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2-19 10:52:49
2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웡카> 3주 연속 1위
<웡카> 3주째 1위, <건국전쟁> 70만 돌파, 예매율 1위 <파묘>!
2월 3주차 박스오피스 분석 시작합니다.
<건국전쟁>이 누적관객 수 70만 명을 돌파하며, 국내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습니다. 한편 <웡카>가 3주 연속 주말 1위에 올랐으며 현재 추세라면 250만 관객을 넘어 300만 명도 가시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는 22일 예매율 11만 명을 넘어선 <파묘>가 개봉하면서 4주 차 박스오피스에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입니다.
밥말리 일대기를 다룬 영화 <밥 말리: 원 러브>가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혁명적인 음악으로 사랑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한 시대의 아이콘 ‘밥 말리’의 전설적인 무대와 나아가 세상을 바꾼 그의 뜨거웠던 삶을 그린 감동 음악 영화며 국내는 3월 13일 개봉예정입니다. 한편 마블 코믹스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마담 웹>이 2위를, <아가일>이 3위를 차지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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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영화의 매력
영화 <패싱>은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흑인들의 삶과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주인공 아이린이 아들이 갖고 싶은 책을 사고자 뉴욕으로 가는 것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마침 어렸을 적 친구였던 클레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클레어의 모습에 아이린은 단번에 눈치를 못 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러 클레어의 방으로 들어가 여태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를 나눈다. 얼마 안 있고서 클레어의 남편이 들어오는데 얘기를 하는 도중에 그는 흑인을 혐오하는 인종차별주의자임을 알게 되어 아이린은 걱정하며 불안해 한다. 하지만 클레어는 별 생각이 없는 듯이 이런 자기의 남편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하지만 내심 어렸을 적, 그 시절들을 그리워한다. 이후 클레어는 흑인복지연맹 위원회로 일하고 있는 아이린을 따라 무도회, 모임 등에 참석하며 사람들과 어울어진다. 하지만 클레어의 남편이 아이린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아내 또한 여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클레어를 찾아가지만, 클레어는 자살하며 영화는 마무리가 된다.
영화 제목인 '패싱'은 우리가 흔히 아는 '지나가다'라는 뜻은 아니다. 혼혈의 비율이 점점 늘면서 겉으로 봤을 때는 전혀 흑인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피하거나 고등교육을 받는 등 백인 행세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실 <패싱>은 흑백영화이기 흑인과 백인, 자세히 어떤 점에서 패싱인지는 파악하기가 조금 어려운 것 같다. 단순히 명도와 채도로만 구분이 가능하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클레어의 머리색이 금발이라고 하지만 '어 피부톤이 좀 밝네? 엇 이 사람은 조금 어둡네?'로 밖에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 수 밖에 없다.
사실 나는 흑백영화를 볼 때 답답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영상미와 연출이 둔탁한 느낌이 들고,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도 뚜렷하지 않은 것 같아 갑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동주>란 영화를 봤을 때는 흑백 영화인 줄 모르고 봤는데 첫 장면부터 숨 막혔었던 것 같다. 하지만 <패싱>은 이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선 흑백으로 함으로써 인종차별을 조금 완화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흑백영화에서는 백인 또한 자신의 원 피부톤보다는 어둡게 나오니. 오직 밝고 짙은 무채색으로만 구별이 가능하고 빛의 유무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니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영화에 더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1.33:1의 비율로 인해 사람의 표정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패드로 감상을 했는데 화면이 꽉 채웠다는 느낌에 몰입할 수 있었고 다른 영화, 드라마와 같이 가로로 늘려있는 화면이 아닌 타이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인물 한 명 한 명에 집중할 수 있고 배경에 감탄하거나 다른 부차적인 요소들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아닌 인물들의 표정과 말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인종차별을 다루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내심 흑백이라는 베일에 가려진 듯한 방식으로 연출하여 밝고 어두움, 이분법적으로 영화를 보게 되어 신선했다. 오히려 1.33:1 비율과 흑백, 이 둘로 인해 답답하거나 막혀있는 느낌이 아닌 인물의 마음과 표정에 더 초점을 맞춘 상태로 볼 수 있어서 긴장감과 초조함을 계속 유지한 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이린과 클레어 간의 감정구도도 흥미로웠던 것 같다. 반감과 걱정의 감정들이 오고가며 누구에게는 끈끈한 관계 누군가에게는 끊고 싶은 관계. 자기 모순적이면서 위선적인 두 여성 인물들에 의해 계속 긴장감을 유지한 채 영화에 더 몰입할 수 있었고 특히 테사 톰슨 배우의 진지하고 차분한 연기, 엘레강스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인종차별은 다양한 형식으로, 방식으로 과거에도 지금 현재에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조심스럽게 아마 미래에도 계속 끊임없이 언급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똑같은 사람으로서 겉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개개인 속의 내면에, 사람의 진심과 마음에 더 귀기울이면 어떨까 한다.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과 배경, 그리고 놓여있는 그 상황에 따른 개개인별의 문제해결 방법에 그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서로 간의 신뢰, 믿음과 배려를 바탕으로 지금보다 더 따뜻한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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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을 한 신부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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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을 한 신부님>
<기생충>과 함께 '2020 아카데미 시상식' 당시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폴란드의 영화로, 원제는 'Corpus Christi'다. 번역이 '문신을 한 신부님'이라고 의역되었는데, 종교에 문외한 사람들의 입장까지 고려하면 번역된 제목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종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작품처럼 느껴지지만, 일반적인 기독교 영화와는 제법 거리가 있다. 폴란드인들이 유럽에서 알아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배경지식 정도만 알고 보면, 이해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훔친 사제복으로 하루아침에 신부가 되다
소년원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다니엘(바르토시 비엘레니아)'은 존경하는 신부 '토마시'의 도움을 받아 목공소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출소하고 목공소가 아닌 성당으로 먼저 향한 그는 훔친 사제복으로 신부인 척 행세를 시작하는데, 사제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는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주임신부로 인해 그는 곧 그 자리를 대행하게 되고, 보통의 신부들과는 다른 화법과 기도 방식으로 신도들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다니엘이 과거 마을을 휘감았던 비극적인 사건의 민낯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독실한 신앙심을 보이던 마을 사람들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파격적 설정, 신선한 스토리
소년원을 출소한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이 사제복을 훔쳐 신부 행세를 한다는 설정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파격적인 설정이다. 주인공 '다니엘'은 소년원에서 신부의 일을 도왔기에 신앙심이 강하고, 성직자의 역할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하루아침에 주임 신부가 된 그의 모습은 당연히 어설프다. 하지만, 위기나 당혹스러운 상황들을 매사 뻔뻔함과 재치로 넘어가며 제법 무거운 작품 분위기 속에서 소소한 유머를 일으킨다.
주인공을 맡은 '바르토시 비엘레니아' 배우의 연기 또한 상당히 강렬한데, 거친 범죄자의 삶을 살아온 비행소년의 서슬퍼런 눈빛을 지님과 동시에 신부로서의 따뜻하고 온화한 표정까지 동시에 보여준다. 기독교의 이중적인 면모를 비판하는 작품에서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 캐릭터를 소화하는 그의 연기는 작품의 의미와 더불어 굉장히 강한 인상을 준다.
예수에 빗대어 표현한 가짜 신부
가짜지만 누구보다 진짜 같은 신부의 모습을 보여준 '다니엘'의 행적에서는 마치 성경 속 예수의 행보와 유사한 흐름들이 느껴진다. 목공소에서 출발한 그의 여정은 성당으로 이어졌고, 기존의 성직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를 설파하며 사람들에게 신선한 반응을 일으킨다. 꽉 막혀 있지 않고, 형식에서 탈피하여 유연한 신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그는 위로가 필요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준다. 하지만, 마을을 덮쳤던 사고를 파헤치는 그의 행보는 마을 사람들이 감추고 있었던 오만과 모순을 드러내게 하는 시험으로 작용한다. 신부로서 양심을 따르고, 절대선을 추구하는 모습은 결과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겐 불편함을 유발한다. 결국 이 둘의 갈등은 다니엘이 직접 장례를 주관함으로써 그가 희생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악함은 끝내 반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첨예한 대립각은 두터운 신앙심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믿고자 하는 기독교 복음에 대한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왜 다니엘은 사고를 파헤치려 했을까
다니엘이 찾아간 마을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7명의 사람이 숨졌다는 비극이 불어닥친 곳이다. 총 사망자는 7명이지만, 6명의 청년들이 탔던 차와 충돌한 1명의 남성 운전자를 살인자 취급하며 그를 성지에 묻지도 못하게 하고, 그 남성의 아내는 집안에 틀어박힌 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니엘이 유족 중 한 명인 '엘리자'와 함께 사고의 진상을 알아보니 마을 사람들이 추모하는 6명은 술과 마약에 찌든 상태였고, 살인자 취급을 받는 남성 은 음주운전조차 하지 않았다. 시장도 이 사실을 아는 것 같지만, 어째 모두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는 느낌이다. 외부권력의 압박과 마을 사람들의 분노에도 다니엘은 계속해서 그 억울한 남성의 장례를 치러주고자 돕는다. 왜 이토록 이 사고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살인자 취급을 받은 남성 운전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일종의 낙인을 찍인 채 죽어서도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치 범죄자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혀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음에도 신부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다니엘'의 상황과도 같다. 다니엘은 낙인으로 인해 절대 악의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그 남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자신은 비록 신분을 숨기지 않고서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사람만큼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상황에서의 억 울함을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의 무고함을 밝히고, 장례까치 책임지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관계가 아예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그토록 신경을 썼던 것이다.
종교의 양면성, 사람들의 이중성
<문신을 한 신부님>은 종교가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공감을 살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매주 성당에 출석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하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표출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끄러운 면들이 밝혀질 상황이 되면 믿음은 이미 저 뒷편으로 사라져 있다. 겉으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모습으로 위선을 떨면서도, 뒤로는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고 악함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종교인들의 양면성과 더 나아가 인간의 이중성 자체를 신랄하게 저격한다. 믿 고 싶을 때만 믿고, 따르고 싶을 때만 따르면서 자신의 이익과 안정을 건드리는 순간 비인간적인 행태부터 일삼는 사람들의 신앙심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의문이 든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모습은 비단 종교에 관해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니고, 여러 집단과 사회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 자체를 고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편인데, 가짜 신부 '다니엘'에게 열광하는 신도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믿고자 하는 존재가 사실 무의미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사제복만 입었다는 이유로 기계적인 믿음을 표출하는데, 정작 그 사람은 방금 소년원에서 출소한 사람일 뿐이니 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행태인가. 가짜 보다 더 진짜 같은 신부를 등장시킨 것은 이렇듯 종교의 허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의 기능을 추가적으로 수행한다. 마을에서 선함과 긍정적인 메시지를 설파하는 것은 좋은 신학교를 멀쩡히 나오고, 출신 교구부터 따지고 묻는 베테랑 주임신부가 아닌 가짜 신부 다니엘이다. 이는 곧, 어디서 왔는지보다 어디로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극의 대사를 반영한 양상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들이 원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어디서 왔는지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진정으로 가려고 하는 앞으로의 방향이 더 중요할 뿐.
* 본 콘텐츠는 네이버 블로거 겔겔겔스타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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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록 시즌 2가 기다려지는 드라마
인류학자 캐롤 코니한은 자신의 저서 《음식과 몸의 인류학》(갈무리, 2005)에서 힘·권력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군림하고 강압하는 힘이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절대적 자원을 독점하여 타인을 통제하는 힘을 말한다. 두 번째는 영향력이다. 남들에게 베풂으로써 생겨나는 책임감과 유대감이 두 번째 힘의 핵심이다.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기, 국가가 탄생하기 전 부족 연맹의 시기를 바탕으로 하는 판타지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는 이 두 가지 힘 중 무엇이 더 센지를 묻는다. 타곤(장동건 배우)은 첫 번째 힘의 화신이고, 은섬(송중기 배우)은 두 번째 힘의 가능성을 체화한 자다. 연맹장 타곤은 공포로 군림하는 왕을 꿈꾸고 은섬은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선의의 공동체를 꿈꾼다.
〈아스달 연대기〉 스틸컷 ⓒtvN두 주인공이 힘을 정의하는 방식의 차이는 각자의 서사가 펼쳐지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타곤의 주 무대는 여러 부족장과 대제사장이 모여 있는 아스 땅 한복판이다. 타곤과 그의 연인·동지인 태알하(김옥빈 배우)는 교묘한 술수와 탁월한 계략으로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이들이 펼치는 고도의 두뇌 싸움과 심리전만으로도 완성도 높은 정치 드라마가 될 수 있을 정도이다.
반면 타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와한족의 은섬은 타곤으로부터 부족민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나 결국 노예로 팔려간다. 은섬은 서로를 외면하고 핍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노예 세계에서도 와한족의 가르침인 베풂과 믿음, 연대의 가치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운명의 시험을 통과하여 아스달이 아직 점령하지 못한 아고족의 우두머리로 거듭난다.
〈아스달 연대기〉 시즌 1은 타곤과 은섬이 각자의 세력을 결집해 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타곤과 은섬의 대결이 자아내는 긴장감은 힘과 권력을 자신의 방식으로 정의하기 위한 둘의 싸움이 21세기에도 끝나지 않았다는 데서 나온다. 타곤과 은섬의 시절이 그러했듯,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타곤의 계승자들이지만 은섬의 뜻을 잇는 자들도 치열한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다른 사상과 권력 체계를 무기 삼아 벌여온 타곤과 은섬의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스달 연대기〉 스틸컷 ⓒtvN
한편, 〈아스달 연대기〉에는 힘과 권력을 정의하는 관점 말고도 정치적 의미를 해석할 만한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정치적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 사이의 괴리였다. 타곤과 은섬은 서로 다투지만, 이 둘은 모두 ‘지도자’다. 아스달의 연맹인과 아고족은 거의 언제나 타곤과 은섬이 벌이는 정치적 이벤트의 철저한 수용자로만 재현된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없다. 어떤 소문이 돌면 우르르 몰려갔다가, 다른 사건이 발생하면 또다시 법석을 떨며 되돌아오는 식이다.결국 타곤과 은섬의 대결은 피지배층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타곤과 은섬은 피지배층의 마음이 주인 되는 정치를 상상하지 못한다. 이들은 정치가 합리적 이성의 결과물이라는 허상을 보기 좋게 깨버리고 마음과 감정이야 말로 정치가 작동하는 근본 원리임을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마음과 감정을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만 봤다는 점에서 둘은 똑같다. 다만 다스림의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를 ‘현실적 재현’으로 볼 수도 있고, ‘상상력 부재’로 볼 수도 있다. 내겐 후자가 더 그럴듯했다. 다만 〈아스달 연대기〉의 정치적 상상력 부재는 제작진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우리 시대 정치적 상상력의 한계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모략을 일삼는 정치인, 약자를 보듬고 챙기는 정치인은 참고할 대상이 많다. 하지만 피지배층을 정치의 주인으로 만드는 정치/인은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아스달 연대기〉가 탁월한 상상력을 서사, 세계관, 비주얼뿐만 아니라 정치적 가능성에도 발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어찌 됐든, 〈아스달 연대기〉는 매우 빼어난 드라마다. 정치적 메시지의 한계가 있지만 이 조차도 또 다른 가능성을 사유하는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완전히 새로운 판타지 세계를 놀라운 비주얼을 입혀 설득력 있게 구축한 시도도 박수받아 마땅하다. 극 초반의 지루한 전개와 떨어지는 대사 전달력은 흠이지만, 이 고비(?)를 넘으면 웅장한 서사시가 펼쳐진다. 코로나 19로 후속 시즌 제작이 중단된 〈아스달 연대기〉의 속편이 하루빨리 제작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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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종류의 눈물
네 가지 종류의 눈물
<위대한 개츠비>, <토니 타키타니>, 그리고 <여수의 사랑>, <성경>
어떤 눈물은 느닷없이 흐른다. 다 잠근 줄 알았던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처럼,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속을 이미 적셔놓고 밖으로 흐르는 눈물이 우리 삶에는 있다. 그런 눈물을 삶의 누수라고 하면 좋을까. 그런 눈물은 그야말로 새어 나오는 것이어서, 눈물이 흐른 흔적만큼 우리 삶에 빈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리둥절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린다. 내 삶이 이만큼 비어있던 것이구나. 이 공간만큼 내가 결여를 느꼈던 것이구나. 흘려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내 삶의 여백을, 눈물은 증거한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그는 앎(knowledge, 지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건 ‘스스로를 알고 있는 앎’과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앎’이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알고 있는’ 앎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앎이 있다. 삶의 누수 같은 눈물을 라캉 식의 구분법으로 해석해보자면, 그건 단연 후자다. 나는 내가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다. 그 순간만큼 나는 그동안 (알면서도) 몰랐던 삶의 진실을 마주했고, 그랬기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삶에서 그런 순간은 느닷없이 찾아오므로, 나는 대신 영화와 책에서 그런 사례를 추려봤다. 네 종류의 눈물이 있다. 네 가지 눈물이 흐르게 된 상황적인 요인, 맥락은 제각기 다르지만, 근원은 같다. 그들은 그 순간 자신의 삶에 진실했고 또 그래서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그런 눈물은 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영화에서 두 편, 문학에서 두 편이다. 영화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2013)와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 Tonu Takitani, 2004>가 있고, 문학에서는 한강의 <여수의 사랑, 2012>과 오래된 책인 <성경>의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위대한 개츠비>
먼저 <위대한 개츠비>. 첫사랑인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부자가 되어 나타나 다시 사랑을 고백하지만 개츠비의 사랑도, 자신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데이지와 재회한 개츠비는 자신의 집에 그녀를 데려와 구경하게 한다. 데이지의 감탄이 터질 때마다 그는 속으로 자신 스스로가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개츠비는 복층 위로 올라가 자신의 영국제 셔츠 수십 벌을 꺼내 장난스럽게 데이지에게 건네는데, 그녀는 셔츠들을 보면서 돌연 울음을 터뜨린 것. 데이지는 왜 울었을까.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번역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요컨대 데이지는 인간 개츠비가 아니라 영국제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다. 개츠비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김영하,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241쪽) 그러니까 데이지의 눈물은 그야말로 허영에 가까운 눈물이었다는 것. 마치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의 무구한 반응처럼 데이지의 눈물은 그런 반응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허영으로 자신 삶의 허망을 견디고 있으니까.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끔찍한 고독에서 건져내 준 아내를, 사고로 잃은 토니는 아내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대신 입어줄 사람을 구한다. 간신히 찾은 여자(히사코)에게 아내의 드레스룸을 보여주는데, 그녀는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소리를 들은 토니가 방으로 들어가 왜 우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많은 옷을 처음 입어봐서 그런가 봐요.” 이 눈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데이지의 경우에서처럼, 허영이 깃든 무구한 반응의 극치인 걸까. 무수한 오해로부터 그녀를 구할 길은 먼저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토니가 찾은 여자는 실직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곤란에 처해있었다. 하루 먹고사는 고민으로 하루를 버티던 그녀가, 한순간 거대한 아름다움과 대면했던 것이다. 자기 삶의 남루함과 세상의 거대한 아름다움 사이의 차이로부터 오는 기묘한 정서,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많은데 내 삶은 이토록 남루하구나 라는 쓸쓸한 자기 인식. 그러니까 속에서 얼음처럼 차갑던 감정들이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고는 이윽고 응결되어 새어 나온 것은 아닐까.
<토니 타키타니>
굳이 새삼스럽게 적지 않아도, <위대한 개츠비>와 <토니 타키타니>의 유사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한강의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을.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또 고향이 어딘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여러 도시들을 떠돌던 자흔은, 다만 명료한 증거 하나만을 토대해 유추할 뿐이다. 자신이 2살 때,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때부터 보호기관에서 자랐다는 것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고향은 여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그녀는 하는 중이다. 그녀는 ‘나’에게 언젠가 자신의 고향(이라 추측되는) 근처를 갔을 때의 일을 말한다.
“여수 앞바다의 해안을 따라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소제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이 있어요. (중략)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완만한 뒷산 등선에는 해가 지고 있었고 그 주위로 새 깃털 같은 구름이 노다지처럼 노랗게 번쩍이고 있었어요. 그 풍경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 봤지요. (중략) 마을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둥그런 만과 다도해 섬들이 파란 바다를 둘러싼 모양이 꼭 가느다란 푸른 실 하나하나를 촘촘히 엮어놓은 것 같이 잔잔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자흔은 왜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걸까. 자흔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흔의 눈물은 자신의 고향에 왔다는 아늑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그 아늑함의 이면에는 단순히 고향에 왔다라는 차원을 초월해, 불분명했던 ‘자기 정체성’이 그제서야 비로소 명료하게 인식되는, 자기 존재의 의미마저 거기 배어 있었을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
세 가지 목록에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성경>의 ‘이사야서’다. 세 종류의 경우처럼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지만 정서상의 감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사야서 6장에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이사야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과 앉으신 보좌, 그리고 둘러싼 천사들의 모습이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표준새번역 <성경>, ‘이사야서 6장 5절) 이사야는 눈물 흘리지는 않았지만 세 종류의 눈물만큼이나 선뜻 헤아리기 어려운 종류의 반응을 한다. 어째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과 신성에 감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탄식한 걸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그는 경이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주한 것이라고. 그래서 난감한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이렇게나 누추하고 얼룩처럼 죄가 묻어있는데,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이가 내게 찾아오다니. 두 번째의 눈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반응이다.
나는 네 종류의 반응이, 우리가 예술을 대할 때 대체로 보이던 반응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예술을 허영으로 여기기도 하고(데이지),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이 각인시켜주는 자신의 남루한 처지를 쓸쓸해하면서(히사코), 누군가는 예술이 나 자신의 존재의 결핍을 깊이 헤아려준다는 느낌에 위로와 안도감을 감각하기도 하면서(자흔), 눈부신 경이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절망하기도 하던(이사야), 저마다 흐른 삶의 누수들. 우리는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몰랐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대체로 알고 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라캉의 말이 옳다.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겨우 알아간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이정식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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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여서 고마웠어
*이 글에는 결말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로봇 드림> 줄거리
외로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은 평생을 가지고 살아갈 감정이다. 사람이 넘쳐흐르는 도시에 살지만 '나'는 혼자이기에 어느 순간에는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도그 역시 사람들 가득한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은 마음 보여줄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살아가고 있다. 그의 표정은 무엇을 하던 무상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료하게 티비를 보며 밥을 먹던 도그는 친구가 되어줄 로봇 광고를 보게 된다. 로봇을 기다리고 그를 받아다 조립하는 내내 도그는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다.
무덤에서 부활하는 좀비같이 일어난 로봇은 이내 도그를 바라보며 방긋 웃는다. 이들의 미래는 환한 로봇의 표정처럼 밝을 것만 같다. 그리고 실제로 도그는 그간 혼자 해오던 것들을 로봇과 나누며 다른 이와 함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충만함을 느낀다. 로봇의 해맑은 미소와 도그의 살랑이는 꼬리를 보고 있으면 나도 그들과 함께 즐기는 것처럼 행복해진다. 늘 로봇과 함께이기에 이제 도그에게 외로움이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별은 갑자기 닥쳐오고 로봇과 도그는 강제로 헤어짐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 순간부터 마냥 귀엽기만 했던 영화는 무섭도록 쓸쓸해지고 로봇과 함께이기에 다정했던 세상은 다시 차가워진다. 로봇과 도그는 각자의 방식으로 잠깐의 이별을 견디기 시작한다.
로봇은 해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계속해서 꿈을 꾼다. 꿈속에서 로봇은 여전히 행복하며 언제나 도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의 꿈은 언제나 차디찬 현실로 끝이 난다. 단순히 도그를 보지 못하던 꿈은 점점 도그가 자신을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투영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로봇은 항상 희망을 갖는다. 끝이 절망적이라도 다시 꾼 그의 꿈은 언제나 희망적이다. 도그와 함께 봤던 영화 <오즈의 마법사> 속 세상에 들어가기도 하고 도그와 함께 춤을 췄던 곡인 'September'는 항상 로봇의 콧노래로 나온다. 이렇게 로봇의 세상은 도그로 가득하고 그렇기에 제발 그들의 재회가 빠르게 이루어지기만을 두 손 모아 바라게 된다.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 도그는 로봇을 만나러 갈 6월 전까지 나름대로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사실 정말 로봇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나에게 맞추며 놀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다. 다들 각자의 삶이 있기에 도그의 새로운 인연은 늘 이별도 공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도그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던 자신의 동반자 로봇을 계속해서 그리워한다. 그는 개장날이 되자 곧바로 해변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로봇은 없다. 끝까지 함께 일 줄 알았던 로봇과도 영영 이별인 것이다.
세상에는 정해진 이별 공식이 존재한다. 이별은 슬픈 것이고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재회의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물론 헤어짐은 눈물을 동반하고 미련은 늘 우리를 과거에 붙든다. 그렇지만 이별은 끝이 아니기에 우리는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도그는 새로운 동반자 로봇을 찾는다. 그는 다시금 자신의 모든 것을 새로운 로봇과 나누며 외로움을 지우고 행복을 느낀다. 로봇 역시 새로운 이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 로봇은 또다른 곳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세상을 새롭게 넓혀나간다.
무 자르듯 이전과 이후가 딱 나눠진 이별은 없다. 도그와 로봇은 해변에서 바다에 들어가려는 자신의 새로운 동반자를 다급하게 막고, 기억을 잃었지만 자신의 애창곡에 'September'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서로의 흔적을 가진 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가끔 재회를 꿈꾸거나 서로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서로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돌아보며 새로운 동반자와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함께 췄던 춤을 추는 로봇과 도그의 모습이 그들의 미래를 즐겁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로봇 드림>에는 대사 한 줄 없지만 우리가 그들이 느낀 외로움, 설렘, 행복 등을 느꼈듯이 로봇과 도그도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그런 이별 후에도 서로가 행복하리라는 생각을 가지며 살아갈 것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로봇 드림>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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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지지대가 되어 주는 친구
- 절친한 친구는 어떤 존재일까?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가족보다 친구가 건강과 행복에 더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힘이 되는 친구가 있다면 즐겁게 장수할 확률이 커지는 셈이다. 기쁜 순간을 공유하고, 가족에게도 보여 주기 어려운 속내를 터놓을 수 있고,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친구가 있다면 매일 아침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조금은 더 가벼울 것이다.영화 <아워 프렌드>는 제목처럼 소중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의 유명 잡지 '에스콰이어'에 실려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사랑스러운 두 딸과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니콜(다코타 존슨)과 맷(케이시 애플렉) 부부. 어느 날, 니콜이 말기암 선고를 받고 난 후 니콜과 맷의 심신은 점점 붕괴된다. 니콜과 맷의 오랜 친구인 데인(제이슨 세걸)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두 사람을 돕는다. 데인은 아예 니콜과 맷의 집 안에 있는 구석진 작은 방에서 장기간 기거하면서 니콜, 맷, 두 딸을 살뜰히 챙긴다. 그러다 보니 데인의 여자친구는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데인을 떠난다.데인은 왜 이렇게 자신의 삶을 저버리면서까지 친구의 삶을 위해 희생할까? 폭풍이 몰아치는 벼랑 끝에 서서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데인이 생각했던 순간에 니콜과 맷이 데인의 손을 꼭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데인은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꺼내 준 니콜과 맷이 힘겨울 때 곁을 지켜줌으로써 진정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었을 것이다. 동시에 스스로 삶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휘청일지라도 쓰러지지는 않도록 서로 삶의 지지대가 되어 주는 친구들의 모습은 서서히 보는 이의 마음을 데운다.세 주연 배우들은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케이시 애플렉과 제이슨 세걸은 실화의 실제 인물들이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생기 넘치는 뮤지컬 배우였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마음까지 위태로워지는 말기암 환자의 내면과 외면을 생생하게 표현한 다코타 존슨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끝)* 11월 16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아워 프렌드> 시사회에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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