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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댕이2021-03-26 21:51:19

살아있어, 뜨겁고 치열하게

<120BPM> 2017, 로빈 캉필로 감독

살아있어, 뜨겁고 치열하게
 

 

 
 
 
 
 
"액트 업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학술회로 추정되는 무대에서 누군가가 발표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 단체가 무대 뒤에서 좁은 틈을 통해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 발표자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이 확성기 소리와 함께 무대에 들이닥친다. 이들은 '액트 업 파리(ACT UP PARIS)'다. 이어서 영화의 타이틀이 뜬 후, 영화는 곧장 관객을 이들의 회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관객은 주인공 '나톤'이 액트 업 파리의 신입 회원으로 들어가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보며 영화의 시작부터 간접적으로 액트 업 파리의 구성원이 된다. 빈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이들의 회의는 이 영화의 핵심이 집결되는 곳이다. 회의실은 치열한 토론의 현장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단체의 활동 방향에 대해 토론하며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계획한 활동을 실행한 후에는 그 결과에 대해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다시 토론하며 찾아낸다. 회의실은 다양한 의견이 공유되는 공간인만큼 그만큼의 갈등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이들은 서로의 의견이 불일치할 때, 때로는 서로를 공격하는 것을 서슴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당장의 갈등보다도 자신의, 모두의 생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회의실은 에이즈(AIDS) 교육의 현장이다. 이들은 에이즈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가 생길 때마다 회의실에서 발표하는 형태로 그 내용을 함께 공유한다.
 
 
영화의 회의 장면들이 사실감 있게 구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화를 연출한 로빈 캉필로 감독이 실제 ‘액트 업 파리’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이 있다. 실제로 로빈 캉필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액트 업 파리 운동을 하고 나서 25년이 지났는데도 에이즈 HIV 감염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자신이 예전에 활동했던 걸 영화로 만들어서 문제의식을 부각하고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영화는 '액트 업 파리'라는 단체의 성공담을 담아낸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의 종반부에 다다르면 액트 업 파리는 결과로 보자면 사실상 실패한 단체였음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다. 액트 업 파리의 승패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다가오는 실패의 결과를 보이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에 대해 덤덤한 태도를 취한다. 또한 이 영화는 거창한 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에이즈나 액트 업 파리에 대한 다수의 정보를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통해 관객을 깨우치려는데 주목적을 두지 않는다. 교육적인 측면이 강한 영화인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은 아니다. 영화는 정보의 전달보다도 그 내부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모습과 그들이 열정적으로 투쟁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담아내는데 주력한다.
 
 
 
 
"살아있어, 이렇게 뜨겁게"
 
영화의 제목 '120BPM'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사전적 의미를 보자면, 120BPM은 1980~90년대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하우스 뮤직의 사운드 리듬을 의미한다. 실제로 80~90년대 유럽 클럽, 그중에서도 게이 클럽에서 주로 틀던 음악의 대부분이 120BPM 하우스 음악이었다. 영화에 사용된 음악 또한 마찬가지로 모두 같은 120BPM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120BPM은 또한 사람의 심장이 뛰는 속도, 심장박동수를 의미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들처럼 춤을 출 때나 섹스를 할 때의 빠른 심장 박동 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음악을 듣다 보면 그 박자가 사람의 심장 박동처럼 들리는 순간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나 영화의 시작점에서부터 들리던 느린 박자의 비트는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금 선명하게 들릴 때 그렇게 느껴진다.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로 시작되던 영화가 다시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를 내며 끝나는 것이다. 이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수미상관은 이 영화의 교차편집 시퀀스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교차편집 시퀀스와 그 의미가 정확히 일치한다.
 
 
영화에는 액트 업 활동과 춤이 병치되는 시퀀스가 네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는 멜톤 제약 연구실에 쳐들어가 결과를 촉구하는 시위를 한 후 돌아오는 장면에서 클럽에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두 번째에서는 어느 학교에서 에이즈 예방법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세 번째에서는 미테랑에 대한 시위행진을 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영화의 가장 마지막이자 네 번째에서는 보험업자들에게 션의 재를 뿌리며 정치 장례를 하는 장면에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클럽의 부유하는 먼지는 곧장 에이즈 바이러스로 변해 그것이 어떻게 체내 세포를 공격하는지를 시각화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는 춤을 추는 장면 뒤에 나톤과 션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곧장 이어지고, 세 번째 시퀀스에서는 춤을 추는 장면과 나톤이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는 장면에 이어 병상에 누워있는 션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교차편집 시퀀스이다. 마지막의 교차편집 시퀀스는 두 장면을 병치해 만든 앞선 세 교차편집 시퀀스와 그 형식이 다르다. 션의 정치 장례와 액트 업 구성원들의 춤, 나톤과 티보의 섹스. 이 세 장면이 빠르고 촘촘하게 이어지며 반복된다. 마지막 교차편집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라 할만한 부분이며, 사실상 앞선 세 교차편집 시퀀스를 압축해 보여주는 시퀀스다.
 
 
다시 앞선 세 시퀀스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교차편집 시퀀스는 에이즈가 인간의 몸을 공격하는 방식 즉, '죽음(死)'으로 끝나며, 두 번째 교차편집은 나톤과 션의 섹스 즉,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 세 번째 교차편집은 병상 위에서 힘겹게 숨 쉬고 있는 션 즉, '생(生)'으로 끝난다. 이제 마지막 교차편집 시퀀스를 들여다보자. 션의 죽음 이후 액트 업 구성원들은 그의 평소 바람대로 정치 장례를 준비한다. 그들은 파티에 가 보험업자들에게 션의 재를 뿌린다. 모두가 함께 재를 뿌리는 순간에 그들이 춤을 추는 모습과 나톤과 티보의 섹스 장면이 교차편집된다. 마지막 시퀀스의 빠른 교차편집 안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빠르게 병치된다. 그들은 자신들은 죽지 않았음을,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음을 춤을 추고 섹스를 하며 세상을 향해 증명한다. 바로 이 순간,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었던 박자의 비트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같은 박자에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이윽고 비트가 멈추고, 화면이 완전히 암전 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때의 고요한 침묵은 관객이 액트 업의 구호 "Silence = Mort(Death)"를 떠올리게끔 만든다.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영화를 보던 관객은 적어도 그 순간 사유할 시간을 갖는다. <120BPM>은 관객에게 엄청난 수준의 계몽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작점부터 이 영화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대신 영화는 1980년대 당시를 살아내던 소수자들의 열정과 투쟁, 그리고 그 안의 연대를 멜로 드라마의 형태로 그려낸다. 그 속에서 그들은 열렬히 사랑하며 무엇보다 소중한 1분 1초의 순간을 살아내기 위해 끝까지 투쟁한다. 이들의 절박하고도 아름다운 열정의 몸부림은 현시점에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다고. 뜨겁게, 그리고 치열하게.
 

 

작성자 . 코댕이

출처 . https://brunch.co.kr/@young-sikogi/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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