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7-12 08:59:06
‘리틀 오대수’, 사이버 렉카로 생존하라
영화 〈좋.댓.구〉 리뷰
배우 오태경이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오대수의 아역을 맡은 것은 행운이었을까? 적어도 〈좋.댓.구〉를 찍을 때쯤의 오태경에게는 행운이 아닌 듯하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아역배우’라는 편견을 넘기 어려워 연기 기회가 줄어들고 점점 잊혀가는 배우 오태경.* 변화를 모색하고자 유튜브를 시작했지만 채널에는 파리만 날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조롱한다. 갈 데까지 간 태경은 큰맘을 먹는다. ‘어린 오대수’를 벗어날 수 없다면 돈이라도 벌어보자는 것.
〈올드보이〉 오대수 분장으로 구독자 앞에 등장한 그가 새로 내세운 콘셉트는 구독자 소원 수리다. 구독자가 어떤 부탁을 하던 오대수 분장을 하고 출동해 소원을 들어주는 식이다. 별 반응이 없던 이전 유튜브와 달리 새 채널에는 구독자가 스멀스멀 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액을 후원한 구독자가 소원 하나를 의뢰한다. 광화문 광장에 아무 말 없이 피켓만 들고 있는 남자의 사연을 알아봐달라는 것.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의외로 만만치가 않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적힌 피켓을 든 남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피켓만 들고 있다가 사라져버린다. 태경이 아무리 그 앞에서 말을 걸고 도발해도 꿈쩍도 않는다. 이에 ‘피켓남’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하고, 어느새 태경의 유튜브 채널과 피켓남은 전 사회적 화젯거리가 되기에 이른다.
〈좋.댓.구〉는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이 곧바로 돈과 영향력으로 전환되는 시대의 모습을 그린다. 스크린라이프 형식을 차용한 영화는 내내 인터넷 방송 화면으로 이어지는데, 유튜브 이용자의 댓글과 ID를 비롯해 온라인 방송 제반 등을 현실감 있게 재현해 몰입감을 높인다. 구독자 수를 합치면 4,000만에 이른다는 실제 인플루언서들과 깜짝 놀랄 만한 카메오도 많이 나와 재미를 더한다. 진실‧사실보다는 관심‧호응이 더 중요한 우리 시대의 모습을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영화를 따라가는 재미는 상당하다. 관객과 수싸움을 하려 드는 반전이 아니라 영화의 플롯과 메시지를 살리는 반전이 연이어 이어진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사이버 렉카’의 난립에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겠다는 회의가 들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믿음의 불가능은 회의를 불러오지 않는다. 어차피 처음부터 사람들이 원했던 건 진실이 아닌 관심거리였을 뿐이고,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유튜버는 자신이 그 관심의 통로가 되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리틀 오대수’가 사이버 렉카들 틈에서 무사히 생존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며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그들의 선동에 들썩이며 부화뇌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버 렉카들은 동시대인들의 관심을 먹고 자란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박상민 감독은 기획 단계부터 오태경 배우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고 밝혔고, 오태경 배우 역시 이 영화의 70~80% 정도가 자신이 이야기 같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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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사라진 여자와 퀴어를 영화로 기억하는 법
럭키, 아파트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영끌’로 작은 아파트를 장만한 9년 차 레즈비언 커플 선우와 희서. 이제 행복한 일만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잘 나가던 희서는 회사의 남성 동성 친밀성 사회에서 배제당해 성과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희서의 가족은 그녀에게 이성애 결혼을 계속 압박한다. 희서가 아파트 마련 비용을 대부분 마련한 데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선우는 배달 일을 하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지만 일하다 다리를 다쳐 오히려 걱정만 끼친다. 집을 마련하기 위한 대가는 두 사람의 생각보다 거대했다.
문제는 이 모든 문제를 감내할 감정적 토대의 근원이 되어주어야 할 아파트에조차 이상한 일이 생긴다는 점. 선우와 희서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악취로 괴로워하다 그 냄새가 혼자 살던 할머니가 고독사한 후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희서가 회사와 원가족 일로 지친 사이 선우는 홀로 그 할머니에 대한 조사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 지독한 냄새에서 레즈비언 친밀성의 계보를 발견하고, 그 계보를 통해 위기의 희서와 선우는 다시금 단단해진다. 어느 ‘무연고자’가 남긴 삶의 조각들을 차근히 채워나가는 집요함으로 그려낸 이 계보는 기록‧기억되지 않고 스러진 소수자의 삶을 복원하고 상기하는 일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펼쳐내 보인다.
양양
한국경쟁
자신이 화목한 가정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고 생각하는 주연은 어느 날 술 취한 아빠와의 통화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고모처럼 되지 말아라.” 1953년생으로, 이십 대 초반에 자살한 고모 이야기였다. 이미 장성한 성인인 주연은 혼란을 느낀다. 왜 지금껏 고모의 존재조차 몰랐던 걸까? 왜 이제껏 가족 중 누구도 고모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걸까? 주로 여성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온 주연은 이제야 이름을 알게 된 고모 양지영의 삶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감독의 탐구는 ‘화목한 가정’이라는 자기 믿음을 처음부터 재검토하는 데서 시작한다. 남아 선호 사상이 당연하던 시절에 장녀로 태어난 고모는 공부를 잘했으나 서울로 대학 가는 일을 허락받지 못했다. 취재를 이어나가면서는 고모가 오늘날의 교제 살인을 당했으리라는 분명한 정황이 발견되기도 한다. 쉬쉬하던 어른들이 수수께끼처럼 던진 말은 고모의 죽음이 ‘개인적 비극’이라는 느낌을 줬지만, 감독이 취재한 고모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에 더 가까웠다. 고모는 남자친구 집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가족조차 이 일을 쉬쉬했기에 이제껏 온당한 추모를 받지 못했다. 이 뒤늦은 추모는 죽은 지 50여 년 후에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조카에 의해 이뤄진다. ‘조카’이자 ‘후배 여성’인 양주연이 양지영의 삶을 복권하는 과정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개인적 비극을 사회적 비극으로 재해석하여 가족의 서사를 전체 여성의 서사로 확장한다.
말께리다스
프론트라인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칠레의 감옥에 갇힌 여성들이 핸드폰으로 몰래 촬영한 저화질 영상으로 구성되었다. 대체로 가난하고,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자주 감옥에 들락거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카메라가 주로 찍는 건 아이들이다. 이 여성들은 아이가 2살이 될 때까지만 직접 돌볼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아이를 밖으로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엄마와 떨어졌을 때 엄마와의 연결성이 극적으로 취약해지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엄마들은 애틋하고 간절하게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렇게 하면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다는 듯이. 이 엄마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이들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는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는 진심을 담아 촬영한 조악한 영상으로 이 강제된 이별에 어떤 방식의 인도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쉬이 설득해낸다. 진심을 다해 돌봐줄 엄마가 사라졌을 때 아이들이 또 다른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성 수감자들끼리의 사랑과 그들이 만들어낸 촘촘하고 따뜻한 네트워크, 열악한 감옥에서의 삶 등을 두루 망라해 보여주는 이 영화는 긴급한 호소로 읽힌다. 어머니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정원의 운율
영화보다 낯선
베를린 외곽. 트레일러들이 수풀 속에 불규칙적으로 늘어져 있다. 퀴어 페미니스트 그룹 ‘몰리스’가 거주하는 곳이다. 영화는 공동체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그 작은 세계의 분위기와 리듬을 관객이 직접 감각할 수 있도록 차근히 전한다. 꽃, 고양이와 강아지, 독서, 클럽 음악, 피어싱, 타투 등등. 서로 그리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 대상들이 나름의 관계성으로 얽혀 독특하면서도 편안한 경관을 펼쳐낸다.
그러나 이 공간은 그리 단단하지 못하다. 한 비정규직 구성원의 사회적 취약성과 마찬가지로 그 토대가 연약하다. 꽃 안으로 극단적으로 파고들어 오랫동안 머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그 안으로 들어가면 트레일러 주변에서 들려오는 공사 소리를 막을 수 있다는 듯 집요하다. 하지만 공사 소리가 가까워지는 일을 중단시키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소수의 사람이나마 기대고 쉴 수 있었던 이곳은 “있었지만, 이제 없다”. 영화가 기록한 이들 정원의 운율은 계속 울려 퍼질 수 있을까?
힘을 낼 시간
한국경쟁
망해버린, 26에 은퇴한 아이돌 멤버 셋이 제주도로 뒤늦은 수학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들은 더는 아이돌이 아님에도 여전히 아이돌로서 훈련받은 것들을 몸에서 떨쳐내지 못한다. 지난 시간 생존하기 위해 혹독히 견뎌냈던 것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이들을 자꾸만 붙잡는다. 그러나 K-POP 아이돌 ‘산업’에서 ‘상품’이 되지 못한 이들이 겪는 문제들을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세세히 짚어내는 이 영화의 주요 정서는 역설적이게도 희망이다. 내내 이들을 실패한 과거에 붙들어 매는 것들이 불쑥불쑥 소환되지만 그 이면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겠다는 결심, 즉 힘을 낼 시간이라는 깨달음이 있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내내 절망적인데 영화가 내내 희망의 질감을 보인다는 역설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절망과 희망의 기묘한 공존과 끝내 희망의 손을 들어주는 여정은 매우 흡인력 있다.
그리고 예라가 있다. 자살한 아이돌 멤버 예라는 이 셋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세 친구는 예라를 추모하고 자신들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힘을 낼 시간〉은 캐릭터의 앙상블과 아이돌 산업에 대한 구체적인 취재 내용이 청년을 위로하는 서사와 깊이 어우러지는 따뜻한 영화다. 당신이 나처럼 K-POP 아티스트를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위로받을 때마다 이 영화를 함께 떠올리며 그 자리에 서지 못한 다른 얼굴을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위 영화의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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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독일] 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장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면,
당신은 천국의 문턱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마틴과 루디라는 두 인물을 통해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질문을 던진다.
같은 병원, 같은 병실. 서랍 속 데킬라 한 병을 나누며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서로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다는 말에 병원을 뛰쳐나온다. 병원 주차장에서 훔친 벤츠와 그 안에 실려 있던 100만 마르크로 양복을 맞추고, 고급 호텔에 머물며 사치를 누리기도 한다. 호텔에서 작성한 버킷리스트는 둘의 여정에 새로운 꿈을 더하고, 이들은 훔친 돈을 돌려주거나 마음에 드는 주소로 돈을 보내며 세상에 작지만 따뜻한 흔적을 남긴다.
계속되는 경찰과 조직의 추격 속에서도 두 사람에게는 이상하리만치 큰 운이 따른다. 그리고 여정의 끝에서 마틴과 루디는 처음처럼 데킬라 한 병을 들고 바다로 향한다. 마침내 마주한 끝없는 수평선 앞에서, 이들은 조용히 파도를 바라본다.
다소 유치한 총격전, 어딘가 나사 하나씩 빠진 듯한 경찰과 악당, 돈을 훔친 이들을 순순히 보내주는 인심 좋은 보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운 좋은 주인공들.
언뜻 보면 이 영화는 어디선가 본 듯한 B급 영화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엔딩까지 제대로 음미하고 나면, 더 이상 이 영화를 가볍게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제법 유쾌하게 풀어낸다. 영화에서는 시한부인 마틴과 루디가 웃고 떠드는 모습을 내내 보여준다. 그 모든 장면이 따뜻하면서도 유쾌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중간중간 종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마틴의 모습, 그에게 약을 챙겨주는 루디의 손길은 그들이 삶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죽음 앞에서 시작된 꿈
보통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마틴과 루디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삶에 더 가까워진다. 바다를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들이, 죽음을 직면한 후에야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나간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병원을 뛰쳐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나였다면?
두 사람은 여유롭게 드라이브를 즐기며 말한다.
“트리니다드, 발리, 아카풀코, 하와이… 발음도 어려운 데로 가자.”
처음엔 그저 바다를 보는 게 목표였던 이들이 더 큰 꿈을 품게 된다. 전 같았으면 상상조차 못했을 꿈들이다.
카메라는 차량 백미러에 쓰인 한 문장을 비춘다.
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
영화 초반, 마틴과 루디는 그저 평범한 행인일 뿐이다.
죽음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일탈과 새로운 시작 역시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마틴과 루디는 죽기 직전에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아카풀코도, 하와이도, 마음먹는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이 된다.
천국에는 주제가 하나야. 바다지.
영화에서 바다는 단순한 자연의 풍경이 아니다. 삶의 목표이자, 소망이다.
영혼 속의 불길만이 영원한 거야.
유일하게 남아있는 불은 촛불 같은 마음속의 불꽃이야.
영화는 여러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천국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결국 바다뿐이며, 그 끝에 남는 것은 영혼 속의 불꽃이라고.
마틴과 루디에게 바다는 삶의 마지막 꿈이었고, 불꽃은 그 꿈을 향한 여정을 가능케 한 갈망과 내면의 용기였다.
나의 바다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바다를 향해 달릴 만큼 마음속 불꽃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가.
삶의 끝에 선 마틴과 루디의 여정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꿈을 다시 꺼내 보게 하고, 지금껏 삶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조용히 묻는다.
천국엔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다. 결국 우리가 천국에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 품었던 꿈, 그리고 그 꿈에 대한 진심이다.
마틴과 루디는 지금도 바다가 보이는 어딘가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바다를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천국의 문턱 앞에 섰을 때, 우리도 우리만의 바다를 이야기하자.
“그럼 뛰어. 시간이 얼마 안 남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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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출변형에 당한 답정너
이 글은 영화 [헤레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거짓말 같은 변신이 아닐 수가 없다.
한때 멜로영화의 남주(남자 주인공) 역을 휩쓸던 남자가 헤레틱(heretic, 이단)이 되어버렸다니.
만우절 이벤트라며 로맨틱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이른 개봉을 할 때만 해도. 더 솔직히 얘기해서 여전히 뭔가 내게 해 줄 말이 있을 것만 같은 저 광고 속에서 촉촉하게 빛나는 눈을 볼 때만 해도. 뭐 끽해봐야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니? 정도의 대사를 내뱉는 정도일 줄 알았다.
그러나 영화관에 들어가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광고에서 보던 스윗함(?)은 온데간데없고, 그가 만들어 낸 미궁의 집처럼 앞뒤 꽉꽉 막힌 답정너가 되어 숨통마저 막을 듯한 기세로 영화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물론 각본을 먼저 쓴 뒤였겠지만, 두 소녀와 한 중년남자가 나오는 공포영화를 제작하려면 제약이 매우 많았을 것이다. 대립의 과정에서 액션적인 요소가 많지도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슬래셔 무비로 가자니 아직도 멜로 눈알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 이 남자는, 안쓰럽게도 간식 트레이 하나 드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역으로 캐스팅되어 버렸다.
덕분에 영화는 넓은 무대를 바탕으로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지도 않고, 점프 스퀘어가 난무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시종일관 반전에 반전이 꼬리를 물지도 않는다. 러닝타임의 절반은 미스터 리드(휴 그랜트)의 거실에서, 나머지는 골방(?)에서 진행될 정도로 세트 자체의 변경도 매우 단조로우며. 몸싸움이 아닌 말싸움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이 모든 숨 막히고 답답한 제약들은 어쩌면 공포영화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단점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 하는 본질을 관통하는 가장 큰,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장치가 된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끝없는 통제 속에서 살고 있는 구) 로맨틱 (서브) 남주가 믿음 하나만으로 뭉친 두 전도사에게 공포를 유발하는 방법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긁기"이다.
리드는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에 이스트)에게 시종일관 불쾌함을 유발하는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그저 타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소통방식에서 오는 의아함에서 시작하더니 점점 그 강도를 높여 나중에는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질문들을 서슴지 않고 던진다. 게다가 분명히 처음에는 궁금함을 가장한 순수한 질문에서부터 나중에는 강압적으로 진술을 요하는 태도로 두 수녀들을 압박한다. 그것도 여전히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유들유들한 말투로 빙긋 미소 지으면서.
불쾌함은 처음엔 향수처럼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나중엔 점점 쌓이더니 두터운 연기처럼 몸을 휘감는다. 어느새 주변에 가득한 연기에 당황하며 입을 틀어막는 순간부터는 이 모든 질문들이 쌓여 있는 공간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수녀는 안타깝게도 하나하나 설계된 이 공포 속에서 간신히 숨만 얕게 몰아 쉰 채 비상구를 향해 전진해야만 한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계시록]의 민찬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게 우연의 당위성을 책임전가 한다면. 마이크로 컨트롤을 사랑하는 이 남자는 그 믿음 자체가 스스로가 만든 것임을 주장하기에 민찬 보다는 나아 보이다가도. 신의 존재 자체를 현미경 위에 올려 부관참시를 해놓고는 결국 그 빈자리에 자신이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그리고는 외친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해 스스로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리드는 두 수녀가 완벽하게 길을 잃은 순진한 양이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출구가 하나밖에 없는 미로에 집어넣으면. 반드시 그 통로로 나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면 자신은 또 한 번 신이 되어 우월감과 동시에 두 수녀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수녀는 기출변형에 가까웠고. 통제를 벗어난 뿔난 두 염소는 기세 좋게 그가 만든 세계를 박살 내며 리드에게 돌진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밑에 무릎 꿇고 고개를 떨어뜨릴 거라 생각했던 팩스턴 수녀는 스스로를 믿기로 마음먹은 채 그의 신념과 목에 배신을 찔러 넣었다. 게다가 거짓의 결정체라 생각했던 반스 수녀는. 거봐 네가 틀렸잖아.라는 듯 그에게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최후를 선물했다.
통제를 벗어나고 교리조차 소용없어지는 순간에. 리드는 자신이 그렇게도 우습게 보던 것들에 의해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았다. 참으로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마치면서
사진 출처:다음 영화
그 어떤 A24의 영화보다도 호불호가 갈릴 영화다.
영화는 다소 설명적이며 수많은 개념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설명하는 장면들에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기 때문에 들여다보는 데 있어 부담감은 없지만. 마치 이제 중학교 수준 영어 듣기를 마친 사람에게 아이엘츠 시험 리스닝을 들이미는 것 같은 속도감의 설명은 자칫 관객들을 피로하게 만들 수도 있다.
누군가가 땀 흘리게 쫓기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좌식 생활에 익숙해져서 앉은자리에 풀도 안 날 것 같은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도 영화 중간중간에는 공포를 압도하는 밋밋함이 찾아오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채 버리지 못한 멜로 눈알을 굴리며 수녀들에게 서서히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휴그랜트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영화에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의 TMI]
1. 영화관에서 팝콘 안 먹기 3회 성공
2. 너무 피곤해서 영화 보고 오는 길에 종점까지 갈 뻔함.
3.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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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름을 끌어안는 바다 위 무지갯빛 베스파는 사랑을 싣고
※영화 〈루카〉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한 작은 바닷가 마을 포르토로소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오랜 이야기가 있다. 조업을 위해 바다로 나선 어부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인근 해안가에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이 출몰한다는 것.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종종 사진에 찍히는 미지의 존재를 가십거리 삼고, 괴물에 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일부는 직접 사냥꾼이 되어 마을의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그리고 바다 밑 작은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농장 일을 돕는 ‘루카’(제이콥 트렘블레이)는 인간들이 말하는 바로 그 ‘바다 괴물’ 중 한 명이다. 이들은 물고기와 자신들을 잡아가는 바다 위 ‘육지 괴물’을 두려워하며 철저히 그들에게 존재를 숨긴 채 살아간다. 여느 때처럼 물고기를 기르던 양치기 루카는 바닥에 떨어진 바깥세상의 물건을 발견하고, 자신과 같은 ‘바다 괴물’이지만 육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알베르토’(잭 딜런 블레이저)를 만난다. 호기심 많은 루카는 절대 육지에 올라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에도 물 밖으로 나가 인간으로 변신하고, 알베르토와 함께 넓은 세계를 경험하며 자신만의 꿈을 키운다.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투사하는 스크린 밖 어른
어린이가 서사의 중심인 작품에서는 종종 주인공을 어리석은 어른이 망가뜨린 세계를 구원하고 행복을 되찾을 유일한 존재로 그린다. 세상의 갈등과 모순을 발견하고 악당을 물리쳐 모두를 구하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영웅 서사는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었던 어린이의 성장담과 결합한다. 둘의 결합은 외면받던 소수가 거대한 상대방과의 대결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통쾌한 역전극이 되어 주인공을 응원하는 독자의 감정적 동요와 쾌감을 자아낸다. 또한 창작자는 더 나아가 기성세대가 초래한 사회의 병폐를 폭로하고 변화를 원하는 주제의식을 서사에 주입한다. 어린이의 이야기로 사회적 메시지를 스크린에 가장 잘 구현하는 감독 중에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반전과 환경오염,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의 모순에 목소리를 내 온 그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으로 어린이를 중심에 내세운 거대한 상상력의 세계를 창조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사회적 메시지와 함께 이를 바꿀 미래세대의 낙관적 희망을 담아낸다. 굳이 어른처럼 보이려 하지 않는 아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갑작스레 주어진 사건들을 헤쳐나가며 미래의 구원자가 된다. 그들은 절멸을 초래하는 거대한 살상과 전쟁의 위기에서 지구를 구해내고, 사악한 마법사가 건 저주를 풀어내기 위해 길을 나서며, 실수로 접어든 신들의 세계에서 부모님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닌다. 그렇다고 마냥 큰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만 하지 않는다. 지브리는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 나서는 남매와 요괴의 우정이나, 육지로 가출한 바다 소녀가 경험하는 세계를 그리기도 한다. 아이들의 눈에 일상은 언제나 커다란 모험과 같다. 이를 가능케 하는 순수한 상상력을 애니메이션 영화는 스크린에 구현해주며 수많은 어린이와 어른 관객에게 또 다른 인식의 공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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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애니메이션에 깊은 영향을 받은 〈루카〉의 감독 엔리코 카사로사는 어린 시절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작은 해변 마을을 배경으로 인간에게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던 한 소년이 가두었던 장막을 걷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과정을 은유한다. 바다 괴물 루카의 우정과 성장을 담은 소소한 일상의 풍경 안에는 혐오와 배제가 일상인 반목의 시대에 거친 바다를 헤치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있다. 살면서 바다를 떠난 적 없던 루카는 누구보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색칠할 캔버스와 같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루카의 상상 장면은 알베르토와 줄리아를 만나면서 다양하고 정교해진다.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루카의 세계는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고 확장한다. 알베르토가 알려준 별과 달의 모습은 줄리아를 거치며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달라진다. 그렇다고 알베르토의 이야기가 무의미한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루카는 어떤 설명이든 그 자체를 사랑하고 보듬는다. 이것이 영화가 강조하는 시대의 미덕이자 상대를 대하는 관점이다. 알베르토가 알록달록 꾸민 베스파 그림에 루카는 줄리아가 알려 준 천체망원경을 추가한다. 둘의 관계를 질투한 알베르토는 툴툴대지만 루카는 개의치 않고 최고의 그림이라고 칭찬한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토바이의 엔진 구조나 천체물리학 같은 정확한 사실과 지식이 아닌 알베르토와 줄리아와 함께하는 즐거운 순간이다. 야생의 베스파가 들판에서 뛰노는 상상도, 저 하늘의 빛나는 물고기를 만나는 꿈도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행복한 시절에서 파생되었고, 이들 없이는 무모한 상상도 없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함께 대회를 준비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때로는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불같이 화내기도 한다. 둘의 정체를 알게 된 줄리아는 짐짓 당황하지만 마지막에는 당당히 그들의 편에 선다. 알베르토는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루카를 외면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용기를 내어 루카를 도와준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고 이해하는 게 가장 어려워 보이는 어른들에게 ‘언더독’ 3인방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너덜너덜하고 테이프 범벅인 베스파 그림처럼 찢기고 상처 받아도 모두를 담은 본질은 그대로라는 진리는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혐오를 딛고 공존을 이뤄내는 포르토로소
차별의 공포와 싸우며 닫힌 문을 열어가는 모두를 응원하는 영화는 사랑과 꿈, 우정과 용기를 어린이의 시선으로 세상의 편견에 맞서 자신만의 길을 떠난다. 바다 괴물이라는 특수한 소재로 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보여주는 루카와 알베르토의 이야기는 자칫 납작해질 수 있을 권선징악의 이야기에 부피감을 부여한다. ‘평범한 일반인’과는 달리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며, 실제와는 달리 상대방에게 불안과 위협의 존재로 낙인찍힌 이들은 현대 사회에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당하는 모든 소수자를 대입할 여지를 남긴다. 바다 괴물을 묘사하는 마을의 여러 상징물과 이미지는 타인을 혐오와 차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이들의 기저에 담긴 공포와 분노가 이유 없는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수의 권력은 소수자의 왜곡된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며 공공연히 전시한다. 차이를 유희와 가십의 대상으로 보는 배타성은 소수자에게 폭력과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바다 마을 주민들은 그들을 ‘육지 괴물’로 부르며 피한다.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과 차별을 거듭하는 설정은 인종과 국적, 성별과 장애, 경제적 조건을 망라한 혐오의 기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소수자의 존재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줄리아는 궁핍한 형편에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도우며 ‘아웃사이더’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방인인 알베르토와 루카와 함께 ‘언더독’ 소리를 듣고 이상하다는 눈총을 받는다. 관객은 줄리아의 아버지 마시모의 첫 등장과 함께 거대한 덩치와 벽면에 걸린 커다란 작살, 그리고 능숙한 칼솜씨에 어떠한 고정관념을 떠올린다. 그가 오른쪽 팔이 없다는 설정은 여러 해적 모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거친 선원들의 세계에 몸담다 일말의 사건에 휘말린 끝에 불의의 사고로 상실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시모는 루카에게 오해와는 달리 그의 팔이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고 말한다. 바다 괴물 사냥꾼이며 남성적 외모를 지닌 마시모에게 흔히 부여하는 설정을 비틀어 선천적 장애를 지닌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영화는 다양성의 외연을 넓혀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춘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이들은 하나의 유사가족으로 뭉치며 세상의 편견에 대항해 변화를 가져온다.
영화의 유일한 악당인 에콜레는 자신이 가진 물리적, 경제적 권력으로 타인을 지배하며 자신의 사상을 강요한다. 다르다는 이유로 작살을 들이밀고 싸움을 걸어오는 그는 현실에서 차별과 혐오를 일삼는 이들이 가하는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구체화한다. 애니메이션에 담기기에는 위험해 보이는 장면임에도 영화는 가해자의 폭력이 끼치는 심각성을 강조하듯 가시적인 위협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수자가 느끼는 폭력과 혐오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영화의 태도는 창작자의 배려와 이해를 느끼게 한다. 이런 상황에도 그의 존재는 마을 사람들조차 눈엣가시이며 성가실 뿐이다. 에콜레와 동조하던 일부 무리도 실은 그의 폭력에 품은 불만을 견디다 못해 그를 응징하기에 이른다. 영화가 가해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들이 엄청난 권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별것 아닌 소수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혐오의 스피커를 키워 과대평가된 에콜레는 줄리아가 그를 향해 외치는 ‘당연하고 옳은 말’에 줄곧 지겹다는 주장만 반복한다. 하지만 당연한 진리는 현실이 되어 무논리의 허상을 폭로한다. 영화는 지겹도록 똑같지만 모두의 삶을 지지하는 유일한 진리를 반복하는 꾸준함이 갖는 힘을 유일한 빌런의 패배로 보여준다.
루카의 사랑이 혐오를 이기는 순간
영화의 중심 주제는 단연 LGBTQ를 고려한 퀴어 서사다. 감독은 부인했다고 하지만 〈루카〉의 서사를 퀴어 영화로 구분하지 않을 수는 없다. 디즈니 픽사는 그간 수많은 게이 캐릭터를 등장시켰지만 명시적으로 확인해준 바는 없다. 최근에서야 단편 애니메이션 〈Out〉으로 동성애자 캐릭터를 전면으로 내세웠지만 장편 애니메이션에서는 아직 없었으며, 〈루카〉 역시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커뮤니티와 평론가들은 다양한 은유와 상징으로 만들어진 성 소수자 캐릭터인 루카와 알베르토를 인정하고 있다. 영화의 중심 플롯은 루카와 알베르토의 사랑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알베르토와 루카는 청소년기에 겪는 사랑과 우정, 선망과 질투 같은 다양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관계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감정적 교감을 하는 두 소년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고는 일견 평이한 성장 이야기에 담긴 서사의 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바다 괴물이라는 설정은 정체를 드러낼 수 없다는 점에서 성적 지향과 연결되기 충분하다. 알베르토는 루카보다 먼저 세상에 나와 살아가지만 아버지와의 이별과 세상과의 단절로 높은 담의 성벽 위에서 홀로 지낸다. 성 소수자의 현실과 감정적 혼란을 상징하는 노골적인 설정이다. 또한 아버지와의 이별 역시 그의 성적 지향을 인정하지 못한 부모와의 갈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외롭던 알베르토 앞에 등장한 루카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이 된다. 영화는 서로를 친구 이상으로 느낄 수 있을 장면들을 여럿 보여준다. 줄리아와 가까워지는 루카를 보고 질투의 감정을 느낀다. 결국 둘 간의 다툼으로 홧김에 알베르토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머뭇거리던 루카가 끝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가슴 아픈 장면은 잘못된 아웃팅으로 상처 받는 이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영화 속 주변 인물로 지나쳤던 두 할머니 캐릭터마저 바다 괴물이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 역시 사회 속에서 숨기고 지냈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상징이며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알베르토의 시선에서 영화는 거대한 성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 자신과 닮은 존재와의 교감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는다는 퀴어 서사의 기본을 따른다. 루카를 넓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자신 역시 루카의 인도로 바깥 세계의 인정을 받는다는 점은 연대와 사랑의 감정이 서로에게 준 긍정적 영향의 결과다. 이렇게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따스한 햇볕이 가득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은 모두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여러 영화의 레퍼런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영화는 프랑수아 오종의 〈썸머 85〉 속 노르망디 해안이나, 루카 구아다니노의 〈콜 미 바이 더 네임〉의 짧은 한때처럼 푸르르게 성장하는 ‘여름 바다 퀴어’의 명맥을 이어가며 따뜻한 작화로 모두에게 다가가고 있다.
우정과 사랑, 자유와 용기가 모두의 인정을 받는 포르토로소의 여름은 차이를 이해하는 이들은 반드시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다. 풍부한 스토리나 캐릭터의 서사보다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그 안에 숨은 관계성과 상징이다. 오늘날 애니메이션은 누군가에게는 머릿속 꿈을 스크린에 구현해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하고, 다른 이에게는 잊었던 동심을 찾고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당면 과제를 티 없이 맑은 이야기로 구현한 아름다운 영화는 단연컨대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에 개봉하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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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앞에 선 사회적 약자의 환상
2019년 영화 <조커>는 한 사회적 약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심리적 파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외감, 무시당하는 상처, 그리고 이를 덮으려는 몸부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했고, 결국 그를 비극의 주인공, 조커로 만들어 갔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전작의 이야기를 잇는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허황된 욕망을 탐구한다. 이번 작품은 혁명의 영웅으로 떠오른 조커보다는 다시금 약자로 돌아간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라는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패배감
아서 플렉에게 패배감은 평생을 관통한 기본 정서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아본 적 없었고, 언제나 비웃음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이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패배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여러 번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감은 일종의 디폴트 상태였고, 이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패배감이 그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끝없이 패배감을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는 조커라는 가면을 쓰며 잠시나마 패배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감정] 조커의 분노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 아서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패배감을 분노로 감추고,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당당함을 얻는다. 이 순간의 조커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강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관객에게조차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듯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아서는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억압과 무시를 세상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당당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속에서 할리(레이디 가가)는 아서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조커였다. 즉,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의 분노와 그로 인해 얻어진 위태로운 매력을 사랑한 것이다. 영화는 조커로 변신한 아서의 모습을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장면으로 표현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남은 것은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아서의 현실과 그가 잠시나마 꿈꾼 조커의 허상을 동시에 보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억울함
아서의 삶에서 억울함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보호의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그를 소외시키고 억압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상황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의 친구조차도 아서를 무서워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아서 스스로 얻고자 해서 얻은게 아니며,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삶의 굴레들이다.
아서에게 억울함은 그가 조커라는 인물로 주목받을 때조차 여전하다. 그는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재판에 나서지만, 여전히 아서 플렉으로서의 자아는 조커가 얻는 주목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조커로서 사람들에게 환호받아도, 아서로 남아도, 결국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뿐이었다. 이러한 억울함은 그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 억울함은 그의 패배감, 분노와 뒤섞여 그를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락뿐임을 암시한다. 아서는 조커로서의 삶에서도, 아서 플렉으로서의 삶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그 억울함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도 그는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 그저 한 번 반짝했던 범죄자로 남을 뿐이다.
촬영이나 연기의 완성도는 높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몰락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의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아서는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며, 할리의 등장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서의 일생 중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조차도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들은 조커의 환상적인 모습이 아닌 아서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아서의 삶을 끝까지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의 서사를 마무리짓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까지 포함해 모두가 조커를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끝까지 아서의 현실을 강조하며 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의 연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뮤지컬 장르를 도입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장르적 도전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 뮤지컬 장르가 원래의 이야기와 잘 이어 붙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되어버렸다. 촬영이나 화면이 고급스럽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게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아서와 조커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레이디 가가 역시 할리 역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연기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사회 변혁 이나 사회 파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의 삶과 그가 꿈꾸는 허망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의 아름다움, 그리고 뮤지컬 장면의 독창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서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며, 그의 몰락이 결국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을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M8_51b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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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된 아이, 사라진 기록
해당 콘텐츠는 씨네랩 초청으로 참석한 <케이 넘버> 시사회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해외 입양인들의 귀환을 가장 가까이에서 담은 독립 다큐멘터리, <케이 넘버>의 개봉이 다가온다. 오는 14일에 개봉 예정인 해당 다큐멘터리의 시사회에 씨네랩의 초청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시사회 참석이 처음이라 설레던 마음도 잠시, 다큐멘터리 속 해외 입양의 실태와 그 아픔에 눈물을 흘리며 점등을 맞이했다.
다큐멘터리 <케이 넘버> 포스터
<케이 넘버>는 조세영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장장 6~7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상영관을 찾아온 작품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수상하고,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70년의 해외 입양 역사에서 나아진 것이 없음을 냉철히 지적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왼쪽부터 차례로 노혜련 숭실대 명예교수(전 홀트 직원), 조세영 감독, 김유경 배냇 대표의 모습
영화의 제목이 되는 K-NUMBER란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낼 때 입양기관이 아이를 분류하기 위해 붙인 표식이다. 한국전쟁 이후 70,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동의 수는 자그마치 20만명에 달한다. 가정과 직장이 있는 성인이 되어 돌아온 입양인들의 귀환과, 이들의 뿌리찾기를 돕는 한국인여성모임 ‘배냇'의 추적에서 드러나는 해외 아동 입양의 진실을 영화는 조명한다. 감독의 집요한 질문과 따뜻한 시선을 따라가며 해외 입양인들이 ‘그들’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타국으로 떠나 보낸 우리 아이들의 귀환이 될 수 있음을 느껴보자.
1970년대 초, 길에서 우연히 발견된 미오카.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오카는 가족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찾는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건 조작된 서류와 감춰진 기록.
K-Number의 진실은 무엇이며, 사라진 서류는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시간과 국경을 넘어, 숨겨진 진실이 풀리기 시작한다.
<케이 넘버> 시놉시스, 출처 씨네 21
영화는 2004년, 관에서 본인의 입양서류 기록을 받지 못해 화를 내는 한 해외 입양인 여성의 외침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미오카 밀러, 한국 이름은 김미옥으로 ‘추정된다’. 한국 이름이 정확한지 확인 할 수 없는 것 또한 입양서류의 불분명성과 위조 가능성 때문이다. 이후 20년간 미오카는 5번의 한국 방문을 이어가며 본인의 뿌리와 가족의 기억을 찾기 위해 방방곡곡을 해메왔고, 그 여정에 사회봉사단체 ‘배냇’이 동참했다.
2004년에서 2024년. 한 사람이 태어나 성인으로 자라나기까지의 기간동안, 미오카와 배냇은 불분명한 서류와 감춰진 해외 아동 입양의 진실과 사투하며 ‘뿌리찾기’를 이어가고 있다. 입양 이후 한국에 처음 방문하는 입양인들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앞에서 자국민의 도움없이 대여섯살때의 단편적인 기억만으로 가족을 찾는 것이 말이 되냐는 배냇 김유경 대표의 물음에는, 입양민 ‘뿌리찾기’의 실태와 그 어려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공개되지 않는 기록에 대한 분노. 미국을 떠나 한국까지 와서도 미오카씨를 반기는 것은 사실확인조차 되지 않고, 본인의 정보조차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반의 반쪽짜리 서류다. ‘이 서류를 기반으로 가족을 찾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겠냐‘는 무력함의 끝에서 나온 질문에도 미오카 씨는 ‘지금 가지고 있는 패는 어쨌든 전부 뒤집어 보아야 한다‘고 답한다. 새로운 서류가 나오고, 정보가 나오고, 거짓이거나 조작되었음이, 혹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진실의 테두리임이 드러날 때 마다 그렇게 밝고 힘이 넘치던 미오카 씨의 얼굴이 조금씩 피로와 절망, 무력과 분노로 물들어간다.
한국 전쟁 이후, 국가 재정난을 겪던 대한민국은 국책 사업으로 ‘해외 입양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한국은 전 세계 유일하게 '대리 입양' 제도가 가능했던 나라로, 입양 부모는 한국에 방문하지 않고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었기에 그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대리 입양제도에 대해 당시 미국 입양 전문가들의 반대가 극심했으나, 대표적인 해외 아동 입양 기관이었던 홀트의 로비로 무마되었다는 노혜련 교수(홀트 전 직원, 숭실대 명예교수)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 한다. 마치 품종묘를 샵에서 고르듯이, 서구 사회의 부모들은 아이의 성별, 인종적 특징을 바탕으로 원하는 아기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동을 일종의 상품처럼 여기며 타국의 양부모에게 배달하는 이러한 '우편 입양' 서비스는 그 대가로 입양기관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국가와 사기업이 주도하는 일종의 인신매매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국가와 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입양 대상 아동을 확보하고 아동의 출신 서류 위조까지 감행한 범죄이자 불법행위”라는 김영우 2024서울독립영화제 예심위원의 분석은 정확하다. 해외 아동입양은 단순히 고아 아동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취지의 해외 입양이 아니었다. 입양 이후의 아동의 안전과 생활과 관련된 어떠한 보고와 의무도 없이, 아동을 판매하면 그것으로 끝인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아동의 기본권은 사각지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아동의 입양 과정이 강제적이냐 자발적이냐와는 관계없이, 아동의 재화화와 이로 인한 이익의 수취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그것도 국가와 사기업의 주도하에 20만명의 아동이 해외로 이주되었고, 이들의 성장과 안전이 한국 사회에서 비가시화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아픈 단편으로서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
20만명의 아동을 해외로 수출한 ‘아동 수출국’이라는 오명은, 국외 시선을 고려해 해외 아동 입양이 중단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동 수출 과정에서 조작된 서류로 뿌리를 찾지 못하고 배신감과 무력감을 경험하는 해외 입양민들의 존재로 인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명은 저출생 국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끊임없는 재생산을 거듭한다. 가장 해외 아동 입양이 많았던 1985년, 한국은 이미 출생률 1.7%를 기록하며 저출생 국가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동을 재화화 하고 떠나보낸 책임을 지고, 해외 입양인의 귀환과 ‘뿌리찾기’를 돕는 일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어 왔던 해외 아동 입양의 진실과 역사 외에도, 영화를 구성하는 또 다른 축으로서 ‘여성’이 존재한다. 해외 아동 입양의 과정은 여성에게 행해지는 폭력의 또 다른 면모를 담고 있다. 북유럽으로 입양된 해외 입양민 여성들의 인터뷰에서, 한 인터뷰이는 ‘20만명의 아이들이 국가 주도의 조직적인 인신매매 정책으로 해외로 보내졌다는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신원 미상의 미혼모와 여성들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망상적 서사를 너무나도 쉽게 믿어버리는 것이 안타깝다‘며, ‘더 나아가 그러한 믿음이 그녀들의 딸, 아들인 해외 입양인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보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거대 권력의 국가보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책임과 비난의 화살이 돌려지는 익숙한 그림이다. “적어도 제가 만나본 한국 여자들은 아이를 쉽게 버릴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입양민 여성의 평가는, ‘설령 아이를 버리는 엄마가 있었더라도, 그곳에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있으며, 남아선호사상 아래에서 셋째 딸의 낙태와 입양을 권유하는 가정과 사회는 어디에 있으며, 아이를 가정으로 돌려보내주고 키울 여건을 마련해주는 대신 길고양이를 잡아 가두듯 모아와 두 당 얼마를 받고 팔아넘긴 기업과 국가는 어디에 있으며, 이를 묵인하고 심지어는 추진한 대통령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라는 무거운 질문을 불러온다.
주제가 아닌 구성의 차원에서도, 다큐멘터리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여성 감독, 배냇의 여성 회원들, 뿌리를 찾는 해외 입양민 여성들과 이들의 어머니-언니, 그리고 탐문을 돕는 시장의 할머니들. 출산과 아동의 양육이라는 테마 때문만이 아니다. 연대와 공감, 실행과 보호라는 테마에서 비로소 여성은 끈끈하게 뭉친다.
‘좋은 일’과 ‘더 좋은 환경’으로 포장된 해외 아동 입양 사업의 실태를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은 마주하게 된다. ‘평범한 한국인들은 입양인의 귀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는 입양인의 질문 앞에, 아마 이들의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던 대다수의 관객은 할 말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감독의 끈질기고 따듯한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시점에서, <케이 넘버>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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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춘기를 탁월하게 표현하는 인사이드 아웃2 속 감정 🌟 #인사이드아웃2 #픽사 #영화리뷰
안녕하세요! 레빗구미입니다!
🐰✨ 오늘은 픽사 스튜디오의 신작 '인사이드 아웃2'에 담긴 세 가지 감정을 알려드립니다. 🎥🍿
엄청난 흥행 속도를 보여주고 있죠. 1편에 이어 2편도 공감가는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
사춘기 소녀 라일리의 감정이 풍부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요.
저와 함께 영화 속에 담긴 감정들을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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