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2025-06-03 23:59:25
<신성한 나무의 씨앗> 리뷰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는 촬영을 중심으로 눈에 띄는 두 장면이 있다. 집에 갇혀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딸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게 되는 시위 영상 장면과, 사라진 권총과 가족 간 신뢰를 찾겠다며 아버지가 카메라 앞에서 가족들에게 증언을 요구하는 장면. 둘은 각각의 진실을 찾기 위해 촬영되고, 촬영하는 영상이다. 하지만 전자는 그것에 성공하고, 후자는 실패한다. 억압을 피해 촬영된 영상은 진실을 찾고, 억압적으로 촬영한 영상은 진실을 더욱 미궁 속에 빠뜨린다. 만인에게 열린 거리와 인터넷에서의 영상과 고립되고 폐쇄된 집에서의 영상. 가부장제와 불평등, 현실과 픽션 등 여러 레이어로 감싸진 두 영상의 비교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라는 영화의 다층적인 위치와 조응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비교가 또 있다. 영화의 마지막, 픽션 속에서 결국 땅에 묻힌 아버지(가부장)의 손과 시위 영상 속 V를 그리는 여자의 손. 이란 시위라는 현실과 픽션 사이에서 다양한 형식적 시도를 통해 울림을 주는 걸작이다.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참석해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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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일 때 사랑하면 최악이 된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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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개봉 전부터 이미 포스터로 유명해진 영화다. 배우 정재영이 주연을 맡은<나의 결혼 원정기>(2005)의 한 장면과 유사하다는 것. 배급사인 그린나래미디어는 공식 트위텅 정재영 배우로부터 온 메시지를 게재하며 이 밈(meme)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한국 사람들은 재미있다. 어쩌면 머나먼 노르웨이에서 온 이 영화가 포스터 때문이라도 한국에서 대박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선언은 진부하지만 나름대로 유효하다. 나는 자꾸만 '누구나 사랑할 땐 최악이 된다'로 제목을 혼돈했다. 주어의 자리를 어디에 둘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누구나 사랑할 때 최악이 된다고 할 때는 최악이 되는 사람의 변명 같이 들리지만 주어의 자리를 바꾸었을 때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종종 저지르는 귀여운 어리석음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사랑할 때 사람들은 자주 바보가 된다. 나도 그렇다.
사랑할 때 나는 얼마나 최악인가를 떠올렸다. 성숙한 사람들은 사랑할 때 최고의 모습만 보여줄까? 지나고 나서 보면 나는 항상 최악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미성숙해서일까.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며 성숙해지기는 할까. 언젠가 성숙한 어른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는 할지 의문이다.
'사랑할 때'라는 때는 언제일까. 영화의 원제는 덴마크어, 영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다. 세상에서 제일 별로인 사람. 그 제목이 어쩌다 '사랑할 땐'이라는 조건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이 멋지다. <더 워스트 퍼슨 인 더 월드>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음차번역을 하지 않은 제목을 만나 반갑기까지 하다.우리나라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라고, 그렇기에 '사랑하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선언에 공감하며 영화표를 끊을 관객도 많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나?
율리에는 의학을 공부하다가 때려치우고,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또 때려치우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진을 공부하면서 연애도 하고, 사람도 만난다. 그러다 <밥캣>의 작가로 유명한 악셀과 사랑에 빠진다. 악셀과 살림을 합치고, 악셀의 친구들과 가족을 만난다. 40대 중반인 악셀은 율리에와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율리에는 이제 겨우 서른이다.
'서른'이라는 숫자는 유난히도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마치 서른이 되면 인생이 끝난다는 듯이, 혹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듯이. 나는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로 넘어가던 날 밤에 혼자 집에 앉아 나의 이십대에 관하여 구구절절 썼다. 이제 그 파일은 어디에 갔는지 지워졌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 사이 내 노트북이 두어 번 바뀌었으며 뭐라고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문장이 '다 사랑 때문이었다'였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어리석었다. 사랑할 때 최악이 되었다는 진부한 생각을 했다. 나의 방황과 슬픔과 우울과 불면의 밤들을 사랑 때문이었다고 단순히 정의내렸다. 20대의 나는 공공연하게든 공공연하지 않게든 늘 누군가를 만나왔고,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어떤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율리에의 부모는 이혼하였고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렸으며 율리에에게 절대 먼저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법이 없다. 율리에가 악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자 악셀은 그 점을 지적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악셀에게 전이된 거라고.
악셀은 40대 중반의 남성으로, 카툰 <밥캣>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작가다. 악셀을 제외한 친구들은 모두 결혼하여 자식을 키우며 평범하게 산다. 악셀은 율리에와 동거하면서 율리에와 친구들처럼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율리에는 자꾸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만 한다. "넌 좋은 엄마가 될 거야"라는 악셀의 말들은 율리에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지만, 악셀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악셀은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다. 물론 그의 작품에 성차별적 요소가 다분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여성혐오적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예술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율리에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엄마가 되면 앞으로의 인생은 오직 '엄마'로만 점철될 것이다. 악셀은 아빠가 되어도 여전히 유명한 만화가이자 아빠로 존재하지만 율리에는 그냥 누군가의 엄마일 뿐이다.
악셀이 새로 나온 만화의 출판기념회를 하던 날, 율리에는 떠들썩한 행사장에서 조용히 빠져나온다. 한참을 하염없이 걷다 어느 파티장으로 들어가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또 자기가 의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장소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설령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더라도.
익명의 파티장에서 익명의 참가자가 된 율리에는 익명의 남자와 대화를 시작한다. 둘 다 동거인이 있는 상황이기에 '선'을 정하고, 어디까지가 바람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를 테스트한다. 이들은 '테스트'라는 이름 아래 온갖 기행을 하는데, 이들 스스로가 '이건 바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에 거침이 없다.
날이 밝아 헤어질 때까지도 서로의 본명을 모른다.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름을 알면 궁금해지고, 찾아보고 싶어지니까. 그렇게 되면 그들이 정한 '선'을 넘어버리게 되니까.
중요한 건 타이밍
의사가 아니라 서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율리에의 앞에 운명처럼 그 날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 그의 애인과 함께. 아직까지는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 그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율리에는 그가 일한다는 카페로 달려간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에이빈드). 주변의 모든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 오직 그와 자신만 존재하는 듯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율리에는 악셀에게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악셀은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 이런 사랑은 없다'며 율리에를 붙잡는다. 그러므로 율리에는 악셀의 곁을 떠나야 한다. 아직 이룬 것도, 원하는 것을 찾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직업적으로도 성공한데다 율리에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까지 미리 살아본 악셀과 함께 있으면 율리에는 자꾸만 스스로를 악셀과 비교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마음을 티낼 수도 없다.
악셀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율리에의 상황이 최악이라서다. 타이밍이 안 좋다. 상황이 최악일 때 사랑(또는 연애)을 하면 최악이 된다. 가진 것도 없고 내밀 것도 없고 당당하지도 못하고, 하필이면 가장 가까운 사람과 비교하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마는, 세상에서 제일 후진 사람이 되는 거다.
에이빈드 역시 수니바와 헤어진다. 에이빈드의 여자친구였던 수니바는 어느날 자신의 멀고 먼 조상에 대해 알게 되었고, 별안간 요가를 시작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에이빈드는 딱히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하자는 대로 잘 따랐던 것 같다. 운명처럼 수니바는 요가와 명상을 위해 떠나고 SNS 스타가 된다. 헤어져야 할 타이밍이다.
각자의 관계를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율리에와 에이빈드. 이들의 앞에도 비단길만 깔려있지는 않다. 에이빈드는 환경을 위해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실수로 율리에가 임신을 하게 되고, 율리에의 눈에는 미래 계획도 없이 파트타이머로만 일하는 에이빈드가 한심해 보인다.
영화는 프롤로그와 열두 개의 챕터,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의학을, 심리학을, 사진을 찍다 사귀게 된 남자친구를, 오슬로를 싫증내는 율리에의 모습을 담는다. 에필로그에서는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잘하는지를 찾아내고 마침내 홀로 선 율리에가 등장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쉽게 속인다. 어쩌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연애가 아니라 성취가 아닐까. 율리에는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찾지 못한 채 불안한 서른을 눈앞에 두었을 때 연애에 몸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 연애는 율리에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결핍을 채워주지 못했다.
율리에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악셀과의 운명같은 사랑도, 에이빈드와 아이를 낳고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낭만적인 오역이다. 율리에는 사랑해서 최악이 된 것이 아니었다. 최악일 때 사랑하는 바람에 최악의 상황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공허함을 사람으로 채우려고 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영화의 위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악셀의 출판기념회 현장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율리에. 사랑하는 사람을 질투하는 못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별로인 사람(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 되는 순간. 그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2021)
감독 : 요아킴 트리에
출연 : 레나테 레인스베, 앤더슨 다니엘슨 라이, 할버트 노르드룸 외
상영시간 : 121분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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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스윙할 수 있다면
청춘물이라는 환상
중학생 때 재활용 작가의 웹툰 <연민의 굴레>를 무척 좋아했다. 허술한 반항아 ‘차련’과 그녀의 소꿉친구이자 완벽한 모범생 ‘안민’이 주인공인 성장만화로, 차련은 불량 학생 소굴로 알려진 ‘미스터리 클럽’에 들어가서 거창한 꿈 대신 소소한 일상을 돌보며 살아가도 되는 점을 배우고, 학생회 소속의 안민은 몰래 차련과 친동생(안미나)가 가입된 미스터리 클럽을 보호하면서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다.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미스터리 클럽과 학생회의 다른 인물들도 저마다의 성장을 이루는데, 그 과정이 정말 감동적이다.
당시 <연민의 굴레>는 고입을 앞둔 내게 동아리의 환상을 심어주었다. 고등학교에 가면 저렇게 다양한 동아리가 있고, 동아리 활동을 통해 친구를 사귀고 여러 경험을 쌓으면서 자아를 탐구하고 실현할 수 있겠다는 그런 환상. 딱 <연민의 굴레> 같은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부푼 꿈을 안고 고등학생이 된 나는 동아리 활동은커녕 무한 자습 지옥에 빠진 나날만 보내며 10대를 마무리했다.
이제는 안다. 청춘물은 어른의 환상이다. 현실의 10대는 마냥 아름답고 눈부시지 않다. 아름다운 청춘을 누리기엔 10대의 정신은 연약하고 제약도 많다. 이제 나는 청춘물을 보면 설렘에 빠지는 대신 회한에 젖는 사람이 되었다. 분명 나도 지나온 시기인데 어쩜 저렇게 다를까. 어쩜 저렇게 눈부실까….
<스윙걸즈>의 눈부신 여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한 시사회에서 본 영화 <스윙걸즈>도 내겐 환상 같은 청춘물이다. 따분한 보충수업으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아이들은 지루한 수학 수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밴드부를 위한 도시락 배달을 자처한다. 그러나 무더위와 험난한 여정을 견디지 못한 도시락은 상해버리고, 배달했던 아이들은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 아이들을 대신해 갑작스럽게 악기를 손에 쥐게 된다. 보충수업을 피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밴드부 활동은 어느새 일상의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
청춘물은 나라별로 그 매력이 다 다른데, 내겐 유독 일본의 청춘물이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다. 정서적으로 우리나라와 제일 유사하면서도 동아리 활동이 특화되었다는 특이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실제 일본의 10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겠지만, 공부와 스펙 쌓기에 짓눌린 채 10대를 보낸 나 같은 한국인에게 <스윙걸즈>의 세계는 현실과 유사해 보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와 같다.
<스윙걸즈>의 10대들은 조금도 무겁지 않다. 그들이 피하고 싶은 건 지루한 보충수업뿐이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기 그지없다. 소리내는 것부터 쉽지 않아 폐활량을 늘려야 한다며 운동을 시작한 그들은 고된 훈련에 보충수업이나 들을 걸 그랬다며 후회한다. 그러나 후회도 잠시, 점점 악기에서 소리다운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음악에 눈을 뜬 그들은 보충수업을 듣는 것보다 훨씬 바쁜 여름방학을 보낸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새로운 경험, 예상치 못하게 발견한 즐거움, 친구들과 함께 꽃피우는 열정. 그들의 여름을 수놓은 모든 것이 너무 반짝반짝 빛나서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보상이 없는 열정이어도
<스윙걸즈>의 눈부신 여름은 식중독에 걸린 밴드부 멤버들이 예상보다 빨리 퇴원하면서 처음으로 위기를 맞는다. 밴드부를 대신해 시합 응원에 나서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던 건데 ‘진짜’ 밴드부가 돌아왔으니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단기간에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엉성한 그들의 연주보다는 능숙한 밴드부의 연주가 훨씬 시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잠깐의 백일몽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은 허무한 마음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처음부터 악기 연주는 관심도 없었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미련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시합’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없어도 다시 연주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 악기를 사고 연습할 공간을 찾아 떠돌아다니며 처음 연습했을 때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아무런 보상이 없는 연습을 계속한다.
10대 시절 황폐한 내 마음속은 보상 심리로만 가득했다. 지금 아무리 삶이 남루해도 조금만 견디면 더 나은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확신하며 모든 행복을 미래로 미뤘다. 성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장된 행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내가 10대 시절을 회한으로만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한 순간도 현재를 즐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참고 견뎌야 했던 그 시기에 내가 얼마나 빛났는지 너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스윙걸즈>의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연습한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지. 그 시절의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든 상관없다.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가장 빛나는 선물을 얻었다. 추억이라는 선물.
영화의 제목에 들어있는 단어 ‘스윙’은 재즈 연주의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리듬감을 말한다. ‘흔들거리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에서 유래된 ‘스윙’이라는 말이 이 영화와 참 어울린다. 아이들은 계속 흔들거린다. 처음엔 소리조차도 내지 못하고 간신히 실력을 키웠더니 연주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악기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연습할 공간도 변변치 않다. 하지만 그 모든 흔들거림이 곧 리듬이다.
회한에 젖은 꼰대처럼 글을 쓰긴 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오히려 내가 전혀 늦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순간을 즐기지 못한 10대 시절이 아쉬우면 지금부터라도 즐기면 된다. 영화를 보고 나니 ‘달라도 돼, 틀려도 돼, 엇박자로 OK~?’라는 포스터 문구가 뭉클하다. 좋아하는 마음은 늦을 수 없다.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어떠한 종착지에도 다다르지 못해도 빛날 수 있는 유일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스윙할 수 있다면 나의 매 순간도 청춘물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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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중국 개봉 가능할까?
마블 스튜디오의 CEO인 케빈 파이기는, 최근 인터뷰에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 대한 중국 팬들의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파이기는 미국 레드 카펫 시사회에서 중국 영화평론가 레이먼드 저우(Raymond Zhou)와 14분 동안 영어로 단독 인터뷰를 가졌는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 담긴 중국(아시아) 혐오에 대해 집중 조명했죠.
이 영화에 대한 중국 개봉일은 아직 발표된 적 없으며, 공식적으로 검열이 통과됐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합니다. 과거 마블 스튜디오가 중국에서 거둔 수익을 본다면, 이번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성공도 중국 시장에 달렸다고 볼 수 있겠죠. 박스오피스 수입의 가장 큰 열쇠가 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어벤저스: 앤드 게임>은 중국에서 미국보다 이틀 먼저 개봉했으며, 총 6억 2,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중국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외국 영화가 되었으며, 전체 수입도 6번째로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마블은 이 프로젝트(샹치)가 처음 발표된 이후 중국 현지에서 나타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프랜차이즈의 첫 아시아 슈퍼히어로가 기존 히어로들과 같이 충분한 매력을 갖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중국에서는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을까요? 첫 번째로, 많은 중국 팬들은 원작 만화에서 샹치의 아버지이자 적으로 나오는 푸 만추(Fu Manchu)가 기존 할리우드 영화에서 소비돼 온 전형적인 ‘중국인 악당’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인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죠. 이에 관련하여 파이기는, “초기 만화책의 일부를 가져왔을 뿐”이라고 발하며, “어떤 식으로든, 어떤 형태든 이는 마블 캐릭터가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반복했죠.
“푸 만추는 우리가 소유하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만화에서 많이, 아주 많이, 아주 오래전에 바뀌었어요. 우리는 이 영화에 그를 출연시킬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푸만추는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고, 샹치의 아버지도 아니며, 심지어 마블 캐릭터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만화에서 때때로 ‘샹치’가 서양을 수용하기 위해 중국 뿌리를 버리는 것으로 그려지고, 심지어 한 줄거리(코믹북)에서는 아버지를 살해하기까지 한다는 것이 중국의 우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이기는, “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변화시킨 요소 중 하나입니다.”라며 중국 팬들을 안심시켰다. “만화는 모두 60년, 70년,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의 모든 만화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우리는 MCU 방식으로 바꾸고 싶은 요소들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현재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는 “이 영화는 사실 그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라며 샹치가 젊은 시절에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도망친 후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직면하고 극복할 것인지가 이야기의 일부분이라고 전했죠.
이 외에도, 극 중 악당인 만다린을 연기하는 양조위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하나”라고 표현했으며, 주인공인 시무 리우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습니다. 중국 팬들은 시무 리우가 이 역할을 맡을 만큼 매력적이거나 카리스마 있지 않다는 지적을 해왔는데요. 심지어 이 캐스팅을 인종차별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파이기는 이에 관해, MCU의 새로운 캐릭터는 상당수가 덜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출연했으며, 톰 히들스턴, 크리스 헴스워그, 톰 홀랜드, 크리스 에반스 심지어 초기에 큰 반발을 일으켰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빗대어 해명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성공적으로 진행됐는데, 중국 현지 반응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 영화 블로거는 파이기가 “모호하거나 의도적으로 대답한 것”이 아닌 매우 진실되게 인터뷰에 임했다고 평가했죠. 중국 매체 웨이보의 한 유저는 “이전에는 안 볼까 생각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려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댓글을 작성했습니다. 물론, 다른 네티즌들은 “샹치가 개봉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다”라며 비판하기도 했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포함한 MCU의 미래가 달려 있을 수도 있는 중국 시장, 케빈 파이기의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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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눈은 온종일 그녀를 향해 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개 로맨스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마침내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고백 장면은 그간 작품이 쌓아온 두 사람 간의 로맨스 서사를 완성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반면 수많은 로맨스 작품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오만과 편견>에서는 고백 장면이 이 작품의 백미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만과 편견>에서 ‘사랑’은 한 사람의 사랑 고백 이후부터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의 ‘자각’은 그 고백을 거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오만과 편견>을 조 라이트의 영화로 처음 접한 이들에게 엘리자베스를 향한 다아시의 고백은 당황스럽다. 소설의 방대한 분량을 2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둘 사이의 서사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 감독의 실수라 탓할 수도 있지만, 원작 소설에서도 다아시의 고백은 엘리자베스에게나 독자에게나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이는 작품이 철저히 엘리자베스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곧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다아시의 고백 이후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다아시의 사랑은 어느 시점부터 시작한걸까.
소설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를 위주로 전개하나 그와 동시에 소설의 특성을 살려 다아시의 내면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적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 본래 말수가 적은 다아시의 감정을 대사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감독은 다아시의 시선과 손을 클로즈업하는 등 비언어적 표현을 사용한다.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마음에 천천히 스며들었듯이 영화는 점차 선명해지는 다아시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설명하려 노력한다. <오만과 편견>을 처음 관람할 때는 엘리자베스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된다면, 관객은 두 번째 관람에서야 엘리자베스에 대한 다아시의 감정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고로 다아시의 입장에서 <오만과 편견>을 해석하여 엘리자베스를 향한 다아시의 감정 변화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첫 무도회 장면에서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의 춤 신청을 사실상 거절한다. 이에 화가 났던 엘리자베스는 사랑의 묘약이 무어냐는 다아시의 질문에 춤이라 응수하며 마지막에 “Even if one’s partner is barely tolerable“(비록 파트너가 끔찍할지라도)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 말은 앞서 다아시가 절친 빙리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엘리자베스를 ‘tolerable‘(봐줄 만한)이라 평가한 말을 몰래 들은 엘리자베스가 다아시를 비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엘리자베스의 비꼬는 말을 듣고 화를 내거나 당황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다아시의 표정은 그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감정을 읽기 힘든 표정이다.
그 뒤로 엘리자베스는 아픈 언니 제인이 빙리의 집에서 간호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빙리의 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다아시를 다시 마주친다. 빙리의 여동생과 함께 있는 내내 무표정이었던 다아시는 갑자기 찾아온 엘리자베스를 보고 당황해하다 곧바로 정중하게 인사한다. 이러한 다아시의 태도는 먼 길을 걸어오느라 엉망이 된 엘리자베스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빙리의 여동생과 대비된다. 더 나아가 다아시가 만족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빙리의 여동생은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놓는다. 이때 다아시는 책을 읽고 있던 엘리자베스를 보고선 독서를 통해 지성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가 엘리자베스를 신경 쓰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관객은 엘리자베스를 향한 다아시의 마음이 이성적 호감이라 확신하기 여전히 어렵다.
영화는 다아시의 무뚝뚝함이 엘리자베스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성적 성격 때문임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 곳곳에 복선을 배치한다. 앞서 사랑의 묘약이 무어냐는 다아시의 질문에 자신과 춤을 추지 않은 다아시를 겨냥하여 춤이라 대답한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설명했다. 그 이후에 열린 무도회에서 다아시는 먼저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와 정중히 함께 춤추기를 요청한다. 사랑의 묘약이 춤이라고 답한 엘리자베스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또한 다아시는 애초에 엘리자베스가 싫어서 함께 춤추길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중반부 캐서린 대부인의 집에서 둘이 마주치는 장면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엘리자베스가 춤을 거절당했던 무도회에서의 부정적인 첫인상을 이야기하자, 다아시는 처음 만난 사람과 편히 대화하는 재주가 없어 그랬다며 처음으로 자신의 태도를 해명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다아시가 오만하다고 평가하며 그에 대한 편견을 지우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초반부와 달리 슬픔이 서린 다아시의 눈빛을 통해 관객은 그의 감정 변화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매 장면마다 엘리자베스를 향해 고정된 그의 시선은 관객이 천천히 다아시의 진심에 다가서게 한다.
다음으로 영화는 다아시의 손을 총 두 번 클로즈업 한다. 두 번의 클로즈업은 다아시의 사랑 고백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지며 이는 관객이 엘리자베스를 향한 다아시의 마음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언니 제인의 건강이 좋아졌을 무렵 엘리자베스의 가족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탄다. 이때 다아시는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 부축해주며 영화는 곧바로 다아시의 손을 클로즈업한다. 긴장한 듯 손을 폈다 다시 쥐는 다아시의 손과 당황한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연출은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을 나타낸다.
이러한 복선을 통해 관객들은 엘리자베스를 향한 다아시의 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아시의 고백은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기보다 그의 돌발 행동에 가깝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다아시를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남성으로 평가해온 엘리자베스는 그의 고백과 해명에 혼란스럽다. 그런 엘리자베스는 다아시를 의도적으로 피하나 결국 그와 마주치게 된다. 영화는 횡설수설 끝에 황급히 다시 돌아가는 엘리자베스를 비춘 뒤 마지막으로 다아시의 손을 클로즈업한다. 예전과 달리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하고 데려다주겠다는 요청까지 거절당했다. 더욱이나 엘리자베스의 내적 갈등을 알 리 없는 다아시의 손은 더욱 쓸쓸해보인다.
영화는 다아시의 손뿐만 아니라 ‘hand(손)’라는 단어를 활용해 둘의 관계를 암시한다. 다아시가 청혼할 때의 대사는 ‘부디 나와 결혼해줘요’라고 번역된다. 이 대사는 이후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마음을 받아줄 때의 대사와 연결되기 때문에 영어 원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때 다아시는 “Please do me the honor of accepting my hand.”라고 말한다. 직역하자면 부디 제 손을 받아주는 영광을 허락해달라는 정중한 청혼 표현이다. 다아시가 영화의 결말부에 다시 한번 사랑한다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 엘리자베스는 자신도 그러하다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고 “Your hands are cold.”(손이 차네요)이라고 대답하며 그의 손을 맞잡는다. 이는 처음 그가 제 손을 받아달라며 청혼했던 대사에 대한 늦은 응답이자 그의 사랑을 이제야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드러내는 대사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내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아니다. 고백 이후 다아시의 마음을 알아챔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스며들었던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자각하는 과정, 곧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벗고 오만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고백 이후의 여정이 이 작품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다. 소설은 이를 인물들의 내면 묘사를 통해 나타냈다면 영화는 비언어적 표현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이를 드러냈다. <오만과 편견>은 원작의 명성을 바탕으로 기존 팬들에게는 원작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선물하고, 처음 작품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원작 소설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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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른인가 아이인가
한 남자의 비리 사건이 터진다. 이 남자는 죄책감 때문인지 회피하고 싶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족들을 남겨두고, 죽어버린다. 유일하게 집에 남은 딸아이는 경찰의 표적이 되어 중요한 참고인이 된다. 경찰은 아이가 아버지의 남은 비리 재산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아이를 보호라는 명목 하에 감시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미성년자이지만 이미 다 커서 알 거 다 아는 어른 이임을 감안하고 이 아이에게서 아버지가 남긴 남은 지산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아이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그런 그 아이는 자살을 기도하고, 그 자살사건에 현수가 투입된다. 그런데 과연 이 아이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이 답을 하기 전에 우린 이 18살을 더 자세히 이해해보아야 할 것 같다.
1. 어른 아이, 18세를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대사가 있었다.
"18살이면 다 큰 거죠."
"아직 어린애잖아요."
비리 사업가의 딸을 두고 내린 상반된 평가. 과연 이 아이는 정말 다 큰 걸까.
요주의 아이, 세진은 경찰의 시선으로는 다 큰 아이로 간주되어 어른의 세계로 인도되었다. 경찰은 세진을 다 큰 아이로 간주되었지만 여전히 어린 나이로 인해 어른에게 물어보듯이 취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진에게 뭔가 더 확실한 정보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세진이 머무는 집 곳곳에 cctv를 심어놓았다. 하지만 세진은 사생활 침해라며 항의했지만 정보가 더 나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진의 이런 항의는 세진에 대한 의심만 더 높아지게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경찰의 입장에서는 세진을 섬으로 보내 요양도 시켜주고, 원하는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작 cctv 단 거 가지고 항의를 하는 세진이 정말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찰은 참고인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다 커서 알 거 다 알만 틈 성장한 세진이 어린 나이를 내세워 미운 어린아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진이의 자살 소식에 태풍을 핑계로 시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귀찮은 아이니 빨리 사망 처리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아이가 죽은 이유에 경찰의 지분이 아예 없지 않음을 경찰 집단이 이미 빨리 간파하고, 이 아이의 잔상을 빨리 잊고 싶은 진짜 다 큰 어른들의 비정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어른들은 고등학생 나이 때의 아이들의 성장을 평가할 때, 어른 특유의 '내가 다 살아봐서 알아'라는 식의 관점과 함께 상황적 요소와 자신의 주관을 섞어 평가한다. 예를 들면, 집안의 웃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혹시 웃어른이 유산 상속자를 18세 미성년자 손자에게 몰빵하셨을 때, 18세 아이에게 무엇인가 설득하려는 주위 친척 어른들이 이 아이를 회유하는 타이밍에 잘 나오는 멘트 중에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알 거 아니냐"라는 뉘앙스의 멘트를 날리시는 분들이 있다. 요맘때 학생들이 주요하게 쓸모가 있을 때에는 머리는 커버렸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임을 어른들은 잘 인정하려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세진이를 두고 보이는 경찰의 태도를 두고, 이 미성년자가 필요한 존재일 때에는 어른 취급을 해주며 존중하는 척해주다가도 아이의 쓸모가 다하면 버려버리는 모습에서 아직 완벽하게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어른에게 느꼈을 환멸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세진을 아껴주던 형사 형준마저 자신을 이용했고, 새엄마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 이 상황에서 18세 아이가 느꼈을 좌절을 그 시기를 거쳤지만 그 시기에 대해 잊어버린 어른들은 이해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어른들의 비정함과 다 컸지만 아직 어른이 되진 않은 18세의 연약함을 비교하게 만들어 준다.
필요에 의해 어른들은 18세 미성년자를 다 컸으니, 어른의 세계에 협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 다 큰 아이는 여전히 아이였고, 어른이 요구하는 덕목은 아직 갖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어른들은 ' 다 컸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어 본인이 18세였던 시기를 망각하고, 세진을 다 큰 '아이'임을 무시해 버렸고, 그 무시의 결과는 아이에게 더한 못을 박았음을 세진의 경찰에 대해 표시한 반감을 통해 알 수 있다.
2. 아무것도 몰랐냐는 말의 비정함
이 영화에서 세진과 그녀의 죽음을 쫓는 경찰, 현수는 비슷한 심리적 상태를 보인다.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고자 자신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정신을 차려보려고 하고, 악몽을 꾸면서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고, 허한 동공으로 분노에 이글거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세진을 통해 현수는 자신의 과거를 본다. 그래서였는지 직감적으로 이 아이는 다른 경찰의 예상과는 다르게 경찰이 혹할 만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아빠가 비리를 저지르고, 오빠가 감옥에 가있는 상황에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만 살아온 자신의 잘못도 일정 부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으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음을 알았다.
"너는 내가 어떻게 남편이 그렇게 오래 바람나도록 아무것도 모를 수 있냐고 물어봤었지. 근데 있지, 나 진짜 아무것도 몰랐었다. "
이 현수의 대사에서 정말 모르고 살았던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모를 수 있냐는 상식 가득한 주변인의 대사는 참으로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내 바보 같음을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거니와 해맑게 살았던 나 자신을 자책하며 반추하게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진의 경우도 같았다. 아빠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오빠가 감옥에 갈 만한 일을 저지르는 줄도 모르고 나만 행복하게, 해맑게 살아온 것에 대해 어린아이가 얼마나 자책을 하고 살았는지 세진의 cctv 속 얼굴과 팔에 상처가 그 시간의 암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나마 새엄마는 세진의 연약함을 잘 알았지만 본인의 상황의 불안정함을 이겨내는 데에 치중하느라 세진은 잠시 뒤로 미루어진 존재였다. 오히려 마주한 적도 없는 현수만이 세진의 외로움, 자책감, 무력감을 이해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을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도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데, 다 큰 사람 취급을 당한 아직 어린아이는 주변 사람들의 배신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 것인지 우리도 예상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공감까지는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겪어보지 않는 한.
사건의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은 생각보다 상처가 많이 된다. 당하고만 있었던 나의 바보 같음을 저주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주변 사람들의 위로라는 가면을 쓴 팩트 폭력들은 생각보다 위로가 안된다. 이처럼 다른 이들이 그들이 살아온 인생에서 기반한 편견이 담긴 팩트 폭력은 전혀 상처 받은 이에게 위안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큰 현타를 얻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사람에게는 각자의 상식을 담은 충고, 조언보다는 그저 입을 닫고,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다. 혹시 당신의 인생에도 아무 충고, 평가도 없이 밥 먹자고 끌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내 사람이니, 붙잡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3. 내 몸에 흐르는 피를 확인해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현수와 세진 모두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자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 타인이 바라볼 때, 팔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자살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놓고, 자신의 몸을 해하는 정신병적 행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수의 대사를 보면, 자해성 행위의 또 다른 정의를 고려해보게 된다.
"넌 내가 죽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 징계 피하려고 내 팔을 그렇게 찧었던 것 같아? 아니, 일이라도 해야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는데, 마비 때문에 일까지 못하면 나 진짜 어떻게 될까 봐. 제발 마비가 풀렸으면 해서 그랬어. 죽으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랬다고. 그 애도 그랬을 텐데, 아무도 없어."
다른 이들은 자신의 몸을 해하는 일은 죽을라고 하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을 해하는 이유 중에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에 상처를 내서 피를 봐서라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경우도 꽤 많다. 정신의학에서도 이런 분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오래도록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공허함에 시달린 이에게, 자해를 할 때의 고통과 피가 흐를 때 느껴지는 일련의 자극적인 감각들은, 마치 살아있음을 깨닫는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마치 죽은 듯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스스로를 상처 내고 다치게 하는 행위,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행위로 인한 자극이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자각을 되살려 주는 것이다.
[출처] 내 몸에 피가 흐르면, 나는 살아있음을 느껴요.; 자해 속에 숨겨진 마음|작성자 두두
그리고 비슷한 예시로, 일본 소설 중에서 스트로베리 나이트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야구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해본 적이 없었지만 눈동냥으로 배운 기억을 되살려서 가슴을 공이라 상상하고 있는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방망이는 쩍 인지 철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멋지게 가슴 위를 떄리고 정확히 턱에서 멈췄다.
“으아아아아아아!”
덜커덩덜커덩, 침대 채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자는 거칠게 몸부림쳤다. 왼쪽 가슴은 한입 베어 먹은 토마토처럼 살덩이가 쑹덩 날아가고 없었다.
환호성과 피비린내가 뒤섞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색이었다. 나도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출처]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데쓰야
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살인자가 살인을 저지를 때에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현수와 세진은 자신의 몸을 해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그 반대로 살인자가 사람을 죽일 때에 느끼는 쾌감의 근원이 피를 보고, 피의 색깔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현수와 세진이 살인자와 같은 부류로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현수와 세진이 자기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점과 몸을 해쳐서 피를 보고서라도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이 살인자가 피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부분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이나 자신의 몸을 해쳐야만 볼 수 있는 피라는 존재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색깔 때문인지, 인간의 몸속에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 기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을 죽이는 일이 나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현수와 세진은 희미해져 가는 맨 정신을 붙잡기 위해서 피라는 매개체를 생각해낸 거라면, 살인자의 경우, 피를 자신의 쾌락으로 여기는 점이 다르다. 현수와 세진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면, 살인자에게는 쾌락의 도구인 것이다.
4. 그럼에도 살아가다.
영화 속에 이런 대사가 있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다.
이 대사가 결국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다. 인생이 잠시 망가졌을지언정 당신의 전체 인생은 아직 진행형이다. 자신이 문제 생겨 곪아 터질 때까지도 해맑게 모르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한 다른 이에게 맞설 힘을 길러야 함을 이 영화는 외치고 있다. 내가 나를 해하고 싶을 만큼 자괴감이 드는 문제는 분명 나만 잘못해서 생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 탓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해할 만큼 자책만 하는 것도 결코 손뼉 쳐 줄 일은 아니다. 자책하고, 자신을 해할 시간에 문제를 이렇게 만든 다른 인간들을 응징하거나 문제를 말끔히 잊고 살아갈 깡, 패기, 똘끼가 조금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다른 이들도 함께 만들어낸 문제에 본인만 파괴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나에게 해를 끼쳐 존재 이유를 찾지 말고, 이젠 소소하더라도 꾸준한 성과로 존재 이유를 찾으시길. 우린 아직 죽을 이유보다는 살 이유가 더 많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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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흥행하는데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냐?"
<범죄도시4>의 엄청난 흥행질주. 영화는 5일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되었는데요.
다가오는 연휴와 겹쳐 흥행이 가속도를 붙어 천만관객을 넘길것으로 예상됩니다.
영화 <범죄도시4>가 개봉 5일만에 관객 4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올해 개봉작 중 최단기 흥행이며 손익분기점을 첫 주에 넘기게 되었습니다. <범죄도시4>는 개봉 초기 흥행몰이에 성공하면서 올해 두 번째 천만 영화가 될 것으로 보이며 다가오는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비롯해 5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3일간의 어린이날 황금연휴에 극장가의 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젠데이아 X 조쉬 오코너 X 마이크 파이스트 주연의 <챌린저스>가 공개 첫 주말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습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만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으로 테니스 선수 세 명의 삼각관계를 그립니다. 2위는 <언성 히어로> 3위는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가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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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클라이밍> 메인 예고편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세 달 전 교통사고를 겪은 세현은 세계 클라이밍 대회를 앞두고
회복되지 않는 컨디션과 경쟁에 대한 압박으로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고 당시 고장 났던 세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다름 아닌, 바로 '나'로부터.
연락을 주고받을수록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두 사람.
급기야 세현은 또 다른 세현의 임신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이후 악몽처럼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