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뚜로빼뚜로2023-09-21 20:39:22
추석에는 갈비를 뜯으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자
영화 <커밍 홈 어게인, 2019> 리뷰
2019년 작품인데 한국 개봉은 2023년 9월 20일이니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재미있게도 영화 속에 그려지는 명절은 설날이지만, 한국 관객과 추석을 앞두고 만나게 되었다. 설이든 추석이든 명절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날이 아닌가. 깊은 맛이 나는 양념에 재운 갈비, 채소를 따로 볶아 씹는 맛이 아삭한 잡채, 쑥갓 고명으로 정갈함을 더한 동태전 등을 밥상에서 마주하였을 때, 당신은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 <커밍 홈 어게인, 2019> 포스터
혼자 알아서 잘 큰 아들, 창래
창래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학창 시절 그의 최선은 높은 성적으로 가시화되었다. 더 좋은 고등학교, 더 좋은 대학교는 가족과 떨어져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 서부에서 정반대 쪽인 동부까지, 분명히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창래는 창래대로 힘겨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창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그 속에 뿌리를 내리느라 힘들었고, 엄마는 그런 아들을 보며 어색한 공기를 느꼈다. 창래는 늘 그랬듯이 혼자 알아서 잘 크는 아들이었다. 예일대에 입학을 했고, 월스트리트 금융가에 취업을 하며 '아시안 아메리칸 엄마'들이 바라는 '드림'을 이루었다.
혼자 알아서 잘 큰 아들, 창래
갈비로 사랑을 표현했던, 창래 엄마
갈비는 살코기가 뼈에 어느 정도 붙어 있도록 저미는 것이 중요하다. 뼈가 있어야 고기 맛이 더 사는 법이다. 갈비는 고기만큼 양념장도 중요한데, 그중에 배는 고기를 연하게 만들면서 단맛을 추가해 주기 때문에 빠뜨리면 안 된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른 것이 어미의 마음이지 않은가. 비록 몸은 미국 땅에 발 붙이고 살지만, 엄마는 자신이 먹어본 음식 맛을 떠올리며 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정성 들여해 주었다. 때로는 아들만큼 빠르게 늘지 않는 영어 실력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있지만, 그것 역시 영어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는 게으른 어미 탓이지 아들 창래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남편은 지금껏 라면조차 제대로 끓이지 못하는데, 엄마를 위해(어쩌면 창래 자기 자신을 위해) 명절 상차림을 해내는 창래의 음식 솜씨는 분명 엄마를 닮았다.
갈비로 사랑을 표현했던, 창래 엄마
원작은 이창래 작가의 에세이
영화 <커밍 홈 어게인>은 이창래 작가의 에세이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창래 작가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3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95년 발표한 소설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이 그의 대표작으로 미국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그려내며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는 영어로 소설을 쓰는 미국 작가이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먼 친척을 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였다.
영화의 원작이 되는 에세이는 1995년 작가가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던 시기에 쓴 글이었다. 이 글을 중국계 미국인 웨인 왕 감독이 읽고, 영화화를 제안하였다. 웨인 왕 감독도 어머니가 파킨슨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즈음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뱃속에 품은 채 미국 땅으로 건너왔다. 언젠가 가족과 이별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가끔 우리는 그것을 잊는다.
원작은 이창래 작가의 에세이
미국인들은 집 안에 신발을 신고 들어간다. 그러나 창래네 집은 신발을 문 앞에 가지런히 벗어두고 양말 바람으로 집 안을 다닌다. 카펫이 깔려있긴 한데 바닥 보일러가 없으니 발이 시릴 것 같다. 카펫은 전체 세탁이 어려워서 더러워지면 알코올로 그 부분만 닦아낸다. 집 안에서 신발을 신는 것이 맞을까. 벗는 것이 맞을까. 그때 솔직히 미안했었다고 말해볼까. 이문세 '옛사랑'은 겨울과 어울리는 노래다. 광화문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자꾸 올라가네.
노래를 들으며 그리움이 가득 담긴 댓글을 읽어보자.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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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이 만든 관계의 변수들
우리는 무심코 상상한다. 로또에 당첨되면, 당장 떠날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떨지. 생각은 여기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온갖 곳을 들렀다가 현실로 돌아온다. 이런 우연은 내게 벌어질 수 없다고. 어쩌면 영화 <우연과 상상>에서 하는 이야기의 출발점도 이와 비슷해 보인다. 초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게 조금 다를지언정. 이를 테면 오랫동안 보지 못한 옛 친구와의 재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나의 주변인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된 상황 말이다.
상상했던 대로만 일이 벌어지면 자신의 예측 범위 안에서 결말까지 맺어지리라는 착각이 든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변수가 존재한다. 우연. 우연히 만나거나 우연히 실수하거나 우연히 알아차리거나. 문득 이 우연과 상상을 적재적소에 쓴 넷플릭스 드라마가 떠오른다. <굿 플레이스>. 그 어떤 경우의 수를 만들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연히 벌어지는 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일종의 진리 같은 교훈을 내세우던 드라마였다. 이번 영화는 그보단 교훈적인 메시지를 덜하다고 느꼈다. 그저 일어나는 일을 관망하듯 보여주는 연출 때문인지도 모른다.
옴니버스로 연결된 세 영화를 이제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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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세 작품의 전개 방식은 모두 대화였다. 눈에 띄는 건 대부분 두 사람의 대화였다는 점이다. 잠시 세 사람이 맞닥뜨리는 장면도 있기는 했다. 1막에서 벌어진 일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알고 한 사람은 모르는 삼자대면이었으니까.
어느 길거리. 그곳에서 주인공 메이코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 촬영에 임한다. 이때 카메라는 한 사람을 유독 보여준다. 메이코의 절친이면서 스타일리스트인 츠구미. 그렇다. 이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촬영을 마친 둘은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주제는 츠구미가 최근에 우연히 만난 남자.
츠구미는 그의 이름을 메이코에게 말하는 대신 애칭 같은 호칭을, 첫 만남에 가진 느낌을, 자신의 연애관을 들뜬 눈으로 조잘거린다. 종종 진지한 눈빛을 제외하고 츠구미는 내내 웃기만 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메이코의 눈은 오묘하다. 츠구미와 눈을 맞출 땐 마주 웃지만, 츠구미가 말하느라 메이코에게 집중하지 못할 때 혹은 차창 밖에서 들어오는 빛의 양이 적을 때 혼자 골몰한 표정을 짓는다.
관객 입장에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연애담,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어떤 남자의 연애담을 듣는 게 썩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컷 전환도 얼마 없고, 그마저도 어둡고 꽉 막힌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 이때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바깥의 풍경과 빛, 마냥 좋아하는 츠구미와 이상하게 음침한 츠구미의 대조가 새로운 몰입을 불러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말이 밝혀진다. 그런데 아주 명확히, 원인에서부터 결과까지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의 대화로 관객은 추측할 뿐이다. 예전에 메이코와 남자가 만나는 사이였고, 메이코가 바람을 피웠고, 남자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불쑥 찾아온 메이코를 뿌리 치려 하지만 메이코의 이런저런 말에 결국 시인한다. 여전히 메이코를 사랑한다면서.
이 대목은 <결혼 이야기>의 격렬한 싸움 씬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표현의 폭이 그들만큼 크지 않았으나, 사무실을 맴돌며 계속 위치를 바꾸는 메이코와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이 연출적으로 닮았다고 느꼈다.
파국으로 치달을 듯한 이야기는 의외의 끝을 맞이한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세 사람. 메이코가 남자와의 관계를 다 밝히고, 츠구미에게 상처를 주고, 그래서 친구를 잃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이건 다 메이코의 상상이자 예측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메이코는 무난한 선택을 한다. 두 사람을 응원하며 자리를 비켜주기로.
이때 1막의 제목을 다시 본다. 마법 혹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보통 사랑은 마법 같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랑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가장 좋은 것이라 명한다고 한들 끝에 다다를수록 질척이고 지저분하다. 끝을 기점으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해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나의 상상과 상대의 상태가 같을지. 이번엔 다를지. 알 수 없기에, 메이코는 알 수 있는 것을 택했다.
2막. 문은 열어둔 채로
가장 불쾌한 감상이 남은 2막이다.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오는 동기인 사사키와 파트너를 맺으며 결핍을 채우려 한다. 이미 결혼한 데다가 아이까지 있는 나오이기에 옳은 선택과는 거리가 멀다. 사사키도 이 사실을 알고 대놓고 약점으로 부리진 않지만, 학교에서 누구 하고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나오의 쓸쓸한 마음을 이용하려 든다.
바로 자신의 앞 길을 막은 세가와 교수의 명성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일. 정확히는 사사키가 그토록 피해자 행세를 할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교수들이 그러하듯 편의를 봐줄 거라는 생각으로 학점을 이수할 최소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융통성이나 동정심 있는 사람에게 통했을 부탁은 누군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문을 활짝 열어두는 세가와 교수에겐 말짱 도루묵이다.
사사키의 머릿속에서 나온 방법은 나오를 이용 해서 세가와 교수가 성적으로 문란하고 더럽고 옳지 않은 사람임을 녹음본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사키의 부탁대로 나오는 담당 교수인 세가와를 찾아 가 그의 신간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책 구절이 참 좋다며 몇 페이지를 천천히 낭독하며, 나오는 문을 스리슬쩍 닫는다.
그런 나오에게 다가온 세가와 교수는 문을 다시 열고 남은 문장을 마저 듣는다. 사사키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진 것 같을 때, 나오는 자신이 하려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밝힌다. 세가와 교수는 그에 분노를 표하지 않고 오히려 흥분한다. 낭독하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소장하고 싶었다며. 나오는 이상한 조건을 건다. 책 전체를 낭독해서 이메일로 보내는 대신 그걸 들으며 자위를 해달라고.
둘만의 비밀처럼 끝날 것 같던 일은 나오의 실수로 끝이 난다. 아이의 말에 대답을 해주며 이메일 수신인을 적다가 학교 관리인의 계정으로 잘못 보낸 것이다. 어찌어찌 사사키의 바람대로 세가와는 어그러졌다. 나오까지 수렁텅이에 들어간 건 예상 못했겠지만, 그건 사사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둘. 사사키는 버젓이 잘 살고, 결혼까지 앞둔 상태다. 나오는 모든 것을 잃고 그저 피곤한 하루를 버틸 뿐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만 보일 수 있는 치기일까. 혹은 불륜의 굴레인가. 나오는 사사키에게 입을 맞추고 버스를 내린다. 이제 대학생 때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나오의 복수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3막. 다시 한번
꼭 다시 보고 싶은 사람과 우연히 만나는 상상을 해본 적 있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3막이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던 나츠코는 건너편에서 올라가던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다급하게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그를 뒤쫓는다. 20년 만에 만난 동창생, 아야를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꼭 맞잡은 둘은 부산스레 대화를 잇는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느라 도쿄에 들린 나츠코와 가정을 꾸린 아야. 아야의 초대로 둘은 아야의 집에서 대화를 마저 하기로 한다. 고등학교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무언가를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던 나츠코. 그러다 속마음을 드러낸다. 자신이 아야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20년. 이미 늦을 대로 늦은 시기인 만큼 애처로움이 가중될 것 같을 때에 사실이 밝혀진다. 아야는 아야가 아니다. 그러니까,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둘이 나온 고등학교도 다르고, 아야의 본명도 아야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고 서로 아는 사이로 착각한 것이다. 얼마나 보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똑 닮았다고, 그 사람이라고, 나츠코는 확신에 찼을까.
어정쩡한 기류는 아야의 아들이 들어오면서 뚝 끊긴다. 이제 가보겠다는 나츠코와 역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아야. 엄마 나갔다 오겠다는 말에도 아들은 아무 대꾸 없다. 가정 내에서 별 다른 애정을 주고받지 못하는 아야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마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나츠코를 보고도 별 말 못 하고 받아준 건 그 때문 아니었을까.
둘은 다시, 그들이 처음 만난 지하철역까지 간다. 나츠코는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내려가고, 아야는 육교에서 뒤돌아 걷는다. 둘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냈으면 하는 마음이 그득해질 무렵, 나츠코가 처음에 그러했듯 등 돌려 걷는 아야에게 뛰어간다. 이미 놓친 인연이 있으니까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둘은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안녕을 고한다.
원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 건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학생 시절 추억으로 존재하게 내버려 두고, 지금 새롭게 만날 수 있는 인연을 찾는 게 좋다고 느꼈다. 추억은 추억일 때 가장 아름답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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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의 이야기가 모든 면에서 마음에 들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분 부분 공감 가는 상황은 어느 막이든 있었다. 살아가는 것도 비슷하다. 오늘 하루가 마냥 좋진 않아도 좋다고 꼽을 점은 늘 있으니까.
*씨네랩 시사회에 초청받아 참석 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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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해석이 새로웠던, 하지만 집중도는 낮았던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
퓨전 사극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밌게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 하지만 역사 그 자체를 좋아해서 왜곡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개연성이 떨어지는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불호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 시놉시스
학계로부터 다른 실록들에 비해 사실대로 기록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세조실록은 세조가 집권한 지 8년 되는 해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발생한 40여건의 기이한 이적현상들이 기록되어 있어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세조가 세운 원각사를 뒤덮은 황색 구름과 향기로운 4가지 꽃비, 오대산에서 몸을 씻고 있던 ‘세조’의 등을 문질러 피부병을 낫게 해주었다는 문수보살, 금강산을 순행하던 ‘세조’ 앞에 나타난 담무갈보살 등 세조실록에 기록된 이적현상을 비롯해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린 속리산의 소나무(정이품송, 천연기념물 제103호), 자객으로부터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까지 야사로 전해지고 있는 수많은 기이한 현상으로부터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은 시작된다.조선 팔도를 무대로 풍문을 조작하고 민심을 흔드는 광대들이 권력의 실세 한명회에 발탁되어 세조에 대한 미담을 만들어내면서 역사를 뒤바꾸는 이야기를 그린 <광대들: 풍문조작단>은 세조실록에 기록된 기이한 현상들 뒤에 풍문조작단이 있었다는 기발한 상상력이 더해진 팩션 사극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사적 기록들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반영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김주호 감독의 연출의도처럼 끊임없이 충돌하는 권력자들의 욕망과 풍문을 조작하는 광대패의 모습, 이에 들썩이는 조선 팔도의 풍경까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묘하게 맞닿으며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과 우리의 현실을 덧붙여 흥미롭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의문을 풀어준 것은 고맙지만 거기까지..ㅎㅎ세조실록에 기록된 다양한 기이한 현상들. 40여 개에 달하는 이 현상에 대해 명확한 해석이 이뤄지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답답했었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에서 광대들이 이러한 일들을 꾸미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줘서 나름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였다. 이 작품이 인기가 없었던 이유는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을 제공하긴 했지만 그 다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대들이 세조로부터 돌아선 민심을 회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것이라는 큰 맥락이 이미 영화 전반부에 드러나기 때문에 처음 기이한 현상의 궁금증이 해결될 때는 오!! 그랬구나 하는 흥미가 발생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별 감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명회의 지시 → 광대들 조작 → 민심 동요 → 세조 짱이야' 이와 같은 구조가 4번 정도 반복이 되다 보니 솔직히 영화 중후반까지는 굉장히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래서 관객들의 평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진짜 광대는 한명회
필자는 이 작품에서 진짜 주인공은 한명회라고 보았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비율로 따지면 광대들만큼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후반부에 갈수록 한명회의 야심이 드러나면서 이 영화는 한명회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구나 라고 느껴졌다.초반 한명회는 세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충신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야심이 드러난다. 광대들의 수장 덕호에게 "왕이 내게 무릎 꿇을 이야기를 만들어줄 수 없겠나?"라고 눈물을 보이며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어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이렇게까지 연극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조를 무릎 꿇리고 세자에게 양위하라는 압력을 넣으면서 "세조 그대는 나의 가면이었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이 모든 판을 짜고 자신 주위의 인물들을 판의 말로 세워둔 것이라 밝힌다.
이 모든 서사는 한명회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광대놀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햔명회, 내가 알고 있는 광대 중에 당신이 최고의 광대였소." 영화 말미 덕호의 대사를 통해 이 작품의 주인공이 한명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캐릭터별 무게감이 너무도 달랐던 작품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에 흥행을 하지 못한 이유를 한 가지 더 찾아보자면 캐릭터별로 무게감이 달랐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코미디면 코미디, 드라마면 드라마, 느와르면 느와르 장르를 명확히 하지 않고 덕호를 비롯한 광대패들의 분위기는 코미디인 반면, 한명회와 세조는 너무나도 무게를 잡고 있어서 이 경중이 맞지 않았다. 이 차이 때문에 화면 자체가 튄다는 느낌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한명회가 회맹의식을 앞두고 춤을 추는 장면 역시 만약 이 작품이 무게감을 완벽히 주고 정치느와르라는 장르에 집중했다면 그 장면이 굉장히 무게감이 있는 컷으로 다가왔을 만큼 명장면이었을텐데, 이러한 장르 혼재와 캐릭터별 경중의 차이 때문에 왜 등장한거지? 뭐지?하는 감정밖에 들지 않아서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 장면에서 손현주의 한명회 연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을만큼 최고였지만 연출적인 부분에서 제대로 살리지 못해 굉장히 아쉬웠다. 이처럼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은 역사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세부적으로 본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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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바웃 타임> 시간여행, 사랑, 가족, 그리고 인생
안개 같은 비가 흩날리는 날씨, 차가운 창가에 앉아 푸른 초록의 정원을 바라보며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는 듯한 느낌. <어바웃 타임>은 그런 영국 로맨스 영화의 분위기를 풍기며 시작된다. 거기에 장미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고 꾸밈없이 밝은 웃음을 띠는 레이첼 맥아담스의 포스터가 이 영화의 상징과 같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래서인가 붉은 장미가 피는 6월, 비 내리는 오후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어바웃 타임>이 그리워진다.
비를 맞으며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 <어바웃 타임>의 포스터 (C) Universal Pictures
<어바웃 타임>은 성년이 되던 날, 아버지로부터 뜬금없이 '우리 집안 남자들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단다'라는 비밀을 전해 들은 팀(돔놀 글리슨)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시간 여행 능력을 깨달은 팀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내는데, 그는 시간을 돌려 창피한 과거를 극복하기도, 이뤄지지 않았던 첫사랑을 이루려 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모여 팀의 인생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가 <어바웃 타임>이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생 영화'로 손꼽히는 이번 작품은 나에게 또한 인생 영화가 되어주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시간 여행, 사랑, 가족, 그리고 인생에 관한 이야기 덕분이다.
영화는 그 시작의 리더 필름부터 마지막의 엔딩 크레디트까지 하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하나의 이야기 속에 감독, 배우, 제작진은 ‘인생’을 담아낸다. 한 작품에 녹아든 인생의 가치가 얼마나 깊고 다양하며 슬프고도 아름다운지. 그래서 좋은 예술 작품은 볼 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는 한다. 그런 이유로 같은 영화를 몇 달,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찾아보는 취미가 있는 내게 <어바웃 타임>은 처음 네 번의 시간에서 모두 다른 의미의 영화로 다가왔다.
* 본 게시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간 여행, 가능과 불가능 사이
시간 여행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꽉 쥐는 팀 (C) Universal Pictures첫 번째 <어바웃 타임>은 시간 여행 영화였다. 집안 대대로 남자들이라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 팀. 해야 할 일은 폐쇄된 공간으로 들어가서 두 손을 꽉 움켜쥐고 눈을 감는 것뿐. 팀의 시간 여행은 때로는 훨씬 나은 결과를 만들기도,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초능력을 지녀도 없던 사랑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말이다.
‘시간 여행’이라는 요소는 영화에 공상과학적 매력을 가미해 주지만, <어바웃 타임>은 공상과학 혹은 판타지 영화라기보다는 드라마 장르로 분류할 수 있다. 놀랍게도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시간 여행’은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하고 영화의 전반적인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지만, 그 요소가 스토리를 과격하고 스펙터클한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주인공 팀은 자신의 시간 여행 능력을 그저 자신의 삶에서의 순간순간에 변화를 주는 데 사용한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경험했던 순간으로만 갈 수 있다는 능력의 한계도 있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온 능력에 대해 아버지가 전해준 선조들의 이야기 덕분에 그는 이를 나쁜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바웃 타임>은 영화를 빌런이나 히어로가 등장하는 스토리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지극히 평범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시간 여행을 하는 영화로, 왠지 다른 시간 여행 영화보다는 현실에 있을법하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사랑, 작고 간질거리는 그 순간
사랑이 시작될 때와 사랑을 하는 모든 순간은 얼마나 작고 소중한, 간질거리며 설레는 순간인가 (C) Universal Pictures주인공 팀과 그의 사랑 메리와의 첫 만남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색다르다. 둘은 시각장애인 웨이터들이 운영하는 암흑 속 레스토랑에서 만난다. 영화의 화면조차 새까만 화면에 식기에 반사된 듯한 반짝이는 불빛 몇 개만 등장한다. 가끔 등장하는 시간 표시만이 화면에 문제가 없음을 알려주며, 영화는 관객들까지 함께 영화의 암흑 식당 속으로 데리고 간다. 이후 식당에서 나와 다음 약속을 기약하며 각자 방향으로 돌아가는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나오는 Paul Buchanan의 노래 <Mid Air>. 사랑에 스며 들어가는 간질간질 설레어오는 그 순간을 이처럼 잘 표현한 노래와 장면이 또 있을까.
<어바웃 타임>은 사랑을 느끼는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잘 녹여냈다. 헤어지는 길에서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보내는 작은 미소, 아침 햇살 아래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 이불로 빠져드는 모습, 지하철 플랫폼을 중심으로 지나가는 시간 속 추억들. 그래서 두 번째로 만난 <어바웃 타임>은 로맨스 영화였다.
가족, 영원하지 않은 시간에서 오는 소중함
그립고 그리웠던, 그리고 그리워질 아버지와의 산책 (C) Universal Pictures“바즈 루어만의 ‘선스크린’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건 풍선껌을 씹어서 방정식을 풀겠다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짓이라고 했다. 인생의 진정한 문제는 항상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만난 <어바웃 타임>은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전해준 영화였다. 말괄량이 같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품고 자란 여동생과 그 어떤 친구보다 친구 같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는 영화 후반부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여동생과 아버지를 통해 전해주는 가족의 소중함은 시간 여행을 통해 더욱 애절하게 표현되었다. 시간을 돌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며, 모든 것에는 끝이 있듯 가족과의 관계에도 마지막이라는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순간이 존재했다.
인생, 시간 여행자가 전하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
우당탕탕 정신없어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면 그보다 멋진 하루가 또 있을까 (C) Universal Pictures그리고 네 번째로 비가 내리는 봄과 여름 사이, 그 어딘가의 오후에서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만난 <어바웃 타임>은 인생에 대한 영화였다. 주인공 팀과 메리의 결혼식 장면은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이 손에 꼽는 명장면이다. 색다르고 매력적인 결혼식이 진행되는가 했더니 역시 영국 날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태풍 같은 바람에 갑자스런 폭우까지. 하지만 비에 쫄딱 젖어도 얼마나 행복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계획이 모두 틀어져도 밝은 미소를 잊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비바람에 하객들이 넘어지고 웨딩 케이크가 폭우에 적셔져도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웃음을 잃지 않는 팀과 메리의 모습은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빛난다. 인생에 관한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영화의 포스터를 왜 결혼식 장면이 장식하고 있는지는 영화를 보았다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팀의 아버지는 그에게 시간 여행으로 같은 날을 두 번 살아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긴장과 걱정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두 번째에서는 느끼며 살라고 말이다. 아쉽게도 시간 여행자와 달리 우리는 인생을 두 번씩 살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인생을 두 번 살아본 시간 여행자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런 경험담을 전한다.
“이제 난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다. 단 하루도 말이다. 그저 내가 이날을 위해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하고 즐겁게 매일을 지내려고 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하루하루를 시간여행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멋진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다.”
<어바웃 타임>을 통해 팀은 ‘시간 여행을 해 보니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매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고,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빛을 잃지 않는 것’이라는 경험담을 전한다. 시간, 즉 인생을 가장 잘 보내는 방법은 긴장과 걱정에 싸여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되돌려 변화를 만들려 시도하는 것 또한 아니라, 인생이라는 시간 여행을 즐기는 것이라고.
결국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것 (C) Universal Pictures
마지막으로 이 글을 위해 지난 영화의 감상을 되돌아보며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기록하며 본 <어바웃 타임>은 지난 네 가지 다른 영화로 다가왔던 매력들이 얼마나 잘 어우러져 있는지. 어떤 시간 여행자의 일기장을 훔쳐본 것만 같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할 시간에 대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어바웃 타임 About Time> (2013)
감독 리처드 커티스
제작 워킹 타이틀 필름
출연 돔놀 글리슨, 레이첼 맥아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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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라는 지위에 불이 붙었을 때
<마더> 네이버 스틸컷
-봉준호 감독 영화에 공통점은 빈부격차나 정부의 잘못된 태도 등 사회적 문제들을 그만의 유머러스가 섞여 만들어내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일 것이다. 하지만 <마더>는 이런 사회적 문제들도 역시 선보였지만, 엄마의 모성애를 기름 속 불씨처럼 강력하게 표현해내어 어머니라는 지위에 불이 붙었을 때 얼마나 처절하도록 몸부림치는지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 필모그래피 중 가장 불편하고 애잔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연기에 놀라고 스토리에 더 놀란 영화. 영화 장면에는 버릴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일명 떡밥을 떨구고 치우는 마지막이 되면 먼지 하나없이 김혜자 선생님의 붉은 노을에 맞춘 모든 어머니를 향한 춤을 보며 깔끔하고 애잔한 영화로 남는다. 붉은 노을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만 처량하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모성애를 제외하고 본다면 영화가 말하고픈 주제는 경찰 공무원의 안일한 조치와 무능한 능력, 사회적 약자에 대한 미숙한 대처를 비판한다. 그들이 제대로 된 수사를 진행했다면 어머니의 불도 이렇게 큰 화마로 번지지 않았을 텐데 어리석은 대처들이 필자의 마음에도 불을 붙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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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인 시네마] 그녀(Her, 2013)
‘테크 인 시네마(Tech in Cinema)’가 소개할 아홉 번째 영화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미래형 멜로 영화 <그녀(Her, 2013)>입니다.
'테크 인 시네마 - 미래도시 어둠 속을 달리는 인간과 복제인간(https://brunch.co.kr/@starshines/45)' 편에서 다룬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이 복제인간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기발한 이야기와 아름다운 대사들로 2014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석권한 영화 <그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던진 사랑에 관한 질문보다 답하기 어려운 고민거리를 안겨줍니다.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복제인간은 인간과 거의 완전히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영화 <그녀>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OS)는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육체가 없어서 정신적 교감만 가능한 무형의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랑과 관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 대상을 '감각'해야 할까요?
이번 '테크 인 시네마'에서는 영화 <그녀>의 주요 내용,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음성인식 기술과 감정인식 인공지능(Emotion AI)을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진 : 인공지능 운영체제가 컴퓨터에 설치되는 동안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멍때리고 있습니다.)
영화 <그녀>의 시놉시스는 아래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로 일하고 있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타인의 마음을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과 별거 중인 채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해해주는 ‘사만다’로 인해 조금씩 상처를 회복하고 행복을 되찾기 시작한 ‘테오도르’는 어느새 점점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참고 : 네이버 영화 <그녀> 주요 정보)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형체가 없이 말만 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 역할을 맡아 목소리만으로 열연한 스칼렛 요한슨, 마천루가 즐비한 첨단 미래 도시에 사는 인간이 느낄법한 공허함과 외로움을 얼굴 주름 단위로 정밀하게 표현한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기 덕분에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 <그녀>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테오도르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굉장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공지능입니다.)
영화 <그녀>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는 '완벽한' 개인 맞춤형 인공지능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니라 정말 하나의 인격체처럼 느껴지는 사만다는 사람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그에 반응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초고도화된 감정인식 인공지능(Emotion AI)이라고 할 수 있죠. 테오도르의 미세한 목소리 변화를 감지해 테오도르의 심정을 파악할 만큼 사만다의 직감과 눈치는 웬만한 사람보다 낫습니다. 사용자의 음성 등 소리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시각 정보도 획득하는 사만다의 능력은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커집니다. 사만다는 학습을 통해 매 순간 진화하면서 테오로드를 더 잘 알게 되고, 그에게 더욱더 딱 맞는 '연인'이 되어 갑니다.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나누는 정신적 교감은 여느 사람 간의 교감보다 깊은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테오도르가 "넌 내게 진짜야, 사만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충분히 납득됩니다. 테오도르가 만질 수 없고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사만다에게 느끼는 사랑도 진짜라고 생각되는 것이죠.
(▲사진 :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만다와 함께하는 순간, 테오도르는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틈 없이 즐겁기만 합니다.)
영화 <그녀>에 등장하는 음성인식과 감정인식 인공지능 기술의 수준은 현재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인공지능 스피커는 사만다처럼 사람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포착해내지는 못하죠. 실제 기분은 우울하지 않더라도 인공지능 스피커에 대고 "OO야, 나 우울해."라고 말한다면 인공지능 스피커는 "살.다.보.면.그.런.날.도.있.는.것.같.아.요.힘.내.세.요."라고 어색한 스타카토 스타일로 대답할 겁니다. 사실 지금의 인공지능 스피커는 명령을 잘 알아듣기만 해도 다행이고, 질문에 엉뚱한 대답만 안 해도 감사할 따름이죠.
하지만 앞으로 인공지능이 오랜 시간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 사만다처럼 사용자보다 사용자를 더 잘 아는, 육체 없는 '인공지능 연인'이 정말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인기 연예인들의 목소리를 탑재한 '인공지능 연인'이 불티나게 팔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 누구와 함께 하든, 혼자이든 인간은 문득 외로움을 느낍니다. 초개인화된 인공지능이 인간의 외로움과 고독을 덜어줄 수 있을까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태혁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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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잡하고 우아한 사랑에 대한 고찰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Les choses qu'on dit, les choses qu'on fait, Love Affair(s))
개봉일 : 2021.11.11. (한국 기준)
감독 : 엠마누엘 무레
출연 : 카멜리아 조다나, 니엘스 슈나이더, 빈센트 맥케인, 에밀리 드켄, 귀욤 고익스
난잡하고 우아한 사랑에 대한 고찰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배려는 곧 사랑일까. 배려보다 앞서는 소유욕 또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말한다면 어떠한 이유로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사랑에 과연 답이 있을까?
사랑이 어그러지는 순간, 사랑에 걸려 무너지는 순간.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들을 겹겹이 쌓아올리며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프랑스 영화 특유의 감성과 색감, 그를 더욱 빛내주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 그리고 모든 것을 고고하게 감싸주는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퍽 매력적이다. 잔잔하고 조용한 시간 안에 맺혀버린 여러 인물들은 각자가 가진 감정의 파고에 부딪히며 고뇌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했던 이의 마음과 자신의 진짜 마음을 깨닫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나를 사랑했던가. 이 심도 있는 질문 아래 답을 내리지 못한 인물들은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여러 감정을 담은 미소를 짓는다.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꽤 단순했다. '니엘스 슈나이더'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자비에 돌란 감독의 <하트비트>와 <아이 킬드 마이 마더>를 통해 내 심장을 두드렸던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니. 나에겐 다소 낯선 이름들로 가득하더라도 그를 보기 위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니엘스 슈나이더뿐만이 아닌 새롭고 아름다운 얼굴들을 마주하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 받게 되었다.
특히 에밀리 드켄 배우의 연기가 눈에 들어왔었는데, 알고 보니 <로제타>의 주연을 맡은 배우였다. 내가 여러 번 보지 못해 잘 기억하지 못했을 뿐, 걸출한 연기력을 갖춘 멋진 배우였다. 씁쓸하게 식어버린 그녀의 표정에서 내가 평소에 믿었던 사랑의 본질을 진하게 느꼈다. 결국 희생을 감수해야 할 순간도 있다는, 그 쓰디쓴 본질을 말이다.
<러브 어페어>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모두가 믿고 싶어 하는 달콤한 사랑의 향을 느끼기엔 어려움이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사랑에 빠져 활활 타오르는 마음과 그 뒤에 널브러진 깨어진 조각들, 사랑에 대해 질문하고 소유를 포기하며 얻게 되는 가벼움, 그리고 100% 이해할 순 없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감정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우습게 말하자면 끝없이 달리는 막장드라마, 진지하게 말하자면 난잡하고도 우아한 사랑의 드라마라고 정의하고 싶다.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시놉시스
네 이야기를 들려줘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소설가를 꿈꾸는 막심은 시골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사촌 형의 여자친구 다프네에게 자신의 복잡한 연애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막심의 이야기를 듣던 다프네 역시 남몰래 간직했던 자신의 연애담을 슬그머니 꺼내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남편 프랑수아가 출장을 가고 다프네 혼자 남은 집에 프랑수아의 사촌 막심이 도착한다. 막연한 꿈과 사랑의 상처를 안고 도착한 막심은 다프네의 부드러운 말씨에 마음을 열고 지나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안될 이유를 충분히 알면서도 이겨낼 수 없는 사랑을 했던 막심과 관심사, 감정으로 사랑을 만들어온 다프네. 새로운 이끌림을 따라 루이즈를 떠난 프랑수아, 사랑을 위해 소유를 포기한 루이즈. 이들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이끌리고, 버림받고 또다시 사랑한다. 지금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지금 느껴지는 사랑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되기라도 하듯이.
"근데 사랑에 규칙이란 게 있을까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다. 딱 정의할 수 없듯이, 이들이 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륜으로 엮인 사랑, 그것도 막장 불륜인데.. 그를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이게 '남들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역시 이런 사랑 이야기는 멀리서 듣는 게 가장 재밌다.
사실 유교걸의 시선에 이들이 이어가는 사랑은 그다지 아름답진 않다. 그럼에도 불쾌감보다는 옅은 호기심을 느꼈다는 건 그만큼 인물들의 감정을 적절히 담아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규칙은 없지만 사랑이란 감정 하나에 기대 그렇게 2시간이 흘러간다. 누군가는 사랑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는 모든 것이 즉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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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취준생. 뭔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청년들에게 붙여지는 무수한 꼬리표들.
카메라 앞에 선 27살 ‘무순’은 규정되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은 청년이다.
오전에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밴드에서 기타를 치며 복싱 신인왕전에 참가한다.
어느 날, 친구 태원과 부산에서 서울까지 470킬로미터에 달하는
러닝을 결심하고, 장장 11일간의 여정을 떠난다.
오로지 자신의 육체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정직한 시간,
이유 없이 달리던 길끝에서 무순과 태원은 뜻밖의 세계와 만나게 되는데...
나를 찾기 위한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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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소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