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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oDAY2023-09-29 23:50:52

'당나귀 EO'의 여정을 굳이 지켜봐야 하는 이유

<당나귀 EO>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당나귀 EO>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이 당나귀, 뭔가 다르다

<당나귀 EO>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19번째 장편 영화로,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당나귀다. 이름은 EO. 카메라는 그의 여행을 조용히 뒤따른다.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서커스단으로부터 구조된 EO. 그는 농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축구팀 마스코트도 됐다가, 소지지 공장에서 간신히 탈출하며 폴란드에서 이탈리아까지 여행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선뜻 와닿지 않는다. 당나귀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대사도 적고, EO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단편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한 이질감도 있다. 장소가 달라질 때마다 연기하는 당나귀도 바뀌다 보니 더욱 그렇다. 중간중간 VR 게임을 하는듯한 실험적인 구도가 삽입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고요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워서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친절하다. 자칫 지리멸렬할 뻔한 예술 영화의 속살을 음미할 문을 슬쩍 열어준다. 오프닝이 그 문이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EO는 파트너인 '카산드라'(산드라 지말스카)와 함께 관능적인 공연을 펼친다. 파편화된 이미지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EO와 카산드라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호흡을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굳이 당나귀의 눈을 빌려 인간 세상을 관조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동물에 관심 없는 동물단체의 역설

카산드라와의 공연이 끝나고, EO는 곧장 생이별을 경험한다. 동물 서커스가 동물 학대라는 시위대가 등장해 카산드라를 비난한다. 서커스단을 떠난 EO는 다름 동물과 함께 한 목장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그는 마스코트로서 기념행사의 배경을 장식한다. 정치인과 동물보호단체 관계자가 맥주를 들고 자축하는 동안. 목장에서의 삶은 서커스단에서의 생활과 다르지 않다. EO는 짐을 나르고, 다른 말은 화보 촬영의 도구로 사용된다. 

 

자연히 의문이 생긴다. 동물 보호 단체에게 동물 학대는 어떤 의미일까? 동물을 수단으로써 활용하지 말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화보 촬영이나 짐 나르기에 말과 당나귀를 이용하는 관행도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런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동물을 학대한다고 비난받던 카산드라만 EO를 사랑으로 대한다. 그를 찾아내고, 생일을 축하해 준다. 심지어 그 순간 EO는 마침내 자기 발로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렇듯 EO의 여정은 동물 보호 단체의 역설을 지적하면서 진정으로 시작된다. EO가 서커스단에서 착취당한다는 보호 단체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EO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진정으로 동물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보다는, 동물을 구하는 정의로운 자기 모습에 도취되는 모순이다. 이후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이는 <당나귀 EO>가 보여주려는, 또 EO가 목격한 인간 세상의 본질이나 다름없다.

 

 

 

 

 

 

 

 

 

 

 

 

 

인간에게 휘둘리는 동물의 가치

실제로 EO는 다양한 인간 세상을 만나며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점을 목격한다. 이때 핵심은 인간은 자신의 목적과 기분에 따라 EO를 대한다는 것. 훌리건이 대표적이다. 축구 경기에서 이긴 팀은 EO를 팀의 마스코트로 여긴다. 경기를 이기게 해 준 승리의 상징이다. 반대로 패배한 팀 서포터즈는 EO를 저주한다. 괜히 등장해서 경기를 망쳤다며 비난한다. 이들의 행동은 어떤 논리적인 설명도 불가능하다. 

 

문제는 인간의 변덕, 정의심, 무관심의 발로로 인해 인간 주변이 다친다는 것. EO가 겪은 대부분의 폭력이 그런 형태였다. 인간에게는 신경 쓸 겨를이나 가치도 없는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이 무심코 던진 돌에 동물은 맞아서 피를 흘린다는 것. 마구간, 농장, 숲, 소방대원, 동물 병원, 햄 공장 트럭, 도축장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일방향적인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이탈리아의 한 저택에서 잘 드러난다. 한 백작 부인이 신부인 아들을 혼낸다. 그러다가 돌연 둘이 불륜 관계일 수 있다는 암시가 나온다. 관객 입장에서는 흥미롭다. 그러나 영화는 자세한 사연을 보여주지 않는다. EO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장면이므로. EO는 그저 저택을 외면하고 떠난다. 그의 무관심은 인간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반대로 인간은 아무런 생각 없이 동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 이 비대칭성 때문에 EO의 여정은 슬플 수밖에 없다. 

 

 

 

 

 

 

 

 

 

 

 

 

 

메시지와 일체화된 연출

영화의 메시지는 다양한 연출 기법을 만나 극대화된다. 빨간 조명이 대표적이다. 중간중간 삽입된 붉은 화면은 여러 동물의 시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늘을 날다가 땅에 떨어지는 새, 좁은 운동장을 돌고 도는 말, 넘어지고 달리기를 반복하다가 자기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로봇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 속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더 떠올릴 수 있다. 사냥 당해 죽은 늑대, 모피 때문에 죽은 여우, 어항에 갇힌 물고기. 

 

이는 EO의 마지막 행선지가 소 도축장인 이유다. 빨간 조명이 가득한 서커스장에서 출발한 EO의 여정은 붉은빛 가득한 트럭을 거쳐 함께 죽어야만 하는 도축장에서 끝난다. 인간 세상의 모순을 목격한 모험의 끝은 죽음이다. 이 과정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당나귀 EO> 인간의 관점으로만 고려하는 동물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진정한' 폭력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붉은 조명 외의 다른 수단 덕분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고찰하자는 메시지에는 더 큰 힘이 실린다. 핸드헬드, EO의 시야에 맞춘 카메라워크, 동물 형태의 로봇을 활용한 화면 구성 등 실험적인 요소가 동원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미지가 적극적으로 삽입된다. 이는 곧 생각의 전환, 사고의 충격을 유발한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화법으로 EO의 메시지를 상기시키는 셈이다. 

 

 

 

 

 

 

 

 

 

 

 

 

 

낮은 곳에 임하신 당나귀

이에 더해 <당나귀 EO>는 동물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동물의 이야기를 인간사로 확장시킨다. 실제로 붉은 조명은 동물들이 학대당하고 죽어가는 순간은 물론, 인간들이 다칠 때도 삽입된다. 일례로 살라미용 말고기를 운반하는 트럭 운전사는 한 여성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 그러다가 여성은 도망치고, 운전사는 괴한을 만나 죽는다. 이때 트럭 내부는 온통 빨갛다. EO는 이 모든 광경을 관조한다. 

 

심지어 이 당나귀에게 의미심장한 종교적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이 장면이 특별하다. EO에게는 역행의 이미지가 달라붙는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붉은 조명 속에서 카산드라는 쓰러진 EO를 부둥켜안고 운다. 그러다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그녀는 EO를 일으켜 세운다. 마치 죽었다가 되살아나듯이. 

 

백작 부인의 저택에서 나와 폭포 앞 아치 다리에 멈춰 선 EO를 비출 때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폭포가 쏟아지는 게 아니라, 강물이 거꾸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미지 속에 EO를 담는다. 도축장으로 가기 직전인 EO는 마치 죽음으로부터 도망갈지, 담담히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거스르고, 죽음 앞에서 고민하는 당나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동물과 비루하고 비윤리적인 인간의 삶까지 모두 살펴보는 당나귀. 말보다 효용가치가 없어서 가장 안 좋은 취급을 받는 당나귀. 이 상징을 한 데 모으면 한 인물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예수다.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왔던 그가 이번에는 당나귀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다시 내려온 듯한 인상을 주는 셈이다.  

 

즉, 죽음과 폭력의 이미지가 넘쳐나는 영화에서 EO는 대사 없이 말한다. 가장 흔하고 초라하게 죽는 당나귀의 여정을 통해서 동물은 물론, 인간 사회의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실마리를 구하라고. 결국 <당나귀 EO>는 한 구원자, 메시아의 여정을 되풀이하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바로 이것이 평범해 보이는 한 당나귀 여행을 눈여겨 지켜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가장 낮은 곳에서 모순덩어리 인간 세계를 관조하다

작성자 . KinoDAY

출처 . https://brunch.co.kr/@potter111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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