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1-10 17:10:26
그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남주
허광환전엔 금성무였고, 티모시 샬라메 전엔 디카프리오였다 ⭐️ 나이가 들어도 멋있는 그시절 남주들. 제방에는 아직도 타락천사 금성무 포스터가 붙어있답니다. 마음한켠에 자리한 남주들이 있으신가요? 댓글로 공유해주세요. 눈호강 하게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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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은 그 자체로 서사 덩어리인 것을
고백한다. 나는 유행이 조금 느린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빠지는 깊이가 결코 얕진 않다. 한 번 빠지면 웬만한 분들"만큼"은 알게 된다. 이것이 치명적인 단점인데, 웬만한 사람"보다" 더 빠지진 않는다. 언제나 정도껏 빠지는 것이 문제다. 관심사는 다양한 편인데, 어느 수준 이상의 빠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이런 내가 꾸준히 해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인데, 국내든 국외든 어디든 돌아다닌다. 혼자 돌아다니는 것 하나는 정말 자신있다. 국외 여행은 많이 다녀보진 않았지만 한 번 외국 나가면 길게 나갔다 오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감질맛 나게 여행 다닐 바엔 코로나도 터졌겠다, 최근에 국내 여행을 훨씬 많이 다닌다. 뭐, 한국인인 것도 한 몫 하겠지만 그만큼 혼자 여행하는 것 너무 좋아한다.
여행을 가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갑자기 꽂혀서 가는 것이다. MBTI 확신의 P라서 가능한 일이다. 쫄보이기에 숙소와 교통편만 정해놓을 뿐 기타 아무것도 정하지 않는다. 우선 숙소에 짐부터 풀어놓고 생각한다. 그렇게 코로나 시국 와중에 경주도 한 번 돌았고, 부산은 3번 방문했으며, 거주지가 서울인 만큼 서울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또한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참 뻔한 포맷인듯 신선한 프로그램이 찾아왔다. 여행 유투버들의 여행을 엿보며 조금이라도 여행 기분 내는 프로그램 '지구마불 세계여행'이 그것이다. 연예인의 여행기는 꽤나 흔한 포맷이지만 일반인보다 조금 더 연예인스러운 유투버들을 올드미디어의 피디가 섭외했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던 걸까. 사실 그 동안 여행 유튜브릍 그리 보지 않았던 나도 이들은 누구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기에 이들의 등장이 대단한가 싶으면서도 새삼 놀랍다. 그리고 부루마불로 여행이 정해지기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효율성이라곤 1도 없는 그들의 여행이 안쓰러우면서도 세상 부럽다.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듯 빨려들어가듯이 봤는데, 각기 다른 여행 스타일도 참 눈에 띈다. 내 원픽은 원지 님인데, 아무계획 없는 여행하는 인간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 프로로 입덕해 다른 여행 영상도 봤는데 여행은 적당한 기대가 중요하고, 계획대로 되지 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오히려 즐거워지는 진리를 알고 계시는 분 같달까. 원지 님의 여행을 보고 있자면 나도 다시 불확실성의 늪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그만큼 해외 여행을 가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조금 더 안정을 찾고 가야 내가 날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여행은 불확실함 속에 날 던지는 거라지만 왠지 지금 가면 현실도피가 될 것 같다. 그래서 조금만 참아보려 한다. 정 가고 싶으면 국내라도 돌지 뭐. 내가 어디를 가는 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디를 가든 그 곳에는 각자만의 개성 넘치는 서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 장소를 가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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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악의 없는 복수에 엄습하는 공포
8★/10★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 자연은 그저 자연이다. 인간 세계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면 지탄받는다. 하지만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인간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은 다르다. 그런데 두 세계는 밀접하게 맞닿아 있고 이미 상당 부분 겹쳐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이럴 때 필요한 건 ‘균형’이다. 두 세계의 원칙이 충돌하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누른다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은, 다른 쪽 세계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충격적인 흡인력으로 펼쳐내듯이.
일본의 작은 산골 마을. 외지인들이 개척해 대를 이어 터를 꾸려온 이 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절묘하다. 마을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자연을 이용하지만 자연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무척 신중하고 사려 깊다. 정성스럽게 생수를 퍼 올려 통에 담고, 이 물로 우동을 끓이고, 가게 주인과 주민들은 우동의 특별한 맛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들이 자연과 관계 맺으며 오랜 시간 꾸려온 균형점의 단면이다.
그런 이 마을에 한 연예기획사가 글램핑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공청회가 열린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가 시작된다. 업체 측의 논리는 단순하다. 글램핑장이 들어오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어, 업체와 마을 모두가 이득을 본다. 일본의 산골 마을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어서 그런지 꽤 ‘상식적’으로 들린다. 문제는 이 상식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글램핑장 정화조 미비로 샘물이 오염될 가능성, 경비 절감을 위해 관리인 수를 줄였을 때 커지는 산불 위험, 무엇보다도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준다’는 아랫마을에 대한 책임감. 공청회를 마련한 업체 측 직원들의 표정은 점점 당혹감으로 물든다. 마을 사람들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가 공존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감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감각 그 이상이다. 공청회에 참석한 업체 직원 두 명은 마을 사람들의 주장에 감화되기에 이른다. 직원들은 마을 사람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며 사장과 컨설팅 담당자를 설득한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 바깥에 있는 것들을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기술적‧관습적‧기계적으로 자기 논리를 관철한다. 관과 결탁한 자본은 자신을 관철하는 법을 안다.
마을 사람들을 회유해보라는 지시를 받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두 직원. 그러나 둘은 오히려 점점 마을 사람, 그중에서도 마을의 심부름센터로 통하는 타쿠미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자본의 논리는 점점 그들의 마음 바깥으로 밀려난다.
이제 놀랄 만한 결말이다. 타쿠미의 딸 하나가 없어지자 마을 사람들이 숲으로 하나를 찾으러 가고 업체 직원들도 이들을 따른다. 그런데 옆에 직원 한 명만 남자 타쿠미가 그의 목을 조른다. 도대체 왜? 마을과 자연의 균형점을 깨닫는 중인 사람을, 폭력적으로 돌격해올 글램핑장 건설을 저지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사람을 도대체 왜?
자연에 선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쿠미가 말하듯, 사슴은 인간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사냥꾼에게 새끼를 잃거나 자신이 부상당하지 않은 이상. 그러나 사슴이 인간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사슴을 사냥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사슴의 복수는 사냥꾼이 아닌 인간을 향한다. 단 한 번 개에 물린 사람이 자신을 물지 않은 수많은 개를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듯 인간에게 두려움과 분노를 느낀 사슴이 혼자 남은 인간을 공격하는 건 당연하다.
타쿠미는 사슴이고, 하나는 새끼 사슴이다. 글램핑장이 계획되기 이전의 타쿠미는 인간의 편에서 자연과 균형을 찾았지만, 글램핑장이 자연을 망칠 것이 분명해진 이후에는 자연의 편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 왜 일을 꾸민 자본가가 아닌 그 하수인 혹은 이제 막 자연으로 넘어오려는 사람이 죽었느냐고 한탄해봐야 소용없다. 자연의 복수는 인간 세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은 우울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안긴다. 우울함은 늘 가장 안전한 곳에서 균형추를 자본 쪽으로 옮기려는 사람들이 높은 확률로 자연의 악의 없는 보복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라는 데서 온다. 그러나 동시에 서늘하다. 타쿠미의 소리소문없는 민첩함, 즉 균형을 되돌리기 위한 사슴의 보복이 그다음에는 어떻게 발현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서늘함은 앞선 우울함을 압도한다.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 ‘극복’하고, ‘정복’해왔다. 그래서 그 결과는?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다. 온갖 잿빛 전망이 쏟아지는데도 지금껏 쌓아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타쿠미의 살인으로 상징되는 사슴의 반격‧자연의 반격이 또다시 일어날 때, 자본이 구축한 안전한 공간이 과연 끝까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 저 서슬 퍼렇고 예측 불가능한 서늘함 앞에서? 회의적이다. 영화의 결말이 관객에게 던지는 충격과 당혹은 자본의 논리에 가까운 사람 모두가 느낄 만한 감정이다.
영화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카메라를 직각으로 세워 나무를 올려다보는(혹은 나무가 내려다보는) 장면은 인간의 지식은 결코 자연을 완벽히 장악할 수 없음을, 때때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자연의 의지에 휩쓸릴 수밖에 없음을 자연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듯하다. 사슴의 그다음 복수는 우리를 향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후 활동가든 기후 파괴자든 상관없다. 사슴의 눈에는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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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 폴 메스컬 캘럼은 즐겁고도 우울했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른 해가 넘게 살았으나 유년 시절은 삶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내 경우, 그러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부모님과 보냈는데, 부모님과 함께한 나날들은 분명 아주 소중하고, 대체로 즐겁고 행복했지만, 때때로 우울하거나 서러웠다. 내 부모님이 나를 부적절하게 해코지를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보다 좀 더 사소한 일이다. 예를 들어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짜증을 내던 엄마라든가, 내가 떼를 쓰는 것을 모른 척 하는 아버지라든가, 나는 잘 모르는 어떤 일로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아 있어서 다가가기조차 무서웠던 당신들... 이런 것들 말이다. 이것은 부모님의 잘못이었을까? 음, 여기서는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들이 왜 그래야 했을까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들을 부모가 아니라 각각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면서. 그들이 가슴에 품었을 생각이 무엇이었을지 가늠해보면서.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니 얼마쯤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 <애프터 썬>을 이런 시각으로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1. 어느 부녀의 튀르키예 여행
어른이 된 소피는 낡은 캠코더 너머로 어느 추억의 단편을 살핀다. 그 곳에는 어린 소피와 그의 아버지, 폴 메스칼 캘럼이 있다. 이혼 이후 멀리 떨어져 살던 두 사람은 모종의 계기로 인해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떠난다. 좋은 추억을 남기자고 약속하면서.
그러나 그러한 기약은 쉬이 힘을 잃고, 아버지와 딸은 시종 불안하다. 각자의 사연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2. 방황하는 자
영화 전반에 걸쳐 그들은 방황한다. 뿌리를 둘 곳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소속되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피는 밝고 명랑한 아이로 자라났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는 스스로가 누구를 사랑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남들과 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깨닫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으므로, 아이의 끝자락은 으레 그렇듯 혼란스럽고 두렵다. 그리고 외롭다.
이러한 사정은 폴도 다르지 않다.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에겐 깊은 시름이 있다. 그를 충분히 아끼지 않은 부모라든가, 사업의 실패, 이혼 그 중 일부이거나, 그 모든 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그는 우울하다. 명상과 농담 따위로 그에 저항하고자 애썼으나, 그럼에도 우울은 온다. 그의 눈에는 생의 의지는 보이지 않고, 해가 자취를 감추면 깊은 무기력함과 슬픔이 그를 잠식한다. 그는 서서히 질식해들어간다. 그 깊은 어둠에.
3. 누군가의 태양
그러나 우울증 환자라고 해서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태양이 솟아 오르듯 폴에게는 소피가 있다. 우울한 아버지도 천진한 딸아이 곁에서는 그나마 미소지을 수 있는 것이다.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소피는 폴에게 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숱한 사랑-어떤 종류의 것이든-의 실패를 겪은 그에게 가장 살뜰한 애정과 이해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소피였으므로. 그러므로 소피는 폴의 친우이자, 이해자이고, 태양이며, 그를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Queen의 'You're my best friend'의 가사에서처럼 말이다.
이렇듯 소피는 폴의 유일한 태양이자 사랑이자 벗이었으니, 그는 더 깊은 우울에 빠져 더는 헤어나오지 못하기 전에 딸을 위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없는 형편에 튀르키예 여행을 준비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4. 그러나, 해는 지기 마련이다.
폴과 소피의 여행은 얼마쯤 즐겁고, 얼마쯤 우울했다. 소피는 제게 충분히 호응하지 않는 아버지가 답답하고, 폴은 그런 딸에게 부채감 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서서히 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귀여운 딸이 준비한 생일 축하 이벤트에도 기꺼이 웃지 못한 것은 그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어서였으리라.
여행지에서 할 만한 건 다 했는데, 어쩐지 그는 무기력하다. 놀러오기는 했는데 자꾸만 잠을 자고, 늘어지고, 웃으면서도 웃음기가 없다.
5 second of summer의 'Try hard'의 가사들처럼, 소피는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폴에게는 그런 딸조차 치유하지 못할 어둠이 있었다. 우울이란 그렇다. 깊은 물 속을 허우적거리고 군중 속을 끝없이 헤매는 기분.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것이어서 타인의 눈에는 쉽게 관찰되지 않는다. 상대가 필사적으로 그것을 감추려고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생각해 보라. 어느 아버지가 딸에게 자신의 어둠을 보여주고 싶어하겠는가? 폴은 소피만큼이나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이가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5. 해가 진 다음의 이야기
여행의 마지막날, 소피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고, 폴은 다시금 우울의 품에 안긴다. 해가 부재한 그곳으로.
평생토록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던, 인생이 실패투성이라 여기던 아버지는 영영 딸과 이별하게 되었을까? 영화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막연하게, 어른이 된 소피는 캠코더 너머의 아버지를 본다. 그리고 어느 우울 너머에 서 있을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서. 그의 눈에는 얼마쯤의 애정과 연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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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폴의 결말이 어땠을지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 영화가 그것을 열어두었다면 나 또한 그러고 싶다. 그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폴과 소피가 서로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에 대해서이다. 비록 서로 상처를 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함께함으로써 행복했고 그것은 분명 어떤 의미로든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폴은 어떤 아버지인가? 우울을 빌미로 생으로부터 도망친 비겁자인가? 실패자인가? 아니,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폴은 그 모든 우울에도 불구하고 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딸이 그 나름의 삶과 사연을 만들어 나가기를 바랐다. 설령 제 자신이 부재할지라도 그 아이가 언제까지고 빛나기를 바랐으므로.
어른이 된 나는 때때로 내 또래였을 부모님에 대해 생각한다. 폴이 그러했든 내 부모님도 당신들 나름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부모면서 각각의 개인이고, 그 개인들은 각자의 삶이 있을 것인데, 그 각각은 한 사람의 것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삶을 각각 살아가면서도 그 삶의 한편을 나를 위해 내어 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유년 시절에 때때로 나를 서럽게 했던 그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어쨌건 그들이 보였던 헌신과 사랑만큼 진실된 것은 없으니까.
나는 아직 부모가 되어 보지 못했으므로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내게는 내 삶을 함께 한 몇몇 반려동물들이 있었고, 그들로 말미암아 부모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무조건적이지는 않지만 진실된 사랑을 포함한다. 때때로 미숙할지언정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나는 영화 <애프터 썬>의 폴이 소피에게 증명해 보인 사랑을 얼마쯤 원망할지언정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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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같은 우주를 떠도는 우주비행사
원작 소설을 읽었던 터라 영화가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다른 점 없이 거의 똑같아서 취향 따라 선택하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책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울림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글자가 주는 의미를 곱씹으며 인물들의 대사를 들으면 더욱 가슴에 와닿기 때문이다.
"어거스트는 태양이다.
엄마와 아빠와 나는 태양을 도는 행성이지만
난 동생을 사랑하고 이 우주에 익숙하다."
어기의 누나, 올리비아가 영화 초반에 곱씹는 이 말은 그저 관심을 빼앗겨 쓸쓸한 사춘기 여학생의 투정처럼 들리겠지만, 이 대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주인공인 어기가 좋아하는 영화는 '스타워즈'고 어기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은 우주비행사 헬멧이다. 즉, 영화는 이 세상을 하나의 우주라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아의 대사 때문에 어기를 태양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물론 영화를 보고 있는 자기 자신마저 행성이 되어 어기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이다. 태양은 밝은 빛으로 다른 행성에게 에너지를 전달해 주지만, 결코 다른 행성과 맞닿을 수는 없다. 자신이 움직일 수도 없거니와, 다른 행성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면 뜨거운 열에 타서 녹아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도사린다.
"과학 공부 필요하면 우리 집에 놀러 와."
어기는 시험 시간에 문제를 풀지 못하는 잭에게 답을 알려주는 나름의 친절을 베푼다. 그 덕분에 잭과 어기는 가까워진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태양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것 같던 행성이, 서로를 슬그머니 잡아당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집에도 놀러 가고, 점심시간에 함께 밥을 먹으며 친해진다. 하지만 어기가 가장 좋아하는 핼러윈 날에, 둘의 관계는 처참히 깨져 버린다. 잭이 자신을 흉보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 어기. 침대에 드러누워서 모든 게 싫다고 소리를 지르는 어기에게 비아는 말한다.
"왜냐하면 학교는 거지 같으니까.
그리고 사람은 변하니까.
평범한 애가 되고 싶으면 그걸 알고 있어야 해."
원래 그런 거라고. 인간관계라는 것은, 삶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라고. 어기에게만 특별히 가혹한 것 같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그렇다고. 이 말을 통해 비아는 어기가 태양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어기를 위해 늘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주는 행성은 없다. 평생 자신을 위해 같은 위치를 지켰던 가족들과 달리, 사회는 냉정하리만큼 빨리 변해버린다. 어기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다.
"진정한 친구는 찾기 힘들다."
자신을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사랑해 주었던 개, 데이지가 죽고 난 후 어기는 말 한다. 한 번에 눈에 탁, 띄어서 내 운명의 상대를 알아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여러 사고를 거치고 나서야 그 사람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기는 잭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그와 화해하기로 한다.
"부인, 어기의 외모는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
"투쉬맨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한편 툭하면 어기를 괴롭히던 줄리안은 결국 부모님과 함께 교장 선생님 앞에 앉게 된다. 자신의 태도를 합당하게 여기던 줄리안은 투쉬맨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잘못이 어기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조금 더 일찍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럴 기회가 있었다면 줄리안과 어기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줄리안이 어기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 그것을 막은 것은 부모이지만, 실은 이 사회의 시선이기도 하다.
"좋았어, 나 싸움도 했어."
"이겼니?"
"응, 그리고 있잖아. 7학년 형들이었어."
여전히 바뀌지 않는 시선에도, 어기의 싸움을 응원하고 돕는 사람들은 조금씩 늘어난다. 사회의 편견과 시선은 7학년 형들처럼 덩치도 크고 힘도 드세다. 연약한 어기로선 쉽사리 이길 수 없는 상대지만, 친구들과 힘을 합쳐 기꺼이 물리치고 손을 맞잡는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 더 강해진다.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두에게 친절해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알고 싶다면, 그저 바라보면 된다."
그래서 어기가 메달을 받는 장면은 뭉클하다. 정말 강인한 사람은 먼저 용기를 내어 다른 사람들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돕는다. 어기는 자신의 빛에 고개를 돌리고 돌아서는 이들 앞에서도 꿋꿋이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때론 다가가기도 하였다. 마침내 용기를 낸 다른 학생들은 그의 내면을 바라보고 손을 잡고 나아간다.
수많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이 멋진 우주를 비행하고자 했던 어기.
어기는 이제 자신이 태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의 비행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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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겁고도 먹먹했던 우리의 여름을 추억하며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알카라스의 여름>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달콤하지만 쓰디 쓴 계절이 있다.
사랑스럽고 애틋하지만 아프게 느껴지는 계절이 있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지닌 여름을, 그리고 유난히 더 뜨겁고 먹먹한 여름을 보내게 된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농사 뿐이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따사로운 해가 내리쬐는 작은 마을 알카라스에 사는 솔레 가족은 3대째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다. 매 여름마다 이들은 복숭아 농장에 모인다. 어른들은 복숭아를 수확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쓰고, 어린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을 돕거나 자신들만의 놀이를 찾아 신나게 즐기곤 한다. 하지만 마냥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곳에도 그늘은 존재하는 법. 이 대가족은 크고 작은 갈등과 다툼을 계속 겪고, 또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농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농사를 계속 이어간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농사뿐이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꿋꿋이 복숭아를 기르고 수확하며 그들의 여름을 이어나간다.
영화를 보며 '공감'을 참 많이 했다.
특히 친척들이 모이면 흔히 보이는 모습들을 영화 곳곳에서 발견해서 참 반가웠다.
친척들이 모이면 항상 어린 아이들은 허공을 향해 총을 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게 공격 받지 않기 위해 냅다 몸을 피하거나 하는 등 자신들만의 놀이를 하곤 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함께 대화하거나 일을 하곤 한다.
그러다 어른들은 의견 충돌로 인해 다툴 때도 있다. 이 일로 인해 먼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이 생길 때도 있는데, 이때 잘 놀고 있던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더 같이 놀지 못하고 빠르게 이별하곤 한다.
이런 모습들이 모두 내가 어릴 때 지켜보고, 또 직접 겪었던 일이어서 새삼스레 반가웠다.
이 영화는 꾸준히 복숭아 농장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음을 알려준다.
예전부터 복숭아 농장을 지켜온 할아버지는 주변 농부들이 모두 헐값에 농장을 팔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기도 한다.
그리고 가족들은 모두 점차 사라져가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 농장에 관한 이야기를 할아버지 앞에서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남몰래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한다.
가족 모두 이 농장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농사 뿐'이라고 말하며 유난히 더 이 농장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더더욱 열심히 지키려고 했던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이 집안의 장남인 '키메트'는 영화의 끝부분에 결국 눈물을 보인다.
키메트는 복숭아를 옮기다가 한 박스를 실수로 쏟았는데, 마구잡이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복숭아를 줍다가 펑펑 울어버린다.
딸과 아들은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아마도 이 눈물은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이 복숭아 농장을 지키고 싶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씁쓸함과 슬픔, 버티고 버텨봤지만 이겨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힘듦 등의 복잡한 마음이 엉켜 있는 상태에서 터져 나온 아우성일 것이다.
대형유통업체의 부당한 가격 제시에도 농부들이 모두 다같이 분노하고 시위에 참여하며 외부의 위협에 항상 용감하게 맞서왔지만, 결국 복숭아 농장은 철거된다.
영화의 마지막, 하나둘씩 쓰러지는 복숭아 나무들을 어른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옆쪽에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싱그럽고 열정 가득하지만, 동시에 씁쓸하고 위태로웠던 여름은 그렇게 저물어간다.
한 계절이 지나간다는 것은 슬프지만 마냥 비극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삶의 터전을 떠나는 것이, 매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복숭아 농장과 그곳에 담긴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과거의 일이 된 것이, 고군분투해서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지켜내지 못한 우리 가족의 여름이 참 슬프지만 그 다음을 향해 새로 또 도약하면 된다.
이 대가족의 여름은 남들보다 유난히 더 짙고 뜨거웠지만, 늘 그랬듯이 또 다른 여름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또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난 내 땅을 위해 노력해요
단단한 땅,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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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하면 잘했어.
한계를 뛰어넘어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운동하면서 이젠 도저히 못하겠다 싶을 때 마지막 한 세트를 더 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뿌듯하진 않았다. 항상 나는 운동은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플레쳐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 '그만하면 잘했어.'는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나는 채찍보다 당근을 좋아하고 밑어붙이는 것보다 쉬어가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내가 정체되어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죽도록 노력해서 성장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기도 한다. 아주 잠시.
플레쳐는 존경받기 힘든 인물이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그에게 한 번도 가르침을 받아 본 적 없는 저 멀리 객석의 관객들 아닐까 싶다. 그의 외향에서부터 칼같이 지키는 시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 가정사를 이용한 비난 등은 사람이 저렇게 못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나다. 첫 등장부터 천재의 느낌이 풍겨지는 앤드류에게 플레쳐는 '엄마 채찍'을 사용한다. "그러니깐 엄마가 도망가지"라는 말을 서슴없이 뱉고 "호모 새끼"라는 말은 그가 비난을 퍼부울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런 비난이 도대체 무슨 교육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앤드류는 성장한다. 하지만 그 성장은 집착하고 광기를 보이는 부적절한 성장이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빠른 비트의 드럼 소리가 들린다. 드럼 소리는 꽤 지속되는데 그 소리가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또 플레쳐가 화내고 비난을 퍼붓는 장면, 앤드류가 피를 흘리며 드럼을 연습하는 장면은 웬만한 스릴러 영화보다도 사람을 압도시킨다. 극한으로 치닫는 앤드류와 드럼 소리들은 영화 <매드 맥스>를 볼 때랑 비슷하게 긴장됐다.
후반부로 가면 플레쳐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나 싶은 장면이 있다. '그도 사연이 있겠지', '역시 엔딩은 해피겠지.' 하지만 플레쳐는 플레쳐였다. 그래도 나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학생에게 복수하는 모습이 못나 보였다. 그렇지만 복수로 인해 영화를 보는 내내 부인할 수 없던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앤드류의 광기를 볼 수 있었고 그렇게 탄생한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은 가히 명장면이었다.
영화 중간에 플레쳐가 자신 때문에 자살한 제자의 CD를 들으며 운다. 그가 우는데 속으로는 '나약하고 허접한 자식'이라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플레쳐가 극성맞은 자식 교육에 열렬한 어머니 같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후에는 음악에 미친 사이코패스라고 그를 정의했다. 자신은 정당한 일을 했는데 그걸 견뎌내지 못한 사람은 나약한 사람일 뿐이라고. 찰리 파커는 심벌즈에 목이 잘릴 뻔했지만 그걸 이겨내고 최고가 됐다고. 많이 들어본 잔소리 레퍼토리다.
참 답답하다. 찰리 파커는 그랬을지 몰라도 나는 다를 수 있단 걸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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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요즘 시대의 자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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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을 공부하던 스물아홉 율리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찾아 세상으로 나온다.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진 율리에,
하지만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걸 원했고 조금씩 어긋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율리에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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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스트> 예고편
당신이 알던 세상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 롱레이크, 어느 날 강력한 비바람이 몰아친 뒤, 기이한 안개가 몰려온다.
데이빗은 태풍으로 쓰러진 집을 수리하기 위해 읍내 그의 어린 아들 빌리와 옆집 변호사 노튼과 함께 다운타운의 마트로 향한다.
하지만 데이빗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는 도중 동네 노인이 피를 흘리면서 “안개 속에 무언가가 있다!!” 뛰쳐 들어왔다.마트 밖은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체 불명의 안개로 뒤덮혔고, 정체불명 거대한 괴생물체의 공격을 받는다.
마트 안에는 주민들과 데이빗, 그의 아들 빌리가 고립되었고, 지금 밖으로 나간다면 모두 죽는다는 미친 예언자가 그곳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다.
몇 시간 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괴물들의 등장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살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과연 그들 앞에 펼쳐진 것들은 인류의 재앙일까?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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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효자> 메인 예고편
저 세상 엄니가 ‘좀비’로 돌아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친 태풍 소식에 5명의 형제들은 함께 산소를 찾아간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 부서진 관 사이로 엄마의 시신이 온데간데 사라졌다? 알 수 없는 기막힌 상황에 집으로 돌아오자 ‘좀비’로 변한 엄마가 이들을 기다리는데! 이렇게 된 이상, 본격 효도에 들어간다! 불효자들의 좌충우돌 효도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