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14 18:54:19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영화 <슬픔의 삼각형> 리뷰

<슬픔의 삼각형>이 시작되면 관객은 처음부터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다. 한가득 모여 있는 남자 모델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인데, 이 영화가 우리를 어떤 롤러코스터에 태울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요” 식으로 상큼한 미소를 환하게 짓는 H&M 모델 표정과, “너희는 모두 내 발아래 있어” 식으로 얼굴을 굳히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발렌시아가 모델 표정을 번갈아 짓게 시키면서 사회자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다 현대 패션계와 인스타그램 광고들을 얼마나 잘 요약해 주는지, 헛웃음이 나온다. 몸을 걸치는 수단이었던 옷과 장신구가 이제 사람의 내면까지 절여 버리려고 드는 게, 재미있긴 하지만 징그러울 때가 있는데 딱 그 느낌이었다.
뒤이어 모델들을 인터뷰하면서, “수입이 여자 모델의 1/3밖에 안 되고 작업 거는 게이들도 상대해야 하는” 남자 모델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뭐냐고 자조적으로 물을 때는 정말 기분이 묘했다. 2022년 기준으로 여성은 동일 직군에서도 남성보다 31.5% 임금을 덜 받고 있으며, 서비스직으로서 인간 대 인간의 기본적인 친절을 베풀다가 별의별 수작질과 심지어 “꼬리 쳐 놓고 이제 와서 모르는 체를 한다”는 의문의 분노까지 받았다는 사람 이야기가 수두룩한 세상을 살고 있기에.

그리고 나면 이 영화는 마치 3개의 꼭짓점처럼 3개의 파트를 톡, 톡, 톡 찍고 엔딩까지 쉼 없이 달린다. 참고로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마케팅 문구는 진실이었다. 아, 참고로 문구는 아니지만 마케팅에 가히가 붙은 것도 나를 미치게 웃기는 요소이다. 게다가 (밈 아니고 진짜로) 포브스 선정 “올해 가장 웃긴 영화.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라는 말이 진짜였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지의 “이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화”라는 말도. 더불어 “어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도 믿어주기를 바란다. “영화관에서 꼭 봐야 하는 영화”이자 “끝나고 나서 할 얘기가 있는 영화”는 모든 영화의 주장이지만, 이 영화는 정말 가급적 영화관에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시길. 다만 구토와 오물이 적나라하게 나오니 비위가 약한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마음의 준비 하셨다면, 그럼,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1.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영화의 1부는 인플루언서 모델 야야와 그 남자친구 칼의 이야기다. 칼도 모델이지만 쇼의 중심에는 야야가 있고, 칼은 관객석에서도 VIP 등장으로 밀려나 뒷줄에 적당히 끼어 앉는 신세이다. 마치 제니 홀저의 작업물 같은 느낌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글씨가 번쩍거리는 쇼의 관객석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조지 오웰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아직 자본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자산”을 자본보다 더 많이 가진 상태이다. 다시 말해 페이보다 #협찬 이 더 많다는 것. 그렇기에 돈 문제로 얼마든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지만 그러는 순간 “섹시하지 않”아진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같은 상황은 다른 단어로 풀어진다. 야야에게는 “섹시하지 않”은 돈 이야기가 칼에게는 “그저 관찰한 것”, “돈 문제가 아닌 것”으로 계속해서 풀어진다. 칼은 “성별 고정관념”에 휩싸이지 말자고 이야기하며 돈 내는 문제를 가지고 따지지만,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손으로 막아서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것에 어떤 젠더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지, 가슴팍에 돈을 끼워준 야야의 행위가 왜 그토록 기분이 나빴는지. 돈 얘기가 아니라지만 이야기는 돌고 돌아 돈으로 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수사학은 현란한 언어로,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여 정신을 꼬드긴다. 칼과 야야의 관계에서도 그 양상이 재연되지만, 2부 ‘요트’에서 만나는 부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양상을 들어 보면 헛웃음이 자꾸 나온다.
요트에서 승무원을 쥐락펴락하는 러시아 부호 여성은 “우리는 모두 평등 We are all equal” 하다는 말과 “삶은 불공평한 것 Life is unfair” 이라는 말을 한 입에서 낸다. 바로 뒤이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명령”한다는 말까지 육성으로 내뱉는다. 그런데도 승무원은 핀으로 고정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다가 결국 Yes와 No의 간단한 대답조차 헝클어지고 만다.
재차 강조되는 평등은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현대에는 더 이상 계급이 없다고 교과서에 나오지만, 동시에 우리는 너의 노력으로 어디론가 올라가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근로 소득의 힘을 점점 얕보는 사회를 살고 있다. 계급이 없다면 <기생충>이 계급 우화였을 리가. <기생충>에서는 계단으로, <행복한 라짜로>에서는 농민들의 마을로 표현되었던 계급이 이 영화에서는 요트 속 사람들의 옷차림과 그들이 머무는 자리로 표현된다. 일하는 위치에 따라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지고 음악 취향조차 달라진다.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본을 얻을 수 있는 무한의 자유가 주어진 척하지만, 자유롭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무엇이, 우리와 함께, 있다.

#2. 전복의 맛, 통쾌한가요?
그러나 이 세계는 폭풍우 속에서 기울고, 이내 전복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유층은 자기의 스타일대로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설명하지만, 그 일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생각해 보면 이들이 아무리 우아하고 고상하게 앉아 있어도 징그럽게 보인다. 극단으로 가는 천민자본주의, 사유가 부재한 사회에서 마케팅에만 절여진 뇌들이 모이면 얼마나 징그러워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서비스직이라면 누구나 ‘가끔은 그냥 바보들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제일 빠르지…’ 하고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할, 영 바보 같은 이미지도 이들 중에 덧씌워진다.
거기 그치지 않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풍자의 오물에 넘어뜨린다. 불안하게 떨리던 잔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아기 우는 소리와 풍랑 소리에 정신이 없는데 피아노 음악은 계속 흐른다. 결국 비싼 술도, 비싼 식재료로 만든 음식도, 심지어는 스스로가 가치 있는 다시 말해 “비싼” 사람이라 믿었을 사람들까지 바닥에 토사물과 함께 구른다. 이 영화는 그렇게 자본주의를 오물과 함께 바닥에 굴린다. 풍랑 속에서 사람들은 구르고 있는데 조타실은 비어 있고, 선장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다. 대처와 레이건과 케네디를 인용하는 러시아 출신의 자본주의자 비료상, 마크 트웨인과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하는 미국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선장의 술 냄새 나는 대화도 재미있다. “당신들이 풍요 속에 헤엄칠 때 세계는 빈곤에 허우적거린다”고 선장이 일침을 놓을 때는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 말을 듣는 부자들은 현재 토사물과 오물 사이를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부자들은 어둠과 오물 속에서, 미국이 자본으로 아작 내고 망친 나라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타인이 자기 얼굴에 전조등을 비추는 경험을 한다. 살기 위해 국경선을 넘는 사람들, 예컨대 베네수엘라에서 국경선을 넘어 미국을 향하던 사람들이 했을 경험이었다. 이 배는 자본주의 전복의 배다. 아무 사정도 봐주지 않고 가차없이 전복은 계속되다가 끝내, 배까지 전복되고 8명만이 살아 남아 무인도에 다다른다. 자본과 능력주의와 성별과 우리 사회를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뒤집은 끝에, 마침내 세계의 전복이 일단락된다. (거기에서의 내용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아껴둔다.)
그러나 이 전복, 통쾌하기만 한가? 미친 듯이 웃다가, 가감 없는 토사물에 ‘으…’ 하다가, 모처럼 영화관에서 사람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있다 보니 정말 ‘어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통쾌하게 웃다 보면… 웃다가 생각해 보니 웃을 때가 아니다. 제가 바로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마케팅에 절여져 사는 사람이랍니다? 영화를 보고 그나마 웃을 수 있는 건 단지 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 사람들처럼 자본을 많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왜 저들이 가진 역겨운 면면은 저에게 다 있는 걸까요?

#3. 삼각형과 원
삼각형과 원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수학적으로는 제법 비슷하게 묶일 만한 성질이 많이 있다…고 언젠가 들은 것 같은데, 학교 졸업한 지 너무 오래라 구체적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검색을 해 보니 삼각형 하면 외접원과 내접원을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고, 관련 공식 유도에서도 서로를 많이 써먹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삼각형과 원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거다.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나는 원을 떠올렸다. 삼각형은 어떻게 굴려도 다시 삼각형이다. 정삼각형인지 이등변삼각형인지 그 모양조차도 변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위치에 따라 어디가 밑변인지가 달라질 뿐이다. 그래 봤자 넓이는 똑같이 구해진다. 또 다른 교착 상태에 머무를 뿐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 똑 같은 얼굴로 금방 잘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해서 괴로워지는 사람이 누구냐가 달라질 뿐이다.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을 생각한다. 요트에서의 삼각형과 무인도에서의 삼각형을 놓고 보면 비슷한 위치에 놓인 사람도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인 사람도 있다. 처한 자리가 달라지면, 똑같은 재능 똑같은 노력을 갖고도 전혀 다른 성과를 내게 된다. 어제까지 비웃음을 사던 사람이 뭐 하나로 빵 뜨면 칭송을 받는 세상, 그러다가도 또 금방 비난을 받는 요지경 같은 세상에서, 삼각형 위를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미끄러지는 우리를, 나를 이 영화에서 본다.
볼 때는 미친 듯이 즐거운데 보고 나서는 할 얘기가 자꾸 생각나는 영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좋다.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모든 대화가 쫀득쫀득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롤러코스터에서 정신을 놓은 다음, 나와서는 삼각형과 원,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 서비스직의 애환, <기생충>과 <행복한 라짜로>, 트로이의 목마… 등등 매우 ‘있어 보이는’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다가 그조차 나의 위선 같다는 찝찝함을 안고 집에 돌아오면 된다. 그러고도 며칠 정도 이상하게 이 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포브스가 옳았다. 볼 때는 “올해 가장 웃긴 영화”였는데, 보고 나니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삼각형과 원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실 분을 찾습니다.
*영화는 5월 17일 극장에서 개봉합니다. 꼭 사람 많은 상영관에서 보세요.
**이 글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한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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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 리뷰
※ 스포일러 주의
하늘길이 막혀 국가 간 여행이 막혔다.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바꾸어 일상을 잊는 게 그 어느때보다 어렵다. 그렇다면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 찬 영화를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올해 개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5번째 장편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는 나쁘지 않은 오락 영화였다. 좋았으면 좋다고 하면 될 텐데 수식어가 괜히 길어진 까닭은, 이 영화에 대해 만듦새가 훌륭하다고 평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서사의 개연성이든, 연출면에서든. 하지만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 역시 적지 않고, 이번 리뷰에선 내가 주목한 점에 대해 간단히 적어볼 생각이다.
출처: 다음영화포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웬우: 망가진 영웅
아마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웅 서사 구조의 원형을 분석한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이란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캠벨의 서사구조를 전형적으로 따랐다고 보긴 어려운데(보글러 모델을 따랐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꺼내온 것은 '빌런'으로 소개된 웬우(양조위)의 일대기가 캠벨의 서사 구조와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웬우는 텐 링즈라는 초자연적 아이템을 획득하여 영생을 누리는 자로,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단 신격화된 인물에 가깝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위대한 정복자로 자신만의 세계를 꾸린 후 잉리(진법랍)라는 신비스러운 여인과 결혼에 성공한다. 이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한 장면이다. 과업의 달성과 신비스러운 여인과의 혼인 말이다. 물론 이런 의문이 생길 순 있다. 그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깊게 파고들기 어려운 까닭은, 스크린 묘사된 웬우라는 인물의 천 년 지배는 너무도 짧은 대사로만 지나갔기에 그의 모든 결정이 악하기만 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밖에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정복자가 곧 영웅으로 떠받들여졌다는 것을, 정복의 과정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들 치세가 안정적이었다면 역사서는 그를 위대한 전사로 서술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파편화된 단서만으로 이 웬우라는 인물을 뼛속까지 사악한 악인으로 점찍는 것은 점차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결과론적으로 세상을 망가뜨리려 한 행동의 본질적 요소는 아내의 부활이자 가정의 회복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주인공인 샹치(시무 리우)가 결국 아버지의 공과 과를 모두 물려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웬우를 완전한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겠지만.
그럼에도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웬우를 주인공인 샹치가 넘어서야만 하는 시련으로 규정한다. 이는 그저 웬우가 완전한 빌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다만, 구시대에서 필요로 했던 타입의 영웅이었지 현대의 우리에게 어울리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웬우의 추락은 어찌 보면 운명적인 측면이 있다. 그는 천 년간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며 분열된 정체성으로 시대를 부유하였음에도 늘 자신의 본명만큼은 잊지 않았고, 늘 자기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잉리가 나타난다. 그는 웬우를 웬우로 호명하며, 흩어진 그의 다면적인 모습을 본연의 자아로 고정시켰다. 홀로 자신을 잊지 않는 것과,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며 세상에 고정시키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웬우라는 이름이 천 년의 고독 속에선 결코 획득할 수 없었던 정체성은 그러나 몇 년의 시간 후 사라진다. 결과는? 자아의 망각이다. 그는 잉리가 존재하기 전 자신이 규정했던 웬우로도, 잉리가 존재했던 시절의 웬우로도 완벽히 돌아갈 수 없다.
영웅과 비영웅의 차이는 삶을 통해 목도하는 운명적인 순간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웬우는 자신의 세계가 일그러졌을 때, 즉 잉리를 잃고 평화를 상실한 시련의 순간에 단독자로서 복수를 하겠다는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택했다. 새롭게 부여받은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키워내지 못한 것, 그것이 그가 추락한 주요 원인이다. 영웅이 된다는 건 자신의 손에 누구도 넘보기 힘든 힘과 권위가 달려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마땅한 도덕의식을 흔들리지 않고 지닐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힘이 없더라도 가슴이 메일만큼 처참한 순간, 주변을 돌보며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와 같은 요소조차 영웅의 조건일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거대한 신분과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세계는 벌써 백 년도 전에 무너졌다. 소박하지만 지겹고 질곡 많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이자, 영웅이 답해야 하는 질문은 어쩌면 이런 것들일 것이다. '살아가야만 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탈로: 완전하지 않은 별세계
웬우는 천 년을 산 인물이기에, 그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조상이자 고향인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잉리의 고향 탈로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개인,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각각의 타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공동체가 거주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하지만 웬우가 숲과 동굴을 통해 탈로에 수평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듯, 웬우와 탈로는 둘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 수직적인 세계가 아닌 평등한 세계관이다. 정복자라는 속성을 띈 웬우와 평화로운 별세계처럼 보이는 탈로는 색상을 비롯한 여러 테마에 있어서 지독히도 달라 보이나, 사실 비슷한 점 역시 무수히 많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를 봉인한 장소이자, 웬우라는 외부자를 철저히 배격하는(그의 변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 폐쇄적이고 정체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진실로 평화롭기만 한 무릉도원이었다면 탈로에선 남녀가 평등하게 무술 훈련을 받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잉리가 성인이 된 자신의 자녀를 위해 갑주를 예비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언뜻 선인의 세계처럼 보일지언정, 탈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품고 있는 아슬아슬한 세계다.
나는 위에서 웬우를 악인이라기보단 ‘비영웅’정도로 묘사했는데, 영화 내에서 파멸적인 악惡을 꼽아야 한다면 어둠의 드웰러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크리처 무리는 다른 생명의 영혼을 흡수하며 텐 링즈를 통해 아이템의 소유주를 홀릴 만큼의 지능과 마력을 지녔다. 언어 능력조차 없어 소통이 불가한 그들은 순수한 공포 그 자체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 내에서 가장 신화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으로 힘을 원하고, 사악한 크리처가 등장하였음에도 영화 내 인물들은 어둠의 드웰러를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로는 인식할지라도 증오나 원망 따위의 감정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샹치와 샤링(장멍일), 케이티(아콰피나)는 외부인이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탈로 주민들 역시 그들의 시간과 장소를 모두 묶은 역사가 존재함에도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일종의 ‘현상유지’다. 탈로가 간신히 모면한 평화 위에 세워진 세계일지언정 불안한 진동을 감내한다.
이때 도달하는 것이 바로 웬우라는 외부인, 혹은 외부 세계다. 그는 자신의 절반을 찾기 위해 봉인된 문을 깨부숴야 하는 인물이다. 설령 그것이 날 눈멀게 한 거짓이라 하여도.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탈로와 웬우의 충돌은 탈로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영화가 탈로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역시나 그들이 무작정 옳거나 신령한 용과 함께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탈로가 공동의 시간과 지혜로 다듬어진 협력의 가치를 인정하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들과 전쟁을 함으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온 '봉인된 문의 수호'라는 목적성을 상실하였고, 이는 세계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릴 위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탈로라는 세계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웬우처럼 단독자가 아니며, 거주민 개개인은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샹치가 잉난(양자경)을 통해 쥐고 있던 손을 피게 되었듯, 탈로 세계의 인물들은 샹치 세계의 인물을 통해 문을 봉인과 위협에 시달릴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 끔찍한 사건이라 해도 오로지 나쁜 결과만 몰고 오진 않는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실패한 아버지조차 계승하는 영웅
유럽의 신화나 미국의 히어로 영화를 보다 보면 친부 살해 모티프나 주인공의 가족 관계가 단절된 설정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미국에서 제작된 히어로 영화임에도 빌런으로 묘사된 아버지 웬우와 차기 세대의 영웅인 샹치가 화해할 뻔한 장면이 있다. 샹치는 (영화 내에서 그가 다짐하기도 했지만) 기존의 다른 영웅들처럼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의 힘만을 취한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외친다.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며, 영화 말미엔 직접적으로 그를 추모하기까지 한다(그러나 완전한 용서인지는 알기 어렵다). 나에겐 영화의 이 지점이 가장 눈에 띄었던 것 같다. 21세기에 영웅이 될 수 없었던 아버지를 계승하는 젊은 영웅의 미래는 기대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 이 영화는 트릴로지의 첫 번째인 만큼, 샹치가 어떻게 텐 링즈를 물려받게 되었는지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프롤로그 부분에 해당할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즉, 샹치를 흔들어 놓을 진정한 모험이 시작된 순간은 아닐 것이라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모험을 통해 샹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케이티와 펍에서 술을 마시고, 웡과 노래방에 간다. 더 이상 호텔 직원은 아닐 수 있겠으나, 그저 그뿐이다. 특히 그가 지녔던 증오나 두려움은 일부 해소된 듯 보이나, 타의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완전한 극복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물론 샹치는 아버지의 텐 링즈를 물려받았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용의 힘을 배웠다. 그러나 영웅이라는 정체성은 단순히 ‘힘’을 획득하여 악하게 쓰지 않거나,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항하는 순간에 얻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발적인 책임 혹은 신념을 자각하는 각성의 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펼쳐질 샹치 트릴로지에서 주인공은 션이 아닌 샹치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회귀한 만큼 자신이 정녕 누구인지를 의식적으로 깨닫는 모습이 필요할 텐데, 이러한 서사를 기존 서구 영화 속 히어로와는 다른 결로 풀어나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는 열다섯에 달려 나오며 숨기고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앞으로 결코 숨길 수 없을 것이며, 숨겨서도 안될 것이다. 한 인물의 공과를 우리는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샹치는 잉리는 물론, 웬우까지 포함하여 다채로운 모습을 모두 포용하되 더 나은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다면적인 선과 악 사이에서,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넓은 스펙트럼의 세상에서.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해 지금 왈가왈부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아직 트릴로지가 종료된 시점은 아니니까. 그리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로 시작한 영화의 트릴로지가 혼자 올곧게 서고자 하여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넓은 세계에서 샹치는 여러 캐릭터들과 뒤엉키게 될 운명인지라, 이 캐릭터의 일관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인간적이었으나 정의로운 이는 아니었던 아버지의 공과를 물려받은 이가, 어떻게 자신을 영웅으로 정의하고 성장할 지에 대해선 정말이지 기대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2021 여름이 저물었다는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무더위가 계속되는 요즈음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시선을 바꾸어본다. 올 가을엔 여름의 발자국이 그 어느 때보다 짙게 남아있으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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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그 신발을 지금 신고 있기 때문이야...
낡은 집을 새롭게 바꿔 어려운 이들을 돕던 예능 프로그램 러브하우스, 놀랍게 변신한 보금자리를 보여줄 때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익숙한 음악(<미술관 옆 동물원> OST 중 ‘Synopsis’)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미술관 옆 동물원' 1988
결혼식 비디오 촬영기사인 ‘춘희’(심은하)는 짝사랑을 하고 있다. 촬영 때 가끔 마주치는 보좌관 ‘인공’(안성기)이 그 대상이다. 한편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철수'(이성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애인 ‘다혜’(송선미)의 집 문을 열고는 그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하여 그 집을 떠났고 이제 그곳은 춘희의 거처이다. 자신의 옛 연인이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음을 알게 된 철수는 함께 했던 공간을 버리고 마음까지 떠나 버린 다혜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집 전화만이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던 시절, 언제 걸려올지 모를 그녀의 전화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와 이미 월세를 철수 자신이 내었다는 권리 주장으로 둘의 좌충우돌 동거가 시작되는데. 몰입을 방해할만한 이러한 황당한 설정이 지나면 영화는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너무도 다른 생활 방식을 지닌 두 사람, 하지만 가장 극명한 차이는 사랑에 대한 서로의 가치관이다. 춘희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녀 감성임에 반해 철수에게 있어 사랑이란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야 하는 현실적인 것이다. 이제 춘희가 써 나가던 시나리오에 철수가 끼어 들게 되고 그 제목은 ‘미술관 옆 동물원’, 미술관은 춘희가 좋아하는 장소이고 동물원은 철수가 가고 싶어 하는 장소이며 서로의 생각의 거리를 보여주는 은유적 공간인 것이다.
둘은 서로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합의점은 미술관 옆 동물원.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설득하기 위하여 그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때로는 큰 소리를 내고, 때로는 “맘대로 하세요”라며 귀를 막고 무시하는 것이 전부다. 티격태격, 이러한 거친 과정이 지나며 그들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이해해 가지만 겉으로는 이전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그들이 써 나가는 시나리오 속 두 주인공의 변해 가는 모습을 통해 춘희와 철수의 변화를 조용히 보여준다. 그러던 중 철수의 휴가가 끝나고 춘희는 시나리오 공모를 포기한다.
춘희가 일을 보러 나간 사이 그녀가 갖고 싶어하던 선물과 과천으로 갔다가 귀대한다는 짧은 편지만을 남겨 두곤 집을 나선 철수, 황급히 그를 찾아 가는 춘희,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의 길은 엇갈리고 만다. 철수는 춘희가 좋아하는 미술관으로, 춘희는 철수를 찾아 동물원으로.
철수와 춘희를 대변하는 은유적 공간
시나리오 속 두 주인공 ‘다혜’와 ‘인공’은 현실의 두 주인공처럼 먼 생각의 거리가 있다. 자전거, 외로움, 순수함이 다혜를 표현한다면 자동차, 현실, 무관심은 인공을 대변하며 미술관의 프레임과 우주는 두 사람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적 설정으로 영화에서 사용된다. 지금 보는 별의 빛이 수 억년 전의 것이라는 막대함을 사랑하는 인공, 하지만 다혜에게는 그 광활함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사각 프레임에 자신의 모든 것이 있다.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인공과 다혜, 어느덧 인공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가 이동 수단이 되어 가고, 다혜는 우주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조심스러운 고백도 한다. “그림 밖이 휠씬 따뜻해요.” 우주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다혜에게 우주는 영하 수 백 도의 진공 지옥이라 이야기하던 인공도 이젠 얼굴에 웃음이 늘었다. 좁은 프레임에 갇혀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던 이와 너무 넓은 공간에 놓여 한 사람만을 받아들이기엔 공허했던 이가 공간을 넓히거나 좁히며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나리오 속 두 주인공은 좁히거나 넓히며 서로의 공간을 이해해 간다
자동차가 고장 난 인공이 다혜의 자전거에 그녀를 태우고 밤길을 가고 있다. “다혜씨,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어요, 누구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공씨, 오늘 처음으로 웃었어요.” 이렇듯 서로는 이해를 통해 사랑을 키워가고 이처럼 아름다운 장면에서 그 설렘을 더해 주는 익숙한 선율, 바로 영국 작곡가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op.12)다.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엘가’는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나 평범한 음악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8살 연상의 ‘앨리스’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엘가’에게 좋은 음악적 조언자이자 매니저였으며 음악적 영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실제 ‘엘가’의 명곡 <수수께끼 변주곡>(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 36 ‘Enigma’)도 아내를 위한 선율을 구상하던 중 창작된 작품이다.
그들의 결혼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평민인 ‘엘가’에 비해 ‘앨리스’는 귀족 집안의 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도 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으며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엘가’는 약혼자인 그녀에게 <사랑의 인사>를 작곡, 결혼 선물로 바친 것이다. 하니 들어 보면 곡의 제목만큼이나 사랑하는 이를 향한 절절함이 가득 묻어나는 너무도 아름다운 선율로, 영화 속 둘의 대화가 비껴 말하는 듯 “우리 이제 사랑이죠?” 하며 나누는 그 첫 인사와 같기에 더 적절한 곡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맞춤 선곡인 것이다. 평생의 사랑을 얻은 ‘엘가’는 이후 성공 가도를 달리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위풍당당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Op. 39)일 것이다. 탄광촌에 위치한 학교에서 벌어지는 감동적인 실화를 담은 '최민식' 주연의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2004)에 등장하여 뭉클함을 안겨 주기도 했던 이 곡은 1901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위하여 작곡된 것으로 모두 5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1번이 가장 유명하다. 이후 <희망과 영광의 나라>라는 가사가 붙여져 불리어지며 영국을 상징하는 곡으로 자리 잡았는데, 주는 감흥이 제목만큼이나 당당한 것이라 지금도 졸업식장이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어울려 자주 연주되는 명곡인 것이다.
'엘가'(Edward Elgar, 1857~1934)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엔 사랑에 관련한 명대사들로 가득하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춘희가 영화의 막바지 조용히 읊조렸던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어”일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 또 하나의 장면, 시나리오 속의 다혜가 지구를 별이라고 언급하자 인공은 “지구는 별이 아니라 행성입니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니. 그런 행성도 자기 주변만 맴도는 위성을 갖고 있죠, 달처럼.”이라며 고쳐 잡는다. 그런 그의 말에 “그럼 난 행성, 난 정말 달인가 보다. 내 안에서는 노을이 지지도 않으며, 그에게 미치는 내 중력은 너무도 약해 그를 당길 수도 없다. 누군가를 맞이하려는 듯 깨끗하게 치워진 내부. 난 태양빛을 못 받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월식 중인 불쌍한 달이다.”라던 그녀의 체념은 서글프지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시(詩)다.
그리고 또 하나의 깊게 스며드는 대사와 장면. 함께 길을 가다 진열대에 놓여진 어느 구두를 바라보며 춘희가 이야기한다. 저 구두가 너무 예쁘다고, 이 길을 가다 보면 꼭 보게 된다고.
“들어가서 한번 신어볼래?”
“아냐 됐어”
“그러지 말고 한번 신어봐”
“나한테는 안 어울릴 꺼야, 지금 신은 신발처럼 편하지도 않을 꺼구”
“신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야, 저기 니꺼랑 똑같은거 있다, 그지?”
“그렇네, 처음 봤을 땐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지금 보니까 왠지 초라해 보이네”
“그건 그 신발을 지금 신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야”
추천음반
<사랑의 인사>는 피아노 반주를 동반한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품이지만 아름다운 선율로 인하여 다양한 악기들로 편곡되어 연주되곤 한다. 이렇듯 수많은 연주 중 가장 첫 손에 꼽을 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것이다. 그녀의 데뷔앨범인 ‘콘 아모레’(Con amore, DECCA)에 수록된 이 곡을 듣다 보면 악기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선명히 보여주는 듯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절함이 바이올린 소리에 녹아 있다. 누군가에게 프로포즈를 준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연주를 배경으로 까시라. 성공 확률이 확연히 높아질 것이다.
본 콘텐츠는 브런치 빛길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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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교환 배우 좋아하는 사람, 모여라!
여러분,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지난달 27일 공개된 넷플릭스 <D.P.>을 통해
구교환 배우는 '나만 알고 싶은 배우'에서 이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D.P.> 뿐만아니라 <모가디슈>등 많은 영화에서 그만의 연기 특색을 보여주며
많은 관객들을 구며들게(구교환에게 스며들다) 만들었는데요.
지금부터, 넷플릭스와 왓챠에 구교환 배우가 출연한 작품들을 소개해드릴게요!
N 넷플릭스
킹덤 : 아신전 - 김성훈
웹 드라마 ㅣ 93분
synopsis
비극과 배신이 삶을 덮친다. 기이하고 불길한 뭔가를 발견한다.
한순간에 가족과 동족을 잃은 여인. 오직 복수를 꿈꾸며 살아온 그녀가 짙은 어둠을 마주한다.
반도 - 연상호
액션, 드라마 ㅣ116분
출처 : 네이버 영화
synopsis
고국을 떠난 지 4년. 전직 군인과 난민 일행이 여전히 좀비로 들끓는 반도로 돌아간다.
돈이 든 트럭을 찾아 바로 빠져나올 계획. 하지만 순탄할 리 없다.
좀비는 물론, 미쳐버린 생존자들을 마주해야 했으니..
다시, 반도를 탈출하라.
W 왓챠
우리 손자 베스트 - 김수현
드라마, 코미디 ㅣ130분
출처 : 네이버 영화
synopsis
헬조선에 살고 있는 20대 백수 교환이 인정받는 곳은 키보드워리어들의 보금자리 너나나나베스트.
그곳에서 나라 걱정 뿐인 정수를 만나게 되고,
헬조선을 뒤흔들기 시작한 그들의 아주 특별하 나라 사랑이 시작되게 되는데...
오늘영화 - 윤성호, 강경태, 구교환
드라마, 멜로/로맨스 ㅣ91분
출처 : 네이버 영화
synopsis
1. 숙취로 공장을 조퇴한 남자는, 나이트에서 만난 여자를 찾아 영화를 보려 하지만 배터리는 오링이다.
여자는 부킹을 딱히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극장 구경을 함께 하려하는데..
여자는 이르게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하려 애쓰는 남자.
과연 이들은 무사히 영화를 볼 수있을까?
2. 영화과 학생 대일의 졸업작품 시나리오를 교수는 맘에 들지 않아한다.
촬영 중 피디 영진과 여배우 소은은 계속해서 딴죽을 걸어온다.
이 이야기는 영화속 영화이고, 영화속 모든 현실 또한 영화 속 영화가 된다.
3. 구교환과 이하나는 연인이다.
이 인은 사전제작지원금 500만원에 눈멀어 셀프 다큐멘터리를 기획한다.
2차 피칭 심사까지 마쳐놓고는 성격상의 문제로 헤어지게 된다.
그러던 중 제작 지원금을 받게되고, 교환은 그 핑계로 하나에게 연애 다큐를 찍자고 제안한다.
서울연애 - 최시형, 이우정, 정재훈
드라마, 멜로/로맨스 ㅣ120분
출처 : 네이버 영화
synopsis
버스 전용 차선에서,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랑 이야기 여섯.
당신이 몰랐던 서울, 당신을 몰라준 마음 파리와 뉴욕이 부럽지 않은 우리들의
서울/연애를 만난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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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신치 않고, 늘 의심할 지어다. 그 의심 속에서 성스러운 순수함만을 찾을 지어다.
우린 왜 '역설, 반골 기질, 평소와는 다름'이 담긴 예술을 좋아하는 것일까? 이는 '창의적'과는 또 다른 갈래의 영역인 것만 같다.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 우리가 그동안 지녀왔던 그 모든 관념들과는 상이해서 이해하는데,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들을 우린 유독 예술에서 만큼은 인정하고, 좋아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 이유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우린 예술을 경외하고, 예술이라는 분야는 예술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범주라고 여기기에 그 독창성과 다름을 단순한 틀림이 아니라 비범함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 <콘클라베>는 종교 영화라는 정립된 장르에 정치적, 철학적 이분법론과 인간의 타락과 의심이 불러일으킨 고뇌 그리고 종교개혁을 연상케하는 플롯 등을 이용해 마치 종교 영화계의 이단아, 반골과 같은 모습을 띤다. 영화는 인트로의 베일을 벗은 순간부터 클로징의 막을 내릴 때까지 종교 영화의 장르적 자세를 항상 취하지만 추리, 미스테리한 일들의 연속을 더해갔고, 지속적으로 타락과 진솔의 사이를 오가는 모습, 의심과 확신의 불안정한 수평선 사이 고뇌하는 인물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깊이감을 더해갔다.
필자의 경우, 삭막한 공간 속 긴장감을 극도로 느끼거나 불안한 심정을 스스로에게도 감출 수 없을 때면 스스로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일정치 못한 박자감의 숨소리는 나의 불안감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 불안감의 양을 증가시키면서 신체의 무리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작품을 제작한 감독은 이런 부분들을 경험한 것인지, 영화적으로 사용하면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적절하다는 점을 아는 것인지,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주인공 "로렌스"의 등을 비추면서 연신 그의 거친 숨소리를 들려준다. 이 점은 영화의 초반부뿐만 아니라 중후반부 "로렌스"가 고뇌에 빠져 선택의 길로에 서 결정만을 남겨두고 있을 때면 이따라 등장한다. 영화 <콘클라브>는 막을 내리기 직전까지도 이 긴장감과 고뇌, 착잡함의 냉랭한 공기를 걷지 않고, 이를 숨소리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는 OST로 아예 관객의 머리에 분위기를 각인시킨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웅장하면서 동시에 영화의 전반적인 테마를 잘 담아냈다고 생각하는 OST는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긴장감을 고조시켜야 하는 상황이면 어김없이 등장해, 소위 소름을 끼치게 한다. 물론 이런 점을 매우 반복하기 때문에 영화를 관람하다 보면 곧 OST가 나오면서 갈등을 고조시킬 것이라는 걸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은 사실 작품의 단점이면서도 안정적인 구조, 본인들이 잘 해낸 부분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확신하지 말지어다. 항상 의심할지어다." 어쩌면 영화는 본 구절을 영상화한 작품인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누구나 종교인, 특히 교황과 그 교황이 될 후보 추기경들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진실고, 거짓이 없으며, 종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다 할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고, 필자의 경우에도 무교지만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먼저 고정관념을 깬다. 교황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새로운 교황을 뽑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선거, '콘클라베'. 교황이라는 직위가 곧 권력의 중심이라 반드시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 교황의 직위를 책임감이라고 생각해 거부하려는 사람간의 갈등이 격돌하고, 교황의 직위를 통해 종교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전통과 신념을 보수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교황의 직위를 통해 시대적 흐름에 맞춰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의 관념들이 부딪혔다. 이 추기경은 좋은 사람이고, 교황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 추천하였지만 교황의 직위를 쟁취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돈을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는, 의심이 확신이 되어가는 순간 영화는 고조로 다달아 주인공 "로렌스"와 보고 있는 관객 모두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반문하게 된다.
위 문단을 읽은 분들은 아마도 더욱 영화의 플롯에 의문을 가지실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렇게 혼란스럽고, 갈등 상황이 많아?'라고 질문을 하실 수 있겠지만, 실제로 영화는 한 시도 관객과 주인공을 갈등의 중심지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이런 점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는 데에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오는 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콘클라베' 기간이기 때문에 바깥 상황과도, 외부의 그 어떠한 세력과도 만나서도, 연락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교황청을 모두 철폐하고, 모든 연락들을 끊은 상태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단 한 공간, 교황청만을 비춘다. 창문도 모두 닫히고, 문도 모두 막힌 채 바깥에서 무슨 소동이 일어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한정된 공간 안에선 전쟁을 방불케하는 피튀기는 신경전이 오갔고, 영화는 그것만을 오로지 담아냈기에 그 서스펜스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또한 영화의 분위기와 혼란을 유지하기 위해 영화가 행한 방법은 바로 주인공 "로렌스"가 알아가는 만큼 관객도 똑같이 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초반부와 중반부, 복도를 걷는 "로렌스"를 촬영할 때면 영화는 그의 등을 클로즈업하여 담아내는데, 이는 마치 관객과 "로렌스"를 일치시켜 그의 상황과 심리 상태에 공감할 수 있게 하고, 사건의 진실을 알아가는 데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도록 한다. 더불어 영화는 굉장히 빈번하게 카메라의 수평 이동과 부감 숏을 활용해 "로렌스"를 비롯한 주 인물들 뿐만 아니라 교황청을 채우는 모든 추기경들을 한번에 담아낸다. 한정적인 공간을 모두 채우는 그 많은 추기경들의 숫자가 빚어낸 부감 숏은 마치 관객에게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사건의 중압감을 선사한다. 또한 수평 이동을 통해 '콘클라베'에서 투표하고 있는 추기경들의 표정을 모두 담아내는데, 확신했던 것들이 의심이 되어가고, 한 두 차례에서 끝났을 투표가 수 차례로 이어지면서 고도화된 심리전을 관객이 모두 경험할 수 있게 되면서 극의 흥미진진함을 더해갔다.
'콘클라베'가 끝나게 되면 모든 단장직을 내려놓겠다는 "로렌스". 기도가 약해졌다는 이유이다. 그가 왜 기도가 약해져 단장직을 내려놓겠다고 이야기하는지 영화는 생각해보라고 전한다. 아마도 영화는 그가 내려놓으려 했던 이유엔 종교의 타락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믿지 않았던 이들은 정말 생각만큼의 행동들을 했고, 믿었던 이마저 사실은 타락의 결에 속했었다. 어쩌면 종교의 장을 뽑는 것인 '콘클라베'는 언쟁이 지속될 수록 정치적 논파 간의 싸움으로 변해갔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갈등은 좀처럼 다시 꿰놓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의심과 혼돈만이 가득한 상황에 한 가지의 답을 내려준다. 그게 바로 "베니테스"였다. 의문만이 가득했던 그의 등장은 전 교황의 서명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그는 '콘클라베'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로렌스"에게 투표했다. 그럴 때마다 "로렌스"는 이를 거부했지만 끝까지 그는 신념을 지켰다. 외적인 소동으로 인해 교황청이 소란에 빠졌을 때 "베니테스"는 그 모든 정치적, 실리적 이득을 위한 언쟁과 투쟁들을 비난하며 나섰고, 이 지점에서 모든 추기경들이 그의 매력을 안 것인지 그 다음 투표 때 "베니테스"가 교황이 되어 "인노켄티우스 14세 교황"이 된다. 재밌는 건 영화는 마치 좋은 교황을 선정하게 되면 이 모든 혼란이 가실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오히려 모든 이들의 합이 맞춰져 뽑게된 새 교황의 투표 과정, 과정 속 추기경들의 표정 등을 보여주지 않고 굉장히 빠른 속도록 축약한다. 마치 그게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로렌스"는 좋은 인물을 교황직에 세운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발표만을 남겨놓고 대기하던 와중 하나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던, '콘클라베' 기간이라 외부와의 연락이 안 되어 더욱 궁금했던 그의 정체는 사실 생물학적 여자였던 것이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유전적으로 여자였지만 스스로가 여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남자로서 살아갔고, 정신적으로도 남자였던 것이다.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은 "로렌스"는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다. 이에 "베니테스"는 과연 이 점이 문제가 되는지 물어본다. 대화를 마친 "로렌스"는 기도가 약해져 종교에 회의감을 품던 과거의 표정과는 달리 새로운 교황의 진실과 사실을 안 이후로 조금은 다른, 조금은 더 편안해진 표정을 지었고, 그렇게 영화의 막이 내린다.
어쩌면 영화는 마지막 갈등이 모두 해결되는 그 순간들까지도 관객에게 '의심을 풀면 안됩니다!'와 같은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결국 영화가 "베니테스"의 정체에 반전을 줌으로써 하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히 성적 다양성이 종교에도 녹아들어져야 한다는 취지가 아닌 것 같다. 진실이 사실은 거짓이었고, 거짓이 거짓인 줄 몰랐고, 심지어 자신을 아꼈던 교황마저도 자신을 의심했었다는 그 모든 불신과 불안정함만이 존재했던 상황 속 찾아낸 진실, 진리마저도 의심해봐야함을, 의심의 결과 결국 찾은 진실에서 종교적, 인간적 순수함을 찾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 속 우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것만 같다. 영화는 이에 대해 순수함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는 이런 모든 순간들에 의심을 더해가며 관객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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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지는 관점 덕에 즐거운, <굿모닝 에브리원>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굿모닝 에브리원 Morning Glory, 2010미국 | 코미디 외 | 2011.03.17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07분
감독: 로저 미첼
달라지는 관점 덕에 즐거운, <굿모닝 에브리원>
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굿모닝 에브리원>는 '사악', '어둠'과 같은 부정적인 언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언제든 볼 수 있고, 영화 끝까지 그 마음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품이 들지 않는 마법 같은 영화랄까. 말 그대로 참 보기 쉽다. 특히 정신적, 감성적으로 목화솜의 촉감처럼, 안정감과 기분 좋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수다쟁이 베키 풀러(레이첼 맥아담스)의 쉼 없는 말과 행동에 잠깐 집중력과 흥미를 잃을 수도 있고, 자칫하면 '그들만의 세상'이란 관점을 관객에게 심어 그들에게서 완전히 도태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맹점이 너무 드러나있는 점이 살짝 아쉬움을 남기지만, 무료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은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봐도 좋을 영화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조화로워 메인 주인공 베키의 변화하는 감정선이 잘 보인다. 스토리의 모든 요소에 깃든 유머가 꽤 매력적이고, 아침 방송국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이 충분히 시각적인 즐거움을 채운다. 마이크(해리슨 포드)의 무표정과 한쪽 눈썹을 씰룩거리는 불만 가득한 표정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또 사실상 베키의 수다가 아니었다면, <굿모닝 에브리원>은 시작하자마자 풀썩 주저앉았을 것이다.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굿모닝 에브리원>이 흥미로운 점은 관객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외면과 내면을 동시에 성장시키는 것을 초점으로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형식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표면적 측면일 뿐이다. 베키의 바쁜 삶을 시작으로 그녀가 악명 높은 방송국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동시에 사랑을 어떻게 쟁취하고 지켜가는지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와 똑같다. 하지만 <굿모닝 에브리원>가 온전히 베키만을 내세우고 있는가? 그녀는 앤드리아와 달리 홀로 해낼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주인공이다. 방송 PD란 직업은 본래 다른 이들과의 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니까. 시청률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사라질 위기에 놓은 아침방송 프로그램 '데이 브레이크'를 되살린 건 베키 혼자가 아니다.
따라서 <굿모닝 에브리원>이 내세운 첫 번째 관점은 '나'가 아닌 '우리'다.
베키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열정을 다 쏟으며, 자신의 존재가치와 위치를 증명하는 데 성공한다. 고집불통인 마이크까지 변화시키는 사건은 베키의 새로운 성장을 위한 서사적 장치였기에 실패는 더더욱 예견되지 않았다. 망해가는 '데이 브레이크'를 살린 건 포기하지 않는 베키의 열의와 그녀의 역량을 진작에 알아차린 마이크와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데이 브레이크의 소속 스텝들의 합심이었다.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그녀가 일 중독자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꿈을 가진 건 좋아.
여덟 살 때는 귀여웠지.
열여덟 때는 당차 보였어.
스물여덟 먹고도 그 모양이니 창피해 죽겠다.
상처 받기 전에 현실에 눈뜨란 말이야.베키의 엄마는 베키가 지방방송 PD에서 해고당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속마음을 딸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과 욕심을 자식이 대신 성취해야만 하는, 그런 전형적인 부모의 입장으로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방송일을 꿈꿨던 소녀가 꿈을 이룬 후, 더 이상 꿈이 주는 희열감과 행복감에서 빠져 살 수 없었던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란 얘기다. 따라서 베키는 자신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닌 일자리임을 엄마의 현실에서 또다시 깨닫게 된다.
다 좋다. 바쁘게 사는 것도, 쉼 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도 전부다. 하지만 베키는 점점 지쳐갔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렵게 들어온 회사에서는 프로그램 폐지를 하겠다고 통보까지 하니 말이다.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다. 그리고 때마침, 마이크가 등장한다. 그는 베키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말라 조언한다. 일에 미쳐 가족에게 소홀했던 자신이 지금 얼마나 외로움과 사투를 하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말이다. 또한 평생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뉴스를 진행하며, 영향력 있는 앵커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될 거라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단편적인 인간이었는지를 털어놓는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 중 세 번째란 타이틀을 가진 것도 올라가는 것만 인생의 값진 보물이라 생각한 마이크 본인 탓임을 시인한 것이다.
이후, 베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고민이다. 베키는 그를 보며 자신의 삶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을 해야만 한다. 그게 보통 이야기들의 흐름이니까. 가령, '정말 나에게 일이 전부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일에 미쳐있는 걸까?'란 생각에 묻혀, 일과 개인생활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매번 순기능을 하지 못하는 '자기 검열' 말이다.여기서 <굿모닝 에브리원>의 또 다른 관점이 등장한다.
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사랑스러운 베키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개인적 시선은 그저 시선으로만 기능했다는 점.
희한하게도 베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보다 직접 행동하는 방식을 취한다. 마이크의 조언과 애인의 배려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일과 삶의 균형점을 찾는 게 아니라 '조정'한다. 균형을 찾는 것은 베키 개인의 몫이니까. 그녀가 일에 더 미친다고 해서 베키의 삶이 불행할 거란 예측은 아주 불필요한 선입견이란 얘기다. 일과 사랑을 모두 충분히 만족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타인에게 확인시킬 이유가 베키에겐 전혀 없다. 베키는 정말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도, 매번 사랑에 조급해하는 마음도 그녀의 삶을 유지하는 투명하고 깨끗한 사이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키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상적인 삶의 균형을 섬세하게 조정하면서 완벽한 '나'로 변화한다.베키 스스로는 변화했다고 느끼지만, 타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키포인트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카메라 앞에서 앞치마를 결코 두르지 않겠다는 고집쟁이 마이크를 카메라 앞에 세운 장본인은 '마이크나 애인에게 영향을 받아 180도로 바뀐 베키'가 아니라 '처음부터 한결같았던 베키'인 셈이다. <굿모닝 에브리원>은 베키의 성장담을 그린 것이 아니다. 베키의 진면목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면서, 결정적인 순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친절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보이지 않던 계획이 본 작품의 힘이란 자신감까지 덧붙인다.
마냥 재미있기만 한 영화가 아니다. 분명 당신의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끝내 '데이 브레이크'를 떠나지 않는 의리의 베키가 <굿모닝 에브리원>의 뻔한 결말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 영화를 본 이들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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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여자의 사랑+우정=‘소울메이트’
7★/10★
개인의 성장은 축복이다.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감정, 생각, 내면이 깊어지고 그 깊이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이 내주는 숙제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장한 개인은 외롭다. 성장의 내용이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번역‧소통 불가능한 자신만의 깊이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성장은 한때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를 종종 멀어지게 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삶의 모든 순간을 같은 조건으로 마주할 수는 없기에.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와 이를 리메이크한 〈소울메이트〉는 누구보다 가까웠으나 성장하면서 멀어진 두 소녀가 둘 사이의 거리를 다시금 좁히는 긴 여정을 담아낸 영화다. 몇몇 세부 설정이 다르긴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높은 완성도로 두 여성이 직조해온 관계를 찬찬히 톺는다.
부모에게 별다른 애정을 받지 못하는 아이(안생/미소)가 있고, 안락한 가정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자란 아이(칠월/하은)가 있다. 전자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반항아적 기질이 있고, 후자는 일반적이고 평온한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 차이가 둘이 친구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아직은 어린 나이이기에 서로의 다름이 불편하기보다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둘은 서로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좋다. 서로만이 누구도 주지 못하는 편안함, 따뜻함, 애정 어린 감정 등을 제공해준다.
첫 번째 균열은 칠월/하은이 남자와 연애를 하며 시작된다. 모든 걸 함께 한 친구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균열이 생긴다. 이에 안생/미소는 우정을 지키고 이전부터 꿈꿔왔던 삶을 살기 위해 그들이 자라온 마을을 떠난다. 이제부터 둘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성장을 모색한다. 안생/미소가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보헤미안으로 살아간다면, 칠월/하은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향해 나아간다. 둘은 그 와중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정작 몇 년 만에 만나 함께 떠난 여행에서 둘이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확인하고야 만다.
얄궂게도 이 만남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인생 그래프가 반전된다. 안생/미소와 칠월/하은은 마치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듯 이전과는 다르게 삶을 꾸린다. 결국 다툼으로 끝난 여행에서, 서로가 경멸해 마지않았던 친구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자기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즉 그토록 달라 보였던 친구의 삶이 곧 내 삶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두 영화에서 소설과 그림은 각각 친구를 이해하는 도구가 되어준다. 모두 상상력과 관찰력이 필요한 예술의 형식이다. 두 친구는 이를 통해 멀어진 친구의 삶을 자기 삶으로 들여온다. 더불어 예상하지 못한, 그러나 선물처럼 다가온 아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친구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고, 남은 친구는 떠나간 친구의 삶을 대신 살아간다. 오해와 거부의 시간을 건너, 두 친구가 그 무엇도 자신들의 관계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가 그려내는 두 여자의 농밀한 관계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이는 여자들의 ‘우정’이 늘 ‘사랑’과는 엄격히 구분된 관계인 양 재현되어온 것과 관련이 있다. 안생/미소, 칠월/하은의 관계는 우정이기도 하지만 사랑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늘 두 여성의 친밀한 관계를 ‘우정’이라는 관계의 형태에 제한하려 한다. 하지만 두 영화가 보여주듯 진정한 우정은 때때로 사랑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다. 더불어 안생/미소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칠월/하은의 말에 묘한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애초에 진정한 우정이란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들이 ‘우정’ 혹은 ‘사랑’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복합적인 관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는 매혹적이다(〈윤희에게〉를 생각해보라!). 사회가 구획해놓은 관계의 틀을 마음껏 헤집으며 자신들만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카타르시스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는 여기에 고독한 성장이라는 또 다른 주제를 더한다. 두 여성이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온 관계 역동과 성장 궤적은 가부장적/이성애중심적 사회에서 규범에 비껴간 친밀성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으로 다가갈 것이다. 사회가 권장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보다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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