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3-25 11:31:23
3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2024 첫 천만 영화 등극
2024 첫 첫만 영화! 오컬트 장르 첫 천만 영화!
최민식 배우 <명량>이후 두번째 천만 영화!
유해진 배우 네 번째 천만 영화!
김고은 배우 데뷔 12년만의 첫 천만 영화!
이도현 배우 스크린 데뷔 첫 천만 영화!
[국내 박스오피스 순위]
영화 <파묘>가 올해 들어 개봉한 영화로는 처음으로 천만 영화 반열에 올랐습니다.
또한 오컬트 장르 증 최초의 천만 영화이며, 비수기로 꼽히는 설 연휴 직후에 개봉한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배우 최민식은 <명량> 이후 2번째 1000만 영화 주인공이 됐고, 이도현은 스크린 데뷔작으로 1000만 배우가 되는 행운을 안게 되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순위]
<고스트버스터즈: 오싹한 뉴욕>이 개봉주 1위에 올랐습니다. 영화는 고대 유물의 사악한 힘으로 빙하기에 이르게 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버스터즈들이 힘을 합쳐 펼쳐지는 모험을 담았으며, ‘뉴 고스트버스터즈’와 ‘오리지널 고스트버스터즈’가 짜릿한 팀플레이를 펼치는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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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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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파동이었던 것들
성인이 되고도 한참 시간이 흘렀건만, 과학과 수학 과목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고등학생 시절의 내가 가끔 고개를 들곤 한다. 미련 못 버린 연인의 흔적처럼 괜히 슬금슬금 넘겨보는 건 물리학이나 수학 대중서. 이제부터라도 중등교육 수준의 과학을 마스터하겠다며 중1 과학 문제집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안되던 게 지금이라고 쉬이 될 리 없다. 중1 과학 문제집은 2장 정도 푼 채로 햇빛에 바래지고 있고, 친절한 대중서조차 다 이해하지 못하고 흐린 눈으로 보면서 시집 같다고 생각했다.
배운 게 있긴 하다. 특히 물질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 빛이 파동인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이 놀랐다. 파동은 과학 책에 전파 모양으로 그려진,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고만 생각했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입자는 당연히 손에 쥘 수 있는, 물성을 가진 무언가라고 생각했는데 빛도 입자라니. 막연히 입자는 물건들처럼 그곳에 놓여있고, 파동은 멀리서 너울너울 전해져 온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틀린 감각은 아니다. 파동은 무언가를 매개체 삼아 다가온다. 물을 타고 파도가 넘실넘실 다가오고, 공기 속에서 소리는 퍼져 나간다. 그리고 오래 전의 별빛은 오늘의 밤하늘을 채우고 내 눈 안에 고인다.
시간과 기억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의 어떤 순간도, 그 사건 속 사람들도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 속에 위치하는 건 아닐까. 꼭꼭 닫혀 교과서에 정리된 과거의 사건 같은 건 실은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단단한 입자 같지만 실은 파동이어서, 별빛처럼 파도처럼 어디선가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전태일 열사가 노동권을 부르짖으며 분신하고도 50여 년이 흘렀다. 그의 죽음은 이제 교과서에도 실린 역사가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평화시장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생겼고, 못다 한 일을 이뤄달라는 아들의 유언을 들은 어머니는 모든 노동자의 '이소선 어머니'가 되었다. 한참 전의 일들이지만, 그 시기를 톺아보는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도 파동처럼 이제 우리에게로 온다. 1977년 9월 9일에 출발한 파동이,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와 2021년 DMZ다큐영화제 등을 거쳐 2022년 1월 개봉하기까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푸른 하늘 아래 야외에서 해사하게 웃으며 미싱을 돌리는 중년의 여성들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미싱을 돌리기 시작한 때는 '여자들'이라기보다 '아이들'에 더 가까운 나이였다. 12세에서 16세가량의 소녀들. 더러는 가난 때문에, 더러는 여자아이에게 공부를 시킬 필요가 없다는 구시대의 편견 때문에, 평화시장에서 미싱을 돌리기 시작했다.
영화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찾아온 사건을, 그리고 그 안에서 이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천천히 함께 돌아본다. 객관적인 정보를 쏟아내듯 제시하기보다, 사진과 인터뷰를 풍성하게 활용해 그날의 그림을 그린다. 내겐 1977년 9월 9일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전혀 배경 지식이 없었지만, 영화를 따라가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선명한 그림이 남았다.
피로가 극도로 쌓여도 쉴 수 없던 시절. 졸다가 때로는 손을 드르륵 박기도 하며, 잠 깨는 약을 먹어가며, 부단히 일해야만 했던 시절. 노동자의 권리나 휴식이란 것이 보장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전태일 열사는 시계를 놀랍도록 앞당겼지만 모든 변화가 단숨에 오지는 않는다. 교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성인 요금을 내며 버스를 타던 시절, 한자를 알아야만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씩씩하게 각자의 현실에 성실하였다. 학교 대신 공장으로 향했지만, 그간 배운 지식과 상식을 토대로 삼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배움의 마중물이 되어준 곳은 노동교실이었다. 한자를 가르쳐주고 은행 계좌 만들기와 입출금 해보기를 숙제로 내주고, 서럽고 힘든 상황에서 외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 준 곳. 공동체가 되어준 곳. 이곳에서 그들은 배움과 배움을 연결시켜 새로운 지혜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럽게 뭉치고 배우고 가르치고 어우러지면서, 어느새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의문을 던지고 사유하고 있었다.
사유, 그것은 마음속에 물음표가 물고기처럼 생생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능력을 이들은 갖고 있었다. 그건 70년대엔 너무 위험한 능력이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70년대 이들의 삶에 비극처럼 덮쳐온 삶의 조건들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도전 앞에 이들이 어떻게 응전했는지에 집중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의 걸음에 초점을 맞춘다. 노동교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 것, 노동교실 철거 예정일 하루 전날에 불안한 마음으로 모여든 날이 하필 9월 9일이었던 것, 하필 그날이 북한의 창립기념일이었던 것과 이소선 '어머니'라는 호칭마저 김일성 '아버지'와 대조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지금은 누구보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이들이 한때는 유리로 배를 긋거나 떨어질 각오까지 했던 것,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
그 자리에 있었던, 혹은 없었던 이들의 기억은 말에서 말로 재구성되어 파동으로 전해진다. 여전히 말만 꺼내도 눈물 나는 기억, 생각만 해도 억울한 기억도 있다. 똑같이 경찰서에 잡혀 왔어도 기본적인 권리조차 챙겨주지 않아 속옷 한 벌 갈아입지 못하고 가족도 모른 채로 한 달을 구류되어 있는 채로, 사식과 면회가 허용되었던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기억도, 따스하고 즐거웠던 기억도 있다.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과 희망, 공동체로 어우러지며 느꼈던 행복도 있다.
시대가 던진 크고 작은 부당함에 스러지지 않고, 이들은 그 모든 기억 너머 오늘에 이르렀다. 열심히 살아 오늘에 다다라서는 과거의 자신에게, 젊고 최선을 다했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냈던 그 시절에 인사를 건넨다. 여전히 단단한 눈빛으로, 말간 미소로,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상념과 함께 눈가에 어린 눈물로. 그 모습을 보다 보면 이들이 왜 노동투쟁의 역사에 함께 남아야 하는지, 이 다큐멘터리 작업이 왜 시작되어야 했는지 원점에서부터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 시절 감옥에서도 조그만 창문 너머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보았던 이들은, 지금도 환하게 웃고 차분히 말하고 서로를 본다. 그 모습을 잘 담아내어 재구성하고자 한 제작진의 노력이 영화 곳곳에서 엿보이는데, 그 장치들은 하나하나 파도가 되어, 별빛이 되어, 파동이 되어 멀리서부터 찾아와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함께 눈물짓게 한다.
21세기가 되면서 인류가 상실해가는 것 중에는 그 끈끈한 연대감도 있다. 연대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많다. 누군가가 겪는 부당한 대우부터, 심지어 쉼 없이 굴러가는 이 세대의 번아웃 현상까지 느슨한 연대로 풀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연대는 점점 낯설고, 마음이 있어도 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목소리 합쳐 구호를 외치고,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현장은 점점 스포트라이트 바깥의 공간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거나 없다. 노동자는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자주 잊고 산다. 그저 분주하고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이 영화 앞에서 나의 분주한 마음은 잠시 멈춰 선다. 많은 시간 바쁨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노동자로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흘리기 바빠 사유라고는 하지 않는 피로한 인간으로서, 이들의 단단한 눈빛과 미소 앞에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마음에는 세상을 보는 물음표가 물고기처럼 돌아다니고 있는가. 나는 나의 세상을 사유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가. 언젠가 지금 내 안에 있는 마음들이 파도쳐 어딘가에 가 닿을 때, 그 자리에서 조우할 이 앞에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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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분이라도 좋아요…매일 씁시다(!)
인터넷 매체에서 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유명 스포츠 선수나 영화배우나 감독을 만나는 일도 좋았지만 내 이름 석 자가 기사 하단에 함께 나간다는 사실은 설렘이었다. 내가 쓴 결과물이 온라인에 공개된다는 건 나를 증명하는 일이었다.(동시에 책임감이기도 했지만) 모든 기사를 잘 쓰기는 어려웠지만 내가 잘 취재하고 상대적으로 더 공들인 기사가 내 이름과 나갈 때, 그 쾌감이란! 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이다.
기자 시절이 생각난 이유는 최근 <마이 뉴욕 다이어리>(감독 필리프 파라도)를 보면서다. 작가를 꿈꾸는 조안나(마가렛 퀄리)는 뉴욕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취직자리를 찾았다. 결국 에이전시에 입사한다. 작가들이 원고를 쓰면 출판사를 연결해 주고 작가의 매니저를 하는 일. 오자마자 거물을 담당하게 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 샐린저를 맡게 된다.
샐린저는 에이전시의 대형 고객이다. 사장 마가렛(시고니 위버)은 샐린저에게 전화가 오면 조심해서 받으라고 말한다. 쓸데없는 말은 절대 하지말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의미. 유명한 작가들은 역시 어디 한구석이 깐깐하구먼!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니었다. 조안나가 우연히 샐린저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 따듯한 목소리로 자기 용건을 말하는 샐린저 씨, 아니 작가님… 뿐만 아니라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안나를 응원한다. 물론 자기가 제일 잘하는 글쓰기로.
"아침에 15분씩이라도 좋아요"
"조안나 씨는 작가지요? 그럼 쓰세요!"
"매일 글을 써야 돼요."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조안나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왜냐면 최근에 글을 쓰고 있지 않았으니까.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을 때는 불안한 미래도 꽤 해소됐다. 생각하고 쓰고 수정하고 다시 써서 완성하는 이 행위가 좋았다. 물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고 내 글에 공감하는 이가 많을수록 마음에 안식이 되었다.
글쓰는 직업에서 벗어나자 자연스럽게 삶의 활력들이 떨어지는 시간이 있었다. 꽤 길었다. 원인을 찾았다. 그중 하나는 글을 정기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거다. 올해 중반 일주일에 두 편이라도 쓰자고 마음먹었는데 퇴근하고 쓴다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샐린저의 저 말 몇 마디를 듣고 난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왜 하루에 15분을 쓸 생각을 못 했을까. 하루에 완성해야 되는 분량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다시 쓰기로 했다. 너무 부담 없이 다시 글 근육을 키우자!
<마이 뉴욕 다이어리>에서 조안나는 다양한 삶의 경험을 겪으며 마침내 본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꿈이었던 작가의 길을 다시 걷기로. “평범한 게 싫었어요. 특별해지고 싶었죠.”라는 자기의 염원처럼.
나는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글쓰기가 거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하루에 15분이라도 글을 쓰고 싶다.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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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플래쉬 / Whiplash, 2014
시간은 저의 나이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10살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입이 짧아 안 먹는 음식이 많았는데, 당시 담임 선생님은 음식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자리에 끝까지 이를 다 먹도록 했습니다.
그게 안된다면, 당사자를 향해서 의자를 던지는 등 위협도 불사했습니다.
사건은 "된장국"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필자는 입이 짧아 안 먹는 음식이 많았고, "된장국" 역시 이에 속했습니다.
담임과 "이를 먹느냐, 마느냐"로 신경전을 펼쳤으며, 담임은 '자기가 보는 눈앞에 먹어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숟가락을 떠먹고선 당당히, "오바이트(?)"를 했습니다.
영화 <위플래시>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002-2007>에서 괴팍한 편집장 "J.K. 시몬스"를 "플레처"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각인시켰습니다. (이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으로 공식적인 결과까지 이어졌고요.)
무엇보다 개봉 당시 군 복무로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쳐 아쉬웠는데, 이번 재개봉이 저에게는 운 좋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올라간 링크에도 있듯이 마지막 곡이 "업스윙윙"과 "카라반"인데도 "이 플래시"로 적어놓는 실수가 있어 이를 바꿀 기회도 겸사겸사 극장에서의 관람을 택했습니다.
그러면, 보는 것은 2번째이지만 극장에서는 처음 보는 영화 <위플래시>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는 뉴욕 최고의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에 입학한 "앤드류"를 보여줍니다.
그는 학교 최고이자 최악의 지휘자 "플레처"의 눈에 들며, 그의 밴드에 들어가 단숨에 메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날로 실력이 늘어나는 "앤드류"이지만, 점점 여자친구와 가족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며 그의 삶을 바꿀 사건이 일어나는데...
관객들의 눈에 플래시가 터진다!
1. 음악영화의 클리셰가 깨졌다?
영화 <위플래시>를 보기에 앞서 "데이미언 셔젤"의 <라라랜드2016>에서 "재즈"에 익숙지 않는 "미아"를 위해 "세바스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재즈는 싸움이고, 주도권이 쉴 새 없이 바뀌며 매일매일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건넵니다.
이런 시점에서 보는 영화 <위플래시>는 애당초 "플레처"의 일방적인 싸움으로 전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가 영화에서 줄기차게 내뱉는 대사 'Not quite my tempo'는 악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상 그가 통제하는 리듬을 의미합니다.
발버둥 쳐봤자 손바닥 안?
그도 그럴 것이 "앤드류"가 그토록 미쳐가는 자리는 사실 "플레처"가 통제하는 밴드 안에서 일어나는데요.
그가 그토록 원하는 "메인"은 "플레처"의 밴드에서 "플레처"의 말로 일어나는 일이며, 그가 손에 피가 튈 정도로 두들긴 이유 또한 "플레처"의 입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를 통해서, "앤드류"는 자신이 되고픈 "찰리 파커" 혹은 자신의 리듬이 아닌 "플레처"의 리듬에서 고군분투했음을 보여줍니다.
보통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노래"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이어주는 매개체임을 고려하면, 영화 <위플래시>는 "클리셰"를 깨부순 영화인 것입니다.
2. 스릴러 같은 음악영화
이외에도 영화 <위플래시>의 특이한 이력을 살펴보면, "공포 영화"를 주로 제작하는 "블룸 하우스"에서 제작된 영화입니다.
물론 "드라마"로 소개되지만 "스릴러"가 더 어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제작한 그 어떤 공포 영화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상황들을 전개하는데요.
바로, 관객들의 입에서 "어떡해?"가 나오며 절로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을 만들게 합니다.
극 중 누군가가 실수를 해 이를 밝히는 장면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눈을 감고서 손만 들라는 교실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며,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큰소리로 다그치는 선생님의 모습은 학교를 다녀보았으면 겪어볼 만할 상황들을 장면으로 꺼내 관객들의 공감을 일으키는데요.
이야기가 "공감"을 넘어서서 "이입"이 되는 것이먈로 가장 좋은 상황임을 본다면, 영화에서 "플레처"는 이야기를 가장 좋게 만드는 매개체입니다.
"블룸하우스"의 어떤 공포보다 무서운데?
여기에 영화 <위플래시>의 음악은 장면을 보다 풍성하게 만듭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음악은 자고로, 가사가 있어야 하는 주의인데 본 영화의 음악은 가사가 없어도 제목이 머리에 쉽게 쉽게 남는데요.
이런 이유에는 해당 음악들이 극 중 "플레처"와 "앤드류"의 사이에서 소비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으로 혼이 나는 장면에서는 "위플래시"를, 경쟁을 부추기는 장면에서는 "카라반"이 쓰이며 가사들이 없어도 관객들의 머리에 크게 남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는 완곡하지 못한 "업스윙윙"까지 아직 기억에 남는 건 영화가 이를 잘 활용했다는 것이고요.
3. <인셉션>의 팽이처럼 관객들의 탄식이 쏟아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화에서 "앤드류"는 "플레처"의 리듬에서 고군분투하는데요.
이는 마지막에서도 일어나고 맙니다.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보였던 "플레처"와 "앤드류"는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지지만 예상에 없던 "업스윙윙"이 나오며, "앤드류"는 "플레처"에게 한방을 먹습니다.
이에 자리를 비우는 "앤드류"이지만, 이내 돌아오며 곧장 "카라반"을 치는데요.
여기서, 더 이상 "플레쳐"의 지휘가 아닌 "앤드류"의 연주로 시작되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동안 영화가 "플레처"의 손으로 연주가 이어지고 중단된 것과 다르게, 이번 연주는 "플레처"도 함부로 중단하지도 못합니다.
1:1, 승패를 결정지을 "위플래시"는 누구에게?
결국, 영화는 "위플래시"를 관객들에게 이 대결의 승패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직, 소리로만 들려주고는 누구의 템포로 시작했는지의 모습은 장면으로 보여주지 않아 <인셉션>의 팽이처럼 관객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업스윙윙"이 "플레처"의 승리였고, "카라반"이 "앤드류"의 승리로 동률을 만들었으니 이들의 승패가 결정지을 "위플래시"의 결과가 사뭇 궁금해지는 것은 비단, 저만은 아닐 겁니다.
그렇게 <위플래시>가 결말을 지었듯이 앞에서 말씀드린 저의 된장국 결과도 말해야겠죠.
"된장국"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먹는 음식은 아닙니다. 결국, 저는 된장국을 선생님 보는 앞에서 밥 말아먹었습니다.
식판을 들며 국물까지 싹싹 긁어서 먹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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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소년, 혜성의 꼬리를 잡다
감독: 제이크 밴 왜거너
출연: Emma TREMBLAY, Jacob BUSTER
시놉시스: 여고생인 잇치는 부모님과 함께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사하게 된 후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잇치는 학교에 우주복을 입고 다니는 괴짜 남학생 캘빈을 알게 되고, 뉴욕에 갈 수 있는 학생 저널리즘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 캘빈의 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 그의 괴상한 계획에 동참한다. 캘빈은 사실 제스퍼 혜성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십여년 전 제스퍼 혜성이 왔을 때 그의 부모님이 ‘외계인에게 납치됐기’ 때문이다. 긴 제목만큼이나 발랄한 기운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트라우마를 안고 성장한 십대가 마침내 받아들이게 되는 아픈 현실과 외계인에 대한 판타지 모두를 끌어안는다.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를 연상시키는 판타스틱한 첫 장면부터 알콩달콩한 십대 소년 소녀들의 좌충우돌 모험기까지, 틴에이지 무비의 정석을 따라가는 동시에 미국적인 낙관주의로 가득한 작품. (최은영)
바야흐로 우주시대가 펼쳐졌다지만 우주선이 정말로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원과 에너지가 든다. 우주선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주'선이 되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어머니 행성의 끈질긴 만류를 뿌리쳐야만 한다는 소리다. 그래야만 궤도를 벗어나 진짜 우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우주선만의 사정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려면 기존에 자신이 머물던 곳(세상, 관념,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그 유명한 <데미안>의 글귀처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하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그렇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세계를 깨부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에 불어 닥치는 폭풍은 그 중 가장 보편적인 '알 깨기' 통과 의례일 것이다. 오늘 소개할 영화도 바로 이러한 시기를 거치는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 도시 소녀, 우주 소년을 만나다.
평생 도시에 살 것만 같던 잇지는 어느날 갑자기 시골 한복판의 다 쓰러져 가는 마을로 이사간다. 그가 공들여 가꿔 놓은 삶의 일부는 도시에 남겨두고 온 것만 같고, 기자가 되겠다는 꿈도 그로부터 몇 마일은 멀어진 것만 같다. 곁에 있는 거라곤 모험기에 심취한 성가신 동생과 과할 정도로 금슬이 좋은 부모님과 다 무너져가는 집 뿐. 아, 그는 정말이지 돌아가고 싶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잇지는 도시로 돌아갈 기회를 찾는다. 그것은 바로 그가 사는 마을에서 가장 '기묘한 대상'을 취재해 '저널리즘 대회'에 공모하는 것. 너무나 도시로 가고팠던 잇지는 학생 신문사 편집장인 헤더의 조언에 따라 학교에서 가장 이상한 괴짜, 캘빈 케플러에게 접근한다.
2. 소년, 혜성을 쫒다
외계인이 자신의 부모를 납치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캘빈은 언제든지 부모님과 함께 우주로 떠날 수 있게 우주복을 입는다. 홀로 사는 그의 집은 우주기지가 된 지 오래고, 기지의 벽에는 혜성과 별 사진들이 빼곡하다. 한편에 줄지어 놓인 컴퓨터 모니터에는 우주의 신호를 탐지하는 곡선이 넘실거린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하늘로, 하늘로 향해 있다. 언젠가 부모님이 제스퍼 혜성을 따라 돌아오는 날만을 기다리며,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괴짜라고 무시하고 폄하한다고 해도.
잇지는 이런 저런 모험과 사건을 함께하면서 캘빈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순수한 열정과 재능, 그리고 부모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소년이 이토록 우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사연까지. 피차 페블폴즈에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던 잇지가 그의 가장 친밀한 이해자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별과 우주와 혜성에 대해 논하는 사이 두 사람의 사이는 아주 긴밀해진다.
3. 알을 깨고 나오기
꿈과 낭만은 언제나 지독한 현실의 방해를 받는 법이다. 잇지는 캘빈에게 그의 '잠입 취재' 사실을 들키고, 캘빈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의 믿음 혹은 기대와는 미국 어느 한편에 살아 있었으며 그 자신의 꿈과 삶을 위해 아들을 버리고 떠나갔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인생 최대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사정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한 진심과 꿈에 대한 열의로 다시금 일어서고, 마침내 제스퍼 혜성을 찾는다. 그리고 캘빈이 그토록 그리던 아버지도! 그리고 캘빈은 비로소 그를 10년 넘게 족쇄처럼 잡아두었던 '혜성'과 '잃어 버린 부모님'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삶 살아나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청소년 성장 서사를 다룬다. 잇지와 캘빈은 서로를 마주함으로써 자신이 기존에 고수하던 세계(그러니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잇지'와 '캘빈'이라는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잇지는 캘빈을 통해 페블폴즈에서의 삶의 즐거움을 깨달았고, 캘빈은 잇지와의 여러 사건들을 통해 부모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홀로서기를 한다. 마침내 그들이 그들만의 로켓을 궤도 밖으로 쏘아 올린 것이다.
SF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유쾌하고도 독특한 소녀, 소년들의 성장기를 좋아한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가끔은 우주적인 상상과 몽상에 빠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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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고 불안한 우리가 90년대의 낭만으로 회귀하고 싶을 때
**스포일러 포함 리뷰**
여름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뜨거운 열기처럼 타올랐다가 사라진 사랑을 담아낸 <콜미바이유어네임>, 청량한 그리스의 배경이 담긴 <맘마미아>, 푸르른 녹음을 비롯한 사계절의 풍경이 오롯이 담긴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 다양한 영화가 있지만, 나에게는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 <중경삼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중경삼림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사실 영화의 유명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내용을 보고 실망을 좀 했었다. 당시에는 영화의 영상미보다는 서사에 좀 더 집중하고 봤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도시인들의 외로움과 쓸쓸함, 고독함이 공허한 사랑 타령으로 점철된 느낌을 받았달까. 하지만 내가 중경삼림의 매력에 완전히 빠지게 된 건, 두 번째 감상부터 시작되었다. 늦은 여름 밤에 약간의 감수성에 젖어있던 나는 이 영화가 불현듯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여름밤의 선선한 공기와 함께 영화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중경삼림에는 네온사인이 빛나는 화려한 도시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군중들과 대비되는 개인의 고독함이 탁월하게 표현되어 있다. 왕가위 감독은 이러한 복잡하고 오묘한 감정을 헨드헬드 촬영 및 슬로우모션, 리듬감있는 편집, 다채로운 색감 등으로 세련되게 표현했다. 이러한 중경삼림 특유의 센티멘탈리즘과 촬영 스타일은 현대에도 유효해서 왕가위 영화의 마니아들을 아직도 끊임없이 양산 중이다.
중경삼림은 모든 장면이 아름답지만, 특히 인상깊었던 장면은 경찰 663과 메이가 처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저 멀리서부터 페이가 일하는 가게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경찰 663의 모습은 그가 음식을 주문할 때까지 끊이지 않고 한 번에 이어진다. 별다른 편집 없이 인물이 가까이 다가오며 자연스럽게 클로즈업으로 이어지지는데, 이를 통해 양조위의 아름다운 비주얼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등장 자체를 더욱 인상깊게 만들어냈다. 또한 이 장면을 메이의 시점 숏으로도 볼 수 있는데, 짝사랑 상대를 바라볼 때 눈을 떼지 못하고 사로잡혀있을 수 밖에 없는 그 심리가 롱테이크를 통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이후 흘러나오는 ‘California Dreamin’ 사이로 대화를 하게 된 둘은, 경찰 663의 실없는 농담을 기점으로 서로에게 친밀감을 쌓아간다. 이후 두 인물이 경찰 663의 집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도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경찰 663은 페이가 몰래 놓고간 이 CD를 전 연인이 좋아하던 노래로 착각한다. 그렇게 페이가 즐겨듣던 ‘California Dreamin’은 경찰 663이 전 연인에 대한 그리움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만든 매개체이면서도, 영화를 상징하는 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영화가 현재에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이러한 영상 스타일뿐만은 아닐 것이다. 우연한 만남과 이별이 빠르게 이뤄지고, 옛 연인과의 추억과 그리움이 깃든 물건에 대한 집착하는 등 영화를 관통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홍콩 반환이라는 변화의 흐름 안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저마다의 사랑을 찾기 위해 분투했던 청춘들의 이야기는 현시대에도 유효하다. 짧게 스쳐지나간 만남들 속에서도 잊지 못할 순간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경삼림은 휘발되지 않을 청춘의 초상을 기록한 작품과도 같다. 왕가위 감독은 찰나의 순간들을 통해 인연의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을 필름에 담아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도시의 고독을 느낄 때면 언제든 90년대의 낭만으로 회귀할 수 있는 안식처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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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에게
친애하는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에게.
영화 해피엔드(HAPPYEND) 리뷰
네오 소라 감독의 첫 장편영화 《해피엔드》를 극장에서 본 지 몇 주가 지났건만, 그 여운은 여전히 잔잔하게 마음에 머물러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 영화를 자꾸만 떠올리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사운드트랙의 매혹적인 힘 덕분이다. 평소 1960~80년대 영국 밴드 음악이나 재즈를 즐겨 듣는 편이라 테크노 장르엔 익숙하지 않은 편이지만, 《해피엔드》는 그런 개인적인 음악 취향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켰다. 사실 음악이 좋다면, 장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신의 흐름과 감정선에 따라 클래식과 테크노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운드트랙은 각 장면을 더욱 풍부하게 채워주며, 영화의 정서와 이야기를 고조 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아직 이 영화를 만나보지 못한 이가 있다면, 꼭 극장에서 경험해보시길 권하고 싶다. 단순히 보는 것 이상으로 사운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누적 관객 수 10만 명 돌파를 축하하며, 미뤄두었던 리뷰를 남겨본다.
하나, 꽃 화(花): 음악으로 피어난 열정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미성년자인 유타와 코우는 출입이 제한된 클럽 앞을 서성인다. 그러다 작은 잔꾀를 부려 클럽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이들에게 다른 유흥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클럽에 몰래 들어온 이유는 오직 하나 음악 뿐이다. 점멸하는 스트로브 조명 속, 무대를 장악한 DJ를 천진하면서도 동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시선은 DJ가 아닌 그가 빚어내는 사운드, 그 마법 같은 리듬에 닿아 있다. 지금 이 순간 음악은 이들의 전부다. 그리고 그 열정은 클럽 안을 넘어 현실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둘, 모양 양(樣): 음악연구동아리라는 울타리
음악이 아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지폈다면, 음악연구동아리는 그 열정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이 울타리 안에서 함께 어울리고,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하며 그럭저럭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낸다. 영화 초반, 유타와 코우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음악은 곧 서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의 전부다. 하지만 그 아늑하고 안정적이던 울타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그 너머의 사회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서부터다.
영화는 가까운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 사회는 기존보다 훨씬 노골적인 방식으로 소수자와 약자를 분리하고 배제한다. 재일 교포 4세인 코우, 미국인 아버지와 떨어져 일본에 사는 톰, 중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대만계 혼혈 밍, 또래보다 왜소한 체격의 아타, 그리고 무관심한 부모 아래 자란 유타까지. 이전까지는 음악이라는 공통의 열정이 아이들을 하나로 묶었지만, 각자의 배경을 기준 삼아 서열을 매기는 사회에서 동아리는 온전한 울타리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몸담고 있던 작은 세계는 사회의 기준 앞에서 점점 위태로워진다.
재난을 빌미로 한 감시와 억압
일본 사회는 오랜 시간 지진이라는 재난을 반복적으로 겪어왔다. 그 경험은 내진 설계나 대피 요령 같은 현실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했지만, 사람들 마음에는 언제 또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이 깊이 뿌리내렸다. 이 불안은 사회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혼란이 커질수록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나 권력은 그 불안을 해소할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정부는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감시를 강화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는 물리적 폭력을 앞세운 전통적 공포 정치와는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는 재난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고 이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유지한다. 공포는 정권을 향하기보다는, 약자를 향하도록 유도된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공포를 통한 지배는 여전히 유효한 정치 수단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코우는 어느 순간, 차별을 너무도 당연하게 수용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한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차별이라는 감각에 대해서 곱씹게 된다.
셋, 해 년(年): 시간의 흐름과 관계의 변화
둘의 시간을 잇던 빨간 대교
다섯 명의 멤버 중에서도 유타와 코우의 관계는 유독 애틋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주관적인 인상일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이런 친밀함이 어떤 감정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 역시 청소년기,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가장 즐겁고 유쾌했던 시절을 보냈으니까. 그리고 그 무리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더 각별하게 마음이 통했던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까무룩 밤이 새도록 일탈을 벌인 뒤, 동이 트는 새벽 대교 위에서 유타는 장난스레 “사랑해”라고 외친다. 그 말에 진저리를 치며 웃던 코우. 결국 유타는 끝내 코우의 입에서도 “사랑해”라는 답을 받아낸다. 짧은 시퀀스지만, 두 사람의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가장 가까웠던 관계에도 서서히 틈이 생긴다. 청소년기에는 흔히 겪는 변화다. 특히 코우는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해졌던 차별과 배제에 점차 의문을 품기 시작한 듯하다. 다만 그동안은 너무 어렸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기에 그런 문제를 깊이 고민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사회적 자각과 일련의 성장통을 겪으며, 우정보다 더 큰 질문들이 고개를 든다.
나는 왜 학교에서 소외되어야 하는가?
학생들은 왜 학교라는 모든 공간 안에서 감시받아야 하는가?
나의 어머니는 왜 차별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학교는 왜, 사회는 왜?
이런 부조리함에 온점이 아닌 물음표를 찍기 시작하면, 문제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된다. 코우가 자신의 급우이던 운동권 소녀 후미와 교류를 시작한 것도, 학교의 불순한 감시 체제와 시스템에 대하여 묵과하지 않고 교장과의 대립을 세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넷, 빛날 화(華) : 화려함, 빛남, 번성함
아이들은 졸업을 앞두고 각자의 갈림길에 선다.
톰은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을 떠나고, 코우는 자신이 겪어온 차별에 맞서 함께 저항할 새로운 이들과 만나며 삶의 동력과 시위의 효능감을 발견한다. 대학 장학금을 받는 경사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유타와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진다. 한편 유타는 교장의 차 사건을 계기로 퇴학당하고, 삶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주어진 환경과 삶의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각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며 어른이 되어간다.
영화 해피엔드(HAPPYEND)의 의미
네오소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큰 세계와 작은 세계.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로 보면 끝(END)이지만, 주인공들의 우정은 행복(HAPPY)이지 않나. 서로 다른 두 개가 맞물리는 감각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 출처: 맥스무비 인터뷰어른이 된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자연스레 영화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어쩌면 학교 안의 디스토피아보다 더 숨 막히는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 밖의 세상은 결코 보드랍지 않다. 특히 소수자와 약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부끄럽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코우는 안다. 세상을 바꾸는 움직임과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개인에게 얼마나 깊은 잔상을 남기는지를.
이미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배워온 진실이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갈 미래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끝(END)이 진짜 끝이 되지 않도록, 그는 앞으로도 목소리를 낼 것이다.
다섯, 화양연화(花樣年華) 그 찬란한 기억
지치고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면, 행복(HAPPY)을 떠올리자.
우리는 언제 가장 뜨겁고 빛났을까?
어떤 순간은 찰나였지만, 영원처럼 기억된다.
삶을 살다 보면 곤혹스럽고 고단한 시간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에겐 돌아볼 수 있는 찬란한 기억이 있다.
오로지 좋아하는 것만을 쫓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했던 시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은, 그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살아남아 위안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들만의 그 추억만큼은 분명, 해피엔드(HAPPY END)라는 말로 남겨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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