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5-04-04 09:02:07
영화 <귀신들> 리뷰: 인간과 AI의 불안한 동거
<귀신들>
씨네랩의 초대로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귀신들>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황승재 감독과 배우 이요원, 강찬희, 정경호, 오희준이 무대 인사를 했다. 영화 <귀신들>은 가까운 미래, 인간을 형상화한 인공지능(AI)들이 인간과 공존하는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 작품이다.
황승재 감독의 <귀신들>은 다섯 개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를 통해 인간과 AI의 경계를 흐리는 미래 사회의 불안을 그려낸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AI가 인간에게 가져올 충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기술이 가져올 불안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영화는 AI가 인간의 외형뿐만 아니라 감정과 기억까지 모방하는 세상을 그리며, 과연 AI 시대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다섯 개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구조 덕분에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영화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전통적인 공포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AI와 공존하는 미래가 마치 귀신과 함께 하는 것처럼 섬뜩하게 느껴진다. AI가 허상이라는 의미에서 귀신과 유사성을 가지니 영화의 제목이 왜 <귀신들>인지 추측하게 한다.
우리가 마주할 미래 사회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력과 심리적 긴장감이 돋보이는 <귀신들>은 공포영화를 넘어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설정과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을 남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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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년의 기다림> "이야기, 그 사람의 기나긴 우주의 일부를 함께 한다는 것."
*해당 게시물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참석해 작성했습니다.
지난 12월 27일, 조지 밀러 감독이 7년 만에 낸 신작 <3000년의 기다림>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했다. 개인적으로 유사한 장르의 영화들이 지니고 있었던 틀을 깨어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을 했다. 스포일러 없는 후기, 함께 자세히 알아보자!
<3000년의 기다림>은 틸다 스윈튼, 이드리스 엘바 등의 배우들이 출연하며 관객들의 기대를 샀다. 총 러닝타임은 108분이며 국내 정식 개봉은 1월 4일이다. 제 75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되며 해외 유력 매체의 언론과 세계 평단의 찬사가 쏟아진 작품이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 통다한 서사학자 알리테아(배우 틸다 스윈튼)가 골동품 가게에서 산 공병으로부터 우연히 소원을 이뤄주는 정령 지니(이드리스 엘바)를 깨워낸다.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3번, 마음 속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랫동안 바라온 소원을 말하면서 알리테아와 지니의 사이는 깊어진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어떤 장르인가 생각해봤다. 역사물도 아니고, 철학물도 아니고, 판타지도 아닌 그 셋을 아우르는 영화다. <3000년의 기다림> 역시 그러길 바란다.” - 조지 밀러 감독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영화의 폭주하는 쾌감과 스릴로 러닝타임을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제2의 매드맥스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사뭇 느낌이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3000년의 기다림>에서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걸쳐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긴, 30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어났던 환상적인 이야기를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넘나들며 구현해내고 있다. 시각적으로 강렬하지만 부드러웠으며 청각적으로 웅장한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최고의 오감만족을 선사해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은 “스크린이 선사하는 경험에 자신을 맡기면 영화로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러므로 <3000년의 기다림>은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라고 전했다.
1.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과 소원을 비는 사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며 묘하게 <미녀와 야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알라딘>, <팬텀스레드> 영화가 생각났다.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소위 말해, ‘지니’겠다)과 소원을 비는 사람 간의 아련하고도 슬픈 관계는 사실 어느 영화에서나 성립했다. 그러나 <3000년의 기다림>은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도 강렬한 서사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호평을 하고 싶다. 지니가 왜 그 병에 3천 년 동안 갇혀 있었는지, 왜 알리테아가 그에게 평생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인물인지 풍부한 서사로 관객들을 설득시켰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니의 3천 년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과정은 말로 설명하기 부족할 정도로 화려했다. 그 화려함 안에는 정령의 아픔, 사랑 그리고 고통이 모두 섞여 있었다.
한편, 알리테아는 이성적인 캐릭터로 본인 인생에 충분히 만족하며 사는 인물로 나온다. 그러므로 처음 지니를 마주하며 소원을 빌어야 할 때, 그 절실함을 느끼지 못 한다. 하지만 지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층 그의 삶에 더욱 가까워질수록 정확히 형언하지 못할 사랑을 느끼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소원을 빌게 된다. 그렇다, 이 과정에서 기존 영화에서 비쳐졌던 소원을 비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의 관계가 타도된 것이다, 그것도 매우 아름답고 서글프게.
2. “우린 고독을 함께 해요”
알리테아가 지니에게 던진 한 마디, 어쩌면 그들의 3000년의 기다림을 요약해주는 한 마디였다. 이 영화를 보면, 단순히 판타지‧멜로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로맨스가 아니라 외로운 두 인물이 함께, 새로운 고독함을 맞닥트린 영화라고 생각했다. 알리테아에게 닿기 위해 지니가 버텼던 3천 년은 분명 행복한 꿈이었을 것이다. 한편, 지니에겐 3천 년의 기다림이었겠지만 알리테아 또한 얼마나 그 무던한 시간을 홀로 버텨왔을까? 평소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그런 그녀에게 감정의 요동을 선물해준 지니였다. ‘내가 미친 건가? 무엇이 진짜일까?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라며 끝없는 고뇌 안에 갇혀있었던 알리테아. 정령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존재의 이유를 선물해줬다고 느꼈다.
지니가 살아온 삼천 년도 도착지 없는 여행이었겠지만, 알리테아가 겪은 무수한 고독함 또한 그랬을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함 2명이 만나면 묘한 사랑으로 번져지는, 정말 물감이 묻은 하나의 붓이 천천히 물병 안에서 퍼졌던 영화였다.
지니, 알리테아; 각 캐릭터가 지닌 공허함을 잘 표현한 배우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다. 특히나 오랜만에 틸다 스윈튼을 큰 스크린으로 보니, 어딘가 모르게 갈 곳 잃어버린 그녀의 눈동자는 더더욱 아름다웠다.
3. 이야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갈망
가수 아이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잘 잤으면 하는 건 사랑이라고. 이 말을 본 영화에 비유해보자면,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사랑해’라는 피상적인 말이 없어도, 그 사람이 건너온 무수한 우주를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본인 내면 속, 무의식 안에서 피어올랐던 진정한 ‘갈망’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을 첨예하고도 부드럽게 그려낸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이다.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연출이 관객에게 선물해주는 ‘타임캡슐’. 실제 지니 역을 맡은 배우 이드리스 엘바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타임캡슐에 담긴 영화같다. 배우와 감독이 함께 이야기를 꺼내서 들려준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뭘 얻을 수 있을까? 갈망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라고 말한 바 있다. 관객은 지니의 3천년의 기다림, 그리고 알리테아와 지니가 앞으로 함께 걸어나갈 무수한 시간의 외로움이 담긴 타임캡슐을 고스란히 극장에서 열어볼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이야기 속에서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피어오르는 3천년의 기다림과 그들의 미래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그 사람의 기나긴 우주의 일부를 함께 한다는 것."라고 나의 한 줄을 정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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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규정될 때
‘나’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규정될 때
<톰보이>에는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들어진 지점들이 존재한다. 첫 장면부터가 그렇다. 영화는 '로레'의 뒷모습으로 시작된다. 로레는 차 위로 상반신을 내밀고 팔을 뻗어 바람을 느낀다. 영화의 초반부까지 영화가 로레의 성별에 대해서 관객에게 알려주는 단서는 없다. 관객은 그저 파란색 벽지를 좋아하고, 런닝티와 반바지를 좋아하는 짧은 머리의 아이와 마주할 뿐이다. 로레는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한다. 친구들은 그의 성별을 묻지 않을뿐더러 그의 외형과 이름을 통해 그가 남자라 생각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로레가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했지만, 자기 자신이 남자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로레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백히 말하자면 로레는 그들을 의도적으로 속인 것이 아니다. 로레는 단지 남자아이처럼 하고 다녔으며,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했을 뿐이다.
로레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어쩌면 로레는 단순히 남자아이들과 놀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리사의 말처럼 남자아이들은 여자라고 껴주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과 놀길 바라는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남자 이름을 말한 것일 뿐인데 일이 예상과 다르게 커졌는지도 모른다. 혹은 로레는 정말 남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동생 '잔'과 목욕한 후, 로레는 그만 씻고 나오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도 욕조에 앉아 잠시 동안 나가기를 주저한다. 욕조에서 일어나서 몸을 타올로 닦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등과 팔의 근육을 살피고 침을 뱉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웃통을 까고 침을 뱉으며 축구를 하는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똑같이 행동하기도 하고, 자신의 수영복을 잘라 남자 팬티 수영복으로 만들어 입기도 한다. 로레가 남자아이처럼 보이도록 행동한 이유는 뭘까. 남자아이들과 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남자가 되고 싶어서였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점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다. 로레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그런 로레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에 더 관심을 보이며 그 본질에 대해 묻는 것처럼 보인다. 로레는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의해 남자아이가 된다. 그가 자신의 성별이 무엇이라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외형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된 것이다. 모두가 당연하게 그를 남성이라 여겼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영화를 카메라의 초점이 두드러지게 찍었다. 카메라가 캐릭터에 초점을 맞출 때 배경은 흐리게 처리되며, 카메라의 초점 이동이 분명하게 드러나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을 명확히 비춘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은 더욱 인물과 인물이 느끼는 감정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감독은 이런 촬영 방식과 더불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모범적으로 만드는 방식을 지양했다. 그래서 주인공 로레를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다소 서툴다. 로레의 엄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는 아마 로레에게 이전보다 덜 신경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아이를 때린 '미카엘'을 찾기 위해 한 아이와 그 엄마가 집으로 찾아온 것으로 모자라,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동네 아이들 모두가 자신의 아이가 남자아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상당한 충격과 당혹감을 안겨줬을 것이다. 엄마는 순간적으로 로레의 뺨을 때리는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로레의 엄마는 로레에게 파란 원피스를 입으라 건네고, 로레가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로레를 억지로 끌고 가던 중에 멈춰 로레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본인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서 로레 엄마의 결정은 그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로레는 로레가 때렸던 아이의 집을 들러 로레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린 후, 곧장 리사의 집으로 향한다. 리사는 모든 사실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로레는 리사의 집에서 뛰쳐나가 숲을 향해 달린다. 숲은 리사와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레는 입고 있던 파란 원피스를 벗어던진다. 로레가 나무 위에 올려둔 파란 원피스가 카메라에 비춰지고, 로레는 그 자리를 떠난다. 로레는 친구들에게로 간다. 자신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겁이 나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으며 접근한다. 친구들은 로레를 발견하고 도망가는 로레를 쫓아가 붙잡는다. 남자아이들은 로레가 여자인지 사실 유무를 확인하려 하고, 리사가 그들을 제지하자 여자인 리사가 직접 그것을 하도록 만든다. 그 과정에서 수치심을 느낀 로레는 그 자리를 뛰쳐나간다. 그리고 리사는 로레를 찾아온다. 창밖을 보고 있는 로레의 눈에 나무 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리사가 보인다. 둘은 다시금 서로를 마주한다. 마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같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자못 다르다. "넌 이름이 뭐야?"라는 리사의 물음에 로레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한다. "로레"라고. 그러고는 살짝 웃는다.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로레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 스스로가 규정한다. 영화는 거기에서 끝나지만 우리는 이들의 관계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비로소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이들이 함께 춤출 때 들렸던 곡 "널 사랑해, 언제나(I Love You Always)"가 들려온다. 로레와 리사는 춤을 춘 후 서로를 꼭 붙잡던 두 손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우정을 계속 키워가지 않을까. 비슷한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로레는 더이상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로레를 사랑해줄 리사와 잔 그리고 엄마, 아빠가 있기에.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영시코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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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 문> |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변방 행성 벨트의 한 농촌에 마더월드의 군대 임페리움을 이끄는 '노블'(에드 스크레인) 제독이 나타난다. 그는 촌장을 때려죽인 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군대를 먹일 식량을 준비하라고 협박한 뒤 떠난다. 농촌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자, 과거 마더월드의 장교였던 자기 신분을 숨긴 채 지내던 '코라'(소피아 부텔라)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다. 어차피 노블 제독이 우리를 모두 죽일 테니, 그전에 그들과 싸울 준비를 하자고.
이에 친구 '군나르'(미힐 하위스만)와 함께 노블 제독에 맞설 전사를 찾아 나선 코라. 그녀는 항구 도시에서 만난 '카이'(찰리 허냄)의 도움을 받아 은하계 각지에 흩어진 숨은 전사들을 발견한다. 노예가 된 왕자 '타라크'(스타즈 네어), 갓을 쓴 검사 '네메시스'(배두나), 임페리움에 반기를 든 전설적인 장군 '타이투스'(자이먼 혼수), 저항군의 리더 '다리안 블러드엑스'(레이 피셔)까지.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나선다. 마더월드의 폭정에 맞서 벨트를 구할 영웅들과 함께.
황새 쫓다 가랑이 찢어진 뱁새, <레벨 문>
<스타워즈>. 스페이스 오페라의 고전. 첫 등장 이후 40년이 지나도 인기를 유지 중인 미국의 신화. 사실 <스타워즈> 이야기는 명성에 비해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 좋게 말하면 왕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클리셰로 가득하다. 조지 루카스가 조지프 캠벨의 연구를 차용한 결과물이기 때문. 캠벨은 여러 신화가 공유하는 모티브를 정리했고, 그 내용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서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신 <스타워즈>는 다른 영역에서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했다. 이야기는 평범해도,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관은 특별했다. 다양한 행성과 생명체, 제다이와 시스의 갈등, 현실세계로 역수입된 광선검 결투, 임페리얼급 스타 디스트로이어와 X-윙 같은 전투기, 여러 외피의 드로이드까지. 익숙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은하계를 탐험할 수 있는 게 <스타워즈>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는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를 꿈꾼 잭 스나이더 감독 신작 <레벨 문: 파트 1 불의 아이>의 실수이기도 하다. 본래 스나이더가 <스타워즈> 스핀오프로 기획한 <레벨 문>. 이 프로젝트는 디즈니의 루카스필름 인수 후 취소됐고, 넷플릭스에서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레벨 문>은 더 이상 <스타워즈> 세계관에 속하지 않는데, 여전히 <스타워즈>를 답습한다. 그 결과 <레벨 문>은 <스타워즈>의 강점 대신 약점만 노출하고 말았다.
첫 번째 실수: <스타워즈>의 세계를 답습하다
할리우드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스타워즈>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스타워즈>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유사한 세계관 속에서 참신한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 가렛 에드워즈의 <크리에이터>는 전자라 할 수 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감독인 그는 스타워즈 세계관의 근간인 '프런티어 정신'과 '오리엔탈리즘'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그렸다.
<레벨 문>은 후자다. 이름과 외양만 다를 뿐, <스타워즈>의 세계관을 이어받았다. 마더월드와 은하 제국은 전 우주를 억압하는 군국주의 권력이다.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섭정 벨리사리우스는 황제를, 반은 인간이고 반은 사이보그인 노블 제독은 다스 베이더의 변형이다. 그들의 관계도 유사하다. 황제가 다스 베이더를 겁박하고 이용했듯이, 섭정 역시 노블 제독을 장기짝으로 다룬다.
주인공 삼인방인 코라, 군나르, 카이는 루크, 레아, 한 솔로 삼총사를 연상케 한다. 루크와 레아의 성별과 신분을 맞바꾸고, 한 솔로를 더 비열하게 만든 게 전부다. 마더월드에 대항하는 저항군과 은하 제국에 맞서는 반란 연합은 규모도, 위상도, 역할도 유사하다. 일반 함선으로는 맞설 수 없는 함선 '킹스 게이즈'의 존재 역시 <스타워즈> 속 스타 디스트로이어의 대체재나 다름없다.
문제는 <스타워즈>의 본래 장점도 세계관이라는 것. 달리 말해 <스타워즈>가 40년이 넘도록 쌓아 올린 세계관을 답습한다면, 그 작품은 결코 <스타워즈>로부터 차별화될 수 없다. 실제로 <레벨 문>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스타워즈>와의 비교를 끝끝내 피하지 못한다. 왜 이 영화가 <스타워즈>가 아닌 다른 제목을 달고 제작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두 번째 실수: 또 다른 고전을 답습하다
그렇다면 <레벨 문>은 스토리텔링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스타워즈>의 도식적인 이야기와 확연히 다른, 참신하고 치밀한 이야기로 관객을 매료해야 했다. <레벨 문>은 그러지 못했다. <스타워즈>라는 클래식에 또 다른 고전, <7인의 사무라이>를 더했다. 자연히 <레벨 문>의 러닝타임 148분은 모두가 이미 알고, 예측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로 가득 차 버렸다.
물론 잭 스나이더의 의도는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연출작은 한 가지 경향성이 있다. '에픽'을 좋아한다는 것. 그는 자기 신념을 관철시키려는 인물의 투쟁을 웅장하고 장엄한 서사시로 그려내는 데 관심이 많다. <300>, <맨 오브 스틸>, <배트맨 대 슈퍼맨>, <왓치맨>, <저스티스 리그> 모두 마찬가지다. 바로 여기서 <스타워즈>를 배경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보여주려 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명작이라는 점과 별개로 <7인의 사무라이>는 스케일이 큰 영화가 아니었다. 한 농촌을 배경으로 도적 떼와 사무라이 7명이 싸우는 이야기였다. 잭 스나이더는 이 이야기를 서사시로 바꾸려 한다. 자유의 투사들이 정의롭지 않고 부당한 탄압에 맞서는 우주적 대서사시를 꿈꾼 셈이다. 그래서 그는 스타워즈를 빼닮은 세계관을 더해 도적 떼를 마더월드로, 7인의 사무라이도 마더월드에 복수하려는 영웅들로 바꿨다.
문제는 잭 스나이더의 큰 그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선악을 딱 잘라 나눈 이분법적인 구도는 이제 소구력이 없다. 당장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도 은하 제국을 퍼스트 오더로, 반란 연합을 저항군로 변형했다가 발전한 게 없다는 비판을 못 피했다.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거악과 싸우는 시대가 아닌 상황에서 이분법적 구도는 구시대적이니까. 근래 히어로 영화, 첩보 영화가 괜히 선악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게 아니다.
세 번째 실수: 허점이 많은 플롯
큰 그림의 매력이 부족한 가운데, <7인의 사무라이>를 차용한 플롯도 안일하다. 벨트의 한 농촌을 구하기 위해 전사를 모으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정작 코라가 조력자를 모으는 과정이 빈약하게 제시된다. 일례로 코라가 무슨 수로 타이투스 장군과 블러드엑스 남매를 찾을 것인지 그 계획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항구 도시 술집에서 타이투스 장군을 아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 이상의 비전을 못 보여준다.
대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카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우주선도 카이에게 빌리고, 티라크와 네메시스라는 전사도 카이에게서 추천받고, 벨트로 돌아가는 항로도 카이가 정한다. 즉, 마더 월드의 폭정에 저항하는 투사로서도, 섭정의 양녀이자 엘리트 군인으로서도 코라는 걸맞은 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니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연속성도 부족한 코라의 여정에는 재미가 붙지 않는다.
각 캐릭터의 매력도 못 살렸다.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각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한 팀이 되는 과정만 잘 보여줘도 <레벨 문>은 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레벨 문>은 그저 캐릭터를 나열할 뿐이다. 그들의 전사, 능력, 심경 변화, 팀에 합류하기로 한 동기 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노블 제독의 입을 빌려 그들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읊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코라와 군나르가 그들을 한 명씩 만나는 내용은 그저 다음 시리즈를 위한 발판 같아 보인다.
마지막 실수: 본연의 장점마저 잃었다
물론 잭 스나이더를 위한 변명이 있기는 하다. 그의 장점은 본래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분량 제한이 없는 스트리밍 환경에서 공개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아미 오브 데드>도 개연성이나 완급 조절 문제를 못 피했을 정도다. 대신 비주얼과 액션 연출은 특출 난 장점이었다. 그가 기획한 DCEU의 비주얼은 만화책을 찢고 나왔다는 평을 받았고, <300>과 <맨 오브 스틸>의 액션은 다른 블록버스터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레벨 문>에서는 잭 스나이더 본연의 장점을 찾기 어렵다. 비교적 저예산으로 스페이스 오페라에 걸맞은 비주얼을 보여주기는 했다. 렌즈 플레어 효과를 적극 활용한 총격씬과 폭발씬은 시선을 사로잡을만하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서는 그린 스크린에서 촬영한 티를 숨기지 못했고, 잭 스나이더의 특징인 슬로 모션도 남발돼 몰입도를 저해한다.
또 합을 맞춘 티가 많이 나는 액션씬도 기대 이하다. 코라가 마더월드 군인들과 싸우는 초반부, 네메시스가 광선검 비슷한 검을 든 채 거미 괴물과 맞서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슬로 모션을 남발한 결과 생동감도 살지 않는다. 그나마 타라크가 배누를 길들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지만, 진부함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가 히포그리프를, <아바타>에서 제이크가 이크란과 교감하는 장면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스타워즈>의 일부라면 익숙하거나 진부한 설정도 '<스타워즈>니까'라는 이유로 용인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로그 원>이나 디즈니+ 드라마 <안도르>처럼 호평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 광선검 액션을 반복하는 대신 색다른 이야기를 보여준 것만은 확실하니까.
애초에 기획과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스타워즈> 자체가 서부극에 근간을 뒀고, 조지 루카스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흔적이 많기 때문. 그러니 '초심에 가까워진 시리즈' 같은 식의 평가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스타워즈>가 아니면서 <스타워즈>를 닮으려 애쓰고 있으니, 모두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다.
종합하면, <레벨 문>은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라는 야심만 있을 뿐, 야심을 실현할 방법론은 볼 수 없는 영화다. 잭 스나이더에게 과제를 잔뜩 안겨준 듯 보이기까지 한다. 언뜻 흥미로워 보이는 아이디어의 스케일만 키우는 대신,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근본적 쇄신이 먼저라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 그래야 잭 스나이더와 넷플릭스가 각각 삼부작으로 계획한 <아미 오브 데드>와 <레벨 문> 시리즈도 안정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 테니.
Dreadful 끔찍한
<스타워즈>를 기대해도, 잭 스나이더를 기대해도 실망스러운 2시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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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제의 드라마, 선의의 경쟁 리뷰
※줄거리 스포주의
요즘 SNS와 틱톡 등 숏폼으로 자주 보이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U+TV에서 나온 ott인 <선의의 경쟁>이다.
특히나 선의의 경쟁의 주연인 혜리(제이 역)와 정수빈(슬기 역)의 키스신이 연일 화제다.
GL의 불모지라고 불릴 수 있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 배우의 동성 키스신은 SNS를 뜨겁게 불태웠다.
# 자극적인 내용과 코드
이 드라마는 19금 드라마로 학교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자극적인 요소가 대거 등장한다.
주인공이 주선하는 마약 거래부터 시작해서 자살, 성관계, 납치, 감금, 학교폭력, 불법 수술, 살인 및 은폐 등 심지어 성인과 미성년자 간 교제나 장면 묘사는 없었으나 성매매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도 나온다. 학교 배경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보면 꽤나 충격적일 내용이다.
한국은 그간 스카이캐슬, 펜트하우스 등 우리나라의 학업 열풍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을 많이 내왔고, 대다수 흥행하며 하나의 계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와중 이 선의의 경쟁은 다른 드라마와 다르게 불법적인 행동을 성인이 아닌 학생들이 주로 한다는 점, 학업보다는 개인적 성장에 초점을 둔 점이 조금 다르지만 그럼에도 위에 적힌 드라마들에서 꼭 나오는 '극성 학부모', '경쟁 상대', '마약', '시험지 훔치기', '학원 특별 과외'는 빼놓지 않고 나온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전개는 다른 드라마와는 조금 다르게 흐른다.
# 슬기의 성장 일기
드라마를 한 줄 요약한다면 "슬기의 성장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슬기(정수빈)는 어렸을 때부터 존재감이 없던 학생으로 그 탓에 유치원에서 간 소풍에서 미아가 되고, 보육원에서 자랐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왕따를 당했고 어쩌다 시작한 공부로 왕따를 면하게 되어 공부에 집착하게 되는 캐릭터다. 그런 슬기가 고등학교 때 명문고를 가면서 제이(혜리)를 만나며 자신을 찾고, 어떻게 보면 우정과 사랑도 찾게 된다.
드라마의 시작 부분도 그렇다. 모든 화의 시작은 각 캐릭터들의 과거나 비밀을 슬기의 내레이션으로 보여준다. 슬기는 관찰자이자 주인공으로 다른 캐릭터와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점점 동화되는 캐릭터다. 처음에는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였다가 나중에는 이 드라마의 진짜 빌런인 제이네 아빠와 대격할 정도로 성장한다. 그 성장의 비밀에는 당연히 슬기의 짝인 제이가 있다.
제이는 그 학교의 짱,, 말하자면 인싸이자 실세로 아버지가 학교의 이사장이자 돈줄이다. 선생님도 제이 말에는 껌뻑 죽고 학생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마약을 유통하는 어두운 면도 있다. 제이는 처음에는 호기심 혹은 약간의 끌림으로 슬기와 친해진다. 슬기는 항상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던 탓에 그 관심이 낯설기도 고깝기도 하다. 처음 슬기가 제이의 집에서 잔 날 슬기는 제이와 키스하는 꿈까지 꿀 정도로 제이에게 휘둘린다. 다만 그날 제이가 슬기에게 순진한 의도로 접근한 것이 아님을 알고 둘은 친해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사실 드라마 전반이 슬기와 제이가 싸우고 친해지고 싸우고 친해지고의 반복이다.
# 제이와 슬기의 관계 (경이와 예리의 관계)
이 드라마는 사실 경쟁 드라마를 빙자한 성장, 그리고 우정 사랑 드라마다.
넷은 겉으로는 문제없이 화목하고 좋아 보인다. 다만, 경이는 부모님의 관심과 자위 문제를, 예리는 돈 문제와 외모 문제를, 슬기는 애정과 마약 문제를, 제이는 아버지 문제를 겪고 있다. 그 관계들도 그렇다. 슬기가 바라보는 제이는 어딘가 수상하지만 완벽하고 꿍꿍이가 많은 여자애다. 슬기는 제이를 좋아하면서도 경계하고 그러면서도 믿고 싶어 하는 사랑과 우정 어딘가의 감정을 품는다. 제이가 슬기에게 갖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장면은 없지만, 제이가 "나는 소중한 존재가 생기면 그 존재가 죽는 상상을 해. 나는 그래서 너를 만난 후에 네가 죽는 상상도 해."라고 말한 부분에서 제이도 슬기를 소중하게 생각함을 알 수 있다.
제이는 끝내 슬기를 위해서 원래 죽으려고 했던 목표도 버린다.사실상 제이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문제아다. 거진 사이코패스인 아버지는 제이를 제2의 자신으로 만들고 싶어 애가 탔고, 제이의 목적은 자신이 가장 위로 올라간 그 순간 모든 걸 망치고 추락, 즉 자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이가 극 중에서 계속 다이빙을 하며, 자신은 물속에서 춥고 숨을 쉬지 못하는 공간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롭다고 언급한다. 그런 부담을 없애주고 제이에게 살고 싶다는 감각을 깨워준 것은 슬기다. 슬기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학업만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 마약을 끊고 슬기가 마음을 다잡게 해준 것은 제이이다. 경이와 예리에게 세상에 자리를 만들어 준 것도 어른들이 아닌 서로의 존재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기승전결을 따라 계속 숨 가쁨과 자극적임의 가도를 달리는데도 중간중간 나쁘게 말하면 김이 세는 어린아이가 노는 것 같이 해맑은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집중력을 흐리는 그 장면들이, 오히려 제이와 슬기, 그리고 경이와 예리가 진짜 나이대로 돌아가서 성장하는 유일한 장면들처럼 보였다.
# 마무리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이 세련되거나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OTT 드라마의 한계인지 사용하는 배경이 조금 한정되어 있고, 가끔 이게 뭘까 하는 대사들도 종종 들린다.
그리고 어두운 장면과 밝은 장면이 너무 갑작스럽게 교차되어 몰입이 중간중간 끊기는 단점도 있다.
스토리도 모든 부분 매끄럽게 이어지진 않고,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둔 듯한 부분도 보인다.
다만, 나는 워맨스 불모지인 한국에서 이 정도 퀄리티와 스토리를 가진 작품이 나온 것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특히나 처음에는 여자들의 케미를 보여준다고 홍보해놓고, 나중에 뜬금없는 남자와 엮어 우리의 뒤통수를 세게 친 작품들이 많기에 마무리까지 억지 헤테로 로맨스 없이 여자들의 우정과 사랑으로 끝난 스토리가 너무 만족스럽다.
현재 태국이나 대만에서는 퀴어 드라마가 넷플릭스 TOP 10에 올라갈 정도로 인기다.
우리나라처럼 워맨스, 브로맨스로 어영부영 퀴어 코드를 넣을 듯 말 듯 하는 수준이 아니라 작 중에서 키스신은 물론 결혼식까지 보여준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퀴어 콘텐츠는 아직 글로벌 작품 수준으로 올라가기에는 너무 느리고 약하다. 다만, 선의의 경쟁처럼 꽤 좋은 퀄리티와 퀴어 코드를 가진 작품이 종종 등장하는 추세이고 우리나라 작품 특유의 좋은 퀄리티와 귀에 꽂히는 대사, K - 막장 코드들이 중국이나 태국에서도 인기가 된다고 하니 이런 작품들이 점차 늘어났으면 하는 바이다.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틀에 박히지 않은 다양한 작품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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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그 자리는 과연 영원한가
DIRECTOR.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
CAST. 케일럽 랜드리 존스, 해리 멜링 외
PROGRAM NOTE.
짐 크레이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티나 라켈 창가리의 <하베스트>는 폐쇄 위기에 처한 이름 없는 마을로 우리를 데려간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월터는 그의 젖 동무이자 마을 지주인 마스터 켄트와 함께 이 외딴 마을에 정착했으며, 배타적이고 미신에 집착하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성과 분별을 지닌 인물이다. 7일간에 걸쳐 마을은 화재를 겪고, 추수 잔치를 벌이며, 외지인들을 핍박하고, 새로운 지주를 맞이하더니 결국 고향을 등지고 떠나게 된다. 감독은 하나의 마을이 서서히 몰락하는 모습과 한 시대의 고통스러운 종말, 그리고 삶의 방식이 비극적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35mm 필름에 담아낸다. 신(新)국수주의가 떠오르는 가운데, <하베스트>는 추방과 강제 이주로 이어지는 지독한 외국인 혐오와 불관용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강렬한 우화이다. (박가언)
디지털 기술이 계속 발전하지만, 필름 특유의 아름다움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 <하베스트>가 그렇다. 테두리가 거뭇거뭇하거나 불그스름한 흔적까지 고스란히 스크린에 올린 이 영화는, 필름을 통해 다소 중세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의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우화를 참 우화로 만드는 건 이런 검박해 보이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곡식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사이로 사람의 손이 올라온다. 이제 막 날개를 펴는 나비에게 후 숨을 불고, 까만 흙이 낀 손톱으로 이끼를 만지다 못해, 이끼를 베어 물고 나무 옹이에 혀를 넣기도 하다가 급기야 알몸으로 물에 들어간다. 그야말로 자연 속에 거하는, ‘인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이 아닌 흙 낀 손톱처럼 자연 그대로인 모습을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은 화재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들판에 산들거리는 꽃이나, 쓰임새를 하나하나 일러주는 나무와 풀들, 거기서 양털을 꺾고 노동요 부르며 농사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얼핏 옛 유럽 그림엽서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사건들은 등락(登落)의 폭이 매우 크고, 그 낙차마다 사람을 놀라게 한다.
외지인은 누구인가
이 영화에는 여러 차례 외지인이 등장한다. 그중 절대다수가 트레일러에 등장하는데, 형틀에 묶여 있는 사람들과 말을 타고 오는 사람들이다. 마을 토박이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외지인을 믿지 않으며, 어떤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합리적 판단보다는 익숙한 사람인지 아닌지의 잣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합리적 판단을 할 만큼의 시간조차 두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남자이자 중간중간 서술자로서 내레이션을 하는 월터는 한편으로 주민들의 삶이 배부르고 취한 짐승들 같다고 자평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삶을 꾸려 가고 있다. 그나마 마을 사람들에 비해 외지인에 열려 있는 사람이 그다. 형틀에 묶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고 싶어하고, 이름을 묻고 싶어한다. 이 마음은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형틀에 묶인 사람들에게조차 조롱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 “belong”은 주요하게 반복되는 단어다. 마을의 아이들은 동네의 경계를 따라 걷다가 경계를 알리는 돌에 머리를 찧음으로써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똑똑히 확인한다. 이러한 과정을 외지인에게는 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단단한 소속감은 기반 논리가 깊지 않다. 외지인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이들의 계급이나 상황이 계속해서 다양해짐에 따라,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도 자반 뒤집기 하듯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물론 외지인의 말 또한 정답은 아니다. 동네를 “개선”하겠다며 소득 증대의 꿈을 꾸는 새로운 주인, 조단의 말은 아마도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체의 소득이 증가하고 모든 게 좋아질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조단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농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토박이 동네를 떠나야 한다.
전통은 무조건적인 혁신으로 깨부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문을 닫아걸고 타인을 거부한다고 순수하게 계승할 수도 없다.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으로 넉넉한 사회만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계속되는 외지인들의 등장 앞에 우왕좌왕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식민지로 물들었던 20세기 어떤 국가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지도는 어떻게 생겼는가
월터는 세계를 동심원형으로 인식한다. 지도 제작자 얼이 개인적으로 작업한 동심원형 지도를 보여주었을 때 “최고의 지도”라고 반가워한 것도 그래서다. 둥근 동심원형은 사방으로 잔잔한 파동을 퍼뜨리며, 설령 영역이 조금 겹쳐도 서로에게 뾰족하거나 유해하지 않다. 넉넉하고 너그럽고 부드럽다. 그러나 동심원형 제도는 얼의 개인 작업일 뿐, 그에게 의뢰되는 작업은 격자 무늬형 지도다.
네모반듯하게 구획을 자른 그 지도상에는 사람이나 나무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 그 지도에서 중요한 건 대략의 위치와 구획당 키울 수 있는 양의 수 정도일 것이다. 월터가 반박하듯 그 땅의 물과 흙, 심지어 땅을 돌아다니는 소의 특성까지도 확실히 알고서 그리는 동심원형 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월터는 단박에 본질을 꿰뚫어본다. 그건 우리를 납작하게(flatten) 만든다고. 동심원형을 강제로 격자 모양에 쑤셔 넣으려면, 원의 가장자리는 잘라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의 여백으로 밀려나는(marginalized) 사람들이 생겨난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세계 지도는 메르카토르 도법을 이용한다. 항해용으로 유리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아프리카가 너무 작게 표시되어 있다. 실제 아프리카 대륙은 미국과 중국과 인도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큰데, 실제로는 아프리카보다 훨씬 작은 그린란드가 더 커 보일 정도이다. 나름의 장점이 있어 활용한 도법이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영국 같은 국가들이 좀더 음흉한 의도를 가지고 많이 사용한 측면도 있다.
월터는 세계를 동심원형으로 인지하는 사람이기에, 외지인을 받아들인다. 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 소설의 무력한 농민 가장들과도 닮은 측면이 있다. 격자식으로 잘려 나가는 세계에서 한 줌 흙을 놓치지 않는, 그러나 다른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는. 손가락질이 심긴 곳에서 비극이 피어난 곳을 보고도 흙에 씨앗을 심는 마음. 격자식 지도에 너무 익숙해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마음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극장에서 두 시간씩 앉아 영화를 본다. 씨앗을 심고 거두듯이.
그 자리는 과연 영원한가
나그네는 영원히 나그네이고, 토박이는 영원히 토박이인가. 자리는 쉽게 뒤집힌다. 어쩌면 저기 저 사람의 어제는 나의 오늘과 비슷했을 수 있다. 나의 내일이 저 사람의 오늘이 되지 말란 보장은 없다. 격자식으로 횡과 종을 마구잡이로 갈라 서열화하는 지도를 떠나, 둥근 원형의 지도를 마음에 품어야 하는 이유다.
비록 월터가 그 동심원을 실행한 방법이 (이 또한 정말 너무 한국 근대 소설의 무력한 농민 가장 같은) 무위라는 점에서 조금 의아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걸음의 방향에만큼은 고개를 끄덕여 본다.
10/03 16:3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상영코드 066)
10/08 20:00 CGV센텀시티 4관 (상영코드 395)
10/09 14:0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상영코드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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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0kg 넘는 거구의 남자가 쓴 마지막 에세이란?
270kg이 넘는 거구인 찰리는 온라인으로 에세이를 쓰는 법을 가르치는 강사이다. 모습을 공개하지 않는 그에게는 큰 상처가 있었으니 자신의 남자친구인 엘런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식증으로 많은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고 엄청난 비만으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보조대로 겨우 걷는다. 사실 찰리는 가족이 있었는데 엘리라는 딸과 아내 메리였다. 찰리는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양육비만 보내고 방치해뒀다. 찰리의 옆에는 보조자가 있었는데 죽은 엘런의 여동생인 리즈였다. 리즈가 하는 일은 찰리 곁에서 음식들을 구해주고 그가 죽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딸인 엘리가 찾아와 아버지인 찰리에게 으름장을 놓는데...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찰리의 집을 방문한다. 몸이 비대한 찰리에게 할 수 있는 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다. 그러나 찰리는 신을 믿지 않았고 보조자인 리즈도 종교에 회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결국 토마스를 내쫓게 되고 다시 들어오는 토마스는 자신이 선교할 목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구원이며 사명이라는 그의 말에 찰리는 넘어가지 않는다.
찰리의 딸인 엘리는 친구들을 조롱하고 마리화나를 피우는 불량한 학생이다. 낙제 점수를 받고 아버지인 찰리에게 불만을 쏟아내며 자신의 에세이를 다시 써오라고 시킨다. 또한 고등학교에서 정학으로 처벌받았고 여러 가지로 문제아이다. 그래도 그런 엘리를 가능성 있게 본 찰리는 자신이 불폼 없는 삶을 살고 있더라도 모비 딕의 구절을 읊으며 엘리가 걱정 없이 크기를 바랐다. 12만 달러나 모았지만 가족들에게 양육비만 보낸 찰리가 할 수 있는 건 병원에 가지 않고 딸인 엘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돈을 주는 것이었다.
보조자의 역할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리즈도 비대한 몸을 가진 찰리를 보조하며 일까지 도맡아 한다. 왜 그렇게 힘들게 찰리를 도아주는 걸까? 그리고 자신의 오빠가 찰리가 좋아한 남자친구인 엘런인데 사망한지 오래됐다. 그 상처가 찰리에겐 아픈 상처였고 힘들어했을 것이다. 죽을 일 밖에 남지 않는 찰리를 보살핀다는 게 여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삶이란 어찌 되는지 모르는 여정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상처받아 좌절하기도 하여 찰리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찰리에게 폭식증은 그를 더 아프게 만드는 기폭제였을 뿐이었다.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찰리도 보조하는 리즈도 불량한 학생이 된 엘리도 모두 다 사정은 갖고 있었다. 고난에서 구원으로 가는 길을 쉽지가 않다. 찰리 역을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는 미국의 여러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말하길 당신도 두 발로 서서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이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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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스타일 리메이크 / 로코의 정석 / 그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 진영 다현 / 대만 원작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지만 엔드크레딧과 함께 사진들이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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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용과 주근깨 공주> 30초 예고편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스즈'는 사고로 엄마를 잃은 후 더이상 노래할 수 없게 된다.
평범한 나날이 계속되던 중, 우연히 가상세계 U에 접속하게 된 '스즈'
그는 그곳에서 신비로운 가수 '벨'로 다시 태어나 순식간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그런데 '벨'의 대규모 콘서트가 열리는 어느 날, '용'이라 불리는 의문의 존재가 나타난다.
큰 상처를 안고 있는 듯한 '용'에게 신경쓰이는 '벨' 그리고 현실의 '스즈'
과연 '스즈'의 목소리는 그에게 까지 닿을 수 있을까?
두 세계가 하나로 이어질 때, 기적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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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울림의 탄생> 메인 예고편
소아마비 고아, 한쪽 귀의 청력마저 상실한 그를 품어준 북 만드는 장인.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북을 만들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며 이 악물고 버텨 온 60년. 이제 일흔을 앞둔 임선빈 악기장은 다른 한쪽 귀의 청력마저 잃게 될 거라는 비보를 접하고, 어린 시절 처음 들었던 그 북소리를 담은 대작을 만들기 위해 23년을 아껴 두었던 나무를 꺼낸다. 그러나 날씨도, 몸도, 전수자인 아들 동국과의 협업도 마음같지만은 않은데 ...
60년 동안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첫 북소리의 울림. 그 울림이 담긴 북을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