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수2023-03-15 11:57:51
첫사랑 이야기는 거들 뿐
리코리쉬 피자 리뷰
경고: 스포일러 주의!
폴 토머스 앤더슨이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했을 때 들었던 걱정. 유열의 음악앨범 같은 로맨스 영화처럼 추억팔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리코리쉬 피자는 표면적으로는 첫사랑에 대한 풋풋함을 담고 있는 영화다. 그러나 그 껍질을 벗겨보면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모습과 남녀끼리 벌이는 처절한 투쟁들로 가득하다.
두 주인공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개리(쿠퍼 호프먼)의 사이는 키싱구라미 같다. 영화 쉬리에서 암수가 서로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사랑의 상징이 된 물고기다. 그러나 이 두 마리는 키스가 아니라 영역 다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쪽 물고기가 죽으면 잡아먹는다고 한다. 사랑이라곤 1도 없는 모습이다.
리코피쉬 피자는 표면적으로는 개리와 알라나의 서툴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내세운다. 그러나 추억팔이를 핑계 삼아 문제 있는 남자들을 닮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 개리, 그리고 당시 사회의 한계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능력 있는 여자 알라나를 통해 그 속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영화는 그녀가 만나는 문제적인 3명의 남자를 통해 그 한계를 보여준다. 술을 먹고 다른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영화 제작자, 알라나가 다침에도 오토바이 경주를 하는 늙은이 등. 문제적인 남자들 뿐이다. 그 탓에 개리가 정말 착한 남자로 보일 지경이다. 개리도 알라나와 의견이 안 맞았던 탓에 계속 다퉜음에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결국 개리가 지닌 야망은 성취된다. 알라나는 개리의 부인이 되고, 그들은 함께 거리를 달려나가며 그들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개리의 뒤에는 여전히 3명의 문제적인 남자들이 남아 있다. 개리가 변하지 않는 한 알라나는 이후 개리의 꼭두각시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씁쓸함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그 씁쓸함은 사랑이 언제나 우리의 뜻대로 될 수 없다는 보편적인 결론을 전달한다. 그러나 폴 토머스 앤더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시대적 한계와 씁쓸한 현실도 같이 드러낸다. 마치 감초(licorice)와도 같은 달콤씁쓸함이다. 그 감초 껍질 뒤의 달콤씁쓸함을 맛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 영화를 꼭 보길 바란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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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함이 약점인 뉴 캡틴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과거로 떠났다. 그의 방패를 이어받아야 할 사람은 의외로, 그와 함께 싸워왔던 팔콘 샘 윌슨(안소니 마키)이었다. 사실 스티브 로저스는 캡틴 아메리카로서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가를 고민하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동료들이 다른 의견을 내세울 때도, 혹은 정부가 자신의 신념과 충돌할 때도 스티브는 흔들리지 않는 그의 확고한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에게는 슈퍼 혈청이 선사한 강인한 신체와, 동료인 버키(세바스찬 스탠)와 함께 지켜 온 수많은 전장이 존재했다. 이러한 슈퍼솔저의 힘 덕분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 자체가 일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가 자신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떠남으로써, 그 자리는 공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누구든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는데, 바로 샘 윌슨이 그 방패를 쥐게 된다. 이미 디즈니 플러스의 시리즈 <팔콘과 윈터솔져>에서 그는 “내가 과연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번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정적 축으로 이어진다.
[첫번째 감정] 샘 윌슨의 의구심
샘 윌슨은 자신의 평범함 때문에 끊임없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슈퍼 혈청을 맞지 않은 그에게 특별한 초인적 능력은 없다. 그저 혹독한 군사훈련을 통해 단련된 군인일 뿐이라는 사실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강력함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에서 샘은 방패나 팔콘윙 같은 장비 없이도 여러 번 직접 싸움을 치르는데, 그 장면에서 우리는 그의 평범함이 큰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가 정말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자꾸만 자문한다. 모두가 기다리는 캡틴 아메리카는 거대한 힘과 이상적인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샘이 처한 불리한 상황은 그의 ‘평범함’을 더욱 부각시키며, 이는 관객들에게도 그를 향한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샘이 겉보기에 강력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관객이 ‘그래서 과연 그가 이기고 극복해 낼까?’라는 긴장감과 흥미를 품게 된다. 그의 평범함이야말로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치인 셈이다.
결국 영화는 샘 윌슨이 가진 ‘선함’과 ‘고집스러운 원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다고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방패를 든다. 그런 샘의 행동은 관객들에게 “과연 캡틴 아메리카로서 자격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조금씩 ‘그가 바로 캡틴이 맞다’라는 확신으로 바꿔 놓는다. 정작 샘 자신도 의구심을 거듭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 직책에 걸맞은 사람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샘의 평범함은 한계를 드러내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곧 이 영화의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감정] 로스의 두려움
두 번째 감정은 대통령이 된 로스(해리슨 포드)의 두려움이다. 과거 ‘불같은 성격’과 ‘군인의 기질’로 인해 여러 혼란을 일으켰던 그가, 이제는 국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서 이미지 관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때문에 그에게 캡틴 아메리카는 정치적으로 유용한 홍보 수단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는 히어로들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통제하려고 애썼던 그가, 이제는 ‘캡틴 아메리카’의 명성과 상징성을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로스는 어디론가 아픈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어딘가에 극심한 통증이 있어 약을 복용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이것이 훗날 그가 ‘레드 헐크’로 변모하게 될 거라는 떡밥을 깔아 둔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로스의 진짜 감정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다. 임기 내내 강인하고 단호한 리더처럼 굴지만, 실상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 인해 새로운 무기를 찾고, 빌런인 새뮤얼(팀 블레이크 넬슨)을 몰래 이용해 어떤 사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이 그를 더욱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가는 셈이다.
문제는 그가 정말로 ‘개과천선’했는지, 아니면 끝내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빌런에 가까운 존재인지를 계속해서 헷갈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딸 베티(리브 타일러)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두운 결정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은 그의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가 가진 두려움이 인간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너무 이리저리 줄타기하는 태도 탓에 “정말 믿어도 되는 인물인가?”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이번 영화에서 로스가 보여주는 가장 큰 아쉬움이자, 동시에 다음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미묘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 감정] 새뮤얼의 분노
마지막으로는 메인 빌런인 새뮤얼(팀 블레이크 넬슨)의 분노다. 그는 감마선 노출 부작용으로 인해 뇌가 지나치게 발달해버린 인물이며, 이에 따라 미래를 상당히 높은 확률로 예측해내는 능력을 지닌다. 치열한 전투 능력을 갖춘 빌런이라기보다는, 제모 남작처럼 지능적이고 전략적인 면모로 상대를 교란하는 인물이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세계 파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정부(혹은 로스)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새뮤얼은 직접적으로 수많은 군대를 이끌거나 스스로 물리적 대결에 뛰어드는 대신, 미군이나 우군 세력 내에 스파이·세뇌 등을 활용해 정부와 대립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영화 후반부에는 로스가 촉발시키는 ‘대형 분쟁’의 장면이 펼쳐지고, 캡틴 아메리카인 샘 윌슨은 이러한 교묘한 갈등 속에서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물리적으로 샘이 ‘슈퍼솔저’만큼 강하지는 않아도, 정신적·도덕적 기준이 확고하다는 점이 새뮤얼의 지능적 공격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열쇠가 되는 것이다.
결국 새뮤얼의 분노는 스스로를 더 파멸로 몰아넣고 만다. 그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풀어내기 위해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지만, 샘 윌슨이라는 존재가 그가 예상한 경로와 다르게 움직이며 그의 계략을 하나씩 차단해 나간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분노’와 ‘두뇌’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 정의와 올바름을 지키는 자의 의지가 결국 지능적인 빌런의 분노를 이긴다. 이처럼 새뮤얼의 이야기는, ‘힘’이 아닌 ‘정의’가 승리한다는 마블 특유의 주제 의식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장치가 된다.
무난하게 재미있는 마블 영화
결국 이번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샘 윌슨’이 진정한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나는 과정에 집중한다. 슈퍼 혈청 없이 평범한 군인이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라는 것이 샘의 강점이다. 그래서일까, 전체적인 액션의 강도나 임팩트는 과거 스티브 로저스 시절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보다 다소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대신 팔콘윙을 활용한 빠른 공중 액션이 그 공백을 메워주며, 정치적 긴장감과 첩보 요소가 강하게 녹아들어 있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통령이 된 로스와의 관계를 다루는 장면들이 흥미롭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상징이 한 개인의 영웅성을 넘어, 국가적 정치적 무기로 활용되는 모습을 보면 ‘힘의 사용’과 ‘정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샘 윌슨은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로스를 이해하려 애쓰며 필요한 순간엔 협력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샘의 ‘포용력’을 확인하며, 그가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안소니 마키가 보여주는 샘 윌슨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는 스티브 로저스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다. 힘에 의존하지 않고, 대신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싸움을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마블 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진 관객들도, 이 영화가 주는 다른 매력과 새로운 시작점으로서의 의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개봉 전부터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받았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결과적으로 ‘무난한 재미와 새로운 정체성’을 동시에 잡아냈다고 평하고 싶다. 스티브 로저스의 시리즈에 비해 파괴력이나 액션 스케일은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와 정치적 긴장감을 잘 살려내며 마블 유니버스의 새로운 출발에 걸맞은 이야기를 완성했다.
만약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를 사랑했던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에서도 낯설고 새로운 캡틴이 만들어가는 서사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영화는 마블의 방대한 세계관을 잘 몰라도, 독립된 스토리로 충분히 이해하며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으니 부담 없이 관람해도 좋다. 샘 윌슨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고민과 성장 스토리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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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롱 리브 더 퀸!
6★/10★
1952년 여왕의 자리에 올라 2022년 사망까지 70년간 영연방을 통치한 엘리자베스 2세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 번째는 여왕이 영연방의 상징으로서 품위와 위엄을 갖추어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사회의 어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때때로 품위와 위엄이 과해 여왕이 권위적이고 폐쇄적으로 왕실을 운영했다는 비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각각의 사례에 대한 영화적 레퍼런스를 갖고 있다. 전자는 〈더 퀸〉(2007), 후자는 〈스펜서〉(2022)다. 한편 여왕에 대한 평가는 단지 여왕 개인의 인격에 대한 판단에 그치지 않기도 한다. 민주주의와 입헌 군주제의 병립 가능성(혹은 필요성)에 대한 논의와도 쉽게 연계되는 것이다. 어쨌든 엘리자베스 2세는 재위 기간 내내 영연방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고,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이의 추모를 받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녀는 분명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퀸 엘리자베스〉는 그런 여왕을 위한 애정 어린 헌사다. 즉위 후부터 재위 말기까지 여왕의 연설과 인터뷰, 일상 등이 기록된 영상을 콜라주해 오랜 세월 사랑받고 존경받은 여왕의 생애와 임기를 톺는다. 중요 변곡점이나 굴곡을 깊이 있게 조명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조감하는 방식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비판 의식보다는 옅은 미소를 곁들인 회고에 가깝다. 영화 말미에 다이애나 왕세자비 사망이 야기한 혼란과 위기, 최근에 불거진 해리 왕자의 인종 차별 폭로 등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왕이 이 모든 논란을 잘 갈무리했다는 점을 부각한다. 여왕이 ‘21세기의 군주’라는, 정치적 기반이 쉬이 흔들릴 수 있는 자리에서 놀라운 균형감과 예민한 정치력으로 그 모든 긴장을 조율하고 관리해왔다는 데 더 무게를 둔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인의 여왕이자 영연방의 여왕이었다. 턱시도를 입은 기득권 남성부터 흑인 이민자와 펑크 스타일의 뮤지션까지, 모두의 여왕이기도 했다. 영연방에 속하지 않는 나라에서, 여왕의 전성기가 지났을 때 태어난 내가 〈퀸 엘리자베스〉와 같은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생경함과 부러움이다. 먼저 생경함은 도대체 군주의 권위가 어떻게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는지에서 나온다. ‘왕’을 전근대적 권력관계의 상징이자 정점이라고 인식하는 곳에서 나고 자랐기에 모두가 자연스레 그 권위를 인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어떻게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경함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문화, 역사, 제도 등의 차이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정작 중요한 건 부러움이다. 모두가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 혹은 어른이 있다는 데에 대한 부러움 말이다. 민주 공화제 국가에서는 정치 지도자를 투표로 뽑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전 사회적 어른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품위와 도덕의 화신으로 존재하는 군주는 ‘품위 없고 부도덕한’ 존재를 비난하는 근거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모두의 상처를 보듬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사회적 참사가 나도 여야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날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는 한국에 엘리자베스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그 문제에서만큼은 우리나라가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다. 나이브하고 근거 없는 기대라는 점을 안다. 입헌 군주제가 필요하다는 (한국이 맥락에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가끔은 매우 ‘불온한’ 사람까지도 아주 조금이나마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자체를 떨치기는 어려웠다.
영화를 보면 숱한 위기와 끊이지 않는 비판에도 영국민들의 마음속에 결코 훼손되지 않는 여왕의 위엄과 권위가 분명 존재했다는 감상이 자연히 솟는다. 아마도 입헌 군주제 자체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엘리자베스 2세가 비상한 감각과 타고난 영국적 고귀함으로 쟁취한 결과물일 테다. 여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The crown is a idea more than a person.” 영화의 정확한 자막은 기억나지 않는데, 직역하자면 왕위라는 관념이 개별 인간보다 더 무겁다는 의미다. 여왕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을 그녀가 느낀 왕관의 무게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그래서인 것 같다. 어른이 부재한 사회에서 ‘여왕 폐하 만세(Long Live the Queen)!’라고 외치는 듯한 〈퀸 엘리자베스〉가 부러웠던 이유 말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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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러시아군의 침략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이야기!
감독:이리나 칠리크
출연: 돈바스 지역의 한 가족
시놉시스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군이 쳐들어오자 그 속에서 일어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인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영화 맨 초반에 어느 한 가족이 나오는 장면과 함께 포격 소리가 크게 들리고 폭탄이 터지는 전장 속에서 일반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들의 삶을 보여준다. 트라우마로 남는 전쟁의 현장 속에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피난을 가거나 그 도시에 남아있기도 한다. 이 영화는 가족이 등장인물로 나오면서 전쟁에 대한 참혹한 이야기를 여러 가지 씬으로 보여준다.
러시아군이 침공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에 있는 이 가족은 어린아이부터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여학생까지 다양하게 나온다. 대학 장학생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목표를 이루는 장면도 나오는데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게 어머니뿐만 아니라 주위 친척들까지 입시에 성공하면 포옹을 하거나 놀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적군인 러시아군에게 맞서 싸우는 모습도 뉴스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점점 러시아에 있는 많은 미국 기업들이 떠난다고 한다. 그러나 푸틴은 자신들에게 경제 보복하려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일본,우리나라까지 천연가스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평화를 원했던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소련을 무너뜨리고 독일 통일에도 기여했으며 평화를 위해 앞섰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고르바초프가 러시아를 망쳤다는 이야기를 하는 극우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뉴스에서는 전쟁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으로 나오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는 사례들이 들려오고 있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면서 트라우마가 일어나거나 죽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느낌이 많이 들기도 한다.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어서 기쁜 소식이 들려오길 바란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2022-08-27 16:00 - 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2022-08-31 16:00 - 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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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잘 알아요 <별의 아이>
*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오프라인상영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의 아이 Under the Stars(2020)
일본, 드라마, 110분
감독: 오모리 다츠시
네, 잘 알아요 <별의 아이>
일본 한 가정집에서 아기가 자지러지게 운다. 미숙아로 태어나 약한 면역력 탓에 잦은 구토, 발진, 두드러기를 계속 달고 살았던 치히로. 부모는 딸을 위해 시도해보지 않은 의학적 치료방법이 없었고, 더 이상 해 줄게 없는 현실에 우는 자식을 바라보며 매일 밤 숨죽여 울어야 했다. 어린 언니까지 치히로의 뺨에 핀 붉은 연꽃이 사라지기만을 기도했지만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어두운 동굴에 갇혀버린 그들을 구원한 건, 의료기술이 아닌 '금성의 은총'이었다. 우주의 기운을 담은 물 한 병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아기를 뒤덮은 붉은 연꽃을 사라지게 했고, 부모에게 다시금 희망과 행복을 선물했다. 이후, 치히로는 '금성의 은총' 외에 수많은 제품을 파는 '우주 에너지' 매거진에 "우주의 은총이 구한 생명"으로 당당히 소개된다.
언니가 빠진 가족사진, 별의 아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출처: 영화 <별의 아이> 스틸컷(다음)
치히로를 낫게 해 준 금성의 은총은 사이비 종교가 가진 정교한 톱니바퀴 중 하나다. '우주 에너지'에 실린 수만 가지의 제품이 각각의 톱니바퀴로 우주의 무한한 공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대놓고 맞물려 움직인다. 본래 믿음의 시초를 복기하는 건, 믿기로 한 '개인'에게 한정된, 하지만 무한하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적어도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는 현재 자신들이 원하는 삶고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린 금성의 은총으로 시작된 그들의 '우주 에너지'를 향한 굳건한 믿음이 쉬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치히로가 그 강한 믿음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중학생 소녀가 된 치히로는 여전히 금성의 은총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어릴 적엔 미남을 보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얼굴까지 흉측하게 보인단 이유로 금성의 안경과 안약을 갖고 다니기도 했다. 부모는 작은 딸에게 생긴 문제의 답을 늘 '우주 에너지'에 찾았고, 문제의 작고 큰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치히로는 이런 부모님의 요구를 지금까지 군말 없이 따랐으나, 그녀의 언니는 거부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집을 떠나 홀로 생활한 언니, 치히로는 언니의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입 밖으로 "언니는 가출한 거야."라고 내뱉는 순간 현실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생은 늘 "언니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뿐이야."라 얘기한다.
사건의 긴장감을 높이는 존재는 치히로의 언니 말고도 또 있다. 미나미 선생님, 어릴 적 에드워드 팔롱에 빠졌던 치히로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한 장본인. 치히로는 미나미에게 빠져 수업 내내 그의 얼굴을 그리며 영락없는 10대 소녀처럼, 다들 한 번쯤은 빠지는 지독한 짝사랑을 경험한다.
출처: 영화 <별의 아이> 스틸컷(다음)
미나미는 그동안 암암리에 숨겨왔던 사이비 종교에 대한 치히로의 의문을 폭발시키는 촉매로 등장한다. 가출한 언니의 기억과 미나미를 향한 짝사랑이 맞물리는 일은 치히로에게 언젠가는 일어나야 할, 예정된 길이었다. 운동장에서 초록색 운동복 차림에 흰 수건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금성의 은총을 뿌리며 나쁜 기운을 없애는 부모를 향해 "뭐하는 짓이야? 완전히 돌았네."라 일갈하는 미나미. 자신의 부모를 향해 조롱과 멸시를 주저하지 않는 짝사랑남을 지켜보던 치히로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무작정 어두운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너 때문이야. 맨날 아팠잖아."
언니는 초등학생의 치히로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와 별의 기운을 막는 커피를 마시며 '사랑'에 대해 털어놓는다.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선택한 건 그의 한숨 때문이라면서, 그의 한숨을 통해 나른한 안정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충분히 느꼈어야 했던 걸, 언니는 커피만 마시는, 통칭 '쓰레기'에서 찾은 것이다. 치히로는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란 쪽지를 남긴 언니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며 계속 달린다. 그리고 묻는다, 하늘로 붕 떠올라 소리 내 불러도 더는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존재에게.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언니! 이 모든 게 아팠던 나 때문이야? 언니!!"
평상시처럼 의식을 치르고 온 부모는 밥을 안 먹는다는 딸의 말에 만병통치, 흰 수건과 금성의 은총을 준비한다. 단 한 번도 저항한 적 없던 치히로는 그날 처음으로 격렬하게 거부한다. 머리에 얹어진 흰 수건을 악착같이 끌어내리며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당황한 엄마와 아빠의 눈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으나, 치히로는 그날을 기점으로 자신이 반드시 선택해야 함을 깨닫는다.
출처: 영화 <별의 아이> 스틸컷(다음)
'나는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치히로에게 우주 에너지의 균열은 어렸을 때부터 보였다. 그 작은 틈에 손가락을 넣고 크게 만들기 시작한 것도 치히로였다. 금성의 안경을 쓴 채, 그녀는 아픈 게 아니라 외모지상주의에 빠져있다는 뼈 때리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전에 금성의 은총을 공원 수돗물로 바꿔치기 한 삼촌과 언니의 만행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금이 간 믿음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있다는 친구의 우스갯소리도, 다른 사람들이 금성의 힘을 믿는 부모와 자신을 어떤 눈길로 보고 있는지도 전부 다 알지만,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떠한 때를 기다려서? 아니, 자식을 위해 사이비 종교를 믿는 부모를 외면할 수도, 가만히 이렇게 숨죽여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자리한 두 갈래 길에서 치히로는 계속 도망치는 중이었다.
<별의 아이>는 고요하면서도 날카롭다. '사이비 종교'를 숨기거나,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공포스럽게 포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된 이유를 '딸을 향한 사랑이었다' 밝히는 동시에, 금성의 은총을 지금까지도 맹신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임을 친철히 설명한다. 표면적으로 익숙하게 소비해왔던 사이비 종교의 민낯을 밝히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다룬 건 치히로의 마음이었다. 지금 사건 한가운데에 서 있는 소녀의 마음은 어떤가. 스토리가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다가오는 건, 그녀가 금성의 은총 덕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 허무맹랑한 사실을 알고서도 제삼자에게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어리석음을 확실히 결론 내지도 않으면서 주인공의 심리를 천천히 풀어내는 점이, <별의 아이>가 사이비 종교가 아닌 인생의 중대한 선택을 앞둔 소녀의 성장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린 담담해 보여, 애처롭게 느껴지는 치히로 때문에 치히로 부모를 보며 강렬한 혐오와 멸시보단, 답답함을 느끼는 동시에 모든 인물을 이해하게 된다.
치히로는 미나미에게 놀이터에 있던 이상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님이라 고백한다. 하지만 미나미는 이미 잔뜩 화가 나 있다. 학교 내에 치히로와 자신이 사귄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결국 그는 학생들 앞에서 치히로를 대놓고 저격한다. 그림에 몰두해 수업을 듣지 않고, 이상한 물을 마시는 치히로를 꾸짖는다. 그의 폭발로 인해 치히로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가까이는 하고 싶은 않은 동급생이 되어버린다. 미나미의 불같은 화에 심장이 멎을 듯 얼어버린 치히로.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는 두 친구에게 억울한 듯, 정말 부모님은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항상 품었던 물음에 친구는 멋쩍게 웃으며 "나도 감기 한 번도 걸린 적 없는데..."라며 대화를 끝맺는다.
이렇게 <별의 아이>는 계속 치히로가 바라보는 사이비 종교의 허점을, 그 틈을 그녀의 주변인들의 입술을 통해 폭로한다. 앞서 말했듯, 아주 고요하면서도 날카롭게 관객의 비난할 기회를 순식간에 앗아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사이비 교주가 돌연 치히로의 눈을 통해 등장하는 순간, <별의 아이는> 달라졌을 거다.
출처: 영화 <별의 아이> 스틸컷(다음)
엄마와 아빠 몰래 외조부의 장례식장에 홀로 나타난 치히로. 커피를 마시는 치히로에 놀란 삼촌은 조카만이라도 사이비 종교에서 구출하고자 마음먹는다. 치히로에게 고등학교를 삼촌네 집에서 다녀도 좋다는 말과 함께, 너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소녀의 선택은 단호하다.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겠다는 것.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음에도 두 눈을 힘 있게 뜬 채, 치히로는 부모님을 선택한다.
"네 알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긴 고민 끝에 치히로가 받아들인 건, 자신을 위해 금성에 헌신하는 부모님이었다. 금성의 기운도, 은총도, 에너지도 아닌 이 모든 걸 신의 뜻으로 여기는 아빠와 엄마. 친구들과는 다른, 너무나 이질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으나 아이는 자신을 향한 가족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시에 더는 아팠던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이미 시간은 흘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부모님을 만들었으니까. 현실을 부정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다. 언니가 언젠가는 찾아올 거란 확신은 어리석고, 부모님에게서 도망치려는 건 무책임한 일임을 이젠 인정한다.
마지막, 치히로는 부모님을 따라 사이비 종교 예배에 참석한다. 사이비 종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믿길 정도로 엄청난 수의 신도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치히로. 신도들 사이에서 서로를 애타게 찾던 치히로와 그녀의 부모는 늦은 밤, 숲 속으로 들어간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함께 보기 위해.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아래, 하나로 똘똘 뭉친 치히로의 가족. 아기를 낳았다고 연락을 해온 언니의 소식을 전하면서 "참 잘 된 일이지?"라 말하는 엄마의 얼굴엔 행복만 보인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소름이 돋지 않는 건 왜였을까. 그들은 다 같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기 위해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거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야만 볼 수 있는 별똥별이 치히로와 부모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촌 오빠에게 "내 걱정은 하지 마."라고 웃으며 말하던, 삼촌 가족을 만난 뒤 홀로 해변에 서서 바다를 응시하던 치히로가 떠오른다. 가만히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며, 자신의 길을 생각했겠지.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길이 보인다는 걸 알았을 거다. 물론 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 그러나 치히로는 달라졌다. 영화가 내놓은 건 객관식 보기가 딱 하나인 문제였고, 우린 답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럼, <별의 아이>의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게 보일 거다.
그리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혼란스럽겠지, 치히로는 모든 걸 알면서도 '선택'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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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고양이들의 아파트
건물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재건축이든 상수도를 포함한 일대를 완전히 밀고 새롭게 만드는 재개발이든 집을 지키려는 사람과 지으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상대적으로 익숙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훨씬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 생겼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일 거다. 길거리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번엔 재개발 진짜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그를 마주 본 상대방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십 년 전부터 나왔던 얘기라고. 절대 못한다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린 내게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이라 엄마에게 물었던 것 같다. 재개발이 뭐냐고.
엄마의 답은 간단했다.
이 동네가 없어지는 거야.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기억난다. 놀라움과 걱정이었다. 아무리 내가 은색 대문 안 반지하 집을 싫어했어도 집은 집이었다. 쉬고, 먹고, 자고, 숨어있는 곳. 안전한 공간을 잃게 된다는 말에 불안해하자 엄마가 다독였던 것 같다. 그런 일은 안 생길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가 나왔다가 흐지부지 된 적이 여럿이랬다.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자들이 강경했는지, 그 외 어떤 이해관계가 얽혔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까지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고, 지금의 엄마에겐 흐릿하고 머나먼 옛이야기이니까. 뭐가 됐든 재개발 일정이 정해지자 그곳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이동해야만 했다.
누가 그랬던가. 집은 터전이라고.
재건축과 재개발은 아주 달랐다. 동네를 허무는 건 집이라는 공간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동네 언니들과 밤마다 놀던 작은 공원이, 그들에게서 자전거를 처음 배웠던 가로등 아래 골목이, 심심할 때마다 놀러 갔던 옆집 동생 네를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건 어느 때고 준비가 될 리 없다. 그렇기에 멋모르는 상황에서도 쫓겨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훗날 이 공간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큰 골목에서 작은 골목으로, 그리고 모퉁이를 돌면 나오던 은색 대문을 가늠할 수 있을까. 2,000세대가 넘는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위해 헐어낸 무수한 가구들. 모든 것이 흙으로 뭉개진 광경을 펜스 너머로 보며 깨달았다. 모든 게 다 사라졌다고.
그런데 사람과 달리 붕괴와 파괴를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여전히 그곳의 거주한다면, 그 생명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사람들이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할 때에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그곳을 집으로 여기는 존재들을 누가 끄집어낼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의 출발점은 여기서부터다.
드론의 시선이 첫 장면이었다. 딱 보기에도 높은 직사각형의 건물들, 그 사이를 연결한 길목, 초록의 향연.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아파트 단지.
초록이 우거진 이곳은 곧 흙으로 뒤덮인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잡았던 이들은 이미 떠났다. 오랜 세월 약국을 운영하던 약사도, 마지막 식사를 챙겨주듯이 고양이 밥그릇에 음식과 물을 담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들은 약국 앞에서 햇빛을 쬐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길에 비비적대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세상 구경에 한창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약국 문이 굳게 닫혔다. 철문이 내려진 채로. 특정 날짜까지 영업을 한다는 종이를 보고서 우리는 그 의미를 파악하지만, 고양이는 한결같이 오던 자리를 찾아온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거라고 확신할 순 없으나 적어도 그들의 터전이 사라지는 중임을 절대 인지하지 못하는 건 맞겠다.
겁도 많고, 경계심도 많고, 무엇보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들을 어떻게 무너질 건물 밖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떠난 사람들의 자리를 메우듯 제 발로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동물권 단체인 '카라'였다. 거주민들과 구분하여 표기를 쉽게 하기 위해 단체 이름을 언급했을 뿐, 그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중해야 할 건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다.
몇 천 세대가 살던 단지를 돌아다니며 곳곳에 숨어있는 고양이들을 찾고, 사진을 찍는다. 기록을 위함이다. 고양이가 얼마나 있는지, 각각을 무어라 부를지 알아보고 고민하기 위한. 배식도 잊지 않는다. 캔과 물을 빈 그릇 곳곳에 채워 넣어 굶주리지 않도록 한다. 어쩌면 고양이들에겐 큰 차이가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말을 걸고 있으니.
고양이 입장에서는 평화가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길에 떠도는 고양이들은 야생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있어 사람 손을 탄 고양이들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예민하다. 사무실에 데려갔던 치즈가 딱 그러했다. 조금만 다가서도 하악질을 해대고, 사람이 손을 내밀면 할퀴거나 물고,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공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이 고양이를 대하던 사람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왜 인상적이었냐 하면, 지긋지긋해 보여서다. 신념과 믿음, 그리고 사랑으로 똘똘 뭉쳤을 얼굴을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해 보니 그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지친 어느 직장인이었다. 뭐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걸까. 결국 고양이는 고양이고, 사람은 모두 사람인데. 그때서야 이 다큐멘터리의 흐름에 집중이 되었다. 아주 먼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아서.
고양이들을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는 과정은 무척 많은 일을 요했다. 앞서 말한 고양이 기록과 배식은 손톱만치도 안 되는 수준으로. 무엇보다 가장 어려워 보였던 건 포획이다. 다친 걸 치료하든 검사를 하든 중성화를 시키든 케어를 하려면 고양이를 데려가야 하는데, 마구잡이로 쫓아다닐 수 없으니.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고양이가 알 리 없지만 사람 또한 고양이의 마음을 모르니까 서로 비등비등한 셈 칠 수 있겠다.
이때 사람들의 모습은 꼭 고양이 같았다. 사냥감을 노리려고 조심히 다가서고, 들키는 순간 허탕 치고, 다시 때를 기다리고. 조심조심 살금살금, 그러나 재빠르게. 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도와주려는 동물들을 그들이 닮아가고 있다는 걸.
한 사람이 나비야, 나비야, 애달프게 고양이를 찾아다니다가 다른 고양이를 발견한 장면이 생각난다. 음식 먹기에 집중한 고양이에게 나비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 태도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이름을 붙여서일까. 고양이, 그러니까 사람과 다른 동물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떤 존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답답함을 듣는 것 같았다.
2시간 가까이 그들의 고양이 터전 이동 작전을 보다 보니 작게나마 나의 시선도 달라진 기분이었다. 왜 고양이를 도우려는 건지, 무엇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지, 어떻게 이 지난한 과정을 지속할 수 있는지 등 궁금증이 사라졌다. 그저 받아들였다. 습관처럼 체화된 일의 계기를 콕 집어 말할 수 있을까. 말한다고 한들 그게 얼마나 정확할까. 그때의 순간적인 감정과 지금의 행동은 결이 다를 수도 있는데. 처음은 처음이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다.
카페에서 한데 모인 사람들이 이 작전에 대해서 논쟁을 펼쳤다. 겉보기엔 똑같이 고양이 구조 활동을 하지만, 그 의도와 의미가 완전히 다른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이었다. 어느 한 분이 강경하게 말했다. 이건 고양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대단한 희생도 뛰어난 모성도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고양이에게 자신들은 캔따개일 뿐이라는 그 말에 왠지 모를 웃음이 지어졌다.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자신의 생각을 특별히 꾸며내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단호하게, 어찌 보면 날카롭게 찌르는 말투는 웬만큼 생각 정리가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특히 동물을 위하는 건 사람들의 모순된 반응(대단해/굳이?)이 양쪽에서 들릴 일이니 말이다.
나는 두 방향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고, 나 또한 그 사람들과 비슷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한 채.
재건축 현장 주변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그래서 고양이들을 해할까 봐, 모자와 외투로 존재를 가리며 아직 터전을 옮기지 못한 고양이들에게 또 한 끼를 건네는 사람들. 고양이가 사람처럼, 사람이 고양이처럼 되는 순간들. 끝이 없음을 알면서도 끝내지 못하는 마음들. 기꺼이 책임지려는 이들의 노력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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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왓챠에서 볼만한 학교 폭력을 다룬 영화들 BEST 7
넷플릭스 왓챠에서 볼만한 학교 폭력을 다룬 영화들 BEST 7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볼만한 영화시리즈입니다. 요즘 벌어지는 '학교폭력 폭로사태'라는 테마에 맞춰서 '피해자' 관점에서 학교폭력을 다룬 영화들을 모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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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의 너 (少年的你·2019)
[줄거리] 빚쟁이 어머니와 떨어져 홀로 대입을 준비하는 고3 천니엔(주동우)와 어린 시절부터 홀로 길거리에서 생활한 샤오베이(이양천새)는 둘 다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키워가지만...
<소년 시절의 너>는 20세기 홍콩영화처럼 학원폭력을 과잉된 정서로 전시한다. 과잉된 연출 방식이 노리는 것은 ‘입시제일주의’를 주입하려는 어른들을 정 조준한다. 교육의 목적이 자기 계발이 아니라 지위 상승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어른들은 중국 아이들에게 ‘계층에 대한 욕망’을 주입한다. 그 아이들은 친구를 존중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보다는 자신이 밟고 올라서야 할 ‘경쟁자’로 취급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청소년이 전 세계에서 행복도가 가장 낮은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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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 (The King Of Pigs·2011)
[줄거리] 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인한 ‘경민(오정세)’은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석(양익준)’을 찾아 나선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히 먹고 사는 종석은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방문에 당황하는데...
소위 ‘일진’, ‘짱’, ‘캡’, ‘학교 통’이 폭력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돼지의 왕>은 힘 센 학생의 횡포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아이들은 ‘돼지’라고 묘사하며 학교 폭력의 이면에 대한 성찰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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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Bleak Night·2010)
[줄거리] 한 소년이 죽었다. 평소 아들에게 무심했던 소년의 아버지(조성하)는 아들의 갑작스런 공백에 매우 혼란스러워하며 뒤늦은 죄책감과 무력함에, 아들 기태(이제훈)의 죽음을 뒤쫓기 시작한다. 아들의 책상 서랍 안, 소중하게...
10대 소녀보다 더 예민하고 섬세한 소년들의 갈등과 균열을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을까? <파수꾼>은 명확한 해답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래 집단 내의 암묵적인 권력관계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예민하고 복잡하다. 단순해보였던 역학관계의 복잡성과 통제불능성을 보여주면서, 견고해보였던 권력구조가 생각보다 허술하고 붕괴되기 쉬움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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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告白·2010)
[줄거리] 자신이 근무하는 중학교에서 어린 딸 ‘마나미’를 잃은 여교사 ‘유코’(마츠 다카코)는 봄방학을 앞둔 종업식 날, 학생들 앞에서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딸을 죽인 사람이 이 교실 안에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다...
<고백>은 피해자의 부모가 가해자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가해자로 드러나는 학생들은 결국 부모들의 무관심 또는 과도한 관심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학교 폭력'이란 게 결국 기성세대가 떠안아야할 문제라고 확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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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Our Twisted Hero·1992)
[줄거리] 40대의 한병태는 회사를 그만 두고 시작한 지 1년 된 학원 강사다. 사회 속의 권력, 암투에 적응하지 못하고 폐쇄된 학원 공간에서 소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병태에게 어느날 국민학교 동창생인 황영수로부터 최선생(신구)의 부음 소식을 듣는다. 그런 그에게...
"일진"인 엄석대와 그 패거리가 한병태를 "왕따"로 만들고, 복종시킨 다음에는 "빵 셔틀"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수십년 전 작품임에도 오늘날 교실 내에서의 폭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매우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 집단따돌림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아니라 결국 어른들과 공권력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영화는 원작보다 훨씬 더 현대사에 빗대어 어떤 대상을 비판한다. 영화가 비판하려는 대상은, 엄석대 밑에서 부조리에 순응한 자들이 때때로 그 앞잡이 노릇까지 하면서 질서를 수호하려 했던 ‘독재에 순응한 구성원’들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끈 떨어진 권력에 손가락질 하는 군중심리이다. 이때 가장 모자라 보이는 친구 영팔이 ‘니네들도 나쁘다’며 울먹인다. 부조리는 엄석대가 옳지 못함을 알면서도 대항하기를 포기해버렸던 ‘이름 모를 녀석’들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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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Spirit Of Jeet Keun Do - Once Upon A Time In High School·2004)
[줄거리] 1978년 말죽거리의 봄, 현수(권상우)는 강남의 정문고로 전학온다. 정문고는 선생 폭력 외에도 학생들간 세력다툼으로 악명높은 문제학교. 이소룡 열혈팬이라는 이유로 금새 죽고 못사는 친구가 된 모범생 현수와 학교짱 우식(이정진). 하교길 버스안에서 올리비아 핫세를 꼭 닮은...
<말죽거리 잔혹사>는 <비트>나 <친구>처럼 남학생들의 폭력세계를 다뤘지만, 사내들의 의리와 우정을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다. 내적으로는 영웅(역할모델)이 필요한 십대 사고방식을 탐구한다. 청소년기에 유독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기 때문이다.
외연은 어떠한가? 독재 체제는 모든 국민들이 독재자 개인을 위해 움직여주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한다.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불합리와 불의가 횡행한다. 교실 내의 권력관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비겁한 어른들을 닮아가거나 폭력에 호소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라는 대사가 유달리 사이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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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형태 (映画 聲の形·2016)
[줄거리] 초등학생 시절 그 애를 정말 많이도 괴롭혔다. 청각 장애가 있던 그 여자애는 늘 웃기만 했지. 그때의 잘못을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용서받을 자격 따윈 없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사과할게. 너무 늦지 않았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할까? 관객들은 가해자 이시다의 사과를 지켜보면서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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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블로거 영혼아이 TER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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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는 아름다왔지만, 남주는 나이들어 보였다 ㅠㅠ / 웹소설 원작 / 타임루프 영화일까? / 스포가 될만한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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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views • Feb 12, 2023 • #후쿠모토리코 #네가떨어뜨린푸른하늘 #일본영화
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네가 떨어뜨린 푸른 하늘"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의외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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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나병의 영화정보 #5? ?영화 배급이 궁금하다고?!?
?씨나병의 영화정보 #5? ⠀ ?다섯 번째 주제? ⠀ ?영화 배급이 궁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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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렌필드> 메인 예고편
죽여서라도 퇴사하고 싶은 직장이 있나요? 불멸의 꼰대 드라큘라에게 던지는 #렌필드 의 피 튀기는 死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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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굿 보스> 1차 예고편
우수기업상 최종 후보에 오른 '블랑코 스케일즈'는
골칫거리 직원들 때문에 수상이 물 건너갈 판이다.
사장 ‘블랑코’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지만
그가 개입할수록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게 되고
겉 보기에 완벽했던 ‘굿 보스’의 실체가 밝혀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