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M2021-03-23 22:42:00
마담 보바리 (1949) / Madame Bovary (1949)
/ 감상 /
이 영화는 '마담 보바리' 소설의 원작자인 플로베르가 재판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죄목은 문란한 혹은 사회의 규율을 위반하는 소설을 지은 죄이다.
그는 마담 보바리의 욕정이 넘치는 모습은 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근데 사실 난 잘 모르겠다.
그 시대는 여성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여성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성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자신의 사랑 혹은 욕망을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하고 분출하는 마담 보바리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녀가 찰스를 비롯한 자신의 가정에 한 행동을 옹호하기 위한 발언으로밖에 안보인다.
여기서의 마담 보바리는 그냥 욕망에 쩌들어서 가정을 버린 여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폐급 인간이다.
솔직히 보면서 찰스가 너무 불쌍해서 절로 욕이 나왔다.
노트북의 노아를 잇는 찐 사랑꾼 찰스..
자신 몰래 바람피고, 그 내연남에게 배신당했다고 남편 앞에서 실신하고, 자기 앞으로 빚을 잔뜩 떠넘기고, 갑자기 자살하는 그녀 앞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찐사랑과 대인배적 모먼트에 무릎을 탁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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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소설을 원작으로 한 고전명작영화!
내가 본 영화 중 아마 가장 오래된 영화 아닐까..
Madame Bovary, C'est moi!
- Gustave Flaubert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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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을 말한다는 것, 진실을 믿는다는 것
얼 모리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불안이었다. 진실이란 언제나 명백한 것일 줄 알았다. 어딘가에는 분명 확실한 답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실제 범죄 사건을 다루면서도, 영화는 명확한 사실보다 누가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진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1976년 텍사스에서 벌어진 경찰관 살인 사건, 랜들 아담스라는 청년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가 범인이라는 결론은, 경찰의 조사와 증인의 증언, 그리고 법정의 판결이라는 그럴듯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결정들이 얼마나 허술한 기억과 편향된 시선 위에서 이루어졌는지 낱낱이 파헤친다. 감독은 수많은 인터뷰와 재판 기록을 차분히 들추며, 표면 너머에 숨은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놓는다. 관객은 그 잔해 속에서 사건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되짚어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실을 재구성하는 방법 자체를 이야기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치는 재연 장면의 반복이다.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인물의 증언을 따라 반복해서 재연함으로써, 영화는 하나의 고정된 진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총이 발사된 순간, 자동차의 위치, 인물의 움직임까지도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그 차이들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진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가서게 만드는 미세한 흔들림이자,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쉽게 조작되고 조형되는가를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 반복이 혼란스럽게 느껴졌지만, 곧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던지는 가장 강렬한 질문임을 깨닫게 된다. 재연은 진실을 왜곡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오히려 진실을 구성하고 또 구성하면서, ‘우리가 믿는 진실은 누구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영화는 이 질문을 통해,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진가는 잘못된 판결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나아가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사실, 경찰 수사에서 제시되는 정황, 그리고 증인들의 증언 모두가 인간의 해석과 선택에 따라 뒤틀릴 수 있는 주관적 진실임을 드러낸다. 즉, 진실은 언제나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감정 속에서, 혹은 의도 속에서 형태를 달리하며 조용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은 때때로 감추어지고, 심지어 파괴되기도 한다. 그 감각은 영화 ‘추락의 해부’를 떠올리게 했다. 이 작품 또한 한 남성의 추락사를 둘러싼 재판 과정을 따라가며, 진실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때로는 부재하는가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가늘고 푸른 선’이 수많은 오류 끝에 결국 현실을 바로잡는 데까지 나아갔다면, ‘추락의 해부’는 끝내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진실의 불확실성을 더욱 부각한다. 그 안에서 진실은 점점 모호해지고, 관계의 균열과 침묵의 의미만이 선명해진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른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만, 공통으로 법정이라는 공간을 통해 진실의 허약함과 인간적 균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닿아 있다.
감상 내내 마음 한편에는 묵직한 불편함이 남았다. 그 불안은 단지 영화 속 인물의 억울한 사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믿어온 세계의 규칙들이, 사실은 허술한 기억과 틈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진실은 과연 존재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는가? ‘가늘고 푸른 선’은 완전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진실을 향한 치열한 탐색이자, 우리가 믿어온 사실들에 대한 조용한 반박이 된다. 진실은 흔히 단단하고 분명한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이 영화는 그 진실이 얼마나 연약하고 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가? 영화는 그 질문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남긴 여운은, 현실을 조금 더 낯설게,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든다.
사진 출처 : M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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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배트맨 / The Batman, 2022
아는 것만 해도, "배트맨"은 "팀 버튼"을 시작해 "조엘 슈마허 - 크리스토퍼 놀란", 그리고 "벤 에플랙"까지 많은 배우들과 감독들이 지나간 캐릭터입니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배트맨"의 등장은 기대감보다는 피곤함이 앞섰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옆 동네 "마블"은 <어벤져스>로 진중하게 끝을 본 것과 달리, "DC"는 아니면 싶으면 새로운 작품을 내놓으니 어렵고 복잡했습니다.
그렇기에 해당 작품의 176분 소식은 이런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챙겨본 <더 배트맨>은 결과부터 말하자면 '왜, <트와일라잇>때 "로버트 패틴슨"을 보고서 열광했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는데요.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영화 <더 배트맨>의 감상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담의 새로운 시장을 뽑으려는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가운데, 현 고담 시장은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됩니다.
이내 현장에서 "배트맨"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지만, 그 내용은 "수수께끼"로 채워져 있는데요.
그리고 다음 목표물로 지정된 이들이 죽어나가며, 살인범은 점점 "배트맨"을 압박하는데...자, 새로운 배트맨은 누기야?
1. 원래, 탐정이었습니다?
이번 <더 배트맨>은 학창 시절, 선생님께 한 번쯤은 들어봤을법한 "너희들이 무슨 어둠의 자식들이냐?"를 언급할 만큼 어두운데요.
이는 보이는 화면의 밝기뿐만 아니라 본 작품의 이야기에도 해당되는 소리입니다.
이런 이유에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태어났는지?'가 아니라 그가 속해있는 "DC 코믹스"의 정의를 알아야만 합니다.
지금이야 "슈퍼 히어로"쯤으로 여기고 있으나 그 원제는 'Detective Comics',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라는 것이죠.
특히, 37년에 처음 발간된 것과 할리우드에서 40년대부터 시작한 "필름 누아르"가 성행했던 시기를 생각하면 이번 <더 배트맨>은 "수구초심"으로 돌아간 것이죠.여우는 죽을 때 구릉을 향(向)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 - 首丘初心 (수구초심)
흔히, 범죄자 혹은 이들이 구성된 "암흑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장르를 "필름누아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해당 장르는 "흑백"으로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해당 캐릭터들의 심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더 배트맨>도 이를 생각해 "흑백(黑白)"으로 보여줘야겠지만, "온고지신"이라고 할까요? - 본 작품은 흑과 백이 아닌 적(赤)을 보여줍니다.
이야기로 살펴보면, 빨간색은 '위험' 혹은 '피'를 상징해 '죄악'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깜깜한 밤에 범죄를 일으켜도 티가 나지 않음을 말하지만, 의외로 과학적으로 어두운 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색깔은 빨간색입니다.2. 몸보단 수 싸움에 능한 히어로
영화 <더 배트맨>이 보여주는 흑과 적의 대비는 이번 "아카데미"의 "시각효과 부문"에 이름을 넣어주고 싶을 만큼 인상적인 비주얼을 선사합니다.
가령, 어둠 속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의 "다스베이더"의 등장을 떠올릴 만큼 선·악을 떠나 관객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데요.
엄연히, 공포 영화가 아님에도 관객들을 놀래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비주얼만 바라봐도 충분히 만족할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본 영화 <더 배트맨>의 이야기는 어땠을까요?음. 이해했어('못했다'라는 뜻)
먼저, <더 배트맨>의 빌런 "리들러"는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원작에서도 이를 단서로 제시하는 것으로 이번 초심을 되찾는 데에는 가장 적합한 캐릭터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영화는 "리들러"가 제시하는 단서에 졸졸 따라가기만 하는데요.
이런 수사극의 재미를 이전 다른 리뷰에서도 밝혔듯이 관객 스스로 주인공에 이입해 단서를 껴 맞춰 적극성을 띠게 만듭니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들마다 느끼는 재미의 격차가 존재합니다. - 아는 사람들은 아는 대로 재밌을 거고,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3. 3시간과 꼭 있어야만 싶었던 캐릭터들?
그도 그럴 것이 "추리"라는 장르부터 관객들의 이해도에 따라서 재미의 격차가 존재해 진입장벽이 꽤 있습니다.
물론, 해당 영화의 추리는 난이도가 높지 않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DC 코믹스"의 원제를 몰랐던 기존 관객들에게 본 작품은 잔잔하게 느껴져 본 작품에 실망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 우리가 원한 건 "슈퍼 히어로" 였으니까요.
아무튼, 이를 제외하더라고 해당 영화의 추리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옷걸이는 아니었지만...
마지막 범인의 동기는 해당 캐릭터의 매력이 반감될 정도이니 3시간이라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을 제외하고도 "펭귄"과 "캣우먼"이 등장합니다.
이들과의 관계로 각자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시너지를 발산시키나 "추리"라는 본 뿌리를 생각하면, 이들의 등장과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리들러"의 마무리가 더더욱 안타까웠습니다. -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 시절, 여성분들이 왜 <트와일라잇>에 열광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았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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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 | 운전대 주인이 바뀌는 과정을 차분히 쫓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견과류 식품 공장에서 일하는 '정순'(김금순)은 외롭다. 남편과는 사별했고, 딸 '유진'(윤금선아)은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까. 그런 그녀 앞에 '영수'(조현우)가 나타난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고, 동료들과 등산도 같이 하면서 정순은 그에게 빠져든다. 정순은 주변의 시선을 걱정하며 더 나아가지 못하지만, 영수의 거듭된 구애에 마침내 마음을 연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뿐, 정순의 일상은 이내 파괴된다. 영수가 공장 직원들 사이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겠겠다며 정순과 찍은 은밀한 영상을 젊은 관리자 '도윤'(김최용준)에게 보여준 것. 영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정순은 충격에 빠지고 칩거한다. 유진이 엄마를 대신해 가해자들을 경찰에 신고하지만, 정순은 딸을 만류하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추스르고 새로운 내일을 열기 위해서.
세련된 범죄 드라마, <정순>
범죄, 특히 성범죄 사건을 소재로 삼는 영화는 두 가지 문제를 마주한다. 성범죄를 어떻게 묘사할지, 그리고 피해자의 서사를 어떻게 구성할지가 관건이다. 범죄의 양상과 경과를 관객에게 전달할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여줄지, 어느 정도의 자극까지 허용할 지에 대한 판단이 늘 애매하기 때문.
이에 더해 피해자에게 어떤 서사를 부여할 지도 문제다. 만약 피해자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묘사한다면 범죄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서는 범죄 사건과 수사 과정으로부터 쾌감과 재미를 끌어내기 위해 피해자를 플롯의 도구로만 활용한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처럼 해당 이슈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작품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매혈기>와 <버티고>로 주목받은 정지혜 감독의 신작 <정순>은 흠잡을 데가 많지 않다. 주인공 정순의 성범죄 피해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심각성을 명확히 인지시키는 연출이 인상적이기 때문. 그뿐만이 아니다. 중년 여성 피해자의 감정선을 우직하게 쫓으며 그녀의 고통뿐만 아니라 재기 과정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즉, <정순>은 세련됐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드라마다.
엄마, 아줌마, 노동자의 틀을 깨다
<정순>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우선 전반부는 정순의 일상을 비춘다. 정순이라는 인물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차분히 포착한다. 이때 정순의 일상 속에 정작 '정순'의 모습은 없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녀는 직원, 엄마, 아줌마의 탈을 쓰고 바쁘게 살아간다. 공장에서는 다른 여직원의 화장이 너무 진한 거 아니냐고 참견하는 오지랖 많은 아줌마다. 그러면서도 친한 동료들과는 등산도 같이 가는 활달한 직원이다. 또 집에서는 평범한 엄마다. 결혼을 앞둔 딸이 결혼식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걱정을 놓지 못한다. 그 사이에서 한 개인이자 주체로서 정순의 모습은 많지 않다.
하지만 영수가 공장에 취직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정순이 영수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그들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한다. 물론 엄마로서 결혼을 앞둔 딸과 예비 사위의 반응을 걱정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보지 않을까 우려도 한다. 하지만 그 걱정마저 떨쳐내면서 정순은 영수 앞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그 순간 엄마, 아줌마, 노동자로서는 맛볼 수 없는 짜릿한 행복이 그녀를 감싼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그러나 <정순>의 분위기는 일순간 전환된다. 영수 앞에서 찍은 은밀한 영상이 주변인들에게 유포된 것. 대명사로만 불리던 그녀가 '정순'을 맛본 바로 그 순간이 동의 없이 타인에게 공개되어 버렸다. 그녀가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은 이제 그녀에게 가장 큰 고통과 수치를 안긴다.
그녀의 일상으로 가득한 전반부가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하다 보니 정순의 추락이 초래한 분위기 전환은 유달리 날카롭고 뼈아프다. 이는 카메라의 구도와 움직임에서부터 느껴진다. 사건 이후부터는 전반부와 달리 핸드헬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또 대상을 보다 가까이에서 포착하며 인물들의 호흡과 변화를 보다 역동적으로 담아낸다. 그 덕분에 혼란상도 더 자세히 느껴진다.
특히 정순의 심경 변화를 포착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범죄 해결보다는 피해자에게 철저히 초점을 맞추면서 자칫 그저 변덕처럼 보일법한 괴로움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정순을 온종일 누워서 집에 칩거하다가도, 경찰 수사에 협조하기도 하고, 이내 빨리 일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다가도 특정한 계기로 인해 참아둔 분노와 한을 토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 덕분에 <정순>은 평범해 보이면서도 세련됐다. 범죄 자체의 잔혹함을 강조하고, 선정성을 윤리적 경계선까지 끌어올리면서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화법을 피해 가기 때문. 오히려 피해자의 심경 그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관객 뇌리에 경각심이 더 강렬하게 각인되기도 한다. 애써 일상으로 돌아오던 정순이 엄마를 목놓아 오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정순이 운전대를 잡는 방법
이에 더해 <정순>은 정순을 피해자라는 틀에 가두지 않는다. 그녀가 스스로 틀을 부수고 나오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 과정은 고정관념을 역이용하기에 더 인상적이다. 영화는 고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이라는 설정을 살려 정순으로부터 주체성을 계속 뺏으려 한다.
하지만 정순은 그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 기꺼이 대항한다. 이 대목에서는 김금순 배우의 열연이 특히 두드러진다. 그녀는 노래 '지나가'를 반복해서 부르는데, 노래 가사와 노래 속에 담긴 정순의 감정선 변화만 따라가도 영화 전체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다.
정순의 변화는 다른 장면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운전대를 잡는 사람이 달라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중반부까지 정순은 운전을 할 줄 모른다. 영수나 유진이 운전하는 차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출퇴근을 한다. 그러나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달라진다. 가해자를 피하거나 숨는 대신, 당당하게 맞서는 법을 깨우친다. 엄마, 아줌마, 공장 노동자라는 역할과 지위에 갇혀 있다가, 자기 힘으로 탈출하는 법을 익힌다.
비슷한 장면은 또 있다. 영수가 머무르는 모텔 앞에는 노숙자가 한 명 있다. 처음에 정순은 그 노숙자를 경계한다. 모텔을 드나들 때마다 그녀가 혹시 자기 얼굴을 알아보고 소문을 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종국에는 자기 힘으로 술 한 병, 담배 한 개비도 구하지 못하는 그녀를 안쓰러워한다. 이처럼 커져가는 정순의 주체성은 다른 피해자에게 전하는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단 한 가지 옥에 티
다만 <정순>에도 옥에 티가 존재한다. 흡입력이 다소 부족하다. 독립영화임을 감안해도 관객을 휘어잡는 힘이 약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특히 초반부에서 문제가 두드러진다. 정순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화법은 필연적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힘이 떨어지기 때문. 기술적인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특히 음향이 아쉽다. 대사와 주변 소음이, 혹은 대사끼리 겹친 나머지 극장에서도 대사가 안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도가 떨어지는 중년 여성의 일상 공간을 스크린 위에 비범하게 재구성하는 힘만큼은 확실히 남다르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 2관왕인 이유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늦은 개봉이 꽤 아쉽다. 영화제 출품과 수상이 대체로 작년, 재작년에 이뤄졌다 보니 화제성 면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Acceptable 무난함
담백하게 불타며 빛을 발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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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새>, 그래도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두 번째로 보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긴 여운이 남은 영화였다. 처음 보기 시작할 때는 ‘러닝타임이 꽤 길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계속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라는 생각이 들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나오면 ‘벌써 끝나 버렸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장면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담고 싶을 만큼 편안한 색감을 띄는 것이 이 영화를 보고, 또 보게 하는 매력인 것 같다.
전반적으로 잔잔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영화를 보다 보니 어딘가 ‘소란스럽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14살 소녀 은희가 마주한 거대한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들 때문인 것 같다. 인상 깊었던 장면을 이야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은희가 친구 지숙에게 자신을 때리는 오빠 때문에 자살하는 상상을 얘기하는 장면이다.
- 내가 자살을 하는 거야. 오빠 새끼가 괴롭혀서 힘들다고 유서 남기고.
- 죽고 나서 하루만 유령으로 있는 거야. 그 새끼 막 울고 아빠한테 혼나. 그럼 난 그걸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상상을 한다.
- 그러면 난 막 상상만 해도 후련해.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이런 상상을 해야 하는 은희의 모습에 탄식이 저절로 났다. 그리고 지숙의 대답인 “다들 우리한테 미안해하긴 할까?”라는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갑자기 내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아직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진심을 담아 미안해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어른들이 너무 많다.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사과를 받지 못하고 눈앞의 현실에 낙담하고 있을 아이들이 많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바꿔 나가야 할 과제이다.
은희가 우연히 발견한 엄마를 애타게 부르지만, 엄마는 전혀 듣지 못하고 그런 엄마를 은희가 그저 바라보는 장면이다. 아마 이때 엄마는 돌아가신 외삼촌, 즉 엄마의 오빠를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그리워하고 있던 것 같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데 닿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금 당장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다시는 그 사람을 직접 만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참 이상하다. 감정이 무뎌져서 당장 눈물이 펑펑 날 정도로 슬프진 않은데 그냥 좀 마음이 이상하다.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가만히 그 사람을 생각하다 보면 주위의 소리가 차단되며 멍-해지기도 한다. 잠시 정적에 휩싸인다. 이 장면에서 은희의 엄마가 딱 그 상황이지 않았을까.
영지가 다툰 이후로 사이가 서먹해진 은희와 지숙에게 ‘잘린 손가락’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다.
-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 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잘린 손가락 묻고 오던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
피 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
하루하루 지쳐진 내 몸 쓴 소주에 달래며
고향 두고 떠나오던 날 어머니 생각하며
술에 취해 터벅, 손 묻은 산을 헤매고 다녔다오
터벅터벅 찬 소주에 취해 헤매어 다녔다오
영지의 정적인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조용히 영지의 목소리를 듣고, 눈빛을 바라보고, 가사를 곱씹어보면 괜히 울적해진다. 노래를 다 부른 영지는 은희와 지숙을 보며 햇살같이 웃는다.
이 장면의 영지는 정말 ‘새벽’ 같다.
‘선생님은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으세요?’라는 은희의 물음에 대한 영지의 대답이다.
나도 내가 좋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사람들도 누구나 나 자신이 싫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을 접하기 전까지의 나는 내가 싫어질 때 자책하곤 했다. 나를 싫어하는 그 감정을 외면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내가 마냥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나 자신이 좋을 때도 있듯이 내가 싫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이다.
오빠에게 맞고 지낸 은희에게 앞으로 맞지 말고, 가만히 있지 말라는 말을 건네는 영지의 모습이다.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는 사람, 맞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사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사람.
‘가만히 있지 마’라는 말을 실제로 해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나조차도 이런 말을 선뜻 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용기가 있다는 점에서 영지는 참 좋은 사람 같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 하루를 겪어도,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웃던 사람이 떠나도, 친한 사람과 사이가 잠깐 틀어져도, 내게 위로가 되어주던 사람의 다정한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도,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
나쁜 일을 겪으면 신기하게도 기쁜 일이 다가온다. 어떤 인연을 놓치면 놀랍게도 또 다른 좋은 인연이 찾아온다.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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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권에서 씹어먹은 장르 '청춘멜로' 영화 추천작
씁쓸하면서도 찬란하고, 아련하면서도 아름답다.
중화권의 ‘청춘멜로’는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중화권의 젊은 세대는 전통적 가치와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경험하며
혼란을 겪어왔기 때문에, 그들의 '시절'을 되짚어 보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너’ ‘시절’ ‘우리’ ‘청춘’이란 단어가
영화 제목에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아닐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청춘적니
17살, 빈 교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링이야오'에게 첫눈에 반한 '뤼친양'. 그의 순수한 고백에 '링이야오' 역시 호감을 느끼며 두 사람은 사랑을 쌓아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랑이 전부일거라고 생각했던 10대와 달리 20대에 들어선 두 사람은 점차 현실적인 문제들로 지쳐가고, 마침내 두 사람이 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날, '뤼친양'은 '링이야오'를 위해 운명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내 청춘 속 누구보다 빛났던 너, 세상 끝에서 다시 함께하게 될 거야"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이제 막 17살이 된 ‘커징텅’은 ‘쉬보춘’, ‘아허’, ‘라오차오’, ‘랴오잉홍’과 친한 친구가 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학교 최고 모범생 ‘션자이’를 좋아한다는 것! 어느날, 수업 중에 상상도 못할 장난을 치다 딱! 걸린 ‘커징텅’은 ‘션자이’에게 특별 감시를 받게 된다. 범생이와 문제아 사이, 절대 좁혀질 것 같지 않았던 거리는 점차 가까워져 가고… 잘해보려는 속마음과 달리 자꾸만 엇나가는 순간, ‘커징텅’은 자기 나름대로 마음을 고백하지만 ‘션자이’는 대답하지 않고, 15년이 지난 후에야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는데… 반짝이는 열일곱, 첫사랑이 시작됐다! 영원히 기억될 두근거림이 다시 한번 극장가에 돌아온다!
소년 시절의 너
시험만 잘 치면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기댈 곳 없이 세상에 내몰린 우등생 소녀 ‘첸니엔’과 양아치 소년 ‘베이’.
비슷한 상처와 외로움에 끌려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 두 사람은 수능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첸니엔’의 삶을 뒤바꿔버릴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첸니엔’만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베이’는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 모든 것을 해결하기로 마음 먹는데… “고마워. 내 세상의 전부, 소년시절의 너.”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1987년, 오랜 세월 지속했던 계엄령이 해제된 대만. 같은 반 남학생 자한과 버디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방에 퍼져 있는 동성애 혐오.
그리고 너무나 무거운 부모님의 기대. 두 사람은 이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먼 훗날 우리
2007년 춘절, 귀향하는 기차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된 ‘린젠칭’과 ‘팡샤오샤오’. 베이징에서 함께 꿈을 나누며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현실의 장벽 앞에 결국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된다. 10년이 흐른 후, 두 사람은 북경행 비행기에서 운명처럼 재회하고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남색대문
단짝 친구 ‘위에전’에게 사랑을 느끼는 ‘커로우’ 같은 학교 남학생 ‘시하오’를 짝사랑하는 ‘위에전’ 그리고 ‘커로우’의 비밀을 알지만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시하오’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이 선명해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에 어쩔 줄 몰랐던 열일곱 가슴 아린 짝사랑과 설레는 첫사랑 사이에서 한 여름의 성장통을 지나는 세 청춘의 이야기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
“만일 그때 너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면 지금의 난 달라졌을까?” 18년 전의 대만 타이난.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생 ‘지미(허광한)’는, 배낭여행 중 잠시 일자리를 찾아 온 일본인 ‘아미’를 만난다. 천진난만한 그녀와 지내는 동안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이 자라는 ‘지미’. 그러나, 돌연 ‘아미’가 귀국을 하게 되고 갑작스런 이별에 충격을 받은 ‘지미’에게 ‘아미’는 서로의 꿈을 이룬 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떠난다.
“나 지금, 너에게로 가고 있어” 시간이 지나 현재. 타이페이에서의 성공한 삶에 지쳐 고향에 돌아온 ‘지미’는, 예전에 ‘아미’로부터 받은 그림엽서를 발견한다. 첫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나고 자란 일본으로의 여행을 결심하는 ‘지미’. 도쿄부터 가마쿠라, 나가노, 니가타 그리고 ‘아미’의 고향 타다미로 향하는 도중 예기치 않았던 소중한 만남을 되풀이하며 ‘지미’는 ‘아미’와 보냈던 그 여름의 나날들을 떠올린다. 이윽고 다다른 ‘아미’의 고향에서 ‘지미’가 알게 된 18년 전 ‘아미’의 진짜 마음이란...
여름날 우리
처음이었다, 사랑이 싹트는 기분 너에게 풍덩 빠져버렸던 17살의 여름. 너를 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21살의 여름. 그리고 몇 번의 여름이 지나고 다시 만난 너, 이젠 놓치지 않을 거야. “널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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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스맨, 긴 여정의 시작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The King's Man, 2020)
개봉일 : 2021.12.22. (한국 기준)
감독 : 매튜 본
출연 : 랄프 파인즈, 해리스 딕킨슨, 리스 이판, 젬마 아터튼, 디몬 하운수, 다니엘 브륄, 매튜 구드, 톰 홀랜더
쿠키 영상 : 1개
관람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성애적 장면은 없음)
킹스맨, 긴 여정의 시작
매너 있는 신사의 거침없는 액션을 보여주며 612만이라는 스코어와 “manners make man.”이라는 명대사를 남긴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상상해 본 적 없었던 콜린 퍼스의 절도 있는 액션과 ‘영국 신사’라는 이미지에 딱 맞아떨어지는 배우들의 멋진 수트핏. 그리고 B급 감성이 물씬 느껴지지만 호쾌하게 터지는 악당들의 머리들.. 아니 액션까지. 잔인하지만 특이하게도 발랄하게 느껴졌던 영화, 킹스맨은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주인공 에그시가 킹스맨의 요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1편,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와 에그시와 해리, 그리고 형제 조직인 스테이츠맨까지 가세해 더욱 활동 범위를 넓힌 2편, <킹스맨: 골든 서클>을 지나 3번째 시리즈로 돌아온 킹스맨은 스파이더맨의 강세에 기죽지 않고 기특할 만큼 꾸준히 스코어를 올리고 있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시리즈의 3번째 편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킹스맨의 첫 번째 이야기 이전에 있었던 프리퀄, 0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최고의 양복점 킹스맨에 자리하고 있는 독립 정보기관 ‘킹스맨’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짚어준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00년대 초반으로, 평화를 바라기 어려웠던 갈등과 전쟁의 시대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이 시기에 실제로 일어난 보어전쟁과 강제수용소, 사라예보 사건, 세계 1차 대전과 같은 사건들과 러시아의 비선 실세였던 그리고리 라스푸틴. 빌헬름, 리콜라이 황제, 여성 스파이 마타하리 등 실존 인물들을 차용해 이야기의 틀을 만든다. 역사를 몰라도 영화를 이해하는데 큰 문제는 없지만, 알고 보면 더 재밌을 것이다. (몇 가지 키워드를 조사한 후 2회차를 했을 때, 몇몇 배우와 실존 인물들의 외적 싱크로율에 감탄했다..)
킹스맨 시리즈인 듯 아닌 듯, 새로운 느낌
개인적으로 킹스맨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가 두 가지 있다. 유연하고 시원한 액션과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음악, 주연 배우들의 멋진 수트핏. 그리고 커다란 위기 앞에서도 잃지 않는 유쾌한 분위기. 하지만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이전 시리즈들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실제 사건들을 주로 다뤄서인지 유쾌함보단 진중함에 더 무게를 둔듯하고, 일명 킹스맨스러운 액션신도 적다. 수트보다는 활동복이 주가 되면서 주연 배우들이 가진 ‘영국 신사’스러운 고급진 분위기와 수트핏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도 이전 시리즈에 비해선 적다. 유쾌한 분위기의 킹스맨 시리즈를 기대했다면 사뭇 다른 분위기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킹스맨’ 시리즈의 근본을 잃지 않는다. 첫 수트는 1번 재봉실에서 맞춰야 한다는 전통, 스테이츠 온 더 록, 칼날이 장착된 구두와 요긴한 무기가 되는 우산, 요원들의 코드명 등 앞서 공개된 시리즈에서 언급됐던 킹스맨의 흔적들이 눈에 띌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거기에 얹어지는 킹스맨의 탄생 과정은 이 시리즈를 사랑하는 관객들의 세계관을 한층 넓혀준다. 영화는 신사적인 평화를 이루고, 불필요한 폭력과 희생은 만들지 않는다는 킹스맨의 정신과 평화를 위해 또는 폭력으로 인해 희생된 인물들을 기리는 술잔과 같은 킹스맨의 전통의 시작점을 보여주며 ‘킹스맨’이라는 단체의 정체성을 다시 읊어준다.
사심을 충족해 준 배우들
‘킹스맨’이라는 브랜드의 특징을 빼놓고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다른 매력을 찾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배우들이라고 말하겠다. 독특하고 거대한 존재감을 뽐낸 라스푸틴 역의 리스 이판 배우와 든든한 서포터 폴리, 숄라 역을 맡은 젬마 아터튼, 디몬 하운수 배우. 감쪽같은 3역 연기를 보여준 톰 홀랜더 배우의 활약이 빛났다. 특히 리스 이판 배우가 보여준 광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고대했던 주인공 부자 옥스포드 공작과 콘래드 역을 맡은 랄프 파인즈와 해리스 딕킨슨 배우의 케미였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구스타브로 가장 유명하지만, 알고 보면 엄청난 동공 미남 랄프 파인즈와 그의 젊은 시절을 닮은듯한 해리스 딕킨슨의 조합은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난다.
해리스 딕킨슨이 킹스맨에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말레피센트2>를 통해 처음 만나고, <마티아스와 막심>에서 다시 만난 그는 몇 마디 되지 않는 대사와 웃을 때면 은은히 올라가는 입꼬리로 내 마음의 문을 뻥 걷어찼는데,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를 통해 그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다. 군복도, 수트도, 사냥 수트도.. 그냥 혼자 다했다.
킹스맨 시리즈 입문자도 부담 갖지 않아도 될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매력적인 배우들과 함께 킹스맨의 시초를 훑어볼 수 있는 영화다. 시리즈물이라 하면 왠지 이전 편을 모두 보고 가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에 관람이 망설여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부담감을 내려놓고 관람해도 좋다. 이전 편들과 연결되는 킹스맨의 상징물들이 있긴 하지만, 미리 알고 가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퍼스트 에이전트를 먼저 보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 시크릿 에이전트, 골든 서클을 관람하며 퍼스트 에이전트에서 본 물건들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시놉시스
역사상 최악의 폭군들과 범죄자들이 모여 수백만 명의 생명을 위협할 전쟁을 모의하는 광기의 시대.
이들을 막으려는 한 사람과 그가 비밀리에 운영 중인 독립 정보기관, ‘킹스맨’의 최초 미션이 시작된다!
베일에 감춰졌던 킹스맨의 탄생을 목격하라!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평화에 대한 두 부자의 신념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스토리는 옥스포드 공작과 콘래드 부자의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직접 전쟁에 참여했던 옥스포드 공작은 거울 속에 비친 잔혹한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평화를 갈망하게 된다. 그는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며, 아들인 콘래드는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란다. 의미 없는 싸움에 참여하기보단 그것을 외면하길, 그렇게 안전하게 살아가길 말이다.
콘래드는 자신을 지극히 아끼는 아버지, 옥스포드 공작을 사랑하지만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한다. 위험을 외면한다면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고, 직접 전쟁에 뛰어들어 평화를 쟁취하겠다는 입장이다.
여러 나라의 관계가 얽히고, 결국 터져버린 전쟁 앞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고 싶어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위험한 세상으로 뛰어든다. 수백만이 무의미하게 죽은 2년간의 전쟁, 평화보다는 적들을 죽이는 것이 먼저인 전쟁. 참혹한 현실을 보게 된 콘래드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총알을 뚫고 귀환하지만 허무하게 죽고 만다.
이 시대의 평화를 위해 신념을 깬 옥스포드
옥스포드는 “조국을 위한 죽음은 감미롭고 명예롭다.”는 거짓말 아래서 죽어간 수많은 청년들을 위해 자신의 평화에 대한 신념을 깬다. 싸움을 외면하고, 누구도 죽이지 않기로 다짐했던, 평화주의자의 오래된 신념을.
옥스포드는 앞서 러시아의 황실을 주무르던 위험 인물 라스푸틴을 죽이고 한참 동안 시름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아들 콘래드의 신념을 잇기 위해 잠시 평화주의를 내려놓는다. 옥스포드는 콘래드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전쟁 영웅의 상징인 빅토리아 훈장을 이용해 모트의 스카프를 끊어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그가 일반 칼이 아닌 훈장으로 스카프를 끊는 장면은 옥스포드가 콘래드의 신념을 이었다는 상징이면서도 훈장에 남은 붉은 천 조각을 바람에 흘려보내며 전쟁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붉은 스카프를 두른 전쟁의 원흉인 인물들도 함께 끊어내면서 말이다.
이후 옥스포드는 콘래드와 같은 수많은 청년들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비밀 조직 킹스맨 에이전시를 창설한다. 코드명은 콘래드가 애칭처럼 사용했던 아서왕과 기사들의 이름으로 지정하고, 콘래드가 보낸 리드 상병도 함께 요원으로 발탁한다. 그가 높이 치켜든 희생자들을 기리는 술잔은 전통이 되어 <골든서클>에서도 등장한다.
평화를 지키고자 했던 평화주의자이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만든 독립 조직 ‘킹스맨 에이전시’는 이렇게 탄생한다. <퍼스트 에이전시>에서 해리가 슬쩍 흘렸던, 킹스맨은 전쟁과 그 후의 남은 이들의 재력으로 만들어졌다던 탄생의 떡밥이 이제야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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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도시1-3 시리즈 초간단 요약 / 사진만 봐도 기억나는 듯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범죄도시 시리즈 요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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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비스> 본투비 슈퍼스타 예고편
그야말로 파격적?? 관객들이 이토록 환호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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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베를린> 공식 예고편
세상에는 거부할 수 없는 강도 범죄가 있다. 어떤 사랑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종이의 집》 세계관의 《베를린》, 넷플릭스에서 12월 29일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