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29 21:25:42
[SIWFF 데일리] 인간에서 인간까지
영화 <카메라를 든 사람>
SYNOPSIS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 커스틴 존슨이 25년간의 촬영 경력 동안 포착해 낸 푸티지 영상을 직조하듯 풀어 낸다. 영상 제작자와 대상들 사이의 관계, 카메라의 객관성과 개입 사이의 긴장, 그리고 날것의 현실과 가공된 이야기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영화.
PROGRAM NOTE
감독으로서 영화는 곧 ‘이야기’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감독은 이야기 안에서 배제된 촬영 현장의 목소리에 대해 늘 아쉬움과 한계를 느끼고는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영화 〈카메라를 든 사람〉은 무엇보다 예외적이며 뛰어난 작품이다. 이는 25년 동안 촬영감독으로 활동한 커스틴 존슨만이 가지는, 감독과는 다른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영화는 오랜 기간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를 통해 만난 사람과 감정을 주고받았던 순간을 엮어서 만든 커스틴 존슨만의 자서전이다. 마치 잘려진 천 조각들이 ‘퀼트’라는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본 듯하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5년 만에 다시 찾은 보스니아의 한 가족과의 대화와 ‘작은 상영회’는 이야기에서 놓쳐버린 현장의 순간들이 어떻게 환생되고 의미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다큐멘터리를 하다 보면 감독의 그릇만큼 세상이 보일 때가 많다. 현장에서 만난 이들에 대한 깊은 탐색과 교감이 쌓여 결국 자신의 아이들과 치매를 가진 어머니에게로 카메라가 향할 때, 어떻게 카메라가 한 개인에게 역사가 되어 성숙한 시선을 갖게 하는지, 또한 그것이 관객에게 어떠한 울림을 주는지, 이번 영화제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권우정]

일전에 넷플릭스에서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주변에서 알음알음 추천을 받고, 왓챠피디아도 내가 4.1점을 줄 거라고 했으므로. 역시나 좋았다. 딕 존슨의 죽음을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딕 존슨의 딸이자,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으로 25년을 살아온 감독 커스틴 존슨의 작품이 상영된다고 해서,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첫 영화로 냉큼 골랐다. 그리고 역시나, 좋았다.
이 작품은 25년 동안 수많은 작품에 참여하면서 그가 촬영한 풋티지 영상을 모아모아 새로이 편집한 것이다. 커스틴 존슨 감독은 이것을 자신의 회고록처럼 여겨 달라고 했다. 타이틀이 떠오르기 직전 보이는 장면은 도로만이 펼쳐진 넓은 평원에 번개가 치는 순간과 우렁찬 천둥 소리가 포착되는 것, 그리고 관객인 나와 동시에 깜짝 놀란 숨을 들이켜는 촬영자의 소리. 기둥 뒤에 공간 있듯, 카메라 뒤에 인간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굉장히 다양한 영상이 조각조각 모여 있다. 스레브레니차 집단 살해의 기억이 남아 있는 보스니아처럼 역사의 어떤 순간도 들어 있고, 복싱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담는 장면도 들어 있다. 복싱 코치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가까이서 찍는 게 진리라고 말한다. 복싱도 촬영도 가까운 데서만 가할 수 있는 일격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그 가까운 촬영의 일격을 연타로 날리는 걸작이다.

얼핏 평이해 보이는 장소에서도 ‘흥미로운 요소’를 찾는 것이 카메라의 힘임을 느끼게 한다.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도시의 풍경에서, 벽의 포탄 자국이, 93-94년 사이에 사망한 사람들의 묘비가, 스레브레니차를 잊지 말라는 그라피티가, 카메라에 점점이 담기면 그곳은 더 이상 평이한 도시가 아니게 된다.
세계 곳곳, 각기 다른 세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성실히 따르며, 카메라는 다양한 것을 담는다. 삶의 ‘흥미로운’,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 단면마다 커스틴 존슨의 카메라가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조각조각들이 모인 곳, 소실점에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바로 인간을 담기 위해 그의 카메라는 그토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 차창 너머로 찍을 수밖에 없는 나라들도 있다. 알 자지라 주요 인물들이 수감된 예멘의 감옥 앞이나 카불처럼 위험한 곳들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도 유리창을 닦는 손이 흥미롭게 담겼다고 말하는 ‘기술 전문가’인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잊지 않는 ‘예술가’가 있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익명성을 위해,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손과 목소리만 담은 인터뷰 영상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전해진다. 인터뷰의 가장 앞 단어를 건네주면서, 공감하고 경청한다. 카메라의 역할은 결코 응시에만 그치지 않는 것이다. 기술과 예술을 동원하여, 담고 전달하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의 모습도, 집단 살해의 기억 이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가족들이 거둔 알알이 보석 같은 열매도, 눈을 다쳤지만 똑똑한 소년으로만 보였던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증언도… 촬영자에게나 감상자에게나 뚜렷하게 각인되는 이런 영상들은, 카메라의 역할이 응시에만 그쳤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 흘렀던 역사의 기억들과, 그 자리들이 오늘날은 평화로워진 장면을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도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편집한 손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의 보여주기는 사실 적극적인 말하기이다. 무수한 이들의 피가 흘렀던 초원에 오늘날 얼마나 햇살이 곱고 들꽃이 살랑거리고 있는지, 단지 고운 들판을 보여줄 뿐인데 왜 우리는 참담해지는지. 이 적극적인 말하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 기록의 행위가 없다면 우리 눈에 그저 예쁜 초원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토록 거대한 기억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기록하고 전달하는 한, 조각도 이야기가 된다.
커스틴 존슨의 작업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이것이 팩트와 기록이 모여 역사가 되는 과정과도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각조각 모인 이야기들이 새로운 진실을 그려내고, 풋티지 영상이 모여 새로운 작품이 되는 과정이다.

영화는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도 함께 담았다. 현장 프로듀서 겸 통역으로 보스니아에서 내내 동행한 이의 말처럼. 우리의 선택이지만, 더 오래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해소도 필요하다는 것을.
때로는 몰랐던 이야기 앞에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대답을 회피하는 인터뷰이에게 다른 주제로—이를 테면 옷 같은 얘기로— 말을 돌리기도 하는 커스틴 존슨의 모습을 보며… 전문가가 된다는 건 단순히 기존 하던 일에 노련해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기 하는 일 안에서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직면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흔히 전문가가 된다고 하면, 마치 감정은 무디게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감정을 잘 해소하고 정돈하는 것이 오히려 필요한 것 같다. 꼭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배우나 소위 ‘감정 노동’으로 일컬어지는 일들이 아니어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대부분 감정을 사용하며 일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인간의 시선에서, 시선 끝의 인간까지. 다큐멘터리는 결국 그런 작업이 아닐까.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경계를 넘어서서, 보여지지 않는 그 너머까지, 그 소실점에 있는 인간에까지 시선이 미친다면 그 사람이 어느 직군에 있든 전문가 소리를 들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 나의 조각 모음은 어떤 회고록의 모양이 되어 있을까. 커스틴 존슨의 인생 thanks to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엔딩 크레디트가 쭉 올라가는 동안 생각했다. 나의 크레디트에 남기고 싶은 이름과 마음들을. 이 영화에서 보고 배운 아름다운 시선이 거기에도 한 자락 묻어나 있다면 참 좋겠다.
2023.08.25. 14:00-15:43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6관
2023.08.28. 19:30-21:13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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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무패 9단계의 최고 단계가 어쩌면 '패배하기'는 아니었을까?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 필자가 다소 꼬인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토마스 에디슨의 본 명언을 필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실패가 너무 무섭다. 작다면 작은 실패와 고난을 반복해가며 만들어진 두려움은 당분간 도전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말은 필자에게 있어 '흥. 웃기고 있네'라는 멸시의 대상이면서 역설적이게도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나보다 많은 것들을 먼저 경험한 분들의 말씀, '지금 너가 겪은 것들은 모두 예고편에 불과해'와 같은 직언은 닥쳐올 실패들을 앞서서 걱정하게 해, 이 모든 역경들을 이겨낸 그분들을, 역경들을 떨쳐내고 성공을 해 명언을 남긴 토마스 에디슨을 존경하게 한다. 본 작품을 모두 관람한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해보자. 실패를 하고 있는 난 패배자이고, 토마스 에디슨은 승리자인가? 토마스 에디슨이 과연 전구를 발명하고 축음기를 발명하기 전까지도 늘 그는 승리자였는가? 명언을 깨닫고, 내뱉기 전까지는 그도 어쩌면 수 많은 패배자들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가.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승리자와 패배자로 이루어진 이분법의 재판장에서 패배자의 손을 들어 세상 모든 패배자들을 위로하고 따스히 안아준다. 재밌는 건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과연 그 구분이 실재하는 것인가 묻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중반부, 주인공 가족인 후버 가족의 가장 별종, "드웨인"의 절규가 이어졌던 배경 속 뒤 표지판엔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뭉치면 산다.' 군대나 전쟁과 어울릴 법한 구절이 가족 오락 드라마에 사용된 데엔 어쩌면 이는 의도적인 설정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내포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본다면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산개와 화합의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보여진다. 특히 이를 주 배경이 되는 장소의 구분을 통해 표현한다.
우린 흔히 '혈연으로 이어진 인간 공동체'를 '가족' 내지는 '가정'이라고 부르는데, 두 단어의 앞 글자가 모두 '집 가(家)'라는 데엔 '가족=집'이라는 걸 의미하는 지 모른다. 가족의 정신과 마음이 모두 담긴 집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영화의 초반부 씬을 보면 화합과 결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가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대화가 긴밀히 오가는 식사 씬에선 쇼트와 역쇼트를 빈번히 사용하여 영화의 호흡을 빠르게 가져가지만 인물들이 집의 복도 내지는 공간을 누비는 장면에선 롱테이크로 촬영한 점이 인상적이다. 대화 씬의 속도와 걷는 씬의 속도가 다른 데엔 빠른 대사와 박자감을 통해 갈등의 흥미진진한 진행을 표현하고자 함과 상대적으로 천천히 이동함으로서 집 안에 만연하게 존재하는 가족 간 미묘한 거리감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와중 불안과 불합치만이 존재하던 집안의 분위기를 바꿔주는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의 본격적인 사건의 중심인 막내 "올리버"의 '미스 리틀 선샤인' 진출을 위한 캘리포니아 행 여행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바로 여행 중 차량 클러치가 고장 나 모두가 차를 밀면서 한 명씩 탑승하는 장면이다. 본 씬과 영화의 전 후 서사를 비교해보면, 본 씬을 기준으로 인물들의 분위기와 표정 등이 변하게 됨을 눈치 챌 수 있다. 공군 사관학교에 가고자 했던, 니체를 극심하게 믿어 침묵의 서약을 했던 아들 "드웨인"의 늘 무표정이던 얼굴이 입체적으로 변해 절규도 하고 웃기도 했으며 작품의 진 주인공으로 보여지는 삼촌이자 잘 나가는 학자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몰락해버린 "프랭크"가 무한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웃고, 떠들고, 위로하고, 도전하기 시작한 계기도 바로 본 장면을 기준으로 한 후였다. 영화의 종반부 이러한 행동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점은 본 씬의 중요도를 영화가 의도적으로 일러주는 것 같으면서 인물들의 행동이 워낙 재밌다 보니 중반부 이후 차를 출발시키려는 씬들이 등장할 때면 이번엔 어떻게 가려나 하는 흥미로운 생각마저 하게 해 영화에 크나큰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운, 신, 미스 리틀 선샤인. 본 작품을 본 분들이라면 모두 인상깊다고 생각할 만한 영화의 소재들이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행복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보통의 사물과 존재들에게 아이러니를 더한 대사와 연출들을 보여준다. 이런 아이러니함의 중심엔 항상 아빠 주인공인 "리처드"가 서 있다. 달달한 맛과 시원한 온도감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아이스크림에겐 '미인대회에서 떨어지기 위해 먹는 패배자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칭호를 딸 앞에서 서슴치 않게 씌웠고, 삼촌 "프랭크"가 "올리버"에게 운을 빈다고 했을 때 "운 따위는 나약한 패배자들이나 의지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운을 비운의 존재로 전락시켰다. 인상깊은 점은 바로 이런 "리처드"가 승리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 도착한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장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딸을 만류하기 위해 내뱉은 첫 마디가 바로 "너의 운을 빌어."라는 것이다.
패배자와 승리자를 항상 구분 짓고 '절대무패 9단계'라는 본인만의 잣대로 비교하던 "리처드"의 영화 속 삶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는 승리자였느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되고, 이는 아이러니함의 시작점이다. 절대무패 9단계라는 본인만의 학설을 자랑스럽게, 마치 승리자인 것처럼 강연하지만 협소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아이러니, 몰락한 학자인 "프랭크"를 패배자라고 멸시하지만 본인도 다른 사람의 확실치 않은 말 한마디에 설레발치며 사업을 확장시켜 결국 파산 직전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리처드"를 마치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과 같은 역설로 보이게 한다.
작품의 재밌는 지점은 운과 아이스크림의 존재 뿐만 아니라 신의 등장 타이밍과 미스 리틀 선샤인의 존재에도 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속 'GOD'이라는 단어가 실제 대사로서 등장하는 때를 생각해본다면 할아버지가 마약 하는 씬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리처드"가 이상함을 느끼던 때이다. 물론 영어 대사나 영문화권 사람들의 평상시 말에도 GOD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고, 관용어와 같이 각종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단어의 뜻과 같이 실제 신의 은총이나 신의 손길이 필요치 않은 장면에서 유독 'GOD'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건 영화가 의도적으로 단어와 대사를 통해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미국의 최고 미인을 선정하는 대회인 미스 아메리카 그리고 아동계의 미스 아메리카인 미스 리틀 선샤인을 영화가 연출한 방법도 이러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본 관람객마다 생각은 모두 다르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선 영화가 미스 리틀 선샤인과 미스 아메리카에 선정된 인물이나 출연한 인물들 심지어 행사 자체를 그리 아름답게 담지도, 좋은 의미로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게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끔 여지를 남겨놓은 것처럼 보여졌다. 미스 리틀 선샤인과 미스 아메리카. 어쩌면 모두 승리자를 뽑기 위한 행사이고, 선발된 인원들 또한 모두 승리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영화가 승리자를 예찬하고, 승리자를 위한 작품이었다면 두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모든 루저들, 모든 패배자들을 위하는 영화이다. 스스로 패배자이면서 패배자임을 인정하기 싫은 가정이 승리자가 되기 위한 여행을 떠났고, 그 끝엔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런 패배자들을 처절하고, 비참하게 그렸을까? 승리자라고 스스로를 추대했던 초반부의 처연한 분위기와 패배자임을 인정하고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짓는 행위마저 모두 의미 없음을 드러낸 종반부의 행복한 분위기의 차이는 그 반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모두 패배자이고 그저 인정만 하면 된다고 단정 짓는 작품일까? 물론 그렇지도 않다. 영화 속 승리자로 보여지는 사람들의 외양, 이미지, 풍기는 분위기 모두에서 과연 그들이 어떠한 면에서 승리자인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고 오히려 패배자로 보여지는 후버 가족의 이미지와 풍겨지는 분위기를 더욱 빛내는 것처럼 연출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패배자를 낙담시키지도 그렇다고 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가 패배자이자 승리자임을, 패배자와 승리자를 구분지어 평가하는 게 모두 덧 없음을,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짓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바로 화합 그리고 사랑이란 걸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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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영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결정의 순간을 맞이한다. 갓난아기 시절에는 먹을지 말지, 싫은지 좋은지로 의사를 표현하지만 조금씩 많은 것을 거부하고 결정해나간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그에 대한 의견 표시를 부모에게 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그 결정을 보조해주지만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면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 특히나 입시 시험은 수많은 문제의 답을 결정해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성적에 따라 어떤 대학에 갈지를 결정한다. 수없이 이어지는 시험에는 정답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외의 문제들에 정답은 없다. 그리고 그 결정 이후 어떤 결과가 자신에게 주어질지 정확히 예측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한다. 결정을 하지 않으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데시벨>은 한순간의 결정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초반에 훈련에 참여하고 있는 해군 잠수함 안을 보여준다. 부함장(김래원)을 중심으로 훈련을 진행하던 중 정체불명의 어뢰 공격을 받고 바닷속에 잠기게 되는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시점을 이동해 현재 부함장의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부함장은 폭탄 설계자(이종석)의 전화를 받고 설치된 폭탄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된다. 폭탄 설계자는 왜 폭탄을 설치했는지 초반에 설명해주지 않고 첫 번째 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시작으로 두 번째 폭탄, 세 번째 폭탄으로 긴박하게 시선을 돌리려 노력한다.
어떤 결정을 한 이후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잠수함 부함장의 이야기
사실 현재 시점의 부함장은 과거 잠수함 사건 이후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잠수함이 가라앉았을 당시 그는 선원들을 최대한 살리려는 결정을 했지만 그 결정은 죽은 선원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선원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결정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부와 사회는 그를 일부 선원이라도 살린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함장은 트라우마와 함께 죄책감을 같이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여기에 폭탄 설계자가 그를 이끄는 곳은 바로 과거 잠수함의 트라우마 속이다.
영화에서 부함장은 시종일관 테러범에게 끌려 다닌다. 도움을 받기 위해 우연히 만난 취재기자(정상훈)와 함께 폭탄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정작 폭탄을 찾고 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는 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사람을 대피시켜도 폭탄을 터뜨린다는 테러범의 말에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부함장과 그와 관련된 사람의 트라우마를 영화는 드러내 이용하려 하지만 그것이 왜 폭탄 테러와 연결되어야 하는지 영화는 설명해내지 못한다.
부함장이 가진 트라우마는 사실 테러범인 폭탄 설계자의 정체를 파악하고 만나게 된 순간 더욱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 속에서 크게 폭발력이 있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폭탄 설계자가 굳이 소음 폭탄을 이용해야 했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과거 전문가가 아니었던 폭탄 설계자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복잡한 폭탄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저 그가 멘사 회원이라는 아주 얕은 이유만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영화에는 부함장의 아내(이상희)가 등장한다. 폭탄 해체반에서 일하고 있는 그가 유일하게 폭탄을 해체하면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부함장은 그와 어떤 상의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취재기자와 뛰어다닐 뿐이다. 또한 영화 속 취재기자도 어설픈 모습만 보여주며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개그를 선보인다. 부함장의 아내와 취재기자 모두 영화 속에 겉돌기만 하고 부속품으로 활용될 뿐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긴박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김 빠지는 캐릭터와 이야기
종합해보면 부함장은 폭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폭탄을 찾아 뛰어다니고, 그의 주변 인물들은 폭탄 해체에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그저 소비되고 만다. 다른 무엇보다 폭탄 설계자가 왜 부함장을 괴롭혀야 하고 테러로 다른 사람들, 특히 부함장의 가족까지 희생시켜야 하는지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무척 공허하게 느껴진다.
영화를 보면서 이미 많은 폭탄 테러 영화, 잠수한 영화 등에서 보아왔던 장면들이 떠올라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다. 그래서 영화가 꽤나 낡은 이야기와 액션을 재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소리를 이용한 폭탄이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사용하고도 전혀 신선함을 느낄 수 없게 구성된 이야기와 캐릭터는 무척 실망스럽다.
결국 이 영화는 부함장의 결정에 의해 발생한 트라우마와 영향을 다루는 이야기다. 영화의 과거 사건인 잠수함에서 살아남은 이가 그 결정을 한 부함장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노력이다. 부함장은 자신의 결정의 죄책감을 마음에 담고 살고 있다. 그리고 그때 살아남은 선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선원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챙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정을 반대했던 사람은 그에게 반기를 들고 테러로 공격을 한다. 그 결정이 이 영화의 비극을 낳게 되었지만 부함장은 자신의 힘으로 그 방법이 잘못된 길임을 알려주려 영화 내내 노력한다.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실망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부함장 역할을 맡은 김래원과 폭탄 설계자 역할을 맡은 이종석의 연기는 나쁘지 않다. 두 인물이 가진 분노와 상실감을 무척 잘 표현하고 있다. 각자가 잘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 취재기자 역할을 맡은 정상훈의 연기도 나쁘지 않지만 이 영화의 상황에 맞지 않는 연기톤 때문에 돋보이지 않는다. 영화 <데시벨>은 기발한 폭탄에 대한 아이디어와 배우들의 연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에서 실망스러운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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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강아름, 뿌연 카메라로 결혼을 질문하다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박강아름과 그녀의 남편 정성만. 둘은 영화를 공부하고 싶다는 아름의 꿈을 좇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 도중 아이도 낳는다. 아내인 아름은 학교를 다니고 남편인 성만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한다. 얼핏 보면 낭만적이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매 순간이 어려움의 연속이다. 〈박강아름 결혼하다〉에는 이 과정의 고난함이 담겨있다.
사실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매끄럽게 이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영화 참여자를 재현하는 방식의 윤리성, 자기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는 일의 진부함 등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바로 이 어수룩한 지점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공부, 출산, 육아 등의 고된 노동을 프랑스라는 낯선 곳에서 해나가는 아름‧성만 부부는 시시때때로 갈등을 겪는다. 영화에는 사랑스럽고 유쾌한 순간만큼이나 긴장감 넘치는 장면도 많다. 고민하던 아름은 근본적 질문에 다다른다. '도대체 우리는 왜 결혼했을까?', '왜 나는 결혼을 그토록 갈망했을까?'
영화가 급격히 흔들리고 방향을 잃는 건 이 질문이 나오고 난 후부터다. 신혼부부의 삶을 담은 생활 밀착형 고난 이야기는 이 질문 이후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해 답을 찾으려 든다. 하지만 끝내 답을 찾는 데 실패하고 만다. 아름이 답을 얻기 위해 몇 쌍의 부부, 커플을 만나는 장면이 자아내는 지루함이 그녀의 실패를 대변한다. 아름은 자기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소중한 이야기를 나눠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실패’는 본격화된다.
그러나 결혼의 의미를 탐구하던 아름의 실패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성공’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아름은 덩케르크로 가족여행을 떠난다. 영화에 바다의 풍경을 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날씨가 문제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성만은 아프다는 이유로 내내 뚱한 표정이다. 아름이 기대하던 아름다운 여행은 없었다. 성만과 아름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고, 카메라는 비에 젖어 점점 뿌예진다.
뿌연 카메라와 뾰로통한 얼굴. 이것이야말로 아름이 답을 갈구하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왜 수많은 갈등에도 결혼으로 묶인 둘 사이는 여전히 공고할까? 사람들은 이들과 같은 문제를 겪음에도 왜 결혼에 애착을 거두지 않을까? 왜 여전히 결혼은 미래 행복의 가장 중요한 선결 조건으로 여겨질까? 이 모든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 속에서도, 사람들은 결혼의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 걸까? 그 행복은 어떻게 결혼을 지속시키며 동시에 결혼을 교란할까?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이중 어떤 것에도 명쾌히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고민이 야기하는 혼란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박강아름 결혼하다〉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아름의 태도에서 모두가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를 엿본다. 길을 잃었지만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는 건 박강아름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우리 모두의 은유다. 그녀가 혼란을 마주하고 고민하는 일을 멈추지 않길 바란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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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리지 않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다, 영화 <코다>
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을 본 영화 <코다>. 라라랜드 감독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반 우려반이었다. 솔직히 영화 <라라랜드>는 그렇게까지 나에게 엄청난 인상을 준 작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코다>는 내 기준으로 영화 <라라랜드>보다 훨씬 잘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 <코다> 시놉시스음악의 마법에 빠질 시간!
가장 조용한 세상에서 시작된 여름의 노래!
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인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코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코다의 의미를 알다사실 코다의 의미를 몰랐다. Children Of Deaf Audlt.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들을 이르는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코다가 뭘까? 주인공 이름이 코다인가? 아닌데,,, 하며 세상 무지함을 뽐내며 영화를 봤다. 주변에 청각장애인이 없어서 그들의 삶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청각장애인의 삶과 그들을 부모로 둔 비장애인의 삶이 어떠한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좋았다.
특히, 나는 비장애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비장애인인 루비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루비에게 너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부담을 주는 엄마를 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고, 어떻게 자식에게 저렇게 부담을 안길까 솔직히 불편했는데 영화 후반부에서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엄마의 입장에서 비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조화와 공존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나름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전해주고 있어서 좋았다.
음향연출이 너무 좋았던 순간
사실 청각장애와 음악영화 이 모순적인 조합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의아스러웠다. 음악의 지배적인 감각이 바로 청각이기 때문인다. 물론 음악을 소화하는 이는 비장애인인 루비이긴 햇지만 그 소재를 청각장애인 가족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요소 때문에 그리고 오히려 청각을 활용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감동이 몰려왔다. 바로 루비의 합창 발표회에서 듀엣으로 부르는 노래를 연출한 장면이었다.
초반부 노래를 들려주다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온다. 관객 역시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태로 그저 행복하게 공연하는 루비와 그런 루비의 목소리에 감동한 듯 쳐다보는 관객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잠깐이나마 모든 이가 듣지만 나는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마련되면서 음악영화지만 멜로디 하나 없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출을 한 그 짧은 순간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누구나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영화 <코다>의 주제는 자립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다. 사실 비장애인인 루비가 태어나기 전까지 엄마와 아빠, 오빠는 청각장애인이었지만 나름대로 세상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잘 살아왔다. 하지만 비장애인인 루비가 태어나면서 세상과 더 활발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며 루비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루비 역시 가족에게 얽메이면서 스스로도 가족없이는 결정을 내려본적이 없는 양쪽 다 서로에게 의존적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루비가 자신이 좋아하던 노래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대학이라는 꿈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간 가족간에서 의존해왔던 자신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글렇게 영화 속에서는 의존적이었던 가족간의 관계에서 ‘의지’를 할 수 있는 관계로 점차 변화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청각장애인인 가족들이 그동안 겉돌다 어떻게 사람들과 화합하기 시작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그려주고 있지는 않다. 다만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수화를 배우게 하고 먼저 다가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 정보만 보여줄 뿐이다. 혹자는 그 과정을 너무 아름답게 편집했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장애인인 자신들끼리만 있기보다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함으로써 의존적이지 않고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한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영화 <코다>는 음악영화답게 감미로운 노래들과 드라마,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조화, 마지막으로 존재의 자립이라는 주제까지 적절하게 버무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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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무너진 균형에 매몰된 감동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며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 그는 자신의 신분과 사연을 숨긴 채 자사고의 경비원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그는 괜한 관심과 주목을 피하기 위해 무뚝뚝하고 차갑게 학생들을 대하며 기피 대상이 된다. 어느 날, 그는 잘못된 친구 관계 때문에 기숙사에서 쫓겨나 떠돌던 '한지우(김동휘)'를 만나고, 어려운 가정환경과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수포자가 되어 좌절 중이던 지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던 중 학성은 우연히 지우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만다. 수학을 가르쳐 달라는 지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는 정답만을 찾는 세상에서 방황하던 지우에게 올바른 풀이 과정을 찾아나가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자신의 삶에서도 전환점을 맞이한다.
박종훈 감독의 첫 상업영화인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정직하다. 영화의 첫인상인 제목으로부터 보여주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은 크게 '수학자'와 '이상한 나라'로 이루어진다. 이때 '수학자'는 수학이라는 소재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미끼일 뿐, 영화가 진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그 수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또 이용하는 개개인들의 사연일 것임을 말해준다. 또 '이상한 나라'는 수학자들이 발 디디고 있는 공간이 품은 이야기에 따라 해당 사연들의 내용과 감흥이 달라질 것이라고 암시한다. 다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정직함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 데 그친다. 수학자의 스토리는 감동적이고 그의 공간도 시각적으로 잘 구현되었지만, 이들의 만남은 하나의 짜임새 있는 플롯을 이루지는 못한다.
우선 '수학자'의 이야기를 보면, 이 영화에서 수학은 철저히 수단적인 도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수학의 이름을 빌려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성은 지우에게 특정 문제의 구체적인 풀이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수학에 접근하는 자세를 일러준다. 예를 들어 풀이를 단축시킬 공식을 알려 달라는 지우에게 학성은 칠판을 가득 채울 만큼 복잡한 계산을 모두 직접 하라고 말한다. 수학의 기술과 문제의 결과만을 쫓는 지우에게 수학의 진정한 묘미는 과정에 있음을 알려준다. 학성이 지우에게 내준 첫 문제가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라는 문제인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러 존재할 수 없는 삼각형을 보기로 주면서 기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공식을 통해 답을 구하는 것보다 수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때 작중 수학을 대하는 태도는 곧 인생을 대하는 태도로 연장되기에 흥미롭다. 영화는 “수학이 단순하단 말을 못 믿네? 곧 믿게 될 거다. 인생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면”이라는 대사를 통해 인생에는 하나만의 정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또 수학계의 난제인 '리만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내해 온 학성의 사연을 빌려 왜 수학의 공식을 증명하고자 하는지, 곧 무엇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정답에 맞춘 증명이라는 결과 그 자체보다 정답보다 중요한 올바른 풀이 과정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Q. E. D. (증명 완료)'라는 자막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고, 그 증명을 강요당한다고 볼 수도 있는 시대에 따뜻한 울림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또한 수학으로써 인생을 말하는 메시지의 울림은 수학이 아름답다는 학성의 찬양 덕분에 더욱 깊고 진하게 느껴진다. 수학의 아름다움은 삶의 미학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찬양의 수단이 수학과 뗄 수 없는 음악이기에 더욱 직관적이고 동시에 인상적이다. 음악은 소리를 소재로 삼을 뿐 그 구성요소인 박자나 선율, 화성 등은 모두 수학적 원리를 따르고 있다. 서로 다른 음을 내는 현 사이의 길이가 간단한 정수의 비로 표현될수록 어울리는 소리가 난다는 피타고라스의 발견처럼, 아름다운 음악에는 올바른 수학적 비율이 깃들어 있다. 그렇기에 학성과 함께 등장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삼인방이 함께 파이(π)의 값을 악보로 옮겨 연주하는 '파이송'은 예술과도 같은 수학의 아름다움과 수학에 대한 영화의 인문학적인 접근법을 부각한다.
이처럼 수학에서 인생의 올바른 가치와 길을 찾는 '수학자'의 관점은 '이상한 나라'의 의미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특히 같은 학교 안에서 극도로 대비되는 공간을 통해 '이상한' 대목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당장 지우가 다니는 자사고의 교실과 기숙사, 복도 공간은 무채색의 화이트 톤으로 명암 대비를 낮춰 평면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이는 ‘학성’과 ‘지우’의 집을 관통하는 콘셉트이기도 하다. 이 공간들은 모두 메말라 있고 비어 있는 황량한 느낌을 선사한다. 고액의 수학 과외가 이루어지는 학원 역시 같은 인상을 남긴다.
반면에 지우와 학성이 함께 수학을 공부하는 장소인 과학관 B103 아지트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명암 대비를 높여 보다 입체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밝고 따스한 호박색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어두우면서도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동시에 신비롭기까지 하다. “으스스하지만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 채워서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라는 느낌을 주는 미지의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박동훈 감독의 말대로 과학실을 가득 채운 잡동사니 덕분에 역으로 어떤 작은 변화도 이상하지 않을 아지트로 재탄생한다.이처럼 두 공간의 상반된 분위기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상한 나라'의 함의가 바뀌게 되는 힘이 되어준다. 초반부만 해도 지우의 수학 성적이 매우 낮고,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는 이유로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전학 가기를 권유하는 학교의 태도는 냉혹하지만 현실적인 것처럼 묘사된다. 딱히 지우에게 인간적인 정을 주지 않는 주변 학생들의 모습도 이를 부추긴다.
그러나 과학관 B103이라는 공간이 등장한 이후로는 비록 냉정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였던 학교의 분위기는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비상식적인 인상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문제의 조건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으니 복수정답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지우에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술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것이 진짜 잘못된 것이라고 일갈하는 교사의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비판적 태도는 답안지 유출 사건을 비롯해 왜곡된 교육 시스템의 진상이 이미 잘 알려진 만큼 효과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수학을 매개로 삶의 감동과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잘 이끌어 가던 영화는 '이상한 나라'에 남북관계를 끌어오려는 과욕을 부리고 만다. 작중 학성과 지우의 관계는 마치 유사 부자 관계나 다름없다. 탈북한 후 남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들을 잃은 학성이 아들의 모습을 지우와 겹쳐 보기 때문이다. 필생의 과업인 리만 가설을 증명하려던 노력 때문에 비극을 겪은 만큼 학성에게 유독 수학 때문에 괴로워하는 지우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선을 쌓아가면서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영화가 적절히 균형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선 짐작 가능한 학성의 개인사를 굳이 숨기고 있다가 그의 사연을 나열하는 선택은 영화와 관객 간에 감정교류를 저해하고 학성의 감정선마저 작위적으로 느껴질 소지를 주고 만다. 또 탈북자인 학성과 국정원의 관계를 풀어나갈 때는 그 위기를 억지로 조성한다는 인상을 남기는데, 이는 딸기 우유로 대표되는 뻔한 클리셰와 결부되어 영화의 깊이감과 몰입감을 모두 방해하고 만다. 그 결과 '이상한 나라'에 담긴 사회적 의미와 현실의 무게감과 인물의 사연이 만들어 낸 일차원적이고 편의적인 감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적으로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문제가 요약되어 있다. 배우의 중량감이나 분량, 스토리의 깊이만 봐도 주인공은 이학성이 되어야 하지만, 미흡한 작법으로 인해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이학성이 아니라 한지우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정직한 제목에 어울릴만한 짜임새를 보여주지 못한 나머지 표류선 마냥 '이상한 나라'와 '수학자' 사이에서 무너지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변수 없는 단정한 수식처럼 작위적인 교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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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동성애에 대하여, 영화 <우리, 둘>
- 우리, 둘 (Two of us, 2019)
제작 : 프랑스·룩셈부르크·벨기에, 드라마·멜로
감독 : 필리포 메네게티 │ 출연 : 바바라 수코바(니나), 마틴 슈발리에(마도)
러닝타임 : 95분 │ 등급 : 12세 관람가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영화
최근에 영화 <갈매기>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었다. 젊은 여성이 아닌 중년의 여성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 세상이 그들에게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에 대해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사회인데도 여전히 소외되는 계층이 있다는 건 관객인 내가 느껴야 하는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같은 맥락으로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을 보여준 영화 <우리, 둘>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오랜 세월 동안 차별과 맞서 온 동성애 속에서도 특별히 ‘노년’이라는 연령층이 갖는 소외감을 마주해서다. 세상은 점점 개개인의 성적 지향을 존중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중년 이상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이 영화 속 레즈비언 커플의 연령대가 ‘할머니’라는 점은 그래서 특별하고도 상징적이었다.
복도를 마주 보고 이웃집 사이로 지내는 ‘마도’와 ‘니나’는 20년째 몰래 사랑을 이어오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그들이 걸어온 시대는 물론 지금처럼 동성애가 존중받는 시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마도는 남성과 결혼을 하여 자식과 손자까지 두었다. 그렇게 자신의 성적 지향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고, 오랜 세월 동성연애를 숨기며 살아온 그녀들이지만, 그럼에도 마도와 니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자식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로마에서 함께 여생을 보내는 것.
하지만 마도는 쉽게 자식들에게 이를 말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과정에서 니나는 상처를 받는다. 결국 둘의 갈등이 심화되던 어느 날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둘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니나는 쓰러져 언어기능이 마비된 마도가 걱정돼 죽겠다. 하지만 니나를 그저 엄마의 이웃집 절친한 친구분 정도로 아는 마도의 가족들 앞에 니나는 나설 수가 없다. 그저 기웃거리는 것쯤으로 마도를 확인해야 했던 니나는,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도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마도의 딸 ‘앤’에게 들키고 만다.
‘내 자식은 안돼’와 ‘내 부모는 안돼’의 차이점
수많은 동성애 커플들이 커밍아웃의 기로에서 오랜 고민을 한다고 들었다. 주로 청년층의 동성애 커플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는 ‘부모의 반대’가 가장 큰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부모와 대치하지 않아도 되는 중년 또는 노년층의 동성애 커플은 어떨까.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영화는 딸 ‘앤’의 격렬한 반대를 통해 보여준다.
엄마의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앤은 니나를 차단하고, 잠금장치를 바꾸고, 엄마를 병원에 가둠으로써 엄마의 동성애를 끝내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앤의 모습은 자식의 동성애를 반대하는 부모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더 나아가 동성애를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그게 내 가족의 일은 아니길 바라는 사회 전체의 모순을 닮아있기도 했다. “내 자식은 안돼”였던 대사가 “내 부모는 안돼”로 변형됐을 뿐이랄까.
노년의 동성커플이 직면해야 하는 위기는, 젊은 층의 동성커플이 겪는 위기와 같은 선상에 높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토록 더욱 깊은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일이다. 성적 지향에 대한 일차적 존중은 물론이고, 자식들이 느낄 상처와 창피함과도 맞서 싸워야 하며, “다 늙어서 무슨 존중을 바라느냐”는 노인 자체에 대한 폭력적 시선도 감내해야만 하는 문제니까.
해피엔딩으로 만드는 건 우리의 몫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니나는 병원에서 마도를 빼내 자신의 집에 데려오고, 둘만이 추억하는 노래에 맞춰 블루스를 춘다. 밖에선 엄마를 되찾아가려는 딸 앤이 문을 쿵쿵 두들기고 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도 존중받을 수 없었던 두 노년의 여성은, 말없이 끌어안고 끝나가는 영화의 화면을 가득 채운다. 슬픔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침묵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기에.
성적 지향에 대한 우리의 다양성은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고, 젊은 동성애자의 사랑에 대한 존중은 이제 하나의 교양이며 덕목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그 시선의 바깥에 젊지 않은 동성애자의 사랑이 남아있다. 마도와 니나 같은 연인들. 살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고, 대부분의 삶을 가족에 대한 의무와 희생으로 지내왔던 숨은 동성 연인들 말이다. 거의 모든 영화와 드라마가 ‘젊은 동성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동안 가려져있었던 연인들에 대해, 이제 따뜻한 시선을 건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니나와 마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앤은 결국 엄마의 사랑을 받아들였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영화에 대한 감상을 떠나,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차별에 대한 감상이기도 하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주변에 더 많은 니나와 마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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