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4-12 17:42:15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노 베어스>
카메라의 위치는 우리가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 베어스> No Bears, 2022, 이란, 드라마
감독: 자파르 파나히
고백하건대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노 베어스>
박티아르(남편)가 가게에서 일하는 자라(아내)를 급히 불러낸다. 그는 아내에게 훔친 여권을 건네며 먼저 프랑스로 떠나라고 사정한다. 자라는 남편이 없는 삶은 의미 없다며 그의 호소를 단호히 거절한다.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괴로워하던 남편은 행인과 시비가 붙고, 격한 감정을 토해낸다. 그 순간 카메라가 쭉 멀어지면서 화면 안으로 조감독 레자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멀어지고, 마침내 노트북으로 화상 연결 중인 파나히 감독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티아르와 자라는 감독이 찍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연기 중인 배우들이었다.
그는 현재 국경 인근의 작은 마을에 숨어있다. 촌장님의 소개로 간바라(집주인)의 방을 빌렸고, 인터넷이 끊기기 전까지 방 안에서 일주일 내내 영화 촬영만 진행했다. 사실상 촬영 말고는 와이파이가 설치되지 않은 마을에서 다른 할 일이 없던 그는 예비부부의 발 씻기 행사에 간다는 간바라에게 카메라를 건네며 녹화를 부탁하고, 자신도 카메라를 들고 옥상으로 나간다. 아랫집 입장에선 안방 천장인 옥상에서 감독은 훗날 엄청난 폭풍의 씨앗이 될 사진을 찍는다.

그날 밤, 간바라는 오전에 들고 갔던 카메라를 감독에게 돌려준다. 녹화 영상 안엔 감독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신랄한 평가가 들어있었고, 대부분 감독을 의심하고 있었다. 감독은 국경을 넘으려고 숨어 들어온 사람이며, 마을의 골칫거리가 될 운명이었다. 뒷담화 영상에 당황하는 간바라와 달리 감독은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영상을 보고 또 볼뿐이다.
빛 한 점 없는 밤, 레자가 촬영본이 든 하드 디스크를 갖고 감독을 몰래 찾아온다. 감독은 레자의 설득에 밀수업자들만 이용하는 도로를 지나 국경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언덕에 올라간다. 그들이 선 곳은 이란과 튀르키예의 국경이었고, 감독은 그 사실을 안 순간 조감독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로 돌아간다. 자국(이란)의 출국금지와 영화 제작 금지 명령을 받은 감독이 국경을 넘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국경 마을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명료하다. 마을이 영화 촬영지(튀르키예)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영화 내내 유지된다. 오직 ‘촬영’만이 감독을 동요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그 누구도, 어떤 사건도 그를 흔들지 못한다. 이는 마을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집요한 행동 방식과도 연결되며, 관객을 향한 <노 베어스>의 일관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젊은 여자를 시작으로 감독은 마을 사람들이 예견한 미래에 빠르게 도달한다. 간바라의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감독을 찾아와 젊은 남녀의 사진을 찍었냐고 묻는다. 촌장은 마을에서 갖는 자신의 위신을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사진을 달라고 한다. 감독은 젊은 남녀의 사진을 찍은 적 없다고 짧고 굵게 대답한다. 그의 세계에선 “컷!”이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있는 곳은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미래의 남편 이름으로 탯줄을 자르는 전통을 목숨처럼 여기는 마을이다. 스스로를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라 주장하며, 어떠한 위협도 용납하지 않는 자들을 그가 무슨 수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간바라의 빠른 눈치로 국경에 몰래 갔다 온 일은 숨겼지만, 관습으로 엮인 남녀가 아닌 진짜 사랑으로 맺어진 연인을 기록한 행위는 모른 척 묻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저항할 힘을 갖고 있어도 쓸 수 없는 무력한 이방인과 달랐다. 스스로를 그렇게 굳게 믿었기에 마을 사람들과의 입씨름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사태가 점점 난폭해지고 심각해지자, 촌장은 감독에게 맹세의 방에 가서 사진은 없다고 선언할 것을 요구한다. 촌장에겐 마을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장 여권을 구하는 부부의 상황’과 ‘국경 인근 마을에 숨어 영화 작업 중인 감독의 환경’은 <노 베어스>의 주축이 되는 이야기들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수시로 전환되며 진행됐다. 전자는 감독이 창작한 허구, 후자는 실제 상황이었으며 서로의 사건에 관여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별 탈 없이 쭉 이어졌다. 대본대로 알맞게 연기하던 주인공들이 갑자기 감독에게 말을 걸고 분노를 표출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었다. 박티아르와 자라의 생존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약혼식을 촬영한 간바라와 맹세의 방에서 ‘맹세하는 나’를 담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한 감독처럼, 자기들의 삶이 영화화되는 것을 허락했다. 해피엔딩은 없었다. 박티아르의 여권은 가짜였고, 자라는 끝나지 않는 절망과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바다에 뛰어들었다. 맹세하는 것조차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겠다고 우긴 감독은 마을의 전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다, 기어이 평화로운 마을을 폭력과 의심으로 얼룩지게 했다. 두 이야기의 마침표는 철저하게 ‘감독이 촬영한다는’ 전제하에 고려된 결괏값이었다.
분명 부부와 감독의 이야기는 진짜였다. 카메라의 빨간불에 노출된 채 아내의 시신을 마주한 남편과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강가에 죽은 채로 발견된 연인(사진 속)의 모습이 이를 증명했다. 두 이야기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완성되었지만, 이러한 시각은 지극히 표면적이며 단편적일 뿐이다. <노 베어스>의 초점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도 만들어진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를 구성하는 ‘말과 행동’에 있다. 감독이 내놓은 결과물보다 그가 주인공으로서 행한 모든 방식이 더 중요하다. 초반에 일상 대화처럼 지나갔던 “자라, 감정을 절제해요.”란 감독의 한마디가 “곰은 없어요.”만큼이나 치명적이고 가혹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인물들이 전부 각자의 경계선을 지키기 위해 마음대로 타인의 선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베어스>는 그 선의 실체를 관객에게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의 위치가 우리가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모든 이야기의 끝, 마지막 장면 그 뒤에 있다. 경비대가 오기 전 서둘러 마을을 떠나던 감독이 죽은 연인을 보고 차를 세운 순간이다. 그는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국경을 넘지 않은 이유와 같은 걸까? 아니면, 인간으로서 갖는 죄책감 때문인가? 어찌 됐든 감독은 두 이야기를 비극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마을 사람들은 또 어떤가? 역시 같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감독은 부부의 세상을, 마을 사람들은 감독의 세상을 침범했다. 그들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젊은 연인의 사진이 영화 속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박티아르의 가짜 여권과 자라의 시신이 두 눈에 박힌 적이 없는 이유와 같다. 영화 속 감독은 어느 순간 멈춰 섰고, 이야기는 끝났다. 주인공이 카메라를 들지 못했기에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인물인 ‘그’ 역시 포기했다는 뜻인가? 혼란과 혼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노 베어스>는 한 가지 팁을 건넨다.
역시나 집요하고 일관된 태도로, “곰은 없다”라고.
‘곰이 없다’라는 말은 ‘맹세의 방으로 향하는 길에 곰이 있다’는 말에서 왔다. 맹세의 방은 신성한 공간이다. 신성한 곳으로 향하는 길목엔 항상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은 사람들이 생산하는 공포로 몸집을 부풀린다. 따라서 맹세의 방에서 고백하는 모든 말은 틀림없는 진실과 사실로 확정된다. 문제는, 마을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를 넘은 탓에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평화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도 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맹세의 방을 정당화의 도구로 쓰고 있었다. 난제를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 고작 입만 움찔거리는 맹세라니. 맹세의 방으로 가던 감독을 불러 세워 두려움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하며, 거짓말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한 마을 주민의 말이 더욱더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노 베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파나히 감독의 뒤에 서서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본 작품이 영화인지 아닌지 묻는다. 나아가 영화라면 어디까지 영화이고, 영화가 아니라면 어디까지 영화가 아닌지, 경계를 정해보라고 요구한다. 관객을 자꾸만 두리번거리게 하고, 카메라의 빨간불을 찾게 만든다. 빨간불이 계속 깜빡였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의 충돌을 계속 부추긴다. 물론 본 작품이 주인공(파나히)과 똑같은 상황에 있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만의, 자국의 탄압에 대한 저항 운동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관객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할듯싶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해야겠다는 강인한 의지 사이에 핀 <노 베어스>.
고백하건대 세상에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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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 보여주기, 더 보여주기. 실화의 <노웨어 스페셜>
***스포일러 없습니다.
전작 <스틸 라이프>로 베니스 영화제 4관왕에 오른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새로운 작품 <노웨어 스페셜>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사실상 첫 데뷔작인 다니엘 라몬트와 차기 제임스 본드의 유력 후보로 화제를 모으며 <작은 아씨들>, <미스터 존스>에서 이미 연기력을 입증한 제임스 노튼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만큼 많은 매력 요소들을 가진 이 영화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관전 포인트를 몇 가지 나눠보고싶다.우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시작은 신문이었다. 신문을 보던 감독 우베르토 파솔리가 한 아버지가 불치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어린 아들과 함께할 새로운 가족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보고 영감을 받아 영화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는 침착한 성격의 창문청소부 ‘존’과 그와 닮은듯한 네 살짜리 아들 ‘마이클'은 과연 새로운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새로운 가족을 찾는다는 것엔 어떤 부모를 만날 것인가, 가족의 형태는 어떠해야하는가, 입양이라는 문제까지 확장시켜 질문을 던진다.
매번 각기 다른 형태의 창문을 닦는 존의 시야에는 창문 너머의 세상과 창문에 비춰지는 세상이 담긴다. 때로는 푸른 하늘 가운데 몽실한 구름, 창문 너머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평범함조차 존에게는 투명한 벽과 같이 닿을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진다.
네 살짜리 아이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존의 모습에는 단순한 가르침 이상의 감정들이 담겨있다. 많은 대사들로 감정을 표현하고 관객들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 영화가 아니다. 죽음을 앞둔 부자의 침묵 속에 이들의 진정성은 깊어진다. 영화는 죽음으로 시작을 하여 아들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것부터 시작해 새로운 관계맺음과 부자 간의 관계의 작은 감정선까지 섬세하게 풀어낸다.죽음으로 시작해 부자 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노웨어 스페셜>은 오는 12월 29일에 개봉한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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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내리는 밤, 꼭 봐야할 스릴러 zip
안녕하세요, 씨네픽지기입니다.
벌써 토요일이네요…!
비 내리는 밤, 축축한 공기가 서늘함을 더하죠.
서늘하고 축축한 스릴러가 생각날 때
여러분의 ‘비 오는 밤 필람 스릴러’는 무엇인가요?
❶ 아이덴티티 (2003), 제임스 맨골드
❷ 하녀 (1960), 김기영
❸ 인썸니아 (2002), 크리스토퍼 놀란
❹ 마더 (2009), 봉준호
❺ 택시 드라이버 (1976), 마틴 스콜세지
❻ 프라이멀 피어 (1996), 그레고리 호블릿
❼ 미스틱 리버 (2003), 클린트 이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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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 크루즈> - ‘허무맹랑한 꿈을 진짜로 만드는 아마존 모험’
정글 크루즈 (Jungle Cruise)
개봉일 : 2021.07.28 (한국 기준)
감독 : 자움 콜렛 세리
출연 : 드웨인 존슨, 에밀리 블런트, 에드가 라미레즈, 제시 플레먼스, 잭 화이트홀
‘허무맹랑한 꿈을 진짜로 만드는 아마존 모험’
디즈니가 딱 디즈니답게 만든, 여름을 겨냥한 정글 모험 영화 <정글 크루즈>. <캐리비안의 해적>을 이을 액션 어드벤처란 말에 <캐리비안의 해적>같은 모험을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 테고, 마음을 비우고 동심으로 돌아가 모험 놀이기구를 즐기듯 즐긴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재밌게 즐기고 온 영화였는데, 전체적인 흐름상 묵직한 한방이 없어서인지 ‘무색무취’라는 불호 리뷰도 예상보다 많아서 조금 놀랐다.
<정글 크루즈>는 전설 속 달의 눈물을 찾아 떠나는 아마존 모험 이야기다. 주인공 릴리와 맥그리거 남매는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다는 전설 속 달의 눈물의 존재를 부정하는 수많은 학자들을 뒤로하고 위험한 아마존으로 향한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들었던 전설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진짜 존재한다면 수많은 아픈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면서.
릴리 남매는 조금 특별하다. 릴리는 ‘바지 입은 여자’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다른 학자들처럼 앉아서 학술회를 즐기기보단 편안한 옷을 입고 직접 모험에 뛰어들길 즐기는 인물이다. 걱정이 한가득이지만 누나 릴리를 따라서 아마존 모험에 나선 맥그리거는 학자로서의 멋과 품위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모험이 진행될수록 아마존에 적합한 행색으로 변화하며(?)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정글에선 모든 게 당신을 죽일 수 있어요.”라며 승객들에게 겁 한 바가지를 들이붓는 듬직한 풍채를 가진 ‘프랭크’는 가짜 위험과 가짜 모험으로 가득한 아마존 크루즈를 운영하는 선장이다. 당장 빌린 돈도 갚을 수 없는 팍팍한 살림살이와 다 낡은 크루즈 한 대가 그가 가진 전부다. 프랭크는 타이밍 좋게 마주친 돈 많은 손님 릴리의 모험 가이드를 승낙한다.
시선 끄는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당당한 여성 릴리와 그녀의 모습이 아직은 신경 쓰이는 선장 프랭크. 이들은 전설과 그에 얽힌 저주 속으로 뛰어든다. 많은 이를 살릴 수 있을 거라 전해지는 전설 속엔 이기심과 욕심으로 만들어진 풀지 못하는 저주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전설을 믿으려면 저주도 믿어야 한다.’는 말처럼 전설 속 달의 눈물을 얻기 위해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단단히 엉켜버린 저주를 풀어야 한다.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 모험에 뛰어든 이타적인 사람과 커다란 위험을 끌고 아마존으로 들어온 자의 대립이 끝없이 이어지고, 저주의 비밀이 조금씩 풀리며 잔잔했던 모험에 즐거운 스릴을 더한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스릴 넘치는 이들의 모험의 끝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사실 이전에 나온 모험 영화가 정말 많다 보니 이 이야기의 흐름을 아예 예상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아주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 함께 즐긴 크루즈 모험이 나는 꽤 즐거웠다.
정글 크루즈 시놉시스
미지의 세계 아마존에서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스릴을 선사하는 재치 넘치는 크루즈 선장 프랭크(드웨인 존슨). 고대 아마존의 전설을 쫓아 영국에서 온 식물 탐험가 릴리 박사(에밀리 블런트)가 의학의 미래를 바꿀 치유의 나무를 찾는 여정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하면서, 순탄치 않은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아름답지만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열대우림으로 함께 모험을 떠나고 수많은 역경과 초자연적인 힘을 마주하게 된다. 고대 나무에 얽힌 비밀이 드러날수록 릴리와 프랭크는 더욱더 커다란 위험에 처하고 인류의 운명도 위태로워지는데… 전설을 믿는다면 저주도 믿어야 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달의 눈물을 찾겠다 다짐한 박사 릴리는 모두가 믿지 않는 전설을 찾아 위험한 아마존으로 향한다. 릴리는 여자는 무조건 풍성한 치마를 입는 게 정상인 시대 배경에 굴하지 않고 편안한 셔츠와 바지, 부츠를 선택한다. 아마존과 가장 잘 어울리는 복장이지만 시대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한 릴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은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신경 안 써”라고. 이타적이고 강단 있는 여주인공 릴리는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물러나지 않는다. 현시대에 알맞게 설정된 ‘매력적인 여주인공’인 그녀는 고구마가 아닌 사이다 그 자체다.
“난 많은 사람들 돕고 싶어요.”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 달의 눈물을 찾는 릴리와 더 많은 싸움을 위해 치유 능력을 이용하려는 요아힘. 그리고 오래된 저주에 묶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프랭크와 아기레. 네 사람은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의 눈물을 찾는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 저주를 끝내기 위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각자 너무도 다른 목표지만 이들은 모두 달의 눈물을 원한다.
전설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려는 요아힘은 저주에 걸린 아기레와 동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아마존엔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달의 눈물을 지키는 부족과 형제처럼 자란 프랭크를 모두 가차 없이 찔러버린 아기레, 더 많은 싸움을 위해 치유의 힘을 이용하려는 요아임. 이기적이고 잔인한 힘을 끌어안은 무거운 잠수함이 아마존을 휘젓고 프랭크는 그를 막으려 한다. 오래된 전설과 저주의 진실이 한순간에 밝혀지고 달의 눈물을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쓰려던 인물들은 전설을 온전히 마주하지 못한다.
그에 반해 릴리 일행은 전설의 달의 눈물을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영화의 후반부, 한 개뿐이었던 달의 눈물을 써버린 릴리에게 아마존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마치 자신을 존중해 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릴리와 프랭크, 맥그리거는 아마존 강의 흐름을 역행하지 않고 그 무엇도 필요 이상으로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을 존중했고 달의 눈물을 지키는 부족원들과도 서로의 물건을 나누며 자연스레 그들의 삶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과 전설을 믿고 존중하던 이타적인 인물들은 결국 원하던 전설을 손에 얻는다. 뻔하고 당연하지만 이처럼 모범적인 결말은 또 없을 것이다.
릴리는 달의 눈물을 찾는 모험을 통해 자신이 믿는 전설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했고, 프랭크는 거짓말로 꾸며진 오래된 인생과 저주를 벗어나 진짜 소중한 것이 있는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된다. 모두가 가짜라 말했던, 가짜로 채워져 있었던 전설을 믿음과 용기를 통해 진짜로 바꿔놓은 멋진 아마존 모험이었다. (릴리와 프랭크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감정선이 두텁지 않아 조금 아쉬웠지만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갔으면 뜬금없는 로맨스 느낌이 났을 것 같아 이 정도가 최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것저것 따져보면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름 영화,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엔 충실히 복무한 영화 <정글 크루즈>. 너무 무겁지 않은, 오랜만에 동심을 깨워줄 만한 영화를 찾는다면 딱 제격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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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울음의 세계
마트 주차장에서 시작된 에이미와 대니의 시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간다. 도로 위 분노의 추격전은 상대방의 집과 사업장에 대한 소변 테러와 별점 테러로 이어지더니, 점차 집착에 가까운 복수로 변하고 만다. 에이미는 자수성가한 CEO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업과 가장의 역할로 지쳐있다. 계약은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가 산 큰 집을 누릴 시간조차 없다. 도급업자 대니 또한 가족 사업이 망한 후 다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은 실은 각자 일상에서 꾹꾹 누르며 안고 살던 시한폭탄을 우연한 기회로 서로에게 터뜨린 셈이다.
에이미와 대니는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에이미는 이민자로서 살아남아야 했던 부모님의 영향 아래 많은 것을 묻어두며 살아왔다.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에이미의 감정은 용인되지 않았고, 부정적인 경험은 오랜 시간 응어리로 남았다.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에이미는 여전히 자신의 본 모습이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남편과 딸 앞에서도 편히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대니 또한 한국계 이민자 2세로서 어릴 때 겪은 인종차별로 인해 부모님과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살아왔다. 그는 부모님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효자 장남인 동시에, 동생에게 인정받고 싶어 비열한 짓을 하는 형이다. 대니의 대사처럼 ’부모가 자식에게 트라우마를 배설한다‘면, 이들의 불행과 분노는 모두 부모 세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에이미의 남편 조지는 다정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에이미의 감정에 무관심하다. 조지는 에이미의 분노 앞에서 뜬금없는 명상이나 감사 일기 따위를 권한다. 하지만 그것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에이미의 고통을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 안에서도 조지와 에이미의 위치는 다르다. 조지는 선망받는 일본인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치열할 필요 없는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에이미가 버는 돈으로 편하게 예술 활동을 한다. 에이미는 매사 태평한 조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 많은 사람들만 돈이 안 중요하고, 부처가 부처가 된 것은 왕자였기 때문"이라고.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에서 정희진은 고통에 관해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으며, 비가시화 자체가 고통이다. 또한 자기 고통을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들어주는 이가 없고, 자신도 자기 고통을 모르기 때문인데 이는 모두 미국에서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온 에이미와 대니에게 해당된다. <성난 사람들>의 1화 제목은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이다. 가족과 제대로 된 소통을 못 하던 대니가 한인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모르는 자가, 고통을 표현할 언어가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울부짖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속에 울음이 살지만’ 표현할 길 없던 이 고통은, 언어화됨으로써 치유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의 위기 앞에 선 에이미와 대니는 속마음을 꺼내어 나누며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를 경험을 한다. 고통을 말하고 들어주는 것은 비로소 긴 울부짖음과 분노를 끝내게 만들었다. 에이미와 조지의 관계와 에이미와 대니의 관계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비슷한 모양의 흉터를 드러낸 이들은 가족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 자신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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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시선으로 특별하지 않음을 말하다.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 <나, 다니엘 브레이크>, <말아톤>, <7번방의 선물>과 같이 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국내외 영화계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앞서 예시를 든 영화들처럼, 장애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흔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해당 인물이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의 고난→ 조력자 혹은 특정 사건과 만남→ 주인공의 극복/ 희망’과 같은 클리셰를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는 관객에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혹은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고, 몰입해볼 기회를 제공하며,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방식은 영화의 전반을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영화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나 그들이 겪는 사건, 영화 전반에 걸쳐 숨겨져 있는 의도와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도를 하락시킨다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며 ‘주인공의 고난과 극복’이라는 전형적이고 반복적인 클리셰에 관객이 흥미를 잃게 될 가능성 또한 있다. 이런 ‘사회적 약자’라는 같은 소재를 가진 영화들의 어떤 공통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 속에서 영화 <나는 보리>가 갖는 시선은 특별하다. <나는 보리>는 농인을 바라본다. 소수가 아닌 다수로서, 장애인 가족이 아닌,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가족으로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소통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농인과 청인을 다르지 않은 시선에서 말이다.
1. 경계를 허무는 시선
‘코다(CODA:Child Of Deaf Adult)’는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용어로, 2020년에 개봉한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는 ‘코다(CODA)’인 소녀 ‘보리’의 일상과 그런 보리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담은 영화이다. 김진유 감독은 실제 농인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코다(CODA)’로, 영화<나는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나는 보리>의 주인공이자, ‘코다(CODA)’인 소녀 보리는 김진유 감독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보리>의 주인공인 11살 ‘보리’는 어린 시절 김진유 감독처럼 농인인 부모님을 대신해 은행 업무를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등 주로 가정 내에서 아이보다는 어른들이 하게 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영화 속 “나는 누나 귀 안 들리는 거 싫어. 치킨 못 먹어.”라는 농인 동생 정우의 대사를 통해서, 아침에 혼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등교하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서, 보리가 “내일 할아버지 집에 갈거야.”라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도 따라나서 엄마와 동생의 몫까지 기차표를 구매하고, 택시 앞자리에 탑승해 길을 안내하고,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농인인 엄마 사이에서 수화를 통역해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리의 가족들이 생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보리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있으며, 보리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떠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보리가 이러한 책임들을 도맡음으로써 결코 불행하다거나 힘겹다거나, 가족들이 보리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여 보리가 없이는 아예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불리하고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에서 보리네 가족은 따스함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화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가족 구성원 내에 농인이 없는 일반 가정보다 더욱 화목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는 은정이가 자신의 부모님은 항상 바쁘고 매번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의 심부름은 다 자신의 몫이라고 투덜대며 보리를 부러워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의 묘사는 농인인 부모님과 청인인 자녀로 구성되었지만, 보통의 가족들처럼 따뜻하고 화목했던 김진유 감독의 가정환경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화목한 가족 내에서도 왠지 모르는 소외감을 느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리’이다. 들리지 않는 부모님 혹은 동생 정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다수에 속하는 청인 ‘보리’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나는 보리>가 농인의 문화와 세상을 특별하지 않게 바라봄으로써 가지는 미덕을 돋보이게 해준다. 보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매일 아침, 자신도 부모님과 동생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며, 심지어는 소리를 잃기 위해 MP3를 최대 음량으로 키워 이어폰을 귀에 바짝 꽂은 채 음악을 듣거나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청력이 감퇴한다는 TV 속 해녀의 인터뷰를 보고 직접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러한 보리의 행동과 소외감은 일반 청인 관객들이 보기에 이질적이고 쉽게 공감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보리의 심리와 행동, 영화의 설정이 <나는 보리>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가족 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우리가 흔히 다수라 말하는 청인에 속함에도 보리가 농인으로 사는 삶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는 장애인은 약자, 청인은 일반인이라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농인의 삶을 남다르게 바라보고 불편할 것이라 섣불리 동정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보리>에는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있는 그대로의 농인을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보리는 물품을 구매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은행 업무를 보는 등 흔히 보호자가 해줄 법한 일들을 모두 맡아 하는데, 이렇게 가족들의 생활편의를 도울 뿐 아니라 보리는 사회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이는 보리가 동생 정우의 축구경기 출전과 엄마와 함께 옷을 사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생 정우 역시 농인인데, 정우는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경기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출전선수가 아닌 후보 선수로 지목된다. 이에 정우가 후보선수라는 것을 알게 된 보리는 이장님인 아버지를 둔 친구 은정이를 통해 정우가 축구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보리가 엄마와 단둘이 옷가게를 방문한 장면에서 보리는 옷가게의 직원들이 자신과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와 비하를 서슴지 않고, 옷 가격 또한 원가보다 높게 책정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후 보리는 잘못된 거스름돈을 점원에게 돌려주며 엄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신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다 보고 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보리는 가족의 도우미와 더불어 보호자의 역할도 소화한다.
그렇다면 청인인 보리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족들의 도움 없이도 모두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리가 가족을 돕듯, 보리 또한 가족의 도움과 관심,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가족과 함께 시장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부모님의 손을 놓친다. 안내방송을 해도,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 없는 부모님과 동생이기에 이들을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보리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 순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밝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보리는 처음으로 11살 제 나이 또래처럼 어린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는 이렇게 가족 내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보리 또한 가족들의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하며,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농인도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도움이 되어 주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다. 다음 소주제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나는 보리>와 유사한 작품으로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라는 음악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코다(CODA)’인 주인공 소녀가 “지금까지 가족 없이 뭘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망설이는 모습을 통해 <나는 보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자신이 가족들을 도와야 하지만 역으로 자신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청인과 농인이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는데, 결국 <나는 보리>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러한 영화의 장면들과 보리의 아빠가 보리에게 반복해서 뱉는 말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들리든, 들리지 않든 우린 똑같아.” <나는 보리>가 바라보는 청인과 농인은 연약한 존재이자 때론 강한 존재로서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다.
2. 다르고도 같은 소녀들– 영화 <코다>의 루비, <나는 보리>의 보리
<나는 보리>의 보리와 유사하게 ‘코다(CODA)’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는데, 바로 2021년 미국에서 개봉한 <코다>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보리와 루비는 모두 코다 중에서도 가족 내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자녀 'OHCODA’이자, 미성년자 코다 ‘KODA’에 속한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청인과 농인의 화합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두 영화 속 소녀의 가정 환경이나 농인의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의 선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관심이 가족들과 보내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과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면, <코다>의 루비는 졸업과 성인을 앞둔 나이로 진학과 가족의 생계 등 자신의 삶과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고민하는 데에 몰두한다. 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차이는 보리는 가족들과 동일시 되어 자신도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반면, 루비는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단순히 졸업 학년과 11살이라는 인물의 나이 차이 때문에 나타난 차이 만은 아닐 것이며, 두 소녀의 가정 환경과 제작자(감독)의 배경과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문화적 배경 또한 영화의 관점과 주인공의 선택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루비의 가족은 아빠와 오빠가 운양하는 어선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가는데, 일정치 않은 수입과 틈만 나면 중간에서 이익을 떼가는 중개업자들 때문에 루비의 진학비용 걱정은 물론, 늘 생활비 걱정을 안고 지낸다. 또한, 루비의 가족은 가족 내의 강한 유대와 결속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루비의 엄마가 식사할 때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가족의 일에는 꼭 모두가 함께 자리하게 하는 장면을 통해 루비의 엄마가 가족의 소통과 결속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거 알아? 엄마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해.”라는 루비의 대사와 “들리는 년들은 나랑 말 안 해.”라는 엄마의 대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사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은 청인과의 교류는 두려워하며 피하고, 농인에 공감할 수 있는 가족 내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엄마의 방어기제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 내의 유대를 강조하는 엄마의 행동과 자신도 부양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저절로 심어지게 되는 루비네 가정의 분위기와 환경은, 루비가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반면, 보리의 가족은 루비네 가족과 같은 입장으로, 농인으로서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분명 있음에도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의 본보기라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부모님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술비조차도 전혀 상관없다며 정우와 보리의 귀를 위해선 큰 비용지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코다>에서는 가족의 생계수단이던 낚시도 <나는 보리>에서는 보리 아빠의 오랜 취미이자, 어린시절부터 아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존재, 아빠와 보리가 속마음을 교감하게 되는 시간과 배경으로 나타난다. <코다>는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이며 원작 영화인 <미라클 벨리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었고, <나는 보리>는 우리나라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이에 루비와 보리의 선택 차이에는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의 면허취득과 독립을 맞이하는 서양의 문화와 개인주의, 그리고 한국의 가족공동체 정신과 협동, 한국의 ‘정’이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정과 사회에 대한 루비와 보리의 관점과 선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두 영화 모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물고, 화합과 이해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같다. <코다>의 경우 영화의 후반부. 음악 영화답게 음악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루비의 오디션과 대학 진학을 내내 반대하던 루비의 부모님은, 교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루비의 모습과 루비의 노래에 환호하는 관객의 모습, 그리고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듯한 루비의 태도를 보고 오디션 당일 아침, 직접 운전을 해 오디션장까지 함께 간다. 오디션장에서 루비가 부르는 노래는 “Both sids now”. 앞서 말했듯, 영화의 메인 사운드 트랙이자 주제를 나타내고 있기도 한 이 루비의 오디션 곡은 “하려던 일들이 많았지만 구름이 내 앞을 막았지. 이제 구름을 양쪽에서 보게됐어. 위와 아래에서”,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이기는 쪽과 지는 쪽에서”와 같이 성장하며 주변에 있던 것들에 대해 달라진 이해와 시선에 대한 가사를 담은 곡으로, 루비가 ‘코다(CODA)’로서 살아가며 때로는 농인인 가족이 자신의 인생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때로는 농인 가족 속에 속한 유일한 청인이 자신이 소외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던, 때로는 다른 가족들과 다른 자신의 가족이 부끄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루비가 이제는 농인과 청인의 입장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가족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노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디션 현장에 몰래 들어온 가족들을 위해 루비는 노래를 부름과 동시에 가사에 맞추어 수화를 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영화 <코다>는 루비의 성장과 이해, 농인과 청인의 교류와 화합을 완벽히 실현시킨다.
<코다>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이해와 화합에 중심을 두었다면 <나는 보리>는 서로 간의 이해와 더불어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자아정체성 확립과 농인과 청인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농인도 청인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점을 더 강조해 말한다. <나는 보리>의 미덕은 바로 이렇게 농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비장애인 가족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정서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느끼게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게 한다. 실제로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의 감정에 집중했고, 그 감정선을 따라 보리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애를 다룬 영화와 차별점을 갖게 된 것 같다.”라며 특별한 의도를 담기보단 오히려 그저 농인을 향한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영화 <나는 보리>의 후반부에서, 보리는 시장에서 구매했던 부적인 ‘악마의 눈’을 바다에 던지는데, 이러한 보리의 행동을 통해 일시적이지만 농인의 입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경험해본 보리가 더 이상 가족에 대한 타인의 차별적인 시선이나 편견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코다(CODA)’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확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보리>는 보리가 도로와 바다 사이 좁은 방호벽 같은 길 위를 양팔을 벌린 채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며 마무리되는데, 도로도 바닷가도 아닌 사이 도로 방호벽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보리의 모습을 통해 농인과 청인 사이에 놓여있는 ‘코다(CODA)’ 보리의 정체성과 농인과 청인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완성한다.
3. 보리가 보여주는 농인의 세상
<나는 보리>에서 보리는 가족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마음에 농인이 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물에 귀를 자주 담그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TV 속 해녀의 말에 직접 바다에 뛰어들며, 이상 없이 무사히 구조되었음에도 보리는 이후로 계속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척, 자신도 농인이 된 척 행동하는데, 이렇게 농인으로서 생활하는 동안 보리는 농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가족들이 농인으로서 겪었을 어려움과 외부에서 받았을 차별들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나는 보리>의 미덕은 농인 가족이 등장함에도 비장애인 가족과 전혀 다른 바 없이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룬다는 점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영화 전반에 걸쳐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지만, 보리가 직접 농인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생활들을 담음으로써 일상 속에서 농인이 겪게 되는 불평등한 차별과 시선 또한 짧은 내에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나는 보리>의 또 다른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리가 가족들처럼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보리와는 상의 없이 보리에게 화장실 청소 당번임을 통보한다던가, 은정이와 보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보리를 투명인간처럼 쏙 빼놓고 은정이에게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와 또래 친구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보리는 주변 어른들에게서도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부모님 대신 정우와 농인이 된 척하는 보리를 데리고 병원에 간 고모가 ‘착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병원에 다녀온 후 엄마, 아빠에게 수술하게 되면 정우가 앞으로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엄마가 함께 간 옷가게에서는 보리와 엄마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래 점원들끼리 상의하여 더 높은 가격으로 옷을 판매하는 것을 보게 되며, 지나가는 보리를 본 동네 어른들이 “어린 것이 딱해서 어떡해.”라며 들리지 않게 된 보리를 안타까워하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보리가 농인인 체를 하며 겪게 되는 주변의 변화와 상황들은 우리가 영화 밖 현실사회에서 농인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 사회는 흔히 장애를 섣불리 안타깝다는 식으로 바라보거나 ‘힘들겠다’라는 식으로 동정 같은 공감을 한다. 작은 시선,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일 수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툭툭 나오는 시선과 말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꽂히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11살 소녀가 특별히 큰일 없이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경험하도록 한 것에도 농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김진유 감독의 바람과 유년 시절 감독이 겪었던 감정,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진유 감독은 “제가 만났던 농인 부모 중 60% 정도가 자녀가 농인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농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에서 우리가 농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감독이 영화에서 보리가 직접 농인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농인이 일상 속에서 빈번하거나 흔하게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 어떤 가정보다 따뜻하고, 온전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그림으로써 현실에서의 농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을 제거하고자 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4. <나는 보리>에 대한 글을 마치며
영화 <나는 보리>는 농인의 삶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코다(CODA)’라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존재를 알리고, 이런 ‘코다(CODA)’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히 농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농인과 청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농인 가족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보리가 농인이 되고 싶어 하는 바람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사고에서 전환된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은, “장애인 가족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묘사도 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농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자신이 살았던 모습만을 보여줘도, 대중이 농인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라고 인터뷰에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이 영화 <나는 보리>와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통한 것일까. <나는 보리>의 보리네 가족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더불어 따뜻해질 정도로 그 누구보다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며, 영화를 통해 그들의 삶과 ‘코다(CODA)’로서 살아가는 보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더 이해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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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문제 맛보기
호주에서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했다는 <드라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을 감추고 온전히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가뭄이라는 뜻의 제목 <드라이>에 맞게 영화는 오랜 기간 가뭄이 이어진 마을 키와라를 배경으로 해들러 일가족 사망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가물어져 바닥이 갈라지고 땅의 맨바닥이 드러나는 장면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지만 진실은 갈라진 바닥에 숨어 도통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 애런 포크(에릭 바나 분)는 그 진실을 찾아 마을을 샅샅이 뒤지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20년 전에 벌어진 엘리 디컨의 죽음에 사사건건 부딪히고 해들러 가족의 죽음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지만 갈라진 키와라의 땅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엘리 디컨은 죽었을 때 바지 주머니에 애런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넣은 채 발견되었는데 이로 인해 애런은 엘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물어질수록 작물은 말라가고 사람들도 함께 죽어가지만 애런은 도저히 진실을 찾을 수가 없다. 왜 <드라이>는 하필 가뭄이 든 마을을 배경으로 한 것일까?
엘리 디컨이 죽었을 때의 정황 중 특이점은 엘리가 강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사건이 말라가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는 정 반대다. 또한 애런의 회상 신은 대부분이 강가를 배경으로 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친구인 루크, 그레첸, 엘리와 강가에서 놀곤 했던 애런은 엘리에게 짖궂은 장난
이라기엔 엘리가 죽을 뻔했지만을 치던 루크 해들러를 떠올리며 루크가 정말로 자신의 가족을 몰살하고 자살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루크의 부모님은 그럴 리 없다며 애런에게 수사를 부탁한다. 확실히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이상한 점이 많다. 막내딸인 갓난 아이만이 살아남았다는 점이나 사살에 사용된 탄약이 평소 루크가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는 것 등이다.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던 엘리와는 달리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가물어진 마을 한복판인 집에서 벌어진다. 물을 배경으로 죽음을 맞이한 엘리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그 진실을 알려주지만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가물어질수록 증거가 하나씩 드러난다. <드라이>의 배경이 가물어진 마을을 배경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건조한 날씨에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가는 긴장감을 상징하는 동시에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는 배경으로서도 가뭄이 유용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한편 가뭄 이외에 영화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어느것 하나 깊이 들어가지 않고 맛보는 데 머문다. 엘리가 죽었을 때 애런은 루크와 사건 정황에 대해 입을 맞추는데 같이 다른 곳에서 토끼 사냥을 했다고 거짓말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회상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성인이 된 그레첸(제네비브 오라일리 분)이 실제로 토끼 사냥을 하고 있다. 이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진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죄없는 토끼가 날조에 이용되거나 마당에 숨어든다는 이유로 사살당해도 되는지 관객에게 의문을 품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고많은 야생동물 가운데 토끼가 사살 대상이 된 이유는 작고 연약한 동물인 동시에 빠르지 않아 쉽게 사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20년 전 죽은 엘리 디컨에 대한 비유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엘리의 죽음은 엘리에 대한 애도보다 애런과 루크에 대한 혐오 면에서 더 크게 작동한다. 평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소녀임에도 엘리가 죽자 마을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고 비난할 누군가를 찾는다.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알리바이가 딱히 있지도 않았던 애런과 루크는 엘리의 죽음에 책임을 지게 되고 결국 애런은 아버지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이 부분 또한 서로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진실 그 자체를 찾기보다는 그저 비난에 초점이 맞춰지는 사회현상을 가볍게 보여주지만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영화는 현상을 바라볼 뿐이다.
엘리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인 동시에 관객은 애런이 20년 전에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혼란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애런은 20년 전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애런이 사실대로 말했다면 애런은 엘리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에도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거짓말은 용인되는 것인지, 혹은 애런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지 은연중에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도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관객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지 궁금해하지만 수많은 질문 가운데 초점이 맞춰지는 질문은 없다. 이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20년 후 일가족의 몰살까지 이어지지만 사실 엘리 디컨의 죽음과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은 독립적인 사건임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드러난다. 영화가 무심코 던져주는 질문들은 영화 진행을 위한 맥거핀으로 기능하며, 애런은 이 맥거핀을 충실히 따라가며 관객의 혼란을 유도하는 동시에 본인도 혼란 속으로 들어간다. 애런이 이 혼란을 벗어나는 것은 결국 윤리적인 질문을 피해 객관적인 증거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순간이다. 사건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모두 걷어내고 객관적인 실체를 마주한 애런은 사건의 진상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가물어진 마을에서 얼마 안되는 숲에 불이 질러질 위험으로부터 마을을 구해내고 숲 또한 보전된다.
숲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해들러 일가족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낸 애런은 다시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며 엘리를 기리는 마음으로 숲을 향한다. 엘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반대로 애런의 감정이 촉발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엘리와 시간을 보내곤 했던 장소에서 엘리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던 애런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결국 엘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된다. 엘리의 죽음에 진정으로 책임이 있는 자가 밝혀질 때 또다시 영화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가볍게 관객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 역시 깊이 들어가지 않고 맛보기만 함으로써 관객은 다시금 어리둥절해진다. 영화는 이런 사회적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문제들을 단순히 몰입감을 위한 장치로서 소비할 뿐인가. <드라이>는 밀도 높은 서사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영화지만 사회적 문제들을 맥거핀으로 소비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운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면 이제 관객은 현실로 돌아와 영화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맞닥뜨려야 한다. 영화가 묘사한 다양한 종류의 혐오들은 정당한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허용할 수 있는 거짓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몰입도 높은 수사 서사를 가진 <드라이>가 모든 진실을 알려준 후에도 극장을 떠나는 관객의 뒷맛이 깔끔하지 않은 이유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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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헐크버스터가 온다!
#왓이프 #아이언맨 #마블레고
2021. 06. 08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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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왓이프 아이언맨!
00:41 유출된 레고
02:32 왜 사카르에?
03:06 레고가 페이크라면?
03:55 접점이 없는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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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만도> 메인 예고편
작전 중 사고로 민간인을 쏜
마약단속국의 특수요원 ‘제임스’는 PTSD에 시달린다.
그런 그의 집에 특수부대 출신의 범죄자
‘조니’ 일당이 몰래 숨겨놓은 돈을 찾기 위해 찾아온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제임스’와 아내는 집을 비우고,
남은 두 딸이 그들의 인질이 되어버린다.
모두가 위험에 빠진 순간, ‘제임스’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총을 장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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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다> 뮤직 예고편
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