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2023-05-17 23:27:21
"우리는 늘 삼각형 안에."
개봉 영화 <슬픔의 삼각형> 리뷰
*본 게시물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월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영화 <슬픔의 삼각형> ?
안그래도 높은 기대, 더욱 더 재밌게 보고 싶은 마음에 예고편과 줄거리도 모른 채 씨네랩 시사회에 갔다. 첫 시작부터 강렬했으며 결말을 보고선 이마 짚으면서 상영관을 나왔다는,, 이 영화를 개인적인 감상평과 함께 한 줄로 남기자면 "새롭진 않았지만 새롭다"!!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
영화에서 "슬픔의 삼각형"이란 단어는 한 번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제목으로 대두되었을 만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30여분으로 1부~3부를 포함하므로 개인에 따라 '길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영화는 관객에게 늘 외치고 있다, "우리의 삼각형은 여전히 그대로야."라고. 여성과 남성 / 부와 가난 그리고 끊임없이 딸려오는 '신분'이라는 고정된 꼬리표. 2023년이 된 지금, 피상적으론 '평등'을 표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의 삼각형은 불변한다,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1부부터 3부까지 우스꽝스럽고도 잔인하게 표현한 이야기 아닐까 싶다.
우리는 슬픔의 삼각형 안에서 살고 있다. 위로 가든, 밑으로 가든 어쨌든 삼각형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평등함을 표하는 동시에 서로를 이렇게 미워할까. 특정 인물들에 공감을 하기도, 혐오감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익숙함
사실 드라마 <석세션>부터 시작해서 부와 가난 등의 차별 등을 비꼬는 미디어 콘텐츠들을 수없이도 많이 봐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새로웠다. 이목을 집중시켰던 1부, 보는 내가 아찔했던 2부 그리고 무한한 불안감으로 끝내었던 3부. 개인적으로 3부 결말로 본 영화를 n차 돌 생각이 충분하지만...! 영화가 다소 길었다. '그들만의' 다큐멘터리를 조용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기분. 한 마디로, 무서사가 만들어낸 서사였다. 피식거리던 웃음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던 그 마지막 10분의 아찔함을 잊지 못 한다.
눈 앞에선 형체 모를 불꽃들이 남발했던 영화였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내가 그걸 즐기고 있었다. 익숙한 새로움에 빠지고 싶은가?
당신 안의 슬픔의 삼각형을 다시금 지각하고 싶은가? 지금 당장 <슬픔의 삼각형>을 보러가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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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투박한 울림으로 기억하기
Director] 모리 다츠야
Cast] 이우라 아라타, 다나카 레나, 나가야마 에이타, 히가시데 마사히로, 코무 아이, 토요하라 코스케, 에모토 아키라 외
Program note]
1923년 9월에 어떤 일이 있었나? 영화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뒤 발생한 비극을 들여다본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일본 군경과 무장한 일본인이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일본 감독이 이런 소재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부터 눈길을 끈다. 1923년 9월, 가난한 15명의 일본 행상단이 후쿠다 마을에 도착한다. 의약품과 일상용품을 팔며 떠돌아다니는 그들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생소한 지방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조선인으로 오해를 받는다. 일본에서도 잘 안 알려진 후쿠다 마을 사건의 시작이다. 조선인 학살과 마찬가지로 후쿠다 마을 사건도 잊혀진 역사이다. 감독은 “99년이 지난 지금 이 비극적 사건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고 말했고, 프로듀서는 “우리는 망각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 알아가고, 기억하고, 소통하는 것은 항상 항거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제작 의도를 밝힌 바 있다. (남동철)
아주 어릴 때, 지금으로선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소설집을 읽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집이었고, 그 중에서는 어머니가 아이를 뒤뜰로 데려가 꽃잎으로 한글을 써 보내는 아련한 장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끔찍한 이야기도 있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미쳐버린 것 같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15엔 50전’을 발음해 보게 시킨 다음,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그 소설집에서 죽창에 찔러 죽은 사람은 말을 더듬는 일본인 아이였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소설집에서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딱 그 두 장면뿐이다.
의도치 않은 조기 교육(?)으로, ‘후쿠다 마을 사건’이 낯설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국민을 위협하는 가짜 뉴스를 뿌리고,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가짜 뉴스의 뒤를 따라가던 끝에, 자국민을 위해 휘두른 무기는 자국민을 죽이고 만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촌극으로 코웃음 치며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국민을 죽인 것이 “실수”였다면, 자국민이 아닌 자들을 죽인 것은 괜찮은가? 우물에 독을 풀었고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다는 거짓말을 뿌려 가며 조선인을 죽이려 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역사는 언제나 “피는 피로, 폭력은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극중에서도 몇 번이나 대사로 강조하지만, 사람들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식의 루머를 받아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인들이 너무 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논조이다. 그렇다면 괴롭히지 않으면 될 텐데, 가해자의 손에서 뻗쳐 간 폭력은 다시 가해자에게 불안으로 돌아간다. 쌍방의 폭력이 아닌 일방의 폭력이어서, 그 불안은 또 다시 피해자의 피를 흘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식민 지배는 전쟁보다 참혹하다.
그게 1923년의 일이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너무 많은 조선인이 죽고, 후쿠다 마을 사건처럼 중국인이나 일본인도 죽고, 말도 안되는 참극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 난리를 막아 보겠다고 내린 칙령들은 1925년 치안 유지법이라는 탈을 쓴다. 다시 조선인을 옥죄는 법이었다. 그 난리통에서 배운 게 아무 것도 없는 이들은 그 후로도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생명을 수탈한다.
어느덧 관동대지진은 100년 전의 일이 되었고, 많이 잊혔다. 관동대지진 이후 있었던 어떤 일들이 그 후로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폭력의 굴레를 덧쓰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품의 존재는 소중하다. 특히나 일본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1919년의 병천, 제암리 같은 지명이 대사로 똑똑히 들리는 순간은 놀라웠다. 병천은 아우내 장터, 즉 1919년 유관순 열사가 있던 곳이자 3.1운동을 상징하는 곳이며, 제암리는 그 이후 일본군이 보복성으로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일본 국적을 가진 이가 전쟁범죄를 똑똑히 언급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잘 알고 있기에, 그 순간은 놀라웠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해 발음이 미묘한 ‘15엔 50전’ 또한 영화에 또렷하게 언급되며, 일본에서 어렵게 살아가다 살해되는 조선인 캐릭터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뱉는 대사는 분연히 외치는 자신의 이름 세 글자였다. 이런 영화는 앞으로도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더없이 인간적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던 듯하나, 젠더 의식 이래도 되나 싶은 장면들이 있었고,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서이기는 하나 “좋은” 일본인의 비율이 현실 대비 매우 높아, 보는 조선인 입장에서 기분이 미묘해진다. 게다가 “좋은” 일본인은 하나 같이 장신의 배우들이 맡아서, 사진을 ‘포토샵’ 처리해 프로파간다에 이용하던 일제가 생각나 또 기분이 기묘하다. 그러나 아쉽다는 말만으로 지나치기엔, 이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아주 정교하게 연출되고 적절하게 배치된 아름다운 문장이어서 마음에 오래 남는 대사들이 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든지,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같은 대사들 말이다. 반면, 투박하게 놓여서 적나라하게 외치는 소리이기에 외면할 수 없는 대사들도 있다. 이 영화의 대사들이 그렇다. 당시의 일본 시민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한 국가는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며, 그걸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가? 그 사람이 조선인이면 괜찮은 것인가? 무의미하고 잔혹했던 몰살은 기록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투박한 대사들은 100년 후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나라를 빼앗기고 언어를 짓눌리고 목숨마저 죽창에 찔려 버린 어떤 사람들의 나라에서 그 울림을 목격하는 기분은 정말로 기묘했다. 이 영화가 던진 울림 이상의 작품들을 더 보고 싶어진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2023.10.04-13) 상영시간표]
10월 06일 20:00 CGV 센텀시티 3관 (097)
10월 09일 0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289)
10월 11일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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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러 vs 액션, 익숙한 것들의 집합체 <스위트홈>
1. 신체능력 5점: 이 배우에 이 무기, 낯설지 않아
2. 판단력 5점: 검술은 거들뿐
3. 정신력 5점: 소주 한 잔으로 몇 모금까지 가능?
4. 필터링 2점: 생각을 그대로 뱉는 편
5. 포커페이스 5점: 비현실적인 초연함, 하지만 사실은....
신체능력, 이 배우에 이 무기, 낯설지 않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모리 역할을 맡은 김남희 배우가 해당 캐릭터 정재헌으로 분했기 때문에 검을 든 모습을 보자마자 친근함을 느꼈다.
"돌잡이에서 칼을 잡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납득이 갈 정도로 멋진 검술 실력을 보여준다.
판단력, 검술은 거들뿐
아무리 검술 실력이 좋다고 해도, 갖가지 능력을 가진 괴물들을 칼 한 자루로 상대하기엔 버거워 보인다.
그런데, 정재헌은 칼 한 자루로도 대체로 문제를 잘 해결한다.
관찰 결과, 그 비결은 상황 판단력!
감상의 재미를 위해 자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그래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상황을 판단하여 치고 빠지기를 잘한다.
정신력, 소주 한 잔으로 몇 모금까지 가능?
과거 알코올 중독이었다는 대사 한 마디, 그리고 빨리 마시고 가라는 식료품 담당의 핀잔을 들어가며 소주 한 잔을 몇 모금에 걸쳐 마시는 장면. 이 장면이 정재헌이라는 캐릭터의 정신력을 아주 잘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잠깐 동안 비친 인물의 성향이 훗날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도 드러난다.
필터링, 생각을 그대로 뱉는 편
호감이 있는 사람에게도 '방이 더럽다'는 말을 툭 내뱉는다.
목소리와 말투만 들어보면 무척 다정하고 사려 깊을 것 같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뼈 때리는 소리이다.
생각을 말로 옮길 때 필터링이 잘 안 되는 편.
예상치 못한 갭이 캐릭터의 매력도를 더 높여준다.
포커페이스, 비현실적인 초연함, 하지만 사실은....
괴물의 위협을 받고 나서, 중요한 행동을 결정하기에 앞서서도 차분해 보인다.
시청자 눈에도, 옆에 있는 인물의 시선으로도 "떨고 있다고? 하나도 안 그래 보이는데?"라고 생각게 되지만, 정작 정재헌은 '굉장히 떨린다'라고 말한다.
의도치 않은 포커페이스의 달인.
배우 개그 또는 스포일러
존재 자체로도 스포일러가 되는 배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한 캐릭터로 분하신 김갑수 배우. "언제 어떻게 돌아가시는 걸까?" 사망 전문 배우로 유명하신 터라, 해당 배우의 캐릭터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드라마<미스터션샤인>과 영화 <박열>에서 악랄한 연기를 선보여준 이정현 배우는 "여기에서는 또 얼마나 나쁜 놈일까?" 비교하며 감상케 된다.
또, 연기 잘하는 조승우 배우가 극찬한 한 배우도 극 중에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서 스쳐가는 조연으로 나온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감상했다.작품 자체 스토리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배우 필모그래피를 고려하며 전개를 유추하게 된다.
그 예측이 뒤집어지든, 그대로 이뤄지든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가 더해져 좋다.
호러가 우선일까, 액션이 우선일까?
한때 재밌게 감상하던 만화가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장르를 설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sf, 역사, 액션, 개그, 모험 등 잡다한 주제들을 모두 포괄하는 만화였기 때문에 그냥 '장르는 짬뽕이야'라고 소개하곤 했다.이 드라마 <스위트홈>도 그렇다. 장르는 짬뽕 같다. 감상하다 보면 익숙한 요소들이 이것저것 보인다.
돌연변이와 인류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할 법한 고민은 영화 <엑스맨> 시리즈와 게임 <메트로>에서 먼저 들었다.
조용하던 주인공 소년이 돌연변이가 되어 고통스럽게 성장하는 장면은 굉장히 만화 <도쿄 구울>과 닮았다.
생존자들이 괴물과 괴물보다 무서운 인간들에 대항해 살아남으려는 투쟁은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에서.
캐릭터들에게 함부로 정 주면 매우 가슴앓이하게 될 수 있다는 면에서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리즈가 떠올랐다.
거기에 의사 드라마에서도, 법정 드라마에서도 연애하듯이 세상이 망조 드라마여도 로맨스가 가미되어 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오마주한 듯,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도 보였다.이런 '짬뽕'콘텐츠 중에서도 내가 선호하는 작품들은, 아무리 잡다한 특징을 포괄하고 있더라도 명확한 한 주제가 이끌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스위트홈>은 쭉 끌고 나가는 주 특징이 없는 듯하다.특히, 배경음악과 화면이 조화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E-sport 관람은 하지 않아서 이 드라마의 주 배경음악으로 쓰인 Warriors라는 곡을 몰랐다.
하지만, 화면은 호러가 강조되고 있는데 음악은 액션에 힘을 주고 있으니 어색했다.
이 작품은 분명 호러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왜 굳이 액션을 강조하는 음악을 주로 썼을까? 이 점이 아쉽다.
원작과 다른 캐릭터 구성과 전개
N웹툰에서 유료로 전체 스토리를 감상하기는 부담스러워서 서핑을 통해 정보를 찾아봤다.
원작 웹툰의 설정과 드라마를 비교해둔 정보들을 읽다 보니, 원작 그대로의 실사화를 기대하던 팬들에겐 아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한정된 공간 안에서 괴물과의 싸움, 생존을 위한 갈등을 다룰 뿐 아니라 아파트 밖의 상황을 전해줄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추가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해당 요소들로 인해 시즌2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쉬운 면도 분명 존재하지만, 원작과 다르게 전개되면서
새로 등장할 인물이나 에피소드들을 기대하며 시즌2를 바라고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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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명의 감독이 바라본 코로나가 존재하는 지금의 세상
코로나는 우리 사회를 정말 상상도 못한 형태로 뒤바꾸어 두었다.
현재는 사실상 엔데믹이라 부른다고는 하지만, 코로나의 영향은 우리 생활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그리고 예술에도 크나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 변화들을 거장들이 바라본 시선은 어떨까?
그 아이디어로 시작한 옴니버스 영화, <끝없는 폭풍의 해>를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다.
자파르 파나히, 안소니 천, 말릭 비탈, 로라 포이트러스, 도밍가 소토마요르, 데이빗 로워리,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렇게 7명의 감독이 모여만든 옴니버스 영화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단편은 일종의 다큐멘터리 같은 형식이다.
마치 베니스 70 미래 재장전 중 김기덕 감독의 "나의 어머니" 처럼, 작중에서 감독이 실제로 카메라를 들고, 지금 이게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카메라를 들고 찍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한다.
코로나로 인해 바뀐 가족들의 모습과 이야기 주제, 밖의 풍경 등 바뀌어버린 일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음과 동시에, 희망을 안겨준다.
안소니 천 감독의 단편은 코로나 시국, 오랜 기간 봉쇄된 우한의 한 가족 이야기를 다룬다.
코로나로 힘들어진 한 가정의 모습을 담담하고 현실적이게 담아낸다.
남자 배우 얼굴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바로 후 보 감독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에서 주연으로 나온 장 위 배우였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의 분위기도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색감과 분위기 같다고 느꼈다.
말릭 비탈 감독의 단편은 다큐멘터리 형식에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미디어 아트 같은 방식으로 양육권 소송 중인 남자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자전적인 이야기임과 동시에, 여기에도 어김없이 영향을 끼친 코로나 시국이 있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그런지 흥미롭게 감상한 단편이다.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의 단편은 이스라엘의 기업 NSO에서 만든 해킹툴이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미국 정부와의 접촉, 실제 위협을 받거나 살해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코로나로 많은 것들이 인터넷으로 공유되는 시대에, 전세계적인 해킹은 정말 심각한 문제인만큼, 심도깊게 관람한 다큐였다.
도밍가 소토마요르 카스티요 감독의 단편은 코로나 시국에서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행동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무난했던 단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로인 건 아니었고 그럭저럭 괜찮게 감상했다.
마무리가 상당히 여운을 남긴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단편은 오래된 편지로부터 시작해 무언가를 찾아가는 한 여자의 여정을 담는다.
분위기나 줄거리가 "고스트 스토리"를 좀 연상시키는 내용이었는데, 그것보다는 좀 더 직관적인 연출이라 크게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코로나가 범람하는 시대, 어떻게보면 되게 비현실적인 지금 이 시대를 되돌아보게 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단편은 불을 켜둔 침대에 꼬이는 벌레들을 찍은 단편이다.
인간이 쓰는 공간인 침대에 모여들어 수많은 날개짓 소리가 들리는 광경은, 마치 코로나라는 거대한 폭풍의 해에 휩쓸린 인류를 연상시킨다.
아피찻퐁 감독답게 난해한 느낌이 들지만, 초반에 나오는 설명과 이 영화의 제목, 끝없는 폭풍의 해를 생각하며 감상하면 이해가 더 잘될것이다.
옴니버스 영화를 보면 대부분 몇개는 아쉬운 게 있는데, 이 영화는 단편 7개 모두 버릴 거 하나 없이 전부 중간내지 중상 수준의 단편이라 만족스러웠다.
특히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첫번째 단편과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마지막 단편이 정말 시작과 끝을 잘한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간만에 만난 정말 훌륭한 옴니버스 영화.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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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동심이란 이름의 황금 성배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웬디>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우리에게 '소년'이 상징하는 바
미성숙함에 대한 인류의 욕망은 유구하다. 소년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쩐지 싱그러움을 품고 있는 것 같고, '소년 같다'는 말은 '노인 같다'와는 표현과는 다르게 칭찬으로 쓰이곤 한다. 누군가 마음에 소년을 품었다고 하면 그는 시대의 풍파에 때묻지 않고 순수한 사람으로 생각될테지만, 마음에 노인이 있다고 한다면, 글쎄, 어쩐지 꽉 막히고 괄괄한 성미를 가졌나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소년'을 동경한다. 그들의 '순수함', '천진함', '때묻지 않음'을 그리워하며 우리 자신이 영원한 '소년'이기를 바라곤 한다.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가능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극 중 웬디 어머니의 말처럼,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은 아주 막연하면서도 희망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영원히 소년일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가 꿈꿔왔던 것처럼 낭만적이고 유쾌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우리의 매일은 가슴이 벅차오르게 설레고 즐거울까?
영화 <웬디>는 이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2. 나는 엄마처럼 되지 말아야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영국이 배경이던 원작의 피터팬 이야기와는 달리, 영화 <웬디>는 20세기의 미국 남부를 주 무대로 한다. 어린아이가 드문 어느 시골 마을의 한 식당에서 주인공 웬디는 자라난다. 그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조촐한 식당은 언제나 노인들로 붐빈다. 그 틈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시선의 중심에 서 있다. 아이들을 향하는 노인들의 시선은 애정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아이들을 귀애하면서도 저주한다. 너희는 결국 이 시골 바닥에서 네 부모의 일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그것은 그 푸른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에 대한 미묘한 질투때문일 수도 있고, 세월의 풍파 속에서 겪은 회의적인 경험담인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은 썩 꺼림칙한 예언이다. 그런 어른들을 보며 웬디는 다짐한다. 자신은 어른이 되어버리지 않겠노라고. 기차를 타고 수 많은 집과 건물들을 지나 소녀와 소년의 땅으로 가 모험을 하겠노라고. 한때는 로데오가 꿈이었지만 지금은 아이 키우는 것을 꿈이노라 이야기하는 엄마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웬디는, 자신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피터의 기차에 뛰어든다.
3. 동심이라는 이름의 황금 성배
웬디와 제임스, 더글라스는 피터의 기차를 타고 어느 화산 섬으로 향한다. 그곳은 아이들이 영원히 아이들로 있을 수 있는 곳, 네버랜드다. 그곳은 마치 규칙이 없는 천국 같아 보인다. 소란법석을 떨어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엄마의 일을 돕지 않아도 누구 하나 잔소리 하는 이가 없다. 그들은 얼마든지 악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도 규칙은 있다. 어머니를 믿을 것.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 것. 어떤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 것. 이 규칙을 어기는 자는 어른이 되어버리므로, 이러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피터 무리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 된다. 그것은 불치의 병과도 같다. 아이들은 늙음을 두려워하며, 늙어버린 동료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늙고 싶지 않으므로 아이들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어머니(어떤 마법적인 힘을 가진 고래 비슷한 생물)'에 대한 아주 원시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거나, 점점 늙어가는 제임스의 손을 주저 없이 자르는 피터의 모습들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상상하는 소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외려 그것은 소설 <파리대왕>의 잔인한 소년 왕, 랄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늙어버린 소년들은 어디로 가는가?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그 무리로부터 소외받는다. 잊혀지진다. 버조와 제임스(그리고 제임스의 '저주'를 돌리기 위해 그와 함께 간 웬디)가 그랬듯, 그들은 낙원 같은 푸른 숲 너머로 향한다. 그곳에는 많은 것이 모래톱에 뒤덮인 황무지이며, 이미 늙어버린 선배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은 소년 시절의 즐거움이라고는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공허하다. 그들의 할 일이라고는 '어머니'를 사냥하려고 그물을 치는 일 뿐인데, 그것은 '어머니'의 살을 먹음으로써 소년 시절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웬디가 아무리 애를 써봐도 그들은 춤을 출 줄도 모르고, 장난치며 노는 법도 모르고, 노래하지도 않는다. 그저 너무 오래되어서 다 잊어버렸노라고 변명할 뿐이다.
웬디의 쌍둥이 오빠 중 하나인 제임스는 한때 더글라스와 더불어 영원한 소년으로 남자고 맹세했다. 그들은 로데오를 포기해야 했던 엄마나, 황무지 너머에서 만난 버조처럼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제임스는 사고로 더글라스를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 크나큰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늙어버리고 만다. 제임스는 그 늙음에 대비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어머니'를 사냥하여 그의 소년 시절을 되찾고자 한다. 소년으로 돌아가겠다는 광기에 휩싸인 그는 늙음을 거부하느라 잘라버린 팔 위로 갈고리 의수를 끼우고, 그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 아는 '피터 팬'의 악당, '후크 선장'이 된다. 다 늙은 제임스가 자신의 소년 시절의 얼굴을 한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죽은 줄 알았던 형제와의 재회를 순수하게 기뻐하기는 커녕, '너는 어째서 소년의 모습 그대로냐'고 분통을 터트린다. 잊은 것이다. 그를 가슴아프게 했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을. '소년 시절'에 대한 집착과 광기로 말미암아.
'어머니'를 숭배하는 소년들과 어머니를 사냥하고자 하는 노인들. 소년들은 '어머니'가 살기를 바라고 노인들은 그가 죽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이 두 집단은 언뜻 보기에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매우 닮아있다. 그들 모두 '소년다움'을 유지하거나 되찾기 위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황금 성배에 목매던 중세의 기사들처럼, 소년답고자 했던 소년들의 갈망이 그들 자신을 망친 셈이다.
4. 우리 안의 소년을 찾아서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영원한 소년이란 정녕 없는가? 우리는 순수의 시절이 그저 떠나가기를 지켜만 봐야하는가? 주인공 '웬디'는 이러한 절망적인 물음에 희망적인 해답을 제안한다.
영원한 소년으로 있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성장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성장 역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주변의 많은 세월 역시 그를 비껴나가게 된다. 가족, 친구, 사회는 자라지만, 당신만은 자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
피터와 제임스를 비롯한 소년(혹은 소년이었던 노인)들은 그 찬란한 고립을 기꺼이 선택했다. 그러나 웬디는 그러지 않았다. 네버랜드에 다다랐을 때도, 다른 소년들과 뛰놀며 '어머니'의 신비를 만끽할 때도 웬디는 고향에 남아 있을 어머니를 떠올렸고 언젠가 그녀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맹세한다. 그녀는 늙어버린 소년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들이 잊었던 소년 시절의 즐거움을 되살리려고 애쓰는가 하면, 그저 맹목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믿음만을 강요하는 피터에게 '그것은 진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녀의 특별함은 더글라스의 상실로 인해 늙어버린 제임스와도 대비된다. 제임스와 웬디는 모두 더글라스라는 형제를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제임스는 늙었고, 웬디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제임스가 더글라스와 절친한 쌍둥이 형제였으므로 그의 상실감이 더 컸으리라고 보았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좀 다른 각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거 같다. 사람은 그 성장 과정에서 보다 복합적인 감정을 습득하고 받아들여 나감으로써 감정적, 정신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 과정이 주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로 말미암아 겉모습만 빠르게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반면 웬디는 세월의 흐름과 늙음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소년의 모습'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소년다움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어른스러워서가 아니다. 그녀는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천진하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소년들과 다르게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흐르는 세월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그녀는 로데오를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아이들을 훌륭하게 기르는 것이 목표라는 어머니에게, 이미 늙어버린 제임스와 다른 소년이었던 노인들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자란다는 것의 찬란함 역시 바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알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결코 우리의 필연적인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므로 그녀는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들에게 당신 안에도 여전히 소년이 있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웬디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미 늙어버린 제임스는 '후크 선장'이 되어 네버랜드에 남는다. 아이들은 자라고, 피터와 제임스는 이제는 어리거나 늙은 소년들의 섬, 네버랜드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 살아간다.
웬디는 어른이 되어버렸으므로 소년들의 땅인 네버랜드에는 더는 돌아가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찬란한 소년 시절을 추억할 수 있고 그것을 향해 기꺼이 달려갈 수 있다. 그 시절의 그 소년은 아직도 그녀의 안에 남아있거니와, 자라남으로써 그녀가 많은 것들을 보고 누리고 배울 수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무리 감상
이 영화는 산만하고 거칠다. 말 그대로 동화인 원작의 스핀오프라서 그런 것일까? 개연성을 따지고 들면 이애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캐릭터들이 매력적인가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피터는 개구쟁이 폭군이고 제임스는 변절(어른이 되어버리는)한 소년인데, 인물들이 입체적이지 않아서 큰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 이 영화를 즐겁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들을 큰 이야기의 한 장치로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영화 자체는 아주 시적이다. 웅장한 자연이 곧잘 연출되며, 그것을 지극히 현대적인 건물과 물건들(그것도 오랜 세월의 풍파를 거치면서 낡고 초라해진)과 대비한 것이 절묘하다. 네버랜드의 소년과 노인들, 그리고 웬디의 고향에서의 아이와 어른들의 모습을 비교해가면서 보는 것도 하나의 관람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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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The Last Duel, 2021)
개봉일 : 2021.10.20. (한국 기준)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해리엇 월터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프로메테우스>, <마션>, <바디 오브 라이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등 짱짱한 배우 라인업을 보고 개봉날만을 기다린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편의상 <라스트 듀얼>과 혼용 표기)
<마션>에 이은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맷 데이먼의 만남, 그리고 <스타워즈>를 통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어 버린 배우 아담 드라이버와 최근 <프리가이>로 눈에 들어온 조디 코머, <나를 찾아줘>를 통해 알게 된, 항상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배우 벤 애플렉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라니. 그것도 시대극?! 얼마나 멋진 작품이 나올까 잔뜩 기대했다.
<듄>과 <베놈> 같은 대중적이고 커다란 작품들에 밀려 개봉 전부터 상영관 배정이 많이 부족해 보여 크고 좋은 관에서 보긴 그른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기에 개봉 전에라도 미리 보자며 프리미어 상영을 다녀왔다. 심지어 <라스트 듀얼>을 보려고 평소 팔자에도 없던 중세 시대와 봉건 제도에 대해 나름 공부까지 하고 갔다. (이 부분은 이동진 평론가님의 영상을 통해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라스트 듀얼>은 근세(1500년)가 시작되기 전, 1000년 정도에 이른, 아주 길었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극 중 배경은 중세 시대 중에서도 유럽에 창궐한 흑사병이 진정된 지 얼마 안 된 혼란한 시기였으며, 그 혼란함을 추스를 후세를 낳기 위해 주인공인 장이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장의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가 장의 절친 자크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영주와 왕은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 각자의 억울함과 분노를 표하던 장과 자크는 마지막 재판 방법인 결투 재판을 신청하게 된다.
잘잘못을 따질 수 없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됐던 결투 재판은 재판장에서 내리지 못한 결론을 하늘이 내려줄 거라, 하늘이 선한 자를 살려줄 거라 믿으며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재판이다. 말이 좋아 재판이지 사실 야만적이고 처절한 결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지배계급 사이의 주종 관계가 확연하게 정립되는 봉건 제도가 있던 시기이자 하늘과 신의 존재를 받들며 온 국민에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던 그 시기에 전투 재판은 하늘의 뜻을 묻는 정당한 재판에 속했다.
영화의 제목이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인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이 벌이는 결투가 실제 프랑스에서 행해진 마지막 전투 재판이기 때문이다. 봉건 제도의 몰락과 왕권의 확립,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에 앞서 합리적인 부분을 먼저 찾기 시작한 사회와 인식의 변화와 일어나기 시작했고, 지독하게 처절했던 이 마지막 결투의 영향으로 전투 재판 제도는 사라졌다고 한다. <라스트 듀얼>은 마지막 전투 재판의 기록을 인용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라스트 듀얼>은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권력과 자존심 다툼을 하는 두 남성의 까칠한 민낯을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용기를 내 무고함을 소리치는 여성의 시선을 함께 담아낸다. 겉으로 보면 한 여성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두 남성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 정도의 느낌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실상은 다르다.
영화는 장, 자크 두 남성의 시선과 사건의 중심에 있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나눠 진행된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상이 박혀있던 그 시기에 살아온 장과 자크는 마르그리트를 지키거나 그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결투 재판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의 소유물을 건든 자를,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자를 심판하기 위해 나의 운명을, 내 소유물인 아내의 운명을 함께 건 것이다. 아내는 물론 선택권이 없다.
하나의 사건을 둔 세 사람의 시선은 모두 다르다. 특히 유일한 여성인 마르그리트의 시선은 이 사건을 다르게 보고 있다.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통해 그 시절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잔인할 만큼 투명하게 보여준다.
불합리와 야만의 시대에서 여성은 아내의 도리를 다해야 했고, 집안에 틀어박혀 식모 살이와 온갖 수모를 견뎌야 했고, 아이를 잉태하는 수단에 불과한 취급을 받아야 했다. 모든 여성들이 포기하며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마르그리트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남편 장에게 호소한다.
나는 마르그리트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다른 분위기이긴 하지만 마르그리트를 보며 올해 7월에 개봉했던 <오필리아>의 주인공, 오필리아가 떠오르기도 했다. 남성이 절대적이었던 사회에서 일어난 남성들의 권력 싸움과 여러 사건 뒤에 묻혀있던 여성 주인공, 그리고 그들의 시선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담아낸 두 영화의 모습이 얼핏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 개의 시선에 따라 정의롭던 사람이 강압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희대의 바람둥이가 순수한 사랑에 미쳐버린 청년으로 변하고, 무고한 여성의 외침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사건의 진실은 신이 내려줄 수 있는 것인가. 왜 여성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는 건 남성뿐인가, 그리고 무고함에 박수받는 것 또한 왜 남성인 것인가.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보는 내내 불편함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속이 답답할 정도로 불편했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굉장히 높다. 중세 시대를 충실하게 복원해낸 세트와 의상, 미술,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그 긴 시간마저도 완벽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관객을 끌어당기는 배우들의 힘. 그리고 각자의 시선을 따라 조금씩 비틀어낸 카메라의 시선. 같은 사건을 3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같은 시간을 3번 반복해 보는 일인데, 그럼에도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던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라스트 듀얼>이라는 영화의 제목만 보고 중세 시대의 웅장한 전투를 기대한다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인물들의 위엄을 보여주는 짧은 전투 장면과 두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마지막 결투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의 결투는 충분히 처절했고, 단시간에 나를 압도했다. 하지만 그 결투 뒤에 숨겨진 진실들은 끝까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라스트 듀얼 시놉시스
부조리한 권력과 야만의 시대,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는 남편 ‘장’이 집을 비운 사이,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자크’는 ‘마르그리트’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자크’의 죄를 고발한다.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는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장’은 승리하는 사람이 곧 정의로 판정 받게 되는 결투 재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장’이 결투에서 패할 경우, ‘마르그리트’는 즉시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는데… 단 한번의 결투가 세 사람의 운명을 가른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하나의 사건과 세 개의 시선
세 사람을 둘러싼 사건은 여러 가지가 아닌 단 하나다. 하지만 세 사람은 모두 다른 시선으로 사건을 보고 있다.
장은 영주의 눈에 든 자크가 목숨을 살려준 자신과의 우정을 배신하고 아첨을 반복하며 권력을 얻은 놈이라 생각한다. 장은 자크가 아내 마르그리트의 결혼 지참금이었던 땅을 빼앗고, 나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던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며 무지향성으로 분노를 터트린다.
1장, 장의 시선으로 보면 자크는 분명 아첨꾼이자 배신자가 맞지만 자크의 시선으로 본 순간들은 사뭇 다르다. 자크가 난봉꾼인 건 맞지만, 그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 리모주 전투에서 다른 병사들이 장의 뒤를 따르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장을 뒤따라가야 한다고 선봉에 선 사람은 자크였고, 자크는 영주에게 장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한다. 자크는 권력을 얻으려고 영주와 함께 어울리긴 하지만, 꼭 장을 배신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 권력
하지만 막강한 권력 앞에서 두 인물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정과 이성을 가볍게 내버린다. 장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옳음 따윈 없어. 사내들의 권력만 존재하는 거야.”
장은 영주에게 인정받고, 좋은 땅을 받고, 본인 대신에 성을 물려받게 된 자크에게 분노와 열등감을 느낀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기로 했던 진짜 주인은 나인데,.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이 없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오가고 있는데, 기사 집안도 아니었던 친구 놈이 성에서 잘 놀고먹고 있다니. 앞서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입은 장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거다.
그래서 장은 자크를 이길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버지처럼 기사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전쟁을 끝마치고 영주에게 보고를 하러 간 자리에서 장은 자신을 가볍게 부르는 자크에게 자신은 이제 기사니 존칭(Sir)을 하라고 명령한다. 자크는 공격적으로 나오는 장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우선 그가 기사인 것은 맞으니 존칭을 붙여 대답한다.
기사가 되어 존칭을 받음으로써 이제 자크를 이긴 걸까 싶었는데, 장이 다시 분노할 일이 생긴다. 자크가 자신의 아내 마르그리트를 겁탈한 것이다. 아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나의 후세를 낳아줄 값진 암말, 나의 소유물을 말이다. 장은 마르그리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자크를 벌하는 것에 더 열을 내며 마지막 전투 재판까지 참여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장이 결투에서 지면 화형에 처해질 운명을 부여받고, 두 남성이 자유롭게 칼을 휘두를 동안 발목이 묶인 채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본다. 남성들의 권력싸움 앞에서 여성이었던 마르그리트는 무력하게 묶여 그들의 싸움에 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여성을 부조리한 시선으로 바라본 남성들
중세 시대 여성들은 인권을 존중받지 못한다. 사회적 지위가 없기에 남편 없이는 재판을 열 수 없었고, 여성은 무슨 일을 당하든 입을 열 수 없었으며 후세를 잇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 또는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른 집안에 보내지는 뇌물 정도로 인식된다. 여성은 그저 남편, 남성의 권력과 욕망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자 소유물일 뿐이다.
영화의 초반, 장의 시선으로 본 장의 모습은 마치 아내를 아껴 재판까지 참여한 꽤 멀쩡한 남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본 장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사건을 알게 된 순간엔 마치 자신의 물건을 뺏겨 화가 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아내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기보단 “나의 소유물을 건드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내거를 가져가려고 해?” 이런 마음과 비슷한 분노였다. 장은 마르그리트의 말을 듣자마자 “그놈은 왜!”라고 소리치며 나의 소유물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는 듯 마르그리트를 침대에 눕힌다.
여성 편력이 굉장하다고 소문난 자크 또한 여성을 육욕의 대상으로만 인지한다. 그는 축하파티 자리에서 처음으로 본 마르그리트의 미모에 홀려 혼자만의 착각에 빠진다. 욕심내면 안된다는 부하의 말에 자크는 “나를 향한 저 눈빛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박하며 일방적이고 사랑, 사랑보단 폭력에 가까운 욕망을 키워간다. 자크는 재판장에 서서도 끝까지 그것은 강제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마르그리트 또한 자신을 사랑했다고,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라고 소리친다.
거기에 얹어지는 남성 법조인들의 수치스러운 질문 퍼레이드를 보며 어이가 없다 못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이 시대는 대체 얼마나 야만적이고 지저분했던 걸까. 중세 시대라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위엄과 무게감 따위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장면이었다.
우리에 갇힌 암말과 같은 여성의 지위
영화의 세 번째 시선, 드디어 마르그리트의 시선이다. 마르그리트는 국가적 배신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아버지의 딸이다. 나름 돈도 많고 괜찮은 집안이었지만 배신자 딱지가 붙자 아무도 마르그리트의 집안과 연을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마르그리트와 혼인을 약속한 건 바로 장이었다.
흑사병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장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 명성과 집안을 이어줄 후세를 낳는 일이었다. 장은 마르그리트 집안의 돈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젊은 마르그리트의 몸을 이용하기 위해 마르그리트를 아내로 맞이한다.
장은 수차례 관계 후에도 임신이 되지 않는 마르그리트를 보며 첫 아내와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며 마르그리트를 압박한다. 장의 어머니 또한 아내의 의무를 다하라고, 여성은 겁탈을 당해도 아무 말 없이 집안에 있는 거라고 다그친다. 마르그리트의 친구 마리 또한 결혼의 무게감을 느끼며, 여성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 사회가 말하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희생한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려던 여성, 마르그리트
마르그리트는 장이 꽁꽁 묶어둔 그의 번식용 값진 암말을 보며 자신 또한 그 암말의 존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혼 후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고립된 상태로 살아온 마르그리트는 장이 긴 전투를 떠나고 스스로 집안일을 처리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새하얀 얼굴이 아닌 조금은 탄 얼굴, 하인인 알리스는 얼굴이 타지 않았냐고 묻는 마르그리트에게 “얼굴에 색이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죠.”라고 답한다. 스스로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마르그리트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남성들의 욕망을 채워줄 도구 따위가 아니다.
여성의 침묵의 대가는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뿐이고, 만일 침묵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장도 친구 마리도, 마르그리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마르그리트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욕하며 자크의 편을 든다. 하지만 마르그리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장의 어머니는 자신도 겁탈을 당했지만 꾹 참고 견뎌 겨우 살아있다고, 재판을 진행하지 말라며 마르그리트를 말린다.
부조리한 일을 겪었음에도 여성은 침묵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찬스를 얻는 것뿐이다. 삶을 영위한다는 건 고귀한 일이지만, 여성은 그저 살아있을 뿐, 명예, 지위, 돈 같은 것들을 절대 탐할 수 없는 아이를 낳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마르그리트가 침묵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마르그리트는 장과 자크의 결투 재판에 끼인 채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그것도 자신의 손이 아닌 장의 손에 쥐어진 자신의 목숨을 반강제로 걸게 된다.
피 튀기는 마지막 결투
사실 점점 더 처절해져가는 결투를 보며 장과 자크 두 사람이 다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두 인물이 모두 미웠으니까. 하지만 발목이 묶인 채 결투를 지켜보는 마르그리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장을 조금은 응원했던 것 같다.
처음엔 말을 타고 꼿꼿한 자세로 시작된 두 사람의 싸움은 점점 처절하게 변한다. 장과 자크는 말의 죽음과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이내 괴성을 내며 무기를 휘두른다. 긴 창에서 도끼, 검, 그리고 단검까지. 두 사람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싸움은 더 치열하고 본능적인 모양새로 바뀐다. 장과 자크, 두 사람은 본인의 권력을 위해 한 명이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싸운다.
신의 손, 신의 심판인 결투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건 결국 남성이었다.
신의 손,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결투 재판이지만 사실 결투 재판은 싸움을 하는 남성이 언제 지치느냐, 언제 죽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남성들에 의해 내려지는 이 재판은 사회에서 남성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만든다.
남성들의 힘이 모든 걸 결정하는 그 결투에 자신의 목숨마저 걸라니. 마르그리트는 장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그대로 쥐여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말한다.
“이게(아이를 낳는 것) 내 삶이었어요.”
“엄마에게 정의가 필요한 것보다 더,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해요.”
마르그리트는 이러한 재판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재판은 과연 누굴 위한 재판이며 이 재판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은 제대로 된 것이었을까?
장이 결투에서 승리하고 마르그리트의 발목에 묶여있던 족쇄가 풀리지만 세상은 여전히 마르그리트가 아닌 신의 재판에서 승리한 장에게 집중하고 박수를 보낸다. 누구도 마르그리트의 무고함엔 관심이 없다. 이게 바로 그 시대의 진정한 민낯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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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러의 보디가드 2> 전 세계 박스오피스 접수하러 등장!
2017년 개봉한 액션 코미디 영화 <킬러의 보디가드>의 후속작인 <킬러의 보디가드 2>가 북미 박스오피스 차트 1위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가 이번 주 북미에서 개봉하는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박스오피스 1위 달성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으로 추측됩니다. 국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국내 2021년 6월 23일에 개봉 예정인데, 조우진 주연의 영화 <발신제한>을 제외한다면 딱히 경쟁작이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라이언 레이놀즈, 사무엘 L. 잭슨 그리고 셀마 헤이엑이 주연을 맡은 <킬러의 보디가드 2>는 16일에 개봉하여 오는 23일까지 1,500만 달러를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몇 안 되는 극장 개봉작 중 하나로서, 이 영화는 영화 사업이 코로나 침체기에서 회복됨에 따라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 대형 스크린에서 공개된 첫 코미디 작품인데요. 이는, 슈퍼 히어로와 서스펜스 스릴러의 인기로 인해 많은 영화 팬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장르이기도 하기에, 이번에 얼마나 많은 관객들을 이끌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이번 후속작은 1편보다 더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의 제작비는 5천만 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고, 1편은 6천9백만 달러의 예산이 소요됐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가 북미 박스오피스 티켓 판매 2,100만 달러로 시작하여, 북미 박스오피스 최종 7,500만 달러, 그리고 전 세계 1억 7,6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다소 부족한 흥행 성과와 함께 극장 개봉을 마친 이력이 있기에, 줄어든 예산에 대한 문제점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2>는 마이클(라이언 레이놀즈)과 다리우스(사무엘 L. 잭슨)가 유럽 전역을 위기로 몰아넣는 미치광이들의 사악한 음모를 없애기 위해 다시 뭉치게 된다는 줄거리로, 다리우스의 아내 소니아(셀마 헤이엑)까지 합세한다는 차별점을 담고 있습니다.
개봉 예정작인 <킬러의 보디가드 2>를 제외하고, 현재 북미 박스오피스 시장은 <인 더 하이츠>와 <피터 래빗 2>가 이끌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 영화 모두 예상보다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HBO Max에서도 관람 가능한 <인 더 하이츠>는 총 1,14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피터 래빗 2>는 1,010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백신 접종으로 인해 되살아나는 극장 시장과 액션 코미디 장르의 귀한! 과연 <킬러의 보디가드 2>는 <인 더 하이츠>와 <피터 래빗 2>를 넘어서 북미 박스오피스 시장 1위에 안착할 수 있을까요? 국내에서도 6월 23일 개봉 예정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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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30] 스릴러로 돌아온 안젤리나 졸리의 추격극
영화 윈드리버의 타일러 쉐리던 감독이 신작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굉장히 건조하지만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가진 캐릭터를 등장시켜 일종의 복수극을 스릴러로 보여줬는데요.
이번 영화는 좀 더 스케일이 커지고 빨라졌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래도 영화가 재미있습니다. 마음을 쫄깃하게 만드는 스릴러 영화에요.
시카리오 시리즈의 각본가로 유명한 타일러 쉐리던은 이제 연출을 시작하는 감독입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되는 감독이네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봐주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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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숏버스 배우행> 메인 예고편
오늘도 배우들은 연기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옥상에선 내가 톱스타! <OK,탑스타> 녹색창에 떠야만 배우인가요? <31,내리다> 감독님, 제 메일은 언제 확인하실까요? <오디션>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는 나는 연기가 고프다 <언젠간 터질 거야> 오디션, 아빠가 없어도 잘 할 수 있어 <클라운> 이들은 그토록 바라던 연기의 꿈을 펼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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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유포리아> 예고편
엄마의 죽음 이후 서로에게 소원해진 자매 '에밀리'(에바 그린)와 '이네스'(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불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며 펼쳐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