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9-21 11:53:02
9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지금 가장 핫한 배우, 3세대 대표 여배우들이기도 한 고윤정 신시아 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스핀오프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의 주연에 낙점되었다고 하는데요. 9월3주차 OTT/ 영화 가장 핫한 소식들만 모아왔습니다. 지금 같이 만나보시죠!
<거미집> 김기영 감독 인권침해 영화 상영금지 가처분소송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거미집>이 김기영 감독 유족과 소송전을 벌였는데요. 김기영 감독 측은 ‘김 감독’이 김기영 감독을 부정적으로 묘사해 고인의 인격권, 초상권을 침해했다며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지만만 제작사 측은 김기영 감독을 모티브로 한 게 아니며 전기 영화도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개봉전 김기영 감독 유족과 극적인 합의를 이뤄 정상개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신카이 마코토 <스즈메의 문단속> 특별 전시회 개최
국내 550만명을 넘긴 신카이 마코토의 <스즈메의 문단속> 특별 전시회가 다음달 신세계 백화점에서 열립니다. 전국 신세계 백화점에서 10월1일부터12월 17일까지 선보일 예정이며 이번 전시회에서는 원작 스토리를 다양한 시점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감독의 스케치, 콘티, 캐릭터 아트 등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슬의생> 스핀오프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
<환혼> <무빙>의 고윤정, <마녀2>의 신시아가 <슬기로운 의사생활> 스핀오프에 주연으로 낙점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에는 율제 본원에서 종로 율제병원으로 무대를 옮겨 산부인과 전공의들의 리얼한 병원생활을 그리며 초보 의사들의 병원 생활에 대해 사회생활을 겪는 이들의 공감을 자아낼것으로 보입니다.
향년 81세 변희봉 배우 별세
배우 변희봉배우가 9월18일 별세했습니다. 유족에 따르면 과거 완치 판정을 받았던 췌장암이 재발해 투병하던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며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에서 호흡하며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입니다.
이선균X정유미 주연 <잠>100만 돌파
영화 <잠>이 개봉 2주차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100만 관객수를 넘겼습니다. 올해 나온 한국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범죄도시3>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 <잠> 총 4편입니다.<잠>은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며 각본, 연출을 같이 맡았고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최초공개되었습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해 보는 'LATEST CINE NEWS’였습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댓글과 좋아요 콕콕!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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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파동이었던 것들
성인이 되고도 한참 시간이 흘렀건만, 과학과 수학 과목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고등학생 시절의 내가 가끔 고개를 들곤 한다. 미련 못 버린 연인의 흔적처럼 괜히 슬금슬금 넘겨보는 건 물리학이나 수학 대중서. 이제부터라도 중등교육 수준의 과학을 마스터하겠다며 중1 과학 문제집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안되던 게 지금이라고 쉬이 될 리 없다. 중1 과학 문제집은 2장 정도 푼 채로 햇빛에 바래지고 있고, 친절한 대중서조차 다 이해하지 못하고 흐린 눈으로 보면서 시집 같다고 생각했다.
배운 게 있긴 하다. 특히 물질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 빛이 파동인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이 놀랐다. 파동은 과학 책에 전파 모양으로 그려진,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고만 생각했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입자는 당연히 손에 쥘 수 있는, 물성을 가진 무언가라고 생각했는데 빛도 입자라니. 막연히 입자는 물건들처럼 그곳에 놓여있고, 파동은 멀리서 너울너울 전해져 온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틀린 감각은 아니다. 파동은 무언가를 매개체 삼아 다가온다. 물을 타고 파도가 넘실넘실 다가오고, 공기 속에서 소리는 퍼져 나간다. 그리고 오래 전의 별빛은 오늘의 밤하늘을 채우고 내 눈 안에 고인다.
시간과 기억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의 어떤 순간도, 그 사건 속 사람들도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 속에 위치하는 건 아닐까. 꼭꼭 닫혀 교과서에 정리된 과거의 사건 같은 건 실은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단단한 입자 같지만 실은 파동이어서, 별빛처럼 파도처럼 어디선가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전태일 열사가 노동권을 부르짖으며 분신하고도 50여 년이 흘렀다. 그의 죽음은 이제 교과서에도 실린 역사가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평화시장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생겼고, 못다 한 일을 이뤄달라는 아들의 유언을 들은 어머니는 모든 노동자의 '이소선 어머니'가 되었다. 한참 전의 일들이지만, 그 시기를 톺아보는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도 파동처럼 이제 우리에게로 온다. 1977년 9월 9일에 출발한 파동이,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와 2021년 DMZ다큐영화제 등을 거쳐 2022년 1월 개봉하기까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푸른 하늘 아래 야외에서 해사하게 웃으며 미싱을 돌리는 중년의 여성들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미싱을 돌리기 시작한 때는 '여자들'이라기보다 '아이들'에 더 가까운 나이였다. 12세에서 16세가량의 소녀들. 더러는 가난 때문에, 더러는 여자아이에게 공부를 시킬 필요가 없다는 구시대의 편견 때문에, 평화시장에서 미싱을 돌리기 시작했다.
영화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찾아온 사건을, 그리고 그 안에서 이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천천히 함께 돌아본다. 객관적인 정보를 쏟아내듯 제시하기보다, 사진과 인터뷰를 풍성하게 활용해 그날의 그림을 그린다. 내겐 1977년 9월 9일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전혀 배경 지식이 없었지만, 영화를 따라가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선명한 그림이 남았다.
피로가 극도로 쌓여도 쉴 수 없던 시절. 졸다가 때로는 손을 드르륵 박기도 하며, 잠 깨는 약을 먹어가며, 부단히 일해야만 했던 시절. 노동자의 권리나 휴식이란 것이 보장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전태일 열사는 시계를 놀랍도록 앞당겼지만 모든 변화가 단숨에 오지는 않는다. 교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성인 요금을 내며 버스를 타던 시절, 한자를 알아야만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씩씩하게 각자의 현실에 성실하였다. 학교 대신 공장으로 향했지만, 그간 배운 지식과 상식을 토대로 삼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배움의 마중물이 되어준 곳은 노동교실이었다. 한자를 가르쳐주고 은행 계좌 만들기와 입출금 해보기를 숙제로 내주고, 서럽고 힘든 상황에서 외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 준 곳. 공동체가 되어준 곳. 이곳에서 그들은 배움과 배움을 연결시켜 새로운 지혜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럽게 뭉치고 배우고 가르치고 어우러지면서, 어느새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의문을 던지고 사유하고 있었다.
사유, 그것은 마음속에 물음표가 물고기처럼 생생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능력을 이들은 갖고 있었다. 그건 70년대엔 너무 위험한 능력이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70년대 이들의 삶에 비극처럼 덮쳐온 삶의 조건들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도전 앞에 이들이 어떻게 응전했는지에 집중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의 걸음에 초점을 맞춘다. 노동교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 것, 노동교실 철거 예정일 하루 전날에 불안한 마음으로 모여든 날이 하필 9월 9일이었던 것, 하필 그날이 북한의 창립기념일이었던 것과 이소선 '어머니'라는 호칭마저 김일성 '아버지'와 대조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지금은 누구보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이들이 한때는 유리로 배를 긋거나 떨어질 각오까지 했던 것,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
그 자리에 있었던, 혹은 없었던 이들의 기억은 말에서 말로 재구성되어 파동으로 전해진다. 여전히 말만 꺼내도 눈물 나는 기억, 생각만 해도 억울한 기억도 있다. 똑같이 경찰서에 잡혀 왔어도 기본적인 권리조차 챙겨주지 않아 속옷 한 벌 갈아입지 못하고 가족도 모른 채로 한 달을 구류되어 있는 채로, 사식과 면회가 허용되었던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기억도, 따스하고 즐거웠던 기억도 있다.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과 희망, 공동체로 어우러지며 느꼈던 행복도 있다.
시대가 던진 크고 작은 부당함에 스러지지 않고, 이들은 그 모든 기억 너머 오늘에 이르렀다. 열심히 살아 오늘에 다다라서는 과거의 자신에게, 젊고 최선을 다했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냈던 그 시절에 인사를 건넨다. 여전히 단단한 눈빛으로, 말간 미소로,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상념과 함께 눈가에 어린 눈물로. 그 모습을 보다 보면 이들이 왜 노동투쟁의 역사에 함께 남아야 하는지, 이 다큐멘터리 작업이 왜 시작되어야 했는지 원점에서부터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 시절 감옥에서도 조그만 창문 너머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보았던 이들은, 지금도 환하게 웃고 차분히 말하고 서로를 본다. 그 모습을 잘 담아내어 재구성하고자 한 제작진의 노력이 영화 곳곳에서 엿보이는데, 그 장치들은 하나하나 파도가 되어, 별빛이 되어, 파동이 되어 멀리서부터 찾아와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함께 눈물짓게 한다.
21세기가 되면서 인류가 상실해가는 것 중에는 그 끈끈한 연대감도 있다. 연대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많다. 누군가가 겪는 부당한 대우부터, 심지어 쉼 없이 굴러가는 이 세대의 번아웃 현상까지 느슨한 연대로 풀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연대는 점점 낯설고, 마음이 있어도 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목소리 합쳐 구호를 외치고,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현장은 점점 스포트라이트 바깥의 공간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거나 없다. 노동자는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자주 잊고 산다. 그저 분주하고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이 영화 앞에서 나의 분주한 마음은 잠시 멈춰 선다. 많은 시간 바쁨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노동자로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흘리기 바빠 사유라고는 하지 않는 피로한 인간으로서, 이들의 단단한 눈빛과 미소 앞에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마음에는 세상을 보는 물음표가 물고기처럼 돌아다니고 있는가. 나는 나의 세상을 사유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가. 언젠가 지금 내 안에 있는 마음들이 파도쳐 어딘가에 가 닿을 때, 그 자리에서 조우할 이 앞에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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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34년으로 갈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쿵쿵 울리는 비트, 깜빡이는 조명과 함께 요란한 생일파티가 벌어지며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 날 잠에서 깨어 숙취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집이 아닌 집에 돌아가면 비키는 어제 입었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을 것이다. 둘 사이 대화는 없고, 다음 날과 또 그 다음 날도 이들은 계속 이 집에만 살고 음악만 듣고, 담배를 피우기만 할 것이다.
비키는 노동조차 클럽에서 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그곳은 파티장이 되어 시끌벅적하다. 하오하오와 그녀는 서로를 사랑한다면서 서로에게 관심은 없다. 그래도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같은 집에 붙어 산다. 오늘과 내일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 버리고, 밤 밖에 남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밤, 마시고 피우고 일어나면 또 밤이다. 비키는 멍해져 있다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마주하고, 점점 해가 뜰 때 일어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러나 쉽지 않다. 해가 뜨면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밤에 번 돈을 생존에 다 써야 하고, 전날 마신 것을 게워 내야 하고, 훔친 물건을 물어내야 한다. 영화의 후반에 가서야 그녀는 말한다. “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그러나 관객은 그녀가 당장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안다. 떠나는 것.
비키가 자유가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90년대의 낭만, 음악, 술과 마약도 다 흰 눈에 덮여 사라진다. 그녀는 90년대를 떠나 겨울로 갔다. 그리고 무사히 2011년에 도착했다. <밀레니엄 맘보>가 낭만으로 남아 반짝일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거기에 도착하여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서사시나 스펙터클이 아니라, 한 세대가 통과해 나온 터널처럼 보인다. 비키는 통과해 나왔지만, 돈도 음악도 뭣도 선택 못하는 하오하오는 낭만 속에 빠져 허덕이다 그 안에 영영 갇혔을지도 모른다. 혹은 몸만 2011년으로 옮겨와 회의주의에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밀레니엄 맘보>의 색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2024년의 관객이 결코 쥘 수 없는 멋진 낭만이다. 그리고 우리가 겨울로 나아가든, 24년도에 갇혀 있든 계속 달아오른 채 깜빡일 과거의 불빛이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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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집 토토로>,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
<이웃집 토토로>,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
<이웃집 토토로>의 시작은 이상하게 불안하다.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는 사츠키 가족의 트럭은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이동을 편히 받아들이는 인간의 시지각적 특성을 고스란히 배반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캐러멜을 나눠먹는 화목한 가족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하나의 부재가 제시된다. 이 트럭엔 엄마가 없다. 그들의 엄마는 결핵에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런 엄마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이들 가족이 단체로 자전거를 탈 때에도 동선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불안감 조성은 후반부 사츠키와 메이가 엄마에게 큰일이 생겼을지도 몰라 전전긍긍하는 두려움의 심리를 탁월하게 증폭시킨다.
하지만 관객을 상대로 한 형식적 불안과는 달리 작중 인물들은 이러한 불안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천진난만한 자매 사츠키와 메이는 새 집을 탐방하며 ‘마쿠로 쿠로스케’라 불리는 검댕 벌레를 목격하지만 전혀 겁먹지 않는다. 이때 그들의 아빠 쿠사카베는 “밝은 데서 갑자기 어두운 곳에 가면 마쿠로 쿠로스케가 보이는 거야.”라며 출몰 원인을 진단해주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말한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의미가 단순한 광량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쿠로 쿠로스케는 이후 창문이 활짝 열린 2층 방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이때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 함유된 의미는 단순한 광량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물질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사 온 시골집은 어두운 곳, 그전에 머물던 도시의 집은 밝은 곳으로 도식화된다. 그리고 마루코 쿠로스케는 물질적 감퇴의 징표이자 그 음울한 기운을 담은 불안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위에도 언급했듯 이러한 도식이 사츠키와 메이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썩은 나무도 웃음의 대상이 되고, 청소와 빨래도 즐거운 놀이가 되며, 시골집은 어두운 곳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의 대상처럼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메이는 마쿠로 쿠로스케를 게임하듯 잡은 다음 언니에게 자랑하듯 뛰어간다. 이후, 그녀는 마쿠로 쿠로스케가 곧 사라질 거란 말에 “재미없어!”, “난 무섭지 않아.”라고 외치며 섭섭함까지 내비친다. 그렇다면 마쿠로 쿠로스케의 출몰 동기는 아이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쿠사카베 같은 어른의 사고에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아내의 간병과 건강을 위해 도시에서 시골로 왔다는 사실을 이내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이전이 어른의 세계에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른에게는 부정적인 일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움이라는 긍정적 결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 <이웃집 토토로>는 어른과 아이의 표면적인 충돌은 전무함에도 그들의 정신과 내면의 층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충돌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어른과 아이의 충돌 세계를 그리는 여타 영화들과 달리 쿠사카베는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어른과 아이의 충돌을 대중적인 화법으로 탁월하게 그렸던 스필버그와는 정반대의 노선인 셈이다. <미지와의 조우>, <E.T>, <에이아이>와 달리 이 영화에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물리적 충돌뿐 아니라 정신적 긴장 관계의 시각적 표현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더욱이 사회나 환경과의 갈등도 전혀 없다. 그렇기에 <이웃집 토토로>의 서사는 지나칠 정도로 평평하고 평화롭다. 만일 당신이 프로듀서라면 질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 이야기가 가능한가. 어떻게 90분 남짓의 상업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수 있는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야기를 성립할 최소한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다름 아닌 ‘토토로’라는 미지의 생명체. 그 친근하면서 동시에 기이한 존재를 향해 집중되는 단일한 미스터리. 그렇다면 토토로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존재는 왜 중요하게 다뤄지는가, 질문해 봐야 할 것이다.
토토로의 정체와 존재론
이사를 온 날 밤, 사츠키 가족이 다함께 목욕을 즐길 때 목욕탕 바깥에서는 불안을 상징하던 검댕 벌레가 비상하여 녹나무의 우듬지를 향해 올라간다. 마치 <모노노케 히메>에서 숲의 정령 ‘고다마’가 어느 나무를 향해 줄지어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주인공 아시타카는 그 나무를 보며 “너희 엄마냐?”라고 묻고, 고다마는 마치 그렇다는 듯 딸깍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를 <이웃집 토토로>에 대입해 보면, 숲의 정령 토토로가 살고 있는 녹나무는 사실상 누군가의 엄마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누구의 엄마인가. 메이가 작은 크기의 토토로를 따라가다 녹나무의 구멍에 빠져 얼마간 굴러 떨어지는 장면에서, 그 긴 통로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의 자궁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 자궁에서 나온 인물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메이. 그렇다면 녹나무의 자식은 사츠키와 메이인 셈이며, 역으로 녹나무는 그들의 엄마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사는 토토로는 누구인가. 사츠키와 메이의 엄마인 녹나무를 지키고, 그 안에서 포근히 쉬는 것을 즐기는 자. 즉각 떠오르는 이름은 너무 당연히 쿠사카베다. 숲의 정령 토토로가 숲을 지키며 그곳에서 쉬는 것처럼 쿠사카베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간병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녀의 쾌유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자이다.
둘의 연결성은 위에 서술한 바 있는 목욕탕 장면에서 보다 명료하게 증명된다. 이 장면에서 쿠사카베는 거센 바람에 집이 흔들려 사츠키와 메이가 불안에 빠지자 돌연 악당 고릴라처럼 “하하하!” 웃더니 보디빌더처럼 상체를 부풀리고 이내 욕조의 물을 내리친다. 순식간에 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물방울은 사방으로 튀어 마치 비가 내리는 듯 보인다. 이는 중반부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 장면과 연계된다. 억센 비가 쏟아지자 사츠키와 메이는 우산을 놓고 간 아빠를 마중 나간다. 하지만 아빠를 실은 버스는 한동안 도착하지 않고 메이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고요히 빗소리로 가득했던 버스 정류장에 발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토토로의 등장. 사츠키는 쿠사카베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져간 여분의 우산을 토토로에게 씌어준다(토토로는 이 우산을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것인 양 가져간다). 우산을 매개로 쿠사카베와 토토로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후,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재미를 느낀 토토로는 목욕탕에서 쿠사카베가 그랬던 것처럼 큰소리를 내며 상체를 부풀려 점프를 한다. 일순 잎사귀에 맺힌 빗물이 소나기 쏟아지듯 떨어진다. 이윽고 토토로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퇴장하고, 곧이어 일반 버스를 타고 쿠사카베가 도착한다. 미야자키는 지금 명백히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
토토로와 아빠, 녹나무와 엄마라는 도식은 미야자키가 즐겨 활용하는,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 머물지만 그것을 떠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의 실체. 토토로는 아빠의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적 존재이고, 녹나무는 엄마의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적 존재이다.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일종의 돌봄 서비스다. 토토로는 어린 사츠키와 메이 옆에 보호자가 부재할 때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를 보호하려는 부모의 본성이 함축된 비인간의 모습은 이미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죽은 부모를 대신하여 그들의 딸 시타를 지키는 거대 경비 병정으로 구체화된 적 있지만, <이웃집 토토로>는 죽은 신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체에서 영혼을 분리시킨다. 아직 현실 세계에서 버젓이 살고 있는 실존 인물의 영혼을 일종의 대리자로 소환하는 것이다. 다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동일한 주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사츠키와 메이가 토토로를 볼 수 있는 순간은 위에도 잠시 언급했듯 쿠사카베가 직무나 간병 등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을 때다. 일에 몰두하다 어느새 영혼이 사라지고, 시간 개념이 없어져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훌쩍 시간을 점프해본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노동의 순간은 결국 사적인 시간의 부재를 뜻하고, 이는 아이를 보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병실에 있는 엄마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치료와 회복이라는 노동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가 애니미즘을 필요로 한 건 부모 없이 남겨진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따뜻한 가족주의의 발현을 위해서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강의 신 ‘하쿠’는 신발을 주우려다 물에 빠지게 된 어린 소녀 치히로를 구해준다.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강의 신체에 빠져버린 소녀를 강의 영혼이 구해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애니미즘적 관점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가 분노한 오무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뒤 부활하는 장면을 나우시카의 신체와 영혼의 분리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토로에게 나무 열매를 선물 받은 사츠키와 메이는 엄마에게 마당 정원에 씨앗을 심었는데 잘 자라지 않아 낙담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흐뭇하게 읽는 엄마의 얼굴이 드러난 다음 장면에서 싹이 나기 바라는 사츠키와 메이의 간절한 소망은 곧바로 실현된다. 토토로 가족이 의식을 치르고, 사츠키와 메이가 이에 동참하면 나무는 어느새 거대하게 자라난다. 이후, 토토로는 그들을 팽이에 태워 창공을 날아오른다. 이때 “우리가 바람이 된 거야.”라는 사츠키의 대사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자연을 파괴한 대가로 폐허가 될 위기에 처한 제국의 시민들과 나우시카가 바람이 불기를 간절히 바라던 반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의 동화를 황홀하게 각인시킨다. 나무초리에 앉은 사츠키와 메이는 그렇게 아빠와 엄마가 분한 영혼의 대리자들 곁에서 극진히 보살핌 받는다.
토토로는 실존하는가
꿈에서 깨어난 사츠키와 메이는 토토로와 함께 성장시킨 나무가 사라졌음을 확인한다. 혹자는 이 장면을 놓고 어쩌면 토토로를 그저 꿈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메이와 토토로의 첫 만남 시퀀스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맺음되고, 버스 정류장에서의 만남은 그녀가 잠든 이후에 이뤄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월적이고 허황된 꿈의 잔영이자 환상의 조각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는 토토로가 현실의 땅 위에 실존하는 존재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메이는 엄마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그녀의 병원을 찾아 헤맨다. 사츠키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길 잃은 메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한다. 하지만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자,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가 메이를 찾아달라며 애원한다. 이 장면에는 트릭이 없다. 꿈이거나 환상일 가능성이 배제된, 그야말로 현실의 장면이다. 그렇다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토토로는 어떻게 현실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엔 두 가지 가설이 따른다. 하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의 결실이 토토로를 소환해 낸 것이라는 가설. 다른 하나는 초월적 존재가 실존하기를 바라는 미야자키의 소망 혹은 정말 그렇다고 여기는 강력한 믿음의 결과라는 가설(“이 신기한 생명체는 이제 더 이상 일본에 살지 않습니다. 아마도.”라고 적힌 <이웃집 토토로>의 포스터 문구를 보고 미야자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신기한 생명체는 여전히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라고 바꾸라며 소리친 적 있다). 전자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어떤 특권적인 세계가 있으리라는 동심의 판타지를 품게 하고, 후자는 현실 세계에 긍정적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이상적 낙관을 상상해 보게 만든다.
그러나 전자의 가설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토토로의 존재를 믿는 자가 사츠키와 메이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쿠사카베는 토토로를 만났다고 하소연하는 메이에게 “거짓말이라고 생각 안 한단다. 숲의 주인을 만났나 보다. 운이 좋은 거야. 근데 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란다.”라며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표한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차례도 초월적 존재와 조우한 적이 없다. 사츠키, 메이와 쿠사카베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아이와 어른이라는 나이의 차이뿐이다. 그렇다면 이 가설에는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이 어린 아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이 첨언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가지 가설을 종합해보면, 미야자키는 어린 아이들만을 위한 초월적 존재가 실존하기를 바라거나, 정말 실존한다고 믿고 있다는 말이 된다.
플래시백의 부재
미야자키 하야오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간과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플래시백의 잦은 사용이다. <이웃집 토토로>는 그의 이전 작품들,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와 다르게 플래시백이 없는 최초의 영화다. 플래시백은 그의 세계에서 이후에도 <붉은 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주제 의식과 서사에 가장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가 플래시백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그의 동경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어린 시절과 그때 비롯된 모험심과 낭만. 그는 어린 시절의 한 시간이 어른의 십 년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런 연유로 그의 플래시백은 한 번도 긴 호흡으로 이어진 적이 없다. 파편적인 작은 기억. 하지만 그 작은 파편 하나가 어른의 십 년보다 더 큰 파급력을 가진다. 미야자키 세계에서 그 작은 기억의 파편은 주제의 핵심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플래시백이 <이웃집 토토로>에는 없다.
그 이유는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플래시백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선 세 작품에서 동경의 대상으로서 유럽을 배경 삼았던 것과 달리 1950년대 본인의 어린 시절, 심지어 자신이 살았던 실제 공간을 토대로 하여 <이웃집 토토로>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에게 그 자체로 동경의 대상이자 그가 평생 구현하고자 했던 유토피아의 가장 현실 가능성 높은 모델이다. 도덕적인 아이들과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영혼의 보호자들, 그리고 이타적인 이웃 주민들이 만들어 내는 협력 공동체. 더불어 이를 감싸는 포근하고 정겨운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 이 영화의 감동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구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감동의 이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웃집 토토로>의 감동은 유토피아와 같은 목가적 공동체의 일관된 도덕성에 있다. 이 세계에서는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로 기능했던,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겪는 엄마의 부재와 그로 인한 불안을 전부 도덕적인 주변 인물들이 해소시켜 준다. 위에서 언급했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세계가 있다고 진짜 믿는 것 같다. 단순한 소망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 그의 오랜 파트너이자 스튜디오 지브리의 메인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가 사츠키 같은 착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하자 미야자키가 화를 내며 한 대답 “있어, 그게 나란 말이야!”는 그런 그의 믿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인물, 배경, 동물들까지 모두 올바르고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엄마의 병원을 찾아 나선 메이가 어느 골목에서 염소를 만나는 장면이다. 엄마에게 선물할 옥수수를 염소로부터 지켜내는 메이의 결연한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지만 우리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염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염소를 언젠가 본 적 있다. 다름 아니라 미야자키의 극장 애니메이션 데뷔작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보았다. 소녀이자 공주인 후지코의 반지를 빼앗아 보물을 손에 넣으려는 탐욕스런 백작은 마침내 그녀의 반지를 압수하여 자신의 반지와 그녀의 반지를, 시계탑에 양각되어 있는 염소 조각의 두 눈에 꽂는다. 보물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백작은, 그러나 한곳으로 모이는 시침과 초침에 끼어 압사 당한다. 이내 시계탑이 무너지고 수문이 열리면서 성이 호수의 물로 채워진다. 이로써 호수 밑에 가라앉아 있던 고대 로마 도시의 유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기의 괴도 ‘루팡’은 아름다운 로마의 유적들을 가리켜 “모든 인류를 위한 진정한 보물이네. 내 주머니에 넣기엔 너무 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염소는 탐욕의 제국을 멸망시키고 정화의 물을 뿌리게 함으로써 전 인류에게 회복의 희망을 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염소가 뜬금없이 메이 앞에 등장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엄마의 부재 속에 그녀의 회복을 염원하는 한 어린 소녀의 마음을 이상한 방식으로 위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염소는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의 장면은 메이라는 하나의 인물을 넘어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현실의 모든 아이들에게 보내는 미야자키의 따스한 포옹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문득 의심이 든다. 이 영화의 감동이 정말 작중의 도덕적인 인물들과 미야자키의 선한 믿음에서만 기인하는 걸까. <이웃집 토토로>가 감동적인 가장 큰 이유는 도덕적인 인물들의 협력과 부모의 부재를 극복해 나가는 어린 아이들의 올곧은 간절함이 우리의 욕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 속에서 도덕적인 인간들과 협력하며 살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에. <이웃집 토토로>의 탁월함은 사회의 무한 경쟁과 자본의 억압 속에 잠시 잊고 살았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한 욕망과 그것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을 찍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미야자키의 믿음과 우리의 욕망은 정확히 일치하는 셈이다). 서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은 촘촘히 설계된 영화의 플롯이 아니라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모두 생채기 하나 없이 이상적인 결말을 맞이했으면 하는 우리의 선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투영하며 영화를 따라간 끝에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엔딩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곧바로 싱그러운 음악이 우릴 축복해준다. 마치 우리에게 앞으로도 계속 그 욕망을 실현시켜주기를 당부하는 것 같이. 그런 탓에 잠시 잊고 있던 도덕적 인간에 대한 욕망이 사츠키와 메이가 심었던 나무 열매의 씨앗처럼 땅을 뚫고 무럭무럭 피어날 것만 같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 적어도 선해지고 싶은 욕망이 우리 심연에 잠재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과연 한 편의 영화가 이 이상의 가치를 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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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P.> 70년째 바뀌지 않는 수통 안을 들여다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헌병대로 자대 배치를 받은 이병 '안준호(정해인)'는 선임인 '조석봉(조현철)'의 친절과 병장인 '황장수(신승호)'의 괴롭힘 속에서 군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우연히 준호의 관찰력과 집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던 중사 '박범구(김성균)'는 그를 D.P. 팀으로 옮기지만, 준호는 첫 번째 임무에서 선임의 실수로 인해 처참히 실패하고 영창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새롭게 부대에 부임한 대위 '임지섭(손석구)'은 준호의 실패가 온전히 그의 책임이 아니라 판단하고, 본래 D.P. 팀이었던 상병 '한호열(구교환)'을 복귀시켜 준호와 같은 팀으로 배치한다. 천방지축이지만 풍부한 경험을 쌓은 호열은 준호에게 필요한 노하우를 알려주고, 그들은 한 팀으로서 탈영병들을 쫓기 시작한다.
27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는 웹툰 <D.P 개의 날>을 영상화한 작품으로 <뺑반>과 <차이나타운>의 한준희 감독이 연출과 극본을 맡고 원작 작가인 김보통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D.P.>는 공개 직후부터 수많은 현역, 예비역들의 악몽을 유발하는 사실적인 군생활 고증으로 이슈몰이를 하면서 넷플릭스 인기 있는 콘텐츠 top 10에 오를 정도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기의 배경에 단지 리얼함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잊고 싶은 그 리얼함마저도 화제가 된 진짜 배경에는 군대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메시지와 주제의식, 특히 변하지 않는 군대에 대한 회의감이 자리하고 있다.
제목인 <D.P.>는 탈영병 추적병을 뜻하는 Deserter Pursuit의 줄임말로, 드라마는 이름대로 탈영병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추적병들의 이야기를 여섯 에피소드로 나누어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는 자연스레 각 탈영병의 사연을 소개하고 각종 병영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한다. 살인자를 잡기 위한 첫 단계로 살해 동기를 파악하듯, 탈영병들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탈영 동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중 묘사되는 사연들은 구타를 비롯해 코골이가 심하다는 이유로 방독면 씌우고 물 붓기, 하의를 벗긴 후 라이터로 음모 태우기, 자위행위 강제하기, 얼굴에 살충제 뿌리기 등 군대를 경험했다면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사실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외에도 <D.P.>는 폭력과 관계는 없지만 그 못지않게 병적인 여러 모순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군대를 갈 경우 가족을 돌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인원 부족으로 인해 징집률이 약 90%에 이르는 현행 징병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타 부대와 협동하여 탈영병을 잡는 과정에서는 병사와 병사, 병사와 간부 간의 갈등에 가려져 있던 부사관과 간부 간의 대립과 부조리를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육군 주임원사들이 '인격권을 침해당했다"며 육군참모총장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던 사건과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박찬주 전 육군 대장 갑질 사건 사건처럼 일부 간부들이 병사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악습 역시 카메라에 포착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들을 갓 입대한 이병 안준호의 시점에서 접하다 보니 더욱 충격적으로 묘사되어 간접 체험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아직 군대와 사회 사이에 서 있는 이병이라는 계급의 특성과 더해져 단지 탈영병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 조직 전반의 문제를 직관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탈영병을 잡지 못하는 에피소드에서는 단지 탈영병이 겪은 폭력뿐만 아니라 탈영병을 잡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문제, 서류와 현실이 따로 놀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면피하려는 군대 특유의 문화를 제대로 꼬집는다. 그래서 사회와 이질적인 시스템 안에서 마치 자신의 얼굴을 피멍이 들 때까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안준호의 모습은 특히나 인상적이고, 충격적이며, 가슴 아픈 연출이다.
또한 <D.P.>는 단지 문제를 열거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모순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존속되는 근본 원인을 나름대로 고찰해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피해자인 일병 조석봉과 가해자인 병장 황장수가 있다. 평범한 미대생이자 친절한 학원 선생님이고, 후임인 준호에게 "우리는 선임처럼 되지 말자"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선량한 청년이었던 석봉. 그는 거듭되는 황장수의 폭행으로 인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하나의 괴물, 복수귀로 변해간다. 황장수에게 복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를 사로잡은 순수한 기쁨과 광기, 그리고 해방감은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할 정도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선후임의 관계를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만 남겨두지는 않는다. 대신 황장수가 저지른 범죄와는 별개로 그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군대라는 조직이 만들어 낸 피해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왜 자신에게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고 미안해하지 않느냐는 석봉의 말에 장수는 "그냥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은 전역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수가 처한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치우려는 장수에게 사장은 군필이 일을 그렇게 밖에 못하냐고 비난한다. 이 비난 밑바탕에는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본인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주어지지 않는 한 현행 유지가 주 목적인 군대라는 조직의 생리가 깔려 있다.
그래서일까? 장수의 대답을 들은 석봉도 비슷한 맥락으로 항변한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만 범죄냐고. 자신을 체포하려 하고 부대로 되돌려 보내려는 너희들도 내가 고통받는 것을 알고도 내버려 두지 않았느냐고 일갈한다. 이렇게 <D.P.>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었듯이 두 선후임의 입을 빌려 군대라는 조직 안에 들어온 이상 군대니까, 곧 군대가 끝날 거니까, 군대가 끝났으니까라는 이유로 적극적인 저항을 할 수 없고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꼬집는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에 오히려 개개인의 잘잘못을 따진다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감은 마지막 에피소드의 부제가 '방관자들'인 이유이자, 사회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며 성매매 가해자인 청소년들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게 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대목이다.
다만 탈영병 하나하나의 살아 숨 쉬는 사연이 한국군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깊은 울림을 주는 것과 달리 정작 두 주인공들의 서사에 큰 비중이 주어지지 않은 점은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탈영병들의 이야기를 전개의 중심에 두고, 이 사건들을 등장시키고 소개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들을 쫓는 입장인 준호와 호열을 사용하다 보니 주인공인데도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특히 호열의 경우 재기 발랄한 존재감과는 별개로 그의 서사라고 할 것이 딱히 없다. DP 병에게 필요한 각종 정보와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선임이자 멘토로서 소비될 뿐이다. 그가 과거 한 탈영병에게 칼을 맞은 적이 있고 그 사건이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암시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조차도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복싱을 배웠던 경험을 살려 액션씬에서 활약하는 준호와 달리 액션의 측면에서도 활약상이 많지 않다. 이는 그나마 원작과 달리 이병 신분으로 등장한 준호가 탈영병들의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이끌어 내고, 그들과 자신의 군생활을 대비시키면서 처음 느낀 좌절과 자괴감으로부터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대비된다.
사실 DP병의 존재가 그 자체로 작품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단점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탈영병을 잡아오는 게 임무인 DP병은 군대라는 조직이 와해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의 최전선에 위치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조차 탈영병들과 다를 것 없는 부조리에 시달리고 같은 잘못을 범하는 모습은 군대에 끌려와 피해자가 된 이들이 오히려 범죄자로 전락하는 이 딜레마를 집중적으로 조명할 수도 있었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 부제처럼 '군견'이 되어가는 이들의 고뇌를 더 깊이 들여다볼 기회였던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시즌제를 염두에 둔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DP병의 비중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된 톤, 문제의식, 명확한 메시지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D.P.>는 박수받을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다. 결말만 보더라도 이 드라마의 우직함이 느껴진다. 일견 <D.P.>의 결말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대대장의 훈시가 끝난 후 다른 병사들의 대열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걷는 준호의 모습은 군대가 변할 수 있으며 자신부터 달라지겠다는 희망과 다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중 시간적 배경인 2014년에 실제로 발생한 임 병장 총기 난사 사건이 모티브가 된 듯한 쿠키 영상을 통해 <D.P.>는 그 희망의 범위를 축소시킨다. 석봉의 말마따나 6.25 전쟁 때 쓰던 수통이 아직도 훈련소와 자대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는 이 군대에 희망이 꽃필 것이라는 희망이 얼마나 나약한 지, 그 냉혹한 현실을 숨기지 않는다. 7년이 지난 2021년 현재에도 끊이지 않는 군대 내 악습과 구조적 문제를 보면 이렇게 최소한의 희망만을 간직한 채 군대라는 조직의 생리와 특성을 솔직 담백하게 담아내는 <D.P.>의 선택이 많은 공감을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현실 군대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군이 쓰던 수통도 있다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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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방금 카페에 들어와서 노트북을 켰다. 늘 먹던 딥초코라떼를 주문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뭐라고 쓰지? 고민했다. 갑자기 지갑과 휴대전화가 어디 있지? 생각했다. 에어팟으로 음악은 나오는 거 보면 분명히 전화기는 근처에 있다. 주머니를 뒤졌다. 여긴 없다. 내가 지금 앉은 책상이 유리로 된 책상이 있고 아래에 투명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 손을 슬쩍 넣었다. 역시 없다. 뭐지? 갑자기 오싹해졌다. 가방에 있나? 가방에 손을 슬쩍 넣었더니 여기에도 없다. 순간 당황했다. 어쩌지. 근처의 가방을 다른 의자로 가져다 놓으려고 할 때 전화기와 지갑이 보였다. 노트북을 열어놨고, 그 기계에 가려져서 못 찾는 것이었다.
늘 있는 일인 것 같아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갑자기 상상에 빠졌다. 만약 누가 훔쳐간 거라면? 지금 앉아있는 자리 위치상 제일 구석에 있기 때문에 나를 굳이 찾아오는 게 아닌 한 내 걸 가져가기는 어렵다. 그래도 만약에 어린, 한 7살쯤 되는 애가 내 걸 훔쳐갔다고 하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전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생각난다. 소매치기 같은 범죄가 어리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역시 나쁜 놈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구먼'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난 경찰서에 가지 않을까? 그리고 어리다고 봐주고 이런 것 없이 처벌받게 했을 것 같다. 그게 그 애한테도 좋은 거고. 나 자신한테도 좋을 테니까. 당연하지. 나는 저 애의 도둑질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까. 이런 나의 마음가짐은 평소에 뉴스를 볼 때에도 이어진다. 내가 강박장애가 있어도 돈을 훔치고 싶은 강박에 시달렸던 적은 없다. 비슷한 느낌으로 '저 사람을 칼로 찌르지 않으면 불안할 것 같다'라고 생각한 적 역시 없다. 난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이 소년이라고 봐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년원 제도가 그렇게 옳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도덕관념과 나이는 별개의 문제니까. 이런 나에게, 또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넷플릭스가 드라마 한 편을 가져왔다. 과연 소년범죄의 해답이 강한 처벌에만 있을까. 넷플릭스로 가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드라마인가요?
한 판사가 있다. 이 판사는 소년범죄에서 일하는 판사다. 판사는 연화 지방법원이란 곳에 발령받는다. 판사는 자기의 후임을 확인한다. 마음 따뜻해 보이는 남자 판사와 아래 직원들이 있다. 근무 첫날. 소년범죄 전과자들과 함께 식사하러 간 자리에서 식당의 손님이 지갑을 분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판사는 전부터 표현하고 있던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혐오를 분출하며, 일행이었던 한 여자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적당히 타이르고 이해해주고 이런 거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아이의 도둑질을 들춰내 망신을 준다. 주인공 심은석 판사는 그런 사람이다. 온정도, 따뜻함도 없는 그런 법관이다.
드라마는 이 심 판사에 대한 인물 제시를 베이스로 소년범죄자들에 대한 판결 과정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핵심 소재는 이 것이다. 토막살인사건, 고등학교 시험지 유출 사건, 집단성폭행 등을 다루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 소년범죄의 이면을 다룬다. 아. 드라마에서 다루는 세부 소재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소년범들을 수용하는 소년범센터도 드라마에 담겨있다. 그러니까 소년범죄자들이 벌이는 범죄자가 얼마나 잔혹하냐가 소재가 아니라는 뜻이다(물론 폭력 수위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수적인 것일 뿐). 소년범죄가 어떻게 일어나고, 왜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처분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로 나서는지도 묘사한다. 이 드라마는 그런 드라마다.
2. 어떤 드라마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소년범을 싫어한 것 같다. 강박장애가 있어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묘사 하나만으로도 무슨 병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드는 살인귀가 된다는 식의 인식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몇몇 병이 그런 폭력적인 수위로 분출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런 폭력성과 내면의 아픔이 무조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리다고, 정신질환자라고 봐주고 이런 게 좀 맘에 안 들었다. 나 역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고 생각이 어느 정도 바뀌었다. 가령 나 역시 '시험지 유출 범죄'에 노출될 뻔했던 사실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일은 공정을 해치는 일이라 절대적으로 일어나선 안 되는 게 맞고 피해자는 엄벌에 처해져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서울대를 위시한 명문대 지상주의를 만든 쪽에 기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범죄에 기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뭘 바꿀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쉽다. 나 역시 학벌에 지배당하고 있던 사람일까 봐. 그런 마음이 하나둘씩 쌓여서 지금의 10대가 고통받는 세상을 만든 건 아닐까 싶어서. 이런 미친 세상에 1인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를 강요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소년심판은 이런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것에 대한 응당한 처벌만을 핵심 키워드로 삼지 않는다. 나름의 균형 있는 시각으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두세 번 생각하게 만든다.
3. 소년법을 소재로 다뤘습니다. 소년범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나요?
폭력의 수위를 미화해 무조건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처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년범 센터를 다룬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중간에 센터장과 10대 아이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1) 아이들이 먼저 심한 말과 함께 밥을 안 먹겠다고 했다 2) 센터장의 폭언과 푸대접 때문에 먹지 않았다가 대립하는데, 이 경우를 둘 다 상황 극화시켜 제시한다. 난 이게 분명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연출자가 일단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두 번째. 이 두 가지 논쟁에서 '어느 게 옳은가'를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실제로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나서 좀 화가 났다. 이렇게 한쪽의 시선만을 제시하는 연출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후반부에 집단성 범죄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서 성범죄 용의자가 피해자 아버지와 대화하는 신이 있는데, 아이패드에다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니까 범죄자들의 악성을 묘사하는 데는 가감이 없었고 이들의 범죄행각에 처벌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무조건 미화하는 듯한 태도를 걱정하시는 분들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다.
4. 폭력의 수위는 어떠한가요?
성범죄 묘사가 있다. 또 학교폭력 묘사가 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아는 10대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 묘사는 다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쓸데없이 외설적이고 잔인하고 이러지는 않다. 적당히 화나고 적당히 거부감이 있다.
5. 이 드라마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3번에서 쓴 부분이 드라마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균형감각이다. 드라마는 쉽게 편을 들지 않는다. 즉 무작정 소년들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쓰지 않았다. 이와 반대급부로 무조건적인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도 말한다. 왜 소년범죄가 일어나는지.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이들에게 과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교화의 효과가 어떤 긍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섬세하게 녹아내리며 탄탄한 극본의 힘을 보여준다.
다른 장점은 떠나간 이들에 대한 예우다. 소년범죄로 인해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화가 여전히 날만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이 피해자들과 유족에 대해서 사려 깊은 묘사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쓸데없이 잔인하지도 않고 외설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거부감이 들어 화가 나는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또 떠난 이들에게 억지 신파를 주입시키지 않고도 감정이입을 하게 해 주니 난 이 정도면 좋은 시각으로 이들을 대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주인공 심은석의 입체성은 어느 정도 생각하기 쉬웠지만 차태석-나근희-강원중 캐릭터는 이제까지 본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클리셰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 분들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단적으로 극을 위해 희생당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존재 이유만으로도 청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가 탁월하다. 속사정을 가지고 있는 심은석 역은 김혜수 배우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또 입에 욕을 달지 않고 연기를 하는 김무열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신선했다. 또 이성민 배우는 찐 50대 가장의 잔소리 톤이 나와서 놀랐다. 그중 최고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이정은 배우다. 이정은 배우는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그분의 다른 특성에 그런 모습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다른 조연진에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 한국 독립영화를 많이 보셨으면 알 염혜란-이상희-이석형-유재명-이봄-심 달기 등 짱짱한 배우들이 드라마의 재미를 덧붙인다.
6. 이해가 어려운 작품은 아닌가요?
아니오.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7.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무난하게 볼 수 있다.
8. 왜 추천하고 싶나요?
드라마에서 이성민 배우가 맡은 강원중이 이런 대사를 한다. "중요한 건 법이 아냐. 시스템이지." 또 이정은 배우가 맡은 나근희 역이 이런 대사를 한다. "소년법은 스피드예요." 이 두 가지 대사는 상충한다. (드라마가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쓰지 않겠다) 법원이 범죄자들에게 사려 깊은 성찰 없이 교화 명령을 내리거나 강한 처벌을 했다고 해보자. 과연 그게 능사일까? 교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은 사실 많은 것을 염두하지 않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극 중 한 인물의 대사처럼 다른 나라에서의 예를 들며 소년범죄의 강한 처벌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는 게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 또 징역 15년 받고 다시 사회에 나온 전과자가 다른 범죄를 일으킨다는 보장이 있나? 아닐 것이다. 실제로 이것에 대한 예시가 첫 번째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폭력의 대물림과 범죄자들에게 냉담한 시선이 또 다른 범죄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내는 분노 이면에 깔려있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소년범죄자는 가해자가 맞다. 그리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절대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끔찍한 폭력을 일으켜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범죄자이기도 하고, 어리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이 될 교화의 기회를 받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있는 부모님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적절한 교육이 없다고 누구는 범죄 저지르기가 쉽다면 그게 100% 그들의 탓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드라마는 이 두 가지의 처지가 절대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다. 설득력 있게. 말과 글로는 이렇게나 쉽지만 시각이 트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탁월한 깊이로 관객들에게 도움을 준다.
뉴스로 접하는 강력범죄는 전체 소년 범죄 중 1% 정도라고 해요. 그런 나머지 99%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심은석 역의 배우 김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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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HD의 미학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이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포함한다는 것을, 친구들끼리 단편영화를 찍으면서야 실감했다. 한 장소, 한 가지의 소품, 한 명의 배우를 화면에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주말에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평일에 회사에 가서 하는 일들, 그러니까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 받고 회의를 하고 영수증을 모으는 일을 수십 번이고 반복해야 한다. 이렇게 준비한 현장에서는 온갖 장비를 이고 지고 촬영 내용을 기록한다. 필요하다면 이것도 수십 번 반복한다. 그러면 비로소 어떠한 자국도 없이 매끈한 작품이 완성되는 멋진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스타 배우들과 일하면서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영화를 작업해온 미셸 공드리가 팬데믹 이후 영화에 대한 영화를 내놓았다.<공드리의 솔루션북>은 영화 감독인 주인공 ‘마크’가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직접 적어 내려가는, 말 그대로 해결책 목록이다. 그는 이제 막 촬영을 마친 영화의 제작을 거절당했다. 자신과 일하던 파트너마저 회사의 편을 들자 그는 제작과 편집 담당인 동료 둘과 필름을 전부 챙겨 시골의 고모 집으로 도망친다. 의욕을 잃은 그는 복용하던 약을 단숨에 끊는다. 그러자 그가 유년기를 보낸 동네에서 아이디어가 끝없이 튀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던 도중 빈 공책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솔루션들을 적기 시작한다.
마크는 관객조차 진력나게 할 정도로 제멋대로이다. 자신을 배신한 동료에게는 분노하고, 회사에서 가장 귀여운 여자 직원과는 어떻게든 잘 되고 싶어 하며, 영화 음악을 작업하면서 동시에 다음 작품도 찍고 싶어 한다. 완성 전에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키면서도 편집에 관여해야 하는 고집도 부린다. 이 와중에 동네 대표도 하고 싶고, 고모의 질병을 돌보고 생일 파티도 열고 싶어 한다. 생각과 계획은 너무 많고 그것을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공드리는 마치 ADHD를 앓는 사람들의 행동처럼 연출했다. 예컨대 마크는 옛날 물건들 중 솔루션 북을 발견하고, 거기에 쓸 테이프를 찾으러 다른 방에 들어 갔다가 솔루션 북은 까맣게 잊고는 종이를 오려 스톱 모션 장면을 찍기 시작한다. ‘증상’에 가까운 이 행동은 미셸 공드리 특유의 꿈 같은 연출, 즉 개연성이 없어 보여도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그의 특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특유의 연출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또 다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하는 이 영화는 ADHD 증상을 미학으로 바꾸어 놓는, 베테랑 감독의 영화 언어를 보여 준다.
정신 없는 편집 과정에서 마크는 자신을 지지하는 동료들과 함께 차근차근 할 수도 있는 것을, 괜히 일을 키우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아이디어를 들이미는 마크와 당장은 안 된다는 동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충동을 참지 못해 물건을 내던지거나 소리치고는 뒤늦게 사과를 하느라 바쁘기도 하다. 그럼에도 모두들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한다. 외딴 시골 동네에서 음악 스튜디오를 찾아 내고 오케스트라를 구하고, 심지어 영사를 척척 준비해 마을에서 상영회를 여는 것은 마크 옆에 있는 샤를로트와 실비아다. 그들은 버겁지만 이 모든 노동과 황당한 아이디어를 감당한다. 이 일을 대하는 태도는 각자 다소 달라 보이지만 이들 모두의 목표는 단 하나, 영화를 끝까지 마치는 것이다.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영화 <무드 인디고>를 제작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전적인 영화이자 자아성찰이 담긴 코미디이다. 주인공 마크가 제멋대로 굴고 끝내는 옆에 머물던 사람들마저 떠나가게 할 정도로 대책 없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솔직하고 자조적인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사랑을 발산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한계는 바로 선의와 신뢰에 의한 관계들이 없다면 마크는 예술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냉혹한 사실이다. 상품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예술로서 영화를 보아주는 동료들과 자신의 엉뚱한 면을 이해해주는 고모 드니즈가 없다면 그는 수많은 아이디어에 짓눌리다가 영영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들은 작은 마을이 계속 굴러가듯이, 여러 사람의 노동이 모여 완성되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멋진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런 조건 없이 마크를 사랑해 주는 여자들, 특히 조용히 아파트에 들어와 엉망이 된 집을 손수 치워 주고 끝내는 가정이라는 새로운 ‘모험’으로 마크를 끌고 가는 가브리엘은 공드리가 연출하는 초현실적인 비주얼 만큼이나 꿈 같은 캐릭터이다. 마법 같이 이루어진 조건 없는 사랑, 아이를 낳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실은 권력이라는 점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다소 씁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쇼트에서 알 수 있는 점은 <공드리의 솔루션북>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걸음 다가가는 시도라는 것이다. 수없이 집적된 아이디어가 성가시게 느껴지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필요하기 마련이고, 거기서 반짝이는 혁신이 일어나기도 한다. 공드리가 자신의 경험을 녹여 만든 이 작품은 사랑과 관계를 가꾸는 것에 관한 작품이며, 동시에 영화를 제작하는 일이 어지럽고 추상적인 계획과 수백 번의 노동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또한 관객 앞에 선을 보이는 순간 영화는 만든 이들의 손을 떠나게 되고 감상과 해석과 왜곡은 전부 관객의 몫이 된다고 말하면서 관객에게 말을 건다. 심지어 마침내 관객의 반응을 조우하는 마크의 기분을 보여 주는 듯한 마지막 장면이 수줍음인지 수치인지 판단하는 것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다. 이렇게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 영화에 대한 질문을 하고 결국 관객 가까이까지 다가오는 영화로 마무리된다. <무드 인디고>를 보고 마음껏 슬퍼해도 되듯이,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비극인지 희극인지 논하지 않아도 됨을 깨달았듯이 이번에도 우리는 영화 만들기를 말하는 공드리의 언어를 재미있게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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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찌 가문의 문제점을 파헤친 여자의 이야기!
하우스 오브 구찌가 개봉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20년전에 원작의 판권을 사놓았다가 구찌 가문의 반대로 영화화를 못하다가 드디어 만들어지게 된거에요.
러닝타임이 길지만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합니다 .
특히나 레이디 가가의 연기가 정말 훌륭하죠.
이 영화에 자레드 레토도 등장을 하는데요. 엄청난 연기변신을 보여줍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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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메이커,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아는 남자와 대통령이 되고 싶은 남자가 만났다!
영화 킹메이커가 지난 주 개봉했습니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 전략가로 불렸던 엄창록 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된 영화인데요.
영화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좋습니다.
영화 속 두 인물의 우정과 관계도 눈에 들어오는데요.
대선이 다가오는 요즘 이 영화를 본다면, 정치란 무엇이고 또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영화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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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킬링 로맨스> 메인 예고편
YESSSS! 스껄하고 힙한 그 영화! 예고편의 새로운 바람을 불고 올 그 이름도 '죽여주는' [킬링 로맨스]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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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티탄> 리뷰 예고편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여성이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슬픈 아버지와 조우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