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4-12 17:42:15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노 베어스>
카메라의 위치는 우리가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 베어스> No Bears, 2022, 이란, 드라마
감독: 자파르 파나히
고백하건대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노 베어스>
박티아르(남편)가 가게에서 일하는 자라(아내)를 급히 불러낸다. 그는 아내에게 훔친 여권을 건네며 먼저 프랑스로 떠나라고 사정한다. 자라는 남편이 없는 삶은 의미 없다며 그의 호소를 단호히 거절한다.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괴로워하던 남편은 행인과 시비가 붙고, 격한 감정을 토해낸다. 그 순간 카메라가 쭉 멀어지면서 화면 안으로 조감독 레자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멀어지고, 마침내 노트북으로 화상 연결 중인 파나히 감독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티아르와 자라는 감독이 찍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연기 중인 배우들이었다.
그는 현재 국경 인근의 작은 마을에 숨어있다. 촌장님의 소개로 간바라(집주인)의 방을 빌렸고, 인터넷이 끊기기 전까지 방 안에서 일주일 내내 영화 촬영만 진행했다. 사실상 촬영 말고는 와이파이가 설치되지 않은 마을에서 다른 할 일이 없던 그는 예비부부의 발 씻기 행사에 간다는 간바라에게 카메라를 건네며 녹화를 부탁하고, 자신도 카메라를 들고 옥상으로 나간다. 아랫집 입장에선 안방 천장인 옥상에서 감독은 훗날 엄청난 폭풍의 씨앗이 될 사진을 찍는다.
그날 밤, 간바라는 오전에 들고 갔던 카메라를 감독에게 돌려준다. 녹화 영상 안엔 감독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신랄한 평가가 들어있었고, 대부분 감독을 의심하고 있었다. 감독은 국경을 넘으려고 숨어 들어온 사람이며, 마을의 골칫거리가 될 운명이었다. 뒷담화 영상에 당황하는 간바라와 달리 감독은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영상을 보고 또 볼뿐이다.
빛 한 점 없는 밤, 레자가 촬영본이 든 하드 디스크를 갖고 감독을 몰래 찾아온다. 감독은 레자의 설득에 밀수업자들만 이용하는 도로를 지나 국경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언덕에 올라간다. 그들이 선 곳은 이란과 튀르키예의 국경이었고, 감독은 그 사실을 안 순간 조감독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로 돌아간다. 자국(이란)의 출국금지와 영화 제작 금지 명령을 받은 감독이 국경을 넘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국경 마을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명료하다. 마을이 영화 촬영지(튀르키예)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영화 내내 유지된다. 오직 ‘촬영’만이 감독을 동요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그 누구도, 어떤 사건도 그를 흔들지 못한다. 이는 마을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집요한 행동 방식과도 연결되며, 관객을 향한 <노 베어스>의 일관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젊은 여자를 시작으로 감독은 마을 사람들이 예견한 미래에 빠르게 도달한다. 간바라의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감독을 찾아와 젊은 남녀의 사진을 찍었냐고 묻는다. 촌장은 마을에서 갖는 자신의 위신을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사진을 달라고 한다. 감독은 젊은 남녀의 사진을 찍은 적 없다고 짧고 굵게 대답한다. 그의 세계에선 “컷!”이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있는 곳은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미래의 남편 이름으로 탯줄을 자르는 전통을 목숨처럼 여기는 마을이다. 스스로를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라 주장하며, 어떠한 위협도 용납하지 않는 자들을 그가 무슨 수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간바라의 빠른 눈치로 국경에 몰래 갔다 온 일은 숨겼지만, 관습으로 엮인 남녀가 아닌 진짜 사랑으로 맺어진 연인을 기록한 행위는 모른 척 묻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저항할 힘을 갖고 있어도 쓸 수 없는 무력한 이방인과 달랐다. 스스로를 그렇게 굳게 믿었기에 마을 사람들과의 입씨름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사태가 점점 난폭해지고 심각해지자, 촌장은 감독에게 맹세의 방에 가서 사진은 없다고 선언할 것을 요구한다. 촌장에겐 마을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장 여권을 구하는 부부의 상황’과 ‘국경 인근 마을에 숨어 영화 작업 중인 감독의 환경’은 <노 베어스>의 주축이 되는 이야기들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수시로 전환되며 진행됐다. 전자는 감독이 창작한 허구, 후자는 실제 상황이었으며 서로의 사건에 관여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별 탈 없이 쭉 이어졌다. 대본대로 알맞게 연기하던 주인공들이 갑자기 감독에게 말을 걸고 분노를 표출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었다. 박티아르와 자라의 생존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약혼식을 촬영한 간바라와 맹세의 방에서 ‘맹세하는 나’를 담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한 감독처럼, 자기들의 삶이 영화화되는 것을 허락했다. 해피엔딩은 없었다. 박티아르의 여권은 가짜였고, 자라는 끝나지 않는 절망과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바다에 뛰어들었다. 맹세하는 것조차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겠다고 우긴 감독은 마을의 전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다, 기어이 평화로운 마을을 폭력과 의심으로 얼룩지게 했다. 두 이야기의 마침표는 철저하게 ‘감독이 촬영한다는’ 전제하에 고려된 결괏값이었다.
분명 부부와 감독의 이야기는 진짜였다. 카메라의 빨간불에 노출된 채 아내의 시신을 마주한 남편과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강가에 죽은 채로 발견된 연인(사진 속)의 모습이 이를 증명했다. 두 이야기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완성되었지만, 이러한 시각은 지극히 표면적이며 단편적일 뿐이다. <노 베어스>의 초점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도 만들어진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를 구성하는 ‘말과 행동’에 있다. 감독이 내놓은 결과물보다 그가 주인공으로서 행한 모든 방식이 더 중요하다. 초반에 일상 대화처럼 지나갔던 “자라, 감정을 절제해요.”란 감독의 한마디가 “곰은 없어요.”만큼이나 치명적이고 가혹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인물들이 전부 각자의 경계선을 지키기 위해 마음대로 타인의 선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베어스>는 그 선의 실체를 관객에게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의 위치가 우리가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모든 이야기의 끝, 마지막 장면 그 뒤에 있다. 경비대가 오기 전 서둘러 마을을 떠나던 감독이 죽은 연인을 보고 차를 세운 순간이다. 그는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국경을 넘지 않은 이유와 같은 걸까? 아니면, 인간으로서 갖는 죄책감 때문인가? 어찌 됐든 감독은 두 이야기를 비극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마을 사람들은 또 어떤가? 역시 같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감독은 부부의 세상을, 마을 사람들은 감독의 세상을 침범했다. 그들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젊은 연인의 사진이 영화 속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박티아르의 가짜 여권과 자라의 시신이 두 눈에 박힌 적이 없는 이유와 같다. 영화 속 감독은 어느 순간 멈춰 섰고, 이야기는 끝났다. 주인공이 카메라를 들지 못했기에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인물인 ‘그’ 역시 포기했다는 뜻인가? 혼란과 혼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노 베어스>는 한 가지 팁을 건넨다.
역시나 집요하고 일관된 태도로, “곰은 없다”라고.
‘곰이 없다’라는 말은 ‘맹세의 방으로 향하는 길에 곰이 있다’는 말에서 왔다. 맹세의 방은 신성한 공간이다. 신성한 곳으로 향하는 길목엔 항상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은 사람들이 생산하는 공포로 몸집을 부풀린다. 따라서 맹세의 방에서 고백하는 모든 말은 틀림없는 진실과 사실로 확정된다. 문제는, 마을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를 넘은 탓에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평화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도 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맹세의 방을 정당화의 도구로 쓰고 있었다. 난제를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 고작 입만 움찔거리는 맹세라니. 맹세의 방으로 가던 감독을 불러 세워 두려움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하며, 거짓말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한 마을 주민의 말이 더욱더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노 베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파나히 감독의 뒤에 서서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본 작품이 영화인지 아닌지 묻는다. 나아가 영화라면 어디까지 영화이고, 영화가 아니라면 어디까지 영화가 아닌지, 경계를 정해보라고 요구한다. 관객을 자꾸만 두리번거리게 하고, 카메라의 빨간불을 찾게 만든다. 빨간불이 계속 깜빡였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의 충돌을 계속 부추긴다. 물론 본 작품이 주인공(파나히)과 똑같은 상황에 있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만의, 자국의 탄압에 대한 저항 운동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관객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할듯싶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해야겠다는 강인한 의지 사이에 핀 <노 베어스>.
고백하건대 세상에 곰은 정말 없다, 이게 영화이듯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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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아가는 그 작은 순간들
1990년대 중반 뉴욕의 따뜻한 정취와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의상과 메이크업으로 레트로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리뷰입니다. 미국 작가 조안나 래코프가 2014년 출간한 자서전 ‘My Salinger Year’을 원작으로, 2013년 〈라자르 선생님〉으로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고 제36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최우수캐나다작품을 수상한 필리프 팔라도 감독이 각색을 맡아 2020년 열린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수작이지요. 20대의 주인공이 꿈을 찾아 성장하는, 어떻게 보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로 지난주 배급사 시사회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마이 뉴욕 다이어리〉 출연진, 줄거리 정보
수잔나, 당신은 작가입니까?
미국 버클리에 살던 20대 작가 지망생 조안나, 방학을 맞아 잠시 뉴욕에 사는 친구 제니의 집에 머물다 그곳의 분위기에 심취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결심합니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자리가 필요했고, 마침 인력사무소를 통해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 지적이고 똑 부러지는 상사 마가렛의 업무 보조일로 그녀가 담당하는 작가들과의 일정 조율과 그중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에게 온 팬 레터를 파쇄하고 팬들에게 편지를 받지 않는다고 답장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매일 똑같은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답답해하던 어느 날, 샐린저가 30년 만에 출간하는 책과 관련된 일을 맡게 되면서 단지 유선으로의 대화이지만, 작가임을 깨닫게 해주며 글쓰기를 독려하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게 되는데...
예고편 │Trailer
https://tv.naver.com/v/23976657
원제 : My Salinger Year│감독·각본 : 필리프 팔라도│원작 : 2014년 조안나 래코프의 동명 소설│출연진 : 마가렛 퀄리, 시고니 위버, 팀 포스트, 더글러스 부스 외 多│장르 : 드라마│상영 시간 : 101분│개봉일 : 2021년 12월 9일│국가 : 캐나다, 아일랜드│등급 : 12세 관람가│평점 : 로톤 토마토 신선도 71% 팝콘 65%, IMDB 6.4, 메타 스코어 50점│시청 가능 서비스 : 현재 극장 상영 중(9일부터)
신입과 대표,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
트렌디하고 책임감이 넘치는 에이전시 대표 마가렛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시고니 위버가 역시 관록을 보여주며 탄탄한 연기력으로 부드럽지만 단호한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를 선보입니다. 여기에 주인공 조안나에는 넷플릭스 〈조용한 희망〉, 근래 〈세버그〉 등에서 조금씩 입지를 다지고 있는 마가렛 퀄리가 맡아 대선배 앞에서도 크게 위축되지 않은 매력을 발산하며 신입사원의 풋풋함과 패기를 드러내주죠. 더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어주지만 실루엣과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제3의 주인공 J.D. 샐린저(팀 포스트)의 매력은 관람한 후 자연스럽게 그의 책을 읽고 싶게 만들고 이들이 함께하는 90년대 뉴욕 문학계의 향수와 거리를 재현한 풍경 또한 이야기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려 줍니다.
조안나, 하루에 15분이라도 글을 쓰세요
젊은 시절을 지나온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려봤을법한 자신만의 이상향이 있을 것이고,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전 세계를 여행하는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의 모습에 금방 빠져들어 꿈을 위해 뉴욕 생활을 단박에 결정하는 단호함에 박수를 쳐줄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사회 초년생의 패기로 치부될 용기이지만, 원작자 본인이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 ‘해럴드 오버’에서 1년여간 일했던 경험을 엮은 회고록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당시 자신의 느꼈던 현실적 감정들이 잘 녹아들어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찬란하게 빛났던 그 시기를 잘 묘사해 주죠.
일정 부분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떠올리실 듯한데, 개인적으로는 적은 분량에도 주인공에게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은 얼굴 없는 작가 제리 때문에 〈인턴〉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벤이 생각났습니다. 그만큼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의 관계, 분위기 등은 추워진 날씨를 녹여줄 만큼 따뜻했고, 결말에 이르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각성하는 장면에서 무한한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 되죠. 아마도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출간을 준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많은 공감을 하실 듯하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흘러가는 과정에서 눈에 띄는 시련이나 고난이 없이 무난히 흘러가는 것에 너무 잔잔하다라 볼 수 있지만, 그마저도 90년대 배경의 뉴욕에 기분 좋게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저야말로 슬럼프 아닌 슬럼프였는데 이걸 보고 다시 한번 파이팅을 외쳐보는 계기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네요. 즐거운 밤 되시고요, 이상 글쓰는 식팔이 모모파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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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본 재밌고, 정겨운 한국영화
※키노라이츠 인증회원으로 시사회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영화 <리바운드>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오랜만에 나온 재밌는 한국영화
최근 한국영화가 많이 부진했었는데, <범죄도시 2>와 <올빼미> 이후 오랜만에 볼만한 한국영화였다. 특히나 <리바운드>가 좋았던 건, 눈살 찌푸리는 장면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소재여서 더 좋았다. 공교롭게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농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에 개봉한 영화라서 그 흐름을 이어서 잘 되면 좋겠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 중에 마이클 조던과 나이키의 이야기를 담은 <에어>도 있는데, <에어>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해당 영화는 나이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연결성을 보자면 조금 더 청춘 농구 스토리인 <리바운드>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농구 영화 흥행 열풍 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최근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둔 영화들이 젊은 관객들에게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해서 온 가족에 알맞은 영화가 재밌게 나온 게 좋았다. 사실 온 가족을 타겟으로 하는 소위 '명절 특선영화' 감성의 영화들은 넓은 나이대의 취향을 커버하는 대신 무난하거나 심심한 경우가 많은데, <리바운드>는 김은희, 권성희(수리남 작가님), 장향준이라는 아주 짱짱한 네임벨류의 제작진이 모여서 그런지 너무 과하지도 않으면서 심심하지도 않은 적정선을 잘 잡아낸 수작이었다.
영화 <리바운드> 캐릭터 포스터,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감동실화’ 위에 안재홍이 재미를 더하고, 배우들의 농구실력이 몰입감을 만든 영화
안재홍의 캐스팅은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원래도 안재홍 배우의 코미디 연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드라마 <멜로가 체질> 이후 오랜만에 물이 오른 코미디를 보여준다. 아마 장향준 감독님이 워낙 재밌으신 분이라서 더 잘 살려내신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화 전체적인 부분에서 보면 안재홍 외에도 극 중 선생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나, 어른 역할의 연기자들은 거의 감초/코미디 톤을 연기하고 있고, 작중 학생들은 성장/청춘 드라마 톤을 연기한다. 이 두 가지 톱니바퀴는 꽤나 적절하게 맞물려서 한 가지가 진부해질 때쯤이면 다른 부분이 맞물려서 돌아간다.
특히 그중에서도 코미디의 중심을 잡고 있는 건 안재홍이고, 성장 드라마의 중심을 잡고 있는 건 실화 기반의 스토리이다. 실화 스토리가 워낙 극적이긴 하지만 개개인 인물들의 서사를 담기 위해서 조금은 오그라드는 청춘 드라마 클리셰를 사용하는데, 그 오그라듬이 불호의 영역에 가기 직전에 개그씬이 등장한다. 이렇게 적절한 완급조절이 영화 내내 이어지면서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한 순간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이런 부분들이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추가적으로 영화에서 생각보다 농구 경기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평소 농구 경기를 안 봐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실제 경기를 보는 만큼 리얼했다. 일단 배우들이 다 농구를 잘하고 심지어 선출인 경우도 있어서 긴박감을 더해준다. 그렇게 리얼한 경기를 몇 차례 보다 보면 영화 말미에 가서는 자연스럽게 경기를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리바운드>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MSG를 적절하게 넣은 추억의 분식집 같은 맛
앞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종합해서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느낀 감상은 정겨운 영화라는 것이었다. 평소 외화 영화나 블록버스터 작품을 좋아해서 한국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 편인데, 오랜만에 옛 한국영화의 정취를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영화 특유의 분위기는 정겨움이다. 최근 한국영화는 뛰어난 감독님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점차 세련되지거나, 개성이 담긴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정겨운 분위기의 한국영화는 가끔 명절 시즌에만 가끔 등장하는데, 대체로 감성적이거나 유치해지면서 아쉬운 성적을 거둔 경우가 많다고 느꼈다.
영화 <럭키>, <써니> 스틸 컷 [출처: 네이버 영화]
<리바운드>는 오랜만에 맛본 정겨운 영화였고, 예시를 들자면 코미디 영화 <럭키>와 청춘 영화 <써니>의 사이쯤에 위치한 영화라고 생각된다. <럭키> 유치하게 웃기는 영화인데 묘하게 정겹고, 친숙해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이고, <써니>는 라붐 같은 감성이면서 묘하게 촌스럽고 불량스러운 게 정다운 추억에 빠지게 만든다. 이런 포인트들이 마치 어릴 적 학교 앞에 있던 MSG가 적절하게 들어간 추억 속 분식집을 만난듯한 감성을 선사하고 그 묘한 단짠단짠에 빠져들어서 영화를 본다면 영화가 정겹다는 표현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리바운드>에서 아쉬웠던 점을 찾아보면 그것도 그것대로 많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점이 있어도 굳이 찾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이 매력이라고, 4월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 좋은 영화를 찾고 있거나 온 가족이 함께 웃으며 볼 영화를 찾는다면 주저 없이 추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로 <리바운드>를 뽑을 수 있겠다.
영화 <리바운드> 캐릭터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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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보지 않아도 괜찮아
"영화 보자마자 감독님한테 전화를 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영화냐고. 영화 주제가 뭐냐고."
영화가 끝나고 한 시간가량의 GV 시간이 있었다. 박상옥 님이 마이크를 들고 가장 먼저 했던 말이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니 '이거... 대체 무슨 영화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김보람 감독은 이 영화를 찍게 된 것이 '섭식장애'라는 키워드에 꽂혀서였다고 말한다. 섭식장애라는 것이 단순히 사회에서 여성의 몸에 주는 핍박 때문에 발병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박상옥 씨와 박채영 씨는 사실 처음 구상한 영화 내에선 짧은 단락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섭식장애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병에 대해 자신이 영화에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고 판단, 두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했다고.
엄마는 언젠가 핸드폰 주소록에 자신을 이름으로 저장해달라고 했다. 엄마라는 역할로서가 아닌, 이름이 불리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내 주소록에 엄마는 'OOO 여사님'이라고 저장되어 있다.
"자꾸 '아프지만 마'라고 하시는데, 그것 말고 딸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 있으신가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본능적인 새끼에 대한 어미의 마음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엄마가 늘 그렇진 않아요. 딸이 안 보일 땐 내 나름의 삶을 살지요."
박상옥 님이 관객의 질문에 답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엄마도 딸이 안 보일 땐 나름의 삶을 산다. 그건, '엄마'라는 역할은 '딸'이라는 역할이 무대 위로 올라와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엄마 이전에 '나'라는 존재가 우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엄마들이 몇이나 있을까. 그것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실 나의 모녀관계도 이전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딸'이라는 역할 수행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상실감에 무너져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나의 지독한 'K-장녀병'은 독립과 함께 끝을 맺었다.
"저에게 요리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한 준비 같아요."
요리를 하고 음식점에서 일을 하는 채영은 즐거워 보인다. 엄마와 있을 때 짓는 웃음과는 다른 종류의 웃음이다. 홀로서기, 내 스스로의 존재 이유에 대해 찾아 나서는 긴 여정에 서 있는 채영은 활기차고 씩씩하다.
엄마라는 정서적 울타리가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딸'이라는 역할로 생존의 이유를 찾아야 했던 채영이 내린 답은 '섭식장애'였다. 먹지 않거나, 마구 먹거나. 섭식 장애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그를 통해 엄마의 관심은 끌어냈지만, 거기서 그치면 '딸'이라는 역할로서만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채영은 음식을 고르고 요리를 하며 사람들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다. 딸로 존재하기 위해 찾았던 방법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채영은 섭식장애를 가진 자신의 모습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꼭 마주 보고 앉아야만 완벽한 식사의 구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향하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를 쳐다보기보단 각자의 앞에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보단 내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은 욕심이, 때론 상대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만큼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노력과 배려의 모습이다.
그럼 꼭 마주 보지 않아도 괜찮다. 손을 잡고 같이 앞으로 걸어가면 그만이니까.
영화는 너무 작아서 발견조차 못했던 작은 문제들에 관하여 조명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상옥과 채영, 그리고 외할머니라는 주인공을 통해 완만하면서도 뾰족한 여성 서사에 대해 그려낸다.
"모녀 관계를 다룬 이야기는 많은데, 왜 부자관계를 다룬 이야기는 별로 없을까?"
함께 보았던 짝꿍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부딪히고 부서지지만 작은 파편들의 목소리를 듣고 인정하며 여성 서사를 이해하려는 아름다운 자리는 많은데, 남성 서사에 대해서만큼은 이토록 심도 있게 다루는 작품이 없다는 게 아쉽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렇다. 여성이라는 존재만이 공감할 수 있는 아픔과 슬픔이 있다면, 남성에게도 그런 서사가 존재하지 않겠나. 영화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배제하고 여성 서사에 집중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분명 남성에게도 그들만의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다. 사실 나는 '남성에게는 그런 서사가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라고 무심코 생각했는데, 짝꿍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게 얼마나 편협된 시각인지를 깨달았다. 언젠가는 그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아름다운 자리도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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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스완 (2011)
-이 글은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블랙스완>은 이야기 자체의 매력보다도 이야기를 영상으로 다루는 방식이 강렬한 영화다. 영화 <블랙스완>은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과 고뇌, 그리고 자아의 분열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방식이 압도적이다. 믿을 수없는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하는 한편, 16mm의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후 디지털화하여 영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상의 노이즈들과 극적인 긴장감을 더하는 웅장한 ‘백조의 호수’, 흑조와 백조를 오가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한데 섞인 이 영화는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괴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렇듯 압도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영상으로 짜여진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완전히 영화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는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강렬한 방식이 눈에 띄는 영화로, ‘완벽’이라는 허상의 것을 좇는 개인의 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다소 앞서가는 것이거나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통해서 완벽주의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이 너무도 강해서 이 영화의 지엽적인 메세지에 불과한 완벽의 추구와 그 허무에 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화두를 뜯어 고치지는 않겠지만, 다소간 확장시키게 될 지도 모르겠다.
1. 보이지 않는 고통들을 드러내는 <블랙스완>.
영화 <블랙스완>이 다루는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은 ‘나탈리 포트만’이 <블랙스완> 시사회 인터뷰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발레 무용수들이 겪는 내적 고통과 유사하다. 아름다운 발레 무용수들의 무대 위 모습과는 달리, 토슈즈를 벗으면 드러나는 성하지 못한 그들의 발과 한번의 무대를 위한 압도적인 연습량으로 닳고 닳은 깡마른 그들의 몸은 그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들이다. 한편, 예술가들이 하나의 보기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쥐어짜내는 고통 역시 보이지 않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고통을 모두 짊어진 ‘니나’를 통해서 두 개의 고통을 포개어 놓는 것으로 그 고통의 상징성을 강화한다. 이렇듯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서 모티브를 받아 구상되었고, 감독의 누이가 발레 무용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술가와 발레 무용수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의 상징을 함께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우연치 않게 두 가지의 상징이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우연이고 필연이고를 떠나서 상징을 중첩시켜 인물의 고통을 강화한 이 영화의 각본은 굉장히 현명했고, 특별하다.
1-2. 분신(Dvoinik)과 분열된 자아.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 Dvoinik>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나, 그것과는 상당 부분 다르다. <분신>속 자아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한 인간의 덧없는 파멸만을 그려내어 탐구가 다소 얕은 반면, 영화 <블랙스완> 속 분열된 자아는 완벽주의에 이르고자 하는 예술가의 심리적 고통과 함께 파멸과 성장의 이미지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의 주체의 역할을 맡은 ‘백조’는 그동안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두 자아 모두가 니나의 자아라는 점이다.
영화는 발레무용수가 자신이 가진 것 이상(以上)의 연기를 소화해내기 위해 이제껏 가져왔던 자아를 버리고, 백조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자아를 꺼내어 자신의 이상(以上)에 이르고자 한다. 물론 그 이상(以上)의 상태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적인 상태는 아니기에, 이 발레 무용수는 완벽한 예술을 위하여 이전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과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결과적으로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흑조)과 이전까지 유지해온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백조)은 두 가지의 자아로 나타나며, 두 자아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백조’는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다.
영화 <블랙스완>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두 자아의 대결을 다루며 이야기의 장력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또 한편으로 ‘니나’의 자아가 분열되어가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각적 긴장감을 더하여 ‘시각매체로서’ 영화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2. 완벽이라는 이름의 허상
지금 현재, 존재하는 존재들은 모두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것들은 정해진 운명이 없기에,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관한 이론으로 현존재를 해석하자면, 지금 나의 무수히 많은 선택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무수히 다른 나를 만들기 때문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 중 우위성을 차지할 수 있다. 반면, 시간에 얽매어있는 현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이 무수히 많은 가능함이라는 결과 자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간대에 놓인 무수히 많은 선택지중 하나의 선택지를 택하면, 다른 모든 선택지가 닫혀버리기 때문에, 현존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얽매어있는 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을 뜻하는 단어 Perfect {per(모두) + fectio(하다)} 는 시간의 속성에 얽매인 존재들은 도저히 이를수 없는 허상의 단어이다.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간은 헛된 일일 수밖에 없으며 완벽을 말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거짓이자 자기 기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지나친 완벽의 추구는 허상의 것을 끊임없이 좇는 일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가 보여주듯이, 완벽한 연기를 위해 겪는 고통과 자멸, 그리고 전락을 암시하는 결말은 허상의 것을 추구하는 행위의 덧없음과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고통을 엿볼수 있다. 그렇다면, 완벽을 추구하는 일이란 결과적으로 한없이 허무할 뿐인가?
3. 완벽이라는 환상의 추구와 그 당위성없는 행위의 당위성.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은 우리가 짊어진 숙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해소되지 않을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가 완전해지고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가는 것, 그 것이 결과론적으로 허상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마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수메르의 바빌로니아에서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여행을 떠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동시대 바빌로니아인들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왕이자 “깊은 곳을 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여정이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해도, 그 과정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앞서 말했듯이 완벽은 허상의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의 추구. 절대로 구해지지 않을 것을 구하는 이 일은 어떤 당위성을 얻게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삶의 당위성을 그 목적지에서 찾는 그 전제가 애초에 들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시작하자. 삶의 목적지는 결국 죽음이다. 완벽한 끝. 삶의 문제를 벗어나, 모든 목적은 그저 ‘완벽한 끝’이므로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삶의 의미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오해되는 전제를 깔아놓고, 결말만을 두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모든 행위는 당연 무의미하고, 당위성을 잃는다. 그렇기에, 완벽의 추구 또는 이상의 추구,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이룰수 없는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 당위성 없는 행위의 당위성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각 개인의 몫이므로, 나는 다만 삶의 의미란 의미를 찾아가는 삶속에 있다고 말할 수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단순히 추구하는 것이 아닌 집착하는 것이다.
4. 추구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블랙스완>의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지만, 그 과정속에서 “깊은 곳”에 닿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니나가 완벽한 흑조가 되어 마주하는 것들은 혼란과 고통, 전락, 그리고 결과에 대한 구체적이지 못한 자기만족―나는 완벽했어, 그 모호한 한마디―에 그친다. <블랙스완>의 니나는 결과적으로 완벽에 집착할 뿐인 광적인 예술가의 군상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보자면, 그녀는 흑조가 되기 이전부터 기술적으로 완벽한 무용수였고, 이미 ‘백조’의 순수함과 순종 결백 등에 집착하고 있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다 큰 그녀가 어머님의 말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모습이나 지나치게 순수한 모습들은 그녀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흑조의 날개가 자라나는 환각을 보는 장면이나, 자신의 피부에서 흑조의 깃털이 돋아나는 환각을 보는 것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여 다른 모든 자아와 의지를 억누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이미 백조에 대한 심한 집착과 몰입을 보여준 예술가 니나가 ‘흑조’ 역할을 맡으며 흑조에게 집착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아에 또 다시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니나가 예술가로서 완벽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무대는 완벽했다. 하지만, 백조의 추락과 백조의 죽음을 의미하는 마지막 엔딩씬은 광기어린 무용수의 집착이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파멸을 야기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읽힌다. 물론, 이전까지 니나를 가두었던 백조의 이미지가 죽어버리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니나가 ‘성장’한 것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게 감독의 의도이고, 옳은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존재의 공허함을 채우는 과정에서 이전까지의 미숙한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 완전한 존재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의 결핍된 모습들마저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결핍된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니나가 백조를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해하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은 니나 자신을 가두는 백조의 틀을 깨버리는 일인 동시에 니나의 미덕이었던 백조의 모습들마저 버리는 것으로, 흑조로 성장하기보다는 흑조로 ‘변이’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니나가 매번 이렇게 변이만을 반복한다면, 그녀는 끊임없이 이전의 자신을 살해하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견뎌내야만 할 것이고, 이 편집증적 고통은 성장통의 고통과는 다르다. 그 고통은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동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스완>은 한 예술가가 성장해가는 서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블랙스완>의 니나가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의 광적이고 고통스러운 집착일 뿐이다. 다만 <블랙스완>이 다루는 이야기의 방향성과는 상관없이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졌으니, 이 영화의 이야기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작품의 완성도는 아주 높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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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잊고 흥겨운 던전 세상으로
아는 사람은 알 거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성공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것을. 그중 한 편이 바로 <던전 앤 드래곤>이다. 2000년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한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망작. 게임팬들에게는 잊고 싶은 과거다.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는 그 과거를 지우고 원작의 명예를 곧추세운다.(제목에도 명예가 들어가 있다!) 과연 이 영화가 장착한 새로운 무기는 무엇일까?
한 때는 명예로운 기사였던 에드긴(크리스 파인)은 남매처럼 지내는 홀가(미셸 로드리게즈)와 감옥살이 중이다. 이들은 도적으로 절도죄와 사기죄로 잡혀 다. 시작은 이러했다. 소피나(데이지 헤드)의 제안으로 ‘부활의 서판’을 포함한 보물을 얻기 위해 코린의 성으로 잠입한다. 에드긴은 ‘부활의 서판’으로 죽은 아내를 되살리려 했던 것. 하지만 일은 틀어지고, 에드긴은 동료 포지(휴 그랜드)에게 딸 키라(클로이 콜먼)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그 말을 한지도 2년이 지나고 딸을 만나고 싶은 에드긴은 홀가와 기발한 아이디어로 탈옥에 성공, 네버윈터 영주가 된 포지를 찾아가 키라와 재회한다. 하지만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포지의 거짓말만 믿는 키라는 아빠를 미워할 뿐. 포지 또한 부활의 서판마저 넘겨주지 않는다. 알고 보니 포지와 소피나는 한통속이었던 것. 에드긴과 홀가는 키라와 부활의 서판을 되찾기 위해 새로운 팀을 꾸린다.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장착한 건 하이스트 코미디다. 에드긴, 홀가 등 도적들을 주인공으로 앞세운 영화는 키라와 부활의 서판을 되찾기 위해 새로운 팀을 만드는 이들의 과정과 악의 무리를 물리치는 서사를 견고히 쌓는다. 바드, 바바리안, 소서러, 팔라딘, 드루이드, 위저드 등 원작의 롤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각 개인의 능력치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이들은 오합지졸. 그 안에서 벌어지는 웃픈 에피소드들은 그 자체로 보는 힘을 갖는다.
영화 속 인물들과 서사는 <오션스> 시리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궤를 같이한다. 특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잔향이 짙은데, 이유는 프로듀서가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파이더맨: 홈커밍> 공동 각본가로 참여한 조나단 골드스타인과 존 프란시스 데일리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다.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성격의 팀원들이 하나의 목표를 갖고 티키타카를 이루는 과정은 익숙하지만 보는 재미를 더한다.
그 익숙함은 게임을 몰라도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에 그 의의가 더해진다. 현존하는 RPG 게임의 시초이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건 원작의 장점이자 족쇄. 이를 위해 감독은 하이스트 장르를 가져와 가족의 소중함, 친구들의 우정을 극대화하고 이를 동력 삼아 원작을 배경으로 한 모험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여기에 기존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적 세계관을 오롯이 반영한 영상이 빛을 발한다. 기사, 화려한 마법, 변신술 등 놀라운 CG로 구현한 영상은 누군가에게는 향수를 누군가에게는 새로움을 전한다. 투구를 얻기 위해 용과 혈전을 벌이는 장면은 물론, 드루이드의 변신술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보는 재미를 부여한다. 특히 아주 작은 벌레부터 올빼미와 곰이 합쳐진 아울베어까지 다양하게 변신하는 모습은 영화 속 세계관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이는 마치 과거 개봉한 영화의 조악한 CG 기술력을 덮는 것처럼도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그 맛을 더한다. 게임 원작 영화 특성상 각각의 능력치가 다른 캐릭터의 역할과 매력 표출이 중요하다. 크리스 파인은 액션보단 머리를 쓰고, 미셸 로드리게즈는 말보다 몸이 앞서는 멋진 액션을 보여준다. 기존 성 역할 고정관념을 깨면서 얻는 B급 코미디를 지향하는 영화의 성격을 인물들의 연기로도 잘 알 수 있다. 다른 배우들 또한 그 역할에 맞는 연기를 보여주며 자신이 맡은 미션을 수행한다.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은 새로운 영화가 아니다. 익숙했던 문법과 장르의 재미를 잘 조합한 흥겨운 분위기의 영화다. 현실의 시름을 잠시 잊기 위해 게임 속 세상을 만나는 것처럼, 고단한 하루를 잊고 영화가 구축한 유쾌한 판타지 모험 세상을 마주해보는 건 어떨까. 던전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3.5 / 5.0
한줄평: 익숙하지만 즐거운 던전의 모험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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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 애거사 짓이야 | 작품성도 세계관도 챙긴 스핀오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다에게 모든 마력을 빼앗긴 후, 기억마저 삭제되어 웨스트뷰에 남겨진 '애거사 하크니스'(캐서린 한). 스스로를 형사라고 착각하며 참견쟁이 이웃으로 살아가던 애거사 앞에 난데없이 소년 마법사 '틴'(조 로크)이 나타난다. 애거사를 감싸고 있던 봉인을 해제한 틴은 애거사에게 '마녀의 길'로 데려가 달라 애원하고, 원치 않던 애거사도 잃어버린 마력을 되찾기 위해 함께 '마녀의 길'을 걸을 다른 마녀들을 찾아 나선다.
애거사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릴리아'(패티 루폰)와 '제니퍼'(사쉬어 자마타), '앨리스'(알리 안)와 '샤론'(데브라 조 럽)까지 마녀들을 모으는 데 성공한 애거사와 틴. 하지만 '마녀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목숨을 건 장애물을 마주치며 위기에 빠진다. 심지어 애거사와 악연인 죽음의 여신 '데스'(오브리 플라자)가 나타나고, 미지의 마법사였던 '틴'이 완다의 아들 '빌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애거사의 집회는 자중지란에 휩싸인다.
마침내 주인공이 돋보이는 멀티버스 사가
개국공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멀티버스 사가의 최종 빌런인 '닥터 둠'으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메가폰을 잡았던 루소 형제를 <어벤져스: 둠즈데이>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의 감독으로 복귀시킨 MCU.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지만,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간 멀티버스 사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 MCU에서 은퇴했던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멀티버스 사가의 영화 11편과 드라마 10개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새 캐릭터를 소개하느라 바쁜 나머지 본래 주인공이 잘 안 보인다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 광기의 멀티버스>만 보더라도 새로운 캐릭터인 아메리카 차베즈가 주동인물이었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녀의 성장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에 그쳤다. 그 결과 멀티버스 사가에서는 인피니티 사가 속 아이언맨과 같이 관객들의 이입을 도와줄 길잡이를 찾을 수 없었다.
<완다비전>의 스핀오프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겉보기에는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완다에게 마력을 봉인당한 마녀 애거사의 후일담을 보여준다. 완다의 쌍둥이 아들 중 하나인 '빌리', 죽음의 여신인 '데스' 같은 새로운 캐릭터와 함께. 하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다행히도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를 피해 가는 데 성공했다. 본편의 메시지를 영리하게 확장하면서 스핀오프 역할에 충실한 결과 주인공이 가려지지 않았으니까.
보이는 것과 봐야 하는 것
<전부 애거사 짓이야>에서는 시나리오가 가장 눈에 띈다. 본편인 <완다비전>의 작법을 똑 닮았기 때문. 특히 반전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완다비전>보다 진일보한 듯 보인다. <완다비전>은 겉과 속이 다른 드라마였다. 겉으로는 완다와 비전의 일상을 다룬 시트콤이었다. 그들이 이웃들과 시간을 보내고, 두 쌍둥이 형제를 낳으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미국 시트콤 형식을 빌려 보여줬다.
하지만 <완다비전>의 진짜 이야기는 달랐다. 마녀와 로봇 부부의 시트콤은 완다가 마법 장벽 '헥스' 안에서 꾸며낸 환상에 불과했다. 마지막 가족이었던 비전을 잃은 슬픔과 절망을 외면하려는 그녀의 피난처였다. <완다비전>은 이 겉과 속의 괴리를 완다의 환상 속에 침투한 마녀 애거사의 음모를 비롯한 여러 복선을 통해 암시했다. 그렇기에 이 모든 복선을 회수하며 진상을 보여주는 반전의 충격도 그 어떤 MCU 작품보다 강렬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와 실제로 진행시키는 이야기가 다르다. 전자는 애거사가 주인공이다. 완다에 의해 모든 마력을 봉인당했던 그녀는 기억을 되찾은 후 자신만 아는 '마녀의 길'을 통과해 힘을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완다의 아들 중 하나인 빌리가 사실 생존했고, 그가 애거사의 봉인을 풀어 이용했다는 것. 쌍둥이 형 토미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마녀의 길'의 끝에서 토미를 되살리는 데 성공한 빌리는 놀라운 진실을 깨닫는다. '마녀의 길'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고, 단지 본인이 마법으로 만든 가상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이처럼 빌리의 시점에서 모든 복선이 맞아떨어지는 전개는 <완다비전>의 반전을 연상시키에 충분하다. 아니, 그 이상처럼도 보인다. <완다비전>에 비해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명확한 복선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사랑과 마법
본편 <완다비전>처럼 가족애와 마법의 비틀린 관계를 강조하기에 반전은 더욱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애거사와 아들 니콜라스가 있다. 애거사는 니콜라스를 출산한 직후에 그들 앞에 나타난 데스를 만나고, 데스에게 사정해서 간신히 아들과의 시간을 추가로 얻어낸다. 이후 애거사와 니콜라스는 마녀들을 유인해 그들의 힘을 빼앗는 삶을 살았고, 니콜라스는 그들의 일상에 멜로디를 붙여서 '마녀의 길'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마녀의 길' 노래를 완성한 그날 새벽에 데스가 니콜라스를 데려가자, 애거사는 이별의 아픔이 담긴 아들의 마지막 선물을 악용하기 결심한다. 마녀의 길 끝에서 힘을 얻으려면 마녀의 집회를 모아야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뒤, 집회에 모인 마녀들의 마력을 강탈하면서 더 강한 마녀로 거듭난 것. 멀티버스를 엉망으로 만든 완다만큼이나 삐뚤어진 방식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처한 셈이다.
사랑이 남긴 아픔을 잘못된 마법으로써 극복하는 이야기는 빌리의 서사에서도 반복된다. 완다가 헥스를 닫을 때 유대인 고등학생인 윌리엄의 몸에 깃들어서 홀로 생존한 빌리. 가족을 포기한 엄마에 대한 원망과 형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현실 조작 능력을 활용해 토미를 되살려 낸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마녀들을 희생한 만큼, 빌리의 여정도 사랑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아픔을 극복한다. 죽을 위기에 처한 빌리와 아들을 겹쳐 본 애거사는 자신을 희생해 그를 구한다. 완다를 원망하던 빌리는 아들을 만나기가 두려워 죽어서도 유령이 된 애거사를 보면서 모성애의 힘을 배운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마녀와 부모를 잃은 마법사는 둘만의 집회를 만들고 토미를 찾아 나선다. 이는 <완다비전>에서 끝내 혼자가 된 완다와 절묘한 대비를 이루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다양성이라는 잔을 반만 채우다
이처럼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본편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착실한 스핀오프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완성도가 만점에 가깝지만, 만점이라고 할 수 없다. 인종, 문화, 성적 지향성 등과 같은 다양성 관련 코드를 다소 편의적으로, 또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MCU에서는 백인 남성이 아닌 히어로나 조력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여성 히어로의 수도 늘었고, 중국이나 파키스탄 등 여러 문화적 배경을 활용하고 있으며, 동성애자나 장애인 히어로도 하나둘씩 조명받고 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애거사의 집회' 구성원만 보더라도 백인, 흑인, 동양인 마녀가 모두 포함됐다. 애거사와 데스, 빌리와 그의 애인처럼 동성애자 커플도 전면에 등장한다.
문제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다양성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번 드라마는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신호는 보내고 있지만, 그 신호를 작품 속에 온전히 녹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상적인 지점이 없지는 않다. 일례로 애거사와 데스를 레즈비언 커플로 설정한 선택은 효과적이었다.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극적 긴장감을 고조하고, 애거사와 아들의 서사를 비극적으로 만드는 역할과 기능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빌리와 그의 애인을 등장시킨 의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빌리의 동성애 성향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 빌리가 애거사를 이용해 토미를 되살리고자 하는 전개에 빌리의 애인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도 빌리의 이야기와 애거사의 서사는 완성도의 깊이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 속의 다양성이 절반 가량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세계관도 챙기는 일석이조
그렇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여전히 멀티버스 사가에서 오랜만에 접한 성공작이다. 본편에서 등장했던 주인공의 과거사와 후일담, 새로운 캐릭터의 성장 서사를 한 묶음으로 유려하게 풀어냈으니 그 자격은 충분하다. 이에 더해 MCU의 미래를 기대케 하는 여러 암시도 효과적으로 보여줬기에 이번 성공은 더 뜻깊다.
우선 빌리의 본격적인 데뷔는 캐시 랭, 케이트 비숍, 미즈 마블 등이 모일 <영 어벤져스>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데스'의 등장도 인상적이다. 초월적 존재로 묘사된 그녀는 <어벤져스> 쿠키 영상에서는 대사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토르: 러브 앤 썬더> 등에서는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다. 그런 그녀가 전면에 나서면서 <이터널스>처럼 더 초월적인 존재가 엮이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의 발판도 마련된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MCU 작품이나 세계관 외적으로도 기대할 만한 변화도 흥미롭다. 사실 MCU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를 시작으로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모든 실사 드라마에 '마블 텔레비전'이라는 별도 레이블을 사용할 예정이다. 과연 이러한 변화가 수년간 만족감이 낮아진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지켜보는 새로운 재미가 생긴 셈이다. 확실한 것은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그 초석을 단단히 다졌다는 사실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닥터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보다 흥미롭고 애절한 마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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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4」 시리즈 속 모든 상징과 철학 뽀개기 #01 | 매트릭스 인문학 리뷰 | 매트릭스 리저렉션 리뷰 | 매트릭스4 리뷰 | 매트릭스4 해석 | 매트릭스 리저렉션 해석 |
?《매트릭스4 리저렉션》(2021) 영화리뷰 / 매트릭스4 리저렉션 리뷰
《매트릭스 1~3》 인문학 결말포함 영화리뷰 #1
*후속영상
#2 [현실은 진짜일까?] https://youtu.be/wfvqm5HBRb0
#3 [빨간 옷의 여자] https://youtu.be/X_fQcoytk70
#4 [오라클은 악마다?] https://youtu.be/fLgWf7NWkn8
#5 [스미스는 왜 졌을까] https://youtu.be/Uas0KZDCQec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리저렉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 라나 워쇼스키
각본: 라나 워쇼스키, 알렉산드르 하몬, 데이비드 미첼[1]
제작: 라나 워쇼스키
음악: 조니 클라이맥, 톰 티크베어
촬영: 존 톨
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앤 모스 외
제작사/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1년 12월 22일, 한국 12월 22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0분
간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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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독전 2분만에 끝내는 리뷰, 그래서 이선생이 누구야?
**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고 감상해주세요!
** 영화나 특정인물에 대한 비하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영화 '독전'을 감상했습니다.
이해영 감독의 신작이자, 故김주혁 배우의 유작이죠.
영화의 스타일은 독보적이지만 단점도 명백한 영화였습니다.영화 '독전'을 2분만에 제 나름대로 재밌게 구성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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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 #류준열 #조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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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운드 오브 프리덤> 예고편
사라지는 아이들, 목숨을 건 구출 작전!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실화다! 아동 성범죄자를 추적하는 정부 요원 ‘팀 밸러드’. 288명의 범죄자를 체포한 에이스 요원이지만, 정작 피해 아동은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신매매 조직의 거래 현장 잠입에 성공한 ‘팀 밸러드’는 납치되었던 8살 소년 ‘미겔’을 구출한다. “아저씨는 아이들을 구해주는 사람이죠? 그럼 우리 누나도 찾아주세요” 피해 아동들을 구출하기로 결심한 ‘팀 밸러드’. 그는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거대 인신매매 조직에 잠입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하는데…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NEW 영화사업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NEW 영화 예고편, 미공개 독점 영상 등을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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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메인 예고편
전 세계가 눈 감아버린 그 날의 이야기
1995년, 세르비아군이 마을을 공격하자 보스니아 사람들은 안전지역인 UN 캠프로 피신한다.
UN군 통역관으로 일하는 아이다는 남편과 아들이 캠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