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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to2023-09-27 15:50:10

나 자신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리뷰

새로운 이야기가 주는 힘은 정말 강하다. 순수하게 즐길 수도 있지만, 힘이 아주 센 이야기는 자신의 세계 속으로 듣는 사람을 끌여들였다가도 성찰을 가능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주변에 있었지만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인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영화의 호흡과 주인공의 조그마한 목소리와는 달리 힘이 센 영화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내내 서울을 누비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는 첫 대사가 중국어여서도, 평소에는 가까이 볼 기회가 많이 없는 관광통역사라는 직업이 전면에 등장해서도 아니다. 주인공 한영은 중국을 거쳐 탈북한 후 서울에 자리를 잡으려 여행사 취직에 도전한다. 그가 경력을 쌓기 시작하면서 중국에서 함께 지낸 소녀 샤오와 동생과 함께 살자던 약속은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동생이 이따금씩 달라는 목돈과 브로커를 통해 고향의 어머니께 보내는 생활비가 지출의 대부분이다. 한영은 불평을 늘어놓지도 않고, 서툴지만 일터에서도 부지런히 성장한다. 영화에는 엄청난 불행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탈북자라는 성격에 방점을 찍어 약간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쉬운 길조차 택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영의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친절하고도 세심한 연출을 동력 삼아 성장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영화에 감도는 공허나 근심의 분위기는 묘연해진 동생의 행방이나 불법체류로 시작해 한국에서 일하고 싶은 샤오가 서울 투어 도중에 사라지는 사건, 갑작스러운 실직과 같은 사건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고민은 현실의 고단함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정체성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한국인이지만 여전히 탈북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한영과 그의 주변인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 즉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과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 사이에서 헤맨다. 한영의 이야기는 불투명한 미래라는 보편적인 요소와 동시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동시에 전달한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관객에게 다가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었지만 한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객의 성찰을 가능케 한다. ‘모습만 같지, 한국 사람들한테 외국인들보다 못하다라는 극중의 대사처럼, 같은 땅을 밟고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살아가는 한국인 관객으로서, 더 나아가서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는 관객들로서는 일상 속에서 가 닿을 수 없었던 고민을 곽은미 감독의 이 세심한 영화는 찬찬히 들려준다.

 

 

 

 

한편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이 신뢰할 수 있는사람’, 그리고 무언가를 믿는사람이라는 두가지 뉘앙스로 읽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탈북민으로 살며 자신의 담당 경찰관이 감시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조금은 의심받는 존재라고 생각해오던 한영을 그리던 영화가 종국에는 멋진 성장영화로 거듭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영의 친구 정미는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선택한 한국 국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이민을 준비한다. 그리고 같은 고민을 가진 존재로서 너를 위해서 살아라라는, 단순한 것처럼 들리지만 쉽지 않은 조언을 던진다. 한국에 오기 전에 꿈꿨던 것들, 다시 말해 돈을 많이 벌어 가족과 모여 살리라는 한영의 목표는 최종적인 것이었지만 이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 되기 시작한다. 방언에서 표준어로 조금씩 변화하는 억양, 상심과 고민에 찬 얼굴을 거뜬히 소화해내는 배우들, 그리고 존중과 따스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쓰고 촬영해낸 곽은미 감독의 솜씨에 이러한 도약까지 더해지면서 관객은 영화 말미에 관객이 바라보는, 긴장되고도 결의에 찬 한영의 걸음을 벅찬 마음으로 따라간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조용한 용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용기를 관객석까지 가져다 준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작성자 . ri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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