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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9선
[오마주 | hommage]
프랑스어로 '존경'을 의미하는 단어
영화는 영화를 오마주하기도 하지만
명화에서 영감을 받거나 오마주 하기도 한답니다.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하기도 하는데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 속 장면들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같이 만나보아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코끼리
어바웃 슈미트 | 마라의 죽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넓은 지평선
더 셀 | 새벽
인히어런트 바이스 | 최후의 만찬
인셉션 |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 어린 옥수수
문라이즈 킹덤 | to prince Edward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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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신작 <트위스터스>가 개봉주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습니다.
개봉 첫 주에만 1117억원을 벌어들였고 이는 <오펜하이머>의 개봉 첫 주말 매출과 같은 기록입니다.
정이삭 감독은 2020년 윤여정 주연의 <미나리>로 제 78회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며 작품성과 연출력을 인정받은바 있습니다.
영화는 폭풍을 쫓는 연구원 케이트와 논란을 쫓는 인플루언서 타일러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역대급 토네이도에 맞서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국내 개봉은 8월 14일 예정입니다.
7월 4주차 씨네뉴스 시작합니다!
<미나리> 정이삭 감독 연출 <트위스터스> 북미 박스오피스 1위
기상청 직원과 스톰 체이서 인플루언서가 역대급 토네이도를 좇는 이야기 <트위스터스>가 개봉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습니다.
<미나리>를 연출했던 정이삭 감독이 연출을 맡으며 국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트위스터스>는 주말 매출액 1700억을 넘어서며 24년 개봉작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한 <괴물> 웨이브 독점 공개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 웨이브에서 독점 공개를 알렸습니다.
<괴물>은 몰라보게 바뀐 아들의 행동에 이상함을 감지한 엄마가 학교에 찾아가면서 의문의 사건에 연루된 주변 사람들 모두가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 이야기입니다.
<탈주> 올 여름 한국영화 최초 200만 돌파
7월 3주 차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탈주>가 기세를 이어 누적관객 수 2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이번 여름 개봉한 한국 영화들 중 2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탈주>가 처음입니다.
<탈주>는 내일을 위한 탈주를 시작한 북한 병사 규남과 오늘을 지키기 위해 규남을 쫓는 보위부 장교 현상의 목숨 건 추격전을 그리며 <탈주>의 흥행은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작 공개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작들이 공개되었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THE ROOM NEXT DOOR>, 루카 구아다니노의 <QUEER>, 토드 필립스의 <Joker: Folie a Deux>까지 쟁쟁한 경쟁작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요.
다양한 장르와 독창적인 연출을 자랑하는 작품들이 출품되어 영화 팬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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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노키오, 너는 이미 '진짜 아이'인 걸
공통점
홀로 사는 목공, 제페토 할아버지가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만든다. 제페토는 잠들기 전, 푸른 요정에게 "피노키오를 진짜 소년으로 만들어달라"라고 소원을 빈다. 그 소원을 들은 푸른 요정은 마음씨 착한 제페토의 소원을 들어주어 피노키오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푸른 요정은 나무로 만든 소년인 피노키오에게 "남을 먼저 생각하고 착하고 용감한 소년이 되어야만 진짜 아이가 될 수 있다"라고 조건을 건다. 그리고 피노키오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귀뚜라미 '지미니 크리켓'이 양심이 되어 도우라고 지시한다.
제페토는 살아 움직이는 피노키오를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피노키오를 학교에 보낸다. 하지만 학교에 가던 중, 피노키오는 사기꾼 여우인 어니스트 존과 그의 부하 고양이 기디온을 만난다. 그들의 꾀임에 넘어간 피노키오는 인형극의 단장인 '스트롬불리'에게 팔려가 공연을 하게 된다. 욕심쟁이 스트롬불리는 피노키오 덕에 돈을 많이 벌자, 피노키오를 새장에 가둔다. 그 사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피노키오를 찾기 위해 제페토는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피노키오는 새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집에 돌아가던 중에 이번에는 '오락의 섬'에 끌려가게 된다. 그곳은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당나귀로 만들어 파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피노키오는 당나귀 귀에 꼬리까지 생겼지만 가까스로 도망쳐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상태였다. 아빠를 구하러 간 피노키오는 먼스트로라는 고래 뱃속에 제페토와 함께 갇히고 만다. 제페토와 피노키오는 고래 뱃속에 불을 피워 재채기를 하게 만들어 먼스트로가 입을 벌렸을 때 탈출한다.
아빠를 무사히 바닷가로 데려온 피노키오는 용감하고 착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진짜 아이'가 된다.
차이점
1. 요정을 대하는 지미니 크리켓의 태도
알다시피 실사판 [피노키오]에서는 푸른 요정이 민머리의 흑인으로 나온다. 이와 다르게 애니메이션에서는 푸른 요정이 백인에 금발의 머리를 하고 있다.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애니메이션과 실사판을 비교하며 볼 때 지미니 크리켓의 태도가 너무 달랐다.
백인 요정이 나왔을 때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스스로 나서서 피노키오의 양심이 되겠노라고 자처한다. 요정이 시키기도 전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등 예의를 차리면 차렸지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흑인 요정이 "이 아이의 양심이 되어 주겠니?" 하고 요청하자 칼같이 거절한다. 그러다가 요정이 갈 데 없이 떠돈다고 팩트 폭력을 날려 버리자 마지못해 알겠다고 한다.
이런 작은 디테일이 논란을 더욱 키운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실사판을 거치며 많은 것이 각색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백인과 흑인을 대하는 곤충의 태도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온전히 똑같이 재현할 것까진 없겠지만, 적어도 우호적인 태도는 유지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푸른 요정, 어니스트 존과 기디온의 반복등장
어니스트 존과 기디온은 영화 [피노키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악당이다. 이 인조 사기단인 여우와 고양이는 학교에 가고 있는 피노키오를 꾀어내 극단으로 향하게 만든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사기단이 피노키오를 스트롬불리와 오락의 섬으로 이끄는 역할을 모두 수행하지만, 실사판에서는 처음에 딱 한 번 등장하고 만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움직임을 제법 재미있게 잘 살렸는데, 극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각색한 듯하다.
푸른 요정의 등장 횟수도 다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처음 피노키오가 말을 하게 되었을 때, 피노키오가 새장에 갇혔을 때, 총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실사판에서는 처음 한 번 등장하고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피노키오와 제페토가 집으로 돌아갈 때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긴 하지만) 이런 각색 덕분에 피노키오의 '모험'을 잘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3. 피노키오가 겪는 시련
영화에서 피노키오는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과 대가를 애니메이션에서는 피노키오에게 온전히 지우곤 한다. 때때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린아이에게 가혹하다. 하지만 실사판에서는 피노키오가 선택한 일들을 아이의 책임으로 돌리기보단 나쁜 어른들과 사회의 어두운 단면 때문에 순수한 아이가 유혹의 길로 빠진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애니메이션에서 피노키오는 자신의 선택으로 학교에 가지 않는다. 그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느낌이다. 새장에 갇혀 푸른 요정을 만나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피노키오는 갱생 불가한 나쁜 소년처럼 보인다. 오락의 섬도 마찬가지다. 어니스트 존에 발 놀림에 꾀이긴 했지만 애니메이션에서 피노키오는 그 섬에서 노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실사판에서 피노키오는 꿋꿋이 학교에 갔다가 쫓겨나고 만다. 나무 인형은 학교에 올 수 없다는 교장의 발길질과 아이들의 비웃음. 비정한 사회의 편견이 피노키오를 결국 스트롬불리의 극단으로 내몰고 만다. 또한 실사판 피노키오는 오락의 섬에서의 행동들에 거부감을 느낀다. 맥주를 마시지도, 물건을 부수지도 않는다.
그 때문인지 지미니 크리켓의 태도도 많이 변한다. '어디 한 번 나 없이 잘 해봐라!'하는 태도에서 '우리 피노키오를 내가 지켜야 해!'하는 모멘트로 말이다.
4. 파비니아의 등장
파비니아는 실사판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스트롬불리가 노예처럼 부리는 인형 조종사다. 파비니아는 등장인물 중에 유일하게 피노키오를 도우려는 선한 인물이다. 또한 인형 조종사들과 함께 스트롬불리를 감옥에 보내고 평등한 인형 가족 극장을 만드는 정의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의 등장은 피노키오를 학교에서 쫓아내거나, 새장에 가두거나, 당나귀로 만들어 내다 파는 나쁜 어른들 속에서도 착한 어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물론 영화 자체가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에 희망과 어른에 대한 믿음을 주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영화를 보는 어른들에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상평
실사판 [피노키오]는 애니메이션과 전체적인 맥락과 흐름은 같지만, 중간중간 각색된 디테일들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피노키오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성장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피노키오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다. 요정에 대한 논란이 약간 아쉽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좋았다.
사실 마지막 장면에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피노키오의 무릎 뒤의 이음새가 변하는 것을 눈치채기가 힘들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고 피노키오가 '진짜 소년'으로 변했다고 생각해 조금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나무 이음새가 사라질 때 푸른 요정의 증표인 파란 불빛이 반짝이지 않는다.
"넌 언제까지나 나의 진짜 아들이란다. 뭐 하나도 바꿀 게 없단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그리고 널 많이 사랑한단다."
제페토는 자신을 구해준 피노키오에게 말한다. 이미 피노키오는 자신에게 진짜 아들이라고. 그리고 이 말은 피노키오가 '진짜 아이'로 변한 것이 말 그대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노키오는 여전히 나무인형에 불과하지만, 제페토에게만큼은 진짜 아이 못지않은 소중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제페토와 함께 걸어가는 피노키오의 뒷모습은 진짜 아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해주는 지미니 크리켓처럼, 우리는 언제나 아이들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 귓속에서 작은 목소리로 언제나 알려줄 수는 없더라도 행동을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피노키오가 나무로 만든 아이라서, 진짜 아이가 아닌 가짜 아이인 걸까? 그건 아니다. 누구든 피노키오를 진심으로 대해준다면 피노키오는 그 사람에게 '진짜 아이'가 될 수 있다.
어떤 아이든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연다. 아이를 정직하고 용감하며 남을 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이의 몫이 아니다.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는지는 어른들의, 우리 모두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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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랑과 변하지 않을 끝, <체실 비치에서>
체실 비치에서 On Chesil Beach, 2017 제작
영국 | 로맨스/멜로 외 | 110분
감독: 도미닉 쿡
다른 사랑과 변하지 않을 끝, <체실 비치에서>
앞이 창창한 부부가 결혼한 지 6시간 만에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비난을 쏟아내고 이별한다. 자신에게 딱 맞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행복하고 축복받는 날에 난데없이 헤어짐을 선택하는 두 사람. <체실 비치에서>는 끝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시간 속에 숨어버린 연인의 결별과 이후에 남은 절절한 그리움을 그리고 있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는 이언 매큐언 소설가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어톤먼트>(2007)를 몇 번이고 눈과 가슴으로 담은 터라 그의 소설이 스크린으로 옮겨진 영화라면 무조건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더구나 <칠드런 액트>(2019)도 인상 깊게 봤기에, 시기를 놓쳐 보지 못했던 <체실 비치에서>(2018)를 그냥 흘러 보낼 수 없어 뒤늦게 접했다. 개인적으로 그의 소설도 무척이나 좋지만,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료하게 담아낸 영화가 더 좋았다. 원작을 발판 삼아 새롭게 태어난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큼 좋은 떨림은 없지 않은가
출처: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덧붙여 <체실 비치에서>는 시얼샤 로넌과 빌리 하울의 연기만 봐도 즐거운 작품이다. 내게 시얼사 로넌은 <어톤먼트> 속 13살의 브라이오니다. 사춘기 소녀의 눈망울에서 보인 질투와 시기 만으로 관객에게 극한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그 장면이 특히 기억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브루클린>(2015), <레이디 버드>(2017), <작은 아씨들>(2019)까지, 그녀는 굵직하다 못해 영화를 뚫고 나오는 아우라를 가진 배우임에 틀림없다. 물론 <호스트>(2013)가 어설프긴 하지만, 경험의 산을 오르기 위한 발판이라 생각하기엔 충분한 작품이다.
빌리 하울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7)에서 반한 배우다. 묘한 긴장감을 가진 얼굴과 마르지도 둔하지도 않은 몸매와 결정적으로 순수함과 타락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소가 참 매력적이다. 본 영화는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즐거움으로 다가왔고, 역시 이들은 섬세하면서도 몰입도 넘치는 연기로 화답했다.이토록 배우들을 찬양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들이 전달하는 이야기의 힘엔, 본래 서사가 가진 힘을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하는 탁월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영화는 이야기의 진행보다 두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들이 주는 호흡이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며 동시에 영화를 빛나게 한다. 스토리가 주는 감명보다 인물들의 요동치는 감정선이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점, 그건 몇 번을 곱씹어봐도 똑같을 것이다.
출처: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자기 자신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이혼을 위한 결혼'을 한다. 각자 품고 있던 마음의 구멍을 메울 유일한 존재를 찾았다며, 함께 살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어째 오묘하게 불편해 보인다. 영화의 시작부터 느껴지는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 서로를 향한 동상이몽이 분명 큰일을 낼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원하는 점이 너무나 달랐다. 여자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 당한 성적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자는 사고로 머리를 다친 어머니를 아들임에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더구나 성생활에 대해 그들은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모두 문외한이었다. 이는 결국 플로렌스에게 섹스에 대한 무한한 공포를 갖게 하고, 에드워드에겐 자신감 결여란 불안을 주입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들의 첫날밤은 시작도 전에 긴 과거여행에 강제로 빠지게 된다. 자의로 태풍 속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강제로 그들의 과거 속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체실 비치 근처 호텔방(현재)과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삶의 궤적(과거)'이 쉼 없이 교대로 교차하고, 동시에 현재에 덧입혀지면서 폭탄을 품고 있는 거나 다름없던 첫날밤은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케 하는 시작점이 된다. 영영 가까워질 수 없는 결과를 낳는 시작, 말이다.
두 사람의 헤어짐, <체실 비치에서>는 이를 담담하고도 조용히 전달한다, 중요한 점은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출처: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에드워드의 아킬레스는 어머니였다. 그는 사고로 머리를 다친 어머니의 기이한 행동을 시간이 흐른 지금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역사학과 수석을 차지했지만, 가족 누구에게도 축하받지 못하는 상황은 물론 개인의 기쁨이 충만할 때마다, 그는 혼자 알아서 스스로의 행복을 위로해야만 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가족은 존재했으나, 없었다. 가족 구성원에서 그는 존재감 제로였고 가족의 관심은 오직 어머니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이해했지만, 가슴 깊이 파고드는 외로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마법처럼 플로렌스가 나타났고, 첫 만남에 자신의 수석 소식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자식인 본인도 어려운 어머니를, 어머니의 눈높이에서 진정으로 이해하는 플로렌스를 보며 조용히 혼자 숨죽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자책과 부끄러움, 고마움 그리고 플로렌스를 향한 확신이 뒤엉킨 눈물이었다.
플로렌스는 부잣집 딸이지만, 그만큼 억압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두려움과 새로움을 경멸하는 집안 내력을 향한 반항심이 극에 달했을 때, 그녀 앞에 에드워드가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한 채 등장한다. 목마른 자유를 어렵지 않게 행하고 있는 그에게서 그녀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욕심이 많은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을 존중하고, 믿고 사랑하는 에드워드와 자기가 만든 4중주 그룹만 있으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플로렌스였다. 다만, 본인이 말하고 믿는 사랑이 정말 사랑이었는지, 나아가 그가 주는 사랑과 같은 결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볼 마음은 없었고, 이를 고려할 시간도 부족했다.
완벽한 운명의 짝이 틀림없던 그들의 시작이 단기간에 끝난다. 비극은 시작부터 존재했다. 서로에게 원했던 마음과 감정을 발견해, 이를 사랑이라 믿고 키웠지만 그것은 사실 너무나 쉽게 무너질 모래성이었다. 그만큼 연인은 서로에게는 물론 본인들에게도 실수 투성이었고, 어렸고, 진실하지 못했다. 첫 부부싸움이 각자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첫 화해도 역시 무참히 결렬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두 남녀는 자기의 자존심을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상대에게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총동원해 비난하며 계속 상처를 주고받는다.출처: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누군가 그랬다, 결혼은 외롭고 결핍에 고통스러워서 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혼자로도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때 하는 것이라고, 서로의 마음속 구멍을 채우기 위해 다른 구멍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나의 구멍을 나 스스로 보듬을 수 있는 각자가 서로를 발견해 만나는 일이라고. 두 사람의 이별이 비극일 수밖에 없는 건, 서로를 향한 마음의 넓이만큼이나 생각의 확장 또한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들의 위태로웠던 삶을 지켜줬던 '자존심'에서 벗어나질 못했기에, 누구 하나 먼저 상대를 포용하겠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 그들은 자신들의 구멍을 감추기 급급했다. 상처를 내보이지 않으면서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마음으로 한 사랑은 곧 기다림마저 허용치 않는 끝이었다.
헤어진 뒤로 두 사람은 긴 시간 속에 묶인 채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간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 서로에게 했던 행동들을 자책하기도 하고, 눈물을 훔쳐가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에드워드가 우연히 플로렌스의 딸과 만나고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과거를 후회하는 추억거리에 불과할 뿐 다시 사랑에 빠져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드라마틱한 미래는 그려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수백 번 복기해도 이미 결말이 나온 이야기의 끝을 바꿀 수 없는, 이변 없는 결말이랄까. 대신 <체실 비치에서>는 다른 시작을 보여준다. 마침내, 끝에서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상처와 분노도 잠재우는 시간이란 자연의 흐름 속에서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후회와 용서를 행하는 잔잔한 고요를 말이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체실 비치에서 다른 선택을 했었어도 결말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끝은, 그 고요는 분명한 울림을 전달한다. 태풍 같은 순간 속에서 했던 선택들과 그로 인한 후회와 자책, 이미 끝난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확신을 뻥 뚫린 구멍에 천천히 밀어 넣으며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는 과정은 분명 깊은 인상을 남기니까. 따라서 각자의 삶을 살게 된 두 인물이 다시 만나는 장면에는, 특별한 감정이 담긴다. 서로에게 비로소 마지막이 될 슬픔과 나에게 다시 시작될 미소 한 줌. <체실 비치에서>가 우리에게 주고 싶은, 이변 없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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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새
벌새
1994년에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다행히 2년 전, 산본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입주한 것이 30년 동안 살아온 보람이자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산동네 빈민촌에서 월세, 전세를 전전하다 어렵게 집을 마련했으니 큰 짐은 덜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랜서 활동을 하며 출판사,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이러저러한 책을 만들고 있었는데, 수입은 적었고, 그나마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수입으로 생활은 어려웠다. 마침 이 무렵 써 놓은 일기가 있어서 찾아봤더니, 이 영화에 나오는 사건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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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18일 토요일
아침에 월드컵 축구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가 있었다. 2대 2로 비긴 경기. 나라가 온통 월드컵 열풍에 휩싸여 있다.
1994년 7월 9일 토요일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12월 19일 월요일
연말이 되면서 나날이 바쁘기만 했다. 주위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만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에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를 보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숫한 상념들이 나의 감정을 흔들었다. 이제 일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연속되고 있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짧은 글이라도 내 마음을 정리하고 깊은 생각 속에서 나온 글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기능적인 글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저기 걸리고 널린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은 때로 위안을 얻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제 서서히 1994년을 정리할 때도 되었다. 꼭 정리를 하지 않아도 힘겹게 달려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숨을 고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신문의 활자를 키운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있다. 가끔 그 속으로 나타나는 햇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대형 사건과 사고가 줄을 이어 터지고 김영삼 정권은 무능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나라의 정치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만큼 저질이다.
사무실을 얻기는 8월부터 얻었지만 출근은 9월부터 했다. 사무실 출근이 하루를 규칙성있게 하는 면이 있어서 좋다. 매달 지불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지만 그것은 일을 하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사무실 유지는 그런대로 잘 되고 있는 편이다. 함께 지내고 있는 이00 씨와 00희 씨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조금 성격의 차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약간의 양보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많고 참여했다 떨어져나오는 모임도 수없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반복은 줄어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른글을 정리하고 새해에는 사람을 정리하고 맺는 관계를 보다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정리를 잘 하는 편이지만 조금이라도 걸리고 널린 관계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힘들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나 지켜온 원칙이 '양보다 질'이었다. 친구는 적게 사귀되 깊이 사귄다. 무릇 사람의 관계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의 관계도 잘 정리를 해야 하겠지만 일과 관계된 것도 잘 정리를 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쓰는 실용서 단행본 작업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빨리 소설로 돌아서야 한다. 결국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언제나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것은 마음뿐일까.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열악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마음 속에 생각하고 떠오르는 것들이 거의 모두 작고,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내용들 뿐이다. 출퇴근을 하면서 보게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행동이 나의 감정에 분노와 짜증을 일으킨다.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교양이 없고 무식하며 질이 낮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런 주장으로 전당포 노파와 딸을 도끼로 살해한다.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 인간은 교양이 있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으로 갈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론적으로 이미 나와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는 경제적 토대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질적인 수준은 결국 경제문제에 달려있다고 본다. 계급이 없고 착취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교양있게 살아갈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주장을 믿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저열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례하지는 않다. 다만 사회의 제도, 교육, 빈부의 격차, 권력의 억압, 착취, 계급제도 등 각가지 모순들이 인간들을 기형으로 만들어 갈 뿐이다.
현상은 왜곡된 인간성의 발현일 뿐이다. 이기적인 인간, 조잡스러운 인간, 한심한 인간, 사악한 인간, 더러운 인간, 비참한 인간, 음흉한 인간, 불쌍한 인간, 교활한 인간 등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독버섯으로 키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조건 희생자인가.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품성은 어떤 사회에서든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 품성이란 결국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품성의 미덕은 분명 있다. 권력을 소수가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에 대항하는 주체는 결국 민중일 수 밖에 없고 그 민중은 권력자와 자본가를 대상으로 언제나 대립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민중의 단결되지 못한 현실을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를 만들고 서로 경쟁하도록 만든다. 산업예비군, 실업율, 대학의 경쟁, 학력중시, 심지어는 지방색까지 만들어서 가능하면 민중들의 단결이 안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구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극도의 이기주의가 번지는 것은 자본주의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경쟁을 최우선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권력자들은 민중의 삶을 피폐하고 메마르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이러한 제도는 국가의 경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50년대와 60년대는 국가 전체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여 모든 노력을 경제부흥에 쏟았다. 경제발전 속에서 최소한의 인권이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이 단지 이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80년대 이후, 경제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자본가와 권력자는 민중을 계속 파편화하고 우매하게 묶어두기 위해 '성'과 '스포츠'를 도입했다. 초기의 권력도 파쇼이고 80년대의 권력도 파쇼임에는 갖지만 경제의 발전정도에 따라 민중을 분열시키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노동악법과 국가보안법 등 탄압과 착취를 강제하는 채찍은 언제나 동일했다.
'개발독재'로 불려진 70년대 파쇼의 시절을 지나 대외 수출이 호황을 맞이하던 80년대와 90년까지 경제의 토대는 성장했다. 대중이 누리는 물질의 풍요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이었고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한 증거이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민중의 기본 삶은 조금 나아졌지만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소외는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이 나아진 만큼 씀씀이도 커지고 경제의 개념이 소비 위주로 바뀌면서 생활 문화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일정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을 노동에 바쳐야 한다. 직장과 직위,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며 갑작스러운 변수, 이를테면 질병, 사고와 같은 변수가 생기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회의 복지제도가 기본으로 지원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는 분명한 일이다. 또한 일정한 수입은 소비문화를 따라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범죄의 유혹을 받고 있다. 공무원의 범죄가 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그래서 너무 당연한 것이다. 공무원 뿐 아니라 몫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이라면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한탕주의에 빠져든다. 마약의 밀매, 매춘, 인신매매, 성을 파는 모든 서비스업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격은 경제력으로 대체된다. 아파트 평수와 고급 승용차, 월 수입 등이 지위와 권위를 대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무차별하고 단순한 비교로 심한 박탈과 소외를 느낀다. 경쟁을 부추기고 인간성을 물질로 대신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하지 않고 평등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근본에서 잘못된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나와 우리 가족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무시되고 필요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가족 이기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든 가장 성공한 분열방법이다. 사회에 범죄가 극성이고 온갖 사고, 사건, 위험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가족끼리만 다정하고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경제단위의 중심이기도 하다. 부(물질)의 승계가 가부장제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자본가가 대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이런 경제단위는 소비문화의 주체이기도 하다. 가족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소비문화가 대중을 유혹하고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도록 만들고 있다. 가족(주로 가부장)은 고급 주택, 아파트를 구입하고 외제 승용차를 사고, 외제 의류를 철마다 사 입고, 고급 백화점에서 날마다 쇼핑을 하고 자녀를 외국에 유학시킨다. 한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보다 결국 자본가이겠지만 가부장의 존재가 가족을 대상으로 이러한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다른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없다. 엄격히 말하면 가족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최소한의 경제단위일 뿐이다. 가족은 부모와 피를 이어받은 자식으로 구성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혈연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는 단적인 몇 개의 예만 들어도 충분하다. 비록 자본가라 할지라도 그들이 풍요롭고 넉넉한 물질생활을 누리는 것이 가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 고유한 의미에서 혈연공동체나 평등한 관계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 아침이면 뿔뿔히 흩어져 공장이나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에 잠을 자기 위해 들어오는 가정을 어떻게 가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돈이 없어 생활이 궁핍하면 가족은 해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지만 가족의 모습 역시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가족의 문제는 가족 구성원의 성격, 이해관계, 희망, 욕심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자본주의 제도, 경쟁, 수입원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부모가 넉넉한 수입이 없다면 자녀는 제도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제도교육을 일정하게 받지 못하면 좋은 취직자리를 얻을 수 없으며 이것은 결국 수입의 한계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만 거의 모든 민중들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가난한 가족은 가난함때문에 가족이 갖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살며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 단칸방에서 서너 식구가 끼어 자야하는 주거생활이 그렇고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일상생활이 그렇다. 여기에 가족 구성원이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면 그 가족은 거의 궤멸에 이른다. 당장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치료비며 생활비 등 들어가야 할 돈은 평소보다 몇 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대책이 없다면 빚을 짊어져야 하고 이 빚은 그 가족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올가미가 된다.
가족이 단단히 결속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고 살아가야 할 일이 막막해지면 빠르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어느 사회에서도 빠르고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편법과 불법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 범죄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며 여성은 매춘을 한다. 3차 산업의 발달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서비스 산업은 성을 상품화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여기에 투여되는 여성의 인력은 언제나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유흥업이나 각종 서비스업에는 매매춘이 허용(?)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건전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게 된다. 여성의 경우 매매춘을 통해 인간성의 황폐화와 경제적 이익을 바꾸게 되고 남성은 극심한 노동이나 범죄의 방법을 찾게 된다. 가족은 결국 경제적인 이유로 흩어지게 되며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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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은희의 가족에게 변곡점이 된다. 은희 개인에게도 가족의 문제와 함께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은희를 둘러싼 세계는 무겁고 답답하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는 일하느라 바쁘고, 학교는 성적 위주로 학생을 평가하고, 어디 한 곳 편하게 마음을 내려 놓을 곳이 없다.
부모는 아들 대훈이 학교 전교회장을 하고, 서울대학교를 들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은희와 은희의 언니 수희에게는 살뜰하지 않다. 수희는 남자 친구와 어울리느라 학원에 가지 않고,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소리나 지른다.
가족이라고 해도 다섯 명 모두 자기 삶을 사느라 바쁘고, 함께 모이는 시간은 아침 밥먹을 때 잠깐이다. 은희가 '왜 우리 가족은 모래알 같을까'라고 묻는 마음은, 그 이유를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서글프다.
은희는 한문 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을 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오빠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대학을 다니던 은지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이 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학교가 재미있니, 성적은, 어느 대학 가야지, 같은 뻔하고 지겨운 질문이 아닌, 좋아하는 게 뭐지, 왜 좋아하지, 요즘 무슨 생각해, 같은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질문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른, 청소년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영지 선생만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은희가 놓여 있는 상황을 공감하고 있는 인물이다. 영지 선생은 서울대학교를 휴학한 상태인데, 그가 부른 노래, 그의 책장에 있던 책으로 보아 '운동권 학생'으로 보이고, 어쩌면 수배 당한 상태였을 수 있다.
은희의 부모는 90년대 한국 부모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아버지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고, 엄마는 가게 일과 집안 일을 하느라 남편, 아이는 물론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다. 언니는 학업보다 남자 친구 만나며 노는데 신경을 쓰고, 오빠는 부모의 기대로 심한 부담을 진 채 학교를 다닌다. 은희는 아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어린 영혼이지만,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는 관찰자 역할을 한다. 그의 세계는 아직 좁고, 부모, 학교, 학원 그리고 친구들이 세계의 전부인데, 은희가 세계를 깨고 나오게 되는 계기가 영지 선생의 죽음이다.
은희는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은희가 살고 있는 대치동은 지금이나 그때나 강남의 중심이고,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여서 은희는 가난한 집 아이였고, 공부도 탁월하게 잘 하지 못하는 아이라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다.
한국 자본주의 욕망이 응집된 강남에서 제한 없는 경쟁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으로 진입하려는 부모와 그 부모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학생들의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지만, 이런 지옥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영화에서 은희를 비롯해 왼손을 쓰는 인물이 여럿 있다. 주인공이 왼손을 쓰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왼손잡이는 소수라는 점에서, 이들이 이 사회의 소수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걸 드러낸다. 은희와 그의 가족은 강남에서 오히려 소수에 속하고, 은희는 학교에서 소수이며, 영지 선생도 한국사회에서 소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은희와 영지 선생이 여성이라는 점 또한 사회적 소수이자 약자라는 점에서 이들이 바라보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이렇게 영화는 1994년의 한국사회 속에서, 중학생 은희가 바라보는 세상과 만나는 사람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은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악한 사람은 없지만, 악한 행동을 하고, 선한 사람도 때론 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인간의 다면성은 의도가 필요 없는 삶 그 자체에서 나오는 모습이며, 은희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부장적이고 때로 폭력을 휘두르는 은희의 아버지도 은희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 은희를 때리던 오빠 대훈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수희를 보고 눈물을 터뜨린다. 이들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기득권을 공기처럼 가지고 살아가지만, 자신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와 본질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같은 해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이 한국사회의 계급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낸 영화라면, 이 영화는 그 폭력성을 내재한 채, 체제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중하층 가족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계급성'을 드러내는 장면은 두 장면이 나오는데, 떡집에서 강남 '사모님'이 은희 아버지가 만드는 떡이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에 반박했다는 은희 아버지의 말과, 은희가 남자 친구와 시완과 함께 있을 때, 시완의 엄마가 나타나 시완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시완의 아버지가 의사라는 사실은 딱 한 대사에서 나타나고, 그것이 부르주아와 중하층 상인의 가족을 가르는 선으로 드러난다.
어떻든, 은희의 가족은 '생존'한 가족이다. 수희가 성수대교 붕괴에서 살아온 것도 생존이지만, 강남에서 떡집을 하며 어렵게 세 명의 아이를 가르치는 부모의 열성 덕으로 은희, 수희, 대훈 모두 살아남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1995년에는 강남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한다. 성수대교 붕괴보다 이 사건은 은희에게 더욱 직접적 충격과 트라우마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강남에 살고 있고, 삼풍백화점에 갔을 확률이 높았을테니,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다.
더구나 은희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1997년 말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고, 수많은 사람이 파산하게 되는데, 이 가족이 과연 그때도 무사히 생존하게 될 지는 모를 일이다. 이렇게 1994년 이후, 한국, 특히 강남에 불어닥치는 사고와 불행으로 은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영화는 1994년, 은희의 수학여행에서 끝나지만, 영지 선생의 죽음으로 은희는 조금씩 변할 것으로 보인다. 평생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꺼지지 않는 불을 간직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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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황혼기를 지나니 새롭게 보였던 것에 대한 고백
엄마 보고 싶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어느 동네에 살던 주인공 마히토다. 안절부절못하는 마히토. 창가 반대편에 엄마가 누워있는 병원이 있다. 전쟁 중이었던 일본. 분위기가 어지럽다. 병원만 보고 있는 마히토. 평화가 깨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전투기가 엄마가 누워있는 병원에 폭격을 가한 것이다. 불에 탄 병원. 엄마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마히토의 마음에는 큰 구멍이 생겼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그 구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새어머니를 찾은 아버지. 새로운 어머니를 찾은 이 가족은 우츠노미야 시로 이사를 간다. 새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냉담한 마히토. 새어머니 나츠코는 친엄마가 아니기 때문에 차가운 태도를 유지한다 이런 마히토의 태도는 새어머니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학교도 가기 싫었고, 원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다. 도망가고 싶은 마히토. 이 마히토에게 왜가리 한 마리가 날아든다. 마히토는 이 왜가리와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다.
안 그랬던 적은 없어
이 영화는 미야자키 히야오가 기존 필모그래피에서 갖고 있던 특징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애니메이션 제작자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일례로 하야오의 수상이력은 아주 좋은 편이다. 2003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했다. 이 의미는 거대하다. 지금 현재 2023년에 아시아 영화가 세계에서 가지는 입지는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의 위상과는 큰 차이가 나기 마련인데, 이를 순수한 작품성과 재미로 극복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시아 영화의 인재풀이 넓어지거나 시스템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또 미디어가 현재까지 발달하기 전에 달성한 업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성과는 다르게 그의 영화는 항상 난해했다. 대표적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부모님이 돼지가 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선후관계를 보면 신기한 일 투성이다. 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초반부의 부모님이 음식을 먹다가 돼지가 되는 장면이 있다. 돼지가 되는 거는 그냥 판타지 요소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돼지가 된다’라는 것이 1980년대의 일본 버블경제를 의미한다고 하면 좀 갑작스럽다. 엔딩을 통해 전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핵심은 한 소녀가 ‘잊던 것을 다시 되돌이킨다’라는 점, 그러니까 세상에 나갈 때 각자가 고유하게 갖던 오리지널리티를 잊지 말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둘은 상충된다. 비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뿐만 아니라 인지도가 덜한 영화 역시도 난해한 편이었다. <벼랑 위의 포뇨>도 그랬고, <모노노케 히메>도 그랬다.
본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이번에도 (감독의 전작처럼) 사랑스러운 영화일 것이라고 기대한 분들이 있다면 무조건 실망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필모그래피 중 가장 위에 있을 매운맛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직선적인 이야기를 거부한다. 직선적인 이야기라고 함은 기-승-전-결의 이야기구조를 뜻한다. 얼마 전에 개봉한 <너와 나>를 생각해 보자. 세미가 불안해한다(기)- 세미가 하은이에게 찾아간다/그리고 하은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불안해한다(승)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각본가들이 이야기를 구성할 때 염두하는 ‘욕망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를 <너와 나>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다르다. 이 영화는 초반 30분을 전제로 이야기의 밑그림을 그리고, 그 이후를 각자의 키워드에 맞게 채색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애니메이션의 틀을 갖고 있지만 수채화 그림이나 에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른 에세이 같은 영화들과 유사하게 주인공은 사실상 감독의 분신이다. 또 이 인물의 욕망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군수공장 집 아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주인공 마히토의 아버지가 군수공장을 운영한다는 점이다. 이 설정 자체만으로도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관객 분들도 많을 것이다. 세계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군수공장 사장 집안 아들이 주인공이라면 자칫 전쟁에 대해 합리화하는 것처럼 읽히기 쉽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군수공장 사장 아들이라는 설정을 반대로 읽었다. 우선 이 영화의 원작에 이 설정이 등장하는지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동안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필모그래피 내내 새긴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전쟁에 대해 합리화하는 태도를 취한다? 과연 ‘군수공장 사장 아들과 세계 2차 대전’이 가져올 파급력을 과연 몰랐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군수공장 사장 아들’이라는 설정은 주인공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비유다. 이 영화의 핵심은 도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두 소재는 과거와 현재다.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어 과거의 자신 때문에 현재에서 도망친다. 특히 주인공 마히토가 흥미롭다. 마히토의 새어머니는 어린 주인공이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존재다. 가족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생활의 부적응으로 이어진다. 타인에 대한 분노가 자기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 마히토를 기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향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주인공의 강력한 조력자로 나오는 인간 캐릭터, 왜가리, 새어머니, 심지어 흑막처럼 보이는 등장인물까지 마히토와 유사하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에 직면했다는 점이 공통점이 되는 것이다. 이를 중심으로 영화를 보면 이야기가 쉽게 느껴진다. 영화가 가지각색의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인생들 사이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는 영화가 이 작품이다. 자, 이를 염두하고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린다. 마히토는 사실상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을 암시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로 본인의 전투기 덕력(?)을 고백한 마야자키 하야오. 하지만 그는 반전주의자다. 또 감독의 어머니는 그가 어린 시절에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가 흥미로웠던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기 자신을 돌이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기존 필모그래피를 오마주한 몇 장면이 있다. 새어머니와 마히토가 대화하는 신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봤던 장면이 연상된다. 영화의 문제 해결 과정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생각나는 장면도 있다. 어떤 장면에선 <벼랑 위의 포뇨>를 상기시킨다. 우츠노미야 시의 집에서 일하는 할머니들, 그리고 동물과 유령들은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난다. 이 세 캐릭터들은 전적으로 하야오스러운 비주얼을 갖고 있다. 이 모든 오마주를 그냥 단순히 팬들 보기 좋으라고 넣은 건 아닐 것이다. 사실상 하야오의 분신인 주인공이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하나하나 경험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는 이야기에서 오마주가 차지하는 비중을 좀 더 쉽게 접근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오마주가 하야오의 고백이자 반성처럼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의 악당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악당이 하는 일과 사는 곳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내면을 상징하면서 그동안 걸어온 길을 암시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예술가다. 그 긴 시간 동안 애니메이션 하나를 깎아 우리에게 풍부한 감동을 선사한 인물이다. 그럼 당연히 예술에 대한 의미가 깊을 것이다. 하야오가 긴 시간 동안 예술가로 살았기 때문에 이 예술이란 존재는 하야오에게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이 의미를 주인공 마히토가 천천히 되짚어보는 구조가 이 영화의 플롯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예술이라는 가치를 탐구하는 과정이 ‘나에게 어떻게 살 지를’ 설명해 줬다는 일종의 선언처럼 보인다.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놓친 것들이 몇 있어. 이런 나를 두고 너희들은 어떻게 살래?'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대중성이 뭐죠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글로 썼다고 해서 글쓴이가 이 영화를 쉽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영화처럼 보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본인 내면의 단면을 잘라서 영화화했기 때문에, 우리 같은 3자는 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난해하고 지루하다’라는 평에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 점에 있다. 특히 초중반부 40분까지의 전개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부러 기괴하게 연출한 장면도 몇 보인다. 이렇게 대중성과는 저 멀리 떨어진 이 영화.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긴 어렵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역시 예술의 순기능 중 하나로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하는 일이고, 예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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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3. 23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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