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4-03-05 21:02:07
진실의 그림자를 뒤쫓아 가다
<메이 디셈버> 리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 디셈버>. 5월과 12월이라는 제목이 왜 붙었는지 알게 되리라 생각하고 상영관에 입장했다. 그러나 5월과 12월의 간극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영화를 본 후에야 찾아볼 수 있었듯이, <메이 디셈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갇혀 있던 사건의 연보와 억눌렸던 생각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다름 아닌 배우가 캐릭터로 분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 커플의 이야기는 곧바로 관객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날씨는
좋고, 여유는 넘치고 집은 예쁘고 아이들은 신이 났다. 집
주인 부부의 나이 차가 유독 많이 난다는 특징 외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이 매끄러운 세계는 배우인 엘리자베스가 도착하면서부터 조금씩 뒤틀린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솜씨가 그 뒤틀림과 균열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창조한다.
열 네 살 소년 ‘조’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징역형을 살고 아이를 낳은 그레이시의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가 그녀를 연기하게 된다. 배역 준비를 위해 가족을 방문한 엘리자베스는 관찰을 시작하지만, 그레이시는
영화가 담아 낼 자신들의 삶의 단면, 즉 이야기로 만들어질 법한 일정한 시간 이외의 것은 공유하지 않으려
든다. 엘리자베스도, <메이 디셈버>를 보는 관객도 그녀와 그레이시가 캐릭터로서 닮아 가는 과정만큼이나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그들의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동기와 선택, 사건과 감정, 그리고
그 재연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메이 디셈버>는 단편적인 증언과 인물의 태도만 보여줄 뿐, 결코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를 직접 목격하게 하는 지름길로 가지 않는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진실을 파헤쳐 보려는, 형사들이 할 법한 이런 시도를 배우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선명해질수록,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엘리자베스는 캐릭터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진실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배역을 완성해가는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와의 관계에
균열을 내지만, 그것이 그레이시의 과거 중 정확히 어느 지점 때문인지 관객도, 엘리자베스도 알 수 없다. <메이 디셈버>는 영화와 배우만 할 수 있는 방식대로 그것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찾고 싶은 것,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의 궤적을 재현하고 또 재연해 보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보여 주는 사건들, 그 옳고 그름에 대해 자꾸만
고민하게 하는 문제를 연결하는 것은 결국 스크린 위에 그것을 배치해 둔 손길이다. 나탈리 포트만과 줄리안
무어의 대체 불가능한 에너지 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요소는 관객이 추리하고 긴장하게 하는, <메이
디셈버>만이 발휘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아 시사회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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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한 예술가의 답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를 만나기 전까지 이 예술가에 대해 전혀 몰랐다. 첫 사진집 ‘성적 의존의 발라드’는 물론, ‘아트 리뷰 파워 100’ 1위에 선정될 정도로 예술가들의 예술가라는 사실, 더 나아가 사진으로 억만장자 일가에 맞선 P.A.I.N.(처방 중독 즉각 개입) 활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일 등 낸 골딘은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든 장본인이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그녀가 이룬 결과물에만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 여느 예술가의 삶이 그렇듯 멋진 결과물 속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녀만의 투쟁 역사가 담겨 있다.
사진작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낸 골딘. 그녀는 2017년부터 시위 단체 P.A.I.N.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를 무분별하게 판매해 막대한 이득을 챙긴 제약 회사 퍼듀 파마, 이 회사를 소유한 새클러 가문과 그들의 기부금을 받아 운영해온 전 세계 대형 미술관을 향해 시위를 벌인다. 2017년 말, 오피오이드 중독에 빠졌다가 벗어난 낸 골딘은 자신과 동일한 위기에 처했던 이들과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한 이들의 가족을 위해 발벗고 나선다. 다큐는 그녀가 왜 이런 활동을 하는지, 아니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한 과거로의 여정을 소개한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은 낸 골딘 개인의 투쟁 역사는 물론, 가족 및 사회 시스템에 억눌린 개인의 투쟁 역사로 말할 수 있다. 이는 다큐의 구성 측면에서 쉽게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총 7개의 챕터로 나눠 낸 골딘의 과거사와 현재 시위 활동을 병치한다.
<시티즌 포> 등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은 먼저 챕터별로 그의 언니 바버라 홀러 골딘의 죽음, 위태로웠던 그녀의 유년시절, 1970년대 초 예술가 친구들과 이룬 공동체 삶, 언더그라운드 문화, 첫 번째 사진집인 ‘성적 의존의 발라드’ 이야기, 이후 성공과 나락에 빠진 삶의 굴곡 등을 다룬다. 그녀가 갖고 있거나 직접 찍은 사진을 슬라이드 쇼 형식으로 구성, 어느 덧 노년의 시기에 접어든 낸 골딘의 내레이션으로 각 사진에 담긴 이야기와 그 안에 숨겨진 개인사를 소개한다.
‘꼬꼬무’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그녀의 처절하고도 투쟁적인 개인사는 그 자체로 흡입력이 대단하다. 불안한 가정 환경, 여성으로서, 여성 사진 작가로서, 그리고 성적 소수자로서 겪는 사회적 편견은 그녀를 매번 시험에 들게 하는데, 오히려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요인으로서도 작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사진 작가로서 가감 없이 성적소수자 공동체, 에로티시즘, 에이즈, 약물 중독 등 그 누구도 담지 않은 당시 사회의 민낯을 찍은 작품은 기록물로서 예술로서 그 가치를 입증한다.
이처럼 각 챕터별 소개되는 그녀의 개인사는 현 시점에서 벌이는 그녀의 저항 운동에 당위성을 제공한다. 처방을 받았을 뿐인데, 약물에 중독된 낸 골딘은 또 한 번 개인으로서 사회적 불합리함에 희생양이 된 것. 자신이 처한 삶을 오롯이 카메라에 담으며 투쟁을 벌인 그녀에게 이 사건은 개인으로서 예술가로서 또 한 번 저항 운동의 중심에 서게 한다. 그리고 가열차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퍼듀 파마와 새클러 가문에 반기를 들고 투쟁을 이어가는 그녀는 대형 미술관들의 새클러 가문 기부금 거부 선언을 이끌고, 새클러 가문이 피해자들을 향해 진정한 용서를 하게 만든다.
삶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삶의 기억을 견디는 것은 어렵다. 이야기와 달리 삶의 경험은 악취가 있고 추잡하며 단순한 결말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시작을 알리는 낸 골딘의 이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나 다름없다. 이 작품이 극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기억을 담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바로 이 말을 온전히 실천하고 싶은 그의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용감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낸과 같은 사람은 결코 만난 적이 없다”는 로라 포이트라스 감독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새클러 가문을 향한 시위 운동에서 그리고 이 모든 걸 담은 다큐를 통해 실행으로 옮겼다. 마치 이야기를 직조하는 게 아닌 있는 시궁창 같은 삶이라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은 것처럼 그녀는 용기있게 피하지 않고, 또 한 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제79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빛나는 이 영화가 지닌 의미는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끼’ 또는 ‘한 개인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한 예술가의 진솔한 답을 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뒷걸음치지 않고, 세상이 보낸 수많은 공격을 온 몸을 다 받아내면서 끝내 자신만의 셔터를 누르는 그녀의 강단과 집념. 거대한 사회 시스템 앞에 개인의 힘이 무력화되는 현 시점에서 예술가가 지녀야 하는 마음과 용기, 그리고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가진 의미는 더 크게 다가온다. 노년의 예술가이자 운동가인 큰 누님의 가르침을 받아 저마다 개개인의 투쟁을 시작해보자. 그것도 아름답게!
사진제공: 찬란 제공
평점: 4.0 /5.0
한줄평: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한 예술가의 답변
*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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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프랑스] 남성적 시선으로부터 탈주하는 클레오의 도시 산책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초기 연출작으로, 여성해방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2차 페미니즘 물결을 통과하는 시기에 만들어졌다. 바르다는 ‘클레오’를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 여성의 정체성 찾기에 골몰했다. 영화는 젊고 아름다운, 나름 가수로서도 성공한 여성인 ‘클레오’가 암 진단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와 더불어 그의 내면의 변화를 보여준다. 로라 멀비가 대부분의 서사 영화 구조 속에서 여성은 수동적인 볼거리로서의 기능만을 한다고 지적한 바와 달리, 영화는 젊은 여성 주인공 클레오의 ‘시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면서 그녀의 삶과 주체성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다.
1.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클레오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제목 그대로 오후 5시에서 오후 7시 사이, 90여 분에 걸친 클레오(코린 마르샹, Corinne Marchand)의 시공간 이동과 대도시 산책을 13개의 장별 구성으로 펼쳐낸다. 이 과정을 통한 내러티브의 방향성은 대상으로서 정체성에 몰입했던 클레오가 주체로 변이생성 해나가는 탈주의 과정이기도 하다. 클레오의 시공간 이동은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도피하고픈 욕구로부터 발생된다. 젊고 아름다운 스타 가수란 정체성을 즐기며 화려한 삶을 누리던 클레오에게 불현듯 다가온 ‘죽음(암)’에 대한 공포는 존재론적 고뇌를 촉발하는 극적 동기로 작용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나타나는 주요 응시 대상은 클레오가 뽑는 9장의 타로 카드들이다. 각각 ‘클레오’라는 인물의 과거-현재-미래를 나타내는 이 카드들은 그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전에 관객들에게 클레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마치 예언처럼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래를 상징하는 카드들은 그에게 암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유발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이때 등장하는 해골카드를 클레오가 보고 절망에 빠지자 점술가는 이 카드가 꼭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하는데, 이를 대상으로서만 살아가던 클레오가 주체로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기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점괘를 안고 점집을 나선 클레오는 건물 출구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면서, ‘추함이야말로 죽음을 의미하며,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한 나는 살아있다’는 자기주술성 위로로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러나 양 벽면에 걸린 거울이 서로를 비추면서 무한대로 분열되는 그의 이미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얻게 되는 존재론적 고뇌가 현재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을 것임을 암시한다.
거리로 나선 클레오는 모든 이들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 자신에게 꽂히는 그러한 타인들의 시선을 클레오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매니저 앙젤르는 ‘아파 보이냐’는 그의 질문에 ‘아름답다’는 답변을 할 뿐이다. 이때 클레오는 또다시 뒤돌아 거울을 바라본다. 앙젤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눈물을 흘리는 클레오를 보며, 그의 절망이 단지 ‘호들갑’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앙젤르가 볼 때 클레오는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어린아이’로,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대상이다. 존 버거가 말한 것과 같이, 클레오는 앙젤르로 대표되고 있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규율과 질서의 통제를 받는 인물인 것이다. (영화 속 앙젤르는 여성이지만, 남편을 잃은 과부로서 클레오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소유 및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앙젤르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규율과 이데올로기를 상당히 내면화한 인물로 나타난다. 이러한 그의 집착은 영화 전반부를 중심으로 잘 드러난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쇼윈도에 놓인 모자를 보고 방문한 모자 가게에서도 클레오는 도처에 놓인 거울들에 비친 새 모자를 쓴 자신의 이미지 보기를 반복한다. 이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면서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 보는 수단이기도 하다. 갖가지 모자를 써 보면서 스스로의 아름다운 외모에 도취하던 클레오는 결국 여름철에 맞지 않는 검은 털 모자를 구매해 쓰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이내 ‘화요일에는 새 옷을 입으면 불운이 생긴다’는 미신을 믿는 앙젤르에 의해 제지당한다. 연이어 가부장적 운명론에 집착하는 앙젤르에 의해 두 사람은 운수 없는 차 번호를 피해, 드물게 존재하는 여성 기사의 택시에 탑승하게 된다. 그러나 택시에 탑승함으로써 거리의 수많은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것 같아 보였던 클레오는 차량 속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시선들의 대상이 된다. 이동 중에도 차창 밖의 행인들의 시선과 옆 차선 차량을 운전하는 남성들의 희롱을 겪은 클레오는 심지어는 창밖으로 마주한 아프리카의 원시적인 가면으로부터도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 그는 문득 거북함을 호소한다. 한편, 남성 지배적인 택시 업계에서 여성으로서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밤거리도 두렵지 않다며 용감한 투쟁담을 들려주는 이 여성 택시기사와의 동행에서 클레오는 여성의 직업에 대한 일종의 성정치학적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 또한 이후 펼쳐질 클레오의 전복적인 산책 여정을 예고해 주는 내러티브 기호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한 클레오는 애인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을 느끼면서도 신체 가꾸기를 위한 스트레칭을 한다. 속옷 차림으로 스트레칭을 하는 그에게 앙젤르는 길고 화려한 털로 꾸며진 아름다운 실내가운을 입힌다. 스트레칭을 마친 클레오는 이내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아름답기에 사랑받는 여자’라는 관습적 내면화를 보여주는 반복적인 신체 움직임으로, 닫힌 틀에 갇힌 자아 대상화에 불과하다. 연이은 장면에서는 ‘남자는 아픈 여자를 싫어하니까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말라’는 앙젤르의 충고가 클레오에게 전해진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야 할 공간인 집/침실에서마저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위해 꾸밈노동을 해야 하는,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음이 계속해서 영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스타 가수이자 부유한 애인을 가진 클레오의 일상을 지배하는 행위는 거울 속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다. 영화 속에서 거울은 가부장적 조직과 규제 속에서 훈련된 클레오의 행위가 정체성으로 재현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버거가 말한 바와 같이, 클레오의 자아는 감시자로서의 자아와 감시당하는 자아라는 두 개의 항으로 찢어져 거울 보기의 행위를 반복하면서 타인에게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다음 장인 5장에서, 클레오는 사업 일로 바쁘기에 잠시 들렸다 가는 연인과 의례적인 만남을 갖는다. 연인에게 영화 <돈주앙>을 보러 나가는 데이트를 조르기도 하지만, 그는 ‘나의 여신 클레오파트라’, ‘나의 보석’이란 찬사를 클레오에게 퍼붓고 곧 떠날 뿐이며, 아프다는 클레오의 말에 ‘고운 몸에 병이 나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고통을 ‘괜한 걱정’ 따위로 치부해 버린다. 이후 노래 연습을 위해 방문한 두 친구 역시 클레오의 병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우스꽝스러운 장난을 치면서 클레오 갈등을 빚는다.
이후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클레오가 <당신 없이(Sans Toi)>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당신 없이는 나는 빈 껍질이에요”라는 가사를 통해 타인의 시선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는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클레오를 떠올릴 수 있다. 이렇듯 애인의 태도와 자신을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클레오가 절망적인 피로감을 느끼게 되면서, 아름다움만이 자신의 가치이고, 남성으로부터 사랑받는 여성이므로 자신은 행복하다고 믿었던 그녀의 정체성에 균열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강박적 욕망으로부터 탈주 충동을 느낀 클레오는 이제 지금껏 스스로를 옥죄어왔던 가발과 온갖 치장을 벗어던진다. 화려하게 장식된 흰 실내가운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검은 원피스로 갈아입은 그는 앙젤르의 경고를 무시하고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털모자를 쓴 채 홀로 집을 나선다.
2. 보는 주체로서의 플로랑스
다시 거리로 나선 클레오는 여전히 도시 사람들의 시선이 가닿는 대상이다. 하지만 이때 클레오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변화가 포착된다. 홀로 거리에 나선 클레오는 중국음식점 외부에 걸린 거울 앞에 서는데, 전반부와 대비되는 태도와 독백으로 자신의 이미지 투영에 직면한다.
“표정 없는 얼굴, 바보 같은 모자…”
그의 독백은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반복되어온 아름다움에 고착된 대상화된 정체성을 전복시키기 시작한다. 이런 전복은 보여지는 대상에서 세상과 자신을 보는 주체로 생성하기 시작하는 산책 여정으로 급진전된다.
이제 그는 ‘스타가수 클레오’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파리라는 도시의 군중 중 하나, 즉 ‘익명의 존재’로서 도시 이곳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클레오는 산 채로 개구리를 삼키는 신기하지만 끔찍스러운 마술쇼를 구경하기도 하고, 사람이 붐비는 카페에서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을 관찰하기도 하면서, 익명의 군중 속에서 신체의 충동을 따라가며 산책하는 ‘탐사자’로 변화해나간다.
이전까지는 마치 그의 모습을 관음 하듯이 촬영했던 카메라의 시점은 이제 여성이자 주체인 클레오의 시선으로 바뀌어 촬영된다. 그는 여전히 시선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동등한 인격체로서 다른 이들을 관찰하는(따라서 때로는 시선이 부딪히며 눈을 마주치기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클레오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조각 작업실로 향한다. 이곳에서도 클레오는 작업을 하는 조각가들과 조각품들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관찰을 멈추지 않는다. 친구는 조각실에서 누드 모델 일을 하는 중인데, 지금까지 줄곧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왔던 클레오가 이제는 ‘보는’ 입장에서 누드 모델, 즉 대상으로 서 있는 친구를 관찰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일을 마치고 클레르는 친구와 같이 거리를 걸으며 신체와 일상, 그리고 자신이 직면한 병과 죽음, 불안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친구는 누드모델 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휴면상태와 같으며, 조각가들은 그저 형태와 아이디어로 자신의 신체를 보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신체 주체성을 토로한다. 여성의 신체를 대하는 가부장적 통념과 시선을 전복시키는 이런 경험은 점술가의 예언이나 앙젤르의 충고와 같은 운명적 틀에 갇혀있던 클레오에게 주체-되기의 계기로 다가온다.
친구가 헤어진 후, 뚜렷한 목적지 없이 거리를 방황하던 클레오는 홀로 몽수리 공원에 들어선다. 보는 이 없는 한적한 공원을 산책하는 클레오는 휘파람을 불면서 자신의 신체와 세상의 관계를 즉흥적으로 노래한다.
아름답고 변덕스런 나의 몸/ 새파란 나의 눈은/ 한번 보면 빠져들어/ 나의 매혹적인 모습은/ 포기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유혹/ 모두들 궁금해하지 내 매력과 미소를
이렇게 터져 나오는 노랫말은 보여지는 대상에서 자신의 신체를 관찰하며 걷고 보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 연출해 내는 즉흥극이기도 하다. 여기서 스스로의 신체를 관찰하는 클레오의 자아는 존 버거가 이야기한 여성의 분리된 두 자아 중 감시하는 자아, 즉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한 것과는 다르다. 클레오의 이러한 자기 응시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여부에 두었다기보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또한 이렇듯 능동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탐색자의 역할을 수행해나가는 클레오를 통해, 영화는 ‘보는’ 행위의 쾌락이 능동적인/남성과 수동적인/여성으로 쪼개진다고 본 로라 멀비의 이론이 다소 이분법적인 구분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대상이었던 여성이 한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일종의 ‘여성적 시선’을 제시한다. 이러한 영화 속에서 관객들은 주체로서의 남성이나 객체로서의 여성보다는 주체되기를 선택한 여성의 시선에 몰입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연의 소리와 풍경을 만끽하며 홀로 걷고 있던 클레오에게 ‘앙투완’이라는 남자가 그녀를 ‘여름날 여신(Flora)’이라고 칭송하며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한다. 환대 없는 어색한 상태에서 시작된 둘의 관계는 이내 죽음에 대한 불안감 공유로 소통이 가능해진다. 클레오는 암을 진단받을지도 모르는 불안을, 앙투완은 알제리전 참전 중 나오게 된 휴가의 마지막 날, 전쟁 중 닥쳐올지 모를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토로한다.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며 소통하게 된 타자와의 만남은 클레오에게 잊었던 기억의 ‘체현’, 즉 잠재된 주체성의 발현을 촉발하는 동기로 작동한다.
클레오는 ‘클레오파트라’에서 따온 스타 가수로서의 가명 대신 자신의 본명 ‘플로랑스Florence’(플로랑스는 꽃의 신 ‘플로라Flora’로부터 유래한 이름으로, 꽃처럼 피어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를 기억해 낸다. 거울 틀 속에 갇혀 보여지는 대상에 머물던 클레오가 플로랑스라는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은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 혹은 거리 군중의 시선에 조응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이 일상과 전쟁, 개인적 삶과 사회적 정치의 공존은 ‘클레오→플로랑스’라는 변화, 즉 보여지는 대상에서 보는 주체로의 변이생성을 충동하는 ‘산책의 변증법’(산책하는 한 존재가 거리에서 군중과 만나며 변화하는 모습을 벤야민은 ‘산책의 변증법’으로 설명해낸다.)을 드러내준다.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은 플로랑스는 가부장적 운명론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처음으로 자신만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3. 경계 밖을 사유하는 산책의 여정
아름다운 스타 가수인 클레오가 익명의 군중 속에 떠도는 플로랑스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거울이라는 틀 속에 갇힌 대상에서, 그 틀을 깨고 탈주하는 주체의 회복이자 생성이라는 점에서 극적 대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여성 이미지를 구축해온 성차별적 영화 관습에 전복적인 이미지 재현을 달성해낸다. 1961년, 여성들이 처한 삶의 영역과 조건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었던 제2 물결 페미니즘(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어 서구세계 전체로 퍼진 여성주의 운동으로, 제1세대 여성주의가 여성 참정권을 비롯하여 제도적 성평등에 집중한 데 비하여, 제2세대 여성주의는 섹슈얼리티, 가족, 재생산 권리, 불평등 등으로 담론 범위를 넓혔다.)이 막 태동하던 시기 세상에 나온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사회적인 표상으로서의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존재론적 고뇌를 겪는 한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이야기다.
그것은 ‘성녀와 창녀’ 혹은 ‘숭배와 강간’으로 상징되는 틀을 깨고 여성 주체가 생성하는 또 다른 시공간을 찾아 나선 산책의 여정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발표된 지 약 반세기가 흐른 현재, 여전히 영화계 내에서 여성은 물신화된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며 ‘여성으로서의 여성’은 대부분 부재하는 상황에서 이렇듯 클레오가 가지는 주체로서의 여성 이미지 서사는 젠더적 관점에서 주목해 볼 만한 쟁점을 가진다. 관습적 세상의 틀로부터 탈주하면서 현실의 변화를 사유하고 스스로 실천해 내는 클레오의 그러한 산책 여정은 현실과 공존하는 영화적 시공간의 기능을 증명해 내는 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변재란, 「아녜스 바르다, 여성의 역사, 영화의 실천」,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8권 2호, 순천향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9, 121-142쪽.
유지나, 「대상에서 주체로의 변이생성 연구: <5시에서 7시까지 클레오>를 중심으로」, 『씨네포럼』, Vol.0 No.34, 동국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2019, 9-30쪽.
Berger, John, 「다른 방식으로 보기」, 최민 옮김, 열화당, 2012.
Laura Mulvey, Visual and Other Pleasures, Basingstoke: Macmillan, 1989, 16p.(쇼히니 초두리, 「페미니즘 영화이론」, 노지승 옮김, 앨피, 2012, 67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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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에 관한 농담 ‘위 아 40’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인 시인 캐시 박 홍은 처음 시를 쓸 때 자신의 정체성 떨쳐내며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데뷔 이후 무슨 글을 쓰든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과 시 쓰기 사이의 거리에서 절망을 느끼던 중 스탠딩 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어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리처드 프라이어는 흑인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그것을 코미디의 재료로 삼은 최초의 코미디언이다. 시인과 달리 코미디언은 정체성이 없는 척할 수가 없다. 프라이어는 자신의 인종적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기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백인 청중들을 당황시키며 웃기기도 한다. 그러나 프라이어의 공연을 필사한 캐시 박 홍은 프라이어의 말을 글로 적으니 그다지 우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프라이어의 익살스러운 이야기 전달 방식이 빠지고 나니, 유머라는 용해제는 증발하고 분노의 소금기만 남은 것처럼 그의 말이 거칠고 둔탁하게 느껴졌다.’
40살에 갑자기 비트를 만나 랩을 하게 된 한물간 극작가의 이야기, 영화 <위 아 40>도 한 편의 스탠딩 코미디 같다. 한때는 30세 이하 30인의 극작가 상을 받을 정도로 주목받았지만 지금 라다를 둘러싼 것은 이런 것들이다. 방음 안 되는 벽 너머 들리는 신음 소리, 창문 밖 노숙자의 볼일 보는 모습을 맞닥뜨리며 시작하는 아침, 체중 때문에 달고 사는 다이어트 음료, 그리고 10년 전 멈춘 라다의 경력을 무시하거나 추파를 던지는 학생들. 여기서 벗어나려면 극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유명한 백인 제작자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흑인의 빈곤 포르노를 상업화하려는 백인 제작자를 들이받고 온 날, 라다는 엉엉 울다 갑자기 창밖에서 들리는 랩 비트에 맞춰 신들린 듯 랩을 내뱉기 시작한다.
나이 40이 되도록 여전히 집세 내기도 빠듯하고 겨우 닿은 기회마저 망쳐버렸는데 갑자기 랩까지 한다. 이쯤에서 나는 이런 결말을 쉽게 상상한다. 라다가 랩으로 인정받고 성공해서 제2의 인생을 사는 이야기. 아니면 <백 엔의 사랑>의 이치코가 서른에 갑자기 프로 복싱 선수에 도전했듯 극작가는 때려치우고 적어도 랩으로 끝장을 보는 이야기. 그러나 영화가 감독이자 주연인 라다 블랭크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라다 블랭크는 마치 비트라는 용해제를 사용해 스스로에 대해 농담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생리는 왜 안 터져?’로 시작하는 라다의 랩은 웃기고도 슬프다. 늘 종아리는 쑤시고 오줌은 자꾸 마렵고 10시만 되면 피곤해 쓰러지는 데다가 젊은 애들이 노인 취급한다. 라다는 ‘이게 40살 인생’이라고 외친다. 흑인이 성공하려면 빈곤 포르노를 팔아야 한다며 인종주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도, 나중에는 적당히 타협한 스스로를 셀프 디스 하는 것도 랩을 통해서다. 라다에게 랩은 제작자의 검열 없이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극작가를 하며 맛보지 못한 쾌감이다. 라다를 둘러싼 찌질한 상황과 스스로에 대한 농담이 웃길지언정, 전혀 우습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라다를 지켜보고 있자면 다시 <마이너 필링스>의 캐시 박 홍이 떠오른다. 캐시 박 홍은 프라이어의 공연을 접한 후로 시 낭독회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항상 강연장에서 자신이 유일한 아시안이 아닌 척해왔는데, 사람들이 늘 자신을 아시아인 정체성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이왕이면 내가 유일한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큰 목소리로 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내 농담을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기왕 망하는 거, 내 삶에 관해 농담하면서 장렬하게 망하고 싶었다.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하다가 실패하고 싶었다.’
라다 또한 자기 자신에 관해 농담하면서 망하길 택한다. 영화 내내 라다와 친구 아치는 40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40대에는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냐고, 비주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내게도 ‘40’이라는 숫자와 관련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40살엔 꼭 자가용 몰아야지. 그때는 돈 좀 만지고 빠듯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기 암시이자 소망이다. 설마 40살의 내가 나를 가난하게 내버려 둘까 싶어 그때까지만 시간을 보류하기로 한다. 그때는 뭔가 달라야만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그러나 영화는 나를 보란 듯이 비웃고 40살의 라다에게 어떠한 매듭도 지어주지 않는다. 라다는 꿈에 그리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상황을 바로잡는다. 멈췄던 라다의 랩은 다시 시작된다. “네 목소리를 찾아.” 믹스 테이프도, 반짝이는 성공도 없다. 40살의 라다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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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비딸 | 영악한 이 영화가 반가우면서도 아쉬운 이유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댄스 열정을 불태우는 사춘기 딸 ‘수아’(최유리)와 함께 티격태격 일상을 보내는 맹수 전문 사육사 ‘정환’(조정석). 아침부터 수아의 생일 파티를 열던 정환은 창밖으로 동네 주민들이 과격한 스킨십을 하는 기괴한 장면을 본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던 정환은 그들이 서로를 깨물고 잡아먹는 모습을 본 후에야 좀비 바이러스의 존재를 깨닫고, 수아와 함께 서울에서 탈출해 어머니 '밤순'(이정은)이 사는 바닷가 마을 '은봉리'로 향한다.
하지만 탈출의 기쁨도 잠시, 정환은 수아가 좀비에게 물린 사실을 발견한다. 감염자를 색출해서 사살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환은 고뇌에 빠지지만, 딸을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감염 후에도 수아가 어렴풋이 사람 말을 알아듣고, 평소 좋아하던 춤과 음식에 반응했기 때문. 이에 정환은 호랑이 사육사로서의 경험을 살리고, 동네 친구 '동배'(윤경호)의 도움을 받아 좀비가 된 딸의 사회화 훈련을 시작한다.
공식은 이렇게 쓰는 거야
한국 코미디 영화는 모두가 아는 맛인 경우가 많다. 초반부는 기발한 설정으로 웃음을 자아내고, 후반부는 주인공들의 사연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면서 눈물을 자아내는 공식에서 대부분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근래에는 예외인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 이병헌 감독의 최대 흥행작 <극한직업>이나 예상외의 흥행을 기록했던 <핸섬보이즈> 등은 '선 웃음 후 신파'라는 공식을 탈피하면서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동명의 네이버 웹툰을 영화화한 <좀비딸>은 새로운 흐름보다는 기존 공식에 충실하다. 갑작스러운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한 아버지는 좀비에 물린 딸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초반부는 좀비로 변해버린 딸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일어날법한 여러 소동극으로 가득하다. 중반부부터는 그토록 아빠가 딸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밝혀지면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7번방의 선물>과 유사한 구조의 코미디다.
따라서 <좀비딸>은 자칫 무난한 공산품 같은 코미디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좀비 영화를 더한 것도 별 도움은 못 될 뻔했다. <좀비딸>의 세계관과 설정은 좀비 영화의 기존 클리셰를 답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비딸>은 영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악하기까지 하다. 두 장르 모두 간과하던 '제삼자'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국형 코미디와 좀비 영화 클리셰의 장점만을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퇴장하지 않는 감염자
<좀비딸>의 세계관은 절대 낯설지 않다. <부산행>, <월드워Z>, <28년 후> 등에서 자주 접한 좀비 아포칼립스 그대로이니까.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들이 출몰했다는 것, 좀비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는 등 준전시 상태가 닥쳤다는 점, 좀비 바이러스를 제거할 수 있는 치료제가 임상실험을 앞두고 있다는 점까지. 전형적인 좀비 영화의 흐름에 충실하다.
단 한 가지가 다르다. 바로 감염자를 다루는 태도다. 일반적으로 좀비 영화에서 감염자는 철저히 주인공을 위기에 빠트리는 도구다. 설령 주인공이라 해도 감염자가 되는 순간에는 남은 캐릭터를 위한 제삼자로 위치가 그 즉시 바뀐다. 좀비에게 물린 즉시 그는 감정선을 자극하는 도구로써 소비된다. <부산행>에서 공유와 마동석이 감염되자마자 각각 딸과 아내와의 관계성에 방점을 찍어주면서 퇴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에 반해 <좀비딸>은 감염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좀비로 변한 수아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정환의 부성애를 드러내는 단순한 스토리텔링과는 다른, 더 세련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정환이 맹수 사육사라는 직업 특성을 살려 수아를 교육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돕는 과정에서는 부녀지간의 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좀비딸>은 이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좀비 영화 분위기는 살리되, 색다른 장르와 내용을 펼쳐 보일 기회로써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실제로 <좀비딸>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영웅적인 이야기에 가려져서 미처 보이지 않았던 감염자와 감염자 가족의 이야기를 펼칠 충분한 공간과 시간을 확보한다. 좀비 영화에서 빠지지 않던 액션과 스릴러 없이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로만 러닝타임을 채워도 영화가 안 허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뻔한 코미디 공식을 낯설게 만드는 법
예상 못 한 인물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좀비딸>의 화법은 코미디를 만드는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좀비딸>에서 유머는 예상과 달리 정환과 수아 외의 인물들이 담당한다. 좀비들 사이에서 좀비 흉내를 내는 장면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코미디는 제삼자가 정환과 수아 부녀 사이에 끼어드는 순간 터져 나온다. 예를 들어 밤순이 효자손을 들고 좀비로 변한 손녀를 '참교육'하는 순간, 영화는 급격히 좀비 영화에서 코미디로 전환된다.
그 이후로도 <좀비딸>은 여러 제삼자를 차례대로 투입하면서 다양한 코미디를 보여준다. 일례로 정환의 동네 친구인 동배는 수아의 사회화 교육을 돕는 동안 수아에게 물릴 뻔한 위기를 겪으며 웃음을 자아낸다. 그다음은 정환의 첫사랑인 '연화'(조여정) 순서다. 일정 수준 사회화가 이뤄진 수아는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에 출석해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체육 수업을 듣는데, 이 시간은 여러 슬랩스틱으로 가득하다.
중요한 것은 제삼자들이 등장하는 순서다. 그들은 수아가 다시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정환의 말을 믿는 정도가 높은 순서대로 투입된다. 즉, <좀비딸>은 수아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는 이야기인 셈이다. 상대적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수아가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정환이 좀비가 된 딸을 훈련하기로 결심한 이유와 그의 과거사도 본격적으로 제시된다.
이를 통해 <좀비딸>은 '선 웃음 후 신파'라는 공식에 딱 들어맞는 환경을 영리하게 조성한다. 불신 가득한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숨겼던 개인사를 공개하는 장면이 눈물을 자아내면서 코미디 장르가 유려하게 신파로 전환되는 것. 놀이공원 시퀀스처럼 수아의 정체가 발각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위기 장면을 한 차례 비트는 연출이 더해진 덕분에 신파로의 전환은 더 자연스럽고, 공식 그대로인 전개도 뻔하지 않은 느낌을 줄 수 있다.
관객이라는 제삼자
더 나아가 제삼자의 존재감은 <좀비딸>의 신파에 깃든 사회적 함의도 부각한다. 정환의 부성애가 애틋한 것과 별개로, 좀비로 변한 딸을 숨기고 훈련하기로 한 정환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반사회적인 선택이다. 만약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는 해악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 이렇게 본다면 <좀비딸>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과 사회의 질서와 안전이 충돌할 때 어느 공익을 우선시하는 게 바람직한지 묻는 영화다.
<좀비딸>은 이 질문을 제삼자에게 순서대로 묻고, 그들은 각자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할머니는 가족이라서, 경호는 친구라서 정환의 선택을 지지한다. 반면에 좀비로 변한 연인에게 공격당한 기억이 있는 여정은 수아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환을 믿지 않는다. 사살 명령을 받은 군인들 역시 수아가 말할 수 있다는 걸 보기 전까지는 총구를 내리지 않는다.
이 연쇄 덕분에 <좀비딸>은 관객에게도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이때 현실과 영화의 틈은 관객을 괴롭게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사회 질서를 우선해야 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팬데믹 초창기에 정부는 감염자 동선을 공개했고, 감염자가 많았던 특정 지역을 사실상 봉쇄한 전례도 있다. 하지만 정환에게 공감하고 눈물을 흘릴수록 그의 선택을 비난하기는 어려워지고, 또 이전의 합의가 옳다고 말하기도 힘들어진다.
영악한 선택과 집중
바로 이 대목에서 <좀비딸>의 신파는 이른바 '공업적 최루탄 신파'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손에 쥔다. 익숙한 장르적 설정, 관습, 공식을 영리하게 활용하여 설계한 구조가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포섭한 덕분에 두 공리의 충돌과 딜레마를 고찰하게 만드는 힘이 정환의 눈물에 깃들기 때문이다. 제3의 역할과 인물을 연쇄적으로 강조한 <좀비딸>의 스토리텔링에 영리하다는 호평이 아깝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좀비딸>의 가능성은 곧 한계이기도 하다. 메시지와 담론의 층위를 더 깊이 만들 기회를 잡은 순간, 그 기회를 살릴 용기의 부재가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정환의 선택을 온전히 긍정하기 어렵다. 팬데믹 때도 한국이 다른 서구권 선진국들에 비해 정부 주도의 권위주의적 방역 정책을 취한 만큼,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에 둬야 한다는 정환의 소신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질 공산이 크다.
이를 고려해서인지는 몰라도 <좀비딸>은 질문을 던지되, 그 파급력을 축소하려 든다. 현실감이 느껴질수록 정환의 부성애보다는 그가 일으킬 사회적 여파를 필연적으로 고려하게 될 테니, 애초에 그 상황을 조성하지 않으려 한다. 현실적이고 논쟁적인 사회적 담론에 발은 걸치되, 그에 대해 확실한 답을 제시할 자신감까지는 없었던 셈이다.
매력적인 균형감
하지만 <좀비딸>은 영악하다. 복어독을 다룰 자신이 없으면 복어에 아예 손을 대지 않아야 하듯이, 가능성을 현실화할 자신은 없으니 철저히 한계를 가리는 데에 집중한다. 작품의 완성도는 아쉬워지더라도 상업영화로서는 안정된 선택만 골라 한다. 일례로 응봉리 바깥세상의 상황은 수아 친부가 등장해 위기가 고조되기 전까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좀비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을 둘러싼 사회적 대립과 갈등도 정환의 슬픔과 피로를 강조하는 장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묘사된다.
같은 맥락에서 원작 내용도 각색했다. 정환과 유사한 처지에 있었던 다른 시민들의 사연이나 존재는 모두 생략됐다. 결말도 달라졌다. 좀비를 숨긴 정환의 선택이 일으킬 논란은 다뤄지지 않고, 정환 덕분에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었다는 다소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즉, 관객의 시선을 철저히 정환의 부성애 쪽에만 붙들어 놓는다.
그와 동시에 배우들을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조금씩 다르게 활용해서 허점을 가리기도 했다. 코믹한 이미지가 강한 조정석이 유머보다는 아버지로서의 절절함을 강조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사이에 이정은, 윤경호, 최유리 세 배우가 코미디를 나눠서 담당하는 식이다. 조여정에게도 명성에 비해 적은 분량을 주면서도 코미디에서 신파로 장르가 바뀌는 전환점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좀비딸>은 식상함과 참신함, 코미디와 신파,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모두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비록 사회적인 측면을 다룰 때 한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기획된 조화를 깨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마냥 비판하기도 어렵다. 이처럼 영리한, 더 나아가 영악한 균형감이야말로 영화 할인 쿠폰 관객을 겨냥한 여름 극장가 대전에서 <좀비딸>이 승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일 테니까.
Acceptable 그럭저럭
지금 한국 코미디 영화에 바랄 수 있는 최선의 영악함과 균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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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들의 고민과 외로움, 아픔들이 담겨있는 영화 8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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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 ‘라라랜드’.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배우 지망생 ‘미아’, 서로 사랑하며 각자의 꿈에 다가서기 위해 수많은좌절을 견뎌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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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9회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여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주제가상, 음악상 6개부문 수상한 작품으로 이외에도 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다시피 한 작품입니다.
음악과 현대적인 감각의 영상을 통해 194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의 고전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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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직 노동자 B. 래빗'은 공장에서 번 푼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래퍼가 되는 꿈을 꾸지만, 연습할 시간도 녹음할 기회도 나지 않는다. 돈과 꿈을 얻기위해 랩배틀에 참가해야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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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교에 배치된 기간제 교사 헨리. 문제아들만 모여있는 학교는 교사도 학생도 서로를 포기한 암담한 상황. 그러나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헨리의 모습에 학생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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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웨이터로 일하는 존은 뮤지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작곡에 매진한다. 하지만 중요한 공연을 며칠 앞두고 일들이 겹쳐 삶은 위태로워지고 존의 30살 생일은 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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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 뉴요커 프란시스. 무용수로 성공하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지만 현실은 몇 년째 평범한 연습생 신세일 뿐이다. 직업도, 사랑도, 우정도 무엇 하나 쉽지 않은 그녀는 과연 당당하게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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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복학생 만섭이는 공부와 취업대신 캠퍼스 퀸 ‘안나’와 ‘족구’에 빠져있다. 급기야 총장에게 족구장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만섭이로 인해 대학교내 족구열풍이 불자 ‘캠퍼스 족구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우리에겐 젊은이들을 이끌어줄 책임이 있어요 그들이 무너져 내리지 않고 낙오하지 않고 하찮은 인생이 되지 않도록 말이에요"
-디태치먼트-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같다고 생각해요"
-족구왕-
혹시 어떤 꿈을 꾸고 계시나요? 어떨 땐 직접적인 위로의 말보다 같은 상황이 놓여진 주인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죠. 꿈이 아니더라도 일 때문에 힘들거나 지쳐있는 상황이라면 위의 8편 영화들을 추천 드립니다. 해답이 되진 못하더라도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큐레이션 마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영화 큐레이터 AMY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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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과 광기의 경계
인도영화 <킬>은 '40명의 무장강도와 1명의 특수요원'이라는 광고 문구와 제목만 보자면 액션만을 위한 유치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영화이며, 오히려 비슷한 류의 액션영화인 <테이큰>이나 <존 윅>보다도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 담겨있다. 다만 주인공 자체에 대한 서사가 너무 로맨스에만 맞춰져 있고, 액션 서사를 '특공대'라는 것으로만 퉁친 점이 좀 아쉽다.
이 영화가 좁은 곳으로 공간을 제한한 단순액션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감독 니킬 나제시 바트(Nikhil Nagesh Bhat)가 자신이 직접 기차 무장강도를 당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액션뿐 아니라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심리묘사나 인도의 계급갈등 등 사회의 묘사가 탁월하다. 그리고 그 부분을 액션으로 잘 승화했다. 비단 이 영화가 인도 영화 특유의 색채 때문에 80-90년대의 홍콩영화 감성이 물씬 풍기더라도, 앞서 말한 점에서 <테이큰>이나 <존 윅>보다도 나은 점이 있다고 느낀다. 이 영화는 그 주제를 잘 나타내기 위해, 영화 중간에 제목을 넣어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죽여야만 할 때
주인공 암리트(락샤)와 친구 비레쉬(아비쉐크 차우한)는 특공대 출신이다. 이 기차에 타고 있는 암리트의 약혼녀 툴리카(타냐 마닉탈라)와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 무장강도가 나타나자 행동을 개시한다. 이때 이들의 전투 목적은 훈련받은 군인의 자세다. 적을 제압하고, 상대의 수가 많으므로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 하는 철저한 군인모드. 그들은 자신들이 무력한 일반승객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러기에 둘 다 아무 망설임 없이 무장강도를 상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대들은 단순한 무장강도가 아니다. 그들은 실제 가족들이다. 가족들끼리 패거리를 이뤄 강도단을 만드는 것은 빨리 돈을 벌고 싶어 하는 하층민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탄 이 열차는 상류층이 차는 매우 비싼 열차이며, 거의 비행기 값이라고 한다. 그러니 승객 몇을 죽이면서 공포로 몰아넣고, 빠르게 내려 도망가려 한 것이다. 그들은 승객들을 공포로 몰아넣기 위해 살인이 필요했다. 그것을 주도한 파니(라가브 주얄)는 이 가족 강도단의 행동대장 격이며 잔혹하다.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농락하는 것을 즐기다 일을 그르친다. 만약 단순히 강도들이나 특공대 주인공들이 할 일만 했다면 그렇게 뒷부분처럼 참혹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죽이고 싶어질 때
영화는 중반부 파니가 암리트의 약혼자인 툴리카를 죽이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영화의 제목인 <킬>이 그제야 화면에 커다랗게 새겨진다. 암리트는 군인으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복수와 죽음의 화신이 되어버린다. 그 모습은 마치 폭풍의 신인 루드라 신이 강림한 것처럼 두렵고 잔혹하다. 칼로 찔러 제압하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풀고 강도들에게 끔찍한 공포와 고통을 주는 것이 목적으로 바뀐다. 지금까지 강도들은 승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끔찍하게 죽어나가는 자신들의 가족들을 보며 그들은 암리트에게 공포를 느끼고 두려워하고 울부짖는다.
그건 마치 현대 격투가와 고대 무술가의 차이와도 비슷한데, 현대 격투술은 스포츠로 만들어져 타격과 기술에 제한이 있다. 상대를 무력화시켜 승리를 거두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필요 이상으로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면 안 된다. 그래서 급소를 타격하는 등의 위험한 기술은 실전에선 유용하지만 아예 하지 못하게 가르친다.
그에 비해 고대 무술은 원래 전쟁에서 상대방을 가장 빠르게 죽이는 목적이 있는 것이므로, 눈 찌르기나 급소 타격, 관절 부러트리기 같은 위험한 기술이 주가 된다. 물론 특공대인 주인공들이 쓰는 특공무술은 그런 '죽이기 위한'무술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단순하게 감정 없이 제압하는 것과 분노를 담아 잔인하게 고통을 주며 죽이는 건 또 다르다. 그건 광기의 살인이다. 이것들의 차이는 타나카 아키오의 만화 <군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분노의 화신이 된 암리트는 이미 죽은 상대의 머리를 계속 내리쳐 으깨버리고, 칼로 찌른 몸을 천천히 반으로 갈라버리거나 일부러 잔혹하고 고통스럽게 죽이고 전시한다. 그 광기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암리트의 절망과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공포와 살인의 반전
암리트가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자신이 죽인 강도들을 매달아 놨을 때 문득 에이리언이 생각났다. 그래, 에이리언은 암리트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살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동료들의 끔찍한 죽음으로 다가왔다. 이유를 모른 채 실험체가 되어 이용당하다 태어나자마자 죽어가는 자신들의 삶에서, 그저 살려고 발버둥 친 건 아니었을까? 강도들에게 괴물처럼 비치는 암리트의 모습을 보며 새삼 에이리언에게 연민을 느꼈다. 누가 누구에게 공포이고 누가 괴물인가?
또한 이 영화에서 절대강자로 등장하는 커다란 강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약하게만 보였던 죽은 승객의 엄마들에 의해 무참히 죽는다. 여기에서는 절대 강자도, 절대 선한 자도, 절대 악한 자도 없다. 모두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살인을 하고 분노하며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그 힘과 공포는 계속해서 위치가 바뀌며,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은 누군가를 응원하게 된다기보다 그저 그런 끔찍한 참사가 벌어져야만 했던 기차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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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재미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짚어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영화가 주는 '과한 감성'이 맞지 않는다면 감정선이 유치하게 보일만한 연충들이 있다. 그 부분만큼은 위에서 언급했듯 딱 80-90년대 홍콩 액션영화와 비슷하다. 그리고 액션에 있어서도 주인공의 액션 무술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감정에 초점이 있고, 좁은 공간에서 사물을 이용하는 스트리트 액션이라서 최근 크라브마가나 칼리 아르니스와 같은 특공무술의 쿨하고 멋진 모습보단 더 현실적인 액션에 가깝다.
잔혹한 액션을 좋아하는 액션 팬들에겐 롯데 시네마에서만 단독 개봉하는 게 아까울 정도로 괜찮은 영화다. <존 윅> 제작사에서도 리메이크를 한다고 하니, 마치 과거 <옹박>을 뤽 베송이 재편집해 개봉해 배우였던 토니 쟈가 세계적인 액션스타가 된 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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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리뷰/행복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찬실이는복도많지#강말금#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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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제가 보고 올게요! 마스크 꼭 쓰고 다니세요~ 토요일엔 역사 컨텐츠가 올라갑니다. 참고로 엔딩곡 꼭 듣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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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톨: 함정> 메인 예고편
늦은 밤 홀로 우버에 탑승한 ‘캐미’는
낯선 길로 들어서는 운전사 ‘스펜서’가 의심스럽다.
그 순간 발생한 정체불명의 사고.
“이 도로는 폐쇄됐으니 우회하여 통행료를 낼 것”
휴대폰도 차도 고장 난 새벽 3시,
두 사람은 도움을 구하러 가까운 마을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존재가 서서히 다가오는데…
‘그’의 세계에 갇힌 자. 통행료는 오직 죽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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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멤버> 1차 예고편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되었습니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 복수를 끝내야 한다! [검사외전] 이일형 감독X이성민X남주혁 [리멤버] 1차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