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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5-08-25 08:04:45

분위기의 영화

영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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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영의 영화에는 분위기가 있다. 배경은 길거리일 때가 많고, 인물들은 계속 대화를 나눈다. 또 그들은 자주 걷는다. 미장센은 적당히 세련되어서 감독에게 특유의 미감이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극에는 줄거리가 있다. 하지만 영화를 감상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그래서 미세한 감정과 은은한 대화의 흐름,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이야기 설명 속에서 종종 길을 잃더라도 크게 불안하지는 않다. 이 영화에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 혹은 느낌이 자연스레 솟아서다.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차분한 호흡과 정돈된 미감이 주는 영화의 안정감에 땀 흘리는 순간, 생활의 순간, 노동의 순간이 부재해서다. 의도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 속 인물들은 일하는 중이거나 일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명상하듯, 산책하듯 연기한다. 그래서 조희영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조금씩은 붕 떠 있는 것만 같다. 구체가 아닌 추상의 세계로 초대받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어지는 땅〉에 이어 홀린 듯 끌려가면서도 조금은 거리를 두며 영화에 들어갔다. 멀리서 흘긋거리며, 끈에 묶여 허공을 날아다니는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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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정호와 관계 맺은 세 여자가 있다. 먼저 수진.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정호의 애인이지만 현재 자기가 책 표지 그림을 그려준 시인과도 만나는 중이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인 인주는 병원에서 의사에게 어쩌면 심각한 병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정호를 향한 마음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여러 캐스팅에 도전 중인 배우 유정은 정호의 전 애인이다. 유정에게는 그녀와의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애인이 있는데, 두 사람은 자꾸만 다툰다. 어쩌면 이 다툼은 정호의 자살 시도가 그녀에게 남긴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간을 뒤섞는다. 수진이 정호와 통화하는 장면이 나오고 한참 뒤, 같은 통화를 하는 정호의 모습을 비추는 식이다. 그리고 이 시간의 뒤섞임과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각자의 기억과 생각, 감정, 의도는 해명되지 않은 채 묵어간다. 감독은 이 영화의 연출 의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일상에서 겪는 빈번한 오류와 오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답을 알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결국 다른 것으로 알려질 모든 기쁨과 고통에서 우리는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유머를 던졌는데 진지하게 받는 상대, 장난을 쳤는데 심각해지는 분위기. 우리가 이런 것들을 매번 해명할 수는 없다. 그저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다. 이는 비단 감정과 의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정호도 마찬가지다. 145분의 상영 시간 동안 아주 짧은 시간만 등장하는 정호는 어딘가 신비로운 인상을 주는데, 이는 그와 관계 맺은 세 여자의 정호에 대한 기억과 생각, 감정, 의도가 그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매끄럽게 정돈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결이 모인 정호는 그래서 수수께끼 같은 신비함을 갖는다. 보호자가 없는 것인지 산책을 나온 것이지, 집으로 돌아간 것인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영화 속 검은 개처럼 말이다. 검은 개는 일반적으로 우울증을 상징한다. 사람마다 다른 애정을 투영하고, 다르게 기억하는 검은 개는 결국 다른 것으로 기억되어서 우울한 사람들 사이의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일까. 혹은 깨져버린 인주의 작품처럼 결국 모든 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목격하고 기억할 파편일 뿐인 걸까. 영화가 특유의 미장센과 분위기로 도달하고자 한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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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언젠가 또다시 만들어질 독특한 분위기로 관객을 휘감는 조희영의 영화가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땀 냄새 나는 생활의 순간을 카메라 안으로 들여와 주제로 삼는다면 어떨까 싶었다. 잘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듯한 영화일 것만 같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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