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26 21:19:41
[SIWFF 데일리] 서로의 손을 잡고 벗어나자
영화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우천사)
SYNOPSIS
1999년, 폭력이 만연하던 종말론의 시대. 무엇 하나 쉽지 않던 그 시절, 어느 여름보다 뜨거웠던 소녀들의 사랑과 친구들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
PROGRAM NOTE
고교 태권도 선수 주영(박수연)에게 그해 여름은 서글프고 찬란하다. ‘정상’여고 태권도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 같이 비정상적이라 세상이 소문대로 멸망이라도 해버렸으면 싶은데, 우연히 만난 예지(이유미)와 사랑에 빠진 다음부터는 자꾸 영원을 꿈꾸게 된다. 세상은 그렇게 두 갈래로 간극을 넓혀 나간다. 한쪽은 폭력과 비리로 얼룩져 있고, 다른 한쪽은 설렘과 애틋함으로 물들어 간다. 영화는 삐삐와 공중전화 같은 소품, 향수를 자극하는 가요 등으로 시대를 다채롭게 재구성하면서 두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여성 청소년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나이와 성별, 신분을 이유로 위계를 나누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의 부조리를 목격하는가 하면, 사랑과 우정이 북돋는 용기에 힘입어 이에 저항하고자 나선다. 영화는 사각지대에 내몰린 청소년을 조명하고 체육계 미투 운동을 상기시키는 에피소드를 전개하면서 어른의 역할에도 질문을 던진다. 다만 인물 곁에는 못되고 못난 어른뿐만 아니라, 제 한계를 확인하며 고민에 빠지거나 타인의 감정을 그 자체로 수용해 주는 어른 또한 자리한다. 덕분에 소녀들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경직된 시선에 압도당하지 않고 저마다 소망하는 방향으로 애써 나아간다. 그 길은 미래의 천국보다 현재의 사랑을 기꺼이 택하는 것이기에, 영화는 끝내 반짝이는 순간을 꺼내 보인다. [차한비]

유행은 돌고 돈다. 똑딱이 디카와 DSLR이 ‘보급형’이 된 세상에서 필름 카메라가 아성을 되찾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캠코더가 유행하더니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를 통해 캠코더를 위시한 2000년대 카메라들까지 유행이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1999년은 내가 아직 문화를 향유하기엔 너무 어렸던 나이임에도, 어쩐지 자꾸 대중문화 속에서 소환된 덕분에 기묘한 감각으로 흐릿하게 돌아보게 되는 것은. 대중문화에서 그리운 그 시절로 회고하니 자꾸 그리운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러는 동안 약간의 위화감이 들었다. 그건 ‘과연 그립기만 한 시절이 맞나?’ 하는 것이었다. 비위가 약했던 어린 날의 나는 그 시절 웬만한 공중화장실이 괴로웠던 것도, 버스 뒷자석이나 페인트 칠해진 벽 위에 수정액 혹은 매직으로 적혀 있던 낙서들이 얼마나 날 서 있었는지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 좀더 익숙하던 시대였다. 1999년은 분명 그랬다.
그 시절의 몽글몽글한 감성과, 그 시절의 폭력성을 동시에 재현하는 영화는 그래서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이하 우천사)가 필요했다. 물론 <오징어 게임>으로 이제 그의 연기력 모르는 사람 없게 된 배우 이유미, 담담해 보이는 표정으로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는, 내겐 너무나 ‘믿고 보는’ 배우 박수연에 대한 기대도 한 몫 했다. 그리고 <담쟁이>로 우리에게 찾아왔던 한제이 감독까지. 보지 않을 이유가 없는 영화였다.

영화 미술팀이 얼마나 꼼꼼하게 노력을 기울였는지 느껴진다. 델몬트 유리병, ‘사랑’ 액자, 야광 별, 옥색 가구… 90년대 집의 무드가 물씬 풍겨 나는 곳. 그 집에서 자란 주영(박수연)은 정상여고 태권도부에 속해 있다. 학교명은 올라야 할 ‘정상’을 지향하고자 하지만, 정상에 오르기 위해 비정상을 감내해야만 한다. 방관은 숱하게 일어나고, 심지어 교육을 빙자한 폭력조차 만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 벽면에는 “방관도 폭력이다” 혹은 “제3자도 가해자다” 같은 ‘맞는 말’이 적힌 포스터가 잔뜩 붙어있을 뿐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 학대 같은 조건도 “다 하는 건데”라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정하고 청소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어머니가 있음에도, 주영은 그 비정상의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구조화된 폭력의 세계니까.

거기에 사이렌을 울리며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다 주고 싶은 첫사랑,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같이 있으면 다 아름다운 두 개의 거울 같은 사랑을 외면할 자신이 있는지. 그러나 아직 어린 소녀들의 주변은 부서지기 너무나 쉽다. 세기말의 흉흉한 세계에서는 더더욱.
폭발할 것 같은 세계였던 동시에, 그 폭발을 핑계로 폭력을 숨겨보려는 이들이 있는 세계이기도 했다. 세기말의 흉흉한 소문들과 권위 의식이 뒤섞이는 이상한 세계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손길들이 작은 삶들을 짓뭉개려 했지만,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햇볕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듯 말랑말랑한 첫사랑의 안온한 온도와, 그 첫사랑을 지키기 위해 가장 차가운 세상에서 가장 뜨거워져야 했던 온도까지 하나에 모두 담았다. 그 극명한 온도 차를 오가다 보면 관객은 목도하게 된다.
소녀가 소녀를 구한다는 것을. 거칠고 폭력적이고 꼬여 있는 세상에서. 사랑이든 우정이든 운동이든, 동기가 무엇이든 그들 모두에게 자유롭게 뛰는 체육관 하나가 필요했음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무관하게 지구 종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이었을지도 모르다. 사랑이 없고, 깨어진, 그 모든 날들이 어쩌면.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다. 수정액으로 여기저기 날 선 낙서가 적혀 있는 세상을 막연하게 거칠다 느꼈던 어린 시절에서, 수정액과 수정 테이프를 섞어 사용하던 학창시절을 지나, 이제는 오래 전 한 개 사둔 수정 테이프가 집 어딘가 굴러다니지만 좀처럼 쓸 일이 없는 그런 날들을 산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보여준 마음들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자신을 태워서라도 모든 걸 내어주고 싶은 첫사랑의 애틋함, 가볍고 즐겁지만 그 이상을 분명 간직하고 있는 우정, 같은 상처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스크럼을 짜고 연대할 수 있는 마음. 부디 주영과 예지, 다른 아이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서로 손을 잡고 벗어나자. 사랑 없음으로 종말에 이르는 세상을.

2023. 08. 26. 10:30-12:22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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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콥스키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
6★/10★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여자가 음악원에 가는 것보다는 시집가는 게 남는 장사라고 말하는 남자다(그러나 이 말의 대상인 미래의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면, 그의 말은 틀렸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결혼할 여자에게 자신은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으며, 결혼하더라도 형제 관계처럼 지내야 할 거라고 거듭 확인시키는 남자다. 결혼식 당일 성당 앞, 남루한 차림의 어느 ‘미친 여자’가 설레는 마음의 신부에게 절대 그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남자다. 또 다른 누군가 역시 신부에게 그에게서 도망치라고 조언하는 남자다. 남성에게만 다정하고 그들과만 시간을 보내는 남자다. 아내가 지참금으로 가져오기로 한 돈의 융통이 어려워지자 그 돈만 믿고 있었다며 윽박지르는 남자다. 음악가를 꿈꾸는 아내가 남편의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남자다. 독수공방에 지친 아내가 침대로 다가오자 경멸하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에는 목을 졸라버리는 남자다. 마침내는 너의 집착 때문에 더는 창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재능 보존’을 위해 아내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남자다. 친구들을 앞세워 아내의 존재가 ‘신경 쇠약’의 원인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며 ‘태양’인 자신의 재능을 갉아먹지 말라고 말하는 남자다.그러나 그의 아내, 만만치 않다. 그녀는 남편의 재능을 추앙한다. 아니, 숭배한다. 적극적인 구애 편지로 처음 미래의 남편을 만난 자리에서 남자의 까다로운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자신의 지참금 규모를 어필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적극적‧자발적으로 자신을 남자에게 상납한다. 그녀의 ‘과잉’은 구애 과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너 때문에 자기 재능이 좀먹고 있다고 모욕하며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외도가 이혼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왔는데도 단호하게 이혼 서류 서명을 거부한다. 자신만이 유일한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숙한 아내’였던 것도 아니다. 내내 남편에게 외면받고 별거하는 동안 육체적 관계만 나누던 남자를 따로 두었고, 그 남자의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아이는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진 후 유년기에 사망했다.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연명하면서 아내라는 지위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종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신은 나와 못 헤어져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집착이 증오, 경멸, 멸시 등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품을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로 되돌아오더라도 남편에게 두려움, 소름 끼침 등을 줄 수 있다면 어쨌든 남편과 함께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녀는 남자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이 되기로 결심했고 죽을 때까지 그 결심을 삶으로 살아냈다.남자의 이름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여자의 이름은 안토니나 밀류코바. 주지하다시피 전자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로 지금껏 사랑받고 있고 후자는 종종 동성애자인 남편에게 과하게 집착한, 천재 남성 곁에 으레 존재하기 마련인 ‘악처’ 정도로 종종 회자된다. 안토니나가 ‘천재 남편’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뒷받침하고 그의 ‘사생활’ 스캔들까지 두루 관리해준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열렬한 감정도 사랑보다는 집착에 훨씬 가까웠다. 여러 모로 안토니나는 동시대 관객에게 ‘교훈’을 줄 위치에 있는 인물은 확실히 아니다(실제로 영화는 왜 지금 다시 안토니나와 그녀가 차이콥스키와 맺은 관계를 다시 조명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기괴한 관계에서 우리는 이중 위계를 거스르는 한 여인의 편집증적 의지를 엿볼 수 있고,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안토니나는 음악가를 꿈꿨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 유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재능이 있었더라도 어차피 시대적 한계로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차이콥스키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남성이었기에 재능을 펼치는 데 제약도 없었다. 그저 동성애 ‘추문’을 방지해줄 아내만 있으면 그뿐이었다.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대신 ‘위대한 음악가의 아내’가 된 안토니나가 실패한 건 바로 이 역할이었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나마 자신이 남편에게 바친 사랑을 돌려받고 싶어 했다. ‘태양’인 차이콥스키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집착적 애착은 예술‧젠더의 위계를 거슬러 남편에게 자신을 각인하기 위해 안토니나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신혼 초의 안토니나가 빨간 산호 목걸이를 차고 차이콥스키와 함께 길을 걷는 장면이 나온다. 차이콥스키는 산호가 진짜냐고 묻는다. 안토니나는 부끄러운 듯 혹은 이 상황이 우스운 듯 가짜라고 말하면서도, 일부 진짜 산호가 섞여 있다고 답한다. 차이콥스키는 ‘내 아내가 가짜 산호 목걸이를 차다니!’라고 혀를 차며 마찬가지로 웃어넘긴다. (차이콥스키에게는 그저 ‘가짜’이기만 했지만) 진짜와 가짜가 섞인 안토니나의 산호 목걸이는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감정 역시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혼재임을 가늠케 한다. 그녀는 정말 차이콥스키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실현되지 못한 자신의 꿈을 대리 충족하는 수단으로 그의 아내 지위를 욕망한 걸까? 숱하게 손가락질받으면서도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끝까지 지킨 데서 정말 행복을 느꼈을까? 상대를 절망시키고 넌덜머리 나게 하는 집착을 정말 ‘사랑’이라 생각했을까? 아마 그녀 자신조차 명확히 답하지 못할 이 물음은 우리가 연인에게 속삭이는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를 뒤흔든다. 당신은 정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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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가버나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가버나움> Capernaum, 2018 제작
레바논 외 | 드라마 | 2019.01.24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26분
감독: 나딘 라바키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가버나움>
이 영화는 이오아나 유리카루의 <레모네이드>(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4), <어느 가족>(2018),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는 분명 다르게 다가온다. 나열한 영화 속 주인공들을 모두 만났다 자부해도 <가버나움> 속 자인과의 만남을 ‘익숙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15분의 기립박수’와 ‘각종 영화제에 초청받았다’는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지도 모른다. <가버나움>은 어느 리뷰에서도 완벽히 해석할 수 없는 작품이다.
출처: <가버나움> 스틸컷
‘가버나움’은 성서에 등장하는 도시로, 예수가 축복하는 동시에 인간의 욕심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 내릴 거라 예언한 곳이다. 성서에서는 ‘축복’과 ‘멸망’을 함께 품고 있는 마을이지만, 자인이 사는 곳은 오직 ‘멸망’만이 존재한다. 감독의 가버나움은 기적보다, 혼돈에 초점을 맞췄다.
<가버나움>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각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은 그들에게 지독한 굶주림과 끝없는 노동을 강요한다. 대부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유일하게 자인의 부모만이 기구한 인생에 절망하기만 한다. 자식들에게 아무런 힘이 없는 이름을 던져주고 거리로 내쫓는다. 우리가 자인에게서 일말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까닭은 함께 사는 부모가 여전히 젖병을 물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혼돈 속에 갇힌 자인을 복잡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색 바랜 빨간 신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
출처: <가버나움> 스틸컷
사하르(여동생)가 생리를 시작하자, 자인은 불안함을 내비친다. 그녀도 떠나간 다른 여동생처럼 남자에게 팔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 주도권은 자신의 부모가 휘두를 것도 아이는 알고 있었다. 끝내 자인은 여동생을 가게 주인에게 빼앗기고 만다. 지키겠다 맹세한 오빠의 절실함은 부모의 매질로 손쉽게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집을 나와 무작정 버스를 타고 떠난 자인은 바퀴맨 복장을 한 할아버지를 따라 작은 놀이동산에 내린다.
놀이동산, 그곳은 아이에게 주어진 새로운 세상일까? 페인트가 다 벗겨진 놀이기구를 통해 짐작했겠지만, 역시 아니다. 하지만 자인은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너무나 자신과 똑같은.
아이는 식당에서 일하는 라힐과 그녀의 딸 요나스를 만난다. 요나스를 집에서 돌보는 것으로 자인은 라힐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다. 나무판자들이 간신히 바람을 견디고 있는 판자촌에서 아이는 또다시 동생을 성심성의껏 돌본다. 비극에 비극이 더해지는 순간에도 그들은 내내 웃고 있고, 우린 말 못 할 고통을 느낀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는 너무나 익숙한 하루일 뿐이었고 미소마저 사라지게 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가버나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인만이 아니다. 불법체류자 라힐 역시, 딸과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 새로운 신분증을 구해야만 한다. 비극 속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순식간에 라힐이 경찰에 잡히고, 자인은 요나스와 긴 기다림을 함께 하다 결국 불법 신분증을 만드는 어른에게 속아 요나스를 두고 집으로 향한다. 출생신고서를 가지러 집에 온 그 순간, 사하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불행이 끊임없이 두 사람을 덮쳐오지만, <가버나움>은 이를 너무나 태연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그렇게 자인은 법정에 서서 순순히 자신이 한 충격적인 행동을 읊는다.
여동생의 남편을 칼로 찔렸음을.
출처: <가버나움> 스틸컷
절망스럽지만, 자인이 간신히 암흑을 찢고 나와 처음 마신 건 엄마의 모유가 아니라 술이었을 것이고, 처음 눈을 떠 본 것은 밤마다 헐떡이는 부모의 옆모습이었을 것이다. 일찌감치 깨달았겠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열두 살로 추정되는 아이는 부모를 고소하기 전까지 그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부모는 아이의 앙상한 신체를 때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끝내 아이를 자기의 손으로 가버나움에 가둬버린다. 더 충격적인 건, 그들이 끊임없이 가버나움 안에서 새 생명을 갈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자인의 손에 칼을 쥐게 한 건, 가난에 힘입어 현실을 부정하는 법밖에 모르는, 무능력하면서 요란하기만 한 부모의 만행 때문이다. 따라서 자인이 법정에 서서 ‘가난이 아닌 부모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 건 당연한 결과다. 모든 걸 통달한 어린아이의 나지막한 선언이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아이가 스스로 삶의 고난과 슬픔을 터득했음에도 가족은 불완전하다 못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었던 자인에게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될 수 없었고, 아이는 선택한다. 부모를 버림으로써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기로.
그렇게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시작한다.
출처: <가버나움> 스틸컷
<가버나움>는 감각적인 장면 전환과 역동적인 스토리, 실제 빈민가에서 캐스팅한 배우들의 열연으로 완성된 수작이다. 그 덕에 필자는 쉽게 감동할 수 없었다. 물론 감동과는 아주 먼 이야기지만, 이 작품을 ‘레바논의 고립된 현실에 직격탄을 날리는 영화’라고만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신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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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루프를 벗어나는 기발한 방법
씨네랩의 초청 시사로 개봉 전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하루하루를 지나다 보면 문득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같은 사람을 만나서 비슷한 업무를 하고 늘 먹는 음식을 먹다보면 어느 덧 하루가 금새 지나가 있다. 그래서 특별한 변화가 없는 일상 속에서 권태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특히나 자신이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고 여러 사람과의 관계에 실망하고 지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런 권태감에 빠지기 쉽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거란 생각은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고 그저 한 자리에 계속 머물게 만들어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어렵게 한다.
영화 <팜 스프링스>는 같은 하루에 갇혀 반복되는 하루를 살고 있는 나일스(앤디 샘버그)의 이야기다.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과거 빌 머레이가 주연을 맡았던 <사랑의 블랙홀>과 유사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팜 스프링스>는 한 남자가 하루를 반복하며 산다는 설정에 그 하루를 똑같이 반복하는 다른 사람들을 넣어 변주하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나일스가 하루의 무한 루프에 빠지게 된 과정을 먼저 보여주지 않는다. 처음 영화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나르시스트처럼 조금은 무력해 보이고 괴상하게 보인다. 나일스는 이미 무수한 오늘을 몇 번이고 반복했고 계속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를 해오다 이제는 그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작은 변화가 생긴다. 나일스가 참석하게 되는 결혼식 신부의 여동생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가 하루가 반복되는 무한루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애초에 이 무한루프가 왜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 나일스는 혼자 하루를 반복하다가 중간에 남자 하객인 로이(J.K.시몬스)를 끌어들였고 이후에 세라까지 무한루프에 참여시키면서 이 세 명에게는 무수한 하루가 반복되게 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하루를 기억못하지만 이 세 사람에게 반복되는 모든 기억은 그들의 기억속에는 남는다.
이 영화에서 최초에 하루를 반복하던 나일스는 유일한 변수였다. 나머지는 자고일어나면 리셋되어 버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상황을 변주할 수 있는 건 나일스 자신 뿐이었다. 그런데 로이가 그 루프에 들어오게 되면서 작은 변수가 생긴다. 하지만 로이와는 거리 상으로도 멀리 떨어져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고, 나일스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된 인물로 각자의 삶에서 변수가 되지만 서로의 루프에서는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더욱 큰 변수가 되는 건 세라의 등장이다. 새라가 무한루프의 하루를 같이 하게 되면서 나일스는 자신의 삶에 조금은 가까운 동반자가 생긴다.
그 무한루프를 벗어나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쓰는 세라를 바라보는 나일스는 자신이 시도했던 여러 노력들이 쓸데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매번 한다. 나일스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고 결론내리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포기한 인물이다. 여자친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은 그를 더욱 그 하루에 안주하게 만들었다. 새롭게 무한루프에 들어오게 된 세라도 마찬가지로 그 결혼식에서 우울한 인물 중 하나였다. 동생의 남편이 될 사람과 바람을 피고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그가 반복되는 하루로 들어오면서 그 우울감을 잠시 잊어버린다.
영화의 두 인물은 삶에서 가장 우울하고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없는 시점에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 하루는 그들에게 최악의 하루였고 외롭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그런 두 인물이 같이 하루를 반복하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변주해나가는 모습은 꽤 유쾌하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들의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하루 안에서 그들은 여러가지 모험도 해보고 극한의 상황을 만들어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
기존에 하루를 반복하던 나일스가 그 하루를 벗어나는 것을 이미 포기했는데, 그 이유는 그 하루가 최악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세라 또한 계속 그 하루를 벗어나려 애쓰는데 그 이유 또한 그 하루가 최악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나일스는 그 최악의 하루 속에서 그저 자잘한 변주로 재미를 느끼고 그 삶에 안주하려는 인물인 반면 세라는 어찌되었든 조금은 다른 내일을 꿈꾸는 인물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 두 인물의 관계는 흥미로운데 두 인물 모두 연인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모두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물이 아니다. 즉 그 관계는 비정상적인 관계이거나 함께 미래를 볼 수 없는 관계다. 그렇게 우울함 속에 있는 인물들이지만 둘이 만나 같이 생활하면서 긍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낸다. 특히 세라가 그 하루를 벗어나려 무던히 노력하고 나일스를 설득하는 여러 장면들은 미래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주변의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일을 꿈꿀 수 없다는 것은 불확실하느 것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고 그저 오늘 편안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비롯해 주변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고 여러가지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다. 영화 속 인물인 로이는 얼핏 나일스에 대한 분노를 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는 현실에서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보면서 나름 행복한 순간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의 오늘만 볼 뿐 미래의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무척 안타까워한다.
비슷한 일상의 챗바퀴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한 편으론 편안한 길이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상을 만들면 그 챗바퀴에서 벗어나 조금은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다. 영화 <팜 스프링스>는 기존의 타임루프 영화들과 비슷하면서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나일스와 세라는 이야기 안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을 만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오늘' 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내일'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들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 한 발 더 내딛는다.
나일스 역을 맡은 배우 앤디 샘버그는 드라마 시리즈 <브룩클린 나인 나인>으로 이름을 알린 코미디 배우이다. 이 영화에서 꽤 능청스러운 코미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번 영화의 제작까지 맡아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팜 스프링스>는 지난 골든 글로브 시상식 뮤지컬 코미디 부분 최우수 작품상을 타기도 했다. 연출을 맡은 맥스 바바코우 감독은 장편 영화 데뷔작으로 꽤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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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과 영문 제목 사이의 괴리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정치가 싫었던 인권 변호사 문재인은 왜 대통령이 되었을까? 청와대 5년, 그는 왜 권력의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사저 시위대의 욕설 속에서 그는 왜 묵묵히 꽃만 심었을까? 그를 지켜본 이들이 한 조각씩, 숨겨진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그는 왜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 시절은 왜 '대통령 문재인'을 원했을까?' 그 퍼즐이 비로소 완성된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양날의 검
노이즈 마케팅. 가장 많이 알려진 마케팅 기법 중 하나다. 이 기법의 핵심은 이슈다. 자극적이거나 부정적이어도 좋다. 사람들의 입에만 많이 오르내리면 된다. 품질에 관계없이 관심을 끌고, 일단 제품을 알리는 것. 노이즈 마케팅의 핵심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입니다>는 노이즈 마케팅의 정수를 보여줬다. <사이에서>, <길위에서>, <목숨>, <노무현입니다>를 연출한 이창재 감독의 신작은 공개 전부터 논란의 한가운데에 섰다. 정치적 갈등을 초래할만한 발언이 담긴 영상을 '김어준의 다스 뵈이다' 258회에서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영상은 본편에 포함되지 않았다. 제품 품질과 무관하게 관심을 끈다는 목적을 120%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노이즈 마케팅은 양날의 검이다.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구설수를 호평으로 바꾸지 못하면 역효과가 난다. 제품 품질에 대한 평가가 구설수에 먹힐 수도 있다. <문재인입니다>도 마찬가지다. 메시지에 쏠려야 할 관심이 정치적 공방에 묻혀 버렸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안타깝다. 지지 정당이나 정치인 문제를 떠나서 보더라도 <문재인입니다 This is the President>는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헤치다
이창재 감독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노무현입니다>다. 하지만 이 영화로 이창재 감독을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하다. 정치적 성향을 지우고 나며 그의 작품에 깃든 독특한 세계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매개체는 달라져도 그의 필모그래피는 일관적이다.
<사이에서>는 신내림과 속세 사이에서 갈등하는 무속인의 삶을 그려낸 영화다. <길위에서>는 비구니 스님을 통해 속세를 떠나야 하는 운명을 관찰한다. <죽음>과 <노무현입니다>는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에 대해 묻고, 한 시대의 얼굴이 되었지만 죽음을 선택한 대통령을 그려낸다.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삶과 운명의 관계를 찾으려는 사색으로 가득하다.
<문재인입니다>도 같은 길을 걷는다.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에서 퇴임한 한국 대통령은 이상한 존재다. 그 자체로 운명과 인간적 삶이 충돌하는 아이러니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아무나 될 수 없다. 모든 국민이 아는 정치인이어도, 가장 유력한 후보도 천운이 따르지 않으면 당선될 수 없다.
하지만 끝은 가혹하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현직 못지않게 무겁다. 죽거나, 망명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자살하거나... 누구 하나 희극을 맛본 이가 없다. 그러니 퇴임 후 조용히 잊히고 싶다는 대통령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마모되고 부서지기 일쑤인 자리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지지와 비난이 맞닿는 삶은 어떤 모습인지. <문재인입니다>는 그 삶의 의미를 찾는다.
대통령의 두 얼굴, 아틀라스와 프로메테우스
영화는 대통령이라는 운명을 마주한 인간을 둘로 쪼개 카메라에 담는다. 한쪽에는 아틀라스가 있다. 지구만큼이나 무거운 과업을 5년 동안 수행하는 사람이다. 다른 한쪽에는 헤라클레스를 만난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그는 마침내 형벌에서 풀려나 자유를 찾았다.
처한 상황이 상이한 만큼 두 이미지를 묘사하는 분위기도 다르다. 오랜 변호사 동료와 임기 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의 진술은 아틀라스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이들의 증언은 단순한 '문비어천가'가 아니다. 문재인이라는 사람의 특징을 나름 객관적으로 들려준다. 인내하는 사람, 듣는 사람, 과묵한 사람의 장단점이 빠르고 날카로운 리듬으로 제시된다.
그 과정에서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건도 등장한다. 주한미군 방위금 문제, 일본과의 무역 전쟁, 조국 사태 등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정치적 평가에는 관심이 없다. 굵직한 현안을 헤쳐 나오는 주인공의 습관과 태도, 정치 방식을 전할 뿐이다.
반면에 자유로워진 프로메테우스는 평화롭다. 대통령 퇴임 직후 그가 아내와 비서진의 도움을 받아 정원을 가꾸는 일상을 보여준다. 반려 동물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 산책에 나서는 모습이 뒤따른다. 전 대통령의 일상은 긴 템포로, 차분하게 전시된다. 물론 운명의 무게를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반대파의 외침이 그의 집을 감싼다. 과거의 결정이 최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지울 수 없다.
조롱과 욕설에 침묵하며 농사짓고 반려 동물을 돌보는 삶. 이 전원생활을 보다 보면 천성적으로 정치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 난리 끝에도 조국 전 장관과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 '차라리 대통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동정과 비난 사이로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이는 <문재인입니다>가 영화적으로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한 듯 보이는 이유다. 아틀라스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프로메테우스가 얼마나 힘겨웠는지는 알 수 있으니까. 과중한 운명을 마주한 인간의 두 얼굴을 성공적으로 포착한 셈이다.
국문과 영문 제목의 괴리감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문재인입니다>의 영화 외적인 선택은 더욱 의아하다. 마케팅을 비롯한 선택 하나하나가 영화의 본질을 가리고 불필요한 논쟁과 소모전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제목부터가 문제다. 물론 전작 <노무현입니다>와 이어지는 영화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열망이 읽히기는 한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 분량도 일부 있다.
하지만 <문재인입니다>라는 제목은 내용이나 메시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영화는 문재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통령직을 수행한 한 인간을 살핀다. 그런데 매개체에 불과한 문재인이라는 이름에는 수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름에는 한국 사회를 둘러싼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와 논쟁이 함축되어 있다. 이슈 하나하나가 찬반이 격돌하는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남북관계, 탈원전, 한일관계 등. 즉, 문재인이라는 이름 석 자는 역으로 영화의 참뜻을 가려 버린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영문 제목인 <This is the President>가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본질에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다가간다. 잘못 번역된 외국 영화 제목이 오해를 초래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문재인입니다>는 보기 드문 반대 사례인 셈이다. 국문과 영문 사이의 괴리감은 영화 외적 요소가 평가와 해석, 감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어떤 이유 때문이든 과소평가한 결과처럼 보인다. 감독의 전작이나 정치적 성향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Poor 형편없음
의도는 흥미롭다. 그러나 방해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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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실감나서 포기해버린 영화
가끔 여기에 영화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이지만 영화관의 모든 영화를 보지 않는다. 주로 거르는 영화의 기준이 있다면 지나치게 폭력적인 영화, 공포영화 등등이 있는데 이 서울의 봄도 총기가 등장하고 군대배경인데다가 이미 서사적으로는 널리 알려진 영화라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기어코 보았고 난 보다가 중간에 나와버렸다. 관람 포기를 해버렸다. 관람포기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영화가 너무 실감났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서사보다는 인물의 싱크로율이 치트키인 것은 보나마나한 사실이었기에 굳이 그 시기의 출세에 목마른 탐욕적인 캐릭터들을 보고 유쾌할 자신이 없었는데 역시나 보면서도 꾸준히 불쾌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잘 못 만든 영화라고 평가절하하고 싶진 않다. 이 영화는 꽤나 잘 만들었다. 그 증거로 나의 관람 포기라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댈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 시절의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그 시절의 카리스마, 현 시대의 무식함은 현대의 관점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답답함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과거로 회귀한 걸까 싶은만큼 실감났다.
그리고 영화 속 모두가 알지만 실명을 밝힐 수 없는 볼드모트같은 그 분, 그 분의 묘사도 뭐 언급하지 않아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부분은 굳이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그 인물 한 사람만 욕하고 싶진 않았고, 그저 그 시절 돈없는 나라에서 출세에 목마른 사람들의 탐욕이 모인 군대라는 무논리의 집단을 보니 한국이라는 나라의 7-80년대는 진짜 아수라장이었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불법을 행해도 이기면 된다는 인식은 이 때가 더 심했겠구나 라고도 생각한다. 그 때는 이기면 불법도 묵인되는 세상이었을 테니까.
역사의 불편한 지점은 그저 역사책으로만 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 감정없는 텍스트로만 봐도 분노가 생기지 않나. 이걸 서사로 풀어진 영화로 보면 분노가 max가 되어 감정과잉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역사는 무미건조한 게 차라리 더 정신건강에 나은 것 같다. 뭔가 영화에 대해 혹평을 한 거라고 오해하실 수도 있어서 다시 말씀드리면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볼만한 영화라고 추천해드릴 만하다. 입소문 탈 만했다. 주저리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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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끝없는 Why + 영화의 미래를 논하다.
제 25회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즈"부문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불의 딸들"
그리고 "시네필전주"부문 빔 벤더스 감독의 "룸666".
두 작품은 '페드로 코스타 + 빔 벤더스' 함께 묶여 상영되었습니다.
페드로 코스타 "불의 딸들"
시놉시스: 포고 화산 폭발로 인해 어린 세 자매는 뿔뿔이 흩어지지만 그들은 노래한다.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어찌하여 살아가고 고통을 받게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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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출신의 감독인 페드로 코스타가 선보이는 Experimental short(실험적인 숏 필름)로, 현재 그가 유럽에서 투어 중인 Canción de Pedro Costa 박물관 전시의 일부입니다.
9분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1951년 카보베르데 섬의 포구 산에서 발생한 화산폭발에서 시작합니다.
코스타는 한 화면에 세 명의 여성, 아델라이드, 클로틸드, 이로디나가 비아지오 마리니의 "파사칼리아 (Opus 22)" 편곡을 노래하는 서로 다른 컷 세개를 함께 배치하여 보여줍니다.
화면 속 여성들은 끊임없이 "왜?" 라는 물음을 본인 스스로에게, 후대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던집니다.
또한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짧은 다큐멘터리 클립을 삽입하여, 관객들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왜?"라는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이처럼 끝없는 "Why?"를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라는 단순한 질문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해야되지?"라는 물음까지 던집니다.
이처럼 그의 실험적인 영상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상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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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 "룸 666"
시놉시스: 1982년 칸 영화제, 전반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영화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느낌이 곳곳에 퍼져 있다. 호텔 마르티네즈의 666호실. 고다르, 파스빈더, 스필버그, 안토니오니, 헤어조크 등의 감독들이 질문에 맞춰 대답한다. "영화는 곧 사라질 언어, 곧 죽어갈 예술인가?"
1980년대 텔레비전과 새로운 촬영기술, 장비 등의 등장으로 영화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습니다.
영화의 존폐가 걸린 변화.
이에 감독 빔 벤더스는 1982년 깐느영화제 당시 호텔의 666번방을 빌려 동료 감독들에게 "영화의 미래"에 대해 인터뷰를 하게됩니다.
프랑스영화 거장 장뤽고다르, 할리우드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이탈리아 영화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의 세계 각국의 감독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는 곧 사라질 언어, 곧 죽어갈 예술인가?"
이에 서로다른 견해를 보이는 감독들.
그들의 견해는 크게 몇가지로 나뉘어집니다.
1.영화는 죽을 것
영화감독인 나조차도 더이상 보지않는 영화를 미래에 누가 보겠냐며 약간은 회의적인 태도.
텔레비전이 더 재미있음.
영화는 너무나 짜여진 것이고, 진실된 캐릭터가 없다고 강조.
연극도 죽고, 소설도 죽었듯 이제 영화도 죽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
2.영화는 지속적일 것
텔레비전의 것들은 이야기가 없으므로 우리의 진실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와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멀리서 큰 것을 바라보는 것과 가까이서 작은 것을 바라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므로, 영화인들이 텔레비전의 등장에 크게 두려워 할 필요없다라는 입장.
혹은 '디지털이나 자기 필름등 새로운 영화촬영 기법들을 수용하고 활용하여 발전하는 시선'에서 영화의 지속을 논함.
3.영화가 죽지는 않지만 성장하기 쉽지 않을 것
텔레비전 덕분에 보다 폭 넓은 영화의 보급이 이루어졌지만, 이에 반해 국제 경제적 인플레이션이 생김. 이제 점점 영화에 투자하는 비용들이 더 비싸 질 것이고, 그것이 영화제작에 발 목을 잡을 것임. 영화를 망치는 것은 기술 발전도, 감독도 아닌 영화를 제작하는데 'Yes or No'를 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다.
4.필름 안쓰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야!
필름을 안쓰는 디지털 영화는 취급하지 않고, 디지털로 영화를 제작하지도 않을거라는 입장.
5.영화 기술 개발? 오히려 좋아.
필름(Pellicule)로 영화를 찍는것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번거롭다.
이럴바엔 디지털? 오히려 좋을 수도.
과연 어떤 감독이 어떤 의견을 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정확하게 영화의 미래를 내다보았을까요?
이처럼 "영화의 미래"를 두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가진 감독들의 시선을 알아볼 수 있는 영화 "룸 666"입니다.
씨네랩 소속 기자로 제 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여한, 강예림 기자였습니다.
상영일정:
CGV 전주고사 3관 2024.05.03 11:00
CGV 전주고사 3관 2024.05.05 18:00
CGV 전주고사 2관 2024.05.10 10:30
영화제 일정:
2024.05.01-2024.05.10
"불의 딸들" 페드로 코스타 감독 인터뷰 참조: https://filmmakermagazine.com/123828-interview-pedro-costa-the-daughters-of-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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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4주 최신 개봉영화(캔디맨, 나의흑역사 로맨티카, 로빈의 소원, 아하 테이크 온미, 종착역)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4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캔디맨 #나의흑역사로맨티카 #로빈의소원 #아하테이크온미 #종착역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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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듄> 메인 예고편
10191년,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후계자인 폴(티모시 샬라메)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유일한 구원자인 예지된 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리고 어떤 계시처럼 매일 꿈에서 아라키스의 행성에 있는 한 여인을 만난다. 아라키스는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스파이스의 생산지로 대가문 세력들의 음모가 격돌하는 전쟁터. 귀족들이 지지하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에 대한 황제의 질투는 폴과 그 일족들을 죽음이 기다리는 아라키스로 이끄는데…
두려움에 맞서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라! 이것은 위대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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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챌린저스> 1차 예고편
코트 위 승리를 향한 집념, 치명적 끌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