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0-04 17:37:01
[BIFF 데일리] 광장에서, 골목에서, 만남에서
영화 <여기 아이들은 같이 놀지 않는다> 리뷰
DIRECTOR. 모흐센 마흐말바프(Mohsen MAKHMALBAF)
CAST. 알리 자데(Ali JADDEH), 벤자민 프라이든버그(Benjamin FREIDENBERG), 아디 니센바움(Adi NISSENBAUM) 등
PROGRAM NOTE.
오랫동안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최신작이다. 감독은 10월 7일 하마스 공격 이후 악화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의 성지이자, 긴장과 증오가 일상화된 예루살렘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유대인과 무슬림들은 한 건물에 살면서도 서로 대화조차 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서로를 공격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무슬림과 유대인 사이의 공존과 평화의 해법을 고민한다. 영화는 현재의 암울한 도시 분위기와 양쪽 주민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담아내는 한편, 이 도시의 미래가 지금은 함께 놀지 못하는 밝은 표정의 아이들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힘과 역할을 확인시켜 주는 수작이다. (조지훈)

이 영화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수미상관을 이루며 시작하고 끝난다. 감독이 과연 이 갈등의 해결책이 있을까 궁금해하며 조사차 예루살렘을 찾았다는 말. 시작할 때와 마칠 때, 같은 문장에서 서로 다른 감정이 피어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둘러싼 두 ‘국가’의 갈등을 담고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60여 분 동안 나는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를 떠올렸다. 능소화가 군데군데 박힌 초록빛 배경에 한예리 배우가 서 있는, 그 싱그러운 포스터. 북촌 일대 서울 골목골목의 이야기가 올망졸망 매달려 있는 그 영화를.
감독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좁다란 골목을 카메라로 부지런히 담고, 그 골목에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평소 우리에게는 늘 가장 우렁우렁 외친 소리들, 뉴스 너머로 전달될 만큼 커다랗고 거친 극단의 목소리만이 들리기에, 보통 사람들의 무난한 생각들을 들을 기회가 좀처럼 없는 걸 생각하면, 더없이 귀한 인터뷰다.
메카에 순례를 왔던 선조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련 현대사와 촘촘하게 맞물려 온 자기 인생을 풀어놓는다. 선조부터 대대로 예루살렘에 살며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서로 다른 관계를 맺어 왔다는, 그래서 세대의 차이를 피부로 느껴온 유대인 벤자민 또한 골목과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단절되고 분리된 사람들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연결하는 공간으로 자기 집을 가꾸어 가는 유대인 여성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 골목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도시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하루>가 북촌 골목골목을 비추며 더없이 서울다운 풍경을 담았듯, 늘 국제면 기사에서 보게 되는 과격하고 뒤틀린 모습이 아니라 이 영화 속 사람들이 그리는 모습이 실제 예루살렘의 모습일 것이다. 언제나 그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들은 골목에서 일어난다. 통곡의 벽이나 대형 모스크 같은 유적지가 아니라.
이들은 변해가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도시 한가운데서 총성과 폭격음이 울리고, 무장한 군대뿐 아니라 어느 날부터 정착해서 살기 시작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치 자경단 느낌으로 무기를 두르고 있다. 총격 사건이 발생하면 시장은 일시적으로 폐쇄되고, 그럴 때마다 일시적으로 모두가 길을 잃는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어떤 말들이 무너진다. 평화, 공존, 그런 단어들이 무너진 자리를 더듬거린다.

영화의 제목은 <이곳의 아이들은 같이 놀지 않는다>이고, 제목답게 ‘같이 노는’ 아이들은 나오지 않는다. 철저한 분리. 위협을 느꼈다고 또 무장하고, 피를 흘렸다고 또 피가 흐르게 함으로써 이 도시를 메운 위험의 총량은 계속 늘어나, 불안한 수위를 한참 넘어서 위태롭게 찰랑거리고 있다.
철저한 분리 안에서, 사람들은 같은 골목을 걷지 않게 된다.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걸을 일도 없고,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대화할 일도 없다. 미지의 적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기류를 구매하겠다고 긴 줄을 선다. 인터뷰를 하는 인물들은 이 상황을 매우 안타까워하면서도, 밝은 미래의 회복을 꿈꾸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차분한 인터뷰가 다수를 이루는 영화임에도, 예루살렘이 죽어가고 있다고 절절하게 외치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 도시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건 이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일 것이다. 마을 안에서, 골목에서, 작은 각자의 집에서, 조금씩 각자의 주변을 바꾸어 가는 사람들. 그 도시에 대한 진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예루살렘 거리는 돌로 되어 있지만 우리 심장은 그렇지 않다”. 영화에 나온 노랫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은 이내 돌처럼 굳어져야 한다. 혐오는 길러지는 것이기에. 영화 속에서 연결을 희망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당사자들이 이야기하듯, 대화를 나눠보면 다 그냥 사람이다. 역사적 사실도, 경전 속의 문장들도, 구태여 갈등을 만들고 상대를 비방하고 살해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여기 아이들은 같이 놀지 않는다>지만, 영화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나올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엿볼 수 있었기 때문에. 폭력의 행위를 흉내 내며 노는 아이들도 있고, (토실토실해서 너무 귀여운) 고양이를 끌어안고 노는 아이들도 있고, 무엇보다 종교나 민족과 상관없이 섞여 함께 가는 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에 다닌 아이들은 입대를 꺼려 한다고 한다. 희망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고 같이 노는 것만으로 해결될 만큼 간단한 자리에.

10월 7일의 하마스 공습을 기점으로 이제 눈치조차 보지 않는, 이 영화 속 표현을 빌자면 점점 파시즘에 가까워 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바라본다. 또한 그 폭력이 전염되고 있는 일대 국가들을 바라본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공세를 펼치고 이란은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이란에 대응할 권리를 갖고 있다면서, 이란 핵시설 공격만 슬쩍 반대했다. 이란에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 밝혔다. 10월 3일 기준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보도들이다.
불안하고 산란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광장과 골목이, 서로 다른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신을 추앙하든, 어떤 가치를 숭배하든,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든, 우리는 만나서 뒤엉켜야 한다. 애정도 갈등도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만남이 단절된 애정은 헛되고, 미지의 상대에 대한 적의는 미친 듯이 부풀어올라 불필요한 갈등으로 꼬이니까.
해답은 언제나 믿기지 않을 만큼 간단하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광장, 골목, 우리가 만날 곳을 회복하는 것뿐이다. 오늘 우리가 만날 곳은 어디일까. 어쩌면 다양한 이야기가 뒤섞이는 영화제 또한 그런 만남의 광장이 아닐까 생각하며, 영화의 전당 앞을 걷는다. 더 많은 이야기가, 계속해서 들려오기를.
10/03 14: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상영코드 065)
10/05 20:00 CGV센텀시티 2관 (상영코드 175)
10/09 13:30 영화의전당 소극장 (상영코드 434)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프레스로 참석 후 작성한 기사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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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접수에 나선 연기돌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의 탄생, f(x) 크리스탈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 EXID 하니
인생 캐릭터 만남 예고, 카라 한승연<애비규환>, 정수정
드라마, 코미디 | 한국 | 108분 | 2020.11.12 개봉
감독 : 최하나 | 출연 : 크리스탈, 장혜진, 최덕문
아이돌 그룹 f(x)로 데뷔해 Hot Summer 등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킨 '크리스탈'(정수정)은 가수 활동은 물론 [볼수록 애교만점],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슬기로운 감빵생활], [써치] 등 다양한 시트콤과 드라마에서 활약해왔는데요. 음반시장에 이어 브라운관까지 접수한 그녀는 지난해 <애비규환>을 통해 똑 부러진 성격과 어디서도 주눅들지 않는 용기를 지닌 위풍당당한 '토일' 역을 맡아 첫 스크린 연기에 도전했습니다. 특히 정수정은 <애비규환>을 통해 스물 두 살 대학생이자 임산부라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내며, 백상예술대상 여자신인상 후보에 오르는 등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았죠.<어른들은 몰라요>, 안희연
드라마 | 한국 | 127분 | 2021.04.15 개봉
감독 : 이환 | 출연 : 이유미, 하니, 신햇빛
아이돌 그룹 EXID로 데뷔해 "위아래"로 역주행 신화를 썼던 '하니'는 예능과 웹드라마 등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왔는데요. '하니'라는 독보적인 캐릭터 대신 본명 '안희연'을 활동명으로 하여, 올해 초 <어른들은 몰라요>를 통해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를 마쳤습니다. <어른들은 몰라요>는 <박화영>을 연출한 이환 감독의 두 번째 문제작인데요. 안희연은 극중에서 18세 임산부 '세진'의 유산 프로젝트를 돕는 가출 4년차 동갑내기 '주영' 역으로 분해 흡연과 거친 욕설 등을 서슴지 않는 파격적인 캐릭터로 그 동안 본적 없던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선보였습니다.<쇼미더고스트>, 한승연
코미디, 공포 | 한국 | 83분 | 2021.09.09 개봉
감독 : 김은경 | 출연 : 한승연, 김현목, 홍승범
인기 아이돌 그룹 카라의 멤버에서 MC 및 연기자로 활동 영역을 확장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온 한승연 또한, 올 9월 스크린 데뷔를 앞두고 있는데요. 그녀의 장편 데뷔작 <쇼미더고스트>는 산뜻하고 유쾌한 올해의 독립영화 화제작으로, 한승연은 극중 자취방 보증금마저 주식으로 날려버린 만년 취준생 '예지' 역을 맡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청춘시대] '예은' 역에 이은 인생 캐릭터의 탄생을 예고했다고 하는데요. 특히 <쇼미더고스트>를 통해 이 시대 청춘들의 불안함과 성장의 과정을 섬세하게 연기한 한승연은 개봉에 앞서 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장편 데뷔작임에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라는 평과 함께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부문 배우상 심사위원 특별언급에 지명되는 쾌거를 이뤘다고 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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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럽게 재밌고 끝나면 프레첼이 먹고 싶어지는 영화
이 영화는 젠더부터 시작해서 자본주의와 계급, 사상과 정치까지 3부로 나누어 다루고 있으며 147분 내내 블랙코미디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슬픔의 삼각형"의 뜻은 얼굴에서 미간과 콧대를 이은 역삼각형이라고 해요.
이 모양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뒤집어진 계급사회를 의미하는 것 같네요.
1부는 젠더 고정관념을, 2부는 각양각색 부자들의 위선과 자본주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3부는 계급도 뒤바뀌어 청소부가 캡틴이 되는 이야기로 상황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뒤바뀌고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전복되었을 때 이 영화의 재미는 배가 됩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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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의 나에게, <태어나길 잘했어>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태어나길 잘했어>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몸과 마음이 커 버린 지금,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한 그 순간 어떤 반응을 보일지.
특히 유난히 더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시기의 나를 만난다면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중, 때마침 이 영화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 영화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한 '춘희(강진아)'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춘희는 어릴 때부터 다한증이 있어서 손에 땀 마를 날이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외삼촌과 외숙모의 집에서 살게 된 춘희는 발을 편히 뻗을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인 '다락방'에서 지낸다. 그곳에서 춘희는 조금은 외롭지만 씩씩하게 커 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른 춘희'의 몸과 마음은 모두 컸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옛 기억들이 남아 있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자꾸 어린 춘희에게 눈치를 주던 것, 자신을 이 집에서 외지인으로 취급하는 친척들, 땀이 많은 춘희의 손을 구박하던 학교 선생님 등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렇게 마음 속에 꾹꾹 숨어 있던 기억들은 '어른 춘희'가 '어린 춘희'를 마주한 후,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영화는 뜨거운 불에 손을 갖다 대는 어린 춘희(박혜진)로 시작한다.
다한증을 갖고 있던 춘희는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손과 발에 땀이 많아서 학교 선생님과 손을 잡고 춤연습을 하다가 땀이 많다는 이유로 구박받기도 하고, 땀으로 인해 집안 곳곳에 발자국이 찍혔을 때에는 외삼촌과 외숙모, 외사촌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춘희는 그런 자신의 손에 스스로 상처를 낸다.
- 우리는 이 집에서 외지인이잖아.
춘희는 외숙모에게서 직접적으로 외지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 집에서 춘희에게 구박과 눈치를 주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할머니였다. 방바닥에 찍힌 춘희의 발자국을 아무 말 없이 닦아주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항상 부모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 이 집에서 외지인 취급을 받는 춘희를 안쓰럽게 바라보곤 했다.
마늘을 까서 사촌 오빠에게 갖다 주며 돈을 벌던 춘희는 어느 날, '주황(홍상표)'을 만나게 된다.
- 저는 좀 쩔어 있어요.
땀에.
춘희가 주황을 만난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한 말이다.
한편, 주황 역시 춘희처럼 어린 시절에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주황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주 폭력을 행사하여 말까지 더듬게 되었다.
훗날 춘희가 주황에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면 어떻게 했을 거냐는 질문에 주황은 어린 자신을 꼭 안아주었을 거라고, 그리고 폭력을 쓰던 아버지에게 한 번쯤은 대들었을 거라고 대답한다.
춘희와 주황은 이렇게 상처를 지니고 있는 서로를 보듬어주며 따뜻하게, 조금은 유치하게 연애를 시작한다.
- 춘희 씨 손에 꽃이 폈네요.
주황은 춘희 그 자체를 사랑해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안 좋아한다고, 어쩐지 최근에 답지 않게 행복한 일들만 일어났다고 말하는 춘희를 주황은 사랑한다.
춘희의 손에 있는 상처도 그에게는 예쁜 꽃이다.
주황은 이렇게 춘희에게 봄날에 핀 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춘희 역시 주황에게 봄처럼 따뜻한, 봄날에 핀 꽃처럼 화사한 사람이었다.
한편, 길을 걷다 벼락을 맞은 뒤로 춘희에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다.
바로 '어린 시절의 춘희'.
어린 춘희를 마주한 '어른 춘희'는 외삼촌 집에서 눈치보며 외지인처럼 살던 옛날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이 감정들을 넣어두고 지내던 춘희는 어느 날, 어린 춘희에게 말한다.
왜 자꾸 나타나서 옛 생각나게 만드냐고.
왜 눈치 없어서 주변 사람들이 자꾸 널 싫어하게 하냐고.
왜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같이 안 죽고 살았냐고. 부모님이랑 같이 죽었어야 했다고.
모진 말을 들은 어린 춘희는 그렇게 떠난다.
떠나서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스멀스멀 떠올라 춘희를 계속 외로움 속에 살게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춘희가 사촌오빠에게 울분을 토함으로써 세상 밖으로 완전히 나오게 된다.
외삼촌네 가족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집에 어린 춘희를 두고 아파트로 이사갔다.
어릴 때 춘희에게 자신들이 이사가면 이 집은 춘희 네 꺼야, 라고 말하던 그들은 훗날 '어른 춘희'에게 이 집을 내놓았으니 나가서 다른 집을 구하라고 얘기한다.
이 집에서 살며 꿋꿋이 집을 지키고 있던 춘희가 열쇠를 바꾸자 다른 집에서 살고 있는 사촌오빠가 오히려 열쇠를 왜 바꿨냐고 화내기도 한다.
이런 일들로 인해 감정들이 쌓이고 쌓였던 춘희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 집은 내가 지켰다고. 그 집은 우리 엄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고.
왜 자신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냐고. 좀 더 잘해줄 수 있었지 않냐고.
왜 (맘껏 발을 뻗을 수도 없는) 다락방을 줬냐고. 다른 방 줄 수도 있었지 않냐고.
그리고 영화는 뜨거운 불에 손을 갖다 대려는 어린 춘희를 막고, 네 잘못이 아니라며 꼭 안아주는 춘희로 끝난다.
둘은 서로를 꼭 안아준다.
-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어른 춘희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듬어준다.
외로운 기억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상처들을 버텨내고 있는 어린 자신을 안아준다.
- 생일인 봄에 하얀 눈이 내렸지.
그 눈처럼 앞으로 하얗고 반짝거리는 일만 일어날 거라고 했잖아.
그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그래도 너를 통해 세상에는 하얗고 빛나는 것보다 더 많은 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앞으로 우리가 서로 꼭 안아줬던 걸 기억하면서 다양한 색깔로 살아갈 거야.
이 영화를 모두 보고, 춘희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을 즈음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어린 춘희가 나타난 이유는 맘 속 한구석에 계속 응어리 져 있던 어른 춘희의 답답함과 외롭고 아픈 기억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
어느 생일날 반짝이는 눈을 본 어린 춘희처럼
반짝이는 벼락이 갑자기 어른 춘희에게.
따라서 마지막에 춘희와 춘희가 서로를 꼭 안아준 것도 쌍방향의 위로가 아닐까.
'어른 춘희'는 어린 춘희에게 네 잘못, 우리 잘못이 아니라면서 토닥여 주었고,
'어린 춘희'는 어릴 적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어른 춘희가 앞으로 이 감정을 조금은 해소한 채로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춘희의 이름은 원래 '기쁠 희'이어야 하는데 잘못 등록해서 '계집 희'가 되었다고 한다.
춘희는, 아마 그녀는 잘 모르겠지만,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도 미소와 기쁨을 주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선물 받은 신발을 자신이 신지 않고 노숙자에게 선뜻 건네는 그녀는 따뜻한 사람이다.
행복해야 마땅한 사람이다.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미워하곤 했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답답했어 가지고. 왜 그렇게 바보 같았어 가지고.
그래서 춘희가 어린 춘희에게 왜 그랬냐고 질책하는 장면을 보며 마냥 미워했던 어린 내 자신이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의 어린 춘희의 얼굴에 어린 시절의 내 얼굴이 겹쳐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미워하면 안됐는데. 어린 나는 그 상황을 견디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영화 속의 춘희처럼 나도 속으로 어린 나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어릴 적 맘 속에서 바래왔던 멋진 어른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나 자신도 어린 나를 답답해해서 미안하다고.
어렸잖아.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 혹독했는걸.
이 글의 초반에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하면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이 영화를 본 뒤 내가 내린 답은 그냥 같이 놀아주고 싶다, 였다.
그냥 그 외로운 순간을 견뎌내는 것을 벅차하던 어린 내가 힘든 시간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도록 같이 즐겁게 놀아주고 싶다.
잠깐이라도 아무 걱정 없이 웃는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
나는 작은 기억으로도 유독 오랜 시간을 사는 아이였다. 그리고 지금 역시 그렇다.
만약 내가 영화 속의 춘희처럼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한다면 그냥 같이 놀아주고,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너의 말과 행동, 너의 모습에서 상황의 그릇됨을 찾지 말라고.
그냥 조금 날이 서 있고, 위태롭고, 절실한 그런 세상 속에 던져졌던 것뿐이라고.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 영화 속의 춘희처럼 꼭 안아주지 않을까 싶다.
잠시라도 만나서 반가웠다고.
이 영화의 포스터 뒷면에는 최진영 감독님의 인삿말이 적혀 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한없이 외로웠던 춘희에게 손을 내미시고, 기꺼이 곁을 내어주신, 춘희의 소중한 친구가 되신 겁니다.
그러니깐 행여 외롭고 지치더라도 춘희 역시 어디선가 그대들을 응원하는 친구로 존재할테니 너무 슬퍼 말아요.
잘 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태어나길 잘했어요!!'
이 봄이 떠나기 전, 모두들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해주는 따스한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를 꼭 관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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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끝나고 정말이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각종 활동을 해보기 위해 몇 장의 자기소개서, 몇 차례의 면접 등을 준비하면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있다. 바로 객관성. 사실을 전달하고, 팩트를 체킹하는 일에는 물론이고,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을 작성하는 일에 있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장착해 주관성이 만들어낸 억측의 구렁텅이에 빠져선 안 된다. 이런 객관성과 주관성을 이야기할 때에 꼭 빠지지 않는 소재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술이다. 예술을 순전히 객관성의 영역으로 치부하기엔 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창의력과 독창성의 의미가 퇴색된다. 또 예술을 오로지 주관성의 영역이라 하기엔 예술을 창작자들을 비롯한 전체 예술 비평가들의 존재가 무안해지며, 그들의 평가 또한 예술의 한 분야로 평가되는 요즘, 예술의 객관성을 빼놓고 예술을 거론하기엔 무리이다. 이렇듯 예술을 주관성과 객관성의 이분법적 논리로 분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영화 <위플래쉬> 내의 대사에도 이런 관점이 등장해 더욱 재밌었다. 영화 속 "앤드류"가 한 말, 예술과 음악엔 객관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편견을 갖지 않을 수 있고, 주관성을 가진 무언가에 내 식대로 생각하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위플래쉬>를 전부 관람한 후 필자의 머릿속엔 단 한가지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객관성을 잃었다.' 영화 <위플래쉬>를 분석하고, 나만의 평을 내려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객관성을 잃었다는 사실은 필자의 뼈 아픈 실수이지만 또 그런 실수를 유도하게끔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는 뜻으로도 생각된다.
영화 <위플래쉬>는 끌어들임과 매혹 그리고 빨아들임을 영상화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심지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영화예술의 미학적 진수를 담아내 모든 이들의 객관성을 무너뜨리는 굉장한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굉장히 무난한 하얀색의 폰트로 작성된 타이틀이 검은 화면을 배경으로 보여지고 뒤에선 본인이 음악 영화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드럼 영화임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스네어 연주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모두 거치고, 어두운 복도 끝엔 빛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좁은 방 안에서 연주하는 한 남자, 주인공 "앤드류"가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달리 인과 줌 인을 통해 카메라는 그에게 다가갔고, 이후 숏에서 그 시점은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이 아닌 또 다른 주인공 "플래처"의 시점임을 알 수 있었다.
영화 <위플래쉬>는 시점과 구도의 미학을 완벽히 이해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 프레임 속 황금 비율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프레임의 대각선이 모이는 중앙점과 그 위 쯤일 것이다. 영화는 그 점보다 더 놓은 지점에 인물을 어두운 복도와 외로운 불빛 하나로 이루어진 공간에 배치하여 의도적으로 인물을 작아보이게 하고 연약한 존재로 비춰지게끔 연출했다. 이후 등장한 "플래처"의 시점을 통해 보이는 당황한 "앤드류"의 당황한 눈빛과 불안정한 몸짓, 아직 부족해보이는 연주 실력은 그를 더욱 작게 만들었고, 관객은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각 인물들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고, 무슨 입장에 처해있는지 별다른 대사 없이도 눈치챌 수 있다.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모든 배경과 사건의 조짐을 시작과 동시에 암시한다.
어떠한 부분을 연습해야하는지 어느정도 알려준 "플래처" 교수의 힌트에 따라 "앤드류"는 더블 타임 스윙을 연습한다. 결국 그는 찾아온 기회에 가뿐히 스카웃되어 "플래처" 교수의 '스튜디오 밴드'로 입성하게 된다. 영화 속엔 재즈 밴드라 일컬을 수 있는 밴드가 총 4개 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두 밴드가 바로 "앤드류"의 첫 밴드인 '나소 밴드'와 '스튜디오 밴드'이다. 물론 두 밴드 사이엔 어느 정도 수준 차이가 존재하지만, 실력 차이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밴드 구성의 의미이다. 두 밴드 모두 젊은 20대 청년들이 모여 이뤄진 밴드이기에 교수가 자리에 없을 때나 학교에 도착해 본인 연주를 준비할 때면 공간은 떠드는 소리에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채워진다. 하지만 교수가 들어왔음에도 전혀 그 태도가 변치 않고 유지되며 문제있는 실력에 따끔히 지적하지 않는 교수로 구성된 나소 밴드와 달리 지정된 시각이 되자 문이 부숴져라 세게 열면서 들어오는 "플래처" 교수와 만반의 준비를 끝맺히고 교수의 콜싸인에만 집중한 학생들로 구성된 스튜디오 밴드는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대표한다. 문제되는 사항이 있는 경우, "플래처" 교수는 한 마리의 야수가 되어 욕설과 분위기로 학생을 압도해 공포감을 조성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주인공 "앤드류"의 시선을 따라가고, 전지적인 시점에서 카메라 촬영을 한다 하더라도 "앤드류"의 관점과 입장을 따라 움직인다. 이런 카메라의 움직임과 구도는 스튜디오 밴드의 공포서린 분위기를 "앤드류"의 관점에서 담아내 그가 느낄 두려움과 불안함을 관객이 피부에 와닿게끔 유도한다.
영화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인물 구도는 바로 상하 관계이다. 영화 <기생충>이 보이는 선이나 보이진 않지만 유추할 수 있는 무언의 선으로 인물 간의 구도를 설정하고, 그 구도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출했다면 영화 <위플래쉬>는 두 인물이 잡힌 투 샷 속 각 인물의 고개와 몸이 쏠린 정도 등의 움직임과 서 있는 인물과 앉아있는 인물의 수직적 위치를 통해 상하 관계를 구사하여 인물 간 주종관계를 설정한다. 상대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위치와 발성으로 묵직하게 누르는 "플래처" 교수의 공포스러운 교수법은 영화 <위플래쉬>가 당시 교육계에서 화제의 영화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플래처"라는 인물을 그저 악마의 인간화로만 비춰지게 방치하지 않았다. "앤드류"가 첫 합주를 앞두고 복도에서 대기를 할 때 찾아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묻고, 존경하는 재즈 뮤지션들의 생애 그리고 그 생애 중 가장 인상깊은 사건인 '심벌 던지기'를 말하는 씬을 볼 때면그는 굉장히 좋은 사람, 친절한 교수처럼 보여진다. 물론 이에 대해 양의 탈을 쓴 늑대, 착한 척하는 괴물이라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후 경연장에서 동료 지휘가의 딸을 만나 친절히 대화하고,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에 아이와 약속까지 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좋은 사람이다. 영화는 공간을 기준으로 "플래처"를 구분한다. 자신의 밴드원들이 존재하는 공간, 음악이 존재하는 공간에선 그 누구보다 치밀하고, 날카로우며, 프로 의식이 투철한 인물이지만, 이후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제자의 죽음, 제3의 공간에선 굉장히 따뜻하고, 온화한 인물이다.
"플래처"라는 인물이 그저 화가 많고, 다혈질적이며,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영화는 답한다. 물론 이를 표출하고 행하는 방법은 충분히 잘못되었지만 영화는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재즈와 음악에 진심인 면을 강조했고, 이는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등장하는 씬의 존재적 의미를 강화시킨다는 측면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보조 자리에서 메인 자리로, 갖은 고생과 수 많은 일들이 지나고 나서야 그토록 원했던 스튜디오 밴드의 메인 드럼을 꿰찰 수 있었다. 이 점에도 의심쩍은 부분은 있다. 이후 장면에서 언급되듯 "앤드류"가 스튜디오 밴드에 입성할 수 있었던 데엔 "플래처" 교수의 힌트가 있어서였고, 메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데에도 타인의 귀책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런 고생 끝에 차지한 메인 자리도 새로운 곡, 새로운 드러머의 합류로 위태로워지기 시작하고, 본인이 자리를 꿰차게 되었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던 난항들이 겹쳐 노력과 시간이 모두 물거품이 되자 "앤드류"는 그동안의 설움이 터져 경연장에서 "플래처"를 덮쳤고, 결국 퇴학당한다.
"앤드류"는 흔히 말하는 아웃사이더 중 하나이다. 영화의 초반부 혼자 연습실에 남아 외로이 연습하는 씬에서도, 연습을 마치고 향한 자취방에 가는 길, 파티 중인 옆 방을 뒤로한 채 쓸슬히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그의 등에서도 그리고 어느 밴드에 가서도 인정받지 못해 그저 불안한 눈동자만 돌리는 그의 눈빛과 행동에서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위플래쉬> 내엔 보통의 타 영화들처럼 대화가 영화의 전반적인 씬을 지배하거나 서사를 담당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씬, 음악만이 존재하는 씬, 연주하는 씬들이 그 역할을 대체한다. 하지만 그 몇 안되는 대화씬, 세기 좋은 수량의 소통 장면이 영화 전체에 주는 영향력은 수와 반비례한다. 작품 속 대화 씬을 모두 종합해 보면 뮤지션으로서 최선을 다 하고, 죽을 힘을 다해 분투하는 "앤드류"의 노력들을 어쩌면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그 노력들과는 반대되는 이들과 나눈 대화들이 전부다. 여자친구 "니키"를 만나 데이트를 하고, 아버지를 만나 영화를 관람하고, 아버지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식사하는 그 모든 씬들엔 "앤드류"가 걷고 있는 길들을 무시하려는 눈빛 내지는 음악으로서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권유하고자 하는 시선만이 존재한다. 또한 대비되는 점은 음악이 존해하고, "앤드류"가 드러머로서 존재하는 공간엔 항상 침묵, 압박, 공포만이 존재하지만 인간 "앤드류"로서 존재하는 공간엔 위로, 환영, 평안의 말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앤드류"가 가고자 하는 길엔 대화보단 행동, 위로보단 압박, 평안보다 음악이 더욱 중요해보이고, 이는 영화의 구조 전체를 구성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영화의 종반부 "앤드류"가 내린 선택으로 귀결된다.
영화 <위플래쉬>엔 음악 영화답게 음악이 끊이지 않고, 음악을 업으로 하는 이들을 담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들의 퍼포먼스 또한 빈번히 등장한다. 흥미로운 건 영화 <위플래쉬>는 음악을 뮤지컬 영화 속 음악처럼 사용한다는 점이다. "앤드류"는 낯을 굉장히 많이 가리는 인물로 보이고, 다른 이들과도 막역한 사이로 못 지내는 성격인지라 주인공 치고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의 심정, 배경, 분위기 등을 행동과 눈빛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데, 이에 도움을 주려 영화는 인물의 심정이 중요히 드러나야 하는 씬에서 재즈 음악을 들려주어 음악의 분위기를 통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앤드류"를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들 뿐만 아니라 "앤드류"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영상들 또한 관객에게 소리와 함께 보여주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하는 연주법은 영화의 종반부에 나올 연주의 복선이기도 하다. 영화 <위플래쉬>는 이렇듯 음악 하나, 영상 하나 허투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후 등장할 모든 씬, 모든 장면들을 위해 초반부부터 빌드업을 이런 방식으로 쌓아가기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 내에서도 이 지점들을 통해 설명하게 된다.
더블 타임 스윙. 파라디들. 300 비트.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과제가 이런 음악 용어들을 관객들에게 잘 설명하는 건 아니었을까. 마치 메디컬 장르 영화나 드라마의 좌우측 하단엔 의학 전문 용어에 대한 해설이 등장하게 되는데, 영화 <위플래쉬>는 행동을 통해 설명하겠다고 대답을 이었다. 영화는 그 연주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전 철저한 빌드업을 통해 등장을 대비했고, 등장을 더욱 화려하게 하면서 관객을 설득시켰다. 심지어 영화는 연주를 하는 인물이나 연주를 하고 있지 않는 보통의 인물이나 가리지 않고 그들의 손과 귀 그리고 입에 집중하게끔 유도했다. 손의 방향, 손가락의 움직임 그리고 귀 장식과 귀의 모양 등 신체를 지속적으로 비추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훈련시켰고, 이후 등장하는 연주씬에서 그 모든 요소들을 풀어내 긴장감과 흥미진진함 모두를 겸비한 장면으로 만들어내었다. 연주곡으로 선정한 곡들 또한 예사롭지 아니하며, 굉장히 인상적이다. 재즈에도 종류가 굉장히 많고, 각 종류별 구사할 수 있는 음악적 분위기도 천차만별이다. 그 많은 선택지 중 드럼, 일렉 기타, 스케일 별 트럼펫 등의 관악기로 구성된 빅 밴드 음악, 그 중에서도 드럼 연주가 귀에 꽂히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각 악기별 독특한 등장 타이밍과 솔로로 만들어진 악기 라이벌링까지 겸비된 음악. 이 모든 재즈의 매력적인 점들을 모인 곡이 바로 영화 <위플래쉬>의 대표곡인 'Whiplash'와 'Caravan'이다. 영화는 이 악기 라이벌링을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각 파트별 솔로를 담당하는 악기를 클로즈업하여 비추고, 솔로가 타 악기로 변경하게 되는 때가 오면 샷을 끊지 않고 스위시 팬을 통해 촬영하였으며, 각 악기별 연주자들의 손, 관악기의 경우 입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해 황홀한 연주의 황홀한 연출을 구사했다. 모든 솔로가 모두 마쳐져 다시 모든 악기가 하나가 되는 때면 팬을 통해 구성원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마침내 멈춘 카메라는 드럼에 포커스를 맞춰 연주자의 고된 표정, 현란한 손놀림과 발놀림 그리고 앞에서 압박을 주고 있는 지휘자 "플래처" 간의 알 수 없는 신경전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일련의 사고가 있고 난 후 모든 드러머로서의 삶을 접고 평범한 한 20대 청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다 우연히 한 재즈 바에서 피아노를 치는 "플래처"를 만난다. 그는 "앤드류"의 증언과 함께 학부모들에게 그의 폭력적인 교수법이 고발되어 교수직에서 쫓겨나 모 프로 밴드에서 지휘를 맡는다고 한다. 그는 "앤드류"를 만나 그 교수법에 대해 스스로가 내린 결론을 이야기한다. 그 때 등장한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 "세상에서 제일 나쁜 두 마디가 있다. 그정도면 됐어."
"앤드류"의 아빠는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어하는 아들 "앤드류"에게 음악이 아닌 평범한 삶도 생각해볼 것을 은연 중 틈틈히 주입시켰다. "앤드류"의 여자친구인 "니키"도 평범히 대학교를 다니지만 아직 본인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 모르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영화 <위플래쉬> 속 오직 "앤드류"만이 최고가 되기 위해, 위대해지기 위해 아둥바둥, 손이 찢어지는 것도 참아가며 연습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이 과연 "플래처"를 만나 생긴 것일까? 그의 욕망, 링컨 센터에서 연주를 하겠다는 의지, 침대마저 연습실로 옮기고 만나는 여자친구마저 연습에 매진하기 위해 헤어지자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플래처"를 만나 더욱 강화되었다면 몰라도 그의 집착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 대답한다. 어쩌면 "플래처"와 "앤드류"는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최고가 되기 위해 집착하려는 남자와 최고를 만들기 위해 집착하는 남자가 만났고, 알 수 없는 신경전과 밀당이 오고 갔기에 모종의 동질감이 생기지 않았을까?'그정도면 됐어'의 보통 수준이 아닌 최고가 되기 위한 두 남자의 끝이 다가온다.
"플래처"의 권유로 치웠던 드럼을 다시 꺼내어 그의 공연을 도우러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잘만 하면 이전의 모든 사건, 사고들을 묻을 수 있을 만큼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플래처"는 "앤드류"에게 다가갔고, 모든 일들의 원흉은 "앤드류"라 지목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전한다. 사실 그 공연엔 "앤드류"가 연습하지 않은 곡들이 선정되어있었고, 전혀 알지 못하는 곡들에 "앤드류"는 함정에 빠져 결국 공연장에서 이탈하고야 만다. 공연을 보러와 준 아버지에게 안긴 "앤드류". 포옹도 잠시 결의에 찬 눈빛을 한 그는 앉음과 동시에 신 들린 연주를 펼친다.
영화의 종반부, 영화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부분이자 러닝타임 내내 공들여 쌓아올린 바벨탑을 화룡점정할 시간이다. 영화 <위플래쉬>는 가장 중요한 그 순간, 대사를 모두 삭제하고 오로지 음악 그리고 "앤드류", "플래처"만 남겨둔다. 초중반부부터 복선으로 이어졌던 버디 리치의 연주와 결을 같이하는 드럼의 현란한 솔로가 이어진다. 그동안 연습해왔던 더블 타임 스윙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소리를 구사한다. 영화는 초중반부에 <Whiplash>와 <Caravan>을 조금씩 들려주기만 할뿐 전체를 들려주거나 연주 전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곡 전체가 궁금했던 찰나 영화는 그 답답함에 시원한 사이다라도 되어주듯 현란하게 칼춤을 춘다. 이미 곡이 끝났어야 할 타임인데도 "앤드류"는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플래처"도 그에게 와 협박을 하고, 방해를 하려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연주가 지속되자 "앤드류"에게 다가간 "플래처". 영화는 "플래처"의 눈을 바라보게끔 유도한다. 그의 눈엔 어느새 최고의 뮤지션을 찾았다는 기쁨과 제자의 몰입된 그 순간을 완성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진정한 광기어린 자가 풍기는 아우라에 눌린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마구잡이처럼 이어질 수 있었던 "앤드류"의 연주는 "플래처"의 지휘로 데크레센도 형태를 취하다 "플래처"의 지휘로 다시 크레센도되어 완벽한 드럼 솔로로 변주한다.
해당 씬엔 특별한 대사나 감정을 유발하는 특별한 연출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앤드류"의 연주다. 슬로우 모션, 손의 움직임을 쫓아가는 트래킹 샷, 계속해서 튀겨지는 피와 땀만이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다. 영화 <위플래쉬>의 종반부가 훌륭한 이유는 말로써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서 그간의 설움, 과정, 노력, 애환, 고통을 함축적으로 표현해내었기 때문이다. "앤드류"와 "플래처", 곡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서로 콜싸인을 맞추려 눈을 마주한다. 상하관계, 주종관계처럼 수직 위치로 배치되었던 눈은 동등한 수평선의 위치에 놓여진다. 비록 눈에 익스트림 클로즈업되었지만 우린 "플래처"가 "앤드류"에게 어떠한 말을 전한 걸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그 말을 들은 "앤드류"는 "니코"를 만난 씬을 제외하고 거의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엔딩을 화려히 장식하고 영화는 마무리된다.
100마디 말보다 하나의 행동이 어떨 때엔 더 도움이 되고,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영화는 더 하는 것보다 빼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무엇을 더 해야 하고,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지가 아마도 영화의 진수인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영화 <위플래쉬>는 그 진수의 향연이지 않았을까? 본 작품에 대한 평가 내지는 한줄평을 보면 "플래처"의 악랄한 교수법을 비판하고 이를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로 생각해 평가한 평들이 많다. 물론 그 지점 또한 무시할 수 없으며, 필자의 생각에도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에 그 요소를 결코 무시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만 작품을 관람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재즈와 드럼, 밴드가 운용되고 연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완벽하게 이해한 감독이 만들어낸 너무도 아름답고도 체계적인 연출 그리고 이를 더욱 빛내는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매력적인 영화음악이 존재하는 영화가 <위플래쉬>이다. 그 어떤 요소로도 본 작품은 정말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는 내가 지금 어디있는지도, 윤리가 무엇인지도, 내 귀에 들리는게 무엇인지도 잊고 그저 즐기게, 미치게 한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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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이 2023년의 관객에게 묻는 전쟁의 의미
마지막 전투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순신(김윤석)이다. 어느덧 전쟁 7년 차. 조선과 왜 나라(일본) 이젠 지쳤다. 희생자가 많은 조선. 이는 조선과 연합을 맡은 명나라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선조와 궁궐 안. 문신들은 전쟁을 금방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조선 내부에서 전쟁에 대한 온갖 논의가 오간다. 하지만 대부분 ‘전쟁 후 조선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뿐이다. 답답한 이순신. 이 왜 나라 무리들을 그대로 놔두다간 화가 돌아올 것 같다. 이순신의 동상이몽이 조선 궁궐 내부의 신하들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내부에서도 전쟁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고니시(이무생)와 시마즈(백윤식)는 다이묘의 입장에서 대립하는 관계다. 이 둘에게는 과제가 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있는 군대를 철수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하는 시마즈와 고니시. 둘은 이순신만은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조선과 연합을 맺은 명나라의 장수들도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 의리라면 죽고 못 사는 등자룡(허준호). 등자룡은 조선에게 우호적이었지만 진린(정재영)은 뭔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전쟁을 지속하는 게 맞을까? 진린의 머릿속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전운이 감도는 조선. 세 나라의 마지막 전투가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다!
신선한 시도
이 <노량 : 죽음의 바다>가 느꼈던 가장 큰 장점은 신선함이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전작과는 다른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의 첫 번째 목표는 <한산 : 용의 출현>과는 다르다. 짜릿한 액션 쾌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명량> <한산 : 용의 출현>처럼 멋진 이순신 장군이 나쁜 놈들 때려잡는 액션물을 기대했다간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 이 영화의 목표는 뭘까? 바로 반전(Anti-war) 영화다. 이 목표 아래에서 본작은 전작 <한산 : 용의 출현>과는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 가령 전작에서 1부는 2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후반부 액션과 거북선의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본작은 다르다. 본작은 사실상 1,2부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병사들의 생사여부가 장군들 몇의 판단에 따라 달렸다는 아이러니를 묘사해야 하고, 이 ‘이순신 3부작’의 핵심 키워드인 ‘의’라는 가치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작이 단순히 서사의 인과관계때문에 사용된 것과는 정반대다. 그리고 이 1부가 전개되는 도중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의 선택이 흥미롭다. 이 캐릭터들은 전쟁을 형상화하고 있다. 입체적인 특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전쟁 이기면 승리에 기쁠 것 같지만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복잡미묘함을 묘사한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
이 영화가 반전영화로 기획된 근거를 다방면으로 읽을 수 있다. 그 하나의 예는 카메라 시점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처음부터 이순신 장군의 전략가적인 면모에 강세를 두지 않는다. 이는 이 <노량 : 죽음의 바다>를 처음 기획할 때에 제작하는 입장에서 염두한 부분일 것이다. 일단 전작 2편과는 다르게 이 노량해전에 대한 기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난중일기>에서 전장의 상황을 직접 묘사하던 이순신 장군이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달할 것이 적다는 한계가 영화의 흐름과도 이어진다. 이야기 안에 판타지스러운 장면이 많이 들어가는데, 빈 공간이 많을 수밖에 없는 흐름을 상상력을 통해 영화의 에너지로 치환시킨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묘사하는데도 안성맞춤이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타국 병사들을 해치우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들어간다면 영화의 접근이 1차원적이게 된다. ‘임진왜란은 나쁜 놈을 때려잡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근거한 감동만 느껴지는 것이다. 이걸 그대로 따라간 것이 전작 <명량>과 <한산 : 죽음의 바다>다. 영화가 굳이 같은 방식을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라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함으로써 이순신 장군의 최후까지 무게감 있게 연출하는 것이 나을까? 영화는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생명의 무게감을 후반부까지 잇는 것이다.
비단 카메라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개 상으로도 반전영화를 가리키는 소재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전작 두 편의 진주인공이었던 어떤 것이 등장/퇴장하는 방식, 병사 개개인에게 동기부여가 들어간 것, (아마 불호 평이 압도적으로 많을) 북과 꿈, 영화의 가장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캐릭터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 등 이 영화는 전쟁의 비참함을 내내 머금고 있다. 이는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이라는 위인으로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읽힌다. 글쓴이는 이 시도가 신선했다고 생각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나 <1917>에서 봤던 서양 전쟁 영화의 씁쓸함이 이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압도하는 존재감
이 영화의 시마즈와 진린의 존재감은 주인공 이순신만큼 강력하다. 시마즈는 고니시과 함께 이 영화를 이끄는 빌런이다. 영화는 이 시마즈를 악마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악마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특별하다. 우리가 아는 악마는 어떤 존재일까? 일단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다다를 수 없다. 하지만 악은 우리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시마즈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행보는 이 특성을 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는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시마즈가 조-명 연합군에 대해 처음 언급할 때 입 밖에 내는 대사와 이 인물의 마지막 장면은 완벽하게 대비되는데, 이를 염두하고 영화를 본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정재영 배우가 맡은 진린 캐릭터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묘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순신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진린이 주인공을 묘사한다?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문장이지만 글쓴이는 다른 측면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순신이 취한 전략가적 면모를 적군이 아닌 동맹의 연합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진린의 과제다. 그리고 정재영 배우는 진린이 이순신에게 영향받은 모습을 강한 감정표현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글쓴이는 이 캐릭터 사용법이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고 본다. 이는 전작 <한산 : 용의 출현>에서 변요한 배우가 맡은 ‘와키자카’와 비슷하다. 다만 등장인물이 처한 처지가 적군과 동맹군이라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또 연기하는 방식도 차이점이 있다. 변요한 배우의 와키자카가 순수한 전쟁광을 맡았다면 진린은 기회주의적이지만 그 근거가 어느 정도 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차이점이다. 글쓴이가 두 캐릭터 중 더 정이 들었던 건 진린이다. 와키자카가 좀 답답한 구석이 있었던 반면 진린은 조선 입장에선 박쥐 같은 느낌이지만 명의 입장에선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물 연출에 있어서 김한민 감독이 더 좋은 방식을 고른 지점이다.
다만 글쓴이는 등자룡의 캐릭터가 진린과 시마즈에 비해 설명이 부족해 보였다. 이 인물의 작중 행보는 실제 인물을 그대로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인물을 이렇게 묘사했던 것도 나름 합리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고 영화는 영화다. 이야기상에서 이 인물이 이런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면 이 캐릭터가 주는 정서의 힘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냥 이순신과 친해서? 그래 보이진 않다. 뭔가 가치관과 어그러지는 것이 있어서? 그런 묘사도 없어서 글쓴이가 상영관에 있을 때는 갑자기 전개가 빨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안에서 이 캐릭터가 겪는 사건은 거대한데 마음은 그곳으로 향하지 않으니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의’가 ‘왜?’가 되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가진 단점 중 하나가 사족이라는 말을 듣기 딱 좋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에서 김한민 감독이 진짜 전하고 싶었던 것들이 이 사족에 있다고 본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며 이런 요소들이 이순신 장군이 가진 숭고함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찾겠다는 김한민 감독의 의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령 이순신이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누군가에게 서찰을 받고 어떤 행동을 한다. 이 서찰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 인물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이순신 장군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또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떤 소리, 러닝타임 다 끝나고 올라가는 쿠키영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반복되는 소리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듯 이순신 장군의 직업윤리가 후세대에도 빛을 발했다는 것을 청각적인 요소로 보여준 것이다. 또 쿠키 영상 역시 마찬가지다. 글쓴이는 이 쿠키 영상도 역사에 대한 코멘트라고 생각했다. 쿠키 영상에서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지를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영화를 보는 폭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김윤석의 이순신
김윤석 배우의 이순신은 3부작 중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민식 배우와 박해일 배우의 이순신은 장군으로서의 위엄이 가장 중요한 캐릭터들이다. 가령 <명량>에서는 이순신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군대를 격려하는 장면에 방점이 찍혀있다. <한산 : 용의 출현>에서는 정적인 구도가 기억에 남는다. 이 정적인 구도는 영화에서 장점이자 단점이다. 멋진 박해일 배우와 진부한 플롯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작 <노량 : 죽음의 바다>에서는 정적이고 감정전달의 폭이 넓고 깊은 이순신 둘 다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에서 ‘신파극이다!’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부분이 있다. 이 부분 연기도 김윤석 배우가 보여준 역량이 아니었다면 정말 신파극처럼 보이기 쉬웠다. 그리고 김윤석 배우는 목소리 톤을 내는 방식으로도 이순신을 표현한다. 진린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런데, 일정한 톤으로 이순신의 결기를 표현하는 좋은 연기였다. 이는 아수라장인 전쟁터에서 감정표현이 드물다는 인물의 특성을 통일성 있게 끌고 가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걸 기대하고 간다면
이 영화에 대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액션이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반전이라는 테마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연출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건 김한민 감독과 (나와 같은) 일부 영화팬들의 입장이다. 당연히 이순신, 그것도 김윤석의 이순신이 멋진 액션으로 왜 나라를 해치우는 액션물을 기대하고 갔다면 실망한다. 롱테이크? 조명? 촬영? 다 처절한 병사들의 모습만 보여줄 뿐 엄청난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글쓴이는 이 <노량 : 죽음의 바다>가 대중적으로 큰 흥행을 할 영화 같지는 않아 보인다.
또 전작 <명량> <한산 : 용의 출현>에서 구사했던 간단한 플롯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김한민 감독이 두는 선택이 좀 오그라들 수도 있다. 1부는 무미건조하다. 그래서 지루하게 느끼기 쉽다. 그러나 후반부는 또 다르다. 쿠키와 엔딩이 그런데, 약간 과해보이기도 하다. 글쓴이도 이 부분은 감독이 놓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명량>에서 국수주의적 대사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김한민 감독이, 과연 이 선택 말고 다른 건 없었을까? 싶다면 글쓴이 입장에서도 ‘아니요’다. 차라리 그냥 존재만 언급하고 끝난다면 더 이야기가 입체적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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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약을 마시지 않은 자만이 웃을 것이다!
줄거리
스포일러 있음
한때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이름을 떨쳤던 매들린은 공연이 끝나고 오랜 친구이자 앙숙이었던 헬렌을 만나게 된다. 매들린은 함께 찾아온 멘빌이라는 헬렌의 약혼자를 꼬셔 결국 결혼하게 되고, 이 때문에 충격을 받은 헬렌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매들린에 대한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정신을 차린다.
그로부터 7년 후, 매들린과 멘빌 부부는 헬렌에게서 출판 기념 파티 초대장을 받는다. 매들린은 축 처지는 피부와 늘어나는 주름살에 스트레스를 받고, 멘빌은 촉망받는 박사에서 장의사로 일하며 부부 관계가 틀어진지 오래였다. 그런데 출판 기념회에서 오십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고 아름다워진 헬렌을 보고 멘빌은 마음이 흔들린다. 이 상황에 초조해진 매들린은 자신이 다니던 숍에서 소개했던 '리즐 폰 루만'이라는 여자를 찾아가게 된다.
리즐은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이십 대처럼 보이는 비결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게 하는 젊음의 묘약 덕분이라 말한다. 비싼 가격에 묘약을 마신 매들린은 다시 젊음을 되찾지만, 리즐은 몸을 아끼라며 경고한다. 집에 돌아간 매들린은 멘빌과 티격태격하다가 계단 아래로 떨어지며 사지가 부러져 죽고 만다.
그러나 더 이상 뛰지 않는 맥박에도 불구하고 리즐은 목이 돌아간 채 멀쩡히 움직인다. 리즐이 말한 약의 부작용이란 죽어도 죽지 않는 것 즉, 죽은 시체의 몸을 한 채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집에 찾아온 헬렌 역시 매들린이 쏜 총을 맞아 배에 구멍이 뚫린 채로도 멀쩡히 일어난다. 두 사람은 서로가 똑같은 약을 마셨다는 걸 알게 되고 싸우다가 옛 오해를 풀고 화해하게 된다.
두 시체는 사정을 알고 있는 멘빌에게 자신들을 고쳐달라 요구한다. 멘빌은 장의사로서의 실력을 살려 둘을 감쪽같이 고쳐놓지만, 자신은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헬렌과 매들린은 문득 자신들에게 마네킹용 스프레이를 뿌리고, 눈동자를 색칠할 수 있는 사람은 멘빌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둘은 멘빌을 리즐에게 데려가 자신들과 똑같은 약을 먹이려 하지만, 멘빌은 끝내 약을 거부한다. 가까스로 그곳에서 도망친 멘빌은 37년 후, 어떤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그의 장례식에 찾아온 두 구의 시체. 헬렌과 매들린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으로 겨우 걸어 다니며, 서로의 얼굴에 스프레이를 칠해주며 앞으로도 '살아가야 했다'.
감상 포인트
1. CG는 옛날 작품인 거 감안하고 봐야 한다. 그 시대에 이 정도 CG 면 놀라운 기술이 아니었을지.
2. 목이 돌아가고 배가 뚫리고... 잔인한 설정이지만 어색한 CG와 분장 덕분에 잔인함은 높지 않다.
3. 특별히 교훈을 주려고 하기보다는 처참한 결말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느낌이다.
감상평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는 목이 부러지거나 배가 뚫리는 등 말로만 들으면 잔인한 장면이 많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못 볼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추석 연휴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 먹으면서 보기에는 약간 거북함이 들 수도 있겠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약간 혐오감까지 불러일으키는지라... 비위 약한 분은 웬만하면 밥 다 먹고 소화 시킨 후에 보세요.(?)
아무튼, 결말이 시니컬해서 더 좋았던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 마네킹처럼 산산조각난 시체 둘이 기괴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은 허탈한 웃음조각이 목 뒤에서 툭,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결국 끝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드는 이러한 결말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멘빌의 장례식도 교훈적이거나 심오하게 들리지 않았다. '인생은 50부터'(자신이 매들린과 헬렌에게서 도망쳐 새로운 아내를 만난 나이가 50이니까), '비벌리힐스의 산 주검'(실제로 겪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했음), '결혼 상담 클리닉과 여성 연구소'(자신이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결혼 상담을 해준 것은 알겠는데 과연 여성의 무엇에 대해 연구했을까? 아마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영원한 젊음을 꿈꾸는 헬렌과 매들린에 대한 궁금증이 연구로 이어진 게 아니었을까?) 등등. 멘빌이 자신의 과거를 숨긴 탓인지 생애가 과하게 포장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멘빌의 비밀을 잘 모르는 산 사람들은, 그에게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이분에겐 그만이 간직한 영원히 사는 비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밀은 우리 가운데, 우리 마음속에 있죠.
영원한 젊음의 비밀은 바로 우리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랑하는 어니스트는 그렇게 영원히 살 것입니다."
누군가에게서 기억되는 것, 잊히지 않는 것. 그래서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것, 사랑.
뻔하디 뻔하고 흔한 이 이야기는 매들린과 헬렌의 삶을 통해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리즐은 묘약을 마실 때 매들린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약을 마시고 십 년 정도는 활동해도 되지만, 그 이후에는 반드시 종적을 감추고 묘약의 비밀을 숨겨야만 한다고. 그래서 리즐의 파티에는 앤디 워홀, 엘비스 프레슬리 등 일찍 죽거나 생사가 불분명한 유명인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에게서 잊혀야만 한다. 자신들만의 영생을 누리기 위해 탐욕을 감추고 숨어 살아야 한다. 멜빈은 약을 먹지 않고 도망친 후 자신의 삶을 살다가 죽었지만, 헬렌과 매들린은 평생 자신들이 시체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그렇게 살아야만 할 것이다. 진정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멜빈이다.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는 사실 우리에게 웃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신비의 묘약을 던진다. 그리고 진정 웃을 수 있는 자는 그 묘약이 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사람뿐일 것이다.
당신은 묘약을 마실 것인가? 웃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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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브스턴스] 끝장리뷰 |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상징 | 야자수 의미 | 오프닝, 엔딩 해석 | 결말해석 | 세 번의 탈피 | 음식과 물질 | 스탠리 큐브릭 | 두 자아
[서브스턴스](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야자수, 세 가지 색 (빨간색 vs 파란색, 노란색)
Chapter 2 물질과 음식, 세 번의 탈피
00:00 괴랄한 수작
00:31 스탠리 큐브릭
01:14 야자수
02:30 세가지 색깔
05:12 의아한 지점
06:10 물질과 음식
07:52 나vs나
08:55 탈피, 변태
09:55 별점 및 한 줄 평
10:12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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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4] 자살을 선택한 사람에 대한 세심한 접근
Rabbitgumi 입니다! 김혜수 배우가 주연한 영화 내가 죽던 날 을 보고 왔어요.
자살한 아이에 대한 수사를 종결시키기 위해 마무리 수사를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데요.
한 사람이 자살로 이르는 심리묘사가 탁월합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이 자살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사람의 믿음과 도움을 통해 보여주려 합니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좋은 드라마를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봐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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