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28 16:09:43
[SIWFF 데일리] 계속하는 시원함으로
영화 <수궁>
SYNOPSIS
4대 국창 가문의 마지막 전수자인 정의진(79세)은 동편제 수궁가의 전수자를 찾고 있다. 서편제의 인기에 밀린 동편제 ‘수궁가’를 지키는 길은 2020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되는 길뿐이라고 믿는 정의진은 문화재 선정을 위해 4시간이 넘는 완창 공연을 준비한다. 정의진은 많은 제자 중에서도 마땅한 전수자를 찾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소리를 하며 행복하다고 말한다.
PROGRAM NOTE
판소리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소리가 익어 삶을 응축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수 있다. 〈수궁〉에서 소리를 하고, 배우고, 또 이어가려는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간의 예술, 판소리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악보도 없이 500여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음표도 없어 전수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제대로 익힐 수 없는 판소리는 무엇보다 시간을 붙잡고 또 흘려보내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은 여성 소리꾼들에게서 소리를 앗아간 원인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수궁〉은 4대 국창 가문의 마지막 전수자 정의진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소리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차분히 풀어 놓는다. ‘수궁가’를 전수하고자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에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를 알고 있는 자의 조심스러움이 묻어나고, ‘수궁가’를 배우는 이들에게선 앞으로의 고됨을 짐작하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소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들의 분투를 먹먹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가문도 목청도 소리를 할 수밖에 없이 태어났지만, 마음가는 만큼 소리를 쫓을 수 없는 이들의 삶이 비단 과거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송아름]

이 영화는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한 문장으로 말하고 시작한다. 사라져가는 판소리를 전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수궁가라니 어쩐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노래를, 별주부전 애니메이션에 ‘범 내려온다’를 얹어 보여주어 사실 우리와 멀지 않은 노래임을 깨닫게 한다. 별주부전의 판소리가 수궁가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 담긴 인물, 정의진 선생님은 양암제 수궁가의 전승을 고민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쪽 찐 머리 아래 경량 패딩과 트레이닝복 바지. 어느새 판소리의 세계에도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89년생 제자에 01년생 제자까지, 계속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정의진 선생님은 이 오랜 세월 내내 판소리계에 있던 사람은 아니다. 결혼과 육아로 '경력 단절'이 되어 있던 시간. 뭐, 이유와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정의진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훑는다. 국악을 무서워했다는데, 무서워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그 무게를 무의식 중에라도 가늠했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모르는 사람은 무서워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 결혼했고 육아를 하며 소리와 멀어졌지만, 그는 끝내 소리를 마주한다.
일순 무서워도 괜찮다. 때로는 숨기고 싶어도 괜찮다. 우리가 평생을 들여 마주해야만 하는 것들은, 언젠가 헷갈리지 않고 마주하게 된다. 이는 정의진 선생뿐 아니라 그 제자들의 삶에서도, 아직 살 날이 창창한 제자들의 삶에서도 어른어른 비춰지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훑는 정의진 선생님의 인생사도 기구하고 독특하지만,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그런 일이 있었어.” 라고만 말하고 마시는 순간이었다. 가끔 너무 거대해 말하기 어려운 것들, 아마 그렇게 말하는 게 최선일 만큼 수없이 많았을 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후회가 없다. 다만 견뎌야 할 것이 많을 뿐이다.
나 같으면 그렇게 뒷걸음질치지 않겠다고 말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단호한 모습에서, 정의진 선생님의 그 마음이 묻어난다. 물론 그 선생님의 마음 못지 않게 제자들의 마음도 굳건하다. 정의진 선생님 못지 않게 그 제자들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차라리 돈 벌 걸 그랬나 했다가도 쭉 가보기로 했다 말하는 다슬 씨, 소리는 타고 나야 한다는 말에 좌절했지만 스마트폰을 켜고 소리를 연습하는 01년생 은영 씨, 무대에 서는 일에 이미 익숙한 은서 씨, 그리고 배우는 사람인 동시에 가르치는 사람으로 20년 넘게 소리를 해온 지선 씨. 연습 장소로 쓰려고 노래방을 만들고, 가진 걸 다 내어서라도 전수자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을 품었다는 지선 씨의 이야기가 특히나 흥미로웠다.

소리를 전수할 사람을 고민하는 정의진 선생님 앞에서 제자들은 흔한 상상도처럼 서로를 시샘하거나 모함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길을 계속 간다. 간절히 바라는 것과 별개로 각자의 길을 계속. 선생님이 힘겹게 계속해 가듯, 제자들 또한 이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세심히 비춤으로써, 이 영화는 정의진 선생님과 제자들을 딱딱한 수직선에 도열하는 대신 각자의 둥근 세계를 품은 예술가들의 풍성한 세계로 알알이 그려낸다.
그 덕분에 이 여성 예술가들의 대화와 노래는 더없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퓨전’을 하면 소리를 버린다는 선생님과 그 이유를 묻는 제자 사이에 감도는 것은 아옹다옹 감정 싸움이 아니라, 두 예술인의 진지한 고찰과 주관이다. 각자의 길을 쭉 가보는 여성들이, 그 길에서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통감하며 체득한 각자의 예술 세계다.
오랜 하대와 괄시의 역사에서도 계속해갈 방법을 찾고, 아무튼 이어갈 길을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담겨 있어 좋았다. 서로 고마워하는 30년대생부터 50년대생까지의 어르신들 모습도 보기 좋았다. 서로 옷 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꼬맹이 많이 늘었다며 칭찬도 해주는 모습이 좋았다. 망가져도, 예쁜 분장 아니어도, 예술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하여 자기 일을 사랑하는 직업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목 상태부터 결혼이나 출산까지 무수한 각자의 현실 앞에서 고민하며 계속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 '계속한다'는 것이 단순히 일직선을 그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따금 끊어지고 떨어져도 다시 시작하기를 계속한다는 의미이다. 정의진 선생님의 생애부터가 그렇다. 선생님의 시간은 회피하고 싶었던 과거, 여전히 숨기고 있는 현재, 소리가 사라질까 두려운 미래로 깜빡깜빡 불안하게 빛나며 여기까지 왔다. 거기에는 선생님이 처한 사회의 상황과 사람들의 시선 같은 것들이 작용했다.
여전히 정의진 선생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유명세를 위해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청청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얼핏 보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소리꾼들에 비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평가하는 시선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깜빡깜빡 점멸과 반짝임을 이어간 선생님의 시간이, 전 생을 다해 보내온 모스 부호처럼 느껴졌다. 순간순간 보면 불안하게 깜빡이는 것 같아도, 이어 보면 의미를 갖는. 정의진 선생님의 소리 생애는 미래에 어떤 의미로 가 닿을 것이다.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도 할, 더러는 그만두기도 할, 그러나 끝내 소리를 향한 애정을 품을 제자들의 삶에 이미 가 닿았듯,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다.
시대가 변하여 이제는 청바지를 입고 연습실을 대여해서 소리 연습을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하지만, 그 애정은 표표히 살아남아 몸에서 몸으로 전파된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각자의 벽 앞에 앉아 각자의 소리, 각자의 고독, 각자의 싸움을 계속하는 작업이다.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세계에 손을 뻗는 마음이다. 방에서 시작하여 산에서 폭포 소리를 이겨내고 동굴과 바다로.

그러나 소리가 단지 외로움만 먹고 크는 예술은 아니다. 소리는 어디까지나 공명이니까. 같이 울리는, 감정을 전하는 것이니까. 정의진 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소리를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을 때쯤, 할 수 있다 해준 다른 소리꾼의 존재가 있었으니까. 무대를 함께 멋지게 빛낸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할 사람은 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어려웠던 시절, 예술이 예술 되지 못하게 했던 세상의 차가운 시선,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다시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치를 지키는 사람 못지 않게 그를 알아보고 심사하여 기록하는 사람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가는 절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보고 기록하는 작업이니까.
장소를 가득 메우고 울리는 소리처럼, 저들이 지키는 꿈과 사랑도 앞으로 쭉 가득가득 울려 퍼지길. 원대한 유명세나 큰 무대만이 성취라서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저들이니 그 아름다운 모습이 계속되길 바라니까. 그냥 좋아서 한 사람들, 앞으로도 그냥 좋아서 계속 할 수 있길 바라니까.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 싶은 것.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풍성한 면면 중에는 우리 소리 자체의 재미와 의의도 있다. 저잣거리에서 왕을 까내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대사 하나하나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녹아 있는 게 너무나 우리답고 좋았다. 자진모리와 휘모리,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세상의 속도에 설설 깎여 나가는 우리의 소리들이 즐겁게 지켜지면 좋겠다. 그리고 좋아서 계속하는 사람들이 외롭지 않을 만큼의 관객, 이들의 가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감상과 해석이 뒤따라 주었으면 좋겠다.
2023.08.27. 16:00-17:32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상영코드 322)
2023.08.29. 19:30-21:09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상영코드 52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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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쉬운 <비상선언>, 그래도 좋았던 건...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린 현실에서 수많은 재난을 봐왔다. 그 재난을 경험하고 살아난 생존자들도 있고, 반대로 희생당한 사람들도 무척 많다. 그것을 화면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자신이 그곳에 있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그 악몽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함께 마음에 자리 잡는다. 그렇게 재난상황은 사람들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본능을 끌어올린다.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생존에 대한 본능은 사회에 보여주는 가면을 치워버리고 진짜 얼굴을 드러내게 한다. 따뜻한 얼굴, 차가운 얼굴, 무심한 얼굴 등 다양한 얼굴은 진정한 세상의 모습을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생존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안전을 좀 더 바라보게 만들고 필요한 경우, 보다 나은 안전을 위해 시위를 하기도 한다. 반면에 정치인들은 그 재난의 상황을 이용해 정치적인 생명을 연장하려고 한다. 공무원인 정부 고위 관계자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인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고위 관계자들은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치인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른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보다는 일단 자신의 조직 내에서 안정적인 결정에 따르려고 한다. 그리고 그 재난 상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장 생존할 기회를 찾게 만든다. 이 가혹한 상황은 모두를 몰아붙인다.
비행기 속 테러와 재난을 함께 다루는 영화 <비상선언>
영화 <비상선언>은 테러와 재난 상황 속 인물들과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외부의 인물들의 얼굴을 담는다. 이 상황을 시작한 건, 테러범인 진석(임시완)이다. 그는 미리 SNS에 비행기 테러를 하겠다는 영상을 올리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타는 비행기의 표를 구매해 탑승한다. 그의 목적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남대문을 불태운 테러나 대구 지하철 참사의 테러범이 했던 것처럼 사회를 향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정작 테러를 한 진석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려는 목적이 아니다. 단순히 비행기를 탄 모두를 죽이는 것이 그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다. 영화 속 어디에도 그가 다른 사람이 차례로 죽는 것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단지 그는 치사량 높은 바이러스 하나로 자신이 가진 분노를 표출하고 그 자신도 그 분노에 의해 먼저 현장을 떠난다.
비행기 내부에서는 벌어진 테러의 중심에 다양한 인물이 포진된다. 부기장 현수(김남길), 스튜어디스 희진(김소진)과 과거 비행기 조종사였던 재혁(이병헌)이 진석을 막기 위해 애쓴다. 그들은 테러범인 진석을 막으려 최선을 다하지만 그가 이미 퍼뜨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승객들은 하나둘씩 감염되기 시작하고 어떤 해결책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들에겐 불안이라는 또 다른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진다. 그와 중에 스튜어디스들과 조종사들은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쓴다. 비행기 내부의 사람들은 대부분은 지시에 따라 안정을 취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안전을 위해 사람들을 구분 짓기를 원한다. 영화 중반 이후엔 바이러스 증상 발현자들과 무증상자를 따로 나누게 되고 이는 그 안에서 작은 계급을 만든다. 짧은 시간에 형성된 작은 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영화는 차근차근 보여주고 있다.
비행기 외부에서는 형사 인호(송강호)가 테러리스트인 진석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정부 관계자들도 상황실을 만들어 이 상황에 대처하려고 한다. 가장 열심히 뛰는 건 아내가 비행기에 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인호다. 그는 필사적으로 진석의 행적을 수사해 그 상황을 해결할 단서를 찾으려고 한다. 반면에 국토부 장관 숙희(전도연)와 청와대 관계자 태수(박해준)는 관련 관리자들을 모아 대책회의를 하고 그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의견 충돌이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윗선의 결정을 기다리는 측면에서 그들의 논의와 결정은 무척 늦은 감이 있다. 피해자 가족이기도 한 개인은 필사적으로 그 상황을 타계하려 노력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부 관계자들은 늘 한 발 느리게 다음 해결책을 제시한다. 어떤 경우엔 다음 결정을 못하고 지지부진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테러 장르로 시작해 중반까지 이어지는 압도적인 긴장감
지난 수요일 개봉한 영화 <비상선언>은 관객 사이에서 호불호가 심하게 나뉘고 있다. 영화의 구성 자체가 이렇게 호불호가 나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테러 장르라고 볼 수 있다. 테러리스트가 등장하고 그가 하와이행 비행기에 생화학 테러를 벌인다. 그리고 그가 퍼트린 바이러스가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한다. 한 명으로 시작했던 감염자는 금방 그 숫자를 늘려간다. 그렇게 비행기 안이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과정이 영화 중반까지 담긴다. 중반까지 진행되는 테러 장르는 꽤 훌륭하게 영상에 담겼다. 실제와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비행기 세트를 실제로 돌리면서 촬영된 비행 시퀀스는 굉장한 현실감을 주고 긴박감을 더해준다. 여기에 동기를 드러내지 않고 테러를 벌이는 빌런 진석은 영화에 엄청난 긴장감을 선사한다. 또한 지상에서 진석의 뒤를 쫓는 인호의 추적극도 굉장히 빠르고 박진감 있게 담겨있다.
이렇게 무사히 전반부를 마친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재난 장르로 방향을 튼다. 재난 장르에는 빌런이 사라지고 피해자들과 지상의 가족 그리고 공무원들이 화면을 채운다. 그러니까 목적 자체가 테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비행기 안의 사람들이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중점적으로 비추기 시작한다. 피해자 중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재혁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고, 그의 과거 이야기도 덧붙여진다. 그렇게 신파 코드를 덧붙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적인 메시지도 포함되면서 중반까지 응축해왔던 긴장감을 풀리게 만든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시간과 사람들의 행동들도 조금은 인위적으로 압축해놓았다는 느낌도 든다. 이런 점에서 영화 <비상선언>의 후반부는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후반부에 던지는 사회적인 메시지 자체는 명확하다.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바이러스라는 특수한 상황 앞에서 여론은 급격하게 갈라진다. 그 안에서 여러 의견들을 보고 자신이 어떤 것을 따를지 결정하기도 하지만 사실 어떤 것이 더 옳은 것인지 단번에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 속에 피해자들이 탄 비행기의 착륙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그 두 가지 의견 중 어떤 것이 더 옳은가라고 묻는다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피해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한 편으로는 바이러스가 퍼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 같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인의 의견이 갈리더라도 정부는 피해자를 최대한 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과 정부 관계자들은 정치적인 안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결정을 한다. 그들의 비겁한 모습 또한 영화 후반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쉽지만 평가절하되서는 안 될 이야기
영화 <비상선언>은 동일한 재난 상황이 벌어질 때 우리 사회의 단면을 무척 잘 캐치하여 담았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재난을 통해 겪어온 일이다. 더 과거로 가서 반복적으로 일어난 다양한 한국 내 재난을 떠올릴 수도 있다. 특별한 테러 동기도 찾기 어려운 테러범 진석도 우리 사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대구 지하철 테러 같은 끔찍한 범죄를 일으켰도 남대문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뿐이다. 그런 점들이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는 테러 장르로 시작해 재난 장르로 마무리가 된다. 비록 후반부 아쉬운 점들은 있지만 이 영화가 평가절하될 만큼 엉망은 아니다. 하이재킹 테러 장르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긴장감을 영화에 담았고 후반부에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 신파적인 장면들 역시 포함되어 있지만 생각보다 그 강도가 세지는 않다. 비록 압축적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시간의 비약과 너무 딱 맞게 떨어지는 설정들이 들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영화에는 피해자와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고, 무책임한 정부 관계자도 있기만 그 상황과 결정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관료도 있다. 거기에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도 같이 보여주면서 다각도로 영화의 상황을 볼 수 있게 구성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임시완이다. 테러범 진석 역할을 맡고 있는데 평범하지만 분노를 깊숙이 숨기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척 좋은 인상을 가진 그가 사람들에게 무심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내뱉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송강호나 전도연, 이병헌 같은 탑 배우들도 이 영화 안에서 혼자 따로 놀지 않고 적절하게 잘 맞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은 과거 <연애의 목적>, <연애의 온도> 같은 관계에 대한 영화를 탁월하게 연출했었고, <관상>, <더킹>, 같은 사회고발과 관련한 영화도 완성도 있게 연출한 경험이 있다. 이번 <비상선언>에는 실감 나는 비행기 테러 이야기와 함께 현실에서 실제로 겪고 있는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을 적절하게 이야기에 녹여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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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bbitgumi의 영화이야기 유료 뉴스레터에도 영화 <비상선언>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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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추상 속에 담긴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
[DMZ Docs] 추상 속에 담긴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
전시 <하인츠 에미히홀츠 드로잉전 : 기울어진 비전> 리뷰
감독] 하인츠 에미히홀츠
전시소개]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고양시 예술창작공간 해움과 공동 주최로 2024년 기획전의 주인공 하인츠 에미히홀츠의 드로잉 작품 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회 ‘기울어진 비전’에서는 감독이 창작한 800여 점의 드로잉 작업 가운데, 순서와 서사, 도상 해석을 고려하기 보다는 이미지의 시각적 흑백 대비를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 영화와 드로잉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실마리에 근거하여 추려진 수백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출처 :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스포일러 유의
다큐맨터리와 꿈
다큐멘터리와 꿈이 갖는 이미지는 어떨까?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담아내는 느낌이라면 우리가 잠잘 때 꾸는 꿈은 개연성도 사실성도 없이 허무맹랑한 경우가 많다. 어찌보면 굉장히 대척점에 있는 요소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다큐멘터리 감독 하인츠 에미히홀츠는 자신의 꿈에 초점을 맞춘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비현실적인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것이 굉장히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이번 기울어진 비전 전시에서 선보이는 하인츠 에미히홀츠의 ‘메이크업의 기초’는 1974년부터 지금까지 감독이 자신의 ‘꿈’에 기반하여 매달 본인의 무의식을 기록한 드로잉 시리즈를 담아냈다. 하인츠 감독이 꿈에서 본 이미지를 2차원의 평면에 구현하고, 이를 다시 3차원의 전시장에 구조물로 재현해 놓았다.
흑백의 대비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꿈의 요소들은 마치 카툰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문 속 사회비판 요소가 강력하게 담겨진 4컷, 8컷 카툰을 보는 듯했던 이유는 그만큼 꿈 속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이 굉장히 시각적으로 강렬했기 때문이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꿈들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폭발할듯한 에너지가 가득 담긴 그림들이다. 유리창이 깨지는 그림이거나 사람이 어디론가 로켓처럼 발사되는 그림 등 운동감이 상당히 잘 드러나는 이미지들이었다.
그리고 서사 없이 이어지는 다양한 꿈 속 상황들을 3차원적인 공간의 전시장 속에서 커튼이 흘러내리듯 곡선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2차원의 그림 자체에 굴곡이 생기면서 관객이 어느 각도에서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림의 이미지가 축소되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하면서 사람마다 다양한 주관적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게끔 기획되어 있어서 그리 크지 않은 전시였지만 꽤나 오랜시간 서성이며 작품들을 보는 맛이 있었다.
공감각을 활용하다
전시 기울어진 비전은 크게 3가지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하인츠 에미히홀츠의 꿈 속 이야기를 담은 ‘메이크업의 기초’, 그리고 자신의 역대 영화 포스터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 마지막은 베를린 ‘언더그라운드’라는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이다. 이중 가장 오랜시간 인상깊게 봤던 것은 바로 베를린 ‘언더그라운드’라는 영화 작품이었다.
영상 작품이어서 가만히 앉아서 봐야하기에 절대적으로 봐야하는 시간이 가장 긴 것도 사실이었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가장 집중을 한 공간이기도 했다. 베를린 ‘언더그라운드’는 2004년부터 2021년까지 하인츠 에이미홀츠 감독이 만든 171권의 공책과 스케치북, 2019년 당시 베를린 지하철 9곳, 가상의 향수 브랜드 광고 2개,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길가에 심어진 67개의 나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말 설명만 보면 도대체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의아해할 것이다. 자리에 앉아 설명글을 보면서도 도통 무슨말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니터로 눈을 돌리자마자 정말 홀린듯이 집중을 하게 되었다. 특히 가상의 향수브랜드 광고 2개는 분명히 시각적으로만 정보가 전달되고 있음에도 나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리며 그 향수의 향을 맡아보려는 행동을 할 정도로 향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뛰어났다. 5분이 넘는 시간동안 탑, 미들, 베이스 노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영상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비슷한 조각상이 같은 방향으로 회전을 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물이 슬로우모션으로 흩뿌려지는 굉장히 단순한 구도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보여지는데 정말 향기 하나하나를 현실에서 맡아본 향에 비유하면서 관객이 스스로 그 향을 쫓아가게끔 만들고 있었다.
하인츠 에미히홀츠 드로잉전: 기울어진 비전을 통해 이제까지 다큐멘터리에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을 잠시나마 깰 수 있었던 것 같다. 추상적이면서도 그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사실적인, 이 괴리감과 간극을 표현하는 하인츠 에메히홀츠의 작품에 홀렸던 시간이었다.
<전시정보>
장소 : 고양시 예술창장공간 해움
일시 : 2024. 9. 26. (목) ~ 10. 2. (수) 10:00 ~ 18:00
도슨트 : 14시, 16시(약 15-20분 소요 * 9.29~30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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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이란?
시놉시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원고 250명의 학생들을 포함해서 305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로 기적적으로 구조된 단원고 학생들과 희생자 부모들은 큰 트라우마를 겪는다. 김태현 무대 감독은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을 창설하고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세월호 침몰 사건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중에 자체 지원한 희생자 부모들인 수인 엄마,애진 엄마,예진 엄마,영만 엄마,동수 엄마,순범 엄마,윤민 엄마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장기자랑이라는 연극을 통해 승화시키는데...
자식들을 사고로 잃은 슬픔을 유가족들은 차마 말하지 못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간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이 유쾌한 연극을 통해 트라우마를 이겨내보려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준다. 자식을 잃고도 자신의 일에 전진하며 살아가는 부모도 있고 잊지 못해 유품을 정리하지 못한 가족도 나온다.
장기자랑이라는 연극은 단원고 학생들이 세월호를 타기 전에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신 그 역할을 유가족 부모들이 하고 있는데 그중에 중도 포기하는 유가족 부모들도 있었다. 사실은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그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기 싫어할 테고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원하지 않는 엄마들도 있었기에 그 빈자리를 전문 배우들을 섭외시켜 메꾸었다고 한다.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은 각 지방으로 돌아가면서 연극을 시작했으며 자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 도착하지 못한 제주도까지 가서 간담회도 했다. 또한 후반부에서는 울컥한 마음으로 2021년 단원고에서 연극을 한다. 그전에 단원고에서 추모 팀으로 연극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교장과 교감 선생님의 반대로 무산됐다. 마지막으로 유가족 엄마들이 연극을 끝내면서 우는 모습을 보니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 사고 앞에서 인명 피해가 났을 때 희생자들의 가족이 안게 되는 고통과 상실감은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장기자랑을 통해 알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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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팝콘 계산이 서는 액션 오락 블록버스터
<모럴 센스>와 <더 버블>, 국가는 달라도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묶이는 두 작품은 결과물마저 실망스럽다는 것으로도 묶이는데요. 그런 점에서 이번 <야차>는 이를 한시름 덜어놓을 수 있는 것이 "넷플릭스 오리지널"이긴 하나 만든 작품은 아닙니다.
당초, 극장 개봉을 염두 했으나 모든 영화들이 그렇듯이 "코로나19"로 개봉이 연기되었고 결국 "넷플릭스 공개"로 선회했습니다. 하나, 그 사이에 "박해수"분이 <오징어 게임>으로 인지도가 확 상승했으니 "넷플릭스"로서도 꽤나 흥미로웠을 작품이었을 겁니다.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영화 <야차>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업의 비리 조사 과정에서 어그러진 검사 "지훈"은 징계성으로 "국정원 파견 검사"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중국 선양에서 "지강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블랙 팀의 보고가 허위였다는 것을 알게 된 본부는 진상 조사를 위해 "지훈"을 보내는데요. 하지만, "지훈"은 블랙 팀이 진행하고 있는 진짜 작전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는데...
계산이 되는 영화
1. 개명 부탁드립니다.
영화를 떠나 '제목'은 관객 혹은 독자들에게 해당 글과 작품이 어떤 방향성을 지니고 보여주겠다는 출사표입니다.그런 점에서 <야차>의 원제 'Yaksha: Ruthless Operations'를 직역하면, "무자비한 작전"쯤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를 비롯한 관객들은 '해당 작품이 어떤 장르이며, 무엇을 보여주겠구나!'라는 저의를 알 것이고, <야차>는 125분 동안 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갑니다. 손해 보는 느낌은 아니지만, '왜, "야차"라는 이름으로 지었는지?'에는 갸우뚱거리게 만듭니다.이름의 의미를 알까?
실명을 말할 수는 없지만, 저의 이름에도 뜻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부모님께서 '그렇게 되었으면 혹은 살았으면'하는 바람과 같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야차>의 "무자비한 작전"은 전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분명히, 화려한 액션이 등장하지만 총알은 팔과 다리에 착지하며 머리들은 다 피해 가는 기적의 회피술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마무리에는 애써 눈(카메라)을 감거나 하늘 위로 올려버리니 "15세 이용가"임을 재확인하게 만듭니다.
2. 악당들도 세요?
이야기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야차"의 매력은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시원시원하게 밀어붙이는 것일 겁니다. 뻔히, 예상되지만 아는 맛이 무섭다고 그렇게, 주인공 "야차"는 이를 보여주지만 어째 캐릭터가 모호하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이유에는 이미, <존 윅, 2014-19>시리즈와 <노바디, 2021>외에도 여러 작품들에서도 다뤄진 진부함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와 필적하는 악당이 없다는 것입니다.상생하시죠.
<존 윅, 2014-19>시리즈와 <노바디, 2021>의 주인공들이 압도적으로 그려지긴 하나, 이를 상대하는 악역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게 그려집니다. 레슬링 팬이 아니더라도,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의 주인공,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도 이런 캐릭터로 한 획을 그은 선수입니다. 선역과 악역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피니시 "스터너"를 갈겨버리는 것이 그의 매력인데 이 중 가장 맛깔나는 상대는 자신의 회사 회장인 "빈스 맥맨"입니다. '회사의 대표'라는 타이틀도 있지만, 직원들에게 해고를 비롯한 폭언을 일삼는 그의 악독함 "스터너"를 맛깔나게 그려주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야차>에선 "설경구"분에 필적할 악당이 있었을까요?
3. 경쟁보단 나만 할 수 있는 거!
사실, 이를 말하기엔 <야차>의 모든 캐릭터들의 매력을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지강인"과 대립각을 세우는 검사 "지훈"은 수사를 하는 과정부터 모든 것들이 그와 반대점에 서있는 인물입니다. 여기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주제까지 내미지만, 열띤 토론 대신 일방적인 설득으로 이를 성급하게 마무리 짓는데요. 이런 이유에는 영화 <야차>에는 이 2명 만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까라면 까야죠?
그를 돕는 "련희(북한)"를 비롯하여,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수연", 그리고 악당 "오자와(일본)"까지 다양한 국가와 요원들은 이야기의 스케일을 키워나갑니다. 무엇보다 해당 캐릭터들은 각자 분담한 영역들이 확실하여 출연 당위성을 내세우나 "야차"의 블랙팀은 '공기'에 가까울 만큼의 비중과 매력을 보여줍니다. 으레, 이런 멀티캐스팅 영화에선 해당 캐릭터들의 매력들을 나눠가며 이들의 출연 당위성을 정립시키는데요. 이들의 역할 자체가 겹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야차"도 보여줄 수 있으니 있어도 없는 캐릭터들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영화 <야차>도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징크스를 끊어내지 못했네요.
※ 엔딩 크레딧에 후속편을 예고한 쿠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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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쇼스키 자매가 창조한 환상적인 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은 공통적인 것을 지키는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공통적인 것'은 보통 경제적 논의에서 언급되는 개념이다. 토지, 재화, 이윤과 이를 둘러싼 관계성 등을 특정인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모두의 것으로 가져오는 방식을 논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가 활용되어 온 것이다.
〈센스8〉은 감정, 느낌, 감각 그리고 몸으로 공통적인 것의 영역을 확장한다. 호모 센소리움(일명 센세이트)은 같은 날 태어난 8명의 존재가 하나처럼 느낄 수 있는 종족이다. 베를린에 사는 볼프강이 총에 맞으면, 인도에 사는 칼라도 그와 같은 아픔을 느낀다. 선과 윌이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잠기면, 모두가 함께 슬퍼한다. 쾌락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공간에서 섹스하며 만들어지는 쾌락이 모두의 섹스와 쾌락으로 확장되는 장면은 지금껏 본 최고의 베드신이었다. 지극히 자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센세이트들의 황홀한 베드신은 우리가 감정, 느낌, 감각, 몸을 공유했을 때 얻게 될 자유의 크기를 가늠케 해준다.
이 드라마에서 퀴어, 여성 서사가 도드라지는 건 이 때문이다. 오랫동안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어 자신만의 감정, 느낌, 감각, 쾌락을 계발해 깊이를 더해온 이들은 센세이트가 담지하는 가능성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다. 더불어 드라마는 이성애 남성성이 어떻게 이들과 어우러지며 화합하는지도 보여준다. 이번에도 감정, 느낌, 감각, 쾌락의 공유를 통해서다. 당황스럽고 낯설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는 더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대가 아닌 환대, 사랑, 공감, 깊이 있는 이해다.
요컨대, 센세이트들은 서로가 남인 동시에 자신인 셈이다. 이들에게 공감, 연민, 연대는 도덕과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과 생존의 문제다. 모든 공통적인 것이 그러하듯, 센세이트들도 자신의 힘을 빼앗으려는 자들과 싸움을 벌인다. 거대 기업 BPO와 싸우는 센세이트들은 처음엔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공통의 감정, 느낌, 감각, 쾌락이 자기 존재의 핵심임을 깨닫는다. 감정과 느낌, 몸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의 원친이 될 수 있는지를 인지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드라마는 끝내 '정치적인 것'이 된다. 인간을 끊임없이 개별화하여 단절시키는 신자유주의와 폭력적 단결만을 강조하는 여러 극우 포퓰리즘 사이에서, 같은 감각과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센세이트는 우리가 무엇을 빼앗겼는지, 빼앗긴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킴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정치의 지평을 연다. 워쇼스키 자매가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제시하고자 했던 꿈틀거리던 잠재성은 〈센스8〉을 통해 피어올랐다.
전 세계 수많은 팬덤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스케일의 로케이션으로 인한 제작비 문제로 다소 성급하게 결말을 냈다는 점,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 개입된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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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엘 하네케 - 피아니스트
미카엘 하네케 - 피아니스트
개인의 뒤틀린 내면과 욕망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욕망과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 에리카는 경쟁률이 높은 음악대학의 교수로, 그의 실력과 명망은 자타가 인정한다. 겉으로 보이는 에리카는 음대 교수로 번듯하지만, 그의 내면은 황폐하고 메말랐으며, 뒤틀려 있다.
에리카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할퀴고, 헐뜯으며, 비난하면서도 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 이 대목은 매우 상징적인데, 에리카와 그의 엄마는 애증으로 엮인 관계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에리카는 독립해서 혼자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럴 이유도, 경제적 여유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은, 엄마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엄마와 쉽게 분리되지 못하는 정신적 미성숙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역시, 에리카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분리불안을 겪고 있는 증거이며, 다른 의미로 엄마가 자신을 지켜주는 '남성'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리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제자의 옷에 유리병을 깨서 집어 넣어 그 제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게 만들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싸이코패스다. 그런 그에게 친구가 있을 수 없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엄마이며, 그의 취미는 포르노 가게에서 혼자 포르노를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에리카의 현재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그녀가 왜 그렇게 비틀린 욕망을 갖게 되었는가 알 수는 없다. 현재 엄마와의 관계를 미루어보면, 에리카의 엄마 역시 '정상'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내 상상이다.
에리카의 엄마가 젊었을 때, 에리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카의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 집을 나간다. 에리카의 엄마는 자존심이 강해서 남편을 찾지 않았고, 에리카를 혼자 키운다. 하지만 남편이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무너지고, 생활을 위해 굴욕적 상황을 감수하면서 근근이 살아왔다. 그 사이 에리카에게 피아니스트의 재능이 보이자, 엄마는 에리카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에리카의 엄마는 자신의 낮은 자존감에 대한 보상심리, 남편에 대한 복수심 등이 뒤섞인 감정으로 에리카를 닥달하고, 에리카는 그런 엄마의 기대에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 어린 에리카에게 엄마는 유일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변변한 연애조차 해 본 적 없는, 그래서 남자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사랑의 감정이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여성이다. 그가 보는 것은 포르노 속의 남성이고, 관념 속의 남성이다. 그런 그녀에게 한 청년, 클레메가 나타난다. 공대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지만, 피아노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청년, 집안도 훌륭하고, 큰 키에 잘 생긴 외모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청년이었다.
그 청년 클레메가 에리카의 연주를 듣고 그녀의 수업을 수강 신청한다. 에리카는 반대하지만, 다른 교수들의 찬성으로 클레메는 에리카의 수업에 참가해 피아노 교육을 받고, 에리카에게 애정의 감정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젊고 잘 생긴 클레메의 구애를 거부하던 에리카도 어느 순간 클레메를 받아들인다.
나이는 많아도 연애 경험이 없는 여성과 젊고 잘 생긴 청년의 연애는 처음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편지는 온통 변태성욕자의 욕망을 충족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클레메는 화장실에서 처음 만나 섹스를 할 때부터,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만, 에리카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권력을 가졌고, 그녀의 재능에 대해 존경과 애정을 동시에 갖고 있던 클레메는 에리카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에리카의 욕망에 순순히 따르는 듯 하던 클레메였지만, 정도가 지나친 변태성욕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클레메는 에리카의 요구를 거절한다. 뿐만 아니라,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에리카의 태도를 확인한 클레메는 에리카를 비웃고, 천박한 여자라고 비난한다. 클레메 역시 에리카가 드러내는 변태성욕에 호기심을 갖지만, 자신의 존재, 사회적 위치, 집안의 명예 등을 생각해 일정 수준에서 에리카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청산한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집착하고, 자신의 연주회가 있던 날, 관객으로 들어오는 클레메가 아는 척도 하지 않자, 칼로 가슴을 찌르고 공연장 밖으로 나간다.
욕망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욕망이 자아를 잡아먹기 시작하면, 개인의 자아와 본능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에리카의 내면은 제어할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찼고, 그것은 현실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음대 교수로서의 정체성보다 변태적 섹스에 집착하는 중년의 여성, 생리가 끝났지만, 면도칼로 자신의 음부를 베어 피를 흘리며 '유사 생리'를 해야만 하는 비참한 집착, 포르노 가게에서 혼자 포르노를 보며 성욕을 해소해야 하는 고독한 상황 속에서 에리카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존재한다.
에리카가 여성이라는 점이 성적 욕망의 억압과 뒤틀린 발현에서 특별한 이유가 될까. 여성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성적 억압의 압력이 남성과 비교해서 훨씬 크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서 에리카는 이미 '엄마'의 존재로 인해 어려서부터 미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엄마의 욕망을 투사하고, 엄마의 욕망을 대리 구현하는 존재로서 딸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삶을 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에리카가 칼로 자해하고 공연장 밖으로 사라지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 존재로 나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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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3주 최신 개봉영화(기적, 보이스, 어시스턴트, 영화의거리, 극장판 포켓몬스터)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3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기적 #보이스 #어시스턴트 #영화의거리 #극장판포켓몬스터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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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종」리뷰ㅣ여자가 예쁘고 야한 장면이 나오는 과학적 이유ㅣ스포없음ㅣ영화보는건데ㅣ공포영화 여자ㅣ
? "랑종" 으로 알아보는 공포영화의 과학원리(*스포없음)
- 랑종 정보
장르: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 페이크 다큐멘터리, 오컬트
감독: 반종 피산다나쿤
각본: 나홍진, 반종 피산다나쿤
제작: 나홍진, 반종 피산다나쿤
원안: 최차원, 나홍진
- 랑종 스토리 시놉시스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
집 안, 숲, 산, 나무, 논밭까지,
이 곳의 사람들은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은
조카 ‘밍’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날이 갈수록 이상 증세가 점점 심각해지는 ‘밍’.
무당을 취재하기 위해 ‘님’과 동행했던 촬영팀은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과 ‘님’, 그리고 가족에게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
피에 관한 세 달간의 기록
#랑종 #랑종리뷰 #랑종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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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롱레그스> 메인 예고편
30년간 이어져 온 암호 연쇄 살인🔪🩸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 공포 [롱레그스]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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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체스트넛 맨> 공식 예고편
감당할 수 있는가. 체스트넛 맨을 초대하면 벌어질 일들을. 《더 체스트넛 맨》, 넷플릭스에서 일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