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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두codu2023-09-18 20:44:12

모호한 희망에서 초록빛 진실로

에릭 로메르, <녹색 광선>(1986)

 

 

 

델핀(마리 리비에르)은 휴가 기간 동안 몇 차례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는 탓이다. 친구와의 휴가 계획이 무산되고 혼자 긴 여름휴가를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델핀은 막막함을 느낀다. 어디에서 누구와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다. 델핀은 그저 삶의 지겨움과 무료함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델핀의 우울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 탓 만은 아니다. 확고한 이상을 지니고 매사에 진지한 사람은 환영받기 어렵다. 채식을 하고, 가볍게 다가오는 남자들을 거부하며 종종 울적함에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골치 아프게 바라보는 시선은 델핀을 위축시킨다. 테이블 위를 오가는 수많은 대화 속에서 델핀은 고립된 섬처럼 동떨어져 있거나 위태로운 배처럼 흔들린다. 델핀은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증명하거나 태도를 지적받는 상황에 놓인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 이 당연한 명제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라는 관용이 아닌 ‘너는 우리와 다르다’라는 분리의 의미로 쓰인다. 왜 남자를 가볍게 만나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에 대한 논쟁은 모두 분절적인 ‘다르다’로 끝난다. 델핀은 갈 곳이 없다고 아무 곳이나 가고 싶지 않고, 만날 사람이 없다고 아무나 만나고 싶지 않다. ‘귀찮은 녀석’이 아닌, 낭만적인 남자와의 만남을 원한다. 타협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완고한 델핀은 어찌해야 할지 모를 긴 휴가기간 동안 내면의 우울을 마주하게 된다.

 

낯선 타인과 진심으로 교감할 수 있을까? 문제는 마음에 달렸지만 조심스러운 델핀에게는 쉽지 않다. 델핀은 누구에게도 쉽게 답하지 않는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만 그저 호기심 많은 아이의 질문도 재차 의심한다. 사람들을 향한 무관심한 태도는 이런 예민함에서 비롯된다. 외부의 자극과 내면의 감정에 예민한 델핀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틈이 없다. 델핀은 온몸으로 ‘나를 내버려 둬’라고 외치는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 누군가가 다가와 주기를 바란다. ‘녹색 광선’은 델핀의 낭만이다. 관계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타인과 진심으로 교감할 수 없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이다. 우리가 아주 잠깐이라도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면 복잡한 관계 속 외로움이 한층 덜어질 것이다.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미신을 믿어보는 것은 델핀 자신이 타인에게 진실로 대하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만난 친구 엘레나처럼 관심 없고 싫은데도 좋은 척, 관심 있는 척 가벼운 관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델핀은 자신이라는 모습 외에 꾸며낼 가면이 없기 때문에 “보여줄 모습이 없다”. 델핀은 자신의 믿음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스스로를 속여 가며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 델핀은 상대방 역시 그러하길 바라나, 타인은 나와 다르다.

 

녹색 광선은 쉽게 볼 수 없으며 찰나의 순간 빛났다가 사라진다. 델핀은 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와 녹색 광선을 기다린다. 인생에 무언가 찾아오길 바라지만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다리던 델핀은 이제 선명한 녹색 빛을 기다린다. 낭만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걸까? 그러나 델핀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자신만의 미신을 따라 특별한 표시들을 찾아왔다. 직감이 이끄는 대로 뭔가를 예고하는 듯한 녹색 카드를 줍고 온갖 녹색의 단서들을 마음에 담았다. 델핀의 마음을 이끄는 것은 이 작은 미신적 단서들이다. 몇 개의 카드와 전단지, 상점의 간판이다. 에릭 로메르는 이 미신적 단서들을 갑작스러운 클로즈업과 의뭉스러운 음악과 함께 비춘다. 한 걸음 떨어져 델핀을 관찰하던 카메라가 그의 내면을 포착하는 순간이다. 미신적인 내면의 시점은 델핀에게 이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델핀에게 이입하지 않고 믿지 않을수록 희망의 모호함은 두드러진다. 델핀의 내면에서 모호한 희망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별 것 아닌 카드도 녹색이라는 이유로 의미 있는 물건이 된다. 델핀은 누군가가 자신을 선택하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신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준으로 선택을 내린다. “녹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미신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정하고 해석한다. ‘녹색 광선’이라는 희망은 현실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허구처럼 보인다. 아무도 모르고 믿지 않을지라도 델핀은 내면의 나침반을 따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희망은 내면의 상태다. 녹색광선이 진짜이든 아니든, 그것이 정말 진심을 알게 해주는 힘을 지녔든 아니든 그것을 보는 순간 타인의 진심을 헤아릴 틈이 생긴다. “오!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앞서 등장한 랭보의 시 한 구절은 논리적이지 않은 내면의 희망을 확신에 찬 어조로 노래한다. 영화적 거짓이든, 미신이든 상관없이 델핀은 초록빛의 진심을 보았다. 우리는 델핀의 진심을 보았는가?

작성자 . 코두codu

출처 . https://brunch.co.kr/@codu/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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