한다. 매일 아침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던 얼굴이 아닌, 수술 자국이 가득한 망가져버린 나의 얼굴. 그리고 운명이라 느낀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없을 거란 좌절감이 그를 휘감는다.
눈을 마주친 순간,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 인생을 바꿀 운명이라 직감했던 그녀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사고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은 데이빗을 제자리로 돌려줄 수 있을까. 쓰디쓴 것이 현실이고 달콤한 것은 꿈인가. 처음으로 마주한 쓴맛 가득한 현실은 데이빗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바닐라 스카이 시놉시스
남다른 매력과 탄탄한 재력으로 수많은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데이빗 에임즈. 그는 유력 출판사와 잡지사를 운영하는 와중에 줄리라는 여자를 만나지만 그녀는 단지 섹스 파트너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빗은 자신의 생일 파티에 온 친구 브라이언의 애인 소피아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녀가 바로 자신이 꿈에 그리던 운명의 상대임을 직감하는 데이빗. 소피아 역시 그에게 이끌려 둘은 뜨거운 연인 사이가 된다. 하지만 데이빗에게 버림받은 줄리는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이들을 미행하고, 마침내 데이빗과의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사고 이후 데이빗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자기 얼굴이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것을 알고 괴로워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눈을 떠”
아침이면 얄짤없이 울리는 알람 소리. 데이빗은 그 소리에 눈을 뜬다.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살핀다. 오늘도 여전히 완벽하군-이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현실 같은 꿈을 한번 꾼 것을 제외하면 이상할 것 없는 완벽한 아침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33살의 나이에 오른 잘나가는 잡지사 사장 자리. 밤을 보내는 파트너 ‘줄리’. 그리고 자연스레 꼬이는 이성들. 데이빗의 절친 브라이언은 방탕한 데이빗의 생활을 보며 “어느 날 진짜 사랑을 알게 될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가온 데이빗의 생일날, 브라이언의 조언은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데이빗은 브라이언이 데리고 온 친구 소피아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저 ‘밤을 함께 보내는 여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감정 말이다. 이렇게 얘기하자면 참 나쁘지만, 데이빗에게 줄리는 전자였고 소피아는 후자였다.
진정한 사랑이자 완전한 단맛. 데이빗은 완전한 단맛을 내는 사랑을 찾아 소피아의 뒤를 따른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던 줄리는 데이빗에게 섭섭함을 토로하고, 브라이언에게 자신을 ‘그냥 친구’라고 말했던 데이빗에게 다시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데이빗은 줄리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냥 친구’라도 좋으니 오랜 시간 데이빗의 곁에 머물며 사랑을 갈구했던 줄리는 오디션 탈락의 절망감과 데이빗이 남긴 상처에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충동적으로 동반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높은 곳이 아니라 떨어질 때 충격이 무서워요.”
항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데이빗은 줄리가 일으킨 사고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다. 몸이 망가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커다란 수술 자국이 남은 얼굴로 인해 회사에도 나가지 못한다.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이 추락을 두려워했을 뿐 실제로 알 순 없었다. 떨어지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떨어진 곳에 남겨진 내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데이빗은 자신이 이제 온전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누굴 믿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고, 매일같이 잔인한 장난으로 나를 조롱하는 꿈이 이어진다. 얼굴은 상처로 망가졌고, 걸음은 느릿하게밖에 걸을 수 없고, 멋진 옷을 입을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의사들에게 되돌려놓으라며 분노를 터트려봐도 돌아오는 건 ‘전 같은 얼굴’이 아닌 기묘한 느낌이 드는 가면뿐이다.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게 현실이다.
“정신 차려, 안 그러면 그 남자를 잃어버릴 거야.”
내일 당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나는 재수 없는 놈이라는 자기혐오에 지쳐버린 데이빗은 브라이언과 소피아를 만나 클럽에 간 날, 술을 진탕마신다. 데이빗은 가면을 뒤통수에 딱 붙인 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춤을 춘다. 어둡고 혼란한 클럽 안에서만큼은 그의 다른 점을 눈치챌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 데이빗을 본 브라이언과 소피아는 이전의 데이빗이 그립다고 말한다. 데이빗은 여전히 꼬인 마음으로 브라이언을 등지고 서서 가면을 쓴 뒤통수로 말한다. “난 재수 없는 놈이야!”라고. 기이하고 부대끼는 느낌이 든다. 데이빗도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꿈보다 못한 현실에 지쳐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하다.
가면을 바닥에 던지고, 포기하듯 눈을 감은 밤이 지나고 다른 날보다 맑고 아름다운 하늘이 기다리고 있던 날,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 소피아는 길거리에서 잠든 데이빗에게 돌아왔고, 그의 삶엔 다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데이빗은 이제 실연의 아픔을 겪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수술을 통해 완벽히 얼굴을 되돌리는데 성공한다.
“쓴맛을 모르면 단맛도 모르는 법이야.”
데이빗의 품에 안긴 소피아가 묻는다 “이게 꿈일까?” 데이빗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아니, 절대.” 이게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을 만큼 행복한, 이전과 같이 완벽히 달달한 삶이다. 아니, 인생의 쓴맛을 봤으니 전보다 더욱 달달하게 느껴지는 삶. 하지만 이 모든 건 데이빗이 선택한 죽음 후에 따라온 자각몽이었다.
식당에서 본듯한 남자의 존재, 사라진 소피아와 자기가 소피아라고 우기는 줄리. 살인 사건에 얽힌 나와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겠다는 박사. 가끔씩 찾아오는 악몽에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면 그곳엔 ‘예전과 같은 내 모습’이 존재하고 있는데, 어찌 된 것인지 모든 순간이 의심스럽게 변하고 있다.
진짜 소피아와 함께 봤던 TV 속에 나온 생명연장의 꿈을 이뤄주겠다고 광고한 레이몬드 툴리의 회사 ‘LE’. 데이빗은 현실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LE와 계약을 진행한다. 그게 어느덧 150년 전 일이다. 사실을 알게 된 데이빗은 가면을 벗으며 “나 깰래!”라고 소리친다.
현실의 데이빗은 나이트클럽에서 진탕 취했던 날 이후로 소피아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어찌어찌하여 회사를 되찾긴 했으나 그는 쓴맛만 남은 인생에 지쳐간다. 그렇게 LE와 계약을 하고 수많은 알약을 털어 넣은, 처음으로 진정한 선택을 했던 순간부터 150년이 지나 이제 다시 선택을 할 시점이 온 것이다. 고층 건물의 옥상. 소피아가 아름답다고 말했던 ‘바닐라 스카이(원작:아르장퇴유의 센 강)’속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데이빗에게 소피아는 생일파티날, 브라이언과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다시 만났던 날. 딱 이틀밖에 만나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무용수라는 것과 꿈을 품고 뉴욕에 왔다는 것, 그녀의 눈빛이 순수하게 느껴졌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데이빗의 자각몽 속에서 단 하나뿐인 구세주가 된다. 좋아하던 로맨스 영화의 장면처럼 흘러가는 소피아와의 순간들, 어린 시절 내가 바랐던 아버지상을 투영한 커티스 박사, 전처럼 완벽하게 돌아온 얼굴. 데이빗이 원하는 것들로 채워진 자각몽은 완벽한 단맛의 인생이었다.
150년이 지난 지금, 이대로 행복하게 자각몽을 꾸며 인생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베니처럼 다시 깨어나 ‘진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데이빗은 망설이지 않고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사랑하는 소피아는 이미 세상을 떠났겠지만, 이제라도 현실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쩌면 데이빗은 자각몽을 꾸기 이전, 33년의 세월을 마음대로 살아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데이빗은 커티스 박사에게 아버지가 자신의 고소공포증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박사에게 꿈 이야기를 꺼내놓기 전, “나더러 미쳤다고 할거잖아요.”라고 말하며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커티스 박사는 무조건 믿는다며 데이빗을 위로한다. 데이빗은 커티스처럼 무조건적으로 나를 믿어주고 위로해 주는 아버지를 바랐지만, 현실의 아버지는 그의 바람과 달랐던 것 같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어린 나이로 회사를 떠안게 된 소년은 51%의 지분을 노리는 일곱 위원회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며 자랐을 것이다. 비즈니스 관계로 얽힌 수많은 사람들을 생일파티에 초대하면서도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브라이언뿐이었던 데이빗의 인생은 달콤하고도 무거운 것이었다. 그 무게를 지고 높은 곳에 서있던 데이빗에게 가장 두려운 건 무거운 것을 안고 떨어질 때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데이빗이 자각몽을 끝내는 조건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걸 적어낸 이유는 자신의 선택에 진정한 확신이 섰을 때 현실로 돌아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백만장자가 아닌 곧 사라질 돈만 남은 인생, 소피아가 사라진 인생. 가면을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꿈 대신 많은 것이 사라진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선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자각몽이라는 가면을 쓰는 게 아닌,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진짜 데이빗’과 자신의 단점마저도 온전히 받아들이고, 상처받은 과거에 멈춘 채 미래를 그리는 것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데이빗은 과거의 자신이 가졌던 두려움을 극복하고 바닐라 스카이에 몸을 던진다. 유일한 친구인 브라이언은 꿈에서 깨겠다는 그를 말리지 않았고, 소피아는 건너편에 서서 데이빗의 선택을 지켜본다.
데이빗은 과거의 상처와 미련을 털어내고 현실로 돌아온다.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완전한 단맛일 거라고 보장할 수 없는 현실로. 하지만 쓴맛을 봐야 단맛도 아는 법이라고, 어쩌면 그의 현실은 이전보다 더 달달하게 변했을지도 모른다.
<바닐라 스카이>는 눈을 뜨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 “눈을 떠!” 이 영화는 자신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현실에, 당신의 진정한 인생에 눈을 뜨라고. 꿈처럼 완벽한 현실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겁내지 말고 눈을 뜨라고.
인생엔 수없이 많은 기회와 새로운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사소한 선택과 놓치거나, 꼭 붙잡은 기회가 섞여 새로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으로 가득 채운 자각몽 속에선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 수 없다. 선택을 할 것도, 의외의 기회도 찾아올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인생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자각몽처럼 흘러간다면, 완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어찌 됐든 꿈은 꿈일 뿐이요, 현실은 현실이니.. 꿈처럼 완벽한 현실을 살지 못한다고 절망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현실 속에 살아가는 ‘진짜 나’의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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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안도르> 메인 예고편
적의 심장을 부수고 제국의 시대를 끝내라! 반란의 불씨 속 혁명의 상징, 냉혹한 스파이 '안도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SF 스파이 액션 [안도르] 메인 예고편 공개!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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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기문술사> 예고편
전설이 깨어난다!
풍문으로만 떠도는 비밀의 암시장 은시.
기문술사 습생은 커져만 가는 요기를 쫓아
의원 백청라, 화조사 백령과 함께
숨겨진 악의 비밀을 파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