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3-09-30 23:45:11
대의를 위한 희생
드라마 <비밀의 숲 1>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남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내가 해야만 한다.
이것이 나의 시작이길 바란다.
'비밀의 숲'의 슬로건은 내부고발 스릴러이다. 하지만 내부고발 이라는 말은 황시목이 검찰의 비리를 파헤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내부 고발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이창준이었다. 황시목은 이창준의 계획을 실행시켜 줄 존재였던 것이다. 괜히 이창준의 빅 픽처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창준이 살인범이라는 죄질이 희석되지는 않는다. 이창준의 박무성이라는 비열한 사람을 죽이는 명분은 망가진 시스템을 살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지. 그래서 이창준의 인형으로서 윤세원이라는 인물이 등장한 것일 테고. 그러나 여진의 대사처럼 그렇게 가족이 살해당해서 가슴에 피눈물 흘리는 사람은 널렸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명분만 따지고 본다면 이해를 못할 것은 없고, 결과적으로는 이들의 정의롭다면 정의롭고, 엽기적이라면 엽기적인 내부고발은 절반 이상의 성공은 이루었다. 드라마 상에서만 보았을 때, 더러운 권력의 핵인 이윤범을 포함한 고위급 인사들은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 모든 결과를 이뤄내기 위해서 한 남자가 죽어야 했고, 한 여성이 죽음의 문턱에서 해매야 했던 것들이 정당한 방식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나의 내면에서 계속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생각해 보니, 분명히 잘못 된 방식이었지만 그들의 동기의 원천은 선한 감정에서 출발했기에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더 의문이 드는 것은 그들이 살인이라는 비인간적인 화두를 던져서 결국 기득권들을 고발하는 방법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아무도 해하지 않고, 비리 파일들만을 가지고 내부 고발을 진행했다면 비리 파일 속 인물들을 모두 구속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후자를 택했다면 오히려 역공을 당해서 이창준이라는 인물까지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지금 살인자들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박무성과 김가영, 두 피해자들은 결코 인생을 정의롭게 살았다고 평가받을 수는 없는 사람들이기는 하였으나 이들을 죽음으로써 단죄할 사람들은 이들에게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아니다. 이들에게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분을 풀 수 있을까? 당연히 살인이라는 방법을 제외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박무성과 김가영, 더불어 고위급들이 언젠가 저주 받을 날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닿게 되었다. 참, 이것이 드라마 상이라지만 살인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나니 쓸데없는 잡념이 생겨서 답답한 마음만 들었다. 검사, 경찰과 같은 정의를 따져야 하는 직업은 정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단한 직업이겠다 하는 오지랖까지 생겨버린다. 정말.
한 가지 재밌었던 부분은 황시목 검사가 마지막에는 환하게 웃었다는 것, 그가 조금씩 감정에 솔직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서동재 검사는 여전히 바뀌질 않았다는 것. 비리 검사는 처음부터 비리 검사이기를 타고 났다는 건가 싶었다. 서동재 검사의 마지막 컷에서는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진심 이 드라마는 스토리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구멍이 없다. 시그널 이후로 참 좋은 드라마 하나 보았다. 그에 상응하는 시청률이 안 나온 것은 좀 아쉽지만 나만 아는 드라마 하지 뭐. 뭐 이젠 다 아는 웰메이드 드라마이지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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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rame Stamp
미국 대중 매체 버라이어티는 샤를리즈 테론, 키키 레인이 주연을 맡은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 감독의 넷플릭스 액션 영화 <올드 가드>(The Old Guard, 2020)가 남녀 균형 고용을 보여준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선정되었음을 보도했습니다
ⓒ Daum 영화
ReFrame과 IMDB Pro는 오늘 (17일) 2020년에 가장 인기 있었던 각본 영화 100편 중 29편이 남녀 균형 일자리를 보여주는 프로젝트의 징표인 ReFrame Stamp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26편의 영화가 선정되었던 2019년에 비해 12% 상승한 비율입니다.
ReFrame Stamp는 미디어 산업에서 여성 중심 콘텐츠로의 진전을 보여주는 기업과 미디어에 수여되는 상입니다. Stamp 인증은 ReFrame 엠버서더, 프로듀서 및 업계 전문가로부터 정의된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양성평등을 향한 진전을 보여주고 핵심적인 역할에서 여성을 더 많이 고용하는 영화 및 TV 프로그램에 수여됩니다.
올해 수상작으로는 <올드 가드>, <원더우먼 1984>, <프라미싱 영 우먼>, <힐빌리의 노래>,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온 더 락스>,<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뮬란>, <크리스마스에는 행복이>, <엠마> 등이 있습니다(번역 제목). 또한 수상작 중에는 여성 감독 작품이 17작품(2019년 대비 12편 이상 증가), 유색 여성 감독 작품이 6작품(4편 증가), 유색 여성 각본 작품 4작품(1편 증가), 여성 영화 촬영감독 작품 7작품(2019년 2편 증가)을 차지했습니다.
ReFrame은 수상작 29편 중 샤를리즈 테론과 키키 레인이 주연한 Netflix 액션 영화 <올드 가드>를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꼽았는데요, 감독이자 엠버서더인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는 수상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성공은 여성들이 더 큰 곳에서 활약할 기회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아름답고도 강력한 대항 수단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여성들은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빛날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Daum 영화
아래는 IMDb Pro의 집계 순으로 정렬된 29편의 수상작들입니다.
1. 올드 가드 / Old Guard / 미국 / 감독 : Gina Prince-Bythewood
2. 원더우먼 1984 / Wonder Woman 1984 / 미국 / 감독 : Patty Jenkins
3.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 Birds of Prey: And the Fantabulous Emancipation of One Harley Quinn / USA /감독 : Cathy Yan,
4. 뮬란 / Mulan / USA / 감독 : Niki Caro
5. 홀리 데이트 / Holidate / USA / 감독 : John Whitesell
6. 레베카 / Rebecca / USA / 감독 : Ben Wheatley
7. 크리스마스에는 행복이 / Happiest Season / USA / 감독 : Clea DuVall
8. 프라미싱 영 우먼/ Promising Young Woman / USA / 감독 : Emerald Fennell
9. 트롤: 월드 투어/ Trolls World Tour / USA / 감독 : Michael Fimognari
10. 애프터: 그 후/ After We Collided / USA / 감독 : Roger Kumble
11. 엠마 / Emma / UK / 감독 : Autumn de Wilde
12. 힐빌리의 노래/ Hillbilly Elegy / USA / 감독 : Ron Howard
13. 큐티스 / Mignonnes (Cuties) / France / 감독 : Maïmouna Doucouré
14. 앤터벨룸/ Antebellum / USA / 감독 : Gerard Bush, Christopher Renz
15.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 Ma Rainey’s Black Bottom / USA / 감독 : George C. Wolfe
16. 갓마더드 / Godmothered / 감독 : Sharon Maguire
17. 마지막 게임 / The Last Thing He Wanted / 감독 : Dee Rees
18. 유물의 저주 / Relic / 감독 : Natalie Erika James
19. 오버 더 문 / Over The Moon / 감독 : Glen Keane
20. 그 남자의 집 / His House / 감독 : Remi Weekes
21. 데스페라도스 / Desperados / 감독 : LP
22. 사라진 소녀들 / Lost Girls / 감독 : Liz Garbus
23. 비트를 느껴봐 / Feel The Beat / 감독 : Elissa Down
24. 크리스마스에 날아갑니다 / Operation Christmas Drop / 감독 : Martin Wood
25. 호스 걸 / Horse Girl / 감독 : Jeff Baena
26. 온 더 락 / On the Rocks / 감독 : Sofia Coppola
27. 위험한 거짓말들 / Dangerous Lies / 감독 : Michael M. Scott
28. 반쪽의 이야기 / The Half of It / 감독 : Alice Wu
29.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 / All the Bright Places / 감독 : Brett Ha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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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린 시아마 유니버스
셀린 시아마 감독이 〈쁘띠 마망〉으로 또 한 번 해 냈다. 여성들의 내밀한 감정‧관계를 섬세한 시선으로 탁월하게 연출해 왔던 셀린 시아마가 이번에 주목한 건 모녀 관계다. 넬리가 자신과 같은 나이의 엄마 마리옹을 만나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이 판타지 영화는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여성 경험‧관계에 주목한다. 〈쁘띠 마망〉에서 시작해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를 거슬러 읽음으로써 그녀가 구축한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가 어린 시절 살던 집에 온 넬리는 숲에서 놀다가 자신과 닮은 또래 친구를 만난다. 그녀는 넬리의 엄마 마리옹이다. 마리옹과 친구가 되고 이야기를 나누던 넬리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임을 알아차린다. 우연히 만난 어린 시절의 엄마는 유전병을 예방하기 위한 수술을 앞두고 있다. 넬리는 그녀의 수술이 잘 될 것임을, 건강이 좋지 않은 넬리의 외할머니(마리옹의 엄마)가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 낼 것임을 마리옹에게 알려 주고 싶다.
여기서부터 셀린 시아마의 강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엄마 마리옹 앞에 꽤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려 노력하는 넬리의 말‧행동‧마음을 담아내는 영화의 시선은 관객에게 서로 연결된 존재에게 주어진 책무를 환기시킨다. “네 뒤로 난 길을 따라왔어.” “이미 내 마음속엔 네가 있거든.” 각각 넬리와 마리옹의 말이다. 저 말로써 넬리는 자신이 엄마 마리옹으로부터 기인한 존재임을, 마리옹은 미래에 출산할 넬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음을 선언한다. 시차를 가진 두 존재(엄마와 딸)의 동시대적 포개짐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어느새 희미해진 타인과 나의 근본적 연결성이 복원되는 것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
〈쁘띠 마망〉은 셀린 시아마가 지금껏 만들어 온 영화의 궤적 속에서 더 적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셀린 시아마는 오랫동안 여성들이 맺는 관계와 감정의 문제에 천착해 왔다. 〈워터 릴리스〉(2007), 〈톰보이〉(2011), 〈걸후드〉(2014),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의 여성 주인공들은 우정, 사랑, 정체성 등을 치열하게 고민한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이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셀린 시아마 영화 속 여성들의 여정을 좇다 보면, 〈쁘띠 마망〉이 여성 관계의 세대적 확장임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워터 릴리스〉의 주인공은 사랑‧욕망에 눈 뜬 여성 청소년 마리와 안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두 친구의 소중한 마음은 안타깝게도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 채 착취당하지만, 아픔 이후 이들은 자기 옆에 같은 상처를 지닌 친구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항상 옆에 있었기에 특별함을 상실했던 마리와 안나는 사랑‧욕망의 좌절이라는 공통의 테마를 바탕으로 단단한 우정을 만든다.
〈톰보이〉도 정체성과 관계의 문제를 다룬 수작이다. 주인공 미카엘은 축구와 수영을 잘해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다. 친구들에게 ‘로레’가 본명임을 들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미카엘이 로레임이 드러난 후, 미카엘은 ‘남자같이 구는 여자’라는 이유로 엄마‧친구들에게 모욕적인 방식으로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신문당한다. 리사는 그런 미카엘에게 손을 내민다. 미카엘은 자신이 미카엘인 동시에 로레로도 살아갈 수 있음을 리사로부터 배운다. 리사는 자신이 좋아했던 ‘미카엘’이 ‘로레’였다는 사실, 즉 자신이 ‘역겨운’ 동성애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불쾌해했다. 하지만 이내 미카엘과 연인이 될 수 없다면 로레와 친구로 지내면 되지 않겠냐는 듯 마음을 연다. 이번에도 미카엘/로레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보듬어 주는 건 여성들 사이의 관계다*.
리사와 미카엘/로레(〈톰보이〉).
앞의 두 영화가 관계로 서로를 보듬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걸후드〉는 이를 밑절미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경제형편이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 청소년 마리엠은 폭력적인 오빠와 삶에 지친 어머니 대신 또래 여성 친구들과 어울린다. ‘비행 청소년’처럼 굴며 큰 해방감을 맛보는 마리엠을 묘사하는 장면은 사회의 관심에서 벗어난 존재(가난한 자, 흑인, 여성)가 어디서 자유를 느끼는지를 비꼬듯 질문한다.
하지만 마리엠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다. 그녀는 친구들이 선물해 준 자유를 바탕으로 다른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흑인 여성 청소년으로서 어떻게 성장해 나갈 것인가? 해결되지 않을 혼란을 품은 채, 마리엠은 다부진 표정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어설프고 어리숙한 일일지라도, “네가 원하는 걸 해”라는 말을 믿는 마리엠. 그녀가 과거를 품은 채 도달할 미래가 어떤 곳일지는 모른다. 다만 도래할 미래가 그녀가 꿈꾸던 것과는 다를지라도, 마리엠은 친구들에게 선물 받은 자유를 바탕으로 당당히 삶을 살아 낼 것이다.
〈걸후드〉의 마리엠.
마지막으로 여성 서사와 레즈비언 서사가 강렬하게 결합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선의 평등이 곧 관계의 평등임을 증명하는 대단히 인상적인 영화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의뢰받은 마리안느는 기존의 관습(남성의 시선)으로는 엘로이즈의 생명력을 그림에 담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겐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선은 마리안느의 화두만이 아니었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 그림의 객체이지만 동시에 마리안느를 관찰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엘로이즈는 화가와 대상이라는 관계의 일방향적 문법을 거부하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무의미한 곳으로 마리안느를 인도한다. 쌍방향적이고 평등한 시선의 결과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레즈비언이라는 특수한 위치에서 가장 보편적인 사랑을 성취한다. 사랑의 범주에서 배제된 자들이 도달한 압도적 사랑이라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테마는 익숙한 젠더 문법에 기댄 어쭙잖은 멜로 영화와 이성애규범적 편견에 휩싸인 세상에 대한 가장 고상한 조소다. 이성애자들이 낡은 관습에 무덤덤해져 사랑에 실패하는 동안, 레즈비언은 그 실패한 사랑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밀고가 사랑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서로를 보듬고, 북돋아 주고, 응원해 온 셀린 시아마의 여성들이 사랑의 관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는 동안, 스스로를 ‘정치적 레즈비언’이라 선언했던 페미니스트들이 꿈꾸고 갈망했던 여성들의 관계가 셀린 시아마의 영화 궤적에 온기를 품은 유려함으로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아 황홀했다.
여기까지가 〈쁘띠 마망〉의 계보다. 〈쁘띠 마망〉은 남자들의 세계에서 관계‧감정을 나누며 버티고 성장해 온 여성들의 이야기가 엄마와 딸, 즉 세대의 문제에까지 확장된 결과물이다. 〈걸후드〉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말마따나 “셀린 시아마의 세계에서 십대 여성은 망하거나 죽지 않고 성장해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확장해 낸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녀의 모든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차근히 진행되며 펼쳐지는 셀린 시아마의 촘촘하고 단단한 세계관이 마블 유니버스나 가수 에스파(aespa)의 세계관만큼이나 많은 팬덤을 거느리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관계는 평등해지고, 우리는 단단해지며, 세계는 다채로워질 것이다. 여성의 경험에서 출발해 성별 권력을 넘어 모두에게 다정한 세상에 대한 상상력으로 나아가기. 셀린 시아마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열어 보자.
*영화는 미카엘/로레가 트랜스젠더인지 레즈비언인지 단정 짓지 않음으로써 어떤 미래든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는 미카엘에게 ‘원래 이름’이 뭐냐고 묻는 리사의 질문, 즉 미카엘/리사를 관계 내부로 호명하는 리사의 질문에 초점을 맞춰 미카엘/로레의 성별을 여성으로 독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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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 줄 단 하나의 아이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작품 속에서 로봇, 인공지능을 소재로 다루지만 이를 통해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지점은 어디인지, 인간을 인간이 아닌 것과 구분 짓는 요소는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에이 아이 (A.I)
기후 변화로 인해 만년설이 녹고 해수면이 상승해 많은 도시가 물에 잠겼다. 선진국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엄격한 임신 허가제를 도입했다. 로봇은 인간을 대신해 많은 일을 도맡게 된다. 사회 경제를 유지하는데 로봇은 필수품이 되었다.
로봇 제작 회사인 '사이버트로닉스'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부부를 위해 부모로 지정된 존재를 순수하고 영원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는 로봇 아이를 만든다. 잠재의식과 꿈, 즉 내면의 세계가 있는 로봇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이 탄생한다. 하비 박사(윌리엄 허트)는 데이빗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리라고 확신한다.
모니카(프랜시스 오코너)와 헨리(샘 로바즈) 부부의 아들 마틴(제이크 톼스)은 극저온 상태에서 간신히 생명만 유지한 채 5년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트로닉스는 회사의 직원인 헨리를 통해 로봇 데이빗을 테스트하고자 한다. 로봇 아이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일곱 개의 단어를 순서대로 말해야 하며 한 번 등록하면 되돌릴 수 없다. 등록 절차는 구매자를 부모로 만들고 로봇은 그 부모를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 만약 부모가 로봇 아이를 거부하면 해당 로봇은 폐기된다. 모니카는 등록 절차를 거쳐 데이빗의 '엄마'가 된다. 데이빗은 모니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쓴다. 데이빗이 조금씩 적응해 갈 때쯤 마틴이 깨어나 집으로 오게 된다. 데이빗은 진짜 자식처럼 엄마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 인간의 외로움
"로봇이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해 준다면 사랑받는 사람은 그 메카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하죠?"
작품 속 슈퍼 토이 곰돌이 인형 '테디'와 자식 대행 로봇 '데이빗' 그리고 애인 대행 로봇 '조'(주드 로)는 모두 인간의 적적함과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변하지 않고 인간을 따르며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심지어 데이빗은 인간에게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을 제공한다. 인간이 계속해서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줄 존재를 생산해 내는 이유는 아마 인간 사이에서 더 큰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조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고객은 데이트 폭력 피해자다. 두 번째로 간 곳에서는 남자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침대에 누워있어 곤란에 빠진다. 사랑을 말하며 폭력과 살인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에서 인간 사이의 사랑이 어떻게 순수할 수 있을까? 조를 부르는 이들은 주로 외롭고 약한 사람들이다. 영혼이 기댈 곳을 찾아 신과 성당을 찾듯 로봇에게 육체를 기대고자 하는 것이다. 조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데이빗을 돌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모니카의 집에서 데이빗이 바라보던 가슴에 하트 모양의 구멍이 나 있는 모빌은 외롭고 공허한 인간이다. 자신의 사랑에 보답해 주지 못하는 그 공허한 모빌을 데이빗은 계속해서 바라본다. 로봇에게는 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아니다. 데이빗의 순도 높은 사랑에 비하면 인간은 그저 태어나서 먹고, 자고 그러다 사라져 버리는 존재다.
▶ 인간의 특별함
영화의 초반에 데이빗은 로봇으로서 대상화된다. 사이버트로닉스의 조형물이 창문에 비친 형상과 데이빗의 첫 등장에서의 형상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데이빗은 사이버트로닉스에서 제작된 로봇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각인시키며 '아이'이기 전에 로봇이라는 정체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기에 모니카의 거부 반응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이가 아닌 로봇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로봇의 뛰어난 기능이나 능력 혹은 멋진 모습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주목할 점은 로봇을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모니카의 아들 마틴은 데이빗과 달리 자신은 진짜 사람이고 엄마의 아들이므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피노키오 동화책을 모니카에게 읽어달라고 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능력들을 보여달라고 한다. 모니카가 고장 난 데이빗을 걱정스러워하며 손을 잡아 주자 마틴은 데이빗에게 모니카의 머리카락을 잘라오라고 부탁한다. 마틴은 데이빗에게 끊임없이 경쟁심을 느끼고 우위에 서고자 한다.
로봇을 잔인하고 화려하게 파괴하며 즐기는 로봇 축제는 인간 종이 로봇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려는 의식이다. 인간은 로봇을 만들었지만 로봇의 성능이 좋아지고, 개체 수가 많아질수록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을 부수며 안도감을 느낀다. 인간의 특별함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온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특별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로봇 축제를 감독하는 존슨은 데이빗을 두고 '목적 없는 특별함은 골칫덩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목적이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특별함에 목적을 찾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목적인 인간에게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데이빗 역시 인간처럼 자신은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하비 박사의 방에서 상자에 들어 있는 수많은 데이빗을 발견했을 때 공포를 느낀다. 자신의 특별함과 유일성이 깨어질 위기에 처한 데이빗은 무너진다. 데이빗이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었기에 특별했듯이 인간의 특별함 역시 믿음에서 온다.
▶ 동화+ 객관적 사실
데이빗은 피노키오를 소년으로 만들어준 '파란 요정'을 찾기 위해 유식 박사를 찾아간다. '동화'와 '객관적 사실'의 카테고리를 결합해 어떻게 해야 로봇이 인간 소년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파란 요정은 결국 '진짜 소년'이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 2000년이 지나 지구를 방문한 외계 생명체에 의해 단 하루 복원된 엄마를 만날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모든 동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러하듯 데이빗의 하루는 평생 그가 바라왔던 대로 행복하다. 엄마에게 온전히 사랑받고 사랑해준다. 2000년을 기다려 데이빗에게 주어진 그 하루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사랑받음'을 이뤄준다. 동화적이지만 마법적이지는 않은 이 슬픈 해피 엔딩은 '동화'와 '객관적 사실'이 결합된 결말이다.
결국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에 우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데이빗이 인간과 구별되는 점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욕심을 내고,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 받은 상처만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 cod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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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올해 베스트 무비! <퍼스트 카우> 리뷰
작품명 : 퍼스트 카우
감독 : 켈리 라이카트
출연 : 존 마가로, 오리온 리 등
<퍼스트 카우>는 최근 많은 미국영화가 주목하고 재현해온 서부극이지만, 동시에 서부극답지 않은 서부극으로서 독특한 개성을 지닌다.
주인공인 쿠키(존 마가로)와 킹 루(오리온 리)는 권총을 차고 사막을 횡단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남성상이 아니다.
이들은 숲속에서 버섯을 따거나 비버를 잡아 팔고, 오히려 누군가를 쫓기보다 쫓김 당하는 신세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각각 유대인과 중국인으로, 흔히 봐오던 서부극의 백인 남성의 외관과 전혀 다르다.
<퍼스트 카우>에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이러한 선택을 통해 새로운 모습의 서부극을 묘사한다. 기록된 적 없었던 방식으로 미국의 시초를 다시 쓰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한 여성과 그의 반려견이 어느 산기슭같은 곳에서 산책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의 반려견은 냄새를 맡으면서 유독 한 장소에 집착하여 흙을 파헤쳐낸다. 그 모습이 이상했던 여성은 반려견이 흙을 파헤치는 곳으로 오게 되고, 결국에는 2구의 해골이 묻혀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켈리 라이카트의 전작 <웬디와 루시>는 영화 제목 그대로 웬디와 그의 반려견 '루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반려견 이름이 루시라고 한다.
어설픈 추측과 억지일 수 있지만 <퍼스트 카우>의 시작에서 보여지는 해골을 발견을 한 여성과 그의 반려견을 각각 켈리 라이카트와 그의 반려견으로 투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2구의 해골을 발견하면서 그들의 지나온 역사를 상상해보는 혹은 미래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극 중 여성의 관점 혹은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관점으로 영화의 출발을 알리는 것은 아닌가 추측해본다.
19세기 서부 개척시대의 미국. 피고위츠는 집단의 식량을 담당하여 쿠키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다른 남성들과 달리 쿠키는 순박하고 여린 성정을 지녀, 무리에서 소외되어 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식량을 찾기 위해 숲속을 떠돌던 그는 발가벗은 킹 루와 만나게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중국인이라는 킹 루는 쿠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지만 그들은 금세 헤어지고 만다.
그러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우연히 조우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공유한다. 갑작스레 스쳐간 아이디어.
바로 부유한 팩터 대장이 데려온 이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시장에 파는 것이다. 이들의 계획은 과연 무사히 성사될 수 있을까?
<퍼스트 카우>는 현재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감독 켈리 라이카트의 신작이다.
<올드 조이> <어둠 속에서> <믹의 지름길> <어떤 여자들>로 평단으로부터 수많은 갈채를 받았던 그는 <퍼스트 카우>를 통해 21세기의 위대한 영화작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퍼스트 카우>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두 남성 주인공의 우정이다. 이 두 인물의 우정은 영화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현대를 배경으로 다시 생각해본다면 더욱 재미있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서부 개척시대, 기존의 서부 개척시대에서 다루는 '죽음과 생존 그리고 결투' 보다는 이 영화는' 공존과 우정'을 택하고 있다.
흔히 영화의 재미는 극적인 사건과 갈등 그리고 해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 많은 이들에게 조용하면서도 잔잔한 그리고 자연스러운 영화가
얼마나 충분히 영화적, 극적인 재미를 줄 수 있는지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다.
21세기의 새로운 서부극이자 아름다운 우정을 다룬 이 드라마를 많은 관객들이 느껴보시길 바란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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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종류의 눈물
네 가지 종류의 눈물
<위대한 개츠비>, <토니 타키타니>, 그리고 <여수의 사랑>, <성경>
어떤 눈물은 느닷없이 흐른다. 다 잠근 줄 알았던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처럼,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속을 이미 적셔놓고 밖으로 흐르는 눈물이 우리 삶에는 있다. 그런 눈물을 삶의 누수라고 하면 좋을까. 그런 눈물은 그야말로 새어 나오는 것이어서, 눈물이 흐른 흔적만큼 우리 삶에 빈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리둥절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린다. 내 삶이 이만큼 비어있던 것이구나. 이 공간만큼 내가 결여를 느꼈던 것이구나. 흘려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내 삶의 여백을, 눈물은 증거한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그는 앎(knowledge, 지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건 ‘스스로를 알고 있는 앎’과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앎’이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알고 있는’ 앎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앎이 있다. 삶의 누수 같은 눈물을 라캉 식의 구분법으로 해석해보자면, 그건 단연 후자다. 나는 내가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다. 그 순간만큼 나는 그동안 (알면서도) 몰랐던 삶의 진실을 마주했고, 그랬기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삶에서 그런 순간은 느닷없이 찾아오므로, 나는 대신 영화와 책에서 그런 사례를 추려봤다. 네 종류의 눈물이 있다. 네 가지 눈물이 흐르게 된 상황적인 요인, 맥락은 제각기 다르지만, 근원은 같다. 그들은 그 순간 자신의 삶에 진실했고 또 그래서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그런 눈물은 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영화에서 두 편, 문학에서 두 편이다. 영화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2013)와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 Tonu Takitani, 2004>가 있고, 문학에서는 한강의 <여수의 사랑, 2012>과 오래된 책인 <성경>의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위대한 개츠비>
먼저 <위대한 개츠비>. 첫사랑인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부자가 되어 나타나 다시 사랑을 고백하지만 개츠비의 사랑도, 자신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데이지와 재회한 개츠비는 자신의 집에 그녀를 데려와 구경하게 한다. 데이지의 감탄이 터질 때마다 그는 속으로 자신 스스로가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개츠비는 복층 위로 올라가 자신의 영국제 셔츠 수십 벌을 꺼내 장난스럽게 데이지에게 건네는데, 그녀는 셔츠들을 보면서 돌연 울음을 터뜨린 것. 데이지는 왜 울었을까.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번역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요컨대 데이지는 인간 개츠비가 아니라 영국제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다. 개츠비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김영하,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241쪽) 그러니까 데이지의 눈물은 그야말로 허영에 가까운 눈물이었다는 것. 마치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의 무구한 반응처럼 데이지의 눈물은 그런 반응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허영으로 자신 삶의 허망을 견디고 있으니까.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끔찍한 고독에서 건져내 준 아내를, 사고로 잃은 토니는 아내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대신 입어줄 사람을 구한다. 간신히 찾은 여자(히사코)에게 아내의 드레스룸을 보여주는데, 그녀는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소리를 들은 토니가 방으로 들어가 왜 우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많은 옷을 처음 입어봐서 그런가 봐요.” 이 눈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데이지의 경우에서처럼, 허영이 깃든 무구한 반응의 극치인 걸까. 무수한 오해로부터 그녀를 구할 길은 먼저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토니가 찾은 여자는 실직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곤란에 처해있었다. 하루 먹고사는 고민으로 하루를 버티던 그녀가, 한순간 거대한 아름다움과 대면했던 것이다. 자기 삶의 남루함과 세상의 거대한 아름다움 사이의 차이로부터 오는 기묘한 정서,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많은데 내 삶은 이토록 남루하구나 라는 쓸쓸한 자기 인식. 그러니까 속에서 얼음처럼 차갑던 감정들이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고는 이윽고 응결되어 새어 나온 것은 아닐까.
<토니 타키타니>
굳이 새삼스럽게 적지 않아도, <위대한 개츠비>와 <토니 타키타니>의 유사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한강의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을.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또 고향이 어딘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여러 도시들을 떠돌던 자흔은, 다만 명료한 증거 하나만을 토대해 유추할 뿐이다. 자신이 2살 때,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때부터 보호기관에서 자랐다는 것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고향은 여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그녀는 하는 중이다. 그녀는 ‘나’에게 언젠가 자신의 고향(이라 추측되는) 근처를 갔을 때의 일을 말한다.
“여수 앞바다의 해안을 따라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소제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이 있어요. (중략)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완만한 뒷산 등선에는 해가 지고 있었고 그 주위로 새 깃털 같은 구름이 노다지처럼 노랗게 번쩍이고 있었어요. 그 풍경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 봤지요. (중략) 마을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둥그런 만과 다도해 섬들이 파란 바다를 둘러싼 모양이 꼭 가느다란 푸른 실 하나하나를 촘촘히 엮어놓은 것 같이 잔잔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자흔은 왜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걸까. 자흔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흔의 눈물은 자신의 고향에 왔다는 아늑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그 아늑함의 이면에는 단순히 고향에 왔다라는 차원을 초월해, 불분명했던 ‘자기 정체성’이 그제서야 비로소 명료하게 인식되는, 자기 존재의 의미마저 거기 배어 있었을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
세 가지 목록에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성경>의 ‘이사야서’다. 세 종류의 경우처럼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지만 정서상의 감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사야서 6장에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이사야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과 앉으신 보좌, 그리고 둘러싼 천사들의 모습이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표준새번역 <성경>, ‘이사야서 6장 5절) 이사야는 눈물 흘리지는 않았지만 세 종류의 눈물만큼이나 선뜻 헤아리기 어려운 종류의 반응을 한다. 어째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과 신성에 감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탄식한 걸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그는 경이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주한 것이라고. 그래서 난감한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이렇게나 누추하고 얼룩처럼 죄가 묻어있는데,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이가 내게 찾아오다니. 두 번째의 눈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반응이다.
나는 네 종류의 반응이, 우리가 예술을 대할 때 대체로 보이던 반응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예술을 허영으로 여기기도 하고(데이지),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이 각인시켜주는 자신의 남루한 처지를 쓸쓸해하면서(히사코), 누군가는 예술이 나 자신의 존재의 결핍을 깊이 헤아려준다는 느낌에 위로와 안도감을 감각하기도 하면서(자흔), 눈부신 경이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절망하기도 하던(이사야), 저마다 흐른 삶의 누수들. 우리는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몰랐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대체로 알고 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라캉의 말이 옳다.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겨우 알아간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이정식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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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결말해석, 호박과 구두 (신데렐라)
Chapter 2 공주의 성장, 영화의 의무
00:00 클래식 분류법
01:04 로마의 휴일 재개봉
02:09 결말해석
03:47 신데렐라, 호박마차
05:29 히치콕, 네오리얼리즘
06:14 성장영화
08:35 영화의 의무
09:33 별점 및 한 줄 평
09:49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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