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9-16 16:33:53
[SICFF 데일리] 할머니의 집요한 추모 의지를 기억하라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물비늘〉
물비늘/The Ripple
임승현 감독/Korea/2022/100min
'국제장편경쟁' 세션
임승현 감독의 〈홈리스〉를 인상 깊게 봤다. 〈기생충〉을 독립영화로 만든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은 영화로, 집이 필요한 젊은 부부의 간절한 마음이 ‘범죄’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손가락질이 과연 온당한지를 질문한 수작이다. 그런 감독이 이번 영화 〈물비늘〉에서는 트라우마, 치유, 속죄의 문제를 카메라에 담았다. 〈홈리스〉가 사회 구조가 촘촘히 새겨진 인간의 마음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내밀한 인간 내면의 본질에 천착하고자 한 것이다.
예분은 매일 금속 탐지기를 들고 강가에 나간다. 그러고는 물에 들어가 종일 강바닥을 훑으며 무언가를 찾는다. 1년 전 래프팅을 하다 사망한 손녀 수정의 흔적 말이다. 그러던 중 예분의 오랜 친구가 그녀를 찾아온다. 자신이 병으로 죽을 날을 얼마 앞두지 않았다며, 자기가 세상을 떠나면 손녀인 지윤을 잘 부탁한다는 부탁과 함께. 사실, 예분은 수정의 친구인 지윤에게 그리 감정이 좋지 않다. 지윤이 수정의 죽음에 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정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래프팅을 할 때 함께 있었던 지윤이 그날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아서 수정이 죽은 이유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의 죽음은 지윤에게도 트라우마였다. 수영 선수인 지윤은 래프팅 사고 이후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는다. 절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난 충격도 크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마저 병사한다. 예분과 지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를 마주해야만 하는 때가 점차 다가온다.
만약 수정의 죽음에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예분과 지윤 모두의 것이다. 예분은 알코올중독으로 손녀 수정을 못살게 굴었고, 수정은 그런 할머니를 피해 집을 나왔다. 지윤은 그런 수정을 달래주기 위해 래프팅 제안을 했으나 하필 그날 사고가 발생해 친구를 떠나보냈다. 즉 예분과 지윤은 모두 수정의 죽음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이제 둘만 남은 상황은, 예분과 지윤이 지금껏 서로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게 함으로써 속죄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같은 상처를 가졌으나 함께 슬퍼할 수는 없었던 두 사람이 수정을 온전히 추모할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분과 지윤은 서로에게 각각 죽은 할머니와 손녀 역할을 하며 새로운 할머니-손녀 관계를 형성한다. 상처와 트라우마, 속죄의 문제를 함께 마주하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전작 〈홈리스〉에 비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소 평면적,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상실과 트라우마의 문제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집스런 예분의 얼굴에서 묘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예분은 이제 자신에게 미래 따위는 없다는 듯 군다. 강 수색이 더는 어려워질까 싶어 몰래 근처 다리 공사 현장의 시멘트와 트럭을 손상시킬 정도로, 손녀의 흔적을 찾겠다는 예분의 의지는 집요하다. 즉, 그녀는 자신은 절대로 죽은 손녀를 과거에 묻어두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상을 살아가고, 손녀가 죽은 1년 전의 시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그런 세월을 자연스레 살아내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만큼은 ‘과거’에 머무름으로써 죽은 손녀에 대한 추모와 애도를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분의 집요함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아직도 그 소리냐’며 유족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동안 무수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는 9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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