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3-11-13 22:49:47
고독정식보단 시끌시끌 투게더지
영화 '더 마블스' 리뷰
쓸쓸한 고독정식을 먹는 것보단 시끌시끌하지만 투게더가 더 보기 좋다는 걸까. 솔로보다 팀이 낫다고 '더 마블스'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너무 재미없고 유치하게 풀어낸다는 게 아쉽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페이즈 5의 3번째 영화이자 캡틴 마블의 두 번째 실사영화인 '더 마블스'는 우주를 지키는 최강 히어로 캡틴 마블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가 초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모니카 램보(티요나 팰리스), 미즈 마블 카말라 칸(이만 벨라니)과 위치가 바뀌게 되면서 의도치 않게 새로운 팀플레이를 펼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실 캡틴 마블 캐릭터 설정이 다른 캐릭터들보다 압도적인 능력치를 지닌 '먼치킨'에 가깝기 때문에 재밌게 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크리족 리더이자 빌런인 다르-벤(자웨 애쉬튼)이 자신의 나라 할라를 구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템 퀀텀 뱅글과 그로 파생된 점프 포인트 여파로 캡틴 마블, 모니카 램보, 그리고 미즈 마블이 서로 엮이게 되는 스토리로 밸런스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풀버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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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듄: 파트 2 | 일말의 부조화까지 삼킨 모래 폭풍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황제'와 하코넨 가문의 모략으로 인해 멸문한 아트레이데스 가문. 하지만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폴'(티모시 샬라메)은 반란군 프레멘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와 사막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한다. '챠니'(젠데이아)에게서 프레멘의 생존 방식을 배운 폴은 프레멘 전사인 페다이킨이 되어 '폴 무앗딥'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그 이후, 그는 하코넨 가문에 대항할 테러 작전을 이끌어 나간다.
그런 폴을 보면서 프레멘은 그가 그들이 기다려 온 외부 세계의 구세주, '리산 알 가입'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비극적인 미래를 예견한 폴은 프레멘의 기대를 저버리려 하지만, 전황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황제와 하코넨 가문이 잔혹한 암살자 '페이드 로타'(오스틴 버틀러)를 보내 프레멘에게 잔혹한 반격을 가했기 때문. 이에 폴은 끝이 정해진 운명을 따를지, 새로운 길을 개척할지 기로에 선다.
<듄>을 지탱하는 두 축
소설의 영상화는 항상 두 가지 난관에 부닥친다. 제작자는 소설 속 세계를 어떻게 보여줄지 머리를 싸맨다. 독자의 상상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압도하는 광경을 보여줘야 하니까. 각색도 고민거리다. 주인공의 서사와 변화를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분량이 한정된 가운데 원작의 여러 장점 중 몇 가지에만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이 그 예시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호빗> 트릴로지는 중간계를 스크린으로 옮겼다는 극찬을 받았다. 반면에 아마존 프라임 시리즈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는 같은 시기에 방영한 <하우스 오브 더 드래곤>에 밀려 조용히 잊혔다. 시각효과는 환상적이었지만, 갈라드리엘을 비롯한 주요 인물의 서사가 원작으로부터 동떨어져있다는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듄>(2021)은 호사를 누렸다. 할리우드 대표 비주얼리스트 드니 빌뇌브가 사막으로 가득한 아카리스 행성의 온도, 습도, 채도까지 재현해 냈다. 원작 팬답게 핵심만 뽑아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데도 성공했다. '구원자가 되는 운명을 의심하고 경계하나 결국 몰락할 영웅 서사'의 기반을 착실히 닦았다. 그 덕분에 팬데믹 중에 개봉한 <듄>은 극찬 속에 월드와이드 4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듄: 파트 2>(이하 <듄 2>)도 마찬가지다. 외려 형보다 나은 아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볼거리는 더 화려해졌고, 폴의 이야기는 심오해졌다. 단, 의외의 문제도 있다. 확신 가득한 빌뇌브의 영상과 의심 가득한 폴의 서사가 간간히 충돌하기 때문.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협화음은 도리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끌어올리고, 그렇게 <듄 2>는 막을 내린다.
절대 눈길을 뗄 수 없도록
<컨택트>와 <블레이드 러너 2049>로 비주얼을 인정받은 드니 빌뇌브. <듄 2>에서도 그의 솜씨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일례로 빌뇌브는 위성사진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구도를 애용하는데, 이번에도 같은 구도를 적극 활용해 전투씬처럼 인원이 많은 장면에서 스케일을 강조하고, 웅장함을 살려냈다. 한스 짐머의 서정적이고 장엄한 OST가 고막을 울리는 가운데, 아이맥스 스크린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의도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대상의 크기를 비교해 위압감을 극대화하는 구도도 인상적이다. 페다이킨의 스파이스 채취 기계 기습, 황제 군대와 폴 군대의 전면전, 황제의 아카리스 행성 도착 장면이 대표적이다. 앞에 서 있는 군인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하베스터, 모래벌레, 황제의 우주선은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여기에 템포를 한 두 박자 쉬고 상황이 전개되는 연출이 더해지면 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해 제시하려는 노력도 독특하다. 일례로 페이드 로타는 '검은 해'가 뜬 검투장에서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생존자들과 싸운다. 흑백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싸움은 아트레이데스 가문과 하코넨 가문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환기한다. 정의와 신뢰를 중시하며 백성을 아끼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돈과 폭력으로 충성을 강제한다. 특히 후자의 잔인함과 야만이 흑백 화면 덕분에 더 날 것처럼 느껴진다.
클로즈업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듄 2>는 할 말이 많다. 예언을 둘러싼 폴, 챠니, 레이디 제시카의 삼각관계를 풀어내야 한다. 황제와 하코넨 가문의 대립과 베네 게세리트의 계략, 마지막으로는 폴과 황제의 전쟁도 보여줘야 한다. 이에 영화는 배우들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하며 이야기의 흐름을 암시한다. 그 덕분에 주인공들의 표정 및 목소리 톤 변화만으로도 <듄 2>는 로맨스, 정치극, SF, 에픽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도화선에 불 붙이는 액션
<듄 2>의 러닝타임은 전편보다도 10분가량 더 긴 166분이다. 그런데 체감 길이는 전편보다 짧다. 템포가 느리고 진중한 분위기가 돋보인 전편과 달리, 대중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기 때문. 전편이 세계관과 설정을 설명하며 판을 깔아준 덕분에 <듄 2>는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는 듯하다. 전편이 기승전결 중 '기승'을 맡았다면, <듄 2>는 '전결'만 맡은 형국이다.
차이는 액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정적이었던 전편에 비해 <듄 2>는 곳곳에 액션씬을 배치해 템포를 계속해서 끌어올린다. 당장 폴 일행과 하코넨 군인 간의 추격전이 시작부터 등장한다. 이 도입부는 빌뇌브의 전작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에서 CIA가 밀수 땅굴을 이용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제압하는 액션씬을 연상시킨다. 팽팽한 긴장감을 자랑하며 관객을 곧장 아카리스 행성으로 초대한다.
그 이후에 영화는 폴의 페다이킨 수련 과정, 프레멘의 테러 공격, 하코넨의 보복 작전을 연달아 보여주며 장작을 착실히 쌓아 올린다. 뒤이어 폴의 군대가 황제군을 급습할 때 장작에는 마침내 불이 붙는다. 폴과 그의 추종자들은 모래벌레를 타고, 또 모래 폭풍을 뚫고 돌격한다. 이 클라이맥스는 <반지의 제왕>이나 <스타워즈> 시리즈의 전투씬에도 밀리지 않는 스케일과 박력을 자랑한다.
이때도 스펙터클에 주도권을 내주지 않고, 관객을 감질나게 하는 빌뇌브의 연출법은 유효하다. 일례로 전투 시퀀스는 의외로 짧다. 부대 차원의 전략적 움직임과 각 주인공의 활약상을 보여준 후 곧장 드라마 파트로 되돌아간다. 전투의 거대한 규모와 세밀한 묘사를 고려하면 분명 아쉬움이 남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순간의 임팩트는 극대화된다.
의심하는 영웅, 폴 아트레이데스
화려한 볼거리를 토대로 <듄 2>는 전편이 암시한 폴의 서사도 한층 구체화한다. 폴 아트레이데스는 신화적인 영웅상을 답습한 캐릭터다. 그에게서는 여러 영웅의 모습이 보인다. 예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자기 손으로 예언을 실현하고, 비극을 맛본다는 모티브는 오이디푸스와의 공통점이다.
뛰어난 영웅과 초인의 폐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다윗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억압받는 민족을 구해낸 후 왕좌에 앉은 메시아. 그는 주변 종족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왕국의 위세를 드높인다. 하지만 영광은 잠시 뿐. 구세주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추종자, 왕국마저 고통에 빠트리고 만다.
핵심은 그가 실패하고 몰락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이다. <듄>의 분위기가 일반적인 판타지, SF 작품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영화는 예언 속 영웅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영웅의 인간적인 결점을 부각해도 이들의 활약상은 끝내 대체적으로 평화롭고 밝은 장조 화음으로 귀결된다. 반면에 예언과 초인을 경계하는 <듄>은 음울한 단조 화음과도 같다.
<듄 2>에서는 이 단조 화음이 더 또렷하고, 풍성해진다. 폴이 프레멘의 구세주로 거듭나는 순간만 봐도 그렇다. '생명의 물'을 마시고 '퀴사츠 해더락'으로 각성한 폴에게서는 음습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온다. 북부와 남부의 모든 프레멘을 휘어잡는 연설도 전율이 일지만, 불편하다. 개인의 복수와 공동체의 생존 사이에서 선틀 타며 숱한 죽음을 유발하는 독재자 같기 때문. 자연히 그의 승전도 마냥 즐겁지는 않다.
확신과 의심의 부조화
이처럼 <듄 2>는 영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두 톱니바퀴를 멋지게 구현해 냈다. 빌뇌브는 확신 가득한 붓칠로 머릿속 상상을 스크린 위에 펼쳐 놓았다. 메시아가 될 운명과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는 폴의 이야기도 더 명확해졌다. 그런데 이 두 축은 빌뇌브 특유의 스토리텔링 때문에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빌뇌브는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인물을 크게 두 분류로 나누는 경우가 잦다. <듄 2>에서는 챠니를 모든 인물의 반대편에 위치시킨다. 챠니는 구세주가 아닌 인간 폴을 사랑하고 또 상징한다. 그래서 그녀는 종교적 광기를 퍼뜨리는 레이디 제시카와 폴의 추종자가 된 프레멘에게 유일하게 맞설 수 있다. 달리 말해 챠니의 관점에서 폴의 여정을 따라갈 때, 관객은 단순한 영웅이 아닌 폴의 고통과 선택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 대신 챠니는 필연적으로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폴이 구세주로서 아버지의 복수를 완수하는 순간이 클라이맥스이기에 이질감은 더 짙다. 관객을 압도하는 연출과 시각효과도 챠니의 우려와 실망에 동조하기 힘든 분위기를 강화한다. 폴의 서사가 강조되고, 빌뇌브가 구현한 비주얼이 생생해질수록 챠니의 위치와 역할은 역으로 모호해지는 셈이다. 폴과 페이드 로타의 최종 결전에서도 그녀 때문에 분위기가 일순간 깨지기도 한다.
문제는 <듄 2>를 한 편의 독립적인 영화로 볼 때, 이 균열이 미처 가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폴과 챠니의 로맨스를 부각해 가교를 만들려는 노력도 충분치 않다. 이들의 로맨스가 그저 원작 내용과 전개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인상이 짙기 때문. 다른 플롯에 밀려서인지는 몰라도, 운명 외에 둘이 사랑에 빠지는 계기나 과정은 다소 간략하게 제시될 뿐이다. 배우 개인의 역량도 이 난점을 극복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아직 정점은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듄 2>의 부조화는 다음 이야기를 더 기대하는 원동력이 된다. 독립 작품의 관점에서는 완성도 문제이지만, 시리즈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장점이기 때문. 소설에서 폴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추방자가 된다. 이 전개를 따를 경우 <듄 2>의 미묘한 균열은 그 자체로 메시아의 패망을 암시하는 강력한 복선이다. 폴이 아니라 챠니가 엔딩을 장식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듄: 파트 2>는 속편이자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완벽에 가깝게 이행한다. 아카리스 행성의 사막 속으로 관객을 빠트리고, 메시아의 탄생을 목도하는 경외심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그의 몰락마저 기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까. 운명을 피하려고 애쓰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폴 아트레이데스의 세 번째 서사시가 언제쯤 찾아올지 궁금할 따름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빌뇌브 표 묵시록의 변곡점. 정점 일보 앞에서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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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TAR 타르' 리뷰
현대인들이 뒤집어쓴 얼굴 이면에는 직업인의 자아와 자유인의 자아가 있다. 직업인의 자아가 만들어진 건 일이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면서부터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 그 이상의 가치가 일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어야 했다. 일은 인간의 숙명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노동의 지위는 올라갔다. 노동은 노력으로 성취해 낼 수 있었다. 특정 직종의 면허, 자격증, 인증서는 그러한 노력의 징표다. 노력은 단순하고 당연한 진리를 내포한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 없는 성질은 설명이 불가하기에 경외하게 된다. 천재성에 놀라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일하는 모습에서 자기표현의 경지를 맛보기 때문이다. 일이라는 건 원래가 반복적이고 의미 없는 일상인지라 그 이상의 요건을 달성하면 일종의 상징이 된다. 달인의 몸놀림에 경탄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아함, 그 이상의 카리스마. 타르의 몸짓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그러했다. 마에스트로의 지휘를 실제로 가까이 보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커리어나 능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위대한 직업인들의 면모에는 공통점이 있을까? 공통점을 정리하면 그들과 같이 설 수 있을까?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적용이 가능할까? 특정 장면에서 타르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부드럽게 본인의 의견을 주장하는데 좌우로 넓게 팔과 다리를 뻗고 대화를 나눈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 자세에서 이 영화의 무게중심이 온전히 느껴졌다.
리디아 타르는 자신의 지휘 경력에 중대한 변곡점이 될 교향곡 리허설에 들어간다. 그녀는 커리어와 능력 어느 면으로 보나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첫 여성 수석 지휘자로 얼마나 다양한 곡을 지휘했는지 셀 수도 없다. 무대와 스크린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기도 해서 4개의 주요 엔터테인먼트 수상식에서 모두 수상하기도 했다. 후학 양성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자서전 출간과 함께 콘서트를 준비하는 바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한다. 철옹성 같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는 건 작은 틈새로 스며드는 물방울이다.
리허설 현장을 기록한 과정들은 단적으로 그녀가 얼마나 놀라운 실력을 가진 사람인지 보여준다. 인터뷰 장면부터도 그랬지만 지휘, 심사, 의사소통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다. 언어를 뒤섞어가며 표현해내고자 하는 정확한 음과 리듬을 짚어내며 지시한다. 그녀는 일련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유별나게 괴팍하거나 괴상하게 특이점을 짚어내지는 않는다. 다만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작곡가들이 악보에 남겨둔 단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휘자가 해석을 하는 과정은 적극적으로 악보의 여백에 뛰어들어 빈틈을 채워가는 일에 가깝다. 타르는 본인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행동에 거침이 없다.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되기에 거침없는 행동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용인되는 것은 오롯이 그녀가 그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마에스트로의 자리에 올려놓은 건 '카바너',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사람이 날카로워지면 불안해진다. 의도는 바늘과 같다. 찌를지 꿰맬지 결정해야 한다. 타인이 원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다는 건 일단은 고지에 올라있는 것이다. 그 이점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린 일이다.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활용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해석은 주관의 소관이니까. 상대방을 내 속도로 잡아당길지 맞춰갈지 정해야 한다.
음악은 시간을 다룬다. 음악을 핵심 소재로 다루는 영화에서는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을 집중해서 보면 좋다. 정해진 시간 내에 각각의 음이 저마다의 속도로 이어져야 비로소 음악이 된다.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지휘자가 시작과 끝을 선언한다. 또한, 그들이 메트로놈과 다른 이유는 템포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도를 올리거나 내려서 각각의 소리를 유기적으로 밀고 당기며 감정을 자아내는 일은 전적으로 지휘자의 몫이다. 신의 존재를 모방하는 형태로 지휘자는 음악을 통해 그 권한을 시험한다. 영화의 중간중간에 신성을 다루는 비유를 통해서 이런 관념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음악의 바깥에는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이 놓여있다.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 잠시 멈추거나 두 배로 감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통제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타르는 무너진다. 옆집 노인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돌아가거나 멈출 수 없어서 도망친다. 도피처는 중요치 않다. 무엇으로부터 도망갔는지가 중요하다. 음악 바깥에는 리허설이 없고 해석해야 할 여백은 너무나도 넓다. 매 순간순간 자신만의 능력으로 의도를 파헤쳐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 앞에 거장은 없으니까.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없으니 의도 또한 없다. 해야 하는 일은 정해지지 않았고 추측은 무의미하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 궤적을 충실하게 채워갈 뿐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할 뿐이다.
인성과 능력의 연관성을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 우린 둘 중 어느 것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직업인의 자아나 자유인의 자아나 불안정한 건 매한가지니까.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한 인간상이 정해지는 건 이 현실 세계 속에서는 비현실적인 일이다. 두 자아상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드는 감상이 인간의 면모는 아닐 것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TAR 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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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나를 위한,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가
하나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사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잘 나오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매 화의 대사 하나하나가 공들여 쓰여졌다는 게 느껴지는 드라마 정말 오랜간만에 찾았다. 어느 대사 하나 예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은데, 최소한 나에게는 너무나 취향이다. 그래서 난 이 드라마가 너무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덕질하자고 꼬셔보려고 한다. 과연 내 구구절절한 글로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1. 폐부를 찌르는 대사의 향연
이 드라마의 장르를 나눠본다면, 휴먼 80/로맨스 20 정도가 될 것 같다.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 드라마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관계에 대한 고찰이 너무 잘 느껴지는 드라마이다. 관계가 가진 성질은 다양해서 가족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연인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동료와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연인 간의 관계의 실패로, 질투와 시기가 난무하는 동료와의 관계 등으로 관계 자체에서 염증을 느끼는 두 남녀, 구씨와 미정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추앙"을 시작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새로운 사람에게서 치유받고자 하기 위함일까. 결국 인간은 사람에게 질리면서도 사람 간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대사 하나하나에서 내 인생을 돌아볼만한 묵직한 대사들이 많았다.
“싫을 때는 눈 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말을 걸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을 들어줘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 내야 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나도 그런데.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두시간 되나? 나머지는 다 견디는 시간.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이 대사가 내가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든 폐부를 찌르는 대사였다. 처음 만나서 어색함에 아무말이나 해야 할 때, 상대가 하는 말도 아무말이구나 싶을 때, 이 어색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오는 현타. 그리고 그 상황이 종료되고, 한창 말 잘하고 나와서 '내가 그런 말을 하고 나왔지. 쓸데없는 말이었는데."하는 자책에서 비롯된 두 번째 현타. 구씨의 대사에서 이런 내 모습이 투영되어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요 근래 내 자신을 왜 좋아할 수 없을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어서 이런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한 대사에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남이 하는 이야기가 가끔 지칠 때가 있다. 그들의 일방적인 이야기에 지치면, 그 지친 감정은 곧 짜증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리곤 후회한다. 그 사람은 이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을 텐데,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저 들어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또다시 미안해진다. 내 이기적인 마음을 비판하며, 또다시 나는 나를 미워하게 된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으면서 남을 비판했을 때, 내가 나에게 느끼는 위선적 혐오감, 나는 오늘도 마음으로 삭히지 못하고, 또 감정을 표출해내고야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내 말을 들어주느라 지쳤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하나의 인간 관계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불안함. 그렇게 쿨한 척 하지만 한없이 소심한 내 자신에 대한 끝없는 자책. 이 생각의 잔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을 싫어하고, 인간에게서 내 자신을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인간들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신경쓰는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 결국 나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인간을 상대하는 게 힘들어서 인생은 혼자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결국 온전히 혼자서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완전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공허함을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대사를 통해 '맞아, 나도 그런 비슷한 느낌 받았었어'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좀 덜 외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2. 왜 하필 추앙일까.
계속 궁금했었다. 왜 작가는 연애하자는 말을 추앙이라고 바꾸어 표현했던 것일까. 처음에 이 대사를 들었을 때, 읭?하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때의 그 의문스러운 느낌 때문에 많은 뇌피셜 해석들을 찾아봤었는데,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들어갔다고 해석하신 분들이 꽤나 많았었다. 그 해석에 대해 많이 동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세계관이고 뭐고 그냥 단순하게 해석해서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 기분이 왔다갔다 하는 것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내가 좋으면 그냥 좋다고 표현할 거라는 대사에서 이 추앙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미정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신선하고, 미정이라는 캐릭터의 걸크는 여기에 핵심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 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이리저리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거 말고, 그냥 나는 그 때 상황에 맞추어 내가 하고 싶은 감정적 표현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존감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미정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술에 절어사는 상대(구씨)를 바꾸려 들지 않고, 그저 좋아한다는 표현, 그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미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시작한다는 개념이 너무 신박하다고 느껴졌고, 그런 담백하지만 묵직한 표현을 통해 구씨가 미정에게 스며드는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우면서 보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싫어도,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 명의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살 만해진다는 미정의 말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 간의 섹슈얼한 관계가 아니라 나를 응원하는 사람의 존재 덕분에 나는 오늘도 버틴다는 메시지가 너무 가슴 따뜻해진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인 로맨스는 참 많지만 내 영혼을 보듬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다. 나의 경우,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나부터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사랑해보는 연습부터 해봐야 겠다. 나는 그런 경험이 전무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치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나를 구원할 한 사람은 필요하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너무나 침체되어 있음을 느끼기에.
요근래 참 나에 대한 고찰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 나는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생각을 단순화시키려고 한다. 그냥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해야겠다. 남을 신경쓰지 않는 척했던 과거를 지나 정말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3. 삶이 힘든 그대에게
지금 이 시각,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아무래도 열린 결말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하수구에 떨어질 뻔한 위기의 동전을 구하고, 편의점에서 샀던 술을 노숙자에게 준 걸로 봐서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고, 새로운 챕터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가 화류계를 떠나고, 정말 술을 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술을 끊는 첫 스텝은 밟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구씨는 조금씩 미정의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을 거다. 아무래도 작가님은 각자가 원하는 결말을 알아서 상상하라는 의도로 그런 결말을 내신 것 같으니,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내련다.
삶이 힘들고, 연애가 지치고, 친구 관계도 염증이 날 때, 미정의 상황, 기정의 상황, 창희의 상황에 감정 이입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는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보시기를 추천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통해 내 안에서 답을 내지 못한 답답함을 뚫어내는 잔잔한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해방일지에 스며들며, 이들의 말에 공감하며, 이들의 캐릭터가 대단히 성공하지는 못해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 드라마 속 모든 캐릭터들을 "추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응원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응원, "추앙"을 받고 싶다. 그렇게 여러분들도 세상의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추앙"받는 삶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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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쓸듄잡
벌써 가물가물한 <듄>. 용어만 복습해도 다가오는 <듄: 파트2> 이해 완!
에디터 AMY가 말아주는 알쓸듄잡 핵심용어.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캐노퍼스 항성계의 세 번째 행성. 물 한방울 나지 않는 모래행성으로 듄의 주요 무대.
우주의 주요 세력 중 하나이자 초능력자 집단.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인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듄 세계관에서 가장 잔인하고 포악한 가문. 황제에게 아라카스의 채굴권을 넘겨받아 엄청난 부를 축적.
아라키스의 자유민 부족. 젠수니 방랑자들의 후손으로 사막에 살고 있다.
논리적인 사고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람들. '인간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아트레이데스 공작가의 투피르 하와트와 하코넨 남작가의 파이터 드 브리즈가 멘타트다.
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캐노퍼스 항성계의 세 번째 행성. 물 한방울 나지 않는 모래행성으로 듄의 주요 무대.
'샤이 훌루드'라고도 불리며,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샤이 훌루드라는 이름을 특정한 어조로 말하거나 대문자로 쓰면 프레멘 가정에서 숭배하는 지신(地神)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작중 황제의 병사들을 지칭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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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재를 노리는 게 잘못된 건가요?
올해 5월에 개최된 제77회 칸 국제영화제의 대상 격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만한 작품이다. 지난 6일 개봉한 신작 '아노라'를 본 관객들, 영화를 좋아하는 씨네필들에게 이 영화는 올해 남은 기간에 두고두고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으로 국내외 관객들에게 주목받은 션 베이커 감독이 '레드 로켓' 이후 3년 만에 신작 '아노라'를 들고 나왔다. 이민자, 성노동자 등 하위문화에 속하는 버림받았거나 소외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왔던 그답게, '아노라' 또한 성노동자(스트리퍼)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아노라'는 미국 뉴욕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는 아노라(미키 매디슨)의 일상으로 포문을 연다. 화려한 조명 스쳐 가는 남자들에게 웃음을 팔며 돈을 번다. 자신이 일하는 바에서 에이스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 벌이로는 영 시원치 않다.
어느 날, 가게에 놀러온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이 만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뀐다. 이반은 아노라에게 첫눈에 반했고, 아노라 또한 자신에게 끊임없이 호감을 표시하는 이반에게 충동적인 감정을 느끼며 빠져들었고 신분 상승까지 꿈꾼다. 이후 특별한 만남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충동적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렇게만 보면 줄리아 로버츠를 할리우드 대표 배우로 만든 로맨틱 코미디 영화 '프리티 우먼'의 21세기 버전처럼 흘러갈 것이라 예상하게 된다. 하지만 션 베이커의 '아노라'는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결혼 사실을 알게 된 이반의 부모가 무효화하기 위해 하수인들을 보내면서 판타지를 와장창 깨뜨린다.
결혼 무효화 소동이 본격화되면서 아노라는 자신의 직업(성노동자) 때문에 따라붙는 꼬리표들(매춘부, 꽃뱀짓 등)로 인해 주변으로부터 끊임없이 난도질당한다. 비록 사회가 가장 천시하는 일이나, 그녀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온갖 수모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아노라를 넘어 모든 아웃사이더·소수자로 향한다. 아노라-이반의 결혼 무효화를 위해 합심한 토로스(카렌 캐러글리안), 가닉(바체 토프마산), 이고르(유리 보리소프) 또한 이반의 부모에게 고용되어 이들에게 잘 보여야 생존할 수 있는 처지 아니던가.
약자들의 이야기를 그리되, 으레 자주 활용되는 '약자들의 연대'는 명확하게 거부한다. "매춘부, 깡패, 빌어먹을 아르메니아인, 싸이코" 등 서로를 향한 거친 욕설을 퍼부으며 가까워지지 않는다. 사실 이들 모두 연대 없이도 각자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따라가는 여정의 끝인 마지막 장면은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 횡재를 노리는 아노라가 그렇게 잘못한 생각을 한 걸까, 그녀도 잘해보고 싶었을 것인데 이를 몰라준 게 아닐까. 마지막 장면을 본다면 '악깡버'로 버텨온 아노라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아노라'를 관람한 관객들은 주인공을 맡은 미키 매디슨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다. 그의 실감 나는 연기가 아니었다면 션 베이커 감독의 훌륭한 블랙 코미디는 화룡점정을 찍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년에 개최 예정인 오스카 시상식 여우주연상 강력 후보로 급부상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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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평범한 보통 청춘의 끝자락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을 지나 피부에 와닿는 쌀쌀한 바람이 계절이 변한 초입임을 알려주는 지금, 짠하지만 않은 아주 평범한 보통의 청춘들이 만나 서로가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마음을 되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2022년 한국 독립 영화 창밖은 겨울 리뷰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고향으로 내려온 석우와 같은 회사 여직원 영애가 우연한 기회로 동행하면서 쌓아가는 일종의 로맨틱 드라마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서 얻는 웃음과 상처, 미련이라는 단어로 얼룩진 청춘의 흔적을 바라보게 되는 기분 좋은 설렘이 유지되는 한 편입니다. 화려함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수수함이 묻어나는 모습에 편안한 힐링을 느끼시리라 생각되네요. :)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창밖은 겨울 정보
뭐 사실은 버리고 싶은데 잃어버린 척 하려는 게 아닐까요?
자신의 꿈에 대한 미련과 상처를 얻고 고향 진해로 내려와 버스기사로 일하는 석우는 어느 날, 점심시간에 터미널 의자에서 우연히 고장난 MP3를 줍습니다. 유실물 보관소에 이를 맡기려 하면서 누군가 잃어버린 분실물이라고 믿고 싶은 자신과 달리 내다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담당 직원 영애와 만납니다. 그리고 보관소가 직원 휴게실로 바뀐다는 소식에 그 MP3를 몰래 받아 함께 수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두 사람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하는데...
예고편│ Trailer
영제: When Winter Comes│감독·각본: 이상진
출연진: 곽민규, 한선화, 이정비, 목규리 외 多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104분
국가: 한국│등급: 12세 관람가
제작: 끼리끼리필름│배급: 영화사 진진
개봉일: 2022년 11월 24일
# 창밖은 겨울 후기
청춘들을 통해 보는 따스한 일상
서울에서 20대를 보내며 영화 일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의 자신을 투영한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이상진 감독의 말처럼 로케이션 장소부터 고향 진해를 배경으로 청춘의 끝자락에 꿈과 현실에 대한 고민, 미련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외적으로 멜로/로맨스 장르의 외피를 두르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미약하게 이어지고 실제로는 두 주연이 서로의 사연을 꺼내어 천천히 돌이켜보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MP3라는 분실물은 지금은 포기했지만 한때 꿈꾸었던 청사진을 보여주는 듯 분실물과 쓰레기 사이의 논쟁을 통해 그들이 꿈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그저 놓고 온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묘하게 이어지는 두 주인공의 인연과 함께하는 일상은 과거의 상처, 미련을 보다듬어 추운 계절을 지나 따뜻한 햇살이 드리우는 봄처럼 그들이 성장하며 나아갈 발판이 되어 왠지 모를 포근함과 따스함으로 잔잔한 웃음을 전합니다. 이러한 일상의 편안함 속에서 행복과 성장을 통해 자아를 되찾는 모양새가 아마도 많은 분들이 ‘패터슨’을 떠올리는 이유인 듯합니다.
곽민규 X 한선화, 따뜻한 케미
과거의 기억이 준 상처에서 도망치듯 귀향한 버스기사 공석우 역의 곽민규는 여느 청춘과 별반 차이 없이 평범하지만 무언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 쳇바퀴를 도는 듯한 햄스터 같은 느낌을 전합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꿈의 조각을 스스로 분리수거하며 다시금 인생이란 퍼즐의 조각을 맞춰보려 힘겹게 살아가는 안타까움마저 녹여내죠. 물론, 소심하고 생각도 많아 답답함에 분통 터지는 인물이지만 왠지 정감이 가는 지나쳐버린 누군가의 청춘, 자극적이지 않은 따스한 그의 연기에 마치 공 기사처럼 돌고, 돌아, 또 도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MBC 주말 드라마 ‘장미빛 연인들’로 떼내며 ‘술꾼도시여자들’로 연기자 전향 이후 최대 전성기를 맞이한 한선화는 부산 출신답게 자연스러운 사투리와 맛깔나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브라운관에 비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던 그가 2020년 ‘영화의 거리’를 시작으로 최근 ‘교토에서 온 편지’까지 배우로서 드라마와 180도 다른 색깔을 보여줍니다. 털털하고 숨김없는 직설적인 영애를 맡아 눈치 없는 석우를 말없이 지켜보며 따뜻한 케미를 발산해 주죠. 소소한 웃음, 흐뭇함마저 전해지는 두 배우의 청정한 연기는 극의 분위기를 살리기에 더없이 좋아서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돌고 돌아 다시 오기까지
잃어버린 것이라 착각하고 믿고 싶은 존재, 이미 알고 있고 잊고 있던 선택을 떠올리게 하고 지나간 계절에 대한 미련처럼 남아있던 자신의 마음을 다시 재정비해 현재를 마주하는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진해를 선택한 것은 감독의 고향이라는 점도 있지만, 모두가 서울로 떠나버린 한적함이 묻어나는 배경에서 우리가 잊고 지낸 여러 가지의 모습을 전달하려 했던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지나가고 있는 계절은 잡지 못한 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미련이 남는 것처럼 아쉬움과 상처가 있던 과거의 기억을 잡고 싶었던 평범한 청춘들의 모습은 잠시나마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물 흐르듯 흐르는 평범한 삶 속에 놓고 놓쳤던 선택의 순간, 꽤 재미있는 이야기로 기억될 듯하네요. :)
한 줄 평 : 미련과 후회를 돌고 돌아 현재를 마주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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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반장 ‘마위안’(성룡)은 함께 일하는 철도 노동자들과
항일 게릴라군 ‘비호’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어느 날 대원들은 부상당한 팔로군 병사 ‘다궈’(왕대륙)를 숨겨주고
그들이 완수하지 못한 항일 작전에 대해 듣게 된다.
평생에 한번 큰일을 해내고 싶었던 ‘마위안’과 대원들은
팔로군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리라 결심하는데…
자, 드디어 큰일 한번 해보자!
‘비호’의 대담한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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