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28 16:09:43
[SIWFF 데일리] 계속하는 시원함으로
영화 <수궁>
SYNOPSIS
4대 국창 가문의 마지막 전수자인 정의진(79세)은 동편제 수궁가의 전수자를 찾고 있다. 서편제의 인기에 밀린 동편제 ‘수궁가’를 지키는 길은 2020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되는 길뿐이라고 믿는 정의진은 문화재 선정을 위해 4시간이 넘는 완창 공연을 준비한다. 정의진은 많은 제자 중에서도 마땅한 전수자를 찾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소리를 하며 행복하다고 말한다.
PROGRAM NOTE
판소리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소리가 익어 삶을 응축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수 있다. 〈수궁〉에서 소리를 하고, 배우고, 또 이어가려는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간의 예술, 판소리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악보도 없이 500여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음표도 없어 전수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제대로 익힐 수 없는 판소리는 무엇보다 시간을 붙잡고 또 흘려보내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은 여성 소리꾼들에게서 소리를 앗아간 원인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수궁〉은 4대 국창 가문의 마지막 전수자 정의진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소리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차분히 풀어 놓는다. ‘수궁가’를 전수하고자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에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를 알고 있는 자의 조심스러움이 묻어나고, ‘수궁가’를 배우는 이들에게선 앞으로의 고됨을 짐작하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소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들의 분투를 먹먹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가문도 목청도 소리를 할 수밖에 없이 태어났지만, 마음가는 만큼 소리를 쫓을 수 없는 이들의 삶이 비단 과거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송아름]

이 영화는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한 문장으로 말하고 시작한다. 사라져가는 판소리를 전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수궁가라니 어쩐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노래를, 별주부전 애니메이션에 ‘범 내려온다’를 얹어 보여주어 사실 우리와 멀지 않은 노래임을 깨닫게 한다. 별주부전의 판소리가 수궁가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 담긴 인물, 정의진 선생님은 양암제 수궁가의 전승을 고민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쪽 찐 머리 아래 경량 패딩과 트레이닝복 바지. 어느새 판소리의 세계에도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89년생 제자에 01년생 제자까지, 계속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정의진 선생님은 이 오랜 세월 내내 판소리계에 있던 사람은 아니다. 결혼과 육아로 '경력 단절'이 되어 있던 시간. 뭐, 이유와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정의진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훑는다. 국악을 무서워했다는데, 무서워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그 무게를 무의식 중에라도 가늠했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모르는 사람은 무서워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 결혼했고 육아를 하며 소리와 멀어졌지만, 그는 끝내 소리를 마주한다.
일순 무서워도 괜찮다. 때로는 숨기고 싶어도 괜찮다. 우리가 평생을 들여 마주해야만 하는 것들은, 언젠가 헷갈리지 않고 마주하게 된다. 이는 정의진 선생뿐 아니라 그 제자들의 삶에서도, 아직 살 날이 창창한 제자들의 삶에서도 어른어른 비춰지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훑는 정의진 선생님의 인생사도 기구하고 독특하지만,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그런 일이 있었어.” 라고만 말하고 마시는 순간이었다. 가끔 너무 거대해 말하기 어려운 것들, 아마 그렇게 말하는 게 최선일 만큼 수없이 많았을 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후회가 없다. 다만 견뎌야 할 것이 많을 뿐이다.
나 같으면 그렇게 뒷걸음질치지 않겠다고 말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단호한 모습에서, 정의진 선생님의 그 마음이 묻어난다. 물론 그 선생님의 마음 못지 않게 제자들의 마음도 굳건하다. 정의진 선생님 못지 않게 그 제자들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차라리 돈 벌 걸 그랬나 했다가도 쭉 가보기로 했다 말하는 다슬 씨, 소리는 타고 나야 한다는 말에 좌절했지만 스마트폰을 켜고 소리를 연습하는 01년생 은영 씨, 무대에 서는 일에 이미 익숙한 은서 씨, 그리고 배우는 사람인 동시에 가르치는 사람으로 20년 넘게 소리를 해온 지선 씨. 연습 장소로 쓰려고 노래방을 만들고, 가진 걸 다 내어서라도 전수자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을 품었다는 지선 씨의 이야기가 특히나 흥미로웠다.

소리를 전수할 사람을 고민하는 정의진 선생님 앞에서 제자들은 흔한 상상도처럼 서로를 시샘하거나 모함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길을 계속 간다. 간절히 바라는 것과 별개로 각자의 길을 계속. 선생님이 힘겹게 계속해 가듯, 제자들 또한 이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세심히 비춤으로써, 이 영화는 정의진 선생님과 제자들을 딱딱한 수직선에 도열하는 대신 각자의 둥근 세계를 품은 예술가들의 풍성한 세계로 알알이 그려낸다.
그 덕분에 이 여성 예술가들의 대화와 노래는 더없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퓨전’을 하면 소리를 버린다는 선생님과 그 이유를 묻는 제자 사이에 감도는 것은 아옹다옹 감정 싸움이 아니라, 두 예술인의 진지한 고찰과 주관이다. 각자의 길을 쭉 가보는 여성들이, 그 길에서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통감하며 체득한 각자의 예술 세계다.
오랜 하대와 괄시의 역사에서도 계속해갈 방법을 찾고, 아무튼 이어갈 길을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담겨 있어 좋았다. 서로 고마워하는 30년대생부터 50년대생까지의 어르신들 모습도 보기 좋았다. 서로 옷 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꼬맹이 많이 늘었다며 칭찬도 해주는 모습이 좋았다. 망가져도, 예쁜 분장 아니어도, 예술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하여 자기 일을 사랑하는 직업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목 상태부터 결혼이나 출산까지 무수한 각자의 현실 앞에서 고민하며 계속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 '계속한다'는 것이 단순히 일직선을 그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따금 끊어지고 떨어져도 다시 시작하기를 계속한다는 의미이다. 정의진 선생님의 생애부터가 그렇다. 선생님의 시간은 회피하고 싶었던 과거, 여전히 숨기고 있는 현재, 소리가 사라질까 두려운 미래로 깜빡깜빡 불안하게 빛나며 여기까지 왔다. 거기에는 선생님이 처한 사회의 상황과 사람들의 시선 같은 것들이 작용했다.
여전히 정의진 선생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유명세를 위해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청청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얼핏 보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소리꾼들에 비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평가하는 시선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깜빡깜빡 점멸과 반짝임을 이어간 선생님의 시간이, 전 생을 다해 보내온 모스 부호처럼 느껴졌다. 순간순간 보면 불안하게 깜빡이는 것 같아도, 이어 보면 의미를 갖는. 정의진 선생님의 소리 생애는 미래에 어떤 의미로 가 닿을 것이다.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도 할, 더러는 그만두기도 할, 그러나 끝내 소리를 향한 애정을 품을 제자들의 삶에 이미 가 닿았듯,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다.
시대가 변하여 이제는 청바지를 입고 연습실을 대여해서 소리 연습을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하지만, 그 애정은 표표히 살아남아 몸에서 몸으로 전파된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각자의 벽 앞에 앉아 각자의 소리, 각자의 고독, 각자의 싸움을 계속하는 작업이다.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세계에 손을 뻗는 마음이다. 방에서 시작하여 산에서 폭포 소리를 이겨내고 동굴과 바다로.

그러나 소리가 단지 외로움만 먹고 크는 예술은 아니다. 소리는 어디까지나 공명이니까. 같이 울리는, 감정을 전하는 것이니까. 정의진 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소리를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을 때쯤, 할 수 있다 해준 다른 소리꾼의 존재가 있었으니까. 무대를 함께 멋지게 빛낸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할 사람은 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어려웠던 시절, 예술이 예술 되지 못하게 했던 세상의 차가운 시선,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다시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치를 지키는 사람 못지 않게 그를 알아보고 심사하여 기록하는 사람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가는 절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보고 기록하는 작업이니까.
장소를 가득 메우고 울리는 소리처럼, 저들이 지키는 꿈과 사랑도 앞으로 쭉 가득가득 울려 퍼지길. 원대한 유명세나 큰 무대만이 성취라서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저들이니 그 아름다운 모습이 계속되길 바라니까. 그냥 좋아서 한 사람들, 앞으로도 그냥 좋아서 계속 할 수 있길 바라니까.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 싶은 것.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풍성한 면면 중에는 우리 소리 자체의 재미와 의의도 있다. 저잣거리에서 왕을 까내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대사 하나하나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녹아 있는 게 너무나 우리답고 좋았다. 자진모리와 휘모리,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세상의 속도에 설설 깎여 나가는 우리의 소리들이 즐겁게 지켜지면 좋겠다. 그리고 좋아서 계속하는 사람들이 외롭지 않을 만큼의 관객, 이들의 가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감상과 해석이 뒤따라 주었으면 좋겠다.
2023.08.27. 16:00-17:32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상영코드 322)
2023.08.29. 19:30-21:09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상영코드 52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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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함을 찾아 도착한 곳은 평범함이었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 사은품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주길래 얼마나 슬프길래 이걸 줄까 했는데 정말 눈물이 도르륵 주르륵 좌라락 흐른 작품이었다. 입양과 죽음이라는 소재이기에 당연히 슬플 걸 알긴 했지만 극 중 배우들의 절제된 감정표현 때문인지 되려 관객이 내가 감정을 폭발시키고 나오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 시놉시스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은 창문 청소부 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바로 네 살짜리 아들 마이클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주는 것. 세상에 혼자 남을 아이를 위해 존은 특별한 부모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아직 어리지만, 말도 잘 듣고 예절도 잘 지켜요. 내 아이를 키워줄, 새 부모를 찾습니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노웨어 스페셜>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창의 경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
존은 창문청소부로 일하며 돈을 번다. 이 창문의 경계가 영화 속에서는 굉장히 유의미하게 등장한다. 창문을 깨끗하게 닦을수록 안이 훤히 보이고 그 집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지만 정작 존은 그 집 안으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그 장벽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특히 존이 창문을 닦는 집들을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집들이다 보니 아이의 온전한 방, 가득찬 장난감을 바라볼 수밖에 할 수 없는 존의 상황과 입장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는 직업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꼭 자신의 아들만큼을 이렇게 유복한 가정으로 입양을 보내고 싶어하는 존의 결심이 왜 들었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들을 위한 특별한 곳? 과연 좋은 것일까?
존은 특별한 경우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죽기 전 반드시 아들을 다른 집으로 입양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기에 사회복지사들도 존에 경우에는 특별히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복지사와 함께 위탁가정을 계속해서 둘러본다. 인터뷰도 하고 대화도 나누면서 집안의 분위기와 가정 환경을 살핀다. 존과 인터뷰를 본 가정은 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 본인들의 권위를 지켜려는 부모, 본인들의 선함을 증명하려는 부모,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부모, 다양한 가족을 만난다.
이 과정에서 초반 존은 자신의 아들 마이클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랐지만 점차 위탁가정들을 둘러보면서 어떤 가족이 마이클에게 특별한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까 보다 마이클에게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는 가족을 누구일까로 생각이 바뀌게 된다. 모두가 자신이 마이클에게 잘 해줄 수 있는 장점과 강점들을 자랑하는 가족과 달리 한부모 가정이지만 유일하게 존의 환경과 마이클이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고 직접 함께 놀아줬던 엄마를 선택한다. 이 선택이 왜 영화 제목이 노웨어 스페셜 인지 잘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존은 마이클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클은 눈치를 채고 있었던 듯 싶다. 34살의 아빠 생일에 굳이 초 한 개를 더 주며 1년을 더 함께 살자고 표현을 하는 것 같아서 정말 눈물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존은 마이클에게 죽음에 대한 동화책과 소재에 대해 알려주기 꺼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사회복지사와의 기나긴 대화를 통해 마이클이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끔 기억 상자를 만들면서 스스로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이클에게 죽음에 대한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죽음을 슬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언제나 아빠는 공기 속에서 마이클 곁에 있을거라는 말을 하는데 세상에 이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정말 얼마나 애달플까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래간만에 영화관에서 펑펑 울다 나온 영화 <노웨어 스페셜>. 특별함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그 특별함은 사랑과 관심으로 보듬어 안아 줄 수 있는 평범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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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고긴 인터넷 게시글을 본 느낌-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대부분의 정보는 웹상에서 얻게 된다. 무엇보다 스마트폰 기술의 엄청난 발전으로,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 인터넷에 접속해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길을 찾을 때도, 여러 뉴스를 찾아볼 때도, 물건을 살 때도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어떤 것이든 할 수가 있다. 그만큼 우린 과거보다 엄청난 정보의 바닷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 정보격차라고 하면 인터넷이나 컴퓨터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층과 아닌 층이 나뉘었다면 지금은 수많은 정보 중에 어떤 것이 쓸만한 정보인지를 가려내는 능력이 정보격차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엄청나게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다 보면 어떤 것이 정말 신뢰할만한 정보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무척 어렵다. 기사 하나 만으로, 게시글 하나 만으로는 그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직접 다시 검색해 보고 다른 의견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판단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게시글의 댓글이나 파생된 다른 글이 있다면 조금은 쉽게 그 정보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있다. 전체 인류의 역사에서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시기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영화 <댓글부대>는 인터넷의 다양한 게시글과 댓글들의 조작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누군가 다른 의도로 게시글을 올리고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는 돈을 벌거나 정치사회적인 대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 체계화된, 조작된 게시글을 만들고 관리하는 조직이 있다는 소문은 이미 우리 사회 여러 곳에서 암암리에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난 건 많지 않다. 영화는 주인공 임상진 기자(손석구)의 사례를 보여주면서, 인터넷에 수많은 글들에 대해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 번째 감정 - 임상진 기자의 억울함
임상진 기자는 대기업 만전의 비리와 관련된 기사를 쓰지만 해당 기사가 오보로 판명 나며 정직당한다. 임기자는 이 모든 것이 만전이 기획한 음모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취재를 좀 더 해보고 싶지만 그것을 이어갈 연결고리가 없어졌고, 정직 중이어서 정식 기자로서 활동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기자는 계속 관련된 근거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우연히 만전의 수법을 알고 있다고 하는 제보자(김동휘)를 만난다.
임기자가 가진 억울함은 그가 취재를 계속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만전과 관련된 글을 찾고 또 읽으면서 다양한 음로론을 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찾게 된 제보자의 증언은 임기자가 가지고 있는 억울함을 풀고 기자로서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과거 자신의 취재가 맞았다는 제보자의 말만으로도 임기자는 자신의 억울함이 모두 풀리는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억울함이 기사를 쓸 에너지를 만들었고, 그가 새로운 기사를 쓸 수 있게 만든다. 화면 속 임기자의 취재를 응원하게 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과연 제보자의 말을 정말 믿을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사실상 제보자의 말을 제외하면 모두 추정적인 사실들만 있을 뿐이고, 인터넷 게시판의 여러 글들이 제보자의 말의 근거로 뒷받침되지만 이것이 딱 맞는 근거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임기자의 억울함이 풀리기 위해서, 임기자는 제보자의 입을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제보자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에 임기자의 모든 경력이 달려 있다는 의미다.
두 번째 감정 - 제보자의 안심
제보자는 임기자를 만나 안심한다. 시종일관 증언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선 점점 긴장감이 없어진다. 만전이라는 거대한 기업에 대항하여 제보를 하는 그의 증언은, 그가 가진 긴장이 줄어들수록 점점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제보자의 안심은 곧 임기자가 제보자에 대한 의심을 줄이는 역할을 하고, 그 모든 이야기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도 안심시킨다. 그래서 이야기 구조 상 제보자에 대한 신뢰도는 점점 높아지고, 관련 취재를 하는 임기자에게는 좀 더 영향력 있는 정보들이 들어오게 된다.
사실 중반부부터는 제보자가 어떤 식으로 여론을 만들고 조작하는지를 세세하게 알려주게 된다. 좀 더 세밀하게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의견이라는 걸 만들어내고, 그 의견에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처럼 여론을 만들어낸다. 꼭 정치적인 문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특정 상품에도, 어떤 인물에게도 그런 계획을 적용할 수 있다. 그 모든 증언들은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영화 속 제보자가 이야기하듯, 100%의 진실보다는 약간의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결국 제보자가 안심하는 듯 보이는 그 순간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힘을 내기 시작한다. 그 안심으로 증언은 더 힘을 얻고 임기자는 자신만의 특종을 낼 수 있게 된다. 이상하리만치 순조롭고 운이 좋게 느껴지는 그 모든 과정에서 관객은 통쾌한 복수나 사실이 세상에 폭로되는 것을 원하게 된다. 그건 주인공 임기자와 똑같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건 바로 제보자의 안심이다.
세 번째 감정 - 관객의 당혹감
관객은 이 모든 이야기를 다 보고 나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이야기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있었던 현실이고, 또 거짓일까. 명확히 알 수 없다. 정확히 임기자가 처한 상황에서 영화가 끝을 맺기 때문에 그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영화는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라는 임기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실제로 일어났던 여론 조작 사건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더 헷갈린다. 이 모든 건 진짜였을까.
영화 속에는 게시글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또 퍼지게 되는지가 꽤나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하나의 게시글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를 믿고 있지 않을까. 분명히 영화가 끝나기 10분 전까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일종의 댓글 공작이나 게시글 공장의 과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봐도 좋다. 영화 속 임기자가 겪었던 것과 동일하게 관객도 똑같이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 영화의 목적 자체가 비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댓글부대가 어떤 식으로 여론을 만들어가고 상황을 바꿔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은 거대한 댓글 공작을 눈으로 체험한 것이다.
영화 <댓글부대>는 극적인 재미가 그렇게 높다고 할 수 없다. 제보자의 증언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중반부는 다소 극적인 재미가 떨어진다. 후반부에 피치를 올리지만 큰 반전 하나만으로는 영화의 재미가 올라간다고 할 수는 없다. 앞서 반전에 영향을 주는 증언 이야기가 너무 느리게 쌓였기 때문에, 너무 급하게 풀려버리는 반전 이후의 이야기의 임팩트도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결말 부분에서 뭔가 관객이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전개가 있었다면 오히려 조금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온라인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게시판 여론 조작이나, 댓글 부대가 어떤 식으로 의견을 만들어내고 또 조종하는지를 잘 알려준 영화다. 조금은 캠페인 영화처럼 보이긴 하지만 임기자의 뒤를 따라가는 관객들은 제보자의 등장과 그의 증언, 그리고 임기자의 취재를 보는 것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영화다. 인터넷의 여론이 어떤 식으로 조작되고 조종되는지 궁금한 관객들은 좀 더 흥미롭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73Saa8wzCrQ?si=FIRON44OseX86Koc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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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한 호불호는 처음부터 예상된 것
(※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5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조커는 5년 공백기를 무색하게 국내 관객들에게 핫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의 신작을 향한 반응이 극과 극 호불호가 갈리는데, 연출을 맡은 토드 필립스 감독이 이를 의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문제작으로 떠오른 영화 '조커: 폴리 아 되'는 2019년 개봉한 '조커'의 속편으로 2년 전 고담시를 충격에 빠트린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 리 퀸젤(레이디 가가)과 운명적인 만남 후 내면 깊이 숨어있던 조커를 다시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를 접한 관객들 대부분은 '난해하다'는 걸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아서 플렉의 망상 장애를 가감 없이 담아내고 있는데, 현실과 비슷한 망상으로 시작해 점차 더 심한 망상에 빠지는 그의 정신세계를 뮤지컬처럼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아서 플렉의 정신세계 및 영화의 구성을 쉽게 이해하려면 부제로 붙은 '폴리 아 되(Folie à Deux)'가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폴리 아 되'는 둘 이상의 사람이 망상과 같은 정신병적 상태를 공유하는 현상으로, 공유정신병적 장애 등으로 많이 번역한다. 또 '되(Deux)'가 프랑스어로 '2'란 뜻으로 각각 주인공이 두 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도 연결된다. 아서 플렉은 조커라는 이름을, 리 퀸젤은 할리 퀸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전편에서는 아서 플렉이 조커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렸다면, '폴리 아 되'에선 아서 플렉과 조커의 정체성 인식에 포커싱 했다. 이는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했던 조커와 조커의 그림자가 분열하고 다투는 애니메이션부터 반영하고 있었다. 아서의 변호사 매리언 스튜어트(캐서린 키너)는 이를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탄생한 다중인격으로 입증해 그를 구하려는 반면, 리는 아서가 조커로 거듭났으니 조커로 살아가야 한다고 부추긴다. 법정 밖에서 무한한 지지를 보내며 조커를 우상화하는 광신도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리와 광기를 공유한 아서는 조커를 받아들이며 변호사를 해임하고 스스로 변호를 진행하는 등 조커가 되려고 하나, 그러지 못했다는 식으로 법정에서 고백하며 아서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조커라는 광기로 인해 할리 퀸이 된 리는 인간 아서로 회귀한 그를 떠나버렸고, 이후 조커의 광기에 영향받은 사이코패스의 각성을 바라보며 비극을 맞이한다.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전작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담긴 닫힌 결말인 셈.
'조커: 폴리 아 되'는 법정물 기반에 상당 부분 뮤지컬 형식으로 전개하면서 아서와 리 두 인물의 정신세계를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상당수이다 보니, 전편처럼 아치에너미의 광기 어린 폭주나 다크히어로 장르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겐 실망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반응이 아서가 아닌 조커이길 바랐다가 실망하거나 배신감 느낀 광신도들의 반응, 스크린 밖으로 이어지는 아서의 비극을 관객들에게도 유도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상업영화보단 예술영화적인 측면이 강하긴 하나, 관객들이 영화를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진입장벽이 제법 높다. 아서의 정신상태와 망상 세계를 반영한 뮤지컬 장면이 '그만!' 외치고 싶을 정도로 과하고 자주, 길게 나온다. 초중반까지는 신선했지만, 계속되다 보니 극 중 대사를 빌려 지루한 서커스장의 공연을 너무 늘어뜨려 활력이 떨어지고 지루함을 유발했다.
1편에 이어 2편에서도 아서 플렉/조커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에도 스크린을 장악하는 열연과 아우라를 뿜어내며 강렬한 존재감을 피력한다. 리 퀸젤로 분한 레이디 가가 또한 그동안 등장했던 할리 퀸과는 색다른 매력을 뽐내며 눈도장받았다. 특히, 자신의 장기인 가창력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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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정신없이 일상을 보내다가도 순간 삶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한평생 우리를 따라다녔고 또 따라다닐 이 질문은,
'대체 무엇이 의미 있는가'
자꾸만 길을 잃는 이들에게 웨스 앤더슨은 영화를 통해 말한다.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극작가 콘래드가 쓴 연극과 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애스터로이드'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열린 '소행성의 날' 행사 참석을 위해 과학 천재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 등 여러 사람이 모인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외계인의 등장으로 이들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갇히고 만다. 이 이상한 연극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 극 속 인물들과 극 밖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의미를 찾아내려 애쓴다.
영화는 연극 속 내용과 비하인드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연극을 현실처럼, 비하인드인 현실을 연극처럼 보여준다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극은 컬러 화면이며, 자연스러운 화면 전환을 보여주는 반면, 비하인드 씬에서는 흑백 화면과 내레이션, 연극 세트와 같은 화면 구성을 가진다. 이러한 경계는 영화가 진행되며 자꾸만 무너진다. 현실의 내레이터 배우가 뜬금없이 연극 장면에서 등장하고, 오기 역의 배우는 도저히 극 중 오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며 연극 밖으로 뛰쳐나간다. 엔딩에서는 연기학원에 앉아있던 배우들이 모두 잠에 빠져드는 연기를 펼친다. 그중 한 배우가 벌떡 일어나며 무언갈 외치는데 이때 배우를 비추는 화면은 컬러로 바뀐다. 현실과 극의 경계가 뒤섞이는 순간이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외계인이 나타난 후 우드로는 아버지 오기에게 말한다. '모든 게 불확실해요.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왜 소행성을 훔친 건지, 그게 우리건 맞는 건지, 우린 아는 게 없다고요.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수상한 외계인의 등장이 우드로의 인생을 흔들어 놓는 동안, 오기 역 배우 존스는 조금 다른 사건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왜 오기는 전기 버너 위에 손을 올렸는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이상한 점은 한 둘이 아니다. 땅을 파는 자판기, 잘려 나간 오기와 아내의 장면, 알 수 없는 외계인의 의도. 그러나 존스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오기가 버너 위에 왜 손을 올렸는지다. 결국 극 밖으로 뛰쳐나와 연출가 슈버트를 찾아간 그는 말한다. 아직도 이 연극의 의미를 모르겠어요. 슈버트는 그런 그에게 의미는 상관없으니, 그냥 이대로 계속 연기하라 답한다.
다시 무대에 오르기 전 존스는 아내 역을 맡았던 배우를 우연히 만난다. 그녀에게서 잊고 있던 삭제 장면에 관해 들은 그는 묻는다. 왜 잘랐을까요? 좋은 장면인데. 배우는 답한다. 아마 러닝타임 때문이겠죠.
극으로 돌아간 존스는 무사히 연기를 끝내고,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성황리에 막을 내린다. 그러나 우드로도, 존스도, 연출가도, 관객도 각자의 의문을 해결하진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상관없다는 것.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기에 인생은 너무나도 짧고, 극의 모든 뜻을 파악하기도 전에 영화는 끝난다. 우리는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의문을 가지고서라도 나아가는 것이다. 엔딩에서 배우들이 외친 대사처럼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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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93회 아카데미 예상 수상작은? 해외 매체 전문 기자의 예측!
모든 것이 준비된 상황, 다양한 여성과 유색인종이 후보로 등록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든 오스카에서 다시 한번 놀라운 일이 벌어질 여지는 충분히 있다. 예상 수상자 집계에서 <노매드랜드>가 총 4개의 트로피를 수상할 것을 예상했으며, 그 뒤를 따라오는 故 채드윅 보스만의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총 3개의 트로피를 수상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상황 아래, 할리우드 리포트 Variery의 기자 Clayton Davis는 그의 제 93회 오스카 수상작을 하단과 같이 예상했으며, 이 외에도 자세한 수상 예측 작품은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처: Variety
작품상
Will win(수상할 것): <노매드랜드>
Could win(수상할 수도 있음): <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7>
Should win(수상해야만 함): <노매드랜드>
Should have been here(후보로 지정됐어야 함): <온워드>
감독상
Will win: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
Could win: 토마스 빈터베르그, <어나더 라운드>
Should win: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
Should have been here: 샤카 킹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남우주연상
Will win: 채드윅 보스만,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Could win: 안소니 홉킨스, <더 파더>
Should win: 채드윅 보스만,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Should have been here: 델로이 린도 <Da 5 블러드>
여우주연상
Will win: 프란시스 맥도만드, <노매드랜드>
Could win: 비올라 데이비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Should win: 바네사 커비, <그녀의 조각들>
Should have been here: 한예리 <미나리>
남우조연상
Will win: 다니엘 칼루야,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Could win: 사챠 바론 코헨,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Should win: 폴 라시, <사운드 오브 메탈>
Should have been here: 엘리 고레 <원 나이트 앤 마이애미>
여우조연상
Will win: 윤여정, <미나리>
Could win: 올리비아 콜맨, <더 파더>
Should win: 윤여정, <미나리>
Should have been here: 제이미 로슨 <페어웰 아모르>
각본상
Will win: <프라미싱 영 우먼>, 에머랄드 펜넬
Could win: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샤카 킹 외 1명
Should win: <미나리>, 정이삭
Should have been here: <위 아 40>, 라다 블랭크
각색상
Will win: <더 파더>, 플로리안 젤러 외 1명
Could win: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Should win: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Should have been here: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찰리 카우프만
장편애니메이션상
Will win: <소울>, 피터 닥터
Could win: <울프워커스>, 톰 무어 외 1명
Should win: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댄 스캔론
Should have been here: <7번가 이야기>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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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1992년과 2021년의 〈캔디맨〉 포스터
*글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한 구절이다. 명확한 형태를 지니지 못한 채 부유하던 ‘그’는 호명을 통해 꽃이라는 구체적 물질성을 부여받는다. 누군가의 이름을 공들여 불러주면 추상적인 것이 물질이 되고,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존재('그')의 욕망은 현실이 된다. 호명은 존재를 소환하는 정치적 행위다.
영화 〈캔디맨〉은 호명과 주체성의 문제에 흑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 폭력 문제를 결합한 미스터리‧공포 영화다. 1992년에 처음 개봉한 후 두 편의 후속작이 나왔고, 올해는 흑인 문제와 미스터리 장르를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자신만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조던 필 감독(〈겟 아웃〉, 〈어스〉 연출)이 각본을 써 새로 만들어졌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캔디맨2〉, 〈캔디맨3〉은 제외하고, 1992년과 2021년에 같은 이름으로 개봉한 두 〈캔디맨〉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두 영화의 핵심 소재는 모두 도시 괴담이다. 거울을 보고 캔디맨의 이름을 다섯 번 부르면, 손목이 잘려 피가 뚝뚝 흐르는 팔에 갈고리를 꽂은 캔디맨이 나타나 이름 부른 자를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게 괴담의 내용이다. 흑인 빈민가였던 카브리니 그린이 재개발된 후에도, 캔디맨 괴담은 끊이지 않고 전승되었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처음에는 캔디맨 괴담을 믿지 않다가, 호명을 통해 캔디맨을 소환한 후, 하락 혹은 상승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여기에 윤리, 정치가 결합된다.
1992년 〈캔디맨〉의 주인공 헬렌 라일
먼저 1992년의 〈캔디맨〉이다. 도시 전설에 관한 논문을 쓰는 헬렌 라일은 캔디맨 괴담에 흥미를 느낀다. 그녀는 도시 전체가 일상적 공포를 전설적 존재 탓으로 돌리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때문에 캔디맨 괴담을 연구하면 사람들이 괴담을 믿는 구조적‧실제적 원인이 드러날 거라 생각한다.
헬렌은 캔디맨 괴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흑인 빈민가로 향한다. 그런데 그녀가 캔디맨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피가 낭자한 잔혹한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는데, 현장에는 늘 정신을 잃은 헬렌이 있다. 헬렌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의심하고, 결국 그녀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기에 이른다.
헬렌이 사회와 멀어질수록, 캔디맨과는 더욱 가까워진다. 캔디맨은 수시로 나타나 자신과 함께 불멸의 존재가 되자고 속삭인다. 헬렌은 자신을 둘러싼 절망적 상황에 휩쓸려 캔디맨의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임을 깨달은 후에는 캔디맨이 희생물로 삼으려 납치한 어린아이 앤소니를 구하는 윤리적 선택을 내린다. 그러나 한순간이나마 캔디맨의 제안을 수락한 대가는 가혹했다. 앤소니를 구하는 과정에서 끔찍한 부상을 당한 헬렌은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캔디맨이 되어 도시를 부유한다.
어린 앤소니를 구하는 헬렌(1992)
이번엔 2021년의 〈캔디맨〉이다. 주인공은 앤소니다(헬렌이 캔디맨에게서 구한 그 앤소니가 맞다). 그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는 남성 화가로 성장했다. 괴로워하던 앤소니는 캔디맨 괴담을 듣고 예술적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어 낸다. 작품의 이름은 〈Say my name〉이다. 사람들이 장난 삼아 캔디맨을 '호명'하라는 작품의 요청에 따르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파국이 시작된다. 앤소니는 무시받던 자신의 예술이 캔디맨의 부활과 더불어 화제가 되자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캔디맨이 활보할수록 앤소니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앤소니가 캔디맨과 연결된 존재임을 암시하는 증거가 점차 늘어만 간다. 혼란 끝에 앤소니는 자신이 캔디맨의 희생물이 될 운명이었음을, 미친 여자라는 오명으로만 남아 있는 헬렌 덕에 살아남았음을 알게 된다. 앤소니는 결국 캔디맨이 되어 예정된 운명에 굴복한다.
2021년 〈캔디맨〉의 주인공 앤소니
1992년의 헬렌은 앤소니를 캔디맨으로부터 구해줬다. 그러나 2021년의 앤소니는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캔디맨이 되었다. 왜 앤소니는 헬렌이 목숨을 걸고 그의 운명을 바꿔줬음에도 이를 되돌리려 하는 걸까? 캔디맨이 되는 것이 ‘윤리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앤소니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선 캔디맨 괴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1992년 영화에도 캔디맨이 어떻게 탄생했는지가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캔디맨이 뿜는 공포를 극대화하는 자원으로만 활용한다. 하지만 2021년의 영화는 캔디맨의 탄생을 더 적극적으로 독해하여 영화의 주제로 가져온다. 1992년의 영화가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앤소니를 구해 내는 헬렌 개인의 윤리에 집중했다면, 2021년의 영화는 캔디맨을 흑인이 감당해 온 폭력의 계보에 맥락화시킴으로써 불합리한 인종 폭력을 고발한다.
최초의 캔디맨은 흑인 화가였다(앤소니의 직업도 화가다). 그는 지역의 저명한 백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는데, 그러다 한 유력 백인의 딸 ‘헬렌’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맡는다. ‘불행히도’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임신을 한다(1992년의 영화에서 캔디맨이 같은 이름을 가진 연구자 헬렌에게 집착하는 이유다). 헬렌의 아버지는 격분하여 흑인 화가에게 잔혹한 응징을 가했다. 그의 팔을 자른 후 갈고리를 박아 넣었고, 온몸에 꿀을 발라 벌에게 쏘이게 했으며, 괴로워하는 그를 불에 태웠다. 즉 최초의 캔디맨은 흑인 남성에 가해진 린치의 희생자였다.
캔디맨이 죽지 않은 건 흑인 린치가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캔디맨’이란 이름은 아이들에게 칼날이 든 사탕을 나눠준다는 누명으로 린치를 당한 흑인 남성의 사례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린치를 당한 흑인 남성들은 분노, 공포, 원한을 응집한 캔디맨으로 다시 태어나 무차별 복수를 감행한다. 캔디맨의 살인을 흑인 대상 린치에 '균형을 잡는 폭력’으로 볼 수 있는 이유다.
헬렌을 협박‧유혹하는 캔디맨(1992)
1992년의 영화는 캔디맨이 형체 없이 소문, 꿈, 공포로만 존재한다고 말하며, 2021년의 영화 속 캔디맨은 거울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런 캔디맨이 물리적 공간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사람들이 캔디맨을 믿고 그를 호명할 때, 즉 그의 추상성에 물질성을 부여할 때다.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기에 캔디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람들이 캔디맨을 잊지 못하는 건 여전히 흑인이 린치를 당하기 때문이다. 흑인의 생명값이 백인보다 낮게 매겨져 하찮게 여겨지는 한, 캔디맨은 영원히 죽지 않고 ‘호명’되어 ‘복수’를 이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내 얘기를 모두에게 전해”라는 2021년 캔디맨의 마지막 말은 흑인 린치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흑인 린치가 멈추지 않으면 캔디맨도 멈추지 않는다. 흉흉한 도시 괴담은 흑인을 향한 물리적 폭력이 중단될 때에야 사라질 수 있다.
폭력에 대항하는 원한적 주체로서의 캔디맨이라는 호명은 주류사회에 포섭되지 않은 소수자의 경험‧분노가 왜 미스터리‧공포의 영화 장르로 이어졌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해되지 못하는’ 소수자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우리 주변을 횡행한다. 소수자가 겪는 폭력이 이해 불가능한 미스터리로 남는 한 캔디맨은 불멸이다. 캔디맨을 향한 공포는 인종차별 사회의 자업자득이다.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다섯 번의 호명 이후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도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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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야차> 공식 예고편
전 세계 스파이들의 최대 접전지에서 전쟁 같은 첩보 작전이 시작된다!
무자비한 스파이들의 전쟁
<야차> 4월 8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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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세버그> 메인 예고편
1960년대, 할리우드와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하는 배우이자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아이콘 진 세버그(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흑인 인권 운동가 하킴 자말(안소니 마키)을 통해 적극적으로 인권 운동에 참여하지만, 이로 인해 FBI의 주목을 받게 된다.
정부를 비난하는 진의 거침없는 행보에 FBI는 신입요원 잭 솔로몬(잭 오코넬)에게
진과 하킴을 24시간 도청할 것을 지시하고 진의 가족과 명예, 그리고 경력까지 망가뜨리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