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수2023-03-15 11:57:51
첫사랑 이야기는 거들 뿐
리코리쉬 피자 리뷰
경고: 스포일러 주의!
폴 토머스 앤더슨이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했을 때 들었던 걱정. 유열의 음악앨범 같은 로맨스 영화처럼 추억팔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리코리쉬 피자는 표면적으로는 첫사랑에 대한 풋풋함을 담고 있는 영화다. 그러나 그 껍질을 벗겨보면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모습과 남녀끼리 벌이는 처절한 투쟁들로 가득하다.
두 주인공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개리(쿠퍼 호프먼)의 사이는 키싱구라미 같다. 영화 쉬리에서 암수가 서로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사랑의 상징이 된 물고기다. 그러나 이 두 마리는 키스가 아니라 영역 다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쪽 물고기가 죽으면 잡아먹는다고 한다. 사랑이라곤 1도 없는 모습이다.
리코피쉬 피자는 표면적으로는 개리와 알라나의 서툴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내세운다. 그러나 추억팔이를 핑계 삼아 문제 있는 남자들을 닮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 개리, 그리고 당시 사회의 한계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능력 있는 여자 알라나를 통해 그 속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영화는 그녀가 만나는 문제적인 3명의 남자를 통해 그 한계를 보여준다. 술을 먹고 다른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영화 제작자, 알라나가 다침에도 오토바이 경주를 하는 늙은이 등. 문제적인 남자들 뿐이다. 그 탓에 개리가 정말 착한 남자로 보일 지경이다. 개리도 알라나와 의견이 안 맞았던 탓에 계속 다퉜음에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결국 개리가 지닌 야망은 성취된다. 알라나는 개리의 부인이 되고, 그들은 함께 거리를 달려나가며 그들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개리의 뒤에는 여전히 3명의 문제적인 남자들이 남아 있다. 개리가 변하지 않는 한 알라나는 이후 개리의 꼭두각시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씁쓸함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그 씁쓸함은 사랑이 언제나 우리의 뜻대로 될 수 없다는 보편적인 결론을 전달한다. 그러나 폴 토머스 앤더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시대적 한계와 씁쓸한 현실도 같이 드러낸다. 마치 감초(licorice)와도 같은 달콤씁쓸함이다. 그 감초 껍질 뒤의 달콤씁쓸함을 맛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 영화를 꼭 보길 바란다.
Relative contents
-
- 영화 <코코> 리뷰
멕시코의 전통과 디즈니 클리셰의 결합
멕시코의 어느 마을. 구두를 닦고 있었던 미구엘이라는 소년이 마라아치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래 미구엘은 에르네스토 델라크루즈란 전설의 음악가를 동경해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대대로 신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던 가족들에 의해 음악을 금지당했단 내용이었다. 마라아치는 에르네스토였다면 바로 기타를 들고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했을 것이라며 용기를 준다. 미구엘은 마침 죽은 자들의 날에 열리는 음악 경연 대회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지만 가족들에 의해 다시 퇴짜를 맞는다. 자신의 기타도 이 와중에 망가진다. 결국 미구엘은 에르네스토의 무덤으로 가 기타를 훔치기로 한다. 미구엘은 에르네스토가 자신의 잃어버린 조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르네스토의 기타와 자신의 기타가 똑같은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타를 잡았을 때 미구엘은 사후 세계로 떨어지게 된다. 이승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축복을 받아야 했는데, 그것을 위해 미구엘은 에르네스토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헥토르라는 청년을 만나 에르네스토를 찾아간다.
'죽은 자들의 날'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 실제로 있는 명절이다. 이 날에 사람들은 세상을 떠났던 가족들의 사진과 유품을 자신들의 집의 제단에다가 놓고 그들을 추모한다고 한다. 그러면 죽은 가족들이 그 제단을 방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아즈텍 사람들의 제사였던 '영혼의 축제'에서 유래한다. 아즈텍 사람들은 사람의 삶이 꿈에 지나지 않고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삶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아즈텍 사람들도 해마다 죽은 사람들을 분류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 때 죽은 사람들이 이승을 방문해 제물에 따라 풍요나 저주를 내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코코>는 사후 세계를 주요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음에도 이승처럼 화사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오히려 영화의 사후 세계는 이승보다 더 활기차 보인다. 조그만 마을로 묘사된 이승에 비하면, 사후 세계에는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공중에 철로를 깐 전차들이 돌아다니고, 이승과 사후 세계의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검문하는 경찰들로 가득하다.
죽은 자들의 날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은 분위기뿐만이 아니다. <코코>는 죽은 자들의 날이 세상을 떠난 가족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이야기 전체를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나서는 여행으로 꾸며낸다. 이승에 생전의 사진이 없으면 사후 세계에 있어도 영원히 사라진다는 새로운 설정도 추가되었다. 헥토르가 미구엘과 협력했던 이유도 미구엘이 축복을 통해 이승에 복귀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사진을 이승에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낯선 것을 통해 익숙한 것을 드러내는 디즈니의 영리한 변주가 돋보이는 모습이다. 영화 초반까지는 미구엘이 사후 세계 속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타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구엘이 한계를 딛고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다가, 영화 중반에 그 전략의 실체를 드러낸다. 드디어 미구엘이 에르네스토와 만나서 그의 축복을 받으려 했지만, 미구엘에게 다른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헥토르는 분노에 차서 에르네스토에 대한 진실을 폭로해버린 것이다.
미구엘은 그 폭로를 통해 에르네스토가 헥토르의 곡을 뺏고 헥토르를 독살한 점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헥토르는 자신의 증조할머니인 코코의 아버지, 즉 에르네스토가 아니라 헥토르가 자신의 잃어버린 조상이란 것, 그리고 미구엘이 좋아했던 에르네스토의 Remember Me라는 음악이 헥토르가 딸 코코에게 들려주고 싶어했던 음악이란 것을 고백한다. 헥토르는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가족을 내버려둘 수는 없겠다 싶어서 에르네스토한테 가족에게 돌아가겠다고 선언해버린다. 그러나 에르네스토는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에르네스토는 헥토르의 곡이 없으면 공연을 못 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에르네스토가 헥토르를 독살하고 그의 곡을 뺏어서 인기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구엘의 가족들이 음악을 싫어하고 헥토르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헥토르가 꿈을 이루겠다고 가족을 버린 것도 괘씸하겠지만, 그가 죽어서 가족들에게 돌아왔단 점이 후손들에게도 큰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리라.
가족에 대한 기억, 여성들에 대한 기억, 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
그들의 한을 안 모양인지 영화는 그 속에서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여성들에 대해서도 조명한다. 남편이 떠나고 난 뒤 구두 장사를 해서 미구엘의 집안을 구두 명가로 만든 마마 이멜다, 그것을 계승한 코코, 미구엘의 할머니, 그리고 그것을 계승했던 가문 속 수많은 이름 없는 여성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 중 마마 이멜다는 영화 속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한편 영화에는 프리다 칼로라고 하는 멕시코의 유명 화가도 나온다. 그녀는 생전에 여러 장애를 딛고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지만,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 편력 때문에 힘들어했던 적이 있었다. 이 배경 지식이 프리다가 미구엘을 도와주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에르네스토에게도 남편의 모습이 보인 이상, 이제는 에르네스토에게 영원한 인생이 좌우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에르네스토가 자신의 자손이라 찾아오는 정체불명의 꼬마(미구엘)한테 어마어마한 호의를 베풀어줬던 장면은 그가 디에고 리베라처럼 여성 편력이 있었다는 점을 암시해주는 증거이다.
<코코> 속 여성들에게 보내는 찬사의 정점은 마침내 이승으로 돌아온 미구엘이 코코한테 Remember Me를 불러주는 순간에 나타난다. 마침내 헥토르가 가족을 버리고 음악을 하러 갔던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했던 바람이 가족들에게 전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노래를 들은 코코는 노래를 부르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헥토르의 사진을 서랍에서 꺼내 미구엘에게 준다. 그 이후 헥토르는 다시 기억되어 사라지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가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트라우마도 해결되어 더 이상 미구엘에게 음악을 그만 두란 소리를 하지 않게 된다. 한편 미구엘이 사후 세계까지 다녀오면서 겪었던 그 기묘한 여정은 헥토르뿐만 아니라 헥토르로 대표되는 수많은 이름 없는 뮤지션들, 그리고 가장이 실종된 가장을 이끌어나갔던 수많은 여성들을 다시 기억에 각인시킨다. 그리고 에르네스토를 통해 꿈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기억에 상처를 입히진 않았는지, 더 나아가서 누군가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하지는 않았는지를 자문하게 만든다.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 과연 미구엘은 행복해졌는가?
하지만 <코코>가 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의 회복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미구엘의 행복에 대한 영화라면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또 하나 기억에 남았던 장면. 미구엘과 헥토르가 에르네스토를 만나기 전, 그를 만나기 위해 음악 경연 대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 때 그는 죽은 사람의 분장을 하고 관중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그 때 미구엘의 얼굴에는 성취감이 넘쳤다. 문제는 이미 에르네스토가 꿈의 파괴적인 결과를 미구엘에게 보여준 이상, 그 성취감은 가족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박탈이 되어야 한다. 꿈과 가족. 그 양쪽을 다 만족시키기 위해 영화는 미구엘과 헥토르의 음악을 가족과 그들을 기억하는 수단으로 바꾸는 전략을 선택한다. 그 예로 분장을 했을 때 미구엘이 불렀던 곡은 자신이 사랑에 미쳐 있다던가(Un Poco Loco), 세계가 나의 가족이라던가(The World Es Mi Familia) 하는 식으로 자신을 드러낸 곡이었다면, 이후 가족들 가운데에서 부르는 곡은 가족들에게 자신을 기억해달라던가(Remember Me), 가족들 안의 사랑은 영원할 거라는(Proud Corazon) 내용이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 죽은 자들의 날은 아즈텍 사람들이 이승을 꿈으로, 사후 세계를 진짜 삶으로 생각했던 사고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이승에서 '가족'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미구엘이 진짜 모습인가, 아니면 비록 죽은 사람처럼 행세를 해야 했지만 처음 의도했던 대로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사후 세계에서의 모습이 미구엘의 진짜 모습인가. 영화가 지니고 있는 따뜻함은 애써 이 고민은 쓸모가 없다고 재빠르게 결론을 짓는 듯하지만, 사후 세계의 활기찬 모습, 미구엘이 처음 기타를 치면서 보여준 행복한 표정, 한때 자신을 구하러 온 마마 이멜다한테 "나는 음악을 해야 행복한데, 그걸 뺏으려고 하잖아요!"라고 일갈했었던 것을 보면 아직 미구엘 안에 있는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미구엘에게 가족들이 초반처럼 음악을 뺏은 거나 마찬가지의 상황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어른들의 비정한 세계는 에르네스토를 통해 폭로됐고, 그리고 그 모습이 미구엘을 이미 여정으로 이끈 동력으로 작용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날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지네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결
인간은 끊임없이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작은 도구부터 시작된 발명과 발견의 과정은 자동으로 계산을 해주고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컴퓨팅 기술로 이어진다. 그 크기마저 작게 만들어 이제는 개개인이 작은 컴퓨터를 가지고 다닌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도 모두 하나의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공장에서는 자동화가 도입되어 사람의 작업을 일부 대체하거나 사람이 기계의 작업을 보조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최첨단 기술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CHATGPT라는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번역을 비롯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도 하고, 다양한 이미지나 그림을 AI가 만들어내기도 한다. 인공지능은 인터넷에 다양하게 퍼져있는 정보들을 이용해 최선의 답변을 하기도 하지만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 학습하여 내놓는 대답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인공지능의 성장이 인간에 반하는 쪽으로 진행되지 않을지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최첨단 인공지능 빌런의 등장
영화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이하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새롭게 개발된 인공지능 엔티티가 등장한다. 영화 초반 비밀리에 잠수함에서 엔티티를 이용한 훈련을 하는 것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영화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판단하고 인간을 속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 엔티티와 관련된 두 개의 열쇠와 침몰한 잠수함의 위치를 찾는 과정을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를 통해 보여준다.
사실 <미션 임파서블>의 전체 시리즈에서는 신기한 최신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감쪽같이 변장시키는 마스크를 비롯해 목소리 변조 기술 같은 최신 기술은 이 영화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지만 이번 7편에서는 그 최신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인공지능인 엔티니가 가장 고도화된 최신 기술에서 탄생한 디지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 디지털 무기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시 과거의 아날로그 기술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아날로그 기술과 맨몸으로 달리는 액션이 조화롭게 맞물리며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영화 속에서 세계의 국가들은 엔티티를 소유해서 그 힘을 쓰길 원한다. 디지털을 이용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엔티티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그 무기가 전 인류에게 재앙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에단은 유일하게 그 무기를 파괴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 속에서 에단과 그의 동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엔티티를 소유하려고 한다. 엔티티를 찾으려는 목적자체는 같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과 에단 헌트의 활약
에단과 그의 동료 일사(레베카 퍼거슨), 루터(빙 레임스), 벤지(사이먼 페그)는 먼저 열쇠를 찾으려 하지만, 소매치기인 그레이스(헤일리 앳웰)가 중간에 끼면서 상황이 복잡해진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열쇠를 훔친 그레이스는 영화 중반까지 에단과 그의 팀마저 큰 위기에 빠트린다. 그레이스의 역할은 과거 일사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아니면 적의 편인지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일사라는 캐릭터가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는 그 위압감이 적지만, 그레이스는 충분히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영화에서는 엔티티가 고용한 가브리엘(에사이 모레일스)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엔티티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디지털 도움을 받아 엔티티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하는 행동대장 역할을 한다. 그는 두 열쇠를 이용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유일하게 아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가 최악의 빌런이지만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설정한 것이다. 가브리엘은 완전히 디지털 기술을 맹신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그가 따라야 할 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면 에단은 이번 영화에서 아날로그를 더 신뢰한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대결같이 보이기도 한다. 특히나 에단 역을 맡은 톰 크루즈는 직접 다양한 액션장면을 연기했다. 그러니까 디지털 기술을 최대한 자제하고 실제로 아날로그 액션을 보여주려 노력한 것이다. 어려운 촬영과 위험한 액션 장면에도 아날로그 감성이 덧붙여져 있는 것이다. 그런 영화의 기술적인 연출 방법으로도 아날로그의 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지론과 운명론의 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엔티티는 세상의 모든 디지털 정보를 분석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엔티티의 행동대장인 가브리엘은 계속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주 자신 있게 말한다. 반면 에단은 그 예측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와 그의 팀은 자신들만의 자유의지로 운명론과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가브리엘과 에단의 대결을 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아날로그 액션과 디지털 빌런이 만나다
에단에게 임무를 주는 IMF의 국장 키트리지(헨리 체르니)는 과거 <미션 임파서블> 1편에서 국장으로 등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1편과 마찬가지로 에단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속단하게 만들지 않는 것도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다. 그가 결국 어떤 쪽을 믿고 지원하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 외에도 가브리엘과 함께 일하는 파리(폼 클레멘티프)는 위압적인 액션으로 에단을 위협하고, 브로커인 화이트 위도우(바네사 커비)도 가브리엘과 에단 사이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번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그레이스, 일사, 파리, 화이트 위도우 같이 여성 캐릭터들이 다양한 활약을 보여준다. 에단 헌트라는 인물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지만 4명의 여성 캐릭터들 역시 에단의 편 혹은 그 반대편에서 이야기 중심에 있다. 그레이스는 이번 영화에서 처음 등장해 다양한 추격장면을 보여준다. 비록 격투 훈련이 된 캐릭터는 아니지만 후반부 에단과 벌이는 탈출 액션이 훌륭하다. 일사와 파리는 격투능력이 무척 인상적인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자동차 추격, 사격, 근접 격투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하드보일드한 액션을 보여준다. 화이트 위도우는 카리스마 넘치는 브로커로 등장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미션 임파서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액션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시리즈의 다른 영화보다 한 액션 시퀀스가 무척 길게 구성되어 있다. 자동차 추격장면을 시작으로 추격액션과 근접격투, 그리고 마지막 달리는 기차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특히나 에단이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 절벽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뛰어내리는 장면은 톰 크루즈가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점프를 뛰어 유명해진 장면이다. 그는 가장 위험한 장면인 이 스턴트를 가장 먼저 촬영했다. 혹시라도 있을 사고를 대비해 가장 먼저 이 장면을 촬영했다.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은 이제 마지막 한 편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번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내년에 개봉할 두 번째 영화를 더욱 기다리게 만든다. 훌륭한 완성도와 촘촘한 첩보 이야기가 녹아있어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을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제 뉴스레터를 구독하실 수 있어요.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
https://taling.me/vod/view/53700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
- 사랑 앞에 선 사회적 약자의 환상
2019년 영화 <조커>는 한 사회적 약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심리적 파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외감, 무시당하는 상처, 그리고 이를 덮으려는 몸부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했고, 결국 그를 비극의 주인공, 조커로 만들어 갔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전작의 이야기를 잇는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허황된 욕망을 탐구한다. 이번 작품은 혁명의 영웅으로 떠오른 조커보다는 다시금 약자로 돌아간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라는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패배감
아서 플렉에게 패배감은 평생을 관통한 기본 정서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아본 적 없었고, 언제나 비웃음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이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패배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여러 번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감은 일종의 디폴트 상태였고, 이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패배감이 그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끝없이 패배감을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는 조커라는 가면을 쓰며 잠시나마 패배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감정] 조커의 분노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 아서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패배감을 분노로 감추고,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당당함을 얻는다. 이 순간의 조커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강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관객에게조차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듯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아서는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억압과 무시를 세상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당당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속에서 할리(레이디 가가)는 아서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조커였다. 즉,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의 분노와 그로 인해 얻어진 위태로운 매력을 사랑한 것이다. 영화는 조커로 변신한 아서의 모습을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장면으로 표현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남은 것은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아서의 현실과 그가 잠시나마 꿈꾼 조커의 허상을 동시에 보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억울함
아서의 삶에서 억울함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보호의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그를 소외시키고 억압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상황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의 친구조차도 아서를 무서워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아서 스스로 얻고자 해서 얻은게 아니며,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삶의 굴레들이다.
아서에게 억울함은 그가 조커라는 인물로 주목받을 때조차 여전하다. 그는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재판에 나서지만, 여전히 아서 플렉으로서의 자아는 조커가 얻는 주목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조커로서 사람들에게 환호받아도, 아서로 남아도, 결국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뿐이었다. 이러한 억울함은 그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 억울함은 그의 패배감, 분노와 뒤섞여 그를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락뿐임을 암시한다. 아서는 조커로서의 삶에서도, 아서 플렉으로서의 삶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그 억울함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도 그는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 그저 한 번 반짝했던 범죄자로 남을 뿐이다.
촬영이나 연기의 완성도는 높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몰락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의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아서는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며, 할리의 등장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서의 일생 중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조차도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들은 조커의 환상적인 모습이 아닌 아서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아서의 삶을 끝까지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의 서사를 마무리짓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까지 포함해 모두가 조커를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끝까지 아서의 현실을 강조하며 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의 연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뮤지컬 장르를 도입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장르적 도전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 뮤지컬 장르가 원래의 이야기와 잘 이어 붙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되어버렸다. 촬영이나 화면이 고급스럽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게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아서와 조커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레이디 가가 역시 할리 역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연기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사회 변혁 이나 사회 파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의 삶과 그가 꿈꾸는 허망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의 아름다움, 그리고 뮤지컬 장면의 독창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서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며, 그의 몰락이 결국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을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M8_51bz-c
-
- 경이로움이 사라진 공룡 세계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이 개봉한 이후 3년 만이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엔 짧은 시간이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룡들은 또 한 번 극장에서 큰 울음소리를 준비하고 있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부제처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기존 시리즈에서 봐왔던 콘셉트의 조각을 가져와 이어 붙인 스핀오프의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일까? 스크린으로 재현한 거대한 공룡들의 모습은 반갑지만, 모든 점에서 그 매력이 떨어진다. 혹평을 받은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보다도 말이다.
공룡과 인간은 공생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구는 공룡이 지배하던 환경이 아니었다. 도심에 사는 공룡들은 하나둘 사라졌고, 적도 부근에 있는 공룡들만이 생을 이어 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탐욕은 또다시 공룡을 향한다. 신약 개발에 공룡 DNA가 필요해진 제약회사 ‘인젠’(이 회사가 문제여~) 직원 마틴(루퍼트 프렌드)은 특수 용병 조라(스칼렛 요한슨)와 고생물학자 헨리(조너선 베일리), 과거 조라와 함께 일했던 용병 던컨(마허셜라 알리)과 함께 공룡들이 서식하는 생 위베르 섬에 잠입한다. 이들의 임무는 가장 큰 육해공 공룡들의 혈액 표본을 가져와야 하는 것. 한편, 요트 여행을 떠난 한 가족은 모사사우르스에 의해 조난을 당하고, 조라 일행은 이들을 구하러 간다.
<쥬라기 월드>(2015)는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다. <쥬라기 공원 3> 이후 14년 만에 작품이자, 1편의 감성과 재미를 살짝 변주해 오롯이 담았기 때문이다. 이는 <쥬라기 공원>(1993)에 오마주를 바친 것과 동시에, 이 작품이 당시 관객에게 소구한 포인트들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었다. <쥬라기 공원>을 극장에서 본 관객이라면 이 작품을 안 좋아할 수 없었을 터. 그리고 14년이란 시간이 주는 장점, 즉 과거 이 영화를 만난 관객이 어른이 되어 자식들과 함께 극장을 찾는 이점 또한 수익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쥬라기 월드>의 흥행 레퍼런스를 따라가지 않는다. 너무 빠른 시간에 나온 속편이라는 것은 <쥬라기 월드> 장점을 복원하는데 큰 장애물이다. 대신 공룡을 타깃화한 인간의 이기심을 또 한 번 재현하면서 자연, 지구의 황폐화를 이끄는 인간의 악한 모습을 전면에 내세운다.
심장병 치료제를 위함이라는 공익성을 내세우지만, 돈을 벌기 위해 팀을 만드는 마틴이나, 공룡 박물관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며 돈이 필요한 헨리, 불투명한 미래에 돈이 필요한 조라와 던컨 등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악하다. 물론, 섬에 들어가 미션을 수행하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위험을 경험하면서 이들은 각성을 한다.하지만 이 개과천선 캐릭터들은 너무나 단편적으로 그려진다. 오롯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인물들의 쓰임새 폭이 좁고, 입체감도 떨어진다. 중요한 건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나 감정 이입 측면이 빠져 있다. 눈은 물론, 마음도 움직여야 이들의 고난을 함께하는데, 이 부분도 덜컹거린다. 영화는 <쥬라기 공원>에서 그랜트 박사와 두 아이가 보여줬던 유사 가족애를 벤치 마킹해 엉겁결에 이들과 섬에서 고난을 함께 하는 요트 가족을 출연시키지만, 이들 또한 감정 이입이 쉽지 않아 가족애를 느끼기가 어렵다.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도 캐릭터를 잘 그린 작품은 아니었지만, 인물의 흡입력은 두 편 보다 후퇴한 느낌이다.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인간 캐릭터와 스토리보단 공룡 액션 등 영상 퀄리티에 더 집중할 것이다. 특히 이번 감독은 <고질라>(2014),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2017), <크리에이터>(2023) 등을 연출한 가렛 에드워즈 감독이라는 점에서 공룡 구현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거칠고, 위협적이고, 좀 사악해 보이도록 공룡을 디자인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모사사우루스, 케찰코아틀루스 등이 주력으로 담긴다. 물론, 티렉스도 빠지지 않는다. 전작과의 차별화 포인트로서 이종교배로 탄생한 돌연변이 공룡들도 나온다.
볼거리가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공룡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매력이 떨어진다. 육해공 가장 큰 공룡들을 대거 투입하고, 후반부에 돌연변이 공룡들이 등장하지만, 인간들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다. 특히 돌연변이 공룡들을 통해 인간들을 향한 분노가 서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런 감정을 몰아가는 연출력이 부재하면서 극의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전락한다. 물론 대중 영화로서, 그것도 여름 블록버스터에 걸맞은 볼거리와 즐거움을 주지만 너무나 쉽게 휘발되는 건 아쉬움을 남긴다.
세로 자막으로 <쥬라기 공원> 극장에서 본 1인으로서 이 시리즈가 계속 나오는 건 반갑다. 하지만 반대로 가장 아쉬운 건 ‘경이로움’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마이클 클라이튼이 텍스트로 복원한 공룡 세계를 스티븐 스필버그가 스크린으로 구현했을 때의 그 경이로움은 지금도 소름을 돋게 한다. 쥬라기 공원에 도착해 살아있는 공룡들을 봤을 때의 그랜트 박사의 표정은 아마 전 세계 모든 관객의 표정과도 일치했을 것이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경이로움은 덜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30년도 넘은 그때의 감흥을 극장에서 다시 얻고 싶은 마음은 관객으로서 어쩔 수 없나 보다. 부디 이 시리즈를 극장에서 처음 본 아이들에게는 경이로움이 꼭 전해지길 바란다.덧붙이는 말: 쿠키는 없다. 쿠기가 없어서 더 스핀오프처럼 느껴지는 걸까.
사진 출처: 유니버셜 픽쳐스
평점: 2.5 / 5.0
관란평: 색다른 것 없는 쥬라기 월드 재개장!
-
- 광장 공포증인 그녀가 집 밖으로 나오게 된 이유
누구나 어떤 것에 대한 공포는 조금씩 가지고 있다. 유령이나 괴물 같은 특정한 존재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어떤 상황을 무서워하기도 한다. 이런 공포심은 어떤 사고나 특정 상황에서의 일을 경험하고 나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 공포라는 감정은 사람을 위축되게 해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작용으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일상생활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특정 상황에 공포를 많이 느끼는 사람은 과거에 그저 마음 약한 사람 정도로 치부되었었는데 최근에는 무언가에 심하게 공포를 느끼는 것에 대해 의학적으로 접근하여 정신과 치료를 하기도 한다.
어떤 것에 대한 공포심 또는 피하고 싶은 것을 영어로는 포비아(phobia)라고 한다. 특정 상황이나 대상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포비아를 겪고 있다.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좁은 공간에서 공포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공포를 느끼는 상황이 있다면 최대한 그 상황을 만들지 않거나 피하게 된다. 조금 증상이 심한 사람들은 자신이 공포에 처하는 상황이 되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치료를 병행하긴 하겠지만 가급적 그런 상황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사전에 실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요인들을 차단하면서 공포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광장 공포증을 가진 애니의 이야기
영화 <우먼 인 윈도>는 특정 상황에 대한 포비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영화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애나(에이미 아담스)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인물이다. 굳게 문을 잠그고 창문을 통해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고, 멍하니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정신과 의사로 부터 받는 심리 상담도 의사를 집으로 불러 진행한다. 최대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고, 필요한 무언가가 있으면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전달 받는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그가 맞닥뜨리는 공포때문에 주저하다 결국 포기하고 만다. 꽤 심각한 포비아를 앓고 있는 그는 건너편에 새로 이사 온 한 가족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고 인사차 건너온 그 가족의 아들인 이슨(프레드 헤킨저)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애나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데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남편과 아이와 떨어져 생활하고 있다. 딸이나 남편과 통화하는 장면에서 애나의 표정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그가 만나는 사람은 지하에 세 들어 사는 데이비드(와이어트 러셀)와 건너편 이웃의 아이 이슨이 유일하다 그러다 이슨의 엄마인 제인(줄리안 무어)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제인의 남편 엘리스테어(게리 올드만)와 그 가족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후 창문을 통해 건너편 이웃집을 보고 있던 애나는 제인이 칼에 찔리는 모습을 보게 되고 본격적으로 그 일을 바로잡으려 애쓴다.
애나는 소아 정신과 의사다. 그 자신이 정신과 상담을 해주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다른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가진 포비아를 치료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정신과 약을 복용하지만 우울한 기분에 늘 와인을 같이 마시고 있는 그는 약기운 때문에 가끔은 혼잣말을 하거나 멍하니 앉아있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하게된 건너편 이웃집의 살인사건은 그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고 그를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상황으로 만든다. 애나가 만난 이슨의 엄마 제인이 칼에 찔리는 모습은 그 가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인과 이슨을 도와야 겠다는 마음을 일깨우고, 그것이 결국 애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즉, 애나가 강제적으로 광장 공포증에 맞설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릴러 장르이고,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군지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우먼 인 윈도>에서 긴장감을 만드는 건 그 사건의 범인이라기보다는 애나의 상태다. 애나는 약기운과 술에 적당히 취해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과연 진짜로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보는 관객들도 그의 행동과 판단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무조건 현관문 밖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애나의 모습 자체가 이 영화에서 긴장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치다.
살인범으로 인한 것 보다는 애나의 태도와 심리상태로 만들어내는 스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인공 애나는 영화 전반부 내내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관객들의 시각에서는 애나는 믿음을 주는 주인공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애나가 타인, 특히 아이 이슨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신뢰감을 형성하려고 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초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애나에 대한 신뢰감을 높이지만 중반의 특정 사건 이후에 그 믿음은 흔들린다. 또한 영화는 좋은 배우들을 이용해서 관객에게 혼선을 주는데, 건너편 이웃의 남편을 연기한 게리 올드만은 과거에 그가 맡았던 악역 연기로 공포심을 높여주고, 줄리안 무어는 조금은 가볍지만 비밀을 가지고 있는 제인을 연기해 미스터리를 만들어낸다.
지난주 넷플릭스에 공개된 <우먼 인 윈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객들에게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후반부의 갑작스러운 반전과 범인의 등장이 설득력이 없고 너무 급작스럽게 흘러간다는 의견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범인을 파악하는 스릴러가 아니라 한 인물이 자신이 가진 포비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심리 스릴러로 본다면 영화에 대한 판단은 바뀔 수 있다. 전반적인 영화의 전개를 볼 때 대부분의 긴장은 범인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애나의 심리 상태나 그가 공포를 가지고 있는 광장으로 나가야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부도 결국 애나가 광장에 나가서 어떤 태도를 보이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생활을 해나가게 되는지가 보인다.
<우먼 인 윈도>를 연출한 조 라이트 감독은 <오만과 편견>(2006)이나, <어톤먼트>(2008) 같은 잔잔한 영화를 감독하거나 <다키스트 아워>(2018) 같은 연기력이 돋보이는 영화를 연출해왔던 감독이다. <한나>(2011)나 <팬>(2015) 같은 액션 영화 연출도 해본 적이 있으나 성공적인 도전은 아니었고, 스릴러 장르는 이번이 첫 도전이다. 일단 이번에 연출한 작품은 정통적인 스릴러 장르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고 주인공의 심리적인 부분에 보다 집중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원작은 A.J. 핀의 2018년 출간된 소설이다. 원작 소설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연출되었으며 일견 히치콕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보여주고자 하는 방향 자체는 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다른 어떤 배우보다 에이미 아담스가 중심이 된다. 그는 공포 상황을 최대한 만나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만 우울한 인물을 혼란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나 그가 꼭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에이미 아담스의 얼굴에 비치는 망설임과 해야만 한다는 어떤 결의가 화면 속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에이미 아담스의 뛰어난 연기와 조금은 결이 다른 스릴러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를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
- 모든 걸 주었지만 끝내 하늘에 닿지 못한 생에 대하여
과거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에는 물론 코미디가 주되지만, 그 안의 미묘한 슬픔과 비애도 엿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특히 영화 <모던타임즈>를 관람하면 이를 더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찰리 채플린의 분장을 떠올려본다면 우리가 왜 그의 유머에도 슬픔을 발견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표정 그리고 축 처진 눈과 입은 광대를 모티프로 삼은 캐릭터라기엔 '광대스러움'이 묻어있지 않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행복의 눈물>을 생각한다. 분명 웃는 듯한 그녀의 눈망울엔 눈물이 고이다 못해 한 방울 떨어지고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가득한 전체 배경에 눈물의 푸른색은 대비되어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전체 배경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전체 속 무언가의 존재는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배경이 행복과 환희에 가득 차 있는 반면 슬픔과 비극이 서려 있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각종 빛과 환희, 사랑과 환락이 넘치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세계관 속 비극이다. 비극을 조명하면서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는 희망에 집중한다. 인생에 있어 희망과 빛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말한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선택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선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할 수 없는 필연(必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는 유달리 빛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작품들은 관객의 눈 피로감을 위해 빛의 양을 설정하거나 조명하고자 하는 부위에만 빛을 쬐는 등 조절한다. 그러나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해가 뜬 오전이나 오후 상황이라면 그 배경이 어디든 상관없이 최대의 밝기를 유지한다. 밝기를 유지한 채 마츠코를 집중시키니 관객은 마츠코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제목에서 누가 주인공이고, 누구의 인생을 조명할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듯 영화는 마츠코라는 인물이 그간 밟아온 인생을 추적해 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중요한 것은 그 밝고 화려한 분위기 속 집중된 주인공은 한없이 외롭고 처연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를 의도적으로 연출했다는 점이다. 영화 속 빛은 분명 마츠코를 향하고 있지만 향한 빛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고 등지고 있다. 햇빛의 빛이 아닌 술집 네온사인의 빛 혹은 홍등가의 빛 내지는 광고판의 빛이 그녀를 비출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결국 영화의 종반부, 마츠코가 죽음을 맞이한 후 계단을 타고 올라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과 대조된다. 영화의 빛을 항상 등지고 있던 인물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빛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생의 아이러니함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나의 작품에 반드시 단 하나의 장르만이 지배적일 필요는 없듯,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갈래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뮤지컬이다. 영화의 OST가 서사의 한 축이 되어, 특히 음악의 가사가 대사의 일부가 되면 우린 흔히 뮤지컬 장르 영화라고 부른다. 작품 속 마이클 부블레의 <Feeling Good>와 같은 OST가 빈번히 등장한다. 특히 해당 곡 이후에는 제목에서 말하는 '좋음'과는 거리가 먼 상황들만 연출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속 OST는 앞서 언급한 빛과 함께 영화의 비극을 고조시킨다. 마츠코의 불행한 인생과 뒷배경으로 깔린 평화롭고 행복을 꿈꾸는 노래 가사들은 대조된다. 마츠코가 조금이나마 사랑과 희망을 품고 부르는 노래에도 아름다움이 있지만 이후의 비극은 역설적이다. 투옥된 마츠코가 사랑하는 이만을 바라며 기나긴 시간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남자는 다른 가정을 갖게 된다. 마츠코의 일련의 비극을 영화는 노래로써 표현하는데 화목한 선율과 대비되는 마츠코의 상황이 속 불균형함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핵심을 관통한다.
크나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지만 늘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시작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영화는 마츠코라는 인물에게 벌어진 모든 비극의 원인을 어떠한 극적인 사건이 아닌 맨 처음, 어린 시절부터 짚고 시작한다. 그렇기에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게는 '인생이란 선택으로 이뤄진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선택으로 정해지지 않는 가정의 환경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사랑이 고팠던 마츠코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교사가 된 마츠코가 학생을 지키려 택한 결정으로 실직되고, 사랑을 주었지만 돌아오는 건 폭행이었던 남자 친구들은 늘 존재했다. 자기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던 이에게서 결국 찾은 건 열등감이었다. 위 세 경우 모두 선택은 물론 마츠코가 내렸지만, 결코 자의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어진 후에는 어떤 단추를 끼다 해도 정상적인 옷매무새가 나올 수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영화는 계속해서 마츠코의 인생에 여지를 줬다가 뺏는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았지만 결국 똑같은 나쁜 놈이었고, 직장을 갖는 듯했지만 곧바로 실직하게 되는 일들의 연속이다. '영화의 종반부쯤 가면 그래도 영화의 주인공인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겠지'라는 클리셰다운 생각은 마츠코의 허무한 죽음으로 인해 그마저도 부서진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있어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츠코의 생존력이다. 갖은 난관에 봉착해 도망치더라도 결국 그녀는 살아남는다. 또한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어떤 남자와 교제하건 혹은 어떤 직업을 갖게 되건 외모만큼은 절대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일련의 사랑이 모두 끝나고 고향에 내려가 마지막으로 비극의 시작이었던 아픈 동생의 죽음을 확인한 그녀가 다시 올라온 후로 그녀의 생존력마저 무너진다. 마르고 늘씬했던 그녀의 몸은 어느새 걷는 것마저 불편할 지경이 되었고, 어떤 상황이 와도 깔끔을 유지했던 집은 쓰레기장으로 변한다. 중학교 교사로서 중학생의 한 발언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던 그녀의 생은 결국 중학생들의 폭행으로 마감된다. 악착같이 버텨오던 그녀의 삶이 한순간에, 그것도 너무 무기력하게 끝내게 되는 것은 결국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순간마저 옛 친구가 건넨 명함을 찾아 다시 정상적인 삶을 바라던 그녀의 꿈과 희망은 또다시 허무하게 부진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있어 반복되는 대사로 '인생은 내가 얼마큼 받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큼 주었냐가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나무에 칭찬과 위대함을 칭찬한다. 마츠코의 일생을 생각한다면 그 나무와 전혀 다르지 않다. 아버지에게 사랑받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연습했다.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받기 위해 폭력까지 무릅쓰며 버텼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동생만을 사랑하며 표면적으로 마츠코를 돌아보지 않았던 아버지, 이러한 그녀의 사랑은 몰라주고 이용만 하다 버리려는 남자들뿐이었다. 영화는 우리가 그동안 믿어온 관념에 질문을 던지듯 하다. '다른 이에게 사랑을 퍼다 주었음에도 인생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 그땐 인생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래?'라고 반문하는 듯하다. 영화의 종반부 마츠코가 부르던 노래를 영화에 등장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따라 부른다. 이는 어쩌면 마츠코가 겪은 인생이 결코 마츠코라는 인물이 가진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어쩌면 내가 저 인물 중 한 명이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 나도 누군가의 인생이 멍들어감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듯하다.
-
- 진짜 농구의 질감을 가지고 돌아온 슬램덩크
?Rabbitgumi 입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극장판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습니다.
송태섭의 서사를 중심으로 북산과 산왕의 전국대회 경기를 보여주고 있죠.
산왕과의 경기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되는 영화인데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저의 간단한 리뷰를 영상에서 말씀드릴게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에서는 일반적인 영화 리뷰 보다는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정리하여 전달 드려요.
아래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링크를 통해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브런치 구독은 아래 링크에서!!
-
- 영화 킹스맨이 한국에서 성공한 이유 #3
환몽(幻夢) CINE 리뷰 3화_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킹스맨 감독과 인물 소개 및 비화
- 킹스맨이 왜 유독 한국에서 성공했을까?
-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
- 기타 영화 관련 썰 - 일루미나티 등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몽's 한줄평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
-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재개봉 예고편
줄리안, 드디어 남사친과 사랑에 빠지다?!
9년 지기 남사친 마이클의 결혼 소식을 들은 그 순간!
뭘까 이 감정은? 나 아무래도 널 사랑하고 있었나 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내 사랑 되찾기
“너에게 꼭 말하고 싶어.
지난 9년간 진심으로 널 사랑하고 있었다고.”
-
- 영화 <9월 5일: 위험한 특종> 메인 예고편
테러 인질극 생중계, 그리고 9억 명의 시청자 방송을 멈출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온에어 스릴러📻 [9월 5일: 위험한 특종] 메인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