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2025-07-16 12:45:09
[BIKY 데일리] 차가운 것이 좋아!
웨스트비키 개막작 <차가운 것이 좋아!> 리뷰
<차가운 것이 좋아!>
시놉시스
좀비 병이 범람하는 좀비 엔데믹 시대지만 상황은 역전되어 좀비들이 인간을 피해 도망쳐 다닌다. 좀비 소탕팀에서 일하는 계약직 공무원 나희는 말하는 좀비인 은비를 돕게 되고, 알래스카로 피신시키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약자들의 연대의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를 좀비물로 은유하는 작품. B급 감성을 앞세워 기성의 아포칼립스 좀비물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현실이다. (출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감독 및 출연진
감독: 홍성은
출연: 박유림, 방원규, 김대건, 손예원
대국민 좀비 종식선언!
영화는 브리핑룸에서 시작된다. 정부의 ‘대국민 좀비 종식선언’이 이어지고, 계약직 공무원 ’나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좀비를 소탕하는’ 업무에 충실히 임한다. 좀비바이러스는 이미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들었고 ‘좀비토탈원케어서비스’와 같은 산업군까지 생기는 무렵이었다.
이 영화는 위와 같이 ’일상의 좀비‘에 대해 이야기한다. 좀비를 죽이는 일이 곧 업무인 나희와 공무원들, ‘사랑하는 연인이 좀비가 된다면?‘이 대화 주제가 되는 상황들, ’은닉좀비신고‘ 캠페인, 나뒹구는 좀비 관련 서비스 홍보물들 등…그런데 이러한 일상들이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 중심의, 편향된 관점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꼬집는다.
좀비의 인권에 대해 외치는 ’저온인간해방단‘은 좀비를 저온 환경에서 생존이 가능한 인간으로 정의한다. 실제로 인간과 좀비를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과연 구분이 가능한 것일까? 만약 인간을 ‘이성’의 유무로 구분하자면, 영화에서의 ‘은비’처럼 인간과 대화할 수 있고 인간의 생명까지도 구하는 좀비는 그 자체로 딜레마다.
이 영화에서의 인간과 좀비는, ’나희‘와 ’은비‘로 칭해진다. 그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사랑하고 살고 싶어 한다.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건 단순히 ‘좀비바이러스의 유무’일 뿐이다.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 공존의 이야기
결국 좀비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아니라 좀비바이러스에 걸린 인간이다. 위 영화에서는 좀비바이러스 치료제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처럼 좀비와 인간은 같은 존재로서 서로의 ‘상태’를 오갈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자가격리를 하고 백신을 접종받았던 나와 이웃들의 모습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질병에 걸릴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약자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 기온이 높은 곳에서는 온몸이 썩어버리기 때문에 알래스카로 향하던 은비에게 나희는 말한다. “그러게 인간은 모두 썩지”. 서로의 다름과 닮음을 이해하고 여정을 함께한 이들처럼 공존이 서로를 보호할 수 있다.
<차가운 것이 좋아!>는 기존의 좀비 영화와는 다른 질문을 한다. “좀비는 다 죽어야 할까?“.
살고 싶어 하는 좀비, 인간을 살리는 좀비,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좀비… 기존 문법과는 다른 이 영화의 참신한 설정들은 인간성, 인권, 연대에 대한 짙은 잔상을 남긴다.
영화의 한줄평
좀비는 다 죽어야 할까?
상영일정 in BIKY
2025.07.13(일) 중극장 17:30
2025.07.15(화) 서하구청2청사 대강당 18:10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기간 : 07월 08일 - 07월 19일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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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노동자의 삶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예술 작품은 1990년대 이후로 찾아보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독재정권이 폭력을 휘두르던 시기와 노동운동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의 노동자는 1960년대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이 만든 '산업화' 전략의 결과물이다. 그 전까지 농업국이던 한국이 경공업 제조를 시작으로 '수출입국'을 국가의 경제전략으로 채택한 이후, 독재정부와 자본가는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것이 절실해졌다.
독재국가가 주도하는 경제 정책은 구체적으로 개인의 삶에 직접 타격을 가한다. 박정권은 농민의 삶에 기본이 되는 쌀값을 '저곡가 정책'으로 유지하면서, 농촌의 청년들이 도시와 공업단지의 노동자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든다. '저곡가 정책'은 박정권에게 일석이조의 이득이 있었는데, 농민에게는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도시에 사는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은 주식인 쌀을 싸게 사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저곡가 정책'은 도시와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저임금' 구조로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태어난 세대는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로, 인구 전체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이들이 성장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박정권이 산업구조를 농업에서 경공업으로 이동하던 시기였고, 농촌에는 '잉여노동'이 넘쳐나고 있었고,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경공업 분야에서 낮은 임금으로 일할 조건이 갖춰지고 있었다.
청계천 섬유 노동자 - 거의 대부분 여성이며, 어린 여성들이었다 - 들이 하루 18시간 이상 노동하면서 받는 임금은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했다는 전태일 열사의 기록도 있는 것처럼, 이 시기의 노동자는 인간 이하의 처우에서 고통당하고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직접적 원인도 노동조건의 열악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노동자로 처음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1975년 무렵이었다. 동네에 있는 대나무 낚시대 공장이었고, 가내수공업 규모였다. 두번째는 압핀을 만드는 공장이었고, 세번째는 유리병 만드는 공장이었다. 모두 작은 공장이었고, 노동자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노동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고, 임금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공장에서의 노동은 저임금에 단조로운 노동으로 인간성이 말라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장 노동자로 산다는 건, 자본의 노예라는 거창한 이유를 떠나 원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단조로운 노동을 오래 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자체가 심각한 고통이다. 나는 공장을 떠나 건설현장으로 옮겼다. 소위 '노가다'라고 불리는 건설현장은 공장 노동보다 더 힘든 부분도 있지만, 공장의 부품처럼 움직여야 하는 기계적, 반복적, 단조로운 노동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면이 많은 것이 장점이었다. 게다가 임금도 공장보다 많았다.
육체노동은 힘들었지만, 한곳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으며, 자율성이 상당히 있고, 숙련도에 따라 임금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어서 나에게는 공장보다 건설현장이 더 좋았다. 길지 않은 공장 생활에 질린 나는 다시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더구나 건설현장은 지방으로 다니면서 오히려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것보다 더 좋은 환경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 지방을 전전하며 건설노동자로 일하다 군대에 다녀왔고, 다시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그때가 1987년 무렵이었고, 나는 구로공단에 있는 작은 도금공장에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순간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목격했다. 이 시기의 구로공단은 197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은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고, 상당수 노동조합이 민주노조였다. 노동조합의 절대 수가 늘어난 것은 1987년 이후였고, 공단 주변의 닭장집, 벌집은 그때도 남아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 경공업 분야의 공장에서 노동착취와 열악한 노동환경이 심했고, 그만큼 노동운동의 투쟁력도 강했다. 여성들은 약하지만, 여성노동자는 강했다. 그들은 끈질기게 투쟁했고, 온갖 물리적 폭력과 모욕을 견뎠다.
영화에서는 1970년대 닭장집이 나오고, 인분을 뒤집어 쓴 여성노동자의 모습도 보여준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독재를 거쳐 1980년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 군사독재까지 무려 27년 동안의 군부독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은 '빨갱이'로 매도당하며 처절하게 짓밟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사회는 독재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이전했다. 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사회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 전반의 확대와 노동자의 삶도 나아졌다. 한국전쟁 이후 수천만 명의 노동자의 피와 살을 갈아넣어 이룩한 산업화는 자본가의 배를 불렸으며, 노동자에게도 아주 적은 몫이 돌아갔다.
기업은 성장했지만 노동자의 삶은 자본가가 배를 불리는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개선이었으며, 그마나도 1997년 구제금융 사태가 발발하면서 노동자의 삶은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한국에서는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임시직, 이주노동자와 같은 수 많은 갈래와 분류가 나타났고, 이는 노동자를 쥐어짜고, 경쟁시켜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자본의 의도가 짙게 깔여 있었다.
영화에서는 20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고통 당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기업이 외국에 진출해서 그 나라의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발생하는 문제,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의 비참한 노동현실, 이랜드 노동자, 마트 노동자, 항공사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물리치료 노동자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육체적, 감정적 노동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데, 노동의 형태와 조건은 조금씩 좋아졌을 수 있고, 달라졌지만, 본질에서는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노동자는 여전히 자본의 노예이며, 임금을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는 비자율적 존재이자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는, 사슬 없는 노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노동운동' 등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다. 자본가와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제외하고도 노동자와 그 가족은 전체 인구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정작 노동자들은 자기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왜곡된 사회 체제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는 특권 계급이 되었으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임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자신들과는 다른,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기괴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오늘 날, 아무도 귀기울여 듣지 않는 외로운 메아리가 되었다.
노동자의 분열을 가장 기뻐하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노동자들이 서로 싸우고, 비난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자본은 노동자를 더 쉽게 해고하고, 임금을 낮추며, 노동조건을 나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자본가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고, 노동자는 자기들의 노동으로 번 돈이 자본가의 배를 불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노예 상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본이 던져주는 약간의 먹이를 받아먹으며 고마워할 뿐이다.
영화는 노동자의 투쟁과 노동조합의 노동운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의 개인적 삶에 주목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어머니가 동대문에서 섬유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에서 주목받았던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한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말하는 것만으로 지나온 과거의 노동 조건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증언한다. 그리고 그런 열악하고 비참한 노동 조건과 현실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도 말한다. 예전에는 '감정노동', '정신노동'이라는 개념도 없었지만, 모든 육체노동자는 감정노동과 정신노동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걸 자본가는 모른 채 할 뿐이다. 노동자의 인권은 과거보다 향상되고 있지만, 여성노동자는 남성노동자와 비교할 때 이중, 삼중의 차별을 받고 있으며, 저임금, 성적 학대, 동등한 기회의 박탈 같은 심각한 차별과 싸우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는 독재정권과 자본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악과 싸워야 했고, 그래서 더 큰 상처를 입었다.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부르주아정부와 자본은 더욱 교묘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노동자를 통제하고 착취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단결, 투쟁하기가 과거보다 더 어렵다. 형식은 달라져도 노동자가 당하는 결과는 늘 똑같다. 일자리를 뺐기고, 돈을 벌 방법이 사라지면 굶어죽을 자유밖에 남지 않는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고, 그것을 아는 노동자는 두려움에 떨며 자본의 폭력 앞에 납작 업드려 죽은 듯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게 된다.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는 '단결'인데, 지금 '신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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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수녀들 | 길 잃은 오컬트와 빛바랜 여성 서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등학생 ‘희준’(문우진)은 자살을 시도했다. 자신에게 숨어든 악령을 내쫓기 위해. 하지만 악령은 좀처럼 희준의 몸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구마를 시도하던 장미십자회 소속 '안드레아 신부'(허준호)도 악령의 힘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유니아 수녀'(송혜교)는 이 악령이 12 형상 중 하나라고 확신하고, 구마 사제가 없더라도 구마 의식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렇지 않으면 희준은 곧 죽을 테니까.
하지만 희준의 담당의 ‘바오로 신부'(이진욱)는 구마의식을 의심하며 정신과 치료만으로도 차도가 있다며 유니아의 계획에 협조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녀는 바오로 신부의 제자인 ‘미카엘라 수녀'(전여빈)가 자기처럼 악령을 느낄 수 있다는 비밀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막무가내로 도움을 요청한다. 미카엘라는 자기 과거를 희준에게 투영하며 유니아를 돕기로 결정하고, 두 수녀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구마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또 실패한 한국 영화 속편
한국 영화의 속편 제작 소식은 그렇게까지 기대받는 뉴스가 아니다.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호평받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해적 2>, <국가대표 2>, <강철비 2>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작품들의 속편만 보더라도 '형만 한 아우 없다'라는 속담이 유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나마 <신과 함께>, <범죄도시> 시리즈처럼 애초에 시리즈물로 기획되는 경우가 예외일 뿐이다.
전편의 성공을 이어받지 못한 속편들은 공통점이 있다. 제목 외에 연속성이 없다. 이름만 같을 뿐, 배우부터 캐릭터와 감독까지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시리즈만의 장점보다는 단점만 부각된다. 시리즈 특유의 매력을 기대하는 관객이 오히려 실망할 가능성도 커진다. 음식점으로 치면 프랜차이즈 식당인데 지점마다 메뉴도 레시피도 다른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검은 수녀들>도 염려가 컸다. <검은 사제들>과 세계관은 같지만 감독, 배우, 캐릭터가 달라졌으니까. 특히 장재현 감독의 부재가 걱정이었다. 아무나 오컬트의 장르적 쾌감과 대중성을 조화시키지는 못하기 때문. 안타깝게도 <검은 수녀들>은 우려를 불식하지 못했다. '여성 오컬트'를 표방했지만, 오컬트를 살리지 못한 나머지 여성 서사만의 매력을 놓쳤다. 그 결과 <검은 수녀들>은 세계관을 확장하는 도구로만 소모되고 말았다.
가톨릭과 여성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검은 수녀들> 속 여성 서사는 예상된 수순이다. 그런데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꽤 흥미롭다. 여성과 종교의 관계성을 깊이 파고들기 때문.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여성의 영성을 이중적으로 대했다. 성모 마리아 공경 교리나 성모 발현 기적 사례는 교회 내에서 강력한 종교적 상징으로 기능한 여성의 영성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여성의 영성은 상징성이 큰 만큼 경계의 대상이었다. 교회 제도 내에서 수녀로서 영성을 발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교회와 사제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이는 중세 시기에 교회가 민간 신앙 혹은 신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전통을 부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권력이 약화되자 굳이 '마녀'를 외부의 적으로 상정한 역사 역시 여성의 영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방증한다.
<검은 수녀들>은 이러한 가톨릭과 여성의 관계에 주목했다. <검은 사제들>이 정통성 있는 구마의식을 다뤘다면, <검은 수녀들>은 그 이면에 존재한 비정통성을 다룬 셈이다. 영화 곳곳에 그 의도가 녹아 있다. 중세 시기라면 마녀로 몰렸을 정도로 특별한 영성을 두 주인공이 소유한 설정이 대표적이다. 바오로 신부와 같은 일반 사제들이 구마의식의 효용성을 부정하거나 수녀의 구마의식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무속도, 타로도, 자궁 타령도 억지는 아닌 이유
그렇기에 자칫 뜬금없을 설정도 <검은 수녀들>에서는 마냥 작위적이지 않다. 여성의 영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무당이 등장하고, 굿으로써 악령을 쫓아내려 하고, 수녀가 타로 점을 보는 전개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 정통 제도 종교의 영역의 밖에서 이어져온 여성의 여성을 한국이라는 공간적 맥락 안에서는 무당과 무속 신앙이 상징하기 때문이다.
악령의 존재를 남들과 다른 청각과 시각으로써 인지할 수 있는 두 수녀의 특별한 능력도 좋게 말하면 영성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미친 것이고, 한국적으로 표현하면 신내림을 받은 셈이다. 미카엘라가 타로 점을 볼 줄 아는 것 또한 제도 종교 외부에서 생명력을 유지한 종교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 간의 접점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구마 방식도 마찬가지다. 악령은 유니아를 창녀라고 모욕하면서 자궁을 영영 못 쓰게 만들겠다고 위협하고, 그녀는 실제로 자궁암을 앓는다. 하지만 그녀는 악령을 자궁에 가둔 뒤에 파괴하면서 그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마녀가 악마와 성교를 하고, 악마의 아이를 낳는다는 중세 시대의 소문과 전승을 뒤집은 이 전개 역시 제도 밖에서 유지된 여성의 영성이라는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극 중 구마 의식도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두 수녀는 구마의식을 같이 진행하면서 신뢰를 쌓기 전까지는 세례명이 아닌 본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악마의 이름을 알아내는 게 구마의식의 핵심인 것을 고려하면 이는 의미심장하다. 두 수녀가 스스로를 가톨릭 교회 속하지 않는 괴물, 마녀, 악마로 여겼음을 암시하니까. 즉, 유니아와 미카엘라는 악령 들린 학생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구마하고 치유한 셈이다.
오컬트 없는 여성 오컬트
이처럼 종교사 이면에 숨은 여성의 영성을 중점적으로 묘사했기에 <검은 수녀들>의 스토리텔링은 흥미롭다. 문제는 차별화된 주제 의식과 소재가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 이유는 명확하다. 여성 오컬트를 표방하지만, 정작 오컬트가 없다. 드라마에만 힘을 준 나머지 오컬트 영화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 대가로 종교적 맥락과 깊이 연관된 서사도 덩달아 힘을 잃는다.
우선 오컬트 분위기를 조성할 디테일이 부족하다. <검은 사제들>은 치밀했다. 의식의 순서마다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일례로 구마 사제는 여성의 분비물을 몸에 뿌린다. 본래 수컷이라서 남자 육신을 취하려는 악령에게 성별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에 반해 <검은 수녀들>에서는 두 수녀가 하는 행동, 외우는 기도문, 준비한 성물 등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구마 예식은 지나치게 가상적으로 느껴진다.
디테일이 없다 보니 구마의식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누가 됐든 악마를 못 이길 것 같으면 성수를 잔뜩 쏟아부은 후에 예식을 다시 시작하는 식이다. <파묘>에서 '이화림'(김고은)이 여러 형태의 굿을 보여줬던 것과 비교하면 오컬트 특유의 재미가 현저히 부족하다. 악령의 권능도 비교적 단순하게 묘사된다. 주변 사물로 구마자를 해하거나 겁 주고, 구마의식을 방해하기 위해 쥐를 풀어서 도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정도다.
구마의식은 스토리텔링을 이끌지도 못한다. <검은 사제들>의 구마의식은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악령은 여동생과 관련된 '최준호 아가토'(강동원)의 트라우마를 악용했고, 그는 간신히 악령을 이겨냈다. <검은 수녀들>은 다르다. 미카엘라는 자기처럼 영성을 지닌 친구가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만, 악령은 이를 이용하지 않는다. 유니아 역시 별다른 약점이 없다 보니 구마의식은 단순한 볼거리로 소비된다.
스스로 맥을 끊다
그 결과 종교적 맥락 내에서 전개돼야 할 여성 서사는 부자연스럽고, 오독될 소지도 크다. 사제들이 수녀라는 이유로 유니아를 억압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본래 의도대로라면 종교 내에서 여성의 영성이 경계받는 미묘한 긴장감이 전해져야 한다. 그러나 오컬트 분위기가 약하다 보니 이 장면은 여성 차별적 구도 안에서 여성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평면적이고 편의적인 연출처럼 느껴진다.
드라마의 잠재력을 스스로 제약하는 결과도 초래했다. <검은 수녀들>은 바오로 신부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희준이 겪는 일련의 현상이 악령에 의한 것인지, 단순한 정신병인지 유니아도 확신하지 못하는 식으로 초중반부를 연출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바오로 신부와 유니아의 갈등은 일차원적 남녀 대립 구도를 넘어서서 정통성과 비정통성의 충돌이라는 종교적 맥락을 입체화하고 강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는 바오로 신부와 유니아가 결국 협력하게 되는 전개를 더 극적으로 꾸미고, 원칙주의자인 바오로 신부의 매력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검은 사제들>과는 다른 과점에서 구마의식을 조명하며 세계관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가능성이 무위에 그친다. 그 결과 <검은 수녀들>의 결과물은 지나치게 <검은 사제들>을 의식한, 전작 주인공의 성별만 뒤바꾼 열화판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기술적 완성도 때문에 아쉬움은 더 크다. 초반부와 후반부에 왕왕 등장하는 부자연스러운 컷 전환은 오컬트 특유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긴장감 조성을 방해한다. 한국 영화의 고질병인 음향 문제도 재발했다. 구마의식 중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사 내용이 들리지 않을 정도다. 배우들도 빈 공간을 채우지 못한다. 희준을 연기한 문우진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수녀복, 사제복을 입은 채로 이전 캐릭터를 되풀이하는 듯하다.
세계관은 커졌지만
결국 <검은 수녀들>은 한 가지 미덕만 남긴다. 바로 <검은 사제들>의 세계관을 확장했다는 것. 성공한 작품의 외피만 빌려 쓰는 대신 두 작품을 엮어 본격적으로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야심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장미십자회의 존재와 역할을 더 부각하고, 12 형상이라는 설정을 구체화하면서 속편의 토대를 다진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최준호 아가토의 재등장도 단순한 팬서비스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다만 이 또한 일장일단이 있다. <검은 수녀들>은 <검은 사제들> 세계관을 위한 발판, 그 이상 그 이하의 인상을 주지 못한다. 마치 <아이언맨> 이후 <어벤져스> 개봉 전까지 <아이언맨 2>, <토르: 천둥의 신>, <퍼스트 어벤져>를 공개한 MCU를 보는 듯한 인상이다. 만약 속편이 나오더라도 유니아의 빈자리가 그리 커 보이지 않다는 점, 그리고 최준호와 미카엘라의 향후 활약상이 그다지 기대되지 않는다는 점이 그 방증이다.
Poor 형편없음
방향은 맞았으나 길을 잘못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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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산업의 침체의 이유
관객들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과거의 흥행 공식에 매달려 진부해지는 작품은 관객들에게 혼쭐이 난다.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만들어준다. OTT 서비스의 확대가 그 흐름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개인화되는 시대에 관객의 '특정' 취향에 맞지 않는, 그야말로 대중이라는 거시적인 관점만을 노리는 작품들은 이제 쉽게 흥행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릭레이어>는 해외에서 먼저 개봉했다. 그 성과 또한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놀랍지 않다. 흥행에 실패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영화를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시놉시스의 몇 글자만 본더래도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이 영화는 몹시 '진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 적 CIA인가? 언제 적 비밀 요원인가? 그리고 언제 적 은퇴한 요원의 복귀를 그리는 이야기인가.
놀랍게도 이 작품은 '할리우드식 액션'의 정형화된 공식을 보여준다. 그게 사실이다. '이 장면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오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꿈보다 이 영화가 미래의 확신을 준다.
은퇴한 CIA 요원은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아주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다. 무려 '벽돌공'이다. '브릭레이어'라는 영화 제목은 말 그대로, 단순하게 벽돌공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사용한 거다. 평범한 벽돌공이 힘을 숨긴 이야기라니. 평상시에는 벽돌을 쌓는 사람이 알고 보니 CIA 요원이었던 놀라운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곳에서 이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디서든.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CIA의 세계적 신용도를 떨어뜨림으로써 혼란을 야기하려는 어떠한 세력이 등장한다. 그 세력의 중심에는 수상한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주인공의 한때 돈독하던 친구다. 한때 CIA 요원으로서 함께했고, 미래가 유망하던 둘이었다. 이제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게 된 둘은 다른 지향점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 목숨을 걸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분명 <브릭레이어>의 이야기는 아닐 텐데 어디서 볼 법한 내용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흔한 이야기라는 거다. 흔한 이야기를 전하려면 그 방식이 특별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 방식 또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정형화'되어 있으니까.
은퇴한 요원은 그 비뚤어진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CIA에 돌아온다. 응징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말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해결하겠다"라는 웅장한 마음가짐은 덤. 이런 땀내 나는 이야기에 여성 배역이 빠지면 섭섭하다. 아름다워야 하고,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정형화된 흥행 공식이니까.
당연히 둘은 서로 투덜대야 한다. 그렇지만 증오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서로 사랑인 듯 사랑 아닌 묘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면 그게 정형화된 공식이다. 마초이즘의 둔탁하고 거친 느낌을 다소 완화해 줄 완충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런 장르의 여주인공 존재 이유가 된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게 흥행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하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나. 그렇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 흥행 공식은 이제 없다는 거다. 이 영화는 그래서 어떠한 관점에서 보면 2010년대 영화 같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마치 남자 주인공이 요원직에서 은퇴했지만 이번만큼은 비밀 작전에 나서는 것처럼.
서로 챙기고, 돕는다.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돕는다. '하이, 큐!' 사인이 떨어지면 준비됐다는 듯 카메라 바깥에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인위적인' 움직임이다. 과거에는 통쾌했을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을 한 순간에 풀어주면서 쾌감을 느끼게 했을 거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그렇게 하겠다' 싶으면 어디선가 여자 주인공이 차를 끌고 온다. 어디선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살리러 온다. 서로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기 위한 "명대사" 한 두줄은 필수다. 이런 정형화된 공식은 플롯에서 관객을 이탈하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다. 갑자기 영화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감독'이 된다. '지금 입장해!' '지금 도망쳐!' 관객이 만든 이야기도 아닌데, 적재적소에 예측하는 대로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다.
위험은 언제 어디서나 도사린다. 서스펜스를 만드는 연출은 필수이며,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 빌런도 있다. 그 빌런이 눈을 감기 전까지 주인공도 어디서나, 어떤 고난에서든 살아남는다. 전형적인 위기-극복 서사다. 극복 서사가 당연해지니 주인공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든지 관객은 서스펜스를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극복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 살아 돌아온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누가 다 알면서도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해외에서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관객은 우리나라 관객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국내 관객도 해외 관객과 수준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브릭레이어>가 국내에서 흥행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우리는 가질 수 있겠는가. <브릭레이어>의 국내 흥행 실패도 예견된 수순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국내 영화 산업이 침체기를 겪는 상황에서 여러 곳이 그 돌파구를 제시하며 기존의 것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소위 '중박'용 영화 생산을 멈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이익을 위한 영화'만 생산되고 그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당연히 흔해빠진 구성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급급해진다. 그런 문제점들은 관객들의 외면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비 인식마저 높인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으면 관람하지 않겠다'라는 의지가 생긴다. 그 선례가 <서브스턴스>, <해피엔드>다. 입소문이 나거나, 충분히 볼 가치가 있어야 하는 작품만 살아남고 있다. 지금까지는 해외 영화들이 그런 점에서 선전하고 있다.
<브릭레이어>는 그런 점에서 해외 영화임에도 국내 영화 특유의 문제점을 수반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일종의 오답 노트가 되어주고 있다. 당연히 미국 영화 산업도 침체를 맞으며 내부적으로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이제는 정말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지나치게 드러내면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사기 쉽다.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는 영화들은 이제 그만 나올 때가 됐다.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다녀온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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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건만 할 수 있는 영화
MCU에서 감초 같은 매력을 뽐내는 우주의 수호자들이 마지막 편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가 개봉하고 극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 히어로답지 않은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우스꽝스러운 면모는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이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2>(2017)은 전편보다 더 휴머니즘이 녹아들고, 어울리지 않았던 이들의 케미가 화려한 폭죽처럼 폭발했던 시리즈였다. 그리고, 이번 마지막 편은 여태껏 메가폰을 잡은 제임스 건 감독의 가히 '걸작'이라고 표현해도 될 법한 영화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스틸컷
제임스 건 감독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각본, 감독한 사람이다. 누구보다 캐릭터들의 매력과 장단점을 확연히 알고 있을뿐더러, 제임스 건 특유의 B급 개그와 휴머니즘 정서에 매우 잘 맞는 영화가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다. 이번 영화를 끝으로 제임스 건 감독은 마블에서 떠나기 때문에 영화는 그가 쏟아낼 수 있는 능력을 마음껏 쏟아붓는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다 드러낸다. 특히, 하이 에볼루셔너리 전투선에서 선보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하 가오갤) 멤버들이 펼치는 롱테이크 전투 장면은 캐릭터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보여주는 연출이었다. 그 밖에도 영화 전체적으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담당했던 감독답게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을 남김없이 활용한다.
영화 개봉 전부터 제임스 건 감독은 이번 영화는 '로켓'을 메인으로 잡았다고 언급했었다. 확실히, 로켓의 과거와 함께 플롯이 진행한다. 필자는 영화를 접하기 전, 감독의 의도를 로켓이 희생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오히려 로켓이 새로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리더가 되는 시리즈의 마무리이자 새 시작을 알리는 '가오갤'만의 '엔드 게임'이었다. 애초에 로켓이 리더가 될 거라는 복선은 영화 초반부터 있었다. '퀼'(크리스 프랫)을 상징하는 낡은 미디어 플레이어 '준'을 로켓이 처음부터 들고 노래를 트는 장면부터 로켓이 나중에 저 '준'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준'은 욘두가 퀼에게 준 유품이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뮤직 플레이어다. 그전에 사용했던 '소니 워크맨'만큼이나 퀼이 전투를 할 때나 우주선을 비행할 때 등 늘 그의 곁에 같이 있는 소중한 물건이다. 그런 물건이 로켓한테 갖고 있다는 것은 퀼에게 어떤 이유로 가오갤에 함께할 수 없게 되고 더불어 비어있는 리더의 자리를 로켓이 맡을 것이라는 복선이 된다. 그리고, 퀼은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은퇴와 그 자리를 로켓이 맡게 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2>(2017)에서 욘두가 퀼에게 남긴 '준' 플레이어는 전부터 사용했던 '소니 워크맨'보다 최신 기종이었기에 이번 영화는 보다 다양한 시대와 장르 음악이 등장해 다채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가오갤'의 시작을 알렸던 퀼을 등장 음악 'Redbone-Come and get your love'을 들려주며 가오갤 시리즈의 수미상관을 선보인다. 니체가 말한 '음악 없는 삶은 실수다.'라는 말처럼 영화는 음악으로 영화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휘어잡는다. 모두가 음악을 들으며 신나게 춤추는 장면은 가오갤만의 재미와 각 캐릭터들의 연대가 어우러져 여운을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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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타쿠 콜렉션] 이토록 황당하고 찬란한 우리의 삶을
2025년쯤 되면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하늘을 뒤덮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닥쳐보니, 우린 여전히 축축한 길을 걸으며 불평하고 있습니다. 걸으며 우린 여전히 오늘 하루 먹고 살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인터넷 창을 10개씩 띄워둔 것처럼 병렬로 염려합니다. 말끔히 끝맺지 못한 문제들과 새로이 피어나는 일들은 생경합니다. 해가 바뀔 때 다졌던 마음은 그새 조금 닳았습니다.
이 복잡하고도 허망한 시기, 우리는 무엇으로 이 혼란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내 모든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내 주변 사람들도 이런 후회를 할까?”
아직 밤이 긴 계절, 도저히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들이 줄을 잇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날이 밝을 때까지 천장에 그간 했던 모든 선택을 쏟아놓는 당신을 위한 영화입니다. 혼란스럽고 화려한, 분주하고 반짝이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도 기나긴 이 영화는, 1인분을 하며 살기에도 버거운 주인공 에블린이 다중우주의 운명을 짊어진 알파 세계의 남편 웨이먼드와 만나며 시작됩니다. 빨래방을 운영하던 에블린은 한순간에 무수히 많은 다중우주를 거대한 악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죠. 에블린은 자신이 일생동안 했던 선택들로부터 수많은 다중우주가 파생되었으며, 각 우주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후회합니다.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일을 맡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에블린 역시 이러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죠. 에블린은 이혼 서류를 내미는 남편, 멀어져가는 딸, 압류 직전의 빨래방으로 구성된 자신의 세계를 위태롭게 움켜쥐고 있습니다. 분명 매순간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 에블린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중우주를 넘나드는 법을 가장 먼저 깨달은 우주인 알파버스의 웨이먼드, 즉 알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당신은 내가 여태 본 수천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에블린으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들은 에블린이 어째서 자신이 최악이냐고 되묻자, ‘당신은 이 우주에서 마치지 못한 목표, 이루지 못한 꿈이 너무 많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우주 중 바로 이 우주에서의 우리는 어쩌면 최악의 선택지만을 골라왔을지도 모릅니다. 비가 올 날에 우산을 챙겨 나가지 않았던 것, 뚜껑을 제대로 잠그지 않은 물병을 가방에 집어넣었던 것, 한 잔 더 마셔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던 것부터, 어떤 갈림길에서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를 결심한 것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최악이기에 괜찮습니다.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그 어떤 존재들처럼 판단하고 결정해도 됩니다.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고, 가져본 적 없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도 됩니다. 내민 적 없는 손으로 누군가를 붙들고, 끌어안아도 됩니다. 지금의 내가 최악이라면, 모든 우주를 뒤져도 이곳의 나보다 큰 잠재력을 가진 존재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에블린이 수많은 우주의 자신과 조우하고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한편, 모든 우주를 집어삼키려 하는 거대한 악, 조부 투바키는 이미 판단을 내렸습니다. Nothings matter.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는 것이죠. 조부는 알파버스에서 받은 과도한 차원 이동 훈련으로 인해 분열되어 하나의 존재인 동시에 모든 존재가 되었고, 모든 우주의 힘을 지니게 되어 도덕적 기준조차 잃고 말았습니다. 조부가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아등바등 살려고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으니, ‘베이글’ 안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죠.
조부가 발견한 진리, ‘베이글’은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그 안에선 어떠한 기준도, 성취도 필요치 않습니다. 조부는 무수히 많은 우주를 넘나들며, ‘허무’를 경험했습니다. 삶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니며,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조부 세력과의 전투 속에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던 에블린 역시 이에 반박할 수 없었고, 조부의 논리에 수긍합니다. 이때 남편인 웨이먼드가 에블린을 붙듭니다. Please be kind! 이해할 수 없는 웨이먼드의 말을 통해 에블린은 깨닫습니다. 늘 실없고 바보같았던 남편, 에블린 없이는 꼼짝없이 굶어죽었을 것만 같은 남편 웨이먼드는 놀랍게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었다는 점을요. 손님의 빨랫감에 장난스레 붙여놓던 장난감 눈알, 에블린이 타박하던 그의 순진하고 물러터진 성정은 실상 세계를 끌어안는 가장 강한 힘이었으며 세상과의 기나긴 사투를 승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제 3의 눈이었던 것입니다.
Nothings matter. 웨이먼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아무것도 중요치 않습니다. 여태 어떤 일을 망쳤든,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든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들과 진심을 나누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게 각자의 생에서 단단히 지켜낼 수 있는 가치이고, 삶이 가지는 의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 세상에게 더 친절해짐으로써 길지 않은 일평생을 더 나은 선택으로 꾸려갈 수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합니다.
삶과 허무, 선택과 사랑이라는 굵직한 주제를 관객에게 쥐어줌과 동시에, 영화는 온갖 패러디와 농담으로 러닝타임을 가득 채웁니다. 어쩌면 이가 ‘인생에 대한 고민은 그리 진지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다 본 후의 당신이, 우리가 마주친 이 우주의 사랑스러운 점을 가득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021년에 세상에 처음 나온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국내 팬들의 꾸준한 성원에 힘입어 지난 2월 14일에 재개봉했습니다. 3월 1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기도 했죠. 이 영화를 언제든 접할 수 있는 우주에 살고 계신 점을 축하드려요.
기회가 되실 때, 에블린의 멀미 나는 여정을 함께할 수 있길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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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한다고 XX! 「러브 라이즈 블리딩」
정신분석가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을 지키겠다는 판단이자 결의'다. 사랑에 대한 그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사랑이란 일종의 자기 파괴다. '모든 이해란 오해'라는 니체의 말을 받아들였을 때도, 사랑은 일종의 자기 파괴다. 이해할 수 없는 필연적인 오해를 지키겠다는 결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에서 '로맨틱'은 잠깐이고 지리멸렬한 갈등은 법칙이다. 성공하는 사랑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에 밖에 없다. 진짜 깊은 사랑은 서로를 파괴한다.
로즈 글래스가 연출한 「러브 라이즈 블리딩 Love Lies Bleeding」의 사랑은 어떤가. 헬스장 매니저로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던 ‘루’ 앞에 보디빌딩 대회 우승을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 ‘잭키’가 나타난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그들은 스테로이드(?)를 나눠 맞으며 사랑을 나누고, 잭키가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는 날에 함께 지겨운 도시를 떠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가정폭력을 당하는 언니를 도우려던 '루'의 시도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결국 '잭키'는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폭력을 숨기기 위해선 더 큰 폭력이 필요한 법. 피비린내 나는 그들의 사랑은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단 주요 캐릭터들의 존재감이다. 여성 보디빌더 '잭키'를 연기한 케이티 오브라이언의 무게감은 말할 것 없고,'루'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 역시 지금껏 보여준 연기의 관성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지만 지겹게 느껴지진 않았다. 약간 우스꽝스러운(변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음에도 위엄을 잃지 않는 에드 헤리스는 명불허전이다. 저런 머리를 하고 있는데도 무서운 건지, 저런 머리를 하고 있어서 무서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렬한 캐릭터 뒤로는 미덕과 아쉬움이 동시에 있다.
우선, 테마적인 면에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힘'이다. 이 '힘'이라는 것이 가질 수 있는 양태를 다면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영화적 미덕이다.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 발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와 성격은 세계의 인구수만큼 많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인 잭키를 보자.
잭키
이 영화에서 '힘'은 중요하다. 우선 '잭키'부터가 순수한 힘을 쫓는 보디빌더이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도망쳐 거리의 삶을 살았던 '잭키'에게 힘은 곧 생존이다. 순수한 힘을 향한 '잭키'의 집착은 영화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사격장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면접 자리에서 '잭키'는 총 같은 도구보다 육체 본연의 힘을 더 믿는다고 말한다. 체육관 앞에서 몇몇 남자들과 난투극을 벌인 후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루'에게 '잭키'는 "내가 그들을 이길 수 있어"라고 말하는데, 이는 '잭키'가 '루'에게 처음으로 정색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잭키'의 힘은 미숙하고 약하다. 그것은 버려진 두려움에서 비롯된 자기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잭키'가 격투기 선수나 역도 선수가 아닌 보디빌더인 점도 의미심장하다. 사실 보디빌딩은 '힘'을 쫓는 운동이 아니라, '미美'를 쫓는 운동이다. 실제로 보디빌딩의 번역어는 '육체미'다. 아름다운 몸(물론 여기서 '아름답다'의 기준은 근육의 크기, 강도, 균형 등이긴 하다)을 가꾸는 시합이지, 강력한 몸을 가꾸는 시합이 아닌 셈이다. 엄밀히 말해 보디빌딩은 스포츠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잭키'에게 원한 건 강한 게 아니라 강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잭키'는 시도 때도 없이 거울을 보며 자신의 근육을 관찰하고 포즈를 취하고, 누군가에게 강해 보이기 위해 불필요하게 선을 넘기도 한다(사격장 면접 씬과 헬스장 앞 난투극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으면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기대도 어리숙하고 헛되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보디빌딩 대회를 보면 그다지 큰 규모도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런 대회에서 상을 몇 개 받는다고 인생이 크게 변할 순 없다. 감독이 어디까지 현실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애초에 훈련만큼 휴식과 영양, 값비싼 불법 약물 등이 더 중요한 보디빌딩에서 '잭키' 같은 사람이 성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작중에서 '루'가 '잭키'에게 스테로이드를 권유했을 때 '잭키'는 매우 당혹스러워하는데, 이를 보면 그녀는 한 번도 약물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이때 '잭키'는 '루'에게 스스로를 내추럴*이라고 말하는데, 정말 신념이 있어서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루'가 스테로이드를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말하자 '잭키'는 곧바로 중독에 빠진다).
결과적으로 '터프함', '강함'에 대한 잭키의 어리숙한 집착은 그녀를 살인자로 만든다. 사실 영화 속에서 '잭키'가 살인을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물론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폭력성 과다, 숨기고 싶은 과거(잭키가 처음 도시에 왔을 때 일자리 알선을 위해 '루'의 형부와 원나잇을 했었다) 등이 엮여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살인을 설명하긴 무리다.
정작 당사자인 '루' 역시 '잭키'의 개입을 원치 않았음에도 굳이 그녀를 돕겠다고 나서 살인까지 저지른 건 순전히 '잭키'의 어리광이다. 물론 그 미숙한 집착이 개인의 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문화 탓에 자라났다는 사실도 분명하지만.
*불법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보디빌더. 흔히 피트니스 업계에서 내추럴과 로이더는 함께 경쟁하지 않는다.
랭스턴
그에 비해 '랭스턴'(루의 아빠)이 가진 힘에의 의지는 결이 좀 다르다. 대형 사격장의 주인이자 총기 밀매 업자인 '랭스턴'은 실질적인 힘을 추구하고, 실제로 힘을 가지고 있다. '랭스턴'은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의 유력자다. 사업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깔끔하게 '처리'할 능력도 가지고 있고, 막대한 부를 축적해 공권력까지 손에 넣고 주무른다.
'랭스턴'이 가진 힘에의 의지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는 영화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어쨌든 영화 속 시점에서 그것은 '잭키'의 자기방어기제 단계는 넘어선지 오래로 보인다. 총을 좋아하냐는 자신의 질문에 '잭키'가 총보단 스스로의 힘을 믿는다는 엉뚱한 대답(사격장 매니저를 뽑는 자리였으니까)을 했을 때도, '랭스턴'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잭키'를 채용한다. 아마도 그것은 '잭키'가 힘에 대한 미숙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언젠가 자신을 위해 이용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지 않았을까(실제로 그는 '잭키'를 '처리'의 도구로 이용한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근육을 구경하는 '잭키'에게 사격을 경험시키면서 "진짜 '힘'은 이런 것"이라고 위계(?)를 보여주는 장면 역시 '랭스턴'이 가진 지배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강력한 힘을 가진 '랭스턴'의 지배 욕구는 단순하지 않고, 그래서 그의 욕구 역시 불완전하다. '랭스턴'은 힘이나 돈으로 찍어누르는 1차원적인 지배를 원하지 않고, 좀 더 완결적이고 총체적인 지배, 그러니까 '완전한 장악'을 원한다. 그에게 인간이란 사무실에서 애지중지 기르는 애완용 벌레 같은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 '랭스턴'이 딸인 '루'를 자신의 사업(총기 밀매)에 끌어들이려고 한 것 같은 묘사를 생각해 보자. 보통 영화에서 성공한 갱이나 마피아들은 자식을 범죄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으려 하기 마련인데, '랭스턴'은 '루'에게 사업을 가르쳐 주고 일에 방해되는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까지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 '랭스턴'의 묘사로 볼 때 그에게 인력이 부족해서 '루'가 필요했던 건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랭스턴'은 '루'를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했다. 다만 그에게 사랑이란 '자아의 연장'이자 '힘의 확장'과 유사한 개념이었을 뿐이다.
'루'의 언니가 가정폭력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을 계기로 '랭스턴'과 '루'는 불편한 재회를 하게 된다. 이때 '랭스턴'이 '루'를 대하는 방식은 결코 미움이나 혐오가 아니다. 미움보다는 '그냥 내 말 듣고 시키는 대로 했으면 편하게 잘 살았을 텐데 사서 고생이냐'는 전형적인 K-아버지식 태도에 가깝다. 나아가 '잭키'가 저지른 실수 탓에 '루'가 곤경에 빠졌을 때도 '랭스턴'은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루'를 돕는다.
그러나 극의 후반부 결국 그의 사랑은 힘을 갖지 못한 채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사랑은 끝없는 자기 확장 욕구의 발현 방식이었을 뿐, '자기 파괴의 감수'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가 '랭스턴'의 입지를 흔들만한 비밀을 폭로하려 하자, '랭스턴'은 곧바로 돌변했다.
데이지와 베스
작중 양아치 남편 JJ로부터 끊임없이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하는 '베스(루의 언니)'와 '루'를 짝사랑하는 '데이지'가 가진 힘의 욕구는 수동적이고 퇴행적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에게도 욕구가 있다.
'베스'는 양아치 남편에게 가정폭력 피해를 당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떠나지 못한다. 일반적인 가정 폭력 피해자들의 경우와는 다르게 '베스'는 강력한 무력과 재력을 가진 아버지가 있음에도 JJ를 떠나지 못하는데, 이는 '베스'가 가진 왜곡된 사랑 탓이다. (작중 '베스'의 이야기가 많이 다뤄지지 않지만) 심각한 폭행으로 병원에 입원한 자신을 타이르는 '루'에게 '베스'는 "너는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몰라"라며 JJ를 옹호한다. 이에 더해 '베스'는 '루'와는 달리 아버지 '랭스턴'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왔던 듯 묘사되는데, '베스'는 사랑이 가진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온몸으로 수용하지만(JJ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악행 역시 감내했다) 그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그래서 이해될 수 없는 타인을 지키겠다는 결의로서 사랑은 무비판적인 수동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힘을 가질 수 있는 사랑은 상대를 향한 적극적인 행동 양식이다. 베스가 진정 JJ를 사랑했다면, JJ의 인격적인 성장을 위해 힘썼을 것이다. 그게 JJ를 떠나는 방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데이지의 경우는 전형적인 '왜곡된 사랑' 그 자체다. 우선 영화는 데이지의 미성숙을 도드라진 방식으로 보여준다. 다 큰 어른이지만 우유와 사탕을 입에 달고 살고, 유아적인 표정과 말투를 가졌다. 다 빠져버린 치아의 상태를 봤을 때 아마도 그녀는 마약을 남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녀는 '루'에게 대마초를 권유하기도 한다).
'데이지'는 '루'를 향한 집착에 가까운 짝사랑을 가지고, 이에 대한 '루'의 반응으로 봤을 때 그 세월도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항상 기름진 머리로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데이지는 '루'를 자신의 답답한 인생에서 탈출시켜줄 구원자처럼 여긴다. 그들이 체육관 화장실에서 처음 마주치는 장면을 보면, '데이지'를 귀찮아하는 '루'는 마치 어린아이 어르듯 돈을 건넨다. 그러자 '데이지'는 상처받은 듯 실망하지만 이윽고 돈을 보고 웃는 낯을 보이는데, 이와 같은 '데이지'의 양가적인 모습은 영화 내내 계속 반복된다. 특히 시체를 싣고 가던 '잭키'를 목격한 이후, '데이지'는 '루'의 약점을 가지고 선을 넘을 듯 말 듯 교묘하게 그것을 활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데이지'는 순수하게 '루'를 사랑하는 순애보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데이지'는 '루'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계속해서 '잭키'와 JJ의 자동차와의 연결고리를 묻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삶에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힘(목격자의 지위)을 가지게 된 '데이지'의 행동을 보았을 때, '데이지'의 사랑은 어린아이와 같은 형태의 퇴행적인 자기애에 가까운 셈이다.
루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힘을 가지는데 성공하는 인물은 '루'다. 오직 '루'만이 주체적으로 '자기 파괴'의 결단을 내리는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우선 '루'는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랭스턴'의 악행을 스스로 거부하고 독립에 (반쯤?) 성공한 상태다. '잭키'를 먼저 발견하고, 관계를 리드하는 것도 '루'다. '잭키'를 위해 매일 계란 노른자를 분리해 주고, 스테로이드를 제공한다(비록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러브 라이즈 블리딩」 속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파괴를 겪는다. '잭키'는 평생을 꿈꿨던 무대를 망치고 살인자가 됐고, '랭스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군 왕국을 잃었으며, '베스'는 엉망이 된 채 JJ를 잃고 '데이지'는 배신당한 채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이 중에 타인을 위해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아를 희생한 것은 '루'가 유일하다.
'루'는 평생 아버지의 악행을 혐오하며 그와 닮지 않기 위해 우악스럽게 살아왔지만, 결국 '잭키'를 위해 피를 두 번 묻힌다(엉망이 된 JJ의 시체를 숨기며 첫 번째 죄를 저지른 후 영화의 결말에 또 한 번 결정적인 죄악을 저지른다). '잭키'를 위한 '루'의 자기 파괴적 희생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요소는 바로 담배다. 작중에서 '루'는 금연에 대한 언급을 여러 번 하면서도 계속 담배를 끊지 못하는데(금연 교육 테이프를 들으면서도 담배를 피운다), '잭키'가 떠나고 난 후 금연을 선언하고 실제로 금연에 성공한다.
그러나 '잭키'와 함께 사막을 떠나던 중 반쯤 죽었던 '데이지'가 다시 꿈틀거리고 '루'가 이를 다시 처리(?) 하는데, 이때 결국 '루'는 '데이지'가 가지고 있던 담배를 꺼내 물어버린다. 이 장면에서 '잭키'는 세상모르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루'는 타자를 지키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도덕적인 자기 파괴를 감행했고, 결국 (담배처럼) 자기 자신을 갉아먹을 것이 분명한 '잭키'와의 사랑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랭스턴'의 저택에서 '루'와 '잭키'가 힘을 합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랭스턴'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잭키'의 거대화(?)다. 그러나 이 거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 다시 말해 '잭키'가 그토록 갈망하던 '커 보이는 것 / 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힘(거대화)'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목숨을 걸고 '랭스턴'의 저택으로 돌아온 '루'의 용기 덕이었다.
'잭키'는 모든 것을 잃고 친동생에게 전화해 "(너무 힘드니까) 넌 사랑하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루'는 (베스와)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 가다도 "언니 사랑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힘에 대한 갈망이 가장이 없었던 '루' 만이 진짜 사랑에 도달해 '힘'을 얻었다.
카메라
「러브 라이즈 블리딩」에서 힘을 갈망하는 마지막 주체는 카메라다. 이 영화에서 '형식'은 끊임없이 저 자신을 드러낸다. '루'가 손으로 직접 막힌 체육관 변기를 뚫고 있는 매우 부담스러운 클로즈업으로 시작한 영화는 이후 땀에 젖은 육체와 의미심장한 문구들을 접사한다. 영화 중간중간에 종교화의 색채를 띤 사막 위의 생명체와 기물들을 '몽타주'하는가 하면, 폭력을 전시하듯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연극적인(극단적인) 조명 연출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다가, 종국에는 (약간?) 당혹스러운 CG까지 나아간다. 저 자신의 영화적인 스타일리시를 백분 활용하는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카메라 역시 힘에 대한 욕구(사랑)가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랑은 어디를 향하며, 또 성공했을까?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어느 영화나 다 그렇듯) 영화를 본 관객마다 다를 것인데, 나의 경우 개인적으로 반쯤은 성공했고 반쯤은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우선 개인적으로 카메라가 [내러티브 - 인물]보다 앞섰다고 보았다(앞서 언급한 클로즈업/조명/인서트들이 내러티브를 돋보이게 한다기보단 저 자신의 스타일에 더 집중한다). 이를테면 '잭키'가 스테로이드 취해 '루'를 토해내는 환상을 보는 장면 같은 겨우, '잭키'가 겪고 있는 어떤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잭키'가 자신 속에 있는 '루'를 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야기의 맥락('루'가 '잭키'의 살인을 수습하고 있을 때다)으로 봤을 때 만약 토해내야 한다면 '루'가 '잭키'를 토해내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이와 같은 스타일리시의 과잉은 캐릭터와 내러티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저 자신의 형식에 더 취하는 것으로 보여 아쉬웠다. 그러나 이는 A24 영화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로즈 글래스 감독의 성향이기도 해서, 사실 미덕의 문제라기보단 취향의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종횡무진 활보하는 '스타일'의 수위를 조금만 더 낮췄다면 '80년대 미국 시골'이라는 배경과 '가부장제를 부시는 아웃사이더'라는 소재와 현대적인 스타일, 이 세 가지 부조화스러운 영화적 요소들이 조금 더 매력 있는 간극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인서트 컷들만 남기도 눈에 튀는 연출들을 배제했다가 영화의 후반부 거인화 장면이 갑자기 툭하고 튀어나왔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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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린 북(Green Book)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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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Midorii(미도리) - 野芥(노케) 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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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아블라’는 ‘사미아’를 냉정히 돌려보내지만,
위험한 길가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미아’가 신경 쓰여
결국 자기 집에 며칠 간 머물며 함께 빵 만들기를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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