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M2021-06-24 23:54:42
미치광이 피에로 / Pierrot le fou
미치광이 피에로 / Pierrot le f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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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나름 재미있다.
역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른 고다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대책없이 행동하는 사랑에 빠진 막가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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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앤느와 사랑에 빠진 미치광이 피에로.
마리앤느가 자신을 배신하고, 이후 그녀의 존재를 본인이 없애버리니
항상 그녀의 선택에 따라 살았던 페르디낭(피에로)은 그녀의 부재가 자기자신의 부재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결말에 줏대와 신념없는 자기자신, 그리고 마리앤느를 죽음에 이르게한 자기자신이 바보같다고 말하며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에 파란페인트로 자신의 얼굴을 칠하는 장면은 그런 바보같은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마리앤느가 없으니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몰라서 세상을 등지고 숨어버리는 행동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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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색감이나 배경이 너무 예뻐서 프랑스에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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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마리앤느와 페르디낭(피에로)이 베트남전 뮤지컬을 미군들 앞에서 펼치는데.. 이 장면이 상당히 거슬리고 기분이 나쁘다.
마리앤느가 얼굴을 노랗게 칠하고 되지도 않는 외계어로 칭총총거리는데..
불쾌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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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디의 오랜 팬들을 위한 선물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에 대한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이 글을 읽지 말아주세요!
스파이더맨을 좋아하세요?
영웅 일대기를 그린 영화 캐릭터 중에서 스파이더맨을 좋아한다.
배트맨은 이야기 흐름과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 즐기기 힘들었다.
슈퍼맨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미국을 위한 맞춤형 영웅'이라는 느낌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스파이더맨은 배트맨처럼 상실의 아픔을 겪지만, 인물의 이야기가 부담스러우리만치 어둡지 않다.
또한, 외계인이 아니라서 해당 인물의 상황에 공감하기가 수월해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스파이더맨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다 챙겨봤다.
첫 번째 시리즈부터 어메이징 그리고 마블의 시리즈와 애니메이션 버전까지 챙겨봤다.
당신의 첫 스파이더맨은 누구?
나처럼 만화가 아닌 영화로 스파이더맨(이하, 스파이디)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의 스파이더맨을 제일 먼저 떠올릴까?
여기에서 세대가 갈린다.
나부터 밝히자면, 내 첫 스파이디는 토비 맥과이어였다. 가장 좋아하는 스파이디이기도 하다.
말이나 행동이 소심하고 어설픈 피터 파커.
하지만,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가르침을 용기 있게 실행한 첫 스파이디였다.
두 번째는 2012년부터 시작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앤드류 가필드이다.
1세대 스파이디보다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
행동이 어설프지 않고 유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스파이디였다. 이 캐릭터 역시 매력적이었다.
세 번째 스파이디는 마블 유니버스에서 등장한다. 톰 홀랜드.
몸도 생각도 어리지만 정의로운 스파이디이다.
이토록 개성 있고 매력적인 세 스파이디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작품이 있다.
영화<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이다.
우리끼리만 웃고 우는 장치들이 한가득한 영화
여기에서 '우리끼리'에 속하는 사람들은 앞선 스파이더맨 주연 영화를 다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오랜 팬들을 위한 장면이 한가득 담겨있다. 팬들을 위한 종합 선물세트 같은 영화다.
같지만 다른 피터 파커들을 연결해주는 명대사,
자신의 활약상은 초라하다고 작아지는 캐릭터와 "아니야 너는 어메이징 해"라는 대사에 얽힌 웃픈 사연(스크린 밖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슷한 상황에서 이번엔 누군가를 구해내는 장면 등.
타임머신이 발견된다면 하고 싶은 것
타임머신이 발견된다면, 과거로 가고 싶은가 미래로 가고 싶은가?
나는 과거로 가고 싶다.
내가 심리적으로 가장 힘들고 외롭던 시기로 돌아가서 '힘들겠지만, 넌 괜찮아져. 이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 같겠지만, 금방 지나가.'라고 말하며 안아주고 싶다.
그런데, 그 상상을 생생한 영상으로 마주했다. 잠이 오지 않아 무심코 택한 영화인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노장 악역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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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날 우리> - '첫사랑을 완성하는 마침표‘
여름날 우리 (你的婚礼, My Love, 2021)
개봉일 : 2021.08.25 (한국 기준)
감독 : 한톈
출연 : 허광한, 장약남
'첫사랑을 완성하는 마침표‘
2018년에 개봉한 박보영, 김영광 배우 주연작 <너의 결혼식>의 중국 리메이크판 영화 <여름날 우리>. 많은 관객들이 답답하고도 애타는 현실 청춘 로맨스의 정석이라 이야기했던 <너의 결혼식>의 리메이크 작이라는 정보와 소지섭 배우의 투자, <상견니>로 온갖 사랑의 기억을 조작했던 허광한 배우의 출연 소식으로 화제를 모은 <여름날 우리>가 <너의 결혼식> 개봉 3주년이 지난 2021년 여름, 한국에서 개봉한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원작인 <너의 결혼식>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이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름날 우리>를 보고 나서도 똑같이 이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름답고 찬란하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소중한 첫사랑의 추억. 그 추억이 아무리 빛나고 애탄다고 한들, 내가 붙잡을 수 없다면,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은 보내줘야 한다.
원작 <나의 결혼식>과 리메이크작 <여름날 우리>는 인생을 바꿔 놓은 첫사랑과, 우리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오랜 시간, 그리고 오래된 청춘의 추억을 보내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른 건 걱정하지 않고 마치 사랑에 눈이 먼 사람처럼 달려온 행복했던 날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랑의 부드러운 위로와 사랑 앞에서 초라하게 무너졌던 순간들. 그리고 결국은 놓아줘야 했던 마지막까지. 인생에 한 번뿐 이기에 더욱 지키고 싶었고, 잊고 싶지 않았던 그를 보내주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한층 더 성장한다.
가슴이 미어질 만큼 미안했고, 그래서 더 고마웠던 나를 만들어준 ‘첫사랑’. 사실 내 첫사랑은 이토록 싱그럽고 아프고 아름답진 않았지만, 이런 영화들을 보고 있다 보면 괜히 내 첫사랑도 웅장하고 아름답게 포장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누군가의 첫사랑은 이럴 수도 있구나.. 괜히 부럽기도 하고 말이다. 조금 지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만약 나의 약혼자가 이들과 같은 청춘, 첫사랑의 기억을 가졌다면 질투 나서 결혼을 못 할 수도 있겠다-싶을 만큼 이들의 이야기는 빛이 난다.
단일 감정이 아닌 행복, 슬픔, 죄책감, 고마움, 설렘, 믿음, 애정 같은 여러 빛깔의 감정이 한곳에 모여 만들어진 ‘사랑’이라는 감정. 그것은 나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는 순간에도, 뜻대로 되지 않고 끝없이 엇갈리는 상황을 맞이한 순간에도 ‘그를 만난 걸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힘이다.
나의 청춘, 나의 죄책감, 나의 아픔을 모두 담은 나의 첫사랑.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가진 것 없는 맨몸인 걸 알면서도 용감하게 그 감정에 뛰어들 수 있었던 싱그러운 젊은 날의 후회 없는 사랑의 끝맺음을 담은 <여름날 우리>. 맞춤양복 대신 소녀의 그림이 담긴 셔츠를 입는 장면, 불꽃놀이 장면 등 원작과 같은 듯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변화된 장면들과 비 오는 날 땡땡이 치던 날의 추억, 두 사람이 벤치에서 이별을 말하던 순간처럼 원작의 장면이 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각각 비교하고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원작을 아꼈던 관객이라면 <여름날 우리>에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약간은 오글거리고 뻔하기도 하고, 끝없이 애타는 순간도 있지만, 청춘 로맨스물의 매력은 이런 순간들에서 오는 게 아니던가.
여름날 우리 시놉시스
처음이었다, 사랑이 싹트는 기분 너에게 풍덩 빠져버렸던 17살의 여름. 너를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21살의 여름. 그리고 몇 번의 여름이 지나고 다시 만난 너, 이젠 놓치지 않을 거야. “널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오직 눈앞의 수영장과 싸움에만 시선을 던지던 단순한 소년의 세상에 한 소녀가 향긋한 바람을 몰고 온다. 수영장(yóuyǒngchí)와 비슷한 발음의 이름을 가진 소녀 ‘요우 용츠’. 그녀는 수영장에 꽂혀있던 소년 저우 샤오치의 시선을 단박에 빼앗고 그의 청춘의 중심이 된다. 구제불능이었던 저우 샤오치는 요우 용츠를 위해 무모한 경기를 치르기도 하고 그녀에게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태어나 처음으로 모든 힘을 짜내 공부를 한다. 저우 샤오치가 수영부 주장 샤크와 내기를 걸 때, 요우 용츠는 저우 샤오치가 지지 않을 거라며 믿음을 보여주고 요우 용츠가 보낸 믿음과 그녀의 존재는 저우 샤오치의 발전 원동력이 된다.
“풋사랑은 그렇다. 느닷없이 시작되고 또 그렇게 끝난다.”
소년의 사랑은 소녀와 함께 비를 맞던 날 더욱 깊어지고, 또다시 비가 내리던 날 갑자기 끝난다. 깨져버린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요우 용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맞이한 첫 번째 이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기적적으로 다시 만난 요우 용츠는 이미 다른 인연을 만났고, 현실은 저우 샤오치가 꿈꿨던 모습과 달랐다. 저우 샤오치의 시선은 여전히 요우 용츠를 향해 있지만 요우 용츠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매번 미묘하게 엇갈린다. 베프라고는 말하지만 왠지 특별한 이유 없이는 연락하면 안 될 것 같은 애매모호한 사이. 첫사랑이긴 하지만 또 다른 사랑으로 잊혀 버린 듯한 사이. 항상 그를 생각했지만 맞지 않았던 타이밍의 반복. 두 사람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오랜 시간 한자리를 맴돌던 두 사람의 사이가 진전이 되는 계기는 슬프게도 ‘상처’때문이었다. 저우 샤오치는 요우 용츠를 구하려다 어깨 부상을 입게 되고, 저우 샤오치를 간호하던 요우 용츠는 사랑과 그 위에 얹어지는 죄책감의 무게를 함께 받아들인다.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저우 샤오치의 사고를 계기로 한걸음 나아가게 된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를 사랑했고, 사랑을 통해 행복을 얻는다. 하지만 그 밑에 깔려있던 상대를 향한 죄책감과 ‘어쩌면’이라는 후회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연인을 향한 죄책감과 후회는 사랑 밑에 숨어 사랑을 의미 없이 지속시키기도 하고 현실과 힘을 합쳐 끝내 사랑을 부숴버리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선수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저우 샤오치는 “내가 그 트레이너보다 더 잘할걸요”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거절했던 체육관 전단지를 손에 한가득 쥐고 있다. 저우 샤오치의 서포트를 통해 용기를 얻은 요우 용츠는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이루지만 저우 샤오치는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는다. 두 사람의 세계는 그렇게 나뉘어버린다. 저우 샤오치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너를 위해서”가 “너 때문에”로 변하기 시작하자 화살은 연인 요우 용츠에게로 향한다. 우리 둘만 있으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던 미래는 결국 현실이 되지 못했고 두 사람은 후회 주변을 맴돌다 사랑을 끝낸다. 이제 사랑이 아닌 나를 위해 살자는 다짐을 나누면서.
“우리 15년 뒤에 뭐 하고 있을까?”
꼬치집 앞에서 함께 15년 뒤를 그리던 소년과 소녀는 어느덧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어른이 됐다. 잊을 수 없는 첫사랑과 청춘의 기억을 뒤로 미뤄두고 현재를 찾은 어른 말이다.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32살의 나와 너. 첫사랑인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17살의 나와 우리. 하지만 이제는 살며시 내려놔야 할 추억들. 많이 행복했기에 그만큼 아팠고 서툰 마음에 저질렀던 실수들이 후회로 남은 불완전한 사랑이었지만 그 어떤 사랑도 대신할 수 없는 ‘첫사랑’이 가진 향으로 가득했던 소중했던 우리의 어린 여름날. 두 사람은 쉼 없이 바라보고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후회보단 고마움으로 가득한 첫사랑과 오랜만에 시선을 맞추며 지나간 우리의 사랑을 정리한다. 항상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조금씩 어긋나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이젠 상대가 아닌 온전히 ‘나의 앞에 펼쳐진 길’로 향하는 순간이다.
소녀는 어느덧 입고 싶었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되었고 소년은 소녀의 손을 담백하게 맞잡고 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의 무게와 죄책감만으론 지킬 수 없었던 사랑을 마무리 짓고, 서로를 등지고 걸어나가는 두 사람 뒷모습이 무겁기보단 홀가분해 보인다. 미련 없을 만큼 열심히 사랑했기에 이별의 순간마저 빛났던, 영원히 기억될 단 하나의 첫사랑이란 이야기에 마침표가 찍힌다. 더 이상 더해질 수도 지워질 수도 없는 찬란한 첫사랑은 이렇게 완성된다.
“내가 없어도 기억하길. 이 순간은”
두 사람은 결국 완전한 이별을 맞이한다. 당장은 그가 아련하게 떠오를지 몰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그를 잊어갈지도 모른다. 함께한 시간인 15년 정도가 더 지나고 나면 그의 얼굴, 목소리와 특징들을 잊고 그저 ‘첫사랑’이라는 존재로만 기억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첫사랑에 빠진 그때의 나,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첫사랑의 존재와 그에게 빠져있던 행복한 순간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완벽하든 완벽하지 않았든 ‘첫사랑’이란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단어니까.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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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퓨리오사가 지켜낸 희망의 씨앗
누구나 자신만의 희망이 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 줄 그 희망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몇 번이나 찾아오는 절망적인 상황은 삶을 더 이어나갈 힘을 빼놓는다. 더 나아갈 힘이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감추어두었던 희망은 꺼내어들 수 있는 마지막 무기다. 그 희망을 생각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조금씩 되찾아간다. 만약 희망조차 없다면 그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먹고 자는 문제만 간단히 해결할 뿐, 나쁜 상황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2015년에 개봉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희망을 무기로 꺼내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퓨리오사(샤를리스 테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생명의 땅으로 가기 위해 임모탄(휴 키스번)에게 갇혀있던 여성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퓨리오사는 모든 여성들의 희망이었고, 그 희망의 여정에 맥스(톰 하디)가 우연하게 끼어들게 되면서 다각도로 전개되는 추격전이 펼쳐졌었다.
이번에 개봉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편에서 희망의 전사였던 퓨리오사의 성장 서사를 다룬다. 사실 성장 서사라기보다는 그녀가 겪었던 모든 절망들을 보여주면서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과정을 보여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에게 행복한 순간은 어린 시절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짧은 행복의 기억 때문에 그녀가 수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영화는 그녀의 어떤 감정들을 전달하면서, 그가 겪었던 수만은 절망들을 보여주고 있을까.
[첫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절망
영화의 대부분은 절망으로 가득 차있다.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지구는 끝없는 사막으로 바뀌었고, 그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누군가의 물과 식량을 탈취한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 이 시기에 아직 푸르름을 간직한 공간이 있었다. 바로 퓨리오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그런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외부인을 강력하게 경계하지만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퓨리오사가 외부 침입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납치되면서 그녀의 절망이 시작되었다. 영화 초반 퓨리오사의 엄마가 납치된 퓨리오사의 뒤를 따라가는 길고 긴 추격장면은 절망을 맞이하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다. 여기엔 두 가지 절망이 섞여 있다. 유일하게 존재하던 푸른 지상 낙원이 외부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과 그곳 출신 아이인 퓨리오사가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끝까지 퓨리오사를 찾기 위해 추적하지만 결국 그 집단의 우두머리인 디멘투스(크리스 햄스워스)에게 붙잡히고 만다. 퓨리오사는 바로 앞에서 엄마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퓨리오사는 행복의 상징인 낙원에서 멀어졌고, 점점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녀의 고통은 커진다. 초반의 긴 추격장면은 긴 안전끈이 늘어나가 끊어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가 죽임을 당한 후 십여 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퓨리오사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던 잭(톰 버크)을 눈앞에서 잃게 된다. 그 역시 디멘투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퓨리오사에게 가장 큰 절망을 선사한 디멘투스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한 존재를 하찮게 보고 그저 자신의 재미를 위해 제거해 버렸을 뿐이다. 그렇게 퓨리오사의 절망은 더욱 커지고, 그 절망을 준 존재를 향한 복수심은 더욱 커져만 간다. 영화 내내 디멘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자동차들로 퓨리오사와 일행을 누르고 파괴한다. 영화는 거대한 디멘투스의 차량이 퓨리오사의 자동차를 짓밟는 모습을 담으며 퓨리오사의 절망을 처절한 액션 장면에 담고 있다.
[두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분노와 복수
절망은 당연하게 분노의 감정으로 바뀐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이 지배하고 있는 시타델에 숨어 살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퓨리오사의 분노가 조금씩 쌓여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은 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 것이어서 단번에 폭발적으로 쌓인 것은 아니다. 퓨리오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고,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복수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도 극단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고 시타델의 시스템 속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볼 수 있는 위치를 노렸다. 결국 수송 트럭으로 탈출을 감행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잭은 <매드맥스> 시리즈의 모든 남자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인물이다. 그는 퓨리오사 내면에 숨어있는 분노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무심하게 알려주는 인물이다.
영화 중반부에 잭과 퓨리오사가 무기 농장에서 디멘투스 일행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다. 무기 농장의 거대한 탑이 무너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 그 상황을 겨우 벗어나지만, 그 액션 장면처럼 그 두 사람은 붕괴되고 있었다.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퓨리오사는 결국 마음속에 복수만이 가득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세 번째 감정] 모두의 희망이 된 퓨리오사의 희망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액션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비슷한 추격장면이다. 이 추격을 하기 위해 퓨리오사는 바퀴가 하나 없는 자동차를 타고 가게 된다. 마치 팔 하나가 없는 퓨리오사의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 그렇게 추격을 시작한 퓨리오사는 영화의 초반 자신의 엄마가 끝까지 자신을 추적해 왔던 것처럼 끝까지 디멘투스를 추격해 낸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 그리고 유일한 믿음을 주었던 잭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이런 복수의 전체 과정에서 퓨리오사는 희망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준 복숭아나무 씨앗 하나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입안에 넣어 보호하는 그 작은 씨앗은 그녀가 지켜야 할 최후의 희망이다. 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이야기 직후에 벌어지는 내용을 다루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까지 이어서 보고 나면 퓨리오사가 지켜냈던 그 희망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희망이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그 희망을 지켜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희망의 동력을 나눠주었다.
영화 속 빌런인 디멘투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디멘투스는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또 다른 빌런인 임모탄은 정상적인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따라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독재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디멘투스에겐 그런 희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며 삶을 이어온 인물이다. 그가 잭을 죽이는 장면에서 혼잣말로 재미없다고 웅얼거리는 장면에서 그의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자신의 희망으로 무작위성, 혼란, 무계획의 대표적인 인물인 디멘투스에게 일종의 형벌을 내린 셈이다.
퓨리오사의 서사는 이번 영화로 완성되었다. 앞으로 <매드맥스> 시리즈가 더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2015년부터 시작된 <매드맥스 사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궁금한 인물이었던 퓨리오사에겐 숨겨진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도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담겨있고, 한 액션 시퀀스가 꽤 길게 이어진다. 전작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프리퀄 영화다. 전작이 액션으로 서사를 완성했다면, 이번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는 액션과 음악 그리고 퓨리오사의 성장이야기로 길게 서사를 이어 완성했다. 전편이 직렬로 이어진 영화라면, 이번 영화는 병렬로 펼쳐 다각도로 퓨리오사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한다. 퓨리오사의 희망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끝까지 시선을 잡아두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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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SYNOPSIS.
“행복을 찾아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계나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좇아 떠나기로 했다.
POINT.
✔ 통찰력 있는 작가 장강명의 동명 소설 원작이자,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 <한여름의 판타지아>,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등 결이 뚜렷한 감성을 가진 장건재 감독 작품
✔ 믿고 보는 배우 고아성을 비롯해, 하나하나 빛나는 배우들이 현실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영화
✔ 한국 사회에서 입시와 취업 준비를 차곡차곡 거쳐 직장인이 된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각자의 마음을 돌아보기 좋은 작품, 누군가와 같이 보고 나와서 함께 대화하면서 더욱 풍성해질 영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남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 정말이지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
출퇴근 시간 9호선에 오를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9호선을 타면 좀더 빨라도 다른 노선을 이용하던 시절을 지나, 이사 갈 동네를 고를 때 9호선 라인을 피해 이사를 했음에도, 어쩌다 출퇴근 시간에 9호선을 이용해야 하는 날은 마음의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내가 사방이 탁 트이고 초록빛인 시골에서 자라서 더 그런 건가? 남들은 정말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살아지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누구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힘들기야 하지만, 그걸 그냥 일시적인 몸의 힘듦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과, 영혼 어딘가가 덜그럭거리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나뉜다는 걸. 그리고 이런 기준선이 9호선 말고도 너무 많다. 계나가 코트 안에 꼬박꼬박 받쳐 입는 경량 패딩이 한국에서 잘 팔리는 이유이자 원작에서 "농담이 아니라 매일 동상의 위기를 겪었다"고 언급되는 이 극단적 날씨, 과장님이 마음대로 골라버린 동태찌개가 자연스럽게 4인분 주문되어도 따라야만 하는 것, 매뉴얼에 따라 업체를 선정할 것이냐 작년 업체를 무조건 고르라는 상사의 말을 들어야만 하나 싶은 순간...
이 모든 기준선에서 우리는 나뉜다. 누군가에게는 그럭저럭 눈 딱 감고 넘길 만한 것이, 누군가에겐 도저히 넘길 수 없는 것이 된다. 후자의 사람들은 한번쯤 눈을 돌린다. 트랙에서 벗어난 삶을 그려본다. 결국 수많은 기준선들은 하나로 귀결된다. 제때 입시를 치르고 제때 직장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제때 결혼을 하는 삶, 거기서 어긋나면 나이에 따라 결이 다른 말을 듣게 되는 삶, 그 정해진 트랙 밖의 삶을 상상하고 실현에 옮긴 적이 있는지 아닌지.
<한국이 싫어서>는 얼핏 한국에서의 삶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계나(고아성 분)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겪는 실낱 같은 기준선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그는 떠난다. 뉴질랜드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사실 계나가 한국을 떠나게 만든 이유들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그럼에도 계나와 같은 선택은 한국에서 크게 지지받지 못한다. 계나 어머니의 말마따나 그만하면 책임감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김우겸 분) 또한, 한국에서 정해진 트랙을 차곡차곡 쌓아 왔고 앞으로도 쌓아갈 시간의 안정감을 이야기하며 계나를 말리려 한다. 계나는 자신을 무슨 외국 병 걸린 취급하냐며, 자신은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명과 같은 사람의 시각에서 계나의 선택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계나가 내린 선택의 시간을, 몇 개 장면만으로도 손쉽게 관객에게 다가오게 만든다. 하필 추운 날씨, 겨울이라 해도 뜨기 전부터 달려야만 하는 출근길 장면 하나만 보아도. 길지 않은 사무실 장면, 부모님과 나누는 대화의 몇몇 장면만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물 위의 오리인지 백조인지처럼 발을 버둥거려야 하는 삶은 누군가에게는 뿌듯한 노력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맞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원작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계나의 선택은 더욱 더 드세고 유난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을 기억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실제로 그 시절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친구들은 참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낙원을 꿈 꾸며 도망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튼 지금 있는 곳을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일단 벗어나 보겠다고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도망이다. 배가 불러서 도망치는 사람은 없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그게 뭐요. 새로운 시작점은 있을 수 있다. 영화는 그 지점을 콕 짚지 않음으로써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누구도 쉽게만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영화의 빼어난 점 중 하나는 인물들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계나뿐 아니라 다소 수상쩍고 가까이 해도 될지 의심스러운 몰골로 등장하는 재인(주종혁 분), 뉴질랜드 정착 지원으로 먹고 사는 태은(김지영 분)과 상우(박성일 분) 부부, 계나와 가치관의 차이가 분명한 지명이나 엄마(오민애 분), 성실하게 사는 계나와 다소 대비되는 삶으로 영화에 들어오는 미나(김뜻돌 분) 등... 어느 인물을 보아도 다정하고 섬세한 시선이 얹혀 있다. 위치의 차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만으로 남을 빌런 취급하기 너무 쉬운 시대의 현실에서, 이런 시선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다.
엄마가 계나에게 원하는 행복과 계나가 생각한 행복은 다르고, 지명이 계나와 그리고 싶었던 삶과 계나가 추구하는 삶은 분명 다르지만, 엄마나 지명의 방식을 영화는 비난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성실한 직장인 계나와 집에서 노는 미나 느낌으로 보여지지 않게, 미나와 계나가 함께하는 시간이나 대화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이 미나를 알아가게 한다. 혹시나 유려한 말 솜씨로 계나를 등쳐먹을까봐 불안한 눈으로 지켜본 태은과 상우 부부는 그냥 계나와 좋은 파트너였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계나가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각자의 고민이 있다는 것을, 교차 편집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서 펼쳐 보여준다.
하긴 그렇다. 누구도 쉽게 사는 사람은 없고, 각자 몫의 고민이 있지. 산다는 건 나와 다른, 그렇다고 해서 꼭 나쁜 것은 아닌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알아가고 어우러지고 그렇게 만나고 또 헤어지는 것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이 더없이 자연스러워 마음에 들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고아성이 연기하는 계나의 모습은 점차로 변해간다. 긴 머리를 정갈하게 내려 묶고 적당한 오피스룩에 코트 차림으로 추워 보였던 한국에서와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화장이나 태닝, 입은 옷으로 계나의 적응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계나의 삶은 점차로 달라져 가고, 교차 편집 속에서도 계나의 시간을 가늠해볼 수 있어, 마치 계나의 여정을 함께하는 기분마저 든다.
그 순간의 온도가 늘 따뜻하지만은 않다. 부당한 일에 맞서 주는 친구도 생기고 함께 달려간 바다에서 모래에 꼼질꼼질 발가락을 묻는 순간은 분명 따끈따끈하다. 뉴질랜드에 막 도착한 계나가 야자나무를 바라볼 때, 낯선 나무를 낯선 바람이 스치는 낯선 소리가 날 때는 조금 스산하다. 원하지 않는 일들이 찾아오거나 가족과 영상 통화가 갑자기 끊긴 후 뺨에 흐르는 눈물은 분명 차가운 쪽일 것이다. 더 차갑고 안타까운 눈물 또한 이 영화에는 등장한다.
그러나 계나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 지금 선 곳의 지축이 뒤흔들려도 또 나아갈 곳을 찾아갈 수 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렇게 흔들려도 자신의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를 알고 또 일어날 힘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끝나고 나서 다시 시작되는 영화였다. 보고 나오자마자 친구에게 물었다. 계나가 처한 상황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면서, 떠날 것인지 말 것인지. 그러면서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도 꽤나 트랙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데, 이제 이렇게 짚어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다는 걸. 모든 선택이 그렇듯 득과 실이 있지만, 지금 삶에서 주어지는 선택들이 좋아서 트랙 속의 안온한 행복이 크게 아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계나와 꽤나 닮은 인생들 같았다. 우리는 이제 트랙에서 이렇게나 멀어졌는데, 계나는 지금쯤 어디쯤에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더 이상 춥지 않은 곳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들이키는 기쁨만큼은 분명히 계나 곁에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토록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영화는, 영화로만 볼 수가 없다. <한국이 싫어서>를 본 후에 옆 사람과 꼭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들을 되짚어보기 대국민 운동이라도 벌이고 싶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각자의 행복을 조금씩 더 찾아가길, 너무 춥지 않길 바라게 된다. 따뜻한 영화였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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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하지만 기괴한, 기괴하지만 평범한
경고: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 속에서 누구를 괴인이라 생각해야 할까. 주인공 기홍(박기홍)은 감정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인물이긴 하다. 그러나 목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돈이 입금이 안 되면 화가 나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고맙다 이야기하면 설레기도 하고. 기홍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말, 행동 하나하나가 타인의 일상을 어떻게 침범해가는가. 일상과 비일상이 얽힌 기묘함을 괴인은 훌륭하게 잡아낸다. 독특하지만 밸런스가 미쳤다.
처음 영화는 기홍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런 와중에 자기가 세들어 사는 집 주인 정환(안주민)과 친해진다. 정환이 먼저 다가선 게 살짝 이상하긴 하지만. 그런데 어느 날 기홍의 차가 누군가로 인해 찌그러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정환이 자기가 같이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 현장에 같이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이 사고는 주인공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침범했는지 더 명확히 드러낸 장치에 불과했단 것을.
괴인의 동력은 처음부터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인물들 간의 일상적인, 말을 통해 영화를 훌륭하게 이끌어간다. 자극적인 장면, 말도 전혀 동원하지 않고 긴장감을 만들어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놀라운 점은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들이 대부분 전문 배우가 아니었던 점이다. 주인공부터 감독의 친구 목수고, 정환 역할을 맡았던 안주민은 피자 굽는 셰프다. 그런데 연기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일반인을 쓰니 괴인 속 이야기가 더욱 일상처럼 느껴졌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괴인 속 세계에선 누가 괴인일까. 내 생각에는 모든 사람이 괴인이라고 생각한다. 지독하게 일상적인 말, 행동이 언제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일상까지 뒤흔드는 사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 등장인물 각자가 지니고 있는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잔잔함을 유지하는 이유는 영화 속 기괴한 모습이 영화 바깥의 인간관계에서도 맞닥뜨릴 일상적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은 뒤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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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탕한 여성'을 단죄하라
누벨바그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쥴 앤 짐〉(1961)이 재개봉했다. 개봉 당시 파격적인 기법과 아름다운 화면 등으로 화제가 된 영화라 한다. 그러나 2023년 현재, 이 영화의 가장 의미심장한 요소는 줄거리와 여성 캐릭터 재현이다. 영화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볼거리를 선보이는 요즘, 기법이나 화면이야 상대적으로 ‘낡은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줄거리와 여성 캐릭터 재현은 그렇지 않다. 전자가 영화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 한정된 이야깃거리라면, 후자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1912년 파리다. 독일에서 온 쥴과 프랑스인 짐은 문화·문화적 취향이 맞아 금세 친구가 된다. 그러던 중 절친한 두 사람 사이에 까트린이라는 여성이 나타난다. 까트린은 매력적이면서도 당돌한 인물이다. 언젠가 쥴, 짐과 함께 연극을 본 후에는 여성 주인공이 숫처녀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쥴은 지속적으로 정숙한 여인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와 짐이 까트린을 만나기 전에 무수히 많은 여성을 서로 소개해주고 종종 성매매를 했음에도 말이다. 쥴에게 ‘정숙함’은 젠더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가치다.
논쟁을 이어가던 까트린이 돌발 행동을 한다. 갑자기 강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자 쥴은 크게 당황하고 까트린은 그제야 그런 쥴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여기까지는 까트린의 당돌함이 나쁘게만 묘사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논쟁을 마주하자, 자기 의견을 독특한 방식으로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매혹적’이다.
전쟁으로 인한 잠깐의 공백을 거친 후, 쥴은 까트린과 결혼한다. 역시 까트린을 욕망했던 짐은 낙심하지만 우정의 이름으로 쥴과 까트린을 축복하고 그들의 집에 방문한다. 그러나 짐은 행복하지 못한 쥴과 까트린을 목격한다. 쥴은 짐에게 까트린이 결혼하면 정숙해질 거라 믿었으나 그렇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까트린이 자신과의 관계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애인을 두고 있다는 점도 고통스레 털어놓는다. 까트린의 당돌함이 본격적으로 악마화되는 건 여기서부터다. 여성에게만 정조 관념을 강요하는 남자에게 도발적으로 반격했던 까트린이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쉽사리 변덕에 휩싸이는 존재, 즉 늘 욕망의 결핍에 시달리는 여자로 재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까트린을 놓칠 수 없는 쥴은 짐이 여전히 까트린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래서 다소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까트린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운 쥴이 짐에게 까트린과의 결혼을 제안하는 것이다. 까트린의 자유분방함을 비난하면서도 그녀를 향한 욕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쥴의 고육지책이다. 이 과정에서 까트린에게는 점차 남자를 홀려 망가뜨리는 ‘팜므파탈’, ‘요부’라는 이미지가 더해진다.
까트린은 쥴, 짐과 함께 지내면서 잠시나마 ‘두통이 올 정도의 완벽한 조화’를 느낀다. 까트린의 욕망은 남자 둘이 있어야 겨우 채워질 정도로 거대하다는 식이다. 여기에 그녀에게 구애하는 또 다른 마을 남성 알베르까지 더해진다. 문제는 까트린이 크게 변덕을 부려 끝내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통제할 수 없는 여성의 욕망은 얼마나 위험한가’를 질문한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진다.
결국 짐은 오락가락하며 여러 남자를 탐닉하는 까트린을 떠난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그를 짝사랑했던 또 다른 여자와 서둘러 결혼한다. 짐이 떠나자 거대한 욕망으로 비틀거리던 까트린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짐에게 총을 들이대며 협박해도 짐이 돌아오지 않자 그를 자동차에 태우고 동반자살을 해버리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여성의 운전은 자율성(혹은 통제되지 않음)으로 해석되어왔다. 때문에 까트린이 거칠게 운전한다는 건, 그녀 욕망이 끝내 무언가를 파괴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동반자살은 필연이었다.
이 장면은 결혼 전의 까트린이 쥴과 논쟁하며 강물에 뛰어든 장면과 겹친다. 그리고 두 장면 사이에는 주체적 욕망의 소유자였던 여성이 자기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과정이 있다. 쥴이 둘의 죽음을 회고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그는 까트린과 짐의 사랑이 자신과 짐 사이의 우정만 못했다고 자위하며 마지막까지 까트린을 우정을 파괴한 여자라고 비난한다. 자신이 그런 까트린을 그토록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은 것처럼 말이다.
〈쥴 앤 짐〉은 자기 욕망을 소유한 여성을 단죄함으로써 두 남성의 우정을 상찬하는 이야기 구조를 취한다. 그러나 그토록 ‘위대한’ 쥴과 짐의 우정은 여자 없이는 불가능한 공허한 것이었다. 쥴과 짐은 예술과 사회에 대한 의견을 공유한다는 데서 우정의 근거를 찾지만 이는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들의 우정은 여자를 탐하며 파리를 돌아다니며 깊어졌을 뿐이다. 작가인 짐은 쥴과의 우정을 담은 자전적 소설에서 둘의 관계에 ‘동성애’적 요소도 있다고 말하는데, 이 둘의 관계는 동성애라기보다는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남성 연대를 도모하는 호모소셜에 가깝다. 이를 ‘퀴어적 관계’로 재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적 기만이다.
영화 속 모든 여성 캐릭터가 부정적으로만 그려진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쥴과 짐에게 여성은 하룻밤 상대이거나,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상대, 지독한 수다쟁이, 언제까지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지고지순한 사람, ‘아름다운 물건’일 뿐이다. 그들이 까트린에게 매혹된 건 그녀가 단일한 이미지로 뭉뚱그려져 타자화된 여성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가 정해놓은 안전한 영역을 벗어난 여자(팜므 파탈, 요부)는 ‘위험’하다. 그래서 쥴은 애타게 까트린을 욕망했음에도 역시 남자들 간의 우정만 한 게 없다고 뒤늦게 주절거린다. 놀라운 정신승리다.
요컨대, 〈쥴 앤 짐〉은 여성을 타자화한 것을 예술적 성취로 포장해온 오랜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영화다. 〈쥴 앤 짐〉의 관람을 강력히 권한다. 이 작품이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명작’이어서가 아니다. 〈쥴 앤 짐〉은 남자가 예술을 빌미로 여성의 삶과 욕망을 제멋대로 재단해온 역사를 확인하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다. 갖지 못할 바엔 죽이겠다는 까트린의 태도를 영화가 그려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욕망하여 저항하는 여자’의 계보에 까트린을 추가하여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이 영화를 재독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쥴 앤 짐〉이 ‘명작’이라면, 오직 시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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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2차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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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트웬티 해커>
서울 도심의 거리, 평화롭게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전자지갑에서 출금 문자가 도착한다. 그리고 곧이어 도심의 전광판은 해커의 경고성 메시지로 도배된다.
‘You Know what? What can you do? ‘
‘It’s Better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