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4-02-29 22:59:05
동심은 죽지 않는다
웡카
이 영화의 혹평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혹평의 주류는 각자의 동심 속 웡카가 아니라는 지적이었던 듯하다. 그 말도 일리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첫 번째 시리즈를 안 봤던 나에게, 팀버튼이 원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원작을 따라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티프만 따왔다고 생각하고 별개의 영화로 인식하고 보니 이 영화는 그저 동심을 잃은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1. 팀 버튼의 웡카와는 다르지만 같은 메시지를 가진
웡카의 성격과는 별개로 웡카가 등장하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있다면 동심이란 건 나이와는 상관없는 클래식이라는 것이다. 웡카가 그로테스크하든 해맑든 그 존재만으로도 동심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이가 가진 꿈은 그 어떤 이유로든 짓밟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달까.
나의 동심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다. 나는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안좋았던 기억을 훑고 좋은 기억들을 그 뒤에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왠만하면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려다가도 살다보면 하게 되는 선택에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붙잡을 때가 있다. 한 때 나도 웡카와 같은 하고 싶은대로 사는 존재에 설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현실을 고려하고 난 뒤에 하고싶은 걸 찾는달까. 무턱대고 꿈꾸기만 하는 시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팀 버튼의 웡카를 보든 이 해맑은 버전의 웡카를 보든 나는 여전히 웡카의 자유로움, 신비로움에 설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심을 꺼내어 좋았던 기억들을 회고하니, 꿈같은 2시간이었다.
2. 현실이 쓰더라도, 초콜릿만 있다면
웡카에 대한 환상은 초콜릿에 대한 진심에서 비롯된다. 힘든 삶을 살아내는 누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웡카는 초콜릿을 권한다. 마치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듯이. 나는 초콜릿 하나를 먹어도 어차피 먹을 거면서 칼로리부터 확인하고 먹을만큼 현실 파악부터 하는 편인데, 가끔은 내 기분을 위해 무모하게 살아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너무 현실만 바라보면 인생이 재미없으니, 삶이란 현실 60, 꿈 30, 실행력 10으로 꾸려나가면 꿈만 좆느라 다치지도 않고, 현실에 질리지도 않을 것 같다. 다만, 꿈만 꾸지 말고 실행하자. 현실이 힘들다 싶으면 단 거 먹고 힘내자. 내가 느낀 영화의 메시지는 이거였다.
총평
최근 본 영화 중 뻔한 전개였는데 이렇게 힘이 된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실행력이 조금 부족한데, 그냥 초콜릿을 가득 들고다니며 막막할 때 하나씩 꺼내먹어야겠다. 영화 속에서 초콜릿이 가지는 의미는 곧 꿈과 환상이자 위로를 건네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호텔 잘못골라 세탁소 시궁창에 빠져버린 웡카와 친구들에게도 초콜릿이 절망적인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소재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ost가 잔잔하게 맴돈다. 티모시 샬라메가 폭발적인 가창력을 가지진 않았는데도 노래들이 조용한 임팩트가 있다. 역시 가창력보다 중요한 것은 전달력인 걸까. 전달력과 가창력이 비례하진 않으니 말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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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다큐>,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록해준다는 것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무언가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예를 들어 특정 영화를 보고 난 후 '집에 가서 꼭 떡볶이를 먹어야겠다', '이 영화를 보고 피로해졌으니 집에 가서 푹 쉬어야겠다' 등의 생각이 드는 것 말이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후 다짐한 것을 꼭 실천하는 편인데,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내가 다짐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하자'였다.
<오늘 영화>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연애다큐>의 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연인 사이인 교환과 하나는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사전제작지원금을 받기 위해 둘의 셀프 연애 다큐멘터리(프로젝트명: 러브(LOVE))를 촬영한다. 이 다큐는 캠코더를 들고 교환과 하나가 계속 서로를 찍어줌으로써 완성한 작품이다.
이들은 1차에 합격하고, 2차 피칭심사까지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하나의 '변덕'과 예술성 취향의 차이 등을 이유로 둘은 헤어지게 된다.
그러던 중 교환은 둘의 작품이 심사에서 합격하여 사전 제작지원금 500만원이 지급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하나에게 이 소식을 알리며 연애다큐를 다시 찍자고 한다.
헤어진 뒤로 다시 교환과 만날 생각이 없었던 하나는 처음에는 거절한다. 하지만 전시회를 구경하다 300만원짜리 도자기를 깨트려버린 하나는 지원금 500만원 중에서 300만원을 가져간다는 조건을 걸고 결국 교환과 다시 연애다큐를 찍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교환의 가족잔치에도 참여한 하나는 갑자기 다큐를 촬영하러 나오지 않았고, 며칠 후 교환에게 깨진 도자기를 택배로 보낸다.
교환은 깨져버린 도자기를 온 집안에 본드냄새를 풍기며 억지로 다시 붙인다.
그리고 본드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도자기를 들고 하나를 찾아간다.
- 가끔 누군가 나를 기록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자, 영화의 시작과 끝에 내레이션처럼 나오는 대사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그 순간의 상대방의 모습을 영구적으로 남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도 함께 기억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사진이나 영상은 화면 위에 보여지는 모습뿐만 아니라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의 마음도 함께 담아져서 나오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를' 찍느냐- 만큼 중요한 게 '누가' 찍느냐-라고 생각한다.
교환과 하나가 열심히 연애다큐를 찍고 있는 장면들이다.
진짜 내가 한 커플의 연애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 나는 갑자기 아빠에게 교환이를 소개시켜줄 마음이 사라졌다.
그냥 변덕이었다.
두 시간 동안 오토바이를 탔는데 아직 여의도롤 못 벗어나서도 아니고, 지식인에서 봤다는 그 저질스러운 오줌소태 퇴치법이 소용없어서도 아니었다.
그건 그냥 변덕이었다.
'변덕'.
때로는 그 단순하다고 느껴지는 변덕 때문에 많은 모습이 바뀌곤 한다.
변덕 때문에 열심히 준비하거나 쌓아왔던 어떤 일을 단숨에 그르치기도 한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아니다.
변덕 때문인데 뭐 별 수 있나.
- 교환이는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까에 대해서 많이 신경쓰는 타입이다.
EIDF 다큐멘터리 제작지원작 공모를 알리는 뉴스에 교환이 자꾸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다. 너무 재미있다.
이런 유머포인트가 정말 너무 진짜 완전 좋다..
보다보니까 약간 무한도전 <TV전쟁> 에피소드에서 자꾸 서성거리는 정준하 같기도 하다.
화면에 자꾸 나오는..
교환: 셀프 연애다큐멘터리 '연애다큐' 가제를 기획한 구교환, 이하나 커플입니다.
이하나 배우와 저는 실제 연인입니다.
이하나 배우는 저희 집에서 같이 삽니다. 아니, 거의 같이 잡니다.
근데 저는 부모님이랑 같이 삽니다.
하나: 그렇다고 저희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는 아니구요.
구교환 어머님, 구교환 감독님의 어머니께서는 저한테 매우 잘해주십니다.
맛있는 걸 많이 주십니다. 참외는 어디서 사오시는지 껍질채 먹어도 참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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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그래서 주제가 뭔가요?
교환: 반지의 제왕에도 주제가 있죠? 뭐, 좆밥 호빗이 큰일을 해낸다든지?
마찬가지로 저희 다큐에도 주제가 있는데요, 그 호빗이··· 아라곤과···
2차 피칭심사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정말 영상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글로만 전달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이 장면에 가득하다.
주제가 뭐냐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좆밥 호빗이 큰일을 해내는' 반지의 제왕 이야기를 꺼내는 교환의 모습이 참 재미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내 웃음포인트이다. 너무 재밌어.. 너무 웃겨
그리고 황급히 하나가 교환의 마이크를 뺏는다.
심사를 마치고 둘은 치킨을 시켜 먹는다.
하나는 양념을 좋아하는데 교환은 후라이드만 주문했다.
그럼 반반을 시키면 되는 거 아니냐는 하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교환은 왜 양념을 고집하냐면서 또 카메라를 꺼내든다.
술을 마시다 전시회에 가자는 하나의 전화를 받고 교환은
- 내가 어쩌다 문화예술오타쿠를 만나가지고···
라는 말을 남긴다.
하나는 먼저 와서 전시회의 커플 사진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숙취로 힘들어하는 교환은 뒤늦게 전시회장에 도착했다. 하나는 이런 교환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먼저 전시회장 밖으로 향한다.
사람이 꽉 차 있는 엘리베이터를 본 교환은 얼른 엘리베이터에 탔고, 하나가 가만히 서 있자 하나에게 밑에서 만나자는 수신호를 보낸다.
하나는 이 모습을 가만히 서서 보다가 큰 소리로 웃더니 교환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나가버린다.
하나와 헤어진 교환은 노래방에서 변진섭의 '로라'를 열창한다.
실제로 구교환 배우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부른 노래도 로라라고 한다.
완전.. 진짜 다큐다..
영화 <세마리>에서 윤종신의 '부디'를 부르는 교환 배우를 보고도 한 생각이지만 담백하게 노래를 참 잘 부르는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 교환은 2차 피칭심사도 합격하여 최종적으로 사전제작지원금 500만원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에게 연애다큐를 다시 찍자고 한다.
처음에 이를 거절했던 하나는 전시회장에서 도자기를 깨트리게 되었고, 결국 300만원을 본인이 가져간다는 조건 하에 다시 연애다큐를 찍기로 한다.
<연애다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교환과 하나는 어느 날, 교환의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사진관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손님 한 분의 여권사진을 찍고 사진을 보정하면서 교환이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 하나야. 난 이렇게 가게에 손님이 딱 들어오잖아? 그럼 이 사람이 증명사진 찍으러 온 건지, 여권사진 찍으러 온 건지 딱 안다?
내 이 여자도 여권사진인줄 딱 알았어.
눈이 너무 슬프잖아. 떠날 사람은 준비하는 게 보여.
'떠날 사람은 준비하는 게 보인다.'
이미 그 눈에서 떠나기로 결심한 슬프고도 단단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이 말을 하는 교환의 눈빛이 조금은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교환의 가족잔치에도 초대된 하나는 그곳에서 노래를 불러보라는 가족의 성화에 이선희의 '인연'을 부른다.
- 노래를 부르기로 한다. 난 여배우니까.
하지만 이날 이후 하나는 연애다큐를 찍으러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교환에게 하나가 보낸 깨진 도자기가 도착한다.
교환은 온 집안에 본드 냄새를 풍기며 깨진 도자기를 다시 붙인다.
- 나는 하나가 왜 도자기를 보냈는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이건 이하나의 편지다.
이미 깨져버린 도자기.
산산조각나서 온 집안에 본드냄새를 풍기면서 다시 붙여야만 원래의 모습을 간신히 갖출 수 있는 도자기.
하지만 원래의 깨끗하고 정교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하는 도자기.
자칫 잘못 만지면 손이 베여서 다칠수도 있는 도자기.
이미 깨져버린 하나의 마음, 깨져버린 교환과 하나의 사이.
자칫 잘못 건드리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게 되어버렸다.
- 우리 엄마가 너 되게 미워해. 집에 본드 냄새 많이 난다고.
이걸 내가 붙이면서 진짜 생각을 많이 했어.
이렇게 막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거 있잖아.
잘했어. 잘 보냈어, 응.
그리고 교환은 자신이 열심히 붙인 도자기를 하나의 앞에서 떨어트린다.
당연히 이미 한 번 깨졌었던 도자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 이거 딱 붙여놓고나서 이걸 보니까 무슨 생각이 제일 먼저 든 줄 알아?
봐봐. 안 예쁘잖아.
'안 예쁘잖아'.
이미 깨져버린 도자기는 다시 열심히 붙여봐도 안 예쁘다.
이미 떠난 사람도 붙잡아봤자 그 마음이 이전과 같을 리가 없다. 오히려 더 이질적이다.
교환도 이를 깨진 도자기를 붙이면서 깨달았다.
깨진 도자기를 다시 붙여봐도 안 예쁘듯이, 이미 깨져버린 하나의 마음을 다시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져버린 하나와의 사이도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 가끔 누군가 나를 기록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 대사가 나오며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유난히 예뻐보이는 사진이나 영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기록물들에는 모두 사랑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순간의 장면만 포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누군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나의 마음, 나의 사랑까지 모두 담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누군가 나를 기록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모습을 마음을 담아 기록해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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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레이더스 시사회 영화 후기 - 독재로부터 자유를 빼앗기질 않을 권리!
서기 2043년 독재국가인 에머슨이 전쟁을 명분으로 하여 미성년자들을 아카데미라는 곳에 데려가 인간병기로 만든다. 니스카는 자신의 어린 딸인 와시즈를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와시즈는 아카데미에 끌려가게 되고 그로부터 10개월이 흐른다. 니스카는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큰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한편 와시즈는 아카데미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지낸다. 하지만 외톨이로 지내는 와시즈에게 교관이 다가와 자신의 어머니인 니스카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큰 실망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니스카는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아카데미의 경계에서 매일 원망한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카데미에 있는 자신의 딸과 아이들을 구출하려고 준비하는데...
근미래의 디스토피아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려주는 영화!
하니엘의 영화 잠깐 엿보기
단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에머슨에게 길들여진 인간병기로 만들어진다면?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없는 걸까?
이 영화는 2043년의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다. 시민들은 식량을 드론으로 배급받는데 형편없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국가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여버리는 독재 국가인 에머슨을 보면서 우리의 삶에 자유가 빼앗긴다면 희망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에 쓰일 인간병기를 만들기 위해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아카데미에서 훈련시킨다. 하지만 미성년자들은 결국 군인으로 키워져 전장에 배치되고 권력의 도구로 쓰이게 된다. 만약 우리도 근미래에 이러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할까? 자유라는 게 없어지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과 다를 게 없어진다.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하면 사회가 얼마나 비참해지게 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독재가 실행한다 해도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 예시가 니스카를 도와주는 인디언 부족들인데 이들은 토착민이면서 자신의 영토를 수호한다. 후반부에 갈수록 에머슨의 군대와 드론들이 쳐들어와 이들과 싸우려고 하지만 자연을 수호하는 와시즈의 능력이 늦게 발휘된 덕분인지 물러나게 된다. 전쟁을 한다는 이유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자유를 빼앗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 '나이트 레이더스'였다.
독재 국가는 독을 탄 음식을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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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니까 청춘 아니고, 청춘시련
영화 <청춘시련> 포스터
청춘시련 (Terrorizers, 2022)
장르 : 대만, 멜로·로맨스 │ 감독 : 호위딩
출연 : 이목(유팡), 임백굉(밍량), 진정니(모니카), 임철희(장둥링)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러닝타임 : 127분아프니까 청춘 아니고, 청.춘.시.련
청춘이라는 단어는 왜 그리 힘든 단어랑 잘 어울릴까. 아프니까 청춘이었는데, 이번엔 ‘청춘시련’이다. 청춘들의 편린을 그려낸 대만의 한 영화 제목이다. 사실 포스터나 제목만 보고는 그저 그런 로맨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영화에는 다양한 주인공들이 나온다. 이야기는 하나로 연결되지만, 주인공의 시점에 따라 옴니버스처럼 펼쳐지는 구성이다. 맨 처음 그려지는 이야기는 귀여운 외모의 여성 ‘유팡’과, 누가 봐도 착하고 건실하게 생긴 남성 ‘장둥링’의 로맨스다. 남자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여성은 이에 넘어가고, 비 내리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로맨틱하게 키스하고, 미래를 도모하고..., 여기까지만 해도 이 영화는 그냥 일반적인 로맨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기차역에서 칼을 든 채 유팡을 향해 달려드는 남자로 인해 영화의 장르는 바뀌어버린다.
그 남자는 왜 칼을 들었을까
유팡을 향해 칼을 들고 달려든 남자는 ‘밍량’. 유팡과 함께 살던 동거인 남성이다. (동거‘남’이 아닌 정말 공간만 셰어 하는 동거‘인’이다) 영화 초반, 소극적이고 과묵하게 그려지는 밍량을 보고 “아, 유팡을 사랑했던 거구나. 그런데 장둥링한테 뺏겨서 화가 났구나. 그래서 칼을 들었구나”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칼을 들어도 분명 미친놈이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하지만 영화는 시점을 꼬아, 이번엔 ‘모니카’라는 여성을 비춘다. 모니카는 진정한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무명배우다. 하지만 배우로 먹고사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고, 현실과 타협해 한 포르노 사이트에 배우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운명은 장난과도 같았고, 그렇게나 영화배우로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마음과는 달리, 사람들은 포르노에 나왔던 그녀를 무척이나 특별하게 기억한다. 야릇한 표정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듯한 모니카의 연기에 압도당한 팬들 중에는, 유팡을 향해 칼을 들고 달려들던 ‘밍량’도 있었다.
밍량은 포르노 사이트에서 보게 된 모니카에게 정말이지 홀딱 반했다. 그 이후 그녀를 마치 자신의 실제 여자 친구처럼 여기며 몰래 집에도 드나들고 온갖 비밀스러운 스토커 행세를 하고 다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 밍량은 왜 모니카가 아닌 유팡에게 칼을 휘두른 걸까.
진짜 로맨스는 여기에 있었다
다시 영화의 시점은 바뀌고, 이번엔 모니카와 유팡이 함께 등장한다. 모니카와 유팡은 극단에서 만난 사이다. 처음에는 서로를 응원하는 동성친구라고 생각했으나, 둘은 연인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모니카는 배우로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고, 여차저차 상황에 쫓겨 호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렇게 비극적으로 헤어져야만 했던 여성 커플의 로맨스 뒤로, 건실한 청년 장둥링이 등장한 거였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그제야 퍼즐이 후드득 맞춰진다. 영화 초반에는 조명되지 않아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을 알고 나자, 같은 사건인데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유팡을 향해 칼을 휘두른 밍량은, 유팡을 사랑한 게 아니라 질투한 것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 가상 여자 친구 ‘모니카’와 사랑을 나누고 몸을 섞는 유팡이 증오스러웠던 것.
그래서 이 영화 뭔 내용인데? 누가 악역인데?
하나의 완벽한 서서를 알고 나자 영화는 괴기스럽기도 하고, 많이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야기’라는 것의 본질적인 특성이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란 화자에 의해 조각나고 편집되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살면서, 한 사건이 당사자들에 의해 다르게 엇갈리는 것을 마주하곤 한다. 같은 사건인데도 A가 기억하는 것과 B가 기억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관에 의해 어떤 부분은 거세되고, 어떤 부분은 과장된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결국 누구의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색깔은 달라질 수밖에. 갱생이 불가한 미친 스토커로만 생각했던 ‘밍량’도 순수한 여고생 ‘키키’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구원해준 고마운 사람이 되고 만다. 이렇게 주관에 따라 극명하게 갈려버리는 서사를 보며 관객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누가 나쁘고 누가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그 시절은 그 자체로 혼란이고 시련이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조금 불투명했으나,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대만의 청춘들이 한국의 청춘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그 시절은 누구나 뜨겁고 혼란스럽고 세상에서 제일 소란스러운 세계라는 것만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제목 그대로, 청춘은 시련 그 자체다. 연인은 떠나가거나 배신하고, 정립되지 않은 자아는 불안으로 요동친다. 그 시기를 지나,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언제 처리할 것이냐가 제일 큰 소란이 된, 30대의 내 고요한 삶이 조금은 고맙게 느껴졌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가끔 뜨거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프냐고 묻는다면 아니. 이렇게 영화를 통해 간접 체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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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와 세계의 아이러니, 아득한 풍경, 생존이라는 사치
※영화 〈정말 먼 곳〉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우(강길우)는 강원도 화천에서 홀로 딸 설(김시하)이를 키우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그를 돕는 목장 주인 중만(기주봉) 역시 딸 문경(기도영)과 어머니 명순(최금순)을 모시고 살아간다. 인적 드문 산골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서울에서 연인 현민(홍경)과 쌍둥이 동생 은영(이상희)이 진우 앞에 나타나고, 평화롭던 일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현민은 진우를 따라 화천으로 내려와 성당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시를 가르친다. 진우의 쌍둥이 동생 은영은 자신의 딸을 맡긴 지 오 년 만에 소식도 없이 설을 데리고 가 평범하게 키우겠다고 말한다. 모두 버리고 찾아온 정말 먼 곳에는 불안한 관계가 뒤얽히고, 비밀을 감춘 이들 앞에 시련은 연이어 찾아온다.
역설과 짐작의 자리를 비워놓은 시 詩
고착된 언어로 규정된 정상성을 의도적으로 비트는 영화는 전작 〈한강에게〉처럼 서사가 시로, 시가 이미지로 전이하는 흐름을 택했다. 특히 호칭으로 고착화하는 인물의 역할 관계를 변주하는 방법으로 경계 밖 소수자의 삶과 인물의 관계성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만든다. 집 나간 며느리가 아닌 집 나간 서방이 돌아온다는 표현으로 남편 없이 홀로 가족을 부양했던 명순의 전사를 짐작할 수 있고, 은영의 아이를 자식처럼 키워온 진우가 아빠가 아닌 엄마인 이유는 성별 이분법적 관계를 답습하는 사고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현실과 관련 있다. 설이는 사실상 엄마의 위치를 담당했던 문경을 언니로 부르지만 정작 친모인 은영의 호칭을 따로 부여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진우와 특별한 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문경의 상황과 더불어 은영과 설이의 해소되지 않는 심리적 거리를 묘사한다. 이 가운데 영화는 아버지라는 단어만 남긴 채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부성의 존재를 제거한다. 극 중 유일한 ‘아버지’인 중만은 조용히 영화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일종의 관조자이자 삶을 먼저 겪은 세대로서 몇 안 되는 대사에 켜켜이 덮인 세월의 깨달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인 정상 가족의 해체와 성적 지향과 대척점에 선 가부장의 위계가 사라진 가족은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존재를 그저 받아들이는 이상적 형태를 띤다.
영화는 각자의 사정으로 얽힌 인물들이 하나의 유사 가족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명시적 표현으로 드러내기보다 관객이 개개인의 삶을 짐작하게끔 여백을 만들어 두었다. 여러 대사 없이도 상황과 이미지로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장면은 압축된 언어로 감정을 담아내는 시와 같다. 명순의 죽음을 가족들이 처음 알게 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차 안의 현민을 두고 멀리서 보이는 창문 밖의 모습으로 다른 가족의 반응을 지켜보기만 한다. 카메라와 인물, 그리고 인물과 인물은 서로를 그저 짐작하며 개입하지 않는다. 〈정말 먼 곳〉의 미덕은 언어가 주는 정신적 폭력에 사려 깊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성소수자를 향하는 편견과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대사는 들리지 않게 웅얼거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진우와 현민 역시 말없이 노려볼 따름이다. 자칫 또 다른 고통으로 느낄 영화적 재현을 지양하는 태도는 영화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매체에서 침묵이 주는 안도감은 이미 일상이 되어 지친 우리에게 무거운 숙제를 건넨다. 각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때 때로는 침묵과 직시가 답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는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되 조심스러운 접근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촉구한다.
언어보다 행위로 짐작해야 하는 영화에서는 배우의 작은 몸짓에도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특히 〈정말 먼 곳〉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섬세함이 인상적인 영화다. 특히 이상희 배우와 기도영 배우는 미세하게 변화하는 인물을 흡입력 있게 묘사한다. 앞서 언급한 문경과 은영의 태도와 설이와의 관계성을 영화는 손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필사적으로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는 문경은 마치 자신의 노동을 바쳐 원래의 궤도로 돌려놓으려는 듯 영화 내내 쉴 새 없이 손을 놀린다. 이에 반해 은영은 어디서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직접적인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진우와의 대화든, 양에게 먹이를 주는 동안이든 마찬가지다. 그의 수동적인 태도는 서울로 설을 데려가고자 마음먹었지만, 미처 친밀함을 쌓지도 못했던 지난 삶의 준비되지 않은 머뭇거림이다. 설을 연기한 김시하 배우가 주는 울림도 상당하다. 영화 후반 은영의 고백에 애써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듯 담담히 책을 읽어가는 설이의 목소리는 늘 천진난만했던 모습 한편에 못내 감추던 상처가 드러나 버린 가슴 아린 장면이다. 영화는 진우와 현민의 이야기를 중심 서사로 놓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을 수 있는 도경과 은영의 서사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은 배우에 있다. 장례식장에서 아웃팅을 하는 은영의 모습이 자칫 극적인 장치를 위한 작위적 흐름이 될 수 있었으나 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적절히 쌓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배우들의 호연으로 영화는 감정적인 호소나 극적인 장면 없이도 느리지만 긴장감 있는 서사를 관객에게 스민다.
현민이 영화 중반 낭송하는 시는 박은지 시인의 동명의 등단작을 인용했다. 둘의 관계가 모두에게 알려진 다음 이어지는 현민의 장면은 허탈함과 분노, 두려움 등 여러 감정을 가슴에 차곡히 억누르다 결국 짧은 시 한 편으로 겨우 내뱉을 수밖에 없던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잔잔한 바다를 뒤흔드는 큰 파동을 맞고 숨 고르기를 하는 듯 울리는 현민의 내레이션은 앞으로의 상황을 상상할수록 막막하고 공허하다. 영화의 주제를 요약해 놓은 시는 제목의 물리적 공간감으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무력한 내면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말한다. 진우는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먼 곳이라고 생각했던 공간마저 일상의 혐오로부터 안전하지 않았다. 생각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은 이상 ‘정말 먼 곳’에 왔다는 인식은 상상에 불과하며, 실은 아직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현실의 외로움과 무력감은 불안한 시어로 표현된다. 규정된 언어를 깨뜨리려는 현민의 수업에서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정작 현민의 언어는 그들에게 끝내 와 닿지 않는다. 그리고 무너지는 발밑을 바라보며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가깝고도 먼 풍경의 위력
언어를 양보한 자리에 채워진 풍경은 그 공백조차 느낄 수 없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정말 먼 곳〉의 배경이 된 화천의 자연은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복잡한 고민마저 작아지게 만든다. 과묵한 등장인물들만큼이나 담담한 풍광은 가족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더한다. 설이와 양들이 함께 거닐던 초원이나 진우와 현민의 사랑을 품어주는 새벽녘의 섬은 행복의 순간을 찬란하게 밝혀준다. 지형지물을 활용한 절묘한 인물 간의 구도는 여러 컷 분할 없이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가파른 절벽에 있는 목장의 들쑥날쑥한 들판은 인물의 시선과 관계를 설명한다. 롱테이크 장면에 고정된 배경은 연극의 한 장면처럼 인물의 움직임을 주목하며 시선을 따라간다. 저 멀리 느리게 흘러가는 장면 하나하나는 유달리 소중하다. 별다른 기교나 편집 없이도 와이드 스크린의 저 끝에서 반대편 사이를 무대 삼아 펼쳐지는 서사는 제한된 공간성으로 인물의 동선과 반응을 집중시킨다. 화천의 아름다운 풍경과 최소화한 카메라 움직임은 익숙지 않아 오히려 초현실적인 감상을 자아낸다. 죽었던 명순이 설과 만나는 장면이나 동트기 전 숲에서 사라졌던 설이를 데려오는 장면은 이질적인 풍경과 함께 묘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또한 무질서한 자연이 프레임 안에서 재배열되는 기적적인 장면들은 실제 감독도 예측할 수 없었다는 인터뷰 내용처럼 믿기 힘든 자연의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 디렉션이 불가능한 양들의 움직임을 멀리서 담은 장면들은 인물의 연기와 신기하게도 어우러진다.
의도하지 않은 경이로움은 영화 마지막 눈보라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출산을 앞둔 양을 보러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점차 거세지는 눈바람은 마지막 순간 관객을 압도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 삶이란 대개 눈보라에 가까웠다. 각자의 생활환경과 가치관, 여러 사정이 얽힌 이들에게 행복했던 일상은 잠시일 뿐 수없이 좌절하고 고통받는다. 위기는 때를 가리지 않으며 영화가 끝난다고 한들 여전히 남은 숙제는 산더미다. 진우는 사라진 현민을 찾아야 하고 은영은 설이와의 관계 형성을 위해 팔을 걷어 붙어야 한다. 목장에 남은 중만과 문경은 명순의 죽음 이후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삶의 끝에 죽음이 있듯 소멸의 자리에는 또 다른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가장 오래된 양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설은 영화의 마지막 이름처럼(雪) 눈을 이끌고 가장 어린 생명을 바라본다. 가족의 막내 설과 가장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눴던 이는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명순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설이의 눈을 보며 희망을 발견한다. 편견과 혐오의 사회에서 설은 꿋꿋이 성장할 것이고, 어떻게든 절망을 딛고 살아갈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기대와 함께.
이기적인 인간,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기대
〈정말 먼 곳〉은 할미 양의 죽음에서 시작해 새끼 양의 탄생으로 끝난다. 인간사에 오랫동안 함께 했던 양을 향해 선조들은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고, 그들은 신의 말씀으로 인간을 대신해 생을 다했다. 풍요와 희생의 의미를 모두 지닌 양은 인간과 닮아있다. 중만의 말처럼 양은 인간만큼이나 이기적이다. 다 함께 무리 지어 살아가지만 솔직한 눈빛 안에는 서늘한 진실이 숨겨있기도 한다. 영화의 마을 사람들은 진우에게 누구보다 따뜻하고 친절했지만 다름을 내보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등을 돌리는 냉혹한 이면을 지녔다. 또한 독립할 시기가 지났음에도 자식을 품에 두고 놓지 못하는 어미 양처럼 중만과 진우는 각자의 반경에 문경과 설이를 둔 채 떠나보내지 못한다. 중만은 문경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고, 진우는 차별이 일상인 사회에서 상처를 주기 싫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바깥세상에서 받은 공포를 나눠 짊어지고 싶은 이기적인 감정에 의해 거짓 이유를 대고,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기만의 공간에 자신을 가두었다. 마치 자유롭게 뛰노는 것처럼 보이는 양들에게 둘린 울타리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내몰린 사람들의 방어기제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까. 소위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한국 사회에서 받았을 고통을 짐작한다면, 고향을 떠나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중만과 명순, 그리고 배우자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진우에게 연고도 없는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중만의 혼잣말은 어미 양의 투명한 눈빛에 비친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선택은 달랐다. 현민의 입으로 들은 진실과 설이의 실종을 겪으며 진우는 외면했던 자신의 진심과 대면한다. 설이를 위한다고 여겼던 도피가 어쩌면 자신의 불안이며, 진우의 두려움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말이다. 목장을 떠나기 전날 밤 진우는 중만에게 불안 섞인 물음을 던진다. 이 세상의 끝으로 생각했던 이곳마저 벗어나야 한다는 복잡한 마음을 중만에게 털어놓지만, 사실 진우는 중만보다 먼저 답을 찾아낸 셈이다. 두 사람을 품어줄 ‘정말 먼 곳’은 이 세상에 없다. 더는 나아갈 수 없어 그렇게 믿기로 한 중만과 허상의 공간임을 깨달은 진우가 있을 뿐이다. 중만의 여정을 책임졌던 동력은 소진되었고 남은 선택지라고는 지금의 삶에 순응하며 존재하지 않는 곳을 그리워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진우는 나아가야만 한다. 그는 있지도 않은 곳을 찾기보다 남아있는 실체에 집중하기로 한다. 현민을 찾고, 설이를 돌보고, 세상 앞에 다시 위험한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그는 숨겨진 자연을 떠나 칠흑 같은 어둠으로 향한다. 그렇게 영화 속 모두는 한 칸씩 성장하고 있다.
오 년 전 진우가 정말 먼 곳을 찾을 수밖에 없던 그 심정을 떠올려본다. 폭력과 차별에 지치고 사람이 싫어 도망치듯 떠났던 참담함을 생각한다. 익숙함의 관성에 밀려난 평범한 인간의 일상에 대해 생각한다. 존재를 인정하지 못해 끝없이 밀어냈던 결과는 막다른 벼랑 앞이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그곳에서 떨어지고 만 사람들이 이번 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곁을 떠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어느 정치인은 원하는 사람들끼리 특화된 공간을 만들어 거기서 즐겨 보라고 말했다. 절망을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세상에 없는 정말 먼 곳을 만들어 쫓아보낸다. 그 시간에도 누군가는 일상이 '욕심이며 사치'인 사회에 견디지 못해 사라진다. 시 구절을 잠시 빌리자면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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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세 번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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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플로리다 프로젝트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1960년대 플로리다 올랜도에 테마파크를 건설한 디즈니의 프로젝트 이름이다. 디즈니랜드가 개장하자 주변에 많은 관광객이 몰려 숙박업이 성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이들 모텔은 집 잃은 빈민의 숙박하는 곳이 되었다. 둘째는 빈민을 구제하는 정부 보조금 사업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리고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자본과 국가가 담아내지 못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세 번째 의미를 펼쳐낸다.
어린아이 무디는 엄마 핼리와 함께 매직캐슬 모텔에 산다. 마찬가지로 모텔에 사는 친구 스쿠티와 어울리며 장난과 말썽의 경계를 분주히 오간다. 아직 계급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는 감정을 학습‧체화하지 못해 천진난만한 무디의 표정과 연보랏빛으로 예쁘게 칠해진 매직캐슬의 외양은 무디가 살아가는 공간이 아름다울 것만 같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자본의 폭력과 국가의 무관심이 상처 내지 못한 데가 남아 있음을 환기시키듯이.
그러나 환상은 오래가지 않는다. 천진한 무디에게도 자신의 계급을 분명히 인지해야 하는 순간, 즉 삶이 친구들과의 재미난 놀이로만 채워지는 게 아님을 깨달아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핼리는 누구보다도 일하고 싶다. 하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정부 보조금 수령 자격도 점차 위태로워진다. 믿고 의지하던 친구와 큰 싸움에 휘말린 후에는 그나마 의지할 곳도 사라져버린다.
물론 아직 바비가 남아 있기는 하다. 바비는 매직캐슬의 관리인이다. 매직캐슬은 여러 문제가 쉼 없이 발생하는 곳인 동시에 가난한 사람이 서로에 기대어 팍팍한 삶을 꾸려나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바비가 있다. 늘 방세를 독촉하며 거주자들을 윽박지르는 바비는 사실 제법 따뜻한 구석을 갖춘 남자다. 모텔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소아성애자를 쫓아내고, 알게 모르게 투숙객들을 배려하며,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도 눈감고 넘어가준다.
무디와 핼리의 위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완전히 끊긴 순간에 본격화된다. 부자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싸구려 향수를 팔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던 핼리는 그것만으로는 돈이 충분하지 않자 매직캐슬에서 성매매를 하기 시작한다. 핼리가 손님을 받을 때면 무디는 욕조에 거품을 풀어놓고 목욕을 한다. 작고 초라한 모텔방은 핼리에게 거주지이자 경제활동의 공간인 동시에 양육의 공간이다.
하지만 성매매는 매직캐슬이 허용할 수 있는 ‘일탈’의 범위를 넘어선다. 성매매가 발각되어 아동보호국에 무디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핼리.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찾아 헤맬 때는 보이지 않던 국가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등장해 무디를 빼앗는 데 자신의 힘을 선보인다. 권력기관은 자신의 권한을 휘두르는 데에는 민첩하지만 그 권한을 위임한 존재를 돕는 데는 지독히 게으르고 무능하다.
무디는 어린아이지만 이제 자신의 삶이 과거와 같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래서 눈물을 글썽이며 친구의 손을 잡고 ‘진짜’ 매직캐슬이 있는 곳, 디즈니랜드로 뛰어간다. 아직 더 놀고 싶다는 듯이, 매직캐슬에서의 행복을 연장하겠다는 듯이, 혹은 더 이상 행복한 일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무디와 핼리 그리고 이들이 대표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무디는 아마 위탁 가정을 전전할 것이다. ‘선의’로 무디를 돌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왜 무디가 이렇게 화가 나 있고 슬퍼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무디는 점점 엄마 핼리가 걸었던 길을 따라갈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일하지 않고 복지 예산을 축낸다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핼리가 낳은 무디가 다시 핼리로 성장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니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디즈니랜드가 제공하는 행복이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희생한 대가임을, 국가는 행복을 빼앗긴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별 관심이 없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꾸리는 방치된 자들은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음을 폭로한다. 친구와 꼭 잡은 채 해맑게 디즈니랜드로 뛰어 들어가는 무디의 뒷모습이 지독히 슬펐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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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뒤편에서 삼켜지는 감정들
말 뒤편에서 삼켜지는 감정들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비에 돌란 감독은 쉽게 형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영화를 찍어왔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언제나 인물이며, 그는 이야기보다도 인물에, 그리고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에 주목해왔다. 지금까지의 그가 인물들이 서로에게 내뱉는 말들의 충돌을 통해 그 감정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면, 이번 영화에서 그는 그것의 충돌보다도 인물이 내뱉는 말 뒤편의 감정을 좇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티아스와 막심>은 자비에 돌란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부드럽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여전히 스타일리시하고 영상미 있지만,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 절제하는 것이 분명히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연출 기법이 서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간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에 혹자에게 이 영화는 그의 전작들에 비해 전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감독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 영화에서 미학적인 의도로 찍은 장면은 베이 윈도우 뒤에서 마티아스와 막심이 키스를 하는 장면 하나뿐이며, 그는 영화 대부분의 장면을 온전히 인물의 심리에 따르며 찍었다. 핸드헬드 장면이 많은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마티아스와 막심>은 그의 영화 중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영화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임에도 이 영화에는 한 가지 튀는 부분이 있다. 바로 영화 출연을 부탁하는 친구 동생 에리카와 그의 친구다. 이들은 영화에서 마티아스와 막심 나이대의 다음 세대로 묘사된다. 이들은 프랑스어와 영어를 혼용해 쓰고, 리베트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그런 그들의 행동을 비꼬는 뉘앙스를 취한다. 두 세대의 언어 충돌은 퀘벡의 젊은 층에게 나타나는 영어에 대한 선호 변화를 실감하게 만든다. 성에 대한 인식 또한 마찬가지다. 에리카의 친구가 마티아스와 막심에게 "둘이 키스 해봤어요?"라며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고, 에리카가 둘에게 "오빠들은 여자야. 아니 남자일 수도 있지"라며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이들의 개방된 성, 젠더 인식에 대해 느끼게 한다. 특히나 "양식에 있어 인상주의적이면서도 표현주의적"이라는 말에 대해 질문하는 막심에게 에리카가 "오빠들 세대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지"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윗세대의 한계에 대한 아래 세대의 변화 가능한 발전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영화의 중심 서사와는 다소 동떨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지만, 퀘벡의 젊은 층에 나타나는 변화 양상을 날카롭게 나타낸 인상적인 부분이다.
" 클로즈업 준비됐어?"
친구 동생의 단편 영화에서 키스 씬을 찍은 뒤, 두 사람에게는 변화가 생긴다. 둘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한다. 이때 두드러지는 건 마티아스의 행동이다. 마티아스는 약혼자에게 자기라고 부르지 말라며 짜증을 내고, 단편 영화를 자신 없이 본 것에 대해 신경 쓰는 등 주변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또한 막심의 송별회를 잊었던 척하고, 게임 중 그가 사기를 쳤다고 시비를 거는 등 막심과 거리를 두며 배타적으로 행동한다. 막심은 그런 그의 행동을 신경 쓰고,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꾸 의식하게 된다. 두 사람의 다른 행동은 성격 탓도 있겠으나, 애초에 두 사람의 처지가 다른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마티아스는 로펌에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고, 승진과 약혼자와의 미래를 앞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에 반해 막심은 불안정하고 막막한 삶을 살고 있다. 2주 뒤 오스트레일리아로 돈을 벌러 떠날 예정이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엄마와 연락 두절인 형은 그에게 의지가 되지 않는다. 친구들과 마티아스의 엄마가 오히려 그의 안식처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혼란스러운 상황에 길을 잃는 것은 같다. 이른 아침 수영 중에 방향을 잃고 헤매던 마티아스가 숙소에 도착해 "길을 잃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런 두 사람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길 두려워하며 계속해서 막심을 밀어내던 마티아스는 결국 파티 도중에 막심에게 상처를 줄 말을 내뱉는다. 여기서 그는 막심을 점박이라고 부르는데, 내내 언급되지 않던 막심의 흉터가 유일하게 언급되는 장면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마티아스는 이내 다시 돌아온다. 그러고는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다른 친구에게 괜히 훈수를 두며 어색하게 막심 곁으로 갈 기회를 만든다. TV를 보고 있던 막심의 곁에 마티아스가 앉는 장면에서 Phosphores cent의 <Song For Zula>가 흘러나온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 들리기도 하는, 영화 전체를 요약한다고 할 만한 곡이다. 이날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때도 마티아스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길 겁낸다. 막심은 주말을 같이 보내자며 지금의 감정을 이해하고 싶다고 하지만, 마티아스는 이건 우리가 아니라며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음 장면에서 마티아스는 점멸하는 전구 밑에 서있다. 불이 들어왔다 안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전구는 친구 사이이면서 사랑 사이에도 놓인 두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티아스가 스위치를 건드리며 인트로에서도 들리던 전구를 켰다 끄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마티아스는 결국 전구를 끄고 장면은 암전 된다. 거래처 변호사 케빈과 바에 있던 마티아스는 그곳을 나와 어딘가로 뛰어간다. 하지만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괴로워한다. 막심은 다른 바에 있다. 그는 화장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반점을 가려본다. 거울에서는 상처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상처가 있다. 막심은 엄마의 집 앞에서 돌아온 형과 함께 즐거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여전히 두 사람은 길을 잃었으며, 목적지를 찾지 못한다.
출국 전날 막심은 마티아스의 엄마 프랑신에게 전남편 전화번호를 부탁해 연락을 취하고, 3주 전 마티아스의 메일로 보낸 상황이라는 답을 받는다. 마티아스의 진심을 다시 확인한 그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에게 서운했던 감정이 녹아내린 것일 수도, 이제 호주로 떠나기 때문일 수도, M과 M의 농장을 만들기엔 이미 완전히 늦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막심은 마티아스의 진심을 다시 확인했다. 짐을 다 챙기고 집 문을 연 그의 앞에 친구들이 보인다. 그중에는 마티아스도 있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간에 당장 두 사람의 목적지는 사랑보다 우정에 가깝다. 길을 잃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을 붙잡아주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길을 찾는다. 마티아스는 막심의 곁에, 막심은 마티아스의 곁에 여전히 남는다.
<마티아스와 막심>은 사랑에 대한 영화이며, 또한 우정에 대한 영화다. 실제로 자비에 돌란 감독은 20대 중후반에 만난 친구들을 캐스팅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준 친구들과 우정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마티아스와 막심>을 만들게 됐다고 밝힌 적이 있다. 마티아스와 막심을 비롯한 영화의 친구 무리는 때때로 서로를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지만,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챙기며 사랑을 베푼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준다. 어쨌든 영화는 우정에 가깝게 끝나지만, 만약 둘의 관계가 사랑으로 진전되다 해도 이들의 우정에는 별 영향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막심의 얼굴 흉터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받아들여진 것처럼.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영시코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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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2 / 안보면 후회 / 우리가 사춘기를 지나며 잃어버린 것들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인사이드 아웃 2"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캐스팅 소개에 1개, 엔드크레딧 후에 1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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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화란> 메인 예고편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옥이 되다 올가을 가장 깊고 강렬한 느와르 드라마? [화란] 메인 예고편 공개 10월 11일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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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소년심판> 티저 예고편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 그 나이에. 감히. 범죄를. 저질렀으니까. 《소년심판》 2월 25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