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3-12-28 22:45:28
작은 아이의 세계, 그 속의 감정들
-<클레오의 세계>(2023)
개봉 전 시사회에서 영화를 먼저 관람하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영화 속 감정 읽기] 라는 연재를 합니다. 영화리뷰안에 각 인물이 대표하는 감정을 적고 그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갓난아이들에게 옆에 있는 엄마는 의지해야 할 꼭 필요한 존재다. 먹을 것을 해결해 주고, 아직 뭐가 뭔지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엄마는 그 아이의 전부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의 세계다. 꼭 엄마만 그런 존재가 되라는 법은 없다. 아빠도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친척이나 다른 누군가가 아이와 오랜 시간 같이 시간을 보내고 도움을 준다면, 그 자체로 아이의 세계에 포함될 수 있다. 어른들이 보기에 아주 좁고 작은 세계지만, 아이에게 그 세계는 무너지면 안 되는 무척이나 큰 세계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는 주인공 클레오(루이스 모루아-팡자니)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를 어릴 적부터 키운 보모 글로리아(일사 모레노 제고)는 어쩌면 클레오의 전부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게 고향으로 떠나야 할 사정이 생기고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는 클레오의 반응과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면서 그가 겪는 상실감과 그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클레오는 마음 한 구석이 시리고 슬프다. 흔들리는 클레오의 세계를 영화는 담담하고 강렬하게 담고 있다.
첫 번째 감정 - 클레오의 두려움
클레오의 세계에는 아빠도 있고,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도 있고, 보모인 글로리아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글로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이 웃고 떠들면서 감정을 공유한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적어도 클레오의 세계에 엄마는 없다. 그 엄마라는 존재를 대신하는 사람이 바로 글로리아다. 글로리아는 클레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친구이자 엄마 같은 존재다. 같이 샤워를 하고, 같이 병원을 가고, 같이 밥을 먹는다. 그러니까 일상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어쩌면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영화 초반 클레오와 글로리아의 수다와 장난을 지나면, 고향에 계신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온다. 그 전화를 받고 글로리아가 우는 그 순간부터 클레오에게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조금씩 생겨난다. 슬픔을 잠시 묻어둔 채 클레오를 챙기고 재우는 글로리아의 모습도 그렇게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어느 순간에 클레오에게 이제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해 버린다. 클로에는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아이가 그렇듯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냐는 물음을 다시 던진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로리아의 말에 클레오는 기운이 없어진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아이에겐 자신이 알던, 무척이나 친숙했던 큰 세계가 통째로 사라져 버릴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의 두려움은 학교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운을 없애고 때론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하지만 곧 그 세계는 무너진다. 아빠에게 위로받고 또 장난도 곧잘 치지만, 그런 아빠의 노력이 텅 비어버린 클레오의 세계를 전부 채울 수는 없다.
두 번째 감정 - 클레오의 질투
글로리아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클레오는 마음속에서 글로리아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글로리아의 고향으로 놀러 가게 된다. 여기서 클레오가 겪는 일들의 대부분은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순간들이다. 오랜만에 자신의 모든 세계인 글로리아를 만났고, 그의 가족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클레오에겐 잃어버린 세계를 찾은 기쁨을 선사한다. 자신의 집이 있는 파리보다는 열악한 시골 섬의 작은 마을이지만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도 하고, 바다에서 수영도 배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게는 임신한 딸과 아들이 있다. 글로리아의 딸이 출산하게 되면서 그의 집에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린다. 이때부터 글로리아는 자신의 손주를 돌보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클레오는 자신이 받던 글로리아의 사랑을 갓난아이가 빼앗아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느끼는 온 세상을 그 아이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작은 클레오의 마음속에 큰 질투의 불씨를 불어넣는다. 그가 글로리아의 손주에게 하는 어떤 행동은 조금은 충격적으로 느껴지지만 클레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클레오의 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클레오와 갓난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과 클레오가 하는 행동을 본 글로리아는 클레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친다. 그때부터 클레오는 달리기 시작하고, 해변까지 간 클로에는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폭발하는 질투심과 죄책감이 동시에 그를 괴롭힌다. 어쩌면 클레오의 세계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당황한 클레오의 표정은 그 모든 붕괴를 표현하고 있다. 클레오의 감정은 그가 해변으로 달려가는 그 모든 순간에 완전히 방출된다. 그걸 보고 있으면 보는 이들도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모르게 된다. 클레오의 질투는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속에 일종의 파괴본능을 만들어냈고, 스스로 악마가 되고 싶었던 클레오는 부끄러움에 바다로 몸을 던진다.
세 번째 감정 - 글로리아의 슬픔
이 영화가 클레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글로리아의 감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클레오를 키워온 글로리아 역시 클레오에게 많은 감정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서로 나눈 감정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처럼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다. 고향으로 떠나야 하는 순간에 글로리아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의 마음에 글로리아의 자리는 꽤나 크게 만들어져 있었을 것이다. 담담히 그 상황을 설명하고 떠나는 글로리아는 자신의 힘으로 키워낸 작은 아이의 세계를 잠시 바라보고 돌아선다.
클레오가 자신의 고향으로 찾아온 방학기간 동안, 글로리아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신만의 사업을 준비하면서 딸의 출산을 돕고, 태어난 아이를 챙겨야 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잠시나마 찾아온 클레오가 너무나 반갑지만, 온전히 그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글로리아는 자신의 가족을 좀 더 신경 쓰며 챙길 수밖에 없다. 여전히 클레오에게 다정한 글로리아지만, 그런 모든 상황을 지나면서 클레오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엔 글로리아가 울음을 터뜨린다. 클레오를 공학까지 배웅하며 돌아서는 그의 마음은 복잡하다. 결국 클레오와 완전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펑펑 눈물을 쏟는다. 아마도 클레오의 방학기간 동안 클레오도 그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클레오는 비행기로 향하며 울음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글로리아는 끝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의 눈물은 클레오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게 된 그 상황에 대한 슬픔이 담겨있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는 클레오라는 아이의 시선에서 상황들을 따라간다. 다양한 클로즈업을 통해 클레오가 진짜로 볼만한 장면들을 화면으로 담고, 느낄만한 감정들을 무척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영화 중간중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전환 장면은 수채화 같은 이미지를 통해 클레오의 세계가 가진 따뜻함을 전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작은 아이 클레오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협소한 작은 공간만 존재했던 클레오의 세계는 아마도 이 영화 속의 일을 겪고 나면 엄청나게 거대해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겪은 성장기처럼. 글로리아는 비록 엄마는 아니었지만 클레오에게 중요한 존재였고, 두 사람이 나눴던 감정의 교류는 모두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영화는 그 거대한 사랑을 클레오의 얼굴과 표정으로 잘 보여준다. 영화의 원제에는 보모의 이름인 글로리아 가 들어간다. 하지만 한국에 수입되면서 <클레오의 세계>로 제목이 바뀌었다.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클레오의 세계가 곧 글로리아였으니.. 어쩌면 이 상황을 잘 표현한 완벽한 번역이 아닐까.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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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구역 빌런이다.
이 글은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좀비물의 특성상 첨부된 사진이 거북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괴생명체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뱀파이어였다.
그들은 영원불멸에 가까운 삶을 피를 통해 연명해야 했지만, 이성을 잃지 않고 인간에 섞여 존재하기를 택했다. 무의미할 정도로 무한정한 시간은 뱀파이어들에게는 부질없는 부를 축적하게 했고, 인간은 둘 중 하나도 얻지 못해 아등바등하는 삶을 가엾게 지켜보는 그들의 눈에는 언제나 가을바람 같은 쓸쓸함이 가득했다. 이 모든 생활이 진절머리 난 뱀파이어들에게 끝을 선사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들을 타들어가게 할 햇빛뿐이었다.
이들이 가진 고고함과 불사의 몸은 영화를 철학적으로도, 때론 스타일 있는 액션물로도 만들 수 있었지만. 영화는 조금 더 원초적이며 복잡하지 않은 크리처를 원했다. 이성이 있는 뱀파이어들은 넘어갈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해 제작자들의 도덕적 부담을 조금은 덜어줄 법 한.
그렇게 좀비가 등장했다.
피에 대한 본능과 소리에 대한 감각만 남았을 뿐 그 어떤 생각도,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앞뒤 재는 것 없이 뜀박질만 할 수 있는 괴력의 존재. 이렇게 단순하고 파괴적인 "좀비"는 생물과 무생물의 특성을 지닌 바이러스 마냥 빠르게 뱀파이어들을 쓰러뜨리고 영화계에서 무자비한 지배종의 자리를 틀어쥐게 되었다.
마치 오랫동안 일본과 중국에 가려져 저평가 받고, 때로는 주류의 문화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던 한국 문화가 넷플릭스의 노른자위 땅에 당당히 깃발을 꽂은 것처럼.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은 넷플릭스에서의 지배종 자리를 노리는 한국 콘텐츠의 저력을 시험하는 자리에 다시 한번 올라있다. [지옥], [오징어 게임]에 뒤지지 않는 명성을 이어 구독자들의 목덜미에 치명적인 이빨 자국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인가.
신선함 반 식상함 반;그리고 빌런의 중요성
사진출처:YTN STAR
[지우학]에 나오는 좀비들도 "좀비물"이라 불리는 영화에서 약속한 암묵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빛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는 점과 감염이 전파되는 속도가 한국인의 성질머리만큼이나 빠르다는 것이 조금 도드라질 뿐이다.
널리 알려진 좀비의 특성상, 영화의 구성이 새로울 리가 없다. 전반부에 휘몰아치듯 벌어지는 추격전을 빙자한 살육전과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Minor)의 생존자들이 한자리로 모이는 과정. 본능 외엔 껍데기뿐인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작은 탈출을 감행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필수 요소처럼 녹아있는 크고 작은 분열과 드러나는 비열한 인간의 본성들.
이미 한국 영화에서도 다섯 손가락을 넘길 만큼의 좀비물이 존재하고 있는 시점에, [지우학]이 레퍼런스로 참고한 작품은 놀랍게도 좀비물보다는 같은 넷플릭스 식구인 [지옥]이나 [돈 룩업]에 에 가깝다는 지점이 조금은 새롭다.
도륙에 가깝다시피 한 시각적 영화에서 머물기보다 최근의 트렌드인 사회적 풍자와 근원적인 고민에 대한 뉘앙스를 가미하는 것으로 비슷비슷한 좀비 영화"류"에서 벗어나고자 한 셈이다.
하지만 이 [지우학]이 다른 좀비물과 가장 차별화되는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트렌드를 따르지 않은데 있다. 바로 치가 떨리도록 무섭고 집요한 빌런 윤귀남(유인수)의 등장.
여태 봐 온 좀비 영화의 전형적인 빌런은 나연(이유미)에 가까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가뜩이나 급박한 상황에 짜증을 잔뜩 끌어올려 살아남은 자들의 신경을 있는 대로 긁어대다 잔인하게 죽고 만다. 보는 순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안에서는 일회용품에 지나지 않을법하다는 것을 관객들이 알아채기 쉽지만, 그러려니 하며 용인하고 넘어갈 만큼의 역할. 딱 그만큼에 머무르기 쉽다. 단지 그 악랄함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그러나 귀남의 경우는 다르다.
좀비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이성도 잃지 않는다. 또한 시즌제를 관통하게 될지도 모르는 바이러스의 변이나 면역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또한 이 최종 빌런의 중요도를 높여준다.
시리즈 자체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우학이 가진 매력을 배가 시키는 데는 귀남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음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시리즈를 살리는데 일조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 하필 학교인가?;그리고 왜 학생인가.
사진 출처:서울 경제
영화에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공간인 학교 안에 있는 불안정한 존재인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우학]에서 보여주는 학교는 학생을 전혀 보호해 주지 않는 곳임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단지 좀비의 근원지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학교 폭력에서도. 빈부 격차에서 오는 차별에서도, 그 어떤 것에서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가장 지옥 같은 곳이 된 것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그들은 교복이라는 갑옷 단 하나로 스스로를 무장한 채 한숨 한 번 쉬며 교문 문턱을 넘어야만 했다.
작품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그들이 학교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알려준다.
수많은 학생들이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처음부터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명찰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로 대체되거나 누구누구의 친구 정도의 언급이나 존재감에 머무른다. 극중 남라(조이현)역시 자신이 맡은 반장이라는 역할에 가려져 이름이 무엇인지 친구들의 입에서조차 몇 번 듣지 못한다.
또한 목숨이 빛의 속도로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한때 선생님들이었던 어른들의 호통에 움찔할 수밖에 없다. 단지 자신보다 어린 학생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만으로. 그들은 핍박받고 어리다고 무시당해야 한다.
가장 씁쓸한 부분은.
그 아무리 허울뿐인 학교라 해도, 학교의 담벼락을 넘는 순간 보호받아야 할 학생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전락해버린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학교 밖으로 나갔을 때의 그들은 이 나라의 희망도 아니요, 보호해야 할 미성년자도 아니다. 그저 나보다 먼저 넘어져 나 대신 좀비의 밥이 될 수도 있는 후보군 들 중 한 명이거나 대충 소리치고 윽박질러 자신이 유리한 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존자들은 학교에 갇혀 있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갖게 된다. 아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희한한 존재가 가진 본질적인 두려움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다른 학생들은 사복을 입지만, 남라는 여전히 교복 차림이라는 것에서도 이 차이를 잘 느낄 수 있다.
이 복잡한 존재들이 겪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도, 학생이라는 불완전한 생명체는 웃고 장난을 치며 무려 내일을 기약한다. 이 혼돈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변하지 않은 정체성에 괜히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과연 좀비만이 무서울까.;방관자들이 큰소리치는 현실
영화는 많은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도 너무 가깝고 생생한 "지금"이라는 현실을 말이다. 점점 영화와 현실의 구분이 되어가지 않는 지금을 살고 있음이 이 작품을 통해서도 느껴진다.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헛소리를 침착하고 밝게 내뱉는 안내방송이나, 현재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에만 급급한 높으신 분들, 왕따 피해자 학생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선생님들.
사실 학생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방관자에 가깝고, 이 방관자들의 헛소리 덕에 좀비 사태는 좀 더 빠르고 심각하게 퍼져나간다. 그 와중에 방관자들이 예측한 이 일의 심각성마저도 과소평가된 것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마치 좀비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이 심각해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좀비는 폭탄으로 끝낼 수 라도 있는 존재였겠지만. 방관자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이런 태도들은 효성시를 다 날려 버리는 것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마치 영화 [돈 룩업]이 보여준 것처럼, 최후의 1인마저 모두 좀비가 되어야만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문제일 것이다. 죽은 자와 좀비 모두 그때가 되면 모두 말이 없을 것이기에.
마치면서
사실 [지우학]은 거슬리는 점 또한 꽤나 많은 영화이다.
선정성(을 암시하는 장면의 삽입)이나 폭력성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시즌제를 염두에 둔 결말도 아쉽다. 6화를 넘어서면서 급격히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형사 역을 맡은 이규형 배우의 뜬금없는 인류애도 완벽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이 [지우학]의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단점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점을 더욱 잘 살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뭐니 뭐니 해도 다시 한번 박사 학위 있는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이 글의 TMI]
언제부터인가 식상하고 기본적이며 때론 인사치레처럼 여겨지던 모든 문장들을 달리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는 진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건강하라.
돈 아껴 써라.
자기를 먼저 챙겨라.
등등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는 말은 그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많이 생기는 삶의 터전 속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나이가 다르고 현재 상황이 다르겠지만. 내가 말하는 이 문장들의 단 하나의 단어 만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있는 저울에 좀 더 진중한 무게를 올릴 수 있기를.
2022년 올해는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은 더 순조롭게 완료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과보다는 과정 안에서 더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지금우리학교는 #넷플릭스 #지우학 #영화추천 #넷플릭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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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단 호크, 마블의 새 빌런되다! 새 시리즈 <문나이트> 합류!
- 출처: 네이버 영화
마블 스튜디오가 신작 <문 나이트>의 악역을 찾았습니다.
미국 대중 매체 버라이어티는 ‘배우 에단 호크가 디즈니 플러스의 새로운 시리즈 <문 나이트>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으며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배우 오스카 아이삭이 맡은 마크 스펙터와 대결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에단 호크의 캐릭터에 대한 정확한 세부 사항은 비밀에 부쳐지고 있지만, 보도에 따르면 에단 호크는 <문 나이트>의 빌런을 연기할 예정입니다. 버라이어티는 이전에 오스카 이삭이 <문 나이트> 시리즈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할 예정이라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배우 에단 호크는 영화 <트레이닝 데이>, <보이후드>에서 남우조연상 그리고 영화 <비포 미드나잇>과 <비포 선셋>으로 각색상 총 4번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명배우입니다. 최근 작품으로는 영화 <매그니피센트 7>,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 그리고 <테슬라>가 있습니다.
또한, 배우 에단 호크는 최근 쇼타임 시리즈 <더 굿 로드 버드>에서 해방 주의자 존 브라운 역으로 주연을 맡았으며 에단 호크의 첫 TV 작품입니다.
<문 나이트>는 과거에는 CIA 요원, 현재는 잔혹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크 스펙터(오스카 아이작)가 이집트 달의 신 '콘슈'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고 이후 달의 4가지 모습과 대응되는 네 명의 다른 성격들이 그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싸우게 되면서 '콘슈'의 인간 아바타로서 범죄와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데스노트>, <엑소시스트>, <판타스틱4>의 각본과 넷플릭스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공동 제작을 맡았던 제레미 슬레이터가 이번 <문 나이트>의 작가이자 제작자를 맡았습니다. <문 나이트>는 모든 마블-디즈니 플러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될 예정입니다.
또 다른 미국 매체 더 랩은 '<문 나이트> 시리즈는 3월부터 부다페스트에서 촬영을 시작하며 마블 스튜디오가 향후 몇 년 동안 디즈니 플러스를 위해 제작하는 11개의 시리즈 중 하나'라고 전했습니다.
첫 번째는 얼마 전 북미에서 공개된 <완다비전>이 있으며 <팔콘과 윈터솔져>는 다가오는 3월, <록키>는 5월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왓 이프>, <미스 마블>, <호크아이>는 올해 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첫 공개됩니다.
마블은 배우 에단 호크 합류에 대한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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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탈리스트>, 몇몇 장면들과 질문들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2024, 브래디 코베)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1
멀미하며 터널을 빠져나가는
<브루탈리스트>는 취조실에 갇혀 패닉한 조피아의 정면 얼굴로 시작해, 라즐로 토스 회고전에서 자신 있는 연설로 숙부와 숙모의 유산을 기리는 나이든 조피아의 정면 얼굴과 오프닝 오버랩으로 끝난다. 일종의 느슨한 액자로 다가오는 이 구성은 영화를 조피아가 쓴 라즐로의 전기처럼 바라보게도 한다. 조피아는 라즐로(와 에르제벳)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설명하며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목표가 중요하다“라는 문장을 강조한다. 바로 그 ‘과정’, 즉 라즐로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이민자로서 아메리칸 드림에 배반당하면서도 ‘고작 몇 미터의 높이를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목격하고 나서 듣게 되는 대사다. 텍스트만으로는 위험하게 들리는 이 문장 자체가 가치관이라기보단- 가치관이나 태도를 지키기 위한 주문일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과정’의 서술 방식은 집요하게 상세하되 목적지를 분명히 두고 있어 고통의 전시나 낭만화로 읽힐 위험을 피한다. 고난과 완성된 작품을 잇는 어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는 ‘그러한 맥락으로’에 가깝다.
액자 안의 두 번째 오프닝은 미국에 닿은 라즐로의 모습에 에르제벳의 편지가 보이스오버되는 시퀀스다. 비좁은 공간에서 막 잠에 깨어 부랴부랴 인파를 헤치고 나가는 라즐로를 따라가는 롱테이크는 매초가 갑갑하고 초조하다. 편지가 화면을 빠져나가는 와중 라즐로는 그곳에서 빠져나가려 애쓴다. 부드럽게 흐르는 내레이션-편지와 더디게 나아가는 인물, 그 ‘방향’은 서로 어긋나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실제로는 아직 닿지 못한 에르제벳의 음성이 라즐로를 이끌며 함께 암흑을 벗어나는 듯한 연출이다. 라즐로는 마침내 야외로 나가 탁하고 환한 공허를 만난다. 무언가를 보고 환호하는 그는 화면 맨 하단에 몰려 있다. 이내 카메라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찍는다. 자유의 여신상, 다만 거꾸로 뒤집혀 있거나 횡으로 돌아가 있다. 노골적인 만큼 효과적인 은유다.
이어 라즐로가 탄 차가 도로를 달리는 모습에 타이틀과 크레딧이 겹치는데, 도로/차를 가로지르는 수평 방향으로 진행된다.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지럽다. 그 멀미의 감각으로 라즐로의 언어를 감히/조금이나마 알아들어 보기를 제안하는 것일까. 이를 비롯해 영화에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도로를 달리거나 터널을 지나는 숏이 몇 삽입되어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 ‘가로막히며 더디게 나아가는’ 감각이 있었다면 이 숏들에는 ‘안전장치 없이 위태롭게 달리는’ 감각이 있다. 특히 에르제벳과 말다툼하며 어두운 도로를 운전하는 씬은 상징적이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며 심리적 거리는 멀어지는 듯도 보였던 부부는 나란히 어둠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라즐로는 단 하나 헤로인에는 굴복했으나 자신을 유혹하고 내리누르는 나머지 것들은 거슬렀다. 그가 멀미하고 구역질하며 캄캄한 터널을 견디고 환한 빛에 다다를 수 있게 도운 것은 그 자신과 에르제벳 외 누구도 아니었다.
사라진 해리슨
오프닝 크레딧처럼, <브루탈리스트>에서는 솟아오르거나 나아가는 라즐로와 그를 방해하는 ‘미국적인 것’이 대립한다. 이미지와 언어/소리가 서로 불일치함으로써 본질을 암시하기도 한다. 해리슨 밴 뷰런이 라즐로를 연회에 초대해 설득하며 아름다운 일화와 명분을 늘어놓을 때, 화면에는 내기 포커를 치며 값비싼 술을 홀짝이는 파티 참가자-부자-들의 몽타주가 흐른다. 꼭 중세 유럽 귀족들마냥 예술가를 ‘후원’하며 제 소유물로 두려는 듯한 해리슨은 그들 중 하나이면서 홀로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위선자, 겸손함과 우아함을 연기하다 실패하는 나르시시스트다. 화를 펄펄 내며 강렬하게 등장한 그의 퇴장은 모호하다. 실질적으로 ‘없다시피 한’ 그 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다.
<브루탈리스트>는 관람이 끝나자 마자 페이버릿 씬이 자동으로 생기는 종류의 영화였다. 거기엔 의외로 라즐로가 없었다.(애드리언 브로디가 담배를 무는 모든 씬은 논외로 한다.) 남편의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된 에르제벳은 보조기구를 짚고 천천히 해리슨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간다. 식탁에 둘러앉은 해리슨, 아들 해리, 딸 매기 등등. 에르제벳은 입구에 몰려 우뚝 선 채 해리슨을 폭로한다.(휠체어 이용/걷기를 에이블리즘에 오염된 의도로 구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작가가 상징을 드리우려 했다’기 보다는 ‘에르제벳에게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즐로 역시 엔딩에서는 휠체어에 타 있기도 하고. 영양실조로 하반신이 마비된 적이 있는 에르제벳은 휠체어에 앉아야 이동이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서서 걸어 들어가기를 택한 까닭은, ‘내가 불편해지고 심지어는 위험해지더라도 저들을 내려다보거나 적어도 물리적으로 동등한 눈높이에 있기 위함’이었던 것이 아닐까.) 해리슨은 뒤늦게 부인하고 제발 저리듯 라즐로를 해고하겠다고 선언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대응으로 일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해리는 과하게 분노하며 에르제벳을 질질 끌고 나가 내동댕이친다. 매기는 해리를 비난하지만, 그의 ‘순수한’(기계적인) 선의는 이 영화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숏은 끊어지지 않고, 카메라는 되돌아가 아버지를 찾는 해리를 따라 긴긴 계단을 오른다.(이 부분에서 조 알윈이 놀라웠다.) 해리는 좀 이상하다. 흥분해 있고, 화나 있고, 방금 한 행동에 대해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고 있는 듯도 하고… 헌데 복합적인 격앙에 담긴 것은 그게 다가 아니다. 그의 일부는 어쩐지 당황해 있고, 무언갈 감추고자 하지만 실패하는 것도 같다. 그는 해리슨의 혐의가 사실임을 내심 짐작하거나 그 자신이 한 일을 돌이키고 있을 수도 있다.(조 알윈도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DAZED]) 여기서 시간/편집 순으로 한참 전의 시퀀스를 떠올리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만취한 해리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라즐로를 협박하며 조피아를 언급한다. 얼마 후 호숫가에 있는 조피아에게 산책을 청한다. 두 사람을 그대로 고립시킨 채 영화는 호숫가의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해리슨, 매기, 에르제벳 등등.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에르제벳은 최선을 다해 웃고 적절히 반응한다. 어느 시점에 배경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숲에서 걸어오는 해리와 조피아가 포착되는데, 클로즈업이 아닌 평이한 숏이다. 늘 그렇듯 말없는 조피아와 답지않게 조용한 해리에게서 읽히는 신호는 많지 않다. 해리는 술이 좀 깬 것 같다. 아까는 수영복 차림이던 조피아가 평상복을 입고 있고, 걸어오며 가디건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이 찰나를 우리는 계단을 오르는 해리에게서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위계는 은근하고 명확한 것은 없다.
해리슨은 저택에 없다. 해리와 매기는 사람을 모으고 개를 풀어 주변을 수색한다. 컴컴한 화면에 횃불만이 밝혀진 가운데 개들과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은 어쩐지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곧 라즐로가 설계한 커뮤니티 센터에 다다른다. 영화는 빈 건물의 곳곳을 조명한다. 말소리들은 높은 천정과 차가운 벽 사이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카메라는 라즐로가 설계한 ‘빛의 십자가’에 머문다. 그리고 몇 십 년을 건너뛰어 라즐로 토스 회고전을 촬영한다. 밴 뷰런 일가는 재등장하지 않는다. 해리슨은 영화에서 증발했다. 이민자 예술가 라즐로의 경험과 유산, 일관된 태도, 그의 고난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체화한 ‘브루탈리즘’ 건축 예술은 역사에 남았고 기려진다. 그러나 그의 착취자, 미국인 억만장자 해리슨은 악인으로조차 기억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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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소되었거나 되지 않은 질문들
- 관람 전 질문: AI 사용이 필요했는가? 연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 두 배우의 헝가리어는 훌륭했으나, 워낙 어려운 언어라 세밀한 리얼리티를 위해 녹음된 대사를 다듬는 데에 사용했다고 하던데… 두 인물이 ‘헝가리어를 꽤 능숙하게 구사하는 비헝가리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했다면 ‘양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헝가리어는 주로 편지 내레이팅에서 쓰였고, (내 생각이지만)헝가리인을 포함한 관객들이 그 완벽함에 감명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허나 워낙 민감한 이슈고… 이렇게 바운더리가 모호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수정’하기 시작하다 점점 배우 각자의 고유성을 침범하면 어쩌나,라는 걱정을 하며 판단을 유보중이다. 다만 제작진의 AI 사용 결정 ‘탓에’ 오스카가 다른 배우에게 돌아간다면 애드리언 브로디는 속이 좀 쓰릴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는 이미 연기상을 여럿 수상했고 BAFTA 수상 소감에선 사려깊게도 동료 후보들을 모두 호명했다.)
- 관람 후 질문: 영화는 은근히 시오니즘을 지향하고 있는가?
: 조피아는 ‘예루살렘 행’이 소명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듣고 “그럼 우린 유대인이 아닌 거니?”라고 혼란을 표했던 에르제벳은 후에 ‘여기선 살 수 없다’며 이스라엘로 가자고 말한다. 아마 브래디 코베도 영화에 대한 반응에 ‘시오니즘’이라는 화두가 등장할 것임을 예상했을 것 같다. 그가 NYFCC 작품상을 수상하며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 점령을 다룬 팔레스타인 다큐멘터리)<No Other Land>를 서포트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을 간접적 근거로 들 수도 있으나, 당연히 이야기 내 맥락을 먼저 살펴봐야 할 테다. 조피아의 단정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야 할까? <브루탈리스트> 주인공들이 (아마도 1950년대에) 이스라엘 행을 결정하는 바탕에는 막연한 희망과 동경보단 구체적인 좌절이 있다. ‘그나마 가능한 살길’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감독은 “캐릭터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 주위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DAZED])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각각 인정받는 프로 건축가/교수와 저명한 기자였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서로 이별했다. 아메리카에서 라즐로의 드리밍은 지속적으로 제지당한다. 역시 고초를 겪은 조피아는 두 사람의 관찰자이기도 했다. 헝가리와 미국에서 그들은 ‘살 수가 없’다. 물론 그 ‘살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온 터전을 침범한다. 허나 적어도 이들 가족의 경우는 이미 ‘건국’된 이스라엘로 향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순서는 아니다.(그래서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영화 전반부에는 트루먼의 ‘이스라엘 국가 선포’ 연설이 보이스오버 되는 씬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을 ‘거꾸로 자유의 여신상’으로 은유하며 허상과 위선 덩어리로 바라보는 <브루탈리스트>는, 미국 대통령의 ‘승인’ 또한 무책임한 제스처이며 허상이라고 암시하는 것일까? 과해석일 수도 있다. (미국은 하얗고 가자지구‘도’ 미국의 것이며 ‘신이 주신 두 개의 성별’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백악관에 들어앉은 지금, <브루탈리스트>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묻는가?)
기념비적 연기들
아직도 <피아니스트>만이 자주 화자되나, 애드리언 브로디는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곤 했다. 다만 때로 ‘도저히 모를’ 작품과 캐릭터를 택했기에 고유의 분위기와 퍼포먼스가 제대로 빛나지 못했을 뿐이다.(가끔은 그가 웨스 앤더슨 픽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대 배경과 캐릭터 설정에서 어쩔 수 없이 <피아니스트>를 떠올리게 되었으나, <브루탈리스트> 작품 자체 만큼이나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새로운 고전’이라고 일컬을 만했다. 라즐로는 큰소리를 낼 때 가장 취약해 보이고 가만히 미소 지을 때 가장 단단해 보인다. 압도하고 누르기보단 거센 바람에 바스러지며 꼿꼿이 상처받는 자. 연약하며 우아하고 엉망인 채로 고고한 존재감이라고 할까… 모조리 사랑하기는 힘든 인물이었으나 라즐로 토스는 <디태치먼트>의 헨리와 나란히, 내 ‘애드리언 브로디 최애 퍼포먼스’ 목록에 올랐다. 멋진 서재 리모델링을 보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드미트리마냥 열을 펄펄 내는 해리슨 앞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빼무는 라즐로-보십시오 이것이 애드리언 브로디 입니다. 그래, 늘 당신이 배우로서 좀 더 주목 받았으면 했었다.
펠리시티 존스의 연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굉장했다. 앉아있건 서있건 누워있건 화면 어디에 있건 중심이 되었다. 에르제벳이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라즐로를 위한’ 역할로 남아 아쉽기는 했으나, 그는 이끌리기보다는 이끄는, 무조건적인 응원이 아닌 이해를 선행한 지지를 보내는 동반자였다. 남편이 빠르게 미는 휠체어나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탄 에르제벳은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지하고 질문하고 따지고 주장했다. 폐쇄적인 구석이 있는 라즐로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성공했으며, 이내 남편의 대변자 자리에 위치했다. 헤로인을 맞고 사랑을 나누며 라즐로가 입밖으로 내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되는 에르제벳은, 마치 남편의 내면을 읽는 것처럼 보였다. 토스 부부의 베드신들은 기묘하고 불편하고 애처로우며 아름다운데, 육체의 하나됨을 넘어선 생각과 정서의 하나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편집도 편집이었고, 펠리시티 존스의 액션을 애드리언 브로디의 리액션이 받쳐주며 마디마디 환상적으로 맞물리는 연기 합이 대단했다.
+ 가이 피어스도 물론 훌륭했고, 라피 캐시디는 관심 배우 목록에 올렸고, 스테이시 마틴은 ‘아무것도 안 하는’ 역할을 맡았고, 기대했던 이삭 드 번콜은 애드리언 브로디와 공사장 컨셉 화보를 찍은 후 퇴장했고, 조 알윈은 내내 효과적으로 신경을 거스르다 앞서 언급한 롱테이크에서 ‘뭔갈’ 해냈다.
* 참고 인터뷰
DAZED | Joe Alwyn and Brady Corbet on The Brutalist: ‘It’s very, very rad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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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시선과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캐롤"
날 부정하며 산다면 무슨 엄마 자격이 있겠어?
캐롤의 말 중에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그 누구도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자기도 모르게 우연한 어떤 계기로 점차 스며들 듯이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되죠.
자신도 모르게 말입니다.
그 대상은 한정되어 있지 않고 무한히 열려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간의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남자와 남자 간의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여자와 여자 간의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과 눈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그 순간만큼은 이게 진정 나의 모습인가 할 정도로 나조차도 몰랐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저절로 눈길이 가면서 쫓느라 바쁘고,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랑'의 면모를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캐롤'입니다.
때로는 사랑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다가도, 또 때로는 그런 자신을 부정하기도 하며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영화 '캐롤'은 사랑은 시선과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통해서 그 메시지를 더욱 강렬히 전달해주죠.
영화의 가장 큰 핵심이자 매력은 바로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를 보는 여러분도 등장인물의 시선에 집중하며 같이 따라가면서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 '캐롤'은 여자와 여자 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애절하고 강한 인상을 안겨 주는 영화입니다.
그럼 어떤 영화인지 간단히 살펴볼까요?
첫 번째 사진의 갈색머리 여성의 이름은 '테레즈'이고, 두 번째 사진의 금발머리 여성의 이름은 '캐롤'입니다.
영화는 테레즈의 지인인 '잭'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시작됩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음식과 바가 어우러진 어느 장소였습니다.
그는 우연히 테레즈를 발견하고 인사를 하죠.
테레즈와 캐롤은 멀리서 봤을 때 평범하디 평범하게 식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잭이 인사를 걸어오는 바람에 캐롤은 어쩐지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황급히 떠나게 됩니다.
잭을 따라 차를 타고 가게 된 테레즈 역시 얼굴에는 미련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창밖에 비춰지는 캐롤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죠.
테레즈의 시선이 캐롤에게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영화는 이 장면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테레즈와 캐롤의 첫만남입니다.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캐롤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딸에게 줄 선물을 사러 온 손님이었습니다.
테레즈는 우연히 캐롤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빠져들어 넋놓고 바라보게 됩니다.
테레즈의 시선이 캐롤에게 집중되어 있죠.
이 이후부터 테레즈는 알게 모르게 캐롤을 신경쓰게 되는데요.
캐롤이 두고 간 장갑을 캐롤에게 전달해준다든지, 캐롤이 산 기차 장남감 세트가 잘 도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재차 확인하는 등 은근히 캐롤을 생각하게 됩니다.
캐롤 또한 테레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점심 약속을 잡게 되죠.
점심시간에 만나게 된 둘은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가며 또 다른 약속을 잡게 됩니다.
21일 일요일 오후 2시, 캐롤은 테레즈로부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게 되죠.
이렇게 테레즈와 캐롤은 이를 계기로 만남을 가지게 되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테레즈와 캐롤에게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개인 사정이 숨겨져 있었는데요.
캐롤은 위협과 혐박을 가하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혼 소송 준비중이었습니다.
테레즈 또한 잘 챙겨주는 남자친구가 있긴 했으나,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테레즈는 사진을 좋아하긴 했으나 사람을 제외한 사진만 찍었죠. 사람을 찍는 건 사생활을 침해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진에 있어서도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에 캐롤은 테레즈에게 같이 떠나줄 수 있겠냐며 제안하는데요.
Would you?
영화 속에서 캐롤이 테레즈에게 이렇게 두 번 질문합니다. 캐롤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서 강렬한 문장 중 하나이지 않나 싶습니다.
여행 중에 이 둘은 점차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테레즈는 사람 사진을 찍지 않다가 캐롤을 계기로 사람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테레즈가 찍은 캐롤의 사진이랍니다.
여행이 깊어져가면 갈수록 테레즈와 캐롤의 관계도 점점 깊어져만 가는데요.
테레즈는 캐롤과의 여행을 통해 남자친구에게는 줄 수 없었던 확신을 캐롤에게는 확신할 수 있게 되면서 줄곧 자신을 의심해왔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캐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캐롤 역시 테레즈와 같이 지내게 되면서 테레즈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첫 만남부터 이 둘은 강한 이끌림으로 인해 서로에게 확신했을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캐롤에게는 4살이 된 어린 딸이 있습니다.
이혼 소송 중에 자신이 동성인 테레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면 양육권을 가져올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캐롤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캐롤에게는 딸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존재이기에, 캐롤은 테레즈로부터 어쩔 수 없이 이별을 고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테레즈도 나의 상황을 이해할 것이라면서요.
마음은 테레즈에게 가 있지만, 상황이 그녀를 이렇게 만드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헤어져 있는 사이, 테레즈는 '뉴욕타임스'라는 직장을 얻게 됩니다.
캐롤은 우연히 차 안에서 길을 걷고 있는 테레즈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캐롤의 시선은 한동안 테레즈에게로 가 있었고, 테레즈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떼지 못하는 캐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되게 마음이 찡했는데요.
앞선 영화의 첫 부분에서 테레즈가 차 안에서 캐롤을 따라 시선을 쫓는 부분이 있었잖아요.
이번에는 테레즈가 아닌, 캐롤이 테레즈를 따라 시선을 쫓는 장면이 나타나니 잠시 뭉클했답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그런 것일까요?
운명은 어찌할 수 없는 걸까요?
서로를 향한 이끌림은 어느 방해물이 있어도 막아낼 수 없나 봅니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이별을 고한 것을 계속해서 후회하기 시작했고, 뒤늦게서야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테레즈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전에 캐롤은 양육권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하죠.
캐롤은 남편을 만나 힘겹게 울음을 삼키고 딸 양육권을 포기합니다.
대신 자주 만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요.
그러면서 캐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날 부정하며 산다면 무슨 엄마 자격이 있겠어?
캐롤은 테레즈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아주 확실히 깨닫게 되었고, 이렇듯 나에게 솔직해져야 딸에게도 부끄럼 없이 살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날 부정하며 사는 건 딸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주지 못할 거라는 것이겠죠.
저는 이 대사가 순간 저의 마음을 훅 덮쳐 왔달까요?
영화 캐럴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사였어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자아를 되찾은 느낌이라서요.
그리고 장면은 다시 처음 장면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 끝까지 보니 처음 봤던 장면하고 이해 정도가 달라져 느낌이 이상하고 새롭더라고요..
'아, 이게 이런 장면이었구나.' 하는 느낌이었달까요.
테레즈는 캐롤을 향한 약간의 원망이 있었던 것인지 약간의 냉정함이 보였고,
캐롤은 테레즈를 다시 잡고자 하는 절실함이 돋보였습니다.
아까 위에서 혹시 캐롤이 테레즈에게 한 말, 기억나시나요?
Would you?
캐롤은 또 한번 테레즈에게 제안합니다.
넓은 집에서 같이 살면 좋겠다고.
하지만 캐롤은 안 되겠다며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캐롤은 자신이 오크룸에서 9시에 사람들을 만난다며 저녁을 먹을 예정이니 혹시 마음 바뀌면 이곳으로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테레즈가 말이 없는 사이 처음에 등장했던 '잭'이 테레즈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이렇게 알고 보니까 잭.. 너무 눈치 없는 거 아니니..?
이 타이밍에 나타나는 거, 너무했다는 생각 저만 한 것일까요? ㅎㅎ
처음에는 놓쳤던 테레즈와 캐롤의 감정과 표정이 이제서야 자세하고 섬세하게 보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캐롤은 테레즈를 아쉽게 뒤로 한 채 떠납니다.
테레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테레즈는 잭을 따라 파티를 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잠시, 테레즈의 마음 또한 알게 모르게 캐롤에게 향해 있기에 결국에는 그 파티에서 빠져나와 캐롤이 알려준 장소로 급히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테레즈는 캐롤을 발견했고, 캐롤 또한 테레즈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 둘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채 영화는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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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랑이란 통제할 수 없는 무언의 힘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마치 보이지는 않지만 캐롤과 테레즈 사이에는 끊어져야 끊어질 수 없는 실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죠.
자신들이 아무리 부정해도 숨길 수 없는 게 시선이라는 사실도요.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어 시선에 따른 인물의 감정을 세세하게 나타내어 줍니다.
이 부분에 얼마나 신경을 써 가며 만들었을까 영화 관계자 입장에서도 생각해보기도 했죠.
그만큼 인물의 감정선이 돋보였던 영화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도 이렇게 애절하고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편견을 한 차례 깨 주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관람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에 맞는 영화라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따뜻한 연말이 되어줄 것 같네요!
이상 영화 '캐롤'의 관람 후기였습니다.
가장 눈여겨 봤던 점!
테레즈와 캐롤 간의 시선.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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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과 1로 이뤄진 디지털 세상이 이렇게 귀여웠던가?
전작을 보지 않아서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스러웠던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하지만 그런 우려는 필요 없었다. 캐릭터만 가져왔을 뿐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충분히 이해하고 감동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시놉시스
오락실 게임 세상에 이어 이번엔 인터넷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각종 사고를 치며 게임 속 세상을 뒤집어 놨던 절친 주먹왕 ‘랄프’와 ‘바넬로피’는 버려질 위기에 처한 오락기 부품을 구하기 위해 와이파이를 타고 인터넷 세상에 접속한다.
얼떨결에 올린 동영상으로 순식간에 핵인싸에 등극한 ‘랄프’와 룰도 트랙도 없는 스릴만점 슬로터 레이스 게임에 참여하게 된 ‘바넬로피’.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스케일과 새로운 재미에 흠뻑 빠진 ‘랄프’와 ‘바넬로피’는 랜섬웨어급 사고로 인터넷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주먹왕 랄프2 : 인터넷 속으로>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디지털 세상을 아날로그로 표현하다
오락실 게임방의 캐릭터들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캐릭터로 표현된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그래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0과 1로만 이뤄진 디지털 세상을 나의 분신들이 돌아다니는 설정으로 구현한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을 할 때 성가셨던 자동완성 검색기능을 리셉션에 있는 안내원이 안내를 해주는 것처럼 묘사를 하다니,,, 기발했다. 그런 상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이 리뷰를 쓰는 와중에도 컴퓨터 속 나의 분신이 꼭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에 나오는 것처럼 행동을 할 것만 같아 귀엽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아날로그적 시스템에 가장 최적화 되어 있고 그 기능에 굉장한 향수를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많은 우리의 디즈니
트레일러와 티저가 올라왔을 때부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포털사이트 이름들이 아주 대놓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구글, 이베이, 유튜브를 보면서 랄프가 구글을 고글 파는데냐고 물어보는데 간접광고 아주,,, 아름다웠다. 현실에서 접하던 인터넷 사이트가 그대로 등장을 하나보니 랄프와 바넬로피가 훼방놓고 다니는 인터넷 세상이 내가 이용하는 세상처럼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요새 트렌드인 인플루언서가 랄프를 통해 잘 드러나서 애니메이션이지만 현실 반영이 참 잘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랄프, 돈을 너무 쉽게 버는 게 아닌가,,,, 얼마나 그 시장이 레드오션인데,,, SNS 가지고 돈을 벌려면 시간과 돈, 노력을 얼마나 퍼부어야 하는데!! 하면서 지난 날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며 질투가 나기도 했다. 랄프가 귀엽다가 듬직했다가 질투가 나가다 아주 감정이 복합적이었다.
우정에 대한 집착 = 랄프 바이러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의 배경은 인터넷 세상이지만 주제는 아름다운 우정이다. 참 디즈니스러운 주제다. 뻔한 내용이지만 사람을 울리는 디즈니는 참 매력적인 것 같다. 겨울왕국 이후로 개봉한 디즈니 작품들을 보면서 울지 않았던 작품이 없었던 것 같다. 바넬로피를 집착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랄프가 약간 바이러스처럼 복제되어서 랜섬웨어처럼 인터넷에 엄청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래서 바넬로피가 보면 칭구~~~~? 이러면서 쫓아다닌다. 컴퓨터 속에 있는 바이러스들이 저러고 돌아다닐 것 같아서 귀여운데 무서웠다. 심지어 내 노트북이 저런 친구를 두질 않길 바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 였다. 랄프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분신인 바이러스 랄프에게 ‘네가 하는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떨어져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바넬로피의 꿈을 응원하는 모습에 기특하면서도 슬픈 감정이 들었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는 인터넷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풀어내면서 그 속에 우정도 함께 그려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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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를 갱신한 감독과 배우, 몰아치는 장르영화의 쾌감
7★/10★
우리는 심각한 얼굴을 한 남성 배우들이 포스터 가운데에 큼지막이 자리한 ‘두 글자 영화’, ‘세 글자 영화’를 참 오래도록 봐왔다. 그중에는 언젠가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영화도 있었고, 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식상한 영화도 있었다. 문제는 개별 영화의 완성도와 성취를 떠나, 이런 콘셉트의 영화가 기시감‧피로감을 준다는 점이다. 포스터만으로 이미 그 영화를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포스터만이 아니다. 전개도 마찬가지다. 몇 장면을 보면 이미 결말이 예측되고, 그 결말로 어떻게 나아갈지가 뻔히 보인다. 지루함에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 영화를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국 상업영화의 성장이 안전한 공식의 확립으로 귀결되어 반복적으로 소비된 결과다.
〈밀수〉도 그래 보였다. 닳고 닳은 포맷에 여성 배우를 끼워 넣었다는 것만으로 새로움을 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밀수〉는 성급한 단정을 기분 좋게 배반한다. 첫 번째 포인트는 케이퍼 무비, 즉 장르 영화로서의 재미다. 영화의 전개는 굉장히 빠르다. 문제가 되는 갈등 사건이 빠르게 전개되며 관객을 순식간에 영화 속 세계로 몰입시킨다. 화학 공장의 폐수로 바다가 오염되어 생계가 막막해진 어촌의 해녀들이 밀수에 뛰어들고, 그들 사이에서 오해가 생겨 사이가 벌어지며, 얄궂게도 엇갈린 이들이 다시 얼굴을 마주하기까지의 초반부를 보자. 본격적인 판이 벌어지기까지의 전사(前史)를 속도감 있게 설명해주는 초반부는 ‘먹고살기(이왕이면 더 잘 먹고살기)’가 최고로 중요한 문제였던 1970년대의 시대정신을 파노라마로 펼쳐낸다. 초반부를 본 관객은 이제 인물들이 그 어떤 비도덕적인 일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조금 덜 나쁜 사람이든 다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퍼 무비를 위한 제대로 된 판이 벌려진 것이다.
무대가 마련됐으니, 이제 그 위에서 뛰어놀 캐릭터의 차례다. 웰메이드 케이퍼 무비가 그러하듯, 개별 캐릭터들은 다채롭게 날뛰는 동시에 앙상블을 이룬다. 김혜수는 〈타짜〉, 〈도둑들〉에서 보여주었던 연기로 장르 영화의 긴장을 생산하며 중심을 잡는다. 김혜수의 캐릭터와 연기는 그 자체로 관객에게 영화를 설명하는 장치가 된다. 김혜수의 파트너이자 자존심 강한 해녀를 연기한 염정아는 현실적 연기 톤을 선보인다. 〈밀수〉가 동떨어진 세계의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건너온 실존하는 과거의 이야기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다방 마담을 연기한 고민시는 예쁘고 요염하게만 소모되다 사라져버리는 다른 영화의 선배 레지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기가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보란듯이 활개하며 인상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어리바리’한 악당을 연기한 박정민, 공권력이라는 막대한 힘을 가진 세관을 맡은 김종수 역시 가진 것 없는 해녀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역할을 얄미울 정도로 능숙히 소화한다. 이들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가 유리한 1970년대의 생존경쟁에서 ‘남자’라는 특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피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권 상사를 연기한 조인성. 사실, 우리는 이미 스타가 된 미남 배우들의 멋짐에 무던한 경향이 있다. 처음 그의 멋짐을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조금씩 휘발되고 어느새 그저 익숙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멋짐은 당연하지 않다. 류승완 감독은 〈밀수〉에서 작정하고 조인성을 멋있게 연출했다고 인터뷰했는데, 이 말은 허언이 아니다. 권 상사는 모두가 생존을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는 전쟁터의 꼭대기에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다른 남자들이 갖지 못한 낭만이 있다. 속된 말로, ‘치인다’. 〈밀수〉의 조인성은 캐릭터와 액션에서 모두 기존의 매력을 완벽히 갱신하며 그의 멋짐을 새삼 뽐낸다. 물론 〈밀수〉의 캐릭터 활용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해녀로 출연하는 박준면, 김재화 등 이미 다른 작품에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배우들의 활용도가 더 컸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뛰어난 존재감을 뽐내는 캐릭터들의 각축전이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해녀들의 특성을 반영한 수중 액션, 음악과 의상으로 연출한 시대적 분위기 등 〈밀수〉를 즐길 만한 요소는 많다. 화룡점정은 메시지다. 남성 이익 카르텔에게 모든 것을 털린 해녀들이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자신들만의 의리‧패밀리십‧해녀 정체성을 무기 삼아 빼앗긴 것들을 되찾는 과정은 영화의 장르적 쾌감과 만나 폭발한다. 현실에서는 가진 자들이 연대하고 없는 자들이 갈등하지만, 〈밀수〉에서는 없는 자들이 뭉쳐 가진 자들의 칼끝이 서로를 향하게 한다. 식민자 남성의 전략인 ‘이이제이’를 피식민자 여성의 반격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베테랑〉, 〈모가디슈〉 등에서 남성들의 연대와 갈등으로서의 세계에 천착하던 류승완 감독이 이토록 완성도 높은 여성 케이퍼 무비로 돌아왔다는 게 놀랍다. 숨통이 트이는 해녀들의 숨비 소리에 하루 빨리 동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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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만에 평창국제평화영화제 다녀왔습니다 l 해물은 싫지만 이 짬뽕은 좋아요ㅣ선우정아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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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랜만에 제 이야기겸... 영화제 이야기겸....
무엇보다... 현생에 지친 모두를 위해 제가 힐링 받았던 순간들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영상을 보시고 다들 조금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느끼셨으면 좋겠군요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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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릴로 & 스티치> 티저 예고편
스티치는 성🏰도 부숴! 귀염폭발 악동 등장💥 [릴로 & 스티치] 티저 예고편 대공개 [릴로 & 스티치] 2025년 5월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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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시그널 X : 영혼의 구역> 메인 예고편
끔찍한 방화와 폭력으로 경찰에 연행된 후
연락이 두절된 엄마.
어느 날 한 통의 연락이 온다.
엄마가 코마 상태라는 것.
의료진은 정신과 정신을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치료 기술을 제안한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구역의 발을 디딘 순간,
기이한 현상이 연이어 벌어지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불분명해지는데..
감히 열어서는 안 될,
새로운 차원의 구역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