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3-12-03 22:32:47
세계관 확장하고픈 욕망만 한가득
드라마 '스위트홈 2' 리뷰
'스위트홈 2'를 정주행 한 감상평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즌 1 성공에 힘입어 세계관을 확장하고픈 욕망만 가득한 반면, 어디 하나 쉽게 몰입할 구석 없이 산만하기만 하다.
3년 만에 시즌 2로 돌아온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은 욕망이 괴물을 만드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을 삼고 있다. 시즌 1에서는 생존을 위해 그린홈 아파트에서 정체불명의 괴물과 사투를 벌이던 차현수(송강)와 그린홈 주민들에게 포커싱 했다면, 시즌 2에선 그린홈 밖으로 나온 이들의 생존기와 또 다른 존재의 등장,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현상들까지 드러난다.
'스위트홈 2' 스토리 초반은 다양한 이야기 갈래로 나눠서 조명한다. 정의명(김성철)에게 몸을 탈취당한 편상욱(이진욱)은 군인들에게 잡혀가던 차현수를 빼돌려 신인류가 되어보자며 자신의 편이 되길 회유하고, 임신한 서이경(이시영)은 남편을 찾기 위해 밤섬특수재난기지에 숨어들어 진실에 접근한다.
그리고 이은유(고민시)와 윤지수(박규영)를 비롯한 그린홈의 나머지 생존자들은 군인들을 따라 안전캠프로 가는 길에서 예상치 못한 역경을 겪는다. 여기에 탁상사(유오성)가 이끄는 까마귀 부대와 괴물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임박사(오정세)의 이야기가 맞물린다. 그러면서 주무대는 그린홈 아파트가 아닌 안전 대피소 스타디움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이야기와 갈등으로 엮어낸다.
시즌 1이 공개될 당시 시청자들에게 혹평을 받았던 '몰입도 빌런' OST 삽입은 말끔하게 해결됐다. 최대한 극에 집중하게끔 최대한 잔잔한 톤으로 깔아 두면서 자신들의 장기인 '한국적 정서'로 끌어들인다. 이번 시즌에선 가족애, 모성애로 시청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려는 게 보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링크에서 확인
Relative contents
-
- "아스타모타"
<나이트 레이더스>
- 개봉: 2022.03.03.
- 장르: 스릴러, 미스터리, 드라마, SF
- 국가: 캐나다, 뉴질랜드
- 러닝타임: 101분
※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관람 후에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33년 멀지 않은 미래에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길러질 수 없게 되었다.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명분은 있었다. 그러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독재 국가를 피해 10년이나 딸 와시즈를 빼앗기지 않고 키워온 나스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친 와시즈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치료를 위해 결국 아이를 그들에게로 보내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다. 그곳은 아이를 로봇과 같이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와시즈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다. 드라큘라와 늑대인간의 차이점이 궁금하고, 당장 배고프지만 새소리가 더 궁금한 그런 아이다. 아이들이 호기심이 많고, 감정이 요동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게 만드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국가. 그렇게 주입받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구출되는 것을 우연하게 본 나스카는 그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그리고 구원자로 추대받는다. 그냥 예언이 있었고, 북쪽에서 온 이방인이 구원자라는 그런 말에 구원자가 되었다. 구출된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려가는 것, 그게 나스카의 역할이라고 했다. 드론들이 사람을 감시하는 그런 시대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 땅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실질적인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실제로 제작자 타이카 와이티티는 마오리족의 혈통을 이어받았기도 했고 토착민의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들이 실질적인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느낀 것은 시덥잖은 농담을 하던 아저씨가 악기를 들고 그들의 음악으로 이야기를 전하면서부터였다. 아,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고 싶은 것이로구나. 이것은 그냥 '구원자'가 나타나서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로구나 하고 말이다.
부족의 사람들은 함께 아이를 키우고, 노래를 부르고, 밥을 먹는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알려주고 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게 해 준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그 말처럼 모두 최선을 다 한다. 전투 등 다른 교육을 받는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행복한 가는 본인 스스로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빼앗겼다는 기분, 와시즈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새를 부르는 소리 "아스타모타"
실제로 있는 토착민의 언어인지 궁금하긴 했다. 알아낼 길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고.
구원자는 와시즈였다. 거대한 모기소리는 드론의 소리였다. 사실 이 부분은 조금은 뻔한 서사여서 "와!" 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속은 시원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어쨌든 기계도 자연 만물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제는 디스토피아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편이다. 이렇게 가까운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영화는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특히 기계와 관련된 것은 '로봇'에 국한되었었는데 드론을 가져온 것 또한 신선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의 영화에게 드론이 대규모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스파이더맨:파프롬홈> 정도이지 않았나 싶으면서 '아 와시즈 한 명 있었으면 미스테리오 따위'라는 생각도 더불어 들었다.
엇 딴 길로 빠졌다...
밤의 습격자는 전쟁을 일삼는 그들이었는지, 그들이 공식적으로 소유하게 된 아이들을 되찾아간 토착민들이었는지, 토착민들의 얼마 남지 않은 숲마저 빼앗으려던 또 그들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어쩌면 드론을 싸그리 제 편으로 만들어버린 와시즈가 구원자가 아닌 습격자였을지도 모른다.
알게 뭐람.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당분간 숲은 파괴되지 않을 수 있고, 의외로 샤머니즘은 먹히고 토착민들의 음악은 매우 좋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그들의 노래가 흘러나오니 자리를 더 떠날 수 없었다. 마음까지 울리는 소리였다. 땅을 빼앗기고, 나무와 동물을 빼앗기고, 사람마저 빼앗겼던 그 사람들의 마음이 한 껏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주인공다운 목소리였다.
진짜 전쟁이 일어난 이 시점. 이런 영화들은 '그냥 영화'로 보기 어렵다. 우리는 겪었고,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토착민들의 목소리를 과거부터 있어왔고 이어지고 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사실 "아스타모타"는 "알이즈웰"과 같은 말은 아닐까?
-
- 아이들은 가출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
줄거리
자신이 사이코패스라고 믿는 17살 소년 제임스.
수많은 실험 끝에 이번엔 사람을 죽여보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건 분노로 가득 찬 소녀 앨리사.
그녀는 지긋지긋한 엄마와 새아빠에게서 벗어나고자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 가출에 일단 동참한 제임스.
과연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이들은 가출하지 않았다
숨은 의미 찾
제임스와 앨리사 모두 자신을 억누르는 인생의 압박감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 시작이 무엇이었든 간에 말이다. 지독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은 원래 서로를 알아보기 마련이니까.
그들을 짓누르는 것은 단순한 무료함이 아니다. 그저 일상의 무료함을 느끼는 정도였다면 급식실을 오가는 수많은 또래 학생들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공유하고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 나이대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소소하고 짤막한 일탈로 하루하루를 달래고 다시 제 발로 무료함 속에 걸어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것은 '일탈'이라는 단어로 퉁치기에는 과한 감이 있다.
제임스는 아빠를 쥐어패고(폭행), 무작정 차를 타고 도망쳐서(절도), 그 차를 개박살 내는 등(손괴) 일탈의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죄를 나열한다. 게다가 살인 시도를 위한 가출이었으니 그 목적마저도 심각한 범죄에 해당된다. 이것은 일탈이 아니라 그야말로 '폭발'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는 여러 동물들은 죽이며 자신을 억눌러왔지만, 결국 앨리사를 만나며 모든 것을 폭발시켜 버린다.
앨리사의 사정도 그다지 다르진 않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거스르는 인간에겐 가차 없이 쌍욕을 박고 휴대폰을 집어던지지만 정작 불만의 근원지인 집에서는 말 한마디 뻥긋하지 못하고 산다. 늘 남들에게 막 대하는 자신의 성정을 속으로는 매 순간 후회한다. 자신이 엉뚱한 방향에 대고 화풀이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반항적이고 조금은 이상한 아이로 살아오며 자신을 억눌렀지만, 마찬가지로 제임스를 만나고 더 이상 참지 않게 된다.
하지만 막상 시시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일상에서 빠져나오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뼈져리게 깨닫는다. 뭐든지 쿨하게 행동하며 아무하고나 하룻밤을 보내려던 앨리사는 자신을 겁탈하려는 어른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이코패스라고 확신하던 제임스는 진짜 사이코패스를 죽인 뒤 역겨움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그런 착각을 하곤 한다. 일상을 빠져나오면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다.
왜냐하면 어디에 있든 우리는 여전히 '빌어먹을 세상' 속에 있으니까.
모순적이게도 제임스와 앨리사 모두 가식적으로 자신을 감싸던 평화를 깨뜨리고 다른 평화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들의 발이 가닿는 곳 어디에도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딜 가든 자신들을 옥죄는 어른들과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두 아이는 그 사실을 세상 끝에 다다라서야 깨닫는다.
마음속에 아직 아물지 않은 아픔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상 그 어디에도 평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열일곱, 혼자서는 감내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상처였다. 드라마는 제임스와 앨리사가 서로에게 작은 위안을 얻으며 조금씩 조금씩 생채기 난 가슴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끝끝내 어른들의 욕심이 그들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처참하게 민낯을 드러낸다.
묘하게 소년 심판이 생각났다. 아이들의 아픔과 어른들의 욕심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달랐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아이들의 행동을 볼 때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축약된다. 마치 뉴스에 제임스와 앨리사가 '빈집에 무단 침입해 집주인을 무참히 살해하고 도망치다가 주유소를 습격한 아이들'로 현상수배되는 것처럼.
아이들은 '가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망'쳤다.
자신들을 상처에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않고 외면하는 어른들로부터. 그들은 행복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벗어나고 싶다고 했지.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너무나도 과장된 행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속시원함이 슬픔으로 다가오는
감상평
시즌 1을 다 본 후의 감상은, 그냥 슬펐다.
눈물을 질질 짤 정도로 사무치게 슬펐다는 건 아니다. 그저 왜 제임스와 앨리사가 매 순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원치 않았던 선택을 등 떠밀려 해왔다는 점이 서글펐다. 말마따나 이 빌어먹을 세상은 도무지 어린애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없다. 왜 항상 어른의 잘못이나 어른의 아픔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가져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 제임스와 앨리사가 도망칠 땐 부러웠다. 그런 선택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더 이상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증명하는 건 마지막에 두 사람이 바닷가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장면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아이는 도망치는 것 밖에는 택할 수 없다. 세상은 자꾸만 그 아이들의 등을 떠민다. 그렇게 떠밀려서 땅 끝으로 내몰려, 이젠 더 갈 곳이 없는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뻐근했다. 어쩐지 나의 유년 시절을 보는 것도 같아서.
-
- 완성도 높은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
SYNOPSIS.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
POINT.
✔️ 일단 이 영화를 보세요. 시놉시스만 아시는 상태로 그냥 다짜고짜 보시기를 권합니다.
음향이 중요하니 돌비(메가박스), 사운드X(CGV) 등 음향을 강조한 상영관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 이외의 다른 모든 이야기는, 영화를 다 보신 후에 찾아보셔요. 이 글 같은 리뷰는 물론, 평론가 해설 또한 영화를 보신 후에! 찾아보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꼭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읽어주세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길지 않은 한 마디지만, 손을 떨면서 하는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주연을 맡은 산드라 휠러 배우가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D0v0WRqqVso
"... All our choices were made to reflect and confront us in the present,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rather 'look what we do now!'. Our film shows where de-humanization leads at its worst. It shaped all about past and present. 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se their jewishness and the Ha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applause)
... whether the victims of October the 7th in Israel or the ongoing attack on Gaza all the victims of this de-humanization, how do we resist? (applause)
Alexandra Bystroń-Kołdziejczyk, the girl who glows in the film as she did in life chose to, I dedicate this to her memory and her resistance. Thank you.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수)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학살의 희생자든...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박수)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지치크, 영화에서 만큼이나 실제도 빛났던 소녀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이 발언은 이 영화를 완성했다.
아니, 이 영화는 나의 마음에 닿아서 완성되는 영화일 것이다.
소리는 당신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오감, 아니 육감 중 가장 큰 부분을 시각에 의지한다. 철저하게 계산되어 고증된 공간과 의상, 내면에 깊은 두레박을 수도 없이 드리워 완성하는 배우의 연기, 그 장면 그 순간을 위한 깊은 노력 대부분이 시각에 의존한다.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그 '시각'이 주는 감정을 보조하기 위해, 그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다르다. 이 영화는 청각으로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시각이 보조한다. 붉고 불길하게 타오르는 꽃잎의 모양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에, 청각이 전달하는 불길한 느낌, 구역질 나는 느낌을 보조한다. 이건 대체 뭐지. 관객은 충격에 빠진다.
소리가 잔인한 이유는 당신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각이 아무리 충격적인 양상을 들이대도 당신의 상상보다 잔인할 수는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카피는 사실 불가능한 카피이다. 언제나 각자의 상상이 각자의 최대치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최악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성립시킨다. 간혹 들리는 비명 소리, 구타가 아닐까 싶은 소리, 총... 같은 느낌이 드는 소리, 동시에 우리의 식민지적 경험이 주는 그 총소리에 대한 의문, (일본군은 당시 총알이 아깝다며 한국과 중국에서 총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총검으로 찌르거나... 그 행위는 그들에게 유희처럼 여겨졌고, 사체의 일부분을 손에 든 채 히죽히죽 웃는 사진도 여러 장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내겐 ‘수용소에서 총 소리가 이렇게 자주 들리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전역과 731부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괴로움과, 서방에서 아우슈비츠가 갖는 의미 대비 그 괴로움이 서술된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자괴감... 나의 직접/간접 경험이 주는 가장 끔찍한 지옥도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파고든, 보는 내내 궁금했던, 마치 기계가 작동되는 듯한 소리.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가 밝혀질 때에, 한편으로는 안심한다. 역사는 언제나 눈을 치켜뜨고 있다. 비록 소리가 상상하게 한 최악의 지옥도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지만, 그들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일 가능성은 없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16p)"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단순히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일원들이 그저 일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 곧 판단의 무능성(20p)"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무너뜨려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21p)"고,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임으로써(42p)" 우리 모두는 아이히만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뼈 아픈 부분이, 이 영화에서도 지적된다. 과연 나는 영화 속 헤스 부부를 보며 단순히 그들을 절대악으로 지정하고 마음 편하게 영화관을 벗어날 수 있는가? 없다. 아이히만은 내 안에 있고, 헤스 부부 또한 그렇다. 17살 때부터 꿈꿔 온 이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헤트비히의 말은... 과연 이 사회에서 자기의 안위를 위해 '각자도생'해야 함을 배운 우리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수십 채나 되는 집을 소유하며 도시를 공허하게 만드는 사람들, '영끌'하는 자기만을 과하게 연민하며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법을 잊은 사람들, 소비로 존재를 대신하려는 사람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113p)"던 아이히만과 우리는 의외로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 속, 아우슈비츠 코앞에서, 연기와 비명 소리와 (아마도 존재했을) 사람'이었던' 것들이 타는 냄새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꽃을 심고 집안을 가꾸는 헤스 부부... 내 집 마련의 꿈을 중요시하지만 사회의 모든 모순은 무시하는 우리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이 영화가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평가되는 이 사건조차도, 단순히 그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최대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가하고 있나. 그들 안에는 아이히만이 없는가?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힘러가, 즉 나치가 사용한 책략은 우리의 "동물적인 동정심"을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174p)" 된 것이었다. 과연 작금의 유대인들은 여기서 얼마나 다른가. 자기 연민과 비뚤어진 자기애로 인류애를 대체하고, 타인의 상황에는 ‘누칼협’ 같은 소리나 들이대고 있는 우리는 또 얼마나 다른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님을, 그러므로 나와 무관하고 그냥 스크린 안에서만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를 뒤집을 수밖에 없다.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프로듀서 앞에서, 실제로 이후 그의 발언이 공식 입장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프로듀서 앞에서, 다시 말해 커리어가 끊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손을 떨면서 1분 남짓의 짧은 말을 이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같은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까지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단순히 아이히만만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영화를 보고 그냥 '미학적으로 좋은 영화군...' 하고 단순하게 돌아설 수 없도록 나와 당신을 막는 힘 또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갈망이 우리를 비인간적인 자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니 배 부른 돼지가 되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 영화는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밍크코트에 이어, 이미 죽었거나 그 근처에 이르렀을 여자의 립스틱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입술에 바르는 헤트비히의 모습에서도, 알고 지내던 유대인 여자가 끌려갔어도 그 커튼을 갖지 못한 것이나 아쉬워하는 대화에서도.
실제 헤트비히 헤스의 말에서 따왔다는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과격한 대사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좀 더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형태의 '인간'이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를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 영화는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시대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의외로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걸 보여주는 존재는 한 소녀다. 감독에게 매우 의미 깊었던 듯한, 영화 속에도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의미심장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감독의 아카데미 소감에도 등장하는, 알렉산드라라는 인물이 있다. 알렉산드라 비스트론 콜로지치크. 그는 영화 속에서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들이 일하는 곳을 밤에 몰래 찾아가 과일을 하나씩 박아 놓고 사라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밤에 뛰어다니는 그곳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굳이 어설픈 직역을 하자면 "이득 지역"인데, "Interessengebiet"라는 독일어 단어를 그대로 옮긴 영어 단어이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인근을 부르던 단어로, 실제로 그들이 아우슈비츠 행정을 위해서라며 이득을 취하던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1941년 나치는 폴란드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몰아낸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고 그 이득을 챙긴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교류를 막았음은 물론이다. 말발굽 아래 너무 쉽게 짓밟히던 과일을, 가방에 소중하게 담아 하나하나 배치해 두는 소녀의 존재는, 처음에는 '뭐지?' 싶게 낯선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이내 그 존재 자체로 어둠 속의 빛임을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열심히 가꾸는 헤스 부부의 집에는 한 번도 직통으로 내리쬔 적 없는 햇살이,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집안으로는 부드럽고 강하게 들어온다.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2016년 9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집에서 촬영했다는 장면에서, 소녀가 피아노로 연주한 곡은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가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제목도 <햇살>. 심지어 옷과 자전거 또한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사용했던 물건이라니 그 의미가 한층 두텁게 느껴진다.
실제 알렉산드라는 1940년 나치가 폴란드에 침공하면서 아버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두는 비극을 겪었고, 친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내부와 접점을 가지고 음식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1년부터는 무장투쟁연맹의 일원으로 연락망을 담당하고, 1943년에는 나치에 의해 노역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우슈비츠에 음식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헤스 작전'으로 소개된, 헝가리의 유대인을 '소거'하는 작전을 앞두고, 전출되었던 자리에서 다시 아우슈비츠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통화하는 부부의 전화로 끝을 맺다시피 한다. 원하는 모든 바가 다 이루어졌지만 내려오면서 어쩐지 구토의 심경을 느끼는 루돌프의 모습이 영화의 사실상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은 매우 역겹다.
구토하지 못하면서도 구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그 모습이, 마치 가해자가 되어야만 했던 자신을 연민하는 액션처럼 느껴져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178p)"이었다는 아이히만의 사고와 동일하게 느껴져서. 가스실을 만들고, "효율적인" 시체 처리법을 고안한 것이 "업적"이었던 그들의 사고방식. 자신의 알량한 삶을 위해 타인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그 방식과 체계와 행정이나 고민하고 있었던, 무뎌지고 마비되었던 두뇌들. 구토하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구토로 자신이 인간인 것처럼 호소하던, '비인간화'의 결과물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소개된, 매우 예외적인, 그래서 독특한 이야기 하나를 나눈다. 이 영화의 ‘헤스 작전' 회의 장면에서도 언급되듯 나치에 진작 동의했던 헝가리 정부와 달리, 끝까지 나치의 유대인 소탕에 반대한 나라가 있었다.
덴마크 국왕은 자신이 자진해서 유대인의 별을 달겠다고 했으며, (왕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굳이) 대신들은 혹시라도 왕이 반유대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자진 사퇴하겠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안전하게 운송'되었으며, 그 과정에 필요한 자금은 덴마크 부유층이 댔다. 결국 덴마크 출신의 유대인들 중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였고, 이들은 대부분 순순히 문을 열어줄 만큼... 노쇠하였거나 가난에 치이느라 현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다시 말해 사회적 최약자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덴마크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고, 그 결과 이들은 수용소에서도 남다른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거였다. 이럴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아우슈비츠와 '악의 평범성'을 타자의 위치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아이히만이 가리키는 지점을 묻고, 그 지점과 싸울 의지가 있는지 묻는 것과도 같다. 이미 시체마저 썩어버린 과거의 나치에게 섀도복싱을 하는 대신, 진짜 내가 싸워야 할 상대에 맞설 마음이 있는지 묻는다. 우리 시대의 나치는 무엇이며, 그 앞에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에 무거운 마음을 답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답이 있는 곳이, 완성도 높은 이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일 것이기에.
-
- 골든글로브 수상작 한눈에 보기
제 81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지난 7일 열렸는데요.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매년 전세계의 영화와 미국 TV
드라마를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인데요. 씨네픽은 '영화부문' 대표 수상작들을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골든글로브에서 선정한 2023년을 대표한 영화들 같이 알아보실까요?
-
- #맨 인 더 다크 2 / Don't Breathe 2, 2021
지난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맨 인 더 다크>는 북미 2주 연속 1위와 벌어들인 총수익 $157,100,845는 제작비 990만 달러의 약 17배에 달하는 영화입니다.
국내에서도 1,003,406명으로 스타 배우와 감독 없이 100만을 넘겼으니 속편을 만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찍이 속편을 결정했으나 문제는 곧바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연출과 각본을 맡았던 "페더 알바레즈"는 바로, <밀레니엄 시리즈>의 <거미줄에 걸린 소녀2018>와 <카오스 워킹2021>에 참여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결국, 이번 2편에서는 감독이 아닌 제작과 각본으로 물러나 시리즈를 이어나갔지만 지난 북미에서의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습니다.물론, "코로나19"라는 특수적인 상황을 치울 수 없지만 들려오는 혹평은 저를 비롯한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요.
과연, 어떤 문제로 이런 말들이 오갔는지? - 영화 <맨 인 더 다크 2>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영화는 전작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끔찍한 사고로부터 도망쳐온 "노인"은 "노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의 옆에는 "피닉스"라는 딸이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노먼"은 "피닉스"를 노리는 자들이 자신의 집에 침범했음을 감지하며, 잊고 있던 그 기억을 되살리는데...캐릭터는 여전한데, 상황은 달라졌네.
1. 언제, 액션 영화가 되었지?
앞서 말했듯이 제목에 쓰여있는 숫자로 보듯이 전작과의 비교는 필수불가결한 수순입니다.
무엇보다 2편은 어렵다고 하지만, 가장 쉬운 숫자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장점을 그대로 보완하되 단점은 고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평가와 흥행은 보장되니까요.
문제는 '이를 알고 있다'라는 전제하에 깔아두어야 하는데, 영화 <맨 인 더 다크 2>는 아쉽게도 이 점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액션이 이렇게나 많았나?
전작 <맨 인 더 다크>는 퇴역 군인의 집을 털기 위해서 찾아온 10대 청소년들이 되려 죽을 위기와 노인의 추악한 비밀까지 보게 되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역관광당하는 이들에게 속 시원하거나 되려, 도둑들을 응원하는 '누가 악당이지?'라는 이성적인 물음까지 건네왔습니다.
물론, <맨 인 더 다크>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이성보다는 생존이라는 본능을 앞세운 스릴감이었지만요.
근데, 이번 속편에서는 이런 악의 대결이 아닌 <테이큰>의 "리암 니슨"과 <존 윅>을 보여줍니다.2. 언제부터 착한 역할이었다고?
앞서 말했듯이 영화 <맨 인 더 다크>의 큰 매력은 '누가 악인이지?'라는 질문에 섣불리 답하지 못하는 캐릭터 간의 구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먼"의 나쁨은 굳이, 이번 영화가 아니더라도 전작에서 보고 왔다면 전부 다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그를 위협하는 캐릭터들의 악함을 설명하는 것이 맞겠죠.
이를 위해 이번 속편에서는 "노먼"의 옆에 "피닉스"라는 딸을 등장시키는데, 이게 시리즈의 정체성을 헤친 결정적 패인으로 보입니다.애들은 좀...
그의 옆에 딸을 배치함으로 영화는 자연스레, "악 VS 악"의 구도가 아닌 "선 VS 악"의 구도를 띄게 만듭니다.
물론, 전작에서도 이런 모습이 전혀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눈이 안 보이는 퇴역군인의 집을 턴다는 아이디어부터 "선 VS 악"의 구도를 띄운 채 시작했으니까요.
그러나 <맨 인 더 다크 2>는 이 구도를 전작과 다르게, 떨쳐내지 못하는데 이런 이유에는 이들의 동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작에서는 이유를 설명하고 행동에 옮겼다면, 이번 속편에서는 이를 밝히지 않고 "피닉스"의 시점에서 집에 침범한 이들에게서 벗어나려는 장면을 보여주니 "악 VS 악"의 구도로 더 나가질 못합니다.3. 늘 10대하고만 싸울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영화의 달라진 전체적인 분위기는 영화의 장르마저 뒤바꿉니다.
영화 <맨 인 더 다크>의 원제는 'Don't Breathe'를 직역하면, '숨도 쉬지 말라'라는 긴장감이 전체적으로 깔린 작품입니다.
어찌 보면, "점프 스케어"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공포스러운 장면이 자연스러우나 이번 속편에 들어선 영화는 공포가 아닌 액션 영화로 변모했습니다.
극 중 책상을 방패 삼아 가스 폭발을 막아내거나 물에 누워있어 물결로 상대방들의 위치를 추리해 총으로 제압하는 모습은 <테이큰>의 "리암 니슨"이 아닌가 싶습니다.감독은 정체성을 캐릭터라고 생각하나 봐요.
제가 생각한 <맨 인 더 다크>의 정체성이 "스릴감"이라고 했지만, 정작 연출자가 생각하는 정체성은 "노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극 중 본드로 코와 이 구멍을 다 붙여 적을 제압하는 모습은 그의 전투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말해주거든요.
근데, 문제는 그가 상대하는 캐릭터들의 극 중 설정이 그와 마찬가지로 퇴역 군인들로 대등하게 그려내어 전작에서 보여준 "역관광"같은 모습을 기대하긴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여전한 주인공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상대하는 적들까지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10대 청소년들은 아니니까요.4. 말과 주먹이 많아진 어르신
그리고 이번 속편에 들어오면서, 가장 아쉬운 건 판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전작에서는 그의 집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이번 속편에서는 "피닉스"를 납치한 놈들의 아지트까지 확대되니까요.
전작에서 스릴감을 펼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장치였던 집은 그가 살아온 공간으로 설명이 가능해 외부에서 들어온 캐릭터들과 관객들이 더 무서움을 느끼게 해주었죠.
그런 부분에서 판이 커진 이번 속편은 이런 긴장감마저 스스로 무너뜨리니 아쉬울 따름입니다.이렇게, 말씀이 많으셨나?
여기, 또 달라진 것을 확인하자면 달라진 "노먼"의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말이 많았나?'싶을 정도로 많은 대사량을 쏟아내는데, 극 중 자신의 딸 "피닉스"에게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까지 이번 영화에서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는데요.
문제는 이 과정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위기가 있는데 이를 극복하는 단계가 상당히 급할 뿐이더라 예상치 못한 정도를 지키는 악당의 모습(aka. 애견인)까지 전개에 대한 아쉬움이 생겨나옵니다.
물론, 예상한 엔딩이기에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저를 비롯해 영화 <맨 인 더 다크 2>를 보러 온 관객들이 이 장면을 기대해서 CGV까지 보러 왔을까요?
-
- <소울> 가장 픽사다운 위로를 어른들에게 건네다
뉴욕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던 ‘조(제이미 폭스)’는 꿈에 그리던 최고의 밴드와 재즈 클럽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는다.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어 잔뜩 흥분한 바로 그 순간, 그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되어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진다. 인간으로 태어날 자격을 획득한 영혼들에게 지구 통행증을 발급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그는 지구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시니컬한 영혼 ‘22(티나 페이)’의 멘토가 된다. 수많은 위인들도 가르침을 주는 데 실패한 영혼 22와 함께 조는 지구로 돌아가 프로 뮤지션이 되고 꿈의 무대에 서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픽사 애니메이션은 여러 공통점을 갖는다. 픽사는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야만 하는 시기나 사건을 특정 소재 안에 담아 풀어낸다. 예를 들어 <온워드>는 마법, <코코>는 망자의 날, <토이스토리>는 장난감, <인사이드 아웃>은 감정을 통해 제각기 성인식, 사별, 유년기, 사춘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픽사는 늘 선택된 소재와 관련된 환상의 공간을 선보이며, 그곳에서 펼쳐지는 모험은 <토이스토리 3>에서 청년이 된 앤디가 장난감들과 아름답게 이별한 것처럼 현실에서의 위로, 성장, 그리고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픽사 애니메이션은 유달리 어른들에게 감동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각각의 작품이 다루는 시기나 사건을 경험한 이들에게 픽사 애니메이션이 선사하는 환상 속 현실의 울림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피트 닥터 감독의 신작 <소울>은 픽사의 DNA가 가장 뚜렷하게 발현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소울>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시기는 삶의 이전과 이후다. 영화의 주된 배경 역시 태어나기 전과 죽음 후에 영혼이 마주해야 하는 환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소울>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의 탄생과 죽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탄생과 죽음은 수단일 뿐, 무엇보다도 현재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본질에 가깝다. 이는 셸리 케이건 예일대학교 교수가 본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영혼이 실재하든 안 하든)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라고 내린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갑작스럽게 죽기 직전에 처한 조와 지구로 내려가기를 거부하는 영혼 22가 함께 뉴욕에서 모험을 펼치며 지난 삶의 과오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발견하며, 당장 그들이 마주한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학교 음악 교사로 일하지만 언제나 재즈 밴드로 활동하는 프로 뮤지션을 꿈꾸던 조는 동경하는 아티스트와 클럽에서 멋진 즉흥 연주를 펼치며 실력을 인정받지만, 매일 공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공허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지구로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던 영혼 22 역시 조의 몸을 통해 처음으로 삶이 무엇인지를 체감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부정당한 뒤 삶의 의욕을 잃고 괴물로 변해버린다. 그러던 와중에 둘은 단풍나무 씨앗으로 대표되는 순간의 아름다움, 사소한 일상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마주한 후에야 진정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인생은 무언가 거창한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즐길 때 의미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영화의 구성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영화 음악의 활용 방식이 대표적인 예시다. 사실 <소울>에서 재즈 음악의 비중은 개봉 전에 이루어진 프로모션과 그로 인한 기대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초반부 재즈 클럽에서의 연주 장면, 뉴욕에서 펼쳐지는 조와 22의 여정, 일상의 소중함을 조가 깨닫는 장면을 제외하면 재즈 음악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소셜 네트워크>의 ost로도 유명한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스페이스 음악을 주로 들려주며, 이는 제2의 <라라 랜드>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약간의 실망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바를 생각하면 기대와 다른, 재즈 음악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분량 면에서 재즈를 많이 들려주지 않는 <소울>의 행보는 필연적이다. 햇살을 맛보고, 단풍나무 씨앗을 손에 쥐고, 재즈가 아닌 일상의 이야기를 미용사와 나누고, 또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상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조에게 재즈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에 오히려 더 소중하며, 그렇기에 그는 클럽에서의 연주 후에도 남은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 이러한 조의 서사처럼 영화 역시 전체적으로 재즈를 배치하지 않으면서 역으로 재즈 음악의 의미도, 예상과는 달랐던 ost도, 영화 1분 1초까지도 모두 즐기고 기억에 남길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재즈 음악을 들려줄 때에는 즉흥 연주와 다른 연주자와의 하모니에 중점을 두며 지금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자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이외의 장르를 통해서는 영혼들의 세계와 조의 절실함, 22의 좌절감까지도 생생하게 제시한다. 이렇게 <소울>은 스브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피트 닥터 감독이 말한 대로 영화 음악의 장르 선택과 배치를 통해 가장 직관적으로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한다.
또한 <소울>은 두 주인공 안에 현대인들의 처지를 녹여내며 관객들이 영화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체감하도록 유도한다. 조와 22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처럼 보인다. 한 명은 확실한 인생의 목표를 지닌 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열정으로 가득하다. 반면에 다른 한 명은 지구에서 태어나지 못할 정도로, 또 본인도 지구에 갈 생각이 없을 정도로 열정이 부족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국 둘은 확신을 갖지 못해 우울하다는 같은 문제 상황에 처한 이들이다. <피로사회>의 표현을 빌리면 조는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지구에서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이라서 우울하며, 22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강제된 자유로부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낙오한 인물이다. 열정이 있는 이와 아닌 이,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인물과 시작조차 두려워하는 인물이라는 차이 이면에는 "(삶을)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해 사색적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성과를 내야 하고, 그 성과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긍정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비록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의 목적에 치여 함몰되어 가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고,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조와 22라는 캐릭터가 현실을 반영하듯이, 주 배경으로 묘사되는 공간도 현실의 비유로서 감정이입과 공감에 큰 도움을 준다. 지나치게 열정에 집착하여 괴물이 된 영혼들이 떠돌아다니는 공간인 어둠의 구역을 보자. 지나친 열정 때문에 주식 거래에 미쳐버린 한 남자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 결과 두 주인공과 같은 문제를 겪는 인물이다. 이때 이 남자와 22처럼 자신의 삶을 잃고 괴물이 되어 버린 이들이 '문윈드'와 같은 개인의 도움에 의해서만 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어둠의 구역은 개인이 스스로를 하나의 부품이자 도구로 여기게 하며 실패할 경우 재도전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사회상의 반영이다.
또 다른 배경인 '태어나기 전 세상'도 현실의 그림자를 반영한다. 이 곳은 언뜻 영혼들의 성장과 배움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갖추어야 한다는 조건들을 정해놓고 그 조건을 맞춘 영혼만 지구에 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은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엇비슷한 인간상을 만드는 공장이나 다름없고, 그 공장에서 낙오한 22와 같은 영혼이 괴물이 되는 것을 방치하는 대목에서는 특정 스펙과 조건으로 삶의 성공과 실패가 재단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 엿보인다. 이러한 공간들의 특성과 인물들이 처한 어려움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현재의 사회구조를 만드는 데 공헌한 과거의 위인들로부터 22가 아무런 가르침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소울>이 픽사 애니메이션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업>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지 못하며, <토이 스토리>처럼 십수 년 후에도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뭉클함을 선사하지도 못한다. 또한 육신과 영혼의 관계, 죽음과 삶의 관계, 죽음이 갖는 의미 등 다소 현학적인 소재로부터 매 순간 마주하는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도출하는 데 있어서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영리하고 효과적이지만 주제나 소재가 갖는 깊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울>은 픽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작품이다. 사실 영화의 다양한 목적과 기능 중 하나가 현실에서의 도피인 만큼, 현실의 아픔과 불편함까지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온 <소울>의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할리우드를 꿈의 공장이라고 부를 만큼 영화는 현실과 다른 세상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제공하는 위안과 위로가 단지 현실 회피와 환상의 충족을 담당할 뿐이라면 영화는 마약과 다를 것이 없으며,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힘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끝이 나기 때문에 영화는 관객들을 그들의 현실로 되돌려 보내야만 하고, 그렇기에 결코 현실에서 완전히 도망치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영화는 도피처가 아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충전소 혹은 주유소다. 그렇기에 앞서 살펴봤듯이 환상 속의 세계를 펼쳐 보이지만 언제나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는 픽사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큰 기대와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삶에 지쳐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하며 황량한 사막을 떠도는 이들을 향해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냉철한 성찰과 비판의 메시지도 남기는 <소울>이 유독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자 가장 픽사다운 영화일 수 있는 이유다.
<소울>은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후 테리가 "영화는 끝났어. 이제 집에 가"라고 말하는 쿠키 영상으로 끝난다. 이는 마치 <데드풀>에서 데드풀이 왜 아직도 앉아 있냐면서 혹시 다음 편 떡밥을 기대한 건 아니냐며 약 올리는 것만큼이나 유머스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 장면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매 순간을 귀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의 마무리이기 때문일까? 실컷 환상의 세계를 맛보고 그 감흥에 취해 있을 관객에게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 대사마저도 다시금 현실을 살아갈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이렇게 <소울>은 현학적이고 깊이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직접 가슴에 와 닿는, 가장 픽사스러운 격려와 위로를 전해주는 영화로 남는다.
O(Outstanding, 특출함)
마블이 <아이언 맨>을 넘어서야 한다면, 이제 픽사는 <소울>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
-
- 【결말포함】한국형 재난 영화의 문제점
#백두산 #한국영화 #영화리뷰
최신 한국 영화를 리뷰해드리고 추천해드립니다
이번에는 영화 '백두산'을 소개합니다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는
저의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작가 슈라 원칙
1.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2. 어그로를 끌지 않는다
3. 수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4. 함부로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 연락처
adonai0919@gmail.com※ 트위치
https://www.twitch.tv/sura_chtr※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b.writerTrack: Syn Cole - Gizmo [NCS Release]
Music provided by NoCopyrightSounds.
Watch: https://youtu.be/pZzSq8WfsKo
Free Download / Stream: http://ncs.io/Gizmo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
-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공식 예고편
《케이팝 데몬 헌터스》, 6월 20일 넷플릭스에서 시청하세요: https://www.netflix.com/title/81498621 케이팝 슈퍼스타 루미, 미라, 조이. 늘 매진을 기록하는 대형 스타디움 공연이 없을 땐 비밀 활동에 나서는데. 바로 악마 사냥꾼이 되어 주변에 도사리는 초자연적 위협으로부터 팬들을 지키는 것. 그런 이들 앞에 나타난 사상 최대의 적. 엄청난 매력의 라이벌 보이 그룹으로 위장한 악마들에게 맞서기 위해 루미, 미라, 조이는 힘을 합친다. 넷플릭스와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 선보이는 작품. 강렬한 재미와 액션 가득한 케이팝 오디세이로, 새로운 오리지널 곡들로 채워진다. 그룹 트와이스의 정연, 지효, 채영이 부르는 오리지널 신곡도 삽입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시청하세요. 6월 20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
- 영화 <메이드 인 이태리> 메인 예고편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을 팔기 위해
아름다운 토스카나에서
뜻밖의 한 달 살기를 시작한 아버지와 아들
이탈리아에서의 낭만적인 일상이
잊고 있던 두 사람의 행복을 되찾아주고
새로운 사랑도 가져다 주는데…
우리 여기서 다시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