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14 18:54:19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영화 <슬픔의 삼각형> 리뷰

<슬픔의 삼각형>이 시작되면 관객은 처음부터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다. 한가득 모여 있는 남자 모델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인데, 이 영화가 우리를 어떤 롤러코스터에 태울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요” 식으로 상큼한 미소를 환하게 짓는 H&M 모델 표정과, “너희는 모두 내 발아래 있어” 식으로 얼굴을 굳히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발렌시아가 모델 표정을 번갈아 짓게 시키면서 사회자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다 현대 패션계와 인스타그램 광고들을 얼마나 잘 요약해 주는지, 헛웃음이 나온다. 몸을 걸치는 수단이었던 옷과 장신구가 이제 사람의 내면까지 절여 버리려고 드는 게, 재미있긴 하지만 징그러울 때가 있는데 딱 그 느낌이었다.
뒤이어 모델들을 인터뷰하면서, “수입이 여자 모델의 1/3밖에 안 되고 작업 거는 게이들도 상대해야 하는” 남자 모델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뭐냐고 자조적으로 물을 때는 정말 기분이 묘했다. 2022년 기준으로 여성은 동일 직군에서도 남성보다 31.5% 임금을 덜 받고 있으며, 서비스직으로서 인간 대 인간의 기본적인 친절을 베풀다가 별의별 수작질과 심지어 “꼬리 쳐 놓고 이제 와서 모르는 체를 한다”는 의문의 분노까지 받았다는 사람 이야기가 수두룩한 세상을 살고 있기에.

그리고 나면 이 영화는 마치 3개의 꼭짓점처럼 3개의 파트를 톡, 톡, 톡 찍고 엔딩까지 쉼 없이 달린다. 참고로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마케팅 문구는 진실이었다. 아, 참고로 문구는 아니지만 마케팅에 가히가 붙은 것도 나를 미치게 웃기는 요소이다. 게다가 (밈 아니고 진짜로) 포브스 선정 “올해 가장 웃긴 영화.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라는 말이 진짜였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지의 “이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화”라는 말도. 더불어 “어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도 믿어주기를 바란다. “영화관에서 꼭 봐야 하는 영화”이자 “끝나고 나서 할 얘기가 있는 영화”는 모든 영화의 주장이지만, 이 영화는 정말 가급적 영화관에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시길. 다만 구토와 오물이 적나라하게 나오니 비위가 약한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마음의 준비 하셨다면, 그럼,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1.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영화의 1부는 인플루언서 모델 야야와 그 남자친구 칼의 이야기다. 칼도 모델이지만 쇼의 중심에는 야야가 있고, 칼은 관객석에서도 VIP 등장으로 밀려나 뒷줄에 적당히 끼어 앉는 신세이다. 마치 제니 홀저의 작업물 같은 느낌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글씨가 번쩍거리는 쇼의 관객석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조지 오웰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아직 자본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자산”을 자본보다 더 많이 가진 상태이다. 다시 말해 페이보다 #협찬 이 더 많다는 것. 그렇기에 돈 문제로 얼마든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지만 그러는 순간 “섹시하지 않”아진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같은 상황은 다른 단어로 풀어진다. 야야에게는 “섹시하지 않”은 돈 이야기가 칼에게는 “그저 관찰한 것”, “돈 문제가 아닌 것”으로 계속해서 풀어진다. 칼은 “성별 고정관념”에 휩싸이지 말자고 이야기하며 돈 내는 문제를 가지고 따지지만,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손으로 막아서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것에 어떤 젠더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지, 가슴팍에 돈을 끼워준 야야의 행위가 왜 그토록 기분이 나빴는지. 돈 얘기가 아니라지만 이야기는 돌고 돌아 돈으로 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수사학은 현란한 언어로,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여 정신을 꼬드긴다. 칼과 야야의 관계에서도 그 양상이 재연되지만, 2부 ‘요트’에서 만나는 부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양상을 들어 보면 헛웃음이 자꾸 나온다.
요트에서 승무원을 쥐락펴락하는 러시아 부호 여성은 “우리는 모두 평등 We are all equal” 하다는 말과 “삶은 불공평한 것 Life is unfair” 이라는 말을 한 입에서 낸다. 바로 뒤이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명령”한다는 말까지 육성으로 내뱉는다. 그런데도 승무원은 핀으로 고정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다가 결국 Yes와 No의 간단한 대답조차 헝클어지고 만다.
재차 강조되는 평등은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현대에는 더 이상 계급이 없다고 교과서에 나오지만, 동시에 우리는 너의 노력으로 어디론가 올라가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근로 소득의 힘을 점점 얕보는 사회를 살고 있다. 계급이 없다면 <기생충>이 계급 우화였을 리가. <기생충>에서는 계단으로, <행복한 라짜로>에서는 농민들의 마을로 표현되었던 계급이 이 영화에서는 요트 속 사람들의 옷차림과 그들이 머무는 자리로 표현된다. 일하는 위치에 따라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지고 음악 취향조차 달라진다.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본을 얻을 수 있는 무한의 자유가 주어진 척하지만, 자유롭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무엇이, 우리와 함께, 있다.

#2. 전복의 맛, 통쾌한가요?
그러나 이 세계는 폭풍우 속에서 기울고, 이내 전복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유층은 자기의 스타일대로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설명하지만, 그 일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생각해 보면 이들이 아무리 우아하고 고상하게 앉아 있어도 징그럽게 보인다. 극단으로 가는 천민자본주의, 사유가 부재한 사회에서 마케팅에만 절여진 뇌들이 모이면 얼마나 징그러워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서비스직이라면 누구나 ‘가끔은 그냥 바보들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제일 빠르지…’ 하고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할, 영 바보 같은 이미지도 이들 중에 덧씌워진다.
거기 그치지 않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풍자의 오물에 넘어뜨린다. 불안하게 떨리던 잔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아기 우는 소리와 풍랑 소리에 정신이 없는데 피아노 음악은 계속 흐른다. 결국 비싼 술도, 비싼 식재료로 만든 음식도, 심지어는 스스로가 가치 있는 다시 말해 “비싼” 사람이라 믿었을 사람들까지 바닥에 토사물과 함께 구른다. 이 영화는 그렇게 자본주의를 오물과 함께 바닥에 굴린다. 풍랑 속에서 사람들은 구르고 있는데 조타실은 비어 있고, 선장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다. 대처와 레이건과 케네디를 인용하는 러시아 출신의 자본주의자 비료상, 마크 트웨인과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하는 미국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선장의 술 냄새 나는 대화도 재미있다. “당신들이 풍요 속에 헤엄칠 때 세계는 빈곤에 허우적거린다”고 선장이 일침을 놓을 때는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 말을 듣는 부자들은 현재 토사물과 오물 사이를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부자들은 어둠과 오물 속에서, 미국이 자본으로 아작 내고 망친 나라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타인이 자기 얼굴에 전조등을 비추는 경험을 한다. 살기 위해 국경선을 넘는 사람들, 예컨대 베네수엘라에서 국경선을 넘어 미국을 향하던 사람들이 했을 경험이었다. 이 배는 자본주의 전복의 배다. 아무 사정도 봐주지 않고 가차없이 전복은 계속되다가 끝내, 배까지 전복되고 8명만이 살아 남아 무인도에 다다른다. 자본과 능력주의와 성별과 우리 사회를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뒤집은 끝에, 마침내 세계의 전복이 일단락된다. (거기에서의 내용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아껴둔다.)
그러나 이 전복, 통쾌하기만 한가? 미친 듯이 웃다가, 가감 없는 토사물에 ‘으…’ 하다가, 모처럼 영화관에서 사람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있다 보니 정말 ‘어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통쾌하게 웃다 보면… 웃다가 생각해 보니 웃을 때가 아니다. 제가 바로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마케팅에 절여져 사는 사람이랍니다? 영화를 보고 그나마 웃을 수 있는 건 단지 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 사람들처럼 자본을 많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왜 저들이 가진 역겨운 면면은 저에게 다 있는 걸까요?

#3. 삼각형과 원
삼각형과 원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수학적으로는 제법 비슷하게 묶일 만한 성질이 많이 있다…고 언젠가 들은 것 같은데, 학교 졸업한 지 너무 오래라 구체적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검색을 해 보니 삼각형 하면 외접원과 내접원을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고, 관련 공식 유도에서도 서로를 많이 써먹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삼각형과 원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거다.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나는 원을 떠올렸다. 삼각형은 어떻게 굴려도 다시 삼각형이다. 정삼각형인지 이등변삼각형인지 그 모양조차도 변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위치에 따라 어디가 밑변인지가 달라질 뿐이다. 그래 봤자 넓이는 똑같이 구해진다. 또 다른 교착 상태에 머무를 뿐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 똑 같은 얼굴로 금방 잘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해서 괴로워지는 사람이 누구냐가 달라질 뿐이다.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을 생각한다. 요트에서의 삼각형과 무인도에서의 삼각형을 놓고 보면 비슷한 위치에 놓인 사람도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인 사람도 있다. 처한 자리가 달라지면, 똑같은 재능 똑같은 노력을 갖고도 전혀 다른 성과를 내게 된다. 어제까지 비웃음을 사던 사람이 뭐 하나로 빵 뜨면 칭송을 받는 세상, 그러다가도 또 금방 비난을 받는 요지경 같은 세상에서, 삼각형 위를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미끄러지는 우리를, 나를 이 영화에서 본다.
볼 때는 미친 듯이 즐거운데 보고 나서는 할 얘기가 자꾸 생각나는 영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좋다.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모든 대화가 쫀득쫀득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롤러코스터에서 정신을 놓은 다음, 나와서는 삼각형과 원,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 서비스직의 애환, <기생충>과 <행복한 라짜로>, 트로이의 목마… 등등 매우 ‘있어 보이는’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다가 그조차 나의 위선 같다는 찝찝함을 안고 집에 돌아오면 된다. 그러고도 며칠 정도 이상하게 이 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포브스가 옳았다. 볼 때는 “올해 가장 웃긴 영화”였는데, 보고 나니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삼각형과 원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실 분을 찾습니다.
*영화는 5월 17일 극장에서 개봉합니다. 꼭 사람 많은 상영관에서 보세요.
**이 글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한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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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의 무지가 부른 비극 [넷플릭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케이틀린 디버 Kaitlyn Dever
우리는 범죄 피해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피해자의 행동을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범죄피해를 겪어보지 못한 이들의 해석은 잘못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범죄해석의 지식이 없는 이들의 단호한 판단이 얼마나 사람을 망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특히 경찰이 무지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줄거리
한 소녀가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다. 피해자로 대우받던 그녀는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하고, 가까운 지인은 물론 경찰까지 소녀가 거짓말로 관심을 얻으려 한다고 의심한다. 결국 소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하고 만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소녀가 살던 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불법 침입 강간 사건이 일어나고, 한 집요한 형사가 수사를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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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는 몰랐고, 지금은 어렴풋이 짐작하는 슬픔
올해 몇 편의 영화를 보았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극장 개봉작 이외에도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쿠팡플레이 오리지널까지 한번에 떠오르는 걸 보면, 이제는 정말 극장과 OTT를 넘나 들며 다방면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는 무엇이었나? 하고 생각해보면 순서대로 떠오르는 영화들이 모두 극장에 찾아가서 본 것들이다. 분명 OTT오리지널도 좋은 영화들이 많았을텐데, 최고의 영화란 극장에서 본 것 중에서 정해야 한다고 나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려 버린 것인지 아니면 게으른 마음과 온갖 변명을 헤치고 나아가 기어코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영화들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것일지 잘 모르겠다.
올해 내가 본 영화들은 굉장히 극단적이다. 너무 세고 자극적이거나, 지나치게 고요하거나.
세고 자극 적인 것들은 대부분 OTT에서 많이 보았고, 고요한 영화들은 극장을 선택했던 것 같다. 적막이 흐르는 공기 속에서 큰 스크린 가득 채워진 주인공의 상황에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미소지었다. 때로는 그들 처럼 멍하니 바다의 잔물결을 함께 바라 보기도 했다.
내가 네가 되어 보는 시간을 완벽히 선사 했던 것은 영화 <애프터썬>이었다. 서른 한 살 소피가 되어 열한 살 소피의 기억을 함께 더듬 더듬 짚어 나갔다.
“11살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요??”
영화는 아빠의 모습을 담은 캠코더에서 소피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소피와 아빠는 지금 여행중이다. 아빠는 언뜻 남매 처럼 보일만큼 젊은 아빠다. 소피의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고, 이혼 후 런던으로 이주한 아빠와 방학 동안 튀르키예 여행을 떠나왔다. 트윈베드를 예약했지만, 더블베드로 배정이 나고, 리조트는 공사중이라 시끄럽다. 돌발상황이 벌어지는 여행에 아빠는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이국적인 풍경 속 여름의 빛은 아름 답고 소피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아빠의 생일을 맞아 다른 사람들과 이벤트를 준비하고 노래도 불러주는 등 휴가를 즐기는 소피와 다르게 아빠의 상황은 어쩐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열한 살 그때의 소피처럼 관객 역시 모든 걸 알 수 없지만, 우울감과 아픔, 경제적인 어려움 여러가지가 뒤섞여 삶을 견뎌내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이겨내고 싶지만, 이겨내기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깜깜한 어둠 속에 있지만, 함께 있는 딸을 향해 웃고, 춤추고, 사랑을 표현하던 아빠의 모습이 가슴 한쪽에 켜켜이 쌓여 묵직하게 남았다.
여행이 끝나고, 출국하러 가는 소피의 마지막 모습을 캠코더로 찍는 아빠. 소피가 출국장으로 들어가자 캠코더를 내리고 소피가 들어간 곳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간다.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난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이 새드엔딩일것이라고 짐작한다. 서른한살 소피가 떠올린 이 여행은 소피의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 늦은 밤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식탁 밑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엄마가 우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지만, 모른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들킬새라 다시 방으로 돌아갔던 기억.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즈음이었는데, 아이둘을 이미 십대까지 키워놓았다. 이십대 초반에 엄마가 되어서 어떤 시절을 지나 왔던 걸까? 나는 그때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었을까?
열한 살 소피의 시선으로 서른한 살 캘럼을 바라보는 이 영화를 보며, 어릴 때는 알 수 없었던 어른들의 삶의 무게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그 때는 몰랐고, 지금도 어렴풋이 짐작밖에 할 수 없는 슬픔. 끝도 없이 깊고 무거운 감정에 갇히지 말고, 부디 살아 남아 함께 위로하고 안아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떠난 사람의 슬픔에 남은 사람의 슬픔이 더해져 무척이나 오랜동안 마음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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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TAR 타르' 리뷰
현대인들이 뒤집어쓴 얼굴 이면에는 직업인의 자아와 자유인의 자아가 있다. 직업인의 자아가 만들어진 건 일이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면서부터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 그 이상의 가치가 일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어야 했다. 일은 인간의 숙명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노동의 지위는 올라갔다. 노동은 노력으로 성취해 낼 수 있었다. 특정 직종의 면허, 자격증, 인증서는 그러한 노력의 징표다. 노력은 단순하고 당연한 진리를 내포한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 없는 성질은 설명이 불가하기에 경외하게 된다. 천재성에 놀라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일하는 모습에서 자기표현의 경지를 맛보기 때문이다. 일이라는 건 원래가 반복적이고 의미 없는 일상인지라 그 이상의 요건을 달성하면 일종의 상징이 된다. 달인의 몸놀림에 경탄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아함, 그 이상의 카리스마. 타르의 몸짓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그러했다. 마에스트로의 지휘를 실제로 가까이 보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커리어나 능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위대한 직업인들의 면모에는 공통점이 있을까? 공통점을 정리하면 그들과 같이 설 수 있을까?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적용이 가능할까? 특정 장면에서 타르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부드럽게 본인의 의견을 주장하는데 좌우로 넓게 팔과 다리를 뻗고 대화를 나눈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 자세에서 이 영화의 무게중심이 온전히 느껴졌다.
리디아 타르는 자신의 지휘 경력에 중대한 변곡점이 될 교향곡 리허설에 들어간다. 그녀는 커리어와 능력 어느 면으로 보나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첫 여성 수석 지휘자로 얼마나 다양한 곡을 지휘했는지 셀 수도 없다. 무대와 스크린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기도 해서 4개의 주요 엔터테인먼트 수상식에서 모두 수상하기도 했다. 후학 양성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자서전 출간과 함께 콘서트를 준비하는 바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한다. 철옹성 같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는 건 작은 틈새로 스며드는 물방울이다.
리허설 현장을 기록한 과정들은 단적으로 그녀가 얼마나 놀라운 실력을 가진 사람인지 보여준다. 인터뷰 장면부터도 그랬지만 지휘, 심사, 의사소통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다. 언어를 뒤섞어가며 표현해내고자 하는 정확한 음과 리듬을 짚어내며 지시한다. 그녀는 일련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유별나게 괴팍하거나 괴상하게 특이점을 짚어내지는 않는다. 다만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작곡가들이 악보에 남겨둔 단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휘자가 해석을 하는 과정은 적극적으로 악보의 여백에 뛰어들어 빈틈을 채워가는 일에 가깝다. 타르는 본인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행동에 거침이 없다.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되기에 거침없는 행동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용인되는 것은 오롯이 그녀가 그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마에스트로의 자리에 올려놓은 건 '카바너',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사람이 날카로워지면 불안해진다. 의도는 바늘과 같다. 찌를지 꿰맬지 결정해야 한다. 타인이 원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다는 건 일단은 고지에 올라있는 것이다. 그 이점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린 일이다.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활용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해석은 주관의 소관이니까. 상대방을 내 속도로 잡아당길지 맞춰갈지 정해야 한다.
음악은 시간을 다룬다. 음악을 핵심 소재로 다루는 영화에서는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을 집중해서 보면 좋다. 정해진 시간 내에 각각의 음이 저마다의 속도로 이어져야 비로소 음악이 된다.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지휘자가 시작과 끝을 선언한다. 또한, 그들이 메트로놈과 다른 이유는 템포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도를 올리거나 내려서 각각의 소리를 유기적으로 밀고 당기며 감정을 자아내는 일은 전적으로 지휘자의 몫이다. 신의 존재를 모방하는 형태로 지휘자는 음악을 통해 그 권한을 시험한다. 영화의 중간중간에 신성을 다루는 비유를 통해서 이런 관념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음악의 바깥에는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이 놓여있다.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 잠시 멈추거나 두 배로 감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통제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타르는 무너진다. 옆집 노인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돌아가거나 멈출 수 없어서 도망친다. 도피처는 중요치 않다. 무엇으로부터 도망갔는지가 중요하다. 음악 바깥에는 리허설이 없고 해석해야 할 여백은 너무나도 넓다. 매 순간순간 자신만의 능력으로 의도를 파헤쳐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 앞에 거장은 없으니까.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없으니 의도 또한 없다. 해야 하는 일은 정해지지 않았고 추측은 무의미하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 궤적을 충실하게 채워갈 뿐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할 뿐이다.
인성과 능력의 연관성을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 우린 둘 중 어느 것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직업인의 자아나 자유인의 자아나 불안정한 건 매한가지니까.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한 인간상이 정해지는 건 이 현실 세계 속에서는 비현실적인 일이다. 두 자아상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드는 감상이 인간의 면모는 아닐 것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TAR 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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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묘 |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야심 찬 살풀이 한 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액의 의뢰를 받아 미국 LA로 향한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 기이한 병을 앓는 갓난아이를 만나고, 아버지 '박지용'(김재철)과 대화를 나눈 후 화림은 지용의 조부가 묻힌 묫자리가 화근임을 눈치챈다. 이에 화림은 지용에게 이장을 권유하고, 자기가 아는 최고의 풍수사이자 지관인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묘지를 살핀 상덕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한다. 절대 사람이 묻혀서는 안 될 악지에 묘가 자리 잡았기 때문. 결국 본래 계획과는 달리 상덕과 화림은 파묘와 굿을 동시에 진행하기 시작하고, 모든 의식을 무사히 끝낸다. 그러나 하늘에서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자 화림은 그제야 깨닫는다. 파내서는 안 될 것까지 같이 파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파묘>, 장재현표 오컬트가 업데이트되다
한국 영화에서 오컬트 장르는 비주류다. 귀신이나 유령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는 적지 않지만, 오컬트의 정의에 입각한 작품을 찾으려면 어려움이 크다. 사전에 따르면 오컬트는 '주술이나 유령 등 설화·문헌으로 전승되는 영적 현상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에 원리나 규칙이 있다고 여기며 이를 이용하는 신념'이다.
핵심은 원리와 규칙이다. 오컬트 작품이 간혹 간과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단순히 유령이 등장한다고 다 오컬트는 아니다. 그들의 동기, 주술이나 의식의 목적을 유려하게 설명해야 한다. 설령 모호하고 헷갈리더라도 일관된 해석은 최소한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장재현 감독은 매번 주목받는다. 그의 작품은 오컬트라는 하위 장르 특유의 재미를 언제나 놓치지 않으니까. 거기에 더해 한국 관객의 입맛에 맞추는 법도 알고 있다. 한국적 풍경에 가톨릭 엑소시즘을 더한 <검은 사제들>, 불교와 기독교 세계관을 토속 신앙에 버무린 <사바하> 모두 마찬가지다.
신작 <파묘>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할아버지 묘를 파헤치는 한 가족의 이야기에는 '파묘'라는 소재에 기대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오컬트 장르의 묘미를 집약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반부터는 한 층 담대한 야심을 꺼내놓는다. 전작에서 풍경에 머무른 한국적 배경이 전면에 등장한다. <파묘>가 역사적, 민족적, 민속적, 종교학적 맥락을 한 데 어우르는 세련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가족사를 묻으려는 파묘
<파묘>의 초반부는 올곧다. LA에 거주하는 부유한 한인 가족의 고민을 보여주며 군더더기 없이 곧장 파묘라는 의식에 집중한다. 지용은 상덕과 화림에게 파묘를 요청한다. 할아버지의 묫자리를 잘못 잡은 나머지 집안의 장손들이 현대 의학으로도 해결 못하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 영화는 지관인 상덕과 무당인 화림의 입을 빌려 땅의 의미와 음양오행에 대한 간략히 설명한 후, 곧장 파묘 의식을 보여준다.
이때 두 지점이 눈길을 끈다. 우선 <파묘>는 클리셰를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 파묘 의식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전개된다. 무사히 끝난 듯 보이는 순간, 누군가의 실수로 문제가 발생한다. 관에서 빠져나온 혼령이 복수를 시작하면서 학살극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클리셰는 반쯤 유지되고, 반쯤 파괴된다. 그 덕분에 영화의 흡입력과 서스펜스는 극대화된다. 상덕이 위험에 빠진 박지용을 급히 만나러 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앞선 시퀀스에 등장한 순서를 살짝 비틀며 문을 절대로 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역이용해 강렬한 긴장감과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비극의 시작점 또한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지용은 상덕에게 관례를 깨는 부탁을 한다. 할아버지의 관을 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염조차 하지 않고 관 채로 태워달라고 요청한다. 미국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기 위해서. 그는 후작 작위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친일파 할아버지의 정체를 숨기려 한다. 이처럼 <파묘>의 장르적 쾌감은 한국인의 흥미를 돋우는 서사 덕분에 더 강해진다.
민족정기를 깨우는 파묘
재현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박지용 조부의 파묘 의식을 쌉쌀하게 매듭 지은 후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면서 더 큰 야심을 드러낸다. 파묘 의식이 끝났는 데도 풀리지 않은 의문을 전면에 내세운다. 일본 귀족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 왜 여우가 들끓는 기운 안 좋은 산에 묻혀야 했을까? 그에 대한 답을 본격적으로 찾는다.
그래서 영화는 또 다른 소재를 들고 나온다. 바로 '일제의 쇠말뚝'이다. 백두대간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곳곳에 설치했다는 쇠말뚝. 그 순간 파묘의 의미는 개인의 범주를 넘어선다. 일반적으로 파묘는 한 개인, 넓게는 가족의 정기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쇠말뚝'의 존재 덕분에 파묘는 이제 민족 전체의 정기를 바로 잡는 행위로 뒤바뀐다.
그 덕분에 <파묘>의 후반부는 전반부와 퍽 다른 맛이다. <검은 사제들> 후반부와 비슷하지만, 더 비장하다. 민족의 한을 풀어내야만 비로소 밝은 미래를 마주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 물론 혹자는 이를 두고 반일 감정을 조장할 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소재를 역이용하는 영리함
하지만 온당치 않다. <파묘>는 일본 정령 및 무속인과의 대립 관계를 부각하며 메시지를 철저히 오컬트적 세계관 내에서만 다루기 때문.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장르적으로 세련된 반일 영화라는 칭찬이 더 적절한 이유다. 특히 소재의 한계를 오컬트적으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다.
쇠말뚝이라는 소재는 자칫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쇠말뚝을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사용했다는 게 정설이기 때문.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반일 감정과 풍수지리가 뒤섞인 결과물에 가깝다. 그런데 <파묘>는 비약일 수 있는 소재를 역이용해 세계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일례로 영화는 초반부에 뿌려 놓은 몇몇 복선을 일부러 회수하지 않다가 뒤늦게 환기시킨다. 과학적인 현실(양) 뒤에 숨은 또 다른 현실(음)이 존재한다는 화림의 내레이션이 대표적이다. 항공사에서 일하는 딸 이야기를 하며 천문학과 풍수지리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는 상덕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합리적,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부정된 가설이 그 너머의 세계에서는 진실이 될 수도 있다고 계속해서 암시한다.
그 덕분에 일제의 쇠말뚝은 현실에서는 부정된 가설이지만, 오컬트 세계에서는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다. 영화적 상상력을 강조하며 역사 문제를 피하고, 대중의 구미를 자극하면서 영화에 직관적으로 빠져들게 만든 셈이다. 더 나아가 한국 오컬트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원혼뿐만 아니라, 일본의 도깨비불 같은 또 다른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킬 계기도 마련하면서 세계관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끝내 못 넘은 한계
다만 <파묘>는 장르 영화의 근본적인 한계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다. 특히 후반부는 다소 불친절하다. 세계관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사건을 빠르게 전개하며 필요한 설정만 암시하기 때문. 특히 오행, 혼령과 정령의 차이 등을 설명하는 대목이 짧은 플래시백 혹은 대사로 언급되다 보니 흐름을 따라가기 벅찰 여지가 있다.
이에 더해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가 다소 늘어진다는 인상이 남는다. 1부에서 기승전결이 깔끔하게 끝났는데 2부에서 다시 기승전결이 펼쳐지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다. 특히 복수에 방점이 찍힌 전자가 대중적으로 익숙한 이야기인 반면, 일본 정령이 등장하는 후자는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커서 단점이 두드러진다.
그나마 탁월한 완급조절 덕분에 단점이 상쇄되기는 한다. 김고은의 마스크를 강조하는 굿 장면, 이와 대비되는 몇몇 유머가 섞이면서 134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사실 공개 전만 해도 <파묘>의 개봉일은 다소 의아했다. 아무리 <검은 사제들>, <사바하>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고 해도, 굳이 <듄: 파트 2>와 오컬트 영화를 붙일 필요는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결과물을 본 후에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장르 본연의 한계만 보다 너그럽게 용인할 수 있다면, 무엇을 기대하든 그 기대를 충족해 줄 한국형 오컬트의 정수가 등장했으므로.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개인과 민족의 아픔을 아우르는 한국형 오컬트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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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를, 내가 짊어온 삶을, 들어준다면
보호자 대신 보호 시설 안팎에서 하루하루 살아내기 급급한 아이들의 불안정한 입지. 이곳, 벨기에 사람으로서 사업을 영위하는 어른은 겪을 일 없는 처지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주할 권리를 증명받지 못한 '로키타'와 체류권은 있어도 한낱 꼬마에 불과한 '토리'는 여전히 벨기에 시민에 속하지 못하기에 이 어른들의 이해타산과 딱 맞는다. 마약 거래상으로 뒷돈을 챙기는 일은 의심받기 쉬울뿐더러 시민인 이상 허락되지 않는 일이기에.
푼돈에 급급한 아이들은 군말 없다. 하물며 자신들이 수고스럽게 받아온 돈 뭉탱이에서 50유로 한 장을 받는다 하더라도. 기대나 실망이 담길 틈 없는 눈빛. 그러나 공허하진 않다. 토리와 로키타에겐 서로가 있기에. 지켜야 할 존재가 있다는 건 사람을 가장 강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유약하게 만든다.
다 자라지 못한 어른들의 세상에 편입된 이미 다 커버린 아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요 줄거리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어른의 삶은 산다는 건 어떤 것인가. 정의할 말은 여럿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타인을 간단히 가늠하는 것 아닐까.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 가며 적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 내며 인간 사회의 규모가 점점 더 커졌으니까. 안타까운 건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엔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진위여부를 가리기에 급급하니 말이다. 이 말이 진짜인지, 거짓이 섞인 건 아닌지, 과장한 거라면 어느 정도가 진짜일지.
로키타가 거쳐온 인터뷰도 비슷한 양상일 테다. 어른들은 로키타가 살아온 보육원에 대해 질문하고, 토리와 만나게 된 경위를 묻는다. 하지만 로키타의 답변엔 관심이 없다. 그가 진짜를 말하고 있는지, 우리 어른이 듣기에 납득할 만한 타당한 사실인지를 확실히 가리고자 질문에 질문을 거듭한다. 취조 현장과 다를 바 없다. 잘못해서 불려 온 것도 아닌데.
마치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논리를 갖춘 구조로, 빈틈없이, 하나의 매끄러운 발표문처럼 말해야 하는 현실과 겹쳐진다. 일평생 더불어 살아온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소개하기도 어려운데, 그런 내가 겪은 한 사건의 특정 시점을 얼마나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질문하는 이가 만약 질문받는 입장이 느낄 당혹스러움과 혼란을 느껴봤다면, 결코 꼬투리 잡듯 묻지 못했을 거다. 결코 상대의 처지에 놓이리라는 생각을 못했기에 뾰족하게 콕콕 찌를 수 있을 테지.
한편으로는 질문을 건네는 쪽의 최선이기도 하다. 비스름한 상황에서 엇비슷한 진술을 하는 수천수만 명을 상대로 어떻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진짜를 말하는 것인지 가늠하는 게 가장 빠르고 손쉽다. 증거의 적확함을 토대로 판결을 내리는 법이 그러하듯.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을 따라 모든 판단은 기출문제처럼 유형이 정해졌다. 그 형식에 능한 사람은 조금 더 유리한 판정을 얻어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순서가 뒤로 밀린다.
로키타는 후자에 속했다. 쉽게 당황하고, 말주변이 없고, 금세 패닉에 빠진다. 어찌 보면 그는 유약할 수밖에 없다. 온갖 궂은일을 제가 다 처리해 가며 동생인 토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동생과 함께 일하지만 직접 마약을 건네고 고객을 상대하는 건 로키타가 전담한다. 와중에 토리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돕기까지 하며.
다소 강박에 가까운 애씀. 이 책임감은 엄마의 불신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과 뒤섞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와 동생이 하루하루 모은 돈은 엄마와 다른 동생들이 있는 쪽으로 보낸다. 아니, 정확하게는 보내려고 했다. 브로커들이 낚아채지만 않았더라면. 로키타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과정은 또다시 진술의 형태를 띤다. 피해 사실의 보고. 그리고 역시나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 슬픔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그가 증거품목이라고 내밀 수 있는 건 오로지 그의 머릿속, 그의 마음속에 있기에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
로키타는 자신이 겪은 세계로부터 토리를 보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증명해야 하고, 거짓을 말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증명해야 하고, 그럼에도 반복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이 나날에서. 이미 자신은 세상의 진흙탕에 굴러 너무 더러워졌다.
하지만 로키타가 토리를 신경 쓰는 만큼 토리 또한 로키타를 아끼고 챙기려 든다. 보호받는 동시에 보호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로키타보다 토리가 유리하다. 남자 어른은 여자 아이를 건들 생각만 하지, 남자아이에겐 새로운 일감을 주니까.
욕구와 요구만이 가득한 주변에서 그나마 잠시 반짝이는 빛이 그들에게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빛에 기대지 않는다. 우리를 믿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도움은 측은지심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반응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거나 낯선 느낌이 들면 내민 손을 금세 거둬들인다. 신기루에 이끌려 어느 하루를 버틸 생각보다는 서로에게 기대어 제 발로 이 땅을 디디고 서는 게 안정적이다.
살아가고자 하는 절박함과 간절함은 구린내가 나는가 보다. 생존 자체가 목적인 모습이 그들과 동등한 사람이라기보단 길들이고 사육할 동물로 보이는 것인지. 몇 마디의 협박과 위협적인 소음을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애석하게도 이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기죽지 않는다. 자신이 한 노동의 대가는 비합리적일지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필요한 것을 정확히 언급한다. 음식점의 남는 빵, 손님들을 위해 불러준 공연의 값, 하다못해 깨끗한 침대보라도. 최후의 보루였는지 모른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람임을 증명받기 위한.
이마저 통하지 않자, 둘은 그들이 함께 살아갈 새로운 방향을 찾아낸다. 머리가 지끈할 만큼 무모한 선택이다. 하지만 무어라 나무랄 수 있을까. 그 길은 막혔으니 다른 길로 가라고, 가리킬 대안이 없다. 최선의 선택은 최고의 선택이지 않다. 때로는 최선이기에 최악이다.
서로를 부르는 음성과 깊은 포옹. 그리고 목적지가 있을 수 없는 달음박질.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노랫말이 자꾸 귀에 맴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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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폐한 인간의 엇갈리는 역사, 닮고도 다른 찬란한 외면
※영화 〈피닉스〉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45년 베를린, 칠흑 같은 밤 검문소를 지나는 차의 조수석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넬리가 앉아있다. 군인들은 레네의 만류에도 끝까지 붕대에 감춰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한다. 회유와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붕대 속 넬리의 얼굴을 본 군인은 사색이 되어 그제야 빗장을 열고 두 사람을 보내준다. 넬리를 포함한 그의 모든 가족이 죽은 줄만 알았던 레네는 재산을 대신 관리하던 중 생존한 넬리를 데려와 돌본다. 소식을 알 수 없는 남편 조니를 찾아 도시를 헤매던 중 클럽 ‘피닉스’에서 잡일을 하는 그를 발견한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었다면 살아있었을 다른 사람의 얼굴을 가진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 혹은 요하네스는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넬리에게 아내인 척 연기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넬리는 이를 수용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궤적에는 익숙한 몇 개의 발자국이 반복된다. 간절한 사랑은 누군가의 정처 없는 방황을 이끌고, 오인과 엇갈림, 배회의 이미지는 일관된 메시지를 내포하면서도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시간에 관한 우화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정중동의 서사가 진행되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가는 영화의 생명력은 독일 영화의 부흥기를 이끄는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매김했다. 기꺼이 자신을 던져버릴 듯 간절한 사랑의 감정과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방 사이의 불협은 과거의 표면에서 배회하는 인간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한 공간에 들여놓으며 경계를 흐리게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역사의 고통을 돌아보지 못하고 과거의 인간으로 남은 군인들은 현존의 외형만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영화에서 넬리가 처음 마주하는 이들이 과거의 흔적인 전쟁을 암시하는 군인인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넬리는 다르다. 영화 속 가장 연약한 존재에서 빛을 따라가 모든 경계와 고민을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그는 외면 外面을 외면한 채 과거의 역사와 사랑, 억압을 모두 껴안은 채 당당히 해방의 길로 나서는 가장 강한 인간이 되어 세상을 박차고 나간다.
공포와 불신의 혼돈을 파고드는 악의 정체
인류를 혼돈에 빠뜨린 구체제를 청산하기 위한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바라본 한나 아렌트는 희생자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집단 학살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악한 의도나 동기가 없었고, 단지 수직적인 명령에 불복종했을 때의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한 일이므로 ‘잘못’이 아니다.
자신에게는 누군가를 죽일 배짱도 없을뿐더러 그러한 끔찍한 일을 막을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공무를 수행하는 하급 관료의 평범한 책임의식으로부터 끔찍한 살인이 벌어질 수 있다는 모순을 아렌트는 ‘생각 없음’으로 초래한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했다. 근대적 이성의 준칙으로 완성된 정언명령은 그 본래 목적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보편적 입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히틀러는 주어진 절차에 따라 집권당 총수가 되고, 헌법을 고쳤고, 법질서를 준수하며 20세기 가장 잔혹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리고 무해한 사람들은 기계적 순응과 제한된 선택지로 합리적인 악의 탄생을 함께 만들고 손뼉 쳤다. 관료주의의 폐해는 여기에 있다. 시민들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감정적 인식도, 이성의 비판도 없이 주어진 절차에 맞으면서도 가장 바람직한 변수의 배열을 찾아내는 데 급급하다. 영화 속 넬리는 왜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을까. 남편 조니가 그의 재산을 획득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은 죽은 줄만 알았던 넬리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으로 정한 순위와 절차와 재산상 이득을 모두 취하기 위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아이러니는 최고 수준이라고 여겨졌던 근대 관료제의 합리성과 효율성이 만드는 공백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진리로 믿었던 우리의 근대적 이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아우슈비츠를 만들 때도 그랬다. 타인의 적당한 고통과 불편으로 다수가 행복하다면 그 희생은 별 저항 없이 용인되었다. 그렇게 인간이 만든 악은 같은 인간을 향해 극악한 범죄와 살인이라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폭격을 맞은 베를린의 거리는 어느 하나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광기의 나치즘에 휘말려 피해자와 가해자, 동조자와 방관자로 구분되었다.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박해와 인종주의적 차별은 시민들이 오늘의 생존을 위해 어제의 이웃을 신고하고, 이분법적 논리에 사로잡혀 비인간적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도록 만들었다. 영화는 전쟁 이후 독일 사회의 인간 단면을 멜로드라마의 형식에 녹여낸다. 〈피닉스〉의 의도적인 기억의 공백은 방관자와 공모자가 가해자로 변모하는 과정이 상처받은 신뢰로 터져 나온 공포를 극복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른다.
전쟁이 끝나자 독일의 시민들은 모든 걸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얼굴을 되찾은 넬리를 마주 선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방관, 침묵, 동조를 해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얼버무리며 그를 위로하고, 자신도 피해받았음을 성토하고, 더는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자리를 피한다. 그들은 나치의 통치에 얽힌 시대의 가해자이며 피해자이다. 잡혀가는 유대인을 묵인하며 신고하는 대신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했던 끔찍한 시절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굴레는 베를린의 전 시민에게 씌워진 비극이다. 적어도 공포를 당당히 대면하지 못하는 영화 속 사람들은 지배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이라는 과거로부터 능동적인 자기 형성을 이루지 못한다. 조니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를 잊고 과거의 영광에 남겨진 나치의 부역자와 피해자의 현현처럼 보이는 조니와 넬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고 더 깊은 이해의 단계로 넘어선다.
영화에서 전쟁의 피해와 고통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넬리와 레네 뿐이다. 하지만 같은 유대인으로 둘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넬리는 끔찍한 수용소의 삶에서 겨우 벗어난 생존자다. 조니가 일반화된 대상으로서의 피해자성을 주장할 때 넬리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전달하며 과거의 기억을 딛고 스스로의 정체성과 가치를 찾아간다. 하지만 레네는 박해를 피해 베를린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아남았다. 인간의 처참한 기억을 간직한 넬리와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았던 레네의 선택은 기억의 공백에 스미는 새로운 악의 탄생을 예고한다. 1945년 그는 유대인이라는 피해자 정체성을 늘 강조하면서도 넬리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한 유대인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세웠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을 빌미로 팔레스타인을 침공한다. 학살과 억압을 되돌리는 미래의 결론은 위치만 바뀐 전쟁범죄의 반복이다. 전쟁이 초래한 불신의 벽에서 좌절하는 레네는 목표를 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외출할 때마다 핸드백 안에 늘 권총을 지니던 레네는 평범한 악의 공포를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주와 민족주의로 승화한다. 나치 정권과 그 부역자를 향한 강한 저항과 분노에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던 레네는 타인과 자신마저 신뢰하지 못했다. 누구든 아무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이렇게 또다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
삶을 향해 걸어가는 찬란한 외면의 커튼콜
조니가 법의 허점을 악용해 과거의 배우자를 가장한 연극을 꾸미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이히만은 자신의 평안과 태만, 일상적 행위의 반복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법적으로 책임을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렌트가 간과한 본질이 빠져있다. 그는 아이히만의 범죄사실을 사유 능력의 상실이라는 책임의 부재에도 반인륜적 범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죄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범죄사실을 숨기기 위해 평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관료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 학살에 능동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반유대주의 신념을 철저히 지켰던 인물이었다. 최소한 아렌트가 보았던 법정 연극은 그를 속이기에 충분했다. 인간이 만든 악이라는 불가항력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자신의 행동을 숨길 수 있다. 다수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언제든 악은 모습을 감추고 서서히 몸집을 불릴 것이다. 넬리는 조니와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며 거짓으로 조니가 원하는 넬리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걸음걸이와 필체를 연습하고, 새로운 알리바이를 만들며, 기차에 내리고 지인들을 만나는 장면을 만들고자 그 전날 다른 지역에서 하룻밤을 묵는 정성까지 들인다.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많은 진실이 가려지고 거짓은 커진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서만 유효하다. 영화는 외면의 교체와 상실을 경험한 주인공을 내세워 역설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보여주는 오인의 테마는 이름이나 얼굴과 같은 외적 표상을 부정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자기인식의 도달을 유도한다. 넬리는 집도의에게 자신의 원래 얼굴로 복원해 주기를 요청했지만, 의사는 아무리 똑같이 얼굴을 고치려고 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며 거절한다. 이미 영화는 덧씌워진 얼굴에 남겨진 시간을 망각하려는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는 예고된 결말을 암시한다. 어떤 얼굴이든 그것이 시간의 궤도 안에 들어선 인간의 것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기억에 머무를 수 없다. 조니는 과거의 기억 속 넬리의 대상화된 이미지를 제시하여 이를 이용해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가고자 한다. 겉치레의 변화만으로 타인과 제도를 속일 수는 있더라도 인간의 기억과 내면, 그 안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틀어지는 계획을 인정하지 못하는 조니는 점차 과거의 넬리와 겹쳐 보이고 마는, 살아있는 넬리를 의식하면서도 외면한다.
아이히만의 가짜 연극의 피해자가 된 아렌트처럼, 넬리 역시 조니가 제작하는 연극의 공동주연이 되어 그의 배역이 진정한 자신의 얼굴이라고 착각한다. 재산을 차지하려는 목적하에 그들은 연극의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브레히트는 서사적 연극론에서 관객이 연극을 이해하는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한다. 처음은 연극과 배우를 가장 가깝게 동일시하고, 다음은 관객과 배역을 냉정한 자세로 소외시키며, 마지막으로는 둘 사이의 통합적 인식의 발현으로 연극의 사회적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다. 〈피닉스〉는 연극의 변증법적 작품해석론을 달성한 넬리와, 그렇지 못한 조니를 나란히 세운 뒤 과연 인간은 역사를 딛고 넘어설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작지만 강력한 희망을 숨겨놓는다. 계획의 주 무대인 조니의 방은 한정된 공간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등장인물 간의 합으로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넬리 본인을 연기해야 하는 넬리는 조니의 상상 속 자신의 이미지를 연기하며 조니의 상상 속 대상에 깊이 이입한다. 넬리의 인식이 바뀌는 순간은 남편이 자신을 고발하고 대신 풀려난 것이라는 의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면서 배역과 끊임없는 소외를 통해 대상과 조니,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거리를 둔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 상호 간의 관계와 그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을 직시하고 억압받는 자신을 발견한 넬리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시퀀스에서 스스로 무대와 관객을 만들어 ‘세 번째 연극’을 거행한다.
조니의 패착은 첫 단계를 의도적으로 건너뛰어 버렸다는 점에 있다. 그는 처음부터 넬리의 재산을 갖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어차피 이만 달러 정도 주고 떠나보낼 생각이었을, 죽은 넬리를 연기하는 이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배우의 첫 번째 조건인 몰입을 애초에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관객에게는 저 여자는 넬리처럼 보여야 한다. 넬리는 대상화된 본인을 연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조니에게 자신이 그의 진짜 넬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조니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넬리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지하면서도 그가 넬리가 아님을 애써 상기해야 하는 이상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 몰입 없는 연극의 거리 두기를 계속한다면, 세상은 절대 조니의 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마지막 순간, 이 연극에서 넬리는 처음으로 제작자의 자리에 선다. 조니의 극본대로 만들어진 자신의 삶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던 그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벗어나, 조니가 지휘하던 연극의 지휘봉을 빼앗아 자신이 깨달은 바를 게스투스적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 연극은 낯선 나와의 대면으로 역사를 직시하게 만든다. 넬리가 전하는 마지막 노래 ‘Speak Low’는 너무 빠른 순간을 한탄하다 어느 순간 너무 늦어버린 시간을 이야기한다. 넬리와 조니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멀어지는 모든 순간을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를 성실히 이겨냈고, 다른 한 사람은 피하기만 급급했다. 그리고 커튼콜의 시간은 그렇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넬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며 조니를 떠난다. 두렵고 낯선 나와의 대면은 지배적 담론에 고착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장면인 마지막 시퀀스는 배우로 하여금 무대 위의 말과 몸짓으로 스스로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자기 반영적 메타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성경 속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에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신은 명확한 근거 대신 믿음이라는 무기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바꾸는 결정은 너무 신속하고, 예측할 수 없다. 자연이라는 이름의 악은 그렇게 인간의 삶을 어떤 의도도 없이 바꾼다. 욥은 끊임없이 내 삶의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에 관해 질문한다. 하지만 완벽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우연이라는 악이 존재한다. 전쟁 역시 그중 하나다. 인간이 증오와 분노로 같은 인간을 살해하는 끔찍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주어지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이 아픔을 남긴다. 한 사람의 얼굴을 바꾸는 선택 또한 레네의 단순한 실수로 우연히 만들어진다. 피아노를 치던 조니가 마침내 넬리를 알아보는 순간은 그의 노랫소리와 팔뚝의 일련번호, 겉으로 드러난 옷가지나 얼굴이 아닌 감춰져 있던 것들이었다. 자신과 타인, 그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를 아우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들, 예를 들자면 상대를 외면할 수 있는 넬리의 용기 같은 것들이 삶에 다가온다. 과거에 매여 현실을 외면한 채 주어진 삶을 바꿔보려 했던 조니에게는 절대 찾아올 수 없는 순간을, 넬리는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가며 당당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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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큐!! 극장판 / 쓰레기장의 결전 / 많이 보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 쇼요와 켄마의 매력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끝나고 제대로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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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자크: 시즌4> 파트 1 예고편
누구도 상처 없이 빠져나갈 수 없다. 시즌 4 파트 1, 곧 공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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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톨 걸 2> 공식 예고편
홈커밍 댄스파티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한 후, 조디(에이바 미셸)는 이제 더 이상 그냥 키만 큰 애가 아니다. 인기와 자신감을 얻었으며, 남자친구까지 생겼다. 그뿐이랴, 올해 학교 뮤지컬에서 주인공 역할까지 따냈다. 하지만 새로운 인기에 대한 부담감이 높아지자 덩달아 불안감도 커진다. 그 와중에 오래된 관계는 흔들리고 새로운 관계가 부상하는데. 지금껏 쌓아온 세계가 사방에서 휘청이기 시작하자, 조디는 큰 키에 당당해지는 건 그저 첫걸음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