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징2023-05-03 00:25:29
이병헌 감독 축구 영화 '드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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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드림
(2023.04.26 개봉)
감독: 이병헌
출연: 박서준, 아이유 등
안녕하세요!
오늘은 극한직업, 스물을 연출한 이병헌 감독의 신작 축구 영화 '드림' 리뷰를 써 보려고 해요!
드림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축구 선수 홍대, 홈리스 풋볼 월드컵 감독으로 나서게 된다.
열정리스 PD 소민이 다큐 제작으로 합류하게 되면서
운동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특별한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이들의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드림> 줄거리
드림은 실화를 각색한 영화거든요!
실제로 2010년에 열린 홈리스 월드컵이 있었는데요
드림처럼 대회 참가에 필요한 돈이 부족해서 참가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대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대한 축구 협회 등에서 후원받은 돈으로 겨우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2019년부터 코로나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었는데 2023년부터 다시 홈리스 월드컵이 열린다고 하니까요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병헌 감독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 뚜렷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스물의 치호와 멜로가 체질의 진주가 생각나는데요
겉으론 멀쩡하지만 어딘가 고장나 있는... 돌I 같은 생각을 하는 캐릭터들이죠
드림에서는 소민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멜로가 체질 영화판 같단 리뷰를 남기셨는데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그 이유가 모든 캐릭터들의 말투가 비슷해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본 스물, 극한직업, 멜로가 체질, 드림만 놓고 봐도
캐릭터들이 다 높낮이 없는 일정한 톤으로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팩폭을 말하거든요
물론 그게 웃기긴 하지만 이제는 지겹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같이 들었던 거 같아요
그럼에도 드림이 재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효봉, 문수 등 새로운 캐릭터를 넣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많은 캐릭터들 각각의 사연을 풀어 주는 데 애썼기 때문이고요
모두가 소민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코믹 영화였다면
사실 2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많이 지루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동진 평론가님의 평을 보았습니다
영화보다 해설가가 해 주는 말이 더 많다였던가??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사실 드림에서 우리가 감동받을 수 있는 부분은 한국팀이 1점이라도 따내는 경기 부분이잖아요?
근데 경기 씬 30분...? 정도를 외국인 해설가의 나레이션과 함께하게 되는데요
그렇다 보니 캐릭터들의 감정을 느끼진 못하겠더라고요
해설가가 말하는 상황 자체(지문)를 이해하고 있을 뿐
머리띠를 쓴 인수가 어떤 감정으로 임하고 있는가, 다리까지 다쳤던 환동이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등
캐릭터에 몰입이 안 되는 거예요...
저 진짜 BGM만 깔아 줘도 우는 애인데 그냥 재미있다~뿐이지 감동적이진 않았어요
저는 이병헌 감독님의 개그 코드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고편을 보고 코믹을 기대했던 것도 있는데
아무래도 실화 기반 스포츠 영화다 보니까 완전히 웃음만으론 갈 수 없겠나 보더라고요...
웃긴 건 정말 예고편으로 보는 장면이 다였고 가끔씩,, 피식거릴뿐
박장대소할 정도로 웃긴 건 없었던 거 같아요
그렇다고 스포츠 영화로 최고였냐? 그건 또 아녜요
사실 스포츠 영화는 깊은 울림과 함께 여운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램덩크가 대표적인 예시겠죠?
저 강백호 빼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막판 1점에선 숨도 못 쉬고 진짜 눈물이 차올랐거든요
그 정도의 감동을 원하고 보는 게 스포츠 영화인데... 그렇게 보았을 땐 아쉬웠습니다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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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한 이야기 2
가만한 이야기
왓챠- <나의 눈부신 친구>, HBO 제작
내가 생각하는 픽션을 가장 잘못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는, 한 마디로 압축되는 교훈 혹은 주제 의식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계발서를 읽고 난 것처럼 자신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주제 의식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로 픽션의 존재 의의를 평가하는 것 말이다.
개인마다 감상이 다른 것인데 왜 ‘잘못' 이해한다고 말하느냐고? 아예 용도가 틀린 사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손톱깎기를 가지고 종이를 자르겠다고 하면 그걸 본 사람은 옆에서 틀렸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픽션은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픽션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본인이 그 픽션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가치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어떤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 했다면 애초에 평가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왓챠에 등록된 <나의 눈부신 친구> 시즌 1, 2에 대한 감상평들을 읽고 한 생각이다.
많은 감상평들이 레누가 짜증 난다, 릴라 같은 친구는 곁에 두어선 안된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혹은, 서로 간의 경쟁심을 통해 각자 발전하는 아름다운 우정이다 같은 말을 하거나. 그러니까 그들은 어느 쪽이든 한 마디로 <나의 눈부신 친구>가 친구 관계에 대해 교훈을 주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엘레나 페렌테의 원작 “나폴리 4부작”을 토대로 한 이 드라마는 처음 몇 분간은 이태리어라고 구분조차 못할 정도로 독특한 나폴리 지역의 투박한 사투리를 그대로 구사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남부 이태리의 찬란한 태양이 아닌, 무채색의 건조한 모래 바람이 몰아치고 폭력이 일상인 다세대 주택이 몰려 있는 동네에서 시작된다.
레누와 릴라는 현실 속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다면적인 사람이다. 나는 사람들이 픽션 속의 캐릭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짜증이 나서 싫다고 말할 때마다 흥미롭게 지켜본다. 왜? 저 캐릭터들은 누구보다 현실의 당신들을 닮아 있는데 말이다. 오히려 그래서 그렇게까지 싫은 걸까?
레누와 릴라는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기도 하다. 둘은 서로 너무 다른 성격으로 태어났지만 뛰어나게 똑똑한 여자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으며 공부를 계속하도록 권유받았지만,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가정환경 때문에 두 사람의 진로는 극명하게 갈렸다. 하지만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고등교육까지 마친 레누도, 부모의 반대 때문에 공부를 일찌감치 그만두고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릴라도, 그렇게 서로 다른 공동체 환경에서 강요받는 같은 억압 때문에 서로에게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다른 환경에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이 견뎌야 하는 시련의 맥락은 같았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의 삶이라는 그 맥락 말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남자보다 몇 배로 더 노력해야 하고, 그러면서 지혜로워야 하고, 동시에 아름다워야 하고, 또 남자들에게 욕망(desire) 되어야 하고, 그다음엔 아이를 낳아야 하고, 하지만 남편의 돈만 축내면 안 되며 자신의 생활력이 있어야 하고, 이 중 하나라도 없다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며 모든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우리 은하계에 대통령이 생긴 대도 그보다는 할 일이 적을 것 같은 모순적이고 숨쉴틈 없이 촘촘한 그 압박 말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조혼인 결혼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야 했던 릴라는, 결혼식 전 자신도 곧 학업을 그만둘 것이라는 레누에게 간곡하게 부탁한다. “레누, 넌 나의 눈부신 친구야. 꼭 모두 A를 받고 졸업하겠다고 약속해. 넌 누구보다도 똑똑해야 해, 남자들보다 더.”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한 선택 — 그것이 온전히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의 경과가 으레 그렇듯, 결혼의 시작과 함께 불행으로 치닫는 자신의 삶 속에서 고등학생 레누의 일상의 단편(선생님의 고급 아파트에 모여 이데올로기와 세계정세에 관해 토론하는 고등학생들)을 본 릴라는, 열등감과 질투심에 휩싸여 일부러 악의적으로 레누에게 상처를 주고자, 너희는 모두 껍데기만 흉내 내는 우스꽝스러운 루저들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해 말한다. “좋든 나쁘든 그래도 나에겐 남자가 있어.”
둘 중 어느 것이 릴라의 진심일까? 물론 둘 다 그녀의 진심이다. 레누가 누리는 것들을 간절히 원했던 릴라는 좌절된 자신의 꿈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애썼고, 그녀의 가족과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은 그런 그녀의 필요를 자신들을 위해 이용하며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자기가 손 쓸 새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자신의 인생을 보는 릴라의 절망을, 그저 지켜보기 짜증 난다거나 못 됐다는 말로 정리해 버릴 수 있을까. 그래도 자신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여자로서의 성공(돈 많은 남자의 부인이 되는 것)을 성취했다고 스스로 합리화해야만 하는 그 쓰디쓴 마음이 정말 진실된 만족이겠는가.
하지만 레누 또한 이런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릴라가 결혼했을 때 그들은 겨우 17살이었다. 릴라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을 보며 레누는 자신이 어떤 남자에게도 욕망되지 않는 ‘쓸모없는' 여자가 되어 버릴까 두려움에 떤다. “모두가 릴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그 작은 조각을 얻어가려고 애쓸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해도 릴라가 가진 위대한 매력을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 가장 동경하는 것을, 릴라는 남성들에게 원해지는 여성으로 태어난 천부적 능력으로 손쉽게 채 가 버린다고 생각한다. 전혀 사실이 아닌 명제들이지만 지금의 레누에게 중요한 것은 냉정한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실체 없는 매력에 대한 초조함 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엔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친구인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박탈감에 대한 사색과 열망을 원동력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 주변의 어떤 여자들도, 자신이 갖지 못한 다른 차원의 충족감에 대해 그들만큼 아쉬워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아무리 최선을 다 해 타협하고 순응해도 헐거워지지 않는 억압 속의 삶을, 계속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레누와 릴라의 세상은 다르다. 그들은 숨통을 죄어오는 억압들을 피하거나 반사해 내며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쉴 틈 없이 튕겨져 나간다.
HBO에서 제작된 <나의 눈부신 친구> 시리즈는 영상매체 연속극이라는 장편의 장점을 최대치까지 살린다. 모든 상황과 관계에 대한 심리 묘사를, 가능한 시청각 요소를 총동원 해 세밀하게 그려낸다.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뿐 아니라 의상, 배경, 화면 연출까지 모든 요소가 한 컷 한 컷 스무스한 앙상블로 이어진다. 이야기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것만큼 인물들의 대사 한 마디에도 집중해야 하고, 그러데이션처럼 모노톤에서 점점 풍부해져 가는 화면 속 색채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그렇게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막스 리히터의 음악이 시리즈 내내 돕는다.
그러니 이렇게 셀 수 없이 많고 작은 요소의 입자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성긴 체에 그냥 부어 버린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그냥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앞서 포스팅 한 ‘가만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픽션에 너무 가혹하고 자신에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 픽션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얼마나 훌륭한지 혹은 얼마나 별로인지 이야기하고 싶다면, 일단은 본인이 먼저 촘촘한 체를 준비해야 한다. 별점 매기기와 한 줄 평 쓰기는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하는 평론가들이 하도록 놔둬도 된다. 일단은 걸러진 자신의 체 위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부터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문제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 본 콘텐츠는 브런치 Good night and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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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욕망과 두려움의 표상, 그리고 삶의 의미
*영화 '아가씨'의 결말 줄거리 포함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소설(fiction)의 형태로 이 세상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것은 태생부터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존재하는 그 개념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처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그 의미를 달리 해왔다. 그 과정에서 ‘디스토피아’라는 개념이 새롭게 태동하여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며 몸집을 불려왔음이 이를 방증한다. 우리는 수많은 매체와 형태, 즉 문화라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그 과정을 지켜봐 왔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살아 움직일 수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욕망과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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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디스토피아
영화 ‘아가씨’는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 유토피아로 향하는 과정으로서 인간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극 초반에서 나타나는 두 주인공의 삶은 각기 다른 형태의 디스토피아를 나타내고 있다. 두 인물의 삶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자유가 부재하는 삶이다. 이에 저항하여 생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분투하는 타마코와 분투 끝에 생존의 의지를 상실해버린 아가씨의 모습은 대조를 이룬다. 두 인물은 사회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각각을 배타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사회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둘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부재다. 그들은 분명 자유롭지만 철저하게 일면에서만 자유로운 탓에, 결국 전혀 자유롭지 않다. 한쪽은 돈에, 한쪽은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에 철저히 종속된 삶이다.
두 주인공은 서로에게서 자신이 가진 결핍으로서의 부자유를 본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가장 밀도 있게 함유한 개념이다. 우리의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되는 법이 없는 반면,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실현 가능함에서 비롯한다. 실현이 가능하지 않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그러나 욕망하는 것에는 가까이 가고자 끊임없이 질주하는 과정이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도피와 유토피아를 향한 지향이 인간 삶을 구성하는 본질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유토피아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옥희’라는 유명한 대사는 아가씨의 관점에서 서술되지만 타마코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가씨의 마음, 그것은 곧 생명의 불씨였기에 타마코에 의해 마음이 짓밟힌 순간 그녀는 목을 매달기 위한 밧줄을 꺼내든다. 타마코가 벚나무에 힘없이 매달려 죽음을 기다리던 아가씨를 밑에서부터 받쳐 들었을 때, 두 주인공이 깨달은 것은 단지 서로를 향한 각자의 애달픈 마음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유토피아가 반대편이 아닌 동일한 방향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기도 했다.
서로의 존재 없이는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인생을 ‘구원’해내기로 한다. 그리고 종래에는 하나의 유토피아에 도달한다. 이는 원작 소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기도 한데, 원작에서 두 주인공은 길고 지난한 여정에 걸쳐 기존의 디스토피아에서 또 다른 디스토피아로 자리를 옮길 뿐이다. 그들은 둘의 노력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유토피아의 존재조차 끝까지 알지 못한다. 원작과 영화의 결말, 그리고 이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극명한 차이가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삶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삶의 본질은 단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도피하는 동시에 어딘가로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 각자의 유토피아가, 욕망이, 삶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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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써 대답하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각자의 유토피아를 향한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실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도착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오직 그것만이 삶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유토피아에 도달함으로써 마치 기차가 역에 도착하듯이 삶도 종착역에 도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행인 것은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우리들 삶의 의미가 죽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도 삶의 의미는 남는다. 그것은 주인을 잃었어도 기어코 이 세상에 남아 삶과 연결된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며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 하나의 질문이 있고 하나의 답이 있다. 당신의 질문과 나의 질문, 당신의 답과 나의 답은 반드시 다를 것이다. 그러나 다름 아닌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는 연결될 것이다. 삶으로써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진 인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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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회로 최대치에 담겨있는 비밀
엑. 배가 왜 이렇게 아프지? 분명히 알약 네 알을 빼먹지 않았음에도 탈이 났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인가? 그럼에도 책 읽기 게임하기 공부하기는 포기할 수 없어서 이 변명을 나 자신도 듣지 않을게 뻔하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다행히 목적지와 집이 그렇게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제주의 원도심 어느 곳에 내린 나. 근처 지하상가에 들어가 화장실을 찾는다. 자주 온 곳이라 어딘지 위치도 외워버렸다. 공중화장실에서 변기 커버를 아무거나 잡고 올렸다.
악! 비명을 질렀다. 누가 변기 물을 안 내렸다. 후다닥 질끈 눈을 감고 물을 내렸다. 그리고 바로 옆의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악! 이 깔끔한 공중화장실 변기 한가운데에 휴지 몇 장이 둥둥 떠다닌다(그냥 휴지만 있었다). 오늘 운수가 왜 이래? 우연 치고는 뭔가 재수 옴 붙은 느낌이다. 근데 또 억울한 게 변기 물이 고장 났냐? 그건 또 아니다. 쭉쭉 잘 내려갔다. 다른 변기도 후다닥 물 내리고 약을 꺼내 먹은 다음 아픈 복통을 처리했다. 그렇게 지하상가를 나와 나의 대장은 왜 이따위인가? 자조하다 갑자기 느닷없이 '이 우연이 참 웃기기도 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 때문에 화장실에 갔는데 그 변기 두 개가 물 안 내린 채로 있었다. 근데 그 변기 하나엔 어떤 못된 인간이 휴지만 둥둥 떠다니게 만들었다. 금세 나는 그런 적이 없었을까? 반추해본다. 다행히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그랬던 적이 없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서 '이런 우연도 벌어졌는데 다른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면 안 될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에잉. 이 무료한 사회복무요원 생활을 빨리 지나 우연같이 만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차 운전 열심히 하던 때 세 명의 여자들은 각기 다른 우연에 맞이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같이 제작됐었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우연과 상상>이다.
우연을 상상해서 만든 이야기
메이코는 모델이다. 사진 촬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집으로 가는 택시에서 동료 사진작가 츠쿠미와 남자 이야기를 하게 된다. 츠쿠미가 만난 남자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이야기가 잘 통해서 수다 만으로도 밤을 새웠다고 한다. 츠쿠미는 그 남자를 마법 같은 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잘 맞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던 츠쿠미. 그렇게 메이코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근데 메이코의 반응은 영 탐탁지 않다. 혹시? 츠쿠미가 말하는 남자의 특성을 조합하면, 메이코의 전 남자 친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충분했다. 생각에 잠긴 메이코. 메이코의 전 남자 친구가 있는 사무실로 길을 돌린다.
사사키는 대학생이다. 그리고 그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나오다. 사사키는 대학 교수 세가와가 진행하는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세가와가 꼴 보기 싫었던 사사키. 유사 여자 친구였던 나오를 구슬려 세가와에게 망신을 주려고 한다. 나오는 사사키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세가와 교수의 저서가 상을 받았던 것을 보고 한번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나오는 사사키의 부탁대로 세가와 교수를 유혹을 시도하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일어나게 된다.
중년의 여성 나츠코. 10대 때까지 사랑했던 연인을 찾기 위해 동창회에 참석한다. 그런데 그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쉬운 나츠코. 속상한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그때, 옛사랑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다. 다시 달려가는 나츠코. 그 사람도 왠지 나츠코를 아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츠코는 확신에 찬다. 행인의 집으로 향하는 나츠코. 나츠코는 그곳에서 우연이 만든 기막힌 사실을 맞이하게 된다.
우연히 만나 상상하기
영화는 세 편의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우연은 '내 친구가 어제 썸탄 남자가 내 전남친'이라는 우연이다. 두 번째 우연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였다. 세 번째 우연은 내 옛사랑을 길 지나가다 만났다는 우연이다. 영화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병렬로 배치시켜 우연의 속성에 탐구한다. 영화는 세 우연에 앞서 상상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상상을 통해서 인물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 소재다.
잠깐 생각을 해 보면, '우연'이 뭘까? 인생은 거의 대부분 필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연이 일어나기 어렵다. 우연은 그러니까 상상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지금 당장 이 카페에서 벗어나 만원을 주울 확률은 거의 상상력에 가깝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만원 돈이 아깝기 때문에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리고 또 요즘은 xx페이가 잘 되어 있어서 현찰 갖고 다니는 사람도 얼마 못 본 것 같다. 이 필연의 가능성이 하나, 둘 모여 우연을 없애버린다. 잠깐 상상했던 나의 우연이었다. 그런데 난 이 우연을 기다리고 있다. 또 이 우연을 맞이하면 대충 어떤 행동을 할 것 같은지도 예상이 간다. 사실 간단하다. 내가 이 우연을 상상했던 이유는 방금 초코라떼 하나를 주문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못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상상은 나에게 있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우선이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맞이하는 우연은 본연이 갖고 있는 욕망에 근거해서 벌어진다. 우연처럼 벌어진 일에 어떻게 행동할지 모를 것 같지만 그 진단에는 '나'라는 인물이 거진 다 스포일러를 하고 있다. 전남친과의 재회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 교수를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 바라던 옛사랑과의 조우까지 이 우연을 대비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내면에 갖고 있는 구멍과도 상충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 구멍의 크기만큼 인물이 행동한다. 영화는 이 인물이 갖고 있는 공허함과 미련을 우연이라는 상황을 접목시켜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 하마구치 류스케 월드
6개월 만에 돌아온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이다. 작년 <해피 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가 국내에서 개봉했을 때가 생각난다. 전자는 후에 왓챠를 통해 봤고 후자는 극장에서 두 번 봤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주는 마력은 어마어마했다. 천천히 쌓아 올려 도착한 엔딩에 긴 여운이 남았다. 그리고 내 인생영화로 등극했다. 이는 비단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분들의 인생영화가 된 두 작품.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분명하다. 지루하지 않게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는 능력 때문이다. 이 하마구치 류스케가 가진 강점은 이 세 편의 옴니버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내면 묘사가 탁월하게 드러난다. 나츠코가 만난, 그러니까 행인에 해당하는 인물이 에피소드 3의 후반부에서 같은 장소를 와다다 달리는 신이 있다. 또 나츠코가 행인의 집에서 만나 하는 대화들을 잘 보면 글 쓰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 언어에 기반한 문장'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사의 톤이 보편적인 톤으로 일관되면 연극 같은 느낌이 강할 것이다. 근데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서 말하는 대사들은 배우 고유가 갖고 있는 언어와 톤으로 전하는 형식이라 극이 갖고 있는 개성과 흡인력이 뛰어나다. 이는 실제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대본 리딩을 한 방식(자주 대본 리딩 읽기)이 실제 하마구치 류스케가 쓰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 의도를 부여해서 연출자로서의 시그니쳐를 새긴 것이다.
근데 손님은 홍상수
이 영화에는 손님이 한 명 있다. 바로 홍상수다. 지금 당장 구글에 '하마구치 류스케 홍상수'라고 검색하면 작년 10월에 하마구치 류스케가 '나는 홍 감독의 팬'이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영화의 형식이나 내용이 홍상수를 베꼈다(근데 그렇게 마음먹어도 못 베낄 듯..)는건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살짝 홍상수의 영화를 하마구치 류스케가 자기 식대로 소화한 느낌이 든다.
우선 자기화의 근거로는 '대화'를 사용한 방식이 떠오른다. 사건이 공개되기 전의 홍상수는 인간 존재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공개되고 난 후는 외로움이라는 정서가 영화를 이끄는 듯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자기화시킨 부분은 전자다. 특히 <옥희의 영화> 생각이 난다. 우선 <우연과 상상>과 <옥희의 영화>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옥희의 영화>에 '우연'이란 키워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옴니버스 영화지만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들이 같은 사람이 아니다(이선균, 정유미). <옥희의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아도 생각나는 차이점 키워드는 두 개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뇌를 빼고 홍상수의 영화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의미와 닿아있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해피 아워>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타인과 나의 관계를 통해 바라보는 자아'를 중심으로 극본을 써온 사람이다. '인간의 욕망을 통해 웃긴 인간의 내면을 묘사한다'는, 전반기 홍상수의 영화적 테크닉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를 보여주듯 '마음의 구멍'을 위시한 인간 내면 치유의 대사가 <우연과 상상> 곳곳에서 들린다는 것은 그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발현이 아닌 하마구치 류스케의 방법론 제시라는 점에서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셈이다. 또한 주연 배우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옥희의 영화>에서 주연 배우들은 다 똑같다. 근데 모두 같은 역할을 맡았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홍상수 감독님이 이 글을 읽고 '그냥 돈 없어서 그렇게 섭외했는데 히히'라고 하면 딱히 할 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글쓴이가 느끼기엔 네 편의 이야기가 한 가지 키워드로 읽히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영화의 구조보다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정서, 그 정서를 공유하는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묶어 네 에피소드의 공감대를 하나로 묶고 싶었던 것이다. 이 <우연과 상상>은 세 에피소드의 배우들이 다 다르다. 이러면 단편영화 세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각기 다른 우연과 입장 차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사연을 통해 웃기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 게 관객이 되는 셈이다. 당연히 뭐가 더 낫고 구리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적어도 홍상수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전개 방식과는 다른 형식을 택한 건 확실한 셈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홍상수 영화에서 썼던 연출법이 곳곳에 보이기도 한다. 일단 배경음악을 잘 들어보면 홍상수의 감성이다. 음악의 ㅇ자도 모르는 나. 그냥 '클래식 비슷한 것'으로 홍상수의 OST를 기억하고 있다. 근데 또 이 홍상수란 사람의 취향이 일관돼서 일상 속의 상황에 튀지도 그렇지도 않은 음악들을 넣어 왠지 모르게 웃긴 느낌이다. 이 <우연과 상상>에서도 이런 연출 방식이 나타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와 다카츠키가 대화하는 신, 눈 묘지 앞에서 가후쿠와 미사키가 대화하는 신에서 조용한 배경으로 대사만 나왔던 것과 대비된다. 또 홍상수 특유의 매가리 없는 클로즈업이 영화에 제시된다. 뭐 클로즈업 기법 쓰는 거야 감독 맘이지만 각각의 쓰는 타이밍은 홍상수가 썼던 형식을 빌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 외에도 19금 코드를 사용한 것, 반복과 차이를 활용한 방법까지 우리나라의 영화 팬이라면 왠지 모르게 드는 기시감이 놀라울 것이다.
베를린의 이유 있는 선택
이 영화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에 이유를 증명하듯 영화에 마법을 부린 것 같다. 전부 다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우연인데, 왠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데 그게 영화 보는 이유 아니겠어?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님에도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는 것. 또 그게 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 우연 같은 좋은 이야기를 만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에게 있어 영화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다들 알 거라 생각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 다 똑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비슷한 궤를 향하는 것 같지만 좀 더 창의적이고 개성이 있다. 일본의 풍경과 감성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녹아든 사랑스러운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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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혼돈의 멀티버스 속에서 굳건히 존재하는 미친 가족애
필자가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들을 관람했기에, 대다수의 영화들은 시놉시스나 예고편 정도만 보면 어느정도 스타일이 예상이 가는 편이다.
원래 장르에는 클리셰라는 것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가끔씩, 시놉시스랑 예고편만을 보고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도저히 감이 안 잡히는 영화들이 종종 있다.
이번에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이러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민자 가족 이야기 같은데, 멀티버스라니? 대체 무슨 조합인걸까?
이러한 조합은 상상이 안될것 같지만, 이 영화는 이 조합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뿐만 아니라 정말 흡입력과 매력도 겸비하여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멀티버스라는 주제답게 정말 많은 장르와 표현들을 넘나든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호러, 액션, 드라마, 고전부터 통상적인 영화의 형태를 벗어난 실험영화의 형태로도 변주된다.
이러한 방식은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형태를 벗어나 예술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화려하고 세련된 영상미로 오락성도 겸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존의 영화를 벗어난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보편적인 한가지 주제를 꾸준히 관통하는데, 그건 바로 '가족애' 이다.
이러한 주제가 있기에 앞에서 말한 기존적인 영화에서 벗어나는 많은 요소들이 있음에도 많은 사람에게 편하게 추천드릴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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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히 생산되는 '나' 속에서 진정한 내 이름을 찾기.
자본과 번호, 이름과 사랑
퇴근하고 잔뜩 지친 몸을 이끌어 지하철에 오른다. 각자의 온도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의 뜨끈한 등과 어깨를 꾹, 꾹 밀며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 본다. 한 정거장 지나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간, 당신의 눈이 드물게 번쩍 빛난다. 그러나 옆에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던 중년 여자가 당신보다 훨씬 빠르게 엉덩이를 붙여버린다. 당신은 미간을 팍 구기고 다시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다. 유해한 도파민이니, 뇌세포를 파괴한다느니의 말들은 쓸모없다. 무의미한 작은 직사각형의 세상으로 당신은 있는 힘껏 오늘로부터 도망친다.
결국, 21 정거장 내내 서서 온 당신은 길거리에서도 핸드폰에 눈을 떼지 않는다. 아무리 편한 운동화를 신어도 언덕을 오르는 종아리는 풍선처럼 부풀어 터질 것만 같다. 당신은 길고도 긴 여정 끝에 엘리베이터를 타 버튼을 누르다가 무심코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한다. 그 속의 사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당신의 자리가 아닌) 당신의 자리를 뺏은 중년 여자와 얼굴이 겹쳐지면서, 핸드폰으로 겨우 외면했던 질문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내가 원래 이런 표정이었나?"
나는 정말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름 모를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거울 속 나는 몇 번째 '나'일까?
블랙 코미디 + SF + 우화의 공식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지독히 사실적이면서도 어쩐지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블랙 코미디 + 우화' 공식으로 성공한 작품을 말하자면 당연히 <기생충>(2019)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자본과 계급으로 분명하게 나뉜 두 가족의 이야기를 보면 속이 울렁거리면서도 어쩐지 헛웃음이 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싹 젖는 감각이 생생한 동시에 몽롱한 동화 같으니 말이다. 한국 SF 장르와 봉준호 감독 세계관에 한 획을 그은 <설국열차>(2013)도 디스토파이 세계관에서 아주 긴 열차 칸으로 나뉜 계급 이야기다. 위와 아래, 앞과 뒤. 뒤집으면 언제든 서로가 될 수 있는 구조. 그는 열과 행의 이미지로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잠식된 현재와 미래를 그리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그의 대표적인 크리처 무비인 <괴물>(2006)과 <옥자>(2017)도 전체적인 세계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빠질 수 없다. 이렇게 계승한 블랙 코미디 + SF + 우화로 더욱 견고해진 봉준호 감독의 작가 주의 세계관을 통해 <미키 17>(2025)이 세상에 나왔다.
<미키 17>은 지구가 멸망을 앞둔 디스토피아적 근미래 배경이다.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나자고 주장하는 이들과 망가진 지구를 어떻게든 고쳐서 쓰자 주장하는 정당의 대립이 이루어지는 혼란함 속에서, 친구 '티모'와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진 주인공 '미키'는 빚쟁이를 피해 지구를 떠나려고 한다. 얍삽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티모와 달리 자존감도 낮고 기술도 없었던 미키는 어떻게든 영토 개척 프로젝트 우주선에 탑승하기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접수를 받는 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원서를 제대로 읽었는지 몇 번이나 물어봤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익스펜더블은 진짜 '극한 직업'이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모두 미키를 앞세운다. 우주선을 고치는 줄 알았더니 사실 방사능 실험이었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몸이 망가지는지 설명해줘야 한다. 4년의 항해 끝에 도착한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을 수도 있으니, 당연히 미키가 먼저 땅을 밟고 있는 힘껏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피를 토한다.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몇 번이고 죽음은 미키'들' 덕분에 다른 요원들도 마음껏 차가운 입김을 볼 수 있게 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은 꽃핀다. 주변 사람들의 무시와 일상에 도사리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미키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나샤'의 사랑이다. 미키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곁을 지켜주는 나샤를 사랑하면서도, 최고의 요원인 그녀가 왜 하찮은 자신을 사랑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그녀를 내조한다.
그날도 17번째 미키는 추락사로 몸이 반토막이 나 죽었어야 했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얼떨결에 살아남아 지나가던 티모에게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티모는 떨어진 무기만 챙기고 다친 그를 향해 재수 없는 질문만 툭 던진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그렇게 덩그러니 남은 미키는 행성의 주인인 '크리퍼'에게 잡아 먹히며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크리퍼는 잡아먹긴커녕 미키를 질질 끌고 가 얼음 동굴 밖으로 내보낸다. 크리퍼가 자신을 눈밭에 던져 얼려 죽일 작정이라고 생각한 미키 추위에 떨며 힘겹게 함선으로 돌아온다. 잔뜩 지친 몸을 침대에 내던지는 순간, 어떤 인기척에 이상함을 느끼고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른 자신, 미키 '18'과 마주한다.
복제의 사이클
'익스펜더블'은 사뭇 다른 원작과 영화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의 '복제 인간'과 다른 점은 미키가 자신이 익스펜더블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이것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징그럽고 코믹한 정치인 마샬 부부의 영토 개척지 정책의 핵심은 좋은 유전자로만 구성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몇 번이나 복제된 미키는 불량품에 불과하다. 나샤와 카이, 과학자 도로시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도 미키가 느낄 고통과 죽음을 경시한다. 죽음에 대한 무례한 질문을 던지고, 누구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살피지 않는다. '그게 네 쓸모고 직업이야.'라는 폭력적인 말 한 마디면 미키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니까. 과학자와 의료진도 처음엔 프린팅 되는 몸을 잘 받아줬지만, 나중에는 바닥으로 꼴사납게 떨어져 구겨진 몸에 주사 바늘을 꽂을 뿐이다.
시체, 쓰레기 등 자본과 사회의 찌꺼기는 모두 '사이클러'에 던진다. 용광로처럼 생긴 사이클러는 단순히 쓰레기를 소각하는 게 아닌, 단백질을 다시 분해하고 재생산해서 다음 미키를 만들어내고 선원들의 식사가 된다. 익스펜더블이 아닌 인물들도 자기도 모르게 이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셈이다. 미키는 끊임없이 소각되고 다시 출력되며, 권력에 의해 멸시받는 노동자들의 응집된 몸이 된다.
꼭 프린터기에 들어가야만 복제 인간의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마샬 부부는 특히 우수한 가임기 여자 요원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궁, 아니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샬 부부를 향한 카이의 날카로운 질문처럼 그들에게 여성은 다른 의미의 '인간' 프린터다. 인류 번식과 자신들의 부를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를 출산할, 인간이지만 프린터의 역할을 해줄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퍼와 인간의 첫 대면에서 미키가 아닌 제니퍼가 죽었을 때 추악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카이와 제니퍼가 연인 사이인 줄도 모르고,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성과 결합해 아이를 생산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거란 편견도 끼얹으며 말이다.
다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일파 마샬은 이상하리만치 '소스'에 집착한다. 살아있는 베이비 크리퍼의 꼬리를 잘라 바로 믹서기에 갈아버리는 장면은 경악스럽다. 굳이 손가락에 찍어 맛을 보라고 권유하고, 배양육인지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는 미키에게 메인 디쉬가 아닌 소스 맛이 어떤지 묻는다. 이렇듯 소스는 일파가 강력하게 표현하는 권력의 상징이자 일개 노동자들과 자신의 차이다. 효율을 위해 정해진 칼로리 안에서 구역질 나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닌, 맛과 건강을 추구하고 음미하는 삶이 최고의 권력인 것이다. 미키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긴 하지만, 마샬 부부의 눈에는 다른 노동자들도 비슷하다. 노동자 1, 노동자 2, 비위를 잘 맞추는 노동자, 말을 안 듣는 노동자. 선원들은 자신들을 미키와 달리 분명한 이름과 존엄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부의 시선에선 언제든 대체 가능하고 휴지 조각 같은 존재들일뿐이다. 생존을 인질로 잡고 있는 자본의 힘이 있는 한 사이클러는 무엇보다 뜨겁고 부지런히 권력을 위해 움직인다.
인간보다 나은 크리퍼
’Creepy’에서 유래된 이름인 ‘크리퍼‘는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완전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 인간의 시선에선 낯선 외형이 두렵고 징그럽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니플하임에 마음대로 정착해 들쑤시고 다니는 인간이야 말로 외계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 이름도 꽤 무례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크리퍼들은 인간을 잡아먹는 생명체도 아니었고, 유일한 친구인 티모마저 외면한 위험에 빠진 미키를 구해준다. 미키는 크리퍼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나샤는 '크리퍼가 구해줬다'라고 정확하게 짚어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2000)를 본 사람들이라면 크리퍼를 보자마자 ‘오무’가 떠올랐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 나라와 나라의 대립을 그린 영화로 주인공 ‘나우시카’가 전쟁을 멈추기 위해 오무 무리들과 소통하는 장면은 미키가 통역기를 사용해 크리퍼에게 곧 가스가 살포될 테니 도망치라고 알리는 장면과 비슷하다. 크리퍼가 본격적으로 서사에 등장하는 시점부터 영화는 어쩐지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이러한 지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장르 믹싱 기법이 눈에 띈다.
크리퍼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소통하며 정보 공유가 가능하다. 미키의 이름도 잡혀있는 베이비 크리퍼 ‘조코’를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마마 크리퍼는 외형이 똑같은 두 베이비 크리퍼의 이름을 정확히 구분한다. 죽은 아이는 ‘로코’, 잡혀 있는 아이는 ‘조코’.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명확하게 각자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으며 공동체가 힘을 합쳐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잘 알고 있다. 외형도 전부 다르고 고유한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치환되는 인간들이, 정작 동료가 위험에 빠진 순간 힘을 합치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마 미키가 크리퍼였다면 마마 크리퍼는 단순히 그의 이름에 번호를 붙여 구분하는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익스펜더블이라는 비윤리적인 직업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더 앞서 삶의 터전인 행성을 그렇게 오염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넘나들며 과학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으니 당연한 대가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받은 만큼만 되갚고, 선의를 보이는 이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태도. 이러한 크리퍼의 자세에서 우리는 진작 갖추어야 할 인간성을 배운다.
나를 마주하기
영화는 미키 ‘17’과 미키 ‘18’이 대면하면서 본격적인 위기에 닥친다. 미키 18은 지금까지 누적된 미키의 정보를 다운로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키 17과 완전히 반대의 성격이다. 뭐만 하면 죽여버린고 말하며 높은 폭력성을 띄고, 대책 없이 충동적이며, 엄청 밝힌다. 17은 자신을 가차 없이 죽이려는 18과 몸싸움을 하면서 나샤에게 전해 들었던 지금까지의 미키와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라는 걸 실감한다.
시간을 앞당겨 익스펜더블이 윤리적 논란에 휩싸였을 때로 돌아가본다. 악용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 주장하자마자 한 미친 과학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멀티플'을 만들어 노숙자를 죽인다. 둘도 아니고 셋이나 만들어 무고한 이들을 잔인하게 죽인 사건을 계기로, 익스펜더블은 공식적으로 지구 안에서 시행이 금지되며 멀티플은 중범죄가 된다.
다시 돌아와 미키 18을 죽이려고 나름 노력해 보는 미키 17의 눈을 보자. '또 다른 나'와 처음 마주한 그는 이제 곧 세상에서 사라지고 죽을 거란 공포와 자신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는 놀라움, 혼란 등에 빠져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채 몸이 반쯤 사이클러 속에 들어간다. 반면, 미키 18은 17에 대한 확실한 반감이 있다. 거울을 보듯 겁에 질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모습에 17은 더 혼란스럽다.
비슷하지만 미세한 차이점이 있는 얼굴로 나란히 서있는 둘의 모습은 마치 자아 분열의 가시화된 것 같다. 얼음 동굴에서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듯 던진 티모의 질문은, 실험쥐처럼 수없이 이용당하는 미키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자기 방어와 누적된 폭력성을 발현시킬 트리거로 작용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미키 17이 처음으로 욕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18이라는 점이다. 처세술에 강하고 얍삽한 티모를 비꼬는 발언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무례함에 대응한 적 없던 미키 17은 나샤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화를 참지 못한다. 심지어 마샬 부부와의 만찬에서 입에 올리지도 못할 끔찍한 고통과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7이 씩씩 거리는 대상은 다름 아닌 18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호기심에 빨간 버튼을 눌러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미키는 죄책감에 모든 우선순위에서 자신을 제외한다. 17의 이러한 위축된 태도는 18의 화를 키운다. 만찬에 초대해 놓고 실험 중인 배양육을 먹인 것도 모자라, 타인의 목숨보다 카펫이 소중한 부부에게 뭐라고 하고 나왔냐는 질문에 17은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저녁 식사 감사하다고... 하고 나왔어."
그런 수모를 겪고도 감사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냐고 불같이 화를 낸 18은 당장이라도 케네스를 죽이겠다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정말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눈다. 폭발하는 공격성이 온전히 '나'를 지키기 위해 표출될 때, 관객은 17을 향한 18의 반감이 애증이었음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미키 18은 17과 대치하던 중 티모를 보자마자 사이클러에 던져 죽이려 든다. 비록 분열된 두 사람이지만 미키가 처음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시도한 순간이었다.
내가 너라서 알 수 있는 열등감과 자기혐오, 그리고 트라우마. 빨간 버튼 따위로 사고가 날 만큼 자동차를 엉망으로 만든 회사 잘못이라는 18의 말은 평생 미키가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그는 무모하고 폭력적인 또라이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용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뻔해도, 결국 우리를 구하는 건 사랑
서로 으르렁 거리는 17과 18 사이에서 혼자 신난 사람은 다름 아닌 연인 '나샤'다. 지금껏 다양한 미키를 봐온 나샤는 정반대 성격의 두 미키를 보며 굉장히 흥분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날 수 있냐는 미키 17의 질문에 그녀는 '반대 상황이라면 너도 나처럼 좋아할걸?'하고 가볍게 받아친다. 멀티플인걸 숨겨줄 테니 미키를 나누자는 카이의 말에는 불같이 화를 낸다. 16이든 17이든 18이든, 나샤에게 미키는 오로지 단 한 명이니까.
나샤는 엉뚱한 면이 있지만, 인정받은 소수 정예 엘리트 요원으로서 단단한 내면과 외면을 갖춘 인물이다. 미키는 다방면에서 월등한 그녀가 대체 왜 가장 낮은 계급인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바이러스와 각종 실험으로 죽어가는 미키를 두고 볼 수 없던 그녀는 직접 진공복을 입고 실험 캡슐 안으로 들어간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서 희생하는 자를 돌본다.
베이비 크리퍼를 구하기 위해 몸이 묶인 채 이로 밧줄을 잡은 나샤는 미키에게 신호를 받고 'C3' 전략을 펼친다. C3는 아기를 안는 것 같은 자세로, 미키와 나샤의 섹스 체위 중 하나이다. 칼로리마저 철저히 계산하고 먹어야 하는 우주선 안에서 섹스는 가장 비효율적인 에너지 활동이다. 마샬 부부는 생존을 빌미로 니플하임에 완전히 정착할 때까지 섹스를 금지시키지만, 그들은 장난으로 체위를 그려가며 계속 몸을 겹친다. 나샤가 미키의 전략으로 베이비 크리퍼를 구해 눈밭을 달리는 장면은, 그들의 섹스가 결여된 존중과 냉소적 자본주의로 만들어진 노동과 권력보다 더 가치 있음을 증명한다.
케네스와 대치하던 18은 기어코 죽음의 순간을 마주한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은 케네스는 그런 감정이야 말로 인간성의 증거라고 자극한다. 그러나 미키 18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나샤와 함께 서 있는 미키 17을 보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줄 사랑이야말로 지금 모두에게 필요한 본성이라는 것을. 뒤에 붙는 거지 같은 숫자 따위는 집어치우고 미키 '반스'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지금까지 그들을 괴롭혔던 동그란 버튼을 꾹 누른다.
거대한 스케일의 SF 영화로 봉준호 감독은 사랑을 말한다. 너무 큰 서사와 화제성에 비해 작은 주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만 더 고민해 보자. 사랑이 조금 뻔하긴 해도, 작았던 적은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 나를 사랑하는 것도, 너를 사랑하는 것도 식상한 말처럼 느껴져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무수한 호칭에 짓눌려 더미 속에 묻혀버린 내 이름을 건져 먼지를 툭툭 털어주고, 어쩐지 낯선 내 얼굴도 한 번 바라보자. 그리고 힘이 남는다면 아끼는 이들의 이름도 찾아 숫자는 치워버리고 광이 나게 닦아보자. 미키와 나샤, 크리퍼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 가치를 배웠으니까.
무수히 생산되는 '나' 속에서 진정한 내 이름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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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이 글은 영화 [스펜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물 교과서에 나오는 혈우병(Hemophilia)은 유전병들 중 가장 슬픈 병임과 동시에 왕가의 집념이 보이는 병이기도 하다. 혈통 보존이라는 미명 하에 왕실에서는 사촌 간에 결혼을 하거나, 정략결혼을 통해 권력을 더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덕분에 빅토리아 여왕의 유전자 하나는(참고 1) 온 대륙의 왕자들이 피를 멈추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아야만 하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왕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되어 넘지 못할 것만 같던 두꺼운 담을 꾸역 꾸역 넘는다. 그리고 기어코 보통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웠던 크기만큼이나 쾌감을 주는 이야기로 떠돌게 된다.
21세기인 지금도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왕족의 이야기는 이제는 대중 매체의 힘을 빌려 손쉽게 담을 넘는다. 가장 매력적이고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를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제목과 일치하는 자신의 성(Family name)인 [스펜서]로 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다이애나의 이야기는 생소하면서도 신비롭다. 영화 속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장면마다 인간 다이애나 스펜서의 슬픔이 묻어져 나오지만. 그녀의 고통과 용기도 함께 느껴져 마음이 몇 번이고 부서져 내리는 두 시간을 보내게 한 영화다.
윈저라는 이름의 왕관, 혹은 금고아;그것을 너무도 잘 표핸해낸 크리스틴 스튜어트
사진 출처:다음 영화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디라 했다. 그것도 영국 왕실의 왕관이라면.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꼿꼿하게 지탱하려 애쓸 것이다.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스펜서의 모습은, 머리 위에 얹어진 원치 않는 왕관을 버텨내느라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자신의 차를 혼자 운전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펜서는 어딘가 경직되어 있는 동시에 안절부절 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런 불안한 상태를 감출 수 없는 듯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의 손은 마음과 동기화되어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고. 스펜서의 한 손은 언제나 다른 한 손에 의해 꾹 눌러진 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겨우 잠자코 숨을 죽인다. 두 손을 맞잡아야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는 그녀의 의기소침한 어깨는 안쓰러울 정도로 작아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다이애나 머리 위의 반짝이는 것을 가리켜 왕관이라 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그저 손오공의 머리를 옥죄이는데 쓰는 금고아(긴고아)에 불과했던 셈이다.
난생처음 보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이토록 잘 표현해낸 데는 틴에이지 영화배우라는 왕관을 쓰고 있는 줄 알았던 크리스틴 스튜어트 개인의 울분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배우라고 부르기엔 한없이 모자랐기에.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금고아를 벗어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배우와 스펜서가 가진 공통된 욕망은,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을 뒤로하며 달리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다른 무수한 영화 속 장면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그 지점에서는 크리스틴과 스펜서 두 사람 사이의 구분선이 완벽히 사라진다.
두 여인은 자신을 통제하고 가둬두려던 그 무언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이 왕관이라 부르며 칭송하던 것을 벗어던지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달리기의 끝에 그녀들이 기어코 얻어낸 것에도 손뼉 쳐줄만하지만. 미친 듯이 달리느라 발을 다치지는 않았는지. 숨이 너무 차 기댈 곳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목걸이, 허수아비, 그리고 꿩;스펜서의 모든 모습을 나타내는 것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진흙탕이라는 단어에서 딱 한 뼘 정도 모자라는 땅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
스펜서는 자신이 궁에서 속한 위치가 딱 허수아비 정도라고 생각했다. 남편 찰스는 바람까지 피운 주제에 불륜 상대에게 준 것과 같은 진주 목걸이를 선물했고. 그것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내려놓으려 할수록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려한 장신구가 되어 스펜서의 목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펄럭이면서, 아름다운 족쇄에 목을 맡긴 채 스펜서는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리라 조금은 믿어버렸다.
하지만 스펜서는 자신의 두 아이만큼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왕가의 전통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지 않다는 아들의 마음은 가볍게 묵살당한 꿩 사냥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꿩은 영화 속에서 아름답지만 도망갈 머리는 모자라는 짐승 정도로 그려진다. 확실한 이유 없이 희생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지점에서 스펜서는 자신의 모습과 꿩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들의 꿩 사냥을 더 말리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들의 총을 맞아 죽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고. 윈저가문의 이유 없는 전통에 의해 스펜서가 희생당하는 것을 막고 싶었을 테니까.
허수아비이자 꿩이었지만. 운명 같았던 진주 목걸이를 없애버린 스펜서는 그렇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신나게 도망을 친다. 벌판에 버려져 있던 그 허수아비에게는 스펜서의 옷이 아닌 윈저의 옷을 선물한 채로.
지금의 찰스를 보고 있자면. 다이애나의 저주(?)를 톡톡히 받고 있는 듯하다. 윈저 가문은 가장 매력적인 왕세자비를 영원히 잃었으며. 스펜서의 마음을 가지고 논 죄로 찰스는 왕위에서 어머니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이제 누가 정말로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는지. 그 당사자는 알겠지.
스펜서, 길을 찾다.;메리크리스마스, 스펜서.
사진 출처:다음 영화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 심판]의 김혜수 배우는. 판사들이 걸어가는 긴 복도가 그 사람들이 가진 끊임없는 일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많은 대사들이 복도에서 이뤄지는 것도 판사들이 가야 할 길 중간에 있는 일들 같게 느껴져서 좋았다고. 영화 [스펜서]에서 복도, 혹은 길이 상징하는 바도 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스펜서는 영화에서 늘 길을 잃고 헤맨다. 그것이 자신이 살던 동네 근처였건. 혹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이한 미로 같은 궁궐이건 상관없이.
애처롭게도 스펜서는 그녀를 그 운명의 길고 긴 길 위에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지 못해, 몇 년을 가도 낯선 길 위에 정처 없이 눈물을 흩뿌리며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모든 것을 토해내기 위한 화장실을 찾아서 겨우겨우.
그녀는 스스로를 죽여 이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기보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 길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덕분에 세 모자(母子)의 신나는 도망기(?)에서만큼은 스펜서는 망설이지도. 길을 잃지도 않는다. 그녀는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고. 주저하지 않고 엉망진창이지만 그대로 완벽한 채로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궁과 멀어진다. 다 큰 어른이 되어버려 산타는 더 이상 그녀에게 내어줄 것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스펜서는 자신에게 아주 큰 선물을 준 셈이다. 두 아들에게도 빼놓지 않고.
스펜서는 영화 말미에 아이들이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패스트푸드를 먹이며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내겐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졸업]과 같아 보였다.
우리는 보통 [졸업]의 결말을 사랑하는 남자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도망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제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버린 이 탈주극에 대한 대책 하나 없는 두 남녀의 소위 "현타"온 표정을 비추는 것이 영화의 "진짜"끝이다.
스펜서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밤이 되면. 잠든 두 아들을 보며 과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현재 가진 것으로는 얼마나 버티며 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인지에 대한 숫자 놀음을 멈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펜서]는 졸업의 결말보다 약 5초 정도 앞에서 끊은 기분이다. 스펜서의 눈에 언뜻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비치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홀가분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그 행복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5초만이라도. 자신이 스스로에게 선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한다.
마치면서+좋아한 장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왔다.어차피 우산이 없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빗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모든 사람이 우산을 쓰고 있었고. 그들은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기꺼이 이상한 사람이 되기를 택했고. 한순간이었지만 스펜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 모든 시선을 받아야 했을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도 그 장면들에 묻히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또 대단했다. 어차피 역사가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혹은 그녀의 마음이 십분 느껴지는 영화였기에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준 미래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조금 더 크고 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마저 남는 영화였다.
[좋아한 장면]
정말 무수하게 많은 장면들이 마음에 날아와 꽂혔지만. 그중에서도 한 장면을 꼽으라면. 단체 사진을 찍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총총거리며 걸어와 여왕 외에는 아무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가족들 사이에 섞여버리는 장면. 다이애나는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커가는 스펜서를 눌러 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영화 가득 그녀만의 색이 묻어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스펜서를 지워내야 했다. 모르겠다. 그냥 이 영화 자체가 계속 눈물이 났다.
참고 1
혈우병은 남자가 걸리기 쉬움.(성 염색체 유전). 여자의 경우 혈우병에 걸릴 경우 embryonic lethal 한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음. 그 당시 왕자들은 말 타다가 넘어져서 멍이 든 게(내출혈) 아물지 않아 죽었다고도 하고. 처형 당했는데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져내렸다고도 하고,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도 함. 아 물론 후자의 경우는 파상풍일 가능성이 더 높음.
[이 글의 TMI]
1. 코로나 격리가 끝나고 회사 갔지만. 여전히 회사는 싫군요.
2. 컨디션은 평소의 70% 정도밖에 안됨.
3. 입맛 없는 게 제일 힘듦.
4. 약 먹어야 되니까 꾸역꾸역 먹고 다시 빠졌던 3Kg 회복함(응?)
#파블로라라인 #크리스틴스튜어트 #스펜서 #최신영화 #영화추천 #실화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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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 가족 -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 한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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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2만 원만 빌려주시겠어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텐트를 집, 밤하늘의 달을 조명 삼아 살고 있는 기우(정일우)와 가족들.
다시 마주칠 일 없는 휴게소 방문객들에게 돈을 빌려 캠핑하듯 유랑하며 살아가던 이들이
어느 날, 이미 한 번 만난 적 있는 영선(라미란)과 다른 휴게소에서 다시 마주친다.
인생은 놀이, 삶은 여행처럼 살아가던 고속도로 가족과 그들이 신경 쓰이는 영선.
이 두 번의 우연한 만남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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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허트 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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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분대장 ‘제임스’가 부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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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까지 남은 시간 D-38.
기꺼이 킬존을 선택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