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M2024-02-13 23:12:14
웡카..이게 뭔카..
영화 '웡카' 리뷰
Wonka / 웡카
며칠 전 드디어 '웡카'를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할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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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여정 좋은 일은 모두 꿈에서부터 시작된다! 마법사이자 초콜릿 메이커 ‘윌리 웡카’의 꿈은 디저트의 성지, ‘달콤 백화점’에 자신만의 초콜릿 가게를 여는 것.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모자 가득한 꿈과 단돈 12소버린 뿐이지만 특별한 마법의 초콜릿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낡은 여인숙에 머물게 된 ‘웡카’는 ‘스크러빗 부인’과 ‘블리처’의 계략에 빠져 눈더미처럼 불어난 숙박비로 인해 순식간에 빚더미에 오른다. 게다가 밤마다 초콜릿을 훔쳐가는 작은 도둑 ‘움파 룸파’의 등장과 ‘달콤 백화점’을 독점한 초콜릿 카르텔의 강력한 견제까지. 세계 최고의 초콜릿 메이커가 되는 길은 험난하기만 한데…
/ 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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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웡카... 이게 뭔카... "
이게 영화 관람 직후 제 감상입니다.
20대중반으로서 '조니뎁'의 윌리웡카를 이 세상 최고의 웡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제게, '티모시 샬라메' 웡카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너무나 밝은 긍정의 아이콘 '웡카'
이 영화는 티모시 샬라메의 노래로 막을 엽니다.
막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웡카는 다가올 자신의 미래에대해 희망찬 태도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오프닝을 시작으로 이 영화는 줄곧 긍정적인 웡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설정이 '찰리의 초콜릿 공장'에서의 웡카의 모습과 사뭇달라 부조화를 일으킵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웡카(조니뎁)는 극중에서 외롭고, 우울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어릴적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멋진 성인이 된 현재에도 그를 괴롭힙니다.
이처럼,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웡카는 긍정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실제로 극중에서도 그의 대사를 통해 그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웡카'의 웡카는 너무 긍정적입니다.
너무.
그리고 극중에서 그의 유년시절 중심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입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던 웡카의 모습과 상반된 이미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웡카'는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둘이 다른 영화라고 할지라도, 이전의 설정을 이렇게 없애버릴 거라면 왜 '웡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는지 의문입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아버지와 웡카의 트라우마는 극의 중심이 되는 요소들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삭제하고 웡카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해놓았다면,
'찰리와 초콜릿 공장' 팬들의 비판과 실망감은 감내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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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연출
이 영화를 보며 줄곧 했던 생각은
'굳이 노래를 불렀어야했을까....?'
입니다.
제작진의 의도, 알겠습니다.
웡카를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나눠주는 긍정에너지 영화로 만들고 싶으셨던거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꼭 노래를 해야만 했습니까?
영화를 관람하며, 티모시 샬라메를 비롯한 배우들의 노래가 거슬렸습니다.
노래가 좋지도, 노래를 잘부르지도, 그렇다고 의미가 있지도 않은 노래들을 아쉬운 춤실력과 함께 부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게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주관적인 부분이니, 불편하신분들은 패스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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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인물설정도 아쉬웠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은데 그들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잡혀있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들의 역할 또한 불분명했습니다.
티모시와 다섯친구들 중 '누들'빼고는 왜 있는지 모를..
심지어 움파룸파도 딱히 하는 것 없음..
+ 웡카랑 친밀감 형성도 잘 안되어있음.
그런데 냅다 도와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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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웡카와 초콜릿 대소동,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름다운 친구들과의 우정? (X)
웡카의 긍정 마인드? (X)
초콜릿은 최고?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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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저모.. 아쉬운 부분이 많았던 영화였습니다.
저는 2.5/5점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준 초콜릿은 얼른 먹어버리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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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새벽은 반드시 찾아온다" 미야케 쇼 감독 <새벽의 모든> 개막작 관람 후기
[JIFF 데일리] "새벽은 반드시 찾아온다" 미야케 쇼 감독 <새벽의 모든>
개막작 관람 후기
<새벽의 모든>,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개막작>
제목 : 새벽의 모든 (All the Long Nights)
감독 : 미야케 쇼
각본 : 미야케 쇼, 와다 키요토
원작 : 세오 마이코 - <새벽의 모든> 소설
주연 : 마츠쿠라 호쿠토 (야모조에 타카토시 역) /카미시라이시 모네(후지사와 미사 역)
시놉시스 :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후지사와는 PMS(월경전증후군)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구리타 과학이라는 작은 회사에 입사한다. 또 다른 신입 사원 야마조에, 알고 보니 그 또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동병상련을 느낀 야마조에와 후지사와는 서로 도우며 마음의 상처들을 점차 치유한다.
OVERVIEW
쉽게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왜 이 영화가 그 많은 경쟁을 뚫고 한 도시의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이해했습니다. 본 상영에 앞서 ‘미야케 쇼’ 감독님이 무대에 올라와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중에 인상적인 질문이 있었습니다.
Q. 관객분들이 어떻게 이 영화를 관람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미야케 쇼’ 감독님 A. 이미 사회자분께서 영화를 멋지게 설명해 주셔서 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 영화가 개막작에 선정돼 감사하고, 영화를 멋지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공황장애와 PMS(월경전증후군)를 앓고 있다. 둘은 처음에는 남들을 신경 쓰고 자신들만의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점점 그것들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순수해진다. 감독인 나도 함께 점점 자유롭고 순수해졌다. (내용 중 일부 발췌)
감독님은 두 주인공, ‘후지사와’와 ‘야마조에’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한 번 더 설명하셨다. 우리나라도 일본과 비슷하게 어려서부터 남들의 시선과 관심에 유독 집중한다. 내게 부족한 것은 더욱 단점으로 보이며, 내가 가진 장점과 스타일은 일반적인 트렌드에 뭉게지기 일수다. 인기 없던 남학생이 밴드부를 만들더니 공연장에 서서 묵묵히 노래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와는 친하지 않았지만 기존 인기 많은 밴드와 동등한 자리에 서 있었다. 관객석에선 야유나 하품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겐 여전히 그 친구의 무대가 인기 많은 기존 밴드보다 기억에 남았다. 감독님 인터뷰를 들으며,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궁금해졌다.
약은 소용없다
영화는 주인공 ‘후지사와(배우 카미시라이시 모네)’의 자기소개 같은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난 어떤 인간으로 인식될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에게 질린다.’ 등 남들에게 표현하지 않는 자신만의 어둠을 설명한다. 장대비 속에서 옆으로 쓰러지는 주인공을 보며 PMS(월경전증후군)의 고통과 불안함을 보여준다. 제아무리 약을 먹지만 효과는 전혀 없어 보인다. 약효가 없다는 점은 두 주인공이 가진 공통점 중 하나다. ‘야마조에(배우 마츠무라 호쿠토)’는 공황장애와 함께 대인기피증 같은 모습을 처음부터 보여준다. 예민함이 아니라 모든 것들에 대한 무미건조한, 시니컬한 태도로 일상을 보낸다. 그도 우울증 약을 복용하지만 일순간 발작이나 흥분을 저하할 뿐 완쾌는 없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약은 답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영화가 이야기하는 진짜 치료제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영화를 관람하시는 분들이라면 인류의 ‘만병통치약’이 무엇인지 찾아보셨으면 좋겠다.
탄산수를 마시다
PMS를 앓는 ‘후지사와’는 자신이 언제 또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 동료들에게 과자나 빵을 선물하며 두터운 신뢰를 쌓으려 노력합니다. 주변 사람을 잘 챙겨주는 상냥한 성격이죠. 반대로 공황장애를 앓는 ‘야마조에‘는 남들의 시선은 물론, 자신에 대한 평가나 주변 사람의 행동과 질문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과자를 나눠주는 선량함은 그에겐 쓸데없는 배려로 보일 뿐입니다. 둘의 접점은 ‘탄산수’입니다. ‘야마조에’가 탄산수 병뚜껑을 여는 소리가 ‘후지사와’의 신경을 건든 것이죠. 탄산수는 그의 답답한 삶과 고뇌를 투영한 음료입니다. 누군가에게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그와 달리 탄산수는 청량하고 목을 간질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니까요. 그런 탄산수도 다른 누군가에겐 괴로운 소음공해가 되기도 합니다. 둘의 만남은 탄산수 하나로 처음부터 어긋나 보입니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야마조에’가 탄산수를 마시는 장면은 확연히 줄어듭니다. 이와 함께 둘의 갈등도 점점 사라지죠. 탄산은 갈증을 해소해 주고, 솔직함과 다정함은 두려움을 줄여주는 것이죠.
어른들은 알고 계신다
남녀 주인공 주변에는 항상 나이 많은 어른들이 함께합니다. 영화가 흥미진진했던 이유는 단순히 장애를 앓고 있는 청춘 세대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서 좋았습니다. 둘을 돌보고 지켜주는 이해심 넘치는 어른들도 제각각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누군가는 동생을, 누군가는 누나를, 남편을 일찍 떠나 보낸 상처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이죠. 그들이 보기에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상처를 가진 존재이자 자신들을 투영한 매개체인 것이죠. 시니컬한 ’야마조에‘는 영화 초반, 그런 어른들을 지적하고 삶을 재미없게 산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그가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갖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마조에‘의 작은 변화도 빠르게 캐치하고 웃어주며 칭찬하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은 아픔을 숨기고 사는 그늘 진 꽃들이 밝게 피기 까지를 기다려줍니다. 영화를 보시며 주변인들의 태도와 반응에도 집중해 보시죠!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거야
내리막길은 가속도가 붙으면 더욱 빨리 떨어집니다. 오르막길은 점점 많은 힘을 내야지만 올라갈 수 있죠. 두 주인공에게도 영화는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의 모습을 계속해서 번갈아 보여주며 이야기 합니다. 삶은 내리막은 자동, 오르막은 수동인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햇볕이 따뜻한 지 알기 위해서는 창문을 열고, 자전거에 올라타 당당히 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현장 분위기나 촬영 기법이 굉장히 겨울 감성을 자극합니다. 그렇지만 굉장히 따뜻한 응원을 품고 있죠. 누군가에게 공감하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어쩌면 오르막을 오르는 상대에게 웃어 보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 기쁜 날도, 슬픈 날도 반드시 끝난다. 그리고 새로운 새벽이 찾아 온다.“
영화 속에는 ’후지사와‘와 ’야마조에‘가 진짜 치료를 받는 장면은 어둠 속에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야마조에‘가 직장 동료에게 붕어빵을 선물하는 모습을, ’후지사와‘가 다시 일어나 준비할 수 있었던 모습을! 영화를 관람하시고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1) 양선생 개막식 방문기 링크
2) 양선생 인스타그램 링크
2024.05.01.19:30 전주시 한국문화의소리전당 모악당(001)
2024.05.02 13:30 CGV 전주고사 3관(120)
2024.05.05 10:3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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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잠>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올해 한국의 3번째 영화 흥행작으로 등극했습니다!
9월 9주차 주말 박스오피스 누적관객수와 분석까지 함께 하실까요?
[국내 박스오피스]
영화 <잠>이 개봉 2주차에도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고 손익분기점 100만명의 관객수를 돌파하며 올해 세번째 한국 영화 흥행작으로 등극했습니다
2위는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으로 주말동안 3만여명의 관객수를 기록했고 다음으로 오펜하이머가2만5천여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3위를 기록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북미 박스오피스 1위는 <더넌2>가 차지했습니다
더 넌2’는 루마니아 수녀원 사건 4년 후, 수녀 모습을 한 악마가 다시 나타나면서 드러나는 공포와 충격적인 진실을 그립니다. ‘컨저링 유니버스’의 8번째 작품으로 ‘컨저링 유니버스’ 사상 가장 강력한 악마로 꼽히는 발락의 등장이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베니스유령살인사건>이 그 뒤를 이으며 2위에 올라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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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 위쇼의 방
-벤 위쇼(Ben Whishaw) 배우론
* 언급하는 작품들의 핵심 전개 포함
* 2022년 5월에 완성한 글입니다.
벤 위쇼의 주인공들은 좀처럼 ‘세계’와 화합하지 못했다. <향수>(2006)나 <아임 낫 데어>(2007)의 ‘반사회적 예술가’(오정연, 2008.05.29. [씨네21])에서 시작해, <할로우 크라운>(2012)에선 한 나라의 ‘주인’이 돼서도 예정된 실패를 맞이하고 눈물을 흘렸다. <크리미널 저스티스>(2008)와 <런던 스파이>(2015)에선 ‘로맨스에 휘말려’ 누명을 쓴 청년, <브라이트 스타>(2009)에선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요절한 시인 존 키츠였다. 이는 인물의 소수자성과 연결되기도 했는데-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2008)의 세바스찬은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정체성을 부정 당하다 알코올에 중독됐고,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 속 로버트 역시 남성에게 끌린다는 까닭으로 협박 당했으며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2018), 노만의 사랑과 존재는 불법이었다.
허면 무대 위 벤 위쇼는 늘상 보편에 속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대상이었는가? 그의 연기를 목격했다면 그렇지 않음을 알테다. 앞서 부러 표면적으로 요약했으나, 그의 주인공들은 늘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에 맞서며 중심을 지켜냈다. 몹시도 흔들리며 괴로워하더라도, 여린 눈빛과 신체가 파헤쳐진 밑바닥엔 항상 꺾이지 않는 ‘곤조’가 있었다. 그게 사랑이건 정의건 예술이건, 넘어져도 놓지 않고 ‘세계’에 저항함으로써 주제를 관통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배우가 지은 독특한 감정의 집과 만나 탄생한 캐릭터성이었는데 -벤 위쇼의 인물들에겐 ‘벤 위쇼’가 가득했다.
연기법에 메소드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기는 지났고, 그에 대한 불신을 공개적으로 표하는 배우들도 있으나, 여전히 메소드는 ‘serious acting’의 가장 추앙받는 방법론이다. 다만 현대에는 오프라인 GV나 인터뷰는 물론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관객이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크린 밖의 배우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미디어는 대중이 배우의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음을 전제로 ‘그가 자신과 아주 다른 이 인물이 되기 위해 얼마나 극단적으로 노력했는가’를 화제로 삼는다. 한편으로는 ‘배우 본인’의 모습만으로 팬덤이 형성되기도 하고, 어떤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공개하고 닮은 역할을 맡음으로써 스크린에 자리 잡았다.
벤 위쇼의 케이스는 조금 특이하다. 스크린 밖의 모습은 공개하기를 꺼리면서 연기에는 그 자신이 묻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배우 개인을 알지 못함에도 관객은 (이상하게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앞에 언급했듯 인물의 특징에 유사성이 보이는 경우도 있으나 그게 다는 아니다. 그는 시대적 배경과 캐릭터성, 포지션을 막론하고 스크린 속에서 ‘자신’이 되곤 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 인물(:타인)이 되고 관객에 닿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기능적 조연일 때조차 어느 정도- 벤 위쇼는 화면에 마련한 제 방에서 주변 인물이나 서사와 소통하며 재빠르게 제자리를 찾았고, 영화/TV시리즈/연극 등 다양한 무대에서 그 범위를 넓혔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신체보다는 두뇌/‘심장’에 재능이 있는 자가 되었던 벤 위쇼는, 오히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그 예리함을 입는다. 눈을 굴리는 건 남들의 눈치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내면의 고민이나 불안, 혹은 오감으로 흡수되는 다량의 정보나 빠른 머리 회전 때문이다. 고개나 손목을 꺾는 것은 특정 이미지를 내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감각이 신체에 묻어 절로 그리 된 것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느끼느라 외부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 모두가 저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임 낫 데어>(2007)
‘세계’와 불화하며 비범하게 존재하다
여성을 대상으로 ‘비정상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남성. 앞 문장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향수> 속 벤 위쇼의 그루누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행동의 폭력성과는 별개로 스크린 속 그의 몸짓은 오히려 남성/여성을 초월한 기이하고 불온한 선지자의 그것에 가깝다. 단편 <더 뮤즈>(2014), 뮤즈에게 집착하다 결국 익사하는 남자의 변태적 우울에도 닮은 데가 있다.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은, 그 ‘괴상한 욕망’이 벤 위쇼의 피부에 안착함으로써 ‘어느 정도’ ‘시대와 불화한 비범한 예술’의 정서를 입는 까닭이다.
<아임 낫 데어>, 덥수룩한 머리의 젊은 ‘시인’. 담배를 물고 삐딱하게 카메라를 향하는 그의 눈빛도 불온하다. 언뜻 ‘메인 롤’은 케이트 블란쳇의 ‘록스타’나 히스 레저의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의 ‘무법자’ 등 비중과 활동성이 높은 자들의 몫인 듯하지만, 흑백 화면에서 한 공간에 머무르며 말을 이을 뿐인 ‘시인’이야말로 가장 자유롭다. 그의 뾰족한 신체는 플롯들 사이의 중심을 잡고, 대사는 작품의 메시지를 관통한다. 유사하게, <클라우드 아틀라스> 속 로버트 프로비셔의 편지는 정교하게 뒤섞이는 서사의 기준을 잡고, 곡은 화면을 아우른다. <브라이트 스타>, 존 키츠의 운명이자 고통인 시 또한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작품 전체에 흐른다.
존 키츠는 화면에 잡히지 않은 채 타인의 언어를 통해 등장하고 퇴장했다. 그러나, ‘집구석에 박혀 있는’, ‘요새 슬픈 생각을 많이 하는’ 따위의 말이 불러일으킨 예상을 깨며- 세상 맑은 얼굴로 평가를 백지화했다. ‘날 똑바로 보라’고 요구하듯 첫인상을 남겼다. 병이 목숨을 앗아가기 전 이미 연인과 작별의 밤을 보내며 차분히 죽음을 예견했다. 어느 정도 자신을 ‘실패작’으로 여기더라도 사랑과 예술에 대한 확신만은 뚜렷한 채였다. 로버트 역시 스스로 마지막을 만든다. 유서 격의 편지와 함께 등장하기에 관객은 자연히 그가 삶을 ‘포기’하게 된 과정을 궁금해하게 되는데, 이 자살은 사실 ‘포기하지 않음’에 가깝다. 세상이 정한 바운더리에 속하지 않기에 무시당하고 협박당하지만, 제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 죽어가는 영혼을 곡에 담는 모습에는 절망이나 파멸의 정서가 없다. 초월적 아름다움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자, 자신을 짓누르는 세계에 순응하느니 존엄하게 사라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가 편지에 적은 대로. (“진실된 자살은 세심한 준비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야.”, “더 나은 세상이 있다고 믿어, 먼저 가 있을게.”)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세바스찬은 가난한 예술가가 아닌 귀족가 도련님이었으나, 세상에 ‘fit in’ 되지 못했다. ‘남색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관람되며’ 처음 등장하는데, 그 역시 편견에 빼앗긴 첫인상을 제 언어로 재정립한다. 꽃다발과 편지, 이어 테디 베어와 행복에 대한 의심으로. 가족과 자신을 단호하게 분리하며 이방인을 자처하는 세바스찬의- 텅 빈 저택을 휘감는 위화감은, 미묘하게 구르는 벤 위쇼의 눈동자로 완성된다. 미래의 불행을 확신하고 ‘죄인’이 되어 슬픈 얼굴로 기도하면서도 절대 존재를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Just to fit in.그냥 너한테 맞추려고.”이라던 찰스에게, 그는 “Well, than don’t!그럼 하지 마!”이라고 말했다. 저들의 ‘선의’에 흔들리느니 차라리 스스로 망가지고 고립되기를 택했다. 사과하는 찰스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그는 작별의 순간 “Not a word.한 마디도 하지 마.”라고 선을 긋던 존 키츠와 겹친다. 타인의 죄책감이 되거나 ‘구원’되기를 거부하며, 연약하나 평온한 모습으로 원하는 순간 이별(퇴장)을 선언한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침착하게 각도를 맞춰 입에 총구의 자리를 만드는 벤 위쇼의 동작은 분명한 정서를 섬세하게 전달했다. 시대의 룰에 억압당한 그의 인물들은 -병으로 인한 죽음이든, 권총 자살이든, 이민이든- 결국 제 식대로 ‘세계’와 헤어지기를 택하며 고유의 언어로 존재를 정의했다. 이 남다른 자들이 거의 거리감 없이 관객에게 닿았던 것은, ‘두꺼운 피부나 굳건한 심지로 대수롭지 않게 억압을 받아치거나 무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숨길 요령 없이 최전선에 던져져 끊임없이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존재를 지켜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캐릭터 묘사의 일등공신은 절대 벤 위쇼였다.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
평범하고 무해한 마스크 속 내면의 힘
단편 <러브 헤이트>(2008) 속 ‘착하지만 수완 없는’ -증오조차 ‘제 hate에게 휘둘려’ 어설프게 표출하며, 욕이 가득한 메일을 쓰며 울먹이거나, 사람을 ‘죽이려’ 나서서도 주먹 한 방에 자빠지고 마는- 톰처럼, 벤 위쇼의 어떤 주인공들은 가장 평범하고 순수한 영혼이었다. 대개 사람이나 상황에 ‘말려’ 곤경에 처하고 위험에 노출되었는데- 그 ‘순수’는 대다수의 사람이 지닌 것은 아니어서, 관객은 이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고’ ‘구해지기를’ 바라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받는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끝내 스스로를 구한다.
<크리미널 저스티스>, 벤의 변호사는 법정에서 평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며 말한다, “Be yourself, Ben.네 모습 그대로 있으면 돼, 벤.” 벤 위쇼의 얼굴은, 작품이 ‘크리미널 저스티스’의 모순과 부정의를 강조하는 제1의 방법이다. 메시지를 분명히 하려면 주인공의 캐릭터성에 물음표가 생겨선 안 되고,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6) 속 카세 료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그의 ‘무해한’ 인상은 의심의 여지를 효과적으로 지웠다. (‘매력적인 보호자’와 로맨틱한 긴장감을 유지하다 ‘구원’되는 연약한 주인공의 남성형인 듯 하다 그것을 ‘배반’하기도 하는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제스처였음을 전하는 것도 벤 위쇼다.) 후반부 결코 전처럼 해맑지 못한 눈빛은 시스템에 의해 개인의 마음이 조각난 모양을 빚어낸다. 최종적 설득력은 대사나 행동 자체보단, 섬세하고 개인적인, ‘두려움을 내보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기에 있었다. 특수한 상황임에도 인물과 같은 것을 겪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몸도 마음도 최대한으로 여린 듯 보이나 숨겨진 내면의 힘으로 포기하지 않는 캐릭터들. 연인의 죽음 이후 누명을 쓰고 괴로움과 혼란에 휩싸이지만 진실을 알아내려 애쓰는 <런던 스파이>의 대니,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노만 스콧 또한 그 맥을 잇는다. 벤과 노만 모두에겐 법정에 서는 장면이 있는데, 강압적인 시선 한가운데 자리한 무방비한(무방비하나 무력하지는 않다.) 이미지가 이미 ‘결백’을 주장한다. 벤 위쇼는 ‘연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모든 자극을 견뎌내며, ‘울음을 계속 참고 있는, 그러다 참지 못하기도 하는’ 모양을 유지한다. 그 터질 듯한 상태 그대로 결국 말들을 당당하게 뱉어내는 모습은, 고통스럽고 벅찰 수밖에.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경우 노만 스콧의 특수한 서사, 복합적인 내면과 매력을 드러내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데, 벤 위쇼는 조심스러우나 방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이를 수행한다. 노만은 제레미 소프의 서술을 통해 일종의 ‘안타고니스트’ 포지션에서 시작하지만, 짐작은 곧 깨진다. 감정과 ‘약점’을 다 드러내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 속수무책의 순수. 모델로서 포즈를 취할 때도 어느 정도 수줍고, 협박을 해도 어설프다. 내내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즐겁고 당당하게 세상에 외칠 때, 엉엉 울고 나서도 활짝 웃을 때, 관객은 이것이 ‘노만 스콧의 이야기’임을 의심치 않게 된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2018)
비범하나 보편적인, 평범하여 특별한.
‘천재’라는 수식에 기자는 어울리는 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 아워>(2011-2012) 프레디의 재능은 절대로 비범하다. 그에 대해 의심하는 이는 없지만, ‘안 예쁜 태도’에 대해서도 모두 입을 모은다. 열변을 토할 때 그의 표정은 ‘관리’되지 않고 생생하게 굳어진다. 프레젠테이션보다 내용이 중요하고, 제 평판보다 진실이 중요해서다. 모두 어느 정도 연기하며 사는 세계에서, 홀로 연기할 생각을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기꺼이 골칫거리가 되는 자. 프레디가 맘에 없는 말을 하는 대상은 벨 하나다. 감정을 덮으려 부러 장난을 걸거나 상대를 깎아내리지만, 아련한 눈빛이 진심을 다 드러낸다-기보단 숨기지 못한다. 외부 압박에 타협하지 않는, 남달리 똑똑하고 위트있는, 그러나 로맨스엔 젬병인- 주인공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프레디 라이언은 유일하고 그 까닭은 벤 위쇼라는 이름으로 설명된다. “He sees extraordinary in ordinary.그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봐요.”(벨 롤리) 프레디가 그렇듯 벤 위쇼도 그렇다.
1화 첫 장면은 대뜸 클로즈업된 벤 위쇼의 얼굴, 거울을 보고 연설문을 읊는 모습이다. 따라서 관객이 보고 있는 상은 프레디 본인의 눈에 비친 것과 동일하다. 이처럼 작품은 자주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데, 이 과정에서 관객은 그 뛰어난 감각이 인식하는 바를 어느 정도 느끼게 된다. 벤 위쇼가 샅샅이 드러내는 보편적인 감정의 떨림 덕이다. 그러고 보면 프레디는 여성을 ‘구하는’ 강하고 멋진 남성이기보단, 루스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늘지거나 잔뜩 얻어맞고 벨에게 발견되는 자다. 인간적인 ‘보통’의 정서를 지님에도 물러서지 않기에 더 ‘보통이 아닌’- 이 위대한 기자의 여정을 그저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이입해 가슴을 졸이며 응원할 수밖에. 비범하면서도 보편적인, 평범하기에 특별한. ‘세계와 불화하는 그들’의 내면에 있는 힘을 벤 위쇼는 오롯이 소화해 전했다. 그 컴플렉스complex함을 절대 단순화하는 법 없이.
어떤 인물들: ‘유해한 세계’에 벤 위쇼가 편입되는 법
아르튀르 랭보, 존 키츠, 노만 스콧, 리처드 2세와 최근의 아담 케이까지. ‘실존 인물’에 그를 캐스팅하며 외모의 유사성은 애초에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을 테고, 기대한 바도 완벽한 ‘재현’과는 멀었을 것이다. 그가 ‘벤 위쇼 아닌 자’이려면, 애니메이션 곰이 되거나, 판타지적 디스토피아의 무감정이라도 입어야만 했을테니. 그러나 <패딩턴>(2015), 마음껏 정신없이 명랑했다가도 풀이 죽어 무방비하게 처량해지는 벤 위쇼의 정교한 미성이 사고뭉치 패딩턴을 ‘지구상 가장 순수한 생명체’로 만드는데 필수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듯- ‘기능적 조연’들 역시 벤 위쇼를 통함으로 인해 달라진다.
<007> 시리즈나 <제로법칙의 비밀>(2013) 속 ‘박사들’ 외에 그가 맡은 일부 조연들은 어쩐지 의외다. 빈민가 소년, 시인, 기자, 귀족 자제, 심지어는 왕의 모습으로-세계의 법칙이/을 거부하는 자였던 벤 위쇼는, 몇 년 후 여성 주연 작품들에서 ‘유해한 규범을 기꺼이 따르고 재생산하는 남자들’이 되었다.(‘절름발이 남자’는 규칙을 어기지만, 세계에 편입되기 위함이었다.) 맡는 역할의 범위를 넓히며 늘 ‘특정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캐스팅으로 ‘효과’를 본 것은 사실 배우보다는 작품이다. ‘규범’이 현실적인 경우 개인이 아닌 불평등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면, ‘영화적일’ 때는 화면에 미묘한 불쾌감을 부여한다.
<서프러제트>(2015) 속 남성의 유형은 다양하다. 습관적으로 폭력을 즐기는 자, 권력을 쥐고 놓지 않는 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법을 집행하는’ 자, 아내를 지지하는 자- 그들 모두가 ‘악해서’ 여성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며, ‘대표적’ 가부장의 마스크를 벤 위쇼가 가져가며 이는 최대한으로 어필된다.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는 ‘착실한 남자’로 등장한 소니는, 모드가 여성 참정권 집회에 나가도 먼발치에서 예민하게 주시하거나 부드러운 말투로 걱정을 내비치는 정도였다. 그 ‘배려’의 정체는 인물의 불안과 함께 밝혀지고, 카메라는 그가 ‘자상한 남편’, 이어 아버지이기를 포기하는 순간을 노린다. 악의 없이 울먹이며 흔들리는 낯을 잠시 클로즈업함으로써, 이 남자가 그저 평범하고 유약하며 특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가부장임을, 그 무책임한 몰인지가 그의 잘못이며 폭력과 차별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더 랍스터>(2015)는 남다른 이입이 특기인 벤 위쇼에게 언뜻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요구되는 연기 스타일이 일정함에도, 이곳의 배우들은 의외로 ‘텅 비지’ 않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연출을 거듭할수록 더) 배우의 개성을 지우기보다 ‘세계’의 룰에 맞게 돋보이도록 조율하며, 행동과 정서가 뻔하게 이어지지 않도록 활용해 장면을 ‘흥미롭게’ 만든다. ‘비정한 여자’가 안젤리키 파풀리아의 얼굴을 통해 기본적 우울을 입듯,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절름발이 남자’의 바탕에 있는 불안은 벤 위쇼의-기계적인 톤을 적절히 입고도 예민하게 구르는 눈동자를 통해 드러난다. <리틀 조>(2019), 크리스의 변화를 미묘하고 ‘극적’으로 드러내기에도 그는 가장 적합한 배우였다. 주인공 여성을 사로잡는 매력적 남성의 전형이 아닌, 잔뜩 긴장해 머뭇머뭇 데이트를 신청하는 소심한 연구원. 그 조심스러움, 어색함과 함께 무해함이 사라지고 결국 무감정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크리스가 지닐 기이함을 예시카 하우스너는 벤 위쇼의 실루엣에서 찾았다. ‘변화’ 이후의 폭력성 역시 계산된 각도로 침착하게 주먹을 뻗는 종류의 것으로, 색다른 공포와 불쾌감을 야기한다. 엄격한 디스토피아에 편입되는 남성들, 그 유해함마저 벤 위쇼만의 것이었다. 특정한 ‘악인’이 되려 애쓰지 않고 ‘세계’를 거역하지 않는 선에서 저만의 위치를 찾는다.
<리틀 조>(2019)
예민함이라는 재능: 타인의 얼굴로 가장 솔직한 자신이 되다.
단순히 마른 것이 아닌 ‘가녀린’ 실루엣, 쉽게 긴장해버리는 근육. 같은 작품에 출연했던 동세대 잉글랜드 배우들: 톰 히들스턴(<할로우 크라운>)이나 짐 스터지스(<클라우드 아틀라스>), 매튜 구드(<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와 같은 ‘남성 리드’가 되기 어려운 이미지고, 에디 레드메인(<대니쉬 걸>)의 ‘무던함’도 없다. 유사하게 ‘세상과 불화하는 천재’ 타이틀을 유독 많이 달았던 베네딕트 컴버배치처럼 ‘뭐든 가능한’ 마스크도 아니어서, 드물게 이성애 로맨스 서사의 주인공이 될 때도 제 1화자나 ‘관계의 리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많은 동료 배우와 평론가, 관객들로부터 ‘동세대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를 받는 까닭의 핵심은 이 ‘예민함’에 있다. “주변 사람들보다 피부를 한 겹 덜 가지고 있는 것 같은”(트레버 넌),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감각을 전제하는 천재성,은 ‘축복’이라고 하기엔 망설여짐에도- 그의 예민함은(‘예리함’으로 바꿔 적어서도 안 된다) 절대로 ‘결점’이 아니다.
“세 시간 만에 모든 인생사를 겪고 자살을 결심하는 젊은이”(벤 위쇼, 2004.04.29. [인터뷰: AP Archive]), 비니에 후드티 차림으로 약병과 주머니칼을 꺼내며, ‘사느냐 죽느냐’를 논하-기보다 온몸으로 겪-는 트레버 넌의 ‘뉴 햄릿’은, 벤 위쇼의 운명과도 같았다. 아니, 이 역할의 운명이 그였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이 주연 데뷔 퍼포먼스로 그는 수없이 공연되고 인용됐던 대사가, 관념에서 떠도는 대신 관객의 가슴에 내려앉게 하고 말았다. <할로우 크라운>, 리처드 2세의 슬픔이 밴 엷은 미소에는 귀족과 군인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분투했던 열 살의 어린 왕마저 비친다. 그는 짓무른 눈가에 자기파괴적 저항과 조롱의 뉘앙스를 드리우고 스스로 ‘폐위’ 씬을 써내려가며 ‘텅 빈 왕관’의 의미를 들이밀었다.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외치며 안경을 든 손을 섬세하게 놀리던 브루투스가 그랬듯, ‘폭정’으로 수식되기도 하는 리처드 2세의 말년 역시, 벤 위쇼와 만나 풍부하고 ‘현대적’이기까지 한 정서를 입었다. 현대의 일반인과는 한참 먼 이 셰익스피어의 남자들이 벤 위쇼와 만나면, 어찌하여 ‘인간’으로 다가와 버리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이 되고 싶지 않다.”(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던 그는, ‘모순적’이게도 스크린을 통해 가장 적나라한 자신이 된다. ‘연기하지 않는’ 이들을 연기하는 벤 위쇼는 그들인 동시에 ‘벤 위쇼’이며, 보고 있는 관객 하나하나다. 그가 불어넣는 개인적 에너지는 작품 전체로 확장되어 관객을 인물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평범과 비범, 특수와 보편을 가리지 않는다. 중세 왕의 대사조차 개인적 감성을 완벽히 드리워 읊어버리고, ‘특별할 것 없는’ 청년일 때도 남달리 고통 받는다. 어떤 전형성조차 저다운 방식으로 수행한다. 배우로서 ‘이점’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특징을- 벤 위쇼는 애써 지우고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않고, 타인/인물이 자신의 피부에 착륙하여land on one’s skin 파고들도록 허락한다.
배우가 게이인 캐릭터를 연기하면, ‘OOO게이’라는 검색어가 자동으로 따라붙고, ‘아니라는 부정’이나 커밍아웃에 대한 기대(유명인의 커밍아웃은 퀴어의 가시성visibility을 높이고 인식을 향상시킬 가능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여기서 ‘기대’는 그러한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한 종류의 것이 아닌 단순 가십을 위한 ‘기대’를 일컫는다.)가 뒤따른다. 벤 위쇼 역시 그에 시달렸고 아웃팅outing으로 성 지향성이 대중에 알려졌으나, 이후로도 소수자적 정체성을 ‘공개’하거나 숨기려고 애쓰지 않았다(벤 위쇼, 2016.04.03. [인터뷰: The Guardian]) 이미지가 굳어지기를 걱정해 의식적으로 ‘다른 방향의’ 배역을 맡지도, 반대로 전략적으로 특정한 이미지를 대중에 ‘어필’하지도 않았다. “배우들은 어떤 것이든 구현하거나 표현할 수 있고, 그 자신이 무엇인가,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벤 위쇼, 2019 골든 글로브 백스테이지 인터뷰)고 벤 위쇼는 말했다. 그의 인물 중엔 게이도 바이도 스트레이트도 있으며, 이는 표현의 깊이나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스스로 ‘양쪽 모두의 에너지에 매료된다’(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고 말하기도 했듯, ‘남성성’ 혹은 ‘여성성’의 전형을 답습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깨트린’다기보다는- 다만 가장 정직한 인간이 된다. 카메라 앞에서 기꺼이 무방비해지는 그 솔직함과 용기 역시 재능이다. <리틀 조>의 서사를 가져온다면, 그야말로 가장 ‘리틀 조 행복 바이러스’에 덜 감염된 사람 중 하나일 테다.
아르만도 이안누치식 찰스 디킨스 각색에서 ‘밉상 빌런’ 유리아 힙의 옷을 입기도 했던 그는, <파고>(시즌4, 2020)에서는 총을 겨누고 협박하다가도 “내겐 아내가 있어요.”, “난 아내가 없는데 내가 죽으면 개밥은 누가 줘요.” 따위의 말에 눈가를 떨고 마는 ‘정이 가는 범죄자’ 라비 밀리건의 복잡한 캐릭터성을 한 톤 낮춘 목소리에 드리웠다. 프로듀싱을 겸한 <디스 이즈 고잉 투 허트>(2022)에서는 좀처럼 ‘정이 가지 않는unlikable’’(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 프로타고니스트 아담 케이가 되어 바쁘고 예민하게 이 병실 저 병실을 오가거나 우울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벤 위쇼는 여전히 범위를 제 식대로 넓히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공연예술계에 혈연이 없음에도 젊은 나이에 무대 정가운데에 올랐던 그의 연기에는 초반부터, ‘타고난 천재성’ 따위 문구 없이는 수식하기 힘든 완전함과 특별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흔치 않은 재능’이란 흔한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것 역시 안 될 말이다. 그가 지나온 예술의 여정엔 소수적 정체성을 지닌 내성적 남성으로서의 경험과 고민의 과정, 그것을 드러낼 용기와 감수성, 인물을 존중하는 섬세한 접근법, 어느 하나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배우로서의 프라이드와 철학이 녹아 있다.
연기는, 벤 위쇼가 타인을 자신의 공간에 초대하는 방법이다. 세상이 화면 밖의 그를 궁금해할 필요나 권리는 없다. 그는 어느 정도, 데뷔 초부터 그 선언을 마쳤다. 연기예술가 벤 위쇼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의 예술을, 픽션의 옷을 입은 채 내보이는 자신을 들여다보면 된다. “Give him a mask, and he’ll tell you the truth.가면을 씌워 주면, 그는 진실을 말할 거야.” (1998, <벨벳 골드마인>, 오스카 와일드 재인용)
* 주 참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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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당신이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이라면?
어느 날 당신의 삶이 가짜처럼 느껴진다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들어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조명이 떨어지거나 만화 영화처럼 폭우가 당신의 움직임을 따라서 내린다. 수십 년 전 죽는 모습을 목격한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오고, 평범한 사람들이 돌변해서 아버지를 납치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출근길에 틀어 둔 라디오에서 당신의 현재 상황을 그대로 중계한다.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지켜보고, 거기에 맞춰 행동한다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배우자까지도 의심스럽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진실과 해결책을 찾을까? 아님 상황을 모르는 척 안정된 삶을 이어가야 할까?
위에 적은 모든 예시는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가 겪은 일이다. ‘트루먼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어날 때부터 모든 순간이 리얼리티쇼로 방영된 남자가 점차 진실을 알게 되는 상황을 다룬다. 1998년 개봉했으며, ‘죽은 시인의 사회’로 유명한 피터 위어 감독의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호평과 흥행에 힘입어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트루먼쇼’에서 능청스러운 연기로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 ‘짐 캐리’는 1999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한 편의 리얼리티 쇼처럼 출연진의 이름과 배우와 PD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이후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의 일상과 시청자의 모습이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쇼에서 트루먼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연기와 설정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의심스러운 사건이 이어지자 ‘트루먼’은 그가 살고 있는 헤이븐 섬을 떠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헤이븐 섬은 거대한 인공 스튜디오로 시간과 기후가 임의로 조정된다. 하늘에서 떨어진 조명은 밤하늘의 별을 대신하는 역할이었다. 헤이븐 섬은 잘 관리되어 있지만, 해와 달이 한꺼번에 떠있는 등 기묘한 공간이다.
다른 곳으로 떠나려는 ‘트루먼’의 노력은 번번이 막힌다. 약 5천대의 카메라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가 떠날 수 없도록 PD ’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는 온갖 방법을 이용한다. 쇼에 큰 집착을 보이는 PD는 달 모양의 방송국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트루먼’을 살핀다. 자신의 사생활은 극도로 노출을 꺼리지만, 트루먼이라는 개인의 삶을 공유하는 일이 다수의 시청자에게 위안을 준다고 믿는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바다에서 보트를 타다가 겪은 사고도 PD가 ‘트루먼’을 막으려고 고의로 만든 상황이다. 그런 방식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가 비행기 표를 구매하러 방문한 여행사 벽엔 비행기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버스가 갑자기 고장 나거나 교통체증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다.
PD의 지시에 따라 ‘트루먼’에게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건 배우들이다. 부모님, 가장 친한 친구, 아내, 이웃 가릴 것 없이 상황에 맞춰 연기한다. 그들은 쇼가 진짜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직업적으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7살부터 함께 한 친구 ’ 말론(노아 에머리히)’은 ‘트루먼’이 진실에서 멀어지고 의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인물이다. 그는 ‘트루먼쇼’가 위기의 순간에 처할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맡는다. 규칙처럼 간접광고를 위해 6개 묶음 맥주를 들고 ‘트루먼’을 찾아온다. 영화에서 재밌다고 생각한 배경은 ‘말론’과 ‘트루먼’이 아지트로 사용하는 장소이다. 어두운 밤에 그들은 끊어진 다리 위에서 장난 삼아 골프를 치거나 위태롭게 다리 끝에 걸터앉는다. 거짓말로 얼룩진 그들의 관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다리와 닮았다.
쇼에서 큰 비중을 가진 또 다른 인물은 ‘트루먼’의 아내 '메릴 버뱅크(로나 리니)’다. 그녀는 영화 속 대사와 행동으로 짐작컨대, ‘트루먼’을 사랑하기보다 쇼에 출연하며 얻게 될 명성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주로 트루먼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며 회피하기 일쑤이고, 광고를 처리하기 위해 맥락에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를 자주 한다. 트루먼에게 가족의 안정과 평화라는 명목으로 떠나려는 '안전한 집으로 가요' 라며 붙잡는다.
한편으로 ‘트루먼’이 세상에 대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결혼식 사진에서 그녀는 검지와 중지를 꼬고 있다. 미국에서 손가락을 꼬는 동작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행운을 빌어주거나 현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장면에서는 후자로 사용되었다. ‘트루먼’은 아내의 손가락을 보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이 거짓을 말할 때, 상처는 얼마나 클까? 배신감과 타인을 향한 불신이 밀려들지 않았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트루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이 TV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쇼의 단역배우로 출연했던 ‘실비아(나타샤 맥켈혼)'는 우연히 ‘트루먼’과 마주치고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두 사람은 감시를 피해 함께 짧은 시간을 보내지만, 곧 방송 관계자에게 ‘실비아’가 붙잡혀 이별한다. 이후에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비아’는 트루먼쇼 반대운동을 하고 그의 자유를 응원한다.
‘트루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그를 지켜보는 시청자도 영화에서 등장한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전 세계 곳곳에서 방영되고 나이, 국적, 성별을 불문하고 열정적인 팬도 있다. 마치 드라마를 보듯 ‘아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둥 ‘트루먼’의 삶에 한 마디씩 보태고 행동 하나하나에 함께 울고 웃는다. ‘트루먼’을 촬영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숨어서 지켜보는 구도와 카메라의 검은 테두리가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사용했다. 중반부를 넘어갈수록 더 자주 등장하는데, 관객이 '트루먼쇼'의 시청자 입장이 되도록 유도한다. ‘트루먼쇼’는 인물마다 개성과 존재감이 뚜렷해서 행동이나 역할을 해석하는 즐거움이 있다.
1998년 영화 ‘트루먼쇼’이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영화 속 비현실적인 상황이 우리의 현실과 닮아서’가 아닐까? ‘트루먼’이 ‘헤이븐섬’을 떠나지 못하게 막는 모습에서 안정적인 삶을 이유로 도전을 말리는 주변 사람들이 떠오른다. 관계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실패로 끝날 거라 걱정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말린다. 때론 함께한 세월을 언급하며 ‘너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식의 말을 꺼내기도 한다.
그리고 ‘트루먼쇼’에서 충격적이라고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는 시청자가 프로그램의 결말과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곳은 뭐하냐고 물으며 채널을 돌리는 부분이다. 시청자를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타인의 시선이라고 해석한다면, 열렬히 응원하거나 인생의 조언을 건네던 사람들도 생각보다 우리에게 무관심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헤이븐 섬’을 탈출하려는 ‘트루먼’에게 PD는 리얼리티 쇼라는 진실을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바깥세상은 위험하지만, 쇼의 주인공으로 살면 안전하다고 설득한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유명인이 될 거라고 설탕 발린 말로 회유한다. 결국 ‘트루먼’은 거짓이 판치지만 안정적인 삶과 자유롭지만 위험한 세계라는 선택에 놓인다. 만약에 당신이 ‘트루먼’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선택 후 펼쳐질 미래는 어차피 미리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자신의 상징과 같은 대사로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In case I don’t see you, Good afternoon. Good evening,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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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맛을 그대로 재배치
* <비공식작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비공식작전 (2023)
감독: 김성훈
출연: 하정우, 주지훈
장르: 드라마, 액션, 스릴러
상영시간: 132분
개봉일: 2023.08.02
납치된 한국인, 잔혹한 내전에 휩싸인 중동 국가의 배경, 그리고 열악한 상황 속 인질을 구출하고 협상을 성사시켜야 하는 주인공. 여기까지만 들어도 줄거리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소재도, 플롯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근 2년 동안만 하더라도 우린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소말리아 내전 탈출기를 그린 <모가디슈>, 아프간 피랍 사건을 다룬 <교섭>을 보아 왔다. 내용상으로 두 작품과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비공식작전>에 관객들의 흥미가 쉽게 닿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이유는 <끝가지 간다>, <터널>을 통해 뻔한 소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김성훈 감독의 신작이라는 것, 그리고 나왔다 하면 기본 이상은 해내는 하정우 주지훈 주연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코미디와 서스펜스의 능숙한 호흡으로 아직까지도 감독의 대표작으로 회자되고 있는 <끝까지 간다>가 있기에 분명 <비공식작전>도 익숙한 시놉시스를 매력적으로 탈바꿈해 놓았을 것이라는 낙관 어린 시선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비공식작전>은 '김성훈 감독'의 장기가 두드러진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실화에서 착안한 소재에 각색의 요소를 많이 더해 경직된 전개를 탈피하려고 한 시도가 엿보이나 그럼에도 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총탄이 날아오는 격전지에서 벌이는 택시 추격극에서 긴장감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다음 신에서 벌어질 장면들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쯤 주인공들의 발목을 잡는 정부 윗선, 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제3의 인물,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주인공이 영웅 심리에 불타게 되는 변화까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의 연속된 흐름을 굳이 또 한 번 보여준다.
애국심으로 포장한 작위적인 메시지, 불필요한 캐릭터, 감성에 호소하는 신파적 스토리 같은 곁가지를 모두 쳐내고 '오락 액션' 하나에 집중한 건 호평할 만하다. 레바논(실제 촬영지는 모로코이지만)을 배경으로 한 영상은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택시 한 대로 상대하는 무장 테러리스트 집단을 상대하는 추격전은 나름대로 관객들이 즐길 만한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갖췄다. 이미 <신과 함께> 시리즈에서 호흡을 맞췄던 '주지훈'과 '하정우'의 조화는 신선함 대신 능숙함을 택하며 한 편의 콩트 못지 않은 티키타카를 선보인다. 특히 '주지훈'은 본인의 장기인 능글 맞고 뻔뻔한 캐릭터로 완벽히 분해 아는 맛도 분명 맛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른 작품들과 연기 면에서 큰 차별화를 느끼지 못했던 '하정우'보다 작품에 유쾌한 바람을 불어넣어준 '주지훈'의 힘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단순히 오락을 추구한 작품으로서는 비록 뻔한 내용일 지라도 큰 흠결은 없다. 다만 후반부에 이를수록 본분을 잊기 시작하며 힘겹게 끌어온 극의 동력마저 상실한다. 시각적 재미와 서스펜스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 <비공식작전>은 한 가정의 파괴, 그리고 인간에게 가해진 비인륜적 행태를 이야기의 모태로 삼고 있다. 결국 작품의 핵심이 오락성일지라도 가볍게 다뤄서만은 안 되는 소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극은 끝으로 향할수록 어설프게나마 주제의식을 전하려 한다. 목숨을 걸 정도로 강한 동포애를 보여준 '이민준(하정우)'과 언젠가부터 그를 착실하게 따르는 '김판수(주지훈)', 그리고 외무부 직원들을 통해 돌아본 국가와 공직자들 간의 신뢰 관계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는 효과를 얻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한 일종의 수단 정도로만 느껴졌다. 빈 껍데기 같은 메시지는 오히려 이야기와 어우러지지 못한 채 겉돌 뿐이다.
나쁘지도 않지만, 좋지도 않다. 이국적인 배경과 화려한 액션신에서 나오는 시각적 재미, 그리고 적당한 서스펜스가 존재하지만 <비공식작전>만의 특색을 꼽으라 하면 딱히 떠오를 만한 게 없다. 세련미는 없더라도 연출가로서의 특징이 확실했던 '김성훈'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 것은 분명하다. 오락과 대중성이 가장 중요한 여름 텐트폴 영화이지만, 흥행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줄 힘이 약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비공식작전>은 아는 맛을 그대로 가져와 재배치하기만 했을 뿐 아이디어는 안일했고, 고민은 부족했으며 디테일은 외면 당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l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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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결국 다시 혼자가 될 것이란걸 알기 때문에
업보. 불교에서 쓰는 말이다. 선악의 행업을 말미암아 삼은 과보를 뜻한다. 이 업보의 주체는 상황마다 다르다. 인간관계에 정답이란 없으니 당연하다. 내가 업보를 돌려받을 수도 있고 타인이 누군가에게 줬던 상처를 내가 입힐 수도 있다. 불교를 정의하는 또 다른 가치관이 있다. 윤회다. 생명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내가 지금 태어났다고 한 건 언제쯤 죽는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또 나는 다른 무언가로 태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좋은 일 나쁜 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금 하품을 크게 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업보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크게 준 상처의 대가를 돌려받고 있는 셈이다.
이 가정을 계속해서 곱씹다 보면 인생이 허무해진다. 공감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이겨내도 막상 같은 시련이 덮치면 어떡하지.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일인데. 이러다 내가 받은 상처가 세상의 기준에 끼지 못한 게 된다면 참 외롭지 않을까. 이 감정이 내가 단 1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런 거겠지.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상대를 모욕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고, 나 역시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주변인들에게 더 감사해야 한다는 걸. 갑자기 나더러 화려하다고 했던 내 스승 중 한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연락할 일은 없어 마음으로만 그분의 행복을 기원한다. 나는 내가 성공했던 일들보다 훨씬 더 초라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에 휘둘리는 인간이기도 하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아무것도 없는 영화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눠진다. 한국의 인기 여배우가 유명 영화감독과 불륜설이 난다. 국내 여론은 당연히 난리가 나고 베를린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는 언니랑 대화를 나눈다. 1부 끝. 2부는 여배우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불륜이 났던 남자 감독과 만난다. 2부 끝. 이 영화는 줄거리만 단출한 게 아니다. 영화의 화법도 조용하다. 플롯이랄 게 없다. 조명도 제대로 안 된 것 같고. 인물 갑자기 튀어나오고. 대화도 사실 의미가 없다. 난 왕가위를 좋아한다. 왕가위 영화의 핵심은 때깔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왕가위의 감성과는 전혀 딴판이다. 왕가위는 스트릿룩으로 멋을 뽐낸 사람쯤 된다면 (이 영화에서의) 홍상수는 맨투맨에 슬랙스만 입었는데 신발이 짚신인 사람이다. 난 난해한 옷차림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비춰서 과연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없다. 이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없다. 2021년 오늘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알았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딱히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혼자 밤 해변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말이 아니라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다. 감독은 어떤 감정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쓴 걸까? 난 외로움과 후회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영희가 유일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공간은 해변이다. 그녀는 애인을 좀 많이 신경 쓴다. 친한 언니에게도 애인 이야기를 한다. 지인들과 술 먹을 때도 애인 생각을 한다. 해변에서도 애인의 얼굴을 그린다. 그러다가 해변에서 잔다. 시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냥 그녀는 그러고 만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시간이 지나 그녀의 그리움이 어떻게 됐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2부를 보자. 바다에서 지인들끼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 근데 이건 꿈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2부가 끝났다. 영화 안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던 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다. 모든 게 꿈이었다. 결국 그녀는 혼자서 길을 걷는다. 영화의 시작은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었는데 끝은 혼자다. 갈등의 해결? 그런 것 없다. 주인공의 해피엔딩? 없다. 새드엔딩? 당연히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 상황은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외로움이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그런 막연함이 외로움이라 생각한다. 영희는 혼자서 소리친다.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냐고 주변인들에게 묻는다. 근데 이게 꿈이다. 내가 진짜 나쁜 년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 마저도 혼자만의 착각으로 끝났다. 그뿐일까? 영희의 애인인 감독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본인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다. 결과적으로 비행기 타고 13시간이나 걸리는 베를린에서 남자를 생각했던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버렸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그리움은 꿈으로 매몰됐다. 남는 게 없는 셈이다. 이게 홍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감정이다. 외로움이다. 우리는 초입 10분 만에 이 영화가 이러다가 끝날 거란 걸 알고 있다. 감독이 홍상수니까. 근데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밤 해변을 보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다. 어차피 세상에 나를 공감할 수 없는 건 나밖에 없단 걸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엔 이유가 없다. 그냥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가장 외로워진다. 그리고 그게 내가 만든 이유 때문이란 걸 알면 걷잡을 수 없이 후회가 커진다. 바닷가에 홀로 누워서 잠을 자고 싶다. 그냥 멍하니 시간만 지나면 좋을 테니까. 좌절과 외로움을 겪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 포함한 모든 이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다. 아무것도 없을 땐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마지막 엔딩신 바로 전까지를 보니 아마 홍상수 감독도 그런 것 같다. 외로우니까. 이 모든 게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나 보다.
근데 마지막 엔딩신을 보자. 영희는 일어나서 똑바로 걷는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단 걸, 다 의미가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단 걸 아는데도 앞을 보며 걸어간다. 외롭다는 뜻이다. 근데 1부에서 남자 등에 업혀 가던 모습이 아니었다. 2부는 혼자서 걷는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이 영화의 그녀 모습에게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외롭지 않은가 보다. 아무도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씩씩해졌나 보다. 영희는 후회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후회는 어차피 우리의 곁에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진다.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용서를 해주지 않을 때가 많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영희는 이 모든 게 허상임을 알고도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앞으로만 걷는다. 난 이런 그녀의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후회가 작동한 후의 방식과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나라는 인간이 비호감 덩어리라 멀어질 수밖에 없던 모순적인 순간들. 뭐 그런 순간이 우리의 일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걸 벗어나지 못하면 후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 막상 그걸 세상이 이해해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냥 방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우리는 걸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세상에게 상처를 주고도 앞으로 걷는다는 건 받은 이들의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셈일 테니까. 현실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홍상수는 부인에게 큰 상처를 줬다. 사실 어찌 보면 질이 안 좋은 사람이다. 그는 이런 자기의 모습을 영희에 투영해 우리의 한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 알아.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단 걸. 그리고 내 애인도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누리던 인기 영희의 주변인처럼 다 꿈처럼 사라지겠지. 사랑도 언젠가 실패할 테고. 그럼에도 영희는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걸었다. 외로움과 후회를 보여줘도 사실 자기는 선택지가 없단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홍상수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하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내가 잘못한 일에 내가 외로움을 느끼던 타인이 나에게 가한 이기심이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게 인생사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모순이고 후회 속에 갇혀 나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 셈이다. 나도 외롭고 후회한다고. 이게 내가 느낀 감정들이라는 걸 보여줬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는 바도 없이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을 완벽하게 비유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루틴의 반복 속에 산다. 반복되는 일상 속 비호감 덩어리인 나.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때의 나만 있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게 꿈같아서 즐거웠던 시간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그러면 어때. 이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내가 보이는 것들이 타인은 눈치 못 채는 순간의 연속이다. 타인과 교감하는 순간까지 심지어 꿈같이 사라질 때가 부지기수다. 이건 결국 후회나 외로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영희처럼 앞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다. 회의감이 가득한 게 우리의 삶이라고 한들 홍상수는 이 감정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감독이다. 홍상수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지만 나도 그에게 설득당해버렸다. 처음엔 양홍원의 <오보에>를 리뷰하려고 시작했던 글이 점점 길어졌다. 굉장히 중요한 기획서를 써서 모 교수님에게 내야 하는데 한 3시간 동안 이 글만 썼다. 이제는 해변에서 혼자 배회하지 않아야 할 텐데. 공부도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7월 말의 밤이 조용히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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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이후 7년 만의 만남! 신세계 2편 아닙니다!!
이정재 그리고 황정민
추가로 박정민'추격자' '황해' '내가 살인범이다'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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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성 미술감독#다만악에서구하소서 #다만악에서 #다만악에서구하소서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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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리뷰 (스포일러 O) - 정답보다 중요한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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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야”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며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
그는 자신의 신분과 사연을 숨긴 채
상위 1%의 영재들이 모인 자사고의 경비원으로 살아간다.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학생들의 기피 대상 1호인 `이학성`은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수학을 가르쳐 달라 조르는
수학을 포기한 고등학생 `한지우`(김동휘)를 만난다.
정답만을 찾는 세상에서 방황하던 `한지우`에게
올바른 풀이 과정을 찾아나가는 법을 가르치며
`이학성` 역시 뜻하지 않은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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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폭풍이 휘몰아치던 크리스마스 날 밤 이후
양 목장에서 태어난 신비한 아이를 선물 받은 '마리아' 부부에게 닥친 예측할 수 없는 A24 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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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공식 티저 예고편
한여름 찾아온 수상한 손님으로 인해,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걷잡을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8월 23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