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28 16:09:43
[SIWFF 데일리] 계속하는 시원함으로
영화 <수궁>
SYNOPSIS
4대 국창 가문의 마지막 전수자인 정의진(79세)은 동편제 수궁가의 전수자를 찾고 있다. 서편제의 인기에 밀린 동편제 ‘수궁가’를 지키는 길은 2020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되는 길뿐이라고 믿는 정의진은 문화재 선정을 위해 4시간이 넘는 완창 공연을 준비한다. 정의진은 많은 제자 중에서도 마땅한 전수자를 찾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소리를 하며 행복하다고 말한다.
PROGRAM NOTE
판소리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소리가 익어 삶을 응축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수 있다. 〈수궁〉에서 소리를 하고, 배우고, 또 이어가려는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간의 예술, 판소리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악보도 없이 500여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음표도 없어 전수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제대로 익힐 수 없는 판소리는 무엇보다 시간을 붙잡고 또 흘려보내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은 여성 소리꾼들에게서 소리를 앗아간 원인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수궁〉은 4대 국창 가문의 마지막 전수자 정의진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소리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차분히 풀어 놓는다. ‘수궁가’를 전수하고자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에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를 알고 있는 자의 조심스러움이 묻어나고, ‘수궁가’를 배우는 이들에게선 앞으로의 고됨을 짐작하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소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들의 분투를 먹먹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가문도 목청도 소리를 할 수밖에 없이 태어났지만, 마음가는 만큼 소리를 쫓을 수 없는 이들의 삶이 비단 과거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송아름]
이 영화는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한 문장으로 말하고 시작한다. 사라져가는 판소리를 전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수궁가라니 어쩐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노래를, 별주부전 애니메이션에 ‘범 내려온다’를 얹어 보여주어 사실 우리와 멀지 않은 노래임을 깨닫게 한다. 별주부전의 판소리가 수궁가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 담긴 인물, 정의진 선생님은 양암제 수궁가의 전승을 고민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쪽 찐 머리 아래 경량 패딩과 트레이닝복 바지. 어느새 판소리의 세계에도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89년생 제자에 01년생 제자까지, 계속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정의진 선생님은 이 오랜 세월 내내 판소리계에 있던 사람은 아니다. 결혼과 육아로 '경력 단절'이 되어 있던 시간. 뭐, 이유와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정의진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훑는다. 국악을 무서워했다는데, 무서워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그 무게를 무의식 중에라도 가늠했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모르는 사람은 무서워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 결혼했고 육아를 하며 소리와 멀어졌지만, 그는 끝내 소리를 마주한다.
일순 무서워도 괜찮다. 때로는 숨기고 싶어도 괜찮다. 우리가 평생을 들여 마주해야만 하는 것들은, 언젠가 헷갈리지 않고 마주하게 된다. 이는 정의진 선생뿐 아니라 그 제자들의 삶에서도, 아직 살 날이 창창한 제자들의 삶에서도 어른어른 비춰지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훑는 정의진 선생님의 인생사도 기구하고 독특하지만,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그런 일이 있었어.” 라고만 말하고 마시는 순간이었다. 가끔 너무 거대해 말하기 어려운 것들, 아마 그렇게 말하는 게 최선일 만큼 수없이 많았을 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후회가 없다. 다만 견뎌야 할 것이 많을 뿐이다.
나 같으면 그렇게 뒷걸음질치지 않겠다고 말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단호한 모습에서, 정의진 선생님의 그 마음이 묻어난다. 물론 그 선생님의 마음 못지 않게 제자들의 마음도 굳건하다. 정의진 선생님 못지 않게 그 제자들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차라리 돈 벌 걸 그랬나 했다가도 쭉 가보기로 했다 말하는 다슬 씨, 소리는 타고 나야 한다는 말에 좌절했지만 스마트폰을 켜고 소리를 연습하는 01년생 은영 씨, 무대에 서는 일에 이미 익숙한 은서 씨, 그리고 배우는 사람인 동시에 가르치는 사람으로 20년 넘게 소리를 해온 지선 씨. 연습 장소로 쓰려고 노래방을 만들고, 가진 걸 다 내어서라도 전수자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을 품었다는 지선 씨의 이야기가 특히나 흥미로웠다.
소리를 전수할 사람을 고민하는 정의진 선생님 앞에서 제자들은 흔한 상상도처럼 서로를 시샘하거나 모함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길을 계속 간다. 간절히 바라는 것과 별개로 각자의 길을 계속. 선생님이 힘겹게 계속해 가듯, 제자들 또한 이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세심히 비춤으로써, 이 영화는 정의진 선생님과 제자들을 딱딱한 수직선에 도열하는 대신 각자의 둥근 세계를 품은 예술가들의 풍성한 세계로 알알이 그려낸다.
그 덕분에 이 여성 예술가들의 대화와 노래는 더없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퓨전’을 하면 소리를 버린다는 선생님과 그 이유를 묻는 제자 사이에 감도는 것은 아옹다옹 감정 싸움이 아니라, 두 예술인의 진지한 고찰과 주관이다. 각자의 길을 쭉 가보는 여성들이, 그 길에서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통감하며 체득한 각자의 예술 세계다.
오랜 하대와 괄시의 역사에서도 계속해갈 방법을 찾고, 아무튼 이어갈 길을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담겨 있어 좋았다. 서로 고마워하는 30년대생부터 50년대생까지의 어르신들 모습도 보기 좋았다. 서로 옷 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꼬맹이 많이 늘었다며 칭찬도 해주는 모습이 좋았다. 망가져도, 예쁜 분장 아니어도, 예술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하여 자기 일을 사랑하는 직업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목 상태부터 결혼이나 출산까지 무수한 각자의 현실 앞에서 고민하며 계속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 '계속한다'는 것이 단순히 일직선을 그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따금 끊어지고 떨어져도 다시 시작하기를 계속한다는 의미이다. 정의진 선생님의 생애부터가 그렇다. 선생님의 시간은 회피하고 싶었던 과거, 여전히 숨기고 있는 현재, 소리가 사라질까 두려운 미래로 깜빡깜빡 불안하게 빛나며 여기까지 왔다. 거기에는 선생님이 처한 사회의 상황과 사람들의 시선 같은 것들이 작용했다.
여전히 정의진 선생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유명세를 위해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청청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얼핏 보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소리꾼들에 비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평가하는 시선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깜빡깜빡 점멸과 반짝임을 이어간 선생님의 시간이, 전 생을 다해 보내온 모스 부호처럼 느껴졌다. 순간순간 보면 불안하게 깜빡이는 것 같아도, 이어 보면 의미를 갖는. 정의진 선생님의 소리 생애는 미래에 어떤 의미로 가 닿을 것이다.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도 할, 더러는 그만두기도 할, 그러나 끝내 소리를 향한 애정을 품을 제자들의 삶에 이미 가 닿았듯,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다.
시대가 변하여 이제는 청바지를 입고 연습실을 대여해서 소리 연습을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하지만, 그 애정은 표표히 살아남아 몸에서 몸으로 전파된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각자의 벽 앞에 앉아 각자의 소리, 각자의 고독, 각자의 싸움을 계속하는 작업이다.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세계에 손을 뻗는 마음이다. 방에서 시작하여 산에서 폭포 소리를 이겨내고 동굴과 바다로.
그러나 소리가 단지 외로움만 먹고 크는 예술은 아니다. 소리는 어디까지나 공명이니까. 같이 울리는, 감정을 전하는 것이니까. 정의진 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소리를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을 때쯤, 할 수 있다 해준 다른 소리꾼의 존재가 있었으니까. 무대를 함께 멋지게 빛낸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할 사람은 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어려웠던 시절, 예술이 예술 되지 못하게 했던 세상의 차가운 시선,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다시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치를 지키는 사람 못지 않게 그를 알아보고 심사하여 기록하는 사람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가는 절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보고 기록하는 작업이니까.
장소를 가득 메우고 울리는 소리처럼, 저들이 지키는 꿈과 사랑도 앞으로 쭉 가득가득 울려 퍼지길. 원대한 유명세나 큰 무대만이 성취라서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저들이니 그 아름다운 모습이 계속되길 바라니까. 그냥 좋아서 한 사람들, 앞으로도 그냥 좋아서 계속 할 수 있길 바라니까.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 싶은 것.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풍성한 면면 중에는 우리 소리 자체의 재미와 의의도 있다. 저잣거리에서 왕을 까내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대사 하나하나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녹아 있는 게 너무나 우리답고 좋았다. 자진모리와 휘모리,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세상의 속도에 설설 깎여 나가는 우리의 소리들이 즐겁게 지켜지면 좋겠다. 그리고 좋아서 계속하는 사람들이 외롭지 않을 만큼의 관객, 이들의 가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감상과 해석이 뒤따라 주었으면 좋겠다.
2023.08.27. 16:00-17:32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상영코드 322)
2023.08.29. 19:30-21:09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상영코드 52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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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독전 시즌2를 맞이하며
영화 독전을 아시나요?!
원래 재미있게 본 콘텐츠가 있다면
그 대사가 기억이 강렬하게 남잖아요!
저는 바로 영화 독전이 그랬어요!
영화 대사 中
"어떤 한 인간을 X나게 집착하다 보면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게 생기거든?"
저는 이 장면이 엄청 강렬하게 다가왔나 봐요~
그럼, 영화 독전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범죄, 액션, 스릴러, 느와르, 공포, 미스터리, 서스펜스
감독 : 이해영
각본 : 정서경, 이해영
출연진 : 조진웅, 류준열, 김성령, 박해준, 차승원, 김주혁
개봉일 : 2012년
평점 : 8.42
스트리밍 : NETFLIX
기획 의도
아시아 최대 마약 조직,
실체 없는 적을 추적하라!
의문의 폭팔 사고 후, 오랫동안 마약 조직을 추적해온 형사 '원호'
의 앞에 조직의 후견인 '오연옥'과 버림받은 조직원 '서영락'이 나타난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시아 마약 시장의 거물 '진하림'과 조직의 숨겨진 인물
'브라이언'을 만나게 되면서 그 실체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잡게 되는데...
여담
영화 독전은 짜임새 높은 스토리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력 하나만큼은 일품인 영화이다.
무엇보다 영화 독전에서 조진웅이 실제로 마약을 흡입하는 과정에서
이 가루의 정체는 소금과 분필 가루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아파 보였을지도?)
영화 독전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불리며
독전 시즌 2가 촬영 중에 있다고 한다.
후기 및 결말
영화 독전 결말을 살펴보자면...
서영락(류준열)이 이선생으로 밝혀지며,
이선생을 잡기 위해 원호(조진웅)은
라이카에게 미리 위치추적기를 심어
이선생을 찾는데 성공한다.
이 둘은 집안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다
집안에서는 총소리가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결말 부분에서 상당히 많은 평이 갈리긴 하지만.
시즌 2를 생각하면 조진웅이 류준열을 쏜 거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즌 2에는 류준열이 안 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배우들의 미친듯한 연기력이 아닐까 싶다.
스토리 부분만 살펴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배우들의 연기력이 빛을 발휘했던 영화였다.
한줄평 : 넘어설 수 없는 연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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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그해 여름, 남매 성장기의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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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윤단비 감독 작품, 2019년, 104분, 한국.)
〈남매의 여름밤〉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유년의 기억 한 페이지를 소재 삼아 아이의 성장기를 담아낸 영화다. 겉보기에는 평온하고 잔잔하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 때로 격정을 느끼고, 아파하며, 성장한다. 여름과 성장의 질감이 짙게 묻어나는 이 영화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철거를 앞둔 재개발 골목에 흰 다마스 한 대가 서 있다.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옥주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동주가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의 집은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다. 나무로 된 짙은 갈색의 실내 장식에서 나는 냄새가 화면 바깥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어느새 아늑해지는 그런 냄새. 옥주와 동주는 아주 느린 속도로 말하고 걷는 할아버지와 그의 흔적이 담긴 집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이내 적응하고는 금세 웃음을 되찾는다.
영화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빠르게 흘러가는 아이들의 시간은 꽤나 잘 어울려서 관객을 웃음 짓게 한다. 굉장히 섬세하고 구체적인 장면들도 눈길을 끈다. 어떻게 상상하고 연출했을까 싶은 장면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남매의 기분 좋은 여름날에 대한 몰입도도 높아진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시간은 마냥 행복하게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에 아이들은 성장한다. 첫 번째는 어른이라는 문제다. 옥주와 동주는 어려운 형편에도 남매를 잘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 남편과의 문제로 언젠가부터 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사는 고모를 잘 따른다. 자신들을 아껴주는 어른들의 마음이 진짜임을 알기 때문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현실에 지친 어른, 현실에 지치다보니 현실과 닮아버린 어른이기도 하다. 두 어른은 거동이 힘들고 용변을 잘 가리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자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집을 팔고자 한다. 이것만으로 아빠와 고모를 욕할 순 없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어른이 엄청난 품이 드는 돌봄노동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매우 힘들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간다면 꼭 그 집에서 살 필요가 없는 것도 맞다.
그러나 여기에는 빠진 게 있다. 옥주는 요양원과 집 문제를 두고 아빠에게 묻는다. “그걸 왜 우리가 결정해?”(요양원), “할아버지한테는 얘기했어?”(집). 옥주는 두 어른보다 현실과 윤리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더 잘 알고 있다. 설령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가더라도, 집을 판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결정의 주체 혹은 의논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두 어른은 이 당연한 과정을 생략한다. 다소 화가 난 듯이 보이는 옥주의 감정은 정당하다. 어른이 부재한 곳에서, 아이들은 성장한다.
두 번째는 엄마 문제다. 옥주는 늘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동주를 자존심도 없냐며 다그친다. 아마도 엄마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동주에게 엄마를 만나러 가면 혼내주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그런데 동주가 몰래 나가 혼자 엄마를 만나고 선물까지 받아 온다. 옥주는 화가 나서 이를 뺏으려 하고, 동주는 엄마의 선물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결국 두 남매는 소리 지르며 몸싸움까지 한다.* 그러나 옥주가 이렇게 화가 났던 건 사실 자신도 엄마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 문제에 의연한 척했던 건 어떻게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긍정하기 위한 포장이었을 뿐, 그 역시 동주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어린이와 청년의 경계에서 홀로 의연히 버텨내고자 하는 옥주의 의지가 대견하면서도 쓸쓸하다. 그해 여름 한 소녀의 지극히 사적인 성장통이 보편적 호소로 다가오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덧. 이 영화를 배리어프리 영화(장애인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제작된 영화)로 봤는데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한국어 영화를 자막(일반 자막이 아닌 배경음악 등에 대한 정보까지 포함한 상세한 자막), 내레이션(박정민 배우가 재능 기부한 것으로 화면 움직임에 대한 해설 등으로 구성)과 함께 보며 모두가 볼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었다. 내레이션의 문장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굉장히 문학적인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화면 대신 내레이션만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이 그려냈을 남매의 여름밤도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싸우는 두 남매를 중재하며 달래주는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노쇠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오히려 남매를 다독인다는 것은 아빠와 고모의 판단이 틀린 것일 수 있음을, 우리 시대의 어른됨이 정상성(사회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육체적, 정신적 기준) 바깥에서만 가능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현실’이 인간을 찌들게 하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SWIFF)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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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복을 벗고 더 큰 우주로
안녕하세요~! 파노라마에서 첫번쨰로 작성하는 영화 리뷰 입니다~!
처음 리뷰할 영화는 원더입니다 줄거리부터 만나보실까요?
1. 원더 줄거리
‘원더’는 안면기형장애를 가지고 있는 어기와, 어기의 주변 인물들을 다룬 이야기이다. 5학년이 되자 어기의 부모님은 어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한다. 어기는 홈스쿨링 대신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된다. 어기의 가족들은 어기의 외모에 대해서 어기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학교는 아니었다. 친구들은 정말 다양한 시각으로 어기를 바라보았으며, 그 상황에서 어기는 상처와 행복을 받는다.
2. 원더를 보고 나서 - 플립과 원더의 공통점과 차이점
줄거리는 원더의 주인공인 어기를 중심으로 요약하였지만, 원더에서는 어기의 상황만을 다루지 않는다. 나는 비슷하게 연출한‘플립’이라는 영화가 떠올라‘플립’과‘원더’를 비교하며 글을 작성해보았다.
첫번째. 영화 플립과 원더의 공통점은 바로 화자가 한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더에서는 이름과 나레이션을 통해 화자의 전환을 보여준다. 플립도 마찬가지로 화자가 바뀔때마다 나레이션을 하는 인물이 바뀐다. 플립은 두 사람을 교차적으로, 원더는 여러명의 시선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누어서 보여준다. 플립에서는 줄리와 브라이스의 갈등상황을 보여줄 때 하나의 상황을 두 사람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연출을 사용하여 인물의 감정에 관객들이 따라갈 수 있도록 연출하였다. 원더는 처음에 어기로 시작해서, 어기 – 비아 – 미란다 – 잭 순서로 인물이 이야기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환된다. 플립은 둘의 상황에 모두 공감할 수 있었다면 원더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원더의 인물변화는 플립처럼 갈등 상황에서 주인공이 아닌 타자의 시선으로 한번 더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어기를 다른사람들보다 특별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어기는 학교에 간 첫날 친구들에게 외모로 놀림을 받았다. 슬퍼하는 어기에게 부모님은 위로를 해주며 어기의 상황이 마무리된다. 만약 어기가 가진 콤플렉스를 부각시키게 연출하고 싶었다면, 바로 다음 씬에서 어기가 부모님의 위로로 자신감을 얻게 되고 용기있게 자신의 콤플렉스를 드러나는 씬으로 구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더는 그렇지 않다. 부모님이 어기에게 위로를 해주는 모습 뒤로 카메라는 누나인 비아에게 초점을 맞춘다. 어기와 같이 학교 첫날이었던 비아도 힘든 하루를 보낸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아의 하나뿐인 친구인 미란다는 갑자기 비아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어기와 비아의 씬 연결을 통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어기를 마냥 측은지심의 시선으로 보지 말라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힘든 부분은 하나씩 있다. 물론 영화 안에서 어기가 비아에게 외모로 놀림받은 적이 있냐고 질문한 뒤 비아가 아니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지만, 서로 힘들었던 부분이 달랐을 뿐이다. 또, 원더는 플립처럼 같은 상황을 두 번 보여주지 않는다. 분명히 갈등 상황이 있음에도 갈등 상황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닌 인물의 마음을 나레이션을 통해 그대로 보여준다. 잭이 왜 다른 친구들에게 어기를 뒷담화 했는지의 사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잭이 얼마나 어기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잭의 시선으로 어기에게 사과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잭의 마음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두 번째.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는 어른이 있다는 것이다.
플립에서는 브라이스의 할아버지를 통해 이야기의 주제를 전달한다. 그리고 원더에서는 부모님, 학교 선생님들과 교장선생님인 터쉬만을 통해 이야기의 주제를 전달한다. 할아버지와 터쉬만의 공통점은 인물들의 편견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플립에서는 줄리에 대해 브라이스가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해서 얘기를 해준다. 마찬가지로 원더는 어기를 괴롭히던 친구의 부모님이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해서 얘기한다.
플립과 원더는 화자를 여러명으로 설정하여 인물의 마음을 각각의 시선에서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 원더의 경우 화자가 여러명이 아니었다면, 보통의 영화처럼 어기를 기준으로 악과 선으로 나누어 그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어기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고, 놀립받거나 과도하게 배려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인물을 어기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물로 만들지 않는다.
원더 명대사
-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싶을 때는 그냥 바라보면 된다 - 어기 풀먼
- You really are a wonder. - 이자벨
- 위대한 사람은 센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싸울 용기를 불어 넣는 사람이다 - 터쉬만
-> 원더 포스터
파노라마_이가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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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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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내가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는다면 그건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다.
마이클 샌델도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그렇게 말한다.
반대로,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해서 인간답게 살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공정하지 못함에 분노하지만, 만약 그 불공정이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운이 좋았다며 겸양의 미덕을 보일지도 모른다.
40년 동안 목수로 일해온 댄은 누구보다 열심히 산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열심히 한 만큼의 대가가 돌아온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치매를 오래 앓은 아내의 병원비를 대느라 돈이 하나도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장병 때문에 일을 더 할 수도 없다.
이제 나라의 복지에 기대야 할 상황이다. 의사는 질병수당을 신청하라고 했지만 반려되었다.
질병수당 대신 실업수당을 신청하려고 했으나 40년 동안 나무만 만진 사람이 갑자기 컴퓨터로 문서를 제출하기는 쉽지 않다.
전화로 물어보고 싶은데 대기 시간만 50분. 대기 중에도 요금은 책정된다.
구직활동은 건강 문제로 불가하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적극 활용하라는 정부의 지침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업수당도 못 받는다.
옆집 청년은 중국산 나이키 신발을 되팔아서 돈을 번다. 젊은 사람은 저런 식으로도 돈을 버는데 댄에게는 복지 수당을 받는 것조차 너무 버겁다.
집에 있는 가구들을 하나씩 팔아가며 그나마 버티고 있다.
구직을 해야 하지만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상담이 거절된 케이티는 두 자녀를 데리고 이민온 미혼모다.
케이티와 그의 아이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도 갖추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겨우 얻은 집은 촛불로 난방해야 할 정도로 형편 없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아이들에게 줘야 할 통조림을 먹고 죄책감에 오열할 정도로 먹을 게 없다.
센터에서 댄을 만난 이후 댄에게 조금씩 도움을 받는다. 40년 경력의 목수 댄은 집도 척척 고쳐주고 아이들에게 장난감도 만들어준다.
한편, 당국의 부당한 대우와 부조리한 복지 제도에 분노한 댄은 다 필요없다며 질병수당 명단에서 자신을 제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고는 건물 밖 담벼락에 페인트로 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댄의 그래피티 퍼포먼스에 사람들은 환호하지만 어쨌든 범법이므로 댄은 연행된다.
이후 집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는 댄에게 케이티가 찾아온다.
도움을 받았으니 댄을 돕겠다는 것. 법과 제도가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은 한다.
케이티는 결국 구직도 하지 못하고, 밑창이 떨어진 운동화를 신는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는 아이들 때문에 성매매에 뛰어든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핼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사실 기회마저도 운이다. 기회가 있는데 왜 잡지를 못하냐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기회가 온다고 다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앞뒤상황 맥락없이 비난하는 건 또 얼마나 쉬운가.
댄은 케이티를 어둠 속에서 끌고 나온다.
케이티는 댄의 질병수당 심사 항고에 동행한다. 질병수당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이야기를 가장 비극적으로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가. 주인공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것이다.
댄은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죽는다.
케이티는 그가 심사에서 낭독하려고 했던 선언문을 결국 그의 장례식에서 읽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 이후로 바뀐 것이 있을까. 당사자의 죽음으로 항고는 기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이후, 케이티의 삶이 조금은 나아졌기를, 댄과 비슷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복지 혜택을 받기가 조금은 편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선별적 복지제도는 복지를 받아야 할 사람이 내가 얼마나 불쌍한지 증명해야 하고, 증명하지 못하면 자격을 박탈당하기 마련이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설명해야만 혜택을 받는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젊었을 때 돈 좀 벌지. 남들 돈 벌 때 뭐 했냐', '노력을 안 하니까 저렇게 사는 거다', 또는 '난 저렇게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만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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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없는 사람에게, 컴퓨터 못 만지는 사람에게 너무도 가혹한 세상이다.
마르크스가 노동과 자본에서 인간의 소외를 말한 지가 벌써 200년이 다 되어 간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간소외는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코 앞에 있다.
모든 것을 돈으로 보는 세상이 숨막힌다. 모든 가치의 척도가 돈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인간성을 잃어야 할 이유는 없다.
매년 겨울마다 생각한다. 길거리에 노숙자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재기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해서 겨울에 얼어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선별적으로 급식 카드에 돈을 받고, 돈까스 하나 먹었다고 비난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우생학이 따로 있는가. 예전에는 종의 개량이었다면, 이제는 돈을 잘 버는 인간만 살아남아라, 하게 된 것뿐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마지막 문장을 떠올려 본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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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심을 찾고 느낄 수 있다
친구하나 없이 엄마(레이첼 맥아담스)가 짜놓은 인생계획표대로만 살던 소녀(맥켄지 포이). 어느 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옆집의 괴짜 조종사 할아버지(제프 브리지스)를 만나면서 오래 전 조종사가 사막에 추락했을 때 만난, 다른 행성에서 온 어린왕자의 존재를 알게 된다. 소녀는 조종사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어가면서 어린왕자가 살던 소행성 B612와 다른 세계로의 여행, 모두를 꿈꾸게 하는 가슴 벅찬 모험을 시작한다.
모모
영화를 보며 소설 책 <모모>가 불현듯 떠올랐다. 두 작품 모두 어른의 세계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길 원하는 주인공의 소재와 둘다 판타지 형식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혹여나 <모모>를 읽어보지 못했다면 <어린 왕자>를 보고,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당신의 어린 모습을 떠오를 수 있고, 어른이 되버린 나에게 동심의 근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린왕자
이 영화는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모티브를 따와 만든 영화이다. 그래서 영화의 내용도 소설의 이야기에서 새로이 추가된 캐릭터들이 사이에 들어가 영화가 진행된다. 어린왕자만의 따뜻한 성격이나 종이 냄새가 날 거 같은 기분좋은 편안한 색채는 소설에서 느껴진 몽글몽글한 느낌을 잘 표현해준다.
객관적 상관물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하면 기존의 물건에 의미를 부여해서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문학 작품만의 표현방식 중 하나이다.
영화에서는 소설에서 등장한 '바오밥나무' ,'장미' ,'별' 등에 의미를 부여하여 소설에서 공감한 느낌을 영화에서도 이어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주제도 부각시켜 영화를 본 관객들이 자아성찰을 깨우칠 수 있는 시간도 만들어준다. (다시 보면 원작의 뛰어남이 묻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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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튼 아카데미 | 뻔한 이야기 속에 숨은 진주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국 뉴잉글랜주의 고등학교 '바튼 아카데미'에서 역사 교사로 재직 중인 '폴'(폴 지아마티). 이렇다 할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는 책과 자기 세상에 갇힌 채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숙직을 맡아 기숙사에 남은 학생들을 지도해 달라는 교장의 제안도 큰 불평 없이 받아들인다. 어차피 그의 크리스마스는 달라질 게 없으니까.
하지만 크리스마스 방학 첫날부터 그의 예상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앵거스'(도미닉 세사)가 갑작스레 학교에 남았기 때문. 입이 튀어나온 앵거스는 교칙대로 공부를 강요하는 폴의 지도에 틈만 나면 반기를 든다. 거기에 아들과 사별한 기숙사 주방장 '메리'(데이바인 조이 랜돌프)까지 학교에 남으면서 무미건조할 예정이었던 폴의 크리스마스는 자꾸만 궤도를 벗어난다.
알렉산더 페인이 크리스마스 영화를 변주하는 법
'크리스마스 영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가족과 떨어져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주인공. 그는 가족이 아닌 이들과 여러 모험을 겪는다. 가족의 의미와 소중함을 되새기며 그렇게 한 층 성장한다. <나 홀로 집에>나 <해리 포터> 시리즈 초반부가 대표주자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 폴 지아마티 주연의 코미디 드라마 <바튼 아카데미>도 마찬가지다. 비둘기 아줌마나 늑대인간은 없지만 큰 틀은 같다. 엄마와 새아빠의 신혼여행 때문에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방학을 보내야 하는 앵거스. 불만 가득한 앵거스는 당직 교사 폴, 학생 식당 조리사 메리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결 성숙해진다.
이렇게 보면 특별할 게 없다. 잘 만들고 감동적인 크리스마스 영화. 그뿐이다. 그러나 정말 이뿐이라면 <바튼 아카데미>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남우주연, 여우연, 각본, 편집상까지 다섯 부문에 후보로 선정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칫 익숙해 보이는 크리스마스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 가족, 교육, 그리고 1970년대다.
학교에서 새로운 가족을 찾다
폴과 앵거스는 단순한 학생과 교사 관계가 아니다. 앙숙이다. 규칙을 준수하는 교사와 자유분방한 청소년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친구가 아니기에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은 더 감동적이다. 특히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눈에 띈다. 그들은 가족과 관련해서 남몰래 간직한 아픔을 털어놓고, 서로 위로를 건넨다. 그 순간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비로소 따뜻해진다. 옆에 있는 새 가족을 찾았기 때문이다.
앵거스는 가족을 잃었다. 친아빠는 정신병원에서 치료 중이라 만날 수 없다. 친엄마는 계부와 신혼여행을 즐기느라 자기를 학교 기숙사에 처박아뒀다. 그래서 그는 유일한 가족사진에 유독 집착한다. 바튼 아카데미에 집착하는 폴은 괴짜로 유명하다. 교칙을 어기거나 공부를 안 하는 학생에게 유달리 엄격하다. 그런 그에게도 속사정이 있다. 어릴 적 엄마와 사별한 후, 그에게 집은 바튼 아카데미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앵거스와 폴은 그토록 바라던 가족과 집을 서로에게서 발견한다. 도저히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서로 마음에 안 들던 둘은 같이 병원을 가고, 저녁을 먹고, 서점을 가고, 볼링을 치면서 상대방의 고독함을 발견한다. 앵거스가 숨기고 있던 우울증 약도, 하버드에서 쫓겨나 바튼 아카데미로 돌아와야 했던 폴의 사연도 공유한다. 가장 비참한 순간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끈끈한 사제 관계로 거듭난다.
메리도 빼놓을 수 없다. 아들을 최근에 잃은 그녀는 후유증에 시달린다. 두 남자는 그녀 옆에서 같이 TV를 보고, 크리스마스 파티에 동행하며 외로운 시간을 채워준다. 메리도 앵거스와 폴이 싸울 때 은근슬쩍 앵거스의 손을 들어주고, 폴이 앵거스를 학생이 아니라 제자로 대하도록 충고를 건넨다. 그렇게 가족을 잃은 이들이 마침내 새 가족을 찾는다. 셋이 함께 칠면조를 먹는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크리스마스인 이유다.
학교에 저항하는 사제지간
그러면서도 <바튼 아카데미>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실제로 영화 곳곳의 힌트를 따라가면 앵거스와 폴을 매개로 삼아 암시하는 이야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다운 블랙 코미디와 찰진 대사를 쫓으면 <바튼 아카데미>의 진짜 풍미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교육이다. 흥미롭게도 배경은 학교지만, 두 주인공은 학교에 썩 어울리지 않는다. 명령과 교칙을 준수하는 교사나 학생은 아니기 때문. 일례로 폴은 교장에게 뻗댄다. 부유한 집 아이에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점수를 부여하라는 교장 지시를 단칼에 거절한다. 그 아이들이 바튼 아카데미라는 명문 학교에 입학한 것만으로 그들은 이미 특혜를 받았으니, 좋은 성적을 따는 것을 그들 몫이라면서.
그뿐만이 아니다. 관례를 따르는 다른 교사들과 달리 폴은 방학 직전까지도 수업을 강행한다. 자연히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을 리 없다. 이 점은 앵거스와 폴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유달리 입이 거친 앵거스는 다른 학생의 인신을 공격하는 데 도가 텄기 때문. 방학 첫날부터 주먹질을 유발할 정도다.
진정한 학교와 교사를 만나다
그런데 <바튼 아카데미>는 오히려 그들의 비뚤어짐을 비난하지 않는다. 학교라는 시스템이 강제하는 일방향 규칙을 마음껏, 제대로 어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고 말한다. 일례로 폴이 앵거스에게 교칙을 지키라고 요구할 때 그들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오히려 그들이 규칙을 깰 때 변곡점이 생겼다. 앵거스가 체육관에서 난동을 부릴 때. 그들이 교칙을 깨고 보스턴 여행을 떠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다.
이처럼 <바튼 아카데미>는 단순히 몇몇 개인 방학과 연휴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튼이라는 학교가 대표하는 교육 시스템에 대한 저항, 규율에 대한 도전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 그보다는 삶의 축소판에 가깝다. 정해진 길을 알려주는 교육을 따르는 대신,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필요하면 반항할 줄 아는 삶의 과정을 그려냈다.
시작과 끝 역시 주인공, 더 나아가 관객의 반항을 응원한다. 교장과 대면하는 첫 장면에서 폴은 키케로의 어록을 인용한다. ‘우리 중 누구도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Non nobis solum nati sumus).’ 마지막 순간, 그는 그 말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직접 증명해 보인다. 본인에게는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는 바튼 아카데미를 포기하려 한다. 이제는 아들과도 같아진 앵거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폴이 앵거스에게 슬며시 건네는 악수는 그 어떤 대사와 제스처보다도 감동적이다. 따뜻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찾아온 추운 겨울날 같은 현실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따뜻하기도 하다. 마음의 흉터를 못 지웠거나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한 이들 간의 연대를 단 한 순간에 꾹꾹 눌러 담았으므로.
70년대 터치 덕분에 더 감성적인
극 중 시대상이 1970년대임을 고려하면 <바튼 아카데미>는 더 의미심장해진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인한 히피 문화가 퍼지며 사회에 대한 저항이 꽃피우는 시대였으니까. 페인 감독은 시대적 환경을 절묘하게 활용하며 강압적인 제도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에 힘을 더한다. 군사 학교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앵거스를 비추면서 베트남 전쟁을 암시하는 식이다.
여러 기술적 접근에도 페인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다소 과하게 느껴지는 줌 렌즈, 1.66:1의 화면비, 필름 스크래치, 디졸브 효과가 배경에 깔린 올드팝과 어우러지는 순간 스크린 위에는 1970년대가 되살아난다. 오래전에 사용된 영화사 로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다소 평범한 듯한 각본도 의도된 것처럼 느껴진다. <바튼 아카데미>는 관객을 70년대로 초대함으로써 가족, 학교나 학생, 더 나아가 사회 분위기에 관해서 까지도 한 번 더 사색할 수 있는 시공간을 선사하는 영화이기 때문. 이 대목에서는 류승완 감독의 <밀수>가 떠오르기도 한다. 겉보기에는 투박한 <바튼 아카데미>가 '따뜻한 크리스마스 영화'라는 무미건조한 평가에 갇히면 안 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배우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폴 지아마티와 데이바인 조이 랜돌프의 연기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성과로 보여줬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올랐을 뿐만 아니라, 제8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각각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눈에 띄는 배우는 따로 있다. 고등학교 연극부 활동이 경력의 전부라는 도미닉 세사의 변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퍽 탁월하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이상
진흙 속의 진주를 발견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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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겉보기엔 멀쩡한 남자> 공식 예고편
그 좋은 시절, 언제나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난 스탠드업 코미디언.
이렇게 완벽할 수가.
똑똑하고 다정하고 직업 좋고, 부족한 게 없네?
너무 괜찮아서 믿지 못할 지경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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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허슬> 공식 티저 예고편
운이 다한 농구 스카우트(애덤 샌들러)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엄청난 실력에 험난한 과거를 가진 선수를 외국에서 우연히 발견한다. 결국 그는 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이 천재 선수를 미국에 데려가는데. 두 사람은 난관을 무릅쓰고 NBA에서 성공할 자질을 갖췄음을 입증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