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0932023-06-07 19:26:17
영화 늑대소년 | 동화속 한이야기
송중기 박보영 주연 영화
박보영 혹은 송중기 좋아하시나요?~
대부분 둘 중 한 명은 좋아하는데~
오늘은 박보영과 송중기의 주연으로 재미있는 영화가 있어서 가지고 왔어요~
동화 속 이야기처럼 늑대가 주연하는데 그 늑대가 송중기라면?!
영화 늑대소년 결말까지 살펴보겠습니다!
기본 정보
출처 입력
장르 : 판타지, 멜로, 로맨스, 드라마
감독 / 각본 : 조성희
출연진 : 송중기, 박보영
개봉일 : 2012년 12월 28일
평점 : 8.66
스트리밍 : tvN , NETFLIX, 왓챠, 웨이브
기획 의도
영원히 지켜줄게...
체온 46도, 혈액형 판독불가
세상에 없어야 할 위험한 존재 늑대소년, 운명적 사랑에 빠지다!
요양 차 가족들과 한적한 마을로 이사 간 소녀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의문의 늑대소년을 발견한다.
야생의 눈빛으로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소년에게 왠지 마음이 쓰이는 소녀는 먹을 것을 보고 기다리는 법,
옷 입는 법, 글을 읽고 쓰는 법 등 소년에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씩 가르쳐 준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손을 밀어준 소녀에게 어특한 감정이 싹트는 소년,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위기 속에 소년의 숨겨져 있던 위험한 본성이 드러나고, 소년은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리는데...
등장인물
김철수 | 송중기
체온 46도
혈액형 판독불가
세상에 없어야 할 존재가 발견되었다.
김순이 | 박보영
영원히 지켜줄게
여담
영화 개봉 당시 남녀 주인공이 워낙 출중하는 평이 지대적 이였다.
왜냐하면, 송중기와 박보영이기 때문에?!
두 주연의 힘입어 개봉 당시 한국 영화 멜로 사상 최대의 관객 수를 기록했었다.
영화개봉 당시 크게 이슈몰이에 힘입어 개그콘서트에서도 패러디 했었고,
광고 등 다양하게 활용되었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늑대소년 결말을 살펴보자면,
순이는 할머니가 되어 철수를 만나는데
철수는 예전 모습 그대로 늙지 않은 상태로 철수와 재회를 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한국 영화의 판타지 멜로의 확실한 결말답게 해피엔딩!
지금 다시 보면 얼핏 유치하고 뻔한 내용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박보영과 송중기의 미모만큼은 유치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줄평 : 늑대소년(송중기 혹은 박보영)이 있다면 키울 건가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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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올해 초 개봉 소식을 듣고 보러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아 보지 못했던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다시 만나 반가웠고, 고양이들이 얼마나 귀엽게 나올지 기대됐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비주얼리터러시 수업을 진행한다고 해서 어떤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는지 궁금했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아이들의 귀여운 그림과 발표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시놉시스
서울 동쪽 끝, 거대한 아파트 단지. 그곳은 오래도록 고양이들과 사람들이 함께 마음껏 뛰놀고 사랑과 기쁨을 주었던 모두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재건축을 앞두고 곧 철거될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 고양이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계속 살고 싶냐고" 고양이들과 사람들의 행복한 작별을 위한 아름다운 분투가 시작된다.
* 해당 내용은 서울국제영화제 공식홈페이지 소개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이처럼 따뜻한 아파트가 있을까?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고양이 개체수가 250마리나 된다는 소리를 듣고 적잖이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아파트 단지 250마리나 길고양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만큼 고양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아파트 주민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지나가다보면 고양이 밥주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보란듯이 써있는 경우도 많아서 도대체 저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여있었던 것일까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길생활을 해서 그런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고양이처럼 깨끗했고, 사람을 무서워한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어서 이곳이야 말로 고양이들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길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들을 더럽다고 인식하거나 방해하는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함께 이 공간을 사용하고 살아가는 존재로 단지 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고양이를 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작품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보면서 계속해서 물음표가 가득했던 것 같다. 이 정도면 거의 동물의 왕국 수준으로 고양이를 쫒아다니면서 촬영을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양이들을 너무나도 귀엽고 예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이 있는 지하실이나 폐허가 된 아파트들 사이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고양이, 나무 위에 올라가 꽃처럼 앉아 있는 고양이, 가게 앞을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는 고양이까지. 굉장히 다양한 고양이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고양이 생태 다큐멘터리처럼 촬영되어 있어서 신기했던 작품이었다.
그만큼 이 고양이들이 카메라를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긴 시간 동안 정서적 유대관계를 쌓아왔다는 노력이 드러나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이어져서 감독의 노력이 영화 곳곳에 묻어나서 보는 내내 감탄을 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지만 고양이 화보집이 아닌가 싶을 만큼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을 아름답게 포착하고 있어서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눈호강하며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고양이와 말이 통했다면
어쩌면 유토피아와도 같은 고양이들의 아파트에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바로 그들이 터전으로 잡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재건축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것이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기에 그 영역을 바꾸는 것도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공사에 들어가고 건물이 무너지는데 고양이들을 그곳에서 살게끔 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대책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고양이 대이주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는데 사람의 손을 많이 탄 고양이들은 입양을 결정하고, 그 외의 고양이들은 조금 더 생활반경을 넓혀 옆에 있는 동산이나 다른 아파트단지로 이주할 수 있게끔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래서 도대체 저 많은 고양이들을 어떻게 이주를 시킬 것인지 궁금했다. 250마리를 한데 모아두고 통째로 이삿짐 이동하듯이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역동물을 특성을 이용해서 사람들은 기존에 밥을 주던 자리를 조금씩 조금씩 땡겨와 고양이들의 영역을 조금씩 바꿔주고, 고양이들이 천천히 이동하는 영역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었다. 이 얼마나 인내심 가득한 프로젝트인가?
이 과정에서도 다른 아파트로 이주한 고양이들이 자꾸 철거를 앞둔 아파트단지로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 고양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사람이라면 이곳은 이제 공사가 들어갈 것이라 더이상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면 되지만 고양이들에게는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에 이 아이들을 이해시키고 위험한 공사현장으로 돌아가지 않게끔 만들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이 아이들과 정말 소통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던 작품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에 대해서 잘 풀어낸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이 고양이들이 그곳에서도 행복하게 잘 살아가길 바라는 따뜻한 마음이 마음에 퍼지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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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 폰 트리에, 어둠 속의 댄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들어가기에 앞서 1973년 발매된 Paul Simon의 싱글 <American Tune>이라는 노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가사를 읽어보면, 이 노래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뼛속까지 지쳐버린 이민자들이 부르는 '미국식 한의 정서'를 담은 노래이다. 잉글랜드인들을 태운 메이플라워 호가 막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꿈과 이상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 되었지만, 70년대에도 여전히 미국이라는 신화는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60년대 말에 소련보다 먼저 달에 도착하였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다. 노래의 화자는, 모든 것은 진보하고 변화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민자인 내 삶만은 나아지지 않는 것인지, 이 노동은 죽을 때까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메이플라워 이래 아메리칸 드림을 위한 여행은 계속된다. 이제는 오직 일신의 안식을 바라며 노래는 끝이 난다. 이 곡이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안 사실이다. 예수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그 수난을 감당해야 했던가?
Many's the time I've been mistaken
And many times confused
Yes, and I've often felt forsaken
And certainly misused
Oh, but I'm alright, I'm alright
I'm just weary to my bones
Still, you don't expect to be bright and bon vivant
So far away from home, so far away from home
And I don't know a soul who's not been battered
I don't have a friend who feels at ease
I don't know a dream that's not been shattered
Or driven to its knees
But it's alright, it's alright
For we lived so well so long
Still, when I think of the
Road we're traveling on
I wonder what's gone wrong
I can't help it, I wonder what has gone wrong
And I dreamed I was dying
I dreamed that my soul rose unexpectedly
And looking back down at me
Smiled reassuringly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
We come on the ship they call The Mayflower
We come on the ship that sailed the moon
We come in the age's most uncertain hours
And sing an American tune
Oh, and it's alright, it's alright, it's alright
You can't be forever blessed
Still, tomorrow's going to be another working day
And I'm trying to get some rest
That's all I'm trying to get some rest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American Tune>을 부르는 Slmon & Garfunkel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지난 2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랩 대령 역을 맡았던 故 크리스토퍼 플러머 배우의 부음 소식을 듣고서, 부모님의 추억팔이용으로 내가 어릴 적에도 같이 DVD로 돌려 보았던 영화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위 영화에 대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추억이자 향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를 보았다. 12세 관람가,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의 주연, 칸느 2관왕의 업적, 개봉 당시 평단의 극찬, 포스터에서 비요크의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때문에 라스 폰 트리에 판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안이하게 관람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악랄한 -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 의도를 가진 감독이 만든 2시간 20분짜리 악몽이었다. <American Tune>을 들었을 때, 희망도 절망도 아닌 <수난>의 정서를, 영화를 보면서 똑같이 느꼈다. 과거와 미래의 희망은 이 뮤지컬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 아주 지난하고 힘든 과정만이 영화 속에 담길 뿐이다.
소음은 리듬이 되고 음악이 된다
1964년 미국 워싱턴 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들과 함께 이민을 떠나온 셀마(비요크)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같은 유전병을 가진 아들의 눈을 고치기 위한 수술비를 벌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녀가 일과 후에 뮤지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직장 동료 캐시(카트린느 드뇌브)도 참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60년대를 풍미했던 <쉘부르의 우산>의 그 카트린느 드뇌브가 변변치 않은 무대에 억지로 올라가 있는 듯한 기묘한 모습, 일사불란한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고 홀로 겉도는 셀마의 모습을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의심쩍다. 그녀의 뮤지컬 실력은 무대가 아니라 공장 소음 안에서 꾸는 몽상에서만 제대로 발휘된다. <라라랜드>에서 전주만 들어도 신이 나는 뮤지컬 ost에 맞추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이들이 LA 고속도로를 점거한 군무에 익숙했던 우리의 눈은, 미국 동부 공장 노동자들이 위험하고 비좁은 공장 안에서 추는 춤이 어색하기만 하다.
6mm 핸드헬드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셀마의 일상은 그녀가 보는 세상에 대한 어지럽고 둔탁한 인상을 담고자 노력하며, 마치 한 체코계 이민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사실성도 부여한다. 시력이 감퇴하는 대신에 예민해진 셀마의 청각은, 그녀의 삶이 매번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주변의 작은 소음을 감지한다. 그 작은 소음, 규칙적인 리듬으로부터 그녀의 노래는 다시 시작되고, 셀마는 혼자서 미치기 직전의 순간에 그 박자에서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뮤지컬 영화와 달리 관객은 뮤지컬 장면에 매번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는데, 위험한 공장 프레스 앞에서 몽상을 하고 있는 셀마의 현실 모습이 점차 뮤지컬 장면 안으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같은 위태로운 현실의 침투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일부러 훼방 놓으면서, 극이 후반부로 치달아 갈수록 뮤지컬이 나오는 몇 분을 시간이 멈춰버린 지옥처럼 길게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다.
후반부로 치달을 수록 이 소음은 하나 둘 제거되면서 성스러운 종교 음악만이 남는다. 교도소 안에서 셀마는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라고 물으면서 절망한다. 이 때 비요크의 95년도 앨범 'It's so quiet'라는 노래와 뮤비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는데, 설마 이것까지도 감독의 시니컬한 농담인 지를 의심했다. 이 곡의 뮤비안에서 비요크는 엠마 스톤 못지않게 화려한 원색 드레스를 입고서 뮤지컬의 여주인공처럼 '여긴 너무 조용해!'라고 주변을 조용히 시킨 다음, 가장 경쾌하고 자신 있게 꽥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셀마로 분한 그녀는 자신을 미치게 하는 고요를 쫓아내지 못한다. 겨우 통풍구로 들려오는 막연한 채플 소리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My favorite things>를 부를 뿐이다.
비요크의 <It's so quite> 뮤직 비디오
유럽 감독이 만든 악몽 'American bad dream'
감독의 비행 공포증 때문에 이 영화가 유럽 여러 지역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배우 또한 데이비드 모스(빌 휴스턴 역)를 제외한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유럽 출신의 배우들이다. 우리는 미국 땅을 제대로 밟아본 적도 없는 덴마크 감독이 가상으로 구현해 낸 미국의 허상을 보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적 패권은 모두 이 신대륙으로 넘어갔고, 유럽에는 오직 과거에의 향수와 문화예술적 자부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착란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지 못하며 무용한 지 영화는 낱낱이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셀마는 동료들과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뮤지컬을 연습하고 있다. 마리아와 본 트랩가 아이들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의 계곡과 산,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미라벨 궁전을 배경으로 이제 누구에게나 친숙한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손을 거쳤으므로 티 없이 밝고, 아름답게 묘사된 장면들은 이제 관객을 골리는 악취미를 가진 유럽 감독에 의하여 생활에 찌든 유럽계 이민자들의 소일거리 취미로 축소, 재현된다.
셀마의 예술적 기질과 취미는 생산 활동에 저해되는 결격 사유가 되고, 아들의 병원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는 변명은 '공산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는군요'라는 조롱으로 돌아온다. 체코에서의 좋았던 시절을 발설하면 '그러면 체코로 돌아가지 왜 여기 있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이웃의 얼굴을 한 미국 사회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은 놀랍지도 않지만, 그는 2차 대전 후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맹목적으로 미국 땅을 밟은 유럽계 이민자들의 무력함,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백치미, 현실과 이상의 혼돈, 후세대를 위한 자발적이고 맹목적인 희생까지도 비틀어 보여준다.
빌과 제프, 체격이나 인상이 비슷한 마을의 두 남자가 셀마의 주위를 맴돈다. 빌은 그녀에게 트레일러를 내주고, 아들 진을 낮동안 돌봐 주는 친절하고 선한 이웃이고, 제프는 셀마에게 호감을 보이는 낯선 이다. 눈이 멀어가는 셀마에게는 이 둘의 의도와 진심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결국 셀마는 태워주겠다는 제프의 호의를 거절하고 그녀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운 빌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녀의 선택, 빌을 의지하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것을 계기로 그녀의 운명은 추락의 길을 걷는다.
영화가 빌을 묘사하는 방식은 흔한 미국 영화에서 악당을 그리는 방식과는 다르다. 그는 사악하기보다는 저열한 인물이다. 치밀하다기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거짓말로 둘러대고, 부인이 그의 거짓말을 믿도록 신파 장면을 연출하며, 경제적 정신적 파산으로 인해 죽음을 생각해왔으나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어서 셀마에게 그 역할을 위임한다. 부인과 셀마뿐 아니라, 정의를 지키다 순국한 희생양으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스스로 믿을 만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비열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셀마의 범죄 장면은, 살면서 웬만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지리멸렬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장면을 끔찍하도록 길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뮤지컬 대사와 음악이다. 이제 그녀의 환상 속에서 강은 핏빛으로 흐르며, '날 용서할 수 있나요'라는 그녀의 노래는 부조리의 끝을 달린다.
수녀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수녀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는 수녀에서 선생님으로, 다시 트랩 가 아이들의 어머니로 신분이 바뀐다. 마리아의 재기 발랄함과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녀원, 트랩 대령과의 초반 대립을 거쳐, 그녀는 오직 자신의 노래로써 한 가족을 변화시킨다. 후에 그녀의 부재를 앓는 아이들을 위해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 돌아와 한 가족을 이루게 된다. 반면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숙제하는데 이상한 질문만 하는 어머니, 아들의 생일에 자전거도 못 사주는 어머니, 범죄자 어머니, 아이가 찾아도 답이 없는 어머니이다. 셀마는 그녀의 유전병 때문에 서서히 시력이 감퇴하자 주인공 마리아 역에서 수녀 역의 조연으로 밀려난다. 이것은 어머니(Mother)에서 살인자(Murderer)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아이와 어떤 연결고리도 갖지 못하는 희생당하는 성 처녀와 같은 수녀(Nun, 아이에게는 무의미함 None)로 전락하는 것을 상징한다. 마리아의 선택은 수녀원의 자비로운 허락과 자유 의지에 따랐던 반면, 셀마에게는 점점 극단적이고 좁은 A/B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그녀를 진심을 다해 돕고자 하는 캐시마저 이 시스템에 동조하게 되는 것은 슬픈 역설이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셀마를 잔다르크에 자주 비견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진(Jean)'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녀는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에서 누구도 굽힐 수 없는 신념을 가졌던 잔(Jeanne)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녀가 원하여 자유 의지로 신념의 전쟁을 했는지, 하늘에 있는 누군가 계시를 내렸는지를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잔 다르크처럼 의연한지를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전화기에 대고 화내며 울부짖고,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몸부림친다. 사실 그녀는 평범한 어머니, 선생님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되고 싶어 했던 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던 대로 운명의 되물림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결국 그녀는 자신이 치른 희생에 합당한 구원을 받았다는 듯 수그러든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관객 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절규 혹은 노래가 울려 퍼지고, 한 번의 추락, 그리고 뮤지컬의 막이 드디어 닫힌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폴 사이먼의 <American Tune>에서 후렴구 가사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I dreamed I was dying"에서 "And I dreamed I was flying"으로 변주, 높이 승화되는 구절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된 육신을 말한다. 그리고 해방된 자는 이제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로 항해하는 저 이상향의 풍경을 또렷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강탈당한 것을 지켜내고 본인 스스로까지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셀마는 시력을 되찾아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또렷하게 직시할 수 있다. 그렇게 더딘,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흘러가는 이 항해는 후대에게 전승된다.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마치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전쟁이 모든 것을 휩쓸기 직전에 사람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 가족의 결합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난민이 된 트랩 가 가족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알프스를 희망차게 넘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항상 이상했던 것은 알프스는 춥고 험할 텐데 이 사람들은 동네 뒷동산을 산보하듯 노래를 부르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즉 영화는 불행했던 과거(트랩가 7남매 어머니의 죽음)와 다가올 불안한 미래(난민의 삶)는 잘라버린 채 온전하고 행복한 모습들만 보여준다. 마치 이에 대한 블랙 패러디처럼, <어둠 속의 댄서>는 셀마가 이민 전 행복했었던 체코에서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도 생략하고 , 그리고 그녀의 희생을 통해 아들 진에게 주어진 좀 더 밝은 미래를 보여주지 않은 채 무대의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면서 한부모, 장애인, 이민자, 블루칼라 노동자 등 모든 측면에서 의지할 곳 없는 사회 소수자인 한 여성을 여러 장치들을 가지고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가학성이 과연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영화는 많은 논란거리를 낳았고,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단과 관객의 평가 또한 극명히 갈리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뮤지컬 장르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관객을 심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인위적인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었나? 감독은 실제로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던 비요크를 비슷한 상황에 몰아넣어 과하게 몰입시킴으로써 훌륭한 연기가 아닌 그녀의 진실된 고통을 착취한 것이 아닌가?
사디스트적인 악취미를 가진 감독이 단지 본인의 유희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는 가정 하에, 이 씁쓸하고 어두운 뮤지컬 영화는 종교적인 희생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20세기판 <마태 수난곡>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감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보다는 차라리 <셀마 수난곡>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나무판자 위에 몸을 결박당하는 셀마의 모습을 보며 성경에 나오는 '그 존재'가 아닌 다른 누구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20세기의 아메리칸 드림을 믿고 현실에서 구원받기 위한 모든 이민 세대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당한 대속죄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것들은 자식 세대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시련이기에, 그녀는 친구의 얼굴을 한 어떤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도 이겨낸다. 이로써 그녀의 아들과 후손들은 광명의 한 자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또 다른 결의 결핍과 상처를 떠안은 채 아메리칸 드림의 항해를 이어간다.
[Eurofilm 11. 덴마크, 독일,스웨덴, 네덜란드, 미국,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2021년 3월 6일 감상 / 2021년 3월 7일 씀
* 본 콘텐츠는 브런치 karenine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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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매운 맛에 대해 알려줄게
좋은 선생님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인자한 얼굴과 다정한 말투 <죽은 시인의 사회>와<굿 윌 헌팅> 로빈 윌리엄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삶을 가꾸어 나간다는 것. 미래를 꿈꾼다는 일이 아름답고 멋진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 격려하고 응원하는 사람. 선생님.
하지만 꿈을 이루어 가는 현실은 꽤나 팍팍해서 막연한 응원만으로는 내가 원하는 목표에 다다르기 쉽지 않다. 엄청난 노력과 숱한 실패를 경험해야 하는 일이 다 반사다. 인자하고 다정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스스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 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꿈을 성취 할 수 있도록 강하게 밀어붙이는 조련자…아니 조력자인 선생님을 만나기도 한다.
영화 <위플래쉬>는 뉴욕의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에서 입학하게 된 ‘앤드류’는 1학년 가을학기에 ‘플레쳐’ 교수에 눈에 띄어 최고의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첫 연습에서부터 ‘플레쳐’ 교수의 모욕적인 폭력에 직면하지만, 밴드의 메인 드러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져 목숨을 걸고 독기를 품고 연습하게 된다. 영화의 초반 ‘앤드류’가 실력을 인정받아 밴드에 발탁되고, 호감이 가는 ‘니콜’에게 말을 걸고, 모든 일이 잘 될 것만 같다. 밝고 에너지가 가득했다.
‘플레쳐’교수는 셰이퍼 음악학교의 교수로 학교 재즈 밴드의 지휘자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고, 최고를 추구한다. 평범하게 좋은 것은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재능있는 사람들의 잠재능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채찍질 하는 스타일이다. ‘플레쳐’의 비정상적인 훈육 방식 때문에 우울증을 겪고 자살한 제자까지 생겼지만, 자신의 가혹한 방식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다.
가혹한 교수법으로 제자를 몰아부치는 선생과 자신의 꿈에 대한 욕심으로 ‘앤드류’의 드럼 실력은 점점 성장하지만, 그에 비해 삶은 조금씩 피폐해져 간다. 버스를 타고 드럼영상을 보며 공부하는 중에 온 ‘니콜’의 문자로 흐름이 끊어지고, ‘니콜’의 존재는 꿈을 향한 여정에 방해물로 여겨진다.
가족은 실패하고 쓰러질 때면 안아주는 존재이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직접 도와 줄 순 없다. 아버지를 관객석에 앉혀 둔 적도, 아버지를 위해 연주한 적도 없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오롯이 혼자서 나아가야한 하는 ‘앤드류’에게 성과지향주의인 ‘플레쳐’는 좋은 선생이었을까? 무조건 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가 참 어렵다.
‘플레쳐’는 목적이 분명하며,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심플한 사람이다. 항상 시간을 지키고, 극한으로 몰아붙이지만, 제대로 해냈을 때 상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순수한 의도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포장하면서도 자신을 쫓겨나게 만든 앤드류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하는 사람이다. 천재음악가의 탄생을 기다리면서도 치졸하기 짝이 없는 이 인간을 욕하고 싶으면서도 ‘앤드류’의 마지막 연주를 보고 나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사실은 결국 ‘앤드류’의 성장은 모두 ’플레쳐’ 덕분인 것만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관객인 나는 억압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서 이뤄내는 성장에 뿌듯한 함을 느끼게 되는 모순감정에 둘러 쌓이고 만다. 그리고 ‘플레쳐’의 말을 다시 생각한다.
“너희가 한계를 넘어서는 걸 보고 싶었어. 난 그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 세상에서 제일 쓸데 없이 해로운 말이 ‘그만 하면 잘했어’야.”
나도 한 때 원대한 꿈을 꾸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시간이 꽤 오래 지나 마음 깊이 묵혀 둔 그런 이야기말이다. 마음의 안심을 주는 의지할 수 있는 선생님, 그리고 채찍질로 빠른 속도로 꿈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선생님. 둘 다 갖춘 선생님을 만나면 좋겠지만,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나는 어떤 쪽의 선생님을 바랄까. 만약 ‘플레쳐’와 같은 선생을 만나서 채찍질을 당했다면 나는 지금 그 꿈을 이뤘을까? 그 꿈을 이룬 세상의 나는 지금과 어떻게 다를까.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다.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한다. 미래에 나의 아이들의 위플래쉬는 어떠해야 할지. 영화는 아마도 나의 위플래쉬를 스스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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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과 확신 그 사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콘클라베>는 일관적으로 ‘이방인’에 주목한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서 알파벳 ‘I’만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다양한 알파벳을 흰색으로 칠하나 각 이름마다 단 하나의 알파벳만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교황을 선출하는 마지막 투표 전, 하얀 우산을 쓴 추기경들의 행렬 쇼트를 자세히 살펴보자. 한 명의 추기경이 우산을 쓰고 있지 않다. 투표를 앞두고 추기경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공유하는 씬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너 명씩 모여 있는 추기경들과 달리 추기경 한 명이 혼자 의자에 앉아 있다.
베니테즈 추기경은 이방인이다.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로렌스조차 알지 못하고 오직 선종한 교황만이 베니테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거의 없는 카불의 대주교로 로마에 온 추기경이며 준비된 명단에 없던 인물이다. 이 이방인은 로렌스의 부탁으로 추기경들의 식사 전 기도를 맡는다. 그는 주신 음식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식사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기도, 그리고 음식을 준비해준 수녀들에 대한 기도까지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콘클라베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안락한 식사 자리가 일상이 아닌 이들을 떠올리고 있다.
여기서 수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수녀들은 콘클라베에 참여할 수 없다. 교황 선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고 당연히 교황이 될 수도 없다. 수녀 또한 콘클라베에서의 이방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콘클라베 자체는 수녀들의 노동력 없이 열릴 수 없다. 영화는 이러한 수녀의 역할을 조명한다. 마지막 교황 투표를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씬에서 계단을 오르는 추기경들의 쇼트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수녀들의 쇼트가 나온다. 위에서 열리는 콘클라베를 아래서 뒷받침하는 수녀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로렌스는 트랑블레 추기경의 비리를 알리기 위해 추기경들에게 보여줄 기밀문서를 복사하고자 한다. 로렌스는 무려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단장이나 복사기는 사용할 줄 몰랐기에 아녜스 수녀의 도움을 받아 문서를 복사하게 된다. 이 기밀문서를 공개한 로렌스는 추기경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는다. 이때 아녜스 수녀는 트랑블레가 아데예미 추기경을 곤경에 빠트리게 하기 위해 한 일을 증언하며 트랑블레가 교황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 시퀀스의 핵심은 교황이 될 유력 후보자였던 트랑블레의 몰락이다. 로렌스가 복사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트랑블레의 몰락을 묘사하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과정 속에서 수녀의 역할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베니테즈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남성인 동시에 여성인 존재다. 그의 성 정체성을 통해서도 그를 이방인이라 규정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성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첫 교황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마지막 투표를 앞두고 베니테즈는 테러를 벌이는 무슬림들을 상대로 종교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테데스코 추기경의 말에 반박한다. 우리의 적은 그들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며 가톨릭 교회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니테즈의 모습은 성경 속의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7:41) 영화는 베니테즈를 이 시대의 메시아로서 재해석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베니테즈가 말한 미래로 나아가는 교회는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가? 이 교회는 과연 신 앞에서 ‘옳은’ 교회인가?
교황은 선종 직전까지 가톨릭교회를 의심했다. 이 의심은 교황 자리를 향한 추기경들의 욕심과 각종 비리로 인한 교회 내부의 부패를 의미한다. 추기경들은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교황을 선출하는 데보다 세간의 평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교황을 선출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다. 전통주의자들은 로마의 전통을 강조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발맞추어 교회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같은 성서를 근거로 하기에 양측 중 하나의 주장만이 옳다고 우리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베니테즈의 미래로 나아가는 교회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강조한다. 영화는 베니테즈의 교회를 양측을 모두 포용하는 옳은 방향의 교회로 그리며 베니테즈는 자신이 확신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영화가 로렌스를 통해 계속해서 강조하는 의심과 확신의 질문에 대한 베니테즈의 응답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니테즈의 입장 또한 끊임없는 의심보다는 확신에 가깝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소인배’이기에 어느 것이 옳은 방향의 신앙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로렌스는 첫 번째 투표를 앞두고 추기경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예수의 12제자 중 의심하는 제자로 알려진 도마처럼 (토마스) 로렌스는 영화 내내 의심한다. 그는 교황이 될 유력 후보자들의 결점을 하나하나 의심하고 있으며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로렌스의 말에 비추어 우리는 그가 신의 존재까지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베니테즈를 교황으로서 가장 적합한 추기경이라 ‘확신’하는 순간 다시 의심이 찾아오기도 한다. 과연 간성(intersex)인을 교황으로 세워도 되는 걸까. 베니테즈의 성 정체성이 앞선 추기경들처럼 하나의 결점에 해당하진 않을까.
영화에는 거북이가 두 번 등장한다. 첫 투표가 끝난 날 밤, 거북이들을 보고 있는 베니테즈에게 로렌스는 전대 교황이 생전에 거북이들을 아꼈다며 자꾸 도망치려 하는 게 문제라고 이야기해준다. 교황이 선출된 뒤 베니테즈의 성 정체성을 알고 혼란스러운 로렌스는 성당 안까지 도망쳐온 거북이를 다시 마주친다. 로렌스는 거북이를 물가로 돌려보낸 뒤 미소 짓는데, 이 거북이는 마치 로렌스 그 자체 같다. 추기경들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까지 의심했던 로렌스는 길을 잃은 거북이, 물가로부터 도망치려는 거북이다.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로렌스는 죽은 교황의 뜻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고 끊임없는 의심에 휩싸인다. 마침내 그는 베니테즈의 비밀을 받아들이고 베니테즈의 교황 선출이 신의 뜻임을 인정한다. 영화는 이를 물가로 돌아온 거북이와 그 앞에서 미소 짓는 로렌스로 표현한다.
영화 <콘클라베>는 성스럽고 경건한 의식 이면에 교차하는 인간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복잡성만을 다루지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과 그 신앙의 형태를 깊이 고찰한다.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불변하나 그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과정은 단순히 확정될 수 없다. 끊임없이 의심하자. 의심 없는 확신을 멀리하자.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야 종교는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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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현실이지? 영화 그런 거 아니고?
돈 룩 업 (Don't Look Up, 2021)
개봉일 : 2021.12.08 (극장 선공개 / 넷플릭스 2021.12.24.공개)
감독 : 아담 맥케이
출연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롭 모건, 조나 힐, 마크 라이런스, 티모시 샬라메, 케이트 블란쳇, 메릴 스트립
쿠키 영상 : 2개
이거 현실이지? 영화 그런 거 아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아닌 ‘어쩌면 실화가 될지도 모를 이야기’. 영화의 포스터에 적힌 이 한마디가 이렇게 적절할 수가 없다. 작중에 혜성 충돌 상황을 부정하며 “이거 현실이지? 평행 우주 그런 거 아니고?”라고 묻는 대사가 나오는데, 나도 그렇게 묻고 싶다.
“이거 현실이지? 영화 그런 거 아니고?”
미리 만나본 <돈 룩 업>, 화려한 라인업으로 시선을 빼앗다.
넷플릭스 공개 전, 넷플릭스 영화 6편을 미리 극장에서 만나보는 릴레이 개봉의 마지막 타자 <돈 룩 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티모시 샬라메의 촬영 사진 한 장으로 이미 내 마음을 깨부셨던 이 영화. 최근 글을 쓰는 영화마다 ‘소식을 듣고 언제부터 기대했던 영화’라고 언급하다 보니.. 대체 나는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는 영화가 몇 편이나 되는 거지..? 살짝 웃기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 영화도 정말 기대했다. 거기에 이런 기획전을 통해 집이 아닌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다니. 횡재가 따로 없다 생각했다.
위에 언급한 세 배우를 제외하고도 조나 힐, 마크 라이런스, 타일러 페리, 론 펄먼, 아리아나 그란데, 케이트 블란쳇, 메릴 스트립.. 등 이름만 들어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대단한 인물들로 가득 찬 라인업에 넷플릭스 자본의 위대함을 다시 느꼈고, 각 인물들의 매력을 잘 살려 어떠한 캐릭터도 1회 성으로 소모되지 않도록 적절히 배려한 연출자의 균형감에 박수가 나왔다. 거기에 재미까지 챙기다니,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케이트 블란쳇의 캐릭터와 연기가 정말 좋았다. 내가 알던 그녀의 이미지와 목소리를 잠시 뒤로 미뤄둔 채 영화를 봤을 만큼 말이다. (캐릭터 자체는 호감형이 아니었지만..)
비디오 게임처럼 비현실적인 이야기 또는 우스울 만큼 현실과 너무 닮은 이야기
<돈 룩 업>은 지구로 다가오고 있는 커다란 혜성이라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중심 소재를 이용한 사회 비판 블랙코미디다. 미시간 주립대 천문학과 교수 랜달 민디와 그의 제자 케이트 디비아스키는 여느 날처럼 천체를 관찰하다 새로운 혜성을 발견하게 된다. 혜성의 존재는 처음엔 놀라운 발견, 축배를 들어야 할 소식이자 축복이었으나, 혜성의 좌표와 속도, 포물선의 모양 등.. 모든 정보를 모아 계산해 보니 혜성은 축복이 아닌 대재앙 그 자체였다.
랜달과 케이트는 이 소식을 알리고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아이러니와 코미디적 요소들이 발생한다. 지구 멸망. 그것도 엄청난 크기의 혜성이라는 간단하지 않은 문제로 멸망이라니. 인류 최대의 위기다.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데.. 어디, 지구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당장 옆에 앉아있는 가족도, 친구도 나와 생각이 다른데.. 이 지구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한곳으로 모일 리가 없다. ‘지구 멸망’의 위기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온갖 우습고도 열이 뻗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어디선가 본듯한 상황들
“아무리 그래도 멸망이라는데.. 진짜 이럴까?”싶다가도 너무 사실적이라, 번뜩 “아 이거 현실 아닌가?”싶은 생각도 든다. 지구 멸망은 아니더라도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각자 분열하고 휩쓸리고 또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는 상황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돈 룩 업>을 보며 답답하기도, 너무 우스워 웃음이 픽픽 나기도 했다.
멸망 앞에서 손발을 벌벌 떨며 세상에 소리치는 과학자 랜달 민디와 케이트 디비아스키, 오글 소프 박사. 그리고 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되레 이용하려는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 사업가들까지. 커다란 언론들의 싸움에 사람들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 길을 정하고, 그 위에서 힘껏 휩쓸린다.
다가오는 위험을 바라보자는 사람들과 그것 또한 거짓이니 바라보지 말자는 사람들의 대립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인물들이 휙 돌아버리는 순간들에 이 영화 진짜 골 때린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처음 접한 아담 맥케이 감독의 작품, 나의 입문작
아담 맥케이 감독이 연출한 작품을 보는 건 <돈 룩 업>이 처음이었다. <앤트맨>의 각본을 제작했다는 것과 <바이스>, <빅 쇼트>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아담 맥케이가 연출한 온전한 ‘그의 작품’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줄줄~ 읊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블랙코미디의 대가라는 타이틀이 찰떡같이 어울린다. 에이 오버다 싶다가도 이 비슷한 장면을, 이런 사람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에 웃음이 절로 난다.
코미디적인 요소와 현실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요소들을 잡아 적절하게 버무린 센스가 엄청나다. 또 언젠가는 “이거 이렇게까지 까도 되나?”싶은데 그게 또 유쾌 상쾌 통쾌 그 자체였다. 주변의 반응을 보니 꽤 호불호가 나뉘거나 전작들(특히 빅 쇼트)에 비해 실망했다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아주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돈 룩 업>을 성공적인 아담 맥케이 감독 입문작으로 정의 내렸다. 땅땅- <빅 쇼트>에 비해 이게 실망스러운 작품이라면.. <빅 쇼트>는 얼마나 재밌다는 걸까. 기대된다. 빠른 시일내에 격파하도록 해야겠다.
돈 룩 업 시놉시스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와 담당 교수 랜들 민디 박사는 태양계 내의 궤도를 돌고 있는 혜성이 지구와 직접 충돌하는 궤도에 들어섰다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다. 하지만 지구를 파괴할 에베레스트 크기의 혜성이 다가온다는 불편한 소식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인류의 종말을 막아라 vs 설마 진짜 종말이 오겠냐?
공룡들의 멸종 이후 얼마 만인가, 대략 2억 년이 더 지나 지구에 또다시 충돌의 위기가 찾아온다.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혜성을 발견한 케이트와 민디는 지구방위 합동본부 오글 소프 박사를 통해 대통령 올린을 만나게 된다. 좋은 말로 하면 여유가 넘치고 나쁜 말로 하면 퍽 가벼워 보이는 대통령은 케이트와 민디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반드시 일어나요.” 비장한 표정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말하는 과학자들 앞에서 올린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알맹이 없는 웃음을 흘린다.
지구와 충돌한다면 핵의 몇십 배 아니 그냥 지구 멸망을 일으킬 혜성이 다가오고 있는데 사람들은 왜 이리 관심이 없는 걸까? 궁금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현실에서도 별별 종말설이 다 돌지 않았던가? 우주적인 요소, 인류들이 만들어낸 요소, 신화적인 요소 등등.. 무슨 달력이 언제까지만 있어서 그 날짜에 맞춰 종말 할 거라느니.. 하는 것들까지 말이다. 나도 그 종말설들을 믿지 않았으니.. <돈 룩 업>의 시민들이 민디의 말을 믿지 않는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이 알아들을만한 자료도 없고, 지나가는 비디오 게임 이야기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이 종말론을, 모두가 후다닥 믿어버리는 것도 웃기긴 하겠다. 거기에 유명하지만 아주 가벼운 토크쇼에서 나오는 이 종말론을 말이다. 사람들은 혜성의 존재보다 케이트가 분노하는 순간, 잘생긴 민디 교수의 얼굴, 그리고 연예인들의 약혼 소식에 더 집중하고 낄낄 웃을 뿐이다. 이거.. 왠지 익숙한 상황이라 어이없이 웃기다.
혜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혜성은 위협인가 이득인가?
혜성의 존재가 알려지고 사람들은 두 개의 파로 나뉜다. 혜성은 오고있다, 궤도를 바꿔 종말을 막아야 한다는 사람들(룩 업)과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보이는 것 또한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돈 룩 업)
눈에 보이지 않으니 믿을 수 없고, 직접 궤도를 계산해 볼 수 없으니 어딘가 못 미덥게 느껴지는 종말론 앞에서 잠시 힘을 모았던 사람들은 1차 발사 취소 후 더 크게 분열하기 시작한다.
일부 인물들은 혜성의 존재는 믿지 않음에도 정치적 이유, 자신의 이득을 위해 1차 발사에 힘을 모으는데, 혜성이 지구에 안착(?) 하게 됐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이득이 있다는 걸 알고 바로 마음을 바꾼다. 조금 전까진 함께 ‘인류의 위협이다!’라고 외치더니, 이젠 이게 축복이란다.
140조 달러의 가치? 세상이 멸망하면 무슨 의미겠냐마는 대통령과 사업가들(BASH)은 돈에 눈이 멀어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이미 우리의 계획은 성공! 그 외의 결과는 상상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주인공들은 서서히 정상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선동과 격리
케이트는 혜성의 위험성을 외쳤다는 이유로 권력에 의해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민디 박사는 권력과 여성에 현혹되어 잠시 궤도를 벗어난다. 아내를 두고 외도를 하고, BASH의 광고에 출연하고, 혜성 분리에 성공할 시 발생하는 장점들을 줄줄 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언론에 휩쓸리고, 불안해하면서도 그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케이트가 숨겨진 진실을 말하는 순간, 불안은 폭동으로 표출된다.
가연성 물질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라이터를 탁탁 켜대는 대통령을 앞에 두고 마침내 정신을 차린 민디는 다시 진실을 밝히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다시 묻혀버리고 만다. 가장 섹시한 과학자로 칭송받던 사람이었지만.. 언론과 권력이 만든 그 타이틀 하나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강한 힘의 일을 방해하면 바로 격리인 거다.
Look Up vs Dont' Look Up
하늘을 바라보라고, 진실을 바라보라고 소리쳐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정말 지지리도 안 본다. 라일리비나가 콘서트에서 부른 노래 가사처럼 ‘제발 과학자들 말을 쳐들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이제 눈으로도 보이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양 갈래로 찢어져있다. 힘을 모아도 모자란 판에, 마지막 희망이었던 핵이 발사장에서 터져버리고, 차악이었던 분리 계획도 실패하며 인류는 종말을 맞이한다.
현실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 웃기고 불편한 블랙 코미디 그 자체였던 이야기.
혜성 충돌이라는 큰 위협 앞에서 각자의 이득과 주장만을 내세우던 인류는 결국 지구를 지키지 못한다. 애초에 모두가 힘을 모은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이 단합을 방해하는 인물들이 참 많았다. 혜성을 믿지도 않으며, 격추 or 분리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지 고민하는 대통령과 비서실장인 아들, 회사에서 쓸만한 광물을 구하기 위해 경제적 가치를 운운하며 선동한 피터, 하늘을 보면서도 현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섹시함과 위트는 갖고 있지만 지성은 없는 토크쇼의 진행자들. 그리고 이득을 따라 움직이는 언론 등등.. 조금씩 느껴지는 기시감에 씁쓸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들을 시원하게 가격하는 연출에 유쾌, 통쾌함을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였다. 나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 <돈 룩 업>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제발, 이 사람들아. 과학자들의 말을 듣자. 위대한 이과의 말을 듣자.”였다.
그리고 그 위에, 민디 같은 교수님이 있다면.. 머리가 타도 좋으니 더 늦기 전에 천문 학도의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진한 사심 한 바가지를 끼얹어본다. (물론 나는 본 투 비 문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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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가 아동학대인건 알겠는데 주제는 뭘까?
김남길의 팬으로서 하정우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클로젯>에 대한 기대감이 낭낭했었다. 아무리 내가 팬이라지만 마냥 좋다고 평할 수 없을 정도로 말문이 막히는 작품이었다. 심지어 영화 평점을 후하게 주는 친구가 왓챠에 2.5점을 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클로젯 시놉시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내를 잃은 상원과 그의 딸 이나. 상원은 소원해진 이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 상원은 이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긋난 사이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나가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며 웃기 시작한다. 하지만 평온도 잠시, 이나의 방 안에 있는 벽장에서 기이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이나에게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그리고 상원마저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 지 얼마 후, 이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나의 흔적을 쫓는 상원에게 의문의 남자 경훈이 찾아와 딸의 행방을 알고 있다며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이나의 ‘벽장’. 10년간 실종된 아이들의 행방을 쫓고 있는 경훈은 믿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고 상원은 딸을 찾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열어서는 안 될 벽장을 향해 손을 뻗는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조했습니다.
하정우에게서 어색함을 느낄 줄이야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하정우에게서 왠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무당이 자해를 하는 비디오 테이프 영상 이후 상원과 이나 차를 타고 이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상원이 이나에게 아빠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정말 어색했다. 전혀 아빠같은 느낌이 아니라 삼촌인데 조실부모한 조카와 어색한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상원이 없어진 이나를 찾는 이유도 잘 와닿지 않았다. 나를 찾아줘의 이영애나 박해준과 같은 모성과 부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대뜸 경찰한테 화를 내거나 방송사에 출연하며 아이를 찾는 노력이 분명 아빠인데도 내가 느끼기에는 굳이?? 이런 감정이 들었다. 이나를 찾으러 이계를 향했을 때도 이나를 찾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구했을 때도 전혀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정우에게 아빠라는 캐릭터가 이렇게 어울리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의문점이 들었던 작품이었고, 하정우식 특유의 유머 없이 시종일관 진중함으로 영화를 끌고가다보니 어울리지 않는 옷을 계속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회수하지 못한 떡밥이 있는데?
영화 <클로젯>을 보면서 물음표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막판에 엄청난 떡밥을 던지고 회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영화 초반에 떡밥을 하나 둘 뿌려놓고 마지막 절정에서 파바박 회수를 하고 결말이 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상원이 이나를 찾으러가는 절정 부분에서부터 이상한 떡밥들이 나오더니 결국 설명해주지 못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도대체 왜? 상원의 아내는 이계에서 상원을 죽이려 하는 것일까? 그리고 명진의 엄마는 어쩌다가 나타난 것이고, 왜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인가? 상원의 아내는 사고사였고, 명진의 엄마는 남편의 살인이었는데 명진의 엄마는 이계 속 괴물로 남지 않고 상원의 아내만 괴물로 남았을까? 도통 이해를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뒤 이렇게 찝찝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리셰란 클리셰는 다 가지고 있으면서 설명은 제대로 안되고 굉장히 허무하고,, 루즈하고,, 영화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빨리 끝나면 저 떡밥들을 회수할 수 없을 것 같고, 걱정만 하다가 결국 회수하지 못하는 영화를 보며 굉장히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동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어렵게 풀어내야 했을까?
영화 클로젯의 전체적인 소재는 아동학대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들이 벽장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유는 명진이라는 아이가 벽장 속에서 아빠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억울해 어둑시니가 되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 집에 나타나 한 명씩 자신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부모에게 당한 폭력, 언어적 모욕, 방치, 무관심 등과 같은 아동학대를 당한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명진이라는 아이가 성불을 했음에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또 다른 아이가 벽장으로 들어가려는 듯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아동학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왜 이렇게 어렵게 풀어내야 했을까? 어둑시니라는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괴담과 연결을 하려는 시도는 좋았다. 그러나 어둑시니와 이계라는 설정이 더욱 부각이 되고 하정우의 모험이라는 테마가 전방에 먼저 제시되다 보니 오히려 아동학대라는 큰 주제는 묻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막판에는 김남길이 그냥 대사를 통해 “다들 아동학대를 당한 아이들이었네요.”라고 퉁쳐서 얘기를 하는 바람에 아동학대를 당한 아이들의 절박했던 그 마음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이 영화의 주제가 아동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이 주변에 많으니 관심을 기울여라 인건지 당신도 모르게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남길 배우를 좋아하기도 했고, 스릴러 장르를 선호하는 편이어서 기대를 많이 했던 영화 <클로젯>. 하지만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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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6] 주눅들어있는 평범한 가장의 본 모습, 노바디
존윅의 각본가가 존윅 시리즈를 기획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영화 노바디 입니다.
전반적으로 존윅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집에 침투하는 적을 제압하는 액션 장면도 그렇고,
다양한 격투장면은 존윅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확실히 이 제작진의 인장이 확실히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조금 다른 점은 가족과 아빠의 가정 내 위치에서 소외당하는 모습을 넣어서 가족적인 감정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고 가족에게도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죠.
다른 것 보다 액션이 좋습니다.
존윅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려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물론 있는 영화죠.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끝까지 봐주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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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열혈사제2> 티저 예고편
We're Back! 이번엔 부산이다! 제대로 돌아 버린 구담즈🙃?! 노빠꾸 공조 수사극 [열혈사제2] 11월 8일 디즈니+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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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시그널 X : 영혼의 구역> 메인 예고편
끔찍한 방화와 폭력으로 경찰에 연행된 후
연락이 두절된 엄마.
어느 날 한 통의 연락이 온다.
엄마가 코마 상태라는 것.
의료진은 정신과 정신을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치료 기술을 제안한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구역의 발을 디딘 순간,
기이한 현상이 연이어 벌어지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불분명해지는데..
감히 열어서는 안 될,
새로운 차원의 구역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