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징2023-09-28 12:25:58
한국 로맨스 영화 '롱디' 스포일러 포함 비추천
롱디
23.05.10 개봉
멜로/로맨스, 12세 관람가
한국, 101분
감독: 임재완
출연: 장동윤, 박유나 등
영화관 가서 볼 정돈 아니다 싶어
시사회를 잡을 수 있었음에도 스루했던... '롱디'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로맨스 영화 중에는
15,000원 주고 영화관 가서 볼 정도의 영화는 없는 것 같아요
이제 영화관=CG보러가는곳이라는 공식이 잡힌 것 같습니다
제목부터 '롱디'인 만큼
저는 도하와 태인이 정말정말......
볼 수 없을 정도로 멀고 애틋한 사이일 줄 알았어요
근데 싸우면 차 타고 달려갈 수 있을 만한 거리더라고요
일단 우리나라임 ㅋㅋ
그 정도면... 롱디긴 한데... 새발에 피인 셈이죠
심지어 롱디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제임스라는 캐릭터 때문에
도하가 헤어질 만한 사유를 만들게 되고
그 와중에 서울에 왔던 태인이 도하를 못 만나고 가게 되고
그래서 둘이 헤어지는 것뿐이에요
이건 롱디가 아니었어도 헤어질 사유 아니었을까요?
롱디라는 관계에 알맞는 에피소드를 만들었어야 해요
어떤 블로거님께서
연애 빠진 로맨스+서치라고 하셨는데 정말 딱 맞는 말인 듯요
일단 <서치>처럼 온라인에서 진행하는 구도? 로 만들어졌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구성을 시도해 본 적이...
제가 봤던 영화 중에선 없는 거로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서치>로 너무 뜬 구성인 만큼 신선하다고 할 순 없죠
롱디가 온라인 연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상황상 맞는 구성이다~ 라고 말은 되지만요
그리고 <연애 빠진 로맨스>를 제가 안 좋아하긴 해요
내용 없고 둘이 말장난만 하는 B급 로맨스 같아서요
근데 <연애 빠진 로맨스>가 B급이라면
'롱디'는... C+급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재미도 감동도 설렘도 없는 영화예요
그냥 제임스 때문에 도하 인생 나락 가는 영화라고 해야 할 듯
영화관에서 보지 않은 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영화 리뷰 많이 올리고 있는데
보고 있는 영화 중에 이렇다 하게 재미있는 영화가 없네요 ㅠ
정말 재미있는 거 보면 흥분해서 들고 올게요 ㅠㅠ
*스토리: 1/5점
*연출: 3/5점
*영상미: 3/5점
*OST: 1/5점
*연기: 2/5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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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력은 증명했으나 감동은 이어가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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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을 정말 재밌게 봤기에 실사화된 작품 역시 기대하고 봤었던 영화 <라이온 킹>. 하지만 실사화된 작품에서는 그 묘미를 잘 살리지 못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실사화를 해서 되는 작품이 있고, 아닌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라이온 킹> 시놉시스
새로운 세상, 너의 시대가 올 것이다!
어린 사자 ‘심바’는 프라이드 랜드의 왕인 아버지 ‘무파사’를 야심과 욕망이 가득한 삼촌 ‘스카’의 음모로 잃고 왕국에서도 쫓겨난다.
기억해라! 네가 누군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심바’는 의욕 충만한 친구들 ‘품바’와 ‘티몬’의 도움으로 희망을 되찾는다. 어느 날 우연히 옛 친구 ‘날라’를 만난 ‘심바’는 과거를 마주할 용기를 얻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위대하고도 험난한 도전을 떠나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라이온 킹>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실사화 하나는 정말 끝내줬던 작품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던 디즈니의 CG. 우리의 기술력이 여기까지 발전했다!!를 대놓고 보여준 작품이었다. 정말 그럴만했다. 사자의 수염 하나, 새의 깃털 하나, 지나가는 벌레 하나, 정말 실제의 모습과 다름없이 있는 그대로 똑같이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약간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 2시간 가량의 영상을 랜더링 돌리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정말 대단하다 하는 경외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실사화를 해서 독이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웠던 점은 그 대상이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라이온킹을 실사화 하다보니 동물들의 표정이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라이온킹의 매력은 등장하는 동물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연기다. 하지만 실사화가 된 사자와 다른 동물들에게 인간의 표정을 대입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면 실사화라는 개념은 실제 있는 동물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표정을 넣어버린다면 그것은 실사화와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이 안타까웠다. 그냥 입이 움직이면 대사가 흘러나오고 표정이 없다보니 딱히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답답하고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또 실사화를 기가막히게 잘해서 감탄을 하게 되고,,, 좋았다가 실망했다가 오락가락했던 작품이었다.
넘버의 가치를 담지 못하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넘버였다. 그 유명하다는 Circle of Life를 살리지 못할 줄은 몰랐다. 애니메이션 속 Circle of Life는 굉장히 짜릿했는데 실사로 보니까 그 감정이 덜해지는 바람에 보는 내내 당황스러웠다. 더불어 비욘세가 불렀다고 해서 엄청 기대했던 넘버 역시,,, 극 속에 녹아들었다기 보다는 순간적으로 콘서트장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이것은 영화인가,, 콘서트장인가..? 이렇게 튀어도 되는 것인가..? 혼란했다.
애니메이션의 감동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영화 <라이온킹>. 디즈니의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실사화의 안 좋은 예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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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 너머 샹그릴라까지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부모님의 집을 떠난 지 십년도 더 지났고,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스스로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가끔 부모님의 집을 찾을 때, (이제는 개념조차 희미한) ‘집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들 때가 있다. 낯선 목소리가 “집에 어른 계시니?” 할 때면, 습관처럼 안 계신다고 대답하고 나서는 끊긴 전화기 앞에서 잠시 상념에 빠진다. 내게 나는 어른이 아닌가? 문득 내 나이를 깨달은 자의, ‘어른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빠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그 질문에 대한 어느 아름다운 답안을 이 영화, <벨파스트>에서 찾았다.
영화 <벨파스트>는 동명의 도시 벨파스트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에게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록허트 교수, <오리엔트 특급 살인> 포와로의 배우로도 익숙한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만든, 반쯤 자전적인 영화다. 케네스 브래너가 녹아든 주인공 꼬마 ‘버디’는 벨파스트의 한 골목에 살고 있다. 저녁 나절이 되면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이웃들이 끝말잇기처럼 줄줄이 전달해줄 만큼 서로가 서로를 빤히 아는 동네. 그곳에서 쓰레기통 뚜껑을 들고 상상 속의 용을 무찌르면서 놀던 꼬마의 평화로운 세상은, 이내 깨진다.
용을 무찌르는 데 쓰던 방패는, 어느새 실제적으로 눈 앞에 튀는 벽돌 조각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고 만다. 아이들이 꿈꾸어야 할 시간을 현실에 매어두는 것, 그게 분쟁이다. 아직 어린 버디에게 더없이 정겨운 고향이었던 벨파스트는, 동시에 폭력과 긴장에 묶인 지역이기도 했던 것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종교 갈등인 동시에, 아일랜드 독립주의 계열과 친영 계열의 갈등까지 뒤섞여 유독 복잡한 분쟁의 양상을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도 분쟁의 내용을 그리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상황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요약 서술되고 넘어가며, 그나마도 속도가 매우 빠르게 처리된다. 텔레비전에서 군대를 보낸다는 소식이 발표되는 동시에 창밖으로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식이다.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얼룩들이 아주 최근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정치적인 관점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거기에 방점을 찍은 영화는 아니다. 관객으로서 나 또한 그보다는 한 가족의 이야기, 한 사람의 이야기로 주목하고 싶다.
#. 정답은 있는가
‘어른’과 유사하게 되어 가면서 점점 느끼는 게 하나 있다면, 거대하고 거창한 하나의 정답을 맹목적으로 외치는 사람 중에는 가짜의 비율이 높다는 것. 목청만 높이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직접 사유하고 살아낸 것만이 내게 남지만, 그렇게 삶으로 배운 것조차도 하나의 고정된 정답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도 언제 깨지고 바뀔지 모른다.
이건 꽤나 속이 복잡해지고 불안해지는 생각이어서, 가끔은 이 마음 끝에서 툭 큰소리를 내게 되기도 한다. 목청만 높이지 말자는 생각 끝에서 목청이 높아지다니 역설적이지만. 허장성세는 결핍에서 나오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영화 속에는 ‘하나의 정답’을 외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답을 종용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맞부딪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세계가 그려져 있다. 실제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떠나, 세계 보편적으로 익숙한 상황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름의 방법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놓고 끙끙대는 버디에게 “숫자를 애매하게 쓰라”고 하며, 이를 “애매하게 맞추기spread betting”라고 한다. 하나 뿐인 정답을 콕 짚는 대신,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조언을 따른 버디가 반쪽의 성공만 거두고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같이 하기do the project together”. 경계를 흩는 것도 좋지만, 궁극적으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눈을 맞추고 함께하는 것이 해결의 열쇠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와 너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나란히 연대하기. 이것은 정답이 아니다. 다만 정답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 변화보다 기억
구불구불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길처럼, 상황은 계속 바뀐다. 한때 데이트가 끝나고 자신이 집에 데려다 주었을 ‘갈색 스타킹 소녀’가 이제는 평생을 함께한 노년의 여성이 되어, 자신의 노구를 ‘집에 데려와 주겠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잠시 할아버지가 멍해지듯이. "고향을 떠나는leaving home" 행동이 "살아가는moving on" 행위로 해석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듯이. 주부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효소 세제가 한 주부에게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듯이.
자꾸 모양을 바꾸는 세상에서 변치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할아버지는 “벨파스트 출신의 버디”라는 정체성을 명확하게 기억하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계속 묻는다. 버디는 그때그때 구체적인 대답을 꺼내는 아이다.
할아버지의 질문들은 버디의 뿌리를 세우는 힘이 될 것이다. 오늘의 버디도 할아버지의 사랑을 풍성하게 느끼지만, 먼 훗날 뒤채고 흔들리는 날에 더욱 느낄 것이다. 이 사랑은 대를 이어 내려온다. 손자의 수학 문제 푸는 법은 도와줄 수 있었지만, 자식의 성장 과정을 옆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그 자식의 마음에 “많이 도와주셨지”라는 아릿한 사랑으로 남아 있듯이. “가라. 돌아보지 마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단호한 얼굴에서 끈끈한 마음이 묻어나듯이.
“돌아보지 마라”는 할머니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버디는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보는 마음, 결국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마음일 것이다.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마음. 구불구불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앞만 바라보지 않는 마음. 그 마음만이 우리를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 달까지 가자
우리가 바라는 곳은 어디인가.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달’이 언급된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1969년 7월)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광활한 우주를 소재로 한 텔레비전 방송을 보는 장면도 나오고, 버디와 캐서린이 함께 하는 과제도 달 착륙에 관한 것이다. 달 착륙 숙제를 했는지, 함께하고 싶은지 묻는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Have you gone to the moon yet?” 달에 가보았는지 묻고, “Do you want to, with me?” 같이 하겠는지 묻는 문장에도 ‘숙제’라는 목적어는 없다. 숙제를 마치고 최고점을 받은 아이들에게 아빠가 묻는 말 또한, 달까지 가는 방법이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대화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달로 가라Get yourself to the moon”는 말을 한 뒤 할아버지는 “런던은 오직 작은 한 걸음일 뿐”이라며 “벨파스트는 언제든 뒤돌아보면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니까.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벨파스트를 갑자기 떠나야 했던 어린 시절이 자신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뿌리를 뽑혀 옮겨 심기는 감각은, 정도와 상황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로 남는 기억이니까. 그러나 트라우마는 트라우마로만 끝나지 않는다. 순진무구한 버디의 시선을 필터 삼아 걸러진 다음, 이야기에 응집된다.
인류가 처음 달을 밟은 것만큼이나, 벨파스트를 벗어난 삶 또한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을 것이다. 달을 밟기까지 우주비행사와 과학자들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듯, 버디의 가족 또한 상당한 역경을 겪었다. 그렇게 도달한 자리는 그전까지 있던 곳과 중력부터 다른 곳, 완전히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다 넘어서서, 이제 반자전적인 영화로 트라우마를 다독인다. 현대사의 얼룩과 다사다난한 개인사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잘 엮어낸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잘 만든 이야기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주목하게 한다.
영화 속 할머니가 서글프게 내뱉은, “벨파스트에는 샹그릴라로 가는 길이 없단다”는 말에 배인 기억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벨파스트의 기억을 달 너머 샹그릴라에 마침내 이르게 한다. 흑백의 날들에 유일하게 생생한 색채로 그려진 세상에 그 길을 만든다. 이제 벨파스트에는 샹그릴라로 가는 길이 놓였다. 샹그릴라는 스크린 속에 있다는 할머니의 말은, 360도 돌아 맞는 말이다. 스크린 속 샹그릴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힘은, 영화에 있다.
이 영화는 불시착처럼 느껴졌을 어떤 순간을 연착륙시킨다. 기억의 재구성에는 그런 힘이 있다. 스웨터를 풀어 그 털실로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듯, 같은 재료로 새로운 꿈을 그릴 수 있다.
#. 어른이 된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게 뭘까. 정답 없는 질문을 몇 번이고 읊조린다. 매번 다른 답안을 써낼 수밖에 없는 질문, 그때그때 달라질 답안을 아무도 평가해줄 수 없음에도 이게 최선인지 더 나은 답안이 없는지 계속 고민해야 하는 질문.
그래도 <벨파스트>에서 끌어낸 하나의 답안이, 지금은 꽤나 마음에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불시착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어떤 순간을 연착륙의 기억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 그렇게 이야기의 힘으로 나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 시간의 한 마디를 건너온 사람만이, 분절된 지점을 지나 뒤를 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란 재료를 얻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니까.
그렇게 달까지 가자. 나의 샹그릴라로. 각자의 기억과 재구성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아폴로 11호 같은 (그리고 누리호 같은) 성공적 발사체를 놓아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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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도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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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중에 그렇게 던지는 선수 전 세계에 몇 명 안 될걸?"
어릴 때부터 야구 신동으로 유명했던 주수인. 그는 청소년이 되면 야구를 할 수 없을 거란 편견을 깨고 고등학교 야구부까지 진학했다. 하지만 재능과 노력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신체 조건에서 남성 선수들에게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주수인에게 “여자 중에 그렇게 던지는 선수 전 세계에 몇 명 안 될걸?”이라는 감독의 말은 칭찬이 아니다. 그는 ‘여자 야구’가 아닌 그냥 야구가 하고 싶은 것이기에.
"내가 130 던지는 게 대단한 거야? 그게 왜 대단한 건데?"
주수인과 함께 야구를 시작한 이정호. 그는 프로팀의 지명을 받아 프로 선수가 되었다. 같은 곳에 있었던 두 친구 사이의 위치가 달라진 것이다. 상심한 주수인에게 이정호가 구속 130이면 대단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자 주수인이 응수한다. “내가 130 던지는 게 대단한 거야? 그게 왜 대단한 건데?” 주수인이 화가 난 건 이정호의 말에 ‘여자 선수 치고는’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주수인은 ‘여자 야구’가 아닌 그냥 야구가 하고 싶다.
"나처럼 못 가면? 포기하는 게 맞는 걸 수도 있어."
주수인의 야구팀에 새로 코치로 온 최진태. 그 역시 프로 야구선수를 꿈꿨으나 이를 이루지 못했다. 그는 주수인에게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주수인이 왜 코치님도 프로에 도전했으면서 나는 못 하게 하냐고 따지자 최진태가 말한다. “네가 여자라서 내가 이러는 거 같아?", "나처럼 못 가면? 포기하는 게 맞는 걸 수도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라는 건 있다. 최진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수인인 지금부터가 더 힘들 겁니다."
하지만 주수인은 야구를 향한 진심과 집념으로 최진태를 감동시키고, 최진태는 주수인이 프로팀에서 뛸 수 있도록 돕는다. 최진태는 주수인에게 남자 선수를 따라 하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고 코칭한다. 투수를 평가하는 일반적인 기준인 강속구가 아닌, 볼 회전이 좋은 주수인의 강점을 살린 너클볼로 승부를 보자는 것이다. 결국 주수인은 한 프로팀 2군에서 선수로 활동할 기회를 얻는다. 단장은 꿈에 그리던 프로선수가 되어 기뻐하는 주수인의 어머니에게 말한다. “수인인 지금부터가 더 힘들 겁니다.”
결국 우리 삶을 빛내는 것은…
영화는 주수인이 2군 팀과 계약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주수인에게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진 않다. 여자인 주수인이 마초적 남성성이 헤게모니를 쥔 곳에서, 신체적 ‘한계’를 딛고 장밋빛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건 너무 순진한 일이다. 하지만 합리성 너머의 무언가에 도전하는 주수인은 큰 울림을 준다. 주수인의 ‘비합리적’ 열정을 내내 조명하는 영화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삶을 빛내줄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인다. 결과와 숫자 너머에, 우리 삶을 빛내는 무언가가 있다.
덧. 네이버 영화 평점을 보면, 이 영화가 '현실'도 모르면서 여성 서사를 억지로 야구에 끼워 맞췄다는 이유로 혹평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아래 기사에서 보듯, 현실을 모르는 건 〈야구소녀〉가 아닌 영화에 혹평을 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변화를 마주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10901280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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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타닉의 운명은 아직 모른다
영화 <앵그리 애니>
영화는 짐을 들어준다
영화 리뷰를 남기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무거운 질문들과 고민들을 조심스레 전해주던 영화였다. 운이 좋게도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이 영화를 관람했고, 상영 내내 분명 의미 있는 시간이 흘러갔다. 영화가 나에게 쉽게 다룰 수 없는 주제를 이야기할 때는 나도 영화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내가 영화를 많이 사랑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직장, 학교, 아니면 그냥 수다 떨고자 만난 카페에서도 다루기 힘든 주제를 영화는 멋지게 해낸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이야기하는 영화는 그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기 시작한다. 무거웠던 주제는 영화를 통해 더욱 순화되거나 다루기 부드러워진다. 고양시에서 열린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만났던 다큐멘터리 영화들도 그랬고, ‘킴스비디오’나 ‘프리 철수 리’ 같은 영화들도 그러했다. 그런 면에서 앵그리 애니는 만족스러웠다.
어머니와 아들
영화 ‘앵그리 애니’는 1974년 프랑스 교외 지역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워킹맘 ‘애니’가 임신 중절 수술을 받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애니’는 당시 프랑스에서 불법이던 시술을 진행하기에 아무도 모르게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서 피를 흘리거나 자신을 도울 비밀 단체를 찾는 방법,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른다. 문제는 ‘애니’만이 앞서 이야기한 선택의 도전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중반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슬픔의 감정을 머금고 단체를 방문한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하며 12세 관람가를 받은 까닭도 비밀 단체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 어린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나에게 많은 충격을 준 영화였지만, 1974년에도 피임의 중요성과 성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시사회를 참석한 분들 중 엄마와 아들이 함께 온 것이 다시 생각났다. 어머니께서 자제분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셨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70년대 보다 나은 성교육을 하셨을 거라고 믿는다.
첫번째 화두가 이것이다. 한국에도 올바른, 현실적인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언제나 존재했다. 남성, 여성을 떠나서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야 하는 논쟁의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 나도 돌이켜 보면 재학생 시절에 어떤 성교육을 받았었는지 돌이켜 보게 됐다. 그런 면에서 영화 ‘앵그리 애니’는 교육 자료로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음습하게 배우는 것 보다 영화를 통해 임신과 성에 대한 진중함을 느끼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두번째는 악의 순환이다. 영화 속에서 정확한 피임과 성교육이 부족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임신은 반가움보다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낳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임신 중절을 원하는 가정이 많아졌으나 법과 권력에 의해 수술은 규제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불법이기에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는 아무도 모르는, 의사나 간호사가 진행하지 않는 터무니없는 수술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학에 대한 어떤 지식 없이 된장을 바르면 상처가 낫는다는 속설처럼 낙태 수술은 그렇게 진행된다. 그러다 여인이 잘못되어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나면 악은 다시 움직였다.
법과 규제를 바꾸면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영화는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인지 설명한다. 정책의 변화는 분명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들에겐 분명 큰 결정이자 파장이다. 이미 지하에서 무수하게 많은 여성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다는 대사가 참 가슴 아팠다. 그리고 한국을 바라보며 내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될 분들이라면
두 가지 말고도 씨네랩의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영화 ‘앵그리 애니’는 나에게 굉장히 많은 충격과 고민들을 쏘았다. 무엇이 맞고 틀리고, 얼마나 영화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넓혀 준 것이 가장 놀라웠다.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70년대 스타일을 설명하는 대신 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난 이 영화는 아버지가 될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보았으면 도움이 될 영화라고 생각한다. 수술대 위에는 누구나 올라갈 수 있으니 말이다. 쉽지 않은 영화였으나 관람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씨네랩 관계자분께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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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결국 다시 혼자가 될 것이란걸 알기 때문에
업보. 불교에서 쓰는 말이다. 선악의 행업을 말미암아 삼은 과보를 뜻한다. 이 업보의 주체는 상황마다 다르다. 인간관계에 정답이란 없으니 당연하다. 내가 업보를 돌려받을 수도 있고 타인이 누군가에게 줬던 상처를 내가 입힐 수도 있다. 불교를 정의하는 또 다른 가치관이 있다. 윤회다. 생명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내가 지금 태어났다고 한 건 언제쯤 죽는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또 나는 다른 무언가로 태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좋은 일 나쁜 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금 하품을 크게 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업보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크게 준 상처의 대가를 돌려받고 있는 셈이다.
이 가정을 계속해서 곱씹다 보면 인생이 허무해진다. 공감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이겨내도 막상 같은 시련이 덮치면 어떡하지.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일인데. 이러다 내가 받은 상처가 세상의 기준에 끼지 못한 게 된다면 참 외롭지 않을까. 이 감정이 내가 단 1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런 거겠지.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상대를 모욕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고, 나 역시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주변인들에게 더 감사해야 한다는 걸. 갑자기 나더러 화려하다고 했던 내 스승 중 한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연락할 일은 없어 마음으로만 그분의 행복을 기원한다. 나는 내가 성공했던 일들보다 훨씬 더 초라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에 휘둘리는 인간이기도 하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아무것도 없는 영화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눠진다. 한국의 인기 여배우가 유명 영화감독과 불륜설이 난다. 국내 여론은 당연히 난리가 나고 베를린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는 언니랑 대화를 나눈다. 1부 끝. 2부는 여배우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불륜이 났던 남자 감독과 만난다. 2부 끝. 이 영화는 줄거리만 단출한 게 아니다. 영화의 화법도 조용하다. 플롯이랄 게 없다. 조명도 제대로 안 된 것 같고. 인물 갑자기 튀어나오고. 대화도 사실 의미가 없다. 난 왕가위를 좋아한다. 왕가위 영화의 핵심은 때깔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왕가위의 감성과는 전혀 딴판이다. 왕가위는 스트릿룩으로 멋을 뽐낸 사람쯤 된다면 (이 영화에서의) 홍상수는 맨투맨에 슬랙스만 입었는데 신발이 짚신인 사람이다. 난 난해한 옷차림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비춰서 과연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없다. 이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없다. 2021년 오늘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알았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딱히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혼자 밤 해변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말이 아니라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다. 감독은 어떤 감정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쓴 걸까? 난 외로움과 후회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영희가 유일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공간은 해변이다. 그녀는 애인을 좀 많이 신경 쓴다. 친한 언니에게도 애인 이야기를 한다. 지인들과 술 먹을 때도 애인 생각을 한다. 해변에서도 애인의 얼굴을 그린다. 그러다가 해변에서 잔다. 시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냥 그녀는 그러고 만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시간이 지나 그녀의 그리움이 어떻게 됐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2부를 보자. 바다에서 지인들끼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 근데 이건 꿈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2부가 끝났다. 영화 안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던 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다. 모든 게 꿈이었다. 결국 그녀는 혼자서 길을 걷는다. 영화의 시작은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었는데 끝은 혼자다. 갈등의 해결? 그런 것 없다. 주인공의 해피엔딩? 없다. 새드엔딩? 당연히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 상황은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외로움이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그런 막연함이 외로움이라 생각한다. 영희는 혼자서 소리친다.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냐고 주변인들에게 묻는다. 근데 이게 꿈이다. 내가 진짜 나쁜 년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 마저도 혼자만의 착각으로 끝났다. 그뿐일까? 영희의 애인인 감독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본인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다. 결과적으로 비행기 타고 13시간이나 걸리는 베를린에서 남자를 생각했던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버렸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그리움은 꿈으로 매몰됐다. 남는 게 없는 셈이다. 이게 홍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감정이다. 외로움이다. 우리는 초입 10분 만에 이 영화가 이러다가 끝날 거란 걸 알고 있다. 감독이 홍상수니까. 근데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밤 해변을 보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다. 어차피 세상에 나를 공감할 수 없는 건 나밖에 없단 걸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엔 이유가 없다. 그냥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가장 외로워진다. 그리고 그게 내가 만든 이유 때문이란 걸 알면 걷잡을 수 없이 후회가 커진다. 바닷가에 홀로 누워서 잠을 자고 싶다. 그냥 멍하니 시간만 지나면 좋을 테니까. 좌절과 외로움을 겪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 포함한 모든 이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다. 아무것도 없을 땐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마지막 엔딩신 바로 전까지를 보니 아마 홍상수 감독도 그런 것 같다. 외로우니까. 이 모든 게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나 보다.
근데 마지막 엔딩신을 보자. 영희는 일어나서 똑바로 걷는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단 걸, 다 의미가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단 걸 아는데도 앞을 보며 걸어간다. 외롭다는 뜻이다. 근데 1부에서 남자 등에 업혀 가던 모습이 아니었다. 2부는 혼자서 걷는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이 영화의 그녀 모습에게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외롭지 않은가 보다. 아무도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씩씩해졌나 보다. 영희는 후회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후회는 어차피 우리의 곁에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진다.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용서를 해주지 않을 때가 많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영희는 이 모든 게 허상임을 알고도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앞으로만 걷는다. 난 이런 그녀의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후회가 작동한 후의 방식과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나라는 인간이 비호감 덩어리라 멀어질 수밖에 없던 모순적인 순간들. 뭐 그런 순간이 우리의 일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걸 벗어나지 못하면 후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 막상 그걸 세상이 이해해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냥 방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우리는 걸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세상에게 상처를 주고도 앞으로 걷는다는 건 받은 이들의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셈일 테니까. 현실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홍상수는 부인에게 큰 상처를 줬다. 사실 어찌 보면 질이 안 좋은 사람이다. 그는 이런 자기의 모습을 영희에 투영해 우리의 한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 알아.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단 걸. 그리고 내 애인도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누리던 인기 영희의 주변인처럼 다 꿈처럼 사라지겠지. 사랑도 언젠가 실패할 테고. 그럼에도 영희는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걸었다. 외로움과 후회를 보여줘도 사실 자기는 선택지가 없단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홍상수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하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내가 잘못한 일에 내가 외로움을 느끼던 타인이 나에게 가한 이기심이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게 인생사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모순이고 후회 속에 갇혀 나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 셈이다. 나도 외롭고 후회한다고. 이게 내가 느낀 감정들이라는 걸 보여줬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는 바도 없이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을 완벽하게 비유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루틴의 반복 속에 산다. 반복되는 일상 속 비호감 덩어리인 나.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때의 나만 있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게 꿈같아서 즐거웠던 시간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그러면 어때. 이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내가 보이는 것들이 타인은 눈치 못 채는 순간의 연속이다. 타인과 교감하는 순간까지 심지어 꿈같이 사라질 때가 부지기수다. 이건 결국 후회나 외로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영희처럼 앞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다. 회의감이 가득한 게 우리의 삶이라고 한들 홍상수는 이 감정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감독이다. 홍상수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지만 나도 그에게 설득당해버렸다. 처음엔 양홍원의 <오보에>를 리뷰하려고 시작했던 글이 점점 길어졌다. 굉장히 중요한 기획서를 써서 모 교수님에게 내야 하는데 한 3시간 동안 이 글만 썼다. 이제는 해변에서 혼자 배회하지 않아야 할 텐데. 공부도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7월 말의 밤이 조용히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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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할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1979년 12월, 서울엔 봄이 오지 않았다. 대신 2023년 극장가에 봄이 왔다. 14일 기준으로 <서울의 봄>은 750만 명을 넘었고, 천만 관객을 향해 진격 중이다. 관객 동원 수에 비례하듯 영화를 통해 12·12 사태와 관련 인물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극 중 수경사령관 이태신 수경 작전참모 강동찬, 헌병감 김준엽, 특전사 오진호 소령 등 전두광이 이끄는 하나회 세력과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는 상황. 군인으로서 해야 할 본분을 다한 이들의 모습은 인생을 살면서 한 번은 마주치는 ‘존재’ 또는 ‘행동’하는 삶에 대한 선택과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 존재할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영화 <서울의 봄> 스틸 /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현대 전쟁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략가이자 실천가 중 한 사람인 존 보이드. F-16의 아버지, ‘걸프전 승리의 설계자’로 불리는 등 전투기 조종사로 군사 전력가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직접 행동하는 삶을 실천하고, 참된 군인으로서의 길을 제자들에게 전파했다. 그는 수많은 젊은 장교들에게 앞으로 두 갈래의 길이 열릴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쪽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출세의 길이 열릴 수 있지만, 세상과 타협해야 하고, 친구들에게 등을 돌려야 한다. 다른 한쪽은 출세하지도, 좋은 임무를 맡지도 못할 수 있지만, 세상과의 타협, 친구와 자신을 배반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 /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존 보이드는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인가(또는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을 할 것인가(또는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과 그 중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교육한 것은 군대라는 사회 내에서 계급에 따른 일이나 위치, 그에 수반된 권력이 결국 자신의 성취로 착각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 그는 의무, 명예, 조국 등 군인이라면 꼭 가져야 하는 가치가 한 번의 결정으로 자만, 권력, 욕심으로 더럽혀진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존 보이드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매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히 해낸 인물이지만, 형식에 갇힌 관료주의와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마지막 계급은 대령이었다. 그리고 남겨진 건 아파트 한 채와 연금뿐이었다고 한다.
| 존재하는 전두광, 행동하는 이태신
영화 <서울의 봄> 스틸 /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서울의 봄>은 존 보이드의 이 개념을 영화로 옮겨 놓는 듯 두 인물을 대립시킨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전두광(황정민)과 중요한 일을 하는 이태신(정우성)이 바로 그들이다. 1979년 10·26 사태가 벌어진 뒤 이 수사를 합동수사본부장 전두광 보안사령관이 책임진다. 그리고 그는 권력의 맛을 알게 된다. 당시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이성민)은 이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10·26 사건 종결 후, 전두광, 노태건(박해준) 등 주요 요직을 맡은 인물을 타지역으로 내려보내려 한다. 이를 알게 된 이들은 권력을 오랫동안 장악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전두광은 물론, 하나회 멤버들은 이 모든 일이 다 조국을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행태를 보면 권력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쿠데타 진행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전두광을 비난하다가도 어떻게든 해결되면 칭찬모드로 변경하는 이들은 권력 앞에 놓인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찌 보면 전두광은 이들의 습성을 미리 인지하고 좌지우지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도 똑같은 인물이었으니까.
영화 <서울의 봄> 스틸 /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의 반대에 서서 서울을 지키는 이태신은 자리가 아닌 일에 몸을 던지는 인물이다. 그 일은 조국과 국민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난다. 정상호가 전두광을 견제하기 위해 이태신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앉힌 것도 그 사명감 때문이다. 곁눈질하지 않고 자신이 택한 신념의 길을 오롯이 가는 그에게 권력보다 더 중요한 건 군인이 해야 할 일이다.
두 인물의 가장 큰 차이는 ‘목적’에 있다. 전두광은 권력과 존재라는 목적을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일을 택한다. 반면, 이태신은 명예로운 참된 군인으로서 일하고 행동하는 일을 목적으로 둔다.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은 없다. 나라와 군인만 있을 뿐이다.
| 전두광의 영화가 아니라는 미덕
영화 <서울의 봄> 스틸 /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아수라> 이후 7년 만에 <서울의 봄>을 들고 온 김성수 감독은 관객을 1979년 12월 12일로 데려가 진압군과 반란군의 대결을 보여준다. 역사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고 상상력을 가미해 사건을 재구성한 감독은 앞서 소개한 대결 구도를 기반으로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펼쳐낸다. 중요한 건 이 작품이 전두광의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소리를 들었던 그 겨울밤으로부터 44년이 지났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날의 사건이 한국 현대사의 운명적인 전환점이 됐는지, 가슴 속에 있던 오래된 숙제를 영화로 보여주려고 했다.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이 운명적인 전환점이 한 개인의 야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하이에나처럼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하나회 무리들의 욕심이 서울의 봄을 빼앗은 거라고 말한다. 권력을 미끼 삼아 타협하고 몸집을 키운 한 집단의 야욕은 군인으로서의 신념을 가진 지키는 자들은 물론, 그토록 민주주의의 봄을 기다려온 국민들의 마음마저 집어삼킨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 /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중요한 일을 하기 보다 중요한 사람이 되려는 이들이 많은 이때 <서울의 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의 목적을 어디에 뒀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존재하는 삶, 행동하는 삶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설 것이다. 그 선택에 의해 누구나 전두광이, 이태신이 될 수 있다. 선택의 순간, <서울의 봄>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
참고문헌: 라이언 홀리데이, [에고라는 적], 흐름출판
로버트 코람, [보이드], 플래닛 미디어
평점: 3.5 / 5.0
한줄평: 권력에 취한 이들의 하룻밤에 봄날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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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팬들에게 준 선물들 정리! (이스터에그)
안녕하세요 마블쟁입니다!!
드디어 스포가 있는 자세한 리뷰 영상입니다!
영화 속에 들어있던 수많은 이스터에그들 중,
이번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캡틴과 아이언맨의 떡밥 및 이스터에그 들을 자세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상 재미있게 봐주세요~
2018. 04. 27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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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티브 맥퀸 : 더 맨 앤 르망> 메인 예고편
‘빠삐용’에 출연하기 몇 해 전,
1960년대를 대표하던 할리우드 스타 배우 ‘스티브 맥퀸’은
평생의 소원이었던 레이싱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프랑스 ‘르망’으로 떠난다.
질주하는 도로 위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을
스크린으로 전달하고 싶던 그는
영화 제작사를 설립해 직접 감독을 섭외하고
레이싱 카에 개조한 카메라를 설치하며 열의를 보이지만,
늘어나는 촬영 회차와 투자사와의 불화로
영화는 점점 그가 원하는 방향에서 멀어져 간다.
여기에 뜻하지 않던 불의의 사고가 더해져
꿈을 향해 질주하던 그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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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가치 캅시다> 메인 예고편
대한민국에서 영어 좀 한다는 남자라면 혹하는, 일생에 단 한 번만 지원할 수 있는 군대 카투사. 엘리트 명문대와 금수저들이 장악한 이 곳에 최종 학력 고졸의 말년 병장 추해진이 있다. 어떤 의미로든 전설로 불리는 해진은 악연, 지연 혈연가지 온갖 차별이 판치는 한국 탈출을 위한 돌파구로 '미군'을 준비한다. 갖은 모욕에도 비굴함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결과, 미군 입대를 눈앞에 두고 느닷없는 절도사건에 휘말리면서 탄원서 5명의 서명을 받아야만 한다. 절친한 동갑내기 후임, 재벌 아들 이등병, 전 여친을 빼앗은 후임, 미군이 되기 위해서라면 선임이고 후임이고 누구에게라도 머리를 조아리고 한 명씩 찾아 나선다. 인종주의자 미군 현병에게 총을 맞을 뻔하면서까지 고군분투하던 해진은 필사적으로 서명을 받아내지만, 자신이 미군이 된다는 것을 지독히 반대하는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마지막 절차가 남았는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네가 잘 되는 게 그냥 싫어!”
한국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지가 미군이 되는 것,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눈 돌아간 해진의 충격적인 반격을 확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