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4-03-05 21:02:07
진실의 그림자를 뒤쫓아 가다
<메이 디셈버> 리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 디셈버>. 5월과 12월이라는 제목이 왜 붙었는지 알게 되리라 생각하고 상영관에 입장했다. 그러나 5월과 12월의 간극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영화를 본 후에야 찾아볼 수 있었듯이, <메이 디셈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갇혀 있던 사건의 연보와 억눌렸던 생각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다름 아닌 배우가 캐릭터로 분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 커플의 이야기는 곧바로 관객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날씨는
좋고, 여유는 넘치고 집은 예쁘고 아이들은 신이 났다. 집
주인 부부의 나이 차가 유독 많이 난다는 특징 외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이 매끄러운 세계는 배우인 엘리자베스가 도착하면서부터 조금씩 뒤틀린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솜씨가 그 뒤틀림과 균열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창조한다.
열 네 살 소년 ‘조’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징역형을 살고 아이를 낳은 그레이시의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가 그녀를 연기하게 된다. 배역 준비를 위해 가족을 방문한 엘리자베스는 관찰을 시작하지만, 그레이시는
영화가 담아 낼 자신들의 삶의 단면, 즉 이야기로 만들어질 법한 일정한 시간 이외의 것은 공유하지 않으려
든다. 엘리자베스도, <메이 디셈버>를 보는 관객도 그녀와 그레이시가 캐릭터로서 닮아 가는 과정만큼이나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그들의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동기와 선택, 사건과 감정, 그리고
그 재연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메이 디셈버>는 단편적인 증언과 인물의 태도만 보여줄 뿐, 결코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를 직접 목격하게 하는 지름길로 가지 않는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진실을 파헤쳐 보려는, 형사들이 할 법한 이런 시도를 배우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선명해질수록,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엘리자베스는 캐릭터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진실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배역을 완성해가는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와의 관계에
균열을 내지만, 그것이 그레이시의 과거 중 정확히 어느 지점 때문인지 관객도, 엘리자베스도 알 수 없다. <메이 디셈버>는 영화와 배우만 할 수 있는 방식대로 그것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찾고 싶은 것,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의 궤적을 재현하고 또 재연해 보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보여 주는 사건들, 그 옳고 그름에 대해 자꾸만
고민하게 하는 문제를 연결하는 것은 결국 스크린 위에 그것을 배치해 둔 손길이다. 나탈리 포트만과 줄리안
무어의 대체 불가능한 에너지 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요소는 관객이 추리하고 긴장하게 하는, <메이
디셈버>만이 발휘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아 시사회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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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성범죄를 다루는 윤리적인 방식
6월 15일,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가 시작되었다. 신도림 테크노마트는 여전히 조용하지만 12층 씨네큐는 제법 소란했다. 어린이영화제인만큼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어린이들을 많이 봤다.
앞서 <키즈 크리에이티브2>를 관람하고 나와 라운지에 앉아 있었는데, 대략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내렸다. 어린이영화제에 어린이가 참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임에도, 어른 사회에 절여진 탓인지 '이 어린이들이 무슨 영화를 보는 거지, 나랑 같은 영화는 아니겠지' 등의 생각을 잠시 했더랬다. 그러고서 아, 이건 어린이영화제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 어린이혐오를 했구나 싶었다.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는 '노 키즈 존'이 만연한 이 땅에서, '예스 어린이 존'을 표방한다. 우리는 어린이가 어른보다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하다고 해서 얼마나 이들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치부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는 내가 가는 카페, 영화관, 식당에 와서는 안 되지만, 뭔가를 잘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 '0린이'라고 부르는, 모순적이고 자기애적인 어른들도 이제는 좀 성장해야 할 때이다.
<오팔>은 카리브해 출신의 알랭 디바르 감독이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러닝타임이 85분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다. 영화의 배경은 카리브해처럼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왕국이다. 왕국은 마법으로 유지되는데, 마법의 근원은 공주 '오팔'에게 있다. 오팔이 행복하면 마법의 기운도 세지고, 불행하면 마법의 기운이 약해진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꽃들이 시들시들 죽어간다. 세계를 관장하는 신, 이로코는 마법의 힘이 약해진 것은 공주에게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주는 성에 갇혀 있다. 누구든 들어올 수 있지만, 나가는 것은 열쇠를 가진 자만 가능하다. 공주에게는 열쇠가 없다. 매일 탈출 계획을 세우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공주가 탈출하고자 하는 까닭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밤중에 공주의 방에 찾아와 마법을 훔쳐간다. 공주는 고통스러워하며, 빌고 애원하지만 아버지는 그래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괴물과 싸우려면 너의 마법이 필요하다, 네가 마법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등의 이유로 공주의 마법을 훔친다.
영화 시작 전 감독 인터뷰가 짤막하게 나왔는데, 감독은 이 영화가 친족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교과서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영화에서의 마법, 그것을 빼앗아가는 아버지는 친족성범죄의 알레고리(우화)이다.
친부, 계부, 친오빠, 사촌오빠 등의 성폭행 사례는 당장 포탈사이트에 검색해보아도 오늘, 어제, 이틀 전, 일주일 전, 끊임없이 쏟아진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를 버릴까 두려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가 가정이 깨질까봐, 자기 때문에 모든 걸 망칠까봐 어디다 털어놓지도 못한다. 범죄자 아버지여도 아이들은 부모를 쉽게 사랑한다. 부모의 사랑이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 아이들의 사랑은 절대적이지 않은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온전히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음을 상처로 품고 사는 어른들이 많다.
오팔은 엄마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만, 엄마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오팔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며, 오로코신 앞에 오팔이 불려갈 때도 입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그 말을 들은 오팔은 아무일 없다고 하지만, 신이 오팔에게 선물한 인형에는 눈과 입이 있어 모든 것을 목격한다. 이 역시 낯선 현상이 아니다. 친부, 계부, 또는 오빠의 성폭행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딸의 입을 틀어먹는 엄마들이 숱하게 많았다. 자아를 남편, 아들에 의탁한 여자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그 전에,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오팔이 무의식으로 들어갔을 때이다. '지하감옥'인 줄 알았던 그곳은 사실 오팔의 무의식이다. 그곳에서 그동안 억압해왔던 슬픔, 분노, 죄책감, 수치심, 좌절감 등을 만난다. 그들은 마치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들처럼 살아있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괴물'은 그들을 잡아먹는다. 그들이 잡아먹힐 때마다 오팔은 억압해왔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끝내 오팔의 마음속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무력해지도록, 더 이상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 때, 오팔은 잠에서 깨어난다.
*아직 <오팔>을 볼 수 있는 OTT는 없는 것 같다.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6/22(수)에 재상영하니, 관심이 있다면 꼭 보기를 권하고 싶다.
'마법'은 다양한 사건으로 치환될 수 있다. 감독이 의도한 친족성폭행 문제일 수도 있고, 친족이 아닌 성범죄일 수도 있고,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상처나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 아픈 기억은 무의식 속에 숨겨놓고 꺼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 사건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며, 오히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프로이트식 방어기제이다.
영화는 지극히 프로이트적으로 접근하는데, 영화 도중 자아(EGO), 초자아(SUPEREGO)라는 글자가 수수께끼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모든 수수께끼는 마지막에 가서야 풀린다. 의식과 무의식을 통하여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에 가까운 과정을 볼 수 있고, 우리는 직접 정신분석을 받지 않았지만 영화를 통해 대리경험을 할 수 있다.
'날것'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자극적인 영화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 성폭력을 다룬 영화도 부지기수이다. 지금까지 성폭력을 다룬 영화들은 대개가 성폭행 장면을 아예 대놓고 보여준다거나, 성폭행을 당하는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동안 영화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강간 장면을 목도하였나. 그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피해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는, 고민 없는 연출인가.
<오팔>의 미덕은 성폭행의 장면을 묘사하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의식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세계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이 애니메이션을 봤으면 좋겠다. 특히 그루밍범죄에 노출된 아이들, 어른들로부터 상처받은 어린이들이 보아야 할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어린시절에 받은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어른들 또한 <오팔>을 보고 치유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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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전 떠들석했던 어린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86분의 러닝타임 내내 아이들은 무척 정숙했고, 진지하게 영화를 보았다. 내 앞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앉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그들끼리 제법 진중한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요즘 아이들은 어쩌고 저쩌고 해도 대개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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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겐 이 꼰대가 필요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을 매달 밧줄을 산 뒤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집에 들어오던 전기도 끊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오토’(톰 행크스). 정장을 차려입고 죽을 준비를 다 마친 그.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겠다 싶은 타이밍마다 이웃들이 그를 방해하기 때문. 새로 이사 온 '마리솔'(마리아나 트레비노)과 '토미'(마누엘 가르시아룰포) 부부는 주차도 제대로 못해서 오토의 속을 뒤집어 놓고, 아무 때나 먹을 걸 가져다준 뒤 오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오토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소냐'(레이첼 켈러)'의 묘비 앞에 앉아 이웃들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한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의 인생 최악의 순간, 원치 않았던 이웃들의 관심 덕분에 그의 삶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신작 <오토라는 남자>는 스웨덴 소설 '오베라는 남자'를 영상화한 코미디 작품으로, 인생 최대의 트라우마에 빠진 한 남자가 어떻게 삶의 의지를 되찾는지를 그려낸 착실한 드라마다. 동시에 건실한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먼저 떠나보낸 가족을 향한 오토의 사랑과 회한이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코미디로 시작해서 잔잔한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교과서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이 정공법은 꽤 성공적이다. 러닝타임 내내 관객석에서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웃음과 울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오토라는 남자>를 그저 준수한 코미디이자 가족 영화로만 남겨 두자니 아쉬움이 남는다. 주인공 오토를 연기한 배우 톰 행크스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 '가장 미국적인 배우'이자 '미국의 얼굴'이라 불린다. 그의 연기력이나 흥행력을 고려하면 미국의 송강호라고 해도 될 터. 그런 그가 소품이라고 불릴만한 영화에 출연했으니, 한 가지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체 톰 행크스가 왜 이 영화에 출연했을까?" 물론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만 영화 속에도 짐작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오토라는 남자>는 단순히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특히 민주주의를 누리는 모두가 곱씹어 봐야 할 이야기에 가깝다.
웃픈 꼰대, 오토
<오토라는 남자>는 코미디로 시작한다. 오토의 괴팍함이 주재료다. 그의 하루 패턴을 훑으면서 그가 얼마나 괴팍한지 보여준다.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오토. 눈이 오는 날이면 자기 집 앞 인도까지 눈을 치운다. 눈이 오지 않으면 아침을 먹고 바로 동네 순찰에 나선다. 주차장에 주차증이 없는 차가 있는지, 도로와 주차장을 분리하는 문은 잘 잠겨 있는지, 쓰레기장 분리수거는 잘 되어 있는지, 자전거 보관대가 아닌 곳에 자전거를 두고 가지는 않았는지, 신문이나 광고가 동네 미관을 해친 건 아닌지. 일일이 확인한다. 오토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면 그 누구도 독설을 피할 수 없다. 새로 이사 온 이웃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친구도, 갈 곳 없는 길고양이도.
하지만 그가 괴벽해진 이유를 알고 나면,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웃기지 않다. 그의 괴팍함은 트라우마를 숨기려는 방어 기제다. 임신한 소냐와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을 떠났던 오토. 행복한 시간을 보낸 그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오토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는 다행히도 무사했지만, 불행하게도 소냐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유산했고, 그녀의 하반신도 마비됐다. 오토는 뒤늦게 버스 회사가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버스를 운행해서 사고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이는 마음속 깊은 흉터가 됐다.
그 후로도 오토는 자꾸 다친다. 장애인이 된 아내를 무시하고, 그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점차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예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졌다. 원칙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하고, 비난한다. 마트 직원이 로프 길이와 가격을 잘못 계산하면 크게 화내고, 회사에서 부사수가 상사로 임명되자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한다. 이웃들이 혹시나 잘못된 행동을 한 건 아닌지 감시하면서 매일 순찰을 돈다. 그렇기에 오토는 더 이상 우습지 않다. 웃프다.
오토의 트라우마 극복기
동시에 <오토라는 남자>는 눈물을 자아내는 드라마다. 오토의 병든 내면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그가 치유되는 과정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소냐와 사별한 뒤, 트라우마가 더 심해지자 오토는 결국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무덤에 가서 소냐와 대화를 나눈다. 조만간 당신 옆으로 가겠다고. 당신과 재회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오토는 죽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 천장에 목을 매달기도 하고, 차 안에 가스를 채워서 질식사도 시도한다. 전철에 몸을 던지거나 머리에 총을 쏘는 것도 선택지에 있다. 그는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점차 죽어가면서 아내와 행복했던 과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에서의 첫 만남, 레스토랑에서의 첫 데이트, 졸업식과 프러포즈, 신혼 생활까지. 오토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치유다.
이상한 일이 생긴다.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오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한다. 하루는 앞집에 이사 온 마리솔이 창문을 고치겠다며 사다리를 빌려 달라고 부탁한다. 하루는 한때 절친한 친구였으나 사이가 멀어진 루벤의 집 라디에이터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무 때나 찾아오는 마리솔은 대뜸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어느 날에는 고등학교 교사였던 소냐의 제자, 말콤이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났다면서. 편견 없이 자기를 대해줬던 선생님이 생각나서 왔다고. 새 가족도 생긴다. 눈 내린 날에 얼어 죽기 직전이었던 고양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오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오토는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연다. 자살하지 않아도 이승에서 죽은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깨닫는다. 이웃에게 베풀고, 그들과 삶을 공유하면서 소냐의 뜻을 이어가면 된다. 소냐가 말콤에게 그랬고, 마리솔이 자기에게 그랬듯이. 타인을 향한 관심과 이웃과의 협력 덕분에 그는 마침내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죽음을 포기하고 아내의 유품도 정리한다. 그렇게 오토는 자기 삶을 살아간다. 덕분에 그의 장례식에서 동네 이웃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쁘게 웃을 수 있다. 자살을 꿈꾸던 그가 편안히 죽음을 마주한 건 그가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 오토 같은 꼰대가 필요한 이유
여기까지만 보면 <오토라는 남자>는 한 노년 남성이 평화를 되찾는 사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오토의 꼰대스러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영화에 숨어 있는 사회적 함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루벤의 집 라디에이터를 고치면서 오토는 이렇게 한탄한다.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더 이상 사람들이 이웃들의 일에, 공동체를 관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각자 살기 바쁘다고. 실제로 오토가 순찰할 때 다른 이웃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웬 오지랖이냐는 식이다. 파편화된 시민의 모습은 다른 장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살하기 위해 전철역을 찾은 오토. 그가 선로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다른 남성이 먼저 선로에 떨어져 버린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오토. 그러나 그는 주위 승객들의 반응에 더 놀란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만 찍을 뿐 아무도 도우려 나서지 않는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는 공중의 쇠퇴를 경계했다. 그는 기술의 변화로 인해 다른 산업 구조가 등장하고, 사회가 거대해지고 조직화되면 사람들이 점점 비인격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작중 듀이가 전망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례로 오토가 퇴사할 때, 같은 부서 직원 한 명은 축하 케이크 위에 그려진 오토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반으로 잘라버린다. 그 결과 민주주의에 필요한 가치나 조건, 그리고 공동체는 훼손된다. 개인은 많지만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오토 말고는 아무도 거리에 신경 쓰지 않고, 공동체가 합의한 규칙을 중시하지 않듯이. 중요한 의사결정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사람에게 넘어간다. 건설 회사가 오토와 이웃들의 집을 불법적으로 매수하려 해도 그들은 권력자를 막을 힘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토의 꼰대스러움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거대해진 사회에 대응해 '거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듀이의 주장과도 궤를 같이한다. 듀이는 이웃 공동체, 지역 공동체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모인 이들끼리 서로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토와 이웃들은 솔직하게 소통하고 협력해서 루벤의 집을 지켜냈다. 그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될 위기도 타개할 수 있었다. 이웃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었던 오토의 '순찰'에 힘입은 결과였다. 비록 예민하게 원칙을 따지고 방식이 거칠기는 했지만. 뒤집어 보면 <오토라는 남자>는 상이한 정체성 간에 대화 대신 갈등만 가득한 현재 미국 사회를 겨냥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는 원작 소설과 달리 이웃 주민의 인종이나 성 정체성이 수정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의 얼굴'인 톰 행크스가 오토 역을 맡은 건 꽤 의미심장하다.
물론 <오토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내용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452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의 내용 중 잘려나간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스웨덴에서 먼저 영화화한 <오베라는 남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스웨덴 버전은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분장상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호평받은 수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누구와 함께 극장을 찾든 간에 <오토라는 남자>를 보고 나면 옆 사람에게 감사를 전할 일이 생길 거라는 사실이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이 영화의 진가가 담겨 있다. 엔딩 크레디트는 오토와 마리솔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서툰 그림으로 가득하다. 또 홀로 사는 이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하라는 문구가 같이 등장한다. 그러니 영화관을 나설 때 마음이 따뜻해지지 따뜻해지지 않기는 어렵다.
A(Acceptable, 무난함)
오토의 순찰이 계속될 때,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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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과 내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뜬다. 더 일찍 일어나고 싶었지만 12시에 일어나는 삶에 익숙해졌다. 아침에 아빠한테 ‘아빠, 오늘은 좋은 크리스마스예요’라고 다시 누운 기억만 난다. 그리고 동시에 백수 생활 6개월 차. 빈도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때 당시 속은 무진장 쓰렸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까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다시 어학부터 따야 뭐라도 하겠지? 그러나 하고 싶은 공부, 그러니까 인적성과 ncs만 파고 있으니 나도 변덕이 심한 편이다. 왜 필요할 때 필요한 걸 안 하는 걸까? 공부하는 일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인데 말이다. 뭐든 재미를 붙였다는 것이 희망적이다. 확실히 난 내일이 기다려진다. 그 자그마한 성취감이 쌓이는 쾌감이 어마무시하다. 그전 날 내가 뭘 했던 뭐든 해나가는 과정이 좋았다.
나만 이런 건 아닐 것이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불안함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하다못해 유느님도 ‘말하는 대로’라는 음원을 낸 적 있는걸. 그리고 내가 봐왔던 수많은 영상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이 시기가 불안하다고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 내 주위의 누군가도 서류광탈은 아프다고 말한 적 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그냥 정해진 무언가가 있거니-하고? 그동안 많은 걸 깨왔다고 생각했지만 여기가 내 한계일까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하지만 이런 속상한 상황에도 뭔가 즐거운 건 있을 거라 믿는다. 아무튼 내일은 확실히 기다려진다고.
이런 나도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아무튼 크리스마스다. 전날 닭강정이 먹고 싶어 아무 데나 가서 결제했다. 하지만 정작 알맹이는 없고 오징어 맛 나는 과자만 양의 절반이었다. 적어도 6천 원 닭강정과 10500원어치가 양이 비슷하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도저히 그 오징어 맛을 참을 수가 없어서 엄마 몰래 쓰레기 봉지에다 갔다 놨다. 이 생각을 하다 갑자기 지금 내가 현재 있는 카페와 내 방 안이 생각난다. 카페는 깔끔한 반면 내 방안은 뭔가 물건이 많았다. 책상부터 시작해 거울, 옷까지 듬성듬성 삐져나온 물건들이 갑자기 보기 싫어진다. 아. 집 가면 방부터 치워야지. 새 해가 머지않았는데 새 마음 새 뜻으로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할 일들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노량> 쓴 것도 좀 고치자. 내일은 레이저 제모가 있다고. 아니야. 영어 단어부터 외울까? 하루라도 빨리 어학을 치워야 뭐라도 할 수 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생각이다. 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걸까? 사실 먹고살기만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나는 기자인지 평론가인지 모를 영화 글을 쓰는 게 재미있다고. 그냥 기자로 살아도 힘든 판에 영화기자로 살면 일단 경쟁률에 못 이길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살기로 한다. 그리고 영화 글을 쓸 수 있는 온오프상의 지면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이 브런치가 나에게 영예로운 무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수익으로 이어지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 재미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도 있는 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내가 있는 이 카페의 사장님이 음료를 다시 채워주셨다. 한 3년쯤 된 것 같다. 자주 가던 카페가 영업을 종료하고, 젊은 여자 사장님이 운영하고 있는 곳은 오랜만이었다. 애정을 쏟는 곳에 자주 방문하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그리고 정들게 되면 상대도 나에게 정을 쌓는다. 그 쌓은 정은 이후 사람 하는 행동을 결정한다. 20대 초 자주 가던 카페가 영업을 종료하고 채울 것이 없어 이곳저곳 많이 다녔다. 나를 ‘아들!’이라 부른 카페 사장님도 있었지만 내가 활동하는 시간대(?)와 영업시간이 맞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완벽하게 빈자리를 채우는 걸 무의식 중에 바랬던 나. 조금 모자라보여도 마음 둘 곳을 원했다. 하지만 20대 초 추억이 서려있는 곳만큼의 무언가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다행이다. 어릴 때 가던 곳은 사장님이 멋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 아는 사장님은 성격이 정말 좋으시지만 잘 알지는 못한다(물론 이 분도 멋있는 분일 것이다). 그래도 내 시간과 맞는 영업시간이 있다는 점에 만족해야겠지. 어릴 때 가던 곳이랑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아이스티와 초코라테 맛집이라는 점이다. 초등학생 입맛인 나에게 적합한 곳이다. 아. 이런 내 입맛을 충족시키는 식당도 현재의 카페 근처에 있다. 지금이야 돈 없는 불쌍한 애다. 하지만 한 때 점심으로 ‘초리’ 가서 난반정식 먹고 여기서 공부하면서 카페로 딱 하루를 마무리하면 그 무엇이 부럽지 않았다. 이 식당도 생각해 보면 사장님과 나 사이의 3의 인물 덕에 알게 된 곳이다. 누군가에게 준 애정 덕에 새로운 장소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맛있는 생각을 하다 문득 집에 갈 시간이 됐다는 걸 체감한다. 오늘은 12월 말. 연말이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쌓은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는 ‘난 사람 구경을 재밌어한다는 점이다. 연말에 행복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 환하게 웃는 사람들. 카페 안에도 몇 커플이 보인다. 좋겠다! 나도 새로운 해에는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딱 체감되는 것이 있다. 바로 해가 바뀌며 소망이 달라진 것이다. 사랑을 찾으면 좋겠지만 딱히 없어도 뭐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사라진다면 문득 두려워질 것이다. 영화를 못 보고. 글을 못 쓰고. 가끔 책 못 읽고. 처음 가 본 서울독립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에 영원히 갈 수 없다면 아득해진다. 언젠가 사랑을 찾을 거야!라는 희미해지는 희망도 나를 살게 하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정말 특별한 경험을 했다. 올해 1월에 내가 쓴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는 분을 우연히 본 것이다. 내가 쓴 글을 네이버 검색에서 찾았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런 반응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 아직까지도 기쁘다. 이런 경험을 하니 다시 목표를 재조준하게 됐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내 가치를 보여주고 싶다.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의지하게 만든다면 더없이 행복할 거라는 바람이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내 사랑도 언젠가 찾을 것이다. 내 운명 같은 사랑을 찾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약해지긴 했어도 내가 원하는 사랑은 아직까지 내 마음 안에 남아있다.
나에 대한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혼자 하다가 다시 내 시선에 집중한다.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 사람들은 각자 즐거운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내 뒤에 알콩달콩 다투는 커플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신발, 그러니까 컨버스를 신고 있었다. 셀카도 찍고 장난도 치면서 방긋 웃고 있다.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저 두 사람도 오늘을 추억하며 행복해할까? 부러운 마음에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바로 옆자리다. 두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둘은 친구인 것 같았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여행 온 것 같다. 대놓고 쳐다보면 좀 그렇잖아? 에어팟을 빼고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다. 또 흘깃 쳐다본다. 제주 사투리 억양 자체가 없다. 야. 여기 근처에 뭐가 있다는데?(그 ‘뭐’를 비롯한 여러 단어가 잘 들리지는 않았다) 여기 한 번 가보자. 야. 내일 우리 여기 가보는 건 어때? 나 여기에서 뭐 사서 가려고. 두 사람은 세상 즐거워 보였다. 제주 여행 좋지. 내가 서울 가서 느끼는 기분을 저 사람들은 느끼는 것 아냐? 그 여행을 서로 사랑하는 친구와 온다면 기쁨이 두 배가 될 것이다. 금세 잘 들리지 않았던 단어 몇 개를 상상한다. 두 친구 중 한 명은 근처 굿즈샵에 가서 선물을 사서 주변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싶은 것 아닐까? 어릴 땐 몰랐지만 선물은 필시 주는 사람이 더 기쁜 일이다. 새삼 드는 생각. 여행은 이렇게 내일의 나를 기대하게 만든다. 동시에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은 굳이 여행이 아니더라도 매일 있다. 나에겐 아직 그런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이 사랑이 없는 삶이, 또 떠나간 나의 모습이 얼마나 텅 비었을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깊게 배웠던 것 중 하나. 상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생기는 그 빈자리가 너무나도 싫었다. 왜 다들 울어야만 하고. 왜 다들 그렇게 사라져야 하는 걸까. 사라지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닭강정의 맛. 같이 치킨 먹는 엄마. 언젠가 만날 내 운명 같은 사랑. 영화와 글쓰기.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와 김혜리의 필름클럽. 우상과 친구들. 이 카페 사장님. 하나하나 찍는 쿠폰들. 내 소망과 꿈까지. 나의 세상을 이루는 무언가가 사라진다면 이내 곧 나머지도 없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다. 이동진 평론가님과 김혜리 기자님이 사라진다면 나의 영화와 글쓰기에 큰 공백이 생길 것이다. 영화와 글쓰기가 사라진다면 나의 감성적인 면모가 어느 정도는 텅 빌 것이다. 닭강정의 맛이 사라진다면 이 카페에서 마실 초코라테의 향을 느끼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언젠가 만날 사람들에게 ‘미안했어’라고 말할 일 자체가 사라진다면 언젠가 만날 새로운 사랑도 나의 어리숙함에 도망칠 것이다. 집 안에 혼자 남는 삶이야 뭐 두말할 필요 없다. 이렇게 나의 인생의 많은 것들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연히 난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어느덧 싫어하는 것들에 별로 관심을 안 두기 때문인지 이제 생각을 어느 정도는 던 것 같다. 내 주위의 것들이 날 떠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심 이 머릿속을 맴돈다. 왜 다들 죽는 걸까. 죽지 않을 순 없는 걸까. 영원히 남아있을 수는 없을까.
<너와 나>는 존재와 상실에 관한 영화다. 세미(박혜수)는 머릿속에 걱정이 가득하다. 학교에서 자다가 꿈을 꿨다. 그 꿈속에서 둘도 없는 단짝친구 하은(김시은)이 죽었다. 뺨에 눈물이 흐른다. 눈물을 닦는 세미. 담임 선생님께 쪼르르 달려가서 조퇴를 신청한다. 될 턱이 없다. 호기롭게 자율학습을 째는 세미. 집에 잠깐 들른 후, 하은이가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세미와 하은. 사실 세미에겐 비밀이 있다. 하은이를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언젠가 세미는 하은이에게 널 정말 사랑한다고, 뭐든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려고 한다. 수학여행에 간다면 이 고백이 쉽겠지? 하지만 하은이에겐 사건이 있다. 바로 최근에 자전거에 치여 다리를 다친 데다 가정형편이 충분하지 않아 여행비를 댈 수 없던 것이다. 다급한 세미. 고백도 하고 싶고. 다른 친구들이랑도 지내고 싶고. 수학여행도 가고 싶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너(하은)와 함께 행복하는 것’이었다.
이 <너와 나>는 이 세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존재와 상실에 대해 탐구한다. 네가 없는 세상, 그 나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세미가 없는 빈자리를 보여주거나 하은이가 없는 빈자리를 보여준다. 하은이가 먹던 사과를 세미가 바라본다던가, 주인 잃은 강아지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내보이는 것이 그렇다. 이 존재와 상실을 연이어 보여준 목적은 두 사람의 사랑에 빛을 비추기 위함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없는 빈자리를 쫓아간다(특히 세미를 중심으로 하은이의 빈자리를 탐구한다). 동시에 세상과 충돌한다. 그리고 그 서로에 대한 절실함이 모아지는 지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두 소녀가 서로의 빈자리를 체감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이제까지 수도 없는 영화를 봤다. 영화 글을 쓰는 것이 삶의 재미 중 하나였던 나. 당연히 영화와 관련된 이런저런 추억이 있다. 2023년 상반기엔 <바빌론>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가보고 싶었던 서울독립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선명한 기억은 후반기에 있다. <너와 나>를 보고 운 기억이다. 난생 안 해본 굿즈 수집이라는 것도 해보고, 티켓을 6번이나 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와 관련된 장소에 가봤다. 수많은 ‘사랑해’를 보면서 먼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누군가 있다 떠나간 자리가 이렇게 황량하고 외로운 것이라는 걸 느꼈다.
내가 뽑는 단연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다. <헤어질 결심>과 <소설가의 영화>, <기생충>과 <버닝>만큼의 뛰어난 터치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누군가의 마음에 남기 충분하다. 지나치게 많은 빛의 양. 이기적인 세미.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하은.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며 ‘사랑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밖의 많은 사람들도 2014년의 4월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잊고 살았던 나. 내가 사랑을 찾아 헤매던 날이 참 더없이 소중했다는 걸 체감한다. 동시에 이 시간 동안 사랑할 일이 많았을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거구나. 내가 없는 세상. 그리고 당신이 없는 세상은 이렇게 우울한 것 투성이구나.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 이거 정말 큰 의미였다. 이거 하나라도 없으면 이 세상이 무너진다는 의미였다.
난 이 글을 구성함과 동시에 읽어주는 많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온갖 눈물로 가득 찰 것이다. 흐릿한 하늘로 변할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맴돌 것이다. 여러분 덕에 생긴 행복한 기억이 우울함으로 변할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어떤 것들이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당신이 줄 사랑이 사라질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떠나간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지금 있는 것들에 따뜻한 것들을 줘야 한다. 그래야 먼저 보낸 이들이 그렇게라도 살아 숨 쉬어 우리들의 마음을 듣고 있을 테니까. 기억공간을 나서면서 느꼈다. 이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거었다는 예감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올 한 해, 아니 그전부터 이 사회를 떠나간 이들에게 기억하겠다는 말을 전할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 <너와 나>를 만든 스태프들과 감독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그리고 김시은, 박혜수 두 배우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각자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언젠가 당신들이 이 글을 읽어 내가 인정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리고, 2014년 4월 우리 곁을 떠난 이들과 또 2023년 이 사회에 있다 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하겠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고생 많으셨다. 새로운 해가 왔다. 다들 힘내자. 사라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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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이례적이지만 흠잡을 곳 없는 개막작
[BIFF 데일리] 이례적이지만 흠잡을 곳 없는 개막작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전,란> 리뷰
줄거리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감독: 김상만
출연: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독립 영화를 중심으로 개막작을 선정하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OTT 영화. 그것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OTT 영화가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10월 2일 영화제의 개막을 앞두고 진행된 기자회견에선 'OTT 영화인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과 응답이 연속적으로 오갔다. 박도신 부집행위원장은 이에 대해 ‘대중적이고 재밌고, 완성도가 높은 영화이며 OTT 작품에도 문이 열려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정했다고 답했다.
이후 시대가 어떻게 변할지 <전,란>의 개막작 선정이 앞으로의 시장을 어떻게 바꿀진 알 수 없지만 일단 <전,란>은 박도신 부집행위원장의 말처럼 대중적이고 재밌고 완성도 높은 영화다. 쟁쟁한 배우들과 양면에 각각 다른 색을 장착한 각본, 다방향으로 치고 나오는 다채로운 액션, 빠르게 돌파하는 과감함까지 모두 갖춘, 흠잡을 곳이 없는 작품이다.
<전,란>은 선조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임진왜란의 전, 후사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영화는 비슷하지만 다른 운명을 타고난 두 남자 종려와 천영의 우정과 증오, 각자의 눈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의지를 연료 삼아 나아간다. 그리고 흑과 백, 적과 청, 진실과 오해를 맞붙여 스파크를 튀기다 끝내 커다란 불꽃을 만들어낸다.
배우들은 이 커다란 불꽃을 가운데 두고 맡은 인물을 마음껏, 맛있게 요리해 내놓는다. 영화 <군도>이후 약 10년 만에 양반이 아닌 노비 천영이 되어 나타난 강동원 배우는 헤진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귀신같은 몸놀림을 보여주고 그에 대척하는 양반 종려를 맡은 박정민 배우는 변화하는 인물의 감정을 진중하게 무너뜨리고 재조립한다. 비겁한 임금 선조를 맡은 차승원 배우는 자칫하면 모든 게 과도해 보일 수 있는 인물을 한 끗 차이로 비틀어 단단하게 만든다. 의병대와 일본군의 선봉장 겐신을 맡은 진선규, 김신록, 정성일 배우의 김자령, 범동, 겐신은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깊은 매력을 뽐낸다.
<전,란>은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각자의 정도(正道)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들은 주어진 운명과 계급에 순응하기보단 그에 맞서길 선택하고 자신에게 꼭 맞는 무기를 손에 든다. 각 무기에 주인의 운명과 의지가 투영되고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단단히 막혀있던 계급과 운명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간다.
비슷하지만 다른 운명을 타고난 종려와 천영은 허물어지고 있는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지키는 자와 허무는 자가 되어 대립한다. 두 사람은 적, 청색의 도포를 두르고 흑, 백의 검을 든 채 마주 선다. 서로의 거울이자 한 덩어리의 실체와 그림자 같기도 했던 두 사람은 갈등의 끝에서 서로를 그림자로 둔 하나의 온전한 실체로 독립한다. 이 과정은 마치 애증 관계 연인의 이별 같기도 하고 고상한 성장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쟁쟁한 배우들과 양면을 가진 각본, 다방향으로 치고 나오는 다채로운 액션까지. 흠잡을 곳 없이 매력적인 영화 <전,란>은 다가오는 10월 11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며 10월 2일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과 이어지는 영화제 기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상영시간]
10월 2일(수) 18:00 영화의전당 야외극장
10월 3일(목) 16:30 영화의전당 중극장
10월 4일(금) 12:30 CGV센텀시티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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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으로 가르는 사람이 필요하다.
거제도. 내가 사는 부산에서 한 시간반. 2015년 처음 방문한 거제는 식당마다 사람이 가득하고 활기 가득했다.
특히 출퇴근 시간의 오토바이 행렬이 끝나지 않게 쏟아지던 곳이었다.
“거제의 거지들은 천 원짜리를 안 받는다.
거제의 개들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라고 할 정도로 지역 경제에 활력이 넘치던 그 시절. 요즘 출산율 높다는 세종보다 더 출산율이 높았던 그런 도시 거제. 그러나 급작스레 찾아온 조선업의 위기. 거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직·간접으로 조선업에 기대어 살아가던 그들에게 조선업의 몰락은 곧 거제시의 인구 절감으로 드러났다. 한 때 30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이미 5만 명 넘게 줄었고, 집값은 반 토막 난 지 오래고, 끊임없이 지어지던 아팥트는 미분양 사태가 속출되었다.
이런 거제의 어려움이 한참 시작되던 2016년 무렵. 블랙홀 같이 빨아들이는 조선업의 몰락 속에 노동자들의 아픔을 렌즈에 담으려 했던 KBS 이승문 PD. 연일 계속되는 어려움에 다른 직장을 구하고, 잘 다니던 회사에서 예상치 쫓겨난 사람들. 그들의 힘듬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건 바로 자녀들이었다. 특히 취업의 전선에서 가장 큰 타격을 경험하고 있는 거제 여자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PD는 취업의 불안함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댄스 스포츠 동아리 일명 ‘땐뽀반’을 만나게 되었다.
다수의 학생들이 불안함에 무기력해 있거나, 벌써부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모습들이 속에서 한 선생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댄스스포츠를 가르친다. 취업에 어려워하는 상황에서도, 시험기간을 앞두고 있는 시간에도, 변함없이 그 시간 그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한다. 그런 상황 속에 평소에 지각하고, 학교에 잘 나오지 않던 아이들이 ‘뗀뽀반’을 통해 학교에 적응해 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다 지쳐 무기력한 아이들이 ‘뗀뽀반’에서 만큼은 춤 선을 위한 힘을 내고, 손동작에 각이 생긴다.
때로 밤늦게 연습이 끝난 뒤 집에 가는 아이들에게 교통비를 쥐어주고, 전날 늦게까지 술을 먹고 온 아이에게 숙취해소제를 내미는 선생님. 영화는 이 선생님을 과장하지도, 또 축소시키지도 않게 보여준다. 때로 사려 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들에게도 너무 들이밀지도, 또 애매하지도 않게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이규호 선생님의 모습은 굉장히 신선하다. 아이들을 향해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끊임없는 지지로 아이들을 대한다. 그리고 어느새 아이들은 선생님이 깔아놓은 사랑 가득한 무대에서 꿈과 미래, 비전과 목표는 내려놓고, 춤이 가져다주는 힘과 즐거움에 매료되어, 땀을 흘리고, 집중하며 그 순간을 즐긴다. 제자들과 친해지려는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하나 된 모습이 녹아져 있음을 느꼈다.
영화의 한 대목 중에 후배 교사가 이규호 선생님에게 물었다.
“승진은 이제 생각은 아예 접으신 거예요?”
선생님은 대답하셨다.
“우리가 승진하려고 선생 아는 건 아니다.아이가. 맞제? 아들 가르칠라고 하는 거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담담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이규호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랑은 한동안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게 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가장 큰 배움들은 늘 삶으로 가르쳐주신 분들로 인해 형성되었다.
나도 그분들 처럼, 이규호 선생님처럼.
삶으로 가르치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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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인연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안녕, 혹시 나 기억해?"
얼마 전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받았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면 매점도 함께 가고, 체육 시간이면 함께 배드민턴 짝꿍을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으니까. 당시 우리는 둘 다 싸이월드와 페이스북을 잘 하지 않았던 탓에, 고등학교를 각자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그녀와 내가 친했던 기간은 딱 1년.
그리고 연락을 하지 않았던 그 이후의 시간은 20년.
나는 잃어버렸던 친구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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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초 앞, 1초 뒤, 2024>는 대만 영화 <마이 미씽 발렌타인, 2021>을 리메이크한 일본 작품으로, 다른 사람보다 1초 빠르게 살아가고 있는 하지메(오카다 마사키)와 남들보다 1초 느린 레이카(키요하라 카야)가 함께 보내게 되는 하루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남들과 속도가 다를 때
하지메(오카다 마사키)는 남들보다 빠른 템포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진을 찍히기 1초 전에 웃고, 달리기 출발 신호를 외치기 1초 전에 출발하며, 알람이 울리기 1초 전에 일어난다. 연애를 할 때에도 상당히 빠른 템포로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 친구를 사랑한다며 라디오에 사연을 제보하기도 하고, 그녀가 돈이 필요하다고 하자 덜컥 돈을 빌려주려고까지 한다.
반면에 레이카(키요하라 카야)는 1초 느린 삶을 살고 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피사체가 움직이고 난 후에야 셔터를 누르고, 남들이 묻는 질문에 항상 조금씩 늦게 대답하며, 시험 문제지 뒷장은 풀지도 못한다.
하지메를 보면 왜 이렇게 급한가 싶고, 레이카를 보고 있자면 느려서 답답함이 올라온다. 모든 사람이 속도를 맞추면서 살아가지는 않는데도, 모두가 공유하는 일상의 템포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가끔 그 속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말이 정말 빠르다던가 혹은 행동이 정말 느리다던가.
물론 물리적인 속도 이외에 사회적인 템포도 존재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에 따른 정상 속도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 20살이 되면 대학을 가고, 20대 중반에는 취업을 하고, 30대에는 결혼을 하고, 뭐 그런 것들. 그런 속도가 빠르거나, 느리다면 남들보다는 사회생활의 난이도가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이 대만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사회적인 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2. 마이 미씽 발렌타인
<1초 앞, 1초 뒤>는 상당히 로컬라이징이 잘 되어있다. 대만 원작 <마이 미씽 발렌타인>과의 차이점을 꼽자면 가장 먼저 주인공 남녀의 성별 반전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 하나만으로도 두 가지 영화를 모두 볼만한 가치가 생긴다. 다른 영화들도 리메이크를 한다면 성별 반전을 해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원작에 없던 버스 기사와 동생 커플 캐릭터가 추가되었고, 썸을 타는 상대 캐릭터도 살짝 변형되었다. 개인적으로 <1초 앞, 1초 뒤>에서 가수 지망생으로 나온 사쿠라코(후쿠무로 리온)의 목소리와 노래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빠져들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잃어버린 하루가 발렌타인 데이였다는 설정이지만, <1초 앞, 1초 뒤>에서는 지역 축젯날로 바뀌었다. 영화의 배경은 '천년의 도시'라고 불리는 교토인데, 지역적인 특성을 살리면서 판타지 장르와도 더욱 어울리기도 한다. 전통이 깊은 도시의 지역 축젯날에는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영화는 화자를 바꾸어서 동일한 이야기를 두 번 전개하는데, 화자의 시점에 따라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 템포 빠른 하지메는 로맨틱한 하루를 보내지만, 한 템포 느린 레이카가 지켜본 하지메의 하루는 그냥 사기꾼에게 돈을 뜯기는 과정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1초 만에 지나버린 하지메의 하루와는 달리 레이카는 24시간을 알차게 보내게 되는데, 이 부분은 사실 원작보다는 살짝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원작에서는 조금 더 추억을 찾아가는 아련한 느낌이 강했다면, <1초 앞, 1초 뒤>에서는 저렇게까지? 싶을 정도로 레이카의 고군분투가 조금은 소름 끼치게 느껴지기도 한다. 로맨스 영화라는 점을 계속 상기하면서 봐야한다.
#3. 궤도 이탈자
개인적으로는 가출했던 하지메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하지메의 아버지는 레이카와 비슷하게 남들보다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국수에 넣을 생강을 사러 간다고 나가서는 집에 돌아오지 않은 실종자다.
그는 자신의 속도로는 세상을 따라갈 수 없기에, 자신만의 템포로 살아가기 위해서 집을 떠났다고 고백한다. 앞에 언급했듯 이 영화는 사회적인 속도에 관한 이야기를 깔고 있는데, 그는 사회 궤도 밖으로 아예 벗어나 버리는 것을 선택한 사람을 의미한다.
정속으로 살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삶은 녹록치가 않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저 앞에 나가 있고, 나는 이제야 마음먹었고 시작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은 수월하고 능숙하게 해내기만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답답해하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국 궤도를 이탈하는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이들에게 영화 <1초 앞, 1초 뒤>는 물리적인 하루를 선물한다.
만약 시간이 나를 위해 잠시 멈춰준다면, 다른 사람과 발을 맞춰서 갈 수 있을까?
#4. 잃어버린 인연을 다시 찾는다면
레이카는 멈춘 하루 동안 하지메를 추억의 장소로 데리고 간다. 함께 사진을 찍고, 못 봤던 얼굴을 실컷 마주보기도 한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조금 의문이 드는 부분이지만, 항상 그보다 두 발짝 느린 그녀는 그와 보내고 싶었던 시간을 마음껏 보내고 즐거운 얼굴이다.
하지메는 사라진 하루의 행방을 쫓다가 결국 그녀가 누군지 알아낸다. 그녀는 그를 잊은 적 없다. 어릴 적 자신을 살게 해주었던 친구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고 있었고, 그가 일하는 우체국에 가서 매일 우표를 사서 자신을 잊은 그에게 편지를 부친다.
하지메는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도 빨랐고, 레이카는 약속을 잊기에도 너무 느릴 뿐이다. 하루를 잃어버린 대가로 하지메는 잃어버린지도 몰랐던 인연을 다시 찾게 된다. 하지메는 빠르게 레이카를 만날 수 있는 지점으로 전근하고, 사고를 당했던 레이카는 한발 늦게 우표를 사러 온다. 다른 속도로 살아가도 기억은 그 자리에 모두 남아있었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인연을 잃어버린다. 시절 인연이라고,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내 속도로 잡아놓을 수는 없기 마련이다.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 인연을 찾을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영화는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결국 속도보다 마음과 방향성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5. 생강을 넣을까 말까
하지메는 엄마와 국수를 먹다가 아버지가 사러 나갔던 생강 이야기를 나눈다. 국수에는 생강을 넣으면 전체의 맛이 변해버린다고, 넣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
그런데도 하지메의 아버지는 멈춘 하루를 이용해 집에 들러서 아내의 손에 생강을 쥐여준다. 하지메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겠다고 했기에, 레이카에게 100엔을 남긴다. 매우 늦었지만 나름 이전 가족들에게 남기는 마무리 인사다.
어떤 사소한 것들은 우리 삶 전체를 흔들어버리곤 한다.
생강, 깁스 위의 낙서, 그리고 사진 한 장처럼.
*본 리뷰는 씨네랩의 크리에이터 시사회에 참석하여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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