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3-05-23 07:48:02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말하는 완벽한 방법
영화 <주전장> 리뷰
먼저 이 영화를 보고 감탄한 점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필자가 반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싫어하는 이유인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을 싫어하는 이들에게 물으면, 그냥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고 무조건 적인 비판을 퍼붓는다.
그렇기에 "반일 하는 애들은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구나."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위안부 문제에서 화제가 되는 키워드들(성노예, 20만 명, 사죄, 배상 등)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려는 사람들과 수정주의자 및 우익사관론자들의 의견을 들어본다.
수정주의자 및 우익사관론자들의 주장은 대부분 감정적이며 정보를 왜곡해서 말한다.
하지만 알리려는 사람들은 정반대로 지혜로울 뿐만이 아니라 설득력도 있다.
이 영화를 호평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흔히들 부르는 '국뽕'이라는 게 유행했던 부끄러운 시기가 있었다.
억지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일으키는 그런 매체들 말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필자가 애국자라고 지칭하는 이들을 혐오하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그들과 싸울 거면 이렇게 싸워야지."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느라 포커스를 맞추지 못했던 미국 정부와 UN 연합의 문제점들도 언급한다.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시선을 비추어주어서 상당히 놀라웠다.
또한 편집과 전개 또한 관객이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영화에서 다루는 문제에 흥미를 느끼게 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반일 영화가 아니라, 치밀한 편집과 전개가 어우러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는 완벽한 영화이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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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오브 인터레스트 | 결코 남 일이 아닌 그들의 일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책임자로 일하는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 그들은 귀여운 아들 둘, 예쁜 딸 둘과 함께 수용소 옆 관사에서 즐거운 일상을 보낸다. 주말이면 피크닉을 가고, 카누를 타며, 수영장 있는 정원을 즐기면서. 잡일은 유대인 하녀들에게 모두 맡겨둔 채로.
하지만 그들의 일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아우슈비츠에 거대한 소각장을 들여놓은 후로 연신 흩날리는 잿가루가 회스 가족의 일상을 조금씩 방해하기 때문. 이에 더해 '최종 해결책' 시행을 앞두고 회스가 전근 명령을 받자 헤트비히는 이 일상과 관사를 떠나야 할까 두려움에 빠진다. 과연 회스와 헤트비히는 꿈이나 다름없이 행복한 그들의 삶을 지킬 수 있을까?
스크린 위에 펼쳐진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리고 '악의 평범성'. 세계사나 철학 같은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책, 개념이다. 사실 '악의 평범성'은 유명세만큼 오해하기 쉽다. 이 개념은 흔히 모든 사람 마음속에 아이히만 같은 악마적인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는 성악설 비슷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아렌트는 모든 사람에게 악마가 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악이 얼마나 단순하게 탄생하는지 꼬집는다. 모든 사람은 역지사지의 능력을 바탕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악의 평범성'은 바로 그들이 악행을 저지른다고 지적하는 말이다.
당장 아이히만도 상투적인 나치의 명령과 말에 안주했을 뿐이다. 그는 유대인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 행동이 어떻게 유대인의 대학살로 이어졌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즉, 타인의 현실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한 그의 무사유가 홀로코스트를 만들어낸 셈이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악의 평범성'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인다. 한 독일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사유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챙겼는지를 꼬집는다. 이 비판은 직설적이지 않아서 되려 더 날카롭다. 익숙한 비판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결말은 심란하다. '과연 나는 저들과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일상을 반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이 메스꺼운 이유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남부러울 것 없고, 흠잡을 데 없는 회스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직장에서 수많은 부하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아버지.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하루종일 바쁘게 일하며 집과 가족을 챙기는 어머니. 아버지는 두 딸이 잠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줄 정도로 가정적이고, 그 덕분에 4남매는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낸다.
그들의 행복한 집도 감탄을 자아낸다. 큰 주택 옆에 딸린 숲과 강은 한적한 오후마다 피크닉을 즐기기에 최적이다. 집 앞 널찍한 마당에는 각이 딱 맞는 모습이 인상적인 수영장과 정원도 있다. 그래서인지 회스 가족의 일상은 <사운드 오브 뮤직> 속 트랩 대령 가족마저 부러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주인공들이 노래만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회스 가족의 일상은 보기 메스껍다. 그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퍼즐 조각이 하나씩 밝혀지기 때문. 그들의 옷, 화장품, 장난감은 모두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유대인의 유품이다. 저택은 아우슈비츠 바로 옆에 위치한 관사이고, 헤트비히를 돕는 충실한 하녀도 유대인이며, 정원에 뿌려지는 거름은 유대인 체를 태운 잿가루다. 회스가 몰두 중인 프로젝트마저 나치의 '최종 해결책'으로 밝혀진다.
무관심을 먹고 자란 일상
그런데 이 퍼즐 조각을 더 끔찍하게 만드는 주체는 따로 있다. 바로 회스 가족의 태도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헤트비히는 새로 받은 코트 주머니에서 립스틱을 꺼내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입술에 바른다. 그 주인이 바로 옆 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는 전혀 생각이 안 든다는 듯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첫째 아들은 무심하게 금이빨을 가지고 논다. 막내아들 '한스'는 처형 명령을 받은 유대인의 비명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말한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정원을 가로막은 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 왜 거대한 굴뚝에서 낮에는 연기가, 밤에는 불길이 피어오르는 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회스 가족의 무관심은 음향 효과 덕분에 더욱 극대화된다.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영화는 유대인들의 아우성, 독일군의 명령, 발포음을 배경에 깔아 둔다. 하지만 회스 가족은 이 소리를 전혀 듣지 않는다. 새 울음소리와 비명이 같이 나도 그들은 새소리만 듣는다. 귀가 멀지 않은 이상 그들도 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무관심한 나머지, 그들은 그 소리에 대해 고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소 독특한 영화의 시작과 끝도 이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제목을 보여준 후에 약 2분 정도 기묘한 음악으로 가득한 검은 화면을 보여준다. 또 엔딩 크레디트는 배경에 깔려 있던 아우성이 터져 나오는 듯한 사운드로 가득하다. 이는 관객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신호를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하는 절차처럼 보인다. 회스 가족의 선택적 노이즈 캔슬링에 주목해 보라는 암시처럼 들리기 때문.
선택한 무관심
이에 더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 가족이 단순히 무관심한 게 아니라,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회스가 유대인 여성을 성노예로 쓰고, 헤트비히가 하녀를 수용소 안으로 보내서 죽일 수도 있다며 기분풀이용으로 협박하는 모습이 그 방증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일상을 누리고 지키려고 한다. 아렌트의 말마따나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사유로 일관한다. 회스가 전근 나갈 예정이라고 아내에게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헤트비히는 지금 집에서의 유복한 삶을 지속하지 못할까 봐 격렬히 화낸다. 이에 회스는 가족들을 관사 남겨두고 혼자 숙소로 떠난다. 그 집 옆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번에도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다른 인물과 대조하면 회스 가족의 문제점은 더 명확해진다. 바로 헤트비히의 친정 엄마 '리나'다. 딸을 만나기 위해 여행 온 그녀. 헤트비히는 하녀들을 동원해 가장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수영장과 정원에 핀 꽃을 자랑한다. 하지만 정작 리나의 시선은 다른 곳에 향한다. 그녀는 딸에게 묻는다. 정원을 막은 벽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헤트비히는 그 질문을 무시한 채 자기 자랑을 이어가기 바쁘다.
이 차이는 모녀의 결별로 이어진다. 아빠랑 카누를 탄 아이들이 수용소 발(發) 잿가루를 뒤집어쓰자 헤트비히는 그들을 씻기기 바쁘다. 리나는 다르다. 밤새 굴뚝을 빛내는 불길과 떨어지는 잿가루를 목격한 그녀는 전날 오후 광경을 떠올린다. 해 지는 수영장을 청소하는 유대인 하녀들과 그 뒤에서 연기를 뿜는 굴뚝을. 아침이 되자 리나는 곧장 헤트비히의 집을 떠난다. 딸과 달리 그녀는 최소한 인간적으로 사유할 줄 아니까.
뺄셈의 미학으로 완성한 영화적 논박
더 나아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혹시 모를 변명까지도 철저히 논박해 버린다. 아이히만 같은 범죄자들은 다음 같이 변명하기도 한다. 그저 명령을 따른 직장인이었을 뿐이라고. 자기들도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 지극히 영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이 결코 나치의 전쟁 범죄로부터 윤리적으로 무관하거나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종 해결책'을 입안한 회스는 작전에 자기 이름이 붙었다면서 기뻐한다. 그는 조직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 자기 작전의 파급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다. 물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내심 깨닫는다. 축하 파티가 끝난 뒤 사무실에서 퇴근할 때 극심한 구역질에 시달리기 때문. 이때 영화는 박물관이 된 현재 시점의 아우슈비츠와 잔뜩 쌓여 있는 유대인 희생자들의 의복과 신발을 비춘다.
이 몽타주는 회스가 내심 자기 작전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지 마음 한편에서는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분명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는 전혀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계단을 다시 내려가며 마지막까지 철저히 무관심하기를 선택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를 이어 붙인 편집은 뺄셈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는 유대인의 피, 땀, 눈물을 직접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쉬운 길을 가지 않고도 홀로코스트의 '평범했던' 뒷사정을 보여준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나치의 책임을 명확히 못 박는 데도 성공했다. 전쟁 영화 중에 <덩케르크>가 있다면, 홀로코스트 영화 중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있는 셈이다.
우리의 일상은 다를까?
마지막으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화살은 나치 부역자들이 아닌 관객에게 향한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등장할 때, 영화는 직원들도 함께 보여준다. 그들은 매일 청소하고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와 가장 맞닿은 곳에서 일하지만, 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그저 일상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니까.
흥미롭게도 그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영화를 본 뒤 우리가 돌아갈 일상도 마찬가지로 비극에 무감각하기 때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 등에서 자행된 비인간적 행위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한국군 내에서 사고가 터져도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라며 무관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보면 비명을 무시하는 회스 가족과, 아우슈비츠를 청소하는 직원과, 비극을 접하고도 반응하지 않는 우리는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극 중 사과를 놓는 소녀가 유독 인상적이다. 사실 그녀는 뜬금없는 인물이다. 다른 주인공과의 접점도 없고,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등장마다 열화상 카메라로 보여주는 연출도 독특하다. 하지만 그녀는 뜬금없기에 중요하다. 그녀는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과도 아무 접점이 없다. 그 덕분에 그들이 집어갈 수 있도록 수용소 주변 곳곳에 사과를 두는 선의는 오히려 더 빛난다. 회스 가족의 무관심과 대척점에 서서.
이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진정으로 당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일에, 내 관심사와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비인간적인 일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한 반성과 성찰이 없다면 누구든 회스 가족이 될 수 있다고 거듭 일깨워주면서. 그 결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분명 걸작이지만, 그 미학과 완성도에 그저 마음 편히 박수 보낼 수 있는 영화는 아닌 듯하다.
Outstanding 특출남
400 페이지짜리 필설을 담고도 남은 1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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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플래쉬 / Whiplash, 2014
시간은 저의 나이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10살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입이 짧아 안 먹는 음식이 많았는데, 당시 담임 선생님은 음식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자리에 끝까지 이를 다 먹도록 했습니다.
그게 안된다면, 당사자를 향해서 의자를 던지는 등 위협도 불사했습니다.
사건은 "된장국"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필자는 입이 짧아 안 먹는 음식이 많았고, "된장국" 역시 이에 속했습니다.
담임과 "이를 먹느냐, 마느냐"로 신경전을 펼쳤으며, 담임은 '자기가 보는 눈앞에 먹어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숟가락을 떠먹고선 당당히, "오바이트(?)"를 했습니다.
영화 <위플래시>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002-2007>에서 괴팍한 편집장 "J.K. 시몬스"를 "플레처"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각인시켰습니다. (이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으로 공식적인 결과까지 이어졌고요.)
무엇보다 개봉 당시 군 복무로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쳐 아쉬웠는데, 이번 재개봉이 저에게는 운 좋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올라간 링크에도 있듯이 마지막 곡이 "업스윙윙"과 "카라반"인데도 "이 플래시"로 적어놓는 실수가 있어 이를 바꿀 기회도 겸사겸사 극장에서의 관람을 택했습니다.
그러면, 보는 것은 2번째이지만 극장에서는 처음 보는 영화 <위플래시>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는 뉴욕 최고의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에 입학한 "앤드류"를 보여줍니다.
그는 학교 최고이자 최악의 지휘자 "플레처"의 눈에 들며, 그의 밴드에 들어가 단숨에 메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날로 실력이 늘어나는 "앤드류"이지만, 점점 여자친구와 가족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며 그의 삶을 바꿀 사건이 일어나는데...
관객들의 눈에 플래시가 터진다!
1. 음악영화의 클리셰가 깨졌다?
영화 <위플래시>를 보기에 앞서 "데이미언 셔젤"의 <라라랜드2016>에서 "재즈"에 익숙지 않는 "미아"를 위해 "세바스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재즈는 싸움이고, 주도권이 쉴 새 없이 바뀌며 매일매일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건넵니다.
이런 시점에서 보는 영화 <위플래시>는 애당초 "플레처"의 일방적인 싸움으로 전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가 영화에서 줄기차게 내뱉는 대사 'Not quite my tempo'는 악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상 그가 통제하는 리듬을 의미합니다.
발버둥 쳐봤자 손바닥 안?
그도 그럴 것이 "앤드류"가 그토록 미쳐가는 자리는 사실 "플레처"가 통제하는 밴드 안에서 일어나는데요.
그가 그토록 원하는 "메인"은 "플레처"의 밴드에서 "플레처"의 말로 일어나는 일이며, 그가 손에 피가 튈 정도로 두들긴 이유 또한 "플레처"의 입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를 통해서, "앤드류"는 자신이 되고픈 "찰리 파커" 혹은 자신의 리듬이 아닌 "플레처"의 리듬에서 고군분투했음을 보여줍니다.
보통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노래"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이어주는 매개체임을 고려하면, 영화 <위플래시>는 "클리셰"를 깨부순 영화인 것입니다.
2. 스릴러 같은 음악영화
이외에도 영화 <위플래시>의 특이한 이력을 살펴보면, "공포 영화"를 주로 제작하는 "블룸 하우스"에서 제작된 영화입니다.
물론 "드라마"로 소개되지만 "스릴러"가 더 어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제작한 그 어떤 공포 영화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상황들을 전개하는데요.
바로, 관객들의 입에서 "어떡해?"가 나오며 절로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을 만들게 합니다.
극 중 누군가가 실수를 해 이를 밝히는 장면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눈을 감고서 손만 들라는 교실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며,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큰소리로 다그치는 선생님의 모습은 학교를 다녀보았으면 겪어볼 만할 상황들을 장면으로 꺼내 관객들의 공감을 일으키는데요.
이야기가 "공감"을 넘어서서 "이입"이 되는 것이먈로 가장 좋은 상황임을 본다면, 영화에서 "플레처"는 이야기를 가장 좋게 만드는 매개체입니다.
"블룸하우스"의 어떤 공포보다 무서운데?
여기에 영화 <위플래시>의 음악은 장면을 보다 풍성하게 만듭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음악은 자고로, 가사가 있어야 하는 주의인데 본 영화의 음악은 가사가 없어도 제목이 머리에 쉽게 쉽게 남는데요.
이런 이유에는 해당 음악들이 극 중 "플레처"와 "앤드류"의 사이에서 소비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으로 혼이 나는 장면에서는 "위플래시"를, 경쟁을 부추기는 장면에서는 "카라반"이 쓰이며 가사들이 없어도 관객들의 머리에 크게 남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는 완곡하지 못한 "업스윙윙"까지 아직 기억에 남는 건 영화가 이를 잘 활용했다는 것이고요.
3. <인셉션>의 팽이처럼 관객들의 탄식이 쏟아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화에서 "앤드류"는 "플레처"의 리듬에서 고군분투하는데요.
이는 마지막에서도 일어나고 맙니다.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보였던 "플레처"와 "앤드류"는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지지만 예상에 없던 "업스윙윙"이 나오며, "앤드류"는 "플레처"에게 한방을 먹습니다.
이에 자리를 비우는 "앤드류"이지만, 이내 돌아오며 곧장 "카라반"을 치는데요.
여기서, 더 이상 "플레쳐"의 지휘가 아닌 "앤드류"의 연주로 시작되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동안 영화가 "플레처"의 손으로 연주가 이어지고 중단된 것과 다르게, 이번 연주는 "플레처"도 함부로 중단하지도 못합니다.
1:1, 승패를 결정지을 "위플래시"는 누구에게?
결국, 영화는 "위플래시"를 관객들에게 이 대결의 승패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직, 소리로만 들려주고는 누구의 템포로 시작했는지의 모습은 장면으로 보여주지 않아 <인셉션>의 팽이처럼 관객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업스윙윙"이 "플레처"의 승리였고, "카라반"이 "앤드류"의 승리로 동률을 만들었으니 이들의 승패가 결정지을 "위플래시"의 결과가 사뭇 궁금해지는 것은 비단, 저만은 아닐 겁니다.
그렇게 <위플래시>가 결말을 지었듯이 앞에서 말씀드린 저의 된장국 결과도 말해야겠죠.
"된장국"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먹는 음식은 아닙니다. 결국, 저는 된장국을 선생님 보는 앞에서 밥 말아먹었습니다.
식판을 들며 국물까지 싹싹 긁어서 먹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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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가 이어져야하는 이유
기술이 발전한 만큼 다양한 범죄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단순한 폭력사건부터 시작해서 지능범죄까지 이런저런 범죄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서 떠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 범죄 예방과 해결을 위해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들이 동분서주 활동하고 있다. 그런 경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고, 범죄에 노출된 사람들은 사건 해결과 범죄자 처벌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현실에서의 범죄는 피해자에게 무척 잔인하게 느껴진다. 아주 사소한 범죄도 있지만 심각한 살인이나 조직범죄는 우리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가 파고든 영역은 바로 그 지점이다. 대중들이 공포심을 가질만한 사건을 선택해 그걸 더 극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마석도 형사(마동석)의 능력을 빌려와 악을 처벌한다. 명확한 선악구도 속에서 마형사가 휘두르는 주먹은 꽤나 통쾌하게 느껴진다.
통쾌하게 범죄를 해결하는 마석도 형사의 세 번째 영화
2017년에 개봉했던 <범죄도시> 1편은 범죄 누아르의 색깔이 강했던 영화다. 장첸(윤계상)이라는 강력한 빌런을 등장시켜 마석도 형사가 속한 강력반 형사들의 대결을 담은 영화는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680만 명의 관객을 극장에 불러왔다. 2022년에 개봉한 <범죄도시2>는 누아르의 색깔을 조금 덜어내고, 마석도 형사의 주먹에 좀 더 무게를 뒀다. 마형사가 주먹을 휘두를 때 둔탁한 효과음이 들어갔고, 그 주먹을 맞는 범죄자들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야말로 핵펀지로 범죄가 박살 나는 과정을 담았다. 이런 통쾌한 설정 때문에 1,000만이 넘는 관객들이 코로나의 해방감을 이 영화로 표출했다.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범죄도시3>는 2편의 구성을 그대로 따라간다. 마석도 형사 특유의 호감형 액션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통쾌함이 영화 전반에 가득하다. 전편보다 더 많아진 액션과 유머가 더 가벼운 오락영화로서 훌륭하게 쓰이고 있다. 이야기의 구성은 단순해졌지만 전편의 장점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또 한 번 관객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첫 주 개봉 이후 500만 명 가까운 관객들이 마석도 형사의 활약을 지켜봤다.
<범죄도시> 시리즈에 등장하는 빌런은 강력한 악으로 등장한다. 1편의 장첸은 모두를 다 씹어먹을 것 같은 극악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장첸의 존재감은 시리즈 전반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2편의 강해상(손석구)도 꽤 강력한 빌런이었다. 주로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베트남이든 한국이든 종횡무진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가며 모든 사람들을 핏조각으로 만드는 인물이었다. <범죄도시3>에 등장하는 빌런은 두 명이다. 주성철(이준혁)과 리키(아오키 무네타카)가 한국 들어온 마약 사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 두 인물 모두 꽤 강력해 보이지만 전편들에 등장했던 빌런들에 비해서 무게감은 다소 떨어진다.
새롭게 등장하는 두 명의 빌런
<범죄도시> 시리즈에 등장하는 빌런은 온전한 악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빌런이 가진 이야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1편과 2편의 빌런인 장첸과 강해상은 그들이 벌이는 일을 벌이는 방법과 이유에 대한 서사가 조금은 있었다면, 3편에 등장하는 두 빌런인 주성철과 리키에게는 그런 서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빌런들이 뭘 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그렇게 잔인하게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영화 속에서는 알기가 어렵다. 그저 돈 때문이라는 원초적인 이유 외에는 다른 서사가 없어 그들이 등장할 때 느껴지는 공포심은 전편에 비해 줄었다.
이번 세 번째 시리즈에서 더 신경 쓴 건, 마석도 형사의 주먹으로 보여지는 타격감이다.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마형사가 범죄자들을 때리는 소리는 더 둔탁해졌다. 천만을 넘은 2편의 성공요인이었던 통쾌한 타격감을 더 강하게 하고 유머를 더 추가함으로써 좀 더 가볍게 마형사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게 구성하였다. 그러니까 성공한 요인에 대한 분석을 한 뒤, 그 성공요인에 영향을 준 강점을 더 극대화시킨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적 완성도 측면에서 꽤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이 선택은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강력한 호감형 캐릭터인 마석도 형사라는 캐릭터가 이 영화의 약점인 빈약한 서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만든다. 이는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가진 호감도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배우와 캐릭터의 호감은 앞으로 8편까지 기획된 <범죄도시> 시리즈가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을 만한 동력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큰 강점 아래에서 부족한 서사를 어떤 식으로 보강하고 변주하느냐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범죄들이 존재한다. 그 많은 범죄를 1차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건 일선의 경찰들이다. 경찰들이 실제로 겪은 여러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나씩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는 이 <범죄도시> 시리즈는 점점 빈약해지는 서사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호응을 불러오고 있다. 볼만한 한국영화가 별로 없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분노의 질주>나 <인어공주> 같은 큰 규모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개봉한 가운데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영화 <범죄도시3>가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잘 담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여전히 미해결 되고 있는 여러 범죄들 그리고 솜방망이 판결 등 통쾌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영화 속에서나마 통쾌한 범죄의 해결을 보고 싶어 하게 만들고 있다.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가 계속 되어야 하는 이유
<범죄도시> 시리즈는 아주 호감형 캐릭터인 마석도 형사의 무게감이 크다. 여기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빌런이 등장하는 것이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성공을 좌우할 것이다. 이어지는 시리즈마다 빌런의 양을 늘리기보다는 하나의 빌런을 두고 좀 더 탄탄한 서사를 만들어 그 무게감을 늘린다면 꽤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시리즈가 될 것 같다. 내년에 개봉예정인 4편이 성공하고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영화에 등장했던 여러 빌런들이 한꺼번에 재등장하는 등의 이벤트성 시리즈도 기획해 볼 만하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강점을 비슷하게 반복하는 <범죄도시> 시리즈가 이어지는 것에 불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 만큼은 온갖 흉악범죄가 해결되고 통쾌하게 응징당하는 모습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게 되면 식상함이 늘어나긴 하겠지만, 한국에도 마석도 형사라는 영웅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리즈 영화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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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한 동물사전>사랑과 연대로 아웃사이더들을 치유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검은 괴생명체 옵스큐러스가 거리를 쑥대밭으로 만든 1926년 뉴욕. 미국 마법 의회 MACUSA의 피쿼리 대통령과 오러인 '퍼시발 그레이브스(콜린 파렐)'가 옵스큐러스를 추적하는 사이, 영국인 마법사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매인)'가 뉴욕에 도착한다. 자신이 마법의 가방 안에서 돌보던 천둥새를 본래 집에 풀어주기 위해 미국을 찾은 뉴트. 그러나 은행을 지나던 중 금은보화를 좋아하는 동물인 니플러가 가방을 탈출한다. 그 와중에 뉴트와 노마지 ‘제이콥(댄 포글러)’의 가방이 뒤바뀌면서 신비한 동물들이 대거 탈출하자 그들은 동물들을 찾기 위해 뉴욕 곳곳을 누비기 시작하고, 전직 오러 ‘티나(캐서린 워터스턴)’와 마법 의회 직원이자 자매인 ‘퀴니(앨리슨 수돌)'와 그들은 엮이게 된다. 한편, 옵스큐러스의 횡포가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마법 사회와 노마지 사회를 모두 혼란에 빠트리는 테러가 발생하고, 이방인인 뉴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 '크레덴스(에즈라 밀러)'와 함께 예기치 못한 혼란의 중심에 선다.
2016년에 개봉한 <신비한 동물사전>은 <해리 포터> 세계관 속 프리퀄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시리즈의 3편인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의 4월 개봉을 앞두고 재개봉했다. 개봉한 지 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신비한 동물사전>은 속편인 <그린델왈드의 범죄>가 혹평을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재평가되고 있으며,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조앤 롤링이 혐오 논란에 휩싸이면서 역설적으로 주목받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딱히 영웅이라 보기 힘든 아웃사이더들을 전면에 내세워서 <해리 포터> 시리즈로부터 이어지는 ‘사랑’이라는 주제 의식을 스크린 위에 인상적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비한 동물사전>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려면, <해리 포터> 시리즈를 되짚어보고 넘어가야만 한다. 이때 <해리 포터> 시리즈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 단어는 ‘사랑’이 될 것이다. 당장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힘을 아는 해리와 알지 못하는 볼드모트의 갈등이 시리즈의 중심에 있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시리즈 속 해리는 부모님과 선생님, 동료,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 덕분에 볼드모트의 위협으로부터 몇 번이고 생존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 반대 양상도 나타난다. 마지막 호그와트 전투에서 볼드모트의 저주가 호그와트를 지키려는 이들을 헤칠 수 없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해리가 자신을 보호해준 수많은 이들처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결과 모두에게 보호 마법을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볼드모트에게는 연인도, 친구도, 동료, 가족도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덤블도어와 해리의 계획과 선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의 영혼이 불구가 될 때까지 영혼을 잘라내는 어둠의 마법인 호크룩스를 연달아 만들면서 파멸을 자초했다. 그래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알버스 덤블도어는 사랑이 모든 마법 중에서 가장 강력하며 마법의 기초가 되는 근원적인 고대 마법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해리 포터>는 철저히 예수의 사랑과 희생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약의 알레고리로 무장한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신비한 동물사전>도 마찬가지다. <해리 포터>의 프리퀄 영화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녹여낸다. 그 중심에는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들, 뉴트 스캐맨더, 티나 골드스틴, 퀴니 골드스틴, 제이콥 코왈스키가 있다. 이들은 모두 '아웃사이더'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동물과의 소통이 더 편한 마법사인 뉴트는 대인관계에 굉장히 서투르다. 티 나는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국 마법 의회에서 배척받는 인물이다. 그녀의 여동생인 퀴니는 선천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지닌 강력한 레질리먼스라서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미움을 산다. 제이콥 또한 변화한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전용사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 네 아웃사이더의 선택을 통해 사랑이라는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 옵스큐러스를 둘러싼 혼란과 뉴트의 가방에서 튀어나온 신비한 동물들로 인해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관계였던 네 주인공. 그들은 뉴트를 돕는 일련의 여정을 통해 우정과 로맨스를 쌓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가면서 서로에게 필요했던 위로를 얻는다. 퀴니는 뉴트에게 마음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주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그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티나와 뉴트는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뉴트는 빵집을 차리려는 제이콥의 꿈을 이루어 줄
지렛대를 놓아준다. 또 제이콥은 늘 외롭게 살아왔던 퀴니에게 따뜻함을 선사한다. 이렇게 영화는 소외받는 이들이 서로 어떻게 힘이 되어주고 치유해 줄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네 아웃사이더의 연대는 그 안에 속하지 못하는 다른 아웃사이더들의 존재 덕분에 더욱 강한 인상을 남기는 듯 보인다. 크레덴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머니라고 생각한 사람에게 학대당한다. 그가 조력자이자 구원자로 믿었던 그레이브스는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크레덴스를 가차 없이 버린다. 이렇게 마법사 사회와 머글(노마지) 사회로부터 모두 버림받은 존재인 그는 네 주인공과 달리 자신을 보듬어줄 공동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끝내 혼자 남는다. 이러한 대조는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이들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에 더해 영화의 최종 흑막인 '그린델왈드(조니 뎁)' 역시 아웃사이더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아웃사이더라는 개념은 개인의 주관적 인식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이 공동체와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소외당한다는 서사를 가진다면 누구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여길 수 있다. 이는 그린델왈드가 마법사 사회를 향해 자행한 자신의 테러를 합리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마법사들의 존재를 비밀에 부치는 법률을 두고 “이 법은 대체 누굴 위한 거지? 우리? 아니면 저들? 난 더 이상 이 법을 따르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마법사들이야 말로 마법사가 아닌 노마지(머글)에 의해 차별과 공격을 당하고 있으니 자신도 아웃사이더이고, 따라서 그들에게 반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에게 피해자 서사를 부여하고, 실재하든 아니든 외부의 적을 가정하여 공격성을 표출하는 것은 그린델왈드의 모티브인 히틀러와 나치의 서사임이 분명해 보인다. 동시에 혐오와 증오가 점점 더 중요한 정치적 개념으로 떠오르는 현대 사회에서 경계해야 할 서사이기도 하다. 즉, <신비한 동물사전>은 아웃사이더라는 틀을 깨고 나와 다른 이들과 공존할 것인지, 아니면 그 틀 안에 갇혀서 반목할 것인지 그 선택에 대해 묻는 영화인 것이다. 이는 2020년에 트랜스젠더 혐오 논란에 휩싸였고, 그 결과 해리포터 20주년 다큐멘터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원작자 조앤 롤링의 태도가 더욱 실망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신비한 동물사전>은 사랑, 구체적으로는 아웃사이더들의 연대라는 테마를 인간 사이에서만 국한시키지는 않는다. 덕분에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의식은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 중심에는 신비한 동물들이 위치한다. 본작에서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살짝 모습을 비추고 존재를 암시했던 여러 동물들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니플러, 스노잉 이블, 보우트러클과 천둥새 등이 뉴트와 맺는 유대 관계는 마법사와 노마지(머글) 간의 갈등과 함께 영화의 두 축을 나눠 맡는다.
뉴트는 각 개체에 알맞은 소통 방식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각 동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동물들을 자신의 소유가 아닌 동등한 생명체로써 존중할 수 있고, 그들이 없어졌을 때도 더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신속히 되찾을 수 있었다. 역으로 보면, 뉴트가 신비한 동물들을 자신과 동등한 개체로 대했기에 그들도 뉴트가 필요로 할 때마다 도움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옵스큐러스와 그린델왈드가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신비한 동물들도 자연스레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비한 동물사전>은 주류 마법사 사회에서 배제당한 아웃사이더뿐만 아니라, 마법사와 동물들 간의 유대감에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며 그들이 함께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고서 남녀, 부모와 자식 간의 개인적 사랑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사회적 차원의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비한 동물사전>은 거대한 상업 영화이자 판타지 영화이기 이전에 왜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이가 없는 그런 공동체가 필요한지, 왜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한지를 자연스럽게 환기하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신비한 동물사전>에는 아쉬움도 적지 않다. 뜻깊은 주제와는 별개로 장단점이 뚜렷한 스토리텔링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불사조 기사단>부터 계속해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메가폰을 잡고 있는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옵스큐러스의 정체와 관련된 맥거핀을 중요한 영화적 장치로 활용한다. 이는 <쿠쿠스 콜링>이라는 추리소설을 집필하기도 한 조앤 롤링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실제로 이 맥거핀은 극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영화의 리듬감을 조절하며 서로 다른 두 개의 플롯을 연결한다. 크레덴스가 등장하는 스릴러 내지는 미스터리 호러 장르와 뉴트가 등장하는 어드벤처 장르를 오가며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 맥거핀은 192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어우러지면서 호그와트를 배경으로 한 <해리 포터>의 밝고 동화적인 분위기가 아닌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만의 어둡고 중후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도 성공한다.
그러나 맥거핀이 주는 반전을 맛보기 전까지 과정이 다소 늘어지는 점은 명백한 단점이다. 주요 인물들과 신비한 동물들을 소개하고 <해리 포터> 시리즈와의 연결점을 소개하는 단계에서 딱히 필요치 않은 장면이 끼어들어 극의 진행을 방해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는 전체적으로는 실보다는 득이 많았기 때문에, 기존 시리즈와 차별점을 두기 위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했던 연출과 편집 상의 도전처럼 보이기는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여러 측면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구축해 관객들을 만족시킨 <신비한 동물사전>은 몇 가지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성공적인 시리즈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사랑과 연대로 분노와 혐오를 극복하려는 아웃사이더들의 안정적인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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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렌치 디스패치 (The French Dispatch, 2021)
* 본 리뷰는 <프렌치 디스패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렌치 디스패치 (The French Dispatch, 2021)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틸다 스윈튼, 프랜시스 맥도맨드, 빌 머레이, 제프리 라이트, 오언 윌슨, 레아 세이두, 티모시 샬라메, 베니시오 델 토르, 스티브 박, 마티유 아밀릭 등
장르: 드라마, 코미디, 옴니버스
러닝타임: 108분
개봉일: 2021.11.18
프렌치 디스패치의 마지막 호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가상 동시 '블라제'의 다양한 희로애락을 담으며 유통 중인 미국의 주간지 <프렌치 디스패치>. 수십 년간 발행인을 맡아온 편집장 '아서 하워치 주니어(빌 머레이)'가 어느 날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면서, 동시에 그의 잡지도 폐간된다. 그가 남긴 유언 그대로. 따라서 <프렌치 디스패치>에 헌신해온 위대한 저널리스트 4인은 편집장과 잡지의 마지막을 애도하는 차원에서 특종 기사들을 써내려간 후 잡지의 마지막 호를 완성한다. 블라제 거리의 과거와 현재를 전하는 '새저랙(오언 윌슨)', 교도소의 미치광이 예술가의 일생을 조명한 '베렌슨(틸다 스윈튼)', '68 학생운동'을 기사로 다룬 '크레맨츠(프랜시스 맥도맨드)', 경찰청장 아들의 납치사건에 함께 휘말렸던 '로벅 라이트(제프리 라이트)'까지. 그렇게 <프첸치 디스패치>의 마지막 호가 완성된다.
잡지의 영상화, 집요한 연출로 세공
'웨스 앤더슨'의 발칙한 상상력과 집요한 연출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정점에 달했다고 느꼈던 그의 작법은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도 흔들림이 전혀 없다. 동화 같은 파스텔 톤 색감, 누군가 쫓아오듯 빠르게 쏟아대는 많은 양의 대사들, 대칭·수직·수평에 대한 집념이 만들어낸 구도의 안정감 같은 감독의 대표적 특징은 이번 작품에서도 강하게 존재감을 뽐낸다.
'웨스 앤더슨' 감독을 대표하는 미장센 외에도 '잡지'라는 매체를 담고자 한 영화의 본질에 충실한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각 저널리스트의 섹션을 넘길 때마다 마치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듯 인쇄물 형태의 레이아웃을 화면에 구현하여 '잡지의 영상화'를 톡톡히 실현한다. 특히 '라이트' 기자의 섹션에서 다룬 애니메이션 기법은 잡지 속에 코너로 있을 법한 코믹스 구간을 표현한 듯하다. 흑백과 컬러의 빈번한 전환은 색깔이 가진 매력을 극대화함으로써 특정 장면을 강조하는데 적절한 도구로 사용되며 각진 화면 분할은 마치 여러 칸으로 구성된 잡지의 한 페이지를 보는 느낌을 준다. 기존 작품들 이상으로 강해진 장면과 구도에 대한 그의 집착이 아기자기하고 발칙한 상상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저널리스트에게 바치는 러브레터
단순히 연출에만 공을 들인 영화는 아니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현재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는 '잡지'라는 언론 매체에 대한 과거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함으로써 세계 곳곳의 사건사고와 정보, 그리고 그 속에 내포된 의미를 전달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저널리스트들에게 헌사를 바친다. 실제로, 감독은 '뉴요커'라는 잡지의 애독자였고 해당 잡지에서 활동했던 기자들을 모델로 삼아 영화 속 캐릭터로 재해석했다.
감독은 이 작품을 '뉴요커'의 저널리스트들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라 칭했다. 이 얼마나 로맨틱한 표현인가. 그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세계를 누비며 열정적인 취재를 하는 것은 물론 범죄 사건에 얽히더라도 목숨을 걸고 특종을 건져오는 기자들의 전문성을 높이 샀다. 어느덧 잡지와 신문 같은 정식 언론 매체들보다는 SNS에 떠도는 스트레이트 뉴스와 유머를 위한 짧은 문구들만을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시대가 오고 말았지만, 과거 수십 페이지의 지면이 사진과 글들로 꽉 채워진 잡지를 보며 행복을 느꼈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그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써 <프렌치 디스패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초호화 캐스팅, 적은 분량에도 존재감甲
수많은 명배우들을 사단으로 데리고 있는 '웨스 앤더슨' 감독답게 <프렌치 디스패치>에도 절륜한 연기력을 가진 명배우부터 핫한 청춘 스타까지 수많은 배우들이 주조연으로 총출동했다. '웨스 앤더슨'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빌 머레이'와 '오언 윌슨'부터 '틸다 스윈튼', '에드워드 노튼', '애드리언 브로디', '월럼 더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앤더슨 감독과 함께했으며 '프랜시스 맥도맨드', '티모시 샬라메', '베니시오 델 토르', '레아 세이두' 등의 배우들까지 더해져 캐스팅이 그 어떤 작품보다 화려하다. 이 중 대사가 단 몇 줄 뿐인 적은 배역을 맡은 배우도 있지만,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앤더슨 감독과 처음 호흡을 맞춘 '티모시 샬라메'와 '베니시오 델 토르'다.
'티모시 샬라메'는 연기천재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게 '제피렐리'라는 학생 운동가로 분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연기 톤을 잡았고, 오랜 경력을 가진 배우들 사이에서 특유의 산뜻함으로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다. 물론, 그의 퇴폐미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파리'라는 도시와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인물은 '티모시 샬라메'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속성이며 그와 호흡을 맞춘 '프랜시스 맥도맨드', '리나 쿠드리'와의 케미스트리 역시 빛난다. 그리고 대사는 많지 않지만 묵직한 카리스마와 표정 연기로 광기의 예술가를 연기한 '베니시오 델 토르'는 대단한 흡입력으로 관객들을 해당 에피소드에 매료시킨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레아 세이두'와의 독특한 로맨스도 의외의 매력을 일으킨다.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내에 열 명이상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다보니 각 배우에게 할당된 시간은 많지 않다. 따라서 배우가 가진 역량을 절반도 채 보여주지 못하지만, 마치 잡지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스타들의 이미지를 감상하는 듯 친숙한 배우들의 등장을 통해 반가움을 느끼게 해준다. '웨스 앤더슨'의 작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배우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겠는가.
감독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
<프렌치 디스패치> 속 편집장 '아서 하위치 주니어'와 영화의 감독 '웨스 앤더슨'은 어떤 면에서 굉장히 닮아 있는 존재다. 이 두 사람은 분명 보통의 편집장 혹은 감독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방식을 고수한다. 이는 효율성과 상업성을 중시하는 통념과는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는 면에서 확고한 자기세계를 가진 아티스트들의 고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앤더슨 감독은 영화 속 편집장에게 자신을 투영시켜 복잡하면서도 정교함을 가진 자신만의 제작방식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만족을 드러낸다. 이러한 감독의 확신,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굳건한 지지가 있기 때문에 촘촘하게 높이 쌓아올린 그의 탑은 흔들림 없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 비록 <프렌치 디스패치>는 편집장의 죽음으로 인해 막을 내렸지만, 앤더슨의 작품세계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몇십년간 지속되었던 주간지의 발행처럼 앤더슨의 미학적 세계관은 계속해서 펼쳐질 것이다. 감독의 소신이 예술에 삼켜지지 않고 체계적인 구조를 갖춘 틀로써 오랜 시간동안 순수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것은, 흔히 말해 예술병에 걸렸다는 평을 받는 감독들과 '웨스 앤더슨' 감독이 분명히 다르다는 지점이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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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시를 쓰는 김종석씨와 그림을 잘 그리는 김춘나씨가 보여주는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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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나씨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고 김종석씨는 시를 멋지게 잘 짓는다. 이 두 부부는 예술을 본업으로 하지 않는 자칭 아마추어 예술가이다. 김춘나씨는 자연의 풍경을 본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고 취미로 배우는 서예 실력도 상당하다. 김종석씨는 경비원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시로 쓰는데 그가 쓴 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똑같은 종이책에 적는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부부는 각자 자신의 별명이 있다. 김춘나씨는 별명은 작은새이고 김종석씨의 별명은 돼지씨이다. 고단한 삶을 살아온 김춘나씨와 슈퍼를 차렸지만 생업이 잘 안됐던 김종석씨는 자신들이 창작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하기로 한다. 딸인 김새봄씨는 자신의 부모인 김춘나,김종석씨에게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두 부부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삶의 고단함을 그림으로 표현한 김춘나씨와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시로 쓴 김종석씨에게 진짜 예술가는 무엇이냐고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할까?
두 부부의 삶의 흔적이 담긴 작품들은 각각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세월이 지나도 작품은 영원히!
김춘나씨는 어렸을 때부터 장래희망이 회사원이었고 일찍 취업을 해서인지 대학교에 가거나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다 해보라는 그녀의 말은 지금의 청춘들에게도 후회하지 않으려면 도전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해준다. 또한 김종석씨는 슈퍼를 차렸으나 집주인이 나가라는 핀잔이 계속되면서 자신의 생업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로 그는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힘든 과거를 통해 만든 시가 많기에 그중에 아주 잘 쓴 게 많다고 딸인 김새봄씨는 칭찬한다. 그동안 세월이 흘러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김춘나씨의 그림과 김종석씨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들로 전시회에 전시된다. 이들에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무엇이냐고 딸인 김새봄씨가 묻자 자신들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는 딱히 구분이 없다고 한다. 과연 프로와 아마추어는 어떤 것이 다를까? 이 영화는 작은새(김춘나)와 돼지씨(김종석)의 이야기이다.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하기까지 많은 세월의 노고를 견딘 그들의 작품은 프로와 견주어도 아깝지 않다.
프로 되기가 쉽지 않지만 아마추어라도 프로만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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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흥신소] 초강력 미세먼지의 습격 '인 더 더스트'
흥해라 이 영화
인 더 더스트
- 지진 발생 후 미세먼지가 도심을 덮친 프랑스 파리 산소 마스크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데...
'엑시트' 그 이전 이미 도심을 덮친 죽음의 미세먼지가 있었다... 극현실주의 재난무비 이 영화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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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4차 예고편 - 끝의 시작 편
“시작은 막차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친 스물한 살 대학생 ’무기’와 ‘키누’는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좋아하는 책부터 영화, 신고 있는 신발까지 모든 게 꼭 닮은 두 사람은
수줍은 고백과 함께 연애를 시작하고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을 쌓아간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 유지야!”
하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준비에 나선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 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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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클리포드 더 빅 레드 독> 홀리데이 예고편
클리포드와 함께하는 아주 특별한 홀리데이! 추운 겨울에 딱인 따뜻한 스토리.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왕 귀요미 클리포드와 지금부터 마법 같은 모험을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