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3-12-28 22:45:28
작은 아이의 세계, 그 속의 감정들
-<클레오의 세계>(2023)
개봉 전 시사회에서 영화를 먼저 관람하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영화 속 감정 읽기] 라는 연재를 합니다. 영화리뷰안에 각 인물이 대표하는 감정을 적고 그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갓난아이들에게 옆에 있는 엄마는 의지해야 할 꼭 필요한 존재다. 먹을 것을 해결해 주고, 아직 뭐가 뭔지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엄마는 그 아이의 전부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의 세계다. 꼭 엄마만 그런 존재가 되라는 법은 없다. 아빠도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친척이나 다른 누군가가 아이와 오랜 시간 같이 시간을 보내고 도움을 준다면, 그 자체로 아이의 세계에 포함될 수 있다. 어른들이 보기에 아주 좁고 작은 세계지만, 아이에게 그 세계는 무너지면 안 되는 무척이나 큰 세계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는 주인공 클레오(루이스 모루아-팡자니)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를 어릴 적부터 키운 보모 글로리아(일사 모레노 제고)는 어쩌면 클레오의 전부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게 고향으로 떠나야 할 사정이 생기고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는 클레오의 반응과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면서 그가 겪는 상실감과 그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클레오는 마음 한 구석이 시리고 슬프다. 흔들리는 클레오의 세계를 영화는 담담하고 강렬하게 담고 있다.
첫 번째 감정 - 클레오의 두려움
클레오의 세계에는 아빠도 있고,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도 있고, 보모인 글로리아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글로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이 웃고 떠들면서 감정을 공유한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적어도 클레오의 세계에 엄마는 없다. 그 엄마라는 존재를 대신하는 사람이 바로 글로리아다. 글로리아는 클레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친구이자 엄마 같은 존재다. 같이 샤워를 하고, 같이 병원을 가고, 같이 밥을 먹는다. 그러니까 일상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어쩌면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영화 초반 클레오와 글로리아의 수다와 장난을 지나면, 고향에 계신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온다. 그 전화를 받고 글로리아가 우는 그 순간부터 클레오에게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조금씩 생겨난다. 슬픔을 잠시 묻어둔 채 클레오를 챙기고 재우는 글로리아의 모습도 그렇게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어느 순간에 클레오에게 이제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해 버린다. 클로에는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아이가 그렇듯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냐는 물음을 다시 던진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로리아의 말에 클레오는 기운이 없어진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아이에겐 자신이 알던, 무척이나 친숙했던 큰 세계가 통째로 사라져 버릴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의 두려움은 학교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운을 없애고 때론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하지만 곧 그 세계는 무너진다. 아빠에게 위로받고 또 장난도 곧잘 치지만, 그런 아빠의 노력이 텅 비어버린 클레오의 세계를 전부 채울 수는 없다.
두 번째 감정 - 클레오의 질투
글로리아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클레오는 마음속에서 글로리아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글로리아의 고향으로 놀러 가게 된다. 여기서 클레오가 겪는 일들의 대부분은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순간들이다. 오랜만에 자신의 모든 세계인 글로리아를 만났고, 그의 가족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클레오에겐 잃어버린 세계를 찾은 기쁨을 선사한다. 자신의 집이 있는 파리보다는 열악한 시골 섬의 작은 마을이지만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도 하고, 바다에서 수영도 배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게는 임신한 딸과 아들이 있다. 글로리아의 딸이 출산하게 되면서 그의 집에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린다. 이때부터 글로리아는 자신의 손주를 돌보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클레오는 자신이 받던 글로리아의 사랑을 갓난아이가 빼앗아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느끼는 온 세상을 그 아이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작은 클레오의 마음속에 큰 질투의 불씨를 불어넣는다. 그가 글로리아의 손주에게 하는 어떤 행동은 조금은 충격적으로 느껴지지만 클레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클레오의 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클레오와 갓난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과 클레오가 하는 행동을 본 글로리아는 클레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친다. 그때부터 클레오는 달리기 시작하고, 해변까지 간 클로에는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폭발하는 질투심과 죄책감이 동시에 그를 괴롭힌다. 어쩌면 클레오의 세계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당황한 클레오의 표정은 그 모든 붕괴를 표현하고 있다. 클레오의 감정은 그가 해변으로 달려가는 그 모든 순간에 완전히 방출된다. 그걸 보고 있으면 보는 이들도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모르게 된다. 클레오의 질투는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속에 일종의 파괴본능을 만들어냈고, 스스로 악마가 되고 싶었던 클레오는 부끄러움에 바다로 몸을 던진다.
세 번째 감정 - 글로리아의 슬픔
이 영화가 클레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글로리아의 감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클레오를 키워온 글로리아 역시 클레오에게 많은 감정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서로 나눈 감정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처럼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다. 고향으로 떠나야 하는 순간에 글로리아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의 마음에 글로리아의 자리는 꽤나 크게 만들어져 있었을 것이다. 담담히 그 상황을 설명하고 떠나는 글로리아는 자신의 힘으로 키워낸 작은 아이의 세계를 잠시 바라보고 돌아선다.
클레오가 자신의 고향으로 찾아온 방학기간 동안, 글로리아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신만의 사업을 준비하면서 딸의 출산을 돕고, 태어난 아이를 챙겨야 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잠시나마 찾아온 클레오가 너무나 반갑지만, 온전히 그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글로리아는 자신의 가족을 좀 더 신경 쓰며 챙길 수밖에 없다. 여전히 클레오에게 다정한 글로리아지만, 그런 모든 상황을 지나면서 클레오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엔 글로리아가 울음을 터뜨린다. 클레오를 공학까지 배웅하며 돌아서는 그의 마음은 복잡하다. 결국 클레오와 완전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펑펑 눈물을 쏟는다. 아마도 클레오의 방학기간 동안 클레오도 그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클레오는 비행기로 향하며 울음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글로리아는 끝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의 눈물은 클레오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게 된 그 상황에 대한 슬픔이 담겨있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는 클레오라는 아이의 시선에서 상황들을 따라간다. 다양한 클로즈업을 통해 클레오가 진짜로 볼만한 장면들을 화면으로 담고, 느낄만한 감정들을 무척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영화 중간중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전환 장면은 수채화 같은 이미지를 통해 클레오의 세계가 가진 따뜻함을 전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작은 아이 클레오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협소한 작은 공간만 존재했던 클레오의 세계는 아마도 이 영화 속의 일을 겪고 나면 엄청나게 거대해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겪은 성장기처럼. 글로리아는 비록 엄마는 아니었지만 클레오에게 중요한 존재였고, 두 사람이 나눴던 감정의 교류는 모두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영화는 그 거대한 사랑을 클레오의 얼굴과 표정으로 잘 보여준다. 영화의 원제에는 보모의 이름인 글로리아 가 들어간다. 하지만 한국에 수입되면서 <클레오의 세계>로 제목이 바뀌었다.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클레오의 세계가 곧 글로리아였으니.. 어쩌면 이 상황을 잘 표현한 완벽한 번역이 아닐까.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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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밍숭맹숭한 삶 속 잠깐의 반짝임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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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재미있는 것들은 대개가 우연의 산물이다. 우연히 들은 음악, 아무 생각없이 고른 영화나 책, 맛집을 검색하지 않고 들른 식당, 너무 취향에 딱 맞는 원두로 커피를 내리는 카페,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상상한다. 인생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는 날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본다. 상상이라는 건 동물 중에서 하등 보잘것 없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고, 그렇기에 인간이 문명을 이루어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할 우연에 기대어 살아갈 수도 없고, 한량처럼 상상만 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영화에서는 한번 해봄직하지 않을까?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3부작 옴니버스로 우연과 상상을 시각화한다.
우연한 마주침
제1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제2화. <문은 열어둔 채로>, 제3화. <다시 한번>까지, 이 이야기들은 관계에 관해서 보여준다. 노래에서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마주침은 우연이다.
내 절친이 사랑에 빠진 남자가 내 전남친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내 인생을 나락으로 보낸 남자를 버스에서 다시 만날 확률은? 20년 동안 그리워하던 사람을 전철역에서 만날 확률은?
이 우연한 만남들이 우리 삶을 확장시킨다. 사전에 계획된 길로만 간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한정적이다. 우연히 메이코의 친구와 전남친이 썸을 타지 않았다면 2년 전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오가 파트너를 위해 교수를 곤경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면 어떨까. 그냥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흐지부지 이어가면서, 육아와 가사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 포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으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나오는 욕망이 강한 여자다. 나오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만학도가 되었다. 동기들은 나오를 끼워주지 않는다. 파트너인 남자만 유일하게 나오와 이야기를 하지만 단지 섹스파트너일 뿐이다.
본인의 자아실현이라는 나오의 욕망은 뒤틀리고 왜곡되어 웬 남학생이랑 불륜을 저지른다. 불륜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남학생은 감정이 없어 보이지만 나오는 그에게 의존적이었다. 남학생은 모두가 나오를 싫어한다며 나오를 가스라이팅하고, 나오는 그런 남학생을 위해 어리석고 무모한 짓을 한다.
곤경에 처한 나오를 무참히 버린 남학생은 졸업 후 출판사에 편집자가 되어 살아간다. 곧 결혼도 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이 순간에, 버스에서 우연히 제 손으로 인생을 망쳐놓고 모른 체한 여자를 만난다면, 이 남자의 삶은 어떻게 될까.
제3부는 '우연과 상상'이라는 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이야기들이다. 전혀 사교적이지 않은 사람이 20년만에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나고 너무나 반가워한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상상했던 것처럼.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평생 기다려온 것만 같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동창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서로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 사람한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 익명의 타자는 기꺼이 그 역할을 해준다. 꼭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금쪽이들에게 질문하는 코끼리 같다. 우연과 상상,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려왔나.
잘 실패하기
안타깝게도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실패했다. 전남친을 붙잡는 데 실패하고, 파트너와의 관계도, 학교도, 가정도 모두 풍비박산나고,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기를 기다려왔던 사람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살아갈 것이다. 전남친을 붙잡는 대신 친구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고, 자기를 망쳐놓은 옛 파트너 앞에 당당히 나타나고,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묻어두었지만 이제 그 사람을 보낼 것이다.
제2화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 나오가 접근했던 세가와 교수는 연구실 문을 닫지 않는다.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강박도 있다. 사실은 외로운 인물이고, 타인과의 접촉을 기대하지만 언제나 문을 열어두기 때문에, 타인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소설가로서, 작품으로만 만날 뿐이다(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두려움은 우리를 자꾸만 가로막는다.
실패가 너무도 두려웠다. 운이 좋은 편이라 내 재주에 비해 대단한 실패를 겪지는 않았지만, 20대 때는 실패할까 싶어 시작도 하지 못했다. 조금 해보다 재빨리 포기하고, 합리화하다 보니 내 손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대차게 실패를 했더라면 술 마시고 술안주로라도 쓸 텐데, 실패마저도 실패한 이야기는 아무런 재미가 없었다.
우연이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주듯이, 실패 역시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갈지도 모른다. 성공하면 더 좋긴 하겠지만.
나는 언제나 이유를 찾아 헤매었다. 나의 문제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 내가 힘들게 했던 사람들, 그런 이유는 결국 내가 싫겠지, 뭐 그런 쪽으로 가곤 했다. 하지만 사실 꽤 많은 경우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필연적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 역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영혼의 쌍둥이라고 생각했던 친구와도 다시 만나기 싫을 정도로 멀어지기도 했다.
우리의 성공이 모두 우리의 덕이 아니고, 우리의 실패가 모두 우리의 탓이 아니다. 세상 많은 일들이 우연과 상상으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그냥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 삶은 밍숭맹숭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별사탕이 있다. 사실 이런 마음을 먹는 것도 나는 자주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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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포인트 : 블록버스터가 스크린을 지배하는 이 시대에 거대서사와 화려한 CG 없는 용감한 영화. 별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자꾸 웃는다. 그러면 그냥 같이 웃게 된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도 그렇게 웃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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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사회주의에 맞서는 러우예의 영화!
시놉시스
상하이의 쑤저우강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고독한 사람,자식과 부모,일을 하는 사람,다리에 몸을 던지는 사람 등등... 그중에 비디오 촬영기사는 사람들에게 촬영 의뢰를 받고 일을 한다. 그런데 해피바라는 유흥주점에 있는 사장에게 의뢰가 들어오고 비디오 촬영기사에 눈에 들어온 건 인조 어항에서 춤을 추는 인어쇼를 본 것이다. 인어의 정체는 바로 메리메리라는 여자였고 둘은 커플이 된다.
하지만 메리메리에게는 사연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고 비디오 촬영기사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기거나 전화를 하는 건데...
러우예 감독은 중국 정부의 감시와 블랙리스트 추가에도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게 만드는 중국 영화들은 수면에 올라왔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은 수면 아래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의 감시에도 러우예 감독은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중국의 사회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게 중국에 맞지 않는 서방 세계의 자유로움과 다양성이 묻히는 게 20세기 말과 21세기 이후를 살아가는 중국 영화감독들의 큰 골칫거리였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비디오 촬영기사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과 핸드헬드 캠코더로 자신의 연인 메리메리뿐만 아니라 마다라는 인물과 메리메리와 닮은 무단이라는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무슨 의미를 주는 걸까라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 감독이 1980년대 당시 쑤저우강의 혼탁함을 비유하며 중국 인민들의 혼란스러운 정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메리메리가 없는 것에 대해 가지는 환상과 그걸 채워주는 욕구 그 이후에 나타나는 불만 같은 관점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은 허구와 현실이 반이 섞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비디오 촬영기사가 사실은 마다 역할도 했고 메리메리도 무단 역할을 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다.
이 영화가 끝나고 정성일 평론가님이 해석하신 다양한 관점들을 후기로 적어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영화감독들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씨네필이 되는 걸 주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국 공안의 감시도 너무 강해서이기도 하고 씨네필이 될 수 없게 만드는 환경도 한몫했다고 한다.
중국에 가보면 해적판 DVD방이 많다고 한다. 결국에는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들은 음지로 갈 수밖에 없는 걸까? 영화 <쑤저우강>은 이러한 사회주의에 대한 중국의 방식을 영화로 표현하고 있다.
중국 기류의 혼탁함을 영화화하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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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트 인 파리(Paris Pieds Nus/Lost in Paris/ 2016/ 프랑스, 벨기에)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
<보이지 않는 손>
캐나다 여성 피오나는 파리에 사는 88세의 이모 마르타로부터 짧은 편지를 한 통 받는다. 양로원에 강제로 수용하려는 사람들로부터 구해달라는 것. 어렸을 때에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모가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48년 동안 만난 적이 없다. 그래도 피오나는 용감하게 파리로 향한다.
어렵게 찾은 이모의 집. 그러나 이모는 집에 없다. 이웃 남자 마르탱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행동이 이상했다고 하여 피오나는 걱정스럽다.
이모가 집에 올 때까지 파리 관광에 나선 피오나. 들뜬 기분에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다 그만 강물에 빠지고 만다. 유람선에 구조되기는 했지만 휴대전화도, 캐나다 국기를 꽂은 배낭도, 여권도, 지갑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는 앞길이 막막하다. 다시 이모 집을 찾았지만 이모는 감감무소식.
피오나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여권 발급신청을 하고 이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갈 곳이 없는 그녀의 사정이 딱해 영사과 직원은 식사 교환권을 건넨다. 지정 식당으로 간 피오나, 그 식당에서 묘한 분위기의 노숙자 돔을 만난다. 그녀에게 능청맞게 춤을 권하는 돔.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사양했지만 돔의 능숙한 리드에 저도 모르게 춤을 추는 피오나. 그런데 웬일. 둘의 춤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해온 커플의 춤처럼 정말 아름답다. 춤을 추는 두 사람도 서로에게 익숙한 자신들에게 놀란다. 그리고 돔은 피오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물 위로 떠오른 피오나의 배낭을 발견한 것은 바로 돔이었다. 짐을 찾으려는 피오나. 횡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돔.
이튿날 돔은 마음을 고쳐먹고 배낭과 그녀의 소지품을 가지고 캐나다 대사관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피오나를 만난다. 돔에게 화를 내며 배낭을 받아 메고 이모의 이웃들을 만나 행방을 묻는 피오나에게, 이모는 이틀 전에 사망했으며 장례식이 바로 오늘이라는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장례식장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 받긴 했지만 피오나는 복잡한 파리의 전철을 탈 자신이 없다. 이때 그녀 주위를 몰래 맴돌던 돔이 나타나 길 안내를 한다.
돔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을 추모하다가 이모는 마르타인데 고인은 마르트임을 알게 된다. 마르트는 이모처럼 무용수였던 데에다 이모의 이웃에 살았던 터라 사람들이 헷갈렸던 것. 마르타도, 마르타와 마르트 둘 모두의 친구였으며 마르타의 애인이었던 남자 무용수 노르망도 장례식에 나타나지만 피오나와는 길이 엇갈리고 만다.
약간 치매 증세를 보이는 마르타는 경찰이나 응급구조대가 자신을 양로원에 강제로 넣으려 한다고 오해하여 이리저리 피하며 집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경찰은 사실 피오나의 부탁을 받아 이모의 행방을 찾아 나섰던 것.
파리의 밤거리를 헤매던 마르타는 돔을 만나 그와 함께 잠시 머물다가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울리는 피오나의 휴대전화를 받게 된다. 피오나가 혹시나 하여 전화를 걸었던 것. 드디어 마르타는 피오나가 파리에 온 것을 알게 되고 피오나는 이모가 지금 '파리의 뉴욕'에 있음을 간신히 알아차린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경찰들을 피해 마르타는 휴대폰을 다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고 에펠탑 위로 숨는다.
'파리의 뉴욕'으로 이모를 찾아나선 피오나는 노숙자 텐트에 있는 돔을 만나 이모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능력을 지닌 듯한 돔 덕분에 이모가 에펠탑에 있음을 알게 되어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 꼭대기로 오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피오나 역시 돔을 좋아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마침내 마르타, 피오나, 돔은 에펠탑 위에서 만나지만 반가움도 잠시, 이모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모의 '자연분해 유골함'을 들고 센강 다리 위에서 추모하는 피오나, 돔, 마르탱과 양로원 직원. 1분간의 묵념 후에 유골함을 센강으로 던짐으로써 장례식을 끝낸 일행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런데 몇 걸음 내딛던 피오나, 발걸음을 돌려 돔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어렸을 적 꿈도 마르타 이모와 마찬가지로 파리에 사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원제는 Paris Pieds Nus(파리를 맨발로)이며 주인공이자 감독인 도미니끄 아벨과 피오나 고든은 부부이다. 이들의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동화적이며 대사나 사실적인 연기보다 과장된 동작과 춤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항상 화면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야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번의 춤과 서로 상대를 꿈 속에서 만나는 피오나와 돔의 과장된 동작은 예술이다.
아울러 이들의 영화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로스트 인 파리>는 <피오나>, <돔>, <마르타> 등 세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있고 내러티브보다 각 캐릭터의 개성과 삶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영화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통해 돔과 피오나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마르타의 구조요청은 둘을 이어주기 위한 모티브였던 셈.
피오나는 돔을 만나기 위해 이모로부터 편지를 받고, 파리로 날아가고, 파리에서 두 번이나 강물에 빠지고,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추모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에펠탑 꼭대기로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반복되는 고난과 어려움은 결코 슬프거나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홀로 지내다 가족이나 친척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는, 세상을 뜬 이가 마르트인지 마르타인지 주변의 관심을 받지도 못하는, 양로원에 갇혀 답답하게 여생을 살아내야 하는, 한때는 젊고 아름다웠고 기운찼던 노인들의 삶이 가엾거나 쓸쓸하다기보다는 유머러스한 상황과 상큼한 색감으로 명랑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인생이 그 주인이며 인간들은 제멋대로 달리는 인생이라는 기차에 타거나 내리거나하는 승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그닥 슬플 일도 불행할 일도 없지 않을까.
그런데 피오나와 돔과 마르타를 에펠탑 꼭대기로 모은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생이라는 기차의 기관사는 누구일까(©2020.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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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함의 이름으로 내리는 형벌
* <더 메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더 메뉴 (2022)
감독: 마크 미로드
출연: 랄프 파인즈, 안야 테일러 조이, 니콜라스 홀트
장르: 스릴러
상영시간: 107분
개봉일: 2022.12.07
순수함의 이름으로 내리는 형벌
참가비만 1250달러, 하루에 오직 12명의 고객만을 대접하는 외딴 섬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호손’. 그곳을이끄는 셰프 ‘슬로윅(랄프 파인스)’을 동경하던 미식가 ‘타일러(니콜라스 홀트)’는 연인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와 함께 은밀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초대받게 된다. ‘슬로윅’이 유명해지는데 일조한 음식 평론가, 레스토랑에는 크게 관심 없어 보이는 유명 배우, 호손의 단골손님과 사업가 친구 무리들 등 공통분모라고는 상류층이라는 것 밖에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특별한 코스 요리를 즐기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외딴 섬에서 함께 합숙하며 새벽부터 출근해서 밤까지 일하는 직원들은 ‘슬로윅’에게 충성을 바친 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슬로윅’은 까탈스러운 고객들이 기대했던 음식들을 그만의 스토리와 함께 차례로 대접한다. 각자의 방식대로 음식을 즐기던 찰나 마치 하나의 쇼처럼 진행되는 코스 요리에는 섬뜩하거나 기이한 일들이 하나둘씩 동반되고, 레스토랑과 ‘슬로윅’ 셰프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순식간에 모두를 공포에 빠드린다.
시종일관 음침하고, 꺼림칙하며 극의 중반부부터는 소름이 돋는 순간의 연속이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천재 셰프라는 소재만으로 불쾌한 장면들과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생생하게 연출할 줄이야. 아무리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유능한 셰프가 아니라면 맛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보다는 어떻게 요리하는 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영화 자체적으로도 증명해주는 듯하다. 외딴 섬의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마치 ‘미드 소마’ 같은 광기 어린 스릴러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은 퍽 신선했다. 하지만 맛이 궁금할 정도로 화려함을 수놓은 요리들과 호손 레스토랑의 셰프와 직원들이 조성하는 서스펜스는 극에 내포된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도 했다.
호손 레스토랑의 음습한 코스 요리는 내면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감독과 ‘슬로윅’의 날카로운 일침과도 같다. 셰프는 자신의 음식을 맛보며 즐거워할 고객들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요리하지만,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셰프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소수의 상류층 고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야 하고 평론가들에게 깎이지 않기 위한 압박감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성공한 셰프의 요리를 맛보러 온 돈 많은 고객들은 계급상의 특별함에 한껏 취해 권력을 뽐내려 하고, 음식의 흠을 찾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씹고 뜯으며 요리를 분석하려 든다. 일명 음식 평론가라는 사람은 자신의 글 몇 자에 문을 닫은 레스토랑이 수 십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셰프는 어느덧 요리하는 걸 순수하게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렸다.
‘슬로윅’은 자신의 순수성을 무너뜨린 사람들에게 날릴 마지막 일갈을 준비했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요리가 무엇인지도 기억도 못하면서 열 번도 넘게 방문한 단골 손님, 요리라고는 할 줄도 모르면서 음식을 분석하는데 혈안이 된 남자, 권세에 취해 있는 음식 평론가와 같은 사람들은 그에게 있어 충분히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최대한으로 만족할 만한, 그리고 과오를 뼈저리게 느낄 만한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맛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반면 완벽한 코스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죽임까지도 불사하는 ‘슬로윅’의 요리는 하나의 예술을 감상하는 듯하며 계급론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은 그가 단지 그럴싸한 비주얼로 포장할 줄만 아는 스타 셰프가 아님을 뒷받침한다. 그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빈민들의 주식이었던 빵을 ‘보통(Common)’ 사람들이 아닌 손님들에겐 대접할 수 없다며 ‘빵 없는 곁들임’을 내놓고, 그 마저도 예술이라며 떠받드는 고객들의 태도는 실소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완벽한 계획에도 언제나 변수가 발생하듯 ‘슬로윅’이 촘촘하게 짜 놓은 판에도 제멋대로 굴러가는 장기 말 하나가 상황을 뒤흔들어 놓는다. ‘타일러’가 데려온 ‘마고’는 원래 초대 받지 않았던 손님이고, 그에 대한 정보가 없던 ‘슬로윅’은 이 정체불명의 여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깐 곤혹스러워 한다. 확실히 ‘마고’는 식당에 초대받은 상류층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인물이다. 편하게 식사해야 할 공간을 긴장감과 섬뜩함으로 채우는 ‘슬로윅’에게 당당하게 불쾌함을 표출하고, 무지성으로 그를 추앙하는 ‘타일러’와 달리 원치 않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이런 ‘마고’의 독단적인 행동을 보며 ‘슬로윅’은 그가 남들처럼 추악함으로 뒤덮인 인간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본다. 초대 받은 손님들의 운명은 이미 바뀔 수 없도록 정해져 있지만, 마치 생존게임 속 깍두기와도 같은 ‘마고’만큼은 유일하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키를 쥐고 있었다. ‘슬로윅’의 집에 몰래 잠입해 그의 과거를 들여다 본 ‘마고’는 영리하게도 정통 치즈버거를 주문하며 그의 상실된 순수성을 일깨운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법한 주문에 잠시 당황했던 ‘슬로윅’도 치즈버거를 만드는 동안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며 과거 순수하게 음식을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듯 하다. 고급진 코스 요리에 시종일관 인상을 찌푸렸던 ‘마고’는 그제서야 허기짐을 달랠 수 있었고, 패스트푸드라 할지라도 음식을 순수하게 즐길 줄 아는 그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 때문일까. 온갖 산해진미를 내놓았던 그 어떤 고급 코스 요리보다도 ‘마고’가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던 치즈버거가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음식을 즐길 줄 모르고, 평가하고 분석하는데 꽂혀 있는 사람들을 향한 풍자는 곧 예술을 순수하게 즐기려 들지를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단지 가벼운 오락의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데, 눈에 불을 켜고 흠집을 찾아내고 구조를 해체하여 분석하는데 열중하는 시네필들은 언제나 순수함과는 가장 거리가 먼 태도로 작품을 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가 돈을 내고 소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음식이건 영화이건 평가를 하는 것도 그들의 자유다. 다만 분명 비평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고, 영화를 볼 줄 안다는 혹은 비싼 요리를 즐기며 서슴없이 유명 셰프의 음식을 평가할 수 있다는 일종의 과시 욕구를 누리고자 한다. 예술가들의 언저리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것도 이들이지만, 동시에 예술가들에게 가장 해로운 것 또한 그들이라는 모순적인 생태계를 거침 없이 돌려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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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고 못 살던 남자가 죽어도, 여자들은 산다
*이 글에는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여자가 있다. 한 명은 아이를 낳아 정상가족을 이루는 게 인생의 목표인 주디다. 또 한 명은 뺑소니 사고로 남편을 잃은 젠이다. 우연히 만난 이들은 서로의 불행에 공감하며 친구가 된다.
문제는 주디와 젠이 서로의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이다. 젠의 남편을 죽인 뺑소니범은 주디고, 주디가 애착을 끊어내지 못하는 전 애인 스티브를 죽인 건 젠이다. 하지만 주디와 젠은 끔찍한 진실을 안 이후에도 우정을 깨지 않는다. 그 남자들의 죽음으로 또 다른 세계가 열렸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데드 투 미〉 스틸컷 ⓒ넷플릭스
젠의 남편은 그녀가 유방암 예방을 위해 가슴 절제술을 한 이후로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젠은 더 이상 남편에게 '여자'로 인식되지 못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파탄난 관계를 이어간다. 젠은 남편이 죽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된 곳에 에너지를 쏟아왔음을 알게 된다. 물론 슬픔도 크고 현실적 어려움도 많다. 하지만 젠은 주디와 함께하는 생활이 나쁘지만은 않다.
주디는 아이를 낳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으나 다섯 번이나 유산했다. 게다가 의사로부터 임신은 불가능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도 듣는다. 무너지기 직전이다. 그런데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전 애인 스티브가 죽은 이후 다른 세계를 만난다. 자신을 존중하며 사랑해주는 레즈비언도 만났고, 젠의 두 아들은 주디를 믿고 의지한다. 이제 주디에게 중요한 건 '정상가족' 아니라 젠과의 우정에 기반한 '대안가족'이다. 그것이 주디의 새로운 토대가 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데드 투 미〉 스틸컷 ⓒ넷플릭스
그래서 젠과 주디는 자신의 남자를 죽인 서로와 계속 같이 산다. 서로의 존재가 기존의 문제적 욕망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젠과 주디의 살인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안겨줬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갈 수 없었던 곳으로 그들을 인도해주기도 했다. 남자들의 죽음은 지금껏 현재를 몽땅 투자한 대상이 오히려 불행의 근원이었음을 깨닫게 해줬다. 즉 젠과 주디는 서로의 살인을 매개로 자기 욕망과 에너지를 투여할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 두 번째 욕망의 대상은 이전처럼 그들의 존재를 갉아먹지 않는다.
죽고 못 살던 남자가 죽어도(사라져도), 여자들은 산다. 젠과 주디처럼 때로는 더 좋은 삶을 산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건 불평등한 젠더 권력에 놓인 이성애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며 지지해주는 관계였다. 범죄, 스릴러, 코미디 요소가 절묘하게 섞인 드라마 〈데드 투 미〉의 다음 시즌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rewr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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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일드 인 타임> - ‘사랑으로 물든 시간, 그 어딘가에서 살아갈 너에게’
차일드 인 타임
개봉일 : 2020.01.09 (한국 기준)
감독 : 줄리언 파리노
출연 : 베네딕트 컴버배치, 켈리 맥도날드, 스티븐 캠벨 무어, 사스키아 리브스, 베아트리체 화이트
사랑으로 물든 시간, 그 어딘가에서 살아갈 너에게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신작 <모리타니안>의 개봉을 앞두고, 계속 그의 모습이 맴돌아서 오랜만에 이 영화를 꺼내봤다. <차일드 인 타임> 직역하자면 시간 속의 아이다. <차일드 인 타임>은 동명 소설 <차일드 인 타임>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로, 소중한 아이들의 유년기에 대한 통찰과 부모가 최대로 품을 수 있는 아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상처와 그 위로 솟아난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순간, 어쩌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이 이야기는 유명한 동화 작가인 주인공 ‘스티븐’이 하나뿐인 딸 ‘케이트’를 잃어버리는 날부터 시작된다. 계산을 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딸의 손을 잠시 놓은 순간, 아이는 순식간에 스티븐의 시선 밖으로 사라진다.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노란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를 찾는 건 어쩌면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스티븐은 끝내 케이트를 찾지 못한다. 스티븐의 아내 줄리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함께 살던 집을 떠나고 스티븐은 홀로 남겨진다. 줄리는 케이트를 찾을 수 없을 거라 절망하고, 스티븐은 아직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뜨겁던 부성애는 스티븐의 가슴에 화상 자국을 남길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모성애’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부성애’를 그린 영화는 흔치 않은 것 같다. 아버지도 어머니만큼이나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말이다. <차일드 인 타임>은 그 흔치않은 부성애를 중심으로 스티븐의 시간을 그려낸다. 더불어 아직 유년기의 부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스티븐의 출판인 ‘찰스’라는 인물을 통해 ‘유년기가 아이와 어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사이에 인물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데, 이야기를 다소 애매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느낌을 받았던지라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상당히 깔끔하고 담백한 영화였다. “난 아이를 잃은 부모야. 여러분 같이 울어요.” 하며 슬픔의 카펫을 무작정 깔아대는 것이 아닌,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새로운 음계를 하나하나 알아가듯, 슬픔의 무게를 천천히 더듬어가는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스티븐은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이 한마디를 보낸다. 사랑한다고. 곧 만나자고. 이 일상적인 한마디가 주는 울림은 예상보다 거대했다.
차일드 인 타임 시놉시스
유명한 동화 작가 ‘스티븐’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 ‘케이트’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딸의 부재는 행복한 부부였던 ‘스티븐’과 ‘줄리’의 사이까지 멀어지게 만들고, 상실감 속에서 매일을 견뎌나가던 두 사람은 일상 속에서 소중한 흔적들을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부재중인 걸 왜 굳이 알려요?"
스티븐은 외출할 때마다 곧 돌아온다는 말과 번호를 적은 쪽지를 현관문에 붙인다. 그를 본 이웃은 “부재중인 걸 왜 굳이 알려요?”라고 말하며 스티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스티븐은 왜 자신의 부재중을 알리는 걸까. 그 이유는 잃어버린 딸 케이트 때문이다. 이미 잃어버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스티븐은 케이트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과연 어떤 부모가 어린 자식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스티븐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딸이 집에 돌아온다면, 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찾아온다면 언제든 나를 부를 수 있도록 매일같이 쪽지를 붙인다. 스티븐에게 케이트는 세상의 전부였고, 여전히 스티븐의 세상엔 케이트가 가득 차있다.케이트가 실종된 후 줄리는 모든 걸 포기하고 더 이상 여기서 살 수 없다며 스티븐과의 별거를 결심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스티븐은 1년 만에 줄리를 만나기위해 시골집으로 향한다. 스티븐은 집으로 가는 길에 운명처럼 노란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의 환영을 따라가게 되고, 그곳엔 ‘더 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술집이 있었다. 술집 안엔 한 여자가 앉아있었고, 스티븐은 뭔가에 이끌리듯 여자를 쳐다본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동네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스티븐은 어머니를 통해 그 술집에 얽힌 신기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더 벨’은 스티븐의 어머니가 스티븐의 아버지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던 술집이었고, 그 시절 어머니는 아름다운 아이 한 명이, 태어나기 전 스티븐이 창밖에서 자신을 바라봤다고 말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스티븐의 어머니는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 스티븐이었을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줄리와 스티븐도 어머니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줄리는 창문 너머에 서있는 스티븐의 머리색을 꼭 닮은 남자아이를, 스티븐은 줄리의 소식을 듣고 급하게 탄 지하철에서 같은 남자아이를 마주치게 된다. 남자아이는 줄리와 스티브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 아이는 곧 태어날 두 사람의 아들을 의미한다.
"케이트를 계속 사랑해 주렴. 사랑하는 것과 그리워하는 건 달라."
부모는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 동안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들은 그 모든 시간 안에 존재한다. 스티븐은 3년이란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케이트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면 케이트를 위한 선물과 트리를 준비하고, 케이트의 방을 항상 깨끗하게 정돈해둔다. 아이가 당장 뛰어들어와도 바로 누워 한숨 잘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이제 7살이 되었겠지만 케이트는 여전히 내 어린 딸이고, 10년이 지나 만난다 해도 스티븐에겐 여전히 내 어린 딸이다. 그리고 곧 생길 사랑하는 아들은 어릴 적 스티븐이 그랬듯,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부모님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그 순간마저도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게 아닐까."어딘가에 있어"
스티븐은 눈앞에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있을 사랑하는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바친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트의 환영이 계속해서 스티븐의 주변을 맴돌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너에 대한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싶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던 어린 딸, 카트에 앉아 빠르게 달려달라며 부탁하던 어린 딸, 작은 손가락으로 힘 있게 내 손을 잡아오던 어린 딸. 스티븐은 케이트를 잃고 오래도록 동화를 쓰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야 새로운 소년에 대한 동화를 쓰기 시작한 스티븐은 욕조 안에서 숨을 참는 시간을 늘려간다. 그리고 그의 상처도 아주 조금씩, 옅은 흉터를 남기며 회복되고 있었다. 스티븐은 케이트를 잃어버리고 무조건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스티븐은 ‘찾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보단 ‘어딘가에 있어. 곧 만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사실 스티븐은 케이트가 돌아올 확률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애초에 알고 있었겠지만.. 그 잔혹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스티븐과 줄리의 상처는 새로 찾아온 사랑스러운 아들의 존재로 인해 조금씩 아물기 시작할 것이다. 스티븐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줄리가 누워있는 병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케이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줄리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그것을 ‘스티븐과 줄리가 케이트를 잊어가고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순 없다. 두 사람은 여전히 케이트를 사랑하기에 어린 딸은 그들의 사랑과 기억, 그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엄마 아빠는 케이트를 사랑하니까.
"아이를 찾고 있어. 금지된 아이를. 그 아이를 찾아야 돼."
끝없는 사랑과 상실, 그리고 회복의 메시지와 더불어 이 영화가 건네고 있는 두 번째 메시지는 ‘유년기의 중요성’이다. 이건 스티븐의 출판인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찰스의 이야기다. 스티븐의 동화 출판을 돕고, 동시에 정치계에서 일하고 있는 찰스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일을 관두겠다고 선언한다. 정치권에서는 말도 안 되는 육아 교육서를 제작하고 있었고, 총리는 스티븐에게 찰스를 감시(?) 해달라고 부탁한다.찰스는 도시를 벗어난 시골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찰스는 비 오는 날 숲을 가로지르고, 숲 한복판에 곧 쓰러질듯한 아지트를 만들고, 이상한 음료수를 마시며 자신의 음모를 가위로 자른다. 그는 마치 다여섯살 난 남자아이와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찰스는 마음속에 있는 ‘금지된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금지된 아이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뜻한다. 찰스가 모든 일을 관둔 이유는 ‘책임지는 삶’에 지쳤음과 동시에 사회에서 통하는 ‘찰스’라는 존재에 대한 모든 걸 내려놓고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며, 누구도 나의 이름에 말도 안 되는 추측과 커다란 기대를 걸지 않는 ‘유년시절’. 그는 유년시절을 그리워하거나, 그에 대한 결핍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수많은 종류의 글 중 ‘동화’를 출판하는 출판인이 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찰스는 어른이 되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어른이 되고 보니 어른이 싫었던 걸까.
일부 정치인들은 말도 안 되는 육아교육 제도를 내놓고 있고, 진짜 아이를 키워본 스티븐은 그에 반대한다. 그리고 찰스는 그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표하듯 나무에 목을 매단다. 스티븐은 찰스의 장례식에서 그를 ‘유년기의 소중함을 알던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빗속에서 뛰노는 찰스의 모습과 맑은 웃음을 흘리며 아빠를 돌아보는 케이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나는 유년기에 대한 진한 향수를 느꼈다. 찰스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찰스는 구두와 반바지, 셔츠와 니트를 입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통상적으로 구두와 셔츠, 니트는 어른의 옷, 편안한 반바지는 어린 남자아이의 옷이라는 이미지를 주게 되는데 찰스는 어른과 아이의 옷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착장으로 발견된다. 땅에 떨어진 채 발견된 구두 한짝은 그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벗겨진 것이리라. 찰스는 어른 찰스를 벗어던지기 위해 몇 번의 발버둥을 쳐야 했을까. 결국 죽기 전까지도 그것을 완벽하게 벗어던지지 못한 찰스가 가엾게 느껴진다.
이런저런 슬픔이, 사무치는 그리움이, 끝없는 사랑이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보내는 그리움과 애정이 담긴 시간들엔 아마 유효기간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차일드 인 타임>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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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서펀트>
[2021년 4월 2일 넷플릭스 공개]
- 살인자를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실제 사건에 기반한 <더 서펀트>는 끊임없이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찰스 소브라즈(골든글로브 후보 타하르 라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를 법정에 세우고자 전력을 다한 이들의 분투 또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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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복지식당>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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