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0-30 10:46:56
10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호불호가 갈리는 지브리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는 벌써 100만 돌파를 앞두고 있는데요. 호평과 혹평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데요 다들 보셨나요? '난해하다' '지루하다'라는 반응과 이를 반박하는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이어지면서 관객들 사이에서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관객들의 'n차 관람'까지 이끌어 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국내 박스오피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계의 대표적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작
<바람이 분다> 이후 약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개봉 첫 주말에 흥행 독주를 이어가며 1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30일>은 누적 관객 180만명을 돌파하여 식지 않는 열기를
입증하며 2위, 25일 개봉한 <용감한 시민>이 3위에 올라섰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인기 호러 게임 Five Nights at Freddy’s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는 실사화 영화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첫 티저 트레일러가 공개된 지 하루 만에 조회 수 1000만 회 및 유튜브 인기
급상승 1위를 달성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27~29일 78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다음 달 15일 공개될 예정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시골에서의 삶, 농촌, 사라져 가는 것들
<리틀 포레스트>는 좋아하는 배우인 김태리, 류준열이 나오기도 하지만 동물권 활동을 열심히 하고 계신 임순례 감독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라 더욱 기대를 했다. 개봉하자마자 냉큼 보러 갔을 정도였다. 일본 영화인 <카모메 식당> 같은 잔잔한 영화가 한국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분위기가 있어서 좋았다. 아마 원작이 일본 만화였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골에서 살다가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기 위해서 도시에 살던 혜원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갈등보다는 계절마다 밥 해 먹고, 놀고, 느끼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텃밭 정도이기는 하지만 직접 키운 농작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먹는 것은 시끄러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로망이다. 깡시골에서 살다가 이렇게 도시 아닌 도시에서 살고 있는 나와 오버랩되기도 했다.
나는 시골을 참 좋아한다. 농촌과 어촌을 꼽자면 농촌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살라고 하면 아직도 좀 무섭다. 일 때문에 출근 시간에 서울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도시의 모습과 지하철의 모습은 나에게 서울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차도 우글우글 사람도 우글우글하고, 밀려서 걸어가야만 하는 상황은 멘붕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세상 조용한 시골과 달리 시끌시끌한 도시에 나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 집은 시골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다. 내가 업어 키우던 7살 터울의 동생과 나는 자라면서 <리틀 포레스트>에 나온 농사의 대부분을 짓거나 도와봤고, 흙바닥을 뒹굴면서 자랐다. TV도 잘 안 나왔기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노는 것이 너무 당연했고, 오락기도 없어서 온갖 놀이를 창조해냈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에 참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농촌의 인구는 대체로 적은 편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1학년 때는 국민학교였는데 2학년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 때 폐교가 되었다. 폐교 당시 유치원생을 포함해서 전교생이 18명이었다. 친구가 많은 학교로 보내고 싶었던 부모님들은 폐교에 동의했다. 큰 학교인 본교로 옮기고 나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등교하려면 스쿨버스를 타고 다녀야만 했고, 빨라진 등교시간 덕분에 부모님은 새벽에 일을 하기 어려워졌다. 스쿨버스를 놓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데려다주셔야만 했다. 우리는 등굣길에서 늘 만나던 숲, 저수지, 풀, 곤충 대신 아스팔트와 도로를 만나야만 했다. 작은 학교의 폐교가 한 마을의 아침 풍경을 바꿔놓은 것이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작은 학교에 대한 폐교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사실 농촌과 환경은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다. 넓은 땅덩어리지만 좁은 수도권에 복작복작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수도권에 전기 같은 에너지가 한꺼번에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럼 그 필요한 전기는 지방에서 생성해서 보내게 된다. 이때 전기를 만들기 위한 발전소는 사람이 적은 농촌 같은 곳에 주로 만들게 되고, 환경에는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발전소 자체도 문제지만 전기를 이동시키기 위한 송전탑이 많아지는 것도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공상가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용서도 자비도 없는 범죄 액션 느와르
황정민과 이정재가 신세계 이후의 7년 만에 재회가 되면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강렬한 느와르 액션과 두 남자의 처절한 싸움 속에각자 서로의 싸움이 이해가 되는 영화.
영화 관상의 강렬한 등장 이정재가 있었다면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는 박정민이 있다!
기본 정보
장르 : 범죄, 액션, 스릴러, 느와르, 하드보일드, 피카레스크
감독 / 각본 : 홍원찬
출연진 :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개봉일 : 2020년 8월 5일
평점 : 8.54
스트리밍 : 티빙, 넷플, 웨이브, 쿠팡, 왓챠
기획 의도
태국에서 충격적인 납치 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을 끝낸 암살자 인남(황정민)은 그것이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인남은 곧바로 태국으로 향하고, 조력자 유이(박정민)를 만나 사건을 쫓기 시작한다.
한편, 자신의 형제가 인남에게 암살당한 것을 갈게 된 레이(이정재).
무자비한 복수를 계획한 레이는 인남을 추격하기 위해 태국으로 향하는데...
처절한 암살자 VS 무자비한 추격자
멈출 수 없는 두 남자의 지독한 추격이 시작된다!
여담
스토리상으로 납치 -> 추격이라는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테이큰, 아저씨, 레옹 등 다수의 작품에서 이런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스토리는 뻔하지만 카메라 워크 기술만큼 뛰어나 직접 액션에 참여하고 몰입할 수 있는 촬영기법으로 몰입감을 상승시켰다.
영화 포스터 속에 황정민과 이정재 단독 주연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박정민을 일부러 숨겼구나 라는걸 캐치할 수 있다.(강렬한 등장으로 절대 잊을 수 없는 연기력)
후기 및 결말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결말을 살펴보자면
인남은 자신의 딸을 구해냄과 동시에 유이에게 맡기며 레이와 최후의 결투를 시작한다. 레이와 인남은 혈투 중 치명상을 입게 되자 수류탄을 뽑고 둘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인남이 사전에 준비한 주택으로 유이와 인남의 딸이 향하며 이 둘의 새롭게 시작하는 모습을 그리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역시 믿고 보는 배우 이정재와 황정민의 두 사람의 연기력은 입이 아플 정도로 좋았고, 아역인 박소이의 연기력과 더불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었던 박정민이 다한 영화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한줄평 : 박정민의 연기력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보게 되는 영화.
-
- 영웅을 기다리며
영웅을 기다리며
6일에 개봉한 <드래곤 길들이기>가 3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흥행 중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15년 전 개봉한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의 인기에 힘입어서일까? 비행 장면을 실사로 멋지게 구현해냈기 때문일까? 주인공 ‘히컵’이 잘생겨서? 반려 드래곤 ‘투슬리스’가 귀여워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이번 작품의 흥행을 서사를 중심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주인공 히컵은 바이킹의 섬 버크에 살고 있다. 바이킹들은 일곱 세대에 걸쳐 드래곤과 긴 전쟁을 벌여왔다. 바이킹의 사회에서는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있는 공격성과 용맹함이 최고의 덕목으로 평가된다. 히컵은 족장 스토이크의 외동아들이지만 바이킹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다. 스토이크는 히컵이 자신과는 달리 ‘바이킹답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히컵은 ‘아버지의 인정’을 욕망하고 그로 인한 결핍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히컵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드래곤을 사냥하고, 계속된 도전 끝에 자신이 만든 무기로 미지의 드래곤 ‘나이트 퓨리’를 맞힌다. 그러나 이는 히컵이 본격적으로 보통 세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 히컵은 드래곤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드래곤에게서 두려움이라는 공통 정서를 발견하고, 드래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나’ ̄‘세계’의 이항 대립 구조에서 벗어난 히컵은 ‘자기와 같은 존재’를 죽일 수 없다. 그에게 모든 ‘세계’는 결국 ‘나’와 같기 때문이다. 히컵은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고 ‘아버지의 인정’을 스스로 포기하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토이크는 히컵에게 보편 규범 안으로 들어올 기회를 다시 내민다. 히컵이 그토록 원하던 드래곤 트레이닝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히컵은 더 깊은 갈등의 단계로 들어선다.
히컵은 친구가 된 ‘나이트 퓨리’에게 ‘투슬리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둘만의 유대를 쌓아간다. 히컵은 투슬리스와 함께할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 히컵이 드래곤 트레이닝에서 두각을 드러낼수록 주민들과 훈련생들은 그에게 동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히컵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 히컵과 그들이 꿈꾸는 이상 세계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히컵과 투슬리스의 연대가 강해지고 버크 섬 내에서 히컵의 입지가 커질수록 두 세계의 간극은 더욱 벌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히컵은 결정적인 시련에 직면한다.
‘투슬리스’의 정체가 발각되자 스토이크는 히컵을 감옥에 가두고 ‘투슬리스’를 드래곤 둥지를 찾는 일에 이용한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언제나 조력자가 있는 법. 히컵은 짝사랑하던 아스트리드를 든든한 동료로 얻고, 다른 훈련생들도 히컵을 도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선다. 아버지가 지키려던 이상 세계는 더 큰 폭력의 논리 앞에서 무너지고, 히컵은 힘의 논리를 뒤집어 연대로 맞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구해낸다. 히컵은 이렇게 ‘아버지의 인정’이라는 결핍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한다.
바이킹 부족은 최후의 적인 레드 데스를 물리친다. 히컵은 죽음의 위기를 겪고, 다리 하나를 잃지만 살아 돌아온다. 히컵은 버크 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바이킹들은 이제 드래곤을 더 이상 적으로만 보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받아들인다. 히컵은 내면적으로 완전한 성장을 이룬다. 다리를 잃은 그는 더 이상 예전의 히컵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아버지의 인정’, ‘아스트리드의 사랑’, ‘마을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며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전형적 영웅 서사이며, 주인공 히컵은 ‘평범 속의 결핍’, ‘용기와 모험심’, ‘남다른 운명’, ‘조력자와 동료’, ‘내면적 성장’, ‘희생과 책임’, ‘초월성’을 두루 갖춘 전형적 영웅이다. 우리가 이토록 전형적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한다. 세계의 폭력과 갈등 속에서, 자신만의 비범함으로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영웅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
- 내 이름은 리들리 스콧. 거장이죠
이 글은 영화 [글래디에이터 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결혼이나 승진 같은 이벤트일 수도 있고, 인생의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얻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순간이 만약 배우에게 다가온다면. 당연히 자신의 존재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역할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러셀 크로우라는 배우에게는 극 중에서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원수인 황제 앞에서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내뱉는 순간이 바로 그렇게도 기다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검투사들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모습은, 화면상에서 봤을 때 상대 배우들에 비해 비교적 작은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압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의 극 중 이름에도. 그리고 배우로서의 이름에도 남다른 무게감이 생긴 뒤에 느낄 수 있는 후광효과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후광 효과를 만들어 낸 위대한 감독 리들리 스콧에게도 [글래디에이터]는 매우 특별한 영화다. 24년이 지난 지금에도 막시무스의 이름을 들으면 전율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속편을 선보이며 자신의 이름값뿐만 아니라 영화의 이름값도. 게다가 불세출의 영웅 막시무스에게도 톡톡이 값을 치러줘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님 개연성 어디 갔어요
사진출처:다음 영화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말 잘 만든 영화라고 해도 겨우 본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그 우려(?)는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현실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1편에서 따왔지만 안타깝게도 개연성과 임팩트는 24년 전 영화에서 신나게 써 버려 이미 멸종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루시우스(폴 메스칼)의 눈에 분노가 있다고 말한다. 전쟁 중 자신의 아내를 비롯한 시민들을 잃었으니 분노의 계기는 명확하다. 그러나 분노의 방향과 깊이는 애처로울 정도로 얕아서 영화 상에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힘들다. 그나마 쌓아 올린 나노단위의 분노조차도 결국 마르쿠스(페드로 파스칼)를 경기장에서 만나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덕분에 영화의 초반부에는 이렇게 말 잘 듣는 전쟁노예가 있었던가.라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하게 한다.
초반부에서 자신의 뿌리를 다시 한번 알게 된 각성한 주인공이 후반부에는 독자적으로 "로마황제 프로듀스 101"을 찍고 있는 마크리누스에게로 칼끝을 겨누는 과정도 그다지 인상적이라거나 매끄럽지 않다.
그 연결고리로 선택한 것은 쌍둥이 황제의 존재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 해봐야 화장을 무당처럼 하는 바람에 밤에 마주치면 무섭게 보이겠다 정도일 뿐. 인간성의 잔인함을 강조하는 것 외에 주인공과 크게 관련된 이벤트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 황제의 존재 이유는 마크리누스의 귀걸이보다도 작고 하찮게 보이고, 그로 인해 과연 그만큼의 품을 들여서 이들을 없앨 이유가 있었던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진출처:다음 영화
또한 2편이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주인공의 태생적인 한계에서부터 온다.
주인공에게 고유함과 더불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막시무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루시우스는 자신의 이름보다는 아버지의 이름 덕에 조금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등장하는 극초반부의 장면은 정말 많은 정보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것도 전장을 둘러보는 막시무스를 향해 인사하는 동료 병사들의 표정으로. 그를 향한 믿음과 존경. 전우애와 의지를 꽉꽉 채운 눈빛으로 말이다.
막시무스는 촉망받는 장군이었으며 분노를 장착한 정치게임의 패배자였고. 죽음이 그를 덮친다 해도 무릎 꿇기는커녕 어서 나를 갈기갈기 찢어보라며 포효할 인물이었다. 잔인한 전투 장면이 없이도 그의 걸음걸음마다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루시우스에게 주어진 서사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너무도 옅은 데다 유약했고. 그 덕분에 루시우스는 아버지에게 그저 만담실력을 물려받은 호탕한 사람 정도로만 느껴진다.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힘이 실리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그는 로마 제국의 단 하나 남은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핏줄을 아무리 영화라지만 살해할 리는 없다.
우리는 막시무스가 그토록 살아남기를 원했고. 화면 속에서 시간이 흐를 때마다 죽어가는 그를 보며 눈물과 안타까움을 삼켰지만. 아들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온 세상 인물이 다 죽는다 해도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테니. 믿는 구석이 애초에 있는 사람의 전투가 간절해 보일 리가 없다.
거장의 장기자랑 타임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이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십분 살려내 화면과 남은 시간 가득 채워내는 것.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운 초반부가 지나고 나면 후반부에는 우리가 감독에게 기대했던 모든 장면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관객의 눈에 안긴다. 소위 "큰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가진 요소들인 거대한 스케일과 장엄한 장면에서 갖추어야 할 카타르시스들을 모조리 느낄 수 있다. 기존의 검투 장면들 역시도 작정한 듯 화려하게 준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거의 장면들은 아름답다 못해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하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독은 지구상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 밖에 없을 것이며. 그의 존재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후반부 덕에 앞부분의 불쾌함이 조금은 날아간다.
물론 영화가 주는 장대함과 압도당하는 힘이 스토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면 자체가 주는 웅장 함이라는 것은 아쉽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보상은 완벽히 가능하고. 정해진 결말로 가는 그 길마저도 조금은 기대로 채울 수 있다.
마치면서
내가 존 스노우 시절(대충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뜻) 두려움이 너를 구할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꽤 오랫동안 내겐 미스터리와도 같았다.
한낱 평범한 사람인 나 조차도 두려움을 이토록 피하고 싶은데.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버린 작품의 감독에게 이번 영화는 얼마나 피하고 싶은 과제였을까.
두려움에서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거장은 스스로가 가진 모든 "치트키"를 활용했다. 주어진 두려움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한 덕에. 이 두려움의 바다에 빠졌을(?) 거장은 뭍까지는 떠밀려 올 수 있었다.
머금은 모래를 내뱉고 따끔거리는 바닷물이 코에서 흐르는 걸 느끼며 진절머리를 쳤겠지만. 비로소 폐 한가득 신선한 공기를 마실 때는 안심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결과 또한 아마도 조금은 매콤하지만 다행인 평이될 것이다.
또한 다음번에 두려움의 바다에 빠졌을 때 무사할 행운이 다를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의 TMI]
1. 베이글 그만 먹고 싶은데 그게 안 됨
2. 아침 운동 너무 힘들다.
3. 너무 추워서 난로를 사고 싶은데 전기세가 걱정된다.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munalogi
-
- 영화를 통해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경험하고, 처연해진 삶 속 페이소스를 느끼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본인의 작품이 어떤 장르이고, 어떤 플롯을 지녔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연극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와 무대를 보여주었고, '씽씽'은 본 작품의 배경인 'Sing Sing 교도소'라는 최고 보안 감옥을 뜻하여, 영화는 교도소에 수감된 수감자들이 연극 무대를 펼치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그리 길지 않으며, 복잡하지도 않고, 러닝타임도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에 영화를 편하게 관람하기에 전혀 무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등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라는 대사처럼 영화는 종반부까지 향하는 그 영화적 방향성과 영화 속 인물들이 무언가 이루기 위해 거쳐가는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굉장히 임팩트있게 제작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영화는 관객에게 다소 희망이 될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이야기를 전하지만 동시에 이들이 범죄자임을 잊지 말라는 듯 그 한계와 거리감, 단절감을 제시하여 적당한 거리선을 유지하는 점이다.
뜨거운 온도의 공감보단 다소 차가운 공감의 온도를 사용한 영화 <씽씽>은 수감자들의 교화 과정을 연극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 그 일련의 과정과 변칙적인 상황에 따른 심정의 변화를 다루어 내어 관객을 인물에게서 인간 심리의 희노애락을 느끼게 하고, 적절한 감정선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유도하게 한다.
영화 <씽씽>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만 같다. 한 공간 속 인물들이 모두 존재하지만 대사를 던질 때면 그 인물만을 클로즈업하여 독백처럼 연출하고, 공간 속 모든 인물들을 담을 때면 점점 멀어지면서 공간을 구분짓는 벽을 드러내 그들에게 공감했던 관객에게 마치 현실을 직시하게 하듯 단절감을 상기시킨다. 마치 내화면과 외화면을 구분짓게 하는 것같은 본 작품의 영화적 기법은 영화가 희곡, 연극을 소재로 주제를 다루지만 동시에 영화 자체가 연극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상적인 부분은 지속적으로 인물의 등 뒤를 따라가거나 그들의 눈빛 방향대로 옮겨가며 촬영을 하는 식으로 촬영하고, 특히 인물들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할 때면 카메라 또한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극의 긴장감을 높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심적 불안감과 함께 성장을 엿볼 수 있게 하여 극의 깊이감을 더해간다.
영화의 초반부, 주인공 "디바인 G"와 "디바인 아이"의 사이가 좋지 않지만, 여러가지 일들이 있던 후 종반부에 들어서 둘은 결국 친구 사이가 된다. 영화는 이를 연출적으로 그리고 대사를 통해 설명한다. 씽씽 교도소에서의 수감생활이 상대적으로 긴 "디바인 G"는 타 수감자들과 친분도 있고, RTA 활동에도 진심인 것으로 보이는 반면 "디바인 아이"는 본인이 원해서 RTA 활동에 들어가 면접까지도 봤지만 지속적으로 활동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면서 그들의 행동에 의심과 불만만을 표한다. "디바인 G"는 그에게 그런 그를 '독려'하기 위해 잠깐 불러 대화를 했지만 "디바인 아이"에겐 그저 '설교'로서 받아들여져 대화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영화는 이렇게 그들이 처음으로 나눈 장면에선 각 대사 속 화자를 번갈아가면서 비추게 되고, 한 프레임 속에 인물을 동시에 두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종반부로 넘어가 그들이 친구가 되었을 때에는 지속적으로 한 프레임 안에 두 인물을 동시에 비추게 되고, 초반부 "디바인 아이"가 "G"를 비롯한 연극부원들을 흑인 비하 단어로 표현했던 점에 "G"가 '친우들'이라는 표현으로 돌리라고 했던 점을 생각하면, 후반부 "아이"가 자연스럽게 그 모두를 '친우들'이라고 칭하는 점에서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디바인 G"와 "디바인 아이"를 한 표현으로 구분지어본다면 '기적을 희망하는 자' 그리고 '기적을 의심하는 자'로 표현할 수 있다. "디바인 G"는 스스로 희곡도 작성해서 본인의 희곡으로 꼭 무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고, 연극 무대를 잘 만들 수 있도록 다른 이들을 독려하고, 이끌기도 하며 갈등이 있을 시 조율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디바인 아이"에게 연극을 하는 이유에 대해, 감옥에 갇힌 현재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한다고 전했다. 현실을 잊기 위해 연극애 매진하고,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각종 법률 서적까지 읽어가며 스스로 사면 심리를 준비한다. 반대로 "디바인 아이"는 그 모든 것들에 의심하고, 회의하며, 벗어나려 한다. 그의 첫 등장은 다른 수감자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장면이다. 굉장히 불량해보이는 그의 첫인상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연극 RTA에 들어가서도 연습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으며 그 모든 것들에 짜증만 내던 그는 "디바인 G"의 손길마저도 거부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시작해서 중반부까지 불만이 가득한 "디바인 아이"가 "디바인 G"를 만나 어떻게 감화되고, 연극 RTA에 빠져들게 되어 어떻게 교화되었는지를 다룬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영화는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연습하는 장면, "디바인 G"가 "디바인 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가석방 심사를 도와주려는 장면 등을 보여주면서 사이마다 자연스럽게 코미디 씬을 보여줌으로써 극의 진행을 매끄러우면서 동시에 흥미진진하게 이끈다.
두 인물 사이에 관해 설명한 이유는 영화가 인간의 관계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 소재와 매질을 이 둘의 관계와 연극의 성사 유무를 통해서이기 때문이고, 결국 영화는 공들여 쌓아올리는 관계성과 감정의 선을 중후반부가 되어 무너뜨리면서 서사를 풀어간다.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기까지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은 바로 "디바인 G"의 옆방 수감자이자 그와 친했던 "마이크 마이크"의 사망 그리고 "디바인 G"의 사면 심사 탈락이다. 그에게 날려오는 원 투 펀치는 그의 급소를 정확히 명중시켜 그를 무너뜨린다. 이전 장면들에서 "디바인 G"는 모든 것들에 해탈한 스님과 같이 인자한 인물처럼 보였다. 연극 무대에 늘 최선을 다하려 했고, 심사 준비도 열심히 해왔으며, 교정생활도 착실히 해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탈락되었다는 소식과 동시에 친구의 죽음은 그를 무너지게 해 중후반부 연극 RTA를 열심히 준비하는 변화한 "디바인 아이"와 달리 그의 초반 모습처럼 모든 것을 의심하고, 연극 무대마저 부질 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이 때에 재밌는 것은 "디바인 아이"가 와 "디바인 G"를 감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주객전도식 구조이다. 결국 영화는 한 명의 굉장히 신성하고, 깨끗하고, 인간의 모든 사건과 일들에 대해 해탈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정화시킨다는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모두 똑같은 인간이 모여져있는 수감소에서 각자가 처해진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이 상황과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달라지고, 오히려 주객전도가 될 수 있는 아이러니함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기적을 희망하는 것, 기적을 의심하는 것 모두 어쩌면 덧 없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넌지시 제시한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한 작품인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제일 문제로다.'라는 대사를 계속해서 들려준다. 본 대사는 햄릿이 처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대변하는 대사와도 같은데, 영화는 본 대사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며 본 작품의 전반적인 색상을 드러내는 것 같다. 바로 비극이다. 영화는 연극 RTA를 하는 즐거운 인물들을 비추면서도 그 사이에 비극을 배치한다. 열심히 준비하는 과정에서 급작스레 찾아온 검방은 인물을 더욱 초라해보이게 만들었고, "마이크 마이크"의 죽음은 연극 준비가 잠시 중단되었을 만큼 모든 이들에게 비극이었다. 영화가 이 비극이라는 소재를 가장 잘 표현해낸 방법은 바로 '창문'이다. 영화는 쇠창살에 가려진 창문을 인물간 대화하는 씬에 반복적으로 배치했고, 이 창문엔 모든 부분이 손 하나 뻗을 수 없을만큼 촘촘히 막혀있지만 한 부분만 구멍이 있어 바깥 공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화하는 중간에도 그 창문 밖 풍경을 비추기도 하고, "디바인 G"와 "디바인 아이"가 가석방 심사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후 돌아갈 때는 롱테이크로 창문과 창문 밖 풍경을 비추기도 하면서 인물들이 사회로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하는 그 심리와 씽씽 감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그모든 비극들을 창문을 통해 극대화시킨다.
영화는 처음부터 각 인물마다의 소개를 늘여놓지 않는다. 죄목이 무엇이고,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한 인물이 가장 비극에 놓여져있거나 비극에 놓일 위기에 있는 상황 직전에서야 본인의 상황을 설명한다. 아마도 그 이유의 첫번째는 작품 속 등장하는 배우들이 실제 씽씽 교도소에서 수감되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는 영화가 이렇게 함으로서 인물들과 관객들 간의 거리감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연극 준비를 최고로 열심히 하는 배우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행동에 웃기도, 슬프기도, 짠하기도 한 관객들에게 적절한 거리감을 심어주기 위해 긱 인물들의 배경사를 들려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마이크 마이크"의 배경사는 그가 사망하기 전날 밤 "디바인 G"와의 새벽 대화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그 대화 속 수감생활과 연극의 이질감과 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한 대화는 결국 그의 사망으로 인해 "디바인 G"가 연극 RTA를 부질없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영화는 등장하는 각 인물들과 "디바인 G", "디바인 아이"에 대한 관객들의 감정을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이 만들어, 결국 영화의 종반부 "디바인 G"의 출소 장면이 되어서 관객의 가슴에 해방감과 동시에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결국 "디바인 아이"의 손을 잡은 "디바인 G"는 무너진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연극 RTA에 매진한다. 이후 영화는 그가 이후로도 참여했던 무대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그의 행적을 따라갔고, 결국 그의 출소일을 마지막으로 극을 마무리한다. 끝내 맞이한 출소, 길고 긴 수감생활을 끝낸 그는 영화 <쇼생크 탈출> 속 "앤디"처럼 표호를 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웃음과 슬픔, 복합적인 감정의 휘용돌이 속 그의 눈은 눈물이 가득찼고, 그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은 채 긴 한숨만을 쉰 채 앞으로 나아간다. 그 한 숨은 필자가 최근 들어 본 영화들의 그 어떤 감정보다도 진하고, 묵직한 감정이었고, 그가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된 이유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그를 기다린 "디바인 아이"와 진한 포옹을 마친 후 그의 차에 타 그곳을 떠난다. 영화는 씽씽 교도소 창문 밖 풍경 속에 그들이 탄 차가 지나가는 것을 연출하여 촬영하였는데, 결국 영화가 만들어낸 감옥과 속박의 공간에서 벗어나게 된 그의 뒷모습을 창문을 통해 표현한 것으로 굉장히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되었다.
영화 <씽씽>이 굉장히 인상적인 이유는 관객에게 그들의 연극 공연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리허설을 보여주거나 연습하는 장면, 대사를 외우는 장면, 드레스 리허설을 하는 씬은 보여주지만 결코 본 무대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결국 영화가 막을 내린 후 엔딩 크레딧에서 보여주게 되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영화의 메시지의 반영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빈번히 등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라는 대사는 결국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로, 결과만을 기대하고, 염원하고, 기적을 바랬던 것들이 안 이루어질 수도 있고, 바라지도, 꿈꾸지도 않았던 것들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인생이라면 결과보단 결국 중요한 것은 과정이라는 것이 영화의 최종 메시지로 보여지면서, 그렇기에 관객들에게도 엔딩크레딧이 되어서야 본 무대를 보여주게 되면서 영화의 이야기를 보는 중엔 그들이 연극을 준비하고, 노력하는 그 과정에만 온전히 박수를 보낼 수 있게끔 비운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꽤 많은 분들이 영화 <하모니>, 영화 <쇼생크 탈출>을 좋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두 작품 다 많이 사랑받았고, 지금까지도 그 관심을 이어 받아 감옥 영화라고 하면 이 두 작품, 혹은 영화 <7번방의 선물>까지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감옥과 수감자의 생활을 다룬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이번 작품 영화 <씽씽>을 한번 관람해보시는 것은 어떨까 추천해본다. 필자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본 작품일 뿐더러, 수감자를 영화적으로 다루는 방식이나 그들의 생활과 교정 생활을 영화적으로 연출해내는 방법이 굉장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한번 관람해보실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
- 영화 <노웨이 스페셜(2020)> 리뷰
인간은 유사 이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 삶에 유통기한이 뚜렷이 새겨지는 순간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두려움과 절망, 그럼에도 남겨질 이들을 떠올리며 점차 무력해지는 몸뚱이를 끝끝내 움직여야만 하는 운명에 대한 비참함과 서글픔. 그리고 그 사이에 스며드는 숭고함 따위를 어찌 감히 일반화할 수 있겠나.
우베르토 파졸리니의 <노웨이 스페셜>은 죽음을 목전에 앞둔 서른네 살 창문 청소부 존(제임스 노튼)과 그의 아들 마이클(다니엘 라몬트)의 일상을 그렸다. 언뜻 보면 의젓한 네 살 아들과 자상한 아버지의 단란한 나날 같지만, 존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이 부자父子의 삶을 자꾸만 촉박하게 만든다. 특히 창문을 닦는 일조차 점차 버거워지는 존은 아들 마이클이 앞으로 살아가게 될 나날에서 얼룩을 지우는 막중한 일을 진행해야만 한다. 그는 영국의 입양법에 기반한 공공기관을 통해 적당하고 새로운 가정을 소개해주려 애쓰지만 그 일은 존의 예상보다도 힘들기만 하다.
※ 이하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배경이 북아일랜드이며 위에서 말했듯 아버지 존의 직업이 창문 청소부라는 점에서 <노웨어 스페셜>은 소외된 자들을 조명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존이 공공기관을 통해 입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작은 갈등들을 겪는 장면이 함께 있어서, 나는 영화를 감상하던 도중 켄 로치를 몇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베르토 파졸리니의 영화는 켄 로치의 것보다는 죽음을 앞둔 젊은 아버지의 심리라는 사적인 영역에 보다 집중한다.
입양 희망자에 대한 면담, 적절성 평가, 사무적인 태도 등이 비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존에겐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 쇼나(에일린 오히긴스)가 있다. 마이클을 입양하고자 하는 이들은 여럿이며 나름대로 (자신들이 믿는)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 정부가 개입해 입양 희망자들을 분류하는 것이 아주 그른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일부 들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존이 마이클의 예비 가족을 만날 때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존의 내면 변화이다. 그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입양이 무엇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대답을 해줘야만 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담는다. 또한 존은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아들의 가족을 대신 선택해 줄 만큼, 마이클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존의 모습은 그가 진실로 마이클을 사랑하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그는 끔찍하리만큼 진실된 사랑을 한 이에게만 허락되는, 가슴 아픈 성취를 획득한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존은 자신에게 닥친 허무를 수용한다. 아이에게 자신을 그저 창문닦이로 소개하면 그만이라고 말하거나, 굳이 뿌리를 알려야 하느냐고 손사래를 쳤던 영화 초반과 달리 존은 미래의 마이클이 열어볼 수 있도록 기억 상자를 마련한다. <노웨어 스페셜>은 전반적으로 톤이 일정하며, 등장인물들이 과할 정도로 오열하는 장면은 없다. 손때가 묻은 물건을 넣고, 우연히 찾은 생모의 사진을 넣는 장면조차 더욱 드라마틱하게 진행할 수 있었음에도 별달리 극적인 효과가 개입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감정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듯하다. 그저 애달픔만으로 속이 이렇게까지 상할 수 있구나, 싶은 느낌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신문 기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한다. 존의 직업이 창작에 기반한 것이라면, 나는 영화 제작진이 굉장히 영리했다고 말하고 싶다. 창문을 닦는 행위를 통해 존은 한 걸음 밖에서 타인의 삶을 바라보게 될 뿐만 아니라 유리는 그가 보지 못한 세상의 이면을 비춰줌으로써 , 존이 처한 상황과 자연스러운 접점을 형성한다. 또한 아버지 존의 이름은 너무도 평범한 것으로, 그의 슬픔이 사실 원치 않는 상황에 급작스럽게 떠나게 되는 모든 이들의 상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남기는 아들 마이클은 미카엘 천사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떠나는 이들에게 당신이 세상에 남기는 희망은 곧 빛이 되지 않겠냐며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을 꼽자면 작중 네 살 마이클의 캐릭터다. 특별히 조숙하다는 설정을 넣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예상보다 많은 것을 알며 종종 어른보다 현명한 태도를 보인다. 표현은 미숙할지 몰라도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마냥 어리게 볼 수밖에 없고, 걱정스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의 시선에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나, 마이클이라는 캐릭터를 지금보다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더욱 좋지 않았을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
- 노바디 리뷰 - 영화 노바디의 4가지 감상 포인트
-
00:00 시작에 앞서...
01:21 1. 액션
03:10 2. 사운드 트랙
04:48 3. B급 유머코드
06:03 4. 떡밥 회수
.
정말이지 착하게 살고 싶었다. 참으려고 했다.
이제 나 건드리면 X된다!
비범한 과거를 숨긴 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한 가정의 가장 ‘허치’
매일 출근을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일과 가정 모두 나름 최선을 다하지만
아들한테는 무시당하고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강도가 들고 허치는 한 번의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당한다.
더 큰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모두 무능력하다고 ‘허치’를 비난하고,
결국 그동안 참고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
-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리뷰 - 내 청춘을 꽃 피워 줘서 고마워
#꽃다발같은사랑을했다 #일본영화 #로맨스영화
여기 누구보다 잘 맞는 한 커플이 있습니다
그렇게 설레는 시간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게 아쉬움만 커져가는 연인들
이제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가장 화사하던 날의 사랑 이야기
7월 14일 개봉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입니다
-
- 영화 <리슨> 메인 예고편
가난한 이민자 출신으로 런던 교외에서 3남매를 키우며 살아가는 벨라. 어느 날 청각장애를 가진 딸의 몸에 난 멍자국이 정부 당국의 오해를 부르고 벨라의 아이들은 강제입양 당할 상황에 처한다. 자신의 가난과 남편의 실직, 그리고 딸의 장애에도 침묵하던 사회 시스템은 한 순간에 나타나 그녀와 가족의 삶을 아프게 흔들어 놓는다.
-
- 영화 <슈퍼맨> 티저 예고편
더 높이, 더 멀리! 전 세계가 기다린 영웅이 온다🦸♂️ [슈퍼맨] 티저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