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혁2023-05-29 10:14:44
[극장에서 본] H&M이었다가 발렌시아가
<슬픔의 삼각형,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모든 상들을 싹쓸어 갔지만, 후보군에 있었던 이름들도 쟁쟁했던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 감독 - 각본" 등 3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영화 <슬픔의 삼각형>.
굿즈의 출시 유무로 해당 영화의 기대치를 반영할 수는 없지만, 가장 인기가 좋은 "메가박스 오리지널 티켓"으로 나오기도 했다. - 무려, 경쟁작은 <분노의 질주: 라이드 오어 다이>였다.
영화는 "칼 - 야야"모델 커플을 비롯해 사회 주요 각개 인사들이 승선한 호화 크루즈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발생하면서 상황 또한 예상한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가는데...
1. 팔은 휘는데, 공은 뻗어나간다.
제목만 보더라도,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뭔가 있어 보인다.
여기에 2022년 "칸 영화제"에서 최고 부문의 수상 "황금종려상"까지 받았으니 어려움을 나타내는 척도 "예술성"이 한없이 높아만 보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본 작품 <슬픔의 삼각형>은 이야기를 이해하는 테에 큰 어려움이 있는 영화가 아니지만, 직관적인 방향성은 도리어, 관객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영화는 총 3개의 챕터로 구분 짓는데, 첫 번째부터 남성 모델과 여성 모델의 임금 차이와 남성 모델들이 성범죄에 노출된 환경을 언급하며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을 뒤엎는다.
그런 점에서 "칼 - 야야"의 식당 말다툼 장면은 상당히, 흥미롭다.
가볍게 본다면, 남자와 여자의 사랑싸움으로 볼 수 있겠지만 "돈 - 평등"이라는 바라보는 입장 차이는 뒤바뀐 성 역할을 넌지시 제시한다.
결국, 이런 관계는 2번째 챕터에서 한껏 더 노골적으로 비치지만 단연 재밌는 이야기는 마지막 3번째이다.
"메슬로우의 욕구 단계"를 보면, 가장 아래에 있는 "생리적인 욕구"를 시작해 가장 맨 위에 있는 "자아실현"까지 피라미드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 학자에 따라 순서대로 실현해야만 하는 것과 꼭 이루지 않더라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음으로 나눠져 있다.
그런 점에서 앞선 1, 2번째 이야기는 "자아실현"과 같은 높은 욕구의 이야기였다면, 마지막 3번째는 가장 아래에 깔려있는 "안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2.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이렇게만 본다면, "안전"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가 갖춰야만 '계급'이 발생하는 이론에만 기댄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영화는 좀 더 깊이 파고든다.
역사에서 "계급"이 발생한 것에는 농업이 발전하며, "잉여 생산물"의 발생으로 생겨난 규율 중 하나이다.
앞서 1번째와 2번째에선 "여성 - 남성 모델", 그리고 승선한 이들의 돈이 "잉여 생산물"이었듯이 마지막 3번째에서의 "잉여 생산물"은 어디에 해당될까?
앞서 말한 "메슬로우의 욕구 단계"에서 "안전"을 포함한 생리적 욕구는 가장 아래에 위치하는데, 이는 "피라미드"로 표현되는 계급도에서 "노동자"로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위로 갈수록 권력자들은 소수로 나타나는데 3번째 이야기는 당연하게 이를 역전시켜 전개한다.
이처럼 영화는 "잉여 생산물"의 발생으로 계급이 만들어졌다 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상황을 봐야 한다.
마치, 선거기간에만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의원들의 상황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 봉착하고 있을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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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2023>
<더 스퀘어>에 이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신작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왔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포스터처럼 이런저런 괴소문이 자자한 영화 중 하나인데, 오늘 리뷰에서는 영화는 어떤지부터 시작해서 영화가 담고 있는 것들과, 또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볼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을 다뤄볼 예정입니다.
우선 전작인 <더 스퀘어>가 예술가의 위선과 특권의식을 다뤘다면 <슬픔의 삼각형>은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젠더와 계층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의 삼각형은 마치 계급을 나타날 때 삼각형을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는 내내 이것을 전복시키면서 대담하고 강렬한 풍자를 이어갑니다. '온갖 위선과 무지로 뒤덮인 상류층이 계급이 전복된 사회가 찾아온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독특하고도 과감하게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더불어서 영화는 마르크스 등의 어록을 언급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을 직접적으로 이용해서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를 탁월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매우 심오하다거나 이해하기 어려워서 재미없지 않습니다. 저도 영화 내내 몇 번이나 웃었던 것 같은데, 그 정도로 굉장히 독특하고 흥미로워서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영화 러닝타임이 세 개의 챕터로 나누어진 2시간 반으로 꽤나 긴 편인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시사회에서도 정말 많은 분들이 웃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는데, 영화 중반부에 그 유명한 구토 장면이 나옵니다. 이 구토는 상류층의 위선을 가장 강렬하게 풍자하는 요소로 영화적으로 굉장히 중요하지만 비위가 약하신 분들이라면 보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저도 반쯤 스크린을 바라보지 못한 것 같은데, 빈속에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 장면만 주의하신다면 영화 전체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보실 수 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훌륭합니다. 우디 해럴슨부터 시작해 해리스 디킨슨, 샬비 딘 모두 훌륭하지만 영화 3장부터 등장하는 돌리 데 레온의 연기가 특히나 인상 깊습니다. 스포일러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영화가 어떠한 지점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말로는 형용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데, 그 장면에서 이어지는 엔딩은 강렬합니다.
영화가 함유하고 있는 주제가 최근 많은 영화들에서 다뤄지고 있기도 하고, 본 영화에서 어떠한 독특한 지점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리 색다르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많이 다뤄진 것뿐이지 여전히 유효한 주제기 때문에 독창적인 변주만 있다면 저는 만족이네요. 감독의 전작인 <더 스퀘어>를 보고 가는 걸 추천드립니다. 루벤 외스틀룬드 특유의 유머 스타일이 있는데, 그걸 알고 보면 더 재밌어요.
이 영화도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작인 <더 스퀘어>보다 좋았네요. 시사회에서 나눠준 굿즈도 전부 마음에 들었고요. ㅎ
+) 샬비 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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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군 | 박훈정의 필모그래피가 여기서 모인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정원 요원 '최 국장'(김선호)의 주도로 비밀리에 진행하던 폭군 프로젝트. 바이러스를 사람에게 주입해 초인을 만들려는 프로젝트가 미국 정보기관에 발각됐다. 이에 최 국장의 반대 파벌인 '사 국장'(김주헌)과 미 정보기관 담당자인 '폴'(김강우)은 폭군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남은 샘플을 미국 측에 넘기라고 압박한다.
이에 최 국장은 샘플을 빼돌리는 작전을 실행에 옮기지만, 작전에 참여한 킬러 '채자경'(조윤수)이 샘플을 빼돌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국정원과 폴이 눈에 불을 켜고 샘플을 찾아 나선 가운데 은퇴한 요원 '임상'(차승원)도 최 국장의 지시를 받아 자경과 샘플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자경은 곧 죽을 위기에 처한다.
박훈정 필모의 두 핏줄
<신세계>와 <마녀> 시리즈. 감독 박훈정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두 작품 덕분에 박훈정 감독은 흔히 누아르 혹은 액션 전문 감독으로 여겨지기 쉽다. 개봉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팬들이 속편을 기다리는 <신세계>의 임팩트도 강할뿐더러, 근래 공개된 작품 모두 비슷한 결이니까.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낙원의 밤>, 작년 여름에 개봉한 <귀공자>까지 전부 누아르 작품이니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데 박훈정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대중에게 어필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이어지는 주제의식 혹은 메시지를 찾을 수 있기 때문. <대호>와 <브이아이피>가 대표적이다. 소재나 장르 면에서는 아무 공통점이 없지만, 세부적으로는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한국을 억압하는 외부의 적을 무찌르는 영화다. <대호>는 일제강점기의 일본군을, <브이아이피>는 21세기의 미국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디즈니+에서 공개된 박훈정 감독의 4부작 드라마 <폭군>은 흥미롭다. 두 갈래로 나뉘었던 그의 필모가 <마녀> 시리즈의 스핀오프에서 접점을 찾은 듯 보이기 때문. 그간 빛을 못 본 방계 작품의 메시지와 플롯을 직계라고 할 수 있는 <마녀> 시리즈의 세계관 속에서 절묘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여성 누아르라는 직계
<폭군>의 네 주인공이 얽힌 플롯을 보면 그 접점은 쉽게 드러난다. 우선 자경과 임상의 플롯은 <마녀> 시리즈와 직접 맞닿아 있다. 자경은 '연모용'(무진성)의 의뢰로 참여한 작전에서 작전 목표였던 폭군 프로젝트의 샘플을 몰래 빼돌린 킬러다. 임상은 폭군 프로그램의 비밀을 알게 된 이들을 상부의 지시대로 제거하는 요원이다. 곧 임상이 자경을 추적하는 이야기는 숨어 있거나 탈출한 초능력자를 쫓는 <마녀>의 플롯과 유사하다.
특히 이들이 주로 보여주는 액션 시퀀스는 이 작품이 <마녀>의 세계관임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임상과 자경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싸우는 장면을 보면 초능력만 없을 뿐 연출이나 카메라워크가 <마녀> 속 액션 시퀀스와 유사하다. 자경이 폭군의 샘플을 자신에게 주사한 후 초인으로 거듭나 자유롭게 괴력을 자유롭게 활용할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또 두 캐릭터 역시 박훈정 감독이 그간 자신의 누아르 영화에서 보여준 캐릭터와 꼭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상은 <낙원의 밤>에 등장한 '마 이사'와 유사하다. 배우도 같고, 과할 정도로 정중하지만 폭력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 꼭 닮았다. 다만 퇴장이 다소 부자연스럽고 임팩트가 덜했던 마 이사와 달리 임상은 마지막까지 캐릭터성을 유지한 채 의미심장하게 퇴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 덕분에 다음 이야기도 기대할만하다.
이에 더해 누아르 영화에 어울리는 여성 캐릭터를 유달리 잘 만드는 박훈정 감독의 솜씨는 여전하다. <마녀> 1편과 2편의 '구자윤'(김다미)과 '소녀'(신시아), <낙원의 밤> 속 '재연'(전여빈)처럼 자경이라는 인물도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쌍둥이 오빠와 의식을 공유하는 이중인격 설정은 자칫 유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경, 쌍둥이 오빠, 폭군 셋이 자아를 공유하는 장면의 복선으로 작용하면서 큰 임팩트를 남겼다.
민족주의라는 방계
반면에 자경과 임상의 충돌을 초래한 최 국장과 폴의 갈등은 첩보물에 가깝다. 특히 그들이 충돌하는 이유가 흥미롭다. 최 국장은 민족주의자다. 그가 속한 국정원 파벌은 미국이 한국을 억압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핵무기나 IBCM을 개발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폭군 프로그램 역시 그 일환이었다. 자연히 반대 파벌인 사 국장과 폴은 최 국장의 계획을 한미동맹과 미국의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해 막고자 한다.
그런데 이 구도는 <브이아이피>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다. 고위층 탈북자인 '김광일'(이종석)의 범죄를 두고 경찰, 국정원, CIA가 충돌한다. '채이도'(김명민)는 한국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니 경찰이 수사하겠다고 주장한다. '박재혁'(장동건)은 김광일의 범죄가 외교 문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국정원에서 조사하겠다고 맞선다. CIA의 '폴 그레이'(피터 스토메어)는 국정원의 역량을 의심하면서 김광일의 신병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이때 김광일을 폭군 프로젝트로, 채이도를 최 국장으로, 박재혁을 사 국장으로, 폴 그레이를 폴로 바꾸면 곧 <폭군> 플롯이다. 또 어떻게든 폭군 프로젝트를 유지하려는 최 국장의 결연한 의지, 폴에게 역공을 가하는 전개도 박훈정 감독 전작과의 공통점이다. <대호>에서는 호랑이를 잡으려던 일본군에게, <브이아이피>에서는 김광일을 추적하던 CIA에게 조선의 사냥꾼과 국정원이 각각 선수를 쳐서 물 먹이는 것과 같은 전개다.
비록 대상이 되는 국가나 기관은 다르지만, 한국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주제나 코드는 일관되게 투영되는 셈이다. 단지 <마녀> 세계관에서 그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게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시도는 꽤 효과적으로 몰입도를 높였다고 볼 수 있다. 장르적으로는 눈을 즐겁게 하고, 시의적으로는 한국의 핵무장 이슈와도 맞물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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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에는 의미가 있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폭군>은 박훈정 감독의 음과 양이 한 데 모여 조화를 이룬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다. 만남 자체가 흥미롭지만, 만남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자가복제 같은 지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전반적인 스토리가 전작의 종합에 가깝고, 캐릭터 역시 전작에 등장한 인물들의 면면을 고스란히 본뜬 측면이 숨겨지지 않는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엿보인다. 영화가 아닌 시리즈로 공개한 게 대표적이다. <폭군>은 본래 극장에서 장편영화로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후반 작업을 거치면서 디즈니+에서 4부작 시리즈로 공개됐다. 그 덕분에 주연 4인방이 한 데 모이는 4화를 제외한 앞선 3개의 에피소드는 등장인물 소개 위주로 극이 진행된다. 이는 익숙함을 풍성한 디테일로 상쇄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도는 되려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는다. 각 캐릭터의 특성과 매력은 확실하다. 박훈정 감독 작품 속 일부 캐릭터는 동기나 서사가 부자연스럽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폭군>의 주인공들은 예외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영화였다면 긴박했을 각 인물의 서사가 늘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 폭군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도 후반부에 가서야 나오기 때문에 다소 불친절한 것도 사실이다.
작가적 관점에서 <폭군>은 퍽 흥미롭다. <폭군>은 대중적으로 소구력이 없었던 <대호>와 <브이아이피>의 주제의식이나 플롯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마녀> 세계관과 결합시킨 결과물이다. 즉, 박훈정 감독이 잘하던 것과 그가 보여주고 싶던 것 사이에서 드디어 찾은 균형점인 셈이다.
그와 동시에 개선점도 확인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반복되는 플롯과 익숙한 캐릭터라는 틀을 깰 때 박훈정 감독의 세계관은 더 풍성해질테니. 희망이 없지는 않다. 박훈정 감독은 <브이아이피>에서 지나치게 도구적이고 잔인하다고 비판받은 여성 캐릭터 활용법을 <마녀>부터는 장점으로 바꿔 놓은 전적이 있기 때문. 향후 이어질 <폭군> 시리즈도, 더 나아가 <마녀> 세계관에 대한 기대를 품기에 충분한 이유다.
Acceptable 무난함
박훈정의 자가발전 혹은 자가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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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새
벌새
1994년에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다행히 2년 전, 산본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입주한 것이 30년 동안 살아온 보람이자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산동네 빈민촌에서 월세, 전세를 전전하다 어렵게 집을 마련했으니 큰 짐은 덜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랜서 활동을 하며 출판사,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이러저러한 책을 만들고 있었는데, 수입은 적었고, 그나마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수입으로 생활은 어려웠다. 마침 이 무렵 써 놓은 일기가 있어서 찾아봤더니, 이 영화에 나오는 사건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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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18일 토요일
아침에 월드컵 축구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가 있었다. 2대 2로 비긴 경기. 나라가 온통 월드컵 열풍에 휩싸여 있다.
1994년 7월 9일 토요일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12월 19일 월요일
연말이 되면서 나날이 바쁘기만 했다. 주위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만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에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를 보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숫한 상념들이 나의 감정을 흔들었다. 이제 일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연속되고 있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짧은 글이라도 내 마음을 정리하고 깊은 생각 속에서 나온 글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기능적인 글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저기 걸리고 널린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은 때로 위안을 얻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제 서서히 1994년을 정리할 때도 되었다. 꼭 정리를 하지 않아도 힘겹게 달려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숨을 고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신문의 활자를 키운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있다. 가끔 그 속으로 나타나는 햇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대형 사건과 사고가 줄을 이어 터지고 김영삼 정권은 무능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나라의 정치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만큼 저질이다.
사무실을 얻기는 8월부터 얻었지만 출근은 9월부터 했다. 사무실 출근이 하루를 규칙성있게 하는 면이 있어서 좋다. 매달 지불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지만 그것은 일을 하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사무실 유지는 그런대로 잘 되고 있는 편이다. 함께 지내고 있는 이00 씨와 00희 씨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조금 성격의 차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약간의 양보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많고 참여했다 떨어져나오는 모임도 수없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반복은 줄어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른글을 정리하고 새해에는 사람을 정리하고 맺는 관계를 보다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정리를 잘 하는 편이지만 조금이라도 걸리고 널린 관계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힘들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나 지켜온 원칙이 '양보다 질'이었다. 친구는 적게 사귀되 깊이 사귄다. 무릇 사람의 관계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의 관계도 잘 정리를 해야 하겠지만 일과 관계된 것도 잘 정리를 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쓰는 실용서 단행본 작업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빨리 소설로 돌아서야 한다. 결국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언제나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것은 마음뿐일까.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열악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마음 속에 생각하고 떠오르는 것들이 거의 모두 작고,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내용들 뿐이다. 출퇴근을 하면서 보게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행동이 나의 감정에 분노와 짜증을 일으킨다.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교양이 없고 무식하며 질이 낮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런 주장으로 전당포 노파와 딸을 도끼로 살해한다.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 인간은 교양이 있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으로 갈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론적으로 이미 나와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는 경제적 토대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질적인 수준은 결국 경제문제에 달려있다고 본다. 계급이 없고 착취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교양있게 살아갈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주장을 믿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저열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례하지는 않다. 다만 사회의 제도, 교육, 빈부의 격차, 권력의 억압, 착취, 계급제도 등 각가지 모순들이 인간들을 기형으로 만들어 갈 뿐이다.
현상은 왜곡된 인간성의 발현일 뿐이다. 이기적인 인간, 조잡스러운 인간, 한심한 인간, 사악한 인간, 더러운 인간, 비참한 인간, 음흉한 인간, 불쌍한 인간, 교활한 인간 등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독버섯으로 키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조건 희생자인가.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품성은 어떤 사회에서든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 품성이란 결국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품성의 미덕은 분명 있다. 권력을 소수가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에 대항하는 주체는 결국 민중일 수 밖에 없고 그 민중은 권력자와 자본가를 대상으로 언제나 대립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민중의 단결되지 못한 현실을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를 만들고 서로 경쟁하도록 만든다. 산업예비군, 실업율, 대학의 경쟁, 학력중시, 심지어는 지방색까지 만들어서 가능하면 민중들의 단결이 안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구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극도의 이기주의가 번지는 것은 자본주의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경쟁을 최우선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권력자들은 민중의 삶을 피폐하고 메마르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이러한 제도는 국가의 경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50년대와 60년대는 국가 전체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여 모든 노력을 경제부흥에 쏟았다. 경제발전 속에서 최소한의 인권이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이 단지 이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80년대 이후, 경제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자본가와 권력자는 민중을 계속 파편화하고 우매하게 묶어두기 위해 '성'과 '스포츠'를 도입했다. 초기의 권력도 파쇼이고 80년대의 권력도 파쇼임에는 갖지만 경제의 발전정도에 따라 민중을 분열시키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노동악법과 국가보안법 등 탄압과 착취를 강제하는 채찍은 언제나 동일했다.
'개발독재'로 불려진 70년대 파쇼의 시절을 지나 대외 수출이 호황을 맞이하던 80년대와 90년까지 경제의 토대는 성장했다. 대중이 누리는 물질의 풍요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이었고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한 증거이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민중의 기본 삶은 조금 나아졌지만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소외는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이 나아진 만큼 씀씀이도 커지고 경제의 개념이 소비 위주로 바뀌면서 생활 문화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일정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을 노동에 바쳐야 한다. 직장과 직위,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며 갑작스러운 변수, 이를테면 질병, 사고와 같은 변수가 생기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회의 복지제도가 기본으로 지원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는 분명한 일이다. 또한 일정한 수입은 소비문화를 따라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범죄의 유혹을 받고 있다. 공무원의 범죄가 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그래서 너무 당연한 것이다. 공무원 뿐 아니라 몫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이라면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한탕주의에 빠져든다. 마약의 밀매, 매춘, 인신매매, 성을 파는 모든 서비스업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격은 경제력으로 대체된다. 아파트 평수와 고급 승용차, 월 수입 등이 지위와 권위를 대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무차별하고 단순한 비교로 심한 박탈과 소외를 느낀다. 경쟁을 부추기고 인간성을 물질로 대신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하지 않고 평등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근본에서 잘못된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나와 우리 가족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무시되고 필요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가족 이기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든 가장 성공한 분열방법이다. 사회에 범죄가 극성이고 온갖 사고, 사건, 위험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가족끼리만 다정하고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경제단위의 중심이기도 하다. 부(물질)의 승계가 가부장제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자본가가 대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이런 경제단위는 소비문화의 주체이기도 하다. 가족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소비문화가 대중을 유혹하고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도록 만들고 있다. 가족(주로 가부장)은 고급 주택, 아파트를 구입하고 외제 승용차를 사고, 외제 의류를 철마다 사 입고, 고급 백화점에서 날마다 쇼핑을 하고 자녀를 외국에 유학시킨다. 한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보다 결국 자본가이겠지만 가부장의 존재가 가족을 대상으로 이러한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다른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없다. 엄격히 말하면 가족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최소한의 경제단위일 뿐이다. 가족은 부모와 피를 이어받은 자식으로 구성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혈연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는 단적인 몇 개의 예만 들어도 충분하다. 비록 자본가라 할지라도 그들이 풍요롭고 넉넉한 물질생활을 누리는 것이 가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 고유한 의미에서 혈연공동체나 평등한 관계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 아침이면 뿔뿔히 흩어져 공장이나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에 잠을 자기 위해 들어오는 가정을 어떻게 가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돈이 없어 생활이 궁핍하면 가족은 해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지만 가족의 모습 역시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가족의 문제는 가족 구성원의 성격, 이해관계, 희망, 욕심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자본주의 제도, 경쟁, 수입원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부모가 넉넉한 수입이 없다면 자녀는 제도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제도교육을 일정하게 받지 못하면 좋은 취직자리를 얻을 수 없으며 이것은 결국 수입의 한계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만 거의 모든 민중들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가난한 가족은 가난함때문에 가족이 갖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살며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 단칸방에서 서너 식구가 끼어 자야하는 주거생활이 그렇고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일상생활이 그렇다. 여기에 가족 구성원이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면 그 가족은 거의 궤멸에 이른다. 당장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치료비며 생활비 등 들어가야 할 돈은 평소보다 몇 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대책이 없다면 빚을 짊어져야 하고 이 빚은 그 가족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올가미가 된다.
가족이 단단히 결속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고 살아가야 할 일이 막막해지면 빠르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어느 사회에서도 빠르고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편법과 불법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 범죄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며 여성은 매춘을 한다. 3차 산업의 발달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서비스 산업은 성을 상품화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여기에 투여되는 여성의 인력은 언제나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유흥업이나 각종 서비스업에는 매매춘이 허용(?)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건전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게 된다. 여성의 경우 매매춘을 통해 인간성의 황폐화와 경제적 이익을 바꾸게 되고 남성은 극심한 노동이나 범죄의 방법을 찾게 된다. 가족은 결국 경제적인 이유로 흩어지게 되며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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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은희의 가족에게 변곡점이 된다. 은희 개인에게도 가족의 문제와 함께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은희를 둘러싼 세계는 무겁고 답답하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는 일하느라 바쁘고, 학교는 성적 위주로 학생을 평가하고, 어디 한 곳 편하게 마음을 내려 놓을 곳이 없다.
부모는 아들 대훈이 학교 전교회장을 하고, 서울대학교를 들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은희와 은희의 언니 수희에게는 살뜰하지 않다. 수희는 남자 친구와 어울리느라 학원에 가지 않고,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소리나 지른다.
가족이라고 해도 다섯 명 모두 자기 삶을 사느라 바쁘고, 함께 모이는 시간은 아침 밥먹을 때 잠깐이다. 은희가 '왜 우리 가족은 모래알 같을까'라고 묻는 마음은, 그 이유를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서글프다.
은희는 한문 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을 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오빠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대학을 다니던 은지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이 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학교가 재미있니, 성적은, 어느 대학 가야지, 같은 뻔하고 지겨운 질문이 아닌, 좋아하는 게 뭐지, 왜 좋아하지, 요즘 무슨 생각해, 같은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질문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른, 청소년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영지 선생만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은희가 놓여 있는 상황을 공감하고 있는 인물이다. 영지 선생은 서울대학교를 휴학한 상태인데, 그가 부른 노래, 그의 책장에 있던 책으로 보아 '운동권 학생'으로 보이고, 어쩌면 수배 당한 상태였을 수 있다.
은희의 부모는 90년대 한국 부모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아버지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고, 엄마는 가게 일과 집안 일을 하느라 남편, 아이는 물론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다. 언니는 학업보다 남자 친구 만나며 노는데 신경을 쓰고, 오빠는 부모의 기대로 심한 부담을 진 채 학교를 다닌다. 은희는 아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어린 영혼이지만,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는 관찰자 역할을 한다. 그의 세계는 아직 좁고, 부모, 학교, 학원 그리고 친구들이 세계의 전부인데, 은희가 세계를 깨고 나오게 되는 계기가 영지 선생의 죽음이다.
은희는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은희가 살고 있는 대치동은 지금이나 그때나 강남의 중심이고,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여서 은희는 가난한 집 아이였고, 공부도 탁월하게 잘 하지 못하는 아이라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다.
한국 자본주의 욕망이 응집된 강남에서 제한 없는 경쟁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으로 진입하려는 부모와 그 부모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학생들의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지만, 이런 지옥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영화에서 은희를 비롯해 왼손을 쓰는 인물이 여럿 있다. 주인공이 왼손을 쓰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왼손잡이는 소수라는 점에서, 이들이 이 사회의 소수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걸 드러낸다. 은희와 그의 가족은 강남에서 오히려 소수에 속하고, 은희는 학교에서 소수이며, 영지 선생도 한국사회에서 소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은희와 영지 선생이 여성이라는 점 또한 사회적 소수이자 약자라는 점에서 이들이 바라보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이렇게 영화는 1994년의 한국사회 속에서, 중학생 은희가 바라보는 세상과 만나는 사람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은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악한 사람은 없지만, 악한 행동을 하고, 선한 사람도 때론 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인간의 다면성은 의도가 필요 없는 삶 그 자체에서 나오는 모습이며, 은희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부장적이고 때로 폭력을 휘두르는 은희의 아버지도 은희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 은희를 때리던 오빠 대훈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수희를 보고 눈물을 터뜨린다. 이들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기득권을 공기처럼 가지고 살아가지만, 자신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와 본질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같은 해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이 한국사회의 계급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낸 영화라면, 이 영화는 그 폭력성을 내재한 채, 체제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중하층 가족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계급성'을 드러내는 장면은 두 장면이 나오는데, 떡집에서 강남 '사모님'이 은희 아버지가 만드는 떡이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에 반박했다는 은희 아버지의 말과, 은희가 남자 친구와 시완과 함께 있을 때, 시완의 엄마가 나타나 시완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시완의 아버지가 의사라는 사실은 딱 한 대사에서 나타나고, 그것이 부르주아와 중하층 상인의 가족을 가르는 선으로 드러난다.
어떻든, 은희의 가족은 '생존'한 가족이다. 수희가 성수대교 붕괴에서 살아온 것도 생존이지만, 강남에서 떡집을 하며 어렵게 세 명의 아이를 가르치는 부모의 열성 덕으로 은희, 수희, 대훈 모두 살아남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1995년에는 강남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한다. 성수대교 붕괴보다 이 사건은 은희에게 더욱 직접적 충격과 트라우마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강남에 살고 있고, 삼풍백화점에 갔을 확률이 높았을테니,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다.
더구나 은희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1997년 말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고, 수많은 사람이 파산하게 되는데, 이 가족이 과연 그때도 무사히 생존하게 될 지는 모를 일이다. 이렇게 1994년 이후, 한국, 특히 강남에 불어닥치는 사고와 불행으로 은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영화는 1994년, 은희의 수학여행에서 끝나지만, 영지 선생의 죽음으로 은희는 조금씩 변할 것으로 보인다. 평생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꺼지지 않는 불을 간직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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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도적인 긴장감의 서부극!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작은 긴장감이 늘 자리한다. 혼자 있는 시간만 있다면 그런 긴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같이 시간을 보낸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그리고 직장 동료와 보내는 시간 등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삶이라는 그림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런 상호작용의 시간 속에는 크고 작은 긴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긴장이 작으면 보통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지만 불편함이 커지면 큰 긴장이 따라오고 평상심을 잃게 만든다. 우리가 평소에 눈치 채지 못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긴장은 시종일관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삶에 영향을 준다.
다른 어떤 관계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런 긴장감이 일상에 배어들어있다. 부모와 만들어지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아이가 자라나는데 심리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가족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이벤트들도 각 가족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각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긴장의 정도도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생각하는 관계의 모습과 미래도 다르다. 그 긴장을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받을 것이고, 그것일 시답잖은 것으로 느끼면 무시하고 외면할 것이다. 각자가 느끼는 긴장감에 따라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나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각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영화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일상 속에 스며든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영화다. 1925년 미국 몬태나를 배경으로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고 있는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필 버뱅크(베네딕트 컴버비치)와 조지 버뱅크(제시 플레먼스)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영화 초반에 필과 조지가 일 때문에 로즈가 운영하는 숙박 업소에 방문하게 되면서 두 가족이 만나게 된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대할 때 만들어지는 그 긴장감은 영화의 끝까지 시선을 잡아놓는다.
이들이 만나는 모습을 통해 인물들의 성격을 알 수 있는다, 필은 호탕하고 조금은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다. 반면 그의 동생 조지는 좀 더 섬세하게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인물로 필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 받는 로즈에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인물이다. 그의 관심을 받는 로즈는 남편을 잃은 이후 아들과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숙박업과 식당을 운영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아들인 피터는 조화 만드는 것을 좋아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등 손으로 하는 세심한 작업들을 잘한다. 그래서 피터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리여리하고 감성적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 이 네 인물이 만나게 되고, 그중에서 조지와 로즈는 서로에게 끌리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데 어찌 보면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가족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영화가 좀 더 집중하는 건 각 인물들의 감정과 표정이다. 비록 로즈에게는 재혼이긴 하지만 조지의 관심을 받은 그는 결국 조지를 선택하면서 그의 가족 일원이 되는 선택을 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고 안정적인 일이 있었던 조지를 택한 로즈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조지의 형인 필의 시선은 무척 좋지 않다.
로즈와 피터가 필과 조지의 가족이 되는 과정을 간단히 보여주던 영화는 피터를 대학에 보낸다는 설정으로 잠시 이야기에서 제외시킨다. 그 이후 집중하는 건 조지의 집에서 살고 있는 로즈의 감정이다. 비록 시부모님이 같은 집에 살지 않지만 조지의 형인 필은 남성주의적인 성향으로 갑자기 자신의 무리에 들어온 여성인 로즈를 곱지 않게 보고 있다. 그는 로즈를 무시하고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조지는 로즈가 부담스럽지 않게 최대한 애쓰지만 로즈는 말이 없고 얼굴엔 근심이 가득하다. 결국 그는 술에 의지해서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로즈가 술에 의지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화면 속 로즈의 얼굴은 매우 불편해 보인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그런 로즈의 심리를 무척 세세하고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의 서부극
사실 이 독특한 서부극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상하기는 무척 힘들다. 초반 조지와 로즈에게 집중했던 영화는 로즈와 필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듯하다가 다시 피터와 필의 관계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서부극이었다면 분명히 총을 이용한 격투가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로 등장했을 테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비슷한 장면조차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묘사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영화의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만큼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의 위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긴장감을 무척 잘 활용하고 있다.
영화 속 로즈의 아들인 피터는 영화 중반 이후에 학교의 방학기간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 필은 피터의 여리여리한 모습과 취미를 조롱하고 무시했던 인물이다. 그렇게 시작된 피터에 대한 조롱은 로즈에 대한 무시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구도는 영화 후반부에는 완전히 깨진다. 다시 집에 돌아온 피터의 모습을 보던 필은 어느 순간 그에게 따뜻한 말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건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조금은 독특한 패션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른 남자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피터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가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필과 피터가 먼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개 모습의 그림자를 같이 봤을 때 무언가 특별한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 중반부까지가 로즈와 필의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면 후반부는 필과 피터의 관계로 인한 긴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두 사람 간의 특별한 감정이 될 수도 있고, 두 사람 간에 남아있는 앙금과 적대적인 부분이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어떤 인물에 감정을 대입하는지에 따라서 느껴지는 긴장감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필과 피터가 다시 만난 시점에서는 분명히 그것은 적대적인 긴장이지만 둘 사이에 어떤 사건 이후로 그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바뀌는 긴장으로 변경된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더 흥미진진해진다.
필로 인해 발생한 관계의 긴장에서 로즈는 나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다. 술에 의지한 방식인데 그것에 의존하면서 어떤 기회가 생겼을 때 소심하게 필의 심기를 건드린다. 즉 그가 가진 힘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 방식이 조금은 무력해 보이는 방식인 것이다. 반면 피터는 필에게 느껴지는 친숙감을 이용해 둘 간의 신뢰를 만들어낸다. 두 사람에게 만들어진 동질감은 피터가 필과의 관계를 조금 더 가까운 관계로 만들게 되는데 두 사람 각자가 진심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이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각자가 서로 적대감을 갖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도의 심리전이 바탕에 깔려있다.
조화로운 세 가지 : 훌륭한 연출, 좋은 영화음악 그리고 뛰어난 연기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절대 마음을 놓고 볼 수 없는 서부극이다.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볼 수 있는데, 이런 긴장감과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음악도 굉장히 효과적이다. 영화 음악을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는 그룹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다. 하지만 여러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작곡을 하기도 했다. <펜텀 스레드>나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영화 음악에 참여했는데 음악으로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심리를 음악을 통해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영화 음악 역시 각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적 상태를 음악을 통해 극대화시켰다.
영화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 감독은 영화 <피아노>로 20대 미혼모의 이야기와 그의 심리를 뛰어나게 묘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을 했었다. 이후 <여인의 초상>과 같은 영화를 연출했었는데 다작을 하는 감독은 아니어서 연출작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번 <파워 오브 도그>에서도 여성을 비롯해 남성의 심리를 꿰뚫는 연출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필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 비치의 연기가 훌륭하고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의지한 채 망가져가는 로즈 역의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도 무척 실감 난다. 또한 인물의 실제 마음이 어떤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인 피터를 연기한 코디 스밋 맥피의 연기도 매우 훌륭하다. 이렇게 연출, 음악, 배우들의 연기까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무척 독특하고 몰입감 있는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의 제목인 <파워 오브 도그>는 성경의 구절인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라는 말에서 나온 표현이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이 구절에 담긴 의미를 포함하고 있겠지만 영화 속 필과 피터가 함께 보는 산등성이의 개의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던 해석은 보는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파워 오브 도그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makOjhOAw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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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것 그대로 드러난 억압과 폭력의 순환은 끝이없다
▷한줄평 : 고통 받을 자유도 무한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
▷영화 :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2025.2월
'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노예다'(괴테)
영화 <브루탈리스트>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를 탈출해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에게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가 보내는 편지에 담긴 괴테의 문구가 이 영화 전체를 대변한다.
뉴욕항에 도착했다는 안내에 따라 어두운 이민선 밖으로 나와 환호와 함께 눈앞에 펼쳐 보이는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의 모습은 이민자로의 삶의 행로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문득 1968년 혹성탈출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는 각자의 선택의 몫이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 (좌) 뉴욕항 입항 안내는 받는 장면, (우) 사촌 아틸라 (알레산드로 니볼라)와 재회하는 장면
(좌) 영화 <브루탈리스트> 2025년 , (우) 영화 <혹성탈출> 1968년
브루탈리즘(Brutalism)이란 프랑스어 ‘베통 브뤼트(Béton brut, 노출 콘크리트)에서 유래한 말로 노출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기하학적인 구조를 특색으로
1950~70년대에 유행했던 건축양식을 말한다. 영화 제목 <브루탈리스트>는 이런 브루탈리즘을 추구하는 건축가를 말하기도 하지만,
주인공 라즐로의 콘크리트 표면과 같이 거칠고 순탄치 않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암시하는 듯 하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 주인공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의 애잔한 모습들
헝가리에서는 바우하우스 졸업하고 부다페스트 시립 센터를 건축할 정도로 인정받는 유능한 건축가였고,
아내 에르제벳 토스 (펄리시티 존스)도 영국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할 정도로 엘리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민자가 되었다. 노숙자 쉼터를 전전하고, 공사판 인부의 삶도 고달프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 (좌/우) 노숙자를 위한 식량 배급에서 만나 친구가 된 고든과 함께 일하는 노동현장 장면
그러나, 항상 새로운 기회는 주어지는 법. 자신의 서재를 리모델링 했던 계기로 인연을 맺은 백만장자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그의 천재성을 뒤늦게 발견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는 기념 건축물 설계를 맡긴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 (좌) 모던하게 리모델링한 해리슨의 서재, (우) 해리슨의 어머니를 기리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 착공식 장면
날 것 그대로 드러난 억압과 폭력의 나라 미국의 민낯
그러나 한줄기 빛으로 보였던 해리슨은 자재를 운반하던 기차사고를 계기로 라즐로의 예술적 도전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부와 권력을 거머쥔 자본가가 예술가적 소양을 갖춘 건축가에게 갖는 열등감을 극복해 내기란 쉽지 않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용하여 부를 창출해낸 초기 자본가들이 자신을 위협하는 경쟁자들이 신분 상승을 하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일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천민 자본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고 인간을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 다름 아니다.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이상을 관철하고자 하는 라즐로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뇌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 (좌) 협력자이면서도 폭력자인 해리슨 부자, (우) 라즐로의 고뇌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아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도모할 수 있는 센터 건축을 완성하고자 하는 라즐라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1980년, 제1회 건축 베니스 비엔날레.
라즐로의 회고전에서 1976년에 완공된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 곳곳에 내재되어 있는 홀로코스트의 흔적들이 드러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하부 구조물과 자유를 상징하는 두개의 기둥, 십자가 모양의 홈을 통해 드리는 십자가의 빛은 전쟁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와 구원을 상징한다.
높은 천장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고 방들은 그가 갇혀 있던 수용소 방의 크기를 염두에 두었다.
라즐로는 지울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아픈 상처를 이 건축물을 통해 역사에 남긴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해리슨은 천박한 자본을 이용하여 비열한 방식으로 라즐로를 통제하고 폭력을 가했지만, 그의 예술적 가치까지는 훼손하지는 못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 내부의 모습
그렇기에 비엔날레에서 조카 조피아가 남긴 마지막 멘트는 의미심장하다.
‘삶이 아무리 유린당해도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조카 조피아
영화 <브루탈리트>는 한 인간의 고통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홀로코스트 당사자로서, 유대인으로서, 이민지라는 신분으로서, 가난한 예술가로서, 아픈 아내를 돌봐야 하는 남편으로서
주인공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가 감당해야할 인생의 무게가 너무나도 크다.
그렇기에 그의 고통의 보편성을 찾고 공감을 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고통의 심연속에서 몸부림치는 연약하고 고뇌엔 찬 존재만이 남을 뿐이다.
어쩌면 타당한 이유랄 것도 없이 인간 그 삶 자체가 고통의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케 한다.
자유를 얻기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나도 크다. 선택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프지만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또 다른 '브루탈리스트'로서 날 것 그대로 거칠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각자의 무거운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 것 아닌가.
나만이 아는 흔적들을 남기며 그렇게 살아내는 것 그 뿐 아니겠는가?
이 영화가 실화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3시간 34분 긴 상영시간 중간에 휴식타임(인터미션 15분)도 고맙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 수상했는데, 올해 3월초 아카데미상에서도 작품상을 비롯한 10개 부문 후보에 지명되었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 브루탈리즘(Brutalism) 주요 건출물
국 샌디에이고 가이젤 도서관(Geisel Library), 미국 버팔로 지방법원 청사, 일본 빛의 교회(안도 다다오 작), 슬로베니아(유고슬라비아) 파노라마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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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예고편, <어벤져스: 앤드게임>의 기록 돌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티저 예고편이 하루 일찍 온라인에 유출됐음에도 불구하고 총 3억 5550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첫 24시간 만에 가장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한 예고편이 되었습니다. 이는 2018년 12월 공개 당시 2억 8900만 뷰를 기록한 <어벤져스: 앤드 게임> 예고편이 보유하고 있던 기록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죠.
소치 픽쳐스에 따르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예고편은 전 세계적으로 450만 건의 언급과 함게 24시간 동안 소셜 미디어에서 가장 많은 언급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국내에서는 24시간 동안 291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해, 같은 기간 <어벤져스: 앤드게임> 예고편이 지닌 194만 건을 두 배 가까이 뛰어넘는 수치를 달성했습니다.
이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티저 예고편에서는,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가 닥터 스트레인저와 함께 멀티버스에 빠져들게 되어 닥터 옥타비우스와 그린 고블린, 일렉트로, 리자드와 샌드맨까지 이전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출연했던 캐릭터와 악역들이 모두 톰 홀랜드의 세계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모두가 원하던 토비 맥과이어와 앤드류 가필드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추후에 공개되는 트레일러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습니다. 마블의 성격상,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개봉일까지 꽁꽁 숨겨둘 수도 있고요!
최근 델타 변이로 인해 코로나 환자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극장 개봉에 대한 수익률이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2월 17일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극장 독점 개봉을 약속하는 소니 픽쳐스의 행보는, 관객 입장에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소니는 스파이더맨에 앞서 개봉하는 <베놈 2: 렛 데어 비 카니지>의 개봉일을 9월에서 10월로 미룬 적이 있는데요. 이 영화의 개봉이 내년 1월로 또다시 연기된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지만, 소니 픽쳐스 측은 예정대로 10월 15에 개봉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참고로 한국에선 10월 3일에 개봉합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개봉일이 변동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번 스파이더맨 영화는 소니의 개봉작 중 가장 중요한 영화이며, 이 스튜디오가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은 글로벌 극장 개봉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2019년에 개봉한 전작인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전 세계적으로 1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소니의 역대 최고 수입 영화입니다. 물론, 팬데믹 상황 속에서 이 기록에 다시 한번 근접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소니는 적어도 더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길 원할 것입니다.
최근 공개한 티저 예고편의 조회 수로만 따진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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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질 결심] 끝장리뷰(ENG) | 내 인생을 ‘붕괴’하러 온 나의 구원자 | 더할 나위 없는 김신영 | 쉬운 해석 + 어려운 해석
[헤어질 결심](2021)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쉬운 해석
Chapter 2 어려운 해석
00:00 깐느 박
01:53 쉬운 해석법
02:58 외도 세 번
05:47 이과적, 엑스레이
06:49 담배, 스마트폰 상징
08:45 어려운 해석
09:40 김신영 캐스팅
10:17 박찬욱이란 사람
11:09 편견, 선입견 타파
13:39 별점 및 한 줄 평
13:55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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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 메인 예고편
남편의 실수로 아이를 잃은 ‘여정’은
우연히 만난 ‘명자’가 남편의 외도로
억울하게 이혼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비밀과 진실을 알고 있는 ‘여정’은
‘명자’와 치밀한 계획 아래
서로 상대방의 남편을 살해한다는 범죄를 공모한다.
독을 품은 두 여자의 광기 어린 복수극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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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야차> 공식 티저 예고편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거침없이 쏘고 자비없이 속이는 스파이들의 전쟁 《야차》 4월 8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