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6-22 10:01:43
6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이번주 씨네 뉴스는 국내외 다양한 소식으로 알차게 준비 해 보았는데요!
그럼,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500억원 투자한 <무빙> 예고편 공개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은 15일, 오는 8월 9일 공개를 확정 지었습니다. ‘무빙’은 초능력을 숨긴 채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아픈 비밀을 감춘 채 과거를 살아온 부모들의 이야기를 그린 휴먼 액션 시리즈입니다. ‘무빙’은 누적 조회수 2억 뷰를 돌파한 원작 웹툰 ‘무빙’의 강풀 작가와 드라마 ‘킹덤 시즌2’ 박인제 감독을 비롯해 ‘오징어 게임’, ‘파친코’ 등에 참여한 최고의 제작진이 만들어낸 웰메이드 프로젝트로 류승룡, 한효주, 조인성, 차태현, 류승범, 김성균, 김희원, 문성근 등 대한민국 대표 연기파 배우들의 출연과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 이정하, 고윤정, 김도훈 배우의 만남으로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냥개들> 넷플릭스 비영어 부문 글로벌 1위
넷플릭스(Netflix) '사냥개들'이 공개 2주 차에 톱 10 리스트 1위에 올랐습니다. 사채업의 세계에 휘말린 두 청년이 악의 세력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사냥개들'이 공개 2주 차에 넷플릭스 글로벌 톱 TV(비영어) 부문 정상에 올라 핫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21일 넷플릭스 톱 10 웹사이트에 따르면 넷플릭스 글로벌 톱 10(비영어) 부문 1위에 올라섰고 전 세계 83개 국가 톱 10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D.P. 2> 7월 28일 공개
'D.P.' 시즌2는 군무 이탈 체포조 준호와 호열이 여전히 변한 게 없는 현실과 부조리에 끊임없이 부딪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시리즈입니다. 'D.P.'는 여러 작품상을 수상하고 국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부조리한 사회를 꼬집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준호역 정해인은 "시즌1과 이어지는 하나의 작품이며 조금 더 밀도 있고 깊어진 이야기를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해 헌병대 103사단 D.P.조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2> 캐스팅 공개
시즌2에 새롭게 합류하는 배우들의 라인업이 공개되었습니다.다양한 작품을 통해 그동안 선과 악을 넘나드는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임시완, 강하늘, 박성훈, 양동근의 캐스팅도 확정되어 시즌2에 대한 기대감을 더했습니다. 한편 1차 라인업에 여성캐릭터가 보이지 않아 많은 팬들의 아쉬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상호 감독 <지옥> 아이스너 어워드 아시아 작품상 후보
연상호 감독, 최규석 작가의 <지옥>이 '아이스너 어워드' 아시아 작품상후보에 올랐습니다. ‘윌 아이스너 어워드’는 미국 만화의 거장 윌 아이스너(Will Eisner)의 이름을 따 1988년에 탄생한 미국의 대표 만화 시상식이며 미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만화 시상식입니다.'지옥'은 어느 날 갑자기 초자연적 현상을 겪은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지옥 같은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며 넷플릭스에서 공개와 동시에 흥행1위를 차지했습니다.
박찬욱감독 <전,란>제작 이유, "넷플릭스 가장 좋은 지원"
박찬욱 감독님은 <전,란>을 넷플릭스와 함께 하게 된 과정을 밝혔습니다.
넷플릭스가 간섭없이 가장 좋은 지원을 약속해 줘서 즐겁게 작업을 임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넷플릭스와 같은 스트리밍 회사들이 영화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생긴 변화를 언급하며 영화 제작자의 입장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똑같은 영화임에도 100억원으로 찍느냐, 150억 원으로 찍느냐에 따라 결정적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고 밝혔습니다. 영화 <전,란>은 300억 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으로 넷플릭스 CEO 테드 서랜도스는 박찬욱 감독과 협업에 대해 정말 기쁘게 생각하고 영광이라며 소감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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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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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언제 진짜입니까
* 2022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프터 양 After Yang, 2021
미국 / 드라마 / 96분
감독: 코고나다나는 언제 진짜입니까, <애프터 양>
신나는 음악이 흐르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열심히 팔과 다리를 움직인다. 4인 이상 가족만이 도전할 수 있는 월례 댄스 대회에 참가 중인 가족들. 그중엔 제이크의 가족도 포함되어있다. ‘제이크’와 ‘키라’가 입양한 딸(‘미카’)과 미카의 문화와 유산을 잇기 위한 안드로이드 ‘양’으로 구성된 4인 가족. 안드로이드가 가족 구성원이라는 설정에서 느껴지듯, <애프터 양>의 세계관엔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테크노 사피엔스 말고도 많은 복제인간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인간은 위대한 종족으로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안드로이드와 복제인간과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안정을 찾는 평범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우리가 단순히 필요 때문에 무선 로봇청소기를 사는 것처럼, 그들도 같은 목적으로 안드로이드와 복제인간을 구입하고 사용한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들에게 원하는 서비스엔 ‘가족의 역할’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양이 문화와 유산을 이을 미카의 동반자이자 보디가드, 베이비시터, 그리고 둘도 없는 친오빠로 사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가족이 되는 데 필요한 요소는 <애프터 양>에서만큼은 조금의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혈연? 그런 건 처음부터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의미 없는, 불필요한 것들이다.
양은 항상 바쁜 키라와 제이크를 대신해 미카의 옆을 지켜준다. 입양아란 사실에 미카가 혼란스러워할 때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단단한 뿌리가 미카에게도 존재함을 알려준다. ‘진짜’ 아빠, ‘진짜’ 엄마가 가진 의미를 다시 정의해주며 미카에게 완전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카에게 양은 안드로이드 그 이상의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양이 댄스 대회를 마친 후 깨어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양의 고장으로 제이크는 당황한다. 학교를 잘 다니던 미카는 등교를 거부하고, 아내는 늘 언급했던 문제를 다시 또 꺼내 든다. 양에게 의존했던 부모의 역할을 이젠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들은 미카가 잊지 말아야 할 문화와 유산을 계속 이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양이 없어도 되는 가정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는 양을 고치는 걸 택한다.
새 제품으로 샀다고 생각했던 양은 사실 쓰였다가 온 제품이었다. 한 번도 꺼지지 않은 채 수면 모드 상태에서 여러 고객의 '무엇'으로 살았던 것이다. 제이크는 너무 비싼 수리비에 고민하다 양의 중심부가 문제라는 말에 테크노 사피엔스 박물관으로 향한다. 관장은 양의 중심부에 들어있는 기억장치를 발견하고, 귀중한 연구자료가 될 것이라며 제이크에게 양을 기부해 달라고 부탁한다. 제이크는 확답을 미뤄두고 양의 기억장치를 들고 집에 온다. 홀로 소파에 앉아 양의 비밀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제이크. <애프터 양>의 진짜 이야기는 그가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화면 가득 채워진 검은 하늘과 산발적으로 퍼진 빛나는 별들. 끝없이 아름다운 우주에서 각각 독립된 세계로 살아있는 기억들. 양의 과거는 그 추억 속에, 시간 속에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이크는 별 하나하나에 깃든 양이 담은 시선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몰랐던 양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양과 함께한 시간을 의미 있게 생각했는지 깨닫는다.
양의 기억의 조각들엔 공통적인 물음이 들어있다.
계속 눈으로 세상을, 사람을,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이유를 찾고 있다는 것. 양은 틈만 나면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나란 존재를 마주했다. 차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 좋다는 제이크의 말에 “제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라며 툭 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끝은 시작이란 말을 믿는지 묻는 키라에 “모르겠어요, 그런 믿음은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아서”라며 인간의 씁쓸함 같은 것을 표현한다. 솔직히 끝에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다며 웃지만, 슬픈 적도 있었냐는 물음엔 자신이 느낄 수 없는 슬픔에 대해 고심한 흔적을 보인다. 슬픔, 기쁨, 외로움, 허망함, 분노‥ 그에게 인간의 감정은 딱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다시 말해 아무리 찾아봐도 안드로이드가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 무가 없으면 유도 없으니까요.”
고민하다 키라에게 답한 양의 말. 그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에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생산한다.
양은 ‘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음이, 단순히 손에 잡은 게 없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 역시 주입된 정보였을까? 그는 인간이 되고 싶었을까? 아니, 인간처럼 살고 싶었던 걸까? 양은 왜 갑자기 멈췄을까. 스스로의 의지였을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테크노 소재를 다루는 영화와 비교해 <애프터 양>이 훨씬 더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양의 목적이 ‘인간으로 살고 싶다’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양은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양은 끊임없이 ‘진짜’를 찾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만의 언어로 말이다. 그만의 시선으로, 그만의 기억법으로, 그만의 관계로 ‘내’가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진짜’를 발견하고자 했다. 테크노가 인간이 되고 싶어 하거나, 사랑을 할 수 있냐는 물음은 인간의 관점에서 출발해 인간의 관점 밖으로 나가지 못한 질문일 뿐이었다. 에이다가 제이크에게 인간만이 가진 마땅한 우월함을 꼬집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양은 인간으로 사는 일을 열망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게 필요한 진짜를 찾는 ‘방법’을 궁금했다. 존재의 의무만으로 인간이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듯, 양에게도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다. “행복해?”란 질문이 자신에게 맞는 질문인지 되묻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나비를 좋아하는 중국인이라서 나비를 수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나비를 수집하고 싶은 것처럼. 양은 자신이 저장한 기억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 어떤 감정으로 저장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 정말 의미 있는 감정의 총책인지, 덩어리인지 그리하여 진짜 피부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인간 같은 테크노여서가 아니라, ‘양’이란 유일무이한 개체로서.
왜? 양은 어느 순간부터 누가 묻지도 않은 것들에 의심하기 시작했고, 의문을 품고서 자꾸만 안드로이드인 자신을 봤기 때문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은 의심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 의심으로 인해 생긴 믿음으로 진짜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짜는 평생 나의 존재를, 의미를 만드는 데 계속 작용된다. 거울이 시작이었을 수도 있고, 가족사진을 찍기 바로 직전 어딘가를 응시하던 순간, 복제인간으로 탄생한 에이다의 웃음, 새벽마다 속삭이는 미카의 목소리, 제이크와 키라의 물음이었을 수도 있다. 우린 무엇이 양의 기억장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양이 진작부터 사진만 찍어대는 셔터의 역할에서 이탈해 있었다는 걸 인지할 뿐이다.
제이크는 양의 기억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양이 미카에게 좋은 오빠가 되어준 것처럼, 자신과 아내에게도 좋은 아들, 나아가 친구였다는 걸 몸소 체감한다. 마치 진짜 가족을 영영 떠나보내는 것처럼 그는 키라와 함께 양의 거취를 최종적으로 논의한다. 양의 기억은 인간에게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면서, 테크노 사피엔스 박물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양을 주지 않으려는 기술자에게 내 것이니 설명할 필요가 없다며 딱 잘라 말했던 제이크가 변한 것이다. 미카가 양이 테크노여서 사랑한 게 아닌 것처럼, 양이 미카에게 저장된 뿌리가 아니라 진정한 뿌리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처럼. 두 사람에게 양은 테크노로 기능하지 않은 순간부터 귀중해졌다.
본래 양은 인간이 원했기에 만들어졌다. 인간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이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 한계를 거뜬히 뛰어넘는 힘, 테크노와 복제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분명한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손을 떠난 것들을 결코 좌지우지할 수 없다. 만들고 생산하고, 세상에 내놓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이후엔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어떠한 말로 대체할 필요도 없다.
양의 중심부에 문제가 생긴 건 인간의 계획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발생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양은 죽었지만, 양의 언어론 그는 살아있다.
양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그의 가슴에 귀를 대보는 에이다의 행동이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것도 그래서 당연하다. 양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짜’를 두고 우린 또 우리의 언어로 해석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고찰하는 방식과 같다 하겠지. <애프터 양>은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양의 기억을 끄집어낸 게 아니다. 인간의 방식과 유사해 보인다 해서 인간의 시각으로 읽히는 게 정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양만의 이야기와 양만이 해내고자 하는 지점이 충분히 존재함을 알려주고자 한다. 양은 독립된 대상으로서 나의 진짜를 찾고 싶은 테크노이자, 테크노가 아닌 ‘양’이다. 양의 기억장치는 기계적으로 ‘저장’한 게 아니라 자의적으로 ‘품고’ 있었던 감정의 소용돌이고, 그 속으로 <애프터 양>이 관객을 초대한 것이다.
감독은 <콜럼버스>를 통해 비대칭에서 각자의 균형을 찾는 법을 공유했었다. 그 안에서 각자의 치유의 공간을 찾기를 바랐다. <애프터 양>을 통해선, 존재의 다름과 존재의 존재 이유를 함께 고민해보길 원한다. 코고나다 감독만의 낯설지만, 감각적인 표현방식이 한층 더 세밀하고 섬세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진짜’를 갈망하는 양의 우주가 내게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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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 '잿빛 도시를 향해 뿜어진 붉은 복수심과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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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Sweeney Todd: The Demon Barber Of Fleet Street)
개봉일 : 2008.01.17 (한국 기준)
감독 : 팀 버튼
출연 : 조니뎁, 헬레나 본햄카터, 앨런 릭먼, 티모시 스폴, 시챠 바른 코헨, 제인 와이즈너, 제이미 캠베 바우어
‘잿빛 도시를 향해 뿜어진 붉은 복수심과 광기’
잿빛으로 물든 세상에 빛과 구원은 없다. 파랗게 질려버린 하늘만 남아있을 뿐.이발사 벤자민 바커는 탐욕으로 가득 찬 터핀 판사에 의해 모든 걸 빼앗긴다. 따스하게 내리쬐던 햇볕 아래 아름답게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아내와 딸을 잃은 그에게 남은 건 복수와 악에 받친 광기뿐이다.
<스위니 토드>엔 팀 버튼 감독 특유의 음울한 색채가 가득 담겨있다. 권력에 의해 인생을 약탈당한 벤자민 바커는 ‘스위니 토드’라는 새로운 이름을 짓고, 재를 뿜어내고 있는 새까만 도시로 돌아온다. 무채색에 가까운 낮과 밤. 스위니 토드가 바라보는 무채색의 도시엔 고유한 아름다움과 색을 뽐내고 있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갇혀있는 듯 정적이고 새까맣다. 하지만 그중, 유독 강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색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빨간색이다. 복수, 광기라는 단어와 빨간색이 합쳐지면, 이 색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략 감이 오지 않는가.
이 이야기는 마치 언젠가 유행했던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같다. 선혈이 낭자하고, 단단할 거라 예상했던 사람들의 신체가 한순간에 뭉개진다. 모자람 없이 기괴하다. 다소 잔인하기도 하며 허망하다. 소중한 사람을 되찾기 위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으로 돌아온, 복수심만 남은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에 희망 따윈 존재할 수 없었던 걸까.
스위니 토드 시놉시스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함께 행복한 남자 벤자민 바커(조니 뎁). 그러나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탐한 악랄한 터핀 판사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그 후로 15년. 아내와 딸을 되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복수를 위해 스위니 토드로 거듭나 이발소를 연다. 그날 이후 수 많은 신사들이 이발하러 간 후엔 바람같이 사라져 나타나지 않고, 이발소 아래층 러빗 부인(헬레나 봄햄 카터)의 파이 가게는 갑자기 황홀해진 파이 맛 덕분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데. 그런데 스위니 토드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난 바커가 아냐. 그는 죽었어.”
아름답고 다정한 아내, 작은 숨을 내쉬고 있는 딸을 품에 안았던 벤자민 바커는 이제 없다. 벤자민 바커 가족이 떠나고, 그의 면도 칼이 2층 마루 밑에 묻힌 날. 벤자민 바커라는 인물은 사라진다. 터핀 판사에 의해 끌려간 감옥에서 지옥 같은 15년을 보낸 그에게 남은 건 스위니 토드라는 새 이름과 분노뿐이다. 다시 돌아온 런던은 15년 전 그날에 비해 더 진한 잿빛이 되어있었다. 어둠 속에 갇혀있던 면도칼과 이발 도구가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간 날 밤. 스위니 토드는 면도칼을 들고 이제 곧 루비처럼 새빨간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 말한다.
러빗 부인은 아내 루시가 독약을 먹었다며 스위니 토드가 떠난 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해 준다. 자신의 수모로도 모자라 사랑하는 아내를 농락하고, 거기에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어린 딸을 데려간 파렴치한이라니. 스위니 토드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아직 살아있는 딸을 만나기 위해, 저 위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터핀 판사를 한 번에 잡기 위해서.
스위니 토드는 때를 기다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긋는다. 서서히 광기에 말려들고 있던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들킬 위기에 처하자 폭발해버린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물을 끓이고 있던 주전자로 피렐리의 머리를 내리친 순간, 15년간 쌓아왔던 분노와 원망, 광기가 터져 나온다. 한 번에 터져 나온 그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러빗 부인은 스위니 토드의 옆에 딱 붙어 그가 살해한 사람들로 파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육즙이 줄줄 흐르는, 먹음직스러운 파이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세상이다.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 그리고 어린 토비는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 러핀 판사와 그의 수족인 비들은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러핀 판사는 피고인보다 높은 판사석에 앉아 무심하게 교수형을 선고한다. 피고인은 어린아이였고, 진짜 범인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이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범인인지 확실치 않아도 어차피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말 할 뿐.
러핀 판사는 높은 곳에 앉아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가진 거라곤 사랑하는 가족뿐인 벤자민 바커의 가정을 파탄 내고, 그의 아내를 미치광이로 만들고, 홀로 남겨진 딸, 조안나를 자신의 집에 가둬둔다. 그리고 악을 구원하겠다며 어린 조안나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은 어차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니, 아랫놈이 윗놈을 잡아먹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면도를 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간 남자들은 목이 그어진 채 건물의 지하로 떨어져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다. 아랫놈을 잡아먹는 윗놈에 대한 복수심으로 시작된 잔혹한 일이었다.
근데 이 복수가 참 아이러니한 게, 결국 스위니 토드의 손에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스위니 토드에게 죽은 사람들은 모두 연고가 없는 남자들이다. 우아한 옷을 차려입고, 부채를 펄럭이는 아내와 함께 온 남자는 연고가 있다는 이유로 무사히 살아돌아가고, 그렇지 못한 남자들은 스위니 토드의 손에 죽게 된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함은 스위니 토드가 딸 조안나와 마주치는 순간과 루시의 목을 긋는 순간 절정에 이른다. 복수에 성공한 직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딸의 얼굴을 마주한 스위니 토드는 딸에게 내 얼굴을 잊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아는 사이지 않냐고 물어오던 아내의 목을 긋는다.
그토록 궁금하고 그리웠던 딸에게 건넨 유일한 한마디는 나를 잊으라는 명령이었고,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건 러핀 판사가 아닌 광기로 가득한 자기 자신이었다.
스위니 토드는 뒤늦게 사실을 알고 러빗부인을 오븐에 가둬 태워버린다. 복수는 모두 성공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나의 면도칼에 목을 베인 아내와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딸의 존재뿐이다. 스위니 토드가 토해낸 피는 루시의 얼굴을 타고 흘러 바닥에 닿는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끈적하게 더러워진 바닥 틈새를 파고든다.
이 복수 계획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걸까. 라고 묻는다면 명확히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고귀하지 않다고 여겨지던 자의 피는 벽과 바닥을 타고 톱니바퀴 위에 떨어진다. 피는 톱니바퀴 사이를 파고들고, 톱니바퀴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피는 흐르고 흘러 결국 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 하수구를 타고 흐른다. 그들의 피는 사회라는 커다란 기계를 돌리는 톱니바퀴 사이에서 사정없이 짓이겨지고 있다. 정의가 사라진 사회에서 윗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피는 점점 더 아래로, 더 깊은 곳으로 흘러내려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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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투게더> -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가볍지만 아팠던 사랑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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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투게더(春光乍洩, Happy Together)
개봉일 : 1998.08.22 (한국 기준)
감독 : 왕가위
출연 : 장국영, 양조위, 장첸, 관숙의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가볍지만 아팠던 사랑의 단면’
“다시 시작하자” 보영의 한마디에 아휘는 흔들린다. 보영과 아휘는 연인이지만 연인이 아니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전부 내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깨지고 짧은 한마디로 겨우 다시 접합해놓은 사랑.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균열을 풀칠 몇 번으로 이어온, 어쩌면 지겹게도 느껴지는 사랑. 충분히 아프고 또 아팠으니 이 또한 사랑이었겠다.
1995년.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흘러가고 있던 시간을 이 영화를 통해 붙잡아본다. 저녁 8시, 도시는 바쁘게 반짝이고 보영과 아휘는 작은 집안에서 몸을 밀착한 채 춤을 추고, 사랑을 하고, 갈라서고, 다시 시작한다.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라곤 한 손에 꼽는 낯선 도시에서 다시 돌아갈 고향을 꿈꾸며 아휘는 보영을 놓지 못한다.
보영 역을 맡은 장국영과 아휘 역을 맡은 양조위의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 펼쳐지는 97분의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며칠 전 4월 1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로 영혼을 탈탈 털어가며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잡아탄 택시 라디오에서 장국영의 To You가 흘러나왔고, 저녁 7시 반쯤이 되어서야 알았다.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사실 난 장국영이라는 배우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다. 그는 내가 10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말하기에도 어딘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근데 난 왜 성장기를 같이한 것도, 동시대를 살아본 것도 아닌 저 먼 곳에 있는 그의 눈을 보며 슬픔을 느끼고 있는 걸까. 기분이 묘하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시대를, 발 한번 붙여보지 못한 도시를,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랑의 형태를 내가 받아들이기 버거울 만큼 아련하고 반짝이게 표현해낸 영화였다.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고, 가볍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아프게 가슴을 찔렀던 사랑이 속절없이 절벽 밑으로 추락한다. <해피투게더>는 그 사랑의 단편적인 조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해피투게더 시놉시스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과 ‘아휘’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던 중 두 사람은 사소한 다툼 끝에 이별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얼마 후 상처투성이로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 ‘보영’은 무작정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서로를 위로하며 점차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하지만 ‘보영’의 변심이 두려운 ‘아휘’와 ‘아휘’의 구속이 견디기 힘든 ‘보영’은 또다시 서로의 마음에 상처 내는 말을 내뱉은 뒤 헤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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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자”
보영은 속절없이 깨져버린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다시 시작하자.”.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다 길을 잃은 이별을 선택하지만 보영은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다. 아휘는 당연하게도 보영의 한마디에 휘둘린다. 사랑하니까, 잊을 수 없으니까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아휘는 보영과 이별을 하고 탱고바에서 일하며 보영보단 고향인 홍콩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때 두 사람의 순간들은 흑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아휘의 곁을 맴돌던 보영이 아휘의 삶으로 다시 들어온 순간, 화면에 청록빛의 색채가 드리운다.
보영은 아휘에게 담배를 빌리고, 아휘의 담배로 불을 붙이고, 아휘의 침대를 차지한다. 아휘는 보영을 집에 들이긴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휘둘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자신은 소파에, 보영은 침대에. 크지 않은 집이지만 서로의 영역을 명확히 나눠 두려 한다. 하지만 보영은 아휘가 집을 비운 사이 침대와 소파를 붙이고, 좁은 소파에 누운 아휘의 옆을 파고든다.
보영과 아휘의 사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갑과 을에 가까웠다. 헤어지는 것도 다시 만나는 것도 보영의 뜻이었고, 아휘는 그에 따를 뿐이다. 근데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휘는 손을 다친 보영을 보살폈고, 돈이 없는 보영에겐 아휘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휘는 보영의 옷 안에서 여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숨겨놓는다. 보영이 가진 대부분의 것들이 아휘의 영역 안에 들어온 것이다.
아휘는 보영을 보살피며 지겨울 만큼 끈덕진 사랑을 느낀다. 감기 몸살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날에도 밥이 필요하다는 보영의 한마디에 일어나 밥을 볶았고, 밤중에 담배가 다 떨어졌다는 보영의 말을 듣고 선반에 담배를 한 움큼 쌓아놓는다. 탱고바에서 일하는 게 싫다는 보영의 말에 설거지 일을 구했고, 아픈 보영을 보살피는 게 행복했다. 손이 낫고 나의 도움이 필요 없어지면 그가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차라리 보영의 손이 낫지 않았으면 하는 슬픈 바람도 가져본다.
“넌 항상 제멋대로 하잖아.”
여러 번 깨어진 사랑에 단단한 신뢰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아휘는 여권을 찾는 보영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여권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아휘는 처절하게 사랑의 환부를 잡아보지만, 보영은 그를 외면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이별을 맞이한다. 몇 번째 이별이었을까.
“네가 불행한 게 느껴져.”
아휘의 친구이자 동료인 ‘장’은 어릴 때 눈이 아팠던 경험 때문에 사람의 소리에 집중하게 된 인물이다. 그는 곧 일을 관두고 세상의 끝에 있는 등대에 갈 거라는 목표를 가진 청년이다. 장은 아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목소리에 묻어나는 슬픔을 가늠해본다. 사랑하는 연인도 들어주지 않았던 아휘의 슬픔. 장은 그것을 담아 세상의 끝으로 향한다. 세상의 끝이라는 우수아이아 등대에 도착한 장은 아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음기를 틀어본다. 녹음기 안에 담긴 건 흐느끼는듯한 소리뿐이었다. 그 흐느낌이 말하고 있는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장은 아휘의 흐느낌을 들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아휘가 이별의 아픔을 담은 흐느낌을 녹음기 안에 담아내고 있을 때, 보영 또한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린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은 끝났다. 아휘는 도살장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물로 씻어내며 보영의 지겨운 에피소드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완전한 끝을 맞이했음을 알게 된 보영은 담배를 잔뜩 사들고 아휘의 집을 찾아가지만 아휘는 떠난 뒤였다. 보영은 담요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아휘는 보영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그대로 내려놓은 채 혼자 이과수 폭포로 떠난다. 테이블에 놓인 이과수 폭포 램프 안엔 다정하게 앉아있는 두 사람이 그려져있지만 진짜 이과수 폭포 앞엔 아휘 혼자 서있다. 반짝이는 이과수 폭포 램프를 보며 상상했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아휘는 보영을 생각하며 슬픔을 말한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은 서로의 스텝이 맞춰지지 않은 탱고 같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춤을 추지만 아휘는 스텝을 자꾸 헷갈린다. 보영은 그런 아휘에게 다시 연습해보라며 홀로 연습할 시간을 주고, 다시 탱고를 춘다. 보영과 아휘는 손을 맞잡고 사랑하다가도 스텝이 엇갈리면 가차 없이 손을 놓았고, 아휘가 다시 스텝을 맞춰오면 잠시 함께 춤을 췄다가, 엇갈리면 다시 놓았다. 지금껏 아휘가 보영의 스텝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휘가 그 노력의 끈을 놓은 순간, 사랑은 정말 끝나버린다.
사랑은 “다시 시작하자”라는 말 한마디로 붙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같이 있으면 좋다고,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그 한마디를 왜 그리 아꼈던 것일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지독하게 아픈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엔 사랑하는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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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과 성장에 관하여
첫 장면은 속임수이다. 아이가 건물 옥상에서 도시 전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훌쩍 뛰어내린다.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안전하다. 다만 영화는 아이가 어쩌다가 옥상에서 삶의 막막함을 토로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연소일기>의 이야기는 옛날 물건이 담긴 상자에서 나온 이 소년의 일기장에서 시작된다. 고등학교 교사인 주인공은 오래 좋아한 사람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는 중이고, 관료제 안에 머물면서 학교폭력 사례의 소극적인 처리에 제대로 항변하지도 못한다. 회의에 빠진 주인공이 발견한 옛날 물건은 그가 지금껏 회피해왔던 기억을 불러 온다.
일기장 속에 남은 것은 다름아닌 학대와 그로 인한 트라우마의 기록이다. 입신양명한 아버지가 지배하는 가족 안에서 형제는 사립학교에 다니며 쉴 새 없이 무언가 훈련한다. 동생은 학교 성적도, 피아노도 수준급으로 해내지만 형인 요우제는 다르다. 좋고 싫은 게 무엇인지 알아내지도 못한 나이에 요우제는 동생과 비교당하면서 일과를 견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한 열등감이 들 때도, 성적을 잘 못 받아 왔을 때도 폭력을 휘두르기 일쑤이고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어르고 달래던 어머니도 부족한 성적을 더이상 참아 주지 못한다. 마음을 알아 줄 사람이 없는 요우제는 인형과 대화하고 옥상에 올라가 소리치고, 일기를 쓴다. 혹독한 환경에서 자라지만 그래도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고 쓰는 아이를 보면서 관객은 점점 <연소일기>가 주는 정서에 감화된다.
영화는 순식간에 초반부에 보여준 작은 반전을 다시 한 번 뒤집는다. 일기와 주인공의 현재를 오가고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하다가 영화는 자연스럽게 일기의 끝과 현재 시점을 연결하고, 부러 잊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경험은 주인공의 삶에 있어 변곡점이 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 지점에서 드러나는 반전은 예상 가능하지만, 중요한 점은 노진업 배우가 연기하는 주인공, 즉 죄책감이나 트라우마를 안고 어른이 된 사람이 삶을 반추하면서 마침내 상실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연소일기>는 학대를 고발하는 것처럼 시작하여 결국 상실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언어 폭력, 심지어는 학교 폭력과 자해 이미지까지 그대로 드러내는 연출은 다소 불필요하게 보이기도 한다. 후반부에 가서 눈물을 흘리게 할지언정 관객의 마음에도 죄책감을 불러 오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의 시점에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이런 연출은 관객까지 이것을 목격해야 하는 이유를 묻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 연출이 필요한 이유는 어린 아이의 유년기가 이런 힘든 성장만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두 체험하고(또는 목격하고) 그런 적 없던 것처럼 과거를 외면하면서 살았던 주인공은 <연소일기>가 다루는 이야기 속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함으로써 진짜로 ‘멋진 어른’이 되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연소일기>는 8-90년대의 홍콩 영화에 대한 향수도, 최대한 많은 관객에게 재미를 선사하기 위한 야심을 품은 영화도 아니다. 그저 상실과 성장을 이야기하고 좋은 어른이 되는 것, 목격하고도 방관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목격해야 하는 사건, 헤아려 보아야 하는 일기로 마음에 남는다.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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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레스를 입은 허수아비는 어떻게 자유를 되찾는가?
해당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스펜서>를 본 후의 감정은 이렇다. 한 움큼의 답답함과 불안함 그리고 약간의 상쾌함. 감독은 극이 시작하기 이전에 앞서 “비극”임을 일러둔다. 실제 다이애나 스펜서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많은 이슈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선뜻 비극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이애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뜻을 고집했고 자유를 꿈꿨다. 나는 이러한 삶을 ‘모난 돌이 정 맞은’ 것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올곧게 앞으로 나아가기에는 세상이 뒤틀려 있기에 장애물이 많았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한 3일간의 샌드링엄 별장 생활은 다이애나에게 비극이다. 찰스 왕세자의 외도와 삭막한 영국 왕실의 예법은 쉴 틈 없이 다이애나의 목을 조여 온다. 그러나 자신을 해치기보다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스펜서>는 깊은 불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포착하며 비극 속에서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드레스를 입은 허수아비
영국 왕실의 크리스마스 연휴를 위한 만찬은 마치 군인들의 특별작전처럼 비밀스럽고도 엄격하게 준비된다. 왕가 사람들의 임무는 삼시 세끼 그 음식들을 먹고 연휴를 즐기는 것. 그 증거로 별장에 들어올 때 잰 몸무게보다 체중이 늘어나면 된다. 정해진 음식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옷을 입고 모여 정해진 일을 하면 된다. 이들은 로열 패밀리로서의 기품을 보여주며 얌전히 일을 수행하면 된다. 영국 왕실의 체면과 품위가 떨어지지 않도록.
왕실의 예법에 맞게 모든 것의 쓰임과 용도는 촘촘하게 정해져 있다. 사냥용 꿩, 애완용 강아지는 각자의 용도와 쓰임이 분명하며 그에 걸맞은 의무도 있다. 의상조차 아침식사용 의상, 저녁식사용 의상, 외출용 의상 등등 용도에 따라 계속 갈아입어야 한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이애나 역시 그레고리를 향해 묻는다. 그래서 “당신이 정확히 뭘 하는 사람”이냐고. 그레고리는 ‘감시자’다. 그렇다면 다이애나의 역할과 쓰임은 무엇인가? 왕실에서 바라는 것은 촘촘히 정해진 임무를 얌전히 수행하는 인형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스스로를 ‘왕세자비’가 아닌 ‘엄마’로 규정한다.
고루하고 엄격한 전통의 집안에서 자유로운 여성은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찰스 왕세자의 외도는 암묵적으로 용인되지만,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지정된 옷을 바꿔 입는 것만으로 말이 나돈다. 파파라치는 언제나 렌즈를 겨누고 있고 소문들은 언제나 뒤를 쫓아온다.
영국 왕실이 다이애나에게 기대한 건 예쁘게 차려 입고 얌전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추는 인형이었지만, 다이애나는 독립적이고 당당하며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주어진 역할과 상충하는 자아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비극의 시작이다.
불안한 내면의 아름다운 시각화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다이애나에게 가장 고역은 식사시간이다. 최고급 요리들이 즐비해 있지만 한 입 뜨는 것조차 어렵다. 다이애나를 옥죄어 오는 차갑고 숨 막히는 시선들 속에서 남편이 준 진주 목걸이, 내연녀에게 준 것과 똑같은 그 목걸이는 더 깊이 다이애나의 목을 조여 온다.
다이애나의 처절한 내면적 정신적 불안과 공황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화면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고통스럽게 목걸이를 뜯어버리려 할 때도, 진주를 으득으득 씹을 때도 심지어 그것을 토해낼 때도 의상과 미술에 눈이 갈 정도로 완벽히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화면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있을 때 다이애나는 말한다. “아름다움 따윈 쓸모 없”고,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스펜서>의 미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훌륭하지만, 관객에게 아름다움 뒤에 가려진 그의 내면에 집중해 주기를 호소한다.
한순간에 외부에서 왕실로 편입된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선망과 관심은 사랑과 미움을 모두 담고 있다. <스펜서>는 거대한 구조와 억압 속에서 한 여성이 지워지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완벽한 크리스마스 그리고 KFC
크리스마스이브, 한참 동안 길을 헤매던 다이애나는 겨우 길을 찾는다. 약속시간에 늦었음에도 다이애나는 허수아비의 옷을 벗겨가는 여유를 부린다. 해야 할 일을 앞두고 걱정만 하면서 딴짓을 하는 것처럼 왕가와 만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유예해 보려는 듯 말이다. 마침내 다이애나가 직접 운전하는 차가 아름답고도 완벽한 균형과 대칭으로 조각된 샌드링엄 별장의 정원에 들어선다. 카메라는 높은 부감 숏으로 정원에 들어서는 다이애나의 차를 따라가고 타이틀이 떠오른다.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 시퀀스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윌리엄은 왕실의 전통에 따라 꿩 사냥을 해야 한다. 다이애나는 이를 막기 위해 허수아비가 입고 있던 낡은 스펜서 가의 유물을 입고 총성이 빗발치는 사냥터로 뛰어든다. 결국 윌리엄의 꿩 사냥은 무산되고 다이애나는 두 아이와 함께 별장으로 돌아간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전통에 맞선다. 세 모자는 차를 타고 별장을 떠나 KFC를 사 먹는다. 그 어떠 만찬보다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가 이들에게는 분명한 해방이자 탈출이다.
딱딱한 대칭의 정원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들어온 다이애나는 두 아들과 노래를 부르며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따라 나아간다. 자신이 정한 길을 자신의 리듬대로 나아간다.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고 용기를 내어 살아가고자 한 다이애나의 선택은 ‘기적’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 나서는 유의미한 한 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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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이리시맨' 리뷰
총(銃)은 칼보다 평등하다. 칼을 무기로 잘 사용하려면 완력이 좋아야 하지만, 총은 방아쇠를 당길 정도의 힘만 있다면 누구나 격발할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상대를 총으로 제압할 수 있다. 총이 개입하는 순간 육체적 우위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순식간에 기화(氣化)된다. 총싸움에서는 근육의 무게보다 아무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배짱의 무게가 중요하다. 누구나 총을 쏘려면 쏠 수 있겠지만, 무심하게 총을 갈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과 실행 사이에는 총신(銃身)의 수억 배에 달하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다. 갱스터 무비의 주인공들은 누군가에게 발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책감과 양심에 발포한다. 그들의 사격은 늘 두 번씩 이루어진다. 그 태연한 반복 동작을 보며 관객은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느끼게 된다.
영화 <아이리시맨(The Irishman, 2019)>을 연출한 마틴 스콜세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갱스터 무비의 대가다. <아이리시맨>은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 <좋은 친구들(Goodfellas, 1990)>, <비열한 거리(Mean Streets, 1973)> 등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이름을 영화사에 아로새겼던 그의 대표적 갱스터 무비들과 같은 듯 다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전 그의 페르소나였던 로버트 드니로(프랭크 시런 역)가 조 페시(러셀 버팔리노 역)와 함께 예전처럼 극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켜준다. 여기에 <대부> 시리즈와 <스카페이스(Scarface, 1983)> 등 여러 갱스터 무비에서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연기로 관객들을 겁박했던 알 파치노(지미 호파 역)까지 가세했다. 이처럼 갱스터 무비의 전설들이 힘을 합쳐 범죄, 우정, 배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사실은 일견 <아이리시맨>이 갱스터 무비의 성공 방정식을 재현(再現)하는 영화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리시맨>은 이러한 단편적인 해석을 배반하는 영화다. 1942년생, 한국 나이 79세로 소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마틴 스콜세지 감독, 로버트 드니로(1943년 생), 알 파치노(1940년 생), 조 페시(1943년 생)는 동년배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풍화작용은 그들의 얼굴에도 깊은 주름의 지류를 형성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금언(金言)을 비웃으면서 살인을 비롯한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밤의 세계에서 군림했던 갱스터도, 늙는다. 사실은 법이 아니라 '시간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처럼 늙은 갱스터를 위한 밤거리는 없다. 시간의 절대적인 힘에 저항해 보려는 걸까. <아이리시맨>은 최첨단 영화 기술 중 하나인 'de-aging'을 활용해 세 주연 배우의 얼굴 주름을 펴서, 마치 초혼(招魂)하듯, 그들의 더 젊었던 시절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그렇게 과거의 영광을 복기해 본들 밤거리를 휘젓던 갱스터의 두 다리는 속절없이 좌표를 휠체어로 옮길 수밖에 없다.
(CG로 도배된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비판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de-aging' 활용했다는 것은 영화가 당대 최첨단 기술과 친구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아이리시맨>은 갱스터에게도 봄날은 가기 마련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인생의 황혼을 지나 밤을 향해 걷고 있는 갱스터 무비의 전설들이, 밤의 고요 속에서, 누구나 '평등한 덧없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나직하게 읊조린다. 총성으로 밤의 고요를 깨는 장면들로 점철되기 일쑤인 갱스터 무비가 오히려 밤의 고요를 느끼게 해 준다는 아이러니야말로 <아이리시맨>의 핵심이 아닐까. <아이리시맨>의 엔딩 크레디트를 채우는 'The Five Satins'의 'In the Still of the Night(밤의 고요 속에서)'를 들으며 나는 침묵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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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이런 영화가 있다고?! 지구의 미래를 예언한? 그 영화!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보이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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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어공주> 메인 예고편
"곧 갈게요, 당신 곁에" 바다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에리얼의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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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파라마운트+ <1883> 공식 예고편
파라마운트+ 최고의 인기 시리즈 [옐로우스톤] 그 이전의 이야기 서부로 가기 위한 목숨을 건 위대한 여정 파라마운트+ 오리지널 [1883] 6월 16일 티빙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