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7-12 08:59:06
‘리틀 오대수’, 사이버 렉카로 생존하라
영화 〈좋.댓.구〉 리뷰
배우 오태경이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오대수의 아역을 맡은 것은 행운이었을까? 적어도 〈좋.댓.구〉를 찍을 때쯤의 오태경에게는 행운이 아닌 듯하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아역배우’라는 편견을 넘기 어려워 연기 기회가 줄어들고 점점 잊혀가는 배우 오태경.* 변화를 모색하고자 유튜브를 시작했지만 채널에는 파리만 날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조롱한다. 갈 데까지 간 태경은 큰맘을 먹는다. ‘어린 오대수’를 벗어날 수 없다면 돈이라도 벌어보자는 것.
〈올드보이〉 오대수 분장으로 구독자 앞에 등장한 그가 새로 내세운 콘셉트는 구독자 소원 수리다. 구독자가 어떤 부탁을 하던 오대수 분장을 하고 출동해 소원을 들어주는 식이다. 별 반응이 없던 이전 유튜브와 달리 새 채널에는 구독자가 스멀스멀 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액을 후원한 구독자가 소원 하나를 의뢰한다. 광화문 광장에 아무 말 없이 피켓만 들고 있는 남자의 사연을 알아봐달라는 것.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의외로 만만치가 않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적힌 피켓을 든 남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피켓만 들고 있다가 사라져버린다. 태경이 아무리 그 앞에서 말을 걸고 도발해도 꿈쩍도 않는다. 이에 ‘피켓남’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하고, 어느새 태경의 유튜브 채널과 피켓남은 전 사회적 화젯거리가 되기에 이른다.
〈좋.댓.구〉는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이 곧바로 돈과 영향력으로 전환되는 시대의 모습을 그린다. 스크린라이프 형식을 차용한 영화는 내내 인터넷 방송 화면으로 이어지는데, 유튜브 이용자의 댓글과 ID를 비롯해 온라인 방송 제반 등을 현실감 있게 재현해 몰입감을 높인다. 구독자 수를 합치면 4,000만에 이른다는 실제 인플루언서들과 깜짝 놀랄 만한 카메오도 많이 나와 재미를 더한다. 진실‧사실보다는 관심‧호응이 더 중요한 우리 시대의 모습을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영화를 따라가는 재미는 상당하다. 관객과 수싸움을 하려 드는 반전이 아니라 영화의 플롯과 메시지를 살리는 반전이 연이어 이어진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사이버 렉카’의 난립에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겠다는 회의가 들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믿음의 불가능은 회의를 불러오지 않는다. 어차피 처음부터 사람들이 원했던 건 진실이 아닌 관심거리였을 뿐이고,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유튜버는 자신이 그 관심의 통로가 되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리틀 오대수’가 사이버 렉카들 틈에서 무사히 생존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며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그들의 선동에 들썩이며 부화뇌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버 렉카들은 동시대인들의 관심을 먹고 자란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박상민 감독은 기획 단계부터 오태경 배우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고 밝혔고, 오태경 배우 역시 이 영화의 70~80% 정도가 자신이 이야기 같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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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의 밤> 잔인하지만 서정적이고 낯선 누아르
1. '양도수(박호산)' 사장의 명령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북성파를 제치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보던 '박태구(엄태구)'는 돌연 비보를 접한다. 누나와 조카가 모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 북성파가 작업에 들어온 것으로 의심한 태구는 즉시 그들의 보스를 공격하고, 북성파의 2인자인 '마상길(차승원)' 이사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 도망가기로 결정한다. 러시아로 가기 전 잠시 들린 제주도에서 태구는 묘한 분위기의 '재연(전여빈)'을 만난다. 사격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는 등 걷잡을 수 없는 그녀로부터 그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동질감을 느끼며 조금씩 편안함을 되찾지만, 태구를 향한 복수의 칼날은 이내 제주도로 들이닥친다.
영화학자 토마스 슈츠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에서 영화 장르의 변화를 네 단계로 나눴다. 실험 단계에서는 특정한 장르로 부를 수 있을 공통된 움직임이 포착된다. 고전 단계에서 공통의 움직임은 제작자와 관객 모두가 공유며 하나의 장르를 규정하는 특정한 이야기 전개의 공식과 도상(볼거리) 같은 관습으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장르 영화는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는 불균질한 요소들이 더해지는 세련화 단계를 지나 기존에 확립된 장르의 전통을 파괴하는 마지막 바로크 단계에 다다른다. 비록 모든 영화 장르에 적용될 수는 없지만, 전반적인 장르의 흐름을 이해하는 기준으로서 위의 과정은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2. 이러한 장르의 변화라는 맥락 안에서 볼 때 박정훈 감독의 누아르 영화 <낙원의 밤>은 분명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한국형 누아르의 진수를 보여준 <신세계>(고전)를 거쳐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마녀>(세련화)로 이어진 박훈정 표 누아르가 한 단계 더 나아가려는 시도가 <낙원의 밤>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외피와 이야기의 발단이 한국형 누아르의 도상과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비해, 중반부에 숨겨둔 진짜 이야기는 장르의 관습에서 탈피하고 있다.
실제로 <낙원의 밤>의 연출, 도입부, 스타일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구가 북성파 두목을 죽이거나 조폭들이 회동을 하는 장소로 한국의 누아르, 범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우나와 중국집이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액션씬 역시 감독의 전작에서 여러 차례 명장면을 남긴 바 있다. <신세계>에서는 엘리베이터 안, <브이아이피>에서는 중국의 한 아파트 복도와 방이 그 장소였다면 이번에는 차 안, 차와 차가 맞붙은 좁은 공간, 문이 잠긴 식당에서 액션이 펼쳐진다.
이야기의 발단도 마찬가지다. 양 사장의 행동대장인 태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누나와 조카가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북성파가 자신의 가족을 죽였다고 판단한 그는 복수를 위해 북성파 두목을 살해하고, 필연적으로 뒤따를 복수의 굴레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이러한 태구의 이야기는 냉혹하고 음울한 담배 연기로 가득한 박훈정 감독의 특유의 연출과 스타일을 만나 또 한 번 사나이들의 의리와 배신,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펼쳐 보이려는 듯 보인다.
3. 그러나 제주도로 장소를 옮긴 후 <낙원의 밤>은 예상된 경로를 벗어난다. 당장 결말부터 각 인물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발단에서 차례로 등장하는 태구, 양 사장, 마상길은 모두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태구는 완전히 도망치지도 못하고, 가족들의 원한을 진짜 범인에게 갚아주지도 못한다. 마상길과 양 사장은 그들의 거래와 계획을 깔끔히 끝맺는데 실패한다. 대신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충격적이고 하드코어한 결말을 통해 오직 재연만 복수에 성공한다. 이는 마치 <마녀>에서 누아르 영화의 남성 주인공의 자리가 여성에게 넘어간 것을 연상시키는 마무리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방향성이 기존의 장르 관습적 선로에서 벗어나는 분기점은 공항에서 태구와 재연이 만나는 순간이다. 이 장면부터 영화는 그저 처음 만난 두 남녀가 새로이 관계를 만드는 데 주목할 뿐이다. <신세계>에서 '정청'(황정민)과 '이자성'(이정재)의 굳건한 관계가 형성되어 유지될지 혹은 파괴될지가 관건이었던 것과는 다르다. 의리와 정, 피의 복수를 되새기는 사나이들을 강조하는 누아르의 관습을 거부한다. 그러다 보니 복수의 칼날을 가는 마상길이 가끔씩 얼굴을 비추는 것을 빼면 영화는 중반부부터 누아르라는 사실마저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일반적인 누아르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이는 태구와 재연의 드라마를 유려한 앙상블에 담아낸 두 주연 배우, 엄태구와 전여빈의 퍼포먼스가 유달리 인상 깊은 이유기도 하다.
4. 이때 두 주인공의 관계 맺기의 중심에는 각자의 트라우마가 위치한다. 마치 거울 치료를 하듯이 서로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 보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태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재연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죽을 날이 정해진 누나를 떠올리고,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자신과 그녀가 동병상련임을 깨닫는다. 재연의 삼촌이 총을 밀수하면서 마련한 선물을 끝내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볼 때는 끝내 생일 선물을 열지 못한 본인의 조카와 재연을 겹쳐 본다.
한편 재연은 온 가족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삼촌의 모습을 제주도로 도망쳐온 태구에게서 본다. 또 가족이 죽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고, 그래서 복수심을 버릴 수 없는 그녀는 가족의 복수를 한(혹은 했다고 생각한) 태구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이처럼 회한과 트라우마가 뒤섞이면서 물회를 사이에 두고 애틋해지는 둘의 관계는 묘한 동질감으로 인해 우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족 간의 정처럼 보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성 간의 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굳이 이들의 관계를 정의 내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구체적인 설명 대신 아름다운 영상 안에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태구와 재연은 차가운 필터에 포착된 제주도의 아름다운 해변가에서 함께 담배를 피운다. 둘이 서로를 온전히 알아가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불운했던 그들의 삶에 마침내 치유와 평화를 얻고 오래간만에 행복해지는 순간,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은 마침내 낙원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담배 연기처럼 금세 사라진다. 아름다운 낙원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듯이 그들은 이내 마상길의 모습으로 자신들을 매섭게 쫓아오는 섬뜩한 복수의 굴레에 다시 빠져든다. 이처럼 태구와 재연의 관계성을 불명확한 경계 안에 담아낸 결과 <낙원의 밤>은 서정적인 누아르라는 차별화된 정체성을 완성한다.
5. 다만 <낙원의 밤>이 거둔 독특한 성과는 결코 매끄럽지 않은 완성도로 인해 빛이 바랜다. 우선 플롯의 치밀함보다는 감정선과 정서를 담아내는 미장센에 힘을 준 결과물은 좋게 말하면 영화를 곱씹어 볼 기회를 주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하다. 명확하지 않은 두 인물의 관계성, 그로 인한 예상외의 전개는 창고와 식당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에 처연함과 잔인함이 맞부딪히는 충격을 가득 불어넣거나 그저 영문을 알 수 없는 당황스러움만을 남기면서 명확한 호불호를 유발한다.
또한 몇몇 한국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설픈 유머, 임팩트를 주기 위해 잔뜩 힘을 준 인위적인 명대사들은 개성적인 캐릭터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 보인다. 무자비한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자신의 말과 약속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마상길, 소시민적인 듯하면서도 비열함을 숨기지 못하는 박 과장과 양 사장처럼 극에 강력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인물들도 끝내 영화의 전반적인 톤에서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낙원의 밤>은 새로운 시도의 성취에 온전히 만족할 수는 없는, 끝내 낯섦을 새로움으로 바꾸지는 못한 한국형 누아르 영화에 머문다.
A(Acceptable, 무난함)
불완전한 영화적 시도가 담은 서늘하게 슬픈 청춘들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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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과 추함 그 너머
SYNOPSIS.
태풍이 불어 닥친 날, 미카미 쿄이치를 비롯한 6명의 중학생이 학교에 갇히고, 교이치의 절친 리에는 등교하던 중 홀연 방향을 바꿔 도쿄로 향한다. 고립된 상황 속에서 결핍과 욕망, 불안과 쾌락이 뒤섞인 이상야릇한 축제가 벌어진다.
POINT.
✔️ 1980년대 일본 영화계의 변화를 이끈 소마이 신지 감독의 대표작이 약 40년 만에 개봉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유명한 감독이라는데, 동양 영화를 일본 위주로 좁게 읽어온 경우가 많은 서구권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감독이에요.
✔️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류의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관심을 가져보실 만합니다.
✔️ 1980년대의 현란한 음악과 음향이 매우 매력 있게 쓰인 영화
✔️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잘 만든 영화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해요.
청춘은 늘 아름답게 혹은 위태롭게 혹은 둘 다로 그려진다. 소용돌이 치는 미완의 감정들이 어쩌지를 못하고 파들거리는 각자의 세계. 자기 자신만으로도 팽창하다 터져버릴 것 같지만 외부와 또 끊임 없이 잡음을 일으키는 일상. 차라리 태풍이라도 와서 이 모든 것이 깨쳐지길 바라게 되는 마음 같은 것들. 여기까지는 청춘을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로 미화하여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쉬이 공감할 법하다.
이 영화도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영화 속 리에의 대사에서 표현되듯, 곧 올 거라는 태풍이 차라리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쩌다 학교에 남아 버린 아이들이 점점 거세지는 태풍 속에서도 굳이 집에 가거나 연락하려는 마음 없이, 교실에 남아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청춘이라면... 저는 그냥 한평생 응애 할랍니다.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다.
아름다운 시네마의 힘
이 영화가 아름답지 않았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에너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제각각의 이유로 학교에 남은 아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흔히 이 영화를 소개할 때 사용되는 불안이나 본능 같은 단어들 또한, 청춘이나 사춘기나 청소년기라는 단어들 또한, 이 영화 속 아이들이 표출하는 에너지를 적확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최선은 결코 최적에 닿지 못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말하고 쓰며 이 영화의 주변을 더듬거려 보고 싶다.
현란한 80년대 음악과 독특하게 사용된 음향, 공간 사용 하나하나 다, 영화를 잘 모르는 눈으로 보아도 잘 만들었구나 감탄하게 되기는 한다. 책상을 쌓아 올리고 종이학을 매달아 둔 교실의 풍경, 거기에 마치 아이돌 군무처럼 원자처럼 제각각 서 있는 아이들,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모습은, 그 장면이나 정서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장면적으로 힘이 있다. 마치 온도가 높아지면 활발해지는 원자의 운동 같다. 전자와 충돌이 증가하고 비저항이 커지는 원자의 모습처럼,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다.
태풍 안에서 제각각의 이유로 끓어 오르는 아이들의, 탁구공처럼 튀어오르는 에너지는 분명히 힘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8명의 아이들이 마치 하나의 사회를 표현한 것처럼도, 한 인간 안의 복잡다단한 정서를 표현한 것처럼도 보인다는 지점이다. 하나의 물체 안의 원자들처럼.아름답지 않은 원시의 폭력
특히나 이 영화 속 아이들의 세계를 하나의 사회라고 한다면, 내 눈에 그것은 태곳적 원시의 사회로 보였다. 인간보다는 짐승의 그것과 조금 더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낳은 이들은 보호자로 기능하지 않거나 아예 부재한다. 아이들이 쌓아올린 보호의 수단은 그다지 보호할 만큼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책상을 바리케이드처럼 쌓아 올린 것은 물리적 충격을 막기 위함이고 종이학은 으레 소원의 상징이나, 둘 다 이 영화 속에서는 장난스러워 보인다고나 할까, 조개 껍데기 가면 정도의 선사 시대 주술 수준으로 무력해 보인다. 그 안에서 생의 감각은 통제되지 않는다. 노래와 춤, 웃음과 폭주, 그리고 폭력.
특히 미치코에 대한 켄의 폭력 장면은, 개인적으로 관객석에 앉아 있기 괴로울 정도였다. 너무 괴로워 속이 좋아지지 않았고, 주먹을 자꾸 불끈 쥐게 되었으며, '미치코 그렇게 밀어내면 네 코어가 흔들려... 코어를 다잡고, 있는 힘껏 한 대 치고 발로 차...'라고 생각하게 되는, 자꾸 극을 극으로 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장면에 얼마나 깊은 괴로움을 느끼냐에 따라서도 평가가 갈릴 지점이 있을 것이다. 유독 길고 집요했던 이 장면은, 명백히 성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가해자의 입장을 고려한다. 그가 가정에서 겪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결여와 그로 인한 그의 정신적 불안정 상태, 좋아한다는 이유로 미치코에게 이미 저지른 일과, 그 일에 대한 면죄부의 의도로 해석될 자리까지 내어준다. (심지어 이 영화의 시놉시스에서 “소년은 짝사랑했던 소녀에게 마음을 고백“한다고 표현한 문장도 있다. 누가 썼는지 몰라도 이건 좀 많이 다르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원색적인 세계에 출구는 있는가? 도쿄에서 태풍 속을 뛰어다니는 리에와 강당 앞에서 춤을 추는 아이들이 노래하는 '만약의 내일'에는, 출구가 있을까. 원시 사회를 벗어난다면, 이 미완성의 시기를 벗어난 '어른'의 세계에는 대안이 있는가.
이 영화 내에는 없다. 대사 하나 없이 잠시 등장하지만 보호자 역할은커녕 스스로를 돌보는 일조차 버거워 보이는 켄의 아버지, 그의 함석지붕에 아들이 내리꽂는 돌멩이, 무책임하게 피하던 약혼녀의 가족과 함께 가라오케 노래를 부르며 무성의하고 무기력하게 술에 몸을 맡긴 교사, 문을 열어 몸을 적시는 이상으로 태풍을 맞이할 수 없는 그의 세계...
<일본산고>의 일침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원시 사회 같은 폭력을 보며 대문호 박경리 선생님의 <일본산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보다는 죽음, 희망보다는 절망을 향해 있다. 출구보다는 막다른 길처럼 느껴진다.
"비상을 꿈꿀 수 없는 사로잡힌 영혼에게 깃드는 것이 허무주의다. 그리고 쾌락이다. 남경 학살, 백주의 난행은 일본군의 전략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의 여실한 참극, 절망 없이 그 짓을 했을까.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또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추구야말로 문화의 시발점인 동시에,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박경리, <일본산고>. 이하 큰따옴표는 모두 같은 책 인용.)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원시적인 사회를 담고 있다고 느꼈다. 로망 포르노 (다시 말해 포르노) 연출로 감독 생활을 시작한 소마이 신지라는 감독에게서도 박경리 작가가 비판한 지점이 느껴졌다. "감각만 살아나서, 마치 달팽이처럼 축소되고 밀폐된 채 끈적끈적한 점액을 남기며 기어다니는 이런 형국에 불어닥친 세계의 바람" 앞에서 "기능 면으로는 재빠르게 받아들여 전환할 수 있었겠지만 의식세계는 일대혼란"이었던 나라의, 말초신경만 남아 버린 허무주의.
이 영화에서의 청춘은 결국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1985년 작품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에로·구로(그로테스크)·난센스·칼과 무의미, 그것은 칼의 세계에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황무지와도 같은 의식을 여실하게 드러낸" 유행이 1920년대의 것이었다면, 일본 문화에서 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진 작품 쪽이 더 보고 싶다.
아름다운 카메라의 움직임, 아름답지 않은 사상의 부재. 그곳에서 나는 내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절감한다. 나는 "인생은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며 보다 고통스럽게 무량한 우주의 비밀을 헤치고 나가는 과정"이라는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저는 일본의 민족성을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스스로도 희생자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체제입니다. 체제가 뭐냐를 물어야지요."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본다.
누가 언제 청춘이 반짝반짝 솜사탕처럼 아름답기만 하다고 했나. 죽고 싶은 순간도 있고, 미완성의 감정들이 나를 추동해서 아주 기묘한 짓거리들을 하며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지만... 이 정도의 귀결이 보편적 청춘인가? 나와 주변인의 청춘에 그런 허무주의가 없었음이 단순히 우리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래 뭐 그랬나보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비릿한 것만이 청춘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야말로 진짜 청춘이고 다른 반짝거리는 영화들은 마치 가짜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커팅된 보석의 일면처럼 다양한 청춘이 있다. 이 영화는 그 중 하나를 너무나 잘 포착했을 뿐이다. 에너지는 아름다웠으나, 그 에너지 뒤에 어떤 사상의 결여가 있는가 생각하면 이 영화가 편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마지막 꼭 해두고 싶은 말은 결코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라는 박경리 선생님의 말을 생각하며 역시나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거 내 청춘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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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영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속 주인공들의 근황이 궁금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2005~2010)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아시나요?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등 수많은 판타지 영화가 있지만 이제는 정말 추억속으로 사라진듯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가 있는데요. 오늘은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한 주연 배우들(보통 어린 배우들 이었죠)은 현재 무슨 활동을 하면서 지내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3편이 나온지 벌써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가장 최근 근황이 궁금궁금!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윌리암 모즐리
4남매 중 첫째, '피터 페벤시' 역
첫번째는 극중에서 맏 형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던 첫째 '피터 페벤시' 역을 맡은 87년생 배우 윌리암 모즐리라는 배우인데요, <나니아 연대기>이후에 유독 눈에 띄는 작품 출연이 얼마 없었으나 짧게 출연한 3편을 마지막으로 여러 작품에 간간히 눈도장을 찍은 배우인데 최근 2016년도엔 <언프렌드>라는 독일 영화, 또 가장 최근엔 잘 알려지지 않은 <더 베일>이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에서 가장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배우였는데 그 이후에 작품 활동이 얼마 없어서 아쉬운 배우이기도 하네요,,
<나니아 연대기> 이후의 작품.
안나 팝플웰
4남매 중 둘째, ‘수잔 페벤시’ 역
페이스만 본다면 여러 영화에서 많이 본듯한(?) 느낌을 주는 88년생 그녀이지만,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이후에 '헤일로: 슈퍼솔져 2012'라는 작품과 '레인 1, 2' 드라마 시리즈 밖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인데요, 특히 이 배우는 나니아 연대기 후 영화보다 드라마 쪽으로 많이 성장해 나가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지만 영화쪽으로도 많이 접했으면 하는 배우였습니다, 최근에는 드라마, 영화 둘다 활동을 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는 본래 4편까지 계획 했으나 배우들의 나이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죠,,
<나니아 연대기> 이후의 모습들
스캔다 케인즈
4남매 중 셋째, '에드먼드 페벤시' 역
91년생 배우로 나니아 연대기라는 작품 이후에 유일하게 작품활동이 하나도 없는 셋째, 에드먼드 페벤시 역을 맡았던 '스캔다 파인즈', 그 이유는 시리즈 이후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활동을 중단했다고 하는데요, 그 선택은 정말 성공적 이었다고 합니다. 최근 근황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을 다닌다고 해요. (유독 호강하는 미모로 많은 여성 팬들에게 인기를 끈 배우였던,,) 마지막으로 이 배우는 근황이 얼마 없기 때문에 최근으로 추정되는 사진들과 여심을 울렸던 <나니아 연대기> 속 모습들과 함께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워후,, 잘생기긴 했,,,
조지 헨리
4남매 중 넷째, ‘루시 페벤시’ 역
"가장 잘 자라준 배우"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막내 역을 맡았던 순둥순둥 배우 95년생의 '조지 헨리', 그녀도 유난히 눈에띄는 작품 활동은 얼마 되지 않지만 안나 팝플웹과 비슷하게 <퍼펙트 시스터즈>, <더 시스터후드 오브 나이트>란 드라마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인데요, 그 이후에 작품 활동은 되지 않지만 95년생 이라는 아직 어린 나이의 여배우인지라 꼭 영화 작품에 출연했으면 하는 배우이기도 하네요. 아래사진은 거의 최근 사진들!
벤 반스
'캐스피언 왕자/왕’ 역
다음은 그래도 국내 팬들의 눈에 익숙한 81년생 배우 '벤 반스' 입니다. 그는 어린 던스텐 쏜 역을 맡았던 영화 <스타더스트>라는 작품으로 눈도장을 찍은 배우이기도 한데요, 또한 그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2편의 주인공격 캐스피언 왕자로 나왔던 그는 시리즈 이후에 큰 작품들은 아니지만 영화 <더 스토리: 세상에 숨겨진 사랑>에서 조연, <빅 웨딩>이란 영화에서 주연, 그리고 상당히 많이 아쉽던 2015년에 개봉한 판타지 영화 <7번째 아들>에서 주인공 톰 역을 맡으면서 여러 작품들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입니다. 7번째 아들이 흥했었으면,,
<7번째 아들> / <재키 앤 라이언>
윌 폴터
'유스터스 스크럽’ 역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주연은 4남매의 사촌으로 나오는 유스터스 스크럽 역을 맡은 배우이자 나니아 연대기 이후 가장 눈에띄는 작품들에 다양하게 출연한 배우인 윌 폴터 입니다. (3편에만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죠),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영화 <메이즈러너> 1편에서 갤리 역, 디카프리오, 톰 하디 주연의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선 짐 브리저 역으로 출연해 많은 분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던 배우인데 93 년생으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배우중에 한명이기도 한 배우입니다. 2014년도엔 제67회 영국 아카데미 영화제 신인상을 수상!!
<메이즈러너>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리암 니슨 / 틸다 스윈튼
'아슬란’ / ‘하얀 마녀’ 역
또한 그 외에 간간히 등장한 1, 2, 3편에 진정한 주연 사자 역의 에슬란/아슬란의 목소리를 녹음한 '리암 니슨'과 1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 등장한 하얀 마녀 '틸다 스윈튼' 배우들은 현재 최고의 헐리우드 배우들로 자리 매김 하고있으며 더 쟁쟁한 배우들이 되었습니다.
진짜 4편 은의자가 너무 보고싶은(..)
소설도 굉장히 재밌습니다 ( ^ω^ )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배우들
7년이 지난 이젠 정말 추억속의 영화가 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배우들을 앞으로도 다양하고 좋은 작품들로
만나보았으면 합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영소남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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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무뢰한>, 아니면서 무뢰한 척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씨발년아."
자신을 칼로 찌른 여자가 있다. 그런데도 그 칼을 꽂힌 채로 그는 그녀를 위한 새해 덕담을 내뱉는다. 이 영화의 느낌은 마지막 대사 하나로도 충분하다. 아니다. 포스터처럼 어스름한 새벽녘의 피곤한 두 얼굴로도 충분하다. 왜 이 영화를 다시금 찾았냐고 묻는다면 그런 날이라서 그랬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담배 연기를 맡고 싶은 날이라서. 다들 그러다 담배를 시작한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담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연기를 좋아하는 거니까. 담배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게 보고 싶은 날이었다. 저 대사 같은 말을 해주고픈 사람이 떠올라서일 수도 있다. 처음 봤을 땐 영화의 결말이 정말 '영화'같다고 생각했었다. 뭉근하게 피어오른 담배연기에 자욱하게 빠져있다가 저 결말을 보고선 갑자기 담뱃재가 왈칵 쏟아져내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먼 얘기도 아니더라. 정말 미운데, 그래도 정이 몽당 떨어질 만큼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온갖 상처를 받고도 그래도 잘 살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드는 사람. 기분이 무척이나 나쁘지만 가끔 궁금은 한 사람.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내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늦게 깨달은 탓이리라.
앞서 드라마틱한 마지막 애증의 한 마디를 남긴 이는 어딘가 비뚤어진 형사 정재곤이다. 정의구현은 무슨,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법의 테두리를 왔다 갔다 한다. 그는 형사가 두려워해야 할 건 범죄자와 구분이 되지 않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범죄를 저지르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뿐이지, 그의 수단과 방법은 범죄자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딘가 헛헛해 보이는 살쾡이나 표범 같다. 그는 가장 빠른 루트로 가기 위해서라면 가장 잔인해질 수도 있다. 누군가의 약점을 빠른 시간 내에 파고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그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이 돼지발정제를 써서 용의자의 애인에게 자백을 얻어 사건을 해결한 것일까. 그러나 그는 그걸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 씁쓸한 표정으로 적당히 찌들고 풀어진 눈으로, 삐딱한 걸음걸이로 그는 그의 앞에 놓인 모든 하루를 걷고 있다.
김혜경은 열쇠 7개 있는 집에 들어갈 수도 있었던 단란주점 사장이다. 남자 때문에 인생 종친 케이스라고 모두가 인정. 회장님 세컨드로 잘 나갈 수도 있었는데 그 부하와 엮이는 바람에 인생이 피곤해졌다. 그가 재곤을 만나게 된 건 그녀의 애인이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남자란 어떤 존재일까. 권력과 자리에 따라 자신을 유흥거리나 정복지쯤으로 여기는 한량이나 게임중독자일까. 확실히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을 잘 쓸 줄도 안다. 그러나 늘 여유로운 웃음을 안고 모두를 대하는 그녀라도 실상은 그녀만큼 외롭고 허망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기껏 마음을 붙였던 애인은 이제 도망자가 되어 자신을 돈줄로 써먹고 있다. 돈과 남자는 그녀에게 등짝을 쳐주고 싶은 원수가 아닐까. 남자에게 돈을 벌어 남자에게 돈을 쓴다. 게다가 지금은 범죄자의 애인이라니. 그냥 다 버리고 떠나오기엔 그것들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발목을 족쇄에 가둔다. 흘러넘치는 건 술이요, 오도독거리는 건 얼음뿐이라. 까무룩 술이 취해 아침에 잠이 들고 밤에 펼쳐지는 아득바득한 인생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무뢰한이다. 신기한 건 주인공인 재곤과 혜경이 가장 무뢰한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점이다. 오히려 재곤과 혜경을 묶어두고 있는 주변 인물들이 더 피도 눈물도 없는 무뢰한에 가깝다. 주인공인 재곤과 혜경의 공통점이 있다면 빈틈 있고 어딘가 짠하다는 것. 무뢰한 비스무리 사는 중인데 고민이 많다는 것. 인정사정 볼 것 없을 것 같은 재곤은 사실 자존심과 연줄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과 직업의식 사이에서 고민한다. 돈이나 받아먹는 부패한 형사가 되고 싶지 않아 성질을 부렸더니 고작 그의 스폰서가 보낸 금액은 정확히 48만원. 얼척이 없다. 범인을 잡을 때 몸 성치 않게 끝내 달라면서 형사 같지 않은 요구를 하는 건 선배 형사다. 그의 몰골이 짠하다. 그는 선배님의 '내 사람이 맞냐'는 질문에 토해내듯 대답을 했고, 적은 액수의 뇌물을 확인하고 돌려주기 전 허탈한 듯 히죽거린다. 돼지발정제를 쓸 수도 있는 무자비한 형사로서의 그의 모습은 어떠면 그가 속한 교양 있는 무뢰한들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혜경 역시 보다 보면 저렇게 짠할 수가 없다. 뭐하고 살았냐고 물으면 빚 받으러 다니고, 빚 갚으러 다녔단다. 인생의 뭔 빚이 그렇게나 많은지 모르겠다. 범죄자 애인은 몇 천이 누구 집 애 이름 같나 보다. 그의 소식에 혼자 마음 졸이고 그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숨어 지켜보는 재곤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혜경이 궁여지책으로 외상금을 받으려 돌아다니는 모습은 당당하고 가냘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당함으로 무장했던 그녀는 웃으면서 돈을 받아내다가 결국은 술집 외상 때문에 인생 종 치고 싶냐며 사정하면서도 나 김혜경이라면서 힘들게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익숙해진 듯한 것이 마음 아픈 사람.
둘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진심인 듯 아닌 듯 서로를 속이고 있다. 그것이 무뢰한들의 세상에 걸맞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믿으면, 속으면 바보같이 당하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상대의 모습에 흔들리고 만다. 의심 가득했던 그녀는 재곤을 완전히 믿지 못해도 그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하고, 사건을 위해서 혜경을 이용하려 했던 재곤은 혜경이 다칠까 배려해주고도 아무 일도 모르는 척한다.
그들의 진심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서로를 가장 속여야 하는 순간에 드러난다. 진심과 거짓의 경계에서 그들은 사랑 비스무리한 걸 하고 있다. 혜경이 돈을 위해 재곤(그녀는 그를 '영준'으로 알고 있지만)을 유혹해야 하고, 재곤은 범인 검거를 위해 그 유혹을 알고 짐짓 모른 척 받아들이는 순간. 재곤이 그녀가 자신의 약점이라고 말하고, 그녀가 아끼던 목걸이를 다시 전당포에서 찾아와 내려두는 순간. 지금 애인이고 뭐고 버리고 자신과 살면 안 되냐는 재곤의 말에 진심이냐, 고 물으며 흔들리던 혜경의 눈. 에이, 그걸 믿냐 하며 어설프게 둘러대는 그의 말에 끝내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씁쓸한 눈빛과 미소.
혜경이 어처구니가 없는 건 결국 그렇게 자신을 흔들어 놓았던 재곤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부터 자신이 알던 '이영준'이 아니라잖나. 자신의 애인을 한 방의 총알로 날려 보낸 것보다도 아무것도 몰랐던 것에 '나 김혜경이야'라는 말처럼 지켜오던 자존심이 와르르 무참히 쓸모 없어져 버려서. 아무것도 믿지 말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번에는, 그는, 그래도 자신에게만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던 자신에게 분노한 것이리라. 그녀의 집주소며 모든 정보를 알면서 정작 그녀는 그의 아무것도 제대로 안 것이 없다는 것에, 겪을 만큼 겪어봤다 생각했는데 이토록 무방비했던 자신이 비참하고 자존심 상해서. 충격보다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이리라. 그 총알로 날렸던 건 애인의 심장만은 아니겠지.
재곤은 사과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찾아와 나는 형사고, 내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그녀를 상처주려 했던 게 아니라고 할 뿐이다. 재수 없다. 술을 팔 때보다 더 구차하게 마약을 놔주며 살고 있는 혜경을 찾아가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녀를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면서도, 처량 맞게 집 앞에서 하루 종일 비나 맞고 있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혜경에게 필요한 건 그 한마디일 텐데. 미안하다고, 다시 곁에 있어달라고. 한번 안아주면 될 텐데.
세상이, 영준이, 아니 영준이라고 믿었던 재곤이 그녀에게 무뢰한이 되라고 가르쳤으니 그녀는 그녀대로 '무뢰하게' 그를 꼭 안아 칼로 찌르고 만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다. 그녀에겐 진짜 이름이 뭐 건간 그는 여전히 그의 애인 준길의 이상한 감방 친구로 그녀 눈 앞에 등장했던, 이영준이다. 그를 보고 싶었던 마음, 한번 꼭 안고 싶은 마음, 왜 비를 맞고 있냐며 묻고 싶은 마음이 한 켠. 그래도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나의 애인을 다리 하나 팔 하나 병신 만드는 것도 아니라 심장에 총알을 박아야만 했나. 나에게 했던 모든 말 그것도 거짓이었냐. 묻지 못한 그 야속함과 증오, 배신감이 한 켠. 그렇게 마음이 한 켠 한 켠 쌓인 뒤섞인 행동이다.
그러나 거기서 알 수 있다. 그렇게 무뢰한같이 칼을 찌르고 나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혜경의 모습에서. 애초에 그렇게 모진 사람이 못된다는 걸. 혜경은 무뢰한이 아니며, 될 수도 없는 사람이란 걸. 재곤 역시 그 칼을 맞고도 유유히 경찰차도 보내고 꾸역꾸역 아파하며 길을 걸어 내려오는 걸 보면. 죗값이다 하고 받아들이는 거 보면. 그 역시 무뢰한이 아니라는 걸. 차라리 아주 못돼 쳐 먹은 사람들이었으면 좋았을 걸. 무뢰한이 아닌 그들이 주변 사람처럼, 세상처럼 무뢰하게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
영화는 대문짝만 하게 자신을 하드보일드 멜로라고 말한다. 세상이 녹록지 않다. 잘 믿어서도, 진심을 잘 들켜서도 안 되는 것이다. 형사인 재곤에게는 범죄자가 애인과 한바탕 나뒹굴고 있는 소리를 엿들으면서도 도시락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하는 것이고, 혜경에게는 한 때는 자기 발 밑 같았던 사람이,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자신을 은근슬쩍 더듬고 희롱해도 감정을 숨기고 웃음을 살짝 지어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 안에 사랑이란 게, 웃음이란 게 있지만 한 군데씩 비틀려 있다. 뾰족한 송곳 같은 사랑, 우스꽝스러운 웃음 같은 것. 그와 그녀의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꼽자면 언제일까. 그건 그녀가 그가 구구절절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따졌을 때가 아닐까. 어설픈 그의 거짓말에 그녀가 날카롭게 파고들었을 때, 그러고도 그가 예리하네, 하면서 뻔뻔하게 웃어넘겼을 때. 그럼에도 서로가 밉지 않았던 순간. 밤도 아침도 아닌 그 어스름한 새벽에 무뢰한이 아닌 이들의 '무뢰한' 사랑이 시작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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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광반조 혹은 부활의 서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가 '계속 존재하는 자'(조너선 메이저스)를 죽인 후, TVA에 돌아온 '로키(톰 히들스턴). 갑작스럽게 생긴 타임슬립 능력 때문에 고생하는 와중에 로키는 TVA가 위기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시간선이 무한대로 증폭하기 시작한 나머지 시간 직조기가 파괴되기 직전이고, 이를 막지 못하면 모든 우주가 붕괴할 테니까.
이에 '모비우스'(오언 윌슨), TVA 가이드북의 저자 '우로보로스/OB'(키호이콴)와 함께 시간 직조기를 고치기 시작한 로키. 그는 '렌슬레이어'(구구 음바타로)의 방해를 뚫고 계속 존재하는 자의 변종 '빅터 타임리'(조너선 메이저스)를 찾아내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실패를 맛본 로키는 마침내 깨닫는다. 운명의 딜레마 속에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됐음을.
<로키 2>, MCU 드라마의 최고점
<완다비전>부터 <로키 2>까지 총 9편. MCU가 디즈니+에서 선보인 드라마 숫자다. 사실 MCU 드라마는 양에 비해 질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부속물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가 메인 스테이지라면, 드라마는 사전 작업에 가까웠다. 실제로 <완다비전>은 <닥터 스트레인지 2>를, <팔콘과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 4>와 <썬더볼츠>를, <미즈 마블>과 <시크릿 인베이젼>은 <더 마블스>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자연히 여러 설정을 설명하느라 바빠서 주인공 이야기에 집중할 여력도 없었다. <로키>만 해도 멀티버스 설정을 알리느라 바빠서 로키의 분량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나마도 로키의 변종 중 하나인 실비와 나눠야 했으니. <변호사 쉬헐크> 역시 헐크와 데어데블에 밀려서 정작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선후배 케미가 돋보인 <호크아이>에서도 바튼보다는 케이트 비숍에게 비중이 쏠렸다.
따라서 <로키 2>에게는 과제 두 개가 있었다. MCU 드라마로서 독립적인 완결성을 증명해야 했다. 로키의 단독 작품으로서는 주인공에게 온전히 집중해 달라는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로키 2>는 해냈다. 2011년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로키의 성장 서사를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감동적으로 매듭지었다. 다만 물음표도 여전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처럼 <로키 2>도 MCU의 구원자라는 확신만큼은 주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가 로키를 사랑한 이유
2011년 <토르: 천둥의 신>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로 로키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MCU 빌런이었다. 본래 <토르: 다크 월드>에서 죽어야 했지만, 사전 시사회에서 관객이 좀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되살려야 했을 정도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도 죽음을 잔인하게 연출하고 몇 차례에 걸쳐 죽었다고 언급한 후에야 관객들은 그의 사망을 수용했다.
관객은 신의 결핍에 공감했다. 그는 버려지고 싶지 않았고,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토르 주위에 친구가 가득한 것을 질투하고, 냉소하며, 비웃는 거만하고 까칠한 신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외로웠다. 자기 종족이 아닌 이들 사이에서 길러졌고, 아버지에게서 버려졌으며,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따른 어머니가 죽는 발단을 초래했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토르가 자기를 동생으로 인정하길 바랐고, 기꺼이 형의 오른팔이 되었다.
동시에 로키는 자유의지 때문에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다. 패배자라는 운명을 이기려는 욕구로 가득했기에 그는 괴로웠다. 아스가르드의 두 번째 왕자이기에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2인자의 설움. 어떻게 해도 잘난 형 토르를 이길 수 없었던 패배자의 회한. 장난의 신은 죽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이길 수 없는 운명을 수용했다. 세상을 재창조하며 신 노릇을 하려는 타노스에게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물론 로키는 토르 트릴로지, <어벤져스>, 그리고 <인피니티 워>를 통해 자기 약점과 결점을 모두 극복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드라마 <로키>의 영리함이 드러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재등장한 2012년도 로키를 활용해 그 시절 팬들이 사랑했던 로키를 재소환해 두 번째 기회를 줬다. 자유의지를 발휘해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그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장난의 신, 마침내 영광을 맛보다
실비가 계속 존재하는 자를 죽이고, 시간 직조기는 폭증하는 시간선을 버티지 못하며, 모든 시간대가 파괴될 상황. 페이즈 1부터 혼자였고, 항상 자유를 갈망한 로키는 이제 딜레마에 직면한다. 겉으로는 우주와 TVA를 지키려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노력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실비의 지적대로 로키는 또다시 혼자가 되기 싫었다. 모비우스를 비롯한 TVA 동료가 본래 시간선에서 자기를 잊고 살아갈 때 외롭게 남고 싶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실비가 계속 존재하는 자를 죽이기 전에 먼저 그녀를 죽이면 신성한 시간선과 TVA를 모두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다른 모든 시간선의 붕괴도 지켜볼 수 없다. 함께 사라질 모든 자유의지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그래서 그는 타협점을 찾는다. 빅터 타임리를 찾아내 시간 직조기 수리를 맡기고, OB의 지식을 모두 전수받아 새 장치를 만든다. 그러나 끝내 실패한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로키는 결심한다. 신성한 시간선을 지키기 위해 다른 변종을 죽이고 세계를 파괴하는 대신, 모든 존재의 자유의지를 지켜주기로. 계속 존재하는 자의 역할을 대신해서 모든 시간대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기로. 언제나 자기를 괴롭힌 자유의지에 몸을 맡겨 자기 결핍을 채워내기로.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자기 이야기를 새롭게 쓰기로.
그렇게 로키는 신성한 시간선과 멀티버스의 종말을 막았다. 비록 혼자 남았지만, 친구와 애인은 지켰다. 장난의 신이 아니라 이야기의 신이 되어 항상 떠들던 '영광스러운 목적'도 이뤘다. <어벤져스>에서 인간에게 모든 자유를 빼앗아 평화적인 질서를 이루겠다던 로키는 모든 이의 자유를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그렇게 13년에 걸친 그의 성장은 끝났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만나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감동적인 마무리다.
멀티버스 사가에 뿌리내리다
<로키 2>는 로키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도 위기의 MCU에 새로운 나무를 심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특히 영리하게 활용한 신화적인 모티브의 함의가 의미심장하다. 모든 시간선을 손에 쥔 채 왕좌에 앉은 로키. 수많은 시간선이 그를 감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나무 같다. 북유럽 신화 속 우주의 중심에서 모든 세계를 연결하는 '위그드라실'을 닮았다.
위그드라실 덕분에 멀티버스 사가가 시작 이후 갈피를 못 잡던 MCU는 비로소 안정감을 갖는다. 위그드라실과 신성한 시간선의 차이 덕분에 비로소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 신성한 시간선은 직선적이다. 멀티버스 전쟁을 막는다는 미명 하에 모든 시간대(branch)의 자유의지를 파괴한 결과다. 위그드라실은 다르다.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가지(branch)에는 각 우주의 자유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 덕분에 MCU는 비로소 멀티버스 사가의 큰 그림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 <앤트맨 3> 속 사건이 짧게나마 언급되듯이 로키가 살려두고 보호하는 자유의지로 인해 멀티버스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전쟁에서 로키에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로키 2>는 곱절로 감동적이다.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여태 흔들리던 세계관에 단단한 뿌리를 잡아주니까.
회광반조, 아니면 부활의 서막
다만 <로키 2>도 극복 못한 한계가 있다. 우선 결말의 임팩트와는 별개로 평균적인 완성도는 높지 않다. 특히 3화까지는 흡입력이 약하다. 빅터 타임리를 찾고 TVA를 구하려는 내용이 펼쳐지는데, 이 대목의 전개가 다소 느슨하기 때문. 또 20세기 런던이나 시카고 박람회 정도를 제외하면 시즌 1과 달리 공간적 배경이 TVA와 시간 직조기 통제실로 한정적이다. 자연히 타임슬립의 재미가 떨어진다. 이를 만회할 액션씬도 부족하다.
작품 외적으로는 여전히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MCU는 페이즈 4부터 같은 질문에 시달렸다. "인피니티 사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멀티버스 사가를 안착시킬 수 있는가?" 여태 답은 '아니요'였다. 토르, 닥터 스트레인지, 앤트맨, 블랙팬서 모두 길을 잃었다. 스파이더맨도 기존 프랜차이즈의 인기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가 그나마 성공적이었지만, 인피니티 사가의 에필로그에 가까웠다.
<로키 2>도 마찬가지다. 물론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 <로키>는 멀티버스 사가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인피니티 사가에서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 중 하나를 빌려온 작품이기도 하다. <가오갤 3>처럼 인피니티 사가의 또 다른 에필로그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로키 2>가 멀티버스 사가의 회광반조일지, 아니면 부활의 서막일지는 아직 물음표다. <가오갤 3>의 다음 주자가 <더 마블스>인 걸 고려하면 더더욱.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자유 의지로 완성한 영광스러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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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복숭아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은 민트색 자동차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이 놀면서 자동차에서 우주선까지 확장될 수 있는, 어디까지고 커질 수 있는 작고 안온한 세상. 그러나 아이들은 영원히 민트색 꿈과 복숭아 내음 안에서 자랄 수 없다. 잘 익은 복숭아 안을 벌레가 파고들 듯, 불안한 현실이 옥시글옥시글 과수원을 둘러싼다. 그러고 보니 복숭아나무에는 진딧물이 유난히 잘 끼던 생각이 난다.
같은 과수원의 서로 다른 식물들처럼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 로제르, 언니 마리오나, 막내 이리스, 쌍둥이 사촌들이 있는 고모 가족, 어린 아기 여동생이 있는 다른 고모 가족까지. 3대에 걸친 가족들은 크고 작은 삶의 팁을 나누면서, 과수원 식물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이웃들과 서로를 구했던 인정을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무화과 나무, 과수원 가득 왕성한 아버지의 복숭아나무, 십대 로제르와 마리오나처럼 바람에 사각사각 잎새 흔들리면서도 쑥쑥 자라는 옥수수, 그 틈에 욕심과 야심처럼 삐죽 튀어나온 대마… 모두 다르지만 한 수영장에서 장난치고 뒤섞여 노는 사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일꾼까지 동원해 다 함께 대대적인 복숭아 수확을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른들은 서류로 뒤덮인 테이블에서 심각한 대화를 나눈다. 인근 ‘지주’가 곧 복숭아 과수원을 밀어 버리고 태양 전지판을 설치한다는 소식에 모두 착잡하고 막막하다. 이 마음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각의 감정과 반응으로 자라난다. 마지막임을 인지할 때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듯, 가족들 간에 다르게 부유하던 마음들이 갑자기 극명한 색깔을 띠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모든 마음에 치밀하게 따라붙어,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해 준다.
그 사이에도 아이들은 자란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잃어버린 폐차 대신, 영화 내내 아지트를 찾아 헤맨다. 농사용 박스로도 들어가 보고 굴에도 들어가 보지만, 아이들만의 아지트는 어른들의 논리로 너무 쉽게 깨져 버린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란다. 복숭아를 으깨고 상추를 발로 차고 수박을 깨 먹으면서. 그렇게 성장은 주변 세계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다. 아이들뿐 아니라 이 가족의 모두가 그렇게, 과수원의 작물들처럼 각자 속도의 성장으로 세계에 균열을 낸다.
스페인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복숭아
그런데 이 균열의 모양, 어쩐지 익숙하다. 한국 근현대 소설을 보는 것만 같다. 염상섭의 <삼대> 생각도 나고, 동네를 두루 다니며 땅을 헐값에 사들이는 지주들의 존재에서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생각도 난다.
옹고집 우격다짐의 아버지 모습조차 어쩜 그렇게 한국 근현대 소설 속 인물들 같은지. 단지 가족끼리 잘 지내고, 가족들에게 더 힘이 되고 싶었을 뿐인 마리오나와 로제르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이자 최소한의 반항을 한다. 그중에는 정성껏 연습한 무대에 오르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면서까지 가족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
사실 가족을 비롯한 수직적인 관계 내에서의 갈등은 대부분 그렇다. 어느 정도 선까지는 간접적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은 서로의 일부이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알고, 너무 눈에 다 보이고, 그래서 더 용서가 쉽게 되지 않고 감정이 뒤엉킨다. 그렇게 이따금 갈등의 뿌리와 열매의 모양이 같아진다. 갈등의 원인이 갈등 자체가 된다.
이런 갈등에서는 쉬이 놓일 수 없다. 음주·가무나 다른 그 무엇으로 도피해도 피할 수 없는 심연을 마음에 남긴다. 그러나 수직으로 깊은 심연에서도 언젠가는 전복이 일어난다.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가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겠다 소리치듯, 아들이 아버지의 복숭아밭에 수로를 열 듯. 어머니가 영화 내내 꾹꾹 참던 감정을 결국 표현하듯. 어머니의 표현 법은 정말 대단했는데, 자기 안의 갈등을 어쩌지 못하고 폭주하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다가가, 가볍게 뺨을 철썩 치는 것으로 모든 상황을 가뿐히 정리했다.
말 한마디도 없이 단순하게 이들이 문제를 직시하게끔 했으며, 고모 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어 앙금마저 그 해결을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춤추면서 과일을 따다가 핀잔을 듣고 “여자는 동시에 할 수 있어!” 했던, 마리오나가 가볍게 던진 말이 맞았음을 깨닫는다. 김 첨지를 비롯해 우리의 속을 답답하게 했던 수많은 한국 근현대 소설 중 여성 주인공의 서사가 있었다면 아마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거라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과수원에서는 토끼 사체 냄새가 난다
이 모든 가족 안의 균열 후에 드러나는 트랙터의 행진은 단순한 숫자 오르내림의 결과값일 수 없다. 숫자 오르내림 뒤에서 한참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갈등을 겪고, 답답함에 괴로워하고, 반항하고, 놀 자리를 잃고, 눈치를 보고, 노력한 가족들의 모든 시간의 결과값이다. 투쟁조차 흙의 산물을 이용해서 벌이는 이들의 “과일도 가격이 있다!”는 말은 마치 “우리 삶에도 가치가 있다!”처럼 느껴진다.
농사를 망치는 토끼들을 죽인 탓에 토끼 사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과수원에서,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토끼 사체를 대한다. 그 끝에, 싱그러운 생명이 자라야 할 자리를 비집고 든 ‘토끼’는 결국 가족들이 놀던 수영장 위에 뻣뻣한 시체가 되어 둥둥 떠다닌다. 조용하지만 강렬한, 큰 힘 없이도 섬뜩한 저항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기억될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가족들의 마음에 한 겹 흔적을 분명 남길 것이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엄마의 손맛’을 이야기하며 나누는 할머니들의 조리법이 반드시 전달될 것처럼, 지하실에 숨어 전쟁을 견딘 어른들의 실화가 아이들의 놀이가 되는 것처럼, 할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기억될 것처럼. 목소리를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 목숨을 바친 친구를 위해 노래하고, 하늘이 아닌 땅을 위해 노래한다는 가사처럼.
거실에 모여 가족들이 아이의 노래를 듣는 장면은, 기꺼이 아이들에게 내어준 무대는 그래서 인상 깊었다. 노래를 들으며 각자의 착잡함이 얼굴에 스치는 그 뒤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흙냄새는 더욱 짙어지고 땅은 굳어질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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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발신제한”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스릴러, #드라마,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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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와일드 구스 레이크> 메인 예고편
오토바이 갱단 리더 저우 저농은 실수로 경찰관을 살해한 뒤 현상금이 붙어 경찰과 폭력배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왔다는 여성을 만난 뒤 휴양지 '와일드 구스 레이크'에 몸을 숨기고, 쫓기는 두 사람은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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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자마> 30초 예고편
18세기 말 스페인 식민지 남미의 한 벽지.
치안판사 자마는 스페인 국왕의 전근 발령을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몇 년째 감감무소식이다.
“비쿠냐 포르토” 라는 도적떼에 대한 소문이 지역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는 가운데,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친 자마에게 유일한 도피처는 육체적 욕망을 탐닉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