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징2023-09-28 12:25:58
한국 로맨스 영화 '롱디' 스포일러 포함 비추천
롱디
23.05.10 개봉
멜로/로맨스, 12세 관람가
한국, 101분
감독: 임재완
출연: 장동윤, 박유나 등
영화관 가서 볼 정돈 아니다 싶어
시사회를 잡을 수 있었음에도 스루했던... '롱디'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로맨스 영화 중에는
15,000원 주고 영화관 가서 볼 정도의 영화는 없는 것 같아요
이제 영화관=CG보러가는곳이라는 공식이 잡힌 것 같습니다
제목부터 '롱디'인 만큼
저는 도하와 태인이 정말정말......
볼 수 없을 정도로 멀고 애틋한 사이일 줄 알았어요
근데 싸우면 차 타고 달려갈 수 있을 만한 거리더라고요
일단 우리나라임 ㅋㅋ
그 정도면... 롱디긴 한데... 새발에 피인 셈이죠
심지어 롱디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제임스라는 캐릭터 때문에
도하가 헤어질 만한 사유를 만들게 되고
그 와중에 서울에 왔던 태인이 도하를 못 만나고 가게 되고
그래서 둘이 헤어지는 것뿐이에요
이건 롱디가 아니었어도 헤어질 사유 아니었을까요?
롱디라는 관계에 알맞는 에피소드를 만들었어야 해요
어떤 블로거님께서
연애 빠진 로맨스+서치라고 하셨는데 정말 딱 맞는 말인 듯요
일단 <서치>처럼 온라인에서 진행하는 구도? 로 만들어졌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구성을 시도해 본 적이...
제가 봤던 영화 중에선 없는 거로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서치>로 너무 뜬 구성인 만큼 신선하다고 할 순 없죠
롱디가 온라인 연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상황상 맞는 구성이다~ 라고 말은 되지만요
그리고 <연애 빠진 로맨스>를 제가 안 좋아하긴 해요
내용 없고 둘이 말장난만 하는 B급 로맨스 같아서요
근데 <연애 빠진 로맨스>가 B급이라면
'롱디'는... C+급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재미도 감동도 설렘도 없는 영화예요
그냥 제임스 때문에 도하 인생 나락 가는 영화라고 해야 할 듯
영화관에서 보지 않은 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영화 리뷰 많이 올리고 있는데
보고 있는 영화 중에 이렇다 하게 재미있는 영화가 없네요 ㅠ
정말 재미있는 거 보면 흥분해서 들고 올게요 ㅠㅠ
*스토리: 1/5점
*연출: 3/5점
*영상미: 3/5점
*OST: 1/5점
*연기: 2/5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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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자의 오지랖
이 글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맥스무비
분명 처음에는 괜찮았다.
한국의 조커 탄생이라 불러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딱지맨(공유)의 탄생을 지켜보는 내내 소름이 오소소 돋는 팔을 쓸어내릴 때까지는. 비장하면서도 패배감에 물들어 어딘가 입꼬리가 축 내려간 채 죽지 못해 사는 것만 같은 기훈(이정재)을 볼 때까지만 해도.
사실 시즌1에서 그다지 이 시리즈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 시청자였기에. 이번 시즌에선 오히려 재미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희망마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이 글로벌 오징어의(?) 오프닝은 장대하면서도 짜릿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시즌 2는 가장 큰 패착을 오프닝부터 모조리 보여주고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것이 주인공인 기훈의 존재 자체라는 것과. 그가 아예 시즌 1과는 완전히 다른, 철이 든 데다 돈까지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는데 있다.
사진출처:한겨레
오징어 게임의 본질(?)은 몸뚱이 밖에는 담보 잡을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것을 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성과 상품성의 대립. 드러나는 인간들의 욕망과 도덕사이에서의 혼돈. 그리고 과연 누가 진짜 나쁜 놈일까. 나는 저 상황에서 저러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기훈의 환골탈태(?)로 인해 이 모든 갈등은, 혹은 갈등에서 오는 재미는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 기훈이 아무리 봐도 주인공 버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첫 게임(지가 제일 많이 움직임. 차라리 뒤돌아 있었으면 이 정도의 짜증은 안 났을 것.)에서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생존케 함으로 인해. 주최 측은 다음단계로 갈수록 좀 더 어렵거나. 팀으로 사살이 가능한 게임을 고안해 내야만 한다.
이제 시즌제 드라마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듣자마자 지긋지긋하면서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세계관 확장에 따라. 이번 시리즈에서는 당연히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이들이 가진 이야기를 풀어내기 바쁘다. 이로 인해 갈등이 쌓이기보다 각자의 말을 들어주느라 혼돈의 시간들을 보내느라 회차를 낭비한다.
등장인물이 많아짐에 따라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미 갈등 자체가 줄어들어버린 데다 갈등 자체가 크게 두 팀으로 나뉘어 버린다는 데 있다. 돈을 벌 것이냐. 아니면 살아 나갈 것이냐.라는 이분법적인 투표가 매 라운드마다 존재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그저 일확천금 외엔 별 목적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더 가벼워져 보인다. 그러니 매번 투표마다 다들 내뱉는 이번 라운드 뒤에 나가자.라는 말이 밥 한번 먹자는 말보다 더 비어보일 수밖에.
사진출처:조선일보
이로 인해 시청자들은 두 가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첫 번째로는 경력직의 활약으로 인해 시즌1에서 느꼈던 종잡을 수 없는 충격들을 느끼기 힘들어진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킹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제작진이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 투입한 빌런인 타로.. 아.. 아니 아니 타노스의 존재를 견뎌야만 한다는 점이다.
오춘기가 지나버린 기훈덕에 기울어져버린 운동장 위에서(?) 타노스는 말 그대로 정의로움이 어색해 보이는 기훈 마냥 한껏 high 한 상태로 방방 뛰어다닌다. 완벽하게 악한 캐릭터냐 묻는다면 이런 류의 작품에선 언제나 눈만 맑은 광인이 한 다발로 등장하기에 그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건방지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타노스를 믿고 깝죽거리는 남규(노재원)에도 못 미치며, 또 그렇다고 해서 캐릭터 자체가 가진 매력이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요"인데 뭘 물어.
타노스는 미쳤다기보다 그냥 동네에 하나쯤은 있다는 덜떨어진 사람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고. 그 역할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자기에게 딱 맞는 어수선한 최후를 맞이하며 다행히 퇴장한다.
사진출처:경향신문
타노스의 경우 개인 연기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더 크게 보았을 때 황동혁 감독의 캐릭터 고용이 좀 납작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거의 모든 캐릭터가 1편에서의 파생이며. 아예 극에서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특히 용식(양동근) 모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눈물을 뽑겠다는 작정을 하고 투입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다.
더 최악인 것은 시즌1에서부터 지적된 여성 캐릭터의 쓰임이다.
애초에 목적이 너무 뚜렷한 데다 심지어 외모적인 특징마저도 아예 빼다 박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형적이다 못해 아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로 변화조차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히 시즌2에서 새로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낯섦은커녕 어디선가 시즌1 때 사망한 새벽이가 등장한다 해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하던 대로 비슷하게 하면 본전은 치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 최선을 다해 생각해 낸 캐릭터의 결과였을지. 나 같은 인간은 절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고뇌의 방향이 어쨌든 간에. 감독의 선택은 얄팍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치면서
2024년의 끝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병상에 계셨기 때문에 다들 "호상"이라며 격려 같은 말을 조용히 말을 건넸지만. 할머니가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온기라는 게 참으로 힘이 세서 나는 그 온기가 날아갈까 두려워 애써 품에 안고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꼭 쥔 채 새해를 맞이했다.
나는 할머니의 맏아들의 장녀였고. 딸이 귀했던 집안(6남 1녀)의 특성 덕에 며느리는 자신의 딸을 한 번 안아보지도 못했다며 너스레를 떨 만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품에서 컸던 큰 손녀였다. 나의 식성도. 나의 취향도. 나의 생김새마저도. 할머니를 닮은 모습에 농담처럼 마을 사람들은 나를 할머니의 숨겨놓은 막내딸이라 부르기도 했었으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큰손녀의 이름만 부르면 눈동자가 다시 사람의 것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말에. 내 마음속 상실의 구멍에 또다시 세차게 찬 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졌다. 이 바람이 이제는 내가 약해져 있을 때는 더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자주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의 상실을 겪었는데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아픔은. 내가 온전히 사라져야 더 이상 느끼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그 경험들 뒤에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또 지나가겠지.라는 체념 같은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네는 날들인 것 같다.
무뎌진 기억을 더듬으며 더 이상의 눈물을 삼키지 않는 날이 조금 더 빨리 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 글의 TMI]
1. 너무 아파서 병원 갔는데 독감이 아니라니. 병가 쓰게 해 줘요(?)
2. 인간적으로 영하 10도 이하면 재택근무 하자 진짜.
3. 오늘 감자탕 먹을 거다 캬캬햐햐햐햐햐햐
#넷플릭스 #오징어게임2 #OTT #영화리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이정재 #황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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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해피엔드를 봤다.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해피엔드를 봤다.
해고를 당했다. 일상을 갈아 넣고 내신 기간을 감당한 결과였다. 강사 경력은커녕 학생으로서도 학원에 안 다녀본 나로선 처음 적응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지만, 노력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상쇄했다고 생각했는데 ‘내신’이라는 새로운 장애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학원에서의 내신 기간은 특정 학교의 시험을 앞두고 약 한 달 동안 학생의 시험 준비를 도와주는 시간이다. 그 기간 나는 학교 교과서로 수업하는 것은 물론 해당 학교의 기출 문제를 분석하고, 외워야 할 내용을 정리해 시험을 보는 등 시험공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옆에서 보조해야 했다.
과다한 업무량만 문제였다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 나를 괴롭히는 건 순수하게 공부를 좋아하는 내가 아이들에게 시험 잘 보기를 강요해야 하는 일이었다. 생각이 깊은 아이에게 불필요한 생각은 시험에 방해된다고 하고, 버거워하는 아이에게 주어진 숙제에만 집중하라고 말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깎여나가고, 내가 나를 포기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들만큼이나 나에게도 보상이 필요했다. 모든 내신 일정이 끝나는 날 저녁, 좋아하는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해피엔드>를 예매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게 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나를 덮쳤다. 간신히 업무를 마친 내게 원장이 할 말이 있다고 하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열심히 노력한 것도, 태도가 성실한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신입이 성장하기를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 미안하지만 이번 주까지만 근무하도록 해라.
그러니까 나는 태도가 불성실한 것도 아니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그저 학원이 원하는 속도에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잘린 것이다.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고? 이제 겨우 첫 내신을 겪었는데 뭘 기다려줬다는 거지?
나를 해고한 학원은 나 한 사람의 특수성을 존중해주기엔 이미 견고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최대한 그 구조에 나를 끼워 맞춰보려 했지만, 집단은 나를 기다려줄 수 없었다. 정말 슬펐던 건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를 내친 건 악의가 아니라 순전히 구조 탓이었다. 그들이 딛고 있는 시스템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건 사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노력과 성실함으로 어떻게든 극복하려 한 건 결국 오기였다. 그들에겐 성실한 사람보다 집단에 이익이 되는 사람이 더 필요했다.
얼떨떨한 상태로 영화관에 가면서 미리 <해피엔드>를 예매한 나의 선택에 감사했다. 이런 일정마저 없었다면 오롯이 혼자서 이 충격을 감당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당연히 초반 몇 분에는 집중이 안 됐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그렇게 부족했나?’, ‘너무 순순히 물러섰나?’ 등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그러다 영화의 감각적인 연출에 먹구름처럼 드리웠던 생각들이 서서히 걷히고 영화에 몰입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만 드는 기시감에 소름이 돋았다. 좋은 예술 작품은 좋은 타이밍을 만날 때 빛을 발한다. 개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집단의 이익 관계에 따라 가차 없이 버려진 그날, 내가 <해피엔드>를 본 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회피와 분노, 그 뒤에 찾아오는 먹먹함
<해피엔드>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영화다. 주인공인 코우와 유타는 유치원 때부터 함께한 죽마고우로 음악 연구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고등학생이다. 둘을 포함한 동아리 회원들은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교장을 골탕 먹이기 위해 그의 외제차를 세로로 세우는 장난을 친다. 다음날 이를 발견한 교장은 범인을 잡지 못하자 학교 전역에 감시 시스템을 도입한다. 근미래 배경답게 감시 시스템도 최첨단이다. CCTV가 교칙을 위반한 학생을 감지하면 그 자리에서 자동으로 벌점이 부과된다. 치기 어린 일탈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그들의 장난은 감시 시스템의 도입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고, 평생 견고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관계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재일 한국인 4세인 코우와 유복한 환경의 유타, 집에 있으면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유타와 믿음직스러운 아들로서 지지받는 코우. 오랜 시간 끈끈한 우정을 나눴던 두 사람은 감시 시스템과 더불어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게 우정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장벽을 느낀다.
<해피엔드>가 유독 먹먹한 이유는 두 친구의 우정이 일방적으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유타는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 하지만, 코우는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함께 놀고 싶어 하는 유타가 철없다고 느낀다. 관계를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에는 두 사람의 핵심 정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유타의 핵심 정서는 ‘회피’다. 유타의 핵심 논조는 ‘어차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텐데 차라리 쾌락을 만끽하는 게 낫지 않느냐’이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매 순간 존재를 부정당하는 코우의 눈에 비친 유타는 아무 생각 없는 온실 속 화초일 뿐이다. 영화는 코우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유일한 안식처였던 친구들을 하나둘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유타의 감정선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관객에게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한다.
<해피엔드>의 배경인 근미래 일본의 핵심 키워드는 ‘통제’와 ‘배척’이다. ‘통제’는 권력자가 공동체를 이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수월하게 다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특성에 어긋나는 모난 돌을 빼내는 게 좋다. 유타는 무리 없이 전체에 수용되지만, 코우는 어딜 가든 모난 돌 취급을 피할 수 없다. 코우와 같은 모난 돌은 계속해서 외친다. 우리를 배척하지 말라고. 차별하지 말라고. 존재를 지우지 말라고. 그러나 이 외침은 모두의 안전을 위한다는 주장 하나로 가볍게 묵살된다.
안전. 근미래 일본이 아닌 지금의 한국을 사는 나에게도 귀에 딱지가 앉게 자주 들리는 말이다.
욕을 먹었다. 그리고 해피엔드에 관해 쓰고 있다.
욕을 먹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겸했는데, 한 달 넘게 같은 지적을 듣다가 정신력이 한계치에 다다랐다. 내가 반복해서 듣는 말은 이거다. 안전을 위해 애들 통제에 주의해라.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하게 한 아이가 큰 부상을 입으면서 현장에 비상이 걸린 탓이었다. 한 명이 여러 아이를 지도하면서 사건·사고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 학교가 택한 방법은 아예 문제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 사고 현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할 것. 돌발 행동은 적극적으로 통제할 것. 문제는 내가 통제해야 할 이 아이들이 발달 과정에서 활발히 움직여야 하는 시기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해피엔드>의 핵심 소재인 AI 감시 시스템의 문제점은 사생활 침해는 물론이고 타협의 여지가 없고, 오류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착한 행동과 나쁜 행동은 기계가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저마다의 맥락을 고려해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해야 한다. 기계의 무자비한 징벌은 당사자도 모르게 벌이 주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영화에서는 사소한 행동이 숨겨진 눈에 의해 ‘잘못’으로 감지되고, 억울하게 벌점을 받아도 이를 해명하다가 더 큰 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소통이 배제된 감시와 처벌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에 저항하는 아이들에게 반박하는 논리는 단 하나다. 이 정도 불편은 안전을 위해 감수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안전해야 하는 걸까? 육체만 보전하면 되는 걸까? 폭력에 노출되는 동안 지쳐가는 정신은 방치해도 되는 걸까? 그렇게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는 정말 안전한가? 애초에 안전이 제일 중요한 가치가 맞는 건가? 안전을 위해 희생된 자유는 아무것도 아닌가?
아이들을 통제하라는 지시에 일부러 반항한 적은 없었다. 나 역시 안전이 중요하다는 의견엔 동의하는 바였다. 그런데도 지적은 계속 들어왔다. 내가 행하는 통제가 그 집단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활동을 박탈당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조차 납득할 수 없는 통제가 아이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나 자신에게 수시로 묻곤 했다. 어른은 아이를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을까? 말 잘 듣는 게 정말 미덕일까? 보호 명목으로 세상을 인위적인 무균실로 만드는 게 옳은 걸까?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이 질문이 떠오를 때면 감시 카메라에 잡힌 <해피엔드> 속 아이들의 얼굴도 같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단보다 큰 개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해피엔드>를 본 타이밍은 꼭 해고 사건이 없었어도 충분히 절묘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의 경험과 함께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정상성을 갈망하는 집단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실감했다. <해피엔드>는 그렇게 집단의 이해관계에 짓눌린 개인 한 명 한 명을 호명하고, 그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어떠한 평가도 없이 깊숙이 들여다본다.
영화를 다 보고 네오 소라 감독의 인터뷰를 읽다가 마음에 박힌 부분이 있었다.
“저는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으면 화를 안 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분노도 사랑이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거예요. 사실 생각해 보면 화를 낸다는 건 엄청 피곤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화를 내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마땅히 필요한 일이겠죠.”
이 영화가 먹먹한 끝에 애틋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코우가 유타의 회피에 화냈던 건 사회에 부정당하는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코우를 사랑한 건 유타였고,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코우의 분노에 동참한다.
<해피엔드>의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까? 안전하게 통제받기를 거절하고, 온 마음을 다해 서로를 사랑할 줄 아는 그들은 분명 좋은 어른이 될 것이다. 삭막한 경쟁 사회 속에서도 끝내 존재감이 지워지지 않는, 집단보다 큰 개인으로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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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크리스마스는 12월 21일인 걸로
올해는 유난히 눈이 잦다. 아침에 눈을 뜨면 소복이 내려앉은 흰 풍경을 보기도 했고, 길을 거닐다가 바람에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만났으며 우산이나 모자 없이는 한 발 내딛기도 힘든 때도 있었다. 눈. 대부분 어린이가 그러하듯 나 또한 눈을 아주 좋아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골칫거리라고 느꼈다. 희게 날리는 눈발을 보아도 이것들이 쌓여서 생길 질퍽대는 까만 흔적들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혹 땅이 얼기라도 하면 불편은 가중되었으므로 겨울의 눈 소식만큼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올해엔 무슨 바람이 들었나. 11월 초, 같이 일하던 사람이 튼 크리스마스 캐롤 때문이었을까. 출퇴근 길, 귀에 항상 꽂힌 이어폰에서는 일찌감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흘러나왔다. 특정날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걸 처음 느낀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감흥이 없다. 캐롤도 거의 듣지 않고. 아마 이른 크리스마스를 맞이했기 때문이겠지.
12월 21일. 꼭 데칼코마니 같은 이 날은 닮은 듯 다른 캐롤의 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약속을 잡고 만난 날이다. 때마침 21일엔 눈이 내리다 못해 쌓였고, 그런 날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단 게 어찌나 행복하던지. 왠지 모를 떨림과 함께 자리에 앉았고, 불이 꺼지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 아래부터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평을 보았다. 이 영화가 감독인 토드 헤인즈의 최고작이라고. 물론 2016년 개봉작임을 감안하면 지금은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동의했다. 집에서 작은 화면으로 두어 번 보았던 이 영화가 얼마나 위대하게 시작했는지.
녹슨 쇠창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벽지 패턴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배우들 이름이 그 위에 하나씩 얹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서정적인 배경음악이 잠시간의 지루할 시간을 달래려는 듯,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들려주려는 듯 이어졌고.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인 'carol'이 뜨자 약간 부산스러운 소리가 새로 등장했다. 이윽고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더니 문인지 창문인지 모를 그 쇠창살의 정체를 보여준다. 하수구. 이제부터 기나긴 테이크다. 하수구에서부터 도로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신호등.
구체적인 위치나 시대는 몰라도, 사람들의 옷차림과 북적한 분위기만으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다. 여긴 도시이고, 지금보다 1900년 중반쯤을 다루는 듯하고, 미국인 것 같다.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거리 전체를 보여주는데 처음으로 배경음악보다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가판대에서 책을 사는 남자. 카메라가 다시금 움직이고, 택시를 부르는 또 다른 남성의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드디어 다음 컷으로 넘어갔다.
책을 손에 든 남자가 계단을 빠르고 가볍게 오른다. 손에 쥔 책을 보고 관객은 예감한다. 아, 좀 전에 책 샀던 남자구나 하면서. 그는 한 레스토랑에서 바텐더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아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 할 캐롤이 보인다. 하지만 남자는 캐롤과 마주 보고 있는 뒤통수의 주인공, 테레즈에게 아는 체한다. 둘 사이의 오묘한 분위기는 테레즈의 친구가 끼어들며 자리가 아예 파하는 것으로 끝난다.
궁금증을 한껏 유발하더니 영화는 테레즈의 좀 더 앳된 시절로 전개된다.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는 테레즈.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경영진이 필수로 착용하라는 모자를 느지막이 쓰고, 손님을 응대한다. 그러다가 문득 한 곳에 그의 시선이 콕 박혔다. 눈을 떼지 못한다는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이, 눈도 안 깜박이며 뚫어지게 쳐다본다. 시선의 끝엔 캐롤이 있었고.
둘의 눈이 마주치고, 잠깐 손님의 시야로 가려진 캐롤은 사라졌나 싶더니 손에 쥔 장갑을 턱 내려놓으며 테레즈에게 말을 건다. 자신의 딸 린디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려는데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에 테레즈가 캐롤이 보고 있던 장난감 기차 세트를 추천한다. 이름, 주소, 연락처를 적은 빌지를 끝으로 둘은 손님과 점원 간의 짤막한 만남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캐롤이 두고 간 장갑. 이 장갑을 기차 세트에 함께 보내며 테레즈는 그 연결을 이어가고자 한다.
분실물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건 점원으로서의 당연한 행동이지만, 캐롤에게 제대로 기차 세트가 도착했는지 거듭 확인하는 그 목소리엔 분명한 기대감이 있었다. 고마움을 표하는 전화가 한 번쯤은 걸려 오지 않을까 하는. 내색하지 않아도 은근히 캐롤을 기다리던 테레즈에게 곧 반가운 목소리가 찾아왔다. 수화선 너머의 캐롤. 고마운 마음에 점심을 사고 싶다며 둘은 약속을 잡는다.
12월 21일 오후 2시.
테레즈는 공책에 캐롤의 이름과 만날 장소, 시간까지 천천히 적어 내려 간다. 한 획을 긋는 그 손길은 조심스러움이 묻어났고, 그게 참 소중해 보였다.
먼저 도착한 테레즈. 캐롤은 약속에 늦어 미안하다는 사과로 첫인사를 건넨다. 곧 메뉴를 고르는데 능숙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문하는 캐롤과 달리 테레즈는 곁눈질을 하다가 같은 걸로 달라고 한다. 캐롤과 같이 있는 동안 테레즈는 늘 그래 보였다. 캐롤이 "Would you?" 하며 무언가를 제안하고, 테레즈는 넙죽 "Yes"로 답한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에 뉴욕 외곽에 있는 캐롤 집에 가게 된 테레즈.
테레즈는 꽤 들떴던 것 같다. 새하얀 눈을 보면 몽글몽글해지는 우리네 마음처럼. 집안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하며, 나름 캐롤을 중심으로 린디, 테레즈가 조용하고도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캐롤의 불청객이 찾아온다. 캐롤과 이혼 소송 중인 하비. 분위기는 폭삭 무너진다. 테레즈가 피아노 치던 화기애애한 순간이 한순간에 꿈같은 일로 뒤바뀌고, 캐롤과 하비의 날카로운 음성들을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 체하며 테레즈는 멀찍이 서성였다. 하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레즈를 추궁하며 무례하게 묻는다. 캐롤이랑 무슨 관계냐고. 또 무슨 짓을 벌인 거냐며.
하비의 폭주는 테레즈를 당혹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캐롤의 자존심이 다칠 만한 행동이었다. 캐롤은 힘겹게 상황을 수습해 간다. 크리스마스는 절대 양보하고 싶지 않았지만 린디를 하비 품에 보내고, 테레즈 또한 집으로 돌려보낸다.
결국 기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던 테레즈. 분명한 상처였다. 대신 담배를 사 오겠다는 말에 캐롤이 이 밤에 주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는 분노 섞인 답변이 그를 아프게 했던 것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는 실망감으로도 보였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 보다가 하루가 끝났다. 크리스마스트리를 고르던 캐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처음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보기 시작한 변화의 날이 이렇게.
침착함을 되찾은 캐롤이 테레즈에게 사과를 건네고, 테레즈는 이를 받아들였다. 캐롤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일지, 혹은 좋아하는 마음으로 상처를 덮어버린 것인지. 린디와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없게 된 캐롤은 접근 금지까지 받게 된다.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자신의 가족들과 보내자는 하비의 말을 완강히 거절한 캐롤에게 벌을 주듯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은 캐롤 또한 똑같이 받는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있거나 슬퍼하기보다는 뭐라도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서부 여행을 가려는데 테레즈에게 동행을 제안한다. 이번에도 역시, YES.
이 말에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연인 리처드다.
사실 명목상 연인이라고 할 정도로 테레즈와 그 사이엔 별다른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리처드는 유럽 여행을 가자며 오랫동안 테레즈에게 졸랐고, 캐롤의 모든 말에 좋아요를 외치던 테레즈는 대답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그런 테레즈가 캐롤과 여행을 가겠다니. 자신이 정체 모를 사람에게 밀렸다는 인상을 받은 리처드가 난폭한 말을 퍼붓는다. 2주 뒤면 자신에게 만나달라며 빌게 될 거라는, 바람 섞인 말을 뱉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캐롤이 운전하고, 중간중간 식사를 하고, 가끔은 차에서 간단히 먹기도 하고. 스탠더드 룸 2개를 쓰던 둘은 할인을 핑계로 스위트룸에 묵으며, 더 가까워졌다. 여행을 하며 점점 확신에 차던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하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기도 하며. 와중에 테레즈 앞에선 의연하게 굴었다.
그러나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게 아니다. 서로에게 아주 깊어졌을 무렵 일은 터지고 만다. 호텔에 딸린 카페에서 만난 외판원. 그는 외판원이 아니라 하비가 고용한 사람이었다. 둘의 옆방에서 그들의 음성을 녹음한 테이프를 하비에게 보낸 걸 알자 캐롤은 거의 이성을 잃는다. 총을 그에게 겨눌 정도로.
테레즈는 캐롤이 지닌 불안을 감지했었다. 그의 캐리어 속 총을 이전에 보았기에. 슬쩍 그에게 물어봤지만 캐롤은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캐롤이 말하지 않는 이상 이때에도 테레즈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장전하지 않은 총은 빈 탄창 소리만 냈고, 캐롤이 운전하는 차 안은 테레즈의 울음 섞인 말로 뒤덮인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좋다고 따라왔다며. 캐롤은 그게 아니라고 테레즈를 달랜다.
그렇게 둘은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문제는 캐롤이 혼자 정한 마지막이었다는 것. 아침, 잠에서 깬 테레즈를 맞이한 건 캐롤의 오랜 친구이자 한때 만났던 사이인 애비였다. 테레즈는 넋 나간 사람처럼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았다. 딱 실연당한 모습으로. 실연이 맞긴 하다. 제 인생을 뒤흔들어 놓고선 어느 날 눈 뜨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니.
테레즈는 애비 더러 묻는다. 왜 자신을 싫어하냐고.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것 같았다. 테레즈는 캐롤이 애비에게는 솔직한 얘기를 하며 의지한다는 걸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둘이 만났던 사이란 것도 알기에. 그 마음을 아는지 그게 사실이라면 아침 댓바람에 서쪽까지 비행기 타고 왔겠냐는 말부터 애비가 열 살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라는 이야기까지 덤덤히 들려준다. 그리고 캐롤의 편지를 건넨다.
캐롤은 불같으면서도 물 같다. 화르륵 타올랐다가 금세 차분해지며 자신이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찬찬히 생각하고 행동한다. 테레즈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하고 화가 날 테지만, 캐롤이 생각하기에 이건 최선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최선. 이번에도 테레즈는 아무것도 선택해보지 못한 채로 어떤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돌아온 집.
눈에 보이는 건 똑같은데 모든 게 달라졌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테레즈는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사진. 캐롤이 선물한 최신형 카메라도 있지 않은가. 포트폴리오를 착착 준비해 가며 사진을 엄선한다. 현상한 사진 중에 불쑥 캐롤이 나와서 멈칫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할 일을 할 뿐이다.
캐롤은 무얼 하고 있는가.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하비네 가족 틈에 둘러싸였다. 심리 상담사를 꾸준히 만나며 '동성애 치료'를 받는 중이다. 1950년대 뉴욕에서는 동성애가 정신병 취급받았으므로, 그들에겐 당연한 처사이긴 하다. 일련의 노력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다. 린디, 캐롤 자신.
본인은 얼마나 의식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한 사람 더 있다. 테레즈. 자신이 아닌 사람인 척 연기하는 똑같은 일상에 숨 막혀하는 캐롤에게 애비는 테레즈 얘기를 꺼낸다. 잠시 간의 정적. 소식 뭐 알고 있느냐는 은근한 물음. 퍽이나 진지한 상황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제 손으로 놓았는데 정작 놓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잘 모르겠는데 뉴욕타임스에 입사한 것 같다고 답하는 애비도 참. 서로 어깨동무하며 계단을 내려가던 뒷모습이 힘들 때 의지해가며 버텼을 그들의 세월을 느끼게 해 주었다.
캐롤은 하비와 자신의 변호사들과 만난 공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모두를 배제한,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내린다. 자신의 성 지향성을 인정하고, 테레즈와 있었던 일도 인정하며. 린디 양육권은 포기하되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여기까지 최대한 양보한 건데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법정까지 갈 거고, 그러면 정말 추해질 거라고. 그리고 하비에게 말한다. 우리 그렇게 추한 사람은 아니잖아.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테레즈, 자기 자신을 선택한 캐롤. 둘은 알게 모르게 한 뼘 자라난 상태로 만난다. 이번엔 캐롤이 기다린다. 그가 약속 시간에 보이지 않자 전화를 건다. 테레즈가 일하는 곳에 전달한 편지가 제 주인을 잘 찾아갔는지. 그렇다는 답을 듣고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반대편 의자가 찼다. 테레즈가 온 것이다.
캐롤은 가구 바이어로 일하고 있다며 근황 얘기를 늘어놓는가 했더니 집이 꽤 큰데 텅 비었다고. 괜찮으면 함께 살자는 제안을 꽤나 대뜸 던진다. 단숨에 뱉는 그 말이 의아하기도 하면서 지금처럼 디지털로 순식간에 연결되는 세상이 아니니까, 오히려 이 전개가 당연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테레즈는 생전 캐롤에게 하지 않던 답을 들려준다. NO.
캐롤은 반쯤 예상한 답이 아니었을까. 이따 저녁 약속에 가는데 마음이 바뀌면 와 달라는 말과 함께 분위기는 오묘해진다. 이 오묘한 분위기로 책을 든 남자가 테레즈를 부른다. 맞다, 이제 영화 초반 장면과 맞닿았다. 캐롤과 테레즈는 각자의 모임 장소로 흩어진다. 테레즈는 파티 장소에서 시간을 잘 보내면서도 한 편으로는 계속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캐롤의 시점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도 똑같지 않았을까. 똑같았을 거다.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영화의 마지막. 결국 테레즈는 캐롤을 찾아간다. 테레즈가 멀리서 캐롤을 보고, 서서히 다가선다. 캐롤이 테레즈를 발견한다. 둘의 눈이 짧게 마주쳤던 백화점에서의 첫 만남과 달리 이번엔 서로를 뚫어지게 본다. 그렇게 눈빛이 계속 이어지다가 영화가 먼저 끝난다.
이제 테레즈도, 캐롤도 두렵지 않다.
너무 좋았다. 좋았다는 모호한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고 느낄 만큼 좋았다. 끝나고서는 이번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해 줄 이야기가 이어졌다.
영화 속 소품 등을 굿즈로 만들어 판매하는 '클로저'다. 첫 상영회 기념으로 캐롤과 관련된 몇 가지 선물을 받았다. 테레즈가 사용한 노트를 본떠 만든 수첩, 편지지, 스티커들을 받았다. 은근 묵직한 선물을 품에 안고 완벽한 마무리를 지었다. 12월 21일 오후 2시, 그들의 점심 약속에서 곁들인 마티니를.
뒤에 일정이 있어 음미하고 가진 못했지만, 이런 경험 자체가 좋았다. 사실 12월 21일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며칠 전일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코끝 시린 겨울과 딱 맞는 영화를, 영화 속 뜻깊은 날짜와 정확히 같은 날에 보며 영화에서 나온 음식을 맛보며 마무리 짓다니. 그들이 담긴 장면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내게도 소중한 날이 하나 더 생겨 기뻤다.
다가올 25일보다 더 좋은 기억이 생긴 것 같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12월 21일이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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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11월 셋째 주도 잘 보내셨나요?
이번 주는 비 소식이 간간히 있으니 외출 시에는
우산을 꼭 챙기시길 바랍니다!
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
11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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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 더욱 확장된 세계관을 선보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1위를 차지했지만, 1편의 흥행
성적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보이고 있다.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의 절반도 되지 못한 관객을
동원했기에 1편과 비슷한 성적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주말 동안 (11월 18일 ~ 11월 20
일) 관객 수 37만 4,64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73만 1,098명을
돌파하였습니다.
2. <데시벨> (NEW)
▶ 압도적 스케일과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하는 <데시벨>은 1위를 차지한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와 4만 관객 수 차이를 보이며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주말 동안
(11월 18일 ~ 11월 20일) 관객 수 33만 6,315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8만 4,909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줄거리
소음이 커지는 순간 폭발하는 특수 폭탄으로 도심을 점거하려는 폭탄 설계자(이종석)와 그의
타깃이 된 전직 해군 부함장(김래원)이 벌이는 사운드 테러 액션 영화
3. <동감> (NEW)
▶ MZ세대 대표 배우들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은 <동감>은 청춘의 풋풋한 매력과 아련한
감성을 선사하며 관객들에게 설렘과 공감을 자극하며 호평을 받았다. 주말 동안 (11월 18일 ~
11월 20일) 관객 수 17만 7,459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30만 1,600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줄거리
1999년의 ‘용’과 2022년의 ‘무늬’가 우연히 오래된 무전기를 통해 소통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청춘 로맨스
▶씨네픽의 이번 주 127회 예측 이벤트는 11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이벤트입니다.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씨네픽 유저 예측 결과
정답자 비율(%)
▶ 한 주 동안 많은 씨네픽 유저분들이 박스오피스 순위를 예측해 주셨는데요.
11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에 대한 예측은 많은 분들이 예측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특히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반 이상이 넘는 71%를 보이며, 절대적 1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씨네픽은 다음 주에 더 재밌고 유익한 제128회 씨네픽 이벤트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4. <폴: 600미터> (NEW)
▶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최초 고공 서바이벌로 전 세계에 흥행 신드롬을 일으키며, 해외 유력
매체의 극찬을 받은 <폴: 600미터>가 4위를 차지하였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스토리를 풀어낸
점과 반전의 반전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주말 동안 (11월 18일 ~ 11월 20일) 관객 수 3만 8,202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5만 7,01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 줄거리
네려갈 길이 끊겨버린 600m TV 타워 위에서 두 명의 친구가 살아남기 위해 펼치는 사상
최초의 고공 서바이벌
5.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
▶ 개봉 6주차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며, 새로운 관객들이 계속해서 유입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개봉 36일 만에 30만 관람객 돌파를 하며 박스오피스를
계속 지킬 것으로 보인다.
주말 동안 (11월 18일 ~ 11월 20일) 관객 수 2만 2,526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32만 8,107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Black Panther: Wakanda Forever>는 국내와 동일하게 개봉 2주차에도 역시 1위를
차지하였다. 2위부터는 신작이 등장하며 순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Lyle, Lyle,
Crocodile>과 <Smile>이 순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Black Panther: Wakanda Forever>는 주말 동안(11월 18일 ~ 11월 20일) 매출액은
67,300,000 (한화 약 908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은 287,992,647
달러 (한화 약 3,885억)를 달성하였다.
<북미 박스오피스 TOP 5>
1.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6,730만 달러 (누적 2억 8,799만 달러)
2. <더 메뉴> 900만 달러 (누적 900만 달러)
3. <더 초즌 시즌 3> 821만 달러 (누적 821만 달러)
4. <블랙 아담> 448만 달러 (누적 1억 5,696 달러)
5. <스마일> 320만 달러 (누적 6,155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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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11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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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동키가 아닌 EO의 시대
출처 : 네이버 영화
귀여운 포스터로 관객을 사로잡은 <당나귀 EO>
당나귀 하면 '슈렉'의 동키만 떠올렸다면, 이제 당나귀 EO가 생각날 겁니다! 강렬한 포스터로 "제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라고 말하는 EO. 이 참을 수 없는 귀여움. 못참고 영화관으로 달려갈 여러분들을 위해 EO의 후기 및 기대 포인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관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
이 영화는 꼭, 무조건 영화관에서 봐야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조하냐면, <당나귀 EO>는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심사위원상과 사운드트랙상을 석권했어요. 영화는 풍부한 사운드로 보는 내내 EO에게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영상미도 한몫 합니다. 가끔 현실인지 구분이 안가는 듯한 영상 연출이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데,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눈과 귀가 동시에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는 "제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라는 말에 걸맞게, EO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폴란드에 있는 서커스단에서 '카산드라'와 함께 연기하는 당나귀 EO. '카산드라'와 EO는 단순히 같이 일하는 동료, 그 이상이죠. 하지만 그런 카산드라와 EO에게 생긴 비극인 사건. 그들은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강제 이별을 하게 됩니다.
EO는 서커스단에서 나온 뒤 많은 일들이 생겨요. 길을 잃어 어두운 숲길을 걷기도 하고, 맛있는 당근을 먹기도 하고, 축구장에 들려 강제로 마스코트가 잠시나마 되기도 하고, 트럭에 갇히기도 하고.
EO는 마치 길 잃은 '사람'처럼, 여러 방황 끝에 결말을 맞이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수상 후보였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제치고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발탁되어 화제의 중심에 오르기도 한 '당나귀 EO'는 오는 10월 3일(화) 개봉한다고 합니다. 꼭, 영화관에서 관람하시길 추천드립니다!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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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단히 '미친' 사람들의 보랏빛 사랑 이야기
8★/10★
K리그1(1부 리그) 승격을 눈앞에 둔 두 팀이 맞붙는다. 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팀은 리그1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확보한다. 두 팀은 치열한 공방을 벌이며 2:2로 팽팽히 맞선다. 경기의 끝은 점점 다가온다. 그때,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 한 명이 상대 진영 골망을 흔든다. 상대 팀 선수들은 탄식하며 주저앉고 같은 팀 선수들은 환호한다. 그러고는 세리머니를 하러 코너플래그로 뛰어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카메라가 선수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여전히 골대를 비춘다. 카메라는 결승골을 넣은 선수의 세리머니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제 골대 뒤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곳에는 선수들과 같은 보라색 옷을 입은 채 눈물 흘리며 기뻐 날뛰는 사람들이 있다. 관객이 들어선 곳보다 빈자리가 훨씬 많은, 단 한 번도 리그1에 올라가 보지 못한 만년 리그2 소속 팀의 경기에서 이들은 왜 이토록 정열적으로 격렬하게 집단적 환호·희열을 분출할까?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이 ‘기괴한’ 사랑의 궤적을 좇는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축구를 다루지만 스포츠 영화는 아니다. 안양의 역사를 다루지만 역사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미친’ 사람들이 떼로 부르는 미친 사랑의 노래다. FC 안양은 2013년도에 창단되었다. 하지만 기원은 그보다 훨씬 앞선다. 1996년 창단된 안양 LG 치타스가 FC 안양의 전신이다. 경기장 근처를 지나가다 구단 직원의 호의로 경기를 처음 본 고등학생, IMF의 아픔을 겪던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안양 LG 치타스의 경기를 보며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 이들은 경기장에서의 경험과 감정을 일상의 소중한 영역으로 편입했다. 그런데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2002 월드컵 붐을 계기로 더 많은 인구와 구매력을 가진 서울로 팀의 연고를 옮긴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FC 서울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포터즈 중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영화에서 FC 안양 서포터즈는 FC 서울을 ‘북패’라 부른다. 찾아보니 ‘북쪽의 패륜’이란 뜻이란다. 살벌하다).
영화는 이후 팀을 잃은 서포터즈 RED가 다시 FC 안양을 얻어내기까지 지나온 길과 전두환의 3S 정책, 서포터즈 문화가 태동한 사회 문화적 배경(PC 통신) 등을 비춘다. 교과서적 정보 전달이 아닌 이른바 ‘약빤’ 편집으로. 당연하게도 이 모든 건 서포터즈의 입장에서 그려지는데, 코로나 팬데믹 때의 텅 빈 경기장에서 공허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스포츠에서 팬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이 장면을 통해 다시금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국 사회에서 프로 스포츠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일종의 유쾌한 문화사를 팬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결국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RED는 단단히 미쳐 있다. 국내 프로 축구 응원에 해저 탐사에나 쓰이던 홍염을 처음 들여온 것도 RED고, FC 안양 창단을 위해 소속된 고학력자들을 모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서를 시에 제출한 것도 RED다. 집회에서 안양 LG 치타스의 상징색은 붉은 옷을 입고 마이크를 쥔 채 프로 축구팀을 창단하라고 구호를 외치는 것도 RED다. 무엇보다, FC 창단 후 보라색이 팀 컬러가 된 후에도 “아주 붉은 것은 이미 보라색이다”라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붉은색 팀 컬러의 ‘북패’에게 팀을 빼앗긴 역사를 상기하며 으르렁대는 것도 RED다. 우리는 이 미친/지극한 사랑의 정체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두환은 자기 목적대로 정치 외에도 스포츠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보며 ‘3S가 역시 효과가 있었군!’이라며 흡족해할 수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실로 멍청한 생각이다. RED의, 그리고 다른 수많은 스포츠팬(나아가 모든 ‘팬질’)의 ‘무용한’ 헌신은 위정자의 의도를 가볍게 초과해 다른 가능성을 벼려낸다. 이윤을 얻으리란 보장이 없어도, 명예를 가져다 주지 않아도, 대형 구단보다 규모가 초라해도, 경기에 패배해 일주일이 내내 우울한 일이 일상이어도 서포터즈는 팀을 사랑하며 ‘극락’하기를 멈추지 않는다(안양安養은 불교에서 극락이라는 뜻이고, ‘수카바티’는 극락의 산스크리트어다). 라이벌 팀을 죽일 듯이 미워하면서도 그들 역시 자신과 비슷하게 무언가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데서는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를 돕는다. 부러 돈과 마음을 들여 동료 서포터즈와 선수를 챙긴다. 모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무지 가성비가 맞지 않는 일들이다(고도로 상업화된 인기 스포츠의 대형 구단 팬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성이 기묘한 매력을 뿜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제삼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도저히 끌릴 만한 요소가 ‘없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단단히 미쳐 있다는 데서 오는 기묘함 말이다.
이 기묘함 앞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멈칫할 수밖에 없다. 칸트는 존재를 압도하는 거대한 무언가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와 공포를 아울러 ‘숭고sublime’라 이름 붙인 적이 있는데, 어쩌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정이 이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팬질’ ‘덕질’에 ‘숭고’까지 갖다 붙이냐며 의아해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무언가를 조건 없이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이 ‘무용한 열정’이 나를, 일상을, 관계를 얼마나 커다랗게 바꾸어 ‘우리’의 탄생으로 이어지는지를. 존재의 극적인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분명 ‘숭고’라는 말을 붙일 만큼 대단한 일이다. RED의 모든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다 옳고 의미 있다는 말이 아니다. RED로 대변되는 서포터즈, 팬덤이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상상할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소리다. 2022년 개봉한 〈성덕〉이 보여주었듯, 우리는 이 지극히 ‘사적인’ 사랑을 통로 삼아 퍽퍽하고 구린내나는 현실을 돌파할 무언가 기묘하고 새로운 통찰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사랑 고백 영화가 필요하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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