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하늘2023-10-12 23:16:59
라벤더와 레드에서 핑크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블랙핑크 : 세상을밝혀라>리뷰
수학여행을 가든, 노래방을 가든, 길거리를 돌아다니든 나의 질풍노도와 함께 그녀들은 함께 했다. 어떤 날은 우리를 향해 s.e.s는 고백했다. ‘너를 사랑해, 나의 마음이, 너를 생각할수록.’ 그러다가 이에 질세라 다른 날은 핑클이 부탁했다. ‘언제나 날 지켜줄 너라고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줘.’ 계속되는 사랑 고백에 수많은 사람들은 라벤더색 풍선(S.E.S)을 들고 목이 터지라 “에쓰이에! 에쓰이에!” 외쳐댔고, 또 반대편에서는 빨강 풍선(핑클)을 흔들며 격렬하게 소리 질렀다. “핑클 짱 핑클 짱.”
철부지 녀석 하나가 내게 물어왔다. “넌 도대체 에스이에스와 핑클 중에 누굴 좋아하는 것이냐?” 평소 핑클을 좋아하던 그 녀석은 나의 정체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이 안타까운 녀석을 설득하기 위해선 삼국지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난세의 어려움 속에 이곳저곳에서 아름다운 꽃과 같이 피어나는 영웅들의 이야기. 그 개개인의 인물들의 매력에 빠지는 것이 바로 삼국지에 즐거움이거늘, 위, 촉, 오중에 어느 나라를 선택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당신은 충성스러움과 신의의 표본인 산상의 <조자룡>과 유비, 관우, 장비가 모두 덤벼도 거뜬하게 막아내는 무력과 달리 한 여인을 향한 로맨티시스트 <여포>, 도저히 승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지략으로 판을 바꾸는 <제갈공명> 등. 각 나라마다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이 많은데, 어찌 위, 촉, 오중 하나를 고르란 말인가? 그럼에도 선택을 강요한다면 나는 SES에서는 유진을, 핑클에는 이진을 선택하겠다. 그러자 그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피아 식별을 향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이후 내게는 수많은 걸그룹이 스쳐지나갔다. 대학 시절 함께한 소녀시대, 군생활을 도와준 2NE1, 그러나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기에 위로와 기쁨을 허락해준 두 그룹만큼의 임팩트는 찾아오기 어려웠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했고 놀랍게도 그녀들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우리 가정에 아이가 생겼고, 자연스레 그녀들도 엄마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아이돌 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방송에서 볼 수 있었고, 나 역시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그 시절 설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때로 라벤더 빛으로 때로 붉은 장미 빛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그렇게 지내던 내게 또 강렬한 색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블랙핑크> 다양한 걸그룹의 진화 속에서 한국의 팝 장르는 K-POP이라는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걸그룹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인기가 있다는 뉴스들을 간혹 볼 때마다, 그 시절, 보라색, 빨간색 풍선을 흔들어 대던 때가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혼과 육아, 그리고 끝나지 않은 학업과 노동의 현장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잘 버티고 있다며 다독여야 했다. 그토록 좋아하던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 때도 있었고, 걸그룹은 멀고 먼 이야기로 지나가고 있었다. 연일 바쁜 삶 가운데 축 쳐진 볏단처럼 살아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헬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땀 흘리는 러닝머신 속에서 나의 속도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Hit you with that ddu-du ddu-du du”
- <블랙핑크>의 "뚜두뚜두" 가사 중에서...
헬스장을 갈 때마다, 이 곡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지겹고,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비트와 함께 멜로디는 허벅지와 종아리에 한 번 더 힘을 가했다. 그리고 멈추려 할 때 로제는 말했다. “두 번 생각해~” 그렇게 두 번 생각하고 있다 보면 제니는 내가 젤 좋아하는 부분을 부르고 있다. “Hit you with that ddu-du ddu-du du” 어느덧 이 노래는 삼십 대를 보내는 내게 다시 흥과 에너지를 가져다줬다. 그리고 헬스장에서 수영강으로 옮겨진 나의 무대에 블랙핑크는 때로 봄에는 휘파람으로 시원함을, 여름에는 마지막처럼으로 청량함을, 가을에는 뚜두 뚜두로 열심을, 겨울에는 불장난으로 한 번 더 뛸 수 있게 해 줬다.
자연스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블랙핑크: 세상을 밝혀라》를 블랙핑크의 팬으로서 즐겁게 시청할 수 있었다. 음식에 있어서 풍미를 증폭하고 개선케 하며, 밸런스를 가져다주고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재료를 통해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만든 《소금. 산. 지방. 불》을 독창적인 색감과 영상미로 이끌어주었던 캐럴라인 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지수, 제니, 로제, 리사라는 사람의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블랙핑크가 되기까지의 장면들을 통해 그녀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제니의 인터뷰와 솔직한 모습은 아빠미소를 갖게 만들었다. 팬으로서 본 다큐멘터리였기에 전반적인 대부분의 내용에 몰입할 수 있었고, 특별히 그들의 프로듀서인 테디가 생각하는 블랙핑크와 노래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음에 즐거웠다.
아쉬운 부분을 꼽자면 K팝을 단순히 십 대들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트로트처럼, 재즈처럼, 클래식처럼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이고, 나이와 출신과 종교와 직업을 떠나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길 바랬다. 그것을 블랙핑크를 통해서 설득시켜줄 수 있는 부분이 나왔으면 했다. 블랙핑크 다큐멘터리에 k-pop 장르의 접근성을 다뤄 달라는 것이 다소 방향성이 엇나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게 K-POP은 십 대도 이십 대도 삼십 대도 충분히 즐기고 누릴 수 있음을 요청한 것은, 지금 이 나이에 블랙핑크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대한 지지와 인정이 필요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시절처럼 신곡이 나올 그날을 매일 기다리고, 책받침과 스티커는 필요 없지만, 아무 생각 없이 뛰고 싶을 때, 청량한 햇살과 드라이브할 때, 덤벨을 하나 더 들어야 하는 그때...
그리고 내 마음속에 여전히 청춘과 젊음과 에너지를 느끼고 싶을때
나는 계속해서 블랙핑크를 찾을 것이다.
그 시절 내가 라벤더와 레드를 찾았던 것처럼 말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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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 준 까치,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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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갑자기 찾아오는 사고를 만날 때가 있다. 그 사고를 겪으며 다쳤던 부위가 치료 가능하다면 정신적 트라우마는 있겠지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자신의 몸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회복에 대한 작은 희망이 있다면 회복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한 운동이나 활동에 매진한다. 그것에 집중하면서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어 장애인이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사고로 하반신 부위의 감각이 없어져 걷지 못하게 되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당사자뿐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도 아픔을 느낀다. 호주에 살고 있던 샘 블룸과 그 가족들은 2013년 태국으로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어떤 관광지 옥상에 올라가 난간에 기대었다가 난간이 부러져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된다. 그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고, 그의 남편 캐머런 블룸과 세 아들도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갑자기 가족의 한 사람에게 엄청난 변화가 온다는 것을 본인을 비롯한 모든 가족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샘과 그 가족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 변화에 적응하고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은 남편 캐머런 블룸의 책 포토 에세이 <펭귄 블룸>에 담겨 있다. 샘의 가족들이 한 사람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속에는 우연히 만나 가족처럼 살게 된 펭귄이라는 이름의 까치가 함께 했다.
실제 추락사고를 당한 샘 블룸의 극복기를 영화화한 이야기
영화 <펭귄 블룸>은 캐머런이 쓴 책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다. 영화는 샘 블룸(나오미 왓츠)의 사고 순간을 생각하고 있는 큰 아들 노아(그리핀 머레이 존스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여행지에서의 밝고 즐거웠던 모습과 함께 하필 그 날 그 순간에 블룸 가족이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노아의 안타까움이 잘 느껴지는 독백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정서를 알려준다. 그 정서는 바로 이어지는 샘의 모습과 반응을 보며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찾는 아이들, 그리고 아직 자신의 힘으로는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기도 벅찬 상황은 슬픔을 넘어 절망을 느끼게 한다.
갑자기 자신의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샘의 삶의 의지까지 빼앗아 간다. 남편 캐머런(앤드류 링컨)이 찍은 과거의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한참을 보는데, 그 사진들 속 샘은 모두 서있거나 걷고 있다. 과거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해 그것을 긴 막대기로 전부 깨트리는 모습은 그런 절망적인 감정 속에 있는 샘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돌볼 수 없고, 대부분의 육아는 남편이 도맡아야 했다. 에세이 <펭귄 블룸> 속에서 샘의 사고 당시 주변 사람의 증언이 나오는데, 사고 후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 때문에 가족 휴가를 망쳐서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점들을 봤을 때, 매우 이타적인 샘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에 펭귄이 들어간다. 하지만 가족의 구성원 중에는 펭귄 블룸이라는 인물은 없다. 펭귄은 블룸 가족 중 첫째 아들 노아가 발견한 까치의 이름이다. 펭귄처럼 까만 색깔과 하얀 색깔이 섞여있는 까치를 보고 노아가 지어준 이름이다. 아기 새였던 펭귄을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로 한 노아는 자신이 학교에 간 사이 엄마 샘에게 펭귄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것이 샘과 펭귄의 첫 만남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그 까치를 거부하고 방치하지만 이내 그를 돌보기 시작한다.
샘과 가족의 트라우마 극복을 이끄는 작은 까치, 펭귄
극심한 트라우마 속에 있는 사람들은 때로는 다른 동물이나 아이를 돌보면서 정서적 치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말도 못 하는 작은 새에 불과했던 펭귄은 샘의 옆에서 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함께 머무르며 샘에게 자신도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신기하게도 이 작은 희망은 샘을 밖으로 이끈다. 남편 캐머런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펭귄이 함께하면서 치유시킨 그 트라우마는 샘을 카약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이끈다. 치유의 시작은 펭귄이었지만, 그것을 완성시킨 건 카약에의 도전이었다. 상체 위주로 움직이면 되는 이 스포츠는 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실제로 긴 시간 노력한 끝에 샘은 호주의 국내 카약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또한 영화 속에서 샘을 비롯한 모든 가족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대화다. 각자가 그 사고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다르다. 그것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오해는 커지고 관계는 깨지고 만다. 샘과 남편 캐머런은 영화 내내 계속 대화해 나간다. 때론 다투기도 하고 감정을 크게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내 상대방에게 사과하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특히 영화 속 케머런의 말 중 인상적인 것이 있다. 자신이 아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말이다. 아내를 더 동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대해야 할지, 더 강하게 이야기할지 등 어떤 태도를 취해야 아내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지 그 적정한 선을 늘 고민하는 것이다.
샘의 사고를 직접 목격한 큰 아들 노아도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영화 초반의 독백에서 이미 보이듯, 노아는 그 사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샘이 떨어진 그 관광지의 옥상에 먼저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 이후 노아는 선뜻 엄마 샘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한다. 그런 노아의 태도는 그 마음을 알지 못하는 샘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어 두 사람의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그 멀어진 간극을 다시 메우는 건 솔직한 대화다. 영화의 후반부 등장하는 노아와 샘이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한 장면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블룸 가족
실제 샘 블룸은 그 사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걸어간다. 그렇게 자신을 직시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탕으로 삶을 계속 걸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어쩌면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를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존재는 바로 까치 펭귄일 것이다. 샘을 그 작은 새와 시간을 보내면서 사진도 찍고 교류하며 조금씩 자신을 치유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펭귄이라는 새의 비중이 아주 크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에는 ‘펭귄’이라는 새의 이름과 함께 ‘블룸’이라는 가족 이름이 같이 붙어있다. 블룸 가족에게 펭귄이라는 존재는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샘 블룸의 과거 인터뷰에 따르면 현재 블룸의 가족 옆에 펭귄은 없다. 2015년 어느 날, 어느 순간 밖으로 날아간 펭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때 아이들의 생일에 갑자기 찾아오거나 한 적은 있지만 아마도 지금은 완전히 독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펭귄이 독립한 것처럼 샘도 자기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독립시키는 힘을 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샘으로 출연한 나오미 왓츠는 과거 영화 <임파서블>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찍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실화의 가족 이야기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나오미 왓츠는 이 영화의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남편 캐머런 역을 맡은 앤드류 링컨은 미드 <워킹 데드>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배우다. 이 영화에서는 힘을 뺀 연기로 부드럽고 인내심 있게 가족을 돌보는 아빠로 따뜻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펭귄을 연기한 실제 까치도 나는 모습만 CG로 처리했을 뿐 집안 곳곳을 누비는 장면은 실제로 촬영된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 실제 가족의 사진과 펭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끝까지 영화를 관람하면 더욱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 넷플릭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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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행착오를 통한 스스로의 구원
* 본 게시글은 시사회를 통해 개봉 전 관람한 후 작성한 후기입니다. 줄거리의 일부가 기재되어 있으니,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율리에는 의학을 전공하던 모범생이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얼마 후, 사실 가장 원하던 것은 사진이었다고 생각해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진을 배운다. 그러나 어느새부턴가 율리에는 본인을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가고자 하는 길을 여러 번 바꾸느라 20대가 다 가 버렸지만, 율리에는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율리에의 방황은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율리에와 악셀은 아이를 가지는 문제부터 사소한 사건들까지 다툴 일 투성이다. 인생에는 단계가 있고, 율리에는 방황하며 시행착오를 겪을 시기에 와 있다. 그렇기에 악셀이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율리에는 답할 말이 없다. 스스로가 가장 복잡하고 어렵기에. 율리에는 자신이 낯설다. 뚜렷한 직장도, 심지어는 뚜렷한 전공도 정하지 못한 율리에는 만화작가로 성공한 악셀에게 사랑과 동경, 질투, 공허함을 비롯한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율리에는 악셀을 보며 자신이 실패한 인생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율리에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비슷한 단계에 있어 어려운 질문을 퍼붓지 않는 에이빈드는 최선의 대안처럼 보인다.
하지만 급작스레 찾아온 아이는 율리에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악셀이 췌장암에 걸렸다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악셀을 찾아간 율리에는 뒤죽박죽인 마음들을 털어놓고, 악셀은 '너와 연인일 때 해주지 못해 가장 후회되는 건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깨닫게 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라는 말을 건넨다. 율리에는 악셀의 마지막을 위해 그가 어릴적 살았던 집에 함께 가 사진을 찍어주고, 그의 두려움을 달랜다.
그렇다면 만약 율리에가 에이빈드가 아닌 악셀의 아이를 임신했더라도, 결론은 같았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율리에와 악셀의 사랑은 시기가 맞지 않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급급한 악셀과는 달리, 율리에는 본인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어긋난 가치관이 맺는 결실은 분명 달가운 것이 아니며, 율리에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이후 율리에는 악셀의 죽음을 마주하고, 밤새 하염없이 거리를 떠돈다.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율리에는 샤워를 하던 중 유산한다. 그는 스스로를 옭아매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관객은 긴 호흡의 롱테이크 숏을 통해 율리에의 세밀한 감정을 함께 느끼며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이 과정에서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된다. 율리에와 악셀의 이별 과정에 삽입된 뮤지컬적 연출이 인상적이며, 분위기를 살리는 영화음악과 리듬감 있는 연기가 돋보인다.
최선이라 생각해 선택했던 것들은 뒤틀린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 비록 아파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최악처럼 느껴지더라도, 좌절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그 수단이 반드시 사랑이 아니더라도. 지금 나의 나이에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덕분에 마음껏 배회하고, 미친듯 사랑할 수 있으리. 사랑과 인생의 행방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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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해결을 현실에 맞지 않게 판타지로 풀어낸 영화 <백두산>
더 테러 라이브와 같이 하정우의 원맨쇼가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보기 시작한 영화 <백두산>. 하정우라는 타이틀롤 하나만 가지고 승부수를 던진 작품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병헌이 나와서 이렇게 남자 배우들 중 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2명이나 나오는데 기대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판단을 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영화 백두산 시놉시스
대한민국 관측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백두산 폭발 발생. 갑작스러운 재난에 한반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다. 여기에 더해 남과 북 모두를 집어삼킬 추가 폭발이 예측된다.사상 초유의 재난을 막기 위해서 전유경은 백두산 폭발을 연구해 온 지질학 교수 강봉래의 이론에 따른 작전을 계획한다. 전역을 앞둔 특전사 EOD 대위 조인창이 남과 북의 운명이 걸린 비밀 작전에 투입되고, 작전의 키를 쥔 북한 무력부 소속 일급 자원 리준평과 접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준평은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인창을 계속해서 곤란하게 만든다. 한편, 인창이 북한에서 펼쳐지는 작전에 투입된 사실도 모른 채 서울에 홀로 남은 최지영은 재난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사이 백두산의 마지막 폭발 시간을 점점 가까워져 간다.
하정우의 개그는 실없이 웃겼다하정우의 띨~ 하면서도 상황을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개그는 영화 <백두산>에서도 존재했다. 특전사 대위로서 팀을 이끌고 있지만 어딘가 미숙한 이 느낌.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또 다 임무를 수행하는 저 능력!
백두산이 한 차례 폭발하고 자신의 어깨에 대한민국의 존망이 달려 있는 상황 속에서도 위트를 잃지 않고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아마 하정우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이러한 위트와 유머가 한 두차례 정도 발현이 됐다면 극의 긴장감을 잠시 환기시켜주고 다시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을 것이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해서 솔직히 말하면 백두산이라는 폭발 상황이 그렇게 까지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는 급박하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하정우식 유머가 영화 곳곳에 묻어나서 그런지 필지는 계속 실없이 웃기기만 했다.
그런데 북한을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영화를 보면서 정말 의문이 들었던 점은 ‘도대체 북한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백두산이 폭발해싸고 해서 북한 정부가 저렇게 손을 놓고 방관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같은 민족이긴 하지만 현재 남한과 북한은 적과 다름이 없는 상태다. 월북과 월남을 시도하려면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하며 조금이라도 영해와 영토, 영공을 군사부대가 넘으면 경고 사격에 이어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관계다.그런데 백두산이 폭발했다고 해서 북한이 남한의 특전사 부대가 핵무기를 훔치러 들어오는데 가만히 있는다? 너무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북한 이라는 나라가 남한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지고 시설이 열악하다고 하나 국가 유지를 위한 체계와 기구들이 존재하는 나라다. 그런데 백두산 1차 폭발 하나로 무너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사전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야기는 어디로백두산 폭발에 중국, 일본, 미국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의아했다. 사실 북한과의 문제에서는 한국과 북한 1대 1로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미국이나 중국이 사이에 껴서 협상이 진행되곤 한다.
그래서 항상 언론에서는 한반도의 이야기지만 언제나 코리아패싱이라며 한반도의 문제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는 남한의 상황을 비꼬는 헤드라인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서 한국의 위치다.그러나 영화 백두산에서는 유아적인 발상을 하고 있어서 실망스러웠다. 북한이 망하면 북한이 만든 핵은 우리의 소유이고 우리가 이 핵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백두산이 터진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과연 특전사를 바로 파견할 만큼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주변 국가과의 관계 속에서 한국의 위치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작품이어서 굉장히 판타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백두산 폭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조금 더 남한과 북한의 관계적인 위치, 그리고 주변 국가들과의 눈치싸움을 녹여냈다면 훨씬 더 완성도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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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전락하더라도 놓을 수 없는 것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인 박쥐를 다시 봤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 영화를 봤는지 셀 수도 없다.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는 아니지만 내용과 대사를 다 알아도 항상 소름이 돋은 상태로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영화이다 보니 소모임 멤버들에게 하도 호들갑을 떨어 놔서 다들 많은 기대를 하고 봤을 것 같은데, 개봉 당시에도 평가가 엇갈렸듯이 보는 사람마다 반응이 다 다른 것 같아서 신기했다. 그 와중에도 불쾌하고 찝찝하다는 평은 모두의 입에서 나왔던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외모라고 했다. 배역에 어울리는 외모와 분위기가 1순위라는 감독의 말을 증명하듯이, 이 영화는 송강호 김옥빈이 아니었으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영화인 것 같다. (이후 스포일러)
본작의 주인공인 현상현은 정말 숭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신부이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없음에 허무함을 느끼고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신부로서의 자신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직접적인 구원자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 또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기적을 만들어낼 수 없었고, 결국 불치병 바이러스의 치료약을 개발하는 연구소에 실험 대상으로 자원하게 된다. 치사율이 100%인 바이러스를 몸에 집어넣은 뒤 행하는 그의 기도문 독백은 이 신부가 얼마나 희생적인 사람인지를 초반에 확실히 설명해주는 역할과 이후의 장면들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떠한 짐도 질 수 없게 하소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결국 현상현 신부는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 직전에 이르게 되어 피를 쏟으며 쓰러진다. 이후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받고 사망 판정을 받지만, 기적적으로 회생해 한국으로 살아 돌아오게 된다.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혼자 살아 돌아온 현상현 신부의 앞에는 그를 메시아로 칭하며 치유받기를 원하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아버지와도 같은 신부님에게 '치유되었다는 분들도 있습니다만..'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구원자가 되고자 했던 자신이 약간이라도 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와중 부산에서 친구로 지냈던 강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머니인 라 여사에게 듣게 되고, 그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되면서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태주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다. 어렸을 때 강우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던 상현은 '집에 놀러 가면 여동생이 부끄럽다고 숨고 그랬었는데..'라고 회상한다. 이 말을 들은 태주의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이는 태주라는 인물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첫 장면임과 동시에 이후 어떤 장면에서 태주의 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때의 인연으로 현상현은 라 여사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마작 모임에 초대받게 되고, 태주와는 두 번째로 대면하게 된다.
해당 장면에서도 느껴지는 박찬욱 영화의 특징은 현실에서 흔하게 쓰이지 않을 것 같은 소품과 장소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올드보이의 사설 감옥 벽지가 그러했고 헤어질 결심 속 서래의 집 벽지가 그러했듯이, 이 영화 속 중심이 되는 장소인 한복집 건물 역시 여러 나라의 특징이 결합된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에서 마작을 하고 있다는 설정도 특이하게 느껴진다. 모두에게 보이는 1층에는 한복집이 위치하고 있으나, 그 위 층에서 다양한 인물이 모여 도박인 마작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반복적인 삶 속에 갇혀 있지만 누구보다 자유롭고자 하는 태주의 심리 상태를 비유하고 있는 것 같다. 개성 있는 소재들이 충돌하고 있는 이 공간은 편안한 집이 아니라 음침한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에는 팜므파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여성 등장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영화 속 태주는 그러한 면모를 극한까지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태주는 자신이 원치 않는 반복적인 삶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인물이며 이를 약간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몽유병을 핑계로 밤마다 맨발로 거리를 뛰어다니는 인물이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억압받은 그녀는 집에서 완전히 도망치지는 못하고 동네 골목까지 뛰어갔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태주의 가족은 라 여사의 집 작은 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태주가 어렸을 때 그녀를 두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아서 혼자 남겨진 태주를 라 여사가 거두어 딸처럼, 강아지처럼 키웠다고 한다. 이 대사를 딱 들으면 때 단순히 태주를 아끼고 귀여워하며 키웠다는 말인 듯싶지만, 이 집안 속에서 태주의 취급을 보았을 때 '개처럼 키웠다'라는 싸한 느낌이 들었다. 중반에 밤마다 달리러 나가는 태주를 막기 위해 라여사가 문에 자물쇠를 거는 것만 봐도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이는 것 같다. 라 여사는 태주를 강우의 간병인처럼 기능적으로 대하고 있는 인물이며, 다른 마작 멤버들 역시 외국인인 이블린을 제외하고는 도덕적으로 해이한 인물들로 묘사가 되고 있다. 태주는 원래 이 마작 멤버에 포함될 수가 없는, 즉 자신의 욕구를 펼칠 수가 없는 인물이지만 현상현이라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그녀를 묶고 있던 속박의 끈이 끊어지게 된다.
한편 현상현 신부는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피를 갈구하게 되면서 자신이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을 희생해 남을 구하고자 했던 현 신부는 의도치 않게 타인의 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흡혈귀가 되어 육체적 쾌락에까지 이끌리게 된다. 자해를 하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잠재우려고 했던 상현은 결국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태주에게 끌리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태주 역시 상현에게 호감을 느끼고 상현을 통해 한복집의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상현이 맨발로 뛰고 있는 태주를 번쩍 들어 자신의 신발을 신겨주는 것은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설렘을 이끌어내는 박찬욱 감독만의 독특한 멜로 연출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두 사람은 육체관계를 가지게 되고, 태주를 사랑하게 된 현 신부는 자신의 몸 상태를 태주에게 고백한다. 남의 피를 마시는 현 신부의 모습을 본 태주는 경악하며 자신의 집으로 도망친다. 현 신부는 태주를 쫓아가 자신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며 자신이 마신 피의 주인은 원래 다른 사람들 먹이는 것을 좋아했던 분이라 이해해주실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뱀파이어가 되어 타인의 피를 마시게 된 1차 전락, 신부로서 금기인 육체관계를 가지게 된 2차 전락을 겪은 상현은 끝없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신부로서의 자신과 흡혈귀로서의 욕망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한다. 처음에 두려움을 느꼈던 태주는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 자신의 지루한 일상과 정 반대에 있다고 느끼며, 밤의 골목을 뛰어다니는 행위를 중단함과 동시에 밤의 존재인 뱀파이어를 자신의 삶 속에 집어넣게 된다.
상현은 사랑하는 태주를 안고 마치 놀이기구를 태워주는 것처럼 높은 건물 위에서 쉽게 뛰어내리지만 건물을 다시 올라갈 때는 태주를 안고 계단을 오른다. 이 장면을 건물을 뛰어내리는 태주의 표정과 연결 지어 생각해봤을 때 뛰어내리는 것, 즉 전락하는 것은 정말 즐겁고 쉬운 일이지만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 같다.
헤어질 결심 속 해준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속아 자신의 직업윤리와 가치관 버리게 된 상현은 결국 물에 가라앉은 집 속 옷장에 강우를 가둬 살해하게 된다. 그래도 자신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며 자기 합리화를 했던 상현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살해하는 3차 전락에까지 이르게 되며, 인간도 짐승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된다.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신부까지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을 목격한 상현은 더 이상 신부로서 존재하기를 포기하게 되고, 더욱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된다.
내 얼굴은 비록 냉담하고 둔감할 것이나 내 심장은 항상 당신을, 오직 당신만을 위해 뛰겠나이다.
모두를 구원하고자 했던 상현은 결국 끝없는 전락의 과정 속에서 태주 한 사람만을 구하기를 소망하게 된다. 태주의 손을 잡고 기도하듯이 말하는 위 대사를 영화 초반부의 기도문과 비교해봤을 때 상현의 정체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강우를 제거하면 거칠 것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은 살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 정상적으로 생활하지 못하게 된다. 태주 자신이 그리했던 것처럼 강우의 환영이 자신의 입에 쪽가위를 집어넣는 상태를 경험하기도 하고 몸이 물속에 잠기는 체험을 하기도 하며 육체관계 중 두 사람 사이에 강우가 끼어있다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멀어져 다른 마작 멤버와 잠자리를 가지기도 하는 등 강우를 죽이기 전보다도 못한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 영화의 내용을 사랑의 과정으로만 생각했을 때, 상대를 사랑함에 있어서 여러 긴장과 제약이 많았던 연애 시작의 설렘을 잃어버린 두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태주의 욕망에 의해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알게 된 상현은 태주를 다그치지만, 태주는 오히려 '내가 아니었어도 당신은 강우를 죽였을 것'이라며 상현의 합리화를 비웃고 그를 병균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강우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태주의 말에 이성을 잃은 상현은 결국 그녀까지 살해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4차 전락에 이르게 된다. 이 장면의 구도와 음악이 모두 압도적이라 가장 좋아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죽여 놓고도 슬퍼하기 이전에 흡혈 본능에 이끌려 그녀의 피를 마시는 상현의 모습은 소름 끼치기 가지 한다.
정신없이 피를 마시던 상현은 라 여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에 놀라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파악하게 된다. 영화 최후 반부까지 태주와 상현이 라 여사만은 죽이지 않는다는 점과 두 사람의 모든 죄를 지켜보거나 폭로하는 사람이 라 여사라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라 여사는 태주와 상현의 최후의 양심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상현은 태주를 소생시키기 위해 자신의 피를 먹이고,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난 태주에게 '해피 버스데이 태주 씨'라고 말한다. 이 대사 역시 그녀를 우발적으로 살해해 놓고, 마치 그녀에게 뱀파이어로서의 새 삶을 선물하려고 의도했던 것처럼 합리화를 하는 것 같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상현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며 흡혈을 하고 다닌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며 자신이 도와주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더 편하게 죽는 것 같다고 또다시 합리화하는 상현에게 태주는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처럼 생각하지 마라',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라는 대사를 통해 상현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폭주하는 태주의 모습을 보며 상현은 자신의 선택이 전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더 이상 태주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태주는 '당신을 살린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줘'라는 상현에게 '당신은 나를 죽여도 후회, 살려도 후회야'라며 일갈한다.
태주는 라 여사의 폭로로 인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마작 멤버들을 죽이고, 상현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이를 돕는다. 마작을 하지 않았던 이블린만이 상현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되는데, 이 영화 속에서 마작이 인간의 욕망이나 악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면 작중 유일하게 도덕적 해이를 보이지 않는 인물인 이블린만이 살아남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 선한 인물들이 이유 없이 죽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감독의 뚜렷한 가치관이 보이는 장면이기도 한 것 같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은 죽을 필요 없는 인물이 죽는 것에서 나오는 감정 소모를 자신도 잘 견디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악의 고리를 끊어야겠다고 다짐한 상현은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는 신도들의 캠프에 찾아가 부정을 저지르는 모습을 일부러 들킴으로써 그들을 헛된 희망으로부터 구원한다. 이후 상현은 새벽이 되기 직전 시간에 태주와 라 여사를 데리고 허허벌판 끝의 절벽에 도달한다. 처음에는 죽기를 거부하고 그늘 속에 숨던 태주였으나, 상현의 진심을 깨닫고 그와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한다. 이 장면에서 태주가 상현이 신겨줬던 구두를 신는 것은 죽는 순간에 자신이 살면서 느낀 가장 행복한 감정을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서야 관객들은 태주도 상현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구원자가 되고자 했던 상현은 전락의 끝에 도달해서야 자기 자신을 희생해 타인을 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합리화가 아닌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상현은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태주, 앞으로 희생될지 모를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게 되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라 여사가 웃으며 영화는 끝나게 된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극단적인 이야기 속에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박찬욱 감독의 능력이 이 영화에서도 통했던 것 같다. 자의와 타의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면서 살아왔던 두 사람이 만나 그 극한까지 달려간 뒤 허무하게 재가 되는 것은 굳이 뱀파이어나 재와 같은 소재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한 번은 상상하는 일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을 것인가?'를 꼽을 수 있겠다. 또한 전락의 끝에 가서야 구원의 길을 깨닫게 되는 결말 역시 흥미롭다. 결국 현상현은 인간의 상식이나 양심이 적용되지 않는 '사람 먹는 짐승'이 되었음에도 스스로 인간으로서 죽기를 선택해 숭고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를 다시 보며 느꼈던 것은 박찬욱 감독 영화 속에서는 역시 여성 캐릭터들이 빛나 보인다는 것이다. 박쥐의 태주와 헤어질 결심의 서래를 비교해 보면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팜므파탈처럼 보이는 공통점이 있으나, 감독 자신의 세월이 많이 흘러서인지 테주보다는 훨씬 더 감성적이 된 서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영화가 던지는 주제의식을 무시하고서 보더라도 다른 영화들에서 볼 수 없는 훌륭한 장면들에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물론 장면마다의 의미를 곱씹으며 보면 두 배로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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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가 뭘 하는지 보라
- 안네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들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은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어". 이 말들은 우리에게 '모종의 영감'을 주는데, 그건 그 말들이 우리 귀에 좋게 들린다는 뜻이다. 이 말들은 살해된 소녀들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이는 걸 용납하는 우리 문명의 타락에 대해 용서받은 기분이 되게 해준다. 그리고 만약 그 말들이 살해된 소녀에게서 나왔다면, 글쎄, 그렇다면 그 말들은 틀림없이 진실일 테니 우리는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게 틀림없다. 살해된 유대인이 내려주는 그런 은총과 사면이라는 선물이야말로(정확히 기독교 사상의 핵심에 자리 잡은 선물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안네의 은신처에서, 그가 쓴 글에서, 그가 남긴 '유산'에서 너무도 간절히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죄 없는 죽은 소녀가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었다고 믿는 것이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만족스러운 일이다. 안네가 '내면이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에 관해 쓴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기 전이었다. 그 문장을 쓰고 3주 뒤, 그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어떤 사람들이 살아 있는 유대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여주는 사실이 여기 있다. 그 사람들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이 사실은 안네 프랑크의 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되풀이해 말할 가치가 있다. 그의 일기를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집단 학살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것이 그의 일기가 집단 학살에 관해 쓴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약 그런 작품이었다면 그 일기는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이 생생하고 자세하게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쓴 글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기록들 가운데 어떤 것도 안네의 일기가 얻은 명성 같은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 그런 무언가에 가까이 갔던 기록들은 오직 은폐라는 똑같은 규칙, 자신을 박해한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예의 바른 피해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규칙을 준수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었다.이디시어판은 <나이트>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자들에 대한 그리고 제목이 암시하듯 무관심으로(혹은 적극적인 혐오로) 그런 살해를 가능하게 했던 세상 전체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위젤은 후에 프랑스인이자 가톨릭 신자이며 노벨 상 수상자였던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도움을 받아 '나이트 La Nuit’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프랑스어판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젊은 생존자의 분노를 신학적 고뇌로 전환한 작품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속한 사회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떤 독자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신을 비난하는 것이 낫다. 이런 접근법은 위젤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에 이 책이 미국이 베푸는 호의의 전형인 오프라 북클럽 선정작이 되게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접근법도 일본의 십 대 소녀들이 안네의 일기를 읽었듯 이 책을 읽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려면 위젠은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은폐해야 했을 것이다.<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주의: 참사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음.
현시점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기엔 너무 참여-미디어 아트의 영역으로 나아가 버린 것도 같다. 대부분의 글로벌 관객들에겐 영화보다도 먼저 사회적 책무를 인지하고 유의하는 행동주의 예술가의 수상 소감 영상이 전해져왔다.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오스카에서 유대계 정체성(Jewishness)과 홀로코스트를 또다른 전쟁/학살을 위해 오용하지 말 것을 촉구한 후, 곧장 전세계 시오니스트의 돌을 맞는다. 그 자신 역시 유대계이면서 이스라엘-가자 전쟁에 정면으로 반대한 그가 손을 덜덜 떨며 준비해온 ‘선언’을 수행할 때 우리는 일종의 경외를 느낀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가 선 곳에 가장 먼저 균열을 내며 우리 인간의 자격을 되묻는 모습. 그렇듯 순교를 불사한 지성인의 결기는 어떤 이에게나 강렬한 전율로 다가오니까.
한편 미디어 아트로서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흥미로운데, 우선 이 영화가 전시하는 풍광은 오프닝부터 경박하리만큼 경쾌하고 그늘 없다. 르누아르의 사랑 넘치는 가족 연작을 떠올리게 할 만큼 밝은 햇볕 속, 떼죽음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며 안전한 부귀를 누리는 가족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건전한 수용소 미관 조성’을 위해 라일락 관목을 꺾지 말라고 엄숙하게 공지 방송을 하고, 아이들은 곧 도살될 유대인들처럼 아버지 루돌프의 눈을 가리고 그를 정원으로 데려가 깜짝 생일 파티를 선물한다. 어머니 헤트비히가 정성껏 돌보는 아름다운 정원과 윤기 나는 검은 개와 건강한 5남매까지, 완벽한 소품을 둔 듯 잘 가꿔진 이 삶이 평범할수록 도리어 벽 너머의 - 어쩌면 이미 삶이 아닐 - 삶(들)에 대한 암시가 숨을 죄여온다.
헤트비히를 포함한 장병 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잔머리 하나는 대단한’ 유대계 희생자들을 비웃고, 그들로부터 갈취한 밍크 코트와 보석들을 두르고 힘을 과시하지만 이 과시는 절대 노골적이거나 공개적이지 않다. 다른 부인의 거대한 코트를 두고 다른 여자들과 “여제 같다”며 부러워하고 비꼬았던 헤트비히는 강아지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은 문 안에서 제게 떨어진 코트를 몰래 입어보며 만족해한다. 그러나 값비싸고 보드라운 코트는 헤트비히가 평소에 입던 평범한 원피스에 비해 너무나 어울리지 않고 어딘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또 헤트비히는 코트 주머니 안에서 나온 립스틱 - 그러니까 이것이 원래는 살아 있었던 누군가의 소유임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끔찍한 소품 -을 발라봤다가 이내 쓱쓱 문질러 지워버린다.
이 은근함, 이 비밀스러움은 회스 부부를 포함한 독일인 전범 가족들이 그 시점 도달한 삶이 절대 처음부터 그들 소유가 아니었단 사실을 제시한다. 그들이 부유했었고 똑똑했던 유대인들을 멸시하거나, 장모가 과거의 유대인 고용주를 떠올리고 “그 여자도 지금 저기 있으려나?” 상상하며 어딘지 고소해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이전에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갖고 있었던 이들에 대한 질시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상위 계층을 ‘몰아냄’으로써 계급 이동에 성공한 하위 계층의 승리감, 도취감 내지는 자족과 뿌듯함이 이들의 얼굴에 부드럽게 퍼져있는 것이다.
“그이는 저보고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래요”라며 수줍은 듯 의기양양한 듯 말하는 헤트비히, ‘불합리한’ 전출에 항의하다가 결국 “이런 ‘희생’을 감수하는 게 삶이란다”라고 애마에게 말하는 루돌프. 우습고 불쾌한 기분이 정점을 찍는 것은 부부가 강가에 서서 발령 소식에 대해 논의하는 씬에서다.
난 죽어도 여기 안 떠나.우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온 삶이잖아.총통도 그렇게 연설하셨잖아.동쪽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찾으라고.즉 헤트비히와 루돌프는 “그동안 꿈꿔왔던 삶”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여왔으며 그 삶을 ‘부당하게’ 뺏기지 않기 위해 더한 노력도 불사할 거란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 노력이란 건 물론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탈취하고 강간하는 일에 일조하거나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고”의 반복을 직접 설계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돌프의 ‘일’은 사람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정하게 먼 거리에 고정된 다중 시점의 카메라를 통해서만 그려지고 있는데, 헤트비히가 일궈온 꽃밭과 온실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손만 까딱하면 네 명의 하녀들이 벌벌 떨며 궂은 일을 대신해주고 전시 중에도 케이크와 비싼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벽 뒤에서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든 나머지 가족들이 알게 뭐란 말인가.
“초콜릿 같은 거 있으면 꼭 챙겨줘”라며 남편에게 당부하는 씬을 통해 공범임을 입증한 헤트비히의 몸과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루돌프의 그것에 비해 비인간성의 일상화에 더 깊게 일조한다. 루돌프는 수용소장이고 헤트비히는 그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사람을 죽이고 처리하는 효율적 프로세스를 직접 설계하는 자고 헤트비히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 그럼으로써 당시에 침묵하거나 적극 가담한 일반적인 독일인 전체를 대표하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돌프가 참석한 나치 장교들의 회의보다도 헤트비히의 신경질적 짜증이 극 전반에 긴장감 도는 중력을 더한다. 그는 결코 상냥하거나 일관된 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제 기분이 상하면 “너 하나쯤 재로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라며 하녀를 위협하는 여주인이다. 무의식적인 듯해서 더 공포스러운 무시. 힘을 제대로 다루는 법도 모르고 뒤따르는 책임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갑자기 쥐어진 타인의 생사여탈권. 성실한 군인이고 좋은 아버지였던 루돌프가 창녀를 사는 위선이나, 헤트비히가 남편보다 집을 선택하는 자기중심성은 그래서 놀랍지도 기이하지도 않다.
상실 없는 상실과 공포 없는 공포, 무게감 없는 무게를 전달하는 작품을 ‘보며’ 관객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시각적 정보에 의존하는지를 계속 의식하게 된다. 벽 뒤에서 무언가 가동되는 소리. 간헐적인 총소리와 희미한 통곡과 비명 소리. 게르만 아기의 울음과 유대인 아기의 울음은 기묘하게 뒤섞이고 개들은 담장 안팎에서 하울링을 주고받는다. 헤트비히의 어머니처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이 모든 불길한 소리를 못 견뎌 말없이 떠나버릴 정도지만, 내부인들은 백색소음 정도로 치부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우리 눈에 푹푹 박혀오는 풀꽃의 선명한 빛깔, 새빨갛고 예쁜 수영복과 희디흰 게르만족 피부의 조화, 맑은 강물 앞 단란한 가족이 노니는 풍경이란 얼마나 아름답게 다가왔을 것인가.
눈과 귀의 기이한 간격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며, 눈을 극적으로 속이고, 클로즈업 없는 원경으로 눈이 해석하는 정보값을 어긋나게 하길 의도하던 영화는 돌연 마지막 5분간 오류 없이 명확한 장면을 송출하니, 바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관을 열심히 쓸고 닦는 현대의 풍경이다. 80년의 간극을 뛰어넘게 해줄 통로는 암전 속 빛이 새어 들어오는 좁은 바늘구멍이다. 이는 원시적인 카메라를 즉각 은유한다.
루돌프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돌연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찍는 카메라를 직시하고, 블랙박스가 ‘보여준’ 미래를 감지한다. 이 응시는 영적이고 마술적이다. 루돌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루돌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그날 밤 자기 공적을 치하하는 파티에서마저 ‘이 사람들을 가스로 몰살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전화 너머 헤트비히에게 즐거이 말한다. 즉 그는 ”당신은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란 필사의 합리화로도 보호받지 못할 괴물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붙잡혀 구타로 앙갚음당하고 결국 교수형을 당할 자신의 운명을, 악인 하나를 징벌하는 것으론 복구되지 않을 수십만의 생명을, 시원하게 토해내지도 못할 만큼 무거운 죄악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짊어진다.
드문 고요 속 루돌프는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아우슈비츠의 집에서 온 방 불을 끄고 문을 잠그며 침실로 올라갈 때와 같은 속도로.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의 우릴 반성하고 직면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그때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뭘 하는지 보라'.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걸 보여줍니다.조나단 글레이저
그때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과, 지금 여기에서 내 눈앞이 아닌 곳에서 담장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다고 말할 사람들. 어쩌면 이미 늦어버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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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틀포레스트> 여름의 맛, 오이 콩국수
보고 나면 뭐라도 먹고 싶어 지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여름 장면은 하나로 기억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먹는 오이 콩국
혜원의 신나는 표정과 면대신 만든 오이의 초록이 오버랩 되어,
더운 여름이면 생각만으로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실 혜원의 오이 콩국수는 냉장고에 만들어 둔 콩국만 있다면,
불을 쓰지 않고 10분도 걸리지 않고 만들 수 있는 정말 간단 요리이다.
뜨거운 물에 팔팔 끓여야 하는 밀가루 면 대신
오이를 길게 채 썰어 넣은 것은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사실 이 요리에서 가장 큰 고민은 ‘콩국물을 직접 (!)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인데,
콩국물을 준비하는 세가지 방법을 보고, 각자가 원하는 대로 선택 하면 될 것 같다.
첫번째, 콩국물을 직접 모두 만들기
이 때는 일정을 한나절 정도는 넉넉히 잡아두는 것이 좋다.
메주콩을 깨끗하게 씻어 물을 넉넉히 넣고 냉장고에서 8시간 정도 불려준다.
적당히 불려진 콩을 센 불에서 삶다가 포르르 끓으면 거품을 걷어내고 중불로 10분 정도 더 삶아준다.
너무 오래 삶으면 메주냄새가 나기도 하기 때문에 비린 맛이 나지 않게 삶아 주는 것이 중요 하다.
삶은 후엔 찬물에서 콩껍질을 벗겨 준 뒤,
삶은 콩, 콩 삶은 물, 생수 기호에 따라 소금을 넣어주고. 믹서에 갈아주면 콩국물이 완성된다.
두번째, 두부로 콩국물 만들기
콩을 불려서 콩국을 만드는 것 보다는 간단하지만, 고소한 별미가 되는 방법이다.
아이가 어릴 때 자주 해 준 간식이기도 한데…
국내산 두부 1모에 두유와 견과류를 조금 넣고 믹서에 갈면 아주 고소한 콩국이 만들어진다.
세번째, 시판 제품 구입하기
몇 년전에 비하면 다양한 제품이 정말 많이 나와있다.
입맛에 맞는 브랜드 제품을 찾아두면 여름이 든든해진다.
콩국을 어떻게 준비 할 것인가 결정이 끝났다면
요리 순서는 아주 간단하다.
1. 오이 끝을 크게 다음, 오이를 면처럼 길게 채 썰어 준다.
2. 슬라이스나 스파이럴 같은 도구를 사용하면 더 쉽고 간단하게 채 썰기가 가능하다.
3. 오이의 아삭한 식감을 위해 얼음물에 오이를 담궈 주면 좋다.
4. 그릇을 준비해, 오이를 담고
5. 준비된 콩국물을 부어 준다.
6. 고명으로 삶은 계란, 토마토등을 올려주면 끝 !
이번 주말엔, 리틀포레스트 영화를 보며, 시원한 콩국을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게 바로 여름이지." 하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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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피지컬 : 100> 티저 예고편
죽도록 싸우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라! 금메달리스트였든, 치어리더였든, 가수였든 상관없다. 인종도, 젠더도, 종목도 상관없다. 오직 하나의 룰. 몸으로 끝까지 살아남는 1명이 이긴다! 각 필드 최고의 피지컬 100인 중 최후까지 살아남을 '궁극의 피지컬'은 누구인가 세상 어디에도 없던, 극한 생존경쟁 《피지컬: 100》 2023년 1월 24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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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 공식 예고편
[2021년 6월 30일, 왓챠 공개]
어른들은 모두 죽었다.
죽지 않는 아이들은 천진하지만 잔혹한 사회를 만들었다.
동생과 생존해 온 안나, 악명높은 "푸른 아이들"이 동생을 데려가자 목숨을 건 모험에 뛰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