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3-12-11 15:50:29
나는 언제 진짜입니까
인간 같은 테크노여서가 아니라, ‘양’이란 유일무이한 개체로서
* 2022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프터 양 After Yang, 2021
미국 / 드라마 / 96분
감독: 코고나다
나는 언제 진짜입니까, <애프터 양>
신나는 음악이 흐르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열심히 팔과 다리를 움직인다. 4인 이상 가족만이 도전할 수 있는 월례 댄스 대회에 참가 중인 가족들. 그중엔 제이크의 가족도 포함되어있다. ‘제이크’와 ‘키라’가 입양한 딸(‘미카’)과 미카의 문화와 유산을 잇기 위한 안드로이드 ‘양’으로 구성된 4인 가족. 안드로이드가 가족 구성원이라는 설정에서 느껴지듯, <애프터 양>의 세계관엔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테크노 사피엔스 말고도 많은 복제인간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인간은 위대한 종족으로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안드로이드와 복제인간과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안정을 찾는 평범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우리가 단순히 필요 때문에 무선 로봇청소기를 사는 것처럼, 그들도 같은 목적으로 안드로이드와 복제인간을 구입하고 사용한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들에게 원하는 서비스엔 ‘가족의 역할’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양이 문화와 유산을 이을 미카의 동반자이자 보디가드, 베이비시터, 그리고 둘도 없는 친오빠로 사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가족이 되는 데 필요한 요소는 <애프터 양>에서만큼은 조금의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혈연? 그런 건 처음부터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의미 없는, 불필요한 것들이다.
양은 항상 바쁜 키라와 제이크를 대신해 미카의 옆을 지켜준다. 입양아란 사실에 미카가 혼란스러워할 때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단단한 뿌리가 미카에게도 존재함을 알려준다. ‘진짜’ 아빠, ‘진짜’ 엄마가 가진 의미를 다시 정의해주며 미카에게 완전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카에게 양은 안드로이드 그 이상의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양이 댄스 대회를 마친 후 깨어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양의 고장으로 제이크는 당황한다. 학교를 잘 다니던 미카는 등교를 거부하고, 아내는 늘 언급했던 문제를 다시 또 꺼내 든다. 양에게 의존했던 부모의 역할을 이젠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들은 미카가 잊지 말아야 할 문화와 유산을 계속 이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양이 없어도 되는 가정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는 양을 고치는 걸 택한다.
새 제품으로 샀다고 생각했던 양은 사실 쓰였다가 온 제품이었다. 한 번도 꺼지지 않은 채 수면 모드 상태에서 여러 고객의 '무엇'으로 살았던 것이다. 제이크는 너무 비싼 수리비에 고민하다 양의 중심부가 문제라는 말에 테크노 사피엔스 박물관으로 향한다. 관장은 양의 중심부에 들어있는 기억장치를 발견하고, 귀중한 연구자료가 될 것이라며 제이크에게 양을 기부해 달라고 부탁한다. 제이크는 확답을 미뤄두고 양의 기억장치를 들고 집에 온다. 홀로 소파에 앉아 양의 비밀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제이크. <애프터 양>의 진짜 이야기는 그가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화면 가득 채워진 검은 하늘과 산발적으로 퍼진 빛나는 별들. 끝없이 아름다운 우주에서 각각 독립된 세계로 살아있는 기억들. 양의 과거는 그 추억 속에, 시간 속에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이크는 별 하나하나에 깃든 양이 담은 시선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몰랐던 양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양과 함께한 시간을 의미 있게 생각했는지 깨닫는다.
양의 기억의 조각들엔 공통적인 물음이 들어있다.
계속 눈으로 세상을, 사람을,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이유를 찾고 있다는 것. 양은 틈만 나면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나란 존재를 마주했다. 차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 좋다는 제이크의 말에 “제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라며 툭 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끝은 시작이란 말을 믿는지 묻는 키라에 “모르겠어요, 그런 믿음은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아서”라며 인간의 씁쓸함 같은 것을 표현한다. 솔직히 끝에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다며 웃지만, 슬픈 적도 있었냐는 물음엔 자신이 느낄 수 없는 슬픔에 대해 고심한 흔적을 보인다. 슬픔, 기쁨, 외로움, 허망함, 분노‥ 그에게 인간의 감정은 딱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다시 말해 아무리 찾아봐도 안드로이드가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고민하다 키라에게 답한 양의 말. 그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에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생산한다.
양은 ‘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음이, 단순히 손에 잡은 게 없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 역시 주입된 정보였을까? 그는 인간이 되고 싶었을까? 아니, 인간처럼 살고 싶었던 걸까? 양은 왜 갑자기 멈췄을까. 스스로의 의지였을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테크노 소재를 다루는 영화와 비교해 <애프터 양>이 훨씬 더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양의 목적이 ‘인간으로 살고 싶다’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양은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양은 끊임없이 ‘진짜’를 찾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만의 언어로 말이다. 그만의 시선으로, 그만의 기억법으로, 그만의 관계로 ‘내’가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진짜’를 발견하고자 했다. 테크노가 인간이 되고 싶어 하거나, 사랑을 할 수 있냐는 물음은 인간의 관점에서 출발해 인간의 관점 밖으로 나가지 못한 질문일 뿐이었다. 에이다가 제이크에게 인간만이 가진 마땅한 우월함을 꼬집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양은 인간으로 사는 일을 열망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게 필요한 진짜를 찾는 ‘방법’을 궁금했다. 존재의 의무만으로 인간이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듯, 양에게도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다. “행복해?”란 질문이 자신에게 맞는 질문인지 되묻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나비를 좋아하는 중국인이라서 나비를 수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나비를 수집하고 싶은 것처럼. 양은 자신이 저장한 기억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 어떤 감정으로 저장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 정말 의미 있는 감정의 총책인지, 덩어리인지 그리하여 진짜 피부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인간 같은 테크노여서가 아니라, ‘양’이란 유일무이한 개체로서.
왜? 양은 어느 순간부터 누가 묻지도 않은 것들에 의심하기 시작했고, 의문을 품고서 자꾸만 안드로이드인 자신을 봤기 때문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은 의심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 의심으로 인해 생긴 믿음으로 진짜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짜는 평생 나의 존재를, 의미를 만드는 데 계속 작용된다. 거울이 시작이었을 수도 있고, 가족사진을 찍기 바로 직전 어딘가를 응시하던 순간, 복제인간으로 탄생한 에이다의 웃음, 새벽마다 속삭이는 미카의 목소리, 제이크와 키라의 물음이었을 수도 있다. 우린 무엇이 양의 기억장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양이 진작부터 사진만 찍어대는 셔터의 역할에서 이탈해 있었다는 걸 인지할 뿐이다.
제이크는 양의 기억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양이 미카에게 좋은 오빠가 되어준 것처럼, 자신과 아내에게도 좋은 아들, 나아가 친구였다는 걸 몸소 체감한다. 마치 진짜 가족을 영영 떠나보내는 것처럼 그는 키라와 함께 양의 거취를 최종적으로 논의한다. 양의 기억은 인간에게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면서, 테크노 사피엔스 박물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양을 주지 않으려는 기술자에게 내 것이니 설명할 필요가 없다며 딱 잘라 말했던 제이크가 변한 것이다. 미카가 양이 테크노여서 사랑한 게 아닌 것처럼, 양이 미카에게 저장된 뿌리가 아니라 진정한 뿌리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처럼. 두 사람에게 양은 테크노로 기능하지 않은 순간부터 귀중해졌다.
본래 양은 인간이 원했기에 만들어졌다. 인간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이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 한계를 거뜬히 뛰어넘는 힘, 테크노와 복제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분명한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손을 떠난 것들을 결코 좌지우지할 수 없다. 만들고 생산하고, 세상에 내놓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이후엔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어떠한 말로 대체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언어로 양은 죽었지만, 양의 언어론 그는 살아있다.
양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그의 가슴에 귀를 대보는 에이다의 행동이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것도 그래서 당연하다. 양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짜’를 두고 우린 또 우리의 언어로 해석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고찰하는 방식과 같다 하겠지. <애프터 양>은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양의 기억을 끄집어낸 게 아니다. 인간의 방식과 유사해 보인다 해서 인간의 시각으로 읽히는 게 정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양만의 이야기와 양만이 해내고자 하는 지점이 충분히 존재함을 알려주고자 한다. 양은 독립된 대상으로서 나의 진짜를 찾고 싶은 테크노이자, 테크노가 아닌 ‘양’이다. 양의 기억장치는 기계적으로 ‘저장’한 게 아니라 자의적으로 ‘품고’ 있었던 감정의 소용돌이고, 그 속으로 <애프터 양>이 관객을 초대한 것이다.
감독은 <콜럼버스>를 통해 비대칭에서 각자의 균형을 찾는 법을 공유했었다. 그 안에서 각자의 치유의 공간을 찾기를 바랐다. <애프터 양>을 통해선, 존재의 다름과 존재의 존재 이유를 함께 고민해보길 원한다. 코고나다 감독만의 낯설지만, 감각적인 표현방식이 한층 더 세밀하고 섬세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진짜’를 갈망하는 양의 우주가 내게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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